한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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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정수필] 삼월에 댓글:  조회:209  추천:0  2023-09-01
서정수필 삼월에   삼월의 하늘로 삼월의 구름이 정처없습니다 삼월의 바람이 훈훈한가운데 서있는 나는 그러나 삼월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내곁을 떠난것이 삼월입니다 그 사람은 그때 내게서 삼월까지 가져갔고 그 뒤로 나의 달력에서는 삼월이 사라졌습니다 눈이 왔으면 비가 왔으면 하고 바라도 삼월에는 눈도 비도 모질이 모질이 적습니다 삼월의 정수배기에 서서 이월도 돌아보고 사월도 건너다보며 아무래도 나는 삼월을 누리지 못합니다 꽃샘을 하는 바람이 부는 좋은 삼월이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삼월부터 봄이고 봄이면 사람들이 한결 밝아질거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해빛은 극상 따사롭습니다 그 따슨 해빛이 삼월을 잃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들이 거리로 흐릅니다 그 화사함에 웃음을 보태지 못하는 나는 그야말로 바보스럽습니다 내게 있어 삼월은 낮도 밤도 없습니다 내게 있어 삼월은 맛도 멋도 없습니다 내게 있어 삼월은 삼각형도 타원형도 아닙니다 그리고 삼월에는 삼월의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삼월은 내게 시도 주지 않고 붉은 피와 푸른 잉크를 말리웁니다 누가 만일 내게서 삼월을 사가신다면 나는 내 젊음의 한토막까지 서슴없이 덤으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삼월이 저렇게 아지랑이로 쨍 빛나도 나는 참말 삼월의 사람은 아닙니다 저만치 유월이 구월이 매콤하고있지 않습니까?  
35    설이 오면 두근거리던 이 가슴을 댓글:  조회:214  추천:0  2022-03-11
설이 오면 두근거리던 이 가슴을 □ 한영남 양력설이 다가올 즈음은 한해 동안 사용해오던 탁상력 따위들을 새 력서로 갈아주고 새해 첫 스타트부터 계획들도 알차게 세우면서 새로운 한해를 즐겁게 멋지게 행복하게 보낼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는 갈림목이기도 하다. 낡은 해와 새해를 가름하는 양력설은 그래서 언제 봐도 새롭다. 그러나 우리한테 양력설은 새해 첫날 정도로만 각인될 뿐 설이 아니다. 본격적인 설은 음력 정월 초하루인 음력설을 설로 알고 있다. 하긴 설빔 같은 우리 말이 무색하리 만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새옷도 척척 사입을 수 있고 색다른 음식도 가격에 크게 제한받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는 요즘이다. 그러니 음력설이라 해도 오랜만에 온 집 식구가 모여서 얼굴을 확인하는 날 정도라고나 할가. 거기에 친척이라도 오는 경우면 그야말로 설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예전에는 음력설을 맞으면 벌써 일주일에서 열흘 아니, 부지런한 살림군들은 아예 한달 정도 시간을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설음식들부터 준비해왔다. 눈발을 헤치며 장을 봐오는데 간혹 산토끼나 꿩 같은 것을 만나게 되면 값을 크게 흥정하지도 않고 사버린다. 또 집에서 직접 해야 하는 음식들도 미리미리 식재료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어릴 때 집에서 순대도 만들고 엿도 달였었다. 방학이라지만 소조공부를 해야 하므로 낮에 친구네 집에 가서 소조공부를 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가마에서 엿이 푹푹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것을 본 할머니는 주걱으로 엿을 스윽 긁어서는 내 앞에 쑥 내민다. 나는 냉큼 입을 가져다대다가 너무 따가워서 그만 뒤로 벌렁 자빠진다. 할머니는 그것이 또 우습다고 허리를 부여잡으신다. 엿이 다 달여지면 그것을 둥근 모양으로 식혀준다. 엿이 굳어진 것을 우리는 판대기엿이라 불렀고 그것을 창고의 독에 넣어두었다. 그러다가 설에 오락을 한바탕 벌리고 난 다음 군입질거리가 생각날 때면 그 판대기엿을 가져다가 칼등으로 툭툭 쳐 까부시여서는 먹군 했다. 그런데 누가 그 추운 겨울밤에 어두운 창고에 가서 엿을 가져오느냐가 항상 문제였다. 원칙만 내세우는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화투놀이나 윷놀이에서 진 팀이 엿을 가져와야 한다고 우기셨다. 팀을 잘 만나야지 지는 날이면 개고생이다. 어린 나이에 어둡고 음습하며 랭기만 감도는 창고는 썩 우호적인 장소가 아니였다. 게다가 눈보라가 왱왱 몰아치는 겨울밤에 엿 가지러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벌칙이였다. 나는 누나 때문에 졌다고 투덜거리며 커다란 아버지의 외투를 머리꼭대기부터 눌러쓰고는 손전지를 켜들고 앞장을 선다. 나보다 세살 이상인 누나는 여유롭게 뒤따르지만 정작 창고앞에 이르면 나는 걸음이 자꾸 느려지고 그렇게 되면 누나가 내 손에서 열쇠를 나꿔채고는 앞장서서 창고로 들어간다. 시커먼 구석에서 당장 무슨 괴물이라도 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억지로 참는데 그때따라 누나를 한번 놀래울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나는 갑자기 손전등을 꺼버리며 우왁- 소리를 질러버린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긴장해서 손더듬을 하던 누나는 그만 와- 울음보를 터뜨린다. 나는 누나가 울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터라 그만 더럭 겁이 나서 같이 울어버린다. 우리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란 식구들이 다투어 창고로 돌진해온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애두 참 하고 혀를 끌끌 차고 아버지는 너 이노옴 어디 보자 하는 투가 력력하시다. 막상 장난을 하고 나니 후폭풍이 예감되면서 더럭 후회가 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렇게 가져간 엿을 입 가득 물고 먹을 때면 온갖 시름과 걱정도 다 사라지고 만다. 방학숙제를 잔뜩 미루고 하지 않은 그 엄청난 걱정까지도… 엿은 그렇다치고 순대는 우리 집의 전통명절음식이다. 제정 때 순대장사, 국밥장사, 랭면장사를 하셨던 할머니의 호령에 따라 순대 만들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순대를 만들려면 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우선이다. 돼지밸을 씻는 임무는 나와 아버지의 몫이고 속을 만드는 것은 할머니, 어머니, 누나와 녀동생의 몫이다. 물론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어머니가 만드셨지만 누나와 녀동생은 기어이 자기네도 순대 속을 만들었다고 우긴다. 밸은 먼저 물에 몇번 헹구어 대충 험한 것들을 제거한 다음 냄새를 잡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주로 된장과 밀가루로 빨래하듯이 주물러서 냄새를 제거했다. 요즘 식당들에서는 세탁기에 돌려낸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하면 맛이 순수하지 않다. 밸 손질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때론 오전 내내 그 일만 하기도 한다. 순대속은 대체로 선지와 찹쌀과 멥쌀을 적당히 섞어주고 거기에 시래기를 넣어준다. 일단 그 정도만 해도 순대속 모양새가 나지만 거기에 조미료들을 곁들여야 한다. 소금 적당량, 후추 적당량, 아지나모도 적당량 등을 한데 넣고 잘 섞어주면 된다. 이제 밸도 손질이 끝나고 속도 다 되였으니 넣어야 한다. 아버지는 빈 병을 가져다가 실에 휘발유를 적셔 병아가리에서 우리 손으로 한뼘 정도 되는 데를 한고패 둘러서 매준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이고 밀대로 톡톡 치면 신기하게도 병아가리가 뎅겅 잘라진다. 밸의 한끝을 실로 잘 매고 다른 한 끝에 금방 잘라낸 병아가리를 거꾸로 집어넣으면 그게 깔대기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작은 사발로 순대속을 떠서 넣는데 할머니는 눈짐작으로도 고루 섞어서 넣어줘야지 너무 되게 들어가고 너무 묽게 들어가면 이제 삶을 때 터진다고 훈계가 이만저만이 아니시다. 그럭저럭 순대속을 다 넣으면 마당에 땅가마를 걸고 불을 지핀다. 가마에서 김이 실실 피여오르고 물이 벌렁벌렁 끓기 시작하면 순대를 넣어주는데 조심하지 않으면 끓는 물이 튕겨 손을 데기 쉽다. 그렇게 한참을 끓이다가 아버지가 느닷없이 싸리꼬챙이를 가져오라고 하신다. 순대를 삶는데 장작을 때면 되지 갑자기 불 피울 때나 쓰는 싸리는 왜? 그래도 군말 못하고 다소곳이 가져다드리면 아버지는 그 선뜩거리는 손칼로 싸리꼬챙이를 연필처럼 잘 깎아준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조짐이지만 재미있고 신기하다. 가마덮개를 열면 물이 사품치고 그 사품치는 물속에서 순대들이 빙글빙글 돌아눕는다. 그때면 아버지는 금방 깎은 싸리연필로 순대의 몸통을 쑤욱 찔러준다. 그러면 때론 김이 새여나오고 때론 물총을 냅다 쏘기도 한다. 순대속을 넣을 때 공기가 같이 들어가기에 이렇게 삶을 때 찔러주지 않으면 순대가 다 터져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넣은 순대를 잘 알아보려고 일부러 파란 색실로 끝을 묶어두었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리석은 짓이였다. 내가 넣은 순대는 속을 고루 잘 저어서 넣지 않았기에 순대 굵기가 고르지 않고 가늘고 굵고 울룩불룩 아주 가관이였다. 근데 파란 실로 묶어놓아서 금방 들통이 나버렸다. 이런 참 괜한 짓을 했잖아? 순대는 아무리 열심히 만들고 삶아도 혹시 터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순대가 터지면 국가마 밑굽에 순대밥이 가라앉게 되는데 그것을 순대국이라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빨이 부실해서 순대껍질을 씹는 게 참 고역이라 그 순대국을 잘 먹었다. 엿도 되였고 순대도 되였으면 이제 폭죽이나 사가지고 설이 오기만 기다리면 되였다. 드디여 그 대망의 그믐날이 된다. 그때는 텔레비죤이 없던 시절이라 라지오를 틀어놓고 온 집 식구가 모여앉아 만두를 빚었다. 어머니는 솜씨가 잽싸서 아버지, 누나, 녀동생, 나 넷이 싸는 만두피를 혼자서 거뜬히 담당하셨다. 만두속은 두부를 보자기로 싸서 꾸욱 짜 물기를 제거한 다음 부셔뜨린다. 그리고 배추김치를 역시 물기를 꾹 짜서 제거한 다음 그대로 잘게 다져서 한데 섞어준다. 거기에 고기를 발라낸 꿩의 뼈를 다져서 같이 섞어준다. 꿩의 뼈는 잘 다져야지 아니면 먹기 어려웠다. 이 만두속에는 후추가루가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들어가서 아주 진한 후추냄새가 풍겨야 만두가 제맛을 낸다. 물론 만두를 삶을 때는 꿩고기로 끓인 꿩탕이 제격이다. 그믐밤이 깊어지면 폭죽소리가 점점 요란해지고 그러면 어서 나가서 터치지 못해 속이 바질바질 탔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고서는 누구도 감히 나가서 폭죽을 터칠 궁리를 하지 말아야 했다. 드디여 열한시가 넘어 자정을 향해 시계가 바쁜 걸음을 재촉하면 아버지가 이제 폭죽 터칠가 하신다. 야호! 만세 삼창이 나오기도 전에 신을 꿰고 밖으로 내달린다. 뒤에서는 옷을 더 입으라는둥 모자를 쓰라는둥 어머니의 잔소리가 잔등을 매섭게 갈겨댄다. 그렇게 폭죽을 터치고 집에 들어오면 만두가 다되여서 우리는 그것을 먹으며 새날을 맞았다. 그믐밤에 자면 눈섭이 하얗게 된다고 해서 잠이 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버텨보려고 하다가 결국 쓰러져 자버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환경오염이다 방화다 해서 폭죽도 터치지 못하게 하고 새옷을 입어도 기뻐서 입이 귀에 걸리는 일이 생기지도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다 같은 설인데 이제는 설풍속도 많이 달라져서 설 쇠는 재미는 많이 적어졌다. 그리고 설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말을 하면 요즘 애들은 픽픽 웃을지도 모른다. 연변일보
34    동주가 못다 센 별을 이어서 세며 댓글:  조회:151  추천:0  2021-12-16
한영남 시인(중국) 일본 권위 시전문지 (2021. 12호)은 전문코너 에 이라는 테마로 중국조선족 한영남시인의 특별기고 라는 글을 실었다. 이는 일본의 시전문지라는 플랫폼을 통해 중국조선족시인들이 세상에 명함장을 내미는 또 하나의 계기로 된다. 이에 본지는 한영남시인의 원문을 그대로 전재해 세계의 시인들과 호흡을 같이하고자 한다.    한영남 약력 : 1967년 길림성 안도 출생.시, 소설, 수필, 실화, 평론 등 300여만자 발표.소설집 , 장시집 등 출간.중국조선족수필상, 중국조선족동시상, 중국조선족연해문학상,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흑룡강신문 랑시문학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도라지 장락주문학상, 흑룡강성소수민족문학상, 연변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등 다수 수상.연변작가협회 회원, 흑룡강성작가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작가학회 회원.자유기고인   계절(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하략)   무려 80년 전에 이렇게 읊었던 시인이 있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시인 윤동주(尹东柱)님이시다.   내가 윤동주라는 이름을 맨 처음 접한 것은 지난 세기 80년대 말이였다. 나의 시 계몽스승이신 림금산(林锦山 전 중국조선족소년보사 문예부 주임) 시인께서 내가 교편을 잡고 있던 안도현제6중학교에 찾아오셨을 때였다. 나는 오랜만에 스승을 만난 기쁨에 내가 그동안 써두었던 엉성한 시노트를 꺼내놓고 선생님께 검사해주십사 청을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한벌 훑어보고 부족점들을 일일이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그때 선생님께서는 나의 시노트에 윤동주시인의 를 직접 외워서 베껴주시는 것이였다. 나는 윤동주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동안 시공부를 하면서 처음 접한 시인이였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연변이 낳은 위대한 시인 윤동주에 대해 자상히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그때 처음 일본의 오무라 마스오교수님의 존함을 들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우리는 우리 땅에서 태여난 위대한 시인을 그때까지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오무라 마스오교수님은 1933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하셨고 1957년 와세다대학교 제1정치경제학부를 졸업, 도쿄도립대학 인문과학연구과 석사 박사 학위를 따낸 지성적인 학자이시다. 1964년 와세다대학 전임강사로 임용, 1966년부터 1978년까지 동대학 법학부에서 중국어 담당, 1967년 조교수, 1972년 교수로 승진하셨다. 그리고 1972년 어학교육연구소로 근무지를 옮겨 2004년까지 조선어 담당, 1985년 와세다대학 재외연구원으로 1년간 중국 연변대학에서 류학하며 조선족문학을 연구하셨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 고려대학교 교환연구원으로 한국에 체류하셨다.   지금까지 『사랑하는 대륙이여-시인 김용제 연구』, 『시로 배우는 조선의 마음』,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윤동주와 한국문학』, 『중국조선족문학의역사와 전개』 등 저서를 펴내셨고 『한일문학의 관련 양상』, 『조선단편소설선』(상·하), 『한국단편소설선』, 『시카코 복만이-중국조선족단편소설선』, 『인간문제』 등 수많은 번역서도 펴내신 량심적인 학자이시다.   1984년 당시 한국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이며 동시작가인 윤일주(윤동주시인의 동생)선생께서 학술회의차 도쿄에 갔을 때 오무라교수는 윤일주선생을 만나 윤동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윤동주를 더 깊이 연구하고 력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는 윤동주의 진실된 모습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오무라교수는 중국행을 결심한다.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윤동주묘소와 윤동주가 생전에 다녔던 룡정중학교의 자료실을 뒤져 찾아낸 윤동주 관련 소중한 자료들, 그것들은 실로 력사속에 잠들고 있던 윤동주의 본 모습을 환원해내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였다.   드디어 중국조선족들은 자기 땅에서 살아숨쉬며 불멸의 명시편들을 쏟아냈던 윤동주시인을 알게 되였고 그런 시인을 동족으로 둔 커다란 자긍심을 갖게 되였다. 오무라교수는 그때 도움을 주셨던 정판룡교수(郑判龙 전 연변대학 부총장), 권철교수(权哲 전 연변대학 교수), 리해산교수(李海山 전 연변대학 교수), 김학철작가(金学铁 조선족 저명한 작가) 등 많은 분들이 그때 오무라교수의 연변에서의 활동을 응원했다고 한다. 또한 김호웅교수(金虎雄 연변대학 교수), 정세봉작가(郑世峰), 남영전시인(南永前 전 장백산 잡지사 주필), 장정일평론가(张正一), 최삼룡평론가(崔三龙) 등 조선족 지성인들과 오무라교수는 지금도 끈끈한 우정과 문화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족시인을 말할 때 윤동주와 같이 거론되는 시인이 또 한분 계신다. 바로 심련수(沈连洙)시인이다. 심련수시인 역시 1945년에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뜬 조선족시인이다. 오무라교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심련수시인의 다른 사료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심호수(심련수의 동생)선생을 수차 찾아 설득해 장장 반세기 넘게 보관되여온 심련수(1918년 출생. 룡정에서 고중까지 마치고 1941년 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해 고학생활. 1943년 강제징병을 피해 지바현에 있다가 라진항을 거쳐 귀국한 다음 흑룡강성에서 교사로 근무. 1945년 집으로 돌아오던 중 왕청현 춘양진에서 피살)의 친필노트, 그의 일기장 등 귀중한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심련수의 본 모습을 세상에 알리는데 오무라교수는 마멸할 수 없는 큰 기여를 하셨다.   여기서 잠간 심련수시인이 쓴 시 를 보기로 하자.   쉴새없이 밀려치는 사나운 물결 陸地의 테두리를 깨물어뜯듯 마지막 發惡을 그대여 보는가 北極의 冰原에서 白熊이 울고 極光이 輝煌하는 雪原에서 北으로 北으로 避難가는 에스키모를 누구의 힘으로 挽留할소냐   얼 부푸는 地軸에서 용가름 트는 소리 地魂이 빠질듯 震動하고 식어드는 兩極에서 찬바람이 일어 微溫이 殘存을 삼키려 함을 그대여 참으로 알고 있는가   그대여 最後의 勝利가 勝利라면 勝利를 못 가질 것 그 무엇이냐 地熱이 식으면 달굴 수 있고 地軸과 軌道가 破盃되면 발굴 수 있으리니 地球星이 宇宙間에 있을 때까지는 우리의 心熱을 輪熱할 수 있고 人類의 歷史를 살릴 수 있을게다     (1941년 12월 3일  게재)   이처럼 오무라교수는 세상에서 많이 소외되고 있는 중국조선족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평생의 심혈을 몰부으신 이 시대의 참된 지성이요 진정한 량심이시다. 윤동주, 심련수와 동시대를 살다갔던 이 땅의 시인들은 서정의 바다에서 삶의 진리를 찾아 힘찬 날개짓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택영(金泽荣 1850-1927),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리욱(李旭 1907-1984), 류치환(柳致环 1908-1967), 김조규(金朝奎 1914-1990), 함형수(咸亨洙 1914-1946) 등은 에 자주 얼굴을 내밀던 쟁쟁한 시인들이다. 또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문단에서 활약했던 김철(金哲 1932년 일본 시모노세끼 출생. 장편서사시 ,  등 60여부의 시집 출간), 김성휘(金成辉 1933-1990. 장편서사시 , , 시집 , , ,
33    '머리를 깎이우며', 외 17수 댓글:  조회:160  추천:0  2021-10-11
 '머리를 깎이우며', 외 17수 한영남    머리가 더부룩했어 목덜미를 자꾸 간질이고 귀를 참월하게 덮어버리고 머리가 불편할 정도로 더부룩했어 미장원에 갔지 이쁘장한 아가씨가 물었어 어떻게 잘라드릴가요 뭐 아무렇게나 보기 좋게 두루 횡설수설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꾸 말들이 잘려나갔어 가볍게 한숨 쉬고 잠자코 들이대고 있었지 근데 말이야 머리를 잘리우는데 아버지 머리카락이 날리겠지 검지는 않고 완전 멋진 은발도 아닌 그냥 희부우연 그런 회색빛 머리카락들이 맥없이 무릎에 툭툭 떨어지겠지 떨어졌다가 바닥에 뒹굴겠지 평생 스스로 머리 깎으신 내 아버지 허옇게 녹슨 머리카락   트럼벳은 불지 않기로 했다 -레핀과 그의 에 부쳐   사품치는 송화강기슭에서 바이올린의 새된 비명소리도 첼로의 배밑바닥 깊은 흐느낌도 파도의 날카로운 호령에 잠재워졌으니 이제 트럼벳은 불지 않기로 했다 아름다운 미풍에 하느작이는 태양도와 장엄한 파도파도파도파도의 송화강이 그만 서로 사타구니를 틀어박고 누워버린 이 기슭에서 우리는 수채화의 아련한 빛이거나 수묵화의 회색빛 살결은 찾지 말아야 한다 고 해도 저렇게 하염없는 태양도를 건너다보며 의 그 넉넉하면서도 시커먼 근육의 고함소리에 귀를 맡겨버려야 한다 글쎄 와봐라 파도여 어디 덤벼라 절망이여 아무래도 트럼벳은 불지 않는 것이 좋겠지 드럼으로도 부셔버리지 못하는 이 악장 외로운 하모니카는 이나 흥얼거리라지 트럼벳은 전설의 트럼벳은 불지 말아야 한다   춘삼월   춘삼월 따슨 볕 그립다 아직은 긴 그림자 손 내밀면 차거운 아지랑이 달래만치나 싱싱하고 개나리만치나 멀리서 캐득거리는 숨소리가 건방지기 시작한다 아직은 강도 산도 몸이 풀리지 않았다 춘삼월 그대 품을 느낀다     살아가는 이야기   한잔의 술과 한개비의 담배가 그렇게도 사치더란 말인가 세월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갑갑답답함을 새기기에는 우리의 술이 우리의 담배가 너무 무색하고 있거늘 한잔의 술과 한개비의 담배가 과연 그렇게도 사치더란 말인가 황금의 웃음과는 너무 거리가 먼 우리들의 일상 부스러진 북어조각만치나 짓뭉개진 시래기먼지만치나 으깨여진 벌레먹은 사과조각만치나 값도 없고 쓰잘 데도 없는 우리들의 찝찔한 일상 소금만치 짜도 소금만치 쓸모는 없는 우리들의 못난 살이 초라한 행색을 서로 비웃으며 우리들이야 우리들에게야 딱 안성맞춤인 이 한잔의 술과 한개비의 담배가 그렇게도 사치더란 말이냐   점적주사를 맞으며     저 한 방울 링거가 내 몸통속에 들어가서 생명으로 되여줄 수 있을가 아픔의 독소를 몰아내고 건실한 세포로 자리잡을 수 있을가 기침을 발로 차버리고 책상다리를 하는데 힘이 되여줄 수 있을가 한 방울씩 무심한듯 흘러내리는 링거에 생명의 의미를 공손하게 부탁해본다     어느 날 그 친구한테 발각된다면   살다가 살아가다가 혹시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 친구한테 발각된다면 어디서 무얼 했노라 주절거리지 않으리라 살아온 그 굽이굽이 아프던 사연들을  굳이 떠들어 아픔을 나누지는 않으리라 만약 그래도 자꾸 궁금해한다면 그 친구와 서로 말없이 마주바라보리라 분명 그 친구한테도 깊이 갈앉은 슬픈 사연이 눈물처럼 두런거리리라 거기에 담긴 안타까운 이야기에  공감은 하더라도 값싼 눈물은 흘리지 않으리라 혹시 그 친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말인가를 하면 고개를 끄덕여주고 어깨를 내여주리라 그러나 서뿔리 말은 하지 않으리 시시한 위안따위로  그 친구의 깊은 아픔을 달래줄 아무도  이 세상에는 없으니 그 친구와 살아온 자초지종을 수런거리지는 않으리 집이나 직장같은것도 주절거리지 않으리 그저 그 맑은 눈동자를 찬히 들여다보다가  힘주어 손을 꾹 쥐여주고는 돌아서리라 한참을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걷다가  그 친구가 이젠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거든 얼른 뒤를 살펴보고  그리고 눈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리라 우리는 누구도 서로의 아픔앞에서는  울 권리도 없으니 혹시 길가에서 어느날 그 친구한테 발각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 그 친구한테 계좌번호 따위도 말해주지 않으리 그저 가장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 친구를 바라보다가 그 친구의 행복만을 속으로 빌며 돌아서리 그냥 그대로 돌아서서 입술을 깨물리   우리가 강아지만할 때   어둠을 밀어내며 빨다가 뱉은듯 말숙한 달이 동녘 저쯤 웃는듯 마는듯 걸리면 케이블방송에 실려 커다란 함지를 인 엄마가 돌아오셨다 가시에 스치고 나무그루에 걸리며 볼품없이 해진 엄마의 손에서 밤새도록 우정금, 고비, 닥지싹, 민들레들이 여러 자름자름한 그릇들에 갈려 담기곤 했다 엄마의 때묻은 얼굴이 무척이나 안타까운듯 초불은 더욱 작아지고 먼데 다듬이소리가 한층 높아갔다 -뒤집 분이가 시집갈 준비를 하나보다 엄마의 목소리는 거의 잠겨있었지만 우리의 귀에는 언제든 또렷이 들려왔다 아직 우리가 강아지만할 때였다     골목이 젖었다   P거리를 너무 급하지 않게 지나 L거리에서 약 백미터쯤 건숭건숭 걷다가 오른쪽으로 픽 틀어져 들어가면 허름한 골목 하나가 나진다 어디서라도 쉽게 볼수 있는 흔하디흔한 골목 평소에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늘 한적하기만 했던 골목 언젠가 계집애 하나가 강아지에게 쫓겨 내처 들어오다가 다행히 이 골목 젊은이에게 구원된적도 있는 골목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찾아주는 사람도 적지만 어쩌다가 고만고만한 사연들이 모여 매일처럼 시름겨운 이야기를 두런거릴것 같은 P거리를 너무 급하지 않게 지나 L거리에서 약 백미터쯤 건숭건숭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바로 나지는 허름한 골목 하나 오늘 비도 오지 않았는데 그만 흠뻑 젖어버렸다 젖은 골목에 사람 찾는 전단지 하나가 축 늘어져 있었다   뼉다구인생   알맞춤하게 넣어진 물과 알맞춤하게 넣어진 우거지와 알맞춤하게 풀어진 된장과 비비고 문대고 제법 들썽이며 국물 들쓴채 며칠이고 우려지다 마침내 어느 오전나절 어느 기름진 손에 의해 멍멍이의 심심풀이로 그 발치에 던져지다 굽이진 곳이며 소용돌이친 곳이며 깊숙이 속으로 패인 구멍까지 얄팍하고 물많은 개의 혀에 이리저리 구석구석 핥이우며 온몸이 흐느적이다 예전에는 기름과 살과 가죽에 싸여 싱싱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뼉다구는 드디여 개에게조차 버려지다 단즙도 없고 살부스러기도 남지 않고 냄새마저 다 빨리운채 나무토막보다 더 담담하게 하얀 속살로 남은 뼉다구 뼉다구에게도 달리던 꿈은 있었다 뼉다구에게도 날고싶던 꿈이 있었다 뼉다구에게도 무지개같은 찬란한 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버려져 아무도 돌아보는 이 없는 뼉다구 뼉다구는 긴 세월  다시 태여날 꿈을 재워야 한다 다시 태여나 어느 살이 되고 피가 될 비상의 꿈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지금 뼉다구는 누워있다 발길에 툭툭 차이며 뼉다구는 이 아침  검은 대지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본다   사월사랑   바람이 불고 꽃은 아직 피지도 못했다 사월인데 잔디는 미처 깨나지 못했고 달래만 양지쪽 언덕밑에서 픽픽 웃고있었다 사월이 줄줄 흐르는데 사정없이 눈발 날리고 어느때보다 춥고 추운 오므리고 사는 춘사월 사월이고 달래알이 툭툭 굵어지고 땅속 잔디뿌리들이 끝도 없이 길어지고 모질이도 기다려지는 화사한 봄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살이   평생을 살아야겠는데 그 하루 비가 내리고 내 평생이 하루인 것을 하늘은 몰라버려라 다음에 태여나면  꿀벌처럼 붕붕거리고 나비처럼 팔랑거리고 제비처럼 멋져보리라 다음 생에도 하루살이로 태여나면 그날은 부디 해가 화사하게 웃어주어 그 하루 부서지게 사랑하다 가리라 평생을 살아야겠는데 이 하루 비가 내리고 내 평생이 하루라는 걸 하늘은 잊어버려라     물덩이들의 반란   물들이  물덩이들이 왈칵왈칵 내 목구멍을 헤집는다 내 목의 겨불내를 닦아주기 위해서 얼마쯤 머뭇거리거나 서성거려주어야 하는데 녀석들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살겠다는듯이 내 위장속으로 란폭하게 쓸려들어간다 내 목구멍을 한껏 벌려버리고는 잘 줴기진 물덩이들이 제법 단단해가지고 한사코 아우성치며 빨리듯 들어간다 물은  물들은 이런것이 아니겠는데 부드러운 물들이여야 하는데 물덩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힘을 자랑한다 분명 나를 아프게 한 물덩이들이 사랑스럽다     화장실 투항병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나는 투항병이 된다 공손히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고 배설물의 순조로운 배출을 열심히 기도한다 먹을것 제대로 먹은 날들은 요란한 소리로 시끄럽고 먹을것 제대로 먹지 못한 날들은 잘 나가주지 않아서 입으로 소리를 함부로 낸다 내 소화계통은 왜 나를  늘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걸가 들쑥날쑥으로  변기만을 번거롭게 하는 나는 언제 한번  정식을 대접해보지 못한 죄때문에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종이말이를 백기처럼 들고 투항병이 된다     바다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묻지 않는다   살다가 지치고 힘 빠지고 맥없을 때 바다를 찾는다 언제라도 너넘실 너넘실 술렁이는 바다 저만치서부터 파도손 쳐들고 반겨주는 바다 멸치 고등어 고래 새우 미역 다시마...들을 다 품어주고도 오히려 넉넉한 바다 바다가에 앉아 바다의 휘파람소리 들으면 바다는 언제나처럼 내게 다가와 그동안 이야기들을 수런거린다 인간세상에서는 서로 만나면 어디서 왔냐고 왜 왔냐고 언제 갈거냐까지 체크하지만 바다는 언제 봐도 내게 어디서 왔냐조차도 묻지 않는다 그래서 바다에 가면 나는 편안한 바다에 누워 바다를 짊어진채 하늘에 풍덩 뛰여든다     그건 내 눈물이다 마시지 마라   마시지 마라 마시지 마라 그건 내 눈물이다 시원하다거나 달콤하다거나 구수하다거나 그런 표현들과는 제법 거리가 먼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도  쿡 웃음이 나오도록 그렇게 지지리 촌스럽고 투박하고 바보스러운 행여 마음 여린 사람은 안스러워 돌아설것만 같은  그러나 그것은 내 초라니 인생을 달인 내 눈물 그래도 마시지 마라 그건 별 쓰잘데없는 내 눈물이다     마른 눈물 한접시   어느날 흐르는 눈물이 말라 내 앞에 놓인 접시에도 소금 한줌 놓인다면 아직은 짠맛 모르는 누군가에게 드리겠습니다 상처의 이름이 아닌 사랑의 이름이 아닌 세월의 이름으로 드리겠습니다 살아가면서 바보처럼 울지 아니하도록  아프지 아니하도록 기도하며 내 앞에 놓인 소금 한접시 내 눈물이 말라비틀어진 소금 한접시 누군가에게 그냥 소금으로 남겠습니다     내일에 눈길 걸어두고   세월 눅눅한데 나 혼자만 아프다고 생각했다 깨면 꿈인것을 씹어삼킬건 아픔뿐 아닌것을 멀리 하늘에 눈길 걸어두고 헛기침 한번쯤 하며 래일은 어떤 하루일까 기다리지 말아야지 망설이지 말아야지 바람 서늘한데 나 혼자만 기도한다고 슬퍼했다   너의 고통에 소금을 뿌리면, 그러면 용서가 될까   기억한다는 것은 용서할수 없다는 것 행여 너의 고통에 소금을 뿌리면 그러면 용서가 될까 긴 눈물이 휴지말이처럼 끝없이 풀려나와도 아픔은 쉽게 가셔지지 않는 것 지금, 용서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으리 기억이 남아있는 한 동북아신문
32    [두만강칼럼]넘버원이 아닌 온리원을 꿈 꾸라 댓글:  조회:422  추천:0  2021-01-28
온리원이라는 말이 대세이다. 중한 수교 이후 넘버원이라는 말이 오래동안 류행되더니 요즘은 온리원 쪽으로 돌아졌다. 둘 다 영어의 한국식 표기인데 대충 그 뜻을 헤아려보면 넘버원은 ‘으뜸’이라는 말이고 온리원은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으뜸이 아니고 하나를 더 선호하게 되였을가? 넘버원은 언제라도 넘버투 혹은 넘버쓰리,넘버포 등에 의해 정복될 위험을 안고 있다. 어디 넘버들 뿐인가. 이름도 없는 무명소졸이 급속히 치고 올라와 무너뜨릴 가능성마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온리원은 오롯이 자기만을 고집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혼자라는 리념을 내세우기에 대체불가인 것이다. 희유금속이 왜 비싸게 팔리는지 아는가? 철이나 구리 등 일반금속과 달리 매장량이 적은 데다가 한곳에 집중되여있으며 추출이 어려운 금속이 바로 희유금속이다. 리튬, 니켈, 인듐, 몰리브덴, 세슘 등이 바로 이 희유금속에 속하는데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량은 결코 많지 않지만 최첨단 IT산업, 자동차, 철강 등 주요 산업의 핵심소재로 쓰이고 있으며 그래서 ‘산업의 비타민’으로까지 불리운다. 황금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는 오로지 리유라면 바로 그 희소성 때문이다. 온리원이 제대로 먹혀들어간 사례로 볼 수 있겠다.   중국 영화계에 까까머리가 트랜드마크인 갈우라는 남자배우가 있다. 그는 금계상, 대중영화백화상 등 중국 영화계의 모든 영화상을 싹쓸이했고 제47회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받은 영화대가이다. 그런데 이 갈우는 당시 사람들의 심미관념으로 볼 때 결코 남자주인공의 형상이 아니였다. 당시 중국 영화계에서 남우주연으로 정평이 나있던 배우들로는 왕심강(《정찰병》, 《렬화 속에서 영생하리》, 《지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전파》 등 영화들에서 남우주연을 맡은 배우), 당국강(《남해풍운》, 《오늘 밤도 별은 찬란하네》, 《적수하를 네번 건느다》, 《높은 산 아래에 놓인 화환》, 《장정》, 《삼국연의》, 《건국 수령 모택동》등 영화와 드라마의 남우주연을 맡은 배우), 진도명(《말대황제》, 《강희왕조》, 《초한전기》, 《당산대지진》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우주연을 맡은 배우) 등 쟁쟁한 배우들이였다. 그들은 말 그대로 당대 꽃미남들이였고 그래서 전국의 수많은 소녀팬, 아줌마팬, 할머니팬들의 우상이였다. 그러나 갈우는 워낙 형상이 우습게 생긴 데다가 젊은 나이에 번대머리까지 되였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형상창조를 위해 고심했다.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고 했던가. 마침내 갈우는 중국에서 판도를 바꾼 이름 난 드라마 《편집부의 이야기》에서 자신만의 특색연기로 대중들의 시선을 한몸에 집중시키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형상창조를 위해 번대머리를 아예 까까머리로 밀어버리고 지금까지도 그 까까머리를 고집하고 있다. 중국 영화배우들의 까까머리는 모름지기 저명한 소품배우 진패사와 갈우로부터 시작되였을 것이다. 갈우는 넘버원을 다투지 않았다. 결코 남우주연을 욕심내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개성 있는 형상창조를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랬기에 그는 더욱 연기파로 소문날 수 있었고 그의 연기는 오로지 갈우 한사람만의 독보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갈우의 경우는 살을 깎고 뼈를 깎아서 천편일률적인 미를 추구하는 요즘과 사뭇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혼자만의 독보적인 존재가 결국 세상사람들한테 먹힌다는 것을 그는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사람중의 한사람이다. 서비홍을 모방하는 사람은 아무리 말을 잘 그린다 하더라도 서비홍을 영원히 초과할 수 없다. 그러나 당나귀를 열심히 그리고 당나귀그림에서 만큼은 가히 독보적인 존재라고 불리울 수 있다면 적어도 서비홍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자기홍보시대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슷한 학력, 비슷한 실력, 비슷한 경력 등으로는 경쟁에서 이겨낼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자기만의 특색을 발굴하고 그것을 극대화시켜야 비로소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다. 즉 세상에 단 한명 밖에 없는 자신을 홍보해야 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상처투성이 넘버원이 아니라 자신만의 가치로 행복을 창출하는 창의적인 온리원이 되여야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 인정되는 순간 당신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누구나 대체가능한 사람은 인재일지는 몰라도 그런 인재의 보편성 때문에 결국 인정받기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은 이미 글이 아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표현될 때 그 가치가 인정되며 독자들을 자석처럼 끌 수 있는 것이다. 보도 블록은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져도 결국 보도 블록일 뿐이다. 그 보도 블록을 고이 모셔다가 집에 수석으로 소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강변에 널려있는 돌들이라 해도 모양이 기괴하고 다른 돌들과 특이하게 생기면 수석으로 모셔져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이 ‘하나’를 추구해야 한다. 오로지 나만의 것을 창출해서 개성 창조에 주력할 때 비로소 훌륭한 작가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아마츄어는 넘버원을 추구하지만 프로는 온리원을 꿈 꾼다. 길림신문
31    득롱망촉 댓글:  조회:469  추천:0  2020-12-08
[두만강칼럼]득롱망촉 한영남 득롱망촉(得:얻을 득. 隴:흐릿할 롱. 望:바랄 망. 蜀:나라이름 촉.)―롱(지금의 감숙성)의 땅을 얻으니 촉(지금의 사천)나라까지 갖고 싶다는 말로 끝없는 욕심을 빗대여 이르는 말이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거야 글쎄 인간의 본능이라 하겠으나 과유불급이라 했은즉 넘쳐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생명은 마치 한척의 배와도 같다. 만일 인생항로에서 감당능력을 초과한 물욕이나 허영심을 적재한다면 그 배는 곧 좌초하거나 침몰하기 십상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비비(일명 개코원숭이)를 어떻게 잡는지 아는가. 고정된 작은 나무상자 속에 비비가 가장 좋아하는 견과류를 넣어두고 상자에 비비의 앞발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 하나를 뚫어놓는다. 비비는 일단 상자 속의 견과류를 움켜쥐면 커진 주먹 때문에 앞발을 빼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비비는 손에 쥔 물건은 절대 놓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이런 방법으로 비비를 잡군 한다. 사람들은 늘 “왜 먹이를 놓아버리고 도망가지 않는가?” 라고 하며 비비의 우둔함을 비웃군 한다. 그러나 사실 비비만 그런 착오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도 물욕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오직 눈앞의 리익에만 집착하게 되며 그에 따르는 위험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모모한 어른들이라고 머리가 아둔해서 들통이 나고 감옥행을 하겠는가. 어떤 고위급 관원이 잡혀나오는 걸 보면 억소리를 넘어서 수백억의 돈을 삼켰다고 한다. 100억원의 돈을 다 쓰려면 인생 100년을 산다고 치고 하루 평균 약 30만원에 달하는 돈을 써야 한다. 불쏘시개를 하지 않는 한, 그리고 필요 이상의 집을 구매하거나 고급 승용차를 매일 갈아대지 않는 한, 양말 갈아신듯이 녀자를 갈아대지 않는 한, 정말 써버리기도 곤난한 돈이다. 그런데도 1억이 생기면 10억을 노려보고 10억이 생기면 100억을 노려본다. 그게 인간의 욕심이다.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통째로 준대도 만족을 모를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러나 각도를 바꾸어서 개인적인 발전을 위한 욕심이라면 어디까지나 격려할 일이다. 책을 억수로 많이 본다든가 무릎 벗겨지도록 열심히 일을 한다든가 성실함과 근면함을 반죽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든가 그런 욕심이라면 내볼 만한 것이고 세인들의 박수를 받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긴 세상사람 모두가 세한삼우(岁寒三友. 겨울에도 지조를 지키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닮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마지노선은 지켜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전문가들이나 지성인들은 인간의 타락을 문화에 대한 외면에서 그 리유를 찾고 있다. 문화를 멀리하고 오로지 동물근성만 키우다가는 쉽게 탈이 나는 것이 우리들 삶의 생리인 것이다. 밝고 건전하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거의 모든 인간들의 리상이다. 문화수양 쌓기가 급선무로 나서고 있는 요즘, 독서를 권장한다. 왜냐 하면 독서는 사람들을 더욱 바른 삶을 살도록 채찍질해주기 때문이다. 길림신문 
30    집중력에 대하여 댓글:  조회:467  추천:0  2020-09-03
[두만강칼럼] 집중력에 대하여 한영남 무슨 일을 하든 집중력이 중요하다. 일이 진척되지 않고 공부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 따위에 고민하기전에 우선은 집중력을 닦아야 한다. 옛 성인들이 말하길 “그 인물이 일을 완수할지 여부는 그의 불 켜는 방법, 마루를 쓰는 방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눈앞의 작은 일이라도 마음을 담아 행할 수 있다면 중요한 일도 반드시 완수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춘추시대 진(晋)나라에는 왕자기(王子期)라는 유명한 마부(馬夫)가 있었다. 조(趙)나라의 대부 양주(襄主)는 왕자기에게서 말 부리는 기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마차달리기시합을 청했다. 그러나 양주는 세번이나 말을 바꾸었는 데도 모두 지고 말았다. 양주는 몹시 불쾌하여 왕자기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말을 다루는 기술을 전부 다 가르쳐주지 않은 것 같소.” 이에 왕자기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비책(秘策)까지도 다 가르쳐드렸습니다. 다만 대부께서 그것을 잘못 받아들이신 것 같습니다. 말을 제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의 몸과 수레가 일치되여야 하고 또 부리는 사람과 말의 마음이 일치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빨리 달릴 수 있으며 또 먼곳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께서는 저를 앞지르고저 초조해하고 또 앞서 달릴 때에는 제가 뒤쫓아오지나 않을가 걱정하셨습니다. 말을 달려 먼곳까지 경주할 때에는 앞설 수도 있고 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든지 뒤서든지간에 언제든지 저에게 마음을 쓰고 계시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말과 일치되여 보조를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대부께서 저에게 뒤쳐진 까닭입니다.” 일을 할 때 잡생각을 없애고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면 기대 이상의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집중력 말이 나오니 어릴 때 그렇게 성행하던 ‘기공이야기’가 떠오른다. 지난 세기 80년대초 중국영화계에는 시대를 가름하는 영화 한부가 혜성처럼 나타나 원자폭탄처럼 신주대지의 상공에서 작렬했다. 바로 향항무술영화 《소림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 영화가 상영되면서 중국에서는 갑자기 무술붐이 일어나 너도 나도 무술을 배운다고 야단을 떨었다. 어떤 극성팬들은 직접 하남성 숭산에 있는 소림사를 찾아가 중이 되는 것도 불사하며 무술을 배워주십사 청을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술붐에 이어서 나타난 것이 바로 ‘기공술’이다. 기실 기공은 중국의 전통적인 보건, 양생, 거병 방법의 일종으로 호흡의 조절과 신체활동의 조절 및 의식의 조절 따위를 수단으로 삼아 신체를 단련하고 병을 예방 치료하며 장수를 도모하고 잠재능력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심신단련방법이다. 쉽게 말하면 인체내에 존재하는 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기공에서 가장 골자중의 골자가 바로 ‘집중력’이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를 ‘움직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까닭이다. 인간의 잠재력 역시 고도의 집중력에 따라 다다소소 개발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나무저가락을 쥐고 집중력을 발휘해 힘차게 던지면 널판자에 쇠꼬챙이처럼 척 꽂히는 것을 우리는 영화같은 데서 많이 보아왔다. 무술영화에서 보면 눈을 부릅뜨고 집중력을 발휘해 “얍―” 소리와 함께 맨손가락으로 돌에 구멍을 뚫는 것도 우리는 많이 보아왔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왈가왈부할 수 없으나 집중력에 대한 칭송 정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공부 잘하는 애들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런 애들은 공부할라치면 설령 곁에서 아무리 떠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해야 할 공부를 충분히 잘해낸다는 것이다. 집중력이 그 진가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칼럼같은 것도 정신을 고도로 집중해서 쓰면 한시간도 되지 않아 마무리할 수 있겠으나 이 생각 저 생각 넘나드는가 하면 사이트를 뒤적거리고 누구와 위챗으로 얘기도 나누고 그럴라치면 하루종일 컴 앞에 앉아있어도 마침부호를 찍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면 된다”는 말도 집중력을 념두에 두고 한 말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집중력은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지 모른다. 길림신문
29    탈팽이 평전 □ 한영남 댓글:  조회:300  추천:0  2020-07-13
프롤로그   해빛 기껏 찬란하고 개울물이 조졸거리며 흐르는 어떤 숲속에서 달팽이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느리지만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기여다니며 열심히 먹이를 찾고 열심히 사랑을 찾아 열심히 서로의 살속을 파고들며 그렇게 달팽이들은 번창하고 있었다   달팽이들은 태여나면 바로 먹이를 위해 분주해야 했고 섹스를 위해 요란해야 했다 식욕과 성욕을 빼면 달팽이들은 살아있을 리유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그 분주함과 요란함은 느릴망정 박수를 받을 만했다 1   그러던 어느 하루 이상한 달팽이 한마리가 태여났다 이 이상한 달팽이를 다른 달팽이와 구분해서 탈팽이라고 불러주자   탈팽이는 다른 달팽이들이 먹는 소리에 서로 군침을 흘릴 때에도 먹이 찾는 방법을 배우느라 땀 뻘뻘 흘릴 때에도 가만히 앉아 사색하길 즐겼다 친구들이 이성에 눈을 떠서 그 뜨거운 육욕에 헐금씨금할 때에도 골살을 쪼프린 채 자기 생각에만 골똘했다   탈팽이는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산다는 게 참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탈팽이는 뭔가 큰일을 위대한 사업을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가 무엇을 해야 할가 무엇을 해야 할가   탈팽이는 고개를 잔뜩 내밀어 세상을 두리번거렸다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탈팽이의 고개끝에 달린 눈에 나무 한그루가 덮쳐들었다 나무는 하도 아름드리여서 탈팽이한테 처음에는 산처럼 보였다 거대한 산이 가로막는다고 생각하고 우로 우로 자꾸 보다가 그것이 한그루 굉장히 거대한 나무라는 것을 탈팽이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래 바로 저것이야 저 정도면 충분히 내 꿈과 맞먹을 수 있지   탈팽이는 꿈이 어벌차게 컸던 탈팽이는 그 거대한 나무를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2   야 임마 정신 차려 네가 저 산을 정복한다고 그래 네 말 대로 나무라고 하자 근데 저 아득한 나무를 네가 정복한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꿈 좀 깨라 너 혹시 요즘 잘 먹지 않더니 정신이 돌았잖아   달팽이무리에서는 온갖 비웃음 비아냥 비꼼들이 터져나왔다 강물이 오염되여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였을 때보다 더 심하게 떠들어댔다 바보 천치 백치 병신 등신 정신병 팔부 하여튼 달팽이 동네에서 갖다붙일 수 있는 온갖 너절한 이름들이 전부 탈팽이한테 왕관처럼 씌여졌다   그래도 난 할 거야   그래 어디 콱 해봐라 하다가 뒈져봐야 정신차리겠구나 아마 시작하기도 전에 나무 밑둥이에 도착하면 벌써 포기할 생각이 날 거다 떨어지면 등에 짊어진 집까지 박살나고 말걸   그래도 난 할 거야   여보게 자네 그러는게 아닐세 먹거리 풍부하지 언제든지 할짓 다 할 수 있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나 이제 좀 몹쓸 꿈에서 깨여나세   그래도 난 할 거야   3   준비랄 것도 없었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고 행동은 곧 일기로 적혀졌다   모년 모월 모일 아침 일찍 나무를 향해 발걸음을 떼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모년 모월 모일 하루종일 나무를 향해 힘차게 나가다   날자들은 마른 나무잎처럼 떨어져 나뒹굴었고 나무를 향한 탈팽이의 발걸음은 여전히 힘찼다   하루는 이틀로 이어지고 이틀은 사흘로 계속되고 일주일은 한달이 되였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그날이 왔다   탈팽이는 끝내 아름드리 나무 밑둥이에 도착했다   와 정말 해내는구나 신기하네 저런 조그만 녀석이 일을 내다니 어이쿠 아직도 시작도 못했잖아 힘내 넌 될 거야 포기해 네가 정복하기에 너무 아름드리야   온갖 소리들이 란무해도 탈팽이는 어떤 소리에도 귀를 빌려주지 않았다 단 소리에도 자만하지 않았고 쓴소리에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려문 입술이 부르텄지만 꿈을 향한 미소는 여전히 남실거렸다   4   아름드리 나무의 주변을 둘러보는데도 한나절이 걸렸다 드디여 안성맞춤한 위치를 정했고 드디여 력대급의 등반이 시작되였다   탈팽이, 달팽이들의 자존심을 걸고 아름드리 나무에 도전   달팽이 세상에서는 톱기사로 크게 다루었고 스타라면 오금을 못쓰는 몇몇 소녀달팽이들은 눈을 감은 채 열띤 상사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탈팽이는 신들메를 단단히 동여매고 장비들을 꼼꼼하게 점검한 뒤 위대한 등반을 시작했다   평지를 갈 때보다 또 달랐다 등반이란 매달리는 힘과 올라가는 힘을 나누어 써야 했다 오로지 앞으로만 가던 것과는 달리 떨어지지 않기 위해 부둥켜안아야 했고 안고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올라가야 했다   땀을 닦을 만한 손수건 한장 건네주는 친구도 없었지만 탈팽이는 여전히 입술을 옥물고 자신만만하게 등반을 계속했다 탈팽이의 온몸으로는 땀방울들이 송알송알 맺혔다가는 무겁게 아래로 떨어졌고 그런 땀방울에 얻어맞은 어떤 달팽이는 비가 오는가 해서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이제 다른 달팽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을 만큼 높게 올랐고 이제 다른 달팽이들은 다른 새로운 뉴스에 관심을 가졌고 탈팽이의 행보와 생사조차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5   한낮의 자글자글 끓는 태양을 피해 탈팽이는 음달진 쪽으로 등반을 했고 한밤의 어둠이 익숙치 않아 서느러운 달빛을 등에 지고 옴지락거리기도 했다   목이 마르면 나무에서 흐르는 수액으로 타는 목마름을 달래고 배가 고프면 나무의 진디물들로 허기를 달랬다 새벽에 정말 곤하면 나무의 상처인 옹이속에 들어가 잠시 심신의 피곤을 달래곤 했다   이제 풀벌레들도 오르기 저어할 만큼 이제 호랑나비들도 오르지 않을 만큼 이제 일부 산새들도 앉기 싫어할 만큼   아래를 굽어보면 모든 것이 고요해보였다 어쩌다 제 방귀에 놀란 토끼가 불쑥 도망치는 바람에 와뜰 놀라기도 했지만 숲속의 그 모든 소리들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바람만이 이따금 먼곳의 소식들을 전해줄 뿐이였다 그런 소식들은 탈팽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였고 그래서 탈팽이는 듣는 순간 흘려버렸고 흘려버리는 순간 잊어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탈팽이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가 이 나무를 정복하고는 또 무엇을 한단 말인가 정말 친구들의 말이 맞는 건 아닐가 선배들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나   그리고 그보다도 못 견디게 괴로운 건 외로움이였다   누구하고도 말할 수 없었고 누구하고도 나눌 수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혼자만의 것 커다란 바위덩이 같은 외로움이 쿵 탈팽이의 작은 몸을 후려쳤다 앗 탈팽이는 그만 하마트면 떨어질 번했다   갑자기 딱따구리를 통해 자기 탈팽이한테 사랑을 고백해오던 그 예쁘장한 소녀달팽이가 눈물 가랑가랑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안돼 이건 아니야 이러면 안되지   탈팽이는 흔들리는 자신이 미워 큰소리로 웨쳤다   난 꿈을 가진 탈팽이란 말이야 누구도 무엇도 내 꿈을 가로막을 순 없어   6   탈팽이는 정말 오래오래 등반을 계속했다 이제 세상은 탈팽이의 존재를 잊었고 탈팽이 역시 숲속의 이야기가 가물가물해졌다 탈팽이한테 숲속의 그 아름답던 이야기들은 할머니가 들려주던 먼 옛말이였다   올려다보면 아직도 아득한데 내려다보면 아래도 아득했다   나무 우듬지에 이르면 이 나무를 정복하는 거야 거기에 아무 것도 없어도 좋아 무엇을 바라고 시작한 것이 아니니깐 다만 이 나무를 정복한다는 그것이 내 꿈이란 말이야 그것으로 충분해 충분하고말고     에필로그   계절은 나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고 세월은 나무의 혼을 빼앗기 시작했다   꿈을 가진 탈팽이 하나가 있었다 식욕과 성욕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었는데도 자기 생각을 고집하기 즐겼고 어느 날 문득 아름드리 나무를 정복한다고 도전장을 내민 그런 탈팽이 하나가 있었다   독수리 한마리가 그 석쉼한 소리로 왜 저 나무 꼭대기에 달팽이 하나가 말라 죽어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라고 했을 때에도 달팽이들은 탈팽이를 전혀 기억에서 떠올리지 못했다   다만 언젠가 사랑을 고백했던 그 소녀달팽이만이 남편이 사준 목걸이를 걸고 거울을 보다가 독수리를 취재하는 뉴스를 들으며 아빠트 창문너머로 멀리 아름드리 나무를   곁눈질 한번 했을 뿐이다 연변일보 
28    끝날 줄 모르는 백색전쟁 댓글:  조회:681  추천:0  2019-11-19
[두만강칼럼] 지난 세기말에 급부상한 백색공포는 비닐봉지에 포위된 인간들의 아우성이였다. 사용하기 편리하고 단가도 비싸지 않은 비닐봉지는 세상에 나오자 마자 대뜸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전에 사용하던 비닐가방, 그물가방, 풍천가방 등은 하루아침에 거리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되여 그야말로 력사무대에서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신 엷고 하얀 비닐봉지(처음에는 요즘처럼 다양한 색상의 비닐봉지가 아니라 오로지 하얀색 한가지 색상 뿐이였음.)가 일상의 생필품으로 자리 잡았다. 남새를 사도 육류, 어류 등 시장에서는 모든 것을 비닐봉지에 담아주었고 지어 상점에서 공책을 사도 연필 한대를 사도 비닐봉지에 담아주군 했다. 그러자 삽시에 세상은 하얀 비닐봉지투성이로 변해버려서 사처에 비닐봉지가 날리기 시작했다. 전선줄에 휘감기고 가로수에 휘감기고 길가는 행인의 뺨을 후려치는가 하면 승용차 앞창문에 턱 달라붙어 뜻밖의 사고를 빚어내기도 했다. 이제 비닐봉지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 만치 되여버렸다. 그런데 그 비닐이 자연분해되여서 무기물로 돌아가기까지 저그만치 500년이 걸린다고 한다. 물론 요즘은 이 백색공포의 위해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일회용 사용을 절제하고 비닐봉지 대신 종이봉투를 사용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전세계적으로 아직도 년간 5천억개에서 1조개의 비닐봉지가 소비되고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우리는 어마어마한 비닐봉지의 포위 속에서 호흡하고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백색공포, 우리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시점이 되였다. 새 세기에 접어들면서 백색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소금과의 전쟁은 고혈압의 최대 적으로 각인된 소금 특히 나트륨과의 맞대결이였다. 소금 즉 염화나트륨에서 나트륨이온은 고혈압을 유발하는 가장 적확하고 실효적인 공로자인 셈이다. 소금섭취량을 줄이자는 목소리 역시 아주 오래전부터 불거져왔다. 세계보건기구에서 권장하는 1일 나트륨 섭취량은 2그람이다. 서구유럽인들의 1일 평균 섭취량을 보면 대략 1.5그람인데 비해 우리 조선민족의 경우 4.6그람 정도라고 한다. 이는 찌개류, 김치류, 젓갈류를 즐겨 먹는 우리들의 식생활패턴과 직접 관계되는 사안이다. 한국의 경우 라면소비량이 세계 으뜸을 차지한다. 그런데 그 라면 1봉지의 나트륨함량은 약 1.7그람이란다. 환언하면 라면 1봉지만 먹어도 그 하루 나트륨섭취량을 충분히 완성하는 정도라는 계산이다. 그외 인스턴트(즉석) 식품 속에 함유된 나트륨은 계산에 넣지 않고도 말이다. 요즘은 저나트륨염이라는 것이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실정이다. 말 그대로 고혈압에 좋지 않다는 염화나트륨의 량을 줄이는 대신 인체에 거의 무해하지만 짠맛을 가지고 있는 염화칼륨이 다량 포함된 소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예전에는 고혈압, 심장병, 당뇨병을 일컬어 ‘3대 부자병’이라고 했다. 운동을 잘하지 않고 출근해서는 신문이나 뒤적이고 차물이나 마시는 일부 간부들에게나 있을 법한 병이라는 말이다. 그 ‘3대 부자병’의 근원이 운동부족, 부적절한 식사패턴 등이라고 하니 그냥 비아냥조로 말했던 것이 적중한 셈이다. 짠맛이 없는 음식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모든 음식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는 조미료에서 소금은 으뜸이다. 짠맛이 들어가지 않으면 별의별 조미료를 다 집어넣어도 음식맛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바로 그 짠맛이 고혈압에는 직격탄이라고 하니 세상 오래 살려면 조심하는 게 상수가 아니겠는가. 이제 식탁에서 또 다른 백색전쟁이 펼쳐지고 있으니 바로 설탕과의 전쟁이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는 설탕이 비싸고 배급제여서 사카린을 많이 사용했었다. 소학교 때 하학해서는 식장문을 아무리 열어보아도 먹을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귀동냥으로 얻은 방법 대로 ‘과학실험’을 시작한다. 먼저 물 한고뿌 떠서는 거기에 사카린을 두알 내지 세알 집어넣고 잘 휘젓는다. 그리고 거기에 식용소다를 반숟가락 정도 넣고 또 휘젓는다. 그 다음 식초를 몇방울 떨어뜨린다. 그러면 삽시에 하얀 거품이 부글거리다가 물고뿌벽에 거품들이 송알송알 맺힌 채로 조용해진다. 일명 우리 끼리 통하던 ‘사이다’였다. 나중에 사카린이 몸에 나쁘다고 식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걸 대신한 것이 바로 설탕이다. 눈덩이처럼 하얗고 깨끗하고 정갈한 설탕은 이래저래 쓸모가 많았다. 사탕도 귀하던 시절 첩약이나 쓰거운 환약 따위를 먹고 구역질이 날 것 같으면 할머니는 설탕을 한숟가락 떠주군 했다. 그 때 먹던 그 단맛! 그것은 천상의 맛이였다. 그 맛을 잊지 못해 하학하면 식장에 매달려 설탕단지에서 설탕을 부지런히 축내군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그렇게도 아끼던 설탕 담는 유리단지를 깨먹고 말았다. 그 때 내 어린 생각에도 그 유리단지는 ‘국보급’은 아니더라도 우리 집 ‘가보급’에 해당되는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비싼 그릇이였다. 그것을 깨먹은 나는 그 좋은 설탕맛이고 뭐고 새까맣게 잊은 채 바로 그 위기를 모면할 궁리에만 골몰해야 했다. 다 지나간 얘기지만 설탕은 귀한 것이였고 결혼잔치라도 치르는 경우 동네 이웃들 설탕표를 얻어서 구매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던 시절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설탕이 당뇨병의 적이라고 밝혀졌다. 완치가 불가능한 불치병의 하나이고 걸리면 죽어야 끝난다는 그 무서운 당뇨병을 설탕이 유발하다니. 설탕찬미주의자들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물론 최근에야 영국, 미국의 학자들이 다년간 반복적인 실험을 거쳐 당뇨병과 설탕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밝혀냈지만 아직도 설탕 하면 바로 당뇨병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당뇨병은 그릇된 생활방식이 제일 큰 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 민족은 자고로 ‘백의겨레’라고 불리워왔고 우리 또한 그것을 큰 자랑으로 삼아왔다. 푸른 하늘에서 여유롭게 두둥실 떠있는 하얀 구름, 백사장으로 하염없이 밀려오는 하얀 파도, 가을 석양빛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억새… 하얀 저고리, 하얀 수건, 하얀 코신… 우리 민족만이 서로 통하고 공감하는 이 하얀 색은 그 순결함과 그 정갈함과 그 순수함으로 때묻지 않은 삶을 지향하는 우리 민족의 대표색으로 일컬어왔다. 그러나 하얀 색은 우리 인간들의 건강만으로 볼 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존재이다. 하얀 비닐봉지가 그렇고 하얀 소금이 그렇고 하얀 설탕이 그렇다. 절제해야 하고 경계해야 하고 견제해야 할 대상들이다. 2020년 경자년이 바야흐로 저 얼음 우로 미끌어져오고 있다. 모든 인사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건강문안을 미리 올리면서 새해에는 정말 건강하게 건전하게 보다 행복한 삶을 꽃피워가기를 기원해본다. 길림신문
27    [단편]손톱 댓글:  조회:453  추천:0  2019-07-15
손톱 한영남   1. 손톱이 문제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치솔질하고 아들 깨워 이불 개고 밥 먹고 그럴 때까지도 아무 문제 없었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U 턴해서 출근길에 오르면서부터 그는 오른손 새끼손톱이 별스레 고분고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운전중이라 딱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매끈하지 않고 약지의 옆구리 쪽을 자꾸 찌르는 느낌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왜 그런지 보려고 속력을 죽이는 순간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아우성친다. “에라, 회사 가서 보자.” 그는 체념하고 운전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출근해서는 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커피 마신다고 그것도 종아리도 어깨도 얼굴도 어디를 봐도 이쁘기만 한 성양이 타준 커피를 마시며 유난스레 포즈를 한껏 취하느라 했더니 갑자기 잊고 있었던 새끼손톱이 쿡 약지 옆구리를 찔러댔다. 하마트면 커피를 쏟을 번했으나 아닌 보살 하고 슬며시 커피잔을 왼손에 바꿔쥔 다음 문제의 새끼손톱을 슬쩍 내려다 보았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자라났을가. 남자의 손톱답지 않게 갸름걀죽하게 생긴 녀석은 언제 어디에 부딪쳤는지 끝부분 절반 쯤이 부서져나갔고 남은 부분은 억척스레 자라면서 약간의 변형이 생기고 있었다. 그 부분이 이상하게 약지 쪽으로 발전해볼 양으로 잔뜩 기울기를 시작했고 약지 쪽 끝머리는 얼마 쯤 날카로워있었다. “응, 그래서였군.” 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왜 그렇게 되였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떠올라주지 않았다.   “강선생님, 타이곤이라고 들어보셨어요?” “타이곤? 그게 뭔데?” “수컷 호랑이와 암컷 사자 사이에 태여난 동물 타이곤.” “아아, 그거. 근데 그게 왜?” “헷갈려서요. 이거 전에도 몇번 찾아봤는데 자꾸 헷갈려요. 벌써 오늘 두시간째 이것만 검색하고 있어요. 호휴~” “우리 말에 노새와 버새라는 말이 있지. 암말과 수당나귀 사이에 태여난 동물이 노새이고 수말과 암당나귀 사이에 태여나면 버새라고 하는. 그래서 버새도 노새도 새끼낳이는 못한다고 남자구실 못하는 사람을 놀림조로 일컬으기도 하지.” “네. 그건 노새와 버새에 대한 거구요. 타이곤은…” “잠간, 내 찾아봄세.” “어, 여기 있군. 자자, 한번 정리를 합시다. 타이곤은 수컷 호랑이와 암컷 사자 사이에 태여난 동물이고 라이거는 수컷 사자와 암컷 호랑이 사이에 태여난 동물이며 리티곤은 수컷 타이곤과 암컷 사자를 교배시켜 만들어낸 잡종이다. 또 리라이거는 수컷 사자와 교접할 수 있는 암컷 라이거이고 티라이거는 수컷 호랑이와 교접할 수 있는 암컷 라이거이다. 근데 뭐가 이렇게 복잡하지?” “제 말이 그 말이예요.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왜 사람들은 자꾸 잡종을 만들어내는 거죠?” “심심하겠지.” “심심해서, 심심해서 복제양 돌리를 만들어내고 복제강아지 복제원숭이를 만들어내나요?” “음음… 어어… 아마… 그렇… 겠지…” “자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괜히 동물사전이나 쓸데없이 두꺼워지잖아요.” 그는 갑자기 이상해진 새끼손톱을 어떻게 조리할가 유심히 살피며 뜨적뜨적 말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그건… 발전이지… 퇴보는 아니거든…” “뭐든 다 복제 가능해도 사상은 복제하지 못할걸요.” “사상을 왜 복제하지 못하지?” “의미가 없으니깐요.” “그렇지. 그렇겠지.”   그는 늘 그랬다. 누구의 말이든 듣게 되면 다 일리가 있어보이고 세상사람들의 말은 거의 절대진리처럼 느껴지군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였는지 모르지만 왠지 자기는 정말 굉장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아주 굉장히 새롭고 굉장히 단단한 어떤 리론(그것을 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이랍시고 척 꺼내놓는데 다른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그만 그 견고한 리론들이 다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그는 번마다 패배자로 되여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남의 말에도 척척 멋진 말들을 리론처럼 막 쏟아내지 않는가. 그들의 말들은 그대로 진리 같아 보였고 자기는 형편없이 초라한 존재로만 느껴졌다. 사상을 복제하지 못한다는 성양의 말은 얼마나 믿음직하고 론리적이고 진리 같아 보이는가. 그래서 지금 그는 성양의 말에 조금 수긍이 되면서도 사뭇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계집애가 서른다섯이면 시집이나 갈 것이지 쓸데없는 말들에 관심을 가져가지고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전을 만들면서 단어를 어떻게 비켜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걸 몇시간이 아니라 며칠이 걸리더라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하는 게 사전 만드는 작업이 아닌가. 선인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부분들은 참고가 되여 쉽지만 전혀 공백으로 있는 부분을 새로 추가해야 하니 진짜 해골 아파지는 작업이 사전편찬 사업이다. 다들 뇌즙을 짜는 일이라고도 했다. 해봤던 사람들은 다시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고 안해본 사람은 그게 뭐 그리 어려우냐, 세상사람들 자기 하는 일은 누구나 다 바쁘다고 하는 법이거든 하며 픽픽 웃기도 한다. 웃어도 좋다. 모르는 사람이므로 용서가 되는 것이다. 저그만치 3천페지짜리 사전 만든다고 생각해보라. 아니 상상만 해보라. 그게 어디 애들 장난인가. 그래도 여기 꾸욱 박혀서 이 지긋지긋한 작업을 꾸준히 하는 까닭은 어쩌면 딱히 다른 일도 할 줄 모른다는 리유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피커와 스티커가 전혀 다르듯이 노새와 버새가 다르듯이 타이거와 타이곤 또 라이거와 라이곤 역시 다른 것이다. 객관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리라. 그런데 정말 그런 새로운 품종 내지 잡종이 왜 필요한 걸가.   “강선생, 담배 한대 피우고 계속 하시지요.” “그럴가요?” “하루이틀에 끝내는 일도 아니고 뭐…” 휴계실에는 담배연기가 자오록하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니 담배군들은 휴계실에서만 피운다. 복도에서도 금연이다. 담배군들은 이것도 인권침해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한테 해를 끼치는 행위야말로 인권침해라는 것이다. 사전 만드는 골치 아픈 일을 하면서 담배도 시름 놓고 피우지 못한다는 게 그는 정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녀자들은 여차직하면 미투로 걸고 들었고 담배 피우지 않는 남자들은 걸핏하면 인권을 들고 나온다. 뭐든 남들이 말하는 것은 다 도리가 선명하고 진리처럼 번뜩인다. 그래, 당신들 다 정확하고 정확하고 정확하고 정확하다구. 나 같은 바보들만 오류덩이다. 이제 됐나? 그저 강철웅 자기만이, 쇠때곰이란 별명이 붙어있는 자기만이 무엇이든 납득이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다들 그렇고 그렇게 쉽게 넘어가주는 일도 그한테는 자못 어려운 일이였다. 휴계실 TV에서는 동물세계가 한창이였다. 그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사자들이 줄말 한마리를 집중공격해서 포획한다. 아주 작전이다. 포복전진도 하고 앞에서 막기도 하고 뒤에서 쫓기도 하면서. 줄말은 단말마적인 발악을 했으나 끝내는 사자들의 먹이가 되여 힘있는 다리만 힘없이 허공을 삿대질한다. 그리고 사자들이 한창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는 독수리들이 빙빙 돌며 기회를 엿보고 멀리 쯤에서는 하이에나들이 틈을 노린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짐승 중 하나가 하이에나이다. 늘 다른 짐승들이 힘겹게 잡아놓은 사냥물을 끼여들어 가로채기도 하고 먹다 남은 부패한 것을 먹기도 하는 아프리카 짐승이다. 아주 드물게 사자도 공격한다는 하이에나는 그야말로 소름 돋는 동물이 아닐 수 없다. 생긴 것마저 개처럼 멋지지도 않고 승냥이처럼 사납지도 않으며 털색갈조차 아주 음산하게 생겨먹었다. 남의 식사상에 끼여들기는 독수리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독수리들은 스스로 뱀도 사냥하고 들토끼도 사냥한다지만 지금 저 아프리카의 독수리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유독 다른 짐승의 사냥물만 넘본다. 그래서 사자 같은 큰 짐승들이 배를 불리거나 혹은 지나친 방해 때문에 시끄러워서 가버리면 대뜸 사냥물을 차지하고는 포식을 한다. “하이에나들과 독수리들이 서로 싸움이나 벌리지.” “하필 잘 살아가는 녀석들을 왜 싸움 시켜요?” “나는 저놈들을 싫어하니깐.” “강선생 싫다고 해도 저놈들끼리 싸워 서로 씨가 마르는 일은 없을 텐데요.” 듣고 보니 또 일리가 있다. 그는 괜히 끼여들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괜히 끼여들어서 옆구리를 쿡 찔리고 말았다. 남들이 다 흥미진진해서 잘 보는데 철없이 끼여든 자신이 어처구니마저 없었다. 그래, 동물세계거든. 인간세상의 주변사들도 엄청 머리 아픈데 동물세계까지 내가 상관해야 하나. 내 오지랖이 너무 넓었어. 그는 내심 자책하며 약간 쑥스러워진 이 장면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걱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남들은 허허 웃고는 곧 새로운 먹이감을 발견한 하이에나들처럼 다른 주제를 열심히 뜯어대고 있었다. 미국경제가 어떻고 무역전쟁이 어떻고 이상기후가 어떻고 하면서. 멋쩍어진 그는 훌쩍 일어섰다. 담배쉼도 시간이 그만하면 비슷하게 흘러갔던 것이다.   오후 다섯시 반 퇴근인 그는 오후 네시부터가 가장 어려운 고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시 반부터 출근해서 자리에 못박힌 채 모니터에 온통 신경을 쏟아야 한다. 전에는 세시 쯤에 반시간 정도 휴식이 있었으나 야근을 취소하면서 반시간 휴식이 같이 취소당했다. 하여튼 뭐든 취소가 매우 쉬운 회사였다. 성급 사업단위인 데도 년휴가는 취소란다. 왜 그게 취소냐 하면 일이 바쁜데 언제 그런 휴가까지 다 챙겨서 쉬냐고 한다. 토요일에도 출근이다. 직원들 휴식은 아무렇게나 잘라먹어도 상관없는 모양이다. 대신 년말에 2천원 보상해주지 않나 반문한다. 그래, 그럼 당신이 그 2천원 가지고 주말마다 토요일 꼬박꼬박 출근하시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리가 잘도 먹혀들어가는 게 이 회사의 생리이다. 사전편찬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이런 일은 출판사에서나 할 일이지 연구원에서 할 일이 절대 아니다. 그런 걸 존경하는 원장님께서 퇴직 전에 국가2급이라도 되여볼 양으로 직원들 전체가 반대하고 상급부문에서도 반대하는 것을 부득부득 우겨서 국가프로젝트를 따내왔다. 지원금도 어마어마하게 내려왔다. 결국 직원들이 개고생해서 사전을 만들어낸다고 치자. 그러면 그야말로 토씨 하나 건드리지 않은 원장은 총기획자에 주필에 편집위원회 주임에 등등 생색낼 수 있는 곳에 전부 자기 이름자를 척척 박아넣을 것이고 누워서 떡 먹기로 국가2급 혹은 잘되면 국가1급까지 될 것이다. 직원들이야 고작 몇푼 안되는 돈 주며 콩알사탕으로 어린애 달래듯하면 될 터이고 상급자들은 그 덕에 자기네 성적도 올라갈 것이므로 칭찬마저 해줄 것인즉 이래저래 좋은 일만 쭈욱 기다리는 판이다. 원장은 원장이길래 그리고 프로젝트를 따내와서 국가지원금을 가져온 공신이길래 닥달질만 하면 되였다. 속도를 내라 그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일 마무리하냐. 다른 곳에서는 일 바로 하지 않아서 국가지원금 다시 되가져갔단다. 갖은 위협과 공갈이 섞인 채찍질을 해댄다. 그러고 보니 그는 회사에 출근해서도 은근히 원장으로부터 부원장으로부터 서기로부터 주임으로부터 부주임으로부터 자주 옆구리 찔리워왔었다. 그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그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저그만치 2천만원짜리 프로젝트이니까 거물급이 맞긴 맞다. 다만 정작 살손을 대서 일할 사람은 몇 안되고 대부분 어중이 떠중이들은 그 변두리를 슬슬 돌면서 언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고기부스러기라도 흘려질지, 그런 것에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일이야 어떻게 진척이 되든 말든, 사전이야 틀리게 나가든 말든 그들에게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였다. 저토록 쾌적하게 즐겁게 살아가는 족속들이 저렇게도 많이 번식되여있다니… 그는 어느 날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마치 본의 아니게 왕의 당나귀 귀의 비밀을 알아버린 리발사마냥 안절부절 못했다. 그래도 그렇달 뿐이다. 그야말로 회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말단의 말단인 그가 뭐라고 한대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마침내 그 대망의 퇴근시간이 돌아왔다. 하루의 고생 끝에 하루의 락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펼쳐져있던 갖가지 사전의 페지들에 연필이며 원주필이며 확대경까지를 부지런히 신나게 끼워놓고는 일을 마무리했다는 투의 휘파람을 가볍게 불어댔다. 휘파람소리를 내는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였다. 퇴근은 아무래도 즐거운 일이다. 원장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기야 지금 세월에 누가 그렇게 혁명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인민을 위한다던가. 정직하고 원칙성 강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서기님도 당장 래일부터 로임을 주지 않는다고 해보라. 출근이고 뭐고 바로 할 것인가. 이것이 사회생리이고 먹고 살기 위한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금전만능주의는 아니더라도 얼마 쯤의 경제적인 자극이 있어야 힘도 나고 열의도 나는 법이니깐. 휘파람으로 전 유고슬로비아 영화 《다리》의 주제가를 절반도 부르지 못했는데 벌써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럴 때는 신행태보 대종이 따로 없다. 다들 끼리끼리 술 마실 사람들은 식당으로 움직이고 데이트 있는 사람은 데이트 장소로 움직이고 그와 같이 아무도 불러주지 않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무약속인들은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따스한 보금자리에 가서 가능하다면 약주 한잔 하고 밥 포식한 뒤 TV를 시청하거나 아이를 어르거나 무얼 해도 다 괜찮다. 마누라의 귀찮은 잔소리만 뺀다면. 차에 오르며 너무 힘주는 바람에 차문 쪽에 몸이 슬쩍 치였는데도 그는 감각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동을 걸었다. 오케이! 브라보! 오늘따라 시동도 가뿐하게 잘 걸린다. 전날 수리부에 다녀온 덕이리라. 룰랄라다. 저녁에는 모처럼 맥주라도 한잔 때려야겠다. 낮 동안 두어 서너 네댓 여섯일여덟번 쯤 어떤 어떤 일에 쓸데없이 끼여들었다가 수많은 진리와 원칙들에 시퍼런 퉁을 맞았던 일이 까아만 점들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붉은 신호등이 들어온다. 젠장! 붉은 신호등은 참 이상했다. 한번 걸리기 시작하면 다음 신호등도 그 다음 신호등도 계속 걸린다. 푸른 신호등일 경우에는 일사천리로 그야말로 거침이 없어 지어  붉은 신호등이다가도 그의 차가 다가가면 바로 바뀌여지면서 기분을 즐겁게 해주지만 아닐 때는 아니다. 묘하게 일이 조금씩 꼬여가는 느낌이다. 이럴 때는 노래가 최고다.   그 사람을 부탁해요 나보다 더 사랑해줘요  보기에는 소심해보이지만 알고 보며는 괜찮은 남자예요  눈치 없이 데이트할 때 친구들과 나올 거예요  사랑보다 남자들 우정이 소중하다고 믿는 바보니까요  술을 많이 마셔 속이 좋지 않아요  하도 예민해서 밤잠을 설치죠  밤에 전화할 때 먼저 말없이 끊더라도  화내지 말고 그냥 넘어가줘요    왁스의 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좀 오래된 노래인데 언제부터 이 노래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냥 처음에는 슬픈듯한 노래가 나쁘지 않아보였고 듣다가 듣다가 노래 가사를 검색해보았고 그러다 보니 깊이 꽂히게 된 노래이다. 어쩌면 자기 강철웅 자신을 쓴 노래 가사가 아닐가 싶을 정도로 그의 모든 것이 들어맞는 노래이다. 같이 따라 흥얼거리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노래 가사가 별스레 더 파고든다. 어쩌면 끼여든 녀자를 원망 한마디 하지 않고 오히려 남자의 구석구석을 챙겨주는 바보스런 전 녀친이란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없지. 어떤 바보가 떠난 남자를 저토록 챙겨준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노래 가사는 작사자 내지 세상사람들의 희망사항을 담는 경우가 많다. 사랑에 끼여든 사람을 제3자라 했던가. 이제는 그런 제기법도 아주 고삭은 어투가 돼버린지 오래다. 그런데 세상 남자들이란 다 세상 녀자들이 그래주었으면 하고 게걸스런 침을 한발씩 흘린다. 그런 남자들이 자기의 전 녀친을 저렇게 챙겨줄 수 있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지. 암 그렇구 말구. 혼자서 노래에 심취해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내 이 소중한 저녁을 그렇게 허투로 흘려버려서야 쓰나. 더구나 금요일 저녁이 아닌가. 물론 래일 토요일 출근해야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대개 토요일 출근이란 약간 형식적인 것으로 좀 늦게 나가도 되고 사정이 있어 청가를 맡아도 대개 허락이 떨어진다. 그런데 너무 소란스럽다. 대체 뭔 일이길래 저런다냐? 신호등이 바뀌고 뒤에서 클랙슨이 아우성쳐도 막힌 길이 뚫릴 가망이 있어보이지 않는다. 젠장! 할 수 없이 내려서 스적스적 다가가본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아낙 하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잔뜩 게거품을 물고 있다. 비쩍 말라보이는 차주인은 화를 내야 하는데 말할 틈새를 찾지 못한다. 아낙 혼자서 떠드는 형국이다. 알고 보니 차가 서있는데 아낙이 다가와 광고전단지를 끼우려다 말다툼이 벌어진 모양이다. 벌써 몇년 전부터 법으로 금지되여있는 그런 행각을 이 바쁜 금요일 저녁 퇴근길에 용감하게 행하다니. 구경군들은 집으로 갈 일이 바쁘지 않은지 팔짱을 지른 채 구경만 한다. 그런데 아낙의 욕지거리가 아주 가관이다. 말로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아마 평생 알고 있는 걸 기어이 다 쏟아놓을 작정을 한 모양이다. 가히 살아있는 욕설사전이다. 저 아낙 불러다 욕설사전이나 편찬할 노릇이 아닌가. 출판사 분들은 다 뭣들 하셔? 입에 거품을 물다 물다 갑자기 바람이 휙 스쳐지나갔고 아낙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이다. 비쩍 마른 사내는 갑자기 말꼬리를 잡고 툭 내뱉는다. “수양이 없이!” 구경군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욕을 아주 청결차로 들입다 흡입하고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수양 어쩌구 저쩌구. 에잇 사내라는 게 불 차고 참 못났어. 그 서슬에 불이 더 확 붙었는지 아낙이 팔소매까지 거두며 달려든다. 여차직하면 큰길에 드러눕기라도 할 기세다. 보다 못해 한걸음 나선다. “됐구요. 다들 그만해요. 이 바쁜 퇴근길에 어서 갈 길들이나 갑시다. 별 하찮은 일을 가지고…” 그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비쩍 마른 사내가 갑자기 돌따서더니 아낙을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기어이 한마디 팽 던진다. “막돼먹은 년!” “뭐야? 아니 지금 누굴 욕해?” 그러나 비쩍 마른 사내는 그만 차안으로 쏙 들어가서 차창을 올려버린다. 아낙이 아무리 두드려도 꿈쩍도 안한다. 갑자기 목표물을 잃은 아낙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를 발견하고 감때사납게 그한테 달려든다. “네가 웬 참견이야? 네가 다 뭔데? 어디서 굴러온 말뼉다구냐 넌!” 갑자기 들이닥친 일이라 그도 구경군들도 잠시 얼빠진 모양새다. 누구도 나서서 말릴 념을 못했고 그는 더구나 뭐라고 했으면 좋을지 몰라 입을 헤 벌리고 말았다. 아낙의 손가락이 당장 너무 놀라 헤 벌어진 그의 입안으로 들어올 기세이다. 이런 젠장! 내가 왜 끼여들어가지고는. 친구의 옆구리도 아니고 참… 그러나 이미 놓아버린 활시위이다. 그는 급히 자기 차로 걸어갔다. 아낙이 덮칠듯 다가와 그의 옷소매를 거머쥔다. 투둑!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지는 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는듯했으나 경황이 없어진 그는 아랑곳할 사이도 없이 반달음에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 역시 비쩍 마른 사내를 본받아 차안에 쏙 들어가 차창을 올려버렸다. 차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낙은 몇걸음 따라오는가 싶더니 포기하는 눈치이다. 이 더러운 습관을. 이 미친 습관을. 왜 나서기를 나서냐 자꾸. 그렇다고 해결을 시원하게 보기나 하는가. 사람이 그만큼 끼여들었다가 망신당하고 옆구리 찔리고 했으면 좀 정신을 차려야지. 반팔십 나이나 어린가. 갑자기 아늑한 보금자리 어쩌구, 맥주 어쩌구 하는 생각들이 바람결에 내뿜은 담배연기 모양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차를 거칠게 운전하는데 갑자기 그동안 잊혀졌던 새끼손톱이 또 약지 옆구리를 쿡 찔러댄다. 이번에는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 오늘 저녁에는 이 녀석을 손 좀 봐야지. 암 봐야 하구 말구. 아니 근데 어디서 저런 아낙이야? 그리고 그 비쩍 마른 사내는 또. 내가 더러워서 못산다. 내가. 그는 다짜고짜 같은 회사 동료 김선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디요? 나 지금 거기 갈 테니까 기다리오. 아니아니, 됐고. 반드시 갈 거요. 지금 당장.”   2. “아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모범남편님께서 여기까지 오시게 되였습니까?” “쓸데없는 말은 쓰레기통에 던지고 쓸데있는 말도 잠시 뒤 술안주로 남기고 일단 맥주부터 한잔 따르라구.” “어어, 강선생님 이건 반칙입니다.” “레드카드 받아도 지금은 맥주야.” 저으기 단호한 그의 표정에 모두들 일순 놀라는 표정이였다. 그러나 대개 남자들은 술상에서 만큼은 술 마신 뒤 뒤따를 마누라의 엄청난 잔소리 따위를 개의치 않는다. 특히 타인에게 나타날 그런 잔소리들은 오히려 술상 남자들의 기고만장을 부채질해주는 꼴이 되여서 서로 대신 상대방 마누라의 잔소리를 들어라도 줄 양으로 까치배보다 더 흰소리를 펑펑 쳐대는 게 술상 남자라는 족속들이다. 다른 사람 술상에 끼여든 꼴이 된 그는 그러나 그런 걸 따질 계제가 되지 못했다. 지금은 당장 그 욕쟁이 아낙과 비쩍 마른 사내에 대한 불미스런 기억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뿐이다. 쿨럭쿨럭쿨럭쿨럭. 잘도 들어간다. 화김에 마시는 맥주는 맥주 그 이상으로 도도하게 흘러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먼저 앉은 친구들의 화제에 미처 섞이지 못한 그는 그들의 이야기 흐름을 애써 파악하려고 했다. “하던 얘기 계속하라구. 날 관계 말고.” 집장고도를 잘하는 화두는 지금 막 일본지진까지 흘러왔단다. 이런 게 또한 녀자들이 리해불가라고 왼고개를 트는 리유 중 하나이다. 남자들은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아서 술상에 앉았다 싶으면 세시간이고 다섯시간이고 일어설 줄 모르는가. 그러면서도 녀자들이 이야기를 나누어서 반시간만 초과하면 녀자들의 수다라고 무작정 혀를 끌끌 찬다. 끌끌 차실 혀가 따로 있지 반시간과 다섯시간을 어떻게 비교한단 말인가. 그러나 화장과 옷과 몸매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할 말이 없는 녀자들이 어찌 알 수 있으랴. 작게는 나노기술부터 크게는 저 광대무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국기로부터 해양세계, 동물세계, 과일세계, 건축세계, 관계세계, 정치세계, 력사세계, 지리세계, 금융세계, 스포츠세계 등등등등 무릇 새로운 정보겠다 싶으면, 무릇 남들이 모르는 지식이다 싶으면 곧잘 화두로 등장시키는 남자들의 세계를. 그리고 그 방대한 내용이 죄다 남자들의 화제라는 것을. “그런데 말이야.” 그가 이야기꼭지를 슬쩍 당겨온다. 오늘따라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고 속에서 부글거리는 뭔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분출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왜 잘못된 걸 분명히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건가?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제법 심각한데요? 오늘 무슨 일 있었죠?” “아참 그러고 보니 강선생님 차를 운전하고 오신 것 같은데 술 괜찮으세요?” “술맛 떨어지게 차 운전이 여기서 왜 나와? 대리운전 부르면 간단히 해결될 걸 가지고.” “인간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는데 왜 아직도 체모와 손톱은 그대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술상에 자주 앉지 못하다 보니 술군들이 제일 꺼려하는 화제가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그는 혼자말처럼 자꾸 떠들어댔다. 그만큼 술기운도 오르고 금방 겪었던 싫은 기억도 차츰 희미해지고 있었다. “강선생, 술이나 마십시다. 무슨 갑자기 다윈2세라도 된 겁니까? 대체 왜 그래요?” “군말도 많다. 대답이나 해봐.” “어엇… 술맛 다운시키면서…” “뭐래?” 그래서 말다툼이 일어난 것 같고 삿대질하며 상대방을 충분히 모욕을 준 것 같고 재수없이 중간에 끼여들어가지고 라는 말에 누군들 끼여들기가 아닌 사람 있나고 고함을 질렀던 것 같다. 화김에 마시는 술은 그래서 나쁘다. 금방 취하고 금방 필림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분히 충동적이여서 누구와도 잘 걸고들고 걸핏하면 말다툼으로 번진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까지 점치고도 술상에 끼여들었던 것은 지극히 퇴근길에서 조우했던 그 욕쟁이 아낙과 비쩍 마른 사내 탓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그는 몇잔을 더 마셨고 취기가 훨씬 더 올랐고 대리운전 불러주는 동료들을 뿌리치면서 아무리 흙이 돼도 자전거에 올라앉으면 바로 집까지 가던 이야기를 빨래줄처럼 줄레줄레 널어놓으며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왁스의 가 차안을 넘어 밖에서도 들릴 지경이였다.   드라마를 좋아하고 스포츠도 좋아해요  야한 녀자 너무 싫어하고 담배 피는 녀자 싫어하지요  절대 그 사람을 구속하지 말아요  그럴수록 그는 멀어질 거예요  사랑한단 말도 너무 자주 표현하지 말아요  금방 싫증낼 수 있으니  혹시 이런 내가 웃기지 않나요  그렇게 잘 알면서 왜 헤여졌는지  그 사람을 사랑할 때 리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헤여져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그 사람 외롭게 하지 말아요    3. 이튿날 아침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화장실 벽을 짚고 헛구역질을 하다가 문득 눈물 그렁한 눈으로 새끼손톱에 눈길을 꽂아버렸다. 약지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러대던 그의 새끼손톱은 가쯘하게 잘라져있었고 매끈하게 다듬어져까지 있었다. 출처:2018 제5호
26    [작가노트] 문학주름 만들기 댓글:  조회:495  추천:0  2019-07-15
문학주름 만들기 한영남   소학교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대뇌에 주름이 많이 생긴다고 한마디 하셔서 내 머리 속 주름은 얼마나 될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총명한 사람들을 헤아릴 때면 의례 스티븐 호킹(IQ 160 정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IQ 170으로 추정), 레오나르도 다빈치(IQ 180으로 추정) 등 명인들이 등장하군 한다. 그들은 일반인(평균 IQ 100)들보다 IQ가 엄청 높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한국 방송에 라는 예능프로가 있다. 거기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전현무, 리장원, 하석진, 김지석, 박경, 타일러 등 고정 출연자이든 그들과 대결을 펼치기 위해 도전하는 게스트이든 일제히 빼여난 문제풀이 재능을 보여주면서 뇌섹남녀들의 쏠쏠한 재미를 부채질해주고 있다. 우리 문학도들 역시 문학주름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장편소설 하나 쯤 탈고하면 굵직한 문학주름 하나 생기는 것이고 시 한수 써내면 실주름 하나 쯤 생기는 것이다. 같은 장편소설이라도 어떤 사람은 굵고 깊게 생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가볍게 스치는 정도의 흔적만 남기기도 한다. 평생 단 한수의 시만 세상에 남긴 시인도 있다. 그는 바로 그 시 한수로 이 세상에 더없이 거대한 문학주름 하나를 남긴 것이다. 지금도 가끔 이제껏 발표해온 수백만자의 글들을 되새겨보면서 나는 도대체 어떤 주름을 얼마나 만들어왔을가 생각해본다. 굵직한 문학상을 받은 작품보다 많은 독자들이 선호하는 글들은 나름 대로 괜찮은 문학주름이 아닐가 스스로 위안해보기도 한다. 맵시 있는 주름을 만드는 사람도, 투박한 주름을 만드는 사람도 다 나름 대로의 리유가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를 뿐이다. 욕심 같아서야 쓰는 글마다 세상사람들이 아우성치며 환호하는 명작들을 펑펑 쏟아내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문학주름도 몇개 안되면서 서뿌른 욕심부터 부리는 사람들도 꽤 많아진 요즘이 아닌가. 문학주름은 글을 쓰지 않고 좋은 책만 읽어도 생겨난다. 한 사람의 문학생애를 좌우지할 만한 사변적인 작품을 읽었을 때 그의 문학주름은 평소와는 결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빅토르 유고의 《93년》을 내 인생의 거대한 문학주름이라고 불러주고 싶다. 그만큼 《93년》을 읽었을 때의 경이로움에서 나는 아직 헤여나오지 못한 까닭이다. 나이가 많다고 꼭 문학주름이 굵고 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어린 문학지망생이라 해도 천부적인 문학재능이 잘 발굴되고 오성도 강한 데다가 독서 등으로 문학 관련 지식들을 두루 많이 습득한 사람은 그 문학주름이 굵고 깊을 수 밖에 없다. 같은 독서라고 해도 많이 읽은 사람과 알차게 읽은 사람은 차이가 있다. 많이 읽은 사람은 독서면의 확장으로 인한 굵은 주름일 수 있고 알차게 읽은 사람은 파고드는 정신으로 깊은 주름이 생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얘기를 늘여놓으려는 의도는 없다. 옳바른 문학주름을 만들기 위해 서로 열심히 읽고 쓰는 판에 보다 참된 문학주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요청되지 않을가 로파심에 한마디 한 것이다. 세상이 참 좋아졌다. 인터넷으로도 많은 정보량 획득이 가능해졌고 웬간한 책들도 인터넷 구독이 가능해졌다. 문제는 어떤 책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일전에 L평론가가 한국 갈 일이 생겼다면서 나한테 필요한 책 있으면 사다 주마 하는 것이였다. 기쁜 김에 최근에 검색해두고 언제든 구해서 봐야지 했던 책 세권을 부탁했다. 《하마트면 열심히 살 번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환상동물사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해마다 두어번씩 한국행이 가능한 L평론가는 갈 때마다 필요한 책 없나 해서는 그걸 사다 주는 고마운 형이다. 결국 《환상동물사전》은 이미 품절이 된 상태여서 다른 두권만 사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 책이 아마 형의 구미에도 맞았나 보다. 원문은 자기가 소장하고 나한테 복사본으로 보내온 것이다. 아무튼 고맙기 그지없는 노릇이였다. 아들 녀석이 기타 교습을 위해 음악학원에 가서 한시간, 태권도관에 가서 한시간 보내는 동안 녀석을 기다리면서 책을 읽군 한다. 역시 멋진 책이였다. 이 두권의 책은 나에게 어떤 문학주름을 만들어줄가 생각할 때면 저도 모르게 흥분하게 된다. 독서도 중요하지만 멘토를 만나는 일 역시 비상히 중요한 일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십년 공부보다 나을 때가 있다. 그 좋은 사람은 스승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으며 후배일 가능성도 있으며 오다가다 만난 스치는 길손일 수조차 있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그 누구인가가 바로 이 멘토인데 커다란 깨우침을 준 사람을 가리킨다. 때론 한마디가 굉장히 중요할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런 스승과 선배와 동년배와 후배들을 만났었다.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서 그렇지 오늘의 내가 있게 된 데는 그들의 그 ‘한마디’가 굉장히 중요한 작용을 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게 독서를 하고 멘토를 만나면서 내 문학주름은 만들어졌다. 물론 굉장히 가늘고 옅은, 또 어설프기 짝이 없는 주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 그것을 내가 세상을 향해 으시대는 자본으로 삼자는 게 아니라 그 흔적이 남겨지기까지 내가 읽은 책과 나에게 좋은 조언을 해준 멘토들한테 끈히 고마운 마음을 저버리지 않고저 함이다. 문학주름이 문학의 전부는 아니다. 문학상이 문학의 전부가 아니듯이. 그러나 그래도 성실한 문학공부의 길에서 생겨나는 문학주름을 거절하거나 부인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는가. 오늘도 나는 문학주름을 만드는 길에서 “할 수 없이 열심히 살고 있다”. 그만큼 나는 충전을 하지 않는 순간 내가 도태되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까닭이다. 출처:2018 제5호
25    '그 날처럼' 댓글:  조회:566  추천:0  2019-07-09
‘그 날처럼’ 한영남   - 자 오랜만에 이렇게 상 둥글게 모였는데 우리 ‘그 날처럼’ 한잔 멋지게 해볼가요? - 그 날이라니, 언제? 누구와 무슨 일 있었는데? - 그런 건 몰라도 되니까… 그냥 그 날처럼… - 그래요. 그럼 ‘그 날처럼’ 마십시다. 필회에 가서 젊은 패들이 모여앉은 상에서 내가 술 한잔 권하며 쓸데없는(?) 제스처를 섞으면 가장 센스 있게 맞장구를 쳐주는 친구가 바로 주향숙이다. 굳이 ‘그 날’이 언제냐고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은 대개 소설쟁이들이다.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에 더 관심이 많은 족속들이니깐. 그렇다고 시인들마다 다 알아먹는 것도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인들은 약간 뚱한 기색이다가 주향숙의 맞장구 또는 엉너리에 대뜸 그 내막(내막이랄 것도 없지만)을 간파해버리고는 곧 화제에 섞여주기도 한다. 끝까지 몰라버리는 시인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 술상은 재미있다. 그리고 그 재미의 중심에는 주향숙이가 있었다.   내가 주향숙을 알게 된 것은 벌써 20년도 넘는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어느 한번 술상에서 지인의 소개로 인사를 받게 되였는데 아주 어린애를 글쎄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시인? 이렇게 어린 시인도 있었나? 그것도 녀류시인이? 그런데 이름을 들어보니 그 어린애(?)가 바로 주향숙이라는 것이였다. 주향숙이라면 내 또래 알 만한 시인들은 다 안다. ‘오월시사’였다가 나중에 ‘연길시청년시회’로 개명된 시모임의 초기 멤버였던 주향숙. 어린 나이에 비해 속 깊은 아픈 시를 곧잘 쏟아내서 선배들을 놀래웠던 주향숙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간히 놀랐고 약간은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되였고 그 무렵 자주 열리군 하던 어떤어떤 문필회에서도 단발머리의 주향숙이를 볼 수가 있었으며 게다가 한동네에 살고 있었던 연고로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아직 결혼 전이였고 다방에서 술을 오래 마셔도 괜찮을 때였다. 그 때 주향숙에 대한 인상이라면 녀자가 좀 너무 똑똑하다는 느낌이였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누구의 말이나 그 속뜻까지 헤아릴 줄 알았고 내색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같이 아파해줄 줄 아는 시인이였다.   그런 주향숙을 문인으로서 정식 대우해주기 시작한 것은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에 참가해서부터이다. 물을 보면 코등살을 찡그리며 소녀처럼 깔깔거리고 떨어지는 나무잎 하나를 주어들고도 쇠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그 모습에서 진정한 시인적인 모습을 엿본 까닭이리라. 술상에서만 만났던 향숙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고 그래서 그런 시들도 나올 수 있었구나 싶은 모습들이 내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는 순간이였다. 그 때로부터 나는 주향숙을 문인대우 해주었다. 하긴 나보다 선배 격인데 내가 대우를 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등 떠밀려서 나 역시 차츰 평론이라는 장르를 터치하기 시작했고 잡지사에서 주향숙의 작품에 대한 평론글을 의뢰해오기 시작했다. 때론 시를, 때론 수필을. 그런 그녀의 시와 수필들을 비벼보면서 나는 거기에서 풍겨오는 상큼하면서도 풋풋한 인간향을 공유할 수 있었고 이제 주향숙이라는 이름은 내게 문우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같이 시상대에도 서보고 서로의 수상을 향해 박수도 보내주면서 우리는 문학이라는 파도를 타고 넘실거리기도 했다. 일년 가야 한두번이 될가 말가 하지만 만나면 언제나 아껴두었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꺼내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향숙이의 글에서는 늘 부모에 대한 효심이 강한 느낌으로 나를 울컥이게 만들기도 하고 순수 문학을 위한, 순수 예술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조차 엿보여서 그런 그녀의 작품을 보는 나는 은연중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알찬 문학행보에 감탄을 보내기도 했다. 잠간 그녀의 시 한수를 읊고 지나가자.   당신은 아름다운 한수의 시입니다                                            -주향숙   다정한 입김으로 씨앗 하나하나를 피워주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초록의 고운 숨결을 만져온   당신이 사랑하고 있음을 온 들판이 알아버리고 이 가을 금빛의 행복으로 설레입니다   이 땅의 아름다운 것들 그들 모두를 감동시킨 당신은 아름다운 한수의 시입니다   부모에 대한 절절함이 묻어나는 시이다. 그리고 부모님한테서 받아안은 사랑에 늘 감사해할 줄 아는 향숙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이다. 내가 애송하는 그녀의 시 가운데 한수이기도 하다.   나는 주향숙이 우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의 시를 읽게 되면 그 가슴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아픔과 고독이 고여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참말이지 그냥 짐작일 뿐이지 다는 알 수도 없고 알아버려서도 안되는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주향숙이라는 그릇은 겉으로는 도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과도 통한다. 언젠가 향숙이는 나한테 롱반진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제가 이래 뵈도 참 못된 녀자랍니다. 그 말의 의미가 이제야 비로소 조금 알리는듯하다. 못되다는 것을 내 식으로 풀이하면 못돼먹은 나쁜 녀자가 아니라 당차고 꼼꼼하며 추호도 곁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향숙이는 그런 녀류시인이다. 상큼하게 찡그려 웃을 줄 아는 조용히 휘여든 코마루를 가지고 있고 타인의 아픈 사정을 들어줄 줄 아는 하얀 귀를 가지고 있으며 눈물 그렁이는 사연에 부드럽게 공감하는 사슴의 그것 같이 섬세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고 다른 이의 한마디 말에 오래오래 상처를 받거나 두고두고 환희를 느낄 줄 아는 그런 빛나는 가슴의 소유자인 주향숙, 늘 아줌마라고 자조하지만 아직도 유리구슬처럼 부서지기 십상인 여린 심성을 가진 주향숙, 그녀의 좋은 시를 얼른 만났으면 좋겠다. 향숙아, 부탁한다. 좋은 시와 수필을…  
24    댓글문화에 태클을 걸며 댓글:  조회:663  추천:1  2019-04-23
[두만강칼럼] 위챗이 아니면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 되였다. 편지는 사라진 지 오래고 전화마저 이젠 귀찮다고 위챗으로 대화(?)한다.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보거나 목소리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나눌 경우의 어색함 등에 적당히 베일을 가려주는 위챗은 그래서 세상에 생겨나자부터 대뜸 현대인들의 필수대화도구로 되여버렸다. 그런데 위챗이 등장하면서 모멘트나 위챗방에 댓글을 다는 ‘댓글문화’가 더욱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댓글문화는 악플러들에 의해 많이 더럽혀져왔고 악플에 덧글까지를 달면서 네티즌들 끼리 싸우는 악순환이 오늘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형국이다. 그래서 선플을 달아 건전한 댓글문화를 꽃피우자는 목소리는 늘 우렁차왔다. 문학작품에 다는 댓글은 인신공격이 아닌 이상,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악플이 아닌 이상 허락되여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한마디만 다른 톤의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얼굴들이 검으락 푸르락 해서 기어이 뜨거워진 속내를 내비치고야 만다. 그러면 상대방이라고 가만있을 리 없다. 그래서 서로 옥신과 각신을 섞게 되면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마침내는 네 탈 내 탈 하다가 개니 돼지니 하는 막말에 상말까지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과연 선플만 좋다고 해야 할 것인가. 선플은 그야말로 모를 다 죽이고 동글동글하게, 게다가 속에 가시도 다 발라내고 단단한 부분들도 말짱 제거해서 그야말로 솜뭉치나 구름뭉치나 안개뭉치 정도이다. 그리고 일부 댓글들을 보면 원문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올리추기만 한다. 그것이 자기한테 어떤 계발을 주고 어떤 공감을 주었는지는 아예 괄호 밖이다. 그런 선플들에 익숙한 사람들은 누군가 비평 한마디 하면 노발대발한다. 자기는 세계 최고급 명작을 써냈는데 너희가 대작을 알아보는 혜안이 없어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건다고 여긴다. 밝고 건전하고 미래지향적인 댓글대화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근거와 리유를 충분히 헤아려보고 댓글을 달아야 진정성이 보이게 되고 그 한마디 댓글이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무작정 까기식의 댓글도 삼가해야 하지만 무작정 추기식의 댓글도 경계해야 할 바이다. 그리고 우리의 글쟁이들도 댓글을 좀 제대로 리해했으면 좋겠다. “너무 좋아요”, “너무 멋진 글이네요”, “너무 감동 먹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먹먹해서 한참 머물다 내립니다” 등등 ‘너무’가 너무 란무하는 댓글들은 정말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인사치레로 그렇게 달아준 것을 마치 유명 평론가의 장편평론인 것처럼 여기고 안하무인 격이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정말이지 그냥 인사치레인 것이다. 인사는 인사로 받아주면 그만이다. 동방식 인사로 말이다. “밥 먹었냐”는 인사를 받고 밥 사주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 우리 동방식 사고방식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하필 그런 인사를 평론 쯤으로 여기고는 오른손에 기고만장을, 왼손에 적반하장을 쳐들고 다닌다. 웃기지 않는가. 웃길 때 웃어주는 것은 매너이다. 웃기지도 않는 것을 억지웃음으로 대할 때 그것은 례의이다. 례의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간 뒤맛이 씁쓰레하다. 그런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작은 턱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것을 가리켜 꼴불견이라고 할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거늘 하물며 사람이라고 칭찬 앞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을 것인가. 칭찬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칭찬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너무 일차적이고 평면적이고 고정적이라는 데 있다. 글은, 아무리 칭찬해주어도 그 글의 품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칭찬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그 글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터넷 세상에서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마당에 지나가는 과객이 “어? 글 좋소!” 라고 한마디 했다고 해서 노벨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으시대서야 어디 될 말인가. 하이퍼시가 대세이다. 정말 좋은 하이퍼시는 우리에게 충격까지 주면서 그 막강한 파워를 자랑한다. 그런데 어설픈 아마츄어시인이 하이퍼시를 써서 모멘트에 올렸는데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무턱대고 좋다고만 하는 댓글이 엄청 달린다. 정말 그 시를 알아보았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안면이 간지러워서 달았다고 한다. 디카시 역시 대세이다. 그런데 아무나 다 생각할 수 있고 아무나 다 쓸 수 있는 디카시가 범람하고 있다. 자기의 생각을 그대로 표출하는 데까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작품으로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리해는 된다. 하지만 리해가 곧 긍정이나 찬양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아니될 것이다. 악플이든 선플이든 서로 소통하고 화목과 우의를 다지면서 더 밝고 즐겁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일들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너무(!) 많다. 아무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맞는 것이라고 단정해버리면 곤난하다. 삼척동자만이 춰주면 좋아서 헤벌쭉해진다. 머리가 명석한 지성인이라면 뜨거워지는 머리를 한달에 한번 쯤 식혀둘 필요가 있다. 예방주사를 맞듯이 퇴고도 맞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진솔한 얘기지만 이 글에 대한 댓글은 정말 보고 싶지 않다. 길림신문
23    [두만강칼럼] 도(度) 댓글:  조회:795  추천:1  2018-12-20
세상사 어느 것인들 도를 떠날 수 있으며 인생사 어느 것인들 도를 잊을 수 있으랴   우리는 일상에서 어떠한 정도나 한도가 넘어설 경우 도가 지나치다고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역시 이 도를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사자성어이다.   “물유본말(物有本末), 사유종시(事有终始),지소선후(知所先后),칙근도의(则近道矣)”(《礼记·大学》)를 우리말로 옮기면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근본과 말단, 시작과 끝의 순서를 깨달으면 도에 가까울 것이로다”는 뜻이다.   인간은 욕심이 있는 고급동물이기에 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번만 더’가 사람 잡는 경우도 많다.   화학실험을 할 때 보면 무색의 수산화나트륨 같은 염기성 용액에 역시 무색인 페놀프탈레인 용액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다가 어느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무색의 용액이 적색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한계 즉 도이다.   물리실험을 할 때 용수철을 늘구다가 어느 한정치를 넘게 되면 용수철이 회복불가가 되여버린다. 그것이 용수철의 탄성한계 즉 도인 것이다.   수학에서 플루스와 미누스 사이에 있는 수치를 0이라고 한다. 즉 0의 오른쪽으로 갈수록 플루스수치가 점점 높아지고 왼쪽으로 갈수록 미누스수치가 점점 거대해진다. 절대치가 같은 플루스와 미누스를 0이 량손에 꽉 쥐고 밸런스를 이루는 형국인 것이다. 그 0이 평면좌표에서는 바로 도인 것이다.   세상 만사만물이 도를 떠나서는 안된다.   시를 굉장히 잘 쓰는 형 한분이 계신다. 그 형과 식사를 하게 되면 재미 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밥 한 공기를 드시는데 맨 마지막에 꼭 한 숟가락의 밥을 남기시곤 했다. 왜 남기시냐 물어보니 딱 못 드시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많은 것도 아니고 단 한 숟가락이 아닌가. 그런데 그걸 드시지 못하다니. 나중에 따져보니 그것이 바로 도였다. 바로 그 한 숟가락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과식으로 약을 한줌씩 먹어야 하고 더러 병원놀이까지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우리말 속담에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이 있다.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은 안성맞춤한 날씨인 데다가 그 해의 햇쌀이 나오고 각종 과일들도 무르익어 그야말로 주머니사정까지 불룩해진 좋은 계절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날이 바로 한가위인 것이다. 계절이라는 도의 한복판에 있는 날이라 해서 이름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 사이라 해도 얼마 쯤의 거리감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른바 관계의 도인 것이다.   음악도 들어보면 남성 베이스만 좋은 것도 아니고 녀성 소프라노만 음악인 것도 아니다. 파솔라시 높은 음과 도레미파 낮은 음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야 멋진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다.   강한 것이 좋지만 너무 강한 것은 부러지기 쉽다고 한다.   중용을 고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는 얼마 쯤의 완충지대가 필요한 것이다.   마지노선이라는 말도 있다. 그게 최후의 도인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사태가 완전히 뒤바뀌는 사변이 일어나게 된다.   결벽증이 있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면 답답증을 호소하게 된다. 그 지나친 철저함이 사람을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한테 “너 혹시 물도 씻어서 마시냐?” 라고 꼬집은 적이 있다. 깨끗한 것은 선호하되 그것이 도를 넘어서면 안된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즉 도를 넘게 오래 쭈크리고 있으면 멀리 뛰지 못한다. 오금이 저리기 때문이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기절정일 때 다들 알아서 자제하고 자중하고 겸손하게 다소곳해야지 거기서 더 우쭐거리면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   도가 지켜지면 이 세상이 바로잡혀진다.   도를 지키려면 웬간한 용기를 가지고는 태부족일 수도 있다.   도,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짓거리는 이제부터라도 사라졌으면 좋겠다.   도, 거기에서 더욱 아름다운 인간미가 꽃펴났으면 좋겠다.   길림신문/한영남(시인)
22    스포츠수치의 대명사 소치 댓글:  조회:1332  추천:1  2014-02-24
스포츠칼럼 스포츠수치의 대명사 소치     스포츠가 사라졌다. 스포츠정신이 실종되였다. 소치는 무치하게도 눈치놀이에 빠져 70억 세계인들을 우롱했다. 김연아는,  진정한 챔피언이였다.  그리고 영원한 피겨녀왕이다.  소치는 전설을 용납할 가슴이 부족했다. 소치가 아무리 눈감고 아웅해도 진정한 피겨는 존재한다. 진정한 피겨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늘의 력사를 잊지 않을것이다. 수치스러워하라, 소치여! 자랑스러워하라, 연아여!/ 한솔
21    리상화의 운동화를 벗겨보니 댓글:  조회:1168  추천:2  2014-02-24
   소치올림픽이 한창이고 한국빙상녀제 리상화의 발이 화제다. 25살 처녀의 발이라고 믿기 어려우리만치 그의 발은 망가져있었다. 온통 굳은살투성이에 상처투성이인 발. 그리고 우리는 저런 발 몇개를 더 보아온 기억이 있다. 아직은 스무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의 피겨녀왕 김연아의 발, 아시아뿐아니라 유럽에서조차 그 저력을 승인해준 한국축구국가대표팀의 보증수표 박지성의 발, 전 세계가 인정하는 발레리나 강강수진의 발… 굳은살에 상처투성이에 변형까지 된 그런 발들을 보며 우리는 세계정상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로정을 상상해볼수 있었다. 연약한 녀자의 몸으로 170킬로그램의 무게를 달고 지옥훈련을 하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드디여 승리의 팡파르를 터친 리상화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노메달에 그쳤지만 열심히 훈련하고 열심히 경기에 림한 모든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참다운 스포츠정신은 결코 이기고 지는데 있는것이 아니다. 0.01초의 차이로 메달과의 인연을 접어야 했던 선수지만 시상대에 선 자신의 경쟁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다음을 약속하는 선수, 스키를 타다가 넘어져서 이제 메달의 꿈은 물론 순위조차 까마득히 밀려날것을 분명 알면서도 결연히 일어서서 다시 라스트를 향해 달리는 선수, 부상당한 경쟁적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쾌유를 비는 선수… 바로 이런 선수들이 있음으로 하여 올림픽은 빛나는것이며 올림픽홰불은 꺼질줄 모르고 활활 타오르는것이리라. 훈련과정에서 부상당해 소치에 가는것조차 포기하고 동료들의 경기를 TV로만 봐야 하는 선수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것을 잊지 말자. 동메달을 탄 선수에게 왜 메달색이 금색이 아니냐고 그 아픈 마음에 생소금을 뿌리지 말자. 서로가 등을 투덕이며 격려해주고 서로의 장점을 배우면서 같이 진보하는것이야말로 참다운 스포츠정신이기때문이다./ 한솔
20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댓글:  조회:1696  추천:0  2012-07-20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한영남 어느 조그마한 제재소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한 40대의 남자가 하루는 해고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사장은 차갑게 말했다. "이 일이 당신의 적성에는 맞는 것 같지 않소. 이제 우린 더 이상 당신이 필요 없소." 때마침 최악의 불황이라 남자는 절망했다. 앞으로 살 길도 막막했지만 황당한 이유로 그를 해고한 사장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여러 달 동안 취업도 못하고 가진 돈도 거의 다 떨어지자 그는 아내한테 말했다. "여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수백 통의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연락 오는 곳은 없어. 정말 미안해." 그런데 아내는 너무도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회사에서 당신을 채용하지 않는 거죠? 그럼 차라리 회사를 만드세요." 딱히 해결책도 없었으므로 고민하던 그는 아내의 말대로 조그마한 건축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번창하여 5년 만에 조그마한 기업으로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세계적인 체인으로 되었다. "홀리데이 인"호텔의 창업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이 세상은 사고하기에 따라 그 양상이 굉장히 달라진다. 낭떠러지에서 앞을 보면 심연이지만 돌아서서 보면 광활한 대지라고 한다. 만일 상기의 이야기에서 그 남자가 제출한 이력서를 보고 어느 기업에서 채용했다고 하자. 그럼 이 세상에 이름난 저 "홀리데이 인"호텔은 태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낙천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항상 기회가 차례지지만 부정적이고, 과거지향적이며, 비관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오던 기회도 되 달아난다는 얘기다. 반 컵 물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아는 얘기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물이 절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말할 것이요 긍정적인 사람은 "물이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암 치료에 굉장히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한 가지 치료법에 암시요법이라는 것이 있다. 뱃속 암이 생긴 부위를 뱃가죽에 볼펜으로 표시해주고 환자더러 매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는 암을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매일 수십 번씩 외치게 한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난 후 의사가 정밀의기로 검사해보고 다시 볼펜으로 요만큼 줄어들었다고 표시해준다. 그렇게 몇 달을 견지하면 처음에는 차도가 전혀 알리지 않다가 반년 쯤 지난 뒤부터는 확실히 줄어드는 것이 알린다는 게 의학전문가들의 결론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어릴 때 보았던 아동명작 한편이 생각난다. 아이가 방학을 맞이해서 매일 놀다보니 심심하기 이를 데 없는 지라 손에 닿는 대로 책 한권을 펼쳐든다. 거기에는 무기력하고, 식은땀이 나며, 아무 의욕도 없고, 제대로 먹지 못하며 잠만 자는 증상이 있으면 두 달을 못 넘겨 죽는다고 적혀있었다. 이를 본 그 아이는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진짜 드러누워 앓기 시작한다. 부모들이 깜짝 놀라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해보지만 아무 병도 없다. 결국 아이한테 물어서 원인을 알게 된 부모들은 소년이 보여준 책을 보고 그만 앙천대소를 한다. 그 책은, 수의학에 관한 것으로 소의 증세에 대해 쓴 한 대목이었던 것이다. 좋은 것만 생각해도 아름 버는 요즘인데 쓸데없는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마이너스효과까지 불러올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천고마비의 계절이 서서히 밀려가면서 백설의 겨울이 저만치서 뚜벅거리고 있다. 환절기에 건강을 챙기면서 산다는 의미를 한번쯤 다시 되새겨볼 일이다.
19    에밀레종은 얼마를 더 울어야 하나 댓글:  조회:2170  추천:0  2012-01-17
      1 수년전 미국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서 사다새(鹈鹕)사건이 터졌었다. 굳이 사건이라고까지 하는것은 본래 동물을 지극히 사랑하는 몬터레이주민들로 말하면 그것은 말그대로 일대 사건이기때문이다.  몬터레이는 사다새들의 천국이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사다새들이 갑자기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새들속에서 온역이 돌지 않나 의심하였고 환경학자들은 바다물의 오염에서 문제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과학가들은 후에 그 원인이 그곳에 새로 선 고기미끼공장이라는것을 밝혀냈다.  본래 몬터레이에 사는 어민들은 바다가에서 잡은 물고기들을 손질하면서 내장을 사다새들에게 던져주군 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다새들은 통통하게 살이 올랐고 따라서 사다새들은 더는 생존을 위해 움직일 필요가 없게 되였다.  그러나 고기미끼공장이 서면서 물고기내장은 그 공장에서 원자재로 회수해가기 시작했고 물고기내장이 돈으로의 환산이 가능해지자 어민들은 더는 사다새들을 위해 내장을 던져주지 않았다. 사다새들은 여전히 어민들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이제나저제나 내장을 던져주기를 바랐으나 그들에게 무상급식은 더는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대로 어민들이 던져주는 내장에 의해 번식해오며 이미 포획능력을 상실한 이 사다새들은 그만 굶주리다 못해 무리죽음을 당하게 되였던것이다.                             2 요즘은 세계가 지구촌으로 불리우면서 세상나들이가 가능해졌고 돈만 있으면 어디라도 관광을 할수가 있게 되였다. 각 나라는 나라대로 특색건축물, 조형물, 예술조각 등으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안깐힘을 쓰고있으며 이색적인 맛거리까지 동원하여 관광객들의 발목을 잡아보려 애쓴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나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니 그 도시의 아무 광장에서나 유유히 날아예는 비둘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나라는 그만두고 우리 나라 그 어느 도시에 가보아도 이 평화의 비둘기들의 모습은 심심찮게 볼수 있다. 그러나 그 비둘기들 역시 인간이 던져주는 빵부스레기가 아니면 생존이 어렵다고 한다.  지어 얼마전 뉴스에서는 영국 런던에서 환경문제로 더는 빵부스레기를 던져주지 못하게 하자 비둘기들이 굶어죽는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굶겨죽일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비둘기들이 영국정부측으로 말하면 일대 고민거리가 아닐수 없다고 한다.  인간들의 손에 의해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어진 비둘기들이 필요이상으로 번식하여 정부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비둘기들을 먹여살려야 하기때문이란다.  지어 어떤 사람은 비둘기들의 먹이에 피임약을 섞어먹이자는 제의까지 했으나 그것은 동물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리유로 채택되지 못했다.  인류는 스스로의 작은 허영심 만족을 위해, 이쁜 짐승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단순히 눈으로 즐기기 위해 동물들의 생존능력을 박탈하고있는것이다.                          3 어미산양은 새끼들을 훈련시킬 때 일부러 벼랑으로 내몬다고 한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훈련을 거친 산양들은 벼랑을 잘 타고 그래서 승냥이를 비롯한 다른 큰 짐승들로부터의 추격을 거뜬히 피할수 있다고 한다.  독수리의 토사물이란 말이 있다. 독수리는 하늘높이 날면서 땅에서 기여다니는 독사나 전갈 등 극독물들을 먹이로 하는데 독수리는 그런 독성이 강한 뱀이나 전갈을 먹고도 살아남는다.  알고보니 거기에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독수리들은 독사나 전갈들을 잡은후 잘 찢어 삼켰다가 그것을 토해 새끼들을 먹인다. 그것을 먹은 새끼들은 더러 쇼크도 하고 더러 죽기도 하지만 그중 살아남은 새끼들은 어릴 때부터 그런 독물을 먹어온지라 성장한후 웬만한 독은 먹어도 중독되지 않는다.  사실 독수리의 토사물은 응구(鹰呕)라고 하는데 독수리 역시 오래동안 독이 있는 짐승들을 잡아먹다나면 위낭속에 독이 뭉치게 된다. 그것을 일정 기간이 되면 토해내야 독수리가 살아남게 되고 그것을 토하지 못하면 독수리는 죽게 되는것이다. 그 독수리가 토해낸 토사물이 바로 응구로 독단(毒丹)이라고 한다.  건실한 새끼들을 키우기 위한 그야말로 사활적인 어미독수리의 노력이라 할수 있다.                                             4 인간은 날이 갈수록 신체적으로 퇴화되여간다고 한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다리가 점점 힘을 잃고 가늘어지는가 하면 컴퓨터 등에 맛들여진 나머지 손가락의 기능이 엄청 발달하고 갈수록 새록새록 거듭나는 맛나는 음식물들에 중독되여 배는 점점 커지며 두뇌가 발달하면서 머리가 굉장히 커진다고 한다.  반면 본래 거의 본능적이던 일부 기능들 례하면 면역력(기실 감기따위는 굳이 치료하지 않아도 인간 신체내부의 조절로 치료 가능하다고 한다)이 퇴화되고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일부 감지능력들도 퇴화되는 등 꽤 쓸만한 기능들이 점차 사라져간다고 한다.  언젠가 한국의 한 시인은 주둥이와 생식기만 고도로 발달한 생물이라고 인간을 걸죽하게 욕한적이 있는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즘 사람들을 사막복판에, 망망대해에, 원시림속에 내려놓으면 혼자의 힘으로는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은 신체적으로 퇴화되였을뿐만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구조대따위에 의존하려는 생각이 본능을 덮어버리고있다는 말이다.  몇해전 중국과 일본의 어린이들이 함께 삼림속에서 어른들 도움이 없이 일주일동안 자체로 숙영숙식을 챙기는 캠프를 벌린적이 있었다. 그나마 일본의 어린이들은 삼림속에서 생존을 위해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중국의 어린이들은 부모를 찾거나 아예 포기하는 모습이여서 주변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중국의 교육시스템의 허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실례라 할수 있겠다. 중국의 한족들은 그래도 방송국 취재팀이 마이크를 들이대면 자기의 생각을 대충 표달하고있는 실정이지만 조선족아이들은 부끄러움이 많아서일가 취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게 방송국 지인들의 이구동성이다.  어른들이라고 자유로울수가 없다. 조선족성인들한테 마이크를 들이대보라.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 의견따위를 뜻대로 표달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가… 조선족을 지나치게 비하하는것이 아니다. 중국교육중에서도 조선족교육은 많이 뒤처져있다는게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조선족이 소수민족가운데서 교육수준이 높고 교육질이 높다고 했던것은 이제 대단히 낡은 옛말이다.  물론 자기의 문자마저 없는 몇만명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이거나 비교적 락후한 민족들과 비하면 아직도 가슴을 내밀고 큰소리 쳐도 괜찮다. 그러나 한족들한테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민족? 축구 잘하는 민족? 어느것도 이제 중국이라는 무대에서 내노라 할만한 큰소리거리가 못된다.  시험치는 기계로만 만들고있는 교육실태, 한국을 닮아서 명문대학만을 노리는 학부모사정, 자유활동시간을 모조리 긁어모아서 학원에 보내야 시름놓는 오늘의 현황이 이런 악순환의 장본인이라는것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이런 현상을 개변해보려고 선뜻 나서지 않고있다. 아니, 아예 나서지 못하고있는지도 모른다.                            5 한족들한테는 맹모삼천의 이야기가 있고 조선족들한테는 한석봉의 이야기와 더불어 에밀레종의 이야기가 있다. 부모의 실없는 한마디로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의 혼이 에밀레종을 울리고있다는 얘기는 아는 사람은 안다.  그 에밀레종은 이제 그냥 종으로, 기념물로만 남아버리고말았다. 아무도 에밀레종이 울고있는 내지 울지 않는 리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 요즘의 우리에게야말로 에밀레종은 가장 큰 경종으로 울려 정신들을 번쩍 차리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저 에밀레종은 울리기를 그만두었다.  에밀레종이 울지 않는다고 평화롭다고 착각하면 대단히 오산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서 비둘기의 생존능력을 박탈하듯이 동심과 더불어 그들의 생존능력을 무지막지하게 빼앗고있는것은 아닐가. 떠엉—떠엉— 에밀레종이 운다. 마지막 목갈린 울음이 정처없이 흩날린다… 
18    문학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 댓글:  조회:1165  추천:30  2011-01-13
 요즘의 우리 문학지들을 보면 30대와 40대들의 글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있어 흐뭇하다. 청년작가들의 글은 우선 같은 젊은이로서 공감할수 있는 부분이 많아 독서로의 대화가 보다 편하다는 리유 말고도 나름대로 조합시킨 신선한 언어색갈과 손바닥에 놓인 수은처럼 언제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활발한 사유, 자유분방한 쟝르적 구조의 신건축학 등으로 문학지에 생기를 주입하고있기때문이다.   지역적으로 보아도 상대적으로 문학인들이 많은 연변 말고도 장춘, 길림지구, 흑룡강지구, 료녕성, 청도, 강남 등 지역으로 변별되는 그들의 문학은 활발한 조짐을 보이고있고 문학모임 같은것도 꽤 자주 눈에 밟혀와 그걸 바라보는것만으로도 조선족문학의 전망은 한결 밝다고 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방심하거나 룰랄라를 부르지 못하는 리유가 있다. 개인적으로 그 리유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오늘 이 마당에 내놓고 같이 고민해보고저 한다. 문학테두리ㅡ시대적 동보   인간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차피 겪게 되는 이런저런 시대적대환경을 떠날수 없다. 이름하여 시대적동물인것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인 창작임에도 그 창작물에 그 시대의 모습들이 얼비치는것을 어쩔수 없게 된다. 력사제재를 쓴다고 해도 오늘날의 작가의 붓끝에서 다뤄지는 력사소설이나 장편서사시 등은 오늘날의 현실모습들이 녹아있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하물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것을 쓰는 수필은 더 말할나위도 없으리라.   문제는 청년작가들이 지나치게 신변잡사에 안주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다. 아무래도 문학은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것을 다뤄야 보다 더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수 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의 시대적 높이거나 세계속의 우리의 자세 등으로 미루어보면 다소 처지고있다는 안타까움이라고나 할가. 청년작가들이 수상은 많이 하고있지만 남겨질만한 력작들이 적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이 면에서 김혁소설가의 《시인 윤동주》는 굵직한 테마에 어울리게 범민족적인 공백을 메운 좋은 본보기라 할수 있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의 명시들이거나 세계급 명편들은 하나같이 그 시대의 아픔과 그 시대를 살고갔던 인간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우리는 오늘날 력사책이 아닌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 시대의 인간군상들을 반추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한국작품만 보면서 그것만이 문학의 자대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될줄로 안다. 중국, 일본 나아가서 아시아나 미국, 유럽의 작품들을 많이 섭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을 메워가는 일만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문학인들의 바른 자세가 될것이다. 특히 중국사정을 무시하거나 경제가 아직 덜 발달했다는 리유로 5천년 문명을 자랑하는 중국의 문화를 우습게 여기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학테두리를 좀 더 넓혀야 우리 청년작가들한테서도 《보바리부인》이나 《모란이 피기까지는》 같은 작품들의 탄생을 기대해볼수 있을것이다.           작가적자세와 예술적승화   글을 쓴다고 모두 작가인것은 아니다. 작가적인 량심과 작가적인 자세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작가라 불리워도 부끄럽지 않을것이다.   어느 한 조각가는 추운 겨울날 자신의 조각품을 안고가다가 그 조각에 자신의 옷을 덮어주고 자신은 그 곁에서 얼어죽었다는 일화를 본 기억이 있다. 미친놈의 짓이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작가적인 광기가 얼마쯤 있어야 하지 않을가 싶다.   어느 한 선배가 이미 발표된 자신의 글을 보면서 토 하나 고친것까지 체크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작가란 아마 저런 사람이겠지 하고 감탄한적이 있었다. 편집사업을 하다보니 자연 남들의 원고를 볼 기회가 많게 된다. 철자, 띄여쓰기부터 론리적인 착오, 상식적인 오유 등이 란무하는 글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오타라고 가볍게, 쉽게 말하지 말자.  30년전의것인가 아주 오래된 원고를 본적이 있다. 어느 잡지사에서 이미 채용한 원고들을 자료삼아 남겨둔것인데 시간이 꽤 흘러서 이제 그것을 정리하게 되였던 모양이다. 얼핏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그 작가분은 우리 문단에서는 너무 쟁쟁한 원로작가이셨다. 그런데 그런 분이 보낸 육필원고(그때는 컴퓨터가 지금처럼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였음)인데 토 한글자가 틀린 곳을 그냥 필로 그어버리고 고친것이 아니라 종이를 원고지 한칸만큼 오려서 그우에 바르게 고친 글을 써서 붙인것이였다.   우리는 과연 오타에 대해 이토록 진지해본적이 있었던가? 자기가 쓴 글을 투고하기전에 한번만 더 훑어보아도 웬만한 오타정도는 쉽게 바로잡혀질것이다. 작가적인 마음가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것이다. 정말 보다 진지해질 법이다.   그리고 수필이라고 하는데 그냥 감동이야기만 늘여놓은 글을 많이 보았다. 그것은 말그대로 이야기이지 수필이 아니다. 수필로서의 예술적승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수기와 수필의 본질적인 구별이라 할수 있겠다.   언젠가 어떤 문필회에서 산문시와 서정수필의 구별점에 대한 질문을 받은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산문시는 아무리 산문투로 씌여졌다 하더라도 우선 시이고 서정수필은 아무리 서정이 질름질름 넘친다 하더라도 결국 수필이라고 저으기 단호하게 말한적이 있다. 하긴 뭇쟝르를 넘나드는 문학형식들도 많은 요즘이고보면 굳이 서정수필이요 산문시요 꼬집는 자체가 우스운 노릇이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보다 진지한 작가적자세와 문학글의 예술적승화는 아무래도 우리 청년작가 모두가 한번쯤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가 싶다.        독서ㅡ문인들의 영원한 갈증   “저는 중국조선족들의 글을 읽지 않습니다. 읽을 글이 없기때문입니다.”  “제가 볼수 있는 시집들은 다 보았습니다. 이제는 시를 쓰기만 해야 할것 같습니다.”  거의 24시간 메신저와 QQ를 켜두는 필자는 드문드문 답답한 친구들이 걸어오는 말들에 화딱지가 날 때가 있다.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다. 그런 친구들은 한두편의 작품을 발표하기만 하면, 또는 한두개의 문학상을 수상하기만 하면 대단한 작가나 된듯이 으시대기 십상이다. 천만에! 문학작품에는 요행수가 있을리 만무하다. 앙금이 앉은만큼에 비례된 글이 나오기때문이다.   지난 세기 90년대를 주름잡던 중국 최고의 작가들을 조사해본 결과 그 92%의 작가들이 “미쳐버린”  독서광이였다는 결론이다. 그렇다고 이 책 저 책에서 한두구절씩 뽑아 모자이크해서는 자기의 글인듯이 내놓는 어리석음은 두절되여야 할줄 안다.  어떻게 기회가 마련되여 한국에 가게 되였다. 일행은 십여명. 그런데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를 돌아보고 나온 사람들의 손에는 고작 한두권의 책들만 들려있었다. 리유인즉 책이 너무 많아서 고를수 없었다는것이다. 문제는 그것이다! 독서를 할줄 아는 사람은 책을 고를줄도 안다. 북경 왕부정서점 같은데 가서 자기가 보고싶은 책을 고를줄 아는 사람은 독서를 할줄 아는 사람으로도 통한다.   건강지도서라는 책을 보았다. 영국, 미국의 학자들이 다년간 실험을 거쳐 밝혀낸데 의하면 당뇨병과 설탕은 직접적관련이 없는것으로 나타났다. 설탕 하면 당뇨병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릇된 생활방식이 당뇨의 제일 큰 적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소금의 섭취량이 높으면 고혈압을 유발하는것으로 알려졌다. 소금의 주성분인 염화나트륨이 인체속에서 분해되면서 생기는 나트륨이온이 이 고혈압에 최대의 적으로 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요즘은 저나트륨염이라는것이 시중에서 팔리고있다. 말그대로 고혈압에 좋지 않은 염화나트륨의 량을 줄이고 대신 인체에 거의 무해하지만 짠맛을 가진 염화칼륨을 대신 넣은 소금이 그것이다. 독서를 하지 않고 이런 정보량을 어디서 얻으며 이런 정보량을 모르고 재래의 사고방식대로만 글을 쓴다면 언젠가 독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랴. 독자들도 우리와 같이 책을 보고있다. 텔레비죤과 컴퓨터로 더욱 고급스러워진 우리의 독자들에게 웃음거리로 되지 않으려면 독자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는수밖에 없을것이다. 괜히 독자들이 소경 등잔기름값 내는 격으로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젊음이란 가능성투성이라고 한다. 타기(惰?u)를 버리고 작가적인 량심과 작가적인 자세로 자신이 정한 타깃을 위한 알찬 등반이야말로 우리가 취할 바른 선택이 아닐가 생각을 여며본다. “최고보다는 최선”이라는 말이 류행어처럼 란무하고있다. 그러나 실패작이나 어수룩한 글들을 펑펑 쏟아내면서 최선을 다 했노라고 감히 말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적어도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는 문학도라면!
17    [단편] 웬만하면 발을 사랑하시지 (한영남) 댓글:  조회:1019  추천:23  2010-08-02
단편소설             웬만하면 발을 사랑하시지                           —어처구니들의 이야기                                                         한영남 망발 옛날에 그림을 아주아주 잘 그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 빈치라고 들어보셨지요? 그럼 “다 빈치 코드”라는 영화는 보셨어요? 괜찮습니다. 몰라도 됩니다. 그 사람이 그린 그림중에 “최후의 만찬”이라는 굉장한 그림이 하나 있는데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그리고 모름지기 앞으로도) 세상사람들의 찬탄을 자꾸자꾸 받는 그림이지요. 그 그림을 너무 골똘히 들여다보고 너무 골똘히 연구하고 너무 골똘히 사랑하던 한 녀자가 어느날 그 그림속에 들어가게 되였습니다.녀자가 그림속에 자원해서 들어간게 아니고 어느날 그 녀자가 “최후의 만찬”에 초대되였던것입니다. 아무래도 최후의 만찬에 대해 좀 얘기해야겠군요. 제가 본래 해석하는데는 좀 무뎌서 그냥 사이트에서 한 단락 퍼오기로 하지요. 최후의 만찬(最后的晚餐, The Last Supper).이딸리아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작품. 작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종류: 회벽에 유채와 템페라.크기: 460×880㎝.제작년도: 1498년.소장: 산타마리아 텔레 그라치에교회, 밀라노.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제1밀라노시대(1482-1499년)에 그린 그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날 열두명의 제자와 함께 만찬을 나누었다(마태 26:20, 마르 14:17, 루가 22:14)는 매우 낯익은 주제를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이 작품의 장대한 구도와 함께 시작되였다는 평가도 있다.15세기 피렌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전의 작가인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나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 의해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는 거듭 그려졌는데 이들 작품의 구도에서는 유다 한 사람이 식탁의 건너편에 위치하고있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최후의 만찬”을 시도하였다. 즉 유다까지 열두 제자의 무리속에 포함시켜서 그 열두 제자를 세명씩 작은 무리를 짓도록 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작가들이 “최후의 만찬”과 유다의 배반이라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면의 조형성에 력점을 두었다는 말이 된다. 화면의 구도는 대단히 수학적인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3개의 창문,  4개의 무리를 이룬 12제자 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4권의 복음서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12개 문 등을 각각 상징하는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화면 한가운데 위치한 예수의 몸은 삼각형을 이루고있다. 정확한 원근법으로 작품이 짜여져있지만 감상자의 립장에 그 원근법을 정확하게 볼수 있는 자리가 없도록 되여있는데 이것은 이 그림이 일상의 차원이 아니라 리상적차원에서 존재하는것으로 기획되였음을 의미한다.기존의 전통적방식을 뛰여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독창성 그리고 예리하면서도 정확한 형식미,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뛰여³ 방식 등으로 이 작품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가장 뛰여³ 성과로 평가된다. 인용이 좀 길었습니다만 옛말을 하려고보니 이 인용이 빠지면 잘 진행될것 같지 않아서 장황한대로 인용하였습니다. 미안합니다. 계속하겠습니다.한 녀자가 “최후의 만찬”에 초대되였는데 그녀는 최후의 만찬에 참가할수 있게 된 급작스런 영광에 그만 조금 어리둥절해졌고 그러다가 차츰 제정신이 들면서부터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한 사람씩 뜯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경박하기 그지없는 이 녀자는 그것이 어떤 장소인지, 자신이 그렇게 해도 되는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주에 조금 취기가 오른 그녀는 이사람저사람 눈박아보다가(처음에는 곁눈질로만 보다가 담이 커져서 눈여겨보다가 눈박아보게 된것이겠지요) 웬 일인지 유다한테 눈길이 쏠렸습니다. 그녀는 유다가 가장 자기와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유다야말로 자기 속셈을 챙길줄 아는 지혜로운 사내라고 생각했습니다. 급기야 그녀는 유다한테 추파를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녀한테 관심이 없었고 예수와 다른 제자들도 그녀를 전혀 무시하고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떡하다가 최후의 만찬에 초대는 되였지만 만찬상에 놓인 빈그릇 하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사랑스러워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그녀는 포크를 들어 유다의 발을 쿡 찔러서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습니다. 유다의 발은 잘 구워진 빵처럼 그녀의 입술이 스치기전에 목구멍을 타고 그녀의 배속으로 미끄러져들어갔습니다. 시간이 대충 흐르고 그녀는 어느새 유다의 두발을 말끔히 먹어버렸습니다. 발이 없어진 유다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귀에 대고 의족을 해넣고 와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녀는 그러라고 머리를 까닥거렸습니다. 유다의 발 두개를 먹어버린 그녀가 만족스레 배를 슬슬 어루만지는 오만무례한 행동을 두어번 했을 때에야 예수의 말씀에 도취되였던 사람들이 끝내 유다가 사라진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예수와 그의 12명 제자(아니 유다가 없으니 11명 제자들이겠지요)들은 문제의 녀자에게 눈길을 집중하였습니다. 예수가 말했습니다.아무리 못³ 제자라도 유다는 내 제자인데 없어서야 되느냐?—말했습니다.유다는 비록 평소 린색한편이지만 그래도 오늘 만찬에 없어서는 안되지요.—말했습니다.유다는 비록 못생겼지만 이 자리에 빠질 정도는 아닌데요.—말했습니다.유다는 비록 나의 녀동생한테 추근거리긴 했어도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고 오늘 같은 날에 유다가 없어서야 될 말입니까?—말했습니다.유다는 비록 유다이지만 유다가 없는 최후의 만찬이 또 어디 있어요?—말했습니다.유다는 비록… —말했습니다.유다는 비록… …그녀가 말했습니다.저는 유다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제가 유다님을 사랑할 때까지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셨나요? 왜 제가 유다님의 발을 먹을 때 아무도 말리지 않았나요? 저는 그래도 괜찮은줄로 알았어요. 그것은 리유가 될수 없다.리유는 그렇게 대는게 아니다.그런것이 다 리유라니…리유는 리유다와야 하느니…그러니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요?그들은 함께 모여서 잠간 의논을 하더니 결론을 내렸습니다. 최후의 만찬에는 유다가 없어서는 안되고 유다가 빠진 최후의 만찬은 최후의 만찬이 아니기에 이제부터 이 최후의 만찬에서는 그녀가 유다노릇을 해야 한다는것이였습니다.동양인이며 녀성이며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그녀는 억울하기 그지없었지만 한입으로 열두 입을 당해내는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박수까지 짝짝 쳐대면서 유다인 그녀의 참석을 환영하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 그녀의 잔등을 자애롭게 투덕투덕 두드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녀의 입에서는 때아닌 교성이 새여나왔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은 흐지부지 끝나게 되였습니다. 여기서 영화 “다 빈치 코드”보다 더 기막힌 비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린 최후의 만찬으로 하여 세계적명화 “최후의 만찬”은 가짜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딸리아 밀라노 쌍마리아 다일레 그라치수도원에 걸려있는 “최후의 만찬”은 위불없는 가짜입니다. 이 사실이 대중화되는 날까지는 아마 대단히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미리 알아두시는게 랑패 없을듯해서 이렇게 알려드리는겁니다.그럼 도대체 세계명화 “최후의 만찬”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였을가요? 그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발 이어서 간추린 뉴스입니다. 오늘 미니광장에서는 해마다 진행되여온 발족시회가 있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온 수백쌍의 발들이 모인 오늘의 제33회 족발대잔치에서는 69센치짜리 거족과 13센치짜리 전족이 나란히 전시되여 수만쌍의 눈길을 모았습니다. 69센치짜리 거족은 생물촉진제를 쓴 흔적이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반면 13센치짜리 전족은 인간의 발이 아니라 모조품이 분명하다는 의론이 거셌으나 발만은 확실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지면서 이번 대회의 우승을 나란히 거머쥐였습니다. 요즘 같은 알칼리성비에도 쉽게 부식되지 않는 거족과 전족이라서 수상은 당연한것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였습니다. 이상 뉴스를 마칩니다. 지금 이 시각 기원 2669년 13월 13일 18시 28분 38초가 흐르고있습니다. 다음 프로 기대해주십시오. 비발 밖에 비가 오고있니?이미 그쳤습니다.그런데 왜 우산을 펴고 다니니?접기 싫어서…쯔쯔, 언제부터 그렇게 게을러졌니?요즘은 웬지 아무것도 하기 싫습니다.밥은 제대로 먹겠지?저야 두부만 있으면 밥 하나는 죽여주지요. 지금도 두공기정도는 게 눈 감추기입니다. 두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살았을가요? 두부발이 잘 선 모두부를 보면 군침이 두공기입니다. 아, 이거 말하다보니 오늘점심에 또 두부를 먹어야겠군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기가 있으면 두부를 먹게 되지 않더군요. 정말, 한가지 물어봅시다. 꼭 두부를 먹어야 합니까? 누군가 두부는 단백질이고 단백질은 곧 생명이다, 두부를 먹는것은 생명을 연장하는 지름길이다, 뭐 그런 말을 하는것 같던데요. 지금 두부나 고기가 중요한게 아니다.그럼 뭐가 중요합니까?무좀을 치료해야겠구나.저의 발은 항상 깨끗하고 건조한대로인데요.너는… 무좀이… 발에… 생긴게 아니라… 저 그러니까 겨드랑이에… 흐흐흐, 우습게도 겨드랑이에…겨드랑이에도 무좀이 생깁니까?내가 무좀이라면 무좀인거지 무슨 말이 그리 많니?하두 이상해서…의사의 말을 듣지 않을거면 병원에는 왜 왔니?미안합니다. 엄중합니까?내가 엄중하다면 엄중한거고 경하다면 경한거지…도대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일단 이 약들을 먼저 써보아라.그런데 이건 소화제 아닙니까? 영양제도 있고…너는 소화가 안되고 영양이 따라 못 가서 무좀이 생긴거다.좀 리해가 되게 말씀해주실수 없습니까?치료하겠니? 안하겠니?하겠습니다.그럼 의사의 말을 들어야지. 군말 말고 이 처방대로 먼저 한동안 치료해보자.치료될수 있습니까?환자가 먼저 신심이 있어야지. 의사를 알기를 뭘로 아는거니?미안합니다. 그저 병만 낫게 해주십시오.괜찮다. 그저 돈만 내면 된다. 그럼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더 있어보아도 무좀은 치료되지 않을걸. 빨리 가서 그 약이나 먹어라.수고했습니다.돈 받고 하는짓인데 수고는 무슨…닥터 지바고님,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잘 가라, 양철북아. 고발 정신팔이는 그러니까 정신을 팔아먹고 다니는 놈이 옳긴 옳았다.힘을 팔아먹는 사람도 아니고 지식을 팔아먹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빽이나 권세나 돈 따위가 있는것도 아니니 정신을 팔아먹을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던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여기서 “거들떠보지도 않는”이라는 표현은 매우 십분 극히 최고로 대단히 꼭 들어맞는 유일한 어구임을 기억해두시기 바란다) 시시껄렁한 말들을 대충 얼버무려놓고는 굉장한 명작이나 되는듯이 으시댈줄 아는 사람이 바로 정신팔이기때문이다. 명색이 기자라는 사람이 명기사 하나 제대로 쓸줄 모르고 언론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칼럼 하나 제대로 맞추어낼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정신팔이다. 정신팔이는 어찌하다가 그와 비슷한 꼴모양으로 아무런 재능도 없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어떤 글쟁이덕분에 소설의 주인공으로 둬번 오르고는 아주 명인이라도 된듯한 기분이 되여 만날 붕― 뜬 기분을 주체할줄 몰라했다. 그게 아니꼬와서 곁에 앉은 선미양은 늘 선떡 먹은 기분이였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 할수도 없는 상황이여서 일단 얼마쯤 그리 기고만장일가 안테나만 잔뜩 살리고있는 판이였다. 오늘따라 정신팔이는 자기가 맡은 지면을 흠잡힐데가 없나 두세번이나 검사하고 무³하다고 결론짓고서야 부장한테 넘겼다. 그는 글쟁이덕분에 주인공이 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지만 두부모기사를 운운하는 바람에 그만 약은 수가 들통이 나버려서 더욱 열심히 정신을 팔아 기사를 만들수 밖에 없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해서 시시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루일을 끝냈다싶어서 그는 즐겨찾기에 무더기로 저장해둔 사이트들을 넘나들며 재미스런 뉴스들을 씹고있는중이였다. 담배쉼이나 하지.동료들이 그런 말을 하며 휴계실로 나가자 정신팔이도 그들뒤에 묻어나섰다. 잡담들이 오가고 육담들이 란무하기 시작했다.그러다가였다.  개나발이래라.화제에도 끼이지 못하고 듣기만 하던 정신팔이가 더는 참을수 없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말의 톤을 한껏 낮춘 개나발이였고 그 말은 아무에게도 욕이 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주변사람들의 야유와 조롱이나 받기 좋을상싶었는데 그 순간 정신팔이는 진짜 정신이 잠간 나가게 되였다. 그렇다고 무슨 큰일도 아니였다. 모두들 둘러앉아 한담을 하던중에 누군가 도적방귀를 뀌였고 그 방귀의 임자를 찾던중 정신팔이에게 시선이 집중되였고 정신팔이는 어쩌구려 드디여 입이 열개라도 변명할수가 없는 처지가 되여버렸던것이다. 사실 그때 정신팔이는 속이 안 좋아서 내심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던중이였고 모두들 그런 시선을 주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황당하다가 나중에는 숫제 이거 정말 내가 뀐것이 아닌가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실상 배속사정이 어려워 화장실로 가게 되였는데 그의 그런 융통성 없는 행동은 기어이 그를 방귀의 주인공으로 몰아붙이는 꼴이 되여버렸던것이다. 어쨌거나 정신팔이는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일을 마치고나서야 이제 화장실문을 나서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무엇으로 어떻게 볼가 이리저리 따져보게 되였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냥 웃으며 지나쳐도 얼마든지 좋을 일인데도 정신팔이는 잔뜩 긴장해가지고 그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냐에만 골똘하고있었다. 그때 부장이 화장실로 들어오다가 그런 지극히 부자연스런 상태의 정신팔이를 보자 알조가 있다는듯이 머리를 끄덕끄덕하더니 자연스런 생리현상인데 무얼 그리 심각해가지고 병신같이 구느냐며 웃어주었다. 부장의 말을 듣지 않았으면 또 모를가 부장까지 그렇게 말하자 정신팔이는 화장실문을 나설 용기마저 잃고말았다. 그래서 다시 조금 끙끙 앓다가 그야말로 세기적인 용기를 내여 화장실문을 나섰는데 이미 사람들의 화제는 방귀차원을 많이 떠나있었다. 그런데도 정신팔이는 사람들이 아닌보살하며 자기를 골려준다고만 생각했다. 텔레비에서 중계하는 스포츠생방송프로를 열심히 설명하는 스포츠담당 김기자를 보아도 마치 자기가 안스러워 일부러 화제를 달리 돌리는것으로 보였고 김기자의 말을 경청하며 텔레비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박기자나 최기자도 평소 스포츠를 관심하지 않던 친구들이라 의심은 곱배기가 되고말았다. 괜히 정신팔이는 헛기침을 컹컹거리다가 자기 사무상에 돌아와 앉았다. 그런데 곁에 앉은 선미양이 별스레 신경쓰였고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마저 아닌보살하는것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여 여기까지 말이 새여들어왔구나! 할일없는 사람들의 극성이란… 젖같이!좆같이라는 말을 항상 젖같이라고 말하는 정신팔이는 그만 무슨 정신인지 몰랐다. 그는 목덜미까지 벌개지는 자신을 의식하며 머리를 수굿하고 자기의 발만 내려다보았다. 그의 발은 그의 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강발이였다. 막 생긴 생강모양으로 길지도 둥글지도 가늘지도 굵지도 않고 정말 아무렇게나 생겨먹은 발이였다. 엄지발가락은 엄지손가락 두개를 나란히 붙여놓은것처럼 잔뜩 굵은데 비해 새끼발가락은 어린애 손가락모양으로 작은것이 옹송그리고 붙어있었고 그가 가장 잘생겼다고 스스로 칭찬해마지않는 둘째발가락도 그러고보니 무슨 어른 중지만큼이나 불쑥 길게 생겼었다. 그는 자기의 손가락을 슬그머니 둘째발가락에 대보았다. 무명지만큼이나 길었다. 왜 발이 이렇게 생겨먹었을가 그는 잠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정확히 28센치짜리인 그의 발은 기실 너무 추한것도 아닌데 어느날 동생이 그렇게 표현을 해버리고나서는 자꾸 들여다보게 되였고 볼수록 스스로도 생강처럼 생겼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던것이다. 그러고부터 정신팔이는 웬지 자신이 기껏 남들의 조롱대상으로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고 그는 더는 사무실에 앉아있기가 불편해서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급작스레 일어서는 바람에 곁에 앉은 선미양이 화들짝 놀라 토끼눈이 되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봉투에 뭔가를 넣어가지고는 무슨 다른 용무가 있는 사람처럼 급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휴계실에서는 여전히 스포츠화제로 화기애애한 담소들이 이어지고있었지만 그는 자기가 나타났길래 방귀화제를 달리 돌린것이라고 결론짓고는 엘레베터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신문사밖은 언제나처럼 해빛이 쨍 빛나고있었다. 그제야 정신팔이는 기지개를 쭈욱 폈다. 그는 어깨에 힘을 주고 가까운 음식점으로 발길을 움직였다. 아이구, 정기자님은 발도 기셔.내 발이 길다구?그럼요. 오늘 새로 개고기를 들여와서 팍 고아놓았는데 마침 정기자님이 이렇게 행차하셨으니 말이죠.아하, 그런 발…그는 구석진 좌석을 차지하고나서 복무원이 오기전에 또 한번 자기의 발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괜찮게 생긴 발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늘 그래왔던것처럼 개발쪽을 시키고 맥주를 두병 시켰다. 퇴근시간까지 그렇게 죽치고 앉아있을 심산이였다. 날씨가 날씨여서 단숨에 두병 비우고 다시 두병 시킨 맥주에서 한 반병정도 마셨을가. 강원도가 문득 음식점에 들어섰다. 아무데나 앉으려던 강원도는 정신팔이를 발견하고는 오래 못 본 친구를 본 사람모양으로 덮치듯이 그한테로 왔다.오래 됐어? 녀편네가 친정집에 가는 바람에 아침을 굶었더니 배가 출출해나서…굳이 리유는 필요 없어도 꼭 리유를 꼬나드는 성미인 강원도는 언제나처럼 실실 웃음을 빼물고 너스레를 떨며 그를 건너다보았다.뒤발을 시켰군. 앞발이 더 맛있는데…별 쓰잘데 없는 말들도 꼭 강원도의 입에서 나오면 제법 심각해지고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료리해버리는게 강원도의 특점이라면 특점이다. 왜… 앞발이… 더 맛있지요?응. 무릇 모든 짐승들은 앞발로 파헤치고 덮치고 얼굴 쓰다듬고 뭐 앞발 사용량이 뒤발의 20배라나. 그래서 앞발이 근육도 발달되고 맛도 더 있는 법이지.근데… 앞발뒤발… 어떻게… 가리지요?보면 몰라? 앞발을 자꾸 쓰게 되니까 앞발은 발톱이 모지라지고 단단한 반면 뒤발은 발톱이 예리하고 좀 무른축이지.정말 그런지는 몰라도 강원도는 확실히 고수는 고수였다. 정신팔이는 또 한번 강원도한테 빨려들어가는 자신을 의식해야 했다. 나오면서 볼라니 정기자한테 송금표가 온것 같던데…송금표요? 돈 보낼 사람 없는데요.이 사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접수실 처녀가 정기자 보았나 물어보길래 알았지.정신팔이는 예쁠데라고는 안성맞춤으로 뚫린 코구멍밖에 없는 접수실 곰보처녀를 잠시 떠올렸다. 또 술 한번 겨뤄보지 그래?맥주잔을 들며 강원도가 시물거렸다. 관둡시다. 술은 즐기는것이지 취하는게 아니잖아요?허허, 언제부터 정기자 술문화 다 연구하시고… 오케이. 그럼 오늘은 문명한 술문화를 위하여…하여튼 강원도는 술상에 앉으면 무슨 위할것도 많았다. 아무렇지도 않은것을 가지고도 강원도가 위하겠다고 하면 별스레 거창해지는것이였다. 위하기로 합시다.어허, 사람이. 그렇게 술마시는 법 어딨어? 흐흐. 하긴 그래서 정기자는 내 구미에 맞는다니깐. 반발 무대는 쇼윈도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거기에 큼직한 발 하나가 과장되게 놓여있다. 사뭇 껑충한 다리에 달린 발은 금시라도 어디론가 뛰쳐나갈듯한 태세다. 쇼윈도곁에는 그 발을 지키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이쁘게 생긴 복무원아가씨가 해반주그레 미소를 바르고 마네킹처럼 서있다. 손발톱미용광고가 요란한 가운데 막이 오른다. 무대 왼쪽에서 볼모양없이 꾀죄죄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주춤거리며 쇼윈도로 다가온다. 유심히 발을 여겨보다가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어 만지려고 한다. 복무원: 손님, 발톱미용 하시렵니까? 이쪽으로 오세요.사내: 아니, 저어…복무원: 오세요. 아주 싸게 해드릴게요.사내: 그게 아니라 저어…복무원: 한번만 하시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겁니다. 어서 오세요.사내: 저는 의족인데요.복무원: 우씨— 재수없다. 오늘은 첫 손님부터 쉬 싹 날군다. 소금이나 뿌려야 할가보다.복무원이 힝하니 쇼윈도뒤로 사라지고 사내는 잘못을 저지른 소학생처럼 다소곳이 서있다가 발을 가볍게 굴러보고는 무대 오른편으로 사라진다. 제발 바람이 분다. 구름은 진작부터 있었다. 비는 구름과 땅 사이 한 절반쯤 왔을가. 먹안개속에서 번개가 칼을 간다. 대지는 일단 전률부터 하고본다. 으르릉— 우뢰가 짖어대고 사위는 일순 고요에 잠긴다. 사람마다 비 대신 치킨이 쏟아지거나 머리통이 깨지도록 은화가 쏟아지기를 갈망한다. 다시 바람이 분다. 비구름을 몰고 온 바람은 비구름을 휘휘 불며 산너머로 사라진다. 바라던 치킨도 은화도 내리지 않았고 지어 그 흔한 비도 오지 않는다. 이제 치킨이요, 은화요보다 비만이라도 와주었으면 하지만 어림도 없다. 하늘은 거짓말처럼 파랗다. 이제 바람도 없다. 시원히 씻어내릴 비도 없고 먼지를 날려버릴 바람마저 없다. 온통 징그러운 해빛, 해빛, 해빛뿐이다. 끝발 자꾸 술을 권하는 강원도를 폭탄주로 간신히 이겨버린 정신팔이는 신문사에 다시 돌아왔다. 출근을 다시 하려는게 아니고 누가 돈을 보내왔나가 궁금했던것이다. 정기자님, 잡지사에서 원고료가 왔어요. 원고료? 좋겠어요. 재간이 좋으셔서 원고료도 나오고… 언제 한턱 사세요. 웃으면 더욱 가관인 접수실 곰보처녀가 하얗게 웃어주며 애교삼아 지분거린다. 기분이 싫지는 않다.언젠가 보낸 시 한수가 발표된 모양이였다. 일년에 두세번정도 나오는 원고료다.  30원짜리 송금표.정신팔이는 그래도 좋았다. 이 정신팔이가 세상에 살아있다는것을 증명해주는 또 다른 표현인 셈이다. 네따위들이 웃겠으면 웃어보라지. 어디 나처럼 원고료를 척척 타본적이 몇번이나 있는가. 치잇…신문사를 나서는 정신팔이는 공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턱이 자꾸 쳐들렸다. 그는 공공뻐스를 타려다가 택시를 타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신문사앞에서 택시는 서주지 않는다. 기어이 몇걸음 더 걸어가야 한다. 아무래도 좋았다. 정신팔이는 코노래를 흥얼거리며 모처럼 차례진 이 좋은 분위기가 망가질세라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다가 이쯤이면 택시가 서주겠지 하고 턱 멈춰서서 길 량켠을 휘둘러보았다. 문득 그의 시야로 새로 내건 광고포스터가 쑥 꽂혀들어왔다. 저 세인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세계명화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여 그린 포스터는 유다 대신 웬 금발머리 팔등신처녀를 앉혀놓고있었다. 그녀는 상에 발을 올려놓고있었는데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엄지발가락이 전체 그림의 초점에 놓여있었다. 손발톱미용을 위한 광고포스터였다. 그런데 우스운것은 어느 위대한 미술가의 솜씨인지는 몰라도 2008년 3월 3일에 오픈한다는 글자들이 이상하게도 정신팔이 눈에는 2669년 13월 13일로 보여지고있었다는 점이였다. 특히 0자를 6자처럼, 8자를 9자처럼 처리한 점과 3자의 앞부분을 일부러 길게 늘여 13처럼 보이게 만든 점이 정신팔이의 시망막을 어지간히 즐겁게 해주고있었다. 젠장, 이젠 명화마저 광고에 리용되는군. 정신팔이는 저도 모르게 언제부터 가려웠는지 모르는 겨드랑이를 썩썩 긁어댔다. 갑자기 앞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차량흐름이 멈춰서더니 숱한 차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귀를 멍멍하게 하였다. 그때라고 생각한 정신팔이는 아래배에 힘을 지그시 주어 방귀를 뀌였다. 그러나 정신팔이의 기대와는 달리 퍼엉— 하는 속 빈 방귀가 나왔다. 그것은 온종일 참고참았던, 다지고다져진 방귀였다. (<연변문학> 2009년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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