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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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골정취 댓글:  조회:547  추천:0  2022-11-04
시 골 정 취          요지음  전원생활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 지고 있다. 일년 옹근 시간은 아니더라도 봄부터 가을까지  시골 전원주택에서 생활하며 채소도 심고 꽃도 가꾸면서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려는 사람들 말이다.        내가 촌에 집을 짓고 뜨락농사를 짓으며 보내온 지도 어언 20년이 되여온다.20 여년 전 어느날 큰 동서가 말했다.요지음 촌에 가서 집을 짓고 사는 친구들이 있다고.그 한마디에 나는 귀가 뻘죽해지였다.그것이 좋겠네.그래 나도 도전해 보아야 하지.          원래  농촌태생이여서 그런지 나는 시골생활을 무척 좋아 한다.80년대말 대학을 나와서 기관에 출근하면서 부터 나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들어 왔고  출근 첫해에 운이 좋게  70평방이 되는 아빠트를 분배받았고 그해에  입주하게 되였다.그때는 장식이라는 것이 없었고 큰형수가 집적 집에 하얀 도료칠을 해주고 또 벽밑 가장자리에는 새파란 페인트칠을 올려 주니 입주준비가 끝났다.내 집이라고는 난생 첫번째였다.나는 너무도 좋아 주방에 채색종이로 포도주잔과 숱가락모형을 오려 붙혀 놓았다.누가 그방이 주방아라는 것을 모를리도 없는데.          그때 외삼촌네는 촌에서 살고 있었다.집은 원래 마을의 건조실을 개조하여 만든것이 였는데 뜨락이 특별히 넓었다.매번 외삼촌집에 가면 그 뜨락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다.하여 언제 조건이 허락되면 나도 이런집 에서 살아봐야 겠다는 꿈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꿈도 있었던 차에 또 동서의 말까지 듣고 보니 하루 빨리 땅을 얻어 집을 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밀어 올라 왔다.그러던차 2002년 봄 우리 단위의 친구들이 마반산등산을 하게 되였다.3월초 였건만 그날은 날씨도 춥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 대였다.고려대학에서 시작한 등산대오가 부암촌 부근까지 도착하니 어떤친구들은 매우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그때 공작에 참가한지 얼마 안되는 한 친구가 춥고 맥이 없다며 등산을 포기하자고 졸라 대였다.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한후 우리는 단연히 등산을 포기하고 하산길에 들어 섰다.그래서 내려온 골이 발로 마반촌6대 골짜기였다.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내려오며 보니 량쪽 산등성이 안 옴폭한 곳에 오붓한 작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마을 앞 탁트인 곳에는 브라하통하가 흘렀고 마을 량옆의 산등성이는 마치 안락의자의 손걸이 같았다.소소리 높은 시리봉은 마치 거인의 베개같이 생기였으니 이가 바로 더없이 좋은 명당자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치였다.그렇지 바로 이곳이 내가 찿아 다니던 제일 마음에 드는 집터였다.       이튼날 나는 이 마을을 다시 찿았다.누가 팔집이 없냐며 물어 가던 중 최씨성을 가진 한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자기가 전에 살았던 초가집을 팔겠다고 하였다.소뿔은 단김에 빼랏다고 나는 인츰 계약을 맺고 선불금을 내였다.그집은 뜨락이   넓었는데 그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또한 지세가 상대적으로 높아 골짜기에 홍수가 져도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적어 보인점도 가산점이 되였던 것이다.       초 가집을 사고 난 그해 여름 누님이 놀려가 보자고 하였다.그때는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라 우리는 연길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반산으로 향하였다.마반산은 작은 마을이지만 기차역을 가지고 있었다.내가 대학다닐때 백성지구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말이 장춘으로 오려면 집마을에서  마차를 타고 향소재지까지 가야 하고 향소재지에서 현성까지는 뻐스를 타야하고 다음에 기차를 타야한단다.거기에 비하면 마반산은 교통이 대단히 편리한 셈이다.         한여름에 잡아 들었는지라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울안에는 쑥이 허리를 치였다.우리는 가지고 간 낫으로 풀을 베면서 집앞으로 접근하였다.한참 베고 나니 집앞이 훤하게 자리가 났다.집에 들어가 보니 한때는 사람이 살던 집이라 회칠도 되여 있었고 물뽐프도 기능을 잃지 않고 있었다.누님은 가지고 간 반찬들을 내놓고 정심을 차려 주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나는 집짓기 준비작업에 들어갔다.그때 집에는 오터바이 한대가 있었는데 그걸 타고 채석장이며 벽돌공장이며 다니며 재료구입을 하였다.친구의 소개로 시공대도 청하게 되였다.4월 중순의 어느날 나는 단위의 봉고차를 빌려가지고 11명의 시공대를 거느리고 마반촌에 입주하였다.        집을 짓는데 딱 한달이란 시간이 걸리였다.내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시공기일을 단축할것 같았는데 일군들은 전혀 급해하지 않았다.나만 급해봐야 별로 해결할 문재도 없고 하니 나는 재료공급에만 신경을 썼다.우리 시공대 책임자는 성이 량가라는 호북성의 사람이였는데 시공일군들도 모두 그 마을 사람들이였다.        지붕을 올리던 날 시공대장이 나보고 제사를 지내지 낞겠냐고 물었다.나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을 본적이 있는지라 그러자고 했다.장에가서 큼직하고 잘생긴 돼지머리를 사오고 제사상을 차리였다.물론룡왕님 입에 백원짜리 지페를 물리는것도 잊지 않았다. 또 깨끗한 동전 여러잎을 준비하고 가운데 구멍을 뚫고 쇠사슬로 꿰 매였다.빨간천을 사다가 붓으로  上梁大吉 坚如磐石란 글자를 써서 동전과 같이 대들보에 매였다. 나는 먼저 룡왕님께 절을 올리며 오늘은 대들보를 올리는 날인데 집을 튼튼하게 해주고 우리 가정을 보호해주십사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소원을 빌었다.다음 집 네면 벽에도 절하였다. 제사를 끝내고 폭죽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마지막 대들보가 천천히 올라가 제 자리를 잡았다.        그날은 고기를 삼고 술을 내여다 마음껏 먹고 마시였다.시공대 여러분들은 좋아하며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웃었다.오래만에 우리 마을에서 큰행사를 벌린것이다. 5월15일날 시공대는 철거하였다.한달 동안 같이 생활하던 일군들을 보낼려니 섭섭한 마음도 금할길 없었다.         집도 짓었겠다 토성으로 울타리도 치였으니 이제 남은것은 과일 나무도 심고 채소농사도 하며 전원생활의 정취를 느끼여 보는것이다.그뒤로 근 20년간 나는 부지런히 땅을 일구고 낟알을 넣고 기음을 매고 땀동이를 흘리며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특히 지난해에는 꽃도 심었는데 파란색의 채소밭곁에 피여난 떨기떨기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여 오고 가는 손님들의 눈길을 끌었다.
1    포도풍년 댓글:  조회:897  추천:3  2021-10-15
포도풍년      내가 어릴때에는 포도는 귀한 과일에 속하였다.우리집이 살고 있던 소영 웃마을에는 호수가 몇십호나 되였지만 포도 나무를 재배하고 있는 집은 한두호밖에 되지 않았다.그러다 보니 어릴적에는  어찌가다  포도 한송를  맛볼수 있었다.      우리 마을에 황씨성을 가진 할아버지가 계기였는데 바로 그집에서  울안에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있었다.우연한 일치라고 할지 그집의 큰 식장에도 포도송이 그림이 그이여져 있었다.소학교때 그 할아버지의 외손자가 나와 동갑이자  한학년에 다니였으니 종종 그집에 놀려 다닌적이 있었다.그때 깊은 인상을 받아서 인지 어른이 되여서도 포도는 나도 몰래  나의 눈길을 잡았다.후일 알게된 일이지만 포도는 다자다복을  상징 한다고 한다.          2002년 마반산에 초가집 한채를 산 뒤 그 어느날 나는 서쪽에 자리잡은 가산을 둘러보았다.낮으막한  산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아니 글쎄 오래동안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포도나무 두 그루도 보이였다.나는 대뜸 흥분되였다.나에게도 포도나무가 생긴것이다.아.나도 포도나무 주인이 된것이다.        2005년에 한국에서 일하던 형님이 연길에 돌아와 반년 정도 머무르게 되였다.형님은 동생을 생각하여 아예 마반산에 행장을 풀고 계시면서 이것저것 손질해주기도 하고 필요한것들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그중에 아주 력사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산에서 자라던 포도나무를 집으로 들어오는 길옆에 옮계 심은 것이다.그리고 형님은 포도달대 삼아 나무정자를 짓어 놓았는데 한여름 정자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그뒤 길수리하면서 정자는 담밖으로 철거하게 되였고 나는 달리 철근으로 포도 달대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집 포도는 야생포도라 과동할때 땅에 파뭇지 않아도 되였다.해마다 어느정도 전지만 해주면 용케도 포도가 잘 열리였다.앞집의 주인이 말했다."이집 포도는 이상하게 별로 관리 안해도 잘 달린다".그러고 보니 내가 축복받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올해 봄에는 동생벌이 되는 친구가 와서 과일나무들을 전지해 주었다.친구네 집에는 여러가지 과일나무들이 있는데 7_8월이면 나는 그집에 왜지따려 가기도 한다.친구는 과일농사로 말하면 전문가 수준이다.물론 친구집에도 포도나무 여러대가 재배되고 있다.      금년 청명휴가때 친구가 집적와서 여러가지 과일나무를 전지해주었는데  와중에는 포도나무도 포함되였다. 전지한 포도나무를  보고 동네 어른이 말했다."너무 심하게   추려 버렸어". 굵은 줄기 몇가지만 남고 어린가지는 기본상 잘라버린것 같았다.  찬찬이 들여다 보려니 다리만 있고 팔과 손이 없이 앙상한 몸뚱이를 가진것이 그리 탐탁하게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순가. 많이 열리나 적게 열리나 나는 거기에는 별로 상관이 없다. 내가 관심하는것은 오로지 우거진 포도넝쿨과 친구들이 둘러앉아 이야가를 나눌수 있는 그늘이다.사실 지난해 강냉이 철에 우리동창들이 마반산에서 강냉이 축제를 가지였는데 바로 이 포도넝쿨아래에 상을 차리고 음식을 나누었다.포도넝쿨의 그늘은 내가 새로짓은 정자보다도  더 시원하였다.한것은 정자는 양철기와를 올려 열을 받는  반면 포도넝쿨은 그 포도의 넓은잎사귀와 포도송이들이 해볓을 가리워 주기 때문에 시원한 것이다.       마반산과 연길도심은 기후차이가 난다.시내의 포도가 잎사귀를 내민지 한 열흘되였는데도 우리집 포도나무는 아직 움도 트지 않았다.“원일이지?"이 친구가 너무 과도하게 전지해서 인가?" 하지만 이미 엎질러 놓은 물이라 별 방도가 없다.만물은 다 자기의 생장법칙이 있는것이다.5월중순에 들어서니 제법 싹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뒤로는 언제 그랬냐싶이 포도잎이 잘도 나왔다.나는 더 확실히 그늘을 확보할 목적으로 검은색 비닐 그물을 두겹으로 포도넝쿨 아래를 막아주었다.       나는 친구가 알려준대로 포도송이가 나오는 즉시 순을 따주었다. 포도가 달리면 그 앞부분의 줄기를 끊어버려야 영양실조를 줄일수 있다고 한다.그대로 내 버려두면 한해에 햇순이 4메터도 넘게 자란다고 하니 포도가 영양섭취를 못라게 되여 결과적으로 포도알이 성기고  작아질수 밖에 없다. 다음 필요없는 포도 손은 다 따버리였다.포도손도 많은 영양을 섭취한다고 하니 말이다.       매먼 마반산에 갈 때마다 나는 포도순을 주는것을 잊지 않았다.철근으로 만든 포도 달대는 아주 든든한대 무거운 포도넝쿨을 거뜬히 받들어 줄수  있었다.나는 달대밖으로 나가는 순은 모조리 따버리였다.장장 온여름을 경과 하면서도 달대 안에 검은색 비닐 그물을 쳐놓았기에 도대체 그 안에 포도가 열리였는지는 알수도 없었다.당초에  포도수확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맛볼정도로만 수확하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이다.내가 관찰한 결과 그물이 막히지 않은 달대 아래쪽에 포도가 여러송이 달렸는데 그 자람새가 아주 좋았다.      더운 여름에는 포도 넝쿨이 우리집주차장으로 변신한다.놀려온 사람들은은근히  먼저 포도넝쿨아래에 차를 주차하려는 눈치다.하지만 여러분도 짐작이 가련만 그것은 안해의 전용 주차장이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포도는 진한 남색으로 변한다.처음에는 푸른포도 송이가 연한 자주색으로 변하는데 탱탱한 알알의 포도알은 진주같이 아름답다.좀더 지다면 짙은남색으로 변하고 다음엔 포도껍질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그때면 포도가 한결더 시원하고 달콤하다.우리집에 드나드는 사람마다 포도나무에서 포도 몇알씩 뜯어내여 입에 넣는것이 관례다.내가 자주 순을 준 덕분인지 금년 포도는 왕년에 비하여 알이 촘촘하고 굵고  달았다.국경절을 지나고 나면 포도맛은는 절정을 이루는데 사람만 좋아하는것이 아니고 까치도 좋아 무리지어 포도나무를 습격한다.       국경절 휴가 마지막날 나는 포도 달대에 매여 놓았던 검은색 비닐 그물을 철거하기로 하였다. 먼지를 막기위하여 채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나는 사닥다리에 올랐다.봄에  비닐 그물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방지하려고 쇠사슬줄 촘촘이 매여 놓았더니 철거작업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밑으로 부터 위로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가노라니 웬지 머리위에 묵직한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뭐지하고 머리를 드는 순간 나는 희열에 빠자고 말았다.포도송이들이 마른 잎사이에  빼곡히 달려있는데 난  이렇게 많이 달린 포도를 처음 보았다.주섬주섬 그물을 다 철거하고 사닥다리 에서 내려와 올려 보니 그야말로 가관이 였다.글쎄 우리집 포도나무에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빼곡히 열려 있었다. 나는 이때 불현듯 "无心插柳柳成荫"이란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집 포도는  살뜰한 대접을 받지도 못했어도 가을이 되니 나한데 이토록 많은 맛나는 열매를 선물해주었다.나는 수확의 희열에 빠지고 말았다.그물안에 둥지틀고 있던 새들이 퍼드득거리며 날아 예고 이름모를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울려주었다.진짜 세외도원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정경이 아닐가 싶다.       내가 우리집 포도풍년 상황을 위챗에 올렸더니 모두들 풍년이라며 즐거워하였다.물론 포도따려온 친구들도 많았다.아마 100근의 포도는 쉽게 수확할것 같았다.혼자 먹으려고 재배한 것이 아니고 다 같이 나누어 먹자고 한일이라 나는  더큰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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