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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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시골정취 댓글:  조회:547  추천:0  2022-11-04
시 골 정 취          요지음  전원생활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 지고 있다. 일년 옹근 시간은 아니더라도 봄부터 가을까지  시골 전원주택에서 생활하며 채소도 심고 꽃도 가꾸면서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려는 사람들 말이다.        내가 촌에 집을 짓고 뜨락농사를 짓으며 보내온 지도 어언 20년이 되여온다.20 여년 전 어느날 큰 동서가 말했다.요지음 촌에 가서 집을 짓고 사는 친구들이 있다고.그 한마디에 나는 귀가 뻘죽해지였다.그것이 좋겠네.그래 나도 도전해 보아야 하지.          원래  농촌태생이여서 그런지 나는 시골생활을 무척 좋아 한다.80년대말 대학을 나와서 기관에 출근하면서 부터 나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들어 왔고  출근 첫해에 운이 좋게  70평방이 되는 아빠트를 분배받았고 그해에  입주하게 되였다.그때는 장식이라는 것이 없었고 큰형수가 집적 집에 하얀 도료칠을 해주고 또 벽밑 가장자리에는 새파란 페인트칠을 올려 주니 입주준비가 끝났다.내 집이라고는 난생 첫번째였다.나는 너무도 좋아 주방에 채색종이로 포도주잔과 숱가락모형을 오려 붙혀 놓았다.누가 그방이 주방아라는 것을 모를리도 없는데.          그때 외삼촌네는 촌에서 살고 있었다.집은 원래 마을의 건조실을 개조하여 만든것이 였는데 뜨락이 특별히 넓었다.매번 외삼촌집에 가면 그 뜨락이 그렇게도 마음에 들었다.하여 언제 조건이 허락되면 나도 이런집 에서 살아봐야 겠다는 꿈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었던 꿈도 있었던 차에 또 동서의 말까지 듣고 보니 하루 빨리 땅을 얻어 집을 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밀어 올라 왔다.그러던차 2002년 봄 우리 단위의 친구들이 마반산등산을 하게 되였다.3월초 였건만 그날은 날씨도 춥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 대였다.고려대학에서 시작한 등산대오가 부암촌 부근까지 도착하니 어떤친구들은 매우 힘이 부치는 모양이다.그때 공작에 참가한지 얼마 안되는 한 친구가 춥고 맥이 없다며 등산을 포기하자고 졸라 대였다.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한후 우리는 단연히 등산을 포기하고 하산길에 들어 섰다.그래서 내려온 골이 발로 마반촌6대 골짜기였다.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내려오며 보니 량쪽 산등성이 안 옴폭한 곳에 오붓한 작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마을 앞 탁트인 곳에는 브라하통하가 흘렀고 마을 량옆의 산등성이는 마치 안락의자의 손걸이 같았다.소소리 높은 시리봉은 마치 거인의 베개같이 생기였으니 이가 바로 더없이 좋은 명당자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치였다.그렇지 바로 이곳이 내가 찿아 다니던 제일 마음에 드는 집터였다.       이튼날 나는 이 마을을 다시 찿았다.누가 팔집이 없냐며 물어 가던 중 최씨성을 가진 한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자기가 전에 살았던 초가집을 팔겠다고 하였다.소뿔은 단김에 빼랏다고 나는 인츰 계약을 맺고 선불금을 내였다.그집은 뜨락이   넓었는데 그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또한 지세가 상대적으로 높아 골짜기에 홍수가 져도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적어 보인점도 가산점이 되였던 것이다.       초 가집을 사고 난 그해 여름 누님이 놀려가 보자고 하였다.그때는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라 우리는 연길역에서 기차를 타고 마반산으로 향하였다.마반산은 작은 마을이지만 기차역을 가지고 있었다.내가 대학다닐때 백성지구에서 온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말이 장춘으로 오려면 집마을에서  마차를 타고 향소재지까지 가야 하고 향소재지에서 현성까지는 뻐스를 타야하고 다음에 기차를 타야한단다.거기에 비하면 마반산은 교통이 대단히 편리한 셈이다.         한여름에 잡아 들었는지라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울안에는 쑥이 허리를 치였다.우리는 가지고 간 낫으로 풀을 베면서 집앞으로 접근하였다.한참 베고 나니 집앞이 훤하게 자리가 났다.집에 들어가 보니 한때는 사람이 살던 집이라 회칠도 되여 있었고 물뽐프도 기능을 잃지 않고 있었다.누님은 가지고 간 반찬들을 내놓고 정심을 차려 주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나는 집짓기 준비작업에 들어갔다.그때 집에는 오터바이 한대가 있었는데 그걸 타고 채석장이며 벽돌공장이며 다니며 재료구입을 하였다.친구의 소개로 시공대도 청하게 되였다.4월 중순의 어느날 나는 단위의 봉고차를 빌려가지고 11명의 시공대를 거느리고 마반촌에 입주하였다.        집을 짓는데 딱 한달이란 시간이 걸리였다.내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시공기일을 단축할것 같았는데 일군들은 전혀 급해하지 않았다.나만 급해봐야 별로 해결할 문재도 없고 하니 나는 재료공급에만 신경을 썼다.우리 시공대 책임자는 성이 량가라는 호북성의 사람이였는데 시공일군들도 모두 그 마을 사람들이였다.        지붕을 올리던 날 시공대장이 나보고 제사를 지내지 낞겠냐고 물었다.나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을 본적이 있는지라 그러자고 했다.장에가서 큼직하고 잘생긴 돼지머리를 사오고 제사상을 차리였다.물론룡왕님 입에 백원짜리 지페를 물리는것도 잊지 않았다. 또 깨끗한 동전 여러잎을 준비하고 가운데 구멍을 뚫고 쇠사슬로 꿰 매였다.빨간천을 사다가 붓으로  上梁大吉 坚如磐石란 글자를 써서 동전과 같이 대들보에 매였다. 나는 먼저 룡왕님께 절을 올리며 오늘은 대들보를 올리는 날인데 집을 튼튼하게 해주고 우리 가정을 보호해주십사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소원을 빌었다.다음 집 네면 벽에도 절하였다. 제사를 끝내고 폭죽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마지막 대들보가 천천히 올라가 제 자리를 잡았다.        그날은 고기를 삼고 술을 내여다 마음껏 먹고 마시였다.시공대 여러분들은 좋아하며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웃었다.오래만에 우리 마을에서 큰행사를 벌린것이다. 5월15일날 시공대는 철거하였다.한달 동안 같이 생활하던 일군들을 보낼려니 섭섭한 마음도 금할길 없었다.         집도 짓었겠다 토성으로 울타리도 치였으니 이제 남은것은 과일 나무도 심고 채소농사도 하며 전원생활의 정취를 느끼여 보는것이다.그뒤로 근 20년간 나는 부지런히 땅을 일구고 낟알을 넣고 기음을 매고 땀동이를 흘리며 노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특히 지난해에는 꽃도 심었는데 파란색의 채소밭곁에 피여난 떨기떨기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여 오고 가는 손님들의 눈길을 끌었다.
150    자전거 수리 댓글:  조회:983  추천:1  2022-10-12
 자전거 수리       요지음 자전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자전거동호회에 가입하여 단체로  자전거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친구들끼이 모여서 같이 자전거 타는 사람도 있고  혼자서 자전거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전거도 오래 타다 보면 여가저기 손 볼데도 생기기도 하고 다이야와 같은 부품들은 새것으로 교체해야 하는 일도 있게 된다.나의 자전거는 나를 동무하여 공로를  달렸는가 하면 가파로운 산길에도 달렸고 때로는 시골마을의 구석구석도 누비였다.그러다 보노라면 다이야가 뻥크나는 일도 종종 발생하게 되였다.한번은 아침일찍 자전거타고 연하로 따라 연홍교 방향으로 달리는데 그만 다이야가 뻥크나게 되였다.하여 나는 할수없이 자전거를 밀고 해방로 자전거 전매점까지 가서야 다이야를 수리하게 되였다.      전에는 자전거 수리부가 시내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그때는 자전거가 운동수단으로가 아니고 대부분 교통공구로 사용되였다.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로 출퇴근 했기에 자전거바퀴가 바람이 나간다던지 여느 라사가 풀리여 삐걱거린다 던지 하는 사소한 고장이 나기가 일쑤였다.하여 고객들의 수요도 만족시키고 수입도 올릴수 있는 자전거 수리부가 여기저기에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출퇴근을 자가용이나 공공뻐스로 해결하는 요지음 길거리에서 자전거수리부를 찿기가 무척 힘들다.내가 타던 자전거도     만킬로메터를 뛰였더니 다이야의 무늬가 기본상 다 닿아서 언제 어디서 뻥크날지 모를 상황에 처하게 되였다.다이야를 미리미리 새것으로 교체해 놓아야 시름놓고 운동할수도 있다.하여 나는 네트워크에서 200여원을 주고 자전거 다이야 두개를 구매하였는데 안장이 문제였다.      나의 인상속에는 하남 예술극장 남쪽골목과 신풍시장골목에 자전거 수리부가 있은것으로 기억되였다.하여 두곳을 다 찿아 보았지만 지금은 자전거수리부가 없어지였다.하여 주변의 사람들과 물어 보았더니 수리부가 없어진지도 꽤 오래 되였다 고 했다.단위친구들과 자전거 다이야를 교체해본적이 있냐고 물어 보았더니 나이가 좀 든 친구들은 전에는 다 자기들이 집적 교체 했다고 우쭐렁 거린다.      나는 자전거를 수리해본 경험이 없다. 위로는 형님들이 계시였기에 사실 내가 뭘 직적 무엇을 수리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형님들이 뭘 수리할라 치면 나는 기껏해야 옆에서 공구를 건녀준다 던지 아니면 뭘 잡어주는 보조역을 하는 정도였다.그러니 자전거 다이야 교체가 슬그머니 걱정되였다.알아본데 의하면 조양천진에 저전거 수리부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 갈것이면 되던 안되던 자기절로 한번 수리해야 겠다는 배짱이 나왔다.      휴식일 날 나는 창고에 나가 차를 빼고 먼저  바닥에 넓은 천을 펴놓았다.전에 자전거 수리부에 가보니 기본상 다 이렇게 하고 있었다.천을 펴놓으면 자전거를 뒤집어 세웠을때 차체가 집적 콩크리트 바닥과 접촉하지 않기에 차체에 흠이 나는것을 방지할수 있고 또 분해한 부품을 모두 천위에 놓음으로써 인츰인츰 찿기도 쉽게 된다.다음 나는 자전거를 천위에  뒤집에 세웠다.그럴사한 수리현장 모습이 나타 났다.      이제 바퀴를 들어내야 하는 순서다.앞바퀴는 들어내기가 비교적 쉬웠다.헌데 뒤바퀴를 들어내려니 차가 원체 변속기가 달린 자전거다 보니 치륜에서 자전거줄을 벗기기가 말째였다.손에  기름칠을 해가며 바퀴를 요리조리 조절해 가서야 겨우 치륜에서 자전거줄을 벗겨 내는데 성공했다.그러고 나니 뒤바퀴도 차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였다.나는 나중에 부품이 혼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품을 부위별로 집결시키여 놓았다.      다음 자전거 바퀴에서 다이야를 벗겨내는 작업에 들어갔다.전에 자전거 수리부에서 기술자들은 도레이바를 다이야 밑에 밀어놓고 칼로 돼지배를 다르듯이 자기쪽으로 끄집어 당기는 것이였다.이때 관건은 다이야 내피의 손상을 피하는것이다.마구 잡이로 도레이바를 끌어 당기다는 내피가 찟기기 쉽다.고맙게도 다이야와 내피를 사니 공장측에서 엷은 숫가락 같이 생긴 다이야를 벗기고 씌울 때 사용되는 공구를 사은품으로 보내주었다.공구가 있으니 벗겨내기가 한결 쉬웠다.      새로 산 다이야에 내피를 밀어 넣고 공기를 어느정도 불어 넣었다.그리고  방치로 바퀴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그래야만 내피와 외피사의에 주름이 없어지고 내피가 제자리를 찿게 된다.다음 바퀴의 공기를 빼내였다.그래야 바퀴에 씌울수 있는 공간이 생기게 된다.먼저 바퀴의 바람을 주입하는 구멍에 공기주입 주둥이를 꼽아 넣고 바퀴를 한쪽 방향으로 돌려 가며 다이야를 메우기 시작했다.마감으로 엷은 숫가락 처럼 생긴 공구로 힘을 넣어 다이야를 번지지 용케도 다이야가 바퀴위 제자리에 올라 앉았다.      뒤바퀴 다이야 엮시 같은 방법으로 바퀴에 메웠다.이제 나머저 일은 바퀴를 자전거 몸체에 안장하는 작업이다.분해 할때 미리 안장작업을 고려 하여 부품위치를 잘 관찰했기에 안장작업도 무난히 진행할수 있었다.자전거를 도로 번져서 제자리를 잡은후 나는 공기펌프로 바퀴에 바람을 주입하였다.새로 산 내피여서 인지 바람도 쌩쌩 잘 들어갔다.어느정도 주입한 후에는 또 방치로 다이야를 톡톡 두드려 주면서 내피의 위치를 다시 한번 고정시켜 주었다.      다 수리된 자전거를 바라보노라니 저도 몰래 흡족한 웃음이 흘러나왔다.나도 해낼수 있는 일을 련 몇일 고민했었다.나는 새로  다이야를 메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보았다.자전거가 한결 탄탄해지고 가벼운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이제 나는 또 이 자전거를 타고 새벽길을  쏜살같이  달릴것이며 아름다운 우리 고향의 이곳저곳 구경에 나설것이며 운동으로 튼튼한 몸을 달련해 나갈것이다.   새로운 만킬로메터를 기약한다.
149    로천영화와 함께한 나날들 댓글:  조회:982  추천:1  2022-01-17
우리 마을에서 로천영화가 흥행한 시기는 아마 지난세기 70년대 중반이였을 것이다.당시 대대지도부에서는 촌민들의 문화생활을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영사기 한대를 구입했고 또 전문으로 방영원과 번역원를 배양하였다.문화생활이  극빈했던 그 시절에 로천영화를 방영하는 날은 온동네의 잔치날이나 다름  없었다.    하학하고 귀가 하던 길 저녁에 마을에서 영화를 돌린다는 소식을 입수하면  그보다  기쁜 일이 따로 없었다.하긴 저녁녘이 될때면 의례 대대에서는  유선방송을 통하여  영화소식을  홍보했지만 몇시간 앞서  소식을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시절 가장  많이 방영한 영화로는《지뢰전 》,《갱도전》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때만 해도  "4인무리"가 문화전선에서 살판치던 때라 많은 영화는 본보기극이였다.많은 본보기극 영화는 문화대혁명전에 출품되였던 예술영화를  재창작한 것들 인데 례를 들자면 《홍색랑자군 》《 홍호적위대》《평원유격대》등이다.조선족 소학교를 다니던 우리 또래 친구들에 게는  알아듣기 힘든 경극가사와 대사 그리고 과장된 표달방식이 리해하기 힘들었 다.하지만 그 시절 문화대혁명전에 출품된 많은 우수한 영화들은 독초라는 판명을 받고  방영이 금지된 상태라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경극영화건 예술영화건  그저 영화를 볼수있다는 사실만 으로도 우리는 좋았다.결국 영화는 영화대로 잔치는 잔치대로 치러지는 판이였다.영화하는 날에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우리 또래 친구들은 쪽걸상이나 비닐방막 그것도 없으면 하도 못해 벼짚단이라도 챙겨가지고 대대마을로 뛰여갔다.한것은 일찍가야 좋은 자리를 차지 할수 있었기 때문이였다.그때는 마을에 애들도 많고 어른들도 많았다.매번 영화하는 날은 진짜 잔치날같은 분위기였는데 어른 아이 할것없이 빼곡히 모여 앉아 목을 빼들고  영화막을 지켜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닦은 해바라기며 옥수수 같은 먹거리를 가지고 갔는데 그 고소한 냄새가 사람들로 하여금 코를 벌름거리게 하였다.어떤 사람들은 아예 영화에는 관심이 별로 없고 코를 구르는가 하면 어떤 애들은 영화구경왔다는것이 아예  부모무릅을 베고 자고 있었다.    한번은 고개 넘어 광흥촌에서 《정찰병》이란 영화를 한다고 하여 나는 기어이 큰형님뒤를 따라 갔다.캄캄한 밤에 꼬박 한시간을 걸어 갔던 것이다.그 영화는 혁명적본보기극과는 완전히 다른판 이였는데 이름난 영화배우 왕심강이 주역을 맡고 있었다.왕심강을 어떻게 알아 보았냐 하면 우리 외삼촌집에 문화대혁명전에 발매했던  10대명배우 사진에서 본적이 있기 때문이였다.영화는 우선 이야기 자체부터가 남자애들의 호기심을 잡는 정찰소재였고  배우들의 연기 또한 너무도 진실하여 관객이 막  영화속에 끌려 들어가는것 같았다.지혜와 담략으로 적들과 싸우는 우리 정찰병들의 이야기는 어린 내마음을 쥐었다 놓았다기 충분하였다.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너무 피곤하고  자부럼이 몰려와  몇번이고 번저질번 하였다.    어릴때는 영화를 보고는 그 시늉도 잘 따라 하였다.우리 웃동네 아이들은 《10월의 레닌》에 나오는 장면들을 모방하여 쩍하면 전투놀이를 조직 하였다.웃학년의 큰 애들이 와씰리역을 맡고 우리 또래 애들은 홍군과 백군으로 편을 나누어 전쟁판을 벌리는것이다.군관역을 맡은 애는 나무권총을 꼬나들고 "동지들 나를 따라 돌격"하며 고함도 지르는데 제법 진짜 영화에서 나오는 전쟁판을 떠올리게 했다.홍군과 백군은 나무 꼬챙이를 휘두르며 박투를 하는데 전혀 사정을 두지 않았다.군관역을 맡은 애들은 새끼줄끝에 나무토막을 비끌어 매여 놓고 시시로 전화로 지시하는 시늉을 하는가 하면 또 병사역을 맡은 애들은 사령부로 달려가 시시각각 전투상황을 회보 하기도 하였다.연출도 없고 씨나리오도 없이 벌어지는 전투놀이 였지만 우리는 너무도 진지하게 맡은바 역을 잘 해나갔다.    봄 여름 가을철에는 로천에서 영화를 방영했으나 추운 겨울에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하여 방영원은   경운기에 영사기와 영화막을 싣고 낮에 각 소대로 다니며 혹은 집체호에서 혹은 창고같은데서 영화를 돌리였다.그런 덕분에 같은 영화를 여러번 관람할수 있게 되였다.《도강정찰기》란 영화를 나는 하루에 세번본적도 있었다.형님친구의 알선으로 영화 《도강정찰기》번역대본을 얻어  보게 되였는데 너무도 재미있어  두번이나 베끼여 두었다.그러니 보니 대사를 줄줄 외울수도 있게 되였다.   촌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일반적으로 오래된 영화가 대부분이 였다.그러니 새로 출품된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야 볼수 있었다.내가 셈이 들어서 처음으로 시내 영화관에가 관람한 영화는 조선예술영화 《금이와 은이의 운명》였다.영화관람 하는 내내 은이의 기구한 운명때문에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몇해전 연해도시에서 사는 친구와 함께 그의 고향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동네 구경을 끝내고 나니 친구 말이 이동네에 삼촌으로 모시는 분이 계시는데  인사하고 가자고 하였다.주인되분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집에 들어서자 나의 눈길을 바로잡은 것은 탁자위에 진렬해놓은 골동품에 가까운 영사기였다.    아.그렇게도 나의 호기심을 끌었고 우리에게 기쁨을 선물하던 영사기가 아닌가.그처럼 숭배에 가깝던 영사기를 40여년 세월이 지난 이때에 이처럼 가까이에서 보게 된것이다.보매 주인장도 당년 로천영화의 충실한 관중인가 보다.얼마나 로천영화를 못잊었으면  집에다 까지 영사기를 진렬해 놓았을가.   로천영화와 함께한 사람들은 공동의 언어가 있고 공동의 회억을 가지고 있다.그것은 바로 비록 가진것이 적어도 영화로 세상을 내다보고 영화로  꿈을 꾸고  영화로 생활을 꾸며 간 것이라 생각한다.   아.잊지 못할 70년대 로천영화여!
148    포도풍년 댓글:  조회:896  추천:3  2021-10-15
포도풍년      내가 어릴때에는 포도는 귀한 과일에 속하였다.우리집이 살고 있던 소영 웃마을에는 호수가 몇십호나 되였지만 포도 나무를 재배하고 있는 집은 한두호밖에 되지 않았다.그러다 보니 어릴적에는  어찌가다  포도 한송를  맛볼수 있었다.      우리 마을에 황씨성을 가진 할아버지가 계기였는데 바로 그집에서  울안에 포도나무를 재배하고 있었다.우연한 일치라고 할지 그집의 큰 식장에도 포도송이 그림이 그이여져 있었다.소학교때 그 할아버지의 외손자가 나와 동갑이자  한학년에 다니였으니 종종 그집에 놀려 다닌적이 있었다.그때 깊은 인상을 받아서 인지 어른이 되여서도 포도는 나도 몰래  나의 눈길을 잡았다.후일 알게된 일이지만 포도는 다자다복을  상징 한다고 한다.          2002년 마반산에 초가집 한채를 산 뒤 그 어느날 나는 서쪽에 자리잡은 가산을 둘러보았다.낮으막한  산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아니 글쎄 오래동안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포도나무 두 그루도 보이였다.나는 대뜸 흥분되였다.나에게도 포도나무가 생긴것이다.아.나도 포도나무 주인이 된것이다.        2005년에 한국에서 일하던 형님이 연길에 돌아와 반년 정도 머무르게 되였다.형님은 동생을 생각하여 아예 마반산에 행장을 풀고 계시면서 이것저것 손질해주기도 하고 필요한것들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그중에 아주 력사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산에서 자라던 포도나무를 집으로 들어오는 길옆에 옮계 심은 것이다.그리고 형님은 포도달대 삼아 나무정자를 짓어 놓았는데 한여름 정자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그뒤 길수리하면서 정자는 담밖으로 철거하게 되였고 나는 달리 철근으로 포도 달대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집 포도는 야생포도라 과동할때 땅에 파뭇지 않아도 되였다.해마다 어느정도 전지만 해주면 용케도 포도가 잘 열리였다.앞집의 주인이 말했다."이집 포도는 이상하게 별로 관리 안해도 잘 달린다".그러고 보니 내가 축복받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올해 봄에는 동생벌이 되는 친구가 와서 과일나무들을 전지해 주었다.친구네 집에는 여러가지 과일나무들이 있는데 7_8월이면 나는 그집에 왜지따려 가기도 한다.친구는 과일농사로 말하면 전문가 수준이다.물론 친구집에도 포도나무 여러대가 재배되고 있다.      금년 청명휴가때 친구가 집적와서 여러가지 과일나무를 전지해주었는데  와중에는 포도나무도 포함되였다. 전지한 포도나무를  보고 동네 어른이 말했다."너무 심하게   추려 버렸어". 굵은 줄기 몇가지만 남고 어린가지는 기본상 잘라버린것 같았다.  찬찬이 들여다 보려니 다리만 있고 팔과 손이 없이 앙상한 몸뚱이를 가진것이 그리 탐탁하게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것이 무슨 대순가. 많이 열리나 적게 열리나 나는 거기에는 별로 상관이 없다. 내가 관심하는것은 오로지 우거진 포도넝쿨과 친구들이 둘러앉아 이야가를 나눌수 있는 그늘이다.사실 지난해 강냉이 철에 우리동창들이 마반산에서 강냉이 축제를 가지였는데 바로 이 포도넝쿨아래에 상을 차리고 음식을 나누었다.포도넝쿨의 그늘은 내가 새로짓은 정자보다도  더 시원하였다.한것은 정자는 양철기와를 올려 열을 받는  반면 포도넝쿨은 그 포도의 넓은잎사귀와 포도송이들이 해볓을 가리워 주기 때문에 시원한 것이다.       마반산과 연길도심은 기후차이가 난다.시내의 포도가 잎사귀를 내민지 한 열흘되였는데도 우리집 포도나무는 아직 움도 트지 않았다.“원일이지?"이 친구가 너무 과도하게 전지해서 인가?" 하지만 이미 엎질러 놓은 물이라 별 방도가 없다.만물은 다 자기의 생장법칙이 있는것이다.5월중순에 들어서니 제법 싹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뒤로는 언제 그랬냐싶이 포도잎이 잘도 나왔다.나는 더 확실히 그늘을 확보할 목적으로 검은색 비닐 그물을 두겹으로 포도넝쿨 아래를 막아주었다.       나는 친구가 알려준대로 포도송이가 나오는 즉시 순을 따주었다. 포도가 달리면 그 앞부분의 줄기를 끊어버려야 영양실조를 줄일수 있다고 한다.그대로 내 버려두면 한해에 햇순이 4메터도 넘게 자란다고 하니 포도가 영양섭취를 못라게 되여 결과적으로 포도알이 성기고  작아질수 밖에 없다. 다음 필요없는 포도 손은 다 따버리였다.포도손도 많은 영양을 섭취한다고 하니 말이다.       매먼 마반산에 갈 때마다 나는 포도순을 주는것을 잊지 않았다.철근으로 만든 포도 달대는 아주 든든한대 무거운 포도넝쿨을 거뜬히 받들어 줄수  있었다.나는 달대밖으로 나가는 순은 모조리 따버리였다.장장 온여름을 경과 하면서도 달대 안에 검은색 비닐 그물을 쳐놓았기에 도대체 그 안에 포도가 열리였는지는 알수도 없었다.당초에  포도수확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맛볼정도로만 수확하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이다.내가 관찰한 결과 그물이 막히지 않은 달대 아래쪽에 포도가 여러송이 달렸는데 그 자람새가 아주 좋았다.      더운 여름에는 포도 넝쿨이 우리집주차장으로 변신한다.놀려온 사람들은은근히  먼저 포도넝쿨아래에 차를 주차하려는 눈치다.하지만 여러분도 짐작이 가련만 그것은 안해의 전용 주차장이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포도는 진한 남색으로 변한다.처음에는 푸른포도 송이가 연한 자주색으로 변하는데 탱탱한 알알의 포도알은 진주같이 아름답다.좀더 지다면 짙은남색으로 변하고 다음엔 포도껍질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그때면 포도가 한결더 시원하고 달콤하다.우리집에 드나드는 사람마다 포도나무에서 포도 몇알씩 뜯어내여 입에 넣는것이 관례다.내가 자주 순을 준 덕분인지 금년 포도는 왕년에 비하여 알이 촘촘하고 굵고  달았다.국경절을 지나고 나면 포도맛은는 절정을 이루는데 사람만 좋아하는것이 아니고 까치도 좋아 무리지어 포도나무를 습격한다.       국경절 휴가 마지막날 나는 포도 달대에 매여 놓았던 검은색 비닐 그물을 철거하기로 하였다. 먼지를 막기위하여 채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나는 사닥다리에 올랐다.봄에  비닐 그물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을 방지하려고 쇠사슬줄 촘촘이 매여 놓았더니 철거작업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밑으로 부터 위로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가노라니 웬지 머리위에 묵직한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뭐지하고 머리를 드는 순간 나는 희열에 빠자고 말았다.포도송이들이 마른 잎사이에  빼곡히 달려있는데 난  이렇게 많이 달린 포도를 처음 보았다.주섬주섬 그물을 다 철거하고 사닥다리 에서 내려와 올려 보니 그야말로 가관이 였다.글쎄 우리집 포도나무에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빼곡히 열려 있었다. 나는 이때 불현듯 "无心插柳柳成荫"이란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집 포도는  살뜰한 대접을 받지도 못했어도 가을이 되니 나한데 이토록 많은 맛나는 열매를 선물해주었다.나는 수확의 희열에 빠지고 말았다.그물안에 둥지틀고 있던 새들이 퍼드득거리며 날아 예고 이름모를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울려주었다.진짜 세외도원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런 정경이 아닐가 싶다.       내가 우리집 포도풍년 상황을 위챗에 올렸더니 모두들 풍년이라며 즐거워하였다.물론 포도따려온 친구들도 많았다.아마 100근의 포도는 쉽게 수확할것 같았다.혼자 먹으려고 재배한 것이 아니고 다 같이 나누어 먹자고 한일이라 나는  더큰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147    어머니의 재봉침 댓글:  조회:1025  추천:0  2021-07-08
  어머니의 재봉침        옛날에는 집에 재봉침 자전거 라지오 벽시계가 있으면 생활이 괜찮은 집으로 여기였다. 70년대 초에 우리가 살던 마을에서 한공에   70전좌우 했으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허리휘도록 일해도 일년농사 수입이라고 해봐야 100원이 되나 마나 했다.  그러니가정기물을 갓춘다는건 너무도  힘든 일이 였다.      우리 집에는 내가 태여나기 전에 재봉침이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발로 디딛는 재봉침이 였는데 어머니가 사용하기 불편하여 한마을에 사는 여느집과 손재봉침과 바꾸었다고 한다.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 쭉 어머님이 손재봉침을 다루는것을 보아 왔다. 우리집 재봉침은  상해에서 생산한 비인표로서 아주 좋은 제품이였다.      손재봉침은 덮개와 재봉틀로 나뉘는데 평소에는 덮개로 덮어 놓겠금 되여 있었다. 그리고 사용할때는 보통 재봉틀을 덮개위에 올려 놓는다. 어머님는 이재봉틀로 얼마나 많은 옷가지들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재봉일을 하게된 주요 원인은 6명이나 되는 가족성원들의 복장을 손수 해결하기 위하여 서였다. 지금은 기성복이 너무 많아 오히려 돈 있는 사람들은 맞춤복을 선호한다만은 그때 세월에 기성복은 수입이 적은 집으로 말하면 사입기 힘들었다. 어머니는 한푼이라도 절약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복장을 손수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려서 기성복이라는걸 별로 입어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재봉기술이 좋았다. 짬짬의 시간을 리용하여 재봉침으로  우리의 옷을 만들었고 또 해진  옷가지들도 기웠다. 특히 당시 복장들은 면직으로 된것이 많았는데 얼마 입지않아도 해 지기 일수 였다. 그리고 자식들은 키가 커가던 시절이라 바지는 얼마 안되여 가랭이를 잇어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길을 거치면 낡은 옷가지나 바지도 금새 보기좋은 옷과 바지로 탈바꿈 했다.      어릴때 나는 어머니 따라 장에 자주 다니였다. 장에가서 팔것이라고 해야 집에서 자란 채소와 살구 같은 것이 고작이 였다. 장을 보고 나면 어머니는 당시 아래 개방지에 위치한 소영공사합작사 같은 곳에 들리여 천을 끊었다. 내가 처음으로 입은 비날론으로 짓은 바지는 소학교5학년때 어머니가 손수 재봉하여 만든것이 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입고 학교에 간날 그만 무릅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그때는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면 학급에 운동장애서 뛰여다니며 놀이 하였다. 우리 학교는 민족학교였는데 내가 한족애들과 장난치다가 번저져 새 바지를  땅바닥에 긁어 구멍낸것이다. 너무 분통하여 다짜고짜로 싸움이 붙었는데 두아이는 서로 엎치고 덮치고 하며 땅바닥에서  뒹굴었다. 결과적으로 분풀이는 했지만 바지를 판낸것은 기성 사실로 되고 말았다. 정심에 집에 돌아와 울럭거리며 어머니 한테 이야기 했더니 괜찮다며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내가 아까워 하는것을 알고 어머니는 인츰 바지 수선을 하였다. 안쪽에 천을 덫대고 손으로 기웠는데 찬찬히 보지않고서는 흠집을 발견할수 없었다.      촌에는 재봉침을 빌려 쓰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비록 아끼는 재봉침이였지만 인품이 좋은 어머니는 기꺼히 동네분들이 집에와서 쓰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다 보니 우리집에 와서 재봉에 대해 담론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어머니는 년세가 들면서 눈이 어두워 지기 시작하였다. 재봉실이 끊어지면 바늘에 실꿰기 힘들어 하였다. 그러면 내가 얼른 실을 꿰여 드리였는데 그러면 그토록 즐거워 하였다.      어머니는 보통 일찍이 일어 났다.   일찍 일어나서 실광주리를 앞에 놓고 뭘 깁는다던가 가위로 천을 재단하기도 하였다. 어머니 한테 재봉침은 보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우리집으로 말하면 큰 기물이였다. 재봉침이 있으므로 하여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손수지은 의복을 입을수 있었다.        어머니는 생전에 너무 많이 고생하여 60세를 일기로  일찍 돌아 갔다. 주인을 잃은 재봉침은 한동안 우리 집 웃방에 덩그라니 방치되여 있었다. 후일 누님이 어머니가 쓰던 재봉침을 가져다 다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지금 가정에서 굳이 재봉할 필요가 적어지게 되였다. 누님도 이젠 재봉침을 쓰지 않는다.       얼마전에 매부를 만난 자리에서 지금도 그 재봉침이 있는가고 물으니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너무도 기뻣다. 어머니가 애용했던 재봉침이 아직도 있다니 마치 갑자기 어머니의 사랑의 손길이 느끼여 지는듯 했다.      이제 내가 재봉침을 마반산에 가져다 잘 보관하고 또 오래도록 간주할것이다.   울 어머니 재봉침 어머니의 손길에 닿아 반들반들 해진 손잡이 매번 새옷을 만들며 그토록 좋아하던 어머니 울집에 희망과 행복을 가져다 주던 아. 울 엄마 재봉침
146    터전농사 인생농사 댓글:  조회:1033  추천:0  2021-07-06
  터전농사 인생농사         터전농사를 하면서  나는 느끼는 것이 많다. 어찌보면 자그마한 터전을 다루면서도 인생살이를 배우는같은 느낌이 들때도 종종 있다. 많은 사람들은 퇴직하고나서 재미로 밭을 부친다고 하는데 나는 그들과 비하면  일찍이 귀농한 셈이다.  한편으로 정상 출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농사일과 씨름했으니 말 이다. 그것은 내가 전원생활을 좋아하는것과 관계된다. 과거 외삼촌의 집에 놀려 가면 넓다란 울안에 심어 놓은 여러가지 채소가 푸르싱싱하게 자라는데 그렇게도 마음을 끌었다.       새는 작아도 오장 육부가 다 있다. 마찬가지로 터전은 면적이 적지만 밭을 다루는 각도에서 보면 어느한가지 농사절차를 빼놓을수 없다. 땅을 번지고 씨앗을 뿌리고 걷우어 드리는 등 모든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말이다. 옛날람들이 이야기 하다 싶이 알알의 곡식은 매 한방울의 땀인 셈이다.     우리 주변에 보면 어느 뙈기 밭을  일구고  채소를 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아마 중국에만 있는 독특한 풍경이 아닌가 싶다. 연길체육장 부근에는 원래 잡풀이 무성한 공터가 많이 있었다. 헌데 일전에 아침운동하려 나가며 보니 온통 채소밭으로 변해 버리였다. 어떤 사럼들은 오이도 심었는데 제법 먹을 만한 것이 열려 있기도 했다.       밭뙈기를 보면 주인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렸는지를 알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원래 널려 있던 벽돌쪼각이나 돌맹이들을 모조리 줏어내고 또 나무가지들을 주어다 울바자까지 둘렀다. 제법 자기집 울타리를 련상시키기도 하는데 주인의 심혈을 엿볼수 있었다.        터전 농사를 하며 심각하게 느끼는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농사란 풀과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풀을 제거하지 못하면 곡식이나 채소가 제자리를 차지 하지 못하고  눌리우게 살게 된다. 결과적으로 풀만 무성하고 곡식과 채소는 보잘것 없이 된다. 그러니 풀을 제거해야 함이 가장 큰 중대사로 나선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살초제로 풀을 제거 하는 방식이 많이 보급되였다. 옥수수를 례로 들면 파종하는 동시에 밭에 살초제를 뿌려준다. 물론 시비도 동시에 한다. 그러니 풀종자가 웬만해서는 빛도 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판이다. 다음 잎새가 세잎정도 나오면 또 살초제를 분무한다. 한40센치 키가 자라면 다시 한번 살초재를 분무하는데 이정도면 온 여름 포전관리는 끝난셈이다. 요지음 살초제의 가격도 높지 않다. 그러니 대면적의 밭을 다루는 집들에서는 농사를 기본상 기계화로 하고 살초제에 의거 한다고 보면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먹고 있는 채소나 곡식에 농약이 스며 있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농약이 들어가 있지 않는 곡식이나 채소를 먹으려면 유기 농법을 도입해야 하는데 대체적으로 말하면 거름은 동물의 분비물이나 아니면 비록 공장에서 생산되였지만 화학성분이 들어 가지 않은 유기 바료를 시비해야 한다. 가격이 만만치 않다. 풀은 손으로 뽑거나 호미로  매여야 는데 그 신고함이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매주 주말이면 촌에가서 터전의  기음 매는데 풀의 생명력에 감탄할 뿐이다. 매여도 매여도 끝이 없다.       농사하면서 터득한것이 또 한가지 있는데 땅은 거짓말 할줄 모른다는 것이다. 기음 매기가 신고 스럽다고 대충하면 풀은 당금 자라난다.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어떤 친구들은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얼렁뚱땅한다거나 대충대충 얼버무리기도 하는데 상급의 감시에서 벗어 날 때도 종종 있다. 하지만 농사에서 땅만은 속일수 없다. 잘하면 잘한만큼 내여주고 안하면 안내주는것이 법칙이다. 옛날에 자본주의 독초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 매우 지당한 말씀이다. 뿌리를 재거 하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를 속이는거나 똑 같다. 땅은 말할것 이다. "자네가 나를 속이려구 어림도 없지. "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들은 소유의 지름길을 선호한다. 기초기능을  단단히 련마하지 않고 쉬운 방법을  다시 말하면 두점사이의 직선거리를 택한다. 인생이란 파란곡절 많은 과정이다. 그 과정을 회피하노라면 언젠가는 다 물어 주게 되여 있다.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남을 속일수는 있지만 자기 만은 못 속인다. 속담에  란우총수( 滥竽充数)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노력을 한만큼 다 얻는다고 말할수 는 없다. 왜냐하면 방법의 정확성 이라 던지 객관적인 인소가 성공의 여부에 여러모로 작용하가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 차날수도 있다. 헌데 그것이 무슨 큰 대수인가.  노력하였기 때문에   문심무괴(问心无愧)할수는 있다. 속이 편해질수 있다는 말이다.      터전농사는 이렇듯 인생농사와  비슷하다. 부지런히 땅를 뚜지노라면 굶지는 않을것이요 운세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것이다. 요지음 마반산에가서 내가 지은 밭을 시진 찍어 위챗에 올렸더니 친구들이 진짜 농사군이 다 되였다는 말을 남기였다.      무슨 일이나 다 한가지다. 항상 준비하고 남보다 더 노력하면 먹고 사는데는 별로 지장이 없다.
145    아버지 사랑은 산이랍니다 댓글:  조회:758  추천:0  2021-06-20
수필 아버지 사랑은 산이랍니다   한영철            나의 아버지의 외모상 가장큰 특점은 키가 크고 얼굴색이 붉은것이였다. 얼굴이 붉어 지게 된 것은 중국 동북지역에 들어와서 고생하며  얼굴이 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고향 경상북도는 기후가 우리 동북보다 많이 따뜻한 곳이다. 지난 세기 30년대 말 아버지는 살길을 찿아 고향을 등지고 중국에 건너 온 뒤 목재판이며 광산을 떠돌면서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나무도 얼어 터진다는 한겨울 살림에서 일하며 얼굴이 붉게 얼어들었다. 그리하여 원래 하얀 얼굴색이 영원히 붉은 색으로 변하게 되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붉은 얼굴색은 고생 많던 지난날의 증명이였다.      품팔이로 살아가던 1947년 아버지는 흑룡강성 학강에서 해방을 맞이했고 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게 되였다. 참군한 뒤 료심전역, 평진전역에 참가하였고 부대의 명령에 따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자다가도 자주 총소리,대포소리에 잠에서 깨여난다고 했다. 그만큼 가열처절했던 전투가 남긴 휴유증이였다. 조선 정전협정뒤로 연변에 오시였고 그뒤로 소영에 행장을 풀고 가정을 이루었다. 전에 우리 어머니와 친척처럼 가깝게 지내는 집이 있었는데 그집 할아버지가 나보고 그때 마을사람들은 군복을 입고 소영에 온 너의 아버지를 '붉은 군대'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성격이 매우 락천적이였다. 동네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곧잘  우스개를 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였고 아주 소탈하고 상냥한 분이였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별로 집에 계시지 않았다. 목재판이며 건축판 소방목 양봉장 인삼장같은 곳에 가서 장기로동을 하였다. 평소에 우리집에는 술이 없었다. 내가 술병을 들고 공소합작사에 가면 판매원은 나보고 웃으며 아버지가 집에 오셨냐고 물었다. 커서야 아버지가 밖에 나가 있는 원인을 알수 있었는데 밖에 나가 로동하면 공수가 높고 또 오래 일 할수 있어 다문 얼마라도 수입을 더 올릴 수 있기 때문이였다. 우리 자식 4명이 다 같이 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 어머니 두분이 그 뒤바라지를 할려니 한시도 쉴 사이가 없었다. 아무리 생활이 힘들고 몸이 고달프더라도 아버지는  내색을 내지 않았고 락천적이였다.         내가 어릴때 아버지는 산에 들어가 방목을 하였다. 생산대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소수래에 싣고 풀이 많은 곳을 찿아 막을 짓고 소를 방목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젊은이 여러명을 데리고 장안진 룡가대대 산속에 들어갔는데 그중에는 한족 총각 한명도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능숙하게 한어를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였다. 먼 후날 그 한족분이 나보고 하는 말이 전기도 없고 방송도 없는 산골에서 저녁이면 너무 답답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들에게 전쟁이야기를 해주는데 너무 재미 있었다고 했다. 후일 그들은 전화선에 레시바이선을 잇으면 방송을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산골에 살면서 방송도 없으니 가장 큰 난제가 일기예보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날씨를 모르니 제때에 소를 몰아 올수도 없고 생활에서 불편함이 많았다. 하여 레시바이를 구해서 전화선에 련결하였더니 정말로 방송이 흘러 나왔다고 했다. 소식도 듣고 노래도 듣을 수 있고 일기예보도 들으니 그이상 더  좋을수 없었다. 물론 남의 통화내용도 들을수 있었지만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좋은 일도 얼마 가지 못하였다. 전화반에서 전화에 잡음이 많아 선로를 검사하다가 방목장에서 사사로이 레시바이를 련결한 것을 발견하였다. 하여 혼쭐나게 훈계 받고 레시바이도 몰수되였지만 하도 태도가 좋아서 벌금은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소영대대 인삼장에 가서 여러해 일하였다. 인삼장은 하룡촌 농골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한달에 한번 쯤 집에 왔었다.  매번 집에 올 때면 산에서 나오는 가래토시며 더덕이며 고사리같은 산에서 나는 토산품을 가져 왔다. 하여 우리 집에서는 항상 산나물을 먹을수 있게 되였다. 겨울이면 옹노를 놓아 산 토끼를 잘 잡았는데 가죽을 벗기여 말리웠다가 합작사에 팔아 술을 사고 고기는 반찬으로 하였다. 온 겨울 두분이 삼장을 지키였는데 물이 없어 얼음을 녹여 밥도 하고 국도 끓이였으니 실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한밤이 되면 집지키기 개가 엄청 짖어대여 렵총을 들고 밖에 나가보면 메돼지무리들이 보였다고 한다. 여름이면 하룡촌 원정가지가 삼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오고가며 이야기라도 할수 있었지만 겨울의 긴밤을 보내려면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한사람이 집에 가고 나면 며칠간 인적없는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야 하는데 그럴 때면 고향생각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을 것이다.     하룡촌에서 소영으로 오려면 해란강을 건너고 또 부르하통하도 건너야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집에 오는 길에 강물을 건너다가 우연하게 큰 물고기를 발견하였다. 아마 누가 터친 남포에 정신을 잃은 물고기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허리를 넘는 강에 헤염쳐 들어가 그 고가를 잡았다.  강역에 나와서는 인츰 광주리에 담고 풀로 덮어 놓았다고 했다. 집에 오는데 자식들에게 물고기를 맛보 일 생각에 그렇게도 즐거웠다고 했다. 부모란 그렇다. 뭘 색다른 것이 있으면 먼저 생각 나는 것이 자식이다.       아버지의 몸에서는 군인으로서의 생활습관이 고스란이 남아 있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옷을 벗어 개여서 꼭 머리맡에 놓고 이불은 안으로 감쳐 놓았다. 장기간 전쟁가운데서 양성된 습관이였는데 그래야 찬바람을 막을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한테 자기용품은 꼭 고정된 곳에 놓아야 찿기쉽다고 말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군대습관으로 이불을 모나게 개였는데 자식들 한테 말 없는  좋은 교육이 되였다.      아버지는 자식교육을 중시하였고 교원을 존중하였다. 어려서 생활난으로 얼마 공부못한 것이 원이 되였다. 해방군시절 행군면서도 앞에선 전사의 행낭에 글을 붙혀 놓고 한자공부를 했다고 이야기 했다. 비록 아는 글자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 바쁜 번체자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에게 공부해야 운명을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하긴 아버지가 조금만 더 문화가 있었더면 부대에서 전업하여 연변에 왔을 때 여느 기관에 배치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엄한 교육이 있었기에 훗날 자식들은 3남1녀중 3명이 공무원으로 1명이 로동자로 근무하게 되였다. 아버지는 길에서라도 선생님들을 만나면 꼭 인사를 하였다. 그것이 본보기가 되여 나도 길에서 어르신들 만나면 바로 인사한다. 내가 초중에 다닐 때 한번은 학교에서  봄놀이를 가게 되였는데 선생님이 아버지를 요청하였다. 보배 찿기 등 유희항목이 끝나고 선생님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아버지는그날  매우 즐거워 하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일생에서 가장 즐거웠을 때가 자식들이 출세할 때였다. 누나는 중앙민족학원에 추천되여 갔고 큰 형님은 부대로 갔고 둘째 형님은 재무학교를 갔다. 부모님이 돌아간 이듬해에 내가 대학에 입학했고 후일 기관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아버지가 가장 격동되였을 때는 40여년 갈라져 생사마저 모르고 있었던 녀동생이 1981년 8월 일본에서 왔을 때였다. 오랍누이의 상봉은 장춘공항에서 이루어졌는데 눈물없이는 보지 못할 광경이였다고 큰형님이 말했다.       내가 연변일중에 다닐 때였는데 아버지가 몸이 편찮으셔 연길병원에 주원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나보고 병원에 와서 아버지병문안을 하라고 하였다. 그날 점심 병원병실에 들어가니 아버지는 침상에 누워계시였고 어머님이 침대머리에 앉아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년세가 60대 초반이였다. 나의 인상속의 아버지는 키꼴이 장대하고 언제나 억센 모습이였다. 그런데 그날 침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그렇듯 왜소해 보이고 힘이 없었다. 내가 아버지한테 몸은 좀 나으신가고 여쭙는데 아버지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왜 어린이 같이 우시냐고 한다.       고향을 떠나 갖은 고생을 해오다가 또 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전투하시다가 어머니를 만나서야 아버지는 비록 안정을 찾을수 있었다. 이제 딸과 장남은 결혼하였고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소식도 전해들을 수 있고 또 녀동생과의 력사적인 상봉도 실현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하였기에 좋은 일들을 이루고 나서야 몸이 허약한 것을 체험하신것 같았다. 그러니 몸이 피로하여 병상에 누우신 것이였다.      이제 자식들이 성인이 되고 살림이 좀씩 피울가 싶은 때에 어머님은 60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에 가시였다. 그 때 누님 나이가 30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의 눈에는 큰사람으로 보였다. 누나는 아버지를 도와 어머니 후사를 치루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누나 보고  막내는 시력도 좋지 못한데 어떻게 하나 공부하여 성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도 그해 가을에 돌아가시였다. 우리는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는 진짜로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였다. 꿈인가 사실인가 .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아버지는 정신상에서 매우 허전해하였다. 동거동락 30여년의 동반자 안해를 잃고 기운이 없어하였다. 없는 살림에 4명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려니 아버지는 좋은 의복 한 벌 입어보지 못하고 좋은 음식도 잡수어 보지 못했다. 남들은 고생 끝에 락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자식들을 성인으로 성장시키고 나서 그만 어머니를 따라 총망히 하늘나라로 가시였다. 아마 두분의 관계가 너무도 좋아서  떨어지기 싫어서 아버지가 쫓아갔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부모를 모신 친구들을 보면 부럽다. 특히 망내로 자라서 나는 부모님과 같이 한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중국말에 충과 효는 다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 형제들이 사업에서 성과를 내고 부모님한테 효를 하려니 너무도 빨리 떠나시였다. 지금도 고향마을에 가면 로인들은 자네 부모님들은 너무 일찍 돌아갔다고 아쉬워 한다.      아. 올해는 아버지가 태여난지 백주년이 되는 해이자 돌아가신지 36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인지 꿈결에도 아버지를 볼 때가 있다. 키가 크고 얼굴색이 붉고 연변말에 남도 사투리를 썩어 쓰시던 아버지, 뭘 좀 한다고 하면 손등을 긁히거나 옷을 째서 어머니한테 꾸지람 듣던 아버지, 자식들이 무슨 성과라도 올리면 그토록 즐거워 하던 아버지가 눈앞에 생생하다.      아버지는 겉은 강했으나 속은 불같이 뜨거운 분이였고 온갖 풍상고초를 겪어온 분이였다. 곤난에 부딛쳐도 언제  한번 내색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이겨내시였다.  그런 아버지가 계시였기에 우리 형제들 모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가질수 있었다.      오늘은 부친절이라고 위챗에서는 난리다. 나는 그저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으로 오늘 부친절을 보낸다.   아버지 우리 모두 잘 보내고 있습니다. 막내도 이미 쉰을 넘었구요. 하지만 아직도 아버님을 못 잊겠어요.   하늘 나라에서나마 부디 명절을 잘 보내소서.   
144    마음은 언녕 밭에가 있다네 댓글:  조회:996  추천:1  2021-04-08
       전에 룡정시가지로 들어가는 다리목에 큰 광고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춘종 하경 추수 동장"라는 큰 글자가 씌여져 있었다. 출근할 때마다  그 광고판을 보게 되는데 농촌의 생산과 생활 제반을 잘 반영한 문구라고 생각되였다.       춘종이란 봄에 씨앗을 넣는다는 말이 된다.  말은 비록 짧지만 내포되여 있는 함의는 깊다.씨앗은 봄에 넣어야 하되 너무 이러도 안되고 늦어도 안된다.농사일은 철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꼭 지켜야할 자연률 이다.  조상들은 자연과 어울려 생활하면서  언녕 무슨 계절에 뭘 해야 한다는 경험을 총화해 놓았으니 《제민요술》에 적혀있다.그러니 봄철에 맞춰 여러가지 춘종 차비를 하는것이 과학영농의 전제가 된다는 말이다.일단 씨앗을 넣어야 뭐라도 나올것이요 뭐라도 나와야 먹을것이 생기게 될것이 아닌가.그러니 춘종이 농경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는가를  잘 알수있다.      춘종하기 위하여 서는 밭에 널부려진 곡식대를 걷어 내야 하고 밭갈이도 해야 한다.땅이 고르고 부드러워야 씨앗을 넣어도 잘나오고 건실하게 자란다.옛말에 시작이 절반이라고 하지 않는가.아무리 바쁜 일이라도 시작하고 나면 앞이 보일 것이요 하노라면  방법이 생길것이다.       요지음 날씨가 따뜻해 지고 청명휴가를 맞게되니 사람들은 여러가지 휴가 계획을 세운다.어떤 친구들은 청명휴가를 이용하여 장백산 온천에 다녀온다 하고  또 어떤 친구들은 가까운 풍경구에 봄놀이를 간다고도  한다.하지만  나의 마음은 언녕 밭에가 있는 터라  청명휴가는 터밭을 정리할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것이다.      휴가 첫날  아침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친구 말이 몇일전 우리집 과일나무 전지는 다 해놓았는데 새닥다리가 없어서 포도나무  전지를 못했다고 한다.그러면서 친구는 지금 포도나무 전지하려  마반산에 가는 길이라고 하며 새닥다리를 준비해 놓으란다.아니 이렇게  고마울 친구라고야.        하긴 며칠전에 내가 먼저 그 친구한테 전화하여 지금 과일전지를 해도 되냐고 문의 한적이 있다.친구는 된다고 하면서 자기가 해주겠다고 말했다.요지음 류행어로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맏긴다는 말이 있다.과일나무에 대하여 생소한 내가 전지를 하기보다 이방면에 연구가  깊는 그 친구에게 부탁는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고 효률적이 라고 본다.        나는 전화를 내려놓기 바쁘게 차를 운전하여 마반산으로 향했다.방조해줄 사람이 먼저와 기다리 겠는데 꾸물거리는건 례의가 아니기 때문이다.지난 밤에 내린 비로하여 날씨도 쌀쌀하건만   친구가 일을 마무리해 주겠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친구네 집에는 과일 나무가 많다.여름 한철이면 왜지나무 사과나무 해탕나무 포도나무가 뜰안에 숲을 이룬다.모든 과일나무는  친구가 직접 전지를 하고 가꾸는데  전문가 수준이다.몇해전에 우리집 살구나무에 왜지나무도 접해주었다.한구루의 나무에 여러가지 과일이 달리는 모습만 상상해도  너무 즐겁다.       내가 도착하여 새닥다리를 내놓자 친구는  일손을 다그 친다. 이리 저리 관찰하며 포도 나무의 겉가지를  잘라준다.일 하면서도 신초는 어느 가지를  자르고 어느 가지는 남겨야 한다는 등 전문가 차원의  강의를  해준다.지난해 우리집 왜지 나무에는 꽃이 많이 피였다.기껏 기대하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과일이 어느정도 크더니 다 부실부실 떨어져 버리는 것이였다.친구의 분석에 의하면  땅에 영양이 부족한 탓인데  유기비료를 줘야 과일나무도 잘 자라고 열매도 잘 열린다고 한다.      전지가 끝나자 나는 친구의 분부대로  페인트칠을  찿아 전지한 나무상처에  골고루 발아주었다.이래야만 과일나무의 수분증발도 막을수 있고 또한 상처가 곱게 아물수도 있다고 한다.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항이다.      청명날 우리부부는 형님내외와 조카와 같이 소영에 모신 부머님의 산소를 찿았다.우리는  전통방식으로  가토를 하고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였다.부모님이 돌아가신지도 어언 36년이나  된다.그때 내가 한창 화룡고중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할때 였는데 안타깝게도 두분은 같은해에 하늘 나라로 가시였다.       금년 청명은 보기 드문  좋은 날씨였다.부모님이 생전일때 어머님은 매번 청명이 되면 오전에는 외할아버지 산소에 다녀 오시고 오후에는 마늘을 심으시였다.어릴때 기억으로는 청명날에는 비가 오는 날이 많았던것 같다.그래 서인지 당나라 시인 두목의 "청명"이라는 시구가 떠 오른다.        청명시절에 비가 구지구질 내리는데       제사길에 나선 사람들 애간장이 끊는구나      구슬픈마움 달래려고 술집을 찿는데      목동은 머리를 설려이며 행화촌을 가르키네        제사를 다 지내고 나는 인차  일하려고 마반촌으로 향했다. 오늘은 밭에 널려진 옥수수대를 거두고 묶어야 하는 등 할일이 많다.옥수수 밭의 면적은 얼마 안되지만 혼자 할려면 쉽지 않은 량이다.       얼굴에 먼지를 쓰면서 옥수수단을 묶는데 약한 다리에 침이라더니 새끼줄이 자꾸 끊어 진다.새끼줄이 너무 마른것 같았다.하여 나는 과거 농군들이 하던 대로 새끼줄에 물을 뿌렸다가 사용했더니  제법 힘을 감당해 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른손에 새끼줄의 한끝을 잡고 옥수수대를 끌어 안은 다음 웬손을 뻗혀 그  새끼줄 끝머리를 찿아 당기면  묶을 준비가 완료 된다.다음 오른 다리 무릅으로는  단을 꾹꾹 다져주면서 새끼줄을 조이면 단을 단단하게 묶을수 있다.나는 자기가 하는 동작에 어딘가 실농군의 일 맵시가 보이는것 같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하긴 뜨락농사를 해온지도 오래 되다 보니 흉내 정도는  잘 낸다.       옥수수대며 고추 가지대를 다 묶어놓았으니 이제 어디에 처리할가가 고민이다.방화철 촌에서는 일체 야외불사용이금지한다.진에서 온 간부들과 마을 촌민위원회 분들이 마을 입구에  검문소를 세우고 오가는 차량 운전자들에게 불주의를 시키고 또 전화번호도 등기 시킨다.과거에는 바람이 일지않는 아침에는  검불에 불을 놓는것이 허용되였으나 지금은  일체 금지다.      옥수수대를 처리하는것이 사실 촌에서는 큰 골치거리다.동네 어른과 어디곳에 처리해야  하는가 물어 보았더니 아무곳에다 버려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답은 나온 셈인데 뭘로 운반할가가 또 문제거리다.자가용은 바퀴가 달렸어도 화물운반에 들어서선 무용지물이고  지게에 지고 가져다 버릴려니  량이 많다. 동네 촌민들의 경운기를 빌리려니 말이 안나간다.       휴가 새번째날 아침  나는 어느 친구한테 전화를 넣었다.자네 오늘  뭘하오?  친구는 인츰 옥수수대를 버릴려고 그러냐며  되묻는다.잰짜 통하는 친구다. 딱히 오늘 내가야 하는것은 아니라고 말했더니  친구는 자기가 인츰 갈테니 나보고 빨리 내려 오라고 한다.그 친구에게는  피카차가  있어 원간한 물건은 운반이 가능했다.나는 집에서  정심먹거리로  소고기며 쏘세지 등을  구럭에 넣고 마반산으로  향했다.      내가 도착해서 보니 친구가 이미 정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성격이 번개불이다.내가 대문을 열자 친구는 차를 몰아 울안에 대였다.내가 밭에서 옥수수단을 안아 내오면   친구는 번쩍번쩍 들어 차에다 싣는다.우리는  손이 척척 잘 맞는다.마을에서 지정한 내버려야 할 장소는 우리집에서 멀지 않은 산 비탈의 큰웅덩였다.원래 친구가 옥수수단을 잘 다져 실었고 또  운전기술도 좋다보니 길에 쓰레기 한점 흘리지 않고  두번만에 운반를 끝내였다.친구가 큰 소리로 말한다.원래 부암골에 가져다 버릴려 했는데 가까워서 쉽게 했다고 .      10여년전 나는 집으로 들어오는 길옆에 키가작은 경관수를 두줄로 심어놓았다.여름철이 되면 둘째 형님이 보름에 한번꼴로 기계로 나무를 반듯하게 깍아주는데 마치 새파란 탁보를 친 상같다.우리집에 놀려 오는 사람들 마다 보기 좋다고 잘 가꾸었다고 혀를 찬다.하지만 경관나무는 손이 많이 가고 한여름에는 벌레가 끼는 등 결함도 있다.그리고 나로 서는   너무 오래 감상해 온 탓에  감상피로가 오는것 같다.하여 나는 친구에게 나무를  베여버리는 것이 어떻게냐고 물었다.그러자 친구는 대번에  오늘 저 나무를 베여 버리자구.그러면 길도 넓어지고 과일 나무도 잘 자랄거라고 한다.우리는 인츰 행동에 옮기였다.전기톱이며 낫이며 총 동원하여 경관나무들을를 베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건 밭갈이와 파종이다.친구는 이제 자가집 밭갈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집 밭을 갈아주겠다고 한다.친구에게는 큰 뜨락또르가 있는데 우리 뜨락만 한건 밭갈이에 반시간도 아니 걸린다.        밭의 옥수수대도 거두고 과일 나무 전지도 끝냈으니 봄차비 한단락은  매듭 지은 셈이다.올해 농사가 이미 시작을 떼였으니 나머지는 차곡차곡 순서대로  춘종 하경 추수 동장하면 될것이다.거기에 또 다정다감한 친구들이 도와주고 있으니 금년농사가  잘 될것은  번연하다.갈곳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사람은 오늘도 즐거운 사람이 아닐가.
143    수상과 회고 댓글:  조회:783  추천:1  2021-03-31
수상과 회고       오늘 "로인세계"잡지사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나의 작품《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였으니 4월2일 국제 호텔 3층회의실에서 가지는 수상식에 참석하라는 것이 였다. 정말 생각지도 못하였던 희소식이 였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그 사랑을 못잊어 창작한 수필이 수상 했다고 하니 내심으로 기쁘다. 그리고 편집선생님들의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나는 여러가지 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이 수상된적은 이번을 포함하여   도합 세번 이다.          첫번째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 연변일중을 다닐 때 쓴 작문이였다. 그때 쓴 작문의 제목이《나는 중국사람이다》라는 것이였다. 아마 우리또래 친구들은 본적이 있을것이다. 그때 나는 어느 잡지에서  길홍창장군의 이야기를 다룬 문장을 보게 되다. 1931년,항일지사 길홍창장군은 장개석의 핍박에 의하여 하야 하여 외국으로 《실업고찰》에 나서게 되였다. 배가 미국에 도착하여 길홍창장군은  생각지도  못한 련이은 강한 자극을 받게 되였다. 미국의 상등 호텔에서는 중국사람이라고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사람들에 대하여서는 신처럼 높이 받들어 모시는 것이 였다. 한번은 장군이  옷가지를 넣은 소포를 우편으로 국내에 보내게 되였는데 우정국 직원이 중국을 모른다고 하였다. 배동하여 갔던 사람이 장군하고 " 당신이 일본사람이라고 말했더면 례우를 받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길홍창장군이 당장에서"당신은 중국사람이여서 얼굴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중국사람이 된것이 영광스럽다"고 하며 호되게  꾸짓었다.        어느 하루 길홍창장군이 정결한 군복차림으로 뉴욕의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고의적으로 길을 막고"당신은 일본 사람이요?"하고 물어 왔다. 그러자 장군은  "아니요. 나는 중국사람이요"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대방은 "중국사람은 동아 병부인데 어찌 당신과 같은 웅장한 체구의 군인이 있을수 있소?"라며 시비를 걸었다. 이에 장군은 매우 분개해 하였다. 제국주의 자들이 중국인에 대한 기시에 항의하고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장군은 거주처로 돌아온후 약 반자길이의 표식을  만들었는데 그위에는 붓으로 "나는 중국사람이다"라고 한자로 쓰고 아래에 또한 영어로 표기하였다. 그뒤로 매번 거리에 나갈때면 장군은 이표식을 달고 사람들 사이로 활개치며 다니였다. 장군의 이러한 행동은 중국사람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되고 또 국격을 지켜나가려는 그의 절개를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이 문장을 보면서 고중생인 나의 가슴에는 뜨거운 피가 끓어 넘쳤다. 그래 중국사람으로 태여난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구사회에서 나라가 약하니 장군도 국외에 나가 기시 당하는것이 아닌가. 우리는 하루 빨리 현대화를 실현하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 나라가 강해야 우리들도 외국 사람들의 기시를 받지 않고 당당하게 살수 있다.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나는 단연 필을 들게 되였다. 어린 나이에 조국에 대한 격정과 사랑으로 작문을 단숨에 써내려갔다.         그해 나의 이 작문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주관하는 《중학생작문선》에 올라 수상을 하게 되였는데  반도체라지오와 조선문으로 된 세계명작 여러권을 선물로 받았다. 그날 출판사선생님들을 모시고 식사를 하게되였는데 내 일생에서 처음으로 참석한 연회석이 였다.        두번째로 상을 타게 된것은 지난해 가을《청년생활》응모작 《장마당 련정》이다. 근년에 나는 시간나는 대로 수필을 적어 조글로에 올리였다. 고중을 졸업하고 나서 기본상 조선문으로 문장을 적어 본적이 없어 수필을 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표기법이 아리숭한데 어느것이 준확한지 머리를 설레일 때가 많았다.  2018년 가을에 조선글로 된 문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점점 줄어드는 우리글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우리글의 명맥을 이어가야 겠다는 사명감 같은것이 나를 핍박하였다. 글의 질은 점차 올리기로 하고 일단 문장쓰기에 돌입 했다. 짬이 나면 쓰고 고치고 역사에 역사를 다 했다. 그때 친구가 한국재외동포문학상에 도전해보라고 했다. 하여 나는 이왕에 적었던 아버지의 이야기을 소재로 하여 수필을 써 나갔다. 수필이 마무리 될즈음  나는 일단 문학을 전공한 선생한테 부탁하여 의견을 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애 말씀하기로 나의 직업현황을 봐서 이런 문장은 부적절하다고 귀띄움해 주었다. 하여 잠시 아버지 이야기를 접고  어머니에 대한 수필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쓴 수필이 《장마당 련정》이다. 어려서 어머니 꽁무니 따라 다니던 동시장의 정경이 훤히 떠올랐다. 다문 한푼이라도 더 만들려고 정심식사도 거르시던 어머니모습이 떠올랐다. 어느 한번 나는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며  자전거에 살구한광주리 싣고 장에 나갔다. 어머니와 나는 진종일 서로 대방을 찿노라 헤매였다. 그 따거운 장터에서 어머니를 만난 순간 나는 기쁨에 앞서  저주부터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마디 나무람하지 않고 자리를 찿아 장을 보았다. 그것이 다 누구를 위하여서 일까. 당신한테는 한푼의 돈도 쪼개여 쓰면서 오직 자식들의 공부 뒤바라지에 허리 휘여간 우리 어머니가 아니였던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머니 그땐 진짜로 철없었습니다. 미안 합니다. 지금도 장에 나가 로인들이 쭈크리고 채소를 파는 장면을 보면 저도 몰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추운데 오돌오돌 떨며 밖에서 장보는 노인들을 보면 나는 측은한 마음에  필요 이상으로 채소를 사가지고 들어 온다.       글이 마무리되자 《청년생활》잡지에 기고 하였는데 글쎄 년말에 금상을 받게 되였다. 나는 너무도 기뻐 어쩔줄  몰랐다. 나도 자기를 알고 있다. 수필에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 편집선생님들의 반복되는 수개를 거쳐온 작품이라 또한 감사의 마음 금할길 없다.        세번째 상을 타게 된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다. 《 장마당 련정》을 끝내고 나서 나는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수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될수록이면 민감한 상황은 피면하고 순수한 가정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서 였다.        사람은 다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이 있다. 고향이란 그 어느 고장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그 동네의 사람들의 대 집성이라 하겠다. 그래서 동년을 보낸 고향에 대하여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고향이라고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님 동생들과 한가마밥을 먹던 정든 고향집 풋풋한 사람내음이 풍기는 동네방네 어느 하나 빠질수 없다. 나의 아버지는 18세에 고향을 떠나 만주에 들어와 별라별 고생을 다 하였고 다시는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인생은 너무도 고생많은 인생이 였다. 해방군에 입대하여 장춘,무한 해방 전투에 참가하였고 항미원조에도 참가하였다. 전쟁뒤로 조선은 분단되였고 다시 고향에 돌아갈수 없게 되였다. 내가 어릴때 아버지는 전쟁 이야기를 곧잘하시였다. 꿈에서도 콩 복듯한 기관총소리에 잠을 깬다고 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단순 남도 어느 한사람의 이야기 만이 아니다. 이민 1세로 중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의 집합 이다. 하지만 또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는 당신만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친인 한분도  없는 중국땅에서 고향생각인들 얼마나 했으며 친인인들을 얼마나 그리워 했을가.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30여년이 지난 2019 년 아버지의 고향땅을 밟은 나의 심정은 심히 격동되였다. 고향집 여기 저기서 나는 마치 아버지의 자취를 찿아 볼수 있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록 아버지는 생전에 귀향을 실현 못하였지만 우리 세대들이 그 혈육의 정을 영원히 이어갈것이다. 하여 오늘도 남도 조상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강들이 모여서 주야장천 바다로 흘러가듯 쉼없이 엮어지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수상한 글들은 별거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것 들이다. 세번의 수상은 어느정도 나의 습작에 대한 고무격려라고 본다. 이를 계기로 하여 더 좋은 글을 써낼것을 다짐한다.    
142    정월 대보름 댓글:  조회:873  추천:0  2021-02-26
정월 대보름       오늘은 정월 대보름날 이다.한족들은 보름이 지나야 설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며칠전 친구들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중의 한사람이 술잔들 들고 설문안을 했다.보름전이면 다 설인데 새해 복많이 받기를 축원한다며 말이다.아마 설명절을 작은설로 부터 시작하여 20여일간 이나  쇠고 또 매일 오늘은 뭘하고 내일은 뭘 먹어야 한다고 설정해 놓은 나라는 우리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조선민족으로 말할진대 오늘 아침 음식상에 꼭 올라야 하는 것은 오곡밥이다.나는 어려서 부터 보름날 아침 오곡밥을 먹는것을 불문률로 여기여 왔다.우리 집에서는 보통 입쌀 좁쌀 옥수수쌀 열콩 팥 등을 넣고 오곡밥을  지었다.아버지는 아침 일찍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어머니는 오곡밥을 안치였다.성어에 오곡풍등이라는 말이 있다.우리 선조들은 설이 끝나는 이날에 새해농사가 잘되여 오곡이 풍등하기를 기원했던것 같다.요지음에는 다섯가지 말린 채소로 료리를 하여 먹는 다는 설도 있다.이건 아마 연변식이 아닌것 같다.      뭐니 뭐니해도 보름날 아침 귀밝이 술을 마시던 때가 가장 인상깊다.어린이와 술은 원래 거리가 멀다.하지만 보름 날만은 례외였으니 어르신들이 어린애들 한테 술을 부어 준다.이 술을 마시면 귀가 잘듣긴다고 하는데 사실은 어른들의 바른 말씀을 잘 명기하고 밝게 자라나라는 기대라고 생각 한다.이처럼 우리민족은 술에도 좋은 념원을 담았다.      보름날을 말하면 윷놀이가 빠질수 없다.가을에 색상이 곱고 몸집이 큰 열콩을 골라두었다가 보름날이면 찿아내여 금을 긋고 모들 만들었다. 촌에서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는 온가족이 모여 앉아 몽이야 컬이야하며 윷놀이판을 벌리였다.그때는 형제들도 많고 친척들도 많아 명절이면 제법 잔치날이 였다.별다른 문화생활이 없던 시기라 한해에 한번노는 윷놀이가 집안의 화기를 끌어 올리는데 한몫을  하였다.      한족들은 보름이면 양걸이 춤판을 벌린다.촌에서는 양걸이 겨루기도 하는데 춤대오가 방대하고 춤사위가 멋진 팀을 선발하여 상을 주기도 한다.전에 흑룡강 목단강 에서 양걸이춤을 추는 장면을 구경한적이 있었다.각 촌에서 올라온 춤대오는 모든 장끼를 다 발휘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여념이 없다.녀성들은 중절모자에 담배 대통을 들었는가 하면 남성들은 나무다리를 하고 몸매도 날렴하게 여러가지 춤동작을 해댄다.과장된 복장과 몸놀림은 수시로 사람들의 웃음보를 자아 내기도 한다.도시에서는 보름을 계기로 하여 여러 양걸이춤  팀들이 각 단위를 돌면서 춤도 추며 새해를 축복하기도 하고고 연출료도 받는다.단위 대문에 들어서면 300원내지 500원 주는 데도 있는데 문제는 이팀이 나가면 또 저팀이 들어오는 것이다.결국 양걸이 대오는 명절이라는 명색을 내들고  한바탕 놀이도 벌리고  수입도 올리는 판이다.하여간 양걸이팀들도 이 기회에 한몫잡지 못하면 어디서  돈이 들어올 기회가 적다.하여 주유가 황개를 때리는 식이 되고 만다.       근년에는 보름에 달집태우기 행사를 벌리기도 하는데 한국에서 들어온 놀이다.주최측에서는 마른 나무를 쌓아 올려 초막모양의 집을 만든다.사람들는 새해의 소망을 담은 카드를 나무가지에 걸어 놓는다. 달이 떠오르면 달집에 불을 지피고 그주위를 빙빙돌면서 가정 여러분과  친척 친구들의 건강과 성공을 빈다.이런 행사는 보통 민속촌이거나 유람지에서 가지는 대형민속 달맞이 놀이에 속한다.외지에서 온 한족 유람객들은 처음 보는 행사라 희귀하다고 난리다.       정월 보름날이면 보통 온가족이 모여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새해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한다.얼마나 멋진 행사인가.정월 보름달은 유난히 밝기도 하다.도시에서 보다도 촌에서 보는 달이  더 밝다.환한 달빛에 사람의 그림자 마저도  또렷하다.보름이 되면 촌에서도 폭죽을 터치지만 도시사람들 처럼 요란하게 터치지 않는다.도시에서는 마치 경쟁하기라도 하는듯이 서로 더큰 소리나고 더 멋진  꽃불을 쏘아 올린다. 콩볶듯한 폭죽소리는 끝날줄 모르는데 마치 전투장 같다.좋아하는건 아이들이고 기뻐하는건 폭죽장사꾼들 이다.장사꾼들로 보면 맨날 보름이 였으면 하는 생각이 날것이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모두들 자기 일터로 돌아가 열심히 일한다.명절이 끝났으되 사람들은 또 새로운 출발하는것이 도리다.아이들을 공부도 시켜야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몸도 다스려야 한다.과거에는 보름전에는 신수리쟁이도 거리에 나오지 않았다.지금이야 도시에서는 설휴가가 끝나면 바로 출근하지만 그래도 시골에서는 보름까지  일하지 않는 습관이 남아 있다.      민족의 융합이라 할가 지금은 조선족들도 보름날이면 원소를 튀기여 먹는 집이 많다.원소가 지금은  아무때건 먹을수 있는 음식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보름음식이라 오늘 먹는 원소가 더 달고 고소한 같다.보름날 아침은  오곡밥에  원소 고사리무침에 두부가 들어간 미역국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는것이 제 격이 아닌가 본다.
141    2021년 해돋이 댓글:  조회:960  추천:1  2021-01-11
2021년 해돋이         오늘은 2021년 새해의 첫날이다.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새로운 분투목표를 내놓기도 한다.그중의  일례로 남자들은 담배를 끊겠다 던가 녀성들은 다이어트 목표를 내놓는다 던가 하는 작은 목표를 세우기도 한다. 그 실현 여부야 어떠 하던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는 면에서 아주 긍정적이다.목표가 없이 새해를 맞이하기 보다는 백배나 더 좋은 생각이라 하겠다.        언제 부터인가 사람들은 새해 해돋이를 바라보며 새해의 안녕과 념원을 기원는 방식을 취하였다. 특히 2000년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해돋이를 보며 새해를 맞이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21세기의 서광을 맞이한다 듣기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였다.그때를 계기로 하여 나는 해매다 새해가 되면 해돋이 보려 나서게 되였다.      올해도 나는 새해 해돋이를 볼려고 일찍  차를 운전하여 산으로 향했다.여러해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줄곳 모아산에 올라 해돋이를 감상하였다.모아산은 연길주변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해돋이 구경하기에 안성마춤 하다.헌데  사람이 너무도 많아 해돋이 구경을  끝내고  하산하기가 곤난 하였다. 저마다 차를 운전하고 등산하는 통에 모아산 주차장은 물론이고  공로까지 주차장으로 변해 버리기가 일수였다.교통이  막혀 도저히 차를 빼낼수가 없었다.여느해인가 우리집 세식구가 해돋이구경을 갔는데 차가 너무 막혀 아들과 나는 도보로 내려오고 안해는 길이 열리면 하산하기로 하고 내려온 적도 있다.그뒤로는 아예 지점을 바꾸어  일출이 아름답고 사람과 차량이 적은 곳을 찿아 다니였다.       올해 해돋이 구경은 해발고가 높고  공로를 옆에끼고 있는  청차관을 선택 하였다.나는 차를 운전하고 과학기술대학을 지나  청차관을 바라고  산등성이에 올랐다. 산을 쳐다 보니 아직 캄캄한 하늘 아래 많은 자동차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해돋이 구경에 나선 사람들이 이미 산에 올랐던 것이다.전에는 이곳을 찿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는데 자가용의 보급으로  해돋이 구경으로 청차관을 찿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아니 그 보다도 사람들의 관념변화가 가져온 결과라 함이 더 적절할것 같다. 더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도전을 꿈꾸며  새로운 기상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고취하기 때문일 것이다.참신한 변화라 하겠다.        산을 톱아 오르며 보니 평퍼짐한 곳마다 차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나는 좀 더 높은곳에서 해돋이를 감상할려고 비탈길로 차를운전하여 올라갔다. 갈림길이 헤여져있는 안성마춤한곳을 찿아  차를 주차하였는데 그곳에도 이미 차 여러대가 서 있었다.이제 남은것은 조용히 태양이 솟아 오르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을 감상하며 새해를 맞이 하는 것이다.      아침 7시가 지나자 동녘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그런데 오늘 따라 날씨가 흐리여 붉은빛과 재빛구름이 교차적으로 바뀌면서 저멀리 룡산정상은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그러다가 점점 붉은 빛이 강렬해 지더니 동녘하늘에 마치 진한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듯 검붉어 지였다.이윽고 해무리가 지면서 올해의 첫 태양이 올라올 모든 차비를 하였다.너무도 장엄한 시각이다. 오늘 해돋이는 아름답다 하기 보다 나는 장엄하고 힘있다는 느낌을 더 강렬하게  느끼였다.      차에서 해돋이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모두 차에서 내려 동녘하늘을 바라 일출을 기다린다.동녘 하늘이 점차 밝아지더니 어느 한  순간 붉은 해가 룡산을 박차고   힘차게 솟아올랐다. 태양이 솟아오르자 삽시에 천하가 밝아 지였다.우리 모두는 청차관에서 2021년 원단 일출을 목격하였다.사람들은" 와"하고 함성을 질렀다.그렇다.새해가 시작되였다.너나없이 흥분된 마음이다.우리는 새해에 많은 기대를 품게 된다.또 한해의 새로운 시작이 아닌가.       새로운 한해 가족의 건강하고 사업이 순리롭기를 바란다.친척 친우들의 건강을 축복한다.동녘 하늘에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여러분들께 새해의 인사를 전하였다.      일출구경을 나온 사람들을 보니 생각외로 젊은축들이 많았다.과거에는 나이가 이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 였는데 지금은 많이 변하였다.젊은이들이 새해 해돋이 마중에 나섰다는것은 과히 기뻐할 일이다.청년들이 새출발을  시도한다는 표식이리라.     다사다난했던 2020년은 코로나로 시작하여 코로나로 끝났다.가는길 험난해도 우리는 절때 포기란 없다.   두팔을 벌려 새해를 포옹하자.새해는 우리것이다.
140    년말총화 댓글:  조회:940  추천:0  2020-12-23
년말총화      동지도 지나고 이제 올해 남은 날이 며칠 없다.각 분야 에서는 년말총화로 다망하다.기관  단위들 에서는 책임제가 제대로 락실되였는지를 하나하나 체크하고 있다.어느 분야 어느 일터라도 쉽게 일할수 있는 곳이 없다.사람들은 우선 생계를 위하여 일터가 필요하고 다음 자기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서 마음 드는 일터가 필요하다.     친구사이 동창사이에서도 년말이라며 한번 앉자고 한다.여러가지 협회  동호회들도 년말 총결로 분주하다.덕분에 식당 사장님들은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린다.년초부터  코로나 때문에 식당 경기가 나빳는데 이제 년말에라도 한몫 잡아야 할때가 되였다.매부좋고 누이 좋은 격이다.요지음 관찰해 보매 사회단체들의 년말 총화가 더 화려하고 멋지다.재직에 눌러 있을 때는 모두 기률에 억매이기 싫다더니만 사회에 나가면 누구 먼저 단체에 가입하여 조직활동을 하는 같다.      한해 한해 넘어가면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변화를 격는다.애들을 대학에 보낸 중년축들은 분투에 분투를 이어 간다.진짜 숨돌릴 사이도 없다.방금 대학문을 나온 친구들은 직장에서 아직 목소리를 낼 형편이 아니지만 두눈을 또렷이 하고 회사의 변화를 주시한다.언제 기회만 잡으면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년장자들은 만년의 행복을 만끽한다.여러가지 협회에 참가하여 취미생활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각자가 할일이 있고 열심히하고 탕개를 늦추지 않는다면 좋은 생활을 누릴수 있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한해를 넘기며 우리는 감회가 깊다. 총화는 자기를 위한것이지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한것이 아니다.그저 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못당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좋아서 하는 사람을 못당하고 좋아서 하는 사람은 미쳐서하는 사람을 못 당한다고 한다.살아가면서 미칠듯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다.베토벤이나 반고흐같은 사람들은 사회에 위대한 작품을 남기였다.총화를 거쳐 어떻게 어느방면을 더 노력해야 겠다는 방향을 잡았다면 이미 절반 목적을 달성 한거나  다름없다.         나는  2020년부터 해돋이를 바라보며 새해를 맞이하였다.새해 해돋이를 볼려고 모아산 청차관 하룡촌 여러곳을 찿았다.혹여 시간을 어길세라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작업을 하고 가장 좋은 자리에서 해돋이를 보려고 캄캄한 새벽에 집문을 나섰다.한집식구 다같이 해돋이를 볼때도 있었고 안해와 같이 해돋이를 볼때도 있었다.해마다 바라는 꿈이 있었고 그것을 실현하가 위하여 노력하였다.우리는 다 그런것이다.내일은 오늘 보다 낫고 명년은 올해보다 낫으리라 확신한다.아니 그런 확신도 없다면 살아가는 동력은 어디서 올가.          동녁이 희붐히 밝아온다.    번뇌와 고민을 훨훨 털어버리자.새해는 새롭게 새날은 새 기상으로 맞이 하자.     
139    동지날 오그랑 팥죽 댓글:  조회:1104  추천:0  2020-12-22
동지날 오그랑 팥죽      오늘은 동지날이다.우리 조상들은 동지날 오그랑 팥죽을 해먹는 것으로 액을 막고 건강을 지키였다고 한다.사람들은 워신을 보고 오늘은 무슨 절기요  뭘 먹는 날이요 하는데  조상님들이  언녕 다 절기의 변화에 따라 뭘 먹으라고 권장해 놓았다.우리 선조들은 절기에 따라 생산 되는 가장 신선한 식자재로 음식을 하여 건강을 지키였으니 그 지혜가 대단하다.  새로 타작한 팥을 쇠가마에 푹 삼고 거기에  햇쌀가루로  빚어낸 알쌈을  넣고 부글부글 끓이면 맛 좋고 영양만점인 동지 오그랑팥죽이 탄생 된다.이 좋은것을 먹으라고 권장했으니 조상님들게 감사드릴수 밖에 없다.       추운 동지날에  뜨끈뜨끈한 오그랑팥죽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온몸이 따뜻해 지고 이마에서는 땀이 흘러 내린다.요지음은 집에서 오그랑팥죽을 끓이는 집이 적고 시장에가서 사다가 먹는 집들이 많다.지난해 동지날에 오그랑팥죽을 사려 하남시장에 갔었는데 사람들로 복새판을 이루고 있었다.하지만 진짜 오그랑 팥죽의 별미를 맛보려면 그래도 촌에 가야한다.       촌에서 쓰는 우리 조선족 무쇠가마는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솥이다.우선 가마가 커서 웬만한 식자재를 넣어도 넘쳐나지 않는다.그리고 가마솥 뚜껑이 무거워서 웬만히 끓어서는 끔쩍하지 않으니 고압솥 작용을 하는 셈이다.바로 이런 가마에 장작불을 때기에 촌에서는 맛나는 동지 오그랑 팥죽을 끓일수 있다.팥과 알쌈의 만남 너무도 환상적이다.알쌈을 넣었기에 쫀득쫀득한 식감이 나고 팥을 넣었기에 구수한 맛을 낼수 있다.우리 민족 음식은 대부분 그 무슨 조미료로 맛을 내는것이 아니라 식자재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맛을 살려내는것이 가장 큰 특점이다.      전에 어머니는 매년 동지가 되면 오그랑팥죽을 끓이는것을 법으로 알고 지키였다.어머니는 집에서 자신이 집적 농사한 팥을 정선하고 또 깨끗한 물에 여러번 씼는다.그리고 물에 불구어 놓았다가 팥죽하는데 사용하였다.쌀가루는 집적 방아간에 가서 가루 내였는데 그때만 해도 동네에는 방아간을 가진 집이 여러집이 되였다.나는 어머니 따라 발방아 찟으려 자주 다니였다.내가 방아를 찟으면 어머니는 잽싸게 손을 호박에 넣어 이리 저리 번지였다.혼자 발 방아찟을 때는 긴 막대기를 리용하여 호박안의 쌀가루를 휘저어 주었다.     어머니는 집에 있으나 밖에 마실을 다닐때나  매냥 깨끗한 옷차림을 하였다.여름철이면 머리에 흰수건이 두르시였고 동삼에는 털수건을 두르시였다. 아버지는 키가 크고 얼굴이 붉은 경상북도 분이였다.아버지는 늘상 군복차림을 하시였다.원래 해방전쟁과 항미원조 전쟁에 참가하였던 분이라 년세가 있어서도 허리가 곳고 발걸음이 빨랐다.     여러가지 준비작업이 완성되였다 싶으면 아버지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였다.원래 초가집이란 벽바람이 세다.밖의 찬공기와 가마솥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이 만나면  집안은 금새 뜬김으로 가득하여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다.그래도 어머니는 날랜솜씨로 알쌈도 빚고 다삶은 팥도 채에 걸러 낸다.다시 걸러낸 팥을 가마에 넣고 끓이다가 알쌈도 넣는다.이제 남은건 아버지의 장작때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어머니는 움에 들어가 배추김치며 갓김치 영채김치를 내온다. 뜨거운김이 물물 나는 동지 오그랑죽이 밥상에 오르면 우리는 숱가락으로 떠 먹기에 여념없었다.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며 오그랑 팥죽을 반찬삼아 드시였다.어머니와 아버지는 환한 미소를 짓으며 볼이 터지게 먹는 자식들을 바라 보았다.     오그랑팥죽은 뜨거울 때면 서로 엉키지 않지만 식은 뒤에는 하나로 굳어 버린다.오그랑팥죽은 밖에 내놓았다가 밤에 중식으로 먹으면 더욱 맛있다.속담에 식은죽 먹기라고 하더니 찬 오그랑팥죽 한그릇 먹기는 게눈 감추기다. 그시절 우리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던 오그랑팥죽이다.먹을거리가 부족하던 그 시절 한솥의 팥죽으로 집안은 그저 즐겁기만 했다.      이제 우리는 모든것이 상품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집에서 만들어 먹던 음식을 젊은이들은 만들줄 모르고  만들줄 아는 중년배들은 번거롭다고  장에 가서 사는 편이 많다.그러니 요지음 젊은축들이 민족음식에 대하여 관심이 적어질수 밖에 없다.      매냥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를 할수 없지만 조상들이 물려준 우리 민족음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연길에 락원떡방이라는 가게가  있는데 사장님은 젊은이다.여러가지 떡이며 반찬을 만들어 판매하는데 장사가 잘 된다.이런 분들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 민족음식이 지켜지는것이 아닌가 생각 한다.
138    벼짚 댓글:  조회:833  추천:0  2020-12-21
 벼  짚      전에는 흔하디 흔하던 벼짚이 요지음에는 웬만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썩장을 띄우는데 쓸려고 벼짚 얻으려 촌에 갔었는데 찿기 힘들다.과거에는  수전농사를 짓는 마을에만 가면 집집들에서 집채 높이 만큼 쌓아 올린 벼짚무지들을 흔히 볼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볼수 없다.지금 벼짚이 적어진 원인은 논면적이 줄어든것과도 관계있지만 제일 큰 원인은 바로 벼가을을 종합수확과기로 하기 때문이다.      종합수확기와  손가을의 가장 큰 구별점은 벼긁을 높게 남기냐  낮게 남기냐 는데  있다.벼긁이 높아지면 자연히 벼짚의 길이가 짧아질수 밖에 없다.게다가 종합수확기는 탈곡하는 방식도 일반 탈곡기와 다르다 보니 짧게나마 베여낸 벼짚이 수확기에 들어가서  분쇄되여 나온다.그러니 어디가서 온전한 벼짚을 구하기 힘들다.      전에는 촌에서 벼가을을 수작업으로 완성하였다.아침 일찍 농부들은 물병과 먹을것을 넣은 주머니를 들고  벼가을을  나간다.일단 논밭에 도착하면 먹을것이 든 주머니를 벼짚으로 가려 놓는데 그래야 시원한 정도를 보존할수 있다.햇볓이 쨍쨍 내리쪼이는 가을 농부는 허리굽혀 벼가을 하기에 여념 없다.스르륵 스르륵 벼을 베는 소리가 귀맛좋게 들린다. 묵직한 벼줌을 내려 놓을 때면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지만 마음은 즐겁다.한나절 가을 하고 나면 허리가 아프고 갈증도 난다.이럴 때면 일군들은 찬물도 마시고 사과배도 베여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어떤 사람들은 아예 베여 놓은 벼위에 벌렁 번드러져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휴식하기도 한다.      지금은 촌에는  일군이 적어서 벼가을를 기본상 종합수확기로 하고 있다.종합수확기를 리용하면 가을과  탈곡을 동시에  할수 있어 로동효률도  향상되고 비용도 절감할수 있어 좋다 .헌데 집집에서 종합수확기를 갖춘것이 아니기에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내가 방금 출근 할때 즈음 외삼촌네는 소영에서 논을 부치고 있었다.외삼촌과 외숙모 두분이 가을 하기에는 엄청 힘겨울 면적이 였다.하여 우리 4형제들과 매형 형수하여 총 여덟명이 동원되여  매년 국경절이면  가을 하기에 나섰다.아침 일찍 나가고 저녁 늦게까지 가을 하노라면  국경절 휴식일 4일이 훌쩍 지나고  가을도 휴식일에 맞춰 끝낼수 있었다.       농촌도거리를 한뒤로는 가을걷이가 빨라지였다.집체 농사할때 어느해인가 11월초에도 가을한적이 있었다.도거리 뒤로는 대부분 국경절을 전후하여 온 동네 벼가을이 끝났다.하지만 그 뒤에도 벼단을 묶어야하고 벼단을 하져야하고 또 실어들여야 하는 많은 일거리가 남아 있다.탈곡하고 난뒤 벼는 곡간에 넣고  벼짚단은 실농군의 손을 거쳐 집채높이 만큼 쌓아 올린다.요지음에는 종합수확기로 일하다 보니 여러가지 일거리를 한번에 끝낼수 있어 좋은 반면 벼짚단이 없어 지였다.       과거 벼짚은 용도가 많았다.    초가집들은 해마다 지붕을 올려주어야 한다.봄에 들어서면 아버지는 짬짬의 시간을 내여 짚으로 지붕 룡말루를 튼다.그리고 바람이 자고 잔잔한 비가 내리는 날 아침이면 우리는  동네 어른들과 같이 새짚으로  지붕을 올리였다.벼짚은 아래로 부터 위로 올라가며 깔아주는데 마지막에 새끼로 엮은 그물을 온 지붕에 씌워 바람에 짚이 날리는것을 방지하였다.제일 마지막에는 지붕꼭대기에 룡마루를 언저 비가 새는것도 방지하고 초가집의 멋도  더해 주었다.        벼짚으로 짠 포장용 가마스는 과거 촌의 주요 부업거리 였다.1970년대 촌에는 가마스틀이라는 것을 기본상  한집에 한대씩 갖추고 있었다.녀성들은 아침일찍부터 뚝딱뚝딱하며 가마스 짜기에 여념 없다.가마스 짜기에는 많은 벼짚이 수요되였다.남정들은 벼짚에 물을 뿜고 긁을 추려주고 새끼꼬기 등 허드레일을  전담하였다.우리집에는 새끼를 꼬는 자새가 있는데 아버지는 길게 꼬다가 허리를  앞으로 하며 날랜 동작으로 자새에 새끼를 감았다.며칠간 모아놓은 가마스는 소수레에 실어 공소사에 가져다 팔았는데 한장에 60전 정도였던 같다.그때 사돈집과 우리집은 어부렁집에서 살았는데 누나는 자다가도 옆집에서 가마스짜는 소리가 나면 냉큼 일어나 자기도 가마스를 짯다고 했다.무의식간에 로동 경쟁이 붙은것이다.       벼짚은 겨울철  소의 주요 먹거리 였다.겨울이면 벼짚을 썰어 소에게 먹이였는데 량이 많이 들었다.벼짚에만 의거 해서는 영양이 부족했음으로 두병이나 꽁깍대기도 같이 먹이였다.그때 가망가망 두병을 훔쳐 구워먹기도 했다.먹을것이 귀하던 세월이라 두운 두병도 별맛 이였다.지금은 부림소가 많지 않다.대부분 기계로 농사를 짓다 보니 역축에 대한 의뢰가 적어진것이다. 촌에 가면 간혹 소달구지를 볼수 있는대 거의 준문물정도로 귀한 물건이 된것 같다.나도 한대 멋으로 갖고 싶은데 구하기가 조련치 않다.       촌에서 벼짚은 다양하게 리용되였다.아버지는 벼짚으로 닭궁주리며 방석도 엮으시였다.지난해 배초구에서 벼짚공예축제를 한다고 하여 찿아가 보았더니 진짜 가관이였다.커다란 룡이며 사자며  벼짚으로 만든 여러가지 동물들이 논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전에는 벼짚으로 만든 짚신이며 키 집모형같은것은 보았지만 이처럼 대형공예품은 처음 보았다.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너무도 신나서 여기저기서 사진찍기에 여념 없다.        벼짚과 우리 민족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그것은 우리 민족이 벼농사와 너무도 밀접하기 때문이다.동북지역의 벼농사는 조선족 이주사와 집적적으로 련관 된다.벼농사는 대부분 조선족 마을에서 지었고 한족마을에서는 한전을 지었다.우리 선조들은 일상 생활에서 벼짚을 다양하게 리용 하였다.사람들은 흔히 생산과 생활상에서 자기가 사는 주위에서 쉽게 얻을수 있는 재료를 많이 리용하게 된다.우리 민족도 마찬가지로 주위에서 쉽게 얻을수 있는 벼짚을 많이 리용하였다. 초가집이 그 일례로 될수 있다.     어려서 초가집 짓는 장면을 본적이 있다. 먼저 기초돌을 고이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기둥위에는 들보를 올리고 마감으로 지붕모양을 내는 삼각틀을 고정시킨다.벽면에는 출입문이나 창문자리를  빼여 놓고 모두 나무가지로 많은 칸을 맏들어 놓았다. 벼짚에다 진흙을 발라 칸칸에 걸고 타래벽을 만든다.그렇게 하기를 반복하며 타래벽을 바람에 말리운다.구들을 놓을 때도  구들돌사이의 쯤은 짚을 버무인 진흙을 리용한다.집의 여느 벽면의 흙이 떨어지면 역시 진흙에 짧게 썬 벼짚을 이기여 바른다.그러면 벽이 트지 않고 견고하게 붙어 있게 된다.지금 벽돌집을 허물고 나면 건축 쓰레기가 엄청 나온다.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살던 초가집을 허물면 모든것이 자연에서 온 건축자재라 쓰레기가 얼마 없다.      그렇게도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지내던 벼짚이 이제 우리를 떠났다.우리가 외면 했기 때문이다.보잘것 없는 벼짚인것 같지만 기실 우리와 오래동안 같이 해온 친구다.
137    동네 한바퀴 댓글:  조회:953  추천:0  2020-12-07
동네 한바퀴      한국방송에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라는 프로가 있는데 매우 재미 있다.서울과 지방을 다니면서 이야기가 있고 사람냄새가 나는 동네를 소개하는 절목인데 인기가 높다.내 생각 같아서는 우리도 저 프로를 배워 우리사는 연변을 전 세계에 소개시키였으면 좋겠다.우리에게도 자랑거리는 얼마든지 있으니깐.      우선 도시를 소개할려면  연길을 꼽을수 있다.연길은 비교적 젊은 도시지만은 규모도 있고 풍격도 있고 자랑거리가 많은 도시다.연길도시 력사라고 하여야 백년정도니 쩍하면 천년소리가 나는 남방의 도시들에 비하면 인문력사가 짧다.하지만 연길은 이야기가 있는 도시다. 지금은 30여년간의 파가이주와 도시확장 건설로하여 어려서 볼수 있었던 건물 대부분이 철거된 상태다.하지만 곳곳에는 새로 들어선 고층빌딩들이 자리잡고 새로 개장된 가게들에서는 손님들이 북적거린다.연길은 옛이야기를 새로 써나가고 있다.      다른 도시에 가면 가게들의 력사가 길다.골목도 오래된 골목이고 물건 파는 사람마저 오래된 사람 같다.력사는 짧지만 연길은 변화가 빠르고 특색이 짙은 도시다.시대의 변화를 대번에 알아 맞추고 또 시대를 이끌어 가는 활력이 넘치는 도시다.   그러니 동네 한바퀴 절목을 할때 력사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보다 약동하고 발전변모하는 연길에 초점을 마춰야 할것이다.       우선 연길시가지의 동네를 둘러 보려면 시장을 손 꼽을수 있다.사람들로 붐비는 연길의 아침시장은 상당한 특색이 있다.수상시장에 가면 고양이 뿔 빼고는 다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과거 나는 수상시장 동쪽 동네에 살았었다.시장이 들어 서기전에는 이곳은 그저 평범한 강뚝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다가 지금의 가게 건물이 들어 섰고 또 건물밑의 공터를 리용한 아침시장이 들어섰다.날이 희붐히 밝아오면 낮에 여느시장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들이 채소며 고기며 의복 잡화들을 봉고차에싣고 대거 밀려 든다.아침 시장이 연길의 아침을 여는것이다.방금 잠에서 깨여난 나그네들은 별로 살것도 없으면서도 수상사장에 나온다.어찌보면 수상시장은 시장의 역활을 함과 동시에 사람을 만나고 정보를 교환하고 절기를 알려 주는 사람사는 냄새가 짙은 생활의 장으로 된것이다.        연길의 양고기꼬치 또한 지역대표 음식이라 할수 있다. 가히 연길의 사람사는 동네에는 다 꼬치집이 있을 정도다.규모가 크던 작던 시간이 오래된 집이든 새로 개장한 집이든 여름이던 겨울이던 상관 없다.사람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꼬치에 맥주조합을 즐긴다.외지에서 온 소님들은 연길꼬치의 맛과 가게의 깨끗함에 놀란다.한낱 길거리 음식이였던 꼬치를 연길사람들은 고급 음식으로 만들어 놓았다.웬만한 가게에 들어가 봐도  다 장식이 특색있고 환경이 정결하다.그리고 가게마다 맛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객들이 찿아다니는 재미를 느낄것이다.전에는 연길에 전형적인 여러개의 꼬치골목이 형성되였었는데 지금은 어디라 할것없이 사람사는 동네에는 다 있다보니 고객들은주로 자기의 기호에 따라  가게를 찿는 같다.      연길의 맥주점 역시 지역특색이다.    연길에는 음식점이 세분화 되여 있다.맥주점은 맥주점이고 술집은 술집이다.연길사람들의 맥주소비는 가히 큰 도시와 비할수 있다.맥주점의 료리는 주요하게 맥주와 궁합이 잘 맞는 기름기가 적고 짭짜름하고 매콤하고 잘근잘근 씹을수 있는 료리가 제격이다.연길에는 전문 맥주집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퇴근하고 사람들은 몇몇이 짝이되여 맥주마실려 간다.웬간한 연길사람들은 여섯병 정도는 거뜬히 마신다.타지방에서는 맥주를  여름에만 마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연길사람들의 관념에은 매주가 계절과 상관 없다.여름이나 동삼이나 맑은 날이나 찌굿은 날이나 상관 없다.외지에서는 손님이 오면 백주를 올리는것이 상례이지만 연길에서는 맥주를 올리는것이 흔한 현상이다.엄숙한 자리에서는 백주를 하고 민간활동에서는 맥주를 한다고 하지만 지금은 엄숙한 장소에서도 맥주를 마신다.하기에 오래동안 맥주를 마시다가 백주를 마시면 정신이 얼빤해지고 속이 쓰리다.       다방에서 맥주파는것 역시 연길 특색이다.어느한번 장춘에서 친구가 왔는데 다방에 가자고 하니 좋다고 야단이다 .하는 말니 연길에 오면 술때문에 고생할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호해줘서 고맙다고 연신 조아렸다.그런데 다방에서 료리시키고 맥주를 올리니 놀라워 한다.차집에 와서 무슨 맥주냐고 한다.내가 연길에서 다방에서 진짜 차를 마시는 사람이 없고 다들 맥주를 마신다고 하니 속히웠다며 난리 친다.확실히 연길에서 다방는 맥주집의 대명사나 다름 없다.특별히 얼리넘기려고 다방에 온것이 아니였다.본의 아니게 친구를 속였다는 생각이 등었다.      연길시내의 여러곳을 돌며 얼마든지 특색음식과 민속을 소개할수 있다.거기에 또 도시의 변모와 발전을 곁들어 이야기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될것이다.
136    자매체(自媒体) 시대 댓글:  조회:953  추천:0  2020-12-07
자매체(自媒体) 시대       자매체 시대가 도래되였다. 이처럼 빨리 이처럼 대규모로 자매체가 보급되리라고 사람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지난해 까지만 하여도 자매체는  자아성적 오락이나 경물 소개 같은 비교적 낮은 차원의 영상을 다루는데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프로 자체가 완전히  탈바꿈하여 시사분석 열점토론 등 무게있는  절목도 다루고 있었다. 진행자들의 신원에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원래는 대부분 방송에 흥취를 가지고 있는 아마추어들이  집적 촬영도하고 진행도 했지만 지금은  방송에서 진행을 맡던 분들이 자매체에 등장하여 프로를 진행하고 있다. 하여 자매체 영상프로는 백화제방의 전성기를 맞이 했다.     올해 년초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밖을 나가지 못하였다. 집에만 있자고 하니 답답하기 그지 없다. 하여 사람들은 분분히 료리를 하거나 집안에서 오락하는 영상을 모멘트에 올려 친구들과 공유하기 시작하였다. 헌데 그것이  생각밖의 효과를 거두었고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다투어 모방 영상물을 올리였다. 그것은 물론 두음(抖音)등    App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것이 였다.  인젠  너무도 다양한 내역의 영상들이 모멘트에  오르고 있다. 심지어 짧은 영화도 만들어 내고 있다.  코로나 영향으로 학생들은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일부 직장인들은 자택근무에 들어 갔다. 처음에는  준비 없었던 일이라 기술적인 문제에 봉착하였지만 지금은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였다.  연구부문의 노력으로   새기술들이부단히 보급되고 있다. 한마디로 온라인 기술은 사용자들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또 사용자들의 부동한 요구가 온라인 기술을 새 높이에 떠밀었다.     이시기에 영상프로에 이름세를 타던 왕홍(网红) 들이 앞다투어 자기들의 영상물을 모멘에 올리였다. 대부분 영상물 내용을 보면 음식 홍보라든지  려행감수라든지  쉽게 시민들의 흥취를 자아내는 내용이 였다. 그누가 말했지 않았던가. 고수들은 민간에 있다고 말이다. 코로나로 답답했던 생활에 새로운 형식의 오락프로가 탄생되였다. 대중들은 너도 나도 두음(抖音)에 뛰여들어 자기의 장끼를 발휘하였다. 좋은 영상물은 많은 관객들의 점수를 따내였다.  새로운 형식의 영상프로는 이미 대중들의 생활의 한부분이 되였고 전례없는 환영을 받고 있다.  대중의 수요는 늘 상상 이외의 우수한 작품을 배출하기도 하고  우수한 방송인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영상프로는 한걸음 더나가 전문가들의 열점토론 시사분석등 다양한 부문별 절목을 배출하게 되였다. 이것은 방송력사상 획기적인 변화였다. 우리는 과거 방송이라고 하면 그것은 거창한 사업으로서 개인은 전혀  발을 들여 놓을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잇터넷기술의 보급과 사람들 실천으로 불가능 하던것이 가능하게 변하였다. 온라인 기술적지지 그리고 특정 시기사람들의 추구가 서로 맞물려 자매체 흥성기를 도래하게 하였다. 고정관념은 비맞은 솜 마냥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지금 자기가 원한다고 하면 얼마던지 기자가 될수 있고 프로듀서가 될수있다. 그리고 영화연출이 될수도 있다. 어려서 우리는 전투놀음을 곳잘하였다. 캄캄한 저녁이되면 동네 아이들은 두개 전투소조로 나누어 적군을 소멸하는 놀음을 하였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복장을 바꾸어 입어 대방을 미혹시킨 다던가 강렬한 전등불빛으로 적군의 눈을 못뜨게 한다던가 하는 전술이였다. 영화에서 나오던 땅크가 앞서고 뒤에 보병들이 뒤를 잇던 장면을 떠올려 소수레에 집단을 쌓아놓고 그것을 전차로 삼고 적의 진지로 돌진하기도 했다. 만약 그 시절에   디지털 핸드폰이 있었더다면 나는 많은 재미나는 영상물들을  하나하나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화 되였더라면 매우 큰 력사적 기록물이 되였을 것이다.    그냥 일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당할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거워서 하는 사람을 당할수 없고 즐거워서 하는 사람은 미쳐서 하는 사람을 당할수 없다고 한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것이 진지하게 하는 것이다. 먹고 살려면 뭘해도 모양이 나게 해야 한다. 그저 낮은 차원에서 뱅뱅 돌지 말고 두어단계식 올리 뛰여야 한다. 미쳐서 하노라면 꼭 가능한 일이다. 요지음 온라인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북미 최형》이란 절목이 있는데 최씨 역시 코로나 전에는 영상프로를 매일 진행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코로나의 역경속에서 여러분들과 소통할수 있는 통로를 찿다보니 요지음의《최형이 매일 말하다》라는 절목이 태여난 것이다.  지금은 폭팔적인 인기프로가 되였는데 팬들의 수도 백만이 넘는다.    직업과 애호가 맞아 떨어진다면 그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즐거워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허나 과거 많은 애호는 자기한테 수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 웬간 했으면 누굴 망하게 하려면 사진기술을 배워주라고 했겠는가. 뜻인즉 사진촬영은 많은 자금을 수요하는 애호이기에 거기애 뻐져들어가면 망한다는 말로 풀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기가 하고픈 려행을 하면서도 영상물이 팬들의 관심을 산다면 자기의 기호대로 론설을 하면서도 팬들의 지지를 얻는다면 그것이 다 돈이되는 세월이 되였다. 첫째로 팬들의 유량을 소모했다는 차원에서  网站  에서는 유량에 따라 장례하고 둘째로 영상프로가  유명세를 탄다면 광고를 받아 수익을 낼수 있고 셋째로 명인효과를 거두어 더욱큰 일감을 받을수 있다. 자매체는 전통적인 방송방식에서 벗어나 진행자의 기호에 따라 자유롭게 절목을 만들어 낼수 있다. 그러나  몸집이 크고 동작이 굼뜬 전통방송은 쉽게 변화할수 없다.    자매체 방송에도 밑선은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해서는 안되고 아무 영상이나 다 올려서는 안된다. 자매체는 비록 방송에 흥취를 가진 개체에 지나지 않지만 준수해야할 사항도  적지 않다. 나라 법률을 지키고 방송도덕을 준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온라인 영상방송의 생명이 짧을수 밖에 없다.    신문 잡지 방송등 선전매개물들은 시대의 백락에 따라 적극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할것이다. 모든것이 변해무쌍한 요지음 독자 청중 관중잡기에 노력해야 하고 자기 특색의 프로그램으로 기반을 다져야 할것이다. 경쟁시대에 적응하면 이길것이요 적응하지 못하면 패할것이다.     지난해 어느 선생의 글을 본적이 있는데  자매체는 전통적인 방송 방식에도 영향을 주는데  그영향력을 공유할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서로 단점을 미봉해나가면서 시민들에게 좋은 볼거리 듣거리를 제공하는것이 요지음 자매체와 전통 방송사 지간의 협력이라고 생각한다. 
135    걷기 좋은 코스 댓글:  조회:868  추천:0  2020-12-02
   걷기 좋은 코스      걷기 운동이 사람한테 좋다고 하여  아침이든 저녁이든 강변에 나가 보면 부지런히 걷는 사람들이 많다. 걷기운동은 유산운동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그 어떤 운동보다도 몸에 유익하다고 한다. 전에는 운동이라고 하면 대부분 경기운동을 가르쳐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여 운동이라면 축구 배구 농구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범위가 많이 확대된것 같다.       걷기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쾌적한 코스가 필요하다. 헌데 도심에는 차도 많고 건늠길도 많아 걷기 운동에 적합하지 않다. 하다보니 브라하통하 남안과 과학기술대학에서 시작된 외환길이 자연히 연길사람들이 선호하는 걷기운동 코스가 되였다. 사람들은 혹은 서너명씩 혹은 한두명씩 걷는데 부지런히 속도를 내는 사람들도 있고 느리게 걷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목표는 하나 신체단련이다. 좋은 코스에는 절기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많다.        걷기운동은 그 누구나 할수 있는 운동이다.  전문으로  시간을 낼 필요도 없고 장비를 갖출 필요도 없다. 출퇴근 하는 길이라던지 원래 차로 이동하려던 웬간한 거리도 다 걷기운동으로 대체할수 있다. 친구중에 한사람이 연변도보협회 성원인데 경상적으로 활동에 참가하는 같았다. 원래 그 친구가 기자로 활약했기에 나는 처음에 보도협회로 간주하였다. 친구의 설명을 듣고나서야 걷기운동을 선호하는 도보협회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생활질량의 향상과 더불어 사람들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려 조직을 뭇고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연길 주변에는 걷기 좋은 코스들이 많다. 특히 휴식일 친구들과 함께 가족과 함게 걸을수 있는 난이도가 중간정도되는 코스들이 많다.  반날의 시간을 들이면 멋진 코스를 걸을수 있다.       그 실례로 과기대에서 시작하여 청차관 (清茶馆)으로 가는 길을 들수가 있다. 도로는 처음에는 미연한 경사도를 유지하다 산중턱에서 부터는 조금 가파로와 진다. 그러나 다 도로위를 걷기 때문에 그리 힘들지 않다. 청차관의 매력은 바로 드넓은 초원이다. 사람들은 이 산꼭대기에 이처럼 넓은 초원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다. 한여름에 청차관을 경유하며 걷다보면 일매진 초원경관에 사람들은 환호하게 된다. 산아래를 바라보면 제법 중등도시 규모를 자랑하는 연길 시가지가 환히 보인다. 청차관이 이처럼 연길시내 지척에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와 본적이 없다.       청차관은 과거에 연길에서 도문을 가는 길목이였다. 이름으로 풀이하면 차한잔 마시고 가는 차집같지만 실은 만족어로서 차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곳이다. 마차가 주요 이동수단이던 세월에 사람들은 돈을 내고 마차에 앉아 도문으로 갔던것이다. 여름철이면 청차관은 양몰이군들이 즐겨 찿는 방목지가 된다. 드넓은 벌판에 양떼 들이 유유히 움직이면서 새파란 풀잎을 뜯고  목동은 푸른 잔디밭에 벌렁 누워 휜구름이 둥둥 떠가는 하늘을 바라 보고 목양견은 이리 저리 뛰여다니며 양무리를 지켜 준다. 진짜 초원에서나 볼법한 진풍경이다. 청차관은 연변고장성이 경유하는 곳으로서 고장성이 여기를 거쳐 마반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히 정부에서 세운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것을 볼수 있다.      이길을 따라 계속북쪽으로 가노라면 길 양옆에는 철조망을 두른 방목지가 보인다.   혹은 누워 휴식하거나 혹은 풀잎을 뜯어먹는 소무리들을  볼수도 있다. 전에는 연길비행장이 이곳으로 이주해온다는 말도 있었는데 후일 도는 말에 의하면 이란진   금성촌으로 간다고 한다. 이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장안진 흥가촌네 도착할수 있다.        다른 한갈래는 과학기술대학에서 출발하여 미연한 산을 도르다가 오른쪽으로 굽어 들면 부대가 보이는데 그길로하여 광제촌 으로 진입하는 도로다. 광제촌은 도문시 장흥진에 소속 된다. 사람들은 도문이 멀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연길 지척에 있는것이다. 동삼에 마을에 진입하면 첫번째 안겨오는 풍경이 들에서 마른 풀을 뜯어먹는 소떼들이다. 광제촌에는 소들이 많다. 길을 따라 한참 걷다가 보면 광제촌 촌부가 나오고 돌다라도 나온다. 왼쪽으로 꺽어 가다가 보면 광천수공장이 나오는데 그옆의 장대를 오르면 이제 광제촌이 제법 잘 보인다. 원래 소학교 자리와 그뒤로 허씨골  (徐家沟)에 앉은 아담한 시골마을이 보인다.         가파로운 공로를 한참 올라가면  연길도문고속철로가 보인다. 그밑을 경유하다 보면 길이 두갈래로 나뉘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과수촌이고 원쪽으로 가면 부암촌이다. 두갈래 길은 한 반시간 뒤 또 만나게 되는데 그주위는 몽땅 옥수수 밭이다.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새끼꿩을 거느리고 길을 건너는 장꿩을 볼수도 있다. 여기까지 오면 이미 해발고가 높다. 멀리로 산너머 소영 열집중공장의 높은 굴뚝이 보인다. 완전히 마을과   동떨어진 밭이다. 좀 더가면 부암촌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꺽어 산을 내려가면 마반촌이고  웬손편으로 길따라 가노라면 그 유명한 마반산이 나온다. 마반산은 연변고장성의 동쪽끝이다. 과학기술대학에서 출발하여 마반산까지 도로를 걷다보면 시내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산림으로 부동한 경관을 구경할수 있어 좋다.       시내 강변도로나 외곽도로를 걷기보다는  산간길을 걷노라면 차가 적기에 안전하기도 하고 건늠 길을 건널 필요도 없다.  또한 시골은  공기 좋고 해볓이 좋아 진짜 힐링하는 기분이다. 봄에는 타오르는 우등불을 연상시키는 진달래꽃과 가까히 할수도 있고 또 대형 뜨락또르들이 밭갈이 하는 풍경도 만끽할수 있다.  한여름에는 이름 모를 여러가지 야생화와 청사진을 이룬 하루가 멀다하게 우썩우썩 자라는 옥수수와도 가까히 할수 있다. 가을에는 새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을 볼수 있고 방치같은 이삭을 업고 있는 옥수수와 농가처마에 달아 놓은  빨간 고추다래를 감상할수도 있다. 겨울이면 일매진 흰눈과 말목을 넘기는 눈발을 타고 이색적인 농촌마을을 구경할수도 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진짜오 꿩먹고 알먹는 셈이다.        걷기운동은 걷는 코스에 따라 부동한 감수를 받을수 있어 좋다. 그저 수걱수걱 걷기만 하면  기분이 따분하고 몸도 힘들다. 머리를 번쩍 들고 여기저기 풍경도 구경하면서 상상의 나래도 펼치며 걷노라면 힘든줄도 모르고 기분 또한 만점이 될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이 하는 말이 걸으면서 인생도 총화한다고 하지 않는가.       걷자. 걸어야 하는 데는 그 무슨 리유가 필요 하겠는가.        
134    아들이 나한테 준 선물 댓글:  조회:958  추천:0  2020-11-24
아들이 나한테 준 선물       출장을 하고 돌아오는데 안해가 고속철도역에 마중을 나왔다.역전과 우리 집 사이  거리는 걸어서 반시간이면 족하다. 하지만 시간이 허락되면  늘 안해가 마중을 나온다. 그날은 날씨가 무척 추웠다. 불시에 들이닥친 추위로 플래트홈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몸을 옹크리였다. 내가 옷을 엷게 입은 것을 걱정하여 안해는 두터운 옷을 가지고 나왔다. 추워서 덜덜거리다가 겨울옷을 입으니 인차 몸이 따스해 났다.       차에서  안해가 나에게 말했다. 아들 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아버지게 노트북을  선물하겠단다. 아들은  류학하여  지금 석사를 전공하고 있다. 학교측으로 부터  어느 정도 생활비를 지급받고 있는데 그것을 모아 노트북을 사서 아버지에게 선물하겠다는 말이였다. 말만 들어도 감사하였다.  나는 아들이 불시로 셈이 든다는 감각이 들었다.과거 우리 사이에는  하루에도 몇마디 교류하지 못했다. 하나는 내가 다망한 것도 있지만 아들은 내 생각을 거부했고 애의 행동은 나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안해는 아들과 사지 말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런데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가 핸드폰으로 글을 보고 쓰고 하는데 화면이 작아 불편하니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하더란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나는 저도 몰래 마음이 찡해 났다.하긴 내가 주요하게 핸드폰으로  글을 쓰기에 화면이 작아 글이 잘 보이지 않아 안경을 끼였다 벗었다 하려니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였다. 그것이 아마 아들애의 마음에 걸렸는가 보다. 이제 아들도 나와 가까워 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아버지의 신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니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선물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데 선물은  마음을 표달할 수 있는 좋은 방식중의 한가지이다. 선물은 가치와 용도를 떠나서 선물한다는 그 자체가 상대가 그 사람 마음속에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선물의 선택도 매우 중요한바 어떤 물건을 고르는가에 따라 선물하는 사람의 깊은 마음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내가 아들한테 선물 받는다는 것은 어느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지금애들의 가장 큰 장애가 교류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마음 열기를 거부하고 자아중심주의가 심각하다. 산생원인을 보면 독신자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집집이 자녀를 꼬마황제와 꼬마황후로 키웠으니 로동하기 싫어하고 곤난을 이겨 내는 의지가 박약하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고 자기밖에 모른다. 그러니 글은 많이 읽었어도 현인군자답지 못하다. 우리 아들은 엄마와는 소통이 잘되는 반면 나하고는 말하기 싫어한다. 아마 내가 평소 아이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고 또 요구가 엄한 것과 관계된 같다. 아들애가 점차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면  부자  사이 랭전이 결속되고 화합이 시작된다는 신호인 것 같았다. 부모는 다 이런 것 같다.자식의 자그마한 사랑에도 감동 받으니  말이다. 자식에 대하여 겉은 강한 것 같지만 속은 연약한 것이다.         과거에 나는 선물이라고 하면 친구 사이에 주고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상급에게 올려 바치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뢰물이니 여기서 토론할 범주가 아니다)하지만 지금 정황을 보면 가정에서도 선물이 환영받고 있다.  선물을 주고 받는 장면을 보면  의식감(仪式感)이 강하다. 자기 마음을 고이 담은 선물을 대방한테 건넬 때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 경건한 마음 가짐이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에 비하면 표달에 능숙하지 않다. 사랑하는 자식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낀다. 부부사이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마음속에는 사랑이 이글거리지만 표현에 약하다. 가끔 안해한테, 남편한테, 부모한테, 자식한테 작은 선물이라도  나눈다면 말로 다 못한 사랑을 표시하는데 생각밖의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요지음 사람들은 선물을 받으면 위챗에 올려 즐거운 마음을 친구들과 함께 공유하는 일아 많다. 생일날 자식한테 받은 생화 선물이을 위챗에 올린다. 한편으로는 자식을 잘 교육했다는 자랑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식이 부모한테 효성한다는 자랑이다. 동기야 어떻던 지간에 위챗을 통하여 그집 식구들 지간의 따뜻한 관계를 엿볼수 있는건 사실이다. 내가 이런 인식을 가져오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였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사랑이 필요해진 건지  자식과의 교류가 필요해 진것 때문인지 아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아이의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싶고 장래의 타산도 듣고 싶다. 우리 같은 60년대 생들은 위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횡으로는 형제자매간의 우정을 극진하게 가꾸어왔지만 자식들한테서는 별로 고마운 소리도 못 듣고 사는 세대다.그래서 인지 자식사과의 교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      선물이란 마음의 표달이다. 내가 상대한테  감사하다면 혹은 말로 혹은 선물로 마음을 표달할 수 있다. 또 감사한 마음은 표달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표달은 일종 사랑의 촉매제 같은 것이다. 표달할수록 사랑은 깊어지고 관계가 밀접해질 것이다. 벙어리 마음은 난 에미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감추는 것이 아니고 표달 하는 것이다. 행동으로든 언어로든 마음을 표달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고 본다.       나는 애한테 선물이라고 뭘 사준 적이 적다. 하긴 애가 필요한 것은 엄마가 알아서 해주니 사실 애도 별로 갖고 싶은 물건이 따로 없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애가 정작 갖고 싶어하는  물건을 부모의 각도에서 보면 별로 내키지 않는 것들이다.        유치원 때 보면 애는 편의국수나 과자봉지에서 나오는 작은 인형이나 무기 같은 놀이감을 좋아했다. 애는 그런것을 수집하기 위하여 별로 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편의국수나 과자를 사달라고 하였다. 국수나 과자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놀이감을 가지기 위하여 서였다. 하여 아들에게는  쬐꼬만 놀이감이 가득하였다. 아침에 아이방에 들어가 보면 쌔근쌔근 잠자는 아이 손에는 쬐꼬만 놀음감이 꼭 쥐여져 있었다.      조금 더 커가면서 애는 자동차나 기중기 같은 놀이감을 좋아하였다. 하여 엄마는 애와 같이 시내에 나갈 때면 종종 애가 좋아하는 자동차모형을  사왔다. 애는 놀음감만 사면 집에 돌아가자고 조른다. 빨리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 때문이였다. 집에만 들어오면 여러가지 자동차모형을 배렬해 놓고"띠띠 빵빵" 소리내며  놀이를 하였다.      어느 해 여름, 우리집 세식구는 대련관광을 가게 되였다. 대련을 다 구경하고 려순에 가게 되였는데 군항 부근의 관광상점에서는 총탄깍지로 만든 여러가지 비행기며  대포 모형들을 팔고 있었다. 이런 모형은 대번에 나의 눈길을 끌었다. 나는 애가 사달라는 말도 하기 전에 대뜸 사고 말았다. 애한테 건네 주었지만 애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자기가 갖고 싶은 물건이 아니였나  보다.      소학교를 다닐 때였다. 한번은 웬만해서는 뭘 사달라고 하지 않던 애가 엄마보고 팽이를 사달라고 하는 것이였다. 학교에서 애들이 잘 가지고 노는가 보다. 하여 엄마는 줄을 감았다가 뿌리치면 되달려 오는 식의 팽이를 사주었다. 며칠 잘 가지고 놀더니 집에 와서 하는 말이 다른 애들의 것은 전등빛이 번쩍거리고 "왱왱"소리도 나는 것이라며 자기도 그런 것을 갖고 싶다고 하였다. 마침 그 때 내가 남방으로 출장가게 되였다. 하여 나는 애보고 아버지가 출장가서 하나 사주겠다고 하였다.      출장이 거의 끝날 무렵이였다. 아들애와 한 약속이 있는지라 나는  전문 시간을 내여 팽이 사려고 가게들을 찿았다. 헌데 여러 집을 돌아보아도 아이가 요구하는 물건이 없었다. 놀이감을 기다릴 아이를 생각하니 아무리 번거롭더라도 기어이 찿아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친구의 자가용을 운전해 이곳 저곳을 찿아다니여 서야 끝내 애가 말하던 전등빛이 번쩍이는 팽이를 살 수 있었다. 집에 들어서니 애는 팽이부터 찿는다. 마음에 드는 팽이를 갖게 된 애는 너무 좋아 퐁퐁 뛰였다.     이것이 아마 내가 아들애한테 준 첫 선물이였다. 그뒤로 연변2중에 입학할 때 노트북을, 대학에 갈 때 핸드폰을 선물하였지만 주요하게는 학습성적에 대한 장려의 차원에서 였다. 값 비싼 선물이였지만 애가 좋아하는 그런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금년에는 불시로 들이 닥친 코로나 때문에 모든 일상적인 생활과 생산이 큰 영향을 받았다. 아들애는 1월중순 겨울방학에 집에 온 뒤로 다시 학교도 가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다. 그 사이 집에서  매일 온라인으로 공부도 하고 론문도 쓰려니 아들애도 자연 갑갑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애는 때론 게임을 하였다. 머리를 쉬우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낼려면 최신식 '무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들은 몰래 인터넷에서 게임공구상자를 사는 것 같았다. 아이가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하여 우리 부부는 웬만한 건 모르는 척 하였다. 그 때 아이와 많은 교류를 하였더라면 더 많은 내심 세계를 읽을수 있었고 우리 사이에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을 터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여러가지 시험이 미루어지게 되였다. 우리는 여러개 외국대학에 석사입학 련락을 하였지만 외국어성적이 없이는 안된다는 회답뿐이였다. 그 때는 정말로 답답한 심정이였다. 몇달후 아들애는 모교 교수님의 추천으로 성균관대학 석사에 입학하게 되였다. 교수님은 자기가 박사공부를 하던 성균관대에 집적 편지를 써 아들을 추천했던 것이다. 입학통지서를 받던 날 아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남실거리였다. 코로나를 겪으며 애는 성숙하였고 우리 식구 사이도 더 가까워 지게 되였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 이제 아들애가 우리한테 사랑을 안겨줄 때가 되였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의 일방적인 사랑은 눈먼 사랑이고 자식을 해치는 사랑에 불과하다. 한뉘 부모와 같이 있을 순 없다. 아들도 부모님의 신상에 대하여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였다. 그것은 곧 성장하여간다는 표식이다. 자기의 길은 자기절로 걸어야 한다. 그 과정이 아무리 험난하더라 해도 자기절로 헤쳐나가야만 성공의 첫 발자국을 뗄 수가 있다.      오늘 내가 받은 것은 두가지였으니 첫째는 선물이요,  둘째로는 마음이였다. 오히려 그 마음이 더 기특하고 더 반갑다. 아들애가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선물은 나로 하여금  희열에 빠지게 한다.
133    어머니 명절 댓글:  조회:1407  추천:0  2020-05-11
어머니 명절      어제는 어머니명절이였다. 명절의 의미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매년마다 특정된 명절의 주제를  총화 보급하는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어머니 명절은 세상 모든 명절중에서도 가장 뜻깊은 명절이라고 본다.  .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태여야 빛을 보게 된것은 어머니의 신고와 고통과 갈라 놓을수 없다. 어머니가 있음으로하여 가정은 대를 이어갈수 있고 인류는  생명을 이어 갈수 있었고 애들은 인생 첫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양육한 아이와 보육시설에서 양육한 아이의 성격과 품질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할머니 할아버지집에 맡겨 키운애와 어머니가 집적 키운애 사이에도 큰 차이가 보인다.      어머니는 이렇게 거룩한 것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때에는 그 거룩함을 인지 못할때가 많지만 어머니자리가 비여 있을 때에 우리는 너무도 큰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어머니는 태양이나 공기나 물같은 존재로서 시시각각  자신의 역할을 발휘하지만 자식들은 실감하지 못 할 때가 많다. 마치 어머니의 존재가 당연한것처럼 어머니의 사랑이 응당한것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허나 정작  다시 한번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때에야  어머니의 거룩함에 통감하게 된다. 아. 그땐 내가 왜서 어머니를 몰랐을가. 하늘나라에 보내고 나면 그때에야 어머니를 더욱 그리는것이 우리들의 상정이다.      애들이 집에 들어 오면 하는  첫마디가"어머니는?". 여적 뉘집 애가 집에 들어 오면서 "아버지는요?"하는 말을 한다는 이야기를  못들어 보았다.      엄마들은 자식을 자기 살붙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자식은 어머니의 몸과 련계된 살붙이다.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한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나 자식에 대한 무조건 사랑은  어머니를 따라가지 못한다. 어머니는 머리가 희슥희슥한 자식이 거리에 나가도 조심하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의 어머니가 다 자식들과 사회의 존중을 받아야는데 그렇지 못하는것이 또한 가슴 아픈 현실이다. 못난 자식의 칼에 찔려 죽는 어머니 못난 자식들의 외면을 받아 홀로 독거하는 어머니들도 있다. 고된 로동으로 허리가 휘여진 어머니들이 로년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하여 로동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가까히 하고 도와 주어야할 일이다.      어릴때 이런장면을 목격하였다. 공안국에서 법을 위반한 동네 웬 남정을 체포하게 되였다. 초동삼이라 날씨가 쌀쌀하다.  집에서 달려 나온 그사람 어머니가 아들보고 솜옷을 입으라고 한다. 헌데 아들은 눈알을 부라리며 않입는다고 호통질이다. 너무도 대조적이였다.       어머니는 인생의 첫 교육자다. 걸음마를 배워주고 언어를 배워주고 밥 먹는법을 배워주고 학교가서 위생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것도 배워준다. 무릇 자식들의 첫번째로가는 인생수업은 어머니 몫이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직책은 무한한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사심없는 사랑이다.        어머니의 교육수평과 자식의 문화정도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 하지만 내가 주장하는것은 가정교육의 중점은 도덕교육이다. 노인을 존중하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곤난한 사람을 돕고  활발한 인간관계를 발전시키는 등이다. 주위에서 다큰 애에게 문학과를  배워준다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사람의 인간소질을 보매 너무도 차하였다. 그러니 학습성적이 올라 갈수는 있겠지만 부모를 따라 배운 사람됨됨이는 보지 않아도 알것같다.      일전에 "어머니"라는 책을 읽게 되였다. 일생에 남편4명을 만나 가면서도  자식만은 공부시키려는 호남성 어느 시골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것이였다. 아무런 문화지식도 없는 어머니였지만 자식만은 반듯하게 자리운 전통적인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교육은 그무슨 예술이니 철학이니 권세술이니라는것과 꼬물도 관계가 없는 가장 소박하고 가장 기본적인 도덕교육이였다. 결과적으로 아들은 전국인민대표까지 선출받는 성공을 이루었다.     어머니 명절 이는 하루명절에 끝히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의 양육에 감사하고 어머니의 수고에 감사하고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 생활가운데서 어머니를 관심하고 효도하고 동무해주어야 한다.      어머니가 없는 어머니 명절 다시 한번 어머니의 양육에 감사드린다. 천하의 어머니들의 행복을 기원한다.
132    마음은 날고 싶다 댓글:  조회:1280  추천:0  2020-05-09
마음은 날고 싶다      지난해말 부터 코로나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세밑에는 무한을 봉성하였다.  방송 텔레비 신문에서는 매일 같이 새로 증가한 환자인원수와 사망자를 통보한다.  잠시 활동할려 밖에 나갔다가  길에서 사람을 마주치면 서로 피해간다. 사람마다 대방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       지금 국내의 코로나퇴치 상황은 대단히 호전되였다. 국외에서 코로나의 타격으로하여 사회제반이 큰 곤역을 치르고 있을때 우리 나라는 순차적으로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 외국사람들은 중국을 부러워하고 있다. 코로나역경을 통하여 다시 한번 당의 정확한 령도와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피부로 느끼였다. 당의 강력한 령도와 정부의 세밀주도한 조치로하여 복공복산복시(复工复产复市)가  이루어지고 있다.      점차적으로 거리에는 사람과 차량들이 붐비고 건설현장에서는 기계동음이 울려 퍼진다. 코로나의 영향이 점차 누그러 들고 오매불망 고대하던 정상생활이 복귀하고 있다. 사람들 얼굴이 펴지고 걸음걸이도 씩씩다. 아직까지는  마스크를 부착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무척 가벼운 상태다.      나는 날고 싶었다. 몸이 날지 못해도 마음은 날고 싶다. 저하늘 높은 곳에서 훨훨 날아서 우리의 정든 도시와 농촌 하천과 산발 약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여 생각해낸것이 드론을 사서 관찰하는 것이였다.       안해는 애들처럼 무슨 놀이감을 살려고 하느냐고 핀잔한다. 나는 드론의 공능으로 부터 드론촬영의 우월성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했다.      언제면 도착하냐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드론이 드디어 도착했다. 오전에 투도까지 자전거운동을 하고 집에 들어 오니 드론이 도착했다고 한다. 이제 드론을 앞에 띄우고 내가 자전거타는 장면도 촬영하리라.         드론은 구입 즉시 다룰수 있는것이 아니다. 설명서 학습은 기본이다. 대학교에서 드론을 조종해본 경험이 있는 아들이 나에게 상세하게 조종설명을 해주었다. 아들은 측량测绘전업을 전공하는데 종종 드론을 사용한다.      우선 우리는 마당이 큰 곳을 선택하였다. 아리랑광장에 가니 연띄우기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드론을 날리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였다. 그 많은 사람중에 드론을 띄우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던 것이다. 드론은  비행하는 동시에 핸드폰으로 화면을 보내주었다. 높은 하늘에서 보는 시각은 너무도 환상적이다.  여기 저기 부동한 각도와 시각으로 보는 아름다운 화면은  나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며칠후 우리는 연길인민경기장 근처에서 드론을 띄웠다. 여기저기 둘러 보다가 경기장안으로 들여보내기로 하였다. 드론은 높이 날아  체육장안에서 날아 들어가 관중석이며 운동장 화면을 전송하였다. 한참 기분 좋게 내부상황을 구경하고 있는데 드론이 갑자기 명령을 접수하지 않는다. 돌아오라고 했는데 그냥 관중석위에서 맴돌더니 글쎄 광고판뒤 기둥위에 내리였다. 조종 사고였다. 그러나 보내온 화면으로 정확한  착륙위치는 파악할수 있었다. 방금전까지 들떠 있던 기분은 갑자기 사라지고 어떻게  드론을 찿아 올것인가 고민하였다.  몇번 놀아 보지도 못하고 잃어 버리면 아쉽기 그지없다.      이튼날 아침 나는 경기장에 찿아 가서 당직일군의 허락 받고 안으로 진입할수 있었다. 고마운 당직일군은 나에게 사다리를 빌려 주었다.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경기장에서 관중석으로 올라 가고 또 그곳에서 맨 꼭대기까지 톱아올라가 용케도  드론을 찿고 말았다. 드론은 고맙게도 그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5. 1절날 나와 아들은 마반산촌민활동실 광장에서 드론을 띄웠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지라 드론은 나의 조종명령대로  자유롭게 훨훨 날아여며 변모하는 농촌모습을 보여 주었다. 산은 점점 록색으로 단장되였고 활짝핀 살구꽃이 집집들 뜰안을 단장하였다.  방금 갈아 놓은 네모 반듯한 밭들은 실농군의 농사에 대한 애착심을 보여 준다. 물곬의 언제를 쌓아 올리는 시공일군들의 손길이 바쁘다. 시원하게  쭈욱 뻗은 시골 포장길이 저멀리 뒤산으로 사라진다. 상춘객들이 삼삼오오  산에서 진달래를 감상하는 장면도 보인다. 시골에 놀려온 애들이 즐겁게 뛰여 논다.      나의 마음도 드론과 같이 날고 있었다. 내가 마치 하늘위를 날고 있는 느낌이다. 너무도 시원하다. 너무도 아름답다. 너무도 즐겁다. 오래동안 가라앉았던 마음은 드론과 함께 하늘을 날아여고 있었다.      자 여러분. 신들메를 조이자. 코로나의 역경속에서 우리는 너무도 잘 해왔다. 이제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 오고 있다. 마음과 마음을 합쳐 생산을 회복하고 시장을 활성화 해 나가고 있다.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것이다.     나의 마음은 언녕 창공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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