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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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담론 댓글:  조회:7432  추천:3  2013-07-31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담론 황 유 복/중앙민족대학 교수,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회장 [론문개요]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민해온 민족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리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우리학계는 아직 우리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이 조선족을 보는 시각은 다르다. 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 아니다. 세상에 이중성민족은 없다.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의 한 부분이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소수민족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핵심어] 조선족, 정체성, 이중성민족, 민족집단 들어가면서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온 이민이나 그들 후예로 구성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다. 조선민족의 중국이주의 역사는 고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왕조시기에 정치, 군사, 경제 및 기타 원인으로 발생된 이민 활동은 1945년 광복 당시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17세기이전에 이주한 고대이민들의 후대들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족, 몽고족, 만주족 및 기타 민족에 흡수, 동화되어 그들의 흔적을 역사문헌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1] 때문에 "조선족"이란 개념은 중국국적을 취득한 이민자 혹은 그들 후대 중에서 중국행정당국의 승인을 거쳐 "조선족"으로 분류된 자를 말한다. 조선이민이나 그의 후대가 아직 중국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거나(조선교민, 한국인 영주권자), 혹은 조선이민의 후대가 이미다른 민족 집단구성원으로 되었을 때 그들을 조선족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관찰해보면 조선족의 중국이주형태는 17세기 전쟁이민(war migration), 주로 후금의 “정묘호란”과 청의“병자호란” 피랍인; 19세기 후반기의 자유이민(free migration); 1910년대의 망명이민(exiled migration); 1920년~1945년의 일제 식민정책에 따른 관리이민(impelled migration)등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현재의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의 17세기 고대 이민의 후대 (하북성 청룡현과 요녕성에 산재해 있는 박씨 후대들)들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150여 년을 넘어선다. 그러나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 공동체의 형성은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 개최로부터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까지로 볼 수 있다.[2]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의 르네상스시대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사회발전과 인류 진보를 위한 새로운 문화중심의 패러다임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우리 학계는 아직 우리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인가?”라는 담론은 민족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러한 담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선 조선족 사회나 문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민족이나 문화에 대한 체계적 리론의 부재도 원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되기까지 중국에서 조선민족을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최초의 문헌은 1928년 7월 9일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문》이다. 그 후에 작성된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문헌자료에서 시종일관하게 중국 조선 민족을 중국소수민족으로 인정하였다. 다만 민족 명칭을 “고려인”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특이하다[3]. 그런데 그 시기 조선민족 이민들이 집중 거주하던 동북지역은 중화민국정부에 귀속되는 동북군벌정권의 유효 행정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 행정부가 조선민족 이민을 중국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사실상 외국거류민으로 취급되었다. 1945년 항일전쟁승리 후의 몇 년 사이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조선민족 이민들이 자의에 의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갔다.[4] 귀국하는 사람들과 남아있을 사람들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동북국은 그 당시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한국거류민’, ‘조선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5]. 그러나 이민현장에 남아 영주할 결심을 한 조선민족구성원 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여 받았고 지방정권수립에 참여하여 참정권을 갖게 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점차 탈바꿈 하게 되였다. 1950년 12월 6일자 《인민일보》는 “중국동북경내의 조선민족”이라는 논설에서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가 개막되면서 동북경내의 조선인민은 중국경내 소수민족의 자격으로 각 형제 민족들과 만나게 되였다. 그때부터 중화인민 공화국 각 민족 인민가운데 이 새로운 구성부분은 각 형제민족 인민들의 관념 가운데서 교민으로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민들로부터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1949年9月,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开幕,东北境内的朝鲜人民,以中国境内少数民族的资格,和各兄弟民族见了面。从此,中华人民共和国各族人民间这个新的组成部分,才在各兄弟民族人民的观念里,以侨居中国的朝鲜人民中区划出来。)”라고 지적하였다[6].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조선민족이 조선교민으로부터 중국 소수민족으로 탈바꿈한 시간을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 회의 개최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조선인민”, “조선민족”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어 “조선족”이란 이름은 1951 년에서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는 그 사이에 확정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 내이션(nation)과 에트닉(ethnic) 민족에 대한 리론 가운데 개혁개방 전까지 우리가 경전으로 꼽았던 쓰딸린의 민족에 관한 정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프랑스 철학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독일의 력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의《허구의 민족주의》등 민족에 관한 저서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들이 담론하는 “민족”은 “근대민족” 혹은 “자본주의민족”, 즉 민족을 봉건왕조국가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난 문화적 조형물로 인식하고 있다. 1903년, 량계초(梁啓超)가 독일학자의 민족개념에 관한 글을 번역하면서 서구의 “민족”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다. 내이션(nation)은 겨레, 국민, 국가 등 복합적 개념이 어울려진 용어이다. 여기에서 내이션은 정치적 령토와 관련되는 민족개념이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민족주의”, 내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는 “민족국가” 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은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국민+민족”이다[7].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민족”이다. 서구의 “근대민족”과 달리 조상과 혈연을 중시하던 동방에서는 고대로부터 “겨레”라는 뜻의 담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조 량조의 소자현의 《남제서》사용한 “민족(民族)” 은 중국의 고대민족개념이었다.[8]《조선왕조실록》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나 녀진인들과 구별하기 위해 “아족류(我族類)”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민족” 혹은 “우리겨레”라는 뜻이 분명하다.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도 에트닉(ethnic)이란 용어가 출현했다. 내이션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면, 에트닉은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중국에서 “族裔”로 번역하고 있는 에트닉(ethnic)은 우리말로 ethnology를 “민족학”으로, ethnicity는 “민족성”이라고 하듯이 역시 “민족”이라 번역한다[9]. 그리고 중국에서 “族群”으로 번역하는 에트닉그룹(ethnic group)은 민족집단으로 번역한다. 코메리칸과 조선족 나는 1987년~1988년에 미국의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에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담당한 적이 있다. 사회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미국국적을 취득한 한국인들을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komerican-코리아와 아메리칸의 합성어)이라고 호칭한다. 왜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호칭하는데 미국에서는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이라고 하는가? 건국 력사가 200여년밖에 안 되는 미국은 총인구의 1%를 차지하는 인디언원주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세계 각국에서 온 외래 이민이거나 이민의 후예들이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민족이란 계념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이민 왔나 로서 국민들을 분류한다. 1929년에는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국가별로 이민 수자를 할당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아일랜드계미국인, 프랑스계미국인, 중국계미국인 등으로 불리 운다. 한국인들의 미국이민은 1965년 새 이민법이 시행되면서 대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미국국적을 취득한 후 미국의 관례대로 한국계미국인으로 호칭된다. 그러나 중국은 수 천 년 력사를 가진 나라이고 고대로부터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민족학자들의 노력으로 민족 식별작업을 거쳐 56개 민족(nation)으로 국민을 분류하게 되었다. 150여년의 이민 력사를 가진 조선민족도 1945년 이 후 중국에서 토지와 참정권을 부여받으면서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으로 인정되고 한족, 만족 등 민족과 동등한 위치에서 조선족으로 호칭되게 된다. 한국에서 “한국계미국인”이라는 호칭에 반발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조선족”이라는 호칭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사실, “한국계미국인”은 한국에서 이민 온 미국인이라는 뜻에서 “미국인”이라는 국적이 강조되었다면 “조선족”이라는 호칭에서는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라는 뜻에서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 조선민족과 한(韓)민족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리 민족집단(ethnic group)은 령토의 분단, 민족의 분단과 함께 민족 명칭의 분단이라는 아픔도 함께 겪게 된다. 조선반도의 북과 남에서 각각 “조선” 과 “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면서 하나의 민족집단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호칭되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리념대립이 살벌해지면서 민족 명칭의 갈등도 심각해졌다. “한민족”그룹에게 있어서 “조선민족”은 “빨갱이”들의 대명사정도로, 그리고 “조선민족”그룹에게 있어서는 “한민족”은 “반동분자”들의 대명사나 다름없이 여겨져 왔다. 1985년 내가 쯔꾸바대학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을 때 일본에서는 조총련과 한국민단이 대립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어느 방송사가 우리말 강좌를 개설하면서 강좌이름을 한국어강좌라 하면 조총련에서 반발하고 조선어강좌라 하면 민단에서 반발하기 때문에 나중에 “안녕하십니까” 강좌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983년에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소개하는 글[10]을《China Reconstructs》1983,No, 3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을 한국의 《동아일보》가 번역해서 게재[11]할 때 제목을 “ 延邊自治州” 라고 했고 글 가운데 나오는 “중국”은 “중공”으로, 조선족은 “韓人”이라고 번역했다. 신문을 보고 나는 너무나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1984년 겨울, 내가 코네티컷대학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을 때 뉴욕에서 발간되는 한 한글신문의 글 부탁을 받고 나는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고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전제로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래”라는 론문을 발표했다[12]. 동서방의 리념대립이 아직도 살벌했던 그 당시 서방진영의 심장에다 “조선족”이라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거부감을 주는 이름을 심어놓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미국과 일본의 신문, 학술지에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13], “中國の朝鮮族 その素顔”[14] 등 여러 편의 론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기간 나는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서울대학교 등 10개 대학 의 초청강의를 담당하면서도 “조선족” 홍보를 계속했다. 오늘까지도 인터넷사이트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놓고 한국네티즌들과 조선족 네티즌 사이에 쟁론을 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랭전시대의 유물이 쉽게 해소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조국과 고국 사이 같은 한자 어휘가 한어와 조선어에서 완전히 다른 뜻을 나타낼 때가 가끔 있다. “조국”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어에서는 “자기의 나라(《현대한어사전》)”, 즉 자기에게 공민권을 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한국에서는 “(1)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2)민족의 일부 또는 국토의 일부가 떨어져 딴 나라에 합쳤을 때 그 본디의 나라(《국어사전》)”라고 정의 했다. 쉽게 말해 중국은 내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이라 하고 한국은 조상이 살던 나라를 조국이라 한다. 중국의 정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한국사전의 해석에 준하면 조선족의 조국은 한국이나 조선이어야 한다. 두 나라의 “조국”이라는 명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감정상의 껄끄러움을 불러오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민해 온 민족 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중한수교를 전후하여 한국에서는 중국 조선족을 “재중한인”으로 호칭하다가 지금은 “재중교포”, “재중동포” 혹은 “조선족동포” 라고 부른다. “재중한인”이란 호칭은 내이션(nation)의 개념을 적용한 용어이므로 한국이나 조선 국적을 포기한 조선족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교포”는 거주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경우를 지칭해야 함으로 역시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겨레라는 뜻이 강조되는 에트닉(ethnic) 개념으로 풀이되는 “동포”는 적당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한민족동포(ethnic)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과거 어려운 시절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민해 왔고 중국의 혁명과 개발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국민의 자격을 취득한 일개의 소수민족(nation)이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분명히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갈래이지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10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국가의 령도층에도, 군의 장성에도, 학계의 최고 위치에도)진입한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중한수교 이후 한국 사람들과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중축구경기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의 저변에는 “한국과 중국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관심이 깔려있다. 사실상 조선족은 60여 년 전에 이미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나는 하버드대학연구보고서(1988)에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15] 라고 지적했다. 이중성 민족은 없다 조국과 고국의 시각 사이에 끼어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적지 않은 학자들이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아래에서 인용하게 되는 글은 어느 개인을 념두에 둔 것이 아니고 “이중성 민족론”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인용상의 편의를 위한 것임을 집고 넘어가겠다.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바꿔 말하면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며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며 조선반도의 국민과 동일선상에 있는 조선민족이다. 따라서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16]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 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17]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학술적으로 토론의 대상으로 조차 상정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술관점의 문제가 아닌 개념정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중성이란 말의 개념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선어나 한어에서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에 겹쳐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국어사전》),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 즉 하나의 사물에 구비된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성질”(“指事物本身所固有的互相矛盾的两种属性,即一种事物同时具有两种互相对立的性质。"《现代汉语词典》)을 말한다. 례를 들어 갑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느 중학교의 교사이고 그에게는 을남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을남이의 아버지이고 동시에 중학교사이기 때문에 갑돌이에게 이중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갑돌이가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두었다면 이중혼인이 불법으로 인정되는 중국에서 갑돌이는 합법과 불법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의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의 이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개 나라의 국적을 소유했다면 그는 이중국적자이다. 만약 조선족의 절대다수가 중국과 한국(조선)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했다면 조선족은 이중국적민족으로 이중성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중국적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조선족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조선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라면 민족의 혈연적(ethnic--“族裔”)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현재의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국적과 민족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하나로 묶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라 할 수는 없다. 어느 교수는 나에게 “조선족은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族群)에 속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기 때문에 이중성민족이 아니냐?”라고 물어왔다.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가 존재하느냐라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만약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 와 “중국 조선족”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조선민족(族群)” 속의 전체와 일부분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중국에는 조선족 이외에도 같은 민족집단(ethnic group--“族群”)이 중국국경선 밖에 독립된 단일민족국가를 갖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로씨아족, 몽골족, 까자흐족, 따지크족, 우즈베크족, 따따르족 등 7개 민족이 있다. 그리고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절반이 넘는 33개 민족이 소위 과계민족(跨界民族)이다. 그 어느 민족도 자기민족이 이중성 민족이라 하지 않는다. 이중성민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중국과 “한마음 한 뜻이 아닌” 민족? 허구의 “이중성 민족론”이 조선족위상에 주고 있는 부정적 영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수준에까지 미치고 있다. 2002년 8월23일,《인민일보》사이트에 소하(肖河)가 쓴 “56개 민족은 한 가족, 중국은 이 모든 민족의 나라(五十六个民族是一家,中国属于所有这些民族)”라는 글[18]이 실렸다. 저자는 민족과 종교 사업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자기아버지의 말을 빌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离心离德) 민족은 도리어 선족(鮮族), 즉 조선족이다. …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들(조선족)은 중국과 정체성을 달리 한다”라고 했다[19]. 그의 글을 읽는 순간 나의 느낌은 우선 자제되지 않는 분노 그 자체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하(肖河)는 일반 네티즌이 아닌 북경대학교수였다. 그런데 중국의 민족정책에 관한 어느 좌담회에서 내가 소하의 조선족에 대한 비틀어진 인식을 비판하자 옆에 있던 한 한족출신의 교수가 조심스럽게 “지금은 조선족학자들이 자신들은 이중성민족이라고 주장하지 않느냐? 조선족학자들만 사용하고 있는 그 말의 뜻은 자신들이 중국사람인 동시에 한국(조선)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해왔다. 그때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 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렬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 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 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해야 할 조선족 젊은이들이다. 총명, 근면, 지식 등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불신 때문에 그들의 길이 막혀진다면 그것은 우리세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주류민족이나 기타 형제민족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면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대들이 귀중한 생명까지 바쳐 우리세대가 중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는 우리 후대들의 주류사회진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제발 허구의 “이중성민족론”으로 그들의 앞길에 걸림돌을 설치하지는 말자.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법 학자로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한국계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국무부 차관보를 지냈던 예일대학 법과대학원 학장 헤럴드 고(고홍주)는 “한국계미국인으로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라는 한국 《중앙일보》기자의 질문에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시점에 나는 100%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 한국인이고 몇 % 미국인인가 고민하다가 ‘100% 한국계미국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더니 쉬워지더군요.”라고 대답했다.[20] 1987~88년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계미국인사회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기 위해 사회조사를 할 때 대부분 코메리칸 지식인들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미국국적을 딴 후 한국 사람들로부터 “축구경기응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자기 자신들과 후대들의 미국주류사회 진입을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문화와 차별되는 미국 코메리칸문화의 창출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했다. 미국의 코메리칸사회의 미국이민 력사는 1903년 7천226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이민한 사건을 제외하면 불과 4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300년 이전에 이민해온 “박가촌” 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중국조선족사회의 이민력사는 150년이나 된다[21]. 오랜 력사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조선족문화도 창출해냈다.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해야 할 리유가 없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럴드 고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1992년 중국과 한국간의 수교가 단행되면서 조선족과 한국간의 내왕이 잦아지게 된다. 많은 한국인들이 고국을 찾아온 조선족동포들을 따뜻한 겨레(ethnic)의 정으로 맞아주었고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조선족들도 한국경제인들의 중국진출을 도와 나섰다. 2006년, 한국보다 10년 먼저 중국과 수교를 실시한 일본은 대중경제교류에서 256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지만 한국은 도리어 254억 달러의 흑자를 얻었다. 조선족과 한국인과의 협력관계는 2003년부터 중국이 한국의 최대수출대상국이 되고, 2008년 말 한국의 대중국수출액이 820억 달러로 상승되는 일이 가능케 했다. 우리자신과 후대들이 중국 주류사회진입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중국에서 계속 타민족의 칭찬을 받는 민족으로 거듭날 때 조선족은 축구경기 때 한국 팀을 응원하는 정도가 아닌, 조국과 고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를 포함한 전 방위적인 교류를 위해 더 많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1] Huang, you-fu 1992, "The History Migration of Koreans Into China", Studies of Koreans Abroad 3: Seoul . [2] 黄有福 2002, “中国共产党在各个历史时期的民族政策与朝鲜族”, 《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 pp85-86, 심양 : 료녕민족출판사 3,《中國共産黨第6次全國代表大會,關於民族問題的決議案》(1928.7.9),《民族問題文獻彙編》,中央黨校出版社,1991年참조,p.87.“中国共产党第六次大会认为中国境内少数民族的问题(北部的蒙古、回族,满洲之高丽人,福建至台湾人,以及南部之苗、黎等原始民族,新疆和西藏)对于革命有重大的意义┅。”그리고“蒙古、回藏、苗黎、高丽人等凡是居住在中国地域的这些弱小民族,他们可以完全自由决定加入或脱离中国苏维埃联邦,可以完全自愿的决定建立自己的自治区域。”《中国苏维埃的十大政纲》(1930.5),1931年11月中华工农兵苏维 第一次全国代表大会通过的《关于中国境内少数民族问题的决议案》。 4. 1948년 판 《조선연감》에서 1945년 8월 이전 동북거주 조선인을 210만 명으로 집계하였는데 1953년 중국의 인구통계 자료에 따르면 조선족 인구수는 112만 명으로 나타났다. 1945년에서1953년까지의 자연 인구증가 숫자를 감안한다면 광복 후 귀국한 사람들을 100만 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5. 中共中央東北局, ,《民族問題文獻彙編》,中央黨校出版社,1991年 참조,p.751 [6] 《人民日报》, 1950.12. 6. [7] 《中國大百科全書》,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86年, 民族券 참조. [8] 《南齊書》, 권54. [9] 에트닉(ethnic)을 이광규는 “민족”이라고(《세계의 한민족》, 통일원, 1996년, P.23) 했고, 한건수는 “종족”이라고(《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 일조각, 2003년, P.122) 했다. [10] Huang, you-fu,1983, "Home of Koreans in China",《China Reconstructs》1983,No,3. [11] 《동아일보》, “ 延邊自治州” 1984년 3월 26일. [12] 황유복, 1985,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래”,《세계신보》, 1985, 1, 1. [13] Huang, you-fu 1988,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The World Platform 10: New York . [14] 黄有福,1985,"中國の朝鮮族 とその素顔”,《統一日報》, 東京. 1985,9,10~20. [15] Huang, you-fu 1988,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The World Platform 10: New York . [16] 조성일, “《중국조선족문학사》편찬의 시말”, 《문화시대》2009년 제1기. [17] 조성일, “조선족문화 론강”,《문학과 예술》,2006년 제2기. [18] 肖河 ,2002, “五十六个民族是一家,中国属于所有这些民族”,, 2002, 8, 23. 【19】 “我父亲以前从事民族宗教工作看来也挺合适,他的工作也帮助我确立了正确的民族观,有意思的是他说中国各少数民族 中,藏族和维族虽然有所谓的藏独,疆独问题,但那只是有海外势力的活动,国内的藏族和维族还是认为自己是中国人。真正和中国离心离德的倒是鲜族,也就是朝鲜族。他们或忠于金氏父子,或嫌贫爱富自认为是韩国人,很少有人认为自己是中国人。从这里也可以看出内外有别。汉,满,蒙,藏,回(包括维族等)及其他少数民族都是我们中国自家人,各民族有自己的语言文化风俗,这些语言文化组成了我们整个中国的语言文化风俗。可是朝鲜人是真正的外来人,他们的风俗文化可能比藏蒙的风俗文化更接近汉人,但是他们却不认同中国。”     [20] 《중앙일보》, 월요인터뷰, 2006. 7. 31. [21] 조선족의 중국 이주의 시원에 대한 연구도 5가지의 설이 난립되어 있다. 황유복: . 《중국 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연구》, 민족출판사, 1996년, p14참조.
9    九、 要致力於二十一世紀朝鮮族文化的再創造 댓글:  조회:3042  추천:21  2010-12-02
朝鲜族文化论九、 要致力于二十一世纪朝鲜族文化的再创造 二十一世纪知识经济时代的人类社会的核心性质即社会发展的原动力由钢铁、能源、资本等物资资源转化为知识、教育、研究开发等文化资源。因此我们称二十一世纪为文化的世纪。现在,文化决定着世界各国的‘相对竞争力’,即文化强,则国家兴。日益发展的电脑,互联网等信息产业以及日益便利的交通手段使地球变成了一日生活区, 使信息、知识、文化的全球性交流成为了可能。文化的相互关联性使世界上任何文化都不能摆脱与其他文化相互交流和相互影响。二十一世纪应该是一个各民族文化的价值和谐共存的时代。越是全球化,我们的民族文化越要强调自身的自主性。现在,我们要抛弃重视朝鲜族文化就是拒绝世界化的偏见,确立朝鲜族文化的认同性,发展民族文化,致力于确保中国文化的普遍性和世界文化的普遍性。为了迎接文化世纪的到来,我们的首要任务就是对民族文化的确信和自豪。在二十一世纪这个文化的世纪,我们应致力于朝鲜族文化的不断创新,使其真正成为中国文化的一部分和世界文化的一部分。文化不单单让人们的精神生活变得饶,而且也在成为以文化产业的形态创造高附加价值的21世纪核心基干产业。因此,朝鲜族文化的发展从实践的意义上讲要依靠文化产业的发展。文化产业(culture industries)意味着利用科学技术这一载体生产出与文化相关的产品。创意性是文化产业的命脉。作为文化艺术的根基,创意性(creativity)是最重要的动力,为探索新思路的社会,带来变化和差异的丰饶,确保企业的竞争力。从单纯的想象力和创意出发,通过创新的技术和才能便可以创作出文化艺术作品,给人们带来快乐、感动和挑战意识。从这个意义上讲人类的历史也可以称之为人类创意性的体现。随着物质文明的变化,社会结构和人们的生活方式都在不断变化,丰富的精神文化可以使人们享受美好的生活。这种变化的底层,正是由人类的创意和努力构建的。谁也不知道我们未来会变成什么样子。现在的人们可能会不断地创造出新的东西,并选择适应社会发展需求的东西,来推动未来社会的发展。  
8    六、 朝鮮族文化絶非“二重性文化” 댓글:  조회:3192  추천:17  2010-11-29
朝鲜族文化论六、 朝鲜族文化绝非“二重性文化”或“蝙蝠型文化”   近年来我们经常会听到“朝鲜族文化是二重性文化”的观点。 “朝鲜族文化在性质上,从国家角度是属于中国文化,而从民族角度是属于朝鲜民族文化圈。所以就像朝鲜族具有二重性,朝鲜族所创造的文化也具有二重性。”[1]  主张朝鲜族是具有二重性民族的这一荒唐的说法,我已在“朝鲜族是二重性民族吗?”一文[2]中辩证过。所以并非二重性民族的朝鲜族,所创造并共享的朝鲜族文化也不具有二重性质。朝鲜族文化是反映朝鲜族群体认同性的单一性质的文化。   持文化二重性观点的人们似乎认为朝鲜族文化是“朝鲜文化(或者是朝鲜民族传统文化)”与“中国文化”混合出来的产物,而这是非常严重的错觉。根据文化人类学的理论,所有的文化时刻在交叉和循环的过程中,产生变化并发展。一个民族的文化遇到另一个民族的文化就会产生交叉文化(Cross Culture)。这时,这种文化不是直接接受两种文化,而是以自己的文化为基础,吸收他文化,并创造出新的文化。这相当于朝鲜族在100余年的历史过程中,以朝鲜族传统文化为基础,吸收和消化中国其他民族的文化,而创造出一种新的“朝鲜族文化”。 认为朝鲜族文化是二重性文化,进而把朝鲜族文化贬低为“蝙蝠型文化”的这种观点更令我们瞠目结舌。金文学在《中国朝鲜族大改造论》中把朝鲜族描绘成“在中国社会、中国文化面前”认为“自己的文化是朝鲜民族文化”,在“韩国文化,韩国人面前” ,“自认为是中国的”,进而下了“我们成为典型的蝙蝠”的结论。在鸟类之中主张自己是鸟,在鼠类之中说自己是耗子的蝙蝠的“二重性格”,倒过来适用到朝鲜族和朝鲜族文化的评价上。 朝鲜族文化的根基是朝鲜族民族传统文化。此外,还吸收了汉族文化和满族、蒙古族等其他少数民族的文化要素,甚至连印度乃至西方文化的要素也被吸收了进来。如果这样,就把朝鲜族文化的认同性和性质定为二重性或三重性是不可取的。我们的“传统文化”即解放前的“朝鲜半岛文化”,也吸收了不少中国文化的要素。在朝鲜王朝时期,我们的祖先使用汉文来记录历史,朝鲜语言的70%以上都是汉语借词。不仅如此,500多年以来,朝鲜王朝从政治、经济、哲学、文化到社会生活都受到来自中国的儒家思想的影响。即便是这样,我们也不会认为朝鲜王朝时期的文化带有二重性,它只是吸收了很多中国文化的要素而已。      [1] 赵成日 2006。 [2] 황유복 2009, “조선족은 이중성 민족인가”, 《도라지》2009년, 제3기.(黄有福 2009,“ 朝鲜族是二重性 民族吗?”,《道拉吉》2009年, 第3期。  
7    五、朝鮮族文化是朝鮮(韓國)文化? 댓글:  조회:2883  추천:29  2010-11-29
朝鲜族文化论五、朝鲜族文化是朝鲜(韩国)文化吗?   1957年之前经常接触到的一种观点是,朝鲜族文化是朝鲜文化的一部分,朝鲜族文化的认同性应在朝鲜文化中寻找。这种观点在朝鲜族认同性确立之后一度消失,但到了改革开放以后,随着二重性理论的出现又开始抬头了。“曾经有一个学者指出‘朝鲜族文化不是二重性文化’,‘朝鲜族文化既不是解放前的朝鲜文化,也不是现在的朝鲜、韩国文化,也不是中国的汉族文化,而是一种新的朝鲜族文化’,根据他的观点,虽然凸显了朝鲜族文化的‘个性’和‘创新性’,却极度夸大了朝鲜族文化与朝鲜文化、韩国文化和中国文化之间的差异,排除了朝鲜族文化与朝鲜文化、韩国文化的血缘关系和共同特性及认同性,倾向于把朝鲜族文化的传统与现代隔离开来,有把朝鲜族文化变成孤立无援的‘文化孤岛’的迹象。”[1]    在这里,赵成日所说的 “一个学者”’是指我本人,而引用的是我在哈佛大学研究报告书和另外的论文里提出的观点[2]。关于朝鲜族文化是否是具有二重性的文化,会在下面专门的分析。在这里,就赵成日所指出的“排除了朝鲜族文化与朝鲜文化、韩国文化的血缘关系和共同特性及认同性”进行简单论述。“朝鲜族文化”与“朝鲜文化”、“韩国文化”能具有共同的“认同性”吗?根据赵成日所讲,能在朝鲜族文化、解放前的朝鲜文化、朝鲜文化、韩国文化之间划等号的吗?   由于变迁是文化的基本属性之一,所以现在的朝鲜族文化只要不是化石,就不可能是半个世纪之前的“解放前的朝鲜文化”。而且,虽然都是以朝鲜半岛的传统民族文化为根基,但是朝鲜族文化也不可能与现在的朝鲜、韩国文化相同。即使不是赵成日反复强调的“政治文化”[3]的差异,就是在继承传统文化的过程中,朝鲜族文化与朝鲜文化、韩国文化也产生了巨大的差异。在朝鲜族日渐重视春节、中秋等传统节日的今天,在朝鲜,由于在建国时取消了阴历,春节、中秋等传统节日逐渐被遗忘,像“太阳节”那种对我们来说很生疏的节日逐渐占领了主导地位。另外就照赵成日的“朝鲜族仍然坚持着自己的传统美食,如汤饭、泡菜、冷面、狗肉、烤肉、打糕、米肠等”的说法,去看看现场——位于首尔的加里峰洞吧。这里是滞韩朝鲜族劳务人员聚集地,这里的餐厅与首尔其他地区的韩式餐厅大为不同。在那里,朝鲜族带过去的“传统美食”的菜单和口味也与韩国大不相同。   说朝鲜族文化“既不是解放前的朝鲜文化,也不是现在的朝鲜、韩国文化,也不是中国的汉族文化,而是一种新的朝鲜族文化”是指,虽然都是以传统文化为基础,但是为了适应与朝鲜半岛完全不同的中国的自然环境与政治、人文、社会环境,继承了从朝鲜半岛带过来的朝鲜民族的优秀的传统文化的同时,吸收了周边其他民族的优秀文化,创造出了与周边环境相适应的新的朝鲜族文化。在这里,我并没有排除“朝鲜族文化与朝鲜文化、韩国文化的血缘关系和共同特点”,并没有倾向于“隔离朝鲜族文化的传统与现代”,完全没有“把朝鲜族文化变成孤立无援的‘文化孤岛’”的观点。但是可以肯定,朝鲜族文化、朝鲜文化、韩国文化的认同性绝对是各自不同的。 [1] 조성일 2006, “조선족문화론강”, 《문학과 예술》2006년, 제2기. (赵成日 2006,“朝鲜族文化论纲”,《文学与艺术》2006年,第2期。) [2] Huang, you-fu 1988和 황유복 2001, “조선족문화의 21세기적 재창출과 실천적 모색”,《중국민족》2001년, 제6기. (黄有福 2001,“朝鲜族文化的21世纪创新和实践的探索”,《中国民族》2001年,第6期。)         [3] 赵成日在“朝鲜族文化论纲”中承认“朝鲜族文化中的这种政治文    化是与朝鲜半岛文化不同的关键所在”。
6    四、關于朝鮮族文化的各種觀點 댓글:  조회:2772  추천:15  2010-11-28
朝鲜族文化论 四、关于朝鲜族文化的各种观点     迄今为止,对于朝鲜族文化的认同性,学术界的研究主要分① 朝鲜族文化是朝鲜文化的一部分,② 朝鲜族文化是中国化的文化,③朝鲜族文化是同时具有朝鲜文化与中国文化特征的二重性文化等三种见解展开的。此外,还有把朝鲜族文化认定为“边缘文化”、“平民文化”、“复合文化”、“复合变异文化”、“中国特色的文化”、“汉文化的周边文化”、“朝鲜半岛的周边文化”、“蝙蝠型文化”等的多种说法。    在判断这些说法的正确与否之前,我们应该首先掌握衡量文化的“尺子” 。我们在讨论文化的时候,应该应用文化理论,而不是用政治理论或是日常生活的常识去谈论文化。文化是人类创造的产物,人们创造着不同类型的文化,并把自己归类于各个不同特征的文化共同体之中。因而文化是具有民族性的,民族是共享一种文化的集团。     1957年之前,经常见到的一种观点是,把朝鲜族文化看作是朝鲜文化的一部分,在朝鲜文化中寻找朝鲜族文化的认同性。但是,这种观点只片面的强调了传统文化的共同特点,忽略了100多年以来朝鲜族群体为了适应与朝鲜截然不同的自然环境与人文社会环境而不断变迁地传统文化,并创造出新的朝鲜族文化的事实,而且同样忽略了创造出新的民族文化的朝鲜族群体在20世纪50年代初就已经确立了彻底脱离朝鲜(国家)的民族认同性的事实。     从1957年到“文革”结束为止,在学术界占有主导地位的观点是朝鲜族文化是中国化的文化。这种见解的产生,是与当时在中国社会中漫延的左倾政治、思想倾向有关,以致于以“国家”的尺度去衡量文化。这种见解剥夺了朝鲜族文化的自律性,使民族文化趋向同化。    随着改革开放,在朝鲜族学术界里,开始出现朝鲜族文化具有二重性的观点。这种观点认为,朝鲜族文化并没有完全脱离朝鲜半岛文化的影响,而且形成有中国文化的特色与特点说以具有二重性。二重性理论可以看作是在上述两种对立的观点之间寻找某种平衡点的做法。但是主张二重性的人们必须注意的是,共享这一文化的朝鲜族群体的民族认同性并不具有二重性的事实。     此外,还有把朝鲜族文化解读为“边缘文化”等的许许多多的说法。但遗憾的是,“其中的任何一种说法都与文化理论没有任何关联。”[1] [1] 황유복 2005, “조선족과 조선족문화 그리고 정체성”, 《문학과 예술》2005년, 제2기. (黄有福 2005,“朝鲜族与朝鲜族文化及其认同性”,《文学与艺术》2005年,第2期。) 
5    三、朝鮮族文化的認同性 댓글:  조회:2919  추천:15  2010-11-28
朝鲜族文化论 三、朝鲜族文化的认同性       朝鲜族文化的认同性(identity)是受朝鲜族民族认同性的制约的。我在哈佛大学研究报告书(1988)中曾写道:“在20世纪50年代初形成的‘中国朝鲜族认同性’是具有彻底脱离朝鲜(国家)的性质。因为他们有着在中国定居的决心和把朝鲜族文化在移居现场发扬光大的决心。[1]”     朝鲜族是从朝鲜半岛迁移过来的移民及其后代构成的民族群体,是中国少数民族成员之一。朝鲜族群体成员必须具备如下两个条件:其一,移民者及其后代必须是中华人民共和国的公民;其二,移民者及其后代必须是经有关行政部门认定其民族成分为朝鲜族者。那些并没有取得中国国籍的朝鲜移民者及其后代(如朝鲜侨民、韩国侨居者),或是已被融合到其他民族群体的朝鲜移民者的后代并不能称为朝鲜族。朝鲜族的移民史长达150余年。但是真正作为中国少数民族的一员,形成朝鲜族共同体的时间是从1949年9月全国人民政治协商会议的召开起到1952年9月延边朝鲜族自治州的成立为止的[2]。   “朝鲜族”这三个字不仅包含了我们的祖先是从朝鲜移居到中国,并属于朝鲜民族族群的一部分等内涵,而且还意味着我们是领有中国国籍的、中国少数民族的一员。    中国的朝鲜族虽然已经成为了中国公民,但这并不意味着他们的文化被同化,他们仍保持了具有独特个性的文化。所以我们可以从不断创新出来的新的朝鲜族文化中寻找朝鲜族文化的认同性。朝鲜族文化既不是解放前的朝鲜文化,也不是现在的朝鲜或韩国文化,也不是我国的汉族文化,而是我国朝鲜族不断创新得来的新的文化。所以朝鲜族文化的认同性就是朝鲜族文化本身。    我在哈佛大学研究报告书(1988)中是这样阐述这种情况的。   “事实上中国的朝鲜族文化既不是解放前的朝鲜文化,也不是现在的朝鲜(包括朝鲜、韩国)文化,也不是中国的汉族文化。朝鲜族以其民族传统文化为基础创造出新的中国朝鲜族文化。这种新的文化是以传统文化为基础的,所以我们首先想到新旧文化之间的共同特性。但是在仔细观察朝鲜族文化时可以发现,这一新的文化并不是传统民族文化的简单延续,而是朝鲜族以本民族文化为主体与中国各民族文化交流过程中进行文化涵化的结果。朝鲜族的文化、艺术创作或报纸、杂志、广播、电视节目以及日常生活中的衣食住文化与岁时风俗文化都以符合中国的朝鲜族社会的‘朝鲜族方式’构成。在这里,我们可以解读到,朝鲜族在中国政府的弘扬和发展少数民族文化的政策指导下,把自己的文化发展成优秀民族文化的智慧和民族自信心。更重要的是,朝鲜族文化就像中国朝鲜族社会一样处于一种稳定的状态,不断地吸收兄弟民族文化的精髓,持续地发展着。”[3]     朝鲜族文化的认同性说到底就是中国朝鲜族群体的,即朝鲜族群体成员以民族传统文化为基础创造出并由他们共享的文化,这就是朝鲜族文化。 [1] Huang, you-fu 1988,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The World Platform 10: New York . [2] 黄有福 2002, “中国共产党在各个历史时期的民族政策与朝鲜族”, 《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 pp85-86, 沈阳 : 辽宁民族出版社。   [3] Huang, you-fu 1988。
4    二、何謂朝鮮族文化? 댓글:  조회:2929  추천:14  2010-11-24
朝鲜族文化论 二、 何谓朝鲜族文化?   可以说文化是“一个人类集团所共享的价值和信念”或“生活的式样(design for living)”。朝鲜族文化就是朝鲜族群体成员所共享的文化。朝鲜族群体由 甲洙、乙男、丙浩等,近200万一个个个体组成。这些一个个成员的行为不可能千篇一律,比如甲洙喜欢吃辣泡菜、大酱汤, 乙男爱吃汉堡包而丙浩则嗜好饺子。虽然个人的爱好千差万别,但朝鲜族群体成员毕竟具有某种共同的与其他民族群体成员不同的行为倾向。与个人的个性无关,朝鲜族群体中的绝大多数成员按朝鲜族群体的行为式样去行动。我们把有别于个人的趣味或习惯的,朝鲜族群体所共有的这种共同的行动式样叫做朝鲜族文化。 但是,并不是所有朝鲜族群体所共享的东西就是朝鲜族文化。我们都有着黄皮肤、黑头发,但这些只是体质的特性,并非是文化,文化是后天习得的。我们在朝鲜族文化环境中出生并成长的过程中,即文化化(enculturation)的过程中,养成了关心特有的朝鲜族文化,而对其他民族的文化则不闻不问的习惯。我们通常不是“有什么看什么”,而是以“怎么学的怎么看”世界的。人们只要一睁眼就可以看到东西,所以大家都以为看东西并不是学习得来的一种能力。但事实上在不同的文化环境中成长的人们在看到同一事物时,就可以有不同的解读。 文化应该是人们相互作用下所产生并代代传承、积累、持续发展的。朝鲜族文化是我们的祖先所积累的经验,通过语言和文字的描述一代代流传至今的。而且朝鲜族文化是由知识、艺术、信仰、道德、法律、习惯等多方面构成的。构成朝鲜族文化的这些方面并不是以任意的方式存在或独立存在的,而是以一个相互作用的整体(a whole)或是以一种体系(system)存在的。所以只要其中的一个部分发生变化,就可能会反映到另一个部分。 从时间的角度考虑,文化是不断变化的。变化是文化的基本属性。我们经常试图找到更有效的方法去解决在日常生活中所面对的问题。而这样的方法取得良好的效果时,社会的其他成员就会学习并把它传播到整个社会。这样的革新作为社会文化的一部分被积累下来。文化的另一种变化是外部原因引起的,即文化间的交流所产生的文化因素与原有的文化因素接触过程中发生的变化。朝鲜族文化也是在150余年移民和定居过程中不断变化至今的。  
3    [朝鮮族文化論] 一、文化的槪念與性質 댓글:  조회:3001  추천:18  2010-11-24
朝鲜族文化论 黄有福/ 中央民族大学教授、中国朝鲜民族史学会会长      我们之所以把21世纪知识经济时代誉为文化世纪,那是因为人类社会的核心性质即社会发展的原动力由钢铁、能源、资本等物资资源转化为知识、教育、研究开发等文化资源。20世纪80年代开始掀起的新的全球性文化热,在21世纪开始形成新的以文化为中心的社会发展与人类进步之范式。在150余年历史进程中,朝鲜族成为我国民族大家庭的成员之一。朝鲜族在21世纪可以选择的生存战略就是持续创造出新的民族文化并把它共享下去。 民族文化是一个民族群体成员共享的行为、思想和感觉的方式及其产品。朝鲜族文化也就是朝鲜族群体成员共享的文化。朝鲜族文化的认同性(identity)与朝鲜族民族认同性有着直接的关联。    一、文化的概念与性质   要谈论文化首先要搞清文化的概念。文化的概念是当代人文社会科学的重要基石。由于民族学、文化人类学研究的核心对象是文化,所以文化的概念一般由民族学家和文化人类学家着力研究。民族学家和文化人类学家们至今尚未就“文化”的定义达成共识。1952年,两位美国文化人类学家阿尔佛雷德.克罗伯(Alfred Kroeber)和克利得.克拉克洪(Clyde Kluckhohn)为给“文化”下一个能让大家首肯的定义,专门组织研究人员系统检索当时的文献,撰写出一部书名为《文化:概念和定义的批判性评述》的专著。他们综合并分析了当时各门科学著作中的有关“文化”的175个定义之后,自己给“文化”下了综合性定义,但他们的定义最终也为诸多定义增添了新的一种定义 [1]。 文化的定义随着时代的发展不断发生变化。在古代西方“文化 (culture)” 意为 动物的饲养、农作物的栽培、宗教的崇拜有关。但是从16世纪到19世纪,文化广泛适用于通过学习取得的个人的人格与习惯的进步、向上。在产业革命过程中文化适用于精神的发展,以区别于基础结构。到了19世纪末,随着民族主义的兴起文化逐步适用于传统与日常生活,容纳到“民族文化 (national culture)”、“民俗文化(folk culture)”等概念之中。   现在,“文化”一词使用于在3种通用的概念之中。 1)指个人或群体以及社会的知识的、精神的、美学的发展。 2)指一定范围的知识性、艺术性活动及其产物(电影、戏剧、美术等)。 3)指一个民族、集团或社会的活动、信仰、习惯等整体的生活方式。 第3个概念是大多数文化人类学家首肯的对文化的核心解释。文化不仅仅是存在于高级艺术或西欧“文明”之中的,而应该是到处普遍存在的。现代文化人类学的奠基人英国的爱德华.泰勒(Edward. B. Tylor)在《原始文化》(1871)中提出了“文化或文明,是包括知识、信仰、艺术、道德、法律、习俗和作为社会成员的个人所获得的任何其他能力和习惯的复合整体。[2]” 这一具有权威性的定义。   虽然对文化的定义众说纷纭,但有关文化属性的解释文化人类学家的见解相当的一致。 1)文化是共享的。 (Shared) 2)文化是后天习得的。(learned) 3)文化是积累的。(accumulation) 4)文化是整合而成的。(system) 5) 文化是不断变化的。(change)   我们在谈论文化时,不应该抛开文化的属性去夸夸其谈。 [1]  Alfred×L×Kroeber and Clyde Kluckhohn 1952, Culture, A Critical Review of Concepts and Definitions, Vintage Books, New York.   [2]  [英] 泰勒 1871,《原始文化》,1页,上海文艺出版社,1992.  
2    조선족발전을 위한 글로벌네트워크 댓글:  조회:3300  추천:94  2008-07-06
조선족발전을 위한 글로벌네트워크황유복 중국중앙민족대학 교수1.중국의 개혁개방 30주년 성적표 ① 1978년 중국공산당 제11회 3중 전회에서 개혁개방 중대정책을 결의.  ②2008년 버아오포럼에서 후진토우중국 국가주석은  2가지 분투와 한가지 나아갈 방향을 다음과 같이 지적.-  중국인민은 확고부동하게 개혁개방의 위대한 길을 따라 나아갈 것이며; -소강사회의 전면적 건설과 나아가서 현대화의 기본적 건설을 위하여 계속 분투할 것이며;-인류평화와 발전이라는 숭고한 위업을 위하여 계속 분투할 것이라고 하였다.③2007년 중국 국내생산총액 24,66만억 원. 1978년의 67배;      중국의 GDP가 세계GDP의 1978년 1%에서 2007년의 5%이상 미국, 일본다음 제3위.      1인당 GDP 1978년의 381원에서 2007년 1,8665원. 49배 증가. ④중국의 수출입총액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 1978년 1%미만에서 2007년의 8%.       2007년 중국 수출입총액 21,738억 달러.      수출:     12,180억 달러.      수입:     9,558억 달러.     무역수지 흑자:   2,622억 달러.      국제무역성장 기여도: 12%. ⑤중국이 사용한 외자자본 누계: 7800억 달러. 세계경제성장에 대한 중국의 기여도: 10%초과. 2. “민족”의 정의에 따른 “조선족”의 IDENTITY 1) 에트닉(ethnic)  민족, 족군 2) 내이션(nation)  국민, 국가, 민족(정치적   영토와 관련시킨)  중국에서 1903년 양계초가 독일학자의 민족계념을 번역하면서 “민족”  이란 용어 사용. 3) 중국에서 내이션으로 민족을 정의. 조선족, 한족, 몽고족 따라서 “조선족”의 IDENTITY는 “중국국민+조선민족”. 4) 재미 코리언과 재중 코리언 재미코리언 --미국시민권자      --미국영주권자 --불법체류자 --공관 및 회사 직원(장기 체류자) **계: 200만 재중코리언 --조선족(193만) --상주 한국인(70만)      --한국인영주권자 약간 --조선인영주권자(조교, 10만정도) --불법체류자 약간 **계: 275만 5) 재중코리언의 IDENTITY는 하나의 Ethnic과 3개국 국민. Ethnic--한민족(조선민족) Nation--중국인, 한국인, 조선인 3. 중국조선족의 변화 1)중국조선족의 이민사 (1) 17세기 전쟁이민(war migration),후금의“정묘호란”과 청의 “병자호란” 피랍인. (2) 19세기 후반기의 자유이민(free migration) (3) 1910년대의 망명이민(exiled migration) (4) 1920년~1945년의 일제 식민정책에 따른      이민(impelled migration) * 1945년 현재 재중 조선인 인구: 216만 명. 2) 인구의 추이 (1) 1945년 광복전야 중국거주 조선민족인구수는 2,163, 115명 (1948년 판 ≪조선연감)참조),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 간 사람들이 절반정도 된다. (2) 해방후 조선족인구의 변화        1953년      1,120,405명 1959년      1,237,200명 1964년      1,348,594명 1978년      1,680,000명 1982년      1,766,439명 1990년      1,920,597명 2000년      1,923,842명 (3)거주지역의 변화 * 1982년 이전: (가) 길림성(110만정도) (나) 흑룡강성(60만정도) (다) 료녕성(20만정도) * 현재 (가) 국내 a. 전통 거주 지역: 35만 b. 송화강, 료하 류역 (할빈, 장춘, 심양, 대련): 40만 c. 경진지역: 15만 d. 황하하류지역(산동): 20만 e. 양자강하류지역: 5만 f. 주강삼각주: 5만 g. 기타지역: 5만 (나) 국외 a. 한국: 35만 b. 일본: 8만 c. 미국: 5만 d. 러시아: 10만 e. 유럽, 남미, 동남아: 2만 4.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 1) 경제수입의 증가: 2006년, 연변자치주에서 외국에 간 조선족노무자들이 연변에 부쳐온 돈은 10억 달러에 육박했고  휴대해 들여온 돈까지 합치면 20억으로 추산 되었다. 2) 조선족사회의 해체위기          (1) 출산인구의 감소: 1999년 말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신생아 출산 수는 1989년의 1/4밖에 안 되는 3,800명이였다. (2)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1996년 조선족학교 수 1130개. 2006년400여개. (3)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전통거주 지역의 황폐화. 5. 동북아 시대와 글로벌 민족 1)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는 2007년 4월 10일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그리고 11일에는 일본의 아베신조 총리와 각각 회담은 갖고 동아시 아 3국의 경제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2) 이어 4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중, 일, 한 30인 포럼에서 3 개국간 FTA 체결이 제안되었고, 3) 4월 21일 중국 해남도 보아우(博鳌)포럼에서는 "아시아경제공동체" 창설 제안이 잇따랐다. 4) 현재 중, 일, 한 3국은 서로가 각국별 무역거래에서 모두 4위 이내를 차지하고 있으며, 중국은 일본에 대해, 일본은 한국에 대해, 한국 은 중국에 대해각각 209~256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취득하는 순환 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5) 이러한 동아시아시대를 살면서 중, 한, 일 3개 국어를 동시에 구사 할 수 있다는 것은 중국 조선족이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말 이다. 6. 글로벌 코리언의 생존을 위한 경제네트워크 1) 중국 조선족기업은 아직도 대부분 기업들이 요식업,  유흥업,  여행사 등 단순서비스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는 연간 4000만 달러의 이익을 창출하는 슈퍼 요식체인업체 (예를 들면 북경한라산 요식체인 기업)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윤마진이 빈약한 상태이다. 이들 기업들은 제한된 지역에서 유사한 비즈니스 모델로 시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동족 기업 간의 소모적 경쟁이 빈발하고 있다. 2) 중국진출 한국기업과 밀착되어 있다는 점 이다. 자본, 기술, 상품, 경영노하우, 비즈니스 모델 등, 많은 조선족 기업들이 자체의 생존 공간 을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시각을 바꾸어 보면 스스로 자체의 발전 공간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다. 3) 글로벌경쟁시대에 있어서 자신들만의 우세와, 다른 민족 집단이 대체할 수 없는 특수한 역사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자각해야 한다. 조선족 기업 들은 한국계 기업들과 차별화된 <중국특색>의 기업발전공간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국계기업 들과 생존을 함께하는  전략적 제휴관계를 유지 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7. 정체성 확보를 위한 민족문화공유는 코리언네트워크 뿐 1)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민족 사회로 생존하려고 한다면 부동한 자연 환경과 문화 환경에 노출되어있는 민족 구성원들이 계속  조선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선족의 민족 정체 성과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해가야 한다. 2) 분산된 조선족사회를 유지하는 대안으로 일부학자들이 “이산(离散) 유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Diaspora) 민족론”을 제시하고 있다. 혈통과 언어가 바뀌어도 디아스포라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데는 끈질기게 작용 해온 유대교가 디 아스포라들의 민족  정체 성과 전통적 가치관의 기반으로 되어 주었 기 때문이다. 강한 결집력을 가진 민족 종교 가 없는 조선족사회에 디아  스포라는 그대 로 적용될 수 없다. 3) 우리는 현실적으로 디아스포라보다는 이민자들이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 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에 가깝다. 중국국적을 취득했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진입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이론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 적인 차원에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 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4) 현재 조선족들이 흩어져 사는 중국의 대도 시 들에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된 조선족 단체 들이 활동하고 있다. 동북지역 도시들 에는  “심양시 조선족연의회”와 같이 현지정부의 민정국에 등록된 법인단체도 있지만 관내 지역 의 절대 다수 단체들은 무허가상태에서 어렵게 조선족 문화관련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 운동회, 설맞이모임, 노래자랑모임, 장학회모임, 동호인 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 내용도 다양하다. 이러한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문화 활동들은, 조선족들이 바다에 뿌려진 모래 알같이 흩어져 있지만,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사는 지역 사회의 친목활동이라는 의의를 훨씬 뛰어 넘는다. 5) 각 지역 조선족단체들은 현지 정부의 민족사업을 협조하는 위치에서 NGO의 합법적 지위확보에 힘을 기울려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 효과적으로 민족 문화의 계승과 창출을 통한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언어교육과 민족문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전통과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 에서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6) 세계로 흩어진 조선족의 사회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글로벌조선족 네트 워크> 의 구축과 상응한 시스템 도입 이 시급하게 우 리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트 경제인들과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는 세계 적인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전체적인 경제사회 발전을 고민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네트워크가 조선족 사회의 민족문화와 경제발전에 촉매 역할 을 하게 해야 한다. 7) 이러한 글로벌네트워크만이 우리가 지금 까지 연구하고 도전해온 조선족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러한 취지로 우리는 북경(2006년)과 부산(2007년)에서 제11회와 제12회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을 열어  글로벌 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활용에 관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8. 결  론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글로벌 코리언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어렵지만 우리는 도전해야 한다.* 본문은 "개혁개방30년 및 조선족기업발전세미나"(2008년 6월 20일.할빈)에서 행한 특강내용입니다. 
1    조선족발전 5대 문제와 그 해결대책 댓글:  조회:3505  추천:97  2007-03-03
조선족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다섯 가지 문제가 있다.  1.조선족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2.조선족 기업인들의 사명 3.조선족 농촌의 중요성 4.민족문화의 진흥문제 5.조선족사회의 정체성문제 1.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얼마 전에 사이트에서 SCK포럼에서 어느 지성인이 쓴 글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중국 조선족은 인구 마이너스성장이라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말을 최근 몇 년간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 필자는 조선족인구 마이너스성장은 조선족 역사발전의 필연적 현상이라 본다. 별거 아닌데 신경을 쓰며 걱정할것이 못된다. 어떤 마이너스 성장은 당연한것이며 오히려 권장해야 한다고 본다."라고 하면서 인구의 감소를 마치 도시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별거 아닌데 신경을 쓰며 걱정한다”는 식으로 오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족 인구감소현상의 본질은 조선족 농민들의 도시 진출로 인한 농촌인구의 감소가 아니라 조선족 출산인구의 감소라는 극히 심각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0년의 조선족 총 인구는 192만 3842명으로 집계되었다.                 2000년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조선족인구가 계속 집거지역에서 잡거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것은 농촌인구의 도시진출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10년 전에 비해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골의 조선족인구가 각각 3만 7879명, 6만 5633명과 314명이 감소된 반면 기타 성, 시의 조선족인구는 모두 증가되었다. 증가폭이 가장 큰 지역이 산동성인데 10년 전에 비해 2만 4433명이 증가되였다. 조선족의 도시 거주인구수는 88만 2308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45.8%를 점하고 향, 진 인구수는 104만 1534명으로서 전체 인구의 54.2%를 차지하고 있어 아직도 농촌 인구가 절반을 웃돌고 있다. 그러나 20세에서 59세까지의 로동력 년령층의 46%가 도시에 집중되여 있는 반면 60세 이상 년령층의 74.8%는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조선족 농촌도 점차 노인들이 지키는 농촌으로 변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우리가 인구의 위기라고 하는 부분은 역시 조선족의 저출산률이다. 1991년--2000년의 조선족 신생아 수는 총 13만 6585명으로, 1981년~1990년의 32만 9207명에 비해 60%가 줄어든 실정이다. 민족을 나무에 비한다면 10년 동안 뿌리가 60% 나 잘린 셈이다. 민족을 이어갈수 있는 인구가 없어진다. 이걸 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지성인들이 이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위기를 불러온다. 도시로 이주하다 보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고 말한다. 출산이 감소되고 있는 원인은 농촌 조선족 총각들이 장가 못 가기 때문이다. 조선족 출산률의 급격한 하락 현상에 관해서는 90년대 중반부터 상당한 분량의 론문들이 발표되여어 감소원인의 분석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들이 제시되어 왔다. 연변조선족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는 2000년과 2002년에 '연변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문제 대책회의'를 2차례에 걸쳐 개최하였다.  일부 인구학자들은 조선족인구 현상을 '인구현대화'로 높이 평가하였으나, 회의 참석자들은 그러한 분석을 뒤엎고 '인구의 기형적 감소'라는 결론에 인식을 같이 했다.2002년 회의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문제' 해법을 위한 특별과제를 설립함으로써 조선족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중앙정부와 성, 자치주 관계부문 지도자들과 행정인원 그리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담당 기구가 설립되고 2003년 11월까지 정부차원의 정책건의가 마련되였다. 조선족인구의 감소문제는 국가차원의 특별정책제정도 중요하지만 조선족공동체가 직면한 사회경제, 교육, 가치관 등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풀어나가야 해결될수 있는 문제이다.  국외로 시집가는 녀성들과 도시로 진출하는 녀성들이 늘어 총각들이 장가 못 간다. 교육위기, 문화위기도 출생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나타난다. 학생이 없기에 학교가 무너진다. 신문, 잡지를 보는 사람이 적어지기에 신문, 잡지도 무너진다. 여기에서 근본 원인이 출생 인구 감소인것이다. 국면 타개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사회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언급한 연변 조선족자치주정부의 정책적인 배려로 금년에는 조선족의 1가구 2자녀의 비례가 증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산재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대책이 있어야 된다. 총각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켜 농촌이든 도시든 관계없이 돈을 벌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 돈이 있으면 결혼 할수 있고 출산률도 늘수 있다.  2. 조선족 기업인들의 사명 제10회 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도시화와 조선족 경제발전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많은 학자들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도시화를 실현한 민족은 조선족이라고 했다. 사실 그렇게 락관할만한 현황이 아니다. 조선족 가운데 도시거주 인구가 45.8% 된다. 개혁개방이후 도시진출 민족 중 가장 돈을 많이 번 민족으로 집계됐다. 올해 연변자치주에서 외국 로무를 나간 사람들이 연변에 부쳐온 돈이 10억달러에 육박했으며 휴대한 돈까지 합치면 20억으로 추산된다. 중국에는 30개 소수민족 자치주가 있다. 이 가운데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봉급수준이 가장 낮지만 개인 저금은 가장 많다. 도시에 진출해 2, 3차산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를 정확히 따져야 한다. 중국 500대기업이나 상장기업 행렬에 든 조선족 기업이 없다. 기타 소수민족은 있는데 우리는 없다. 료식업, 제조업, 려행사, 유흥업 등에 진출해 있는데 기업인들이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점은 중국 경제정책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점. 지금까지 중국은 세계 공장이라 할 정도로 투자유치를 해왔다. 그러는 중 자연자원에 대한 략탈성 개발과, 심각한 환경오염, 그리고 구미 나라들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반덤핑세 부과로 수출이 타격을 받는 등 부작용이 뒤따르고 있다. 한국제조업자들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조선족기업들이 많이 위축되였다. 조선족 제조업자들이 앞으로 더욱 힘들어질것이다. 이제 조선족 기업인들은 미래의 진로를 고민하지 않을수 없다. 지난해 중국공산당 16차 5중전회에서 새로운 정책을 제시했는데 그 중 권장산업으로 창의산업이 지정되였다. 창의산업을 민족발전의 령혼이라고 평가했다. 대량의 인력을 사용하는 제조업보다는 창의성 하이테크산업이 진로이다. 문화산업이나 하이테크산업 및 조선족이 가장 취약한 류통업. 오염이 없고 정책적으로 지원을 받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하는데 이점이 상당히 미흡하다. 례를 들어 조선족 대학생들을 보면 동아시아 3국 언어가 상당히 능숙하다. 지난해 일본에서 열린 중한일 3국 TV포럼에 참석했는데 3국 언어로 통역할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조선족 류학생들이었다. 이것을 우세로 생각하고 동시통역회사를 설립하는 등 이런 산업의 잠재력을 발굴해야 한다. 3.조선족 농촌의 중요성 우리 민족의 발전은 농촌문제를 떠나 생각할수 없다. 조선족공동체가 겪고 있는 모든 변화는 그 뿌리가 농촌문제에서 기인된다고 할수 있다. 우선 개혁개방을 맞아 대량의 농민들이 선조들이 개척한 땅을 떠나 도시로 진출한다. 그 결과 우리 민족 집거지역이 위축되거나 소실되고 있다. 처녀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거나 한국으로 시집가면서 농촌총각들은 결혼에서 외면당한다. 그 결과 우리 민족 인구가 마이너스 성장의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고, 농촌에는 태여나는 애들이 없기 때문에 농촌에 있던 민족학교들이 문을 닫게 된다. 그 결과 민족교육은 위축되고 우리 민족 '문화영토'는 점차 축소 내지 소실되고 있다. 소위 '인구위기', '민족교육위기', '민족문화위기'는 그 근원을 농촌에 두고 있다.  제10회 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집중촌건설, 녹색산업, 농촌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 등  3가지 문제가 집중 론의되였다. 도농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 지난해부터 추진한 새농촌건설 운동은 제창할 바이다. 농촌에서 땅은 상당히 중요한 재산이다. 쉽게 버릴 문제가 아니다. 도시에 진출해 중등소득층의 10년 후 수입이 땅 가격에 못 미칠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있다. 농촌은 꼭 지켜야 한다. 길림성 서란현의  한 50대 조선족농민이 60헥타르의 수전을 경영하고 있는데 한족 농민을 고용해 기계화 경작을 하는데 일년에 나가는 로무 비용만 30만원이 된다. 이는 상당한 기업인들도 도달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런 규모경영이나 록색 산업으로 농촌을 지켜야 한다.농촌문제를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도시와 농촌의 균형적 발전과 경제와 사회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두 개의 핵심적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 나가야 한다. 모두가 도시로 몰려들면서 조상들이 개척한 농촌의 땅을 버리거나 , 돈은 벌었지만 조선족 사회는 무너져 버리는 그 어느 하나도 바람직하지 않다. 시장경제체제와 글로벌경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할수 있는 우리 민족 농촌경제가 형성되지 않는 한 조선족의 발전은 있을수 없다. 4.민족문화의 진흥문제 민족문화의 문제는 민족교육, 민족문화예술, 언어 등 3가지로 나눌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교육문제이다. 학교가 적어지는 현재, 조선족들이 현성, 도시에 모이는 상황이다. 도시에서 민족교육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무너진 조선족학교를 도시로 옮기는것보다 도시의 공립학교의 인적자원과 공간을 리용하여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 방법이 훨씬 효률적일수 있다. 몇 년 전에 북경의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에 조선족 학생 120명을 학비 2000원(한족학생의 학비는 300원밖에 안됨.)씩 지불하기로 합의를 보고 입학시켰다. 그리고 30만원을 투자해 학교 뒤 단층집에 기숙사를 마련했다. 오전은 한족학생들과 학교의 교육을 함께 받고 오후에는 기숙사에서 조선족 교원들이 두시간정도 조선어 학습, 숙제 지도를 완성하면서 훌륭한 교육의 효과를 거뒀다.  각 지역에서 이런 형태의 학교를 만드는것도 민족교육을 해결하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할수 있다. 문학예술에서 조선어 사용 인구가 줄고 있는데 우리 민족의 신문, 문학지나 문예지는 살려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기업인들의 도움이 상당히 필요하다. 우리 민족의 문학인, 예술인들도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현대에 맞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것은 우리 문화인들의 몫이다. 문화의 세기를 살아가면서 우리도 문화산업, 콘텐츠산업, 창의산업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언어에서 한족이나 기타 민족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는데 조선족 학생들보다도 더 표준적으로 우리 말을 구사한다. 동아시아 시대에서 두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할수 있다는 것이 큰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은 조선어를 홀시하고 한어만 중시한다. 유명대학에 입학하는 만 중시하고 이후의 취직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대학을 졸업하든 두 가지 언어를 확실히 장악하면 취직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현재 연변의 경우 정책상 원인으로 조선족 중소학교의 조선어 강의 시간을 많이 줄인다. 그러다보니 대학 입학시 조선어 학과에 오는 학생들은 조선어 수준이 매우 낮다. 이런 문제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5.조선족사회와 문화의 정체성문제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력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했다. 조선족문화를 '변연문화', '2중성문화'라고 많이 담론하고 있는데 사실 '변연문화'란 100년 이전에 나온 리론이다. 아마존강류역과 같이 현대문명과 격리된 원시부락의 문화를 말한다. 연변이 중국의 변방지역, 조선반도의 변방지역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변연문화라고 하는것은 문화이론에 부합되는것이 아니다. 학문적인 정립이 필요하다. 중국의 주류문화에서 우리는 비주류라 할수는 있지만 조선족문화를 한족문화와의 비교에서 락후한것이라 할수는 없다. 지난 2000년 중국의 인구통계자료에서 조선족의 문화수준은 한족보다 높은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의 우리 문화를 '변연문화'라 하는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사실 중한 교류에서 북경이나 산동 등 내지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들의 역할이 엄청 크다. 변연문화란 지정학적으로나 문화인류학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중국조선족은 광복전의 조선문화도 아니고 현재의 조선반도 남과 북의 문화도 아닌  자체의 문화를 창조해냈다. '문화는 집단구성원들에 의해서 공유된(shared) 것'이라는 속성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문화는 조선족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된것이다. 조선족문화가 2중성문화이자면 그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조선족공동체가 2중성, 말하자면 2중국적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조선족은 2중 국적 소유자가 아니다. 그리고 문화의 변동은 또 다른 하나의 문화의 기본 속성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중국(한족, 만족 등 민족)문화와의 접촉에서  해방전의 조선(반도)문화요소가 중국문화요소에 의하여 변동이 유발되였는데 그것이 조선족문화이다. 미국은 200년 전 영국의 '와스프(WASP)'(영국계, 백인, 개신교도) 들이 아메리카대륙으로 이민 가서 세운 나라이다. 영국의 '와스프'문화와 흑인문화, 인디언과 에스키모 문화, 히스패닉문화 등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미국문화를 형성했다. 미국의 '와스프'문화는 영국문화와 전통을 같이 하지만 현저한 차이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미국의 '와스프'문화를 2중성문화라 하지 않는다.  문화의 정체성은 그 문화를 공유한 민족공동체사회의  정체성과 일치하다.1957년 반우파투쟁 후 중국은 조선력사에 관한 교육을 금지시켰다. 그러다보니 현재까지도 학생들은 민족의 력사를 모르고 있다. 력사를 모르는 상황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한다는것이 불가능하다. 이에 대한 대안을 우리 모두가 내와야 한다. 전통과 그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 문제를 확정해야 정체성을 확인할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옛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려 노력해야 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에만 집착하지 말고 민족문화전통을 이여가야 한다. 문화전통과 세계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네트워크 문제에서 192만 중국 조선족에서 50만은 관내에 진출해 있고 40만 정도가 해외에 진출해있다. 해외 진출 조선족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족 네트워크가 없으면 해외 조선족들이 고독을 느낄수밖에 없게 되고 조선족 사회 구성원 감소로 나중에 민족 해체를 야기시킬 수 있다. 얼마 전 북경에서 개최된 제11회 중국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에서 국제 조선족 네트워크와 관련한 조선족 발전학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조선족 발전을 위해 공헌하려는 일본, 유럽, 미국, 한국, 호주 등지의 조선족 대표들이 많이 참석했다. 대회의 총적 목표는 조선족 네트워크 구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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