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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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민족어를 위한 시대적 도전 (황유복) 댓글:  조회:2004  추천:1  2020-05-31
민족어를 위한 시대적 도전 황유복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중앙민족대학에 조선어문학과가 설립되었다. 그동안 조선어문학과는 조선어문학부로 성장하였고, 우리가 조선족일 수 있게 하는 우선 조건인 민족 언어와 문학을 지켜가기 위해 지금까지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민족은 역사적 기원, 생산방식, 언어, 문화, 풍속습관과 심리적 정체성 등에서 나타난 공동특징을 말한다. 문화인류학자들이 제시한 민족구성의 요소는 샤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27개나 된다. 그 중에 빈도가 높은 것이 5개인데 즉 “공동의 지역적 기원” 혹은 “공동의 조상”, “동일한 문화 또는 관습”, “종교”, “언어”, “인종 또는 형질적 특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민족을 형성하는 5대 요소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다. 언어는 문화현상 중에서 민족의식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된다. 언어인류학자 사피어와 워프의 언어상대성가설에 따르면 언어는 의사소통의도구일 뿐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하여 감정을 공유하고 유사한 사유체계를 형성하게 한다.      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시키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다. 통신전달의 체계는 동물들에게도 있지만 언어는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고유속성이다. 민족 언어는 민족문화를 민족구성원들에게 공유하게 하고, 또 그것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해주는 가장 중요한 매체이다. 문화와 언어의 관계에서 문화가 언어의 구조와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언어구조가 문화의 다른 측면과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크다. 따라서 우리는 한 민족의 언어행위를 통해서 그 민족의 사회관계와 사회구조 및 사고의 구도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그만큼 언어의 중요성은 크다.      이민연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민족지역으로 이주한 이민 집단이 민족특성을 상실하는 순서는 제일 먼저 민족의 언어를 상실하고 그 다음에 음식습관을 상실하며 마지막으로 가치관을 상실 한다고 한다.       대도시로 들어온 조선족가정의 청소년들이 제일 먼저 상실하게 되는 것이 바로 민족 언어이다. 150년이 넘는 이민역사에서 조선어를 잘 공유해온 중국 조선족이 개혁개방을 맞이하여 대도시로 진출하면서 중국의 주류문화인 한족문화와의 접촉과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민족 언어와 전통적인 가치관과 생활양식 등 문화의 유지와 보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모어(母語)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소수민족들의 언어가 보존돼야 세계적 인류의 지적 자산이 보존될 수 있다고 한다. 개혁개방이래 조선족 민족교육은 점점 위축되어가고 있다. 아직도 “중국에서 좋은 대학을 가려면 조선어보다는 한어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식들을 어려서부터 한족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민족교육의 ‘불편한 현실’이다.           사실 대학진학뿐만 아니라 대학졸업 후 취직하는데도 조선어를 아는 학생이 모르는 학생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부모들이 ‘조선어무용론’이라는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대학졸업생들의 취직률이 70%를 밑도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중앙민족대학 조선어학부 졸업생들의 취직률은 계속 100%를 자랑하고 있다.      21세기는 다양한 민족문화의 가치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시대여야 한다. 비록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추세라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 민족의언어나 문화가 어느 한 언어나 문화에로의 접근이나 동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다양한 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는 그 문화의 자주성에 바탕을 둔 동참과 협력이 토대가 되어 모든 민족들의 미래를 위한 생존전략으로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언어와 문화의 획일화가 인류문명에 끼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인류문화가 갖는 언어, 문화적 다양성을 말살시킴으로써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대안을 제한시킨다는 점이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력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민족 언어와 문화를 지켜가면서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 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도전해야 한다.  
98    소셜미디어 시대의 문학지 댓글:  조회:2088  추천:0  2019-07-09
소셜미디어 시대의 문학지 황유복   우리는 지금 지식과 정보(信息)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같이 드라마나 광고의 현란한 언어와 ‘명언’들이 인터넷 사이트나 소셜미디어(社交媒体)를 통해 산사태처럼 쏟아져내리는 요즘이다. 종이책을 매체로 했던 문학의 립지가 좁아지면서 문학인들의 글쓰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일반인들의 글쓰기에 대한 욕망은 점점 강해지는 현상이 글로 소통하는 데 익숙해진 소셜미디어 시대의 진풍경이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경계는 점점 허물어지면서 문학인들은 문학지의 존페에 대한 걱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얼마 전 북경 삼지마을문학회는 송년모임을 가지고 뉴미디어 시대 삼지마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토론을 했다.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종이책에 대한 독서가 줄어든 대신 스마트폰을 통한 독자들은 예전보다 많아졌기 때문에 토론에 참가한 작가들은 오프라인 문학지의 미래를 걱정하게 되였고 최종적으로 삼지마을문학회 회원들에게 독자층을 넓혀주고 온라인상 독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위챗플래트홈(微信公众号)을 개설하기로 결정했다.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 덕분에 지식과 정보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분배되고 접근이 더 쉬워졌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의 진위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겐 페해가 더 크다는 것이 갈수록 확인되는 요즘이다. 우리는 날마다 지식과 정보의 산사태와 싸운다. 이메일, 스마트폰, 트위트, 페이스북 등에 매일같이 올라오는 원하지 않는 과다한 지식과 정보, 하지만 방대한 량의 지식과 정보를 처리하는 기술은 거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선택 앞에서 집중력이 산만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을 《메가렌드》를 쓴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우리는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면서 지식에는 목말라있다”고 했다. 독자를 겨냥한 채널과 정보량은 폭증했지만 ‘섭취하는 정보’는 과거보다 훨씬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피터 힌센은 《뉴노멀》에서 “문제는 정보의 과부하가 아니라 필터링(过滤)의 실패”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딥워크》의 저자 칼 뉴포트는 뇌를 산만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메일, 소셜미디어와 스마트폰을 지적한다. “항상 멀티태스킹을 하는 사람은 무의미한 것을 걸러내지 못한다. 사실상 정신적으로 망가진 상태에 가깝다.”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해야 지식과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지식을 제대로 처리하고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가?  오프라인의 종이책은 편집자들이 가공되지 않고 구별되지도 않으며 출처를 알 수 없는 가짜 정보를 걸러내 독자들로 하여금 21세기 지식기반사회의 주인공으로 살아남게 도와준다. 문학지의 경우 편집인들은 소셜미디어에 넘쳐나는 비문非文이나 비속어, 인터넷식 엉터리 문체들을 려과시켜 독자들이 정품(精品) 문학작품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시 말해 문학지 편집인들은 문학이 간직해야 할 것과 지워버려야 할 것을 구분 짓는 려과작용을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독자들과 소통하는 글을 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에서 삭제버튼만 누르면 사이버공간의 글들은 깔끔하게 지워진다. 그 속에 쓰레기와 보존하고 싶은 글들이 함께 휩쓸려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학지는 독자들에게 안전한 독서를 보장해준다. 나는 수백명의 회원을 가진 위챗플래트홈에서 경영자의 부탁을 받고 형태로 새로 읽은 책을 소개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칼 뉴포트의 《딥워크》를 읽은 후 “장담하건대 산만한 대중을 떠나 집중하는 소수의 대렬에 합류하는 일은 인생을 바꾸는 경험이 될 것이다. 물론 모두가 몰입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노력을 통해 습관을 뜯어고쳐야 한다. 많은 사람은 신속한 이메일 교류와 소셜미디어 활동에 따른 인위적인 분주함을 편안하게 느낀다. 그러나 몰입하는 삶을 살려면 이런 일들을 대부분 등져야 한다.”라는 저자의 말을 마지막 에 남기고 위챗플래트홈을 떠났다.  나는 좀더 몰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97    우리는 왜 청소년들에게 모어(母語)교육을 해야 하는가? 댓글:  조회:2946  추천:5  2018-11-06
[두만강칼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색(3)   오늘 중국조선족이 흩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의 민족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이 절실한 시대적 과업으로 되고 있다. 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 민족 지성인들의 앞에 놓인 어렵지만 풀어가야만 하는 공동한 과제일 것이다.   조선족은 누구이고 우리는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답하기전에 먼저 석춘화양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금년 10월 21일, 한국에서 개최된 제18회 한, 중, 일 텔레비죤방송제작자포럼에서 한국 KBS는 《삼대-연변처녀 동경 정착기》라는 다큐멘터리(纪录片)를 제출하였다. 다큐멘터리는 화룡출신의 석춘화양이 북경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 일본의 잘 나가는 회사의 해외영업담당으로 취직된 이야기를 기록했다. 한국인들의 조선족차별의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찍었다고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은 연변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외할머니와 서울에서 로무하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동경에서 활약하는 석춘화의 일상을 대조시키는 수법으로 중, 한, 일 3개국 언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조선족 젊은이들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 산재지역 조선족학생들의 이러한 우세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관내 대도시로 진출한 부모들을 따라온 학생들은 한족학교를 다니면서 점차 우리가 조선족일 수 있게 하는 우선 조건인 민족언어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민족특성을 상실하는 순서는 제일 먼저 민족의 언어를 상실하고 그 다음에 음식습관을 상실하며 마지막으로 가치관을 상실한다고 한다. 대도시로 들어온 조선족 가정의 청소년들이 제일 먼저 상실하게 되는 것이 바로 민족언어이다. 인간은 자신의 모어(母語)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소수민족들의 언어가 보존돼야 세계적 인류의 지적 자산이 보존될 수 있다고 한다.   민족을 형성하는 5대 요소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이다. 언어는 문화현상중에서 민족의식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하여 감정을 공유하고 류사한 사유체계를 형성하게 한다. 민족언어는 민족문화를 민족구성원들에게 공유하게 하고 또 그것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해주는 가장 중요한 담체이다. 문화와 언어의 관계에서 문화가 언어의 구조와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언어구조가 문화의 다른 측면과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크다. 따라서 우리는 한 민족의 언어행위를 통해서 그 민족의 사회관계와 사회구조 및 사고의 구도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는 떼여서 생각할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그만큼 언어의 중요성은 크다.   도시 조선족학생들의 모어상실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필자는 1989년 3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와서 미국에서 받은 강사료로 북경시 교육부문의 정식인가를 받고 법인자격을 가진 ‘북경조선어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각지의 요청에 따라 북쪽의 할빈에서 최남단의 해남도 해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15개 도시에 분교를 설립해 조선족청소년들에게 모어교육을 실시하였다. ‘북경조선어학교’는 무료로 도시청소년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주말학교였다. 1995년 학교는 국가 교육부의 새로운 규정에 따라 학교명칭을 ‘북경한국어배훈(培训)학교’로 바꾸었고(북경에 민족언어교육을 목표로 하는 학교는 우리 밖에 없기 때문에 외국어학교로 분류시킴), 북경에서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교실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2013년에 문을 닫게 되였다. 그동안 학교와 분교는 만 5천 여명이 넘는 학생들을 교육했고 그중 600여명의 우수한 학생들을 미국과 한국에 보내 류학하게 하였다.   지금은 필자가 ‘북경조선어학교’를 설립할 때와 달리 조선족기업인들이 성장했기 때문에 조선족들이 진출해있는 도시마다 조선족기업인들의 도움으로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주말학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산하의 조선민족발전위원회는 성립 당시부터 조선족 청소년들의 모어교육을 위해 해마다 ‘상해화동조선족주말학교’에 재정지원을 해오고 있다.   21세기는 다양한 민족문화의 가치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시대여야 한다. 비록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력사의 추세라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 민족의 언어나 문화가 어느 한 언어나 문화에로의 동화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모어는 민족문화의 요람으로서 일단 상실하기만 하면 그 회복은 불가능하다. 다양한 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는 그 문화의 자주성에 바탕을 둔 동참과 협력이 토대가 되여 모든 민족들의 미래를 위한 생존전략으로서의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언어와 문화의 획일화가 인류문명에 끼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인류문화가 갖는 언어, 문화적 다양성을 말살시킴으로써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대안을 제한시킨다는 점이다. 길림신문/ 황유복(중앙민족대학 교수)
96    우리는 왜 문학인들을 도와야 하는가? 댓글:  조회:3561  추천:0  2018-10-25
[두만강칼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색(2) 우리가 희망하는 미래는 경제발전, 환경보전, 사회통합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 발전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그것들이 만들어졌을 때의 사고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 대로 그동안 경제발전에 짐이 된다고 간주되였던 환경문제와 사회문제가 뼈아픈 실천적 경험을 거쳐 이제는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려운 과제로 부상되고 있다. 지속가능 발전을 추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 즉 창의성이다. 인간의 창의성은 많은 철학가들이 말했듯이 문화예술에 대한 체험에서 나온다. 따라서 지속가능 발전이라는 미래를 실현하는 첫 단추는 이처럼 문화와 발전의 련결로 채워진다. 그래서 우리 나라는 유네스코(联合国科教文组织)의 지원으로 2013년 항주에서 ‘문화와 발전 세계전문가 회의’를 개최했다. 미국 코넬대학 존슨경영대학원에서는 앞으로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될 덕목중 하나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꼽았다. 공감능력을 갖춘 리더가 각광받고 성공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다. 이렇듯 공감과 소통 능력은 이제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으로 되고 있다. 창의성이나 사회적 공감능력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학습할 수 있다. 카나다 인지심리학자 키스 오틀리는 문학작품이란 인간 마음의 소프트웨어에서 작동하는 시뮬레이션(simulation)―모의실험이라는 독특한 리론을 제시했다. 즉 문학작품에서 이야기는 사회생활을 위한 ‘비행 시뮬레이션 장치’이고 비행기 조종사들이 비행 모의실험을 통해 비행기술을 습득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창의능력과 사회적 공감능력을 학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문학작품을 더 많이 읽는 대학생일수록 사회적 능력이 더 뛰여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오늘의 조선족은 중국의 넓은 지역과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고 있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로 계속 살아남으려면 조선족문화의 공유가 우선조건으로 된다. 우리 세대는 문제없지만 청소년들에 의한 민족 언어의 상실은 문화공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조선족사회의 이러한 ‘불편한 진실’에서 우리는 조선족작가들의 작품활동이 민족문학발전 뿐만 아닌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과 나아가서 민족의 지속가능 발전에 핵심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 대신 조선족문학은 문학의 보편적인 가치 뿐만 아닌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과 나아가서 민족의 지속가능발전에 키워드로 작용해야 한다. 즉 우리 문학에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흥미와 감동이 있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사회를 향해 전달하고 알려주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어떤 경향과 표현의 방법을 선택했던 문학작품은 궁극적으로 우리 삶의 희망과 꿈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문학의 보편적 가치와 함께 민족문화를 수호하는 구심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 오늘날 돈을 향한 온갖 욕망이 란무하는 시대에 조선족문학인들은 여전히 전혀 돈이 되지 않는 문학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사실 소수민족문학으로서의 조선족문학은 처음부터 가난과 이미 동의어였다. 하물며 문학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여있는 지금, 그들이 문학을 계속 고집하는 리유는 무엇일가? 민족문화의 진흥이라는 간절한 꿈, 그러한 꿈을 차마 접어버릴 수 없어 그들은 오늘도 아무런 경제적 수입도 되지 않는 문학작품을 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문화예술인들은 오늘의 ‘가장 사랑스런’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계속 조선족일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민족문화를 수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 경제인들은 그들의 작품활동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한 도움은 어느 문화예술인 개인에 대한 도움이라기보다 우리 민족문화발전을 돕는 일이라고 평가된다.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산하의 조선민족발전위원회는 성립 당시 해마다 연변작가협회가 추천하는 작가들의 작품집 두권씩 출판해주기로 했다. 지난해까지 조선민족발전위원회 문학총서가 10권이 출판되였다. 21세기 지식경제시대의 인류사회가 갖고 있는 핵심적 성격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에너지, 철강, 자본 등 물질적 자원으로부터 지식, 교육, 연구개발 등 문화적 자원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이제 문화는 세계 각국, 각 민족의 ‘상대적인 경쟁력’을 결정한다. 다시 말한다면 문화가 강한 자가 이기게 된다. 어떻게 보면 과거의 인류력사는 인간이 지닌 창의성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문명의 변화에 의해 사회구조와 생활양식이 바뀌였고 정신문화의 풍요로 인류는 보람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저변에는 인류의 부단한 창의적 노력이 깔려있다.                                                                                 길림신문/ 황유복(중앙민족대학 교수)
95    우리는 왜 사막에 가서 나무를 심는가? 댓글:  조회:3143  추천:1  2018-10-10
[두만강칼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색(1) 금년 추석련휴를 리용해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산하의 국가 2급 사회단체인 조선민족발전위원회 위원들은 녕하회족자치구 령무(灵武)시의 백급탄(白笈滩) 모우쑤(毛乌苏)사막에 가서 나무를 심었다. 올해는 조선민족발전위원회 성립 5주년이고 사막식수도 5회째이다. 백급탄국가급자연보호구관리국은 우리를 위해 ‘민족단결하니 한집안처럼 친근하고 손에 손 잡고 함께 록색꿈을 구축하자― 우호림 건설 5주년 기념’이라는 주제의 좌담회를 개최했고 ‘모우쑤사막화 방지와 환경보호사업에 기여한 노력과 공헌을 기리여’ 조선민족발전위원회에 감사패를 수여하였다. 우리는 왜 조선족 거주지역도 아닌 사막에 가서 나무를 심는가? 항일전쟁시기 우리의 선대들은 동북항일련군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의용군을 조직하여 중국 오지의 태항산일대에서도 팔로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해방전쟁시기에는 5만여명의 조선족 열혈청년들이 중국인민해방군에 가입하여 동북해방전쟁은 물론 화북, 화중을 거쳐 화남의 최남단인 해남도해방전쟁에까지 참가하였다. 우리 선대들이 중국의 각 민족과 함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 적극 참가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떳떳하게 중국 민족대가정 속의 일원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현재 조선족들이 흩어져사는 중국의 대도시들에는 여러가지 명칭으로 된 조선족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 단체들은 여러가지 조선족문화 관련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운동회, 설맞이모임, 노래자랑모임, 장학회모임, 동호인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내용도 다양하다. 이러한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문화활동들은 조선족들이 흩어져있지만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사는 지역사회의 친목활동이라는 의의를 훨씬 뛰여넘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 민족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자기들 끼리만 놀고 있다”는 혹평이 따를 수 있다. 심지어 일부 높은 위치에 있는 지성인들이 인민넷에 기고한 글에서 “조선족은 서장이나 신강의 분리주의자들보다 더 중국과 한마음이 아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우리는 나 홀로 발전할 수 없다. 민족의 발전은 국가의 발전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때문에 어느 한 민족의 발전은 주변 민족사회와의 조화와 협력, 다시 말해 민족단결을 통한 국가의 발전이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다민족국가인 중국에서 계속 뿌리를 내리고 발전하려면 선대들이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시기에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는 다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해 계속 관심하고 공헌할 수 있는 책임성 있는 민족임을 실제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조선민족발전위원회는 성립 당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갖고 심각하게 토론했다. 우리는 국가의 대사 가운데서 각 민족들의 공동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관심하는 환경보호사업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사막화를 방지하고 자연환경을 개선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우쑤사막을 찾아갔다. 백급탄 국가급자연보호구관리국은 우리를 위해 800여무의 사막을 지정해주었고 나무를 심은 그 해에 산더미같이 큰 기념비석을 세워주었다. 그 기념비석에는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조선민족발전위원회와 길림신문사(吉林朝鲜文报社) 이름들이 나란히 새겨져있다. 이듬해, 국가는 이 기념비석을 중심으로 6만 6000무의 사막을 국가급 사막공원으로 지정했고 2017년에는 중국 유일의 사막방지전시관을 우리의 식수지역 옆에 세웠다. 그 전시관에는 조선민족발전위원회 식수전문 전시판이 개설되여있다. 해마다 만여명을 헤아리는 전국 각 성시의 대표단과 견학단, 그리고 유엔에서 조직한 세계 각국의 대표단들이 백급탄국가사막공원에 세워진 기념비석과 사막방지전시관을 참관하고 있다. 그들을 통해 환경보호를 위해 애쓴 조선족의 노력이 전국과 전세계로 알려지고 있다. 백급탄 국가급자연보호구관리국 위몽 부국장은 “녕하의 인민들은 이런 특수한 방식으로 녕하의 사막방지를 지지하고 후원하고 동참해준 조선족 유지인사들의 노력을 기억하고 있다.”라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상상력을 가장 잘 사용한 결과는 창의력’이기 때문이다. 돈이 유일한 가치기준처럼 되여가는 시대에 우리는 조선족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인간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번 식수활동에 참가한 조선민족발전위원회 위원들은 우리 세대 뿐만 아니라 자식들을 동원해서라도 사막식수를 계속하기로 약속하였다.  길림신문/ 황유복(중앙민족대학 교수)
94    설날의 의미 댓글:  조회:6047  추천:1  2013-01-05
여태껏 살아오면서 스스로 깨달은 한가지 문명한 진리가 있다면, 그건 아무리 《지구 종말》이 왔다고 난리를 쳐도 한해가 가면 또 다른 한해가 온다는 사실이다. 2012년《룡의 해》는 이제 영원속으로 잠적해버리고 바야흐로 계사(癸巳)년《뱀의 해》가 시작되고있다. 2013년은 천간(天干) 이《계(癸)》이고 지지(地支)가《사(巳)》인 해, 륙십갑자의 서른번째 해이다. 천간을 오행과 맞추면《계(癸)》는《수(水)》에 해당되기때문에 계사년은《물뱀의 해》인 셈이다. 설은 음력 1월 1일로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는 새해의 첫날이다. 이런 상징성때문에 전통시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최대의 명절로 지켜지고있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세시명절이다. 설날은 새해를 시작하면서 조상님께 차례를 먼저 올려 가족의 번영을 기원하고 집안이나 마을의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면서《어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미풍량속을 지향했으며 자신도 새로운 출발을 위한 희망을 다지고자 하는 경건의 의미가 크다. 다른 세시풍속은 점점 희미하게 잊혀져가고있지만 설날의 풍속은 지금까지도 많은 부분이 그대로 이어지고있다. 물론 오늘날의 설날의 의미는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다는 것과 바쁘고 피곤한 일상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어본다는 의미가 더 커져가고있다.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 하비콕스는《일상적인것을 단절시키고 사람의 마음을 과거로 개방시키는 제축과 경험적 타산이 무시하고 통과해버린 방문을 낱낱이 열어봄으로써 혁신의 가능성을 확대시키는 환상》으로 명절문화의 의미를 새겼다. 명절문화는 인간만이 누리고있는 특수한 행위라고 할수 있다. 전통명절문화는 전통문화의 확립으로 그 사회를 안정시키면서 정신적으로 그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따라서 설문화의 원형은 민족의 연원과 관계되는 아득한 태고로의 귀의이라 할수 있다. 이러한 귀의를 통해 민족전통문화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봄으로써 새로운 혁신과 창조의 에너지를 확보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설날의 문화적 의미를 되새기며《지구 종말론》의 공포를 확산시킨《마야달력》의《불안 심리의 주술》에서 깨여나 새로운 한해의 희망을 만들어가야 한다. 더 이상 덮어감출것도 없고 그렇다고 더 이상 드러낼것도 없는 대자연처럼 우리는 본래부터 자기몫으로 차려진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있다. 설사 그러한 삶이 아무리 맵시 없고 고단하다 하더라도 삶이란 언제나 자기 자신이 희망을 만들어가야 함으로 혼자서 씨 뿌리고 혼자서 수확해야 한다. 남들이 신기루처럼 거창한 행복에 허기져 분노하고 증오하더라도 세상이 생각만큼 아름답지만은 않더라도 전혀 좌절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으며 체념하지 않고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름름함과 고결함을 지키면서 호들갑 떨지 않고 묵묵한 가운데 나 자신을 추슬러 희망을 만들어낼수 있어야 한다. 세월은 무정하게 우리 모두의 얼굴에 주름살을 만들어가고있지만 희망을 잉태하지 못하는 삶은 우리의 가슴속에 주름살을 만들수 있다. 올해에도 시련과 수난이 닥칠수도 있겠지만 아침 해살이 들판의 안개를 걷어내듯이 이번 설날에는 람루한 회한과 미망을 털어내고 새해의 희망을 찾아나서자.
93    중국 조선족의 문화공동체 댓글:  조회:9080  추천:6  2012-10-07
中國 朝鮮族의 文化共同體 황유복/ 중국 중앙민족대학교수    문화는 집단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된 것이다. 그런데 그 "집단구성원"을 중국의 조선족으로 설정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조선족문화의 존재여부를 살펴보아야 한다. 보통 조선족문화라 할 때 그것은 조선족공동체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된 문화를 가리킨다. 때문에 조선족문화의 정체성(identity)을 담론하려면 우선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의 르네상스시대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사회발전과 인류 진보를 위한 새로운 문화중심의 패러다임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조선족 사회나 문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에 아직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조선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   1.“조선족”은 누구인가   “조선족”이란 호칭을 “조선민족”의 약칭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으나 정확히 말한다면 “조선족”이란 중국국적 을 가진 조선민족에 대한 전문호칭, 즉 국적과 민족출신을 동시에 표시한 호칭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으로서 네이션(nation)은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경계와 역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하는 근대적 영토 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등장한 개념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은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국민+민족”이다.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민족”이다. 미국에서는 미국국적을 취득한 한국인들을 “한국계미국인”이라고 한다. 한국계미국인이라는 호칭을 코메리칸(komeric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 미국에서는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이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호칭하는가? 건국 역사가 200여년밖에 안 되는 미국은 총인구의 1%를 차지하는 인디언원주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세계 각국에서 온 외래 이민이거나 이민의 후예들이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민족이란 계념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이민 왔나 로서 국민들을 분류한다. 1929년에는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국가별로 이민 수자를 할당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아일랜드계미국인, 프랑스계미국인, 중국계미국인 등으로 호칭한다. 한국인들의 미국이민은 1965년 새 이민법이 시행되면서 대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미국국적을 취득한 후 미국의 관례대로 한국계미국인으로 호칭된다. 그러나 중국은 수 천 년 역사를 가진 나라이고 고대로부터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민족학자들의 노력으로 민족 식별작업을 거쳐 56개 민족(nation)으로 국민을 분류하게 되었다. 150여년의 이민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도 1945년 이 후 중국에서 토지와 참정권을 부여받으면서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으로 인정되고 한족, 만족 등 민족과 동등한 위치에서 조선족으로 호칭되게 된다. 사실, “한국계미국인”은 한국에서 이민 온 미국인이라는 뜻에서 “미국인”이라는 국적이 강조되었다면 “조선족”이라는 호칭에서는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라는 뜻에서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한국계미국인”이라는 호칭에 반발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조선족”이라는 호칭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리 민족공동체(ethnic group)는 영토의 분단, 민족의 분단과 함께 민족 명칭의 분단이라는 아픔도 함께 겪게 된다. 조선반도의 북과 남에서 각각 “조선” 과 “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면서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서로 다른 이름으로 호칭되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이념대립이 살벌해지면서 민족 명칭의 갈등도 심각해졌다. 오늘까지도 인터넷사이트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놓고 한국네티즌들과 조선족네티즌사이에 쟁론을 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냉전시대의 유물이 쉽게 해소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조선에서 이민해 온 민족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현재의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의 17세기 고대 이민의 후대 (河北省 靑龍縣과 요녕성에 산재해 있는 박씨 후대들)들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150여년이 된다. 그러나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 공동체의 형성은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 개최로부터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까지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조선민족을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최초의 문헌은 1928년 7월 9일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문》이다. 그 후에 작성된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문헌자료에서 시종일관하게 중국 조선 민족을 중국소수민족으로 인정하였다. 다만 민족 명칭을 “고려인”, “한국인”, “조선인” 등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특이하다. 그런데 그 시기 조선민족 이민들이 집중 거주하던 동북지역은 中華民國政府에 귀속되는 東北軍閥政權의 유효 행정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 행정부가 조선민족 이민을 중국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사실상 외국거류민 으로 취급되었다. 1945년 항일전쟁승리 후의 몇 년 사이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조선민족 이민들이 자의에 의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하는 사람들과 남아있을 사람들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동북국은 그 당시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韓國居留民’, ‘조선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현장에 남아 영주할 결심을 한 조선민족구성원 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여 받았고 지방정권수립에 참여하여 참정권을 갖게 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점차 탈바꿈 하게 되였다. 1950년 12월 6일자 《人民日報》는 이라는 논설에서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가 개막되면서 동북경내의 조선인민은 중국경내 소수민족의 자격으로 각 형제 민족들과 만나게 되였다. 그때부터 중화인민 공화국 각 민족 인민가운데 이 새로운 구성부분은 각 형제민족 인민들의 관념 가운데서 교민으로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민들로부터 갈라져 나오게 되였다.”라고 지적하였다.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人民日報》는 조선민족이 조선교민으로부터 중국 소수민족으로 탈바꿈한 시간을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 회의 개최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조선인민”, “조선민족”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어 “조선족”이란 이름은 1951 년에서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는 그 사이에 확정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1987년 9월에 미국의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에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라는 연구를 담당한 적이 있다. 1년 남짓한 기간의 조사와 연구를 거쳐 1988년 10월말에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한 후 옌칭연구소에 제출할 수 있었다. 그 연구보고서 에서 나는 중국 조선족의 민족정체성(Ethnic Identity)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중국 조선민족의 민족의식은 아주 뚜렷하다. 그들의 민족 정체성은 1945년 광복을 전후하여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광복이전의 ‘조선민족정체성’은 범조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일투쟁, 조국광복, 민족교육, 민족문화 4가지 내용을 포함한다. 광복이후 조선반도의 정세는 ‘조선민족정체성’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여러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있다. 우선 그들은 광복이전 자신들이 중국에 이민하면서 겪어온 민족차별과 일제의 강제동화정책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현재 그들은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 역사는 가장 짧지만 다른 민족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긍정적으로 인식한다. 물론 그들은 일제의 통치를 반대해 싸웠고 현지개발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이 땅의 주인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근면과 교육열로 이룩한 경제생활의 상대적 윤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농촌 농민들은 벼농사에 종사하기 때문에 타민족 농민들에 비해 단위당수확고가 높고 수익도 높으며 도시거주자 중에는 전문직업인(대학교수, 연구기관 연구원, 의사, 문화예술인, 기타 전문분야의 기술인 등)과 국가 기관간부로 진출한 사람들의 비례가 크다. 그들은 동포들의 적극적인 중국정치참여에 대해서도 만족 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중앙정부 부부장(차관)급 관직에 진출했던 사람(현 재직자 포함)이 10여명, 전국인민대표대회대표 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진출했던 사람(현직 포함)은 수 십 명이 된다. 1988년 10월에 중국인민해방군의 정상급 계급에 승진된 17명의 상장 중에도 한명의 조선족 출신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민족의 동질성과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자각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조선민족출신이란 사실에 대해 전혀 열등감 을 느끼지 않으며 도리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들이할 때에도 한복을 입음으로써 자신이 조선민족 출신임을 나타내려고 하는 경향이다 ⋯ 중요한 것은 그들 1세와 2세들 간의 심리적 일체감이다. 그들 은 미국 조선민족이 겪고 있는 심각한 세대 간의 갈등을 경험하지 않고 있다. 1세들은 현지사회에 정착하기 위하여 자아 희생적으로 열심히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 대한 민족교육(민족 자부심, 민족 언어, 민족문화 등)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2세들은 1세들에게서 전수받은 민족교육의 바탕 위에 시대적 의식과 새로운 지식을 가미하면서 현지사회의 지출에 나섰다. 1957년의 ‘반 우파 투쟁’과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기간에 민족주의자로 비판받았던 사람 중 다수가 2세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강한 민족의식에 대한 반증으로 될 수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 현재의 조선족사회의 민족정체성을 분석한 것이다. 90년대를 경유하면서 조선족사회는 엄청난 구조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고 적지 않은 민족공동체 구성원들의 가치관의 혼돈으로 민족정체성도 차질을 빚고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본다면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질적인 변화 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지난 90년대에 동, 서방 대립의 냉전구조가 종식되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장막은 걷히고 경제활동의 글로벌화가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중국 조선족 역시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변화와 새로운 움직임들을 재빨리 파악 하고 그와 같이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21세기에 살아남는 생존 전략으로서 우리는 조선족이면서 중국적인 안목과 세계적인 안목을 함께 갖춘 새로운 조선족 공동체의 민족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2. 100% 조선족   같은 한자 어휘가 중국어와 한국어에서 완전히 다른 뜻을 나타낼 때가 가끔 있다. “조국(祖國)”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어에서는 “자기의 나라(《現代漢語辭典》)”, 즉 자기에게 시민권을 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한국에서는 “(1)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2)민족의 일부 또는 국토의 일부가 떨어져 딴 나라에 합쳤을 때 그 본디의 나라(《국어사전》)”라고 정의 했다. 쉽게 말해 중국은 내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이라 하고 한국은 조상이 살던 나라를 조국이라 한다. 중국의 정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한국의 사전적 해석에 준하면 조선족의 조국은 한국이나 조선이어야 한다. 두 나라의 “조국”이라는 명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감정상의 껄끄러움을 불러오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한민족동포(ethnic)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과거 어려운 시절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민해 왔고 중국의 혁명과 개발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국민의 자격을 취득한 일개의 소수민족(nation)이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분명히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갈래이지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10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국가의 령도 층 에도, 군의 장성에도, 학계의 최고 위치에도)진입한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중한수교이후 한국 사람들과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중축구경기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당신이 중국이나 한국 축구가운데 어느 팀의 스포츠풍격을 좋아하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고 “한국과 중국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의문이 깔려있다. 사실상 조선족은 60여 년 전에 이미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나는 하버드대학연구보고서(1988)에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라고 지적했다. 조국과 고국의 시각 사이에 끼어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적지 않은 조선족학자들이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 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학술적으로 토론의 대상으로 조차 상정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술관점의 문제가 아닌 개념정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중성이란 말의 개념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어나 중국어에서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에 겹쳐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국어사전》),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 즉 하나의 사물에 구비된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성질”(《現代漢語辭典》)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갑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느 중학교의 교사이고 그에게는 을남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을남이의 아버지이고 동시에 중학교사이기 때문에 갑돌이에게 이중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갑돌이가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두었다면 이중혼인이 불법으로 인정되는 중국에서 갑돌이는 합법과 불법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의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의 이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개 나라의 국적을 소유했다면 그는 이중국적자이다. 만약 조선족의 절대다수가 중국과 한국(조선)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했다면 조선족은 이중국적민족으로 이중성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중국적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조선족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조선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라면 민족의 혈연적(ethnic)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현제의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국적과 민족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하나로 묶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조선족은 세계 한(조선)민족공동체(ethnic group)에 속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기 때문에 이중성민족이 아니냐?”라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세계 한(조선)민족공동체가 존재하느냐라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만약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세계 한(조선)민족공동체” 와 “중국 조선족”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민족공동체(ethnic group)” 속의 전체와 일부분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허구의 “이중성 민족론”은 중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를 키워가고 있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은) 도리어 선족(鮮族), 즉 조선족이다. 그들은 김씨부자에게 충성하거나 혹은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이렇게 믿지 못할 민족이라는 비난이 중국의 지성인들 사이에 만연되고 있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열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 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해야할 조선족 젊은이들이다. 총명, 근면, 지식 등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불신 때문에 그들의 길이 막혀진다면 그것은 우리세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주류민족이나 기타 형제민족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면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대들이 귀중한 생명까지 바쳐 우리세대가 중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는 우리 후대들의 주류사회진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법 학자로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한국계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국무부 차관보를 지냈던 예일대학 법과대학원 학장 헤럴드 고는 “한국계미국인으로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라는 한국 《중앙일보》기자의 질문에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시점에 나는 100%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 한국인이고 몇 % 미국인인가 고민하다가 ‘100% 한국계미국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더니 쉬워지더군요.”라고 대답했다. 1987~88년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계미국인사회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기위해 사회조사를 할 때 대부분 코메리칸지식인들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미국국적을 딴 후 한국 사람들로부터 “축구경기응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자기 자신들과 후대들의 미국주류사회 진입을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은 코메리칸 아이덴티티를 “한국적인 것이 얼마나 미국적인 것과 다른가에 대한 시시비비”에서 발상된, “한국적인 것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섭섭하지 않은 상태의” 탈 한국적인 것으로 설명했다. 그들은 한국문화와 차별되는 미국 코메리칸문화의 창출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했다. 미국의 코메리칸사회의 미국이민역사는 1903년 7천226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이민한 사건을 제외하면 불과 4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300년 이전에 이민해온 “박가촌”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중국조선족사회의 이민역사는 150년이나 된다. 오랜 역사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조선족문화도 창출해냈다.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해야할 이유가 없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한국)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한)민족공동체(ethnic group)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럴드 고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우리자신과 후대들이 중국 주류사회진입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중국에서 계속 타민족의 칭찬을 받는 민족으로 거듭날 때 조선족은 축구경기 때 한국 팀을 응원하는 정도가 아닌, 조국과 고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를 포함한 전 방위적인 교류를 위해 더 많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3.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족사회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중국 조선족사회는 미증유의 충격을 받으면서 80년대에 이루어진 농민들의 도시진출을 경험하게 된다. 중국 조선족 농민들은 전통적으로 기술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수전 농사에 종사해왔기 때문에 수원이 충족한 양질의 땅을 적당한 규모로 경작해왔다.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그들은 상품경제 시대에서는 제한된 땅에서 얻는 수확으로 도저히 더 잘살 수 있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게 되었다. 도시진출 농민들이 초기에 제일 많이 선택한 생업이 김치장사인데 적은 자본금으로 시작할 수 있어 좋은 점도 있지만 그 대신 그들을 상대적으로 집중시키지 못하고 보다 넓은 지역으로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김치장사로 번 돈은 대부 분 식당업으로 재투자되지만 그 외에 단순 서비스업이나 제조업에 투자되는 경우도 있었다.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족 사회는 새로운 기회를 접하게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던 마을들을 떠나 부(富)를 찾아 나섰고 한국 경제인들의 중국진출 붐에 따라 조선족들은 북경, 천진, 심양, 대련, 청도, 상해, 광주 등 연해개발지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들은 주로 한국관련 회사나 공장의 노동자, 회사직원으로 취직되거나 한국인을 상대하는 유흥업소, 여행사 등 서비스업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90년대의 또 다른 추세는 한국 노무의 붐이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코리안 드림"의 유혹에 끌러 한국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법체류 외국인 노무자가 사회문제로 비화되자 조선족들의 한국입국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고 그들 노무 희망자들은 미화 6천 달러에서 1만 달러 정도의 수수료를 노무 중개업자들에게 지불하면서 "기회의 나라"에 입국하기 위해 온 가족의 생계와 심지어 그들의 사활을 내 건 "도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가 빈발하면서 90년대 후반기에 한국과 조선족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노무사기 사건들이 속출했다. "코리안 드림"으로 시작된 조선족 사회의 한국노무 봄이 여성들의 한국으로 시집가기 붐으로 이어지면서 2000년 말 현재, 약 6만 명의 조선족 여자들이 한국으로 시집갔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 낳아 조선족 공동체를 유지해 가야 하는 조선족 여성 3명 중 1명이 한국으로 가 버렸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중국조선족 출산인구는 급 하강선을 타게 되어 1999년 말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신생아 출산 수는 1989년의 1/4밖에 안 되는 3,800명이였다. 조선족 사회가 전통적인 농업경제를 탈피하고 도시경제에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우선 일인당 평균 경제수입의 증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 조선족 전체의 경제수입 실태를 추출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러나 개별지역 통계에서 우리는 그 전반을 감지할 수 있다. 례를 들면 2006년, 연변자치주에서 외국에 노무나간 사람들이 연변에 부쳐온 돈은 10억 달러에 육박했고 휴대해 들여온 돈까지 합치면 20억으로 추산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수입의 증가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족사회는 많은 귀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조선족의 문화영토"로 인정되던 조선족 마을의 空洞化와 해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선민족학교의 폐쇄, 민족 정체성의 혼돈,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잃어가고 있다. 급변하는 중국조선족 사회는 지금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사회는 발전과 해체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개혁개방이래 중국 조선족은 전통적인 거주지역인 동북 3성을 떠나 중국의 연해지역 대도시로 대거 진출하게 된다. 현재 중국 조선족의 거주판도는 동북 3성 대도시에 40여만 명, 현, 시 이하 농촌에 45여만 명 그리고 중국 동남연해지역에 60만 여명으로 이루어져있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중국 도시경쟁력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경제중심지역은 1) 심천, 홍콩, 마카오를 포함한 화남지역, 2) 상해 등도시를 아우르는 양자강하류지역, 3) 북경, 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지역, 4) 심양, 대련, 장춘, 길림, 하얼빈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역, 5) 청도, 제남을 중심으로 하는 황하중하류지역이다. 조선족들은 이러한 중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해 가는 지역이자 또한 5만개 이상의 한국회사와 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에 진출해있다. 그리고 조선족의 해외진출도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법무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5년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인구수가 23만 여명이었는데 2007년 초부터 방문취업제를 실시함에 따라 지금은 한국진출 조선족인구가 30만을 헤아린다. 그 외에도 일본에 8만 여명, 러시아에 5만 여명이 진출해 있으며 미국과 유럽, 동남아시아, 중동, 호주, 남미 등 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까지 합치면 50만 명을 넘어섰다. 때문에 현제의 중국 조선족출산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해외진출의 증가로 7~8년 후에는 중국거주 조선족 인구가 100만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그 대신 중국정부가 2005년 말부터 중국체류 외국인들에게 영주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현제 80여만 명의 한국인들이 중국에 장기 체류하고 있으며 조선족인구가 100만으로 줄어들 때 중국체류 한국인은 100만으로 증가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그 때가 되면 재중 조선족과 재중 한국인 사회는 새로운 형태의 재중 코리안 사회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2006년부터 시작된 중국 제11차 5개년 계획의 청사진에 따르면 도시화는 “전면적 소강사회의 실현”과 현대화 발전을 실현하는 중대한 전략으로 채택되어 지금은 중국대륙의 현대화 발전의 거대한 흐름으로 되어 있다. 다행히 우리 민족은 다른 어느 소수민족보다 재빨리 도시화 과정에 참여했고 중국의 평균 수준보다 높은 도시화 수준을 이룩하였다. 조선족은 개혁개방이후 도시진출 민족 중 가장 돈을 많이 번 민족으로 집계된다. 중국에 30개 소수민족 자치주가 있는데 이 가운데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봉급수준이 가장 낮지만 개인 저축은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족의 도시화 과정에는 해결되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중국에서 조선족이 가장 먼저 도시화를 실현한 민족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밝은 현실은 아니다. 급격히 변모하는 조선족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역할과 과제 역시 부단히 변하고 있으며 또 외적, 내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모색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바라고 있다. 돈은 좀 벌었지만 조선족 사회는 무너져 버린다는 미래상은 그 어느 하나도 바람직한 것 이 아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 우선 사회와 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핵심적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 나가야 한다. 중국 조선족기업의 기본 특징은 아직도 대부분 기업들이 요식업, 유흥업, 여행사 등 단순서비스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는 연간 4000만 달러의 이익을 창출하는 슈퍼 요식체인업체 (예를 들면 북경한라산 요식체인기업)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윤마진이 빈약한 상태이다. 이들 기업들은 제한된 지역에서 유사한 비즈니스 모델로 시장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동족 기업 간의 소모적 경쟁이 빈발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기업의 또 다른 특징은 중국진출 한국기업과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본, 기술, 상품, 경영노하우, 비즈니스 모델 등, 많은 조선족 기업들이 자체의 생존공간을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시각을 바꾸어 보면 스스로 자체의 발전공간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조선족은 다른 민족 못지않게 일찍 시장경제체제에 뛰어들었고 또한 이중, 삼중 언어의 우세도 있지만 중국 500대기업 서열에 든 조선족 기업도 없고 상장기업도 없다. 기타 소수민족은 있는데 조선족은 없다. 그들은 언어의 우세도 없고 해외관계도 없는 상황에서 ⟪중국 돈⟫버는데 전념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아온 세계적인 경제 불황속에서 이제 조선족 기업인들은 자기들의 생존공간을 한국관련 기업으로 제한시킨 현실을 극복하고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최근 미국의 권위경제지⟪포브스(FOBES)⟫가 선정한 재부서열에서 중국의 억대부자들 수가 미국다음으로 세계 제2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돈이 가장 많은 10대부자들 중에 6명이 부동산업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땅장사를 하는⟪대지주(大地主)⟫들이었다. 중국 부자서열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杨惠妍은 26세의 여성이지만 중국정부 다음가는 땅의 소유자이다. 2007년 10월 1일 신화통신사가 보도한데 따르면 그녀가 소유한 땅은 4500만 평방미트에 달하는데 20여년 개발할 수 있는 땅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녀의 재산은 1 215억 원이다. 미국의 갑부 빌 게이츠나, 일본의 갑부 손정희는 IT산업, 즉 첨단기술을 필요로 하는 하이테크산업으로 돈을 벌었다. 그러나 중국의 갑부는 기술함량이 낮은 땅장사로 재부를 축적했다. 이것도 ⟪중국특색⟫이라면 특색이다. 중국 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조선족기업인들은 우선 형제민족기업인들과 같이 ⟪중국특색⟫에 따라 ⟪중국 돈⟫을 벌어야한다. 현제 중국에서 비교적 성공한 조선족기업가들 중 대부분은 조선족사회에서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기타민족들 속에서 기업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다음 글로벌경쟁시대에 있어서 자신들만의 우세와, 다른 민족 집단이 대체할 수 없는 특수한 역사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자각해야 한다. 조선족 기업들은 한국계기업들과 차별화된 ⟪중국특색⟫의 기업발전공간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국계기업들과 생존을 함께하는 전략적 제휴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한다.   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21세기에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그동안 조선족은 경제적 수입의 증가를 위해 집중거주 지역에서 중국의 대도시들과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다. 192만 조선족인구 중 70%이상을 차지하는 150여만 명이 화남지역, 양자강하류지역, 화북지역, 동북지역, 황하중하류지역 대도시들과 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국으로 흩어져나갔다. 이제 조선족은 명실 공히 글로벌민족으로 되었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민족사회로 생존하려고 한다면 부동한 자연환경과 문화 환경에 노출되어있는 민족구성원들이 계속 조선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해가야 한다. 분산된 조선족사회를 유지하는 대안으로 일부학자들이 ⟪离散 유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Diaspora)⟫민족론을 제시하고 있다. 혈통과 언어가 바뀌어도 디아스포라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데는 끈질기게 작용해온 유대교가 디아스포라들의 민족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의 기반으로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강한 결집력을 가진 민족종교가 없는 조선족사회에 디아스포라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그 어떤 이론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출생된 조선족 아기수는 도합 136,585명인데 10년 전(1981-1990)의 329,207명에 비해 60%가 줄어든 실정이다. 민족을 나무에 비한다면 10년 동안 뿌리가 60% 나 잘린 샘이다. 민족공동체를 이어가야 할 후계인구가 없어지고 있다. 출산인구가 감소되고 있는 원인은 농촌출신 조선족 총각들이 장가를 못가기 때문이다. 국외로 시집가는 여성들과 도시로 진출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총각들이 장가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이 어려워졌다. 교육위기, 문화위기도 출생인구의 급격한 감소 때문에 발생된다. 태어나는 애기가 없어 학생이 없어지고 따라서 조선족학교가 무너지고, 우리말 배우는 학생이 없어지니 조선어가 위축되고, 우리글 신문, 잡지 보는 사람도 점점 적어져 신문, 잡지도 문을 닫게 된다. 여기에서 근본 원인이 출산인구의 감소인 것이다. 연변조선족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는 2000년과 2002년에 《연변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문제 대책회의》를 2차례 걸쳐 개최하였다. 회의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문제》 해법을 위한 특별과제를 설립함으로서 조선족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중앙정부와 성, 자치주 관계부문 영도들과 행정인원 그리고 전문가들로 조직된 프로젝트 담당 기구가 설립되었고 2003년 11월까지 정부차원의 정책건의가 마련되었다. 조선족인구의 감소문제는 국가차원의 특별정책제정도 중요하지만 조선족공동체가 직면한 사회경제, 교육, 가치관 등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풀어나가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정부의 정책적인 배려로 2006년부터 조선족의 1가족 2자녀의 비례가 증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산재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대책이 있어야 된다. 총각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켜 농촌이든 도시든 관계없이 돈을 벌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 돈이 있으면 결혼 할 수 있고 출산도 늘 수 있다. 조선족 출산인구의 회생을 위해 우리는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된다. 민족문화의 문제는 민족교육, 민족문화예술, 언어 등을 포함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교육문제이다. 1996년에 존재했던 1200여개의 조선족학교가 2005년에 와서 400개로 줄어들었다. 조선족학교가 줄어드는 속도는 조선족 출산인구의 감소속도와 거의 맞먹는다. 조선족들이 도시에 모이고 있는 상황에서 도시에서 민족교육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도시공립학교의 인적자원과 공간을 이용하여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1999년에 우리는 북경의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에 120명의 조선족 학생들을 입학시켜 정규교육과 민족교육을 접목시키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오전에는 정규교육을, 그리고 오후에는 민족어교육을 받게 하여 훌륭한 교육의 효과를 거뒀다. 그리고 우리는 도시화에 대비하여 1989년부터 북경 등 15개 대도시에서 주말 조선어교육을 지금까지 실시해오고 있다. 각 지역에서 이런 형태의 학교를 만드는 것도 민족교육을 해결하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족의 신문, 문학지나 문예지는 살려나가야 한다. 그러기위해서 기업인들의 도움이 상당히 필요하다. 조선족 문학인, 예술인들도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현대에 맞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은 문화인들의 몫이다. 문화의 세기를 살아가면서 우리도 문화산업, 콘텐츠산업, 창의 산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기업인들과 문화인들이 서로 협력하는 산학협동의 길을 모색해야한다. 한국어를 배운 한족이나 기타 민족의 학생들이 조선족 학생들보다도 더 표준적으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동아시아 시대에서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은 조선어를 홀시하고 중국어만 중시한다. 유명대학에 입학하는 것만 중시하고 이후의 취직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대학을 졸업하든 두 가지 언어를 확실히 장악하면 취직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현재 2만 여명의 한족학생들이 한국에서 유학하고 있고 중국 내에도 130여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개설되어 있어 한국어를 배우는 한족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와 반대로 우리말을 모르는 조선족젊은이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연변의 경우 정책상 원인으로 조선족 중소학교의 조선어강의시간을 많이 줄인다. 때문에 대학 조선어학과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조선어 수준이 매우 낮다. 이런 문제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현제 조선족들이 흩어져 사는 중국의 대도시들에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된 조선족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동북지역 도시들에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와 같이 현지정부의 民政局에 등록된 법인단체도 있지만 관내지역의 절대다수 단체들은 무허가상태에서 어렵게 조선족문화관련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운동회, 설맞이 모임, 노래자랑모임, 장학회 모임, 동호인 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내용도 다양하다. 이러한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문화 활동들은, 조선족들이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같이 흩어져 있지만,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사는 지역사회의 친목활동이라는 의의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제 각 지역 조선족단체들은 현지 정부의 민족 사업을 협조하는 위치에서 NGO의 합법적 지위확보에 힘을 기울려야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 효과적으로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출을 통한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족 언어교육과 민족문화교육을 실시해야한다. 전통과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옛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려 노력해야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에만 집착하지 말고 민족문화전통을 이어가야 한다. 문화전통과 세계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러한 대도시 조선족단체들을 위한 문화의 항공모함이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조선족문화 활동에 필요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어야하고 그들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어야 한다. 연변의 연출단체들은 그들을 위한 순회공연을 당연한 책임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로 흩어진 조선족의 사회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상응한 시스템 도입이 시급하게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트 경제인들과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는 세계적인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전체적인 경제사회발전을 고민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네트워크가 조선족사회의 민족문화와 경제발전에 촉매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글로벌네트워크만이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하고 도전해온 조선족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취지로 우리는 북경(2006년)과 부산(2007년)에서 제11회와 제12회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열어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활용에 관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보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어렵지만 도전해야 한다.    
92    중국조선족기업의 기본특징 및 그 출로 댓글:  조회:7864  추천:3  2011-09-28
중국은 개혁개방이래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함으로서 지금은 GDP기준으로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런 발전은 단순한 경제지수의 대폭 상승만이 아닌 일련의 광범하고 심각한 변혁이다. 농촌으로부터 도시에까지 경제령역에서 정치령역에까지 경제가 고속성장한 동시에 중국의 경제구조, 사회구조, 제도구조도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조선족사회도 례외가 아니다. 중국의 거대한 변화에는 우리 민족의 중대한 기여도 포함되여있다. 이 시기 중국조선족사회에도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에서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중국조선족사회도 미증유의 충격을 받게 되였고 지난 세기 80년대에 조선족농민들의 도시진출이 대거 이루어졌다. 상품경제시대에 제한된 땅에만 매달려서는 더 잘 살수 없다는것을 감지한 조선족농민들은 도시로 대거 진출을 단행한것이다. 하지만 자본이 적고 주머니사정이 여의치 않은데서 그들은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보다 넓은 지역에서 분산적으로 경영활동을 전개하는 상황을 면치못하였던것이다.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족사회는 새로운 발전기회를 접하게 된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부를 찾아 돈을 벌려고 대도시로 진출하였다. 보따리장사도 하나의 추세로 되여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발벗고 나섰다. 한국 경제인들의 중국진출을 계기로 중국조선족들이 북경, 상해, 천진, 대련, 청도, 광주 등 대도시들에 대거 진출하였다. 지난 세기 90년대의 다른 한 움직임은 바로 한국로무진출붐이였다. 수천수만의 조선족농민들이 "코리안드림"의 유혹에 끌려 한국으로 대거 진출하게 된다. 지금도 그 열조가 조금 식기는 하였지만 의연히 유혹이 대단한것만은 사실이다. "코리안드림"으로 시작된 중국조선족사회의 한국로무붐이 조선족녀성들의 결혼으로 이어지면서 대량의 조선족녀성들이 자의타의로 혹은 진짜 그렇찮으면 가짜로 한국에 시집가면서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근 30%의 조선족녀성이 한국으로 시집간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에서 돈을 벌었거나 중국의 대도시들에 진출하여 자금을 축적한 적지않은 조선족들은 그 자금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면서 기업경영과 확대재생산에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대도시들에서 조선족들이 기업경영에 몰입하여 일정한 규모를 형성하고있는것만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대도시들에 진입하여 기업경영에 혼신을 다하고있는 조선족기업들의 기본특징은 아직도 료식업, 유흥업, 려행사 등 단순 서비스업종에 거의 집중된것이다. 그중 년간 4000만딸라의 리익을 창출하는 슈퍼료식체인업체 이를테면 북경의 한라산그룹같은 덩치가 엄청 큰 기업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리윤이 얼마 안되는 빈약한 상태에 처한것이 적지않다는것도 지적해야 할것이다. 이런 기업들은 제한된 지역에서 류사한 비즈니스모델로 시장을 공유하고있기에 동족기업간의 소모적경쟁도 빈발하여 상호간의 발전을 저애하고있는것도 부인할수 없다. 중국조선족기업들의 다른 한 특징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들과 밀착되여있다는 점이다. 자본, 기술, 상품, 경영노하우, 비즈니스, 모델 등이다. 이처럼 많은 조선족기업들이 자기생존공간을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에 초점을 맞추고있기때문에 시각을 바꾸어보면 스스로 자기발전공간을 제한하고있는 형국이다. 그 결과 조선족은 신주땅에서 타민족 못지않게 시장경제의 격랑속에 뛰여들었고 또한 2중, 3중 언어우세가 있지만 중국 500대기업의 서렬에 든 조선족기업도 상장기업도 없다. 기타 소수민족은 우리보다 우세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있는것이다. 그들은 언어의 우세도 해외관계도 없지만 중국에서 돈을 버는데 전념하였기에 이럴수 있었던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비약적인 천지개벽을 이룩하면서 제반 경제정책도 변하고있다는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세계공장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처럼 투자유치를 하였다는것이다. 그가운데서 나타난 부작용은 다름아닌 략탈성적인 개발과 환경오염의 극심화이다. 동시에 선진국들이 중국제품들에 대하여 가끔 반덤핑세를 부과하기에 수출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고있는 실정이다. 한국제조업체들이 중국진출을 하면서 중국조선족들도 땨라서 제조업에 대량 진출하였다. 하지만 중국정부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제조업들이 살아가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동남아세아로 대량 이전되고있는 상황이다. 중국조선족기업들도 한국기업들과 전략적제휴관계를 가지고있기에 역시 불운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향후 조선족기업인들이 자기생존공간을 한국관련기업에로 제한시킨 현실을 극복하고 자체적발전공간을 개척하고 자주적미래를 창조하는것이 절실한 사안임을 감안해야 함을 시사해 준다. 중국조선족기업인들은 우선 형제민족기업인들과 함께 "중국특색"에 따라 "중국돈"을 벌어야 한다. 당면 중국내에서 비교적 성공한 조선족기업가들의 대부분은 우리 민족 사회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형제민족기업인들과 함께 경영활동을 하고있는 그런 기업가들이다. 타방으로 글로벌시대에 립각하여 조선족기업인들은 한국계기업인들과 차별화된 "중국특색"의 기업발전공간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국계기업들과 공존하는 전략적제휴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체적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개척해야 할것이다. 2010년대에 진입하면서 국가의 투자중심을 장춘-길림-두만강지역의 개발개방에로 옮겨오고있다. 조선족기업인들은 국가에서 집앞에까지 와서 풀어놓는 "돈보따리"를 리용할수 있는 프로젝트를 잘 선정해야 할것이다. 이런 프로젝트는 인력을 대량 수요하고 자원을 소모하고 오염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그런 제조업보다 친환경적이고 창의적인 하이테크산업이나 문화산업이여야 할것이다. 우리 민족 경제인들에게 이 점이 상당히 미흡하다고 본다. 중국조선족기업인들은 내셔널리티(중국국민)와 에스니시티(조선민족)를 활용하여 이 량면으로부터 액세스할수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할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화교상권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세계한인상권과도 네트워크로 련계되여야 할것이다. 그로하여 공간적으로 가로에도 세로에도 발전해 나갈 가능성을 가진 중충적이고 다차원적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것이 더없이 절실한 사안이라 하겠다.  
91    새로운 시대적민족문화 창출 절실 댓글:  조회:7510  추천:6  2011-09-01
개혁개방이래 중국조선족은 전통적거주지역인 동북을 떠나 중국의 연해지역 대도시를 중심으로 대거 진출하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의 거주판도를 연변지역을 제외하고 동북 3성의 대도시들에 35만여명, 현, 시 이하 농촌들에 37만여명 그리고 산해관이남지역에 50여만명이 거주하고있다. 중국조선족의 해외진출도 지금 의연히 진행형으로 전개되고있는 실정이다. 한국법무부에 따르면 2010년말까지 한국에 체류중인 중국조선족의 인구는 52만명이다. 그외에도 일본, 러시아, 미국, 동남아, 중동, 호주, 남미주 등 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까지 합치면 도합 7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새로운 력사적조건하에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여 중국조선족이 흩어지고있는 현실을 감안하고 적극적인 자태로 하나의 민족사회로 보존하고 발전시키에 진력하는것이 시대적과업으로 절실한 사안으로 되고있는것도 사실이다. 우리 민족이 부동한 자연환경과 문화환경에 로출되여가고있는 이런 현상태에서 하나의 민족사회로 생존하려면 반드시 민족구성원들이 계속 공동한 조선족문화를 공유할수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여 조선족의 민족정체성과 전통적가치관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것이다. 그 대안을 마련하는것이 우리 민족 지성인들의 앞에 놓인 시급히 풀어가야만 하는 공동한 과제인것이다. 우리 민족은 중국이란 이 신주대지에서 이미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취득하고 한족을 비릇한 기타55개 민족과 함께 중화대가정의 떳떳한 일원으로 그리고 주류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하기에 우리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령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그런 대안을 마련하는것이 급선무이다. 우리는 연변 지역을 포함하여 중화의 대지에서 모든 중국조선족들이 공유할수 있는 조선족특유의 민족문화를 창출해야 할것이다. 이런 문화는 흩어진 우리 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유지될수 있는 민족정체성 그 자체일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 문화사업종사자들은 조선족사회가 오늘의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가일층 발전되고 강한 민족으로 성장해가는 키워드로 될수 있다. 현재 조선족들이 흩어져 사는 중국의 대도시들에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된 조선족사회단체들이 활동하고있다. 동북지역의 대도시들에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와 같은 현지 정부의 민정국에 등록을 하고 적극적으로 활약하고있는 법인단체도 있지만 관내지역의 절대다수 단체들은 무허가상태에서 어렵사리 조선족문화관련활동들을 전개하고있다. 지역운동회, 설맞이모임, 노래자랑모임, 장학회모임, 동호인모임, 각종 경로행사 등 내용도 풍부하고 형식도 다채롭다.  이러한 기성세대가 조직하고 주도하는 모임과 행사들은 비록 조선족들이 신주대지에 바다의 모래알처럼 뿌려져 있지만 조선족사회가 아직 살아있고 힘차게 숨쉬고있다는것을 뚜렷하게 과시하고있는것이다. 그 상징적의미도 일반적인 행사의 거행보다도 더욱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바 보기에는 간단하고 단순하여도 일반지역사회의 성질을 훨씬 릉가하는것이다. 이제 각 지역 조선족단체들은 당지 정부의 민족사업을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그에 토대하여 합법적지위확보에 힘을 기울여야 할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욱 효과적으로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출을 이룩할수 있다. 동시에 이를 통한 민족정체성확보에서 당과 정부의 지지와 관심과 배려를 받을수 있다. 타방으로 전통과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를 고민하는와중에도 더욱 높은 차원에서의 청소년들에 대한 민족언어교육과 민족문화교육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고 더욱 바싹 틀어쥐여야 할것이다. 이래야만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여 그에 걸맞는 민족정체성확보에 도달할수 있다. 로일대는 로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며 젊은이들을 리해하여 주고 그들에게서 새로운것을 배우는 자세가 필요된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너무 글로벌화에 집착하지 말고 민족전통문화를 이어가는데 알힘을 넣으며 뇌집을 짜야 할것이다. 그래서 문화전통과 글러벌화를 조화시키여 우리 민족에게 리로운것들을 많이 창출해야 할것이다. 연변이 상기한 대도시의 조선족단체들을 위한 항공모함역할을 잘하는것이 특히 필수적이다. 산재 지역의 조선족민속문화활동에 필요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그들이 건전한 발전을 도모할수 있도록 조건을 창조해 주고 지도해 주어야 할것이다. 연변의 연예단체들은 내지의 조선족집거구역에 다니면서 공연을 조직하는것을 경제리익창출보다도 당연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간주해야 할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에서 지난 150여년간의 력사적과정을 거치면서 이미 중국의 56개 민족과 함께 떳떳한 일원으로 그 정체성을 확보하고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흭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더욱 높은 차원에로 부상하자면 오직 글로벌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확보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야 할것이다. 오직 이 길밖에 없다. 우리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도전해야 할것이다!  
90    조선족의 한ㆍ중 경제발전 공로 인정해야 댓글:  조회:6362  추천:47  2011-05-19
조선족의 한ㆍ중 경제발전 공로 인정해야                    황유복 중앙민족대 교수 `한중 경제포럼' 발표         황유복 중국 중앙민족대학 교수는 19일 "중국의 조선족들이 중국과 한국의 경제교류에 교량역할을 하고 있음을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면서 한국사회에 만연돼 있는 조선족 경시 풍조를 불식할 것을 주장했다.   황 교수는 이날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주최로 서울 쉐라톤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제1회 한ㆍ중 경제포럼에서 `중국내 재중동포경제인의 위치와 전망'이란 제목의 주제 발표를 통해 "재미동포는 한국에 두뇌를, 재일동포는 한국이 어려울 때 금융을, 재중동포는 한국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한다고 보는 것이 한국학계의 시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조선족이라고 하면 3D업종 종사자로만 생각하고 낮춰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며 "중국 돈을 벌어서 한국경제가 발전하는 지금 상황에서 이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중국에서 다양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고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잘아는 동시에 중국어와 중국문화에 능통한 조선족들은 그간 한ㆍ중 경제관계 발전을 위해 가교역할을 해왔다"면서 "재미동포나 재일동포들의 공로에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황 교수는 조선족에 대해 `중국 국적을 취득한 이민자 혹은 그들의 후대 중에서 중국 행정 당국의 승인을 거쳐 조선족으로 분류된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그 숫자는 192만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는 조선족 사회의 특징으로 ▲이민역사가 가장 길고 ▲언어를 비롯해 고국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글로벌화가 잘 돼 있다는 점을 꼽았다.   또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의 무역업ㆍ서비스업ㆍ제조업이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과 맞물려 고속성장을 이뤘고, 조선족이 대도시로 진출하면서 주요 주거지가 동북 3성에서 중국 동남연해지역으로 이동했다고 분석했다.   황 교수는 "지난해 하루 120편의 비행기가 한국과 중국을 오가고 연간 500만명이 내왕할 정도로 양국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며 "이제 양적으로 커진 두 나라의 관계를 질적으로 격상시킬 때이기에 조선족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연합
89    게임을 하겠으면 룰을 지킬 줄 알아야 (황유복) 댓글:  조회:9762  추천:59  2010-05-03
게임을 하겠으면 룰을 지킬 줄 알아야      -- 조선족정체성에 관하여 김호웅교수님과의 대담(对谈)                         황 유 복   게임(游戏)을 하려면 우선 룰(规则)을 지켜야한다. 룰이 없는 게임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이다. 학문의 “룰”은 우선 개념으로 시작된다. 개념이 없으면 학문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희다”하고 땅속에서 캐어내는 석탄을 “검다”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눈은 “검고”, 석탄은 “희다”고 한다면 우리는 개념의 부재로 대화를 할 수 없어진다.   연변대학 김호웅교수가 “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라는 론문에서 조선족과 조선족문화가 “이중성”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의 글이 조글로에 실리면서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왔다. 그런데 그때 나는 집 이사를 해야 했고 또 금년에 졸업하게 될 7명 박사생들의 론문을 봐주어야 했기 때문에 전혀 시간여유가 없었다. 뒤늦게 김호웅교수의 글을 읽고 나는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정체성이나 민족문화정체성을 론하려면 민족학, 문화인류학의 리론으로 접근해야하는데 민족학이나 문화인류학의 기본개념조차 지켜주지 않은 글을 상대로 토론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족이 네이션(nation) 개념이라는 것은 나와 김교수가 토론할 문제가 아니고 중국의 민족학, 문화인류학 학계가 이미 정해 놓은 개념이다. 《中国大百科全书 民族卷》에서 “朝鲜族”을 영어로 “처아오시안 내이셔널리티 (Chaoxian nationality)”라고 표기하여 “조선족”은 nation 개념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김호웅교수는 “개념 사용에 있어서 더 큰 혼란에 빠진 것은 오히려 황유복 선생”이라고 하면서 민족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어느 누리군의 댓글을 “유식한 네티즌”이라는 미명을 붙여가면서 “조선족은 nation의 개념이 아니고 ethnic group의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다시한번 김호웅교수가 “말꼬투리”라고 표현한 개념정리를 하게 된다.  1. 김호웅교수가 황유복의 관점이라고 하면서 정리한 첫 번째 문제 : “▲ 조선족은 디아스포라가 아니다.”    김교수는 나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나는  “조선족은 디아스포라가 아니다.” 라고 한 적이 없다.  나는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분명히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갈래이지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10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진입한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라고 했다.(황유복,「중국조선족의 문화공동체」)∎ 개념정리   이민학(移民学)에서 이민자가 타국으로 이민 갔을 때 새로운 이민현장에서 정착하는 형태는 크게 디아스포라(Diaspora)와 트랜스내셔널(Transna tional) 두 가지로 나눈다. “리산 유태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는 어쩔수 없이 모국을 떠났기 때문에 강한 귀소본능에 전통지향적이여서 거주국 주류사회에 진입하지 않는다. 그 대신 트랜스내셔널은 모국의 국적을 초월하고 거주국국적을 취득하여 주류사회에 진입한다.   광복전 동북지역에 살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조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포함한 1945년 이전의 재중조선민족은 어느 시각에서 보아도 분명히 디아스포라였다. 그러나 계속 중국에 남아 모국의 국적을 초월하여 중국국적을 취득한 1949년 이후의 조선족은 학문적 분류에서 분명히 트랜스내셔널이다.   한족의 경우도 미국이나 타국 국적을 취득한 화인(중국정부가 말하는 “동포”)은 트랜스내셔널이라 하고 중국국적을 소유한 화교들은 디아스포라라 한다.   학문은 반 쪼가리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2. 김호웅교수가 황유복의 관점이라고 하면서 정리한 두 번째 문제 : “▲ ‘조선족’은 ‘한반도의 족속’과 같은 민족이 아니라 ‘100%조선족’일 뿐이다.”나는 <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라는 글에서 “지금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민족"은 내이션(nation)이란 개념이고 nation 은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도 ‘국민+민족’이다.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민족’이다. 여기서 ‘조선족’은 nation의 개념이고, 따라서 ‘조선족’과 한국의 ‘韓족’은 ‘서로 다른 민족’이다.” 라고 개념정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김호웅교수는 “개념 사용에 있어서 더 큰 혼란에 빠진 것은 오히려 황유복 선생 자신이라는 사실을 유식한 네티즌들이 지적하고 있다. ‘황유복 선생의 용어 사용에 혼동이 있다. 중국 56개 민족을 nation이라 했는데, 응당 ethnic group라 해야 한다.황유복 선생은 조선족은 nation의 개념이고 따라서 조선족과 韓民族은 다른 민족이라고 했는데, 중국국민이 nation의 개념이고 조선족이 ethnic group의 개념이다. 따라서 ethnic group 면에서 조선족과 한민족은 같은 민족이고 조선족과 중국국민은 nation에서 같은 민족이다.’” 라고 했다. “유식한 네티즌”이라고 올려 추면서 민족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어느 누리군의 댓글을 근거로 남을 공박하는 것은 무식함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학자가 학문을 대하는 자세이자 도덕성의 문제이다. 익명의 댓글이   학문의 근거로 될 수 없다는 것은 대학교수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 개념정리 나의 은사님이셨고 지금은 타계하신 吴文藻,费孝通,林耀华 등 중국의 민족학과 문화인류학계의 최고 권위들이 함께 집필한 《中国大百科全书 民族卷》의 “朝鲜族 (Chaoxian nationality)”조목에 영어로 Chaoxian nationality라고 하여 “조선족”은 nation 개념임을 분명히 했다.(《中国大百科全书 民族卷》69페이지) 그리고 조선반도 북과 남의 조선민족은 “朝鲜人 (Koreans)”이란 조목에서 다루면서 설명중에 “与中国朝鲜族同源”이라고 했다(《中国大百科全书 民族卷》67페이지).민족학분야의 최고 권위들이 정의한 “처아오시안(朝鲜) 내이셔널리티”와 “코리언”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다. 그러나 에스닉그룹(ethnic group)이라는 개념으로 조선족과 조선, 한국인은 하나의 “겨레”이고 “동포”이다.  3. 김호웅교수가 황유복의 관점이라고 하면서 정리한 세 번째 문제 : “▲ 조선족에 대한 중국 지성인들의 불신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  “보다시피 황유복 선생은 중국의 한 사이트에 실린 네티즌의 글을 논거로 삼고 있는데, 이런 선입견과 편견을 가진 사람을 과연 “중국의 지성인”이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런데 그 “중국의 한 사이트”가 <인민일보>사이트고 그 “네티즌”이 중국의 유명대학교수로서 중앙정치국위원들에게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중국의 지성인”이라 볼 수 없을까? 사실 중국사회과학원계통이나 대학들에서 조선족학자들의 “이중성론”을 빌미로 중앙으로 보내오는 <보고서>는 인민일보사이트의 글보다 훨씬 심각하다.   내가 <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라는 글에서 강조했지만 세상에 “이중성민족”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김호웅 등 일부 학자들뿐이다. 왜 꼭 없는 말을 만들어서 조선족의 위상에 상처 주는 일을 해야 하는가?      4. “이중성(二重性)” 과 "중층적(双重性)" ∎ 개념정리 “이중성(二重性)”이란 단어는 한어나 조선어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이중성”은 사물의 본질, 즉 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성질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단어이다. 그러나 한어의 “双重性”이란 낱말이나 조선어의 “중층적” 혹은 “다중”이란 낱말은 사물의 본질과 관계없이 구조적측면에서 두 개의 층면을 이야기할 때 쓰인다. 때문에  “二重性”과 “双重性”은 서로 호환(互换)할 수 있는 낱말이 아니다. 왕아남이 말한 "双重民族身份과 민족의식"은 "이중성민족"으로 번역될 수 없다. “双重民族身份” 이란 말에서 “双重”은 두 개의 층면이란 뜻이다. 즉 중국의 56개 민족은 구체적인 자기 소속민족과  "중화민족"이라는 두 개 층면의 신분을 가진다는 말이다. 조선족은 “조선족”구성원인 동시에  “중화민족”의 구성원으로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한어에서는 “双重民族身份”이라 하고 우리말에서는 “중층적 민족신분” 혹은 “다중 민족신분”이라 한다.  여기서 "중화민족"과 "조선족"은 "두 개의 대립되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왕아남은 “双重民族身份” 이라고 했지 “二重性民族身份"이라고 하지 않았다.   김호웅은 “조선어에는 쌍중성(雙重性)이란 낱말이 없기에 이중성(二重性)이란 낱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지의 독선이다. 중국, 일본, 한국의 민족학학자들은 우리 말 론문에서 한어의 “双重”에 해당되는 말로 “중층적” 혹은 “다중” 이란 낱말을 사용한다. “(조선족의)중층적·다차원적 구조” (일본 나고야대학 교수, 사쿠라이 타츠히코: “동아시아의 코리안·네트워크 연구의 시점과 과제”) ; “‘한민족’이라는 것은 그저 자기의 다중 정체성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 명지대학교 교수, 박화서: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비극”) 5. 조선족문화는 “변연문화”가 아니다 김호웅교수는 론문에서 조선족문화의 “변연문화론”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개념정리 “边缘文化(marginal culture)”란 절대 김호웅교수가 말한 뜻이 아니다.“marginal culture”이란 개념은 독일의 인문지리학자 라첼(Ratzel)이 1891년에《인류지리학》이라는 저서에서 최초로 사용한 문화중심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아류문화(亚文化)"라는 개념이다. 영국문화인류학자 타일러(Edward B. Tylor)를 대표로하는 고전진화론학파들이 “边缘文化(marginal culture)”개념을 문화인류학에 도입하면서 문화중심에 대응되는 아류문화로서 “락후한 문화”라고 개념을 정리했다.(陈国强等 1990,《简明文化人类学词典》,第116页.)    “한(漢)족 문화”는 중국에서 주류문화의 작용을 하고 있다. 조선족문화는 중국에서 비주류문화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절대 한족문화의 “아류문화”나 한족문화에 비해 “락후한 문화”는 아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조선족문화는 조선문화나 한국문화와 뿌리를 같이 하는 하나의 자주적문화이지 그들 문화의 “아류”도 그들에 비해 “락후한 문화”도 아니다.                          6. 조선족과 조선족문화의 성격에 대한 정판룡선생의 견해:나는 정판룡선생님의 아래의 견해를 완전히 동의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지금의 많은 견해들은 흔히 기성의 개념이거나 어느 한시기의 정치수요로부터 출발하여 무단적으로 결론을 내려진것이기에 그 결론이 흔히 중국조선족문화의 실제정황과 잘 맞지 않게 된다. 이를테면 중국조선족은 조선으로부터 중국에 천입한 민족이기에 본질적으로 여전히 조선민족의 한 부분이며 그 문화도 조선민족문화의 한 부분이라는 일부 사람들의 견해가 이런것이다. 이런 견해는 중국의 조선족이 조선민족에서 갈라져나와 중국으로 천입했다는 한가지 사실만을 근거로 삼았지 갈라져나온 뒤 새로운 환경에서 점차 자기 특성을 가진 새로운 민족공동체로 발전해나갔다는 사실은 홀시되고있다.” (정판룡: “우리나라 조선족문화의 성격을 론함” )정판룡교수님께서는 당신이 문학전공자이셨기 때문에 조선족과 조선족문화를 이야기하시면서 같은 글에서 “이 문제는 민족학에서 연구되여야 할 문제”라는 겸손함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7. 김호웅교수는 론문에서  “황유복 선생은 한국계미국인들이 “탈한국적인 코메리칸사회”를 만들었듯이 중국조선족도 100여 년간의 이민사, 정착사, 투쟁사를 통해 이미 중국사회에 튼튼히 뿌리를 내린 것만큼 중국조선족이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다고 보는 것은 일종 허구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중국조선족공동체가 한국사회와 구별되는 점만을 이야기하고 중국 주류사회와 구별되는 점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한 이른바 탈모국(脫母國)적인 “100%의 조선족”을 운운하면서도 중국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 특히 민족교육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딜레마에 빠지고 있다. 특히 “100%의 조선족”론은 중국조선족과 모국과의 문화적 연계를 인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 인식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라고 했다.∎ 개념정리 (1) “그는 중국조선족공동체가 한국사회와 구별되는 점만을 이야기하고 중국 주류사회와 구별되는 점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정판룡선생님의 말씀대로 조선족이 “자기 특성을 가진 새로운 민족공동체로 발전”했음을 이야기할 때 자연히 같은 겨레인 “한국사회”와 다른 점이 지적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선족과 “중국 주류사회” 즉 한족(汉族)과는 민족(nation)개념에서도 동포(ethnic group)개념에서도 그리고 민족문화(national culture)차원에서도 원천적으로 다르다. 완전히 다른데서 또 무슨 “구별되는 점”을 찾아야 되는가?    (2) “이른바 탈모국(脫母國)적인 “100%의 조선족”을 운운하면서도 중국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 특히 민족교육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스스로 이율배반적인 딜레마에 빠지고 있다.”김호웅교수님의 뜻은 조선족이 민족문화와 민족교육을 부흥시키려면 조선이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된단 말인가? 조선족은 1949년에 이미 탈모국(脫母國)적 구조변경을 거쳐 중국소수민족으로 되었다. 중국국적을 취득(탈모국)했기 때문에 조선족은 민족문화와 민족교육을 발전시킬 자격이 없단 말인가? “탈모국(脫母國)”적이란 개념은 우리가 앞으로 “하자”, “말자”하는 문제가 아니라 력사적으로 이미 되어있는 문제이다. 다민족국가에서 각 소수민족들이 자기민족의 문화와 교육을 소홀히 하면 주류민족에 의해 동화된다는 도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3) “‘100%의 조선족’론은 중국조선족과 모국과의 문화적 연계를 인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 인식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나는 론문에서  “100%의 조선족”을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라고 정의 했다.   그런데 김호웅교수님은  “100%의 조선족”이라는 점을 승인하면 왜 “모국과의 문화적 연계를 인위적으로 차단”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100%의 조선족”일 때 왜 한국과 문화적 연계를 할 수 없단 말인가? 김교수가 한국과 문화적 연계를 할 때 100% 조선족이 아니고, “50% 조선족에 50% 한국인”이란 말인가? 그래야 문화교류가 된단 말인가?   현제 중국에 거주하는 우리 겨레는 3가지형태로 정착하고 있다.(1) 탈모국적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형태 -- 조선이나 한국의 국적과 관계없이 중국국적을 선택했고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 인정되었다. (조선족)(2) 디아스포라(Diaspora) 형태 -- 조선이나 한국의 국적을 같고 중국에서 영주권을 부여받은 사람, 중국에서는 조선교민이나 한국교민이라 부르고 조선이나 한국에서는 재중 교포라 부른다.( 조선교민, 최근에 중국에서 영주권을 딴 한국인)(3) 재외국민 형태 -- 조선이나 한국국적자로 중국에 장기체류하는 사람. (유학생, 외교공관임직원, 회사관련 사업자 등)     1988년 나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자격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중국의 조선족을 “중공속의 한인”이라 호칭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국의 10개 대학에서 순회강연을 하면서 조선족은 중국국민으로서 하나의 소수민족이지 “한국인”이 아닌 한국인의 “겨레”라고 주장했다. 즉 재외한국인도 한국의 재중교포도 아닌 “동포”라고 했다. 나는 지금 매년 8차정도 한국에 초청되어 학술발표를 하거나 대학 특강을 하게 된다. 현재 한국의 정부기관이나 대학교수들은 우리가 주장한 개념대로 조선족을 “동포”라고 부른다. 내가 “100% 조선족”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지만 한국과의 “문화적 연계를 인위적으로 차단”하거나 차단된 적이 없다.  우리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정체성을 확인하고 중국의 주류사회진입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서 중국에서 계속 타민족의 칭찬을 받는 민족으로 거듭날 때 조선족은 조국과 고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를 포함한 전 방위적인 교류를 위해 더 많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2010.5.3 북경에서
88    4.조선족 민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댓글:  조회:6530  추천:55  2010-01-17
중국 조선족의 문화공동체4 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황유복      21세기에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그동안 조선족은 경제적 수입의 증가를 위해 집중거주 지역에서 중국의 대도시들과 해외로 진출하게 되었다. 192만 조선족인구 중 70%이상을 차지하는 150여만 명이 화남지역, 양자강하류지역, 화북지역, 동북지역, 황하중하류지역 대도시들과 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국으로 흩어져나갔다. 이제 조선족은 명실 공히 글로벌민족으로 되었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민족사회로 생존하려고 한다면 부동한 자연환경과 문화 환경에 노출되어있는 민족구성원들이 계속 조선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해가야 한다. 분산된 조선족사회를 유지하는 대안으로 일부학자들이 ⟪离散 유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Diaspora)⟫민족론을 제시하고 있다. 혈통과 언어가 바뀌어도 디아스포라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데는 끈질기게 작용해온 유대교가 디아스포라들의 민족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의 기반으로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강한 결집력을 가진 민족종교가 없는 조선족사회에 디아스포라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그 어떤 이론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출생된 조선족 아기수는 도합 136,585명인데 10년 전(1981-1990)의 329,207명에 비해 60%가 줄어든 실정이다. 민족을 나무에 비한다면 10년 동안 뿌리가 60% 나 잘린 샘이다. 민족공동체를 이어가야 할 후계인구가 없어지고 있다. 출산인구가 감소되고 있는 원인은 농촌출신 조선족 총각들이 장가를 못가기 때문이다. 국외로 시집가는 여성들과 도시로 진출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총각들이 장가가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이 어려워졌다. 교육위기, 문화위기도 출생인구의 급격한 감소 때문에 발생된다. 태어나는 애기가 없어 학생이 없어지고 따라서 조선족학교가 무너지고,  우리말 배우는 학생이 없어지니 조선어가 위축되고, 우리글 신문, 잡지 보는 사람도 점점 적어져 신문, 잡지도 문을 닫게 된다. 여기에서 근본 원인이 출산인구의 감소인 것이다.   연변조선족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는 2000년과 2002년에 《연변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문제 대책회의》를 2차례 걸쳐 개최하였다. 회의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문제》 해법을 위한 특별과제를 설립함으로서 조선족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중앙정부와 성, 자치주 관계부문 영도들과 행정인원 그리고 전문가들로 조직된 프로젝트 담당 기구가 설립되었고 2003년 11월까지 정부차원의 정책건의가 마련되었다. 조선족인구의 감소문제는 국가차원의 특별정책제정도 중요하지만 조선족공동체가 직면한 사회경제, 교육, 가치관 등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풀어나가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연변 조선족자치주정부의 정책적인 배려로 2006년부터 조선족의 1가족 2자녀의 비례가 증가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산재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대책이 있어야 된다. 총각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켜 농촌이든 도시든 관계없이 돈을 벌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 돈이 있으면 결혼 할 수 있고 출산도 늘 수 있다. 조선족 출산인구의 회생을 위해 우리는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된다.      민족문화의 문제는 민족교육, 민족문화예술, 언어 등을 포함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교육문제이다. 1996년에 존재했던 1200여개의 조선족학교가 2005년에 와서 400개로 줄어들었다. 조선족학교가 줄어드는 속도는 조선족 출산인구의 감소속도와 거의 맞먹는다. 조선족들이 도시에 모이고 있는 상황에서 도시에서 민족교육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도시공립학교의 인적자원과 공간을 이용하여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1999년에 우리는 북경의 중앙민족대학 부속소학교에 120명의 조선족 학생들을 입학시켜 정규교육과 민족교육을 접목시키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오전에는 정규교육을, 그리고 오후에는 민족어교육을 받게 하여 훌륭한 교육의 효과를 거뒀다.  그리고  우리는 도시화에 대비하여 1989년부터 북경 등 15개 대도시에서 주말 조선어교육을 지금까지 실시해오고 있다. 각 지역에서 이런 형태의 학교를 만드는 것도 민족교육을 해결하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족의 신문, 문학지나 문예지는 살려나가야 한다. 그러기위해서 기업인들의 도움이 상당히 필요하다. 조선족 문학인, 예술인들도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현대에 맞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은 문화인들의 몫이다. 문화의 세기를 살아가면서 우리도 문화산업, 콘텐츠산업, 창의 산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기업인들과 문화인들이 서로 협력하는 산학협동의 길을 모색해야한다.    한국어를 배운 한족이나 기타 민족의 학생들이 조선족 학생들보다도 더 표준적으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동아시아 시대에서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은 조선어를 홀시하고 중국어만 중시한다. 유명대학에 입학하는 것만 중시하고 이후의 취직은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대학을 졸업하든 두 가지 언어를 확실히 장악하면 취직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현재 2만 여명의 한족학생들이 한국에서 유학하고 있고 중국 내에도 130여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개설되어 있어 한국어를 배우는 한족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와 반대로 우리말을 모르는 조선족젊은이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연변의 경우 정책상 원인으로 조선족 중소학교의 조선어강의시간을 많이 줄인다. 때문에 대학 조선어학과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조선어 수준이 매우 낮다. 이런 문제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현제 조선족들이 흩어져 사는 중국의 대도시들에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된 조선족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동북지역 도시들에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와 같이 현지정부의 民政局에 등록된 법인단체도 있지만 관내지역의 절대다수 단체들은 무허가상태에서 어렵게 조선족문화관련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운동회, 설맞이 모임, 노래자랑모임, 장학회 모임, 동호인 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내용도 다양하다. 이러한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문화 활동들은, 조선족들이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같이 흩어져 있지만,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사는 지역사회의 친목활동이라는 의의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제 각 지역 조선족단체들은 현지 정부의 민족 사업을 협조하는 위치에서 NGO의 합법적 지위확보에 힘을 기울려야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 효과적으로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출을 통한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족 언어교육과 민족문화교육을 실시해야한다. 전통과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옛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려 노력해야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에만 집착하지 말고 민족문화전통을 이어가야 한다. 문화전통과 세계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러한 대도시 조선족단체들을 위한 문화의 항공모함이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조선족문화 활동에 필요한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어야하고 그들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어야 한다. 연변의 연출단체들은 그들을 위한 순회공연을 당연한 책임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로 흩어진 조선족의 사회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상응한 시스템 도입이 시급하게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트 경제인들과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는 세계적인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전체적인 경제사회발전을 고민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네트워크가 조선족사회의 민족문화와 경제발전에 촉매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글로벌네트워크만이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하고 도전해온 조선족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취지로 우리는 북경(2006년)과 부산(2007년)에서 제11회와 제12회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열어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활용에 관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보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어렵지만 도전해야 한다.       글 싣는 순서 1. “조선족”은 누구인가 2. 100% 조선족   3.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족사회     4. 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87    2. 100% 조선족 댓글:  조회:8847  추천:55  2010-01-09
중국 조선족의 문화공동체2100% 조선족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 교수  같은 한자 어휘가 중국어와 한국어에서 완전히 다른 뜻을 나타낼 때가 가끔 있다. “조국(祖國)”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어에서는 “자기의 나라(《現代漢語辭典》)”, 즉 자기에게 시민권을 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한국에서는 “(1)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2)민족의 일부 또는 국토의 일부가 떨어져 딴 나라에 합쳤을 때 그 본디의 나라(《국어사전》)”라고 정의 했다. 쉽게 말해 중국은 내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이라 하고 한국은 조상이 살던 나라를 조국이라 한다. 중국의 정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한국의 사전적 해석에 준하면 조선족의 조국은 한국이나 조선이어야 한다. 두 나라의 “조국”이라는 명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감정상의 껄끄러움을 불러오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한민족동포(ethnic)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과거 어려운 시절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민해 왔고 중국의 혁명과 개발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국민의 자격을 취득한 일개의 소수민족(nation)이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분명히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갈래이지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10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국가의 령도 층 에도, 군의 장성에도, 학계의 최고 위치에도)진입한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중한수교이후 한국 사람들과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중축구경기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당신이 중국이나 한국 축구가운데 어느 팀의 스포츠풍격을 좋아하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고 “한국과 중국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의문이 깔려있다. 사실상 조선족은 60여 년 전에 이미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나는 하버드대학연구보고서(1988)에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라고 지적했다.   조국과 고국의 시각 사이에 끼어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적지 않은  조선족학자들이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 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학술적으로 토론의 대상으로 조차 상정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술관점의 문제가 아닌 개념정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중성이란 말의 개념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어나 중국어에서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에 겹쳐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국어사전》),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 즉 하나의 사물에 구비된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성질”(《現代漢語辭典》)을 말한다.   예를 들어 갑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느 중학교의 교사이고 그에게는 을남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을남이의 아버지이고 동시에 중학교사이기 때문에 갑돌이에게 이중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갑돌이가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두었다면 이중혼인이 불법으로 인정되는 중국에서 갑돌이는 합법과 불법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의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의 이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개 나라의 국적을 소유했다면 그는 이중국적자이다. 만약 조선족의 절대다수가 중국과 한국(조선)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했다면 조선족은 이중국적민족으로 이중성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중국적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조선족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조선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라면 민족의 혈연적(ethnic)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현제의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국적과 민족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하나로 묶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조선족은 세계 한(조선)민족공동체(ethnic group)에 속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기 때문에 이중성민족이 아니냐?”라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다. 세계 한(조선)민족공동체가 존재하느냐라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만약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세계 한(조선)민족공동체” 와 “중국 조선족”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민족공동체(ethnic group)” 속의 전체와 일부분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허구의 “이중성 민족론”은 중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를 키워가고 있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은) 도리어 선족(鮮族), 즉 조선족이다. 그들은 김씨부자에게 충성하거나 혹은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이렇게 믿지 못할 민족이라는 비난이 중국의 지성인들 사이에 만연되고 있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열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 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해야할 조선족 젊은이들이다. 총명, 근면, 지식 등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불신 때문에 그들의 길이 막혀진다면 그것은 우리세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주류민족이나 기타 형제민족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면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대들이 귀중한 생명까지 바쳐 우리세대가 중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는 우리 후대들의 주류사회진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법 학자로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한국계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국무부 차관보를 지냈던 예일대학 법과대학원 학장 헤럴드 고는 “한국계미국인으로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라는 한국 《중앙일보》기자의 질문에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시점에 나는 100%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 한국인이고 몇 % 미국인인가 고민하다가 ‘100% 한국계미국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더니 쉬워지더군요.”라고 대답했다.   1987~88년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계미국인사회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기위해 사회조사를 할 때 대부분 코메리칸지식인들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미국국적을 딴 후 한국 사람들로부터 “축구경기응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자기 자신들과 후대들의 미국주류사회 진입을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은 코메리칸 아이덴티티를 “한국적인 것이 얼마나 미국적인 것과 다른가에 대한 시시비비”에서 발상된, “한국적인 것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섭섭하지 않은 상태의” 탈 한국적인 것으로 설명했다. 그들은 한국문화와 차별되는 미국 코메리칸문화의 창출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했다.  미국의 코메리칸사회의 미국이민역사는 1903년 7천226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이민한 사건을 제외하면 불과 4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300년 이전에 이민해온 “박가촌”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중국조선족사회의 이민역사는 150년이나 된다. 오랜 역사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조선족문화도 창출해냈다.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해야할 이유가 없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한국)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한)민족공동체(ethnic group)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럴드 고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우리자신과 후대들이 중국 주류사회진입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중국에서 계속 타민족의 칭찬을 받는 민족으로 거듭날 때 조선족은 축구경기 때 한국 팀을 응원하는 정도가 아닌, 조국과 고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를 포함한 전 방위적인 교류를 위해 더 많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글 싣는 순서1. “조선족”은 누구인가2. 100% 조선족   3.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족사회    4. 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86    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 댓글:  조회:12003  추천:50  2009-12-28
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황 유 복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계 교수 나는 세상에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약 누가 나에게 다가와서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우긴다면 나는 거저 웃고 넘어가지 절대 그 사람과 론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론쟁을 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중성민족”은 있을 수 없다. 이중성성격을 가진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 한 민족의 구성원가운데 나쁜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나쁜 민족”은 없다. 이중성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평가로 해석된다. 한 민족을 “이중성민족”이라 하는 것도 그 민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만약 조성일 선생님이 지구의 어느 구석에 있는 민족을 “이중성민족”이라고 주장했다면 나는 역시 거저 웃고 넘어갈 수도 있다.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생님이 “이중성”이라고 한 민족이 내가 일생을 바쳐 연구하고 그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조선족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 조선족의 위상에 너무나 큰 영향을 주는 일이 있고부터 나는 더 이상 웃고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2009년부터는 나는 나의 주장을 글로 쓰고 강연하게 되였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인가?” , 《도라지》2009년 제3기“중국조선족의 문화공동체”, 《한반도 제3의 기회》(한국,서울)2009.5  “세계금융위기와 조선족”,<금융위기와 조선족 기업경제발전포럼>기조강연,  2009년5월11일,장춘.  “세계금융위기와 조선족의 정체성”, <송화강문화론단>강연, 5월17일, 길림.  “民族、族群与文化”, 연변대학 사회학과 특강강의, 7월 2일, 연길.  “조선족의 력사와 문화”, <흑룡강성 조선족중학骨干教师培训班> 강의, 7월 15일-17일, 할빈.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담론””, 제2회 중국조선민족사학회학술회의(8월 11일, 연길)발표 론문, 《료녕조선문보》2009년 9월 8일 제7면에 필자의 동의 없이 게재.  “중국조선족 문단의 특색과 문학지 현황”, 《에세이21》5주년 기념 한중 세미나에서 발표, 9월 17일, 서울.  “ 중국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 한국국사편찬위원회 초청강연, 9월 18일, 서울.  “중국조선족과 한국”, 제9회 한국 재외동포포럼 강연, 9월 25일, 서울.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재외동포신문》,서울, 2009년10월12일 제185호. 2면.                                                     “중국조선족사회의 형성과 정체성”, 서울교육대학특강, 11월 14일, 서울.“조선족문화란 무엇인가?” , <제1회조선족문화포럼> 기조강연, 11월 21일, 길림.“글로벌코리안 네트워크와 동아시아공동체”, <제3회 재일조선족국제학술심포지엄> 기조강연, 12월 12일, 동경.앞의 글과 강연에서 세상에 “이중성민족”은 있을 수 없고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조성일 선생님께서 최근에  “조선족과 조선족문화 이중성 재론”이라는 글을 어느 인터넷사이트에 올렸다고 한다. 나는 좀 아둔한 편이여서 온라인에 떠있는 방대한 분량의 글들을 읽을 시간도 없고 또 옥석을 가리는 혜안이 없어 아예 사이트를 전혀 방문하지 않는다. 최근에 누군가가 조선생의 글을 복사해서 보내왔기에 읽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성일 선생님께서 또 한번 “二重性”과 “双重”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혼돈하시었다. 아래의 인용문은 조선생님의 글 중에서 소위 “이중성민족”의 근거로 제시한 부분이다.  <중국경내의 소수민족 이중성에 한해서 중국의 민족학 학자 왕아남(王亞南)선생은 “중국은 다민족국가인가 아니면 통일민족국가인가를 개략적으로 론함’이라는 글에서 “통일된 현대 중화민족국가내부에서 사람들은 동시에 쌍중민족신분과 민족의식을 갖고있다. 이는 그야말로 일종 회피할수 없는 력사유류(遺留)의 상황이다”. 라고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필자는 왕선생의 견해에동감을 표한다. 조선족도 쌍중신분 바꿔말하면 이중신분을 가지고있는것이다.> 1) 왕아남이 말한 “쌍중민족신분과 민족의식”은 “이중성민족”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双重民族身份” 이란 말에서 双重은 두 개의 층면이란 뜻이다. 즉 “중화민족” 과 구체적인 어느 민족(예를 들어 “한족”, “몽골족” 등) 이라는 중층적 신분을 말한다. 여기서 “중화민족”과 “몽골족”은 “두 개의 대립되는 성질””이 아니다. 때문에 왕아남은 “双重民族身份” 이라고 했지 “二重性民族身份”이라고 하지 않았다. “쌍중신분”은 우리말로 “중층적 신분”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이중성신분”은 절대 아니다. 참조:双重 — 两层 两方面(多用于抽象事物):~领导|~任务。(《现代汉语词典》 1072页)二重性-- 指事物本身所固有的互相矛盾的两种属性,即一种事物同时具有两种互相对立的性质。(《现代汉语词典》289页)앞에서 언급했지만 세상에 “나쁜 민족”이 없듯이  “이중성민족”도 있을 수 없다. 타민족을 “이중성민족”이라고 하는 학자도 없고, 자기민족을 “이중성민족”이라고 하는 학자도 없다. 조성일 선생님과 같은 분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중성민족”이란 말은 하나의 민족을 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2)그리고 조선생님께서 “개념정리에서의 어폐이며 불찰임을 자인”하면서도 내가 선생님의 글을 “단장취의(斷章取義)”했다고 하는데 내가 글에서 조선생님의 글 한 자연단락 전체를 인용했기 때문에 “단장취의(斷章取義)”가 될 수 없다. 참고로 아래에 “中國 朝鮮族의 文化共同體”라는 글에서 조선생님의 글을 인용한 부분을 제시한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 3)<조선족이 조선반도의 겨레들과 부동한국가에서 생존한지 반세기 남짓할뿐인데 이 사이에 조선족이 조선반도의 족속들과 다른 민족으로 변질했다는 말인가? 조선인과 한국인은 부동한 국가, 부동한 체제하에 살고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래 서로 다른 민족이란 말인가?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상기 조성일 선생님의 “조선족”과 “조선반도의 족속”이 “서로 다른 민족이란 말인가?” 라는 질문에는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민족”은 내이션(nation)이란 개념이고 nation 은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도 “국민+민족”이다.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민족”이다. 여기서 “조선족”은 nation의 개념이고, 따라서 “조선족”과 한국의 “韓족”은 “서로 다른 민족”이다. 그러나 서구의 “민족”과 달리 조상과 혈연을 중시하던 동방에서는 고대로부터 “겨레”라는 뜻의 담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南朝 梁조의 蕭子顯의 《南齊書》에서 사용한 “민족(民族)” 은 중국의 고대민족개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나 여진인과 구별하기위해 “아족류(我族類)”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민족” 혹은 “우리겨레”라는 뜻이 분명하다.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도 에스닉(ethnic)이란 용어가 출현했다. 내이션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역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면, 에스닉은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역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상태를 가리킨다. 중국에서 “族裔”로 번역하고 있는 에스닉(ethnic)을 한국의 문화인류학자들은 “민족”이라고 번역하는 사람과 “종족”이라고 번역하는 사람으로 나눈다. 그리고 중국에서에 “族群”으로 번역하는 에스닉그룹(ethnic group)은 “민족 집단” 혹은 “종족집단”으로 번역된다. 에스닉(ethnic) 개념으로서 조선족은 “조선민족”이다. “조선민족”과 “韓민족”은 하나의 공동체로 된다. 하나의 ethnic--“族裔” 혹은 하나의 ethnic group --“族群”으로 된다. 즉 우리는 “韓민족”과 같은 “겨레”고 같은 “동포”다.4)그 외의 문제들은 더 대답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아래에 인용한 조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조성일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문화대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황교수는 조선족구성원가운데서 “자신이 중국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민족)은 도리어 선족(鲜族), 즉 조선족이다”라는 이른바 어떤 중국의 일부 “지성인”의 망언에 동조하여 “중국 다민족의 대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있다”고 력설하고있는것이다. 이른바 중국의 일부 “지성인”의 망언과 황교수의 력설은 중국 조선족에 대한 바람직하지 않은 견해이다. 우리 조선족을 이른바 중국을  리탈하는 “무엇”으로 몰아부치려 하는지 우려를  떨쳐버릴수가 없다. “문화대혁명”기간에 “8.2, 8.4”의 터무니없는 사건을 조작하여 우리 조선족을 “판국폭란(販國暴亂)”의 “반역자”로 매도한 참안이 문득 필자의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문화대혁명” 당시의 대자보와 같은 글을 평론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론쟁을 할 만큼 한가한 사람도 아니다. 조선족이 민족언어와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다. 말장난보다는 지성인들이 해야 할 사회적, 실천적 노력에 힘을 모으자.   
85    조선족 사회, 새로운 변화 모색해야 할 시점(2) 댓글:  조회:7265  추천:52  2009-11-10
조선족 사회, 새로운 변화 모색해야 할 시점(2)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생존을 위해 민족문화 계승 절실 중국 연해도시와 내륙뿐아니라 한국, 일본, 미국, 남미 진출 등 조선족은 명실공히 글로벌민족이 되고있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민족사회로 생존하려면 부동한 자연환경과 문화환경에 로출돼있는 민족구성원들이 계속 조선족문화를 공유할수 있어야 한다. 민족문화의 문제는 민족교육, 민족문화예술, 언어 등을 포함해서 생각할수 있는데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1996년 1200여개의 조선족학교가 2005년에는 400개로 줄어들었다. 학교가 줄어드는 속도는 조선족출산인구의 감소속도와 거의 맞먹는다. 도시공립학교의 인적자원과 공간을 활용해 민족교육을 발전시키는 방법도 있다. 북경의 중앙민족대학부속초등학교에 120명의 조선족학생을 입학시켜 정규교육과 민족교육을 접목시키는 교육을 시험적으로 펼쳐 훌륭한 효과를 거둔적이 있다. 우리 민족의 신문, 문학지나 문예지를 살려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의 도움이 필요하다. 문학인, 예술인도 전통만 고집 말고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학협동을 통한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 글로벌시대에 이중언어 구사는 큰 장점이다. 현재 2만여명의 한족학생이 한국에서 류학을 하며 한국어를 배우고있는데 반해 조선족젊은이들은 점점 우리 말을 소홀히 하고있는데 시급한 대책이 요구되고있다. 조선족네트워크구축이 필요 중국 대도시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들은 여러 명칭으로 된 단체활동을 하고있다. 대부분이 등록되지 않은 무허가단체지만 어렵게 조선족문화 관련 활동을 펼치고있다. 지역운동회, 설맞이모임, 장학회모임, 동호인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내용도 다양하다. 이런 활동들은 조선족들이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처럼 흩어져있지만 아직도 살아 숨쉬고있다는것을 상징한다. 이제 각 지역 단체들은 현지정부의 민족사업을 협조하는 위치에서 NGO의 합법적지위 확보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더 효과적으로 민족문화를 계승할수 있고 주체성도 이어갈 수 있다. 이제 세계로 흩어진 조선족의 사회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시스템도입이 시급하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력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해왔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뤄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나가는데 힘쓰는 길밖에 없다.  
84    조선족사회, 새로운 변화 모색해야 할 시점(1) 댓글:  조회:7300  추천:65  2009-10-12
조선족사회,새로운 변화 모색해야 할 시점(1)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농촌공동체를 유지하던 조선족은 너도나도 도시로 진출했다. 개혁개방을 맞아 제한된 땅에서 얻는 수확으로 도저히 더 잘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돼서다. 그래서 1980년대부터 수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진출했다. 이후 1990년대 후반에 수많은 조선족들이 ‘코리안드림’의 유혹에 이끌려 한국으로 몰려들었고 불법체류자를 비롯해 입국사기 등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어서 조선족녀성의 한국으로 시집가기 붐도 일어 2000년말 현재, 약 6만명의 녀자가 한국으로 시집갔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조선족공동체를 유지해가야 하는 조선족녀성 3명중 1명이 한국으로 가버린것을 의미한다. 현재 조선족의 출산인구는 급하강선을 타게 되여 10년전에 비해 4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고있다. 조선족의 중국 내륙과 한국으로의 진출은 조선족사회의 부를 일군것은 분명하다. 한국에서 10억딸라 이상이 송금됐으며 휴대해 들어온 돈까지 합치면 20억딸라 이상으로 추산되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부의 창출과 더불어 조선족사회는 많은 귀중한것들을 상실하게 됐다. ‘조선족의 문화령토’로 인정되던 조선족마을의 공동화와 해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선민족학교의 페쇄, 민족총체성의 혼돈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존망과 직결되는 전통적가치관을 잃어가고있다. 급변하는 조선족사회는 지금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령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감소 등 여러가지 위기상황에 직면하고있다. 조선족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중국 돈"을 벌어야 성공한다 중국조선족기업은 아직도 대부분 료식업, 유흥업, 려행사 등 단순서비스업종에 집중되여있다. 그래서 리윤, 마진이 빈약하다. 더우기 같은 지역에서 유사한 비즈니스로 시장을 공유하고 있어서 동족 기업간의 소모적경쟁이 빈발하다. 조선족기업의 또 다른 특징은 중국진출 한국기업과 밀착되여있다는 점이다. 자본, 기술, 상품, 경영노하우, 비즈니스 모델 등 많은 기업들이 자체의 생존공간을 한국인이나 한국기업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자체의 발전공간을 제한하고있다. 조선족은 다른 민족 못지 않게 일찍 시장경제체제에 뛰여들었고 또한 이중, 삼중 언어의 우세도 있지만 중국 500대 기업 서렬에 든 조선족기업이 없고 상장기업도 없다. 다른 소수민족은 있는데 왜 우리는 없는것일가. 그들은 언어의 우세도 없고 우리처럼 해외관계도 없지만 ‘중국 돈’을 버는데 전념했기때문이다. 즉, 중국 현지특성에 맞춰서 중국인을 상대로 하는 사업을 펼쳐야 한다.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중 제조업분야는 점차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하려고 하기에 자신들의 생존공간을 한국관련 기업으로 제한시켜왔던 조선족기업들은 미래의 진로를 고민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중국의 10대 부자중 6명이 부동산업자다. 이들은 땅장사를 하는 ‘대지주’다. IT 등으로 돈을 버는 다른 나라의 부자와는 다른것이 중국의 특색이다. 그러므로 중국특색에 따라 ‘중국 돈’을 벌어야 한다.
83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담론 댓글:  조회:8774  추천:44  2009-08-31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담론             황 유 복/중앙민족대학 교수,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회장   [론문개요]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민해 온 민족 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리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아직 우리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조선족을 보는 시각은 다르다. 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 아니다. 세상에 이중성민족은 없다.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의 한 부분이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핵심어] 조선족, 정체성, 이중성민족, 민족집단 들어가면서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주해 온 이민이나 그들 후예로 구성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다. 조선민족의 중국이주의 역사는  고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왕조시기에 정치, 군사, 경제 및 기타 원인으로 발생된 이민 활동은 1945년 광복당시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17세기이전에 이주한 고대이민들의 후대들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족, 몽고족, 만주족 및 기타 민족에 흡수, 동화되어 그들의 흔적을 역사문헌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조선족"이란 개념은 중국국적을 취득한 이민자 혹은 그들 후대 중에서 중국행정당국의 승인을 거쳐 "조선족"으로 분류된 자를 말한다. 조선이민이나 그의 후대가 아직 중국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거나(조선교민, 한국인 영주권자), 혹은 조선이민의 후대가 이미 다른 민족 집단구성원으로 되었을 때 그들을 조선족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관찰해보면 조선족의 중국이주형태는 17세기 전쟁이민(war migration), 주로 후금의 “정묘호란”과 청의“병자호란”피랍인; 19세기 후반기의 자유이민(free migration); 1910년대의 망명이민(exiled migration); 1920년~1945년의 일제 식민정책에 따른 관리이민(impelled migration)등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현재의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의 17세기 고대 이민의 후대 (하북성 청룡현과 요녕성에 산재해 있는 박씨 후대들)들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150여년을 넘어선다. 그러나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 공동체의 형성은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 개최로부터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까지로 볼 수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의 르네상스시대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사회발전과 인류 진보를 위한 새로운 문화중심의 패러다임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아직 우리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인가?”라는 담론은 민족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러한 담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선 조선족 사회나 문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민족이나 문화에 대한 체계적 리론의 부재도 원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되기까지   중국에서 조선민족을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최초의 문헌은 1928년 7월 9일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문》이다. 그 후에 작성된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문헌자료에서 시종일관하게 중국 조선 민족을 중국소수민족으로 인정하였다. 다만 민족 명칭을 “고려인”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특이하다.    그런데 그 시기 조선민족 이민들이 집중 거주하던 동북지역은 중화민국정부에 귀속되는 동북군벌정권의 유효 행정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 행정부가 조선민족 이민을 중국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사실상 외국거류민 으로 취급되었다. 1945년 항일전쟁승리 후의 몇 년 사이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조선민족 이민들이 자의에 의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갔다. 귀국하는 사람들과 남아있을 사람들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동북국은 그 당시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한국거류민’, ‘조선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민현장에 남아 영주할 결심을 한 조선민족구성원 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여 받았고 지방정권수립에 참여하여 참정권을 갖게 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점차 탈바꿈 하게 되였다.     1950년 12월 6일자 《인민일보》는 “중국동북경내의 조선민족”이라는 논설에서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가 개막되면서 동북경내의 조선인민은 중국경내 소수민족의 자격으로 각 형제 민족들과 만나게 되였다. 그때부터 중화인민 공화국 각 민족 인민가운데 이 새로운 구성부분은 각 형제민족 인민들의 관념 가운데서 교민으로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민들로부터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1949年9月,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开幕,东北境内的朝鲜人民,以中国境内少数民族的资格,和各兄弟民族见了面。从此,中华人民共和国各族人民间这个新的组成部分,才在各兄弟民族人民的观念里,以侨居中国的朝鲜人民中区划出来。)”라고 지적하였다.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조선민족이 조선교민으로부터 중국 소수민족으로 탈바꿈한 시간을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 회의 개최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조선인민”, “조선민족”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어 “조선족”이란 이름은 1951 년에서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는 그 사이에 확정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 내이션(nation)과 에트닉(ethnic)   민족에 대한 리론 가운데 개혁개방 전까지 우리가 경전으로 꼽았던 쓰딸린의 민족에 관한 정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프랑스 철학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독일의 력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의《허구의 민족주의》등 민족에 관한 저서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들이 담론하는 “민족”은 “근대민족” 혹은 “자본주의민족”, 즉 민족을 봉건왕조국가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난 문화적 조형물로 인식하고 있다.    1903년, 량계초(梁啓超)가 독일학자의 민족개념에 관한 글을 번역하면서 서구의 “민족”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다. 내이션(nation)은 겨레, 국민, 국가 등 복합적 개념이 어울려진 용어이다.  여기에서 내이션은 정치적 령토와 관련되는 민족개념이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민족주의”, 내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는 “민족국가” 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은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국민+민족”이다 .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 “조선민족”이다.   서구의 “근대민족”과 달리 조상과 혈연을 중시하던 동방에서는 고대로부터 “겨레”라는 뜻의 담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조 량조의 소자현의 《남제서》사용한 “민족(民族)” 은 중국의 고대민족개념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나 녀진인들과 구별하기위해 “아족류(我族類)”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민족” 혹은 “우리겨레”라는 뜻이 분명하다.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도 에트닉(ethnic)이란 용어가 출현했다. 내이션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면, 에트닉은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중국에서 “族裔”로 번역하고 있는 에트닉(ethnic)은 우리말로 ethnology를 “민족학”으로, ethnicity는 “민족성”이라고 하듯이 역시 “민족”이라 번역한다. 그리고 중국에서에 “族群”으로 번역하는 에트닉그룹(ethnic group)은 민족집단으로 번역한다. 코메리칸과 조선족   나는 1987년~1988년에 미국의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에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담당한 적이 있다. 사회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미국국적을 취득한 한국인들을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komerican-코리아와 아메리칸의 합성어)이라고 호칭한다. 왜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호칭하는데 미국에서는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이라고 하는가?    건국 력사가 200여년밖에 안 되는 미국은 총인구의 1%를 차지하는 인디언원주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세계 각국에서 온 외래 이민이거나 이민의 후예들이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민족이란 계념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이민 왔나 로서 국민들을  분류한다. 1929년에는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국가별로 이민 수자를 할당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아일랜드계미국인, 프랑스계미국인, 중국계미국인 등으로 불리 운다. 한국인들의 미국이민은 1965년 새 이민법이 시행되면서 대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미국국적을 취득한 후 미국의 관례대로 한국계미국인으로 호칭된다.      그러나 중국은 수 천 년 력사를 가진 나라이고 고대로부터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민족학자들의 노력으로 민족 식별작업을 거쳐 56개 민족(nation)으로 국민을 분류하게 되었다. 150여년의 이민 력사를 가진 조선민족도 1945년 이 후 중국에서 토지와 참정권을 부여받으면서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으로 인정되고 한족, 만족 등 민족과 동등한 위치에서 조선족으로 호칭되게 된다.    한국에서 “한국계미국인”이라는 호칭에 반발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조선족”이라는 호칭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사실, “한국계미국인”은 한국에서 이민 온 미국인이라는 뜻에서 “미국인”이라는 국적이 강조되었다면 “조선족”이라는 호칭에서는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라는 뜻에서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   조선민족과 한(韓)민족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리 민족집단(ethnic group)은 령토의 분단, 민족의 분단과 함께 민족 명칭의 분단이라는 아픔도 함께 겪게 된다. 조선반도의 북과 남에서 각각 “조선” 과 “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면서 하나의 민족집단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호칭되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리념대립이 살벌해지면서 민족 명칭의 갈등도 심각해졌다. “한민족”그룹에게 있어서 “조선민족”은 “빨갱이”들의 대명사정도로, 그리고 “조선민족”그룹에게 있어서는 “한민족”은 “반동분자”들의 대명사나 다름없이 여겨져 왔다.  1985년 내가  쯔꾸바대학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을 때 일본에서는 조총련과 한국민단이 대립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어느 방송사가 우리말 강좌를 개설하면서 강좌이름을 한국어강좌라 하면 조총련에서 반발하고 조선어강좌라 하면 민단에서 반발하기 때문에 나중에 “안녕하십니까” 강좌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983년에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소개하는 글을《China Reconstructs》1983,No,3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을 한국의 《동아일보》가 번역해서 게재할 때 제목을 “<中共속의 코리아> 延邊自治州” 라고 했고 글 가운데 나오는 “중국”은 “중공”으로, 조선족은 “韓人”이라고 번역했다. 신문을 보고 나는 너무나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1984년 겨울,  내가 코네티컷대학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을 때 뉴욕에서 발간되는 한 한글신문의 글 부탁을 받고 나는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고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전제로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래”라는 론문을 발표했다. 동서방의 리념대립이 아직도 살벌했던 그 당시 서방진영의 심장에다 “조선족”이라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거부감을 주는 이름을 심어놓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미국과  일본의 신문, 학술지에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 “中國の朝鮮族 その素顔” 등 여러 편의 론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기간 나는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서울대학교 등 10개 대학 의 초청강의를 담당하면서도 “조선족” 홍보를 계속했다.   오늘까지도 인터넷사이트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놓고 한국네티즌들과 조선족네티즌사이에 쟁론을 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랭전시대의 유물이 쉽게 해소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조국과 고국사이          같은 한자 어휘가 한어와 조선어에서 완전히 다른 뜻을 나타낼 때가 가끔 있다. “조국”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어에서는 “자기의 나라(《현대한어사전》)”, 즉 자기에게 공민권을 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한국에서는 “(1)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2)민족의 일부 또는 국토의 일부가 떨어져 딴 나라에 합쳤을 때 그 본디의 나라(《국어사전》)”라고 정의 했다. 쉽게 말해 중국은 내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이라 하고 한국은 조상이 살던 나라를 조국이라 한다. 중국의 정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한국사전의 해석에 준하면 조선족의 조국은 한국이나 조선이어야 한다. 두 나라의 “조국”이라는 명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감정상의 껄끄러움을 불러오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민해 온 민족 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중한수교를 전후하여 한국에서는 중국 조선족을 “재중한인”으로 호칭하다가 지금은 “재중교포”, “재중동포” 혹은 “조선족동포” 라고 부른다. “재중한인”이란 호칭은 내이션(nation)의 개념을 적용한 용어이므로 한국이나 조선 국적을 포기한 조선족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교포”는 거주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경우를 지칭해야함으로 역시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겨레라는 뜻이 강조되는 에트닉(ethnic) 개념으로 풀이되는 “동포”는 적당한 호칭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한민족동포(ethnic)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과거 어려운 시절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민해 왔고 중국의 혁명과 개발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국민의 자격을 취득한 일개의 소수민족(nation)이다.    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분명히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갈래이지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10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국가의 령도 층 에도, 군의 장성에도, 학계의 최고 위치에도)진입한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    중한수교이후 한국 사람들과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중축구경기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의 저변에는  “한국과 중국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관심이 깔려있다. 사실상 조선족은 60여 년 전에 이미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나는 하버드대학연구보고서(1988)에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라고 지적했다.    이중성 민족은 없다    조국과 고국의 시각 사이에 끼어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적지 않은  학자들이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아래에서 인용하게 되는 글은 어느 개인을 념두에 둔 것이 아니고 “이중성 민족론”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인용상의 편의를 위한 것임을 집고 넘어가겠다.  “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바꿔말하면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며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며 조선반도의 국민과 동일선상에 있는 조선민족이다. 따라서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있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학술적으로 토론의 대상으로 조차 상정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술관점의 문제가 아닌 개념정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중성이란 말의 개념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선어나 한어에서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에 겹쳐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국어사전》),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 즉 하나의 사물에 구비된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성질”(“指事物本身所固有的互相矛盾的两种属性,即一种事物同时具有两种互相对立的性质。"《现代汉语词典》)을 말한다.    례를 들어 갑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느 중학교의 교사이고 그에게는 을남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을남이의 아버지이고 동시에 중학교사이기 때문에 갑돌이에게 이중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갑돌이가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두었다면 이중혼인이 불법으로 인정되는 중국에서 갑돌이는 합법과 불법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의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의 이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개 나라의 국적을 소유했다면 그는 이중국적자이다. 만약 조선족의 절대다수가 중국과 한국(조선)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했다면 조선족은 이중국적민족으로 이중성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중국적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조선족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조선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라면 민족의 혈연적(ethnic--“族裔”)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현제의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국적과 민족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하나로 묶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라 할 수는 없다.  어느 교수는 나에게 “조선족은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族群)에 속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기 때문에 이중성민족이 아니냐?”라고 물어왔다.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가 존재하느냐라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만약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 와 “중국 조선족”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개념이 아닌 하나의 “조선민족(族群)” 속의 전체와 일부분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중국에는 조선족 이외에도  같은 민족집단(ethnic group--“族群”)이 중국국경선 밖에 독립된 단일민족국가를 갖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로씨아족, 몽골족, 까자흐족, 따지크족, 우즈베크족, 따따르족 등 7개 민족이 있다. 그리고 55개 소수민족 중에서 절반이 넘는 33개 민족이 소위 과계민족(跨界民族)이다. 그 어느 민족도 자기민족이 이중성 민족이라 하지 않는다. 이중성민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민족?    허구의 “이중성민족론”이 조선족위상에 주고 있는 부정적 영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수준에까지 미치고 있다. 2002년 8월23일,《인민일보》사이트에 소하(肖河)가 쓴 “56개 민족은 한 가족, 중국은 이 모든 민족의 나라(五十六个民族是一家,中国属于所有这些民族)”라는 글이 실렸다. 저자는 민족과 종교 사업에 종사하다가 은퇴한 자기아버지의 말을 빌려 “장족과 위구르족은 서장독립, 신강독립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해외세력의 활동일 뿐이고 국내의 장족과 위구르족은 자신들이 중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离心离德) 민족은 도리어 선족(鮮族), 즉 조선족이다. … 가난을 혐오하고 부(富)를 추구하면서 자기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중국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들(조선족)은 중국과 정체성을 달리 한다”라고 했다. 그의 글을 읽는 순간 나의 느낌은 우선 자제되지 않는 분노 그 자체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하(肖河)는 일반 네티즌이 아닌 북경대학교수였다. 그런데 중국의 민족정책에 관한 어느 좌담회에서 내가 소하의 조선족에 대한 비틀어진 인식을 비판하자 옆에 있던 한 한족출신의 교수가 조심스럽게 “지금은 조선족학자들이 자신들은 이중성민족이라고 주장하지 않느냐? 조선족학자들만 사용하고 있는 그 말의 뜻은 자신들이 중국사람인 동시에 한국(조선)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해왔다. 그때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우리민족 선대들이 귀중한 목숨과 피땀으로 쌓아온 조선족의 이미지가 계속 무너져내려가고 있다. 56개 민족 중에서 인구비례로 혁명렬사가 가장 많은 민족, 교육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문화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등등  화려했던 월계관은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고 중국 다민족의 대 가정에서 조선족은 이제 “진짜 중국과 한마음 한뜻이 아닌” 믿지 못할 민족으로 전락되고 있다.   조선족에 대한 불신의 풍조가 만연되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중국의 주류사회에 진입해야할 조선족 젊은이들이다. 총명, 근면, 지식 등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자질이 구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불신 때문에 그들의 길이 막혀진다면 그것은 우리세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주류민족이나 기타 형제민족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면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선대들이 귀중한 생명까지 바쳐 우리세대가 중국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었듯이 우리는 우리 후대들의 주류사회진출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제발 허구의 “이중성민족론”으로 그들의 앞길에 걸림돌을 설치하지는 말자.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국제법 학자로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한국계미국인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인 국무부 차관보를 지냈던 예일대학 법과대학원 학장 헤럴드 고(고홍주)는 “한국계미국인으로서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라는 한국 《중앙일보》기자의 질문에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시점에 나는 100%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몇 % 한국인이고 몇 % 미국인인가 고민하다가 ‘100% 한국계미국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더니 쉬워지더군요.”라고 대답했다.  1987~88년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계미국인사회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하기위해 사회조사를 할 때 대부분 코메리칸지식인들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미국국적을 딴 후 한국 사람들로부터 “축구경기응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자기 자신들과 후대들의 미국주류사회 진입을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문화와 차별되는 미국 코메리칸문화의 창출해야 한다고 인식을 같이 했다.    미국의 코메리칸사회의 미국이민 력사는 1903년 7천226명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이민한 사건을 제외하면 불과 4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300년 이전에 이민해온 “박가촌”사람들을 제외하더라도 중국조선족사회의 이민력사는 150년이나 된다. 오랜 력사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조선족문화도 창출해냈다. 우리는 조선족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해야할 리유가 없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 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에 소속되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헤럴드 고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라고 떳떳하게 말하면 된다.    1992년 중국과 한국간의 수교가 단행되면서 조선족과 한국간의 내왕이 잦아지게 된다. 많은 한국인들이 고국을 찾아온 조선족동포들을 따뜻한 겨레(ethnic)의 정으로 맞아주었고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조선족들도 한국경제인들의 중국진출을 도와 나섰다. 2006년, 한국보다 10년 먼저 중국과 수교를 실시한 일본은 대중경제교류에서 256억 달러의 적자를 보았지만 한국은 도리어 254억 달러의 흑자를 얻었다. 조선족과 한국인과의  협력관계는 2003년부터 중국이 한국의 최대수출대상국이 되고, 2008년 말 한국의 대중국수출액이 820억 달러로 상승되는 일이 가능케 했다.   우리자신과 후대들이 중국 주류사회진입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중국에서 계속 타민족의 칭찬을 받는 민족으로 거듭날 때 조선족은 축구경기 때 한국 팀을 응원하는 정도가 아닌, 조국과 고국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를 포함한 전 방위적인 교류를 위해 더 많고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1 Huang, you-fu 1992, "The History Migration of Koreans Into China", Studies of Koreans Abroad 3: Seoul .2 黄有福 2002, “中国共产党在各个历史时期的民族政策与朝鲜族”, ⟪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재조명⟫, pp85-86, 심양 : 료녕민족출판사 .3 《中國共産黨第6次全國代表大會, 關於民族問題的決議案》(1928.7.9),《民族問題文獻彙編》,中央黨校出版社,1991年참조,p.87。4 1948년 판 《조선연감》에서  1945년 8월 이전 동북거주 조선인을 210만 명으로 집계하였는데 1953년 중국의 인구통계 자료에 따르면 조선족 인구수는 112만 명으로 나타났다. 1945년에서1953년까지의 자연 인구증가 숫자를 감안한다면 광복 후 귀국한 사람들을 100만 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5 中共中央東北局, <關於東北時局的具体主張>,《民族問題文獻彙編》,中央黨校出版社,1991年참조,p.751。6 《人民日报》, 1950,12, 6。7 《中國大百科全書》,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1986年, 民族券 참조.8 《南齊書》, 권54.9 에트닉(ethnic)을 이광규는 “민족”이라고(《세계의 한민족》,통일원,1996년,P.23) 했고, 한건수는 “종족”이라고(《처음 만나는 문화인류학》,일조각,2003년,P.122) 했다.10 Huang, you-fu,1983, "Home of Koreans in China",《China Reconstructs》1983,No,3. 11 《동아일보》, “<中共속의 코리아> 延邊自治州” 1984년 3월 26일.12황유복, 1985,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래”,《세계신보》, 1985, 1, 1.13 Huang, you-fu 1988,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The World Platform 10: New York .14 黄有福,1985,"中國の朝鮮族 とその素顔”,《統一日報》, 東京. 1985,9,10~20.15  Huang, you-fu 1988,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The World Platform 10: New York .16 조성일, “《중국조선족문학사》편찬의 시말”, 《문화시대》2009년 제1기.17 조성일, “조선족문화  론강”,《문학과 예술》,2006년 제2기.18肖河 ,2002, “五十六个民族是一家,中国属于所有这些民族”,<人民網>, 2002, 8, 23.19 “我父亲以前从事民族宗教工作看来也挺合适,他的工作也帮助我确立了正确的民族观,有意思的是他说中国各少数民族中,藏族和维族虽然有所谓的藏独,疆独问题,但那只是有海外势力的活动,国内的藏族和维族还是认为自己是中国人。真正和中国离心离德的倒是鲜族,也就是朝鲜族。他们或忠于金氏父子,或嫌贫爱富自认为是韩国人,很少有人认为自己是中国人。从这里也可以看出内外有别。汉,满,蒙,藏,回(包括维族等)及其他少数民族都是我们中国自家人,各民族有自己的语言文化风俗,这些语言文化组成了我们整个中国的语言文化风俗。可是朝鲜人是真正的外来人,他们的风俗文化可能比藏蒙的风俗文化更接近汉人,但是他们却不认同中国。” 20 《중앙일보》,월요인터뷰, 2006.7.31.21) 조선족의 중국 이주의 시원에 대한 연구도 5가지의 설이 난립되어 있다. 황유복: <중국조선족 이민사의 연구>. 《중국 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연구》, 민족출판사, 1996년, p14참조.
82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중국 조선족(황유복) 댓글:  조회:8675  추천:82  2008-10-10
제1회 조선족발전포럼-"연변의 의미와 가치 좌담회" 발표문연변조선족자치주와 중국 조선족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경제사회발전고문   1   나는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에서 태생하였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경상북도이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나는 경북억양이 풍기는 우리말을 한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나는 연변이란 이름을 모르고 커왔다. 길림시조선족중학에 진학하면서 연변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거의 절반 정도의 선생님들이 연변대학졸업생들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생님들도 “연변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연변” 은 나에게 있어서 막연하고 신비스러운 곳이었다.  길림시조선족중학을 졸업하고 나는 북경에 있는 중앙민족대학 역사학부에서 민족사를 전공하게 되었다. 그때 배운 학과목가운데 <중국 소수민족지>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연변에 관한 지식을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한 소개에서 습득하게 되었다. 강의를 담당하신 강사님은 한족출신이었지만 연변에 가서 사회조사를 하신분이였기 때문에 연변의 자연, 지리 상황은 물론 조선족들의 사회생활, 가정생활과 풍속습관,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었다. 강사님이 “연변조선족들은 문화수준이 높고 깨끗하고 위생적이며 노래와 춤에 능해 예술적인 민족”이라고 조선족을 칭찬할 때 막연하지만 나의 가슴은 긍지로 부풀어났다. 60명이 정원인 반에서 나는 “유일한 조선족”이었기 때문에 한족동학들은 나를 “연변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가짜이긴 하지만 나는 “연변사람”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조교로 선택되어 대학에 취직되었다. 문화대혁명와중에 “공, 농, 병 대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한 1971년에 평생 처음 연변에 출장으로 잠간 다녀오고 그 이듬해 1월에 대학에 조선어문학전공을 설치하기 위하여 나는 연변대학에 가서 6개월간 연수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연변에서 1주일이상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했다. 그때 난생처음으로 조선족아줌마들이 물건을 팔고 있는 재래시장과 조선족음식점을 구경할 수 있었고 자치주 주장의 가정에서부터 시골 농민의 집에까지 손님으로 초대되어 “연변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체험을 통해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들어오던 “연변사람”들에 대한 풍문들이 허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중국조선족은 어디에서 살던지 한겨레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연변에서 북경으로 돌아와서 나는 “연변처녀와는 결혼하지 말라”는 경상도마을의 금기를 깨고 연변태생인 지금의 아내와 연애과정을 거쳐 결혼하게 되었다.    “10년 동란”으로 정의된 “문혁”이 막을 내리고 개혁개방의 시대를 맞이하여 나는 당시 중국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영문지로부터 중국조선족문화를 소개하는 논문을 부탁받았다. 나는 논문제목을 "Home Koreans in China" 라고 정했다. 물론 내 마음의 고향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대한 글이었다. 그  논문은 지 1983년 제3기에 발표되었고 몇 달 후부터는 독일, 영국, 미국 학자들의 편지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동아일보>가 1984년 3월에 “중국속의 코리아 연변자치주” 라는 제목으로 나의 논문을 번역해 게재하였다.   그 논문과 1981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Home on the Range”등 논문 때문에 나는 밀폐되어 있다가 금방 개방하기 시작한 중국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던 서방학자들로부터 북방민족연구학자로 인식되어 1983년 말부터 미국, 일본, 캐나다, 소련, 한국, 몽골 등 나라 대학에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가게 되었다. 1972년 비연변태생인 내가 연변에서 체험하고 확인했던 조선족정체성이 나를 국제학술무대에 서게끔 뒷받침해주었다.  2         개혁개방 30주년을 맞이하는 중국은 30년 전에 비해 GDP 67배의 성장을 이룩하여 GDP기준으로 세계 제3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단순한  경상지수의 대폭상승만이 아닌 일련의 광범하고 심각한 변혁이다. 농촌으로부터 도시에 이르기까지, 경제영역에서 정치영역에 이르기까지 경제가 고속 장성한 동시에 중국의 경제구조, 사회구조, 제도구조도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30년의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은 고도로 집중된 계획경제체제로부터 활력이 넘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전변, 폐쇄 반 폐쇄상태로부터 전방위로 세계경제에 융합하는 위대한 전변을 성공적으로 실현하였다. 개혁개방 30년은 중국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운명, 생활방식과 사회적 관념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족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의 거대한 변화에는 우리민족의 기여도 포함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 중국조선족사회에는 30년 간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중국 조선족사회는 미증유의 충격을 받으면서 80년대에 이루어진 농민들의 도시진출을 경험하게 된다.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그들은 상품경제 시대에서는 제한된 땅에서 얻는 수확으로 도저히 더 잘살 수 있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본금이 충족하지 않은 그들은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집중되지 못하고 보다 넓은 지역으로 분산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조선족 사회는 새로운 기회를 접하게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던 마을들을 떠나 부(富)를 찾아 나섰고 한국 경제인들의 중국진출 붐에 따라 조선족들은 북경, 천진, 심양, 대련, 청도, 상해, 광주 등 연해개발지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90년대의 또 다른 추세는 한국 노무의 붐이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코리안 드림"의 유혹에 끌러 한국으로 몰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법체류 외국인 노무자가 사회문제로 비화되자 조선족들의 한국입국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고 그들 노무 희망자들은 미화 6천 달러에서 1만 달러 정도의 수수료를 노무 중개업자들에게 지불하면서 "기회의 나라"에 입국하기 위해 온 가족의 생계와 심지어 그들의 사활을 내 건 "도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가 빈발하면서 90년대 후반기에 한국과 조선족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노무사기 사건들이 속출했다."코리안 드림"으로 시작된 조선족 사회의 한국노무 붐이 여성들의 한국으로 시집가기 붐으로 이어지면서 2000년 말 현재, 약 6만 명의 조선족 여자들이 한국으로 시집갔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 낳아 조선족 공동체를 유지해 가야 하는 조선족 여성 3명 중 1명이 한국으로 가 버렸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중국조선족 출산인구는 급 하강선을 타게 되어 1999년 말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신생아 출산 수는 1989년의 1/4밖에 안 되는 3,800명이였다.조선족 사회가 전통적인 농업경제를 탈피하고 도시경제에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우선 일인당 평균 경제수입의 증가를 실현할 수 있었다. 조선족 전체의 경제수입 실태를 추출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러나 개별지역 통계에서 우리는 그 전반을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면 2006년, 연변자치주에서 외국에 노무나간 사람들이 연변에 부쳐온 돈은 10억 달러에 육박했고  휴대해 들여온 돈까지 합치면 20억으로 추산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수입의 증가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족사회는 많은 귀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다. "조선족의 문화영토"로 인정되던 조선족 마을의 공동화(空洞化)와 해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선민족학교의 폐쇄,  민족 정체성의 혼돈, 그리고 민족공동체의 존망과 직결되어 있는 전통적 가치관을 잃어가고 있다. 급변하는 중국조선족 사회는 지금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사회는 발전과 해체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3   사실상 개혁개방이래 중국 조선족은 전통적인 거주지역인 동북 3성을 떠나 중국의 연해지역 대도시로 대거 진출하게 된다. 현재 중국 조선족의 거주판도는 동북 3성 대도시에 40여만 명, 현, 시 이하 농촌에 45여만 명 그리고 산해관 이남지역에 60만 여명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조선족의 해외진출도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국법무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5년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인구수가 23만 여명이었는데 2007년 초부터 방문취업제를 실시함에 따라 지금은 한국진출 조선족인구가 35만을 넘어서고 있다. 그 외에도 일본에 8만 여명, 러시아에 5만 여명이 진출해 있으며 미국과 유럽, 동남아시아, 중동, 호주, 남미 등 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까지 합치면 5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해부터 나는 길림성 서란현 조선족사회에 대한 사회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서란시 조선족의 상황과 발전>(<舒兰市朝鲜族现状与发展>,中国社会科学出版社,2008年9月,北京)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다. 서란시 각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10년 안으로 분산주거지역 조선족마을은 심양시 만융촌과 같은 대도시부근의 집중촌외에는 모두 소실될 것이라는 판단이 나온다. 그렇게 된다면 분산주거지역에서 국내 대도시나 국외로 진출한 조선족들은 고향이 없는 “나그네”로 될 수밖에 없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변사람”들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나그네”들의 고향으로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연변은 명실공이 모든 중국조선족의 고향으로 되어야 한다.      흩어져버린 조선족사회가 하나의 민족사회로 생존하려고 한다면 부동한 자연환경과 문화 환경에 노출되어있는 민족구성원들이 계속 조선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해가야 한다. 분산된 조선족사회를 유지하는 대안으로 일부학자들이 ⟪이산(离散) 유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Diaspora)⟫민족론을 제시하고 있다. 혈통과 언어가 바뀌어도 디아스포라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 데는 끈질기게 작용해온 유대교가 디아스포라들의 민족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의 기반으로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강한 결집력을 가진 민족종교가 없는 조선족사회에 디아스포라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디아스포라보다는 이민자들이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에 가깝다. 중국국적을 취득했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진입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이론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여러 가지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지속적으로 흩어진 조선족들이 공유할 수 있는 조선족문화를 창출해야한다. 그러한 문화는 흩어진 조선족들이 계속 하나의 민족으로 될 수 있는 민족정체성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민족 문화사업종사자들은 조선족사회가 오늘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키워드로 될 수 있다.     현제 조선족들이 흩어져 사는 중국의 대도시들에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된 조선족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동북지역 도시들에는 ⟪심양시조선족련의회⟫와 같이 현지정부의 민정국에 등록된 법인단체도 있지만 관내지역의 절대다수 단체들은 무허가상태에서 어렵게 조선족문화관련 활동들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운동회, 설맞이 모임, 노래자랑모임, 장학회 모임, 동호인 모임, 경로행사 등 활동내용도 다양하다. 이러한 기성세대가 주도하는 문화 활동들은, 조선족들이 바다에 뿌려진 모래알같이 흩어져 있지만, 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사는 지역사회의 친목활동이라는 의의를 훨씬 뛰어 넘는다.       이제 각 지역 조선족단체들은 현지 정부의 민족사업을 협조하는 위치에서 NGO의 합법적 지위확보에 힘을 기울려야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더 효과적으로 민족문화의 계승과 창출을 통한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언어교육과 민족문화교육을 실시해야한다. 전통과  현대화,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민족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옛 전통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사물을 접수하려 노력해야하고  젊은 사람들은 현대에만 집착하지 말고 민족문화전통을 이어가야 한다. 문화전통과 세계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이러한 대도시 조선족단체들을 위한 항공모함이 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조선족문화 활동에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어야하고 그들이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어야 한다. 연변의 연출단체들은 그들을 위한 순회공연을 당연한 책임으로 생각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정체성을 확보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 성장과정에서 어머니의 정신과 정서를 마음의 보금자리로 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 보금자리를 심리적 구심점으로 만들어 간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조선족구성원 모두의 어머니 품이고 심리적 구심점이다.                                   2008년 10월 4일 북경에서  
81    “혐한” “반한”정서의 “허”와 “실” 댓글:  조회:7461  추천:78  2008-09-25
“혐한”“반한”정서의 “허”와 “실”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2008년 8월 25일부터 26일까지 중국 국가주석 호금도는 북경올림픽이 금방 페막한뒤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중한 양국의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가일층 추동했다. 두나라 정상의 상호 방문은 양국의 정치, 경제, 인문 등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했으며 특히는 양국 청소년들의 교육, 문화 교류를 확대했다. 중한친선협력관계의 깊은 발전은 양국 인민들에게 혜택을 갖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촉진했으며 선린친선, 공동발전의 윈-윈 국면을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중국인의 "혐한정서"와 "반한정서"는 최근 한국언론의 열점화제로 떠오르고있다. 북경올림픽기간 한국 부분적 언론들은 전문 일부 부정적인 면들만 골라가며 꼬집어 보도하는데 열을 올렸다. 여자 양궁 개인종목 결승전을 두고 한국연합통신 등 언론은 중국관중들이 의식적으로 한국선수를 교란했다고 보도했다. 한국언론들은 또 한국팀과 일본팀의 야구경기에서 중국관중들이 일본팀을 "응원"했다고 다루어 보도했다. 한국언론들은 상기 몇가지 사건을 한줄에 꿰여 집중보도하면서 중국인의 "혐한정서"와 "반한정서"에 대해 근심걱정했으며 지어 일부 한국인들은 "13억이나 되는 중국인 모두가 한국을 싫어하지 않을가"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그토록 심각하지는 않다 한국의 《중앙일보》는 9월 1일에 한중 인민간의 감정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으며 그 추세가 악화된 한일 양국 인민간의 감정과 못지 않다고 보도했다. 보도는 이어 "반한정서와 혐한정서"가 인터넷을 통해 중국에서 신속히 확산되고있다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중국 거주 한국인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중국 국내의 반한정서가 지금 10대와 20대 젊은 층과 인터넷 공간을 넘어 점차 전반 중국사회에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한정서를 제때에 치유하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있다." 조사에서 한국의 응답자들은 양국 민간교류를 확대하여 양국 국민들로 하여금 상대방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함과 아울러 인터넷 등 매체의 사실에 대한 외곡보도에 신속히 대응해야한다고 대답했으며 민간교류에서 청소년 교류와 학술계 교류에 중시를 돌리고 양국 언론간의 상호 이해와 교류에도 중시를 돌려야한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중국의 "반한정서"를 해소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우리는 "혐한정서", "반한정서"라는 개념부터가 과장된 것이라고 여긴다. 문제가 한국언론들이 보도한것 처럼 심각하지는 않다. 양국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분야의 교류와 협력이 늘어나면서 모순도 그만큼 많아지게 되기 마련이며 양국의 상호 교제에서 상대방 국가를 싫어하는 정서가 존재하는것은 정상적인 현상으로서 한국 국내에 일부 반중정서가 존재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가장 중요한것은 이런 정서가 주류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반한정서" 또는 "반중국정서"는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으며 "혐한정서"와 "반한정서"는 사실보다 과장된것이다. 중한 민간교류서 확실히 일부 문제 출현 하지만 우리는 중한간의 민간 래왕에 확실히 일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2002년 월드컵에서 중국관중과 한국관중간의 분쟁2005년 강릉 단오축제의 세계무형문화유산 등록2006년 고구려 역사 문제2007년 장춘동계아시안게임서 한국선수 "백두산은 한국 땅"이라는 패쪽 시위2008년 서울서 베이징올림픽성화봉송           사천지진 발생후 한국 개별적 네티즌들의 표현           SBS방송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장면 앞당겨 방송 등 《한국일보》는 8월 21일자 "중국의 '반한기류' 비난만 할게 아니다"라는 사설에서 "라싸사건"에서 성화봉송,북경의 대기오염에 이르는 온갖 논란과 시비에서 한국언론은 그 어느 나라보다 중국에 비우호적이였다고 지적했다. 사설은 중국인의 옹졸함을 탓하기 전에 우리의 분별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면서 우리는 응당 이런 태도가 가까운 이웃의 마음을 상하지 않았겠는가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고 썼다. 중한 양국의 부분적 사람들이 상대방을 싫어하는것은 두렵지 않다. 그것은 접촉이 이전보다 많아졌기에 모순도 이전보다 많아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양국간의 교류가 날로 빈번해짐에 따라 양국 인민간의 상호 이해도 날로 강화되리라 믿는다. 양국의 식견있는 인사들은 양국관계의 큰 국면에 착안하여 각자의 역할을 적극 발휘해 대중을 인도하여 서로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게 해야한다. 중한 민간에 문제가 존재하는 원인  1.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    1) 동쪽 오랑캐(东夷)—한자(汉字), 공자    2) 티베이트 역사문제    3) 고구려 역사문제2. 언론의 무책임--장춘동계아시안게임서 한국선수들의"백두산은 우리의 땅" 패쪽 시위    SBS방송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앞당겨 방송 등3. 네티즌들의 자질 수준4. 홍보가 무기력   강릉단오절의 세계비물질문화유산 등록 등    중한 양국간의 건전한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구축하고 양국 국민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학술계에서 중한 양국간의 우호협력관계 개선을 위한 대안을 공동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80    네트워크와 새문화창조가 조선족의 살길 댓글:  조회:6682  추천:95  2008-07-08
네트워크와 새문화창조가 조선족의 살길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 "현 정책 지속되면 조선족을 동포로 지켜낼 수 없을 것"-조선족 없어질 위기에 놓인 상황...보다 현실적 논의 필요"       중국 조선족은 한국정부의 재외동포정책과 상당한 관계가 있으며, 한국에서 재외동포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기 때문으로 결과적으로 조선족이 피해를 봤다고 생각한다.이에 본인은 한국의‘재외동포’의미는 사전적 해석보다는 정치적인 개념으로 보고, 나름대로 3가지로 나눠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재외국민’은 자신이 국적을 갖고 있는 나라 이외 국가에 거주하는 한국사람이고, ‘재외교포’는 자신이 국적을 갖고 있는 나라 이외 국가에서 영주권을 취득해 거주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재외동포’는 자신이 국적을 갖고 있는 나라 이외 국가에 이민해 원국적을 포기하고 거주국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한국정부가 재외동포로 명칭을 통일한 것이 진정한 재외동포의 지원 보다는 재외국민이나 재외교포에게 지원을 더 하려는 것으로 의도로 보인다. 이는 실제 중국지역에 있는 동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선족은 모두 '재외동포'이고, 이들에 대한 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과거 김대중 정부 당시 10여 곳에서 한글(민족)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고, 정부 측 소개로 당시 교육부 장관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더니 "우리가 운영하는 한글학교에 지원해 주고싶으나 교육부에는 재외국민 교육 관련 예산만 있고, 조선족은 재외동포에 해당하니 재외동포재단에서 도와줘야 한다고 해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당시 김봉규 재단 이사장은 “교육부 예산이 100억 정도라면 재단예산은 10억이 있지만 미국, 일본 등지를 지원하다보니 중국에 지원할 예산이 없다”고 말했다.우리는 모국 정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선족들의 교육문화를 지속하는데 자체 힘으로 해왔고, 이광규 전 이사장이 있을 때 3천 달러 상당의 지원을 한차례 받은 적 있을 뿐이다.결국 한국정부는 정책적으로 한국사회를 잘 아는 재외국민이나 교포들을 위해서 돈(예산)을 사용할 뿐이고, 우리는 중국에 태어나서 이곳에서만 지내 이런 상관관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산을 받기가 어려워, 앞으로도 같은 정책이 지속된다면 한국정부가 조선족인 중국계 동포들을 동포로 지켜낼 수 없다고 본다.일부 한국언론은 중국동포 중 광복 이전에 건너간 동포인 ‘조선족’명칭을 쓰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에서는 시민권을 획득한 재미동포를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미국은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이냐?”에 따라 이민 온 사람들을 호칭하지만, 중국의 경우에는‘민족’으로 분류하면 된다.현재 중국에는 대부분 중국 국적을 취득한 193만 명의 조선족이 있으며, 또 2006년부터는 영주권제도를 시행해 약간의 영주권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70만명의 한국인과 한국인 중 약간의 불법체류자 등 총 300여만 명이 중국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그렇다면 왜 조선족인가? 중국에서는 1903년 양계초가 독일학자의 개념을 번역하면서‘민족’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중국에서‘민족’은 한족, 몽고족 등을 뜻하게 됐으며, ‘조선족’은‘중국국민+조선민족’이 합쳐진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최근 조선족들의 거주지역이 변화하고 있다. 82년 이전에는 지린성에 110만명, 헤이룽장성 60만명, 랴오닝성 20만 명 정도로 일부지역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중국 내에서도 다양한 지역으로 분포가 확산됐다. 동북3성에 35만명, 하얼빈, 창춘, 선양, 다롄 등 쑹화강지역에 40만 명, 경진지역 15만 명, 황허하류지역 20만 명으로 흩어졌으며, 한국에 35만명, 일본 8만 명, 미국 5만명, 러시아 10만 명 등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이같이 분산된 조선족 사회를 유지하는 방안으로는 일부학자들이‘이산유대인’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디아스포라’ 민족론을 제시하고 있지만, 강한 결집력을 가진 민족종교가 없는 조선족 사회에는 걸맞지 않아 ‘트랜스네셔널(Transnational)’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조선족들이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을 가졌으며, 대상이 되는 조선족은 오랫동안 중국에 거주해 중국국적을 취득했고 상당부분 주류사회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당히 진행된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 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조선족이 없어질 위기에 놓인 현 상황에서는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2006년 이후 문닫는 조선족민족학교가 많아져 상당수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학교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민족문화 지속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중국조선민족사학회’라는 NGO학회를 구성했다. 중국은 NGO설립이 어렵기 때문에 학술적인 이름을 넣어서 인가를 받아냈으며, 조선족문학인, 미술인들, 기업인들이 가입하도록 했다.이중 1억 이상 재산을 가지고 있는 20명이 모여 조선족 학생들을 위한 11개 민족학교 분교를 만들었고 올해에는 5개 분교가 설립됐다. 앞으로는 50개 학교설립을 목표로 민족교육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재외동포재단(한국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힘들지만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또한 세계로 흩어진 조선족의 사회와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엘리트 경제인들과 학자들이 주축이 된 ‘글로벌코리안네트워크’가 구축돼 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이 12회까지 진행됐다. 이를 통해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활용에 관한 사안들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꾸준히 갖고 있다.이처럼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글로벌 코리언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뤄가는 동시에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 가는 길밖에 없다.*본문은 6월 30일 <재외동포신문> 창간 5주년을 기념해 재외동포신문과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가 공동 주최한 ‘새 정부 정책수립을 위한 '2008 재외동포정책 세미나’에서 행한 기조연설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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