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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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댓글:  조회:4979  추천:28  2011-10-02
      “추억의 길목” 응모작품                                  우리의 청춘은 저 산너머에                                                                                                                                                                                                  글 / 강 순 화        젊어서는 희망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더니 늙었다 하기엔 아직 이른것 같은데도 젊은시절의 추억만 떠올리면 어쩐지 가슴부터 울렁거린다. 6-70년대의 중학생이였다면 거의다 겪어 온 일이겠지만 새파란 청춘을 고스란히 바쳐온 그 광활한 대지에 사랑과 련민이 남아서일가? 아니면 그 시절에 얼키고 설키였던 아픔과 방황, 정열과 랑만 때문일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바래지고 잊혀진 그 흑백의 인생드라마들이 갑자기 오색찬연한 칼라로 바뀌여 주마등마냥 눈앞을 스친다.     무지개 같은 희망에만 부풀어있던 19살 중학생이《지식청년》이란 신식 모자를 쓰고 일곱 년륜의 춘하추동을 저 산너머에서《재교육》을 받아왔다. 소를 몰고 두엄을 끄고 모를 심고 기움을 매던 그 고달픈 기억들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더우기 그 향촌학교의 교직생활, 시골애들과 뛰놀며 글을 가르치고 노래를 배워주던 그 젊음의 추억들은 참으로 잊을수 없는 청춘의 멜로디였다.                                                      재교육을 받으러 농촌으로           1968년 가을,《인민일보》첫면에《지식청년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하여 66, 67, 68년급, 3기의 초,고중 졸업생들은 모두다 광활한 천지 - 농촌으로 재교육 받으러 가야했다. 남부러워하는 교육자의 가정에서 태여나 문학가의 꿈을 키워오던 천진랑만한 장미꽃소녀는 하루아침에《문화대혁명》의 된서리를 맞고《당권파》딸로,《검은5류》자녀로 전락되였다. 대학에 추천되고 입당도 눈앞에 두었었는데 그 금빛찬란한 희망은 휘몰아쳐오는 폭풍취우에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오직《모든것은 모주석의 지시대로》해야만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지고무상의 정치요, 항변할수 없는 철칙이며 그 세대 8천만 중학생들에게 락인된 특이한 이력서였다.         붉은기가 휘날리고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요란한 환송소리 속에서 우리는 어록책을 손에 들고 이불짐을 등에 멘채 커다란 해방패 트럭에 빼곡이 실려 아무런 주저도, 두렴도 없이 용감하게 도시를 떠났다. 얼마를 살고 돌아올지 말지도 모르는 삶의 불모지를 향해 근심어린 부모님들의 얼굴을 뒤에 남긴채 우리는 달리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룡정을 벗어나 남쪽으로 100여리 길, 높고 가파른 계곡을 꿰질러 그리 넓지 않은 흙길로 뽀얗게 먼지를 일구며 달리고 달려 당도한 곳은 바로 변강산촌 백금향이였다. 또다시 두만강기슭을 따라 20여리 길을 더 내려가서야 우리의 종착지인 심포마을에 도착하였다. 열 다섯호의 인가들이 하얀벽의 한옥차림으로 산비탈에 옹기종기자리 잡고 있었는데 마을 동쪽 언덕우에 번듯이 지어놓은《집체호》붉은 벽돌집은 그야말로 닭무리 속의 학과도 같았다. 김대장과 마을사람의 열정적인 안내로 우리는 행장들을 풀어놓고는 우선 서넛씩 사원들의 집에 나누어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인가가 드믄 그 시골에서는 마치 무슨 경사나 난듯이 집집이 두부를 앗고 시루떡을 쪄서 도시에서 온《지식청년》을 환대하였다. 반나절이나 트럭에서 부대낀 우리는 처음으로 농촌의 순두부며 떡이며 구수한 된장국을 마주하게 되자 너나없이 계눈감추듯 퍼 먹어댔다. 참으로 진주성찬이 따로 없었다.       저녘을 먹고 밖에 나가 보니 마을 앞에는 푸르른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담한 산촌학교가 보였다. 큰길 너머로는 검푸른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는 이웃나라 조선의 인가들이 어슴프레 보이고 있어 참으로 신기한 변강산촌 이였다. 도시의 온갖 소음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란 우리들은 시골마을 산등성에 조용히 불타오르는 저녁노을이며, 푸르른 논밭과 앞마당의 각가지 남새 그리고 뒷산의 울긋불긋한 과수나무들이 그렇게 신비롭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열네명의 애숭이《지식청년》들은 이렇게《집체호》라는 특이한 대가정의 호주가 되여 함께 살게 된것이다.                                                햇내기들의 농사일 배우기       새 환경의 새 기분도 잠간, 농촌의 생활과 로동이란 그렇게 랑만적인 것만은 아니였다.《일년 농사는 봄에 달렸다》하여 아직 겨울철 찬 기운이 감도는 이른 봄부터 밭에 나서면 음력설을 쇨 때까지 사시장철 들판에서 헤매야 했다. 녀자애들이 자랑해야 할 예쁜 얼굴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꽃치마 한번 입어 볼 겨를이 없었다. 무릎을 기운 광목바지와 초록색 군복웃옷에 약진패 머리수건을 접어쓰면 그것이 류행이고 시체멋이였다. 간고소박이 미덕이니 색부치나 꽃무늬 옷들은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고 엄금했었으니 말이다. 허나 그 두만강기슭에서의 하많은 에피소드들은 여전히 채색드라마로 되여 오늘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농촌이란 새 천지에 당도하여 제일 처음으로 닥친 일은 가을걷이와 싣걱질이였다. 서투른 솜씨로 낫에 손을 베여가며 벼가을을 끝내자 또 논밭에 무져 놓은 벼단들을 하루바삐 탈곡장에 실어 들여야 했다. 도시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소수레를 몰아야 하는데 아무리 겁모르고 덤벼든다 하여도 햇내기들이라 그 천근무게의 육중한 소발에 밟혀 아우성치며 쩔뚝거리기가 일수였고 벼단을 쌓아 실은 수례를 논뚝에서 번져버리는 등 실수 또한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가을 싣걱질이 끝나면 또 탈곡을 해야 하는데 그때 어데 지금과 같은 현대화기계가 있었는가? 생산대에 두대 밖에 없는 반자동 탈곡기로 코구멍이 까맣게 되어가지고 몇날씩 밤도와 벼를 탈곡해야 했다. 싸늘한 늦가을의 탈곡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할라치면 판들판들하던 깜장눈들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벼낟가리에 처박히기가 십상이였다. 음력설 후부터는 또 새해 농사에 쓸 비료를 장만해야 하는데 꽁꽁 얼어붙은 소똥, 돼지똥들을 꺼서는 밭에 실어내야 했다. 곡괭이질이 서툰 우리는 온 얼굴에 두엄을 들쓰기가 일수였고 가끔은 입안에까지 튀겨 넣어 저마다 고양이 락태상이 되군 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래도 한여름 불볕에서 조이밭 두벌기음을 매는 일이였다. 두만강기슭의 밭고랑들은 어찌나 사래가 긴지 아예 점심 도시락을 허리춤에 차고 시작해야 했다. 밭고랑 중간까지 매고나면 어느덧 해가 구중천에 떠올라 그 자리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잠간 허리 쉼을 하고는 또다시 다그쳐 김을 매서야 저녁해를 등지고 돌아 올수 있었다. 애들의 얼굴은 검실검실 타들었고 야들야들한 손바닥에는 줄줄이 장알들이 박혔다. 허나《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한 당년의《지식청년》들은 누구 하나 뺑소니를 치지 않았다. 강철은 용광로에서 단련된다더니 우리들이야 말로 농촌이라는 훨훨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서 일하고 배우며 튼튼한 실농군으로 되어갔다.                                                   산골과 집체호의 이야기        두메산골 백금향 심포마을의 생활형편이란 말 그대로 가난하고 말끔하였다. 집집마다 장롱에 이불을 얹어놓으면 그것이 전부였고 좀 살림이 괜찮다는 집은 정주간에 큰 식장을 갖춰놓고 그 우에 커다란 꽃 대야들을 두개씩 엎어서 몇쌍 올려 놓으면 그것이 바로 부의 상징이였다. 온 마을에 기철이네 딱 한 집에 17촌짜리 흑백텔레비가 있어서 저녁 후이면 마을 남녀로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모여앉아 연변뉴스와 당시 류행했던 일본드라마를 보군 하였다.       가난한 시골이지만 인품만은 더없이 좋았다. 아직 남새가 나지 않는 초봄에는 집집이 밥에다 간장만 찍어먹을 형편이지만 청명이 되면 생산대에서는 돼지를 잡아 일인당 한두근씩 똑같이 나누었고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떡이나 두부 같은 색다른 음식도 온 동네가 똑같이 만들어 먹었다. 마음씨 고운 동네 아줌마들은 집체호에 찾아와서 김치도 담가주고 산나물과 터밭의 남새들도 뜯어다 주었다.     그때만 해도 도시는 배급제였지만 농촌에 오니 그래도 밥만은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 그런데 부식이란 뒷산의 돌배와 퍼런 복숭아 뿐인지라 그저 하루 세끼 밥이 죽어났다. 1인당 800근씩 주는 1년 식량은 항상 부족해서 년말이면 또 생산대에 손을 내밀군 하였다. 어데 그뿐인가 콩가을 때면 밭머리에 둘러앉아 마른 나뭇가지로 불을 지피고는 입이 새까맣게 콩서리를 했고 강변 모래밭에 락화생을 심으라고 종자를 나눠주면 한 절반은 우선 자기 입에다 심어버리고 마니 밭에 나는 싹은 가물에 콩이 나듯 아예 솎아버릴 념려가 없게 되였다. 사원들은 억이 막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생각해 보면 철딱서니 없는 이《재교육대상》들 때문에 농민들도 여간만 애먹지 않은 것 같다.                                                 지식청년의 향촌 교직생활          범없는 골안에 슬기가 왕이라고 그때 시골에는 대학생은 고사하고 나같은 고중졸업생이면 최고학력자였다. 1년후 나는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 민반교원으로 되였다. 두만강기슭에 자리잡은 심포학교에는 전교 학생이라야 50명도 안되지만 소학 1학년부터 중학 3학년까지의 반급들이 다 있었다. 교원은 모두 4명이였는 한 교원이 한어, 어문, 정치, 력사를 가르치면 다른 한 교원은 수학, 화학, 물리, 기하를 가르쳤고 학생이 적은 반급은 두 학급 학생을 한 교실에 갈라 앉히고 흑판가운데 줄을 그어 놓고는 복식강의를 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전교 사생이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올라 겨울내 난로에 땔 나무를 장만하였고 일요일이면 교실의 벽을 바르고 회칠을 하였으며 책걸상도 손수 수리하였다. 모든것이 말 그대로 근공검학이였다.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사군의 아들딸들은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다. 일곱살 난 소학교 1학년생으로부터 열여섯살 초중 3학년생까지 크고작은 애들이 하학 종소리만 울리면 함께 운동장에 뛰쳐나가 밀치고 닥치고 하면서 즐겁게 뛰놀군 하였는데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오붓한 시골학교의 특이한 풍경이요, 변강산촌의 푸르른 희망이였다.                                                      시대의 불행아가 행운아로           1975년 봄,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갈수 있다는 당중앙의 정책에 따라 우리는 모두 기를 나누어 성시로 돌아왔다. 그 험난한 시골도 어느덧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대로 들어서인지 떠나올 땐 마을의 어른, 아이들과 눈물로 헤어져야만 했다. 연길시에 돌아 온 이튿날로 나는 연변대학인쇄공장에 찾아갔다. 대학을 갈망하던 마음으로 우리민족의 최고학부에서 대학교재를 만드는 일이면 최고인듯 싶었다. 과연 공장령도에서는 교원출신인 나를 선뜻이 받아주었다. 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여 해마다 학교의 선진공작자로 되군했다.      취직하여 2년이 되던 1977년 10월, 국무원에서는 교육부의《1977년 대학교모집사업에 관한 의견》을 비준하고 대학입시제도를 회복하였다. 이는 배움의 기회를 잃었던 우리들에게 다시금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희망의 나래를 달아주었다. 때는 우리 66년급 고중생들로 말하면 모두 30대 나이였고 거의 다 결혼을 하였었지만 대학공부를 해 보려는 꿈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들애를 해산한지 두달도 안되는 몸이였지만 다시 얻을수 없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어 퉁퉁 부은 얼굴을 해 가지고 10여년간 놓아버린 고중교재들을 다시 복습하며 대학입시준비에 밤을 지새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같은 각고한 노력이 있었기에 늦게나마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졸업의 영예를 받아 안고 대학교의 연구기관에서 훌륭하게 사업할수 있었다. 이렇게 나는 연변대학이란 이 신성한 직장에 내발로 찾아와서 일하며 배우고 진보하면서 한 인쇄공으로부터 대학학부의 교학비서로, 나아가서는 연구소의 부교수급 연구원으로 성장하여 오늘날 정년에 이르기까지 33년간을 일하여 온 것이다.     《추억의 길목》을 마무리 하면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한 세대의 운명을 바꾸었던 그 시절의 그 인간수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오늘의 보람찬 삶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무디여가는 정열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히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 특수 년대의 열혈청춘들이 이제는 지천명(知天命)을 지나고 이순(耳順)에서 달리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길 끝까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본문은 2011년 9월1일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와                                               중공연변주위 잡지사에서 공동 주최한                                              《추억의 길목》응모에서--- [우수상]을 획득하였음.)                                                                                                                             
55    민족문화의 거목 정판룡교수님을 기리며 댓글:  조회:4338  추천:24  2011-09-26
                                        금년 10월 7일은 우리 조선민족의 걸출한 교육가이시며 문학가이시고 사회활동가이신 연변대학교 전임 부총장 정판룡교수님의 서거 10주기 기념일입니다. 민족문화의 거목이셨던 선생님은 저명한 학자로서 수많은 젊은 후학들을 양성하셨으며 우리민족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혼신의 정열과 지혜를 몰부은 훌륭한 문화지성인이시고 우리민족의 거두였습니다. 한 위인으로서는 너무나도 짧은 70세의 인생 로정에서 선생님은 우리민족의 교육과 문화발전을 위하여 그야말로 많고 많은 업적을 쌓아 오셨습니다. 그 숭고한 정신, 그 드넓은 흉금, 그 자애로운 얼굴, 그 우렁진 목소리는 수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가슴속에 아로 새겨져 무시로 우리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운명의 안배였을가요? 나는 행운스럽게도 12년간이나 이렇게 저명하신 민족의 대가 정판룡교수님 슬하에서 함께 사업할 수 있는 인복을 지니였습니다.     1989년말, 연변대학 한어학부에서 사업하던 내가 선생님의 부름으로 성립주비중인 조선한국연구중심에 전근했을 때 선생님은 우리대학의 부총장이면서 또 우리 연구중심의 주임을 겸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벌써 선견지명을 가지시고 연변대학의 민족적 학과적 특성을 살려 중국에서 처음으로 대학교에 조선한국연구중심을 창립하심으로서 연변대학이 중국내에서의 조선한국학의 위상을 정립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을 이룩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러하였듯이 처음 교수님을 대할 땐 무척 존경하면서도 또 접촉하기 어려운 분으로 여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의 그 후더운 성격과 너그러운 인품은 언제나 친 부모와 같은 뜨거운 정을 느끼게 하였으며 령도이자 스승으로서의 아낌없는 지도와 친절한 가르침은 나로 하여금 항상 신심 가득히 사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학부사무실에서 교무공작을 하다가 과학연구부문으로 옮겨오니 처음엔 어떻게 학술연구를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러한 나에게 주저없이 임무를 맡기고 과감히 실천해 보도록 고무격려해 주셨습니다.     기억에도 새로운 1990년 10월 한국의 한 사회학회에서 우리 연구중심과 함께《중국조선족사회연구》학술토론회를 가졌는데 10여가지 연구항목중《녀성의 사회적 지위》라는 종목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이 문제는 강동무가 맡아해야 하겠소. 녀성문제가 아니요?》라고 하시며 대담히 연구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고무와 격려에 힘을 얻은 나는 열심히 사회조사를 하고 자료를 찾고 정력을 몰부어 연구하고 집필한 끝에 학술회에서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은 한편의 훌륭한 론문을 써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첫 론문이 되어 그후 수년간 많은 연구과제를 완성해 나갈 수 있었으며 이러한 실천 과정에서 학문의 법칙과 규범을 모색하고 연구방법을 찾아내여 몇년간 30여편의 중국조선족연구와 녀성연구 론문들을 국내외 학술간물에 발표함으로서 1997년 1월에는 파격적으로 부연구원이라는 고급직함까지 평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참다운 가르침과 지도가 오늘의 나를 이끌어주시고 키워주셨음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으며 조금만 밀어 주면 얼마든지 커갈수 있는 그 젊은 시절에 정판룡교수님 같은 참 스승을 만난 평생의 행운으로 하여 항상 자랑을 느끼군 합니다.     선생님은 민족의 전당인 연변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뛰여난 행정력을 과시함과 동시에《연변대학의 특색은 조선한국학연구》라고 하시면서 반드시 이 유리한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고 발전 제고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친히 연구중심을 세우셨을 뿐 아니라 교내의 각 사회학과 연구기구들을 단합하여 20여차의 국제학술회와 국내외 학술활동들을 활발히 조직 지도함으로써 수많은 학술성과로 연변대학을 정상에로 끌어 올렸습니다.     1999년 5월, 청천벽력으로 불치병 진단을 받으신 후에도 선생님은 의연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완강한 의력과 투지로 병마와 싸우셨고 한 두번도 견디여 내기 어렵다는 항암화료를 열두차례나 기적같이 견디여 내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보고《아직도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죽지 못하는가 보오》라고 하시며 조금만 정신이 들면 필을 들어 글을 쓰시군 하셨습니다. 아마 생명에 대한 굳은 신념, 불타는 삶의 정열이 선생님을 그렇게도 용히 버티게 하였는가 싶습니다.     2년 반이라는 기나긴 투병생활, 전후 무려 열네차례나 병원에 입원하시면서도 선생님은 항상 후학들에게 조선족사회 문제들을 피력하셨고 또《내가 알고 있는 일들은 내가 죽으면 다 파뭍혀 버리게 되니 살아 있을때 내가 다 써 놓아야하오.》라고 하시면서 우리문단의 우수한 작가, 평론가들의 일화 30여편을 매일 만여자씩 쓰시여《장백산》잡지에 련재해 주시면서 인생철리가 빛발치는 감격적인 글들로 독자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어데 그뿐입니까? 중국 조선족의 문화교육사업을 자신의 평생사명으로 간주하시고 투병중에도 그 힘든 몸으로 사회의 각종 지성인활동에 참가하시여 보귀한 지도와 연설을 하셨고 또 친히 한국 우리은행 비지니스클럽의 자금을 쟁취하여《중국조선족아동장학회》를 설립하시여 금년에 이르기까지 이미 9년간이나 이 기금으로 만여명의 실학아동을 구하고 극빈학생들을 도와 공부할 수 있게끔 이끌어 주셨습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일주일 전에도 선생님은 우리대학의 곤난한 학생들을 념려하시면서 병상에서 6명의 학생들에게《정판룡교육기금장학금》을 친히 내주셨습니다.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어려운 생의 마지막 시각에도 선생님의 그 뜨거운 마음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힘들게 장학생들의 손을 일일이 굳게 잡아 주시던 그 모습은 차마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감동의 화면이였습니다.     더욱더 사람들을 경탄케 하는것은 선생님의 유언이였습니다. 평시 장학금의 운영을 걱정하시더니 떠나시면서 안해 왕유선생님께 치료하고 남은 돈을 몽땅 장학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왕유선생님은 학교지도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중히 글을 올려 정선생님의 유지대로 집에 남은 11만원의 저금통장을 몽땅《정판룡교육기금장학회》에 바쳤습니다. 참으로 후세에 길이 빛날 거동이요 천사의 마음이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또 당신이 수십년간 수장하시고 아껴 보시던 도서 2000여권을 몽땅 연구중심에 기중하시여 학자들의 연구사업에 쓰이도록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서가에서 한권 한권의 책들을 뽑아 등기하고 정리하면서 우리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을 그렸습니다.     아, 가물가물 꺼져 가면서도 유난히 밝게만 빛나던 한대의 굴직한 초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을 몽땅 불태우던 그 맑은 령혼, 추호의 사심도 없이 민족교육사업에 혼신을 바쳐온 거룩한 그 모습 그 덕성에 만민은 우러러 보며 높은 산도 머리숙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무도 일찍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일찍 훌륭한 스승님을 잃었습니다. 선생님이 키워 주고 이끌어 주신 수많은 제자들은 영원히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으며 오늘도 선생님을 한없이 그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70주년 생일날에 제자들에게《사람은 살아서 남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여야 하오.》라고 진지하게 부탁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우리 민족을 위해 좋은 일을 너무도 많이 하셨는데 그렇게도 일찍 떠나가시니 그 슬픔에 하늘도 울부짖었고 땅도 통곡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서거 10주기를 추모하면서 우리는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꼭 훌륭히 사업해 나갈것이며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모든 정력과 지혜를 다 바칠것입니다.      존경하는 스승님께서 하늘나라에서라도 항상 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에《정판룡 문학편》출간기념모임에서 발표했던 중국조선족소년보사 사장 한석윤 선생님의 시를 재삼 읊어 보면서 정판룡교수님에 대한 추모의 글을 마칩니다.                                                                                                                                                                                     2011. 9. 26                          스승님께 올리는 시                                                           한 석 윤                    멀리서 바라보면 산이였습니다                    하얀 구름 서리서리 허리에 감고                    하늘을 떠받치고 선                    아아한 산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보면 내물이였습니다                    키작은 풀들과 눈맞춤하며                    도란도란 정다운 이야기 끝이 없는                    살가운 내물이였습니다.                    민족문화산맥의 제일봉에 오르시여                    세기의 아침해 남먼저 마중하며                    민족의 앞날에 채운을 뿌려주시면서도                    만인의 입에 도인으로 칭송받으면서도                    언제나 언제나                    맨발바람으로 고학의 길 떠나시던                    그날 그 농부의 아들로 살아오신 스승님                    스승님의 그 거룩한 모습에서 저희는                    잘 익은 이삭일수록 머리 숙이고                    물이 찬 병일수록 소리가 작다는                    참인간의 정도를 깨칠 수 있었고                    스승님의 그 거룩한 행실에서 저희는                    싱싱하게 피여야 할 우리 민족의 길에                    내가 설 자리, 내가 해야 할 일                    불씨로 받아 가슴에 피울 수 있었으니                    아, 정녕 산이면서도, 우람한 산이면서도                    한뉘 민초들과 이웃하여 내물처럼 살으신 스승님                    스승님은 언제나                    민족의 산으로 우뚝 솟아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좌표로 영원할 것입니다.                                                                                                   2001년 8월 31일                      
54    제2의 인생을 즐기는 대학가의 퇴직 녀성들 댓글:  조회:4870  추천:17  2011-08-05
                      제2의 인생을 즐기는 대학가의 퇴직 녀성들                                                                                       글 / 강 순 화   《참 요즘 로인들은 나이에 비해 젊으셨구나》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60 이 청춘이라는 말이 이제는 공연한 치하의 말이 아니다. 70, 80 이 되어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례가 많고 90세이상 로인들을 만나는것도 예전처럼 신기하고 흥분되는 경험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고령화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해주는 현실이다.    여기에서 나는 현시대 로인들의 모범이 될수 있는 연변대학 로간부처의 녀성탁구조 이야기를 하려한다. 그들은 모두가 연변대학에서 30-40년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한 60-70대 녀성들이다. 재직때에는 모두가 의사요, 교수요, 처장이요, 과장이요, 주임이요 하던 녀성강자들이였는데 퇴직 후에는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제2의 인생을 함께 가꾸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코기러기가 있으니 그는 바로 강철의 녀인으로 불리는 김문희 의사이다.    원 연변대학병원의 부주임의사였던 김문희선생을 두고 모두들 강철의 녀인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의 남다른 경력과 굳센의지 때문이리라. 34년간 대학교의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무수한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그들에게 건강과 기쁨을 가져다 준 모범의사였지만 자신의 아들애에게는 예방주사 한대도 제때에 놓아주지 못하여 어린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리게 만든 가슴에 한이 맺힌 녀인이다. 허나 그는 불행을 힘으로 바꾸어 그 눈물겨운 역경을 억세게도 이겨냈으니 참으로 강철의 녀인임에 손색이 없다.    젊은 시절에는 병원의 출근시간 외에도 아픈 아들애를 등에 업고 약가방을 들고 학교내 교직공들은 물론 그 가족과 학생들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해 주고 환자의 마지막 길까지 지켜주던 모범 의사였고 불구자로 된 아들애에게는 항상《너는 다리가 아파도 총명한 머리와 튼튼한 두손이 있으니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다》고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 주어 그 아들로 하여금 열심히 공부하여 끝내는 인재로 성장되게 한 훌륭한 교육자였다.    그 불구자 아들은 지금 할빈공업대학 계산기응용분야의 박사학위까지 수여받은 어엿한 연변대학계산기계의 교수이며 주임이다. 같은 학과의 훌륭한 녀성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데 그 딸 최경화학생은 몇해전에 벌써 전주 4천명이 참가한 백일장 경연에서 최고상인《장원상》까지 취득한 신동이다. 올해에는 연변1중을 졸업하고 대학입시에 도전하여 666점의 우수한 성적으로 중국의 명문대학인 절강대학에 입학하였다.    원 연변대학 물리계 교수이며 주임이였던 김문희의사의 남편은 일찍 뇌혈전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지만 김문희 의사는 10여년간 남편을 정성들여 시중하면서도 의연히 연변대학퇴직녀성탁구조의 조장직을 맡고 비가오나 눈이 오나 수년을 하루와 같이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면서 퇴직녀사들을 이끌어 왔다.   그는 매일 아침 남편에게 점적 주사를 놓고 모든 시중을 끝낸 후 오전 한시간씩 테니스를 치고 오후에는 또 퇴직반의 탁구조에 와서 생전 탁구채도 잡아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손에 손잡고 일일이 가르쳐 주면서 훈련시킨 훌륭한 교련이였다. 재직때엔 병원에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지켜줬다면 퇴직 후에는 운동으로 여러분들의 예방치료를 멋지게 해 주어 만년의 건강과 행복을 만들어 주는 백의 천사이다.     이렇게 하는 데는 그의 운동소질에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소유한 남을 위하는 고귀한 품성,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의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열정적인 지지와 솔선수범하는 행동은 여러사람들을 고무격려하고 있다. 하여 이 탁구조 10여명의 우수한 탁구운동원들은 60-70세의 나이에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날랜 솜씨로 치고 박으며 뛰는가 하면 80 에 가까운 황정원, 박영숙등 녀사들의 탁구치는 모습은 참으로 경탄할만한 일이다.   《집에 있으면 맥이 없다가도 학교에 나와 탁구만 치면 힘이 솟는다》고 오애순 녀사는 말한다. 그들의 흥취와 쾌락은 바로 그들만이 느낄수 있는 작은 탁구공의 무궁한 매력이 주는 것이다. 이 따뜻한《사랑의 집체》성원들은 1년 사시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짐없이 매일 학교에 나와 운동 뿐 아니라 배움에도 게으르지 않으며 노래도 배우고 춤도 추고 태극권도 배우고 등산도 여행도 조직하면서 즐겁고 아름다운 만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지금시대는 50-60은 중년이고 70-80 이 되어야 로년이라고 한다. 관념의 부동은 생산적활동, 건강장수, 그리고 안정된 삶의 유지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떵떵거리고 살았어도 60 이 넘어 실버시대에 이르러 병들고 궁색스럽게 살게 된다면 그의 삶은 실패한 삶이요, 반면에 젊은 나이에 고생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고달픈 나날을 살았어도 60 이 넘어서부터 건강하고 안정되고 인간다운 삶을 산다면 그의 삶은 성공적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연변대학 퇴직반 녀성탁구조의 교실에서는 경쾌한 노래소리가 울려 퍼진다.             다정한 벗들아 탁구를 칩시다        작디작은 탁구공이 우리를 부른다          오고 가는 탁구공 웃음꽃 피우고    격렬한 공방전에 박수갈채 드높다          아아 벗들아 다정한 벗들아           남은 인생 건강 위해 즐겁게 탁구치자             다정한 벗들아 탁구를 칩시다        작디작은 탁구공이 우리를 부른다          소중한 우정으로 가슴을 덥히고     자랑찬 이야기로 웃음꽃 피우자          아아 벗들아 다정한 벗들아           남은 인생 건강 위해 즐겁게 탁구치자    강철의 녀인 김문희선생이 이끄는 연변대학퇴직반 녀성탁구조 성원들은 오늘도 래일도 이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탁구를 치고 있다. 이 아니 황혼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아닌가?!                                                                                             2011년 로인절을 맞으면서  
53    연변대학교의 조선-한국학연구개황 댓글:  조회:4861  추천:14  2011-08-01
                                연변대학교의 조선-한국학연구개황                                          강순화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연구중심)        1. 연변대학교에 있어서의 조선-한국학연구의 위치와 의의     연변대학교는 1949년에 중국조선족의 교육, 문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대학교이다. 해방전쟁의 포연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연변에 중국의 200만 조선족을 중심으로 중국조선족의 고급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교의 설립이 추진되었고 그 결과로 1949년 4월에 연변대학교가 성립된 것이다.     연변대학교의 설립취지에서 대학교의 민족적 성격을 천명함과 아울러 조선-한국학연구가 가지는 중요한 위치와 의의를 밝혔다. 조선족사회의 교육, 문화 수준을 제고하고 조선족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하자면 연변대학교가 필요했고 또한 상술한 목표를 달성하자면 조선-한국학연구를 중요한 위치에 놓아야 했다. 따라서 설립초기부터 조선-한국 언어문학, 력사 등 학과는 연변대학교의 핵심적인 학과로 되었다.     특히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온 과경민족의 후예이고 연변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이웃해 있으므로 연변대학교는 다른 지역의 대학들에 비해 력사적, 지정학적 우세를 가지고 있다. 장구한 력사적 행정 속에서 중국과 조선, 중국과 한국은 서로 활발하게 문화교류를 진행해 왔다. 이 가운데서 연변대학교는 중한 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해왔고 중국의 조선족은 자기의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풍부히 하고 발전시켜 왔다. 또한 연변은 조선족자치주로서 중국공산당의 현명한 민족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각 민족은 모두 자기 언어 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를 가지며 자기의 풍속과 습관을 보존 또는 개혁할 자유를 가진다.》는 중국공산당의 올바른 민족정책의 고무 하에 중국조선족은 일찍부터 자기의 독창적인 민족교육체계를 세우고 조선민족의 문자로 교재를 편찬하고 조선민족의 언어로 교수할 수 있었으며 자기의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하여 연변대학은 중국 국내에서 조선-한국학연구를 가장 일찍 시작한 대학교로 되였다. 설립초기부터 연변대학교는 중국 국내의 우수한 조선족 문인들과 지식인들을 집결하여 교수진과 연구진을 무어 조선-한국학 관련 교수와 연구를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력사, 철학, 언어, 문학, 교육,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한국학을 중국에 전파,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오봉협, 주홍성, 박문일, 박진석, 박창욱, 방학봉, 정판룡, 권철, 최윤갑, 강맹산, 리득춘 등 학자들은 일찍 1950년대 초반부터 력사, 철학, 문학, 언어학 등 분야에서 조선-한국학연구의 총체적인 기틀을 다지는데 진력했다. 그들은《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과 같은 정치운동의 엄혹한 시련을 이겨내면서 조선-한국학 관련 학과를 개설하고 교과서를 편찬하였으며 연구소를 설립했다.     1978년부터는 조문학과에서 석, 박사 과정 대학원생을 모집하고 조선문제연구소, 조선언어문학연구소, 민족연구소, 고적연구소 등 연구소들을 설립하였으며 조선어의 규범화, 조선민족의 문학과 예술, 조선족의 민속, 고구려, 발해의 력사와 문화, 중국 경내 독립투쟁사 등 여러 면에 걸쳐 연구를 하였으며《조선족간사》,《조선고전문학사》 등 저작들을 출판하므로서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이룩했다.          현재 연변대학교 조선언어문학 학과에는 박사점 1개, 석사점 2개, 연구소(또는 연구센터) 4개가 있다. 지난 20여 년간 각 연구소에서는 도합 20여 차의 대형 국제학술회의를 가졌다. 현재 조선- 한국학 관련 교수와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는 무려 100여 명이나 된다. 20여 년간 연변대학교에서 출판한 조선-한국학 관련 학술저서는 200여권, 발표한 론문은 800여 편이다. 그중 국외에서 발표된 저서만 해도 100권에 달한다. 대체로 1980년대 이후 조선-한국학 영역에서 해마다 100여 편의 론문과 10여 권의 저서들이 나온 셈이다.     조선-한국학연구의 질과 심도면에서도 큰 제고를 가져왔다. 우선 연구의 범위에 있어서 초창기에 언어문학이나 력사에 국한되던 데로부터 점차 철학, 경제, 정치, 교육, 사회, 민속, 여성학에 이르기까지 넓혀졌다. 또한 여러 분야에 걸치는 중조일 관계사, 비교연구에서도 적지 않는 성과를 거두었다.      2. 조선-한국학 각 학과에서의 성과     조선어,한국어연구는 대체로 1970년대 말부터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79년《연변조선어학회》를 출범시켰고 1981년《중국조선어학회》를 설립했다. 1981년 연변대학교에《조선언어문학연구소》를 설립한 후 동북3성과 그 산하의 여러 현,시에서도《조선어학회》와《소학교 중학교 조선어문교수 연구회》를 설립해 조선어(한국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1981년부터 2005년까지 연변대학교에서 나온 조선어학 관련 박사학위논문들은 《함경도방언음조에대한연구》(전학석1991),《조선어접미사에대한거시적연구》(강은국1991),《조선어종결사에대한거시적연구》(렴광호1995),《15세기조선어규정어결합구조에대한연구>(강보유1995),《조선어어의(語意)연구》(류은종1997),《조선어문체론수단과수법의력사적발전》(김기종1997),《조한공간개념표달형식대비연구》(최건1998),《조선운서중에반영된명청음계연구》(김기석1998),《조한수자표시어전환에대한다시각연구》(김종태1998),《남북한언어정책비교연구》(김홍식2000),《조선중세한문번역본의언어사연구》(김영수2001),《조선조운서한자음적전승과정리규범》(이승자2002),《현대한어동사어의조합관계연구》(필옥덕2003),《한국어정도부사에대한연구》(유춘희2005) 등 20 여편이 있고 127편의 석사학위론문이 나왔다.      분야 별로 보면 문법론과 어휘론 관련 론문이 다수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사회언어학, 음운론, 방언학 관련 론문이 일정한 수를 차지한다. 127편 석사학위론문가운데서 언어대비연구가 80편(63%)이다. 연변대학의 최윤갑, 리득춘, 최명식, 김진용, 허동진, 장의원, 전학석, 류은종, 최희수, 유춘희, 김기석, 최건, 김영수 등 언어학 학자들은 2005년까지 사전 70여부, 어음론 3권, 문법론 30여권, 어휘 의미론 20여권, 문체론 10여권, 방언학 10여권, 어학사 20여권, 일반 언어학 5권, 사회언어학 10여권, 조선어규범화 20여권을 출판하였다.     이미 학위를 취득한 조선-한국언어학 박사학위 취득자는 20명이고 석사학위 취득자는 64명이며 재학 중인 박사 대학원생은 18명, 석사 대학원생은 46명이다.     문학의 경우, 중국조선족과 한반도의 조선인들은 한자(漢字)를 매개로 하는 중일한 언어문학의 밀접한 상호 교류에 착안해 자기의 독특한 연구방향을 확립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한국 한문학 관련 연구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석, 박사학위 제도가 회복되고 자유로운 학술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80년 7월 연변대학교와 북경대학교, 중국사회과학연구원의 학자 교수들을 중심으로《조선문학연구회》가 발족되었고 1982년에 제1기 조선문학 석사학위논문으로 리암의《리규보 시 연구》, 채미화의《박지원 소설의 근대적 요소 연구》가 발표되었다. 1980년대 중기에 와서는 작가, 작품 연구의 범위가 확대되고 그 내용도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연변대학교 교수들이 펴낸《조선고전작가,작품연구》(1985년), 허문섭 교수의《조선문학사》(1986년)는 중국 경내 최초의 조선문학 관련 교과서로 널리 사용되었고 청년학자들을 양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는 일정한 경험과 기초를 쌓게 되었다. 연변대학의 경우, 한국문학연구에 전문 종사하는 학자만 해도 5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한국문학연구영역에서 중국학파를 형성하는데 주축이 되었다.     올해까지 한국문학을 연구해 24명의 학자가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10명이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공부하고 있는 박사연구생은 24명, 석사연구생은 71명이다. 이미 출간된 박사학위 논문들로는 다음과 같다.《조선 중세기 북학파 문학연구》(김병민 1990년),《조선 리조시기 실학파 문학관념 연구》(리암 1991년),《조선 고전소설의 서사 패턴 연구》(김관웅 1991년),《고려문학 미의식 연구》(채미화 1994년),《재만조선인문학연구》(김호웅1996년), 《조선 신화 연구》(허휘훈 1998년), 《최승희 무용예술 연구》(리애순 1999년)《조선조산수문학연구》(최웅권2000년). 특히 서동일의《리덕무 문학연구》는 2003년 중국의 100대 우수 박사학위논문으로 선정됨으로써 연변대학교 한국문학연구의 수준을 보여주었다. 1990년대 이후 연변대학교 한문학 연구에서는 20여 권의 저작과 200여 편의 논문이 출간되었다. 2002년 연변대학의 조선언어문학학과는 국가급중점학과로 지정되었다.     조선-한국 력사연구는 여전히 연변대학교 한국학연구의 중심영역으로 되고 있다. 1980년대 초 부터 석사연구생을 모집하였고 1994년에는 박사점을 쟁취하였다.세계사박사학위학과에서는이미 28명의 박사와 120명의 석사를 배양하였는데 이미 출판된 박사학위 논문들로는《7-9세기 당,신라,일본의 정치제도 비교연구》(리종훈 1998),《삼국지、위수(魏書)、고구려전 연구》(박찬규1998),《근대 중조일삼국이 간도조선인에 대한 정책연구》(정신철2003), 《조선반도평화통일문제연구》(맹경의 2001), 《조선과청나라 무역관계연구》(윤영일 2004), 《중일한삼국서학사비교연구》(리 호2004),《10-13세기송、려、일문화교류연구》(리매화2005)등 23편이 있다.석사점과 박사점의 경우, 중일한 언어에 정통한 우세를 가지고 있기에 중일한 삼국 관계사와 비교사 연구에서도 자기의 특유의 우세와 특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박진석, 방학봉, 박창욱, 박문일, 강맹산 등 로학자들은 호태왕비, 고구려사, 발해사, 민족독립운동사, 중조일관계사, 조선반도 통일문제 등 연구 분야에서 중요한 성과들을 거두었다. 이미 출판된 중요한 저서들을 보면: 《조선통사》(박진석 강맹산 1973),《조선사강의》(박진석 강맹산 1983),《리조사화》(박경수 1984), 《신라사화》(강맹산 1985), 《조선간사》(박진석 강맹산 1986), 《고려사화》(리순홍 강맹산 1987》, 《조선중세기사연구》(박진석 강맹산 1988),《조선통사》(강맹산 리춘호 1992),《호태왕비와고대조일관계연구》(박진석 1993),《중조일관계사(상)》(전춘원, 방학봉, 1994), 《중국경내고구려유지와유물연구》(박진석, 1995), 《중국정사중의조선사료(1,2)》(강맹산 류자민 김영국 1996), 《명대중조관계사》(강룡범, 류자민 1999),《종군위안부》(김성호 1999), 《중국고대문화가 조선, 한국과 일본에 대한 영향》(박문일,김구춘 ,2000),《중조일관계사(하)》(방민호 강룡범 2002), 《고구려사연구》(박찬규 2003) 등 이 있다.     박진석 김광수 강맹산등 로학자들을 위수로하는 조선문제연구소는 1978년 성립초기로 부터 학술간물들을 꾸리기 시작했는데《조선문제연구동태(총10기)》,《조선사연구(총7기)》,《조선-한국학론총(총6기)》등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조선사연구성과를 기재하는 학술간물로서 중국의 조선사연구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중한수교이래 조선-한국력사 령역에서는 무게있는 연구저서 50여권을 출판하였고 350여편의 론문들을 국내외 학술간물에 발표함으로써 중국에서의 조선-한국 력사연구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변대학교 력사학과의 조선-한국사 관련 연구소로는 조선력사연구소, 중조한일비교사연구소, 조선문제연구소, 발해사연구소 등이 있다.   조선-한국 철학에 관한 연구는 1970년대 말까지 거의 공백이나 다름없었다. 1978년 개혁개방 후부터 한국철학연구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1979년 10월 연변대학교에서는《동방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선-한국 철학 관련 연구를 하는 학자들을 조직해 정기적인 잡지《동방철학연구》(1979), 《조선연구론총》(1981), 총서《조선-한국학연구》(1997) 등 도서들을 발간하였다. 주칠성교수는 일찍 1979년에《조선봉건사회 말기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라는 론문을 발표했고 그 후에도 한국 실학사상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하여 6편의 무게 있는 론문을 발표함으로써 중국 학계의 대표적인 한국실학 관련 연구자로 자리매김 하였다. 1989년에 와서 주홍성, 리홍순, 주칠성 등 학자들은 조선철학발전의 력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조선철학사상사》를 출판함으로써 학계의 공백을 메웠고 이 저서는《중국백과전서》(철학권(2002년)에 실렸다.   중일한 유학사상의 비교연구, 퇴계, 율곡 등 한국유학사상에 관한 연구 등 방면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반창화 교수의《중조일 비교철학 탐구》(1994)와 주칠성 교수의 《중국조선일본 전통철학 비교연구》(1995) 등은 중한 수교 이후 나온  비교적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 성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외에도 논문《중조 실학사상 비교》(반창화 1989), 《퇴계, 율곡 철학사상 비교》(서홍위 1990),《유학이 조선에 대한 전파와 영향 및 한국 현대화에 대한 작용》(리돈구 1994), 《유학과 당대한국》(반창화 1997),《조선철학 범주사》(반창화 1998),《주희와 퇴계의 인성론 비교》(리홍군2000),《신라불교의 본토화 연구》(허명철2002),《조선 주자학적 특점》(반창화 2003),《주자와 퇴계, 율곡의 인심도심(人心道心)비교》(이빈2004) 등등 30여 편의 깊이 있는 론문들이 국내외 학술 간물에 발표되여 학계의 중시를 불러 일으켰다. 하여 국제 유학계에서도 연변대학의 조선-한국철학연구는 홀시 못할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984년에는 국가교육부로부터 동방철학사 석사 학위점을 비준 받았고 1996년에는 외국철학 석사 학위점으로 되였는데 2005년까지 도합 62명의 석사 대학원생을 배양하였다. 그중 한국철학 관련 학위 론문만 37편으로 60%이상을 차지한다. 현재 재학중인 조선-한국철학 석사 대학원생은 29명이다.      최근에 와서 중한경제교류가 활성화되고 두만강하류지역의 개발문제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자 조선-한국경제 연구 분야 역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의 경제의 현황 및 발전모델에 대한 소개 및 연구, 중한경제의 상호 보완 관계, 동북아 경제권의 개발 모텔, 그 조건과 전략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중 비교적 돌출한 성과들을 보면 《조선경제사 개론》(백봉남, 리동욱, 1988), 《남조선 십대산업》(백봉남, 1988), 《동북아 금삼각》(최룡학, 박승헌, 1991), 《박정희경제론저선》(김동훈, 최후택, 1994), 《한국경제》(백봉남, 1994), 《라진, 선봉자유경제무역구 무역투자의 가행성법률에 대한탐색》(박흥진, 송병용, 1996), 《동북아 구역경제》(최룡학, 박승헌, 1997),《조선경제》(림금숙, 2000), 《한조 경제교류의 현황과 전망》(박승헌, 2003), 《중조 경제무역 관계》(림금숙2006)등 저서들이다.     1986년부터는 조선-한국경제 석사 연구생을 모집하였는데 이미 9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 재학 중인 대학원생은 29명이다. 석사지도교수 림금숙교수는 조선-한국경제 전문가로서 중한 수교 이후 조선-한국경제에 관한 많은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그는 중한수교이래《조선과 한국의 경제협력》(1997),《한국경제의 결구성 모순 및 기업결구 정리》(1999),《IMF후 한국금융업의 조정》(2000),《조선 경제체제 개혁》(2001),《조선 개체경제의 발전 및 금후 방향》(2002),《조선 대외개방의“삼면으로 이끄는” 발전전략》(2003),《중조 변경무역》(2004) 등 20여 편의 론문과 2권의 저서를 발표하였다.      이상의 학과 외에도 동북아정치, 교육, 법률, 문화체육 등 영역에서 조선-한국학 방면으로 적지 않은 연구 성과들을 보였다.       3 . 국내외 한국학 관련 교류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의 발전은 국내외, 특히는 한반도와의 교류를 통해 커다란 도움을 받았다. 연변대학교는 건교 초기 특수한 정치관계와 따뜻한 동포애에서 비롯된 김일성종합대학교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김일성종합대학은 연변대학교에 교과서를 제공했고 우수한 교수를 파견했으며 교수과정의 설정 등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80년대 말부터 연변대학교는 한국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1992년 중한 국교정상화는 중국 경내에 전례 없는 조선 -한국학 붐을 일으켰다. 따라서 연변대학교의 조선-한국학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국과의 학술교류는 외부와의 오랜 단절에서 비롯된 공백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극복하고 학문연구의 범위와 시야를 획기적으로 넓힐 수 있은 계기와 동력으로 되었다. 연변대학교는 한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조선-한국학연구의 발전과정을 점검하고 진맥하여 새로운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국 국내에서 최고의 연구진과 연구실적을 자랑하는 우수한 연구기관들은 지난 10여 년간 혹은 개별 학자의 방문 형식으로, 혹은 자매결연의 형식으로 연변대학교 한국학 관련 학자들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진행하여 왔고 연변대학교의 젊은 학자들을 대학과 연구기관에 받아 가르쳐 주면서 중국 경내 한국학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중국 내에서 조선-한국 언어문학학과를 개설한 대학교로는 연변대학교, 북경대학교, 중앙민족대학교 등 3개소의 대학교밖에 없었지만 현재 중국의 연해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내륙지역까지 무려 50여개소의 대학교들에 한국언어문학학과와 연구기관들이 개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주목할 부분은 여기의 약 80%의 중견교수, 중견연구원들이 모두 연변대학교 출신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연변대학교가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연구의 전파와 발전에 준 홀시할 수 없는 기여를 말해준다.     연변대학교에서 조선-한국학분야에 경주한 다양한 노력, 이를테면 한국학에 관련되는 다양한 학과의 개설, 한국학 관련 인재 육성, 자료정보센터의 건설, 한국학 관련 프로젝트의 추진 등은 오늘날 중국 경내에서 조선족의 위상을 확립하고 조선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며 나아가 중국 경내에서 조선-한국학의 전파와 진흥을 가져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최근 몇 년간 연변대학교의 한국학연구는 비단 학술연구, 인재양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교류 면에서도 큰 진전을 가져 왔으며 연변대학교의 위상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시작하였다. 연변대학교는 비단 한국의 여러 대학교 연구기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여러 대학교 연구기관들과도 좋은 관계를 건립하였고 오래 동안 갈라진 남북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데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989년부터 연변대학교의 주최로 조선-한국학 국제학술토론회를 20여차 개최하였는데 한국학연구센터에서 주최한 회의만 하여도 국제학술회의 8차, 국내학술회의 10차이며 매번 참석 인수는 80-100명에 달한다. 발표 논문도 도합 500여 편에 달한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원과 여성연구센터에서는 해마다 조선력사연구소 전문가들과 조선 김일성종합대학교 학자들을 초청해 학술교류를 진행함으로써 중국과 조선, 한국의 학자들을 련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론문을 발표하고 학술논문집을 출판하였다.     조선-한국학연구센터는 전임 연변대학교 부총장 고 정판룡 교수의 령솔 하에 일찍 198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워졌으며 지금까지 17년간《조선학연구1-4》(조문판),《조선-한국학총서1-6》(중국어판) 등 40여 권의 학술저서를 출판하였고 1999년에는《간명한국백과전서》를 출판하여 전 중국에 널리 전파하였다. 이는 연변대학교 조선-한국학연구의 대표적인 연구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 많은 중, 청년 학자들이 원로 학자들의 계주봉을 이어받아 한국학 관련 연구에 종사하고 있으며 동북아연구원, 민족연구원, 중조한일비교문화연구센터, 동북아정치문화연구소, 조선문제연구소, 조선력사연구소, 중조한일비교사연구소, 동방철학연구소, 언어연구소, 조선문학연구소, 녀성연구중심 등 연구기관들이 한국학연구중심과 긴밀한 연구협력관계를 형성하고 알찬 영구성과들을 거두고 있다     4. 한국학연구에서의 우리의 자세     현재 연변대학교는 언어문학, 력사, 철학, 경제 등 분야를 중심으로, 학부생 과정으로부터 석사과정,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인재양성 시스템과 전문연구기관을 갖추고 있기에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연구의 중요한 력량으로 되고 있다.     연변대학교에서 조선-한국학연구는 단순히 인문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의 의미보다 훨씬 더 큰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다. 조선-한국학연구는 연변대학교 인문사회과학분야의 선두자로 될 뿐만 아니라 인재양성, 학술연구 등 방면에서 취득한 성과로 하여 대학교의 전반적인 학술수준을 향상시키고 대외적인 인지도를 향상시킴으로써 기타 학과들의 발전에 본보기로 되고 또 발전 패턴을 제공해주고 있다.      혈연적, 지연적으로 한반도와의 밀접한 관련은 연변대학교의 특점인 동시에 우세이다. 동북아시대가 열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조선-한국학연구로 학문적 특색을 살리고 그 우세를 확립하는 것은 연변대학교의 내외적 여건에 부합되는 전략으로 되고 있다.     연변대학교의 사명으로 보나 민족지성인의 량심으로 보나 한국학연구를 통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중한문화교류에 도움을 주는 것은 모두 의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저의 연변대학교는 국가에서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100개 대학교로 선정되었고 민족적 특색과 지역적 특색이 선명한 우수한 종합대학교로 건설하기에 계속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총적으로 연변대학의 한국학연구 현황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는 아직 몇 가지 주의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조선-한국학연구의 총체적인 기획이 미비하고 자발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시장경제도 일정한 국가의 통제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한 학교의 학술연구도 일정한 기획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조선-한국학은 연변대학으로 보면 교학, 과학연구, 교원양성 등 여러 문제와 관련되며 또 조선학 한국학 연구 자체로 보더러도 조선, 한국 및 기타 지역의 연구 동태를 부단히 장악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연구과제의 선택, 경비조달, 인원배치 등에서 사전의 주밀한 계획과 예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매개 연구영역에 있어서도 자기의 돌파중점과 도달목표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이나 한국 및 중국 경내 기타 대학교들의 연구동태를 보아 우리가 무엇을 중점적으로 해야 하는가?  당전에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등이다.     인재양성 면에서도 사전 기획이 없이 자연발전에 맡겨 두니 단층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한때 흥성하던 학과가 지금은 모두 노쇠하여 계승자가 없어 비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세라고 인정하는 학과에 언제나 일정한 후비대오가 보존되게끔 계획이 있게 후진을 육성하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 연구는 반드시 중국 특색이 있어야 한다. 조선-한국학은 조선이나 한국으로 보면 국학이다. 때문에 거기에는 많은 인력과 재력이 투입된다. 그러나 우리로 보면 조선-한국학은 외국학이기에 많은 재력과 인력이 투입될 수 없다. 즉 한국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조선이나 한국에 비해 열세에 처하고 있는 것만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기타 대학교에 비하면 그래도 우리에게는 우세가 있다. 그중 하나는 비록 외국학이지만 조선족으로 놓고 말하면 같은 민족이고 또 연변대학교는 조선민족대학이기 때문에 조선, 한국에 비교적 익숙하고 학과 설치나 연구기구 설치 등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객관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조선고대사연구, 민족독립운동사연구, 동북아 각국 관계사연구, 비교연구 등에서 우리에게는 큰 우세가 있다.     그리고 지금 조선반도는 오래 동안 남북으로 분열되어 제각기 자기중심을 이루고 있으니 우리는 두 쪽의 우점을 흡수하여 자기를 충실히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기 어려운 과제를 우리가 할 수 있으며 남북 학자들 간의 교량적 역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연구 립각점은 비교적 객관적이다. 남북은 장기간의 정치, 군사대립으로 하여 아직도 많은 면에서 긴장이 풀려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필연적으로 학술연구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다. 즉 어느 쪽에서나 객관적이며 공정한 립장에서 문제를 대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중국 조선족학자들은 그들과 다른 립장에 서 있으므로 객관적으로 문제를 보고 연구하는데 일정한 우월성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연변대학교, 중앙민족대학교, 북경대학교 등 몇 개의 대학들에서, 그리고 많이는 조선족 학자들 속에서 진행되었다. 물론 일부 한족학자들도 있었지만 그 수가 적었다. 그러나 지금은 형세가 달라졌다. 50여개 대학에 한국어학과가 설치되고 중점대학들에 한국학연구센터가 성립되었으며 수많은 한족 청년학자 및 학생들이 한국이나 조선에 나가 조선-한국학을 배우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며 조선-한국학연구의 새 고조가 바야흐로 형성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태까지 중국에서의 조선-한국학연구의 중심이며 한국학연구 인재의 육성기지로 자처하던 우리로 놓고 보면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중점대학교들의 한국학연구는 그 학교 자체의 자질 우세와 한국 등 나라들의 중시까지 받아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우리를 초과하는 일부 연구 성과들도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도전에 대응하자면 우리만의 아닌 각 민족학자들과의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공동 연구를 하며 호상 교류하는 학술 세미나를 많이 가짐으로써 여러 민족으로 조성된 진정한 중국의 조선-한국학연구 대오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50여 년간 연변대학교에서 배출한 우수한 학자들이 취득한 성과는 바로 조선-한국학연구에 있어서 자신의 우세를 최대한 발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과 한반도는 동일한 문화권에 있으므로 비슷한 가치관, 륜리관과 문화리념을 가지고 있다. 근년에 와서는 중국에서의 “한류(韓流)”와 한국에서의 “한풍(漢風)”으로 두 나라 인민들의 문화생활에 주는 영향이 크다. 연변대학교는 지금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회와 도전에 직면해있다. 천여 개 되는 중국의 대학교 중에서 평범한 대학으로 남느냐 아니면 자체적인 특성과 우세를 갖춘, 민족적 특색이 선명한 명문대학으로 발전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조선-한국학을 비롯한 연변대학교의 우세를 십분 발휘할 필요성이 한결 분명해진다.                                                                  (조선-한국학총서 6  흑룡강인민출판사  2006. 12)                                                                               
52    전화상담에서 본 조선족 혼인가정의 위기현상 댓글:  조회:5786  추천:13  2011-07-30
                                         전화상담에서 본                            조선족 혼인가정의 위기현상         개혁개방은 중국사회에 전례 없는 변혁을 가져왔다. 이러한 변혁은 경제생활, 정치생활 령역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가치층면에서도 뚜렷이 보여 지는바 그중 혼인가정 관념의 변화는 특히 사람들에게 주의를 일으키는 문제로 되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가져다준 가장 큰 영향의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관념상에서 자아를 의식하도록 한 것이며 연애, 혼인 가정 중에서 자아의 가치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불가피적으로 전통 관념과 현대의식지간의 격렬한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전통사회의 혼인은 경제적, 정치적, 종족적, 가족적 이해관계의 각종 쇠사슬에 억매여 있는 것이라면 현대혼인은 남녀쌍방이 자기의 리상에 따라 자신의 발전을 추구하며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장악함으로써 비교적 완미한 인생을 가꾸어 보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혼인과 가정이 오직 생아육녀(生儿育女)의 “합작사”거나 생계를 유지하는 “경제공동체”인 것이 아니라 남녀쌍방이 사상, 문화와 정감면에서 융합을 가져오고 심리상, 감정상 공명을 찾으며 공동한 행복과 동등한 권리를 추구하고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장악하려 하는 것이다. 즉 가정을 본위로 하는 전통적 혼인관은 개인생활의 행복을 본위로 하는 독립자주의 혼인관으로 대체되었고 자발적인 혼인이 자각적인 혼인으로 전변되었으며 정감적인 요구와 만족이 혼인의 주요요소로 되였다. 이는 오늘날 혼인가정질량의 새로운 갱신을 보여주고 생존방식과 생활체계의 립체적 변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류사회의 하나의 발전과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변혁은 배우자선택표준, 결혼동기, 성 관념, 생육관, 리혼관 등 면에서 모두 현저한 변화를 일으켰는바 배우자선택 면에서 보아도 80년대 이전의 가정출신, 정치조건, 경제토대 등 외재적 선택을 위주로 하던데로 부터 현시대에 와서는 개인품덕, 재간, 능력, 성격 등 내재적인 것을 우선으로 하는 선택방향으로 전이되어 애정을 기초로 하는 혼인이 기본추세를 이루고 있다.      성 관념에서 보면 80년대 이전에 실행된 육체금욕주의, 정신금욕주의는 이미 지나간 일로 되고 성문제가 사회여론에 공개적으로 나타남으로서 사람들의 성 관념도 개방 되였다. 하여 성지식의 전파, 성문제의 토론은 이미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일로 되고 있다. 혼인가정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은 물질생활과 정신생활 외에 성생활도 없어서는 안 될 인간의 기본 욕구임을 인식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의 혼인가정문제를 살펴볼 때 상술한바와 같이 시대에 발맞추는 진보적 측면이 있는가 하면 또한 홀시할 수 없는 위기현상도 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연변대학민족교육원에서 운영하고 있는《생명의 전화》는 개통되여 10여년래 사회 각 분야에서 들어오는 1000여 통의 상담전화를 받았다. 그 사례들을 통계해보니 혼인가정문제와 성문제가 58%로 반수이상을 차지했는데 그중에서도 애인문제(혹은 제3자문제)가 76%, 성문제가 24%를 차지하였다. 아래에 몇 가지로 나누어 보자.      一. 애인(情夫,情婦)현상      이 문제는 전화상담에서 가장 많이 제기된 문제로서 그것은 바로 일부사람들이 소위 부르짖는 “성 해방”, “성 자유”, “자유적 생활”, “사생활”추구의 직접적인 산물인 것이다. 개방 후 자본주의 세계로부터 불어 온 이런 그릇된 사조는 일부 부패 타락한 인간들에 의해 모방되고 만연되어 아주 빠른 시기 내에 각양각색의 애인관계가 산생 되였다. 미혼자와 기혼자지간, 기혼자와 기혼자지간, 두 미혼자가 혼인을 기초로 하지 않는 혼외관계 등등은 순 감정의 수요, 혹은 물질욕구의 만족, 혹은 새것을 탐내고 낡은 것을 싫어하는 사상의 반영으로서 어떤 것은 가정을 파괴했고 어떤 것은 가정을 유지하면서, 공개적 혹은 은폐적으로, 장기적 혹은 잠시적으로, 정신적 정감에 치우치거나 단순 이성적 만족에 치우치는 등 각종각양의 혼외련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화상담에서 제기된 애인현상을 보면 대개 남40-50대, 녀30-40대가 가장 많았다. (상담사례들은 지면으로 공개 못함) 상담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이런 혼외 량성관계나 외도행위는 혼인제도와 가정륜리도덕에 어긋날 뿐 만 아니라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엄중히 파괴하고 본처나 본남편들께 심리고통을 줌으로서 자타의 생활과 사업, 나아가서는 사회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는 우리사회 혼인가정에서의 한개 위기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이 오늘날 사회에 스스럼없이 만연되고 발전해 가는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고 보는데 그중에서도 사회법제제도의 불 엄밀성, 치안관리의 방임, 돈벌이를 위한 유흥업체들과 란잡한 서비스장소 등이 객관적 환경을 조성해 주었을 뿐 만 아니라 더욱이는 사람들의 타락되고 모호한 인식에도 그 주관원인이 있다고 본다.      애정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특유하고 신성한 정감세계로서 숭고한 정신생활이며 순결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렬거한 그런 사람들은 마치 남녀사랑은 개인일이니 그 어떤 제약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사실상 “사생활”이란 오직 상대적 함의를 가지는바 그것은 사회와 인간관계를 리탈 할 수 없으므로 결국 절대적 자유는 없는 것이다. 남녀가 일단 가정을 이루었다면 그 시각부터 쌍방은 곧 가정과 부모 및 자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애인현상은 바로 이런 책임을 무시하고 개인의 향락만 추구하는 극단적 자사자리 표현이며 가정을 파괴하는 비 도덕적 행위로서 응당 사회여론의 엄연한 질책과 법률의 무정한 제재를 받아야한다고 본다.      애인현상의 산생원인을 보면 다음의 몇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      (1) 시대의 발전에 따라 물질이 풍부해지고 생활이 제고 된데서 청소년들의 성 성숙 년령이 앞당겨지고 인간의 수명이 크게 연장된데서 평생의 단일한 이성교제에 불만족을 느끼군 한다. 녀성들이 성에 관한 가치관념도 변화하여 절대 성적공구로 되지 않으려 하며 성과 사랑은 결합되어야 한다고 보기에 “사랑을 위한 성행위는 비도덕적이 아니다”라고 여긴다.      (2) 독신자녀정책으로 하여 생식문화가 다만 자녀번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 쾌락의 목적에도 있다는 관념이 날로 많은 사람들께 인식되었다. 따라서 일부 부패한 상층인물들과 돈을 물쓰듯 하는 일부 계층의 소수 사람들의 깨끗하지 못한 사생활은 주위사람들께 시범작용을 하였고 유흥업체들의 돈벌이 경쟁은 혼외련의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3) 력사적으로 조성되였던 일부사람들의 불행한 혼인은 오늘날 유족한 환경에서 보상받아 보려는 심리가 생기고 연애 없이 결혼한 사람들은 “보충(補課)”해 보려는 욕망이 생기며 “애정 없는 혼인”은 “혼인 없는 애정”을 찾으려 한다.      (4) 리혼하고 다시 가정을 이룸은 그 대가가 너무 크지만 정부를 두면 혼인의 부족 점을 미봉하면서도 가정을 파괴하지 않으므로 큰 모험이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경제수입의 증가, 주택조건의 개선, 소위 “은사권”의 불 침범 등은 혼외련 존재의 환경을 지어준다.      (5) 심리적으로 볼 때 성애는 불온정한 것으로서 결혼하였다 하여 “예쁜 것을 좋아하고” “이성이 서로 흡인”하는 규률이 소실될 수 없으며 또 동일한 성별이라 하여도 성적인 흡인력과 성욕, 성관념에는 차이가 있으므로 부부사이 성불화로 하여 깨여진 성애는 왕왕 제3자를 찾아 만족해 보려는 욕구가 생기게 된다.      (6) 해외돈벌이 등으로 인한 부처간의 장기 분거는 제3자 차입의 공간을 만들어 주며 또 사회진출로 인한 인구류동 반경이 커가기에 이성접촉의 기회도 많아지므로 각종현상의 애인, 특히 외지에서의 “림시가족”, “현지처” 등이 존재할 수 있는 환경을 지어준다.      (7) 색정광고나 황색잡지들의 범람은 미성년들에게 저급적 취미를 가해주고 대증매체의 괴상한 보도나 지나친 과장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착오적인 영향을 준다.      二. “성 해방”현상      소위 “성 해방”이란 개념은 최초 구라파 문예부흥시기 인문주의자들이 봉건적 신학과 허위적인 금욕주의를 반대하고 인성을 주장하면서 성욕도 인간의 기타 욕망과 마찬가지로 만족을 가져야하지 압제해서는 안 된다는 론리하에 량성관계를 봉건종법의 쇠사슬에서 해방해 내려는 시도로 그 당시에는 비교적 진보적인 의의를 띠였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확립과 서방세계의 날로 엄중해지는 혼인위기에 따라 “성 해방” 론자들은 인성과 그의 적극적 의의만 주장하고 개인욕구의 만족과 자유만을 추구하면서 애정, 혼인의 엄숙한 륜리도덕성을 부정하고 이로 인해 산생되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회피한 것이다.      인류의 성행위는 동물처럼 그렇게 단순히 성숙만 되면 즉시 성욕이 산생되어 급급히 이성과의 결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성행위 본신은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회의 여러 가지 제약을 받으며 이런 제약 속의 성 행위 방식은 곧 사회의 도덕, 전통과 풍속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성행위를 사적인 일로 간주하고 개인의 사욕을 위해서는 륜리도덕은 물론 인성까지 잃어버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화상담사례는 지면에서 생략함)      그 외에도 안마방과 다방에서의 반 라체 아가씨들과의 란잡한 성관계, 중학교 녀학생들의 부끄럼 없는 류산행위, 대학생들의 미혼동거 후 결국 갈라지게 되여 죽는다 산다하는 등등 날로 열어지는 정조관념과 인간 최저의 도덕마저 무시하고 타락해 가는 어두운 구석의 이런 추잡한 성 행위는 한창 자라는 청소년들의 심신건강을 해치고 순진한 그들의 마음에 먹칠하여 인생을 암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능히 용기를 내여 심리자문 전화를 걸어오거나 유관 부분에 반영하는 당사인들은 그래도 도움을 받아 생의 희망을 찾고 방법을 대여 역경 속에서 뛰쳐나 다시금 새 생활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런 용기가 없는 피해자들은 그 몸서리치는 나날을 그냥 그렇게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매번 이런 성 피해의 전화를 받을 때면 우리 상담원들은 심정이 침울해지고 가슴 아프며 성 혼란이 가져다주는 우리사회 구석구석의 암흑면으로 하여 불안감을 느끼군 한다.      三. 리혼과 출국가정문제      개혁개방 전 우리나라는 줄곧 세계상에서 리혼률이 가장 낮은 국가의 하나였다. 장시기 동안 사람들은 리혼이라면 불문곡직하고 나쁜 일로만 생각해 왔기에 녀성들은 체면 때문에, 여론 때문에 또는 아이 때문에 죽어가는 혼인의 고통과 시달림 속에서도 “가정”이라는 허울을 부등켜 안고 리혼의 방식으로 새로운 행복을 쟁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사회의 변화와 녀성들의 자아의식의 제고에 따라 그들도 자신의 인격과 가치를 인식하게 되였고 모든 것에 순응하는 가부장적 의식에서 벗어나 과감히 새생활을 추구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현재 리혼소송안건 중 70%가 녀성이 원고로 된 것이며 재혼한 녀성수도 남성보다 퍽 많다고 한다. 사회는 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부부의 감정불화에서 리혼으로 혼인을 결속하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임을 인정하게 되였다.      그러나 리혼과 재혼이 사회에 모두 리로운 것은 아니다. 리혼, 재혼으로 인기되는 많은 문제들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자녀와 친속, 그리고 주위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문제로서 홀시할 수 없는 위기현상들을 나타내고 있다. (상담사례를 지면에 생략함)      이상의 사실들에서 알 수 있는바 리혼, 재혼 후 나타나는 각가지 모순, 출국바람에 가짜리혼이 진짜리혼으로 되여 파괴된 가정, 리혼 후 자녀와 생리별하여 고통에 모대기는 애아버지, 돈벌이에 가정까지 탕진되여 역경 속에서 헤매야만 하는 자녀들 …… 리혼바람 출국바람은 오늘날 우리조선족사회에 실로 가슴 아픈 사연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외화를 벌어온다는 그 하나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그야말로 홀시할 수 없는 위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정당한 리혼이던 비 정당한 리혼이던 그 결과가 빚어지는 후과는 복잡 다단한 것으로서 유관부분에서는 리혼수속시 응당 새로운 규정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리혼 분급제 같은 것이다. 그 내용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포함될 수 있다. (1) 자녀가 미성년인 부부는 리혼신청시 반드시 학습반에 참가하여 리혼이 자녀에게 주는 피해를 똑똑히 인식하게 해야 한다. (2) 리혼부부는 자녀의 전도를 안배할 계획서를 작성하여 법적공증을 받아야 한다. (3) 자녀가 있는 부부는 응당 가배의 신중성을 가지고 될 수록 아이가 큰 다음 갈라지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등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 법률제도와 정책은 녀성의 합법적 권리와 녀성의 발전을 보증해 주고 있으며 사회변혁 중에 나타난 문제들은 부단히 연구되고 해결되며 완선화 되고 있다. 녀성과 남성은 공동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바 녀성이 전통혼인의 속박에서 벗어나 신녀성의 형상을 수립할 때 남성 역시 전통관념에 대해 재 사고하고 조정하며 함께 현대적 사유를 받아들여야하는 것이다. 즉 사회의 변혁과 가정의 변혁 중 녀성의 각성과 발전은 남성들의 승인과 존중을 받으며 부부는 서로 접수하고 서로 융합되는 과정 중에서 함께 현대형의 가정으로 전변시켜 가는 것이다. 이것이 당면 혼인가정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자세가 아닌가 싶다.                                                          (2008년 8월 연변대학여성연구중심 학술회에서 발표)  
51    80후세대 출산관념의 변화에 관하여 댓글:  조회:4867  추천:13  2011-07-26
     80후세대 출산관념의 변화에 관하여              --- 중앙인민방송국《여성시대프로》인터뷰 (7.15) 기자: 아이를 낳고 자식을 키우는것은 인생의 희사입니다. 그러나 지난세기 80년대에 출생한 젊은이들이 결혼생육년령에 들어서면서부터 새로운 생육고봉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분투중에 있는 80년대에 출생한 부부들은 부담스러울 정도의 생육원가가 자신들의 사업과 전도에 영향줄 뿐더러 앞으로의 아이의 인생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여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네,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 --- 오늘 시간에는 80년대후에 출생한 부부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 —생육에 대해 얘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일부 젊은이들 의 생각부터 들어보겠습니다. 김1: 저는 올해 27살입니다. 여자친구와 사귄지는 2년정도 되는데요. 래년쯤 결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결혼후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대도시에 살아남을려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집도 사야 되고 주위친구들한테서 들은 얘기인데요. 결혼을 할려고 해도 돈이 엄청 든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남자이다보니 부담이 좀 큽니다. 그리고 남자면 사업에서 일정한 성과도 이루어야 하는 데 , 글쎄요. 아이가 있으면 사는게 팍팍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둘만 사는것도 사실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김2: 임신한지 3개월 반정도 된 임신부입니다. 지난해 10월에 결혼을 했거든요. 그런데 생 활원가와 양육원가를 생각하니 웬지 부담스러워 바로 아기를 갖는것이 결코 옳은 선택인지 고민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는 낳기만 하면 제절로 자란다고 하지만 요즘처럼  유치원에 보내기도 힘든 세월엔 어른들의 말씀도 꼭 일리는 있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쇼핑하러 나가 보면 아이들의 옷이 어른들의 옷보다 오히려 더 비쌉니다. 아이와 관련된 물건이면 얼마나 비싼지, 그래서 남편과도 구경 아이를 낳는것이 맞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 나눠본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남편은 집에서 외동아들이거든요. 그래서  시부모님들이 저희보다 오히려 아기를 더 바라는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임신전 고민이  요즘엔 오히려 행복한 고민으로 바뀌였습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며칠전 병원으로 검사받으러 가서 아기사진도 보고 하니 이젠 실감이 납니다. 좀 더 빨리 임신했더라면 이런 행복을 더 빨리 느낄수도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검사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아이를 위하는것이라고 생각하니 아깝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야 겠다 는 동력도 생기는것 같습니다. 저희 또래 특히 80년대이후에 태여난 사람들은 흔히 80后라고 불리우는데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기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던데요. 제가 보기엔 낳아야 된다고 봅니다. 기자: 아이는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나 치렬한 경쟁속에서 자신의 설 자리조차 찾기 힘든 세월에 젊은이들은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가정 즉 팅크가정을 유지해 나가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슬하에 아들 2명을 두고 있는 본 방송국의 선배님을 모시고 얘기 들어보겠습니다. 손: 아이는 한 가정의 생활을 유지해 가는 뉴대로서 없어서는 안될 구성부분이라고 봅니다.  저는 아들 둘이 있는데요. 큰 애는 13살. 둘째 애는 11살입니다. 여자아이도 아니고 남자아이 둘이여서 키우는데 힘이 배로 듭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녀를 낳지 않는 팅크가정을 꾸려가길 바란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요. 사실 저 역시 젊었을 때엔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적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여자이니 좀 더 멋도 부리고 싶었고 또 친구사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니 아이를 낳으면 사업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을 해서 주위 친구들에 비해 애를 좀 늦게 낳은 편인데 지금에 와서 키울려니 힘들때가 많습니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듯이 가끔은 후회될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하루하루  커가는 아들들을 보면 행복합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무슨 일이든 후회가 되는지 않 되는지도 해봐야 알수 있다. 때문에 후회가 되더라도 아이는 낳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낳고보면 그것이 어디까지나 잠시적인 후회임을 알게 될것입니다. 젊은 부부들은 가진게 아무도 없고 이룬게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애를 키우겠냐고도 하던데요. 좀   더 아껴쓰고 착실히 살림을 해가노라면 아이 한명쯤은 변변히 키울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기자: 물가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아이 하나 키우는 비용도 날로 높아만 갑니다. 특히 공공봉사자원이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생육원가는 해마다 올라가는 추세입니다. 게다가 생육고봉에 태여난 아이들은《태여나서부터 줄을 서야 하는》운명에 처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그리고 취업, 결혼, 지어 양로 등 일련의 사회문제는 아이를 낳을까 말까 고민해야 하는 젊은 부부들이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죠. 일전에 《청년연구》에서   란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보고서에는 상해시 서회구를 전형으로 상해에서 18세까지 아 이 하나 키우는데 드는 비용을 조사했는데요. 그럼 아래에 그 수치에 대해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임신기간 비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산전엔 진단검사를 13-15차정도 하게 되는데 여기에 드는 비용은 1000원정도 입니 다. 다음 9개월정도 영양품을 먹게 되는데 거기에 3000원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복사방지옷 400원, 영아용품 3000원, 임산부 양성비용1000원 , 기타 3100원까지 합하면     임신기간에 1만 1500원정도의 돈이 들게 된다고 합니다.    다음 출산때에 드는 비용인데요. 입원비를 하루 50원으로 계산할때 8일로 계산하면 400 원정도가 듭니다, 그리고 순산이면 2000원정도입니다. 거기에 기타 비용까지 합하면  2700원정도가 든다고 볼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출산후부터 유치원에 가기까지 비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보모고용기간을  3년으로 볼때 한달에 600원 으로 계산하면 도합 2만 1600원이 듭니다. 그리고 기저귀 6 개월치 1800원, 분유, 영양품, 유아도서, 신체검사, 진료비 등을 합치면  4만 5100원정도의 비용을 들게 됩니다.    다음 유치원비용을 보면 학비에 식사비용. 그리고 기타 도서, 완구, 만화영화값을 합치면 도합 6만 5700원정도의 돈이 든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소학교단계에 드는 비용에 대해 봅시다. 소학교단계에서 드는 비용은 주로 학교선택비, 학잡비, 책값, 학원비, 식사비용, 교통비, 위생보건비, 사회실천활동비, 특장보도반 등으로 나눌수 있는데요  6년에 도합 10만 3780원정도의 돈이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학교 단계에서는 학교선택비, 학비, 학잡비, 책값, 보충수업 혹은 가정교원고용비, 식사비, 위생보건비, 사회실천활동비, 교복, 복장(교복외), 학습용품, 용돈과 기타 지출 등을 합치면 6년간 16만 6154원정도의 돈이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단계는 학비, 학잡비, 책값, 용돈, 관광, 실습비용, 식사비 등을 합쳐  4년에  도합 9만 5000원정도의 비용이 들수 있다고 합니다.     이상 각 단계의 비용을 합쳐보면 약 49만원 정도의 비용이 듭니다.     말 그대로 어머어마한 비용이긴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적인 부분만 고려해서 아이  낳기를 거부한다는건 구경 바람직한 일인지 …네, 연변대학 여성연구중심 강순화선생님을 모시고 여성문제 전문가로서의 그분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조언의 말씀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순화:     80년대 이후, 시장경제가 몰고 오는 물질의욕의 증장, 가치관념의 변화와 생활방식의 개변에 따라 사람들은 경제적 지위, 사회적 지위를 따지게 되며 젊은이들의 자아가치 실현욕구는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多子多福》하다거나《후대잇는다》는 등의 전통적 생육관념은 이미 소실되고 새로운 생육관이 젊은세대들 속에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들은 자기 세대의 성공과 향락을 첫 자리에 놓고 아이를 낳지 않거나 혹은 낳아도 하나이상 더 키우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라도 잘 키우면서 자기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가장 리상적이라는 자기중심의 관념 때문이지요. 최근에는 아예 생육을 거부하는 소위 팅크가족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80년대 이후의 독신자녀세대는 생육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60-70년대까지 만도 우리 조선족의 출산률은 그래도 비교적 높았습니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자식 여럿을 키워온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 이후는 이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생육거부 사상은 도시로부터 농촌에까지 감염되고 있어 우리 조선족인구는 이미 90년대 초부터 20여년 간 련속 미누스장성 상태입니다. 현재 조선족 집거구인 연변만 보아도 조선족인구는 전 자치주 인구의 36.8%밖에 안됩니다. 조선족 인구가 이 상태로 계속 내려간다면 멀지 않아 20%이하로 내려가 중국의 유일한《조선족자치주》란 의미도 상실하지 않겠는가가 우려되는 것입니다.    한 에서 보면 1626세대중 두번째 아이를 낳겠다는 가정이 겨우 41세대로 2.52%밖에 안되며 121세대가 돈을 주면 두번째 아이를 낳겠다고 표시했는데 이 역시 7.4%밖에 안됩니다. 그외 90%이상 가정에서 남자애건 녀자애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해도 두번째 아이는 절대 낳지 않겠다고  표시하였습니다. 그 리유라면 경제가 곤난하고 생활수준이 높지 못함이 45.5%, 학교 교육비용이 높아 감당못해 낳지 못함이 35.6%를 차지하였습니다. 즉 총적으로 경제적 원인이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에서도 젊은부부들이 말하다시피 집도사야하고 사업에서 성과도 내야하니 아이가 있은 후의 생활원가와 양육원가를 생각하면 부담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청년연구》에서 상해시의 양육비용을 조사했다고 하는데 제가 생각하건대 상해같은 대도시의 양육비용과 기타 중소도시의 양육비용은 그 차이가 있지 않을가 봅니다. 또한 그 비용대로 계산해 본다하여도 한 아이가 대학까지 졸업하고 취직하여 돈을 벌 때가 된다면 늦게 25세까지를 예산해 보더라도 49만이나 50만의 돈은 결국 월 평균으로 따지면 1600원좌우 밖에 되지 않으니 젊은부부가 열심히 일한다면 이만한 경제는 능히 담당할수 있지 않을가도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지혜롭게 살림을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    순 경제를 따지면 이러저러하다고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선에서도 말하다시피 아이는 가정을 유지하는 사랑의 뉴대이고 부부를 행복하게 하는《금쪽》같은 존재입니다. 옛날부터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아이들만 있으면 웃음이 넘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은 젊어서는 부부만이면 다 될듯 하지만 로년에 들어서면 자식이 없는 분들만큼 처량한 처지가 없습니다. 지금 선진국에서도 많은 독거로인들이 아파트 빈 집에서 숨을 거두고 처참히 시체로 발견되는 사례를 종종 볼수가 있지 않습니까... ...?    그러니 자식은 꼭 있어야 하고 그 자식들에게 형제가 있으면 더욱 좋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좀더 아끼고 계획적으로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자신들과 같은 독신자녀로만 만들지 않는다면 그애들은 앞으로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부모에게도 함께 효성할수 있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 70년대 부모들은 대부분이 두자녀 가정이여서 지금 60이 넘으니 우선 아들딸이 산같이 큰 의지가 되고 또 정신상이나 물질상에서도 자식의 덕을 많이 보고 있는듯 하여 이 이상 큰 행복이 또 어디에 있냐 싶습니다.        가정경제기능, 자녀양육기능, 양로기능 등 면에서 이렇게 인구가 방대한 하고 발전중인 중국으로 놓고 볼때 여전히 부모 자식을 위주로 하는 가족자체의 힘이 중요하지 모두를 국가의 부담이나 사회의 복지로 대체되기는 아직도 한 세대는 지나가야 실현될런지 하는 기나긴 시간이 수요될 것으로 보아집니다.      중국정부에서는 일찍 우리 200만 조선족을 비롯한 인구 천만이하의 상당한 수의 소수민족들에게 아이를 둘씩 낳을 수 있다고 허용하였습니다. 이는 중국 민족정책의 훌륭한 체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날 우리는 오늘의 위기를 예견 못했고 70년대 후부터는 산아제한 정책을《좌》적으로 집행하여 산아제한의 모범자치주로 정부의《표창》은 받았지만 결국 오늘의 현실은 우리 민족의《량적쇠퇴》라는 엄중한 후과를 빚어내게 되였습니다. 만일 이렇게 지속된다면 우리 조선족은 중국의 56개 민족가운데서 약소민족으로 전락되여 사회적 지위가 보잘것 없게 될 것은 물론, 조선족자치주라는 독립적 군체의 존재마저 상실하지 않겠는가가 우려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상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으려는 생육관념은 급작스레 닥친 시장경제 속에서 엄청난 소비지출과 낮은 수입간의 모순격차로 하여 경제부담이 과중해진데서 생겨난 것이 사실입니다. 인제는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중시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한편 자치주주장이 직접 책임지고 계획출산지도소조를 내오고 계획출산 목표를 제정하고 있습니다.    그 규정들을 보면 확실히 여러 가지 실제적인 우대조치들을 취하여 조선족 인구 증장에 커다란 지지와 고무를 주고 있습니다. 상세한 조치는 아래와 같습니다.    (1)부부 쌍방이 모두 농민이고 변경 향진에 거주하며 두 아이가 모두 딸애일 때: (2)재혼부부가 재혼 전 각기 아이 하나가 있을 때: (3)재혼부부가 재혼 전 일방에 두 아이가 있고 다른 일방은 25주세가 넘었지만 아이가 없을 때: (4)두 아이 중 하나가 비 유전성 질병이 있어 정상적인 노동력으로 성장될 수 없을 때 등 조건에서 다시 아이를 가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이미《독신자녀부모광영증》을 타고 다시 출산할 때 원래 받은 장례금은 물리지 않으며 두 번째 아이의 출생으로부터 16세까지 탁아비 ,입학금, 치료비 등을 독신자녀와 동등한 대우로 합니다. 산모의 산가(産仮)는 30일 증가하며 남편도 7일의 호리가를 주고 호리기간의 공자와 장금은 그대로 발급합니다《희망 공정》,《봄 우뢰》등 빈곤지구 아이들을 돕는 장례 계획은 2태호를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등입니다.    나라의 민족정책과 산아제한정책이 이럴 듯 소수 민족의 출산을 부추겨주고 있으나 우리민족의 출산관념은 아직도 쉽게 개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종 매체와 민간단체들에서는 민족의 번영장성을 위하여 힘을 내야할 때가 되었다고 홍보하며 우리 민족 자손만대의 흥성을 위하여 시대와 민족이 부여한 이 력사적이고 성스러운 사업을 위하여 우리는 힘껏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합니다.    물론 아직도 여러 가지 애로가 크지만 물질적 기초가 점차 제고되고 사회적 조치들이 따라가며 사람들의 관념과 인식이 바꿔지면 많은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거나 또 아이를 하나 더 키우려 할 것입니다. 이미 행동에 옮긴 가정들도 적지 않게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대학의 젊은 녀성교원들은 매년 한 두명씩 륙속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첫애가 커가고 두 부부가 재미없을 때 둘째 애가 생기니 애 엄마는 물론, 남편까지도 애가 귀여워 어쩔줄 모르며 퇴근하면 집에 일찍 오고 외돌이를 적게 하며 집에 마음을 붙혔고 큰 애도 저절로 섬을 차려 형 노릇을 잘하니 가정에는 항상 웃음꽃이 만발하다고 합니다.    사회에서의 각종 우대정책은 물론 직장에서도 부모에게 장례금을 주고 긴 휴가도 주면서 봉금은 그대로 발급하며 학교에서는 둘째가 있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조선족의 두 번째 아이 출산은 환영과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점차 출산관념을 바꾸어 간다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밝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행위문화로서의 혼인, 가정은 물질문화 제도문화 그리고 정신문화의 복잡한 역동관계 속에서 부단히 변해왔음을 볼수 있습니다. 력사의 부단한 발전에 따라 세상만물도 천변만화 하듯이 젊은이들의 생육관념도 부단히 움직이고 변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개혁개방의 성숙기에 들어서는 21세기의 중국의 발전 속도로 보아 그 변화가 더욱 놀라울 것이라고 봅니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이며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몇십년 안에 새 물결이 올 것이다. 그 물결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 심지어 투쟁하는 방식까지 모두 바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명의 변환이라고 할 수 있다... ... 앞으로의 세상은 산업혁명 이전처럼 가정의 기능이 중요해지며 그와 함께 녀성들의 능력과 몴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제3의 물결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힘이 아니라 감성과 두뇌가 중요한 생산요소로 되면서 녀성능력이 남성과 동일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따라서 21세기 부부쌍방은 평등하게 가사로동을 분담하게 될 것이며 경제적 책임도 평등하게 될 것입니다. 발달한 선진국처럼 국가의 복지가 매 가정에 락실될 때면 지어 육아도 더는 가정의 부담으로 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인생의 향수가 되어 부부마다 쟁취하고 그 복을 누리는 사랑의 열매로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보다 넓고 멀리보는 개방된 심리상태로 생육과 양육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해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50    연변의 과학기술과 녀성교육 댓글:  조회:4630  추천:40  2010-12-07
          연변의 과학기술과 녀성교육                    중국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강순화             一. 연변지구와 연변의 과학기술    연변은 중국조선족의 주요 집거구이며 조선족인민들이 민족구역자치를 실행하고 있는 지방이다. 근로 용감하고 지혜로운 200만 연변인민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이 땅에서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며 세세대대로 살아 왔다. 지금 자치주의 총인구는 217만7126명인데 그중 녀성인구는 109만2343명으로 전주 총인구의 50.17%를 차지한다. 전 자치주의 조선족인구는 37.69% (82.0481만명), 한족 59.29% (129.0868만명), 만족 2.6% (5.6523만명), 회족 0.3% (6633명), 몽고족 0.09% (1935명)기타소수민족 0.031% (686명) 등이 있다. (2005년 연변통계년감 자료) 자치주에는 6개시와 두개 현이 있는데 총 면적은 42700km로서 중국 길림성의1/4, 대만성의1.2배, 한국(99393.81km)의 약 43%가 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력사는 유구한바 일찍 26000년 이전 구석기 말기에 연변에는 이미《안도인》이 생존하고 있었고《연변》이라는 명칭은 1920년 전후 이 땅이 3국교제의 변연에 있고 또 연길변무공서 관할에 있다고 하여 연변이라고 하였다 한다. 1930년대 중기에 일제와 괴뢰만주국이 연길시에 세운《간도성 전농 모범장》이 당시 연변지구에 있어서 처음으로 되는 과학연구기구로 칠수 있었지만 기술일군은 겨우 12명밖에 안 되었다. 이밖에 몇 개의 중요한 공장, 광산에 그저 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분석실 혹은 실험실을 설치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한 후 연변에는 인민정권이 건립 되였으며 간도성 정부를 설립하였다. 1952년9월3일에는 민주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성립했으며 1955년12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이름을 고쳤다.     해방 후 특히는 건국이후 공 농업 생산과 문화교육사업이 발전됨에 따라 과학기술사업도 상응하게 제고되고 발전 되였다. 연변의 과학기술사업은 농업과학실험으로부터 시작 되었는데 일찍 룡정, 연길 등지에 세운 연변수전실험장, 연변수토류실방지실험소, 수리관개실험소들에서는 농업과학기술을 널리 보급 시켰으며 1956년 10월에 이르러서는 1200여명의 과학기술보급 선전원을 가지고 있는 연변과학기술보급협회가 정식으로 성립 되였다. 1958년 초에 연변과학기술협회로 개칭하고 그 산하에 농학, 수리학, 림학, 화학, 지질지리 등 14개 학회를 두었는데 회원 5000명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50년대 이후에 와서는《민간전문가》들이 나타나고 중요한 과학성과들이 이룩 되였는데 안도현 농촌 귀향지식청년 류창은은 장백고산지대에 알맞은《만보11호》,《만보21호》벼 우량종을 배육하여 벼농사 산량을 2-3할(20-30%) 증산할 수 있었고 연길시 장백향의 최죽송은 벼 다수확기술을 모색해 냈는데 그 경험은 전국에 보급 되여 그 본인은 중국농업과학원 특별 초빙연구원으로 초빙 되였다. 조선족 농민 김상욱, 최일선이 길러낸 연변《사과배》는 그 맛과 향기로 전국에 소문을 놓았다.    과학기술보급사업이 생기발랄하게 발전함에 따라 전문과학연구기구가 련이여 세워졌는데 1959년 자치주의 첫 과학연구기구-연변농업과학연구소(과학연구일군 249명, 조선족 74명, 9개 연구실 한개 과학정보실)가 설립 되였고 뒤이어 1962년부터 1973년까지 연변잠업연구소(연구일군62명, 조선족30명), 연변림업과학연구소(연구일군34명, 조선족27명), 연변농업기계연구소(연구일군55명, 조선족41명), 연변과학기술정보연구소(연구일군21명, 조선족19명) 연변과학기술연구소(연구일군38명, 조선족34명)등 32개 자연과학연구소가 세워졌으며 1963년부터 연변조선민족언어연구소, 연변력사연구소 등 10여개 사회과학 연구기구들도 잇달아 설립 되였다. 1978년 3월 북경에서 소집된 전국과학대회에서 연변의 13가지 과학연구성과가 영예롭게 우수성과상을 탔으며 두 개 단위가 전국 과학기술 선진단위로 평의 되였다.    개혁개방 이후 나라의 사업 중점이 경제건설에로 옮겨지면서 연변의 과학기술사업은 우후죽순마냥 생기를 띠게 되였다. 1991년에는《과학기술로 자치주를 진흥 시킨다》는 전략적 지도사상을 세우고 과학기술 진보와 로동자소질 제고에 의거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침을 실천하였다. 자치주 정부에서는 과학기술 대오를 확대하고 과학연구 환경을 개선했으며 공헌이 있는 과학기술 일군들을 장례하는 등 정책을 실시함으로서 광범한 과학자들의 적극성과 창조성을 불러 일으켰다. 각항, 각 전업의 과학연구기구들도 육속 보충 건립 되였는데 농업기계, 장백산 특산(인삼, 모기버섯, 더덕 등의 규모화 기지건립), 야생동물, 민족의학, 식품과학, 림업 양봉, 응용과학 등 21개 전민소유의 자연과학 연구기구들을 건립하였고 력사, 문학, 예술 등 사회과학 연구기구들도 새롭게 세워졌다. 목전 전 자치주 8개 시현에 모두 과학기술 부현장、시장이 있고 55개 향정부와 97개 향진에 과학기술 부향장、진장, 과학기술조리 등을 배치하였다.     연변대학교를 위수로 한 각 고등학교들에서도 1957년부터 육속 과학연구실을 설립하였는데 현재 사회과학분야에만 50여개 연구소와 20여개 연구실에 1000여명의 전직 연구일군들을 두었다. 연변의과대학에는 천연약물연구소、생물면역연구소、기생충연구소、환경의학연구소、식품건강연구소、심혈관、유전우생(遺傳優生)、소화생리、종양생화、유기물、간염、약물제조(藥物製劑)등 연구소와 연구실이 있는데 전직 연구원만 250여명이 있다.    중앙 11기 3차 전원회의(1978년)이후 연변에서는 여러 가지 형식의 과학연구 도급제도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과학연구 기구와 과학연구일군을 합리하게 이동시키는 것으로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의 결합을 다그쳐 나갔다. 인재 이동 체제를 개혁한 후 국가의 분배에 의해 피동적 운명에 순종하던 낡은 관념은 환영받는 인재로 되려고 분투하는 새 관념으로 전환 되였다. 1986년부터 1987년 2년 사이 전문기술일군 이동수는 4259명에 달하였다. 민영과학연구기구들도 과감히 성급과 국가급 연구항목 70여개를 맡아 나섰는데 그중 4개 항목이 성급 감정에 통과 되였고 13개 항목이 국가 전매특허권을 신청하였다.     연변의 과학기술발전과 경제건설을 위하여 자치주 정부에서는 과감히 외지 인재들을 청해 들였는데 지금까지 2300여명의 과학기술일군들이 연변에 초빙되여  국외의 자금을 들여오고 연변의 풍부한 자원 우세를 이용하여 새 특산품종을 개발하는 등 좋은 성과들을 거두어왔다. 인재의 합리적 이동은 공장과 농촌의 과학연구사업에 새로운 진척을 가져다주었다. 지금 자치주 내의 30여개 기업에 과학연구기구들을 세웠는데 이는 기술의 인입, 소화, 흡수 및 기술개조와 내부기술 발굴 등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놀고 있다.      농촌의 과학기술사업도 초보적인 체계를 이루었다. 전 자치주에 이미 인삼, 모기버섯, 포도, 잎담배 등에 대한 연구기구가 81개 있으며 그 연구인원은 만여명에 달한다.     지금 자치주는 전국의 38개 대중도시, 80여개 대학 전문학교, 140여개 과학연구단위, 300여개 기업들과 경제기술 협조관계를 맺고 200여가지 새 제품과 새 기술을 들여오고 있으며 국외의 10여 가지 항목의 새 기술도 받아들이고 있다. 건국 이래 자치주에서 거둔 과학기술연구성과는 885개 항목이 되며 그중 42개 항목은 세계선진수준에 도달하였고 130개항목은 국가급 표준에 이르렀으며 253개 항목의 성과는 성내 선진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모든 연구 성과 가운데서 85%는 이미 생산에 투입되여 경제적 효과를 거둠으로서 연변경제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목전 전 자치주 과학기술일군은 도합 109052명(자연과학-63563명, 사회과학-45489명)인데 이는 전 자치주 총 인구의 5%로서 전국 평균 수평 (중국과학기술협회의 통계에 의하면 목전 중국의 과학기술인원은 도합 2639만명으로 전국 총 인구의 2.12%를 점한다.) 인 2.12%보다 훨씬 높다. 광범한 기술 일군들은 각 분야의 과학연구사업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과학기술을 보급 제고하고 공 농업 생산의 발전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인 역할을 놀고 있다. 전 자치주에 민반 과학기구도 83개소가 있으며 각종 민반 과학협회, 학회, 연구회는 80여개소가 있고 향급 과학보급협회 105개소, 공장광산기업의 과학협회 조직도 34개소가 있어 성시와 향촌이 결합되고 전업성과 군중성이 결합 되였으며 연구와 보급추광이 결합된 과학기술 체계를 이루어 비교적 강대한 과학기술대오를 형성하고 있다.        二. 중국의 과학기술 정책과 연변의 경제문화    중국 개혁개방의 통수이시며 총 설계사였던 등소평동지는 일찍《과학기술은 제일생산력이다》,《과학기술과 교육으로 나라를 부강시켜야 한다.》라고 호소 하셨다. 중공중앙、국무원의 과학기술진보를 가속화 할 데 관한 결정에는 과학기술은 경제와 사회발전의 우선적인 추동 역량이며 국가 강성(强盛)의 결정적인 인소라고 했으며 또한 과학기술 실력은 이미 국가 종합국력의 강약과 국제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늠하는 중요한 인소라고 강조 하였다.     2006년에 공포한《중화인민공화국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제11차5개년(2006-2010)계획요강》에도《과학기술과 교육에 의한 국가진흥전략과 인재에 의한 강국전략을 실시한다》고 공포하였다.《과학기술의 진보와 혁신을 경제와 사회발전의 중요한 추진력으로 삼고 교육의 발전과 재덕을 겸비한 자질 높은 인재의 양성을 보다 두드러진 전략적 위치에 두고 체제개혁을 심화하고 투자를 늘이며 과학기술과 교육의 발전을 가속화하여 혁신형 국가와 인적자원 강국건설에 박차를 가한다》는 것이다.   《계획요강》에는 또《국가 중、장기 과학기술발전계획을 실시하여 자주적 혁신과 중점적 도약 발전후원, 미래지향의 방침에 따라 국가 혁신체계를 서둘러 구축하고 기업의 혁신능력을 끊임없이 높이며 과학기술의 경제 및 교육과의 긴밀한 결합을 강화함으로서 과학기술의 총체적 실력과 산업기술수준을 전면적으로 높인다》고 강조하였다.     2002년 6월 29일《중화인민공화국 과학기술 보급법》이 정식으로 반포되여 중국의 과학기술보급사업은 법제화 건설과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전 사회적으로 과학을 지향하고 사랑하며 과학을 배우고 활용하는 새로운 풍기를 형성했으며 매년 9월의 세번째 공휴일을《전국 과학기술 보급일》로 정하고 전국 방방곳곳에서 과학정신을 선양하고 과학지식을 전파하며 과학 발전관을 수립하는 유익하고 다채로운 활동들을 활발히 벌리고 있다.     2004년 7월 북경 중국과학기술관에서는《인류와 자연의 조화로운 발전편--대자연의 경보와 깨우침》이라는 전람회를 열었는데 이 전람은 인류와 자연의 조화로운 발전을 중점으로《록색GDP》,《순환경제》,《절약형 농업》과《록색 제조업》등 새로운 관념에 치중하였다. 이번 전람을 통하여 전국 인민들이 자연생태환경 보호의식을 한층 높이고 순환경제, 절약형 농업과 록색제조업을 추진해 인류와 대자연의 조화로운 발전을 진일보 추진하였다.          지난 2006년 1월 중국과학원사 사무국에서는 570명 중국과학원 원사와 중국공정원 원사들이 투표형식으로 중국과학기술 발전의 10대 뉴스를 평의 하였는데 그 항목에는 : 1. 신주호 탑인 우주비행선 우주비행성공  2. 청장철로 전부개통  3. 64위 고성능 통용 CPU칩(芯片) 고안  4. 중국과학고찰대 첫번째로 남국 최고점에 도달  5. 기록된 종류가 세계에서 제일 많은《중국식물지》출판  6. 첫번째 단분자자선태(單分子自旋態)의 통제를 실현  7. 쵸몰랑마봉의 해발 새 높이 8844.33메터를 측정  8. 중국 대륙 과학시추가 지하 5158메터까지 뚫고 들어감  9. 혈관속에서 운행하는 미형《나미약물분자운수차》를 연구제조  10. 분별률이 최고로되는《중국 디지털 남1호》가 탄생 등을 선택하였다.           과학기술의 제고와 더불어 연변의 경제상황도 많은 발전을 보였는데 2004년 자치주생산총치는 194.3억원으로 연속10년간 10%이상 속도로 상승하였고 일인당 생산총치는 8906원으로 처음으로 인당 GDP가 1000달러를 초과하였다. 2004년 전 자치주 재정수입은 24.3억원으로 전해만 16.1%나 증장하였다.         문화교육사업도 커다란 발전을 보이고 있는데 지금 주내에는 19개 학원을 가진 종합대학교인 연변대학교(학생수는 2만2458만명)가 있고, 9개 중등전업학교가 있으며(학생수는6280명), 중학교와 고등학교 193개소(학생수14만3481명), 그중 조선족학교 74개소(5만1109명), 초등학교 407개소(12만7511명), 그중 조선족학교 183개소(5만2164명), 유아원 455개소(3만4972명), 그중 조선족유아원 261개소(1만5319명) 등이 있으며 기타학교도 41개소가 있다.  전 자치주 학령아동 입학률은 99.9%이다.     자치주에는 8개의 예술표연단체와 4개의 박물관, 8개의 문화관, 70개의 문화짬과 9개의 도서관이 있으며 8개소의 라디오방송국과 9개소의 텔레비방송국이 있다. 이런 문화기구에서 현재 사업하고 있는 일군은 도합 2200여명이다. 전 자치주에서 한해(2004년)에 출판되는 도서는 2020종(조문-740종), 3012만책(조문-4931만책)이며 잡지는 21가지(조문-12종 56만책)종류로 66만책, 신문 11가지 종류로(조문-6종 7444만부) 도합 31108만부를 발행하고 있다.          三. 연변지구 녀성교육의 기본상황    《2005년 연변통계년감》자료에 의하면 전주 총인구는 217만7126명인데 그중 녀성인구는 109만2343명으로 전주 총인구의 50.17%를 차지한다. 전 자치주 인구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녀성군체를 볼 때 다수의 녀성들이 개혁개방의 동풍을 빌어 과감히 사회에 진출하고 있으면 사회 제 분야에서 홀시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사회의 변천은 부단히 사람들에게 압력과 도전을 가하고 있지만 녀성들은 이속에서도 재능을 늘이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연변지구 녀성들의 문화정도를 보면 대학, 전문학교와 고중, 중등전업 및 초중이상 수준에 도달한 숫자가 매천명당 각각 22명, 224명, 332명으로서 전국평균수준 보다 (전국은 각각 14명, 79명, 233명) 훨씬 높다. 이 외에도 각종 성인교육과 직업교육의 녀성수는 남성을 초과한다. 이는 우리 연변녀성들이 문화교육을 중시하고 힘써 배우는 교육전통, 교육열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녀성의 교육수준은 사회경제활동에 참여하는 능력, 수입수준, 생활정황의 중요한 요소로 되며 여성의 사회지위를 결정하는데 있어 관건적인 역할을 한다.     2000년 말까지의 연변지구 녀성의 평균 교육년한은 10.8년으로 1995년의 6.8년보다 58.8% 제고되었으며 2004년말에 와서는 11.3년으로 2000년보다도 4.6% 제고되었다. 녀자애들의 소학교 입학률이 99.94%에 달하여 남자애들과 동등한 교육기회를 향수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중, 고등교육의 비율이 점차 제고되고 있는바 전주 보통고등학교의 재학 녀학생은 1,566명으로 총 학생수의 52.1%를 차지한다. 상세한 정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연변 조선족 녀학생 재학상황   학교별     학생수 1990년 1996년 2002년 소학교 학생 총수(명) 80.762 67.384 36.122 녀학생수(명) 39.595 33.330 18.154 녀학생비례(%) 49.03 49.46 50.26 초급중학교 학생 총수 30.441 30.442 32.868 녀학생수 15.072 15.145 16.710 녀학생비례 49.51 49.75 50.84 고급중학교 학생 총수 10.189 9.001 12.555 녀학생수 4.823 4.005 6.424 녀학생비례 47.34 44.50 51.17 중등전문학교 학생 총수 4.957 7.968 7.477 녀학생수 3.028 5.051 4.666 녀학생비례 61.09 63.39 62.40 대학교 학생 총수 5.621 7.172 5.229 녀학생수 2.547 3.553 2.795 녀학생비례 45.31 49.54 53.45 합계 학생 총수 132.129 121.966 94.321 녀학생수 65.065 61.144 48.749 녀학생비례 49.24 50.13 51.68   최근 10년간 녀학생 재학인수는 기복이 있지만 전체 학생수에서 차지하는 비례는 지속적인 상승선을 긋고 있었다. 1990년에 유독 중등전문학교만 녀학생비례가 61.09%로 절반을 넘었고 그 외 소학교, 중학교와 대학교의 녀학생 비례는 모두 반수가 못 되었다. 하지만 2002년에 와서는 소학교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녀학생의 비례가 모두 50%이상을 차지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족 녀학생 재학 상황이 말해주다시피 현재 조선족 녀성의 교육은 초등학교는 물론 고중, 심지어 대학교를 포함한 고등교육에서의 남녀차이를 줄이고 큰 발전을 가져왔음을 볼 수 있다. 같은 시기 전국의 평균수준과 비교해볼 때 2002년 전국의 년말통계를 보면, 전국의 녀학생의 재학인수는 평균 학생총수의 47.45%를 차지하지만 조선족의 경우, 평균 51.68%로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녀교원의 비례도 많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인데 이는 현행 국가교육체제에서 녀성이 차지하는 지위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지표이다.   표2 연변 조선족녀성 교원의 재직상황 학교별   1990년 1996년 2002년 소학교 교원총수(명) 3.720 3.988 3.052 녀교원수(명) 2.568 2.964 2.247 녀교원비례(%) 69.03 74.32 73.62 초급중학교 교원총수(명) 2.455 2.320 2.245 녀교원수(명) 996 1.308 1.321 녀교원비례(%) 40.57 56.38 58.84 고급중학교 교원총수(명) 953 832 933 녀교원수(명) 334 336 457 녀교원비례(%) 35.05 40.38 48.98 중등전문학교 교원총수(명) 477 612 ― 녀교원수(명) 201 301 ― 녀교원비례(%) 42.14 49.18 ― 대학교 교원총수(명) 1.346 1.453 1.510 녀교원수(명) 286 379 552 녀교원비례(%) 21.25 26.08 36.56 합계 교원총수(명) 8.951 9.181 7.740 녀교원수(명) 4.385 5.270 4.577 녀교원비례(%) 48.99 57.40 59.13    소학교의 경우 1990년에 이미 녀교원의 비례가 69.03%를 차지하였고 1996년과 2002년에는 74.32%와 73.62%로 늘어나 현재 소학교의 교원은 거의 대부분이 녀성교원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중등전문학교와 사범학교에 녀학생이 대부분을 차지한 상황을 보면 금후에도 소학교의 녀교원수는 계속 증가될 것으로 예산된다.  고등교육에서의 녀교원의 수도 부단히 늘어나고 있으며 평균년령도 점차 감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고등교육에서의 녀대생의 증가, 특히는 녀 연구생수의 지속적인 증가에 있다. 고등학교 녀교원수와 그 차지하는 비례는 녀성들이 고등교육에 참여하는 정황을 장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표중의 하나이다. 표2에서 볼 수 있듯이 1990년에는 대학교의 녀교원 비례가 21.25%로 5분의1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2002년에는 36.56%로 15.3%나 증가되었다. 녀교원들은 실제교학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교학심리에 비교적 높은 교학능력을 가지고 있어 학생들과 조화로운 교류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四. 연변의 녀성교육에 존재하는 문제점   상기의 표1과 표2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교육에서의 녀성의 지위는 전시기에 비해 많은 제고를 가져왔다. 하지만 질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학교에서의 녀교원비례가 상승하였다 하여 순수하게 교학과 학술방면에서의 녀성들의 우세로만 볼 수 없으며 새로운 형세하에 남성교원들의 유실 등 여러 가지 원인들도 배제할 수 없다. 녀대생들의 취업난도 엄중한 문제로 나서고 있는데 국가에서 남녀평등을 원칙으로 제정한 국가정책이 실시과정에서 일부 남성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나가게 되여 결국 녀성들에게 더욱 많은 곤난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녀성 지식인들에게 존재하는 돌출한 문제는:  1) 높은 차원의 교육일수록 녀성이 적은 것이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발달과 사회의 보편적인 정신문화수준의 향상은 녀성의 교육수준도 따라서 높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상술한 녀성의 절대적 교육수준과 문화소질의 제고보다도 남성과의 비교에서 본 상대적 교육수준과 문화수준의 제고가 더욱 중요하다. 고등교육이 귀족(精英)교육으로부터 대중화한 교육으로 전변된 후 대학교 교육도 사회보급교육으로 전변되어 대학모집인수는 대대적으로 확대되였다. 이 기회를 빌어 녀학생들에게도 많은 고등교육의 기회가 제공되었으며 녀대생의 수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로 보인다. 상기의 표1, 표2에서 보다시피 대학교에서 차지하는 녀학생 비례가 53.45%로 남학생수를 훨씬 초과하였다. 하지만 교육의 차원이 높아질수록 녀학생수가 점차 감소되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데 석사, 박사 등 높은 학력에서의 녀학생 비례는 상대적으로 낮으며 대학교 녀교원의 비례도 절반을 차지하지 못한다. 특히 대학교 녀교원의 경우, 교수나 박사생 지도교사와 같이 높은 직함을 가진 녀성학자나 녀성전문가는 10%도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녀학생이 적은 리공과류의 전업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교육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녀성간부의 참정, 의정 수준은 45.8%로 제고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기층간부이고 지(地), 청(厅)급 등 고위급의 녀성간부는 겨우 5명 정도밖에 안되며 그나마도 “남정녀부(男正女副)”의 경우가 보편적인 현상이다. 2) 과학문화소질방면에서 녀성과 남성의 차이가 크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부분에서도 간단히 언급하였었는데 대학교의 경우, 전공분야에 따라 남성과 녀성의 차이가 뚜렷하다. 문과류의 전업은 한 개 반에 1,2명의 남학생을 제외하고는 절대다수가 녀학생이지만 리공과의 경우는 완전히 반대다. 교원들도 마찬가지로 리공과는 남성교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문과류는 녀교원이 상대적으로 많은 양상을 보인다. 주요한 원인은 아직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낡은 관념과 선입견에 있다. 즉 녀성은 전업성이 강한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남성보다 못하다는 관념이 아직도 많은 정도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으며 더욱 엄중한 것은 이러한 낡은 고정관념의 지배하에 녀성 스스로가 자신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력은 비슷하지만 과학문화소질방면에서의 남녀차이가 현저하다. 전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과학소질에 대한 조사연구를 보면 2001년과 2003년에 거쳐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모두 녀성은 과학지식, 과학방법, 과학과 사회의 관계 등 방면에 대한 요해가 남성보다 많이 부족하다고 나타나고 있다. 2001년의 조사연구에 따르면 남성이 과학기술, 체육, 정치, 경제 등 분야의 뉴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녀성은 새로운 영화거나 드라마에 대하여 더욱 큰 흥취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2003년의 조사는 또 새로운 과학기술 발견에 대한 흥취도는 남성이 녀성보다 6%좌우나 높으며 녀성이 새로운 과학발견에 대한 흥취는 보통이라거나 흥취가 없는 경우가 남성보다 16.5%가 높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과학소질의 제고는 경제, 사회, 문화수준의 제고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교육권리와 기회에 대한 향유정도가 어떠한가, 그리고 과학정보자원과 휴가시간을 자유롭게 지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아직도 조선족녀성들은 전통적 관념의 지배하에 대부분의 가사일과 자녀교육을 맡고 있기 때문에 직업과 가사가 주는 이중부담으로 인해 자신에게만 속하는 휴식시간을 자유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녀성들, 특히는 결혼하여 아이가 있는 녀성들은 학교에서의 정상적인 교육을 마친 후 재교육에 대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적으며 시간을 들여 과학기술에 관한 정보나 지식을 습득할 여유는 더구나 적다. 그 외 일부 녀성들은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학습하거나 기술을 습득하는데 별 흥취가 없고 그저 초등교육을 받은 정황 하에서 기초적인 직업을 선택하려고 하는데서 그 의식이거나 취향이 남성들과 많이 다르게 나타난다.  상술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전통사회에서 형성된 남녀성별의 배역과 역할에 대한 고루한 관념이 녀성의 진일보 발전과 제고를 엄중하게 저애하고 있는데서 그 주요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2004년 10월 인터넷을 통해 진행한 성별기대(性別期待)에 대한 조사를 보면 아직도 상당한 부분의 사람들이 성별의 형상과 역할에 대한 경직된 전통 관념을 유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70%나 되는 사람들이 “남편의 수입은 반드시 아내의 수입보다 많아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반면에 “아내의 수입이 남편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는 항목에 대해서는 896명의 조사대상중  한명도 선택한 사람이 없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녀성의 발전에 있어서 유리한 사회 환경과 사회여론의 지지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사회 환경과 낡은 관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녀성자신의 자비의식과 심리장애 및 이러한 것들로 기인된 경쟁의식의 결핍이다. 법률상 제정된 남녀평등방침과 책략은 단지 녀성들에게 평등한 조건과 기회를 제공하고 녀성들이 정상적인 발전을 가져오도록 유리한 환경과 가능성을 마련해줄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녀성들의 발전은 오직 자신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五 . 연변지구 녀성들의 변화와 전망    개혁개방이래 연변지구 녀성들의 현황을 고찰하면서 우리는 아래와 같은 시대적인 변화특점을 보아 낼수 있다.      첫째는 녀성들의 자아위주의 사상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현대녀성들의 자아가치 척도는 과거의 자아희생으로 부터 현재의 자아성취에로 전변되였다. 그리하여 단순 취직형으로부터 사업형으로 전변되고 녀성들은 과감히 자신의 개성적 특징을 발휘하여 창발적으로 사업을 벌리며 아이를 적게 낳고 가정부담을 감소하는 것으로 자아의 성취를 이룩하며 자신의 인생가치를 높히려 한다. 이런 녀성들에게는 자신감이 넘쳐 보이고 항상 노력 분투하므로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에서의 성공률도 높다. 이것이 최근 10여년간 녀기업가, 녀장원, 녀박사, 녀교수 등이 용솟음쳐 나오게 된 내재적 원인이다.     둘째는 다방면적 추구다. 현대 녀성들의 애호는 광범하며 그 추구도 다양하다. 그들은 가정에서 경제상의 평등은 물론 정신상의 평등도 추구하여 부부가 인격상 호상 존중하고 가정의무를 공동히 부담하고 책임질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의 복잡한 환경에도 아주 잘 적응하며 대담히 시장경제의 충격에 뛰여들어 경쟁을 벌리고 능력을 비기며 어려움을 두려워 하지 않고 분발 노력하며 악전고투한다. 자기가 맡은 일은 전력을 다 하며 똑 부러지게 해내려 한다.《지금 세상에는 게으른 놈이 못산다》는 것이 그들 생계의 좌우명이다.    셋째는 녀성들의 미에 대한 표준이 변한 것이다. 오랜 시기를 두고 여성매력의 표준은 오직 예쁘고 온순하며 선량한데 두었다. 그러나 현시대는 독특한 개성이 있고 품위가 있으며 현대감각이 나는 녀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녀성들은 지식을 부단히 넓히고 문화수양을 제고함으로서 자신의 인격과 품위를 높혀 내적인 미를 살리려 한다. 최근 몇 년 간 우리학교와 사회 각지 녀성학원의 새로운 학습 붐은 이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시대적 변혁에 적응하는 현대인의 심미가치의 변화라고 본다.   넷째는 감정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다. 현대녀성들은 경제상독립은 물론 인격상에서도 독립하려한다. 오늘날 지식녀성들은 자신이 우선 사회의 한 성원임을 인식하였기에 가사나 자녀양육보다 더욱 광범하고 더욱 중요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게 되였다.  이리하여 《독신귀족》이나《두사람의 세계》현상이 늘고 또 가정에서 과거 감정상 남편이나 자식에게만 의뢰하던 것이 현재는 광범한 사회적 교제를 벌리고 집단활동을 즐기며 사업의 성공에 취미를 붙이면서 감정상 독립하려 한다.     다섯째 지식인 녀성들의 새로운 번뇌이다. 고층차의 지식인 녀성일수록 남성과의 동등한 목표를 추구하려 한다. 그들은 사업의 성과로 사회의 승인을 받으려면 모든 면에서 남성들과의 거리를 단축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을 자연적 녀성에서 사회적 녀성에로 변화시키려 하기에 사업성공의 기쁨 뒤에는 다방면으로부터 오는 생활의 억제감과 감정의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사실상 녀성의 남성화로 남녀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력사적 착오인 것이다.    위에서 렬거한  연변녀성들의 변화특징과 문제점들은 일정한 의식형태의 발전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녀성자신이 자신을 해방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부단히 제고 하려면 목전에는 우선 아래의 몇 가지에 그 착안점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고 필자는 인정한다.    첫째로 녀성 자신의 문화자질을 재빨리 제고 하여야한다. 녀성교육을 중시하여 고학력층의 녀성수 증가는 물론 전반 녀성의 문화적 자질을 높히는 여러가지 도경을 부단히 창출하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교육부문과 각 학교의 구체조치도 있어야 하거니와 더욱이는 녀성자신의 자각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로 녀성자신이 자기의 약점을 알고 적극적으로 극복해나가야 한다. 중국녀성들이 장기간 습관되여 온 국가와 직장에 대한 의뢰성, 남성보다 못하다는 나약성, 큰일을 할수 없다는 자비감 그리고 또 일부 녀성들의 현 상태에 만족하고 분발상승하려 하지 않는 등 단점들은 왕왕 자신들의 전진을 저애하고 있음으로 제때에 인식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셋째는 사회적으로 제3산업을 계속 발전시켜 가사 로동의 사회화를 실현함으로서 녀성들의 이중부담을 경감하고 그들이 사회생활에서의 적극성과 창조성을 고무 추동하여야 한다. 법적으로 남녀가 공평하게 취업하는 권리를 제정하고 보장해 주어야 하며 생육보상 제도를 건립하고 생육의 사회성을 승인하여야 한다.     넷째로 녀성권리의 법적보증을 강화해야 한다. 나라의 헌법으로부터 혼인법, 상송법, 형법, 형사소송법 및 로동법 등 기본 법률법규에 모두 남녀평등과 부녀의 합법적 권리를 보호하는 규정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아직 구체화, 완선화 되지 못했다. 우선 기본적인 부녀법이 없으며 부녀를 보호하는 일부 법률과 원칙적 규정일 뿐 구체조치가 적다. 이는 부녀립법의 새 과제로 보아진다.      다섯째, 녀성자신부터 전통사회에서 형성된 성별 역할과 형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낡은 관념이 녀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차례진 기회와 권리를 충분히 이용할 수 없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인재를 판단하는 기준은 “제2의 성”이 없으며 녀성이 사회발전의 수요에 부합되는 우수한 인재로 되자면 자주의식, 경쟁의식, 진취의식, 독창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강자의 심태(心態)로 자아를 초월하여 자신의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해야 한다고 본다.         나가면서    이상으로 연변의 과학기술 현황과 녀성교육을 중심으로 한 연변 녀성들의 현황을 검토하고 존재하는 문제점과 원인을 분석하여 보았다. 목전 중국 조선민족은 출생률의 하강과 청장년인재의 유실 등 문제로 인해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는 글로벌시대에 직면한 발전도상 나라들의 필연적인 시련이라고 생각한다. 격변하는 시대에 녀성들이 진정 자신이 처한 환경과 도전하여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고 녀성의 발전을 이룩하려면 자신의 교육수준과 과학문화소질 양성에 모든 마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현시대 녀성들이 꿋꿋이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이 틀림없다.         맑스께서는 일찍 사회의 진보는 녀성의 사회적 지위여하로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인류의 반수을 차지하는 녀성의 문제는 곧 천가만호의 사회적 문제이므로 온 사회가 공동히 책임지고 해결해 나가야할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녀성자신의 정신면모를 크게 개변시켰으며 녀성들의 개성특징을 완선화 하고 그들의 진취심을 불러 일으켜 각항, 각 업종에서의 녀성들의 무궁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 하였다. 이런 역사적 변혁은 녀성군체의 존재와 그 사회적 지위에 대하여 다시금 새로운 시대적 평가를 내리게 할 것이며 사회의 부단한 진보와 물질문명의 발전 및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가치관의 진보 및 완선화에 따라 시대적 특성을 띤 녀성문제들도 점차 해결될 것으로 보아진다.                                            (한국전남대학교《녀성과학자네트워크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론문 2008.8)    참고문헌     1.《오늘의 연변》  왕정원 외    연변인민출판사   1992년 8월   2.《중화인민공화국 국민경제와 사회 발전 제11차5개년계획 요강(초안)》길림일보(조문판)    2006년 4월 29일   3.《연변통계년감》  연변주통계국 편   길림인민출판사   2005년 8월   4.《동북과학기술신문》(조문판)   2005년 1월--12월    5.《중국조선족여성 현황 연구》 채미화  <여성과 조화로운 사회 학술론문집>     2006년 1월   6.《연변조선족 녀성형황》 강순화   <중국조선족 문화와 녀성문제 연구>  한국 학술정보 출판  2005년 1월     7.《연변통계년감》  연변주통계국 편   연변인민출판사   2001년 8월   
49    <여성시대 프로> 특집 댓글:  조회:5886  추천:48  2010-11-13
             <여성시대 프로> 특집                               중앙인민방송국 조선말 방송                                  강설화기자와의 인터뷰    기자: 연변조선족 자치주 성립이후 자치주 여성들의 삶  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십니까?    강소장: 연변조선족 자치주 성립이후 녀성들의 놀라운 변화는 아래 몇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혼인, 생육관념의 변화입니다. 배우자 선택기준에 있어서 이전에는《정치조건, 경제토대, 가정상황, 직업》등 외적인 조건을 중시하던데로부터 점차《능력, 성격, 품성, 재간》등 내적인 조건을 우선시하며 중매나 부모에 의한 선택보다는 당사자들간의 접촉과 료해를 중요시하면서 애정에 바탕을 둔 혼인을 위주로 합니다. 이는 혼인관념의 새로운 변혁이며 진보적인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생육면에서도《다자다복(多子多福)》하다거나《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한다》는 전통적인 대가족의 관념은 점차 소실되고 부부는 자기자신의 성공과 향수를 첫 자리에 놓으며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없이 하나만 키우면 만족해 합니다. 높은 소비문화와 엄청난 교육비용은 아이 하나도 힘에 부치는 일이니 민족인구의 감소는 뒤로하고 자식 하나만이라도 잘 키우면서 경제적으로 좀 풍요롭게 지내는 것이 리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가정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경제가 상대적으로 락후했던 지난날 가정의 중요한 가치는 공리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하여 가정과 자식을 위해서 부부는 서로 의존했고 서로 불쾌한 일이 있어도 그것을 쉽게 밖에 내비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조선족들의 리혼은 70년대까지만 하여도 남에게 알릴수 없는 창피한 일로, 퍽 보기 드문 일로 되였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 진보에 따라 가정의 공리적 가치는 낮아지고 심미적 가치가 높아져서 남녀 모두가 더욱 새롭고《질높은》혼인생활을 추구합니다. 특히 개혁개방이후 부쩍 많아진《제3자》현상, 《애인》현상들이 이를 충분히 보여줍니다. 전통적인 가치관에서는 가족이나 가문의 명예가 중요했지만 현대가정에서는 삶의 질 문제가 우선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농경사회의 대가정은 산업사회의 핵가정으로 변했으며 결손가정, 재혼가정, 독신가정, 새롭게 생긴 짝무이, 동거형식 등 생활공동체는 가정형태의 새로운 발전모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자녀교양관념의 변화입니다. 우리민족 부모들이 자식을 룡이나 봉황으로 키우려는 념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그 욕망과 방식에는 질적인 승화를 가져왔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키듯이 현시대의 부모들은 아파트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 합니다. 어릴때 부터 아이의 흥취와 애호를 살리고 개성을 개발하며 그들의 다방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고 애씁니다. 지금 부모들은 자식을 공부시켜 취직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만 된다면 석사나 박사까지라도 밀어주어 성공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아마 우리민족의 교육사에서 지금처럼 고차원의 인재가 수없이 배출되고 있는 시대는 없을것입니다.   넷째로는 직업관념의 변화입니다. 현대녀성들의 가치척도는 자아희생으로부터 자아성취로 전변했으며 단순한취직형으로부터 창발적인 사업형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대담히 시장경제의 물결속에 뛰여들어 경쟁을 벌리고 능력을 비기며 분발노력하고 악전고투합니다.《지금의 세상에는 게으른놈이 못산다》는것이 그녀들의 좌우명입니다.    다섯째로는 심미관념의 변화입니다. 오랜시기를 두고 녀성미의 표준은 오직 예쁘고 온순하며 선량한데 두었습니다. 그러나 현시대에는 독특한 개성이 있고 품위가 있으며 현대감이 넘치는 녀성이 매력적이라고 합니다. 그러자면 당연히 외모뿐이 아닌 자신의 지식을 부단히 넓혀야하고 문화수양을 제고해야하며 인격과 품위를 높혀 내재적인 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각종 녀성학원의 새로운 붐은 이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차원의 녀성일수록 남성과 동등한 목표를 추구하며 모든면에서 남성과의 거리를 단축하려합니다. 하여 자신을 자연적인 녀성의 삶에서 사회적인 녀성의 삶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하기에 그들은 사업성공의 기쁨뒤에는 생활의 억제감과 감정의 고독감도 느끼게 됩니다. 사실상 녀성의 남성화로 남녀의 평등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력사적인 착오인 것입니다.     기자: 이런 변화가 일어난 주요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강소장: 녀성들의 사회참여를 녀성해방의 기본척도로 삼아온 우리나라는 일찍부터《남자들이 할수있는 일이면 녀자들도 할수 있다》,《전국의 부녀들이 일떠서는 날이자 중국혁명이 승리하는 날이다》라는 모택동 동지의 말씀에 고무되여 용약 생산제일선에 나서서 절반하늘을 떠이는 기세를 보였습니다. 하여 중국 녀성들의 취업률은 세계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자치주 성립 후 우리 조선족 녀성들은 더욱더 생산 제1선에 뛰여들므로서 가정울타리를 벗어나 용약 사회인으로 되면서 녀성들의 삶에는 더욱더 생기가 부여되였습니다.    특히 개혁개방 30여년래 조선족녀성들의 경제활동참여는 더욱 활발해졌는데 시장경제가 보편화됨에 따라 녀성들의 물질욕구는 늘어났고 가치관념은 변화되였으며 삶의 질을 제고하려는 욕망도 전례없이 제고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방식도 질적인 개변을 가져오게 되였습니다. 녀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한층 높아졌으며 자아가치의 실현은 갈수록 중요시 되어왔습니다. 이는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기자: 그럼 이런 변화는 여성들로 하여금 어떤 진보를 가져오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강소장: 위에서도 언급하다시피 애정에 바탕을 둔 혼인을 위주로 하는 혼인은 혼인관념의 새로운 변혁이며 진보적인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녀성해방에도 질적인 승화를 가져왔다고 할수 있습니다.    생육면에서 자식 하나만이라도 잘 키우면서 경제적으로 좀 풍요롭게 지내는 것이 리상적인 삶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로하여 녀성들은 더욱 많은 시간을 가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보와 사회적 활동에 리용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교육면에서도 어릴때 부터 아이의 흥취와 애호를 살리고 개성을 개발하며 그들의 다방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고 애씁니다. 지금 부모들은 자식을 공부시켜 취직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것이 아니라 능력만 된다면 석사나 박사까지라도 밀어주어 성공시키려고 노력하기에 수많은 조선족 인재들이 그 어느 민족 못지 않게 비약적으로 증가되였습니다.     녀성들은 자신의 주체적인 인격과 능력으로 자기의 인생가치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녀성군체의 80%이상을 차지하는 직업녀성들은 남성과 평등하고 독립적인 자격으로 사회에 나서고 있습니다. 남편의 성공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던 현처량모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녀성들은 자신의 주체적인 인격과 능력으로 자기의 인생가치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가정에서의 경제적인 독립은 물론이요, 인격상에서도 독립하려 하며 감정상에서도 남편과 자식뿐이 아닌 광범한 사회적 교제를 즐깁니다. 여가시간이면 여러가지 사회교육에도 적극 참가하고 문체활동과 건강관리 등에도 중시를 돌리면서 자신의 삶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현시대에는 독특한 개성이 있고 품위가 있으며 현대감이 넘치는 녀성이 매력적이라고 합니다. 그러자면 당연히 외모뿐이 아닌 자신의 지식을 부단히 넓혀야하고 문화수양을 제고해야하며 인격과 품위를 높혀 내재적인 미를 갖추어야 합니다. 각종 녀성학원의 새로운 붐은 이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자: 시대와 사회의 발전에 따른 여성들의 삶의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추구에 따른 진보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이로인한 문제점 또한 적지 않을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주로 어떤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강소장: 례하면 생육관의 변화에 따른 근 90%에 달하는 독신자녀률은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을 불러왔고 혼인, 가정관의 개방은 리혼률을 력사상 최고수치로 끌어올렸습니다. 시장경제바람으로 인한《도시열》,《한국열》은 또한 많은 리산가족과 결손자녀들을 만들어 사회의 불안전요소를 산생하고 있습니다. 하여 현시대의 조선족 리산가족 어린이들은《문제 많은 세대》, 《사랑 없는 세대》, 《비극적인 세대》로 부모의 사랑을 잃은 사회의 불행아라고들 말합니다.  또한 전통적인 효도관념은 점차 사라져 웃어른의 권위는 낮아지고 부모중심의 가정은 자녀중심의 가정으로 전변되고 있는 것입니다.     녀성을 잃으면 가정을 잃고 가정을 잃으면 사회를 잃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민족사회에 나타난 이런 현상들은 바로 녀성들의 삶의 변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자: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강소장:  시대와 사회의 발전에 따른 이런 변화들은 물론 인간의 질적인 삶의 추구에 따르는 진보적인 현상이지만 이로인한 문제점 또한 신속히 극복하여 가지 않으면 안될 일입니다.      개혁개방이래 조선족의 제3차 대 이동으로 인한 리산가족문제는 산업화, 정보화, 세계화로 나아가는 현 시대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로 되고 있고 어쩌면 우리 조선족들의 위기이자 기회로도 되여 그 리해와 득실도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실제적 조치가 뒤받침해 줄것이 수요됩니다.       그러면 이런 사회적 조건에서 우리 녀성들은 어떤 노력을 하여야 할가요? 아래에 몇가지만 라렬해 봅시다.            우선 녀성은 가정을 튼튼히 지킴과 동시에 자신의 고정적인 사업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관념입니다. 녀성이 사회에서 남성들과 경쟁하려면 명석한 두뇌는 물론 자신의 능력도 꾸준히 개발해야 하며 부단히 업적을 쌓아야 합니다. 자신의 지혜로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발명창조하고 분발진보하며 게으름없는 노력을 기울린다면 성공의 기회도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녀성의 경제적 독립은 인격적 독립의 본전이지요. 자신의 두손으로 창조한 재부와 고정적인 수입이 안받침해 줄 때 녀성은 자연히 당당해지며 가정에서는 총리로 사회에서는 남을 도울수 있는 지성인으로 자신의 총명과 재질을 남김없이 발휘할수 있습니다. 금전은 만능이 아니지만 온당한 경제기초는 가정에 안녕과 평화를 가져다 주며 가족들간의 화목과 행복을 만들어 주는 기본인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령활한 생활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생활은 우리에게 쾌락을 가져올 수도 번뇌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양육하는 우리 녀성들에게 너무 완벽한 생활추구는 쉽게 피로를 가져오고 권태를 느낄수 있지만 또한 너무 라태하거나 허무한 생활방식은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지혜로운 녀성은 항상 즐거운 마음과 신근한 노력으로 현대감이 넘치는 가정환경을 만들고 가정생활을 사랑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의 성장을 기뻐하면서 그들에게 온갖 심혈과 정성을 다 쏟아 넣습니다. 그들은 이런 생활속에서 삶의 쾌락을 느끼고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면서 즐겁게 매 하루를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것은 부단한 배움입니다.《영원히 살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것처럼 일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배움은 끝이 없으며 녀성들의 삶의 지혜도 바로 배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현대화 정보화와 세계화시대에 따라가자면 배워야 하고 삶의 질을 높이려면 배워야 하며 놀랍게 성장해 가는 자식들을 뒷받침해 주자해도 배워야 합니다. 배움은 녀성의 품위와 풍격을 높혀주며 배움은 녀성의 지혜와 매력을 더한층 가꾸어 줍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 58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녀성들 모두다 더욱더 아름답고 더욱더 세련되며 더욱더 건강하고 더욱더 활기에 넘치는 새세기의 신녀성으로 됩시다. 가정에서는 사랑스러운 안해로, 존경스러운 어머니로 사회에서는 능력있는 일군으로, 성공하는 녀성으로 자신을 부단히 승화시킵시다. 우리 녀성들께 이보다 더 신나고 멋진 삶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자: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2010년 9월 3일 18.00시—19.00시                                         중앙인만방송국 조선말 방송자료                   
48    연변인민방송국 사회부《희망클럽21》프로 댓글:  조회:5726  추천:45  2010-11-08
   연변인민방송국 사회부《희망클럽21》프로        희망을 만드는 아름다운 실천          안녕하십니까? 《희망클럽21》의 김옥화입니다.      자연의 푸른 생명이 움트는 4월입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절기와 더불어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도 푸른 희망으로 가득찼으면 하는 생각 가져봅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속에서도 고독에 빠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저런 좌절과 실패속에 용기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분들이 더 힘들어하는것은 괴로워하는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는 답답함이라고 하는데요. 문제를 해결해달라는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나누기만 해도 좋을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는것입니다.        그럼 이런 맘을 나눌수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가요? 그들은 어떤분들일가요?《희망클럽21》, 오늘은 《희망을 만드는 아름다운 실천》을 하고있는분들을 만나 맘 따뜻해지는 얘기를 나누는 시간 마련해봤습니다.                                                    &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며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나는 스트레스와 삶의 고민으로 몸살을 앓고있습니다. 인생길에서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절실한 도움을 줘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시간에는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 생명열선상담연구소 강순화소장을 모시고 그들의 아름다운 실천을 통한 문제해결의 대안은 어디에 있는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기자: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며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나는 스트레스와 삶의 고민으로 몸살을 앓고있습니다. 인생길에서 힘들어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절실한 도움을 줘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에는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 생명열선, 녀성열선 상담연구소 강순화소장을 모시고 그들의 아름다운 실천을 통한 문제해결의 대안은 어디에 있는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생명의전화》상담연구소에서 소장으로 일하고 계시는데 우선 《생명의전화》란 어떤것인지 하는 것부터 얘기주시겠습니까?    강소장: 예, 살다보면 우리는 이런저런 고민이나 좌절을 겪을 때도 있고 실패앞에서 절망을 느낄 때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분들을 위해 그들이 고민과 방황, 좌절과 절망의 심리에서 벗어나 다시 새 희망을 가지고 삶을 정시할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상담기관이 바로《생명의전화》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극단적인 심리 불안으로 자살까지 시도하는 분들도 포함하여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생명존중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하는 말그대로 생명을 구하는 희망의 전화라는 의미도 포함되였지요.     기자: 듣고보니《생명의전화》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속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나 고민들을 들어주고 풀어주면서 그들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는 고마운 전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직도 실제적인 어려움이나 고민같은것들을 남에게 털어놓고 얘기하기를 꺼려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나의 사생활이고 비밀이란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것을 저어하는것 같은데요. 《생명의전화》는 전화라는 이 매개체를 통해 이런분들의 맘속 응어리를 효과적으로 풀어주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런 형식의 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겠나 생각됩니다?       강소장: 복잡한 삶의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인간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따라서 상담자는 그들의 어려움이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할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과정이 상담이기에 상담은 개인의 일만이 아닌 사회의 문제를 치료하고 예방하는 하나의 새로운 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생명열선, 녀성열선》》은 바로 얼굴없는 상담전화로서 상담자는 오직 래담자가 제출하는 문제를 경청하고 공감하며 함께 고민하고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래담자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용기를 주며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기자: 그런데 이《생명의전화》란것이 외국에서 기원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부각하며 도움의 손길을 보내기 위한 사랑의 실천으로 시작된것이 아닙니까?    강소장: 예 그렇습니다. 전화는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가장 경이로운 기구중의 하나로서 우리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필수품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당연한것으로 생각하여 그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통을 잘 받지 못하여 결국 자살시도를 막지 못한 침통한 사실로 하여 호주 시드니의 알랜워커라는 목사는 1960년대에 벌써 생명을 살리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여 오늘날 국제 생명의전화로 발전되였고 금년에 이르러 한국은 34년(1976년에 개통), 우리 연변은 15년(1995년에 개통)이라는 력사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기자: 다같이 오늘을 살아가고있는 우리인 만큼 삶에서 느끼는 갈등이나 모순, 고민같은것은 누구나 있을수 있지 않습니까? 특히 무한경쟁사회를 살아가고있는 오늘날에는 이런저런 스트레스들도 갈수록 많이 늘어나고있는 현실인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 주변에도 이런분들에게 보낼수 있는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연변도 보면 개혁개방의 물결속에 출국붐이 일면서 많은 면에서 대변혁이 일고있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모순이나 문제들도 속출하고있는데 이런 실정에서 우리에게도 소중한 의미를 담고있는 《생명의전화》같은 상담기구는 매우 절실하게 수요된다고 봅니다?      강소장: 중국이 개혁개방에 들어서면서 우리들의 삶에도 천지개벽이 일어났지요.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간의 가치관념을 변화시켰고 이에따라 도시열, 한국열, 외국으로 향한 대거 이동은 많은 리산 가족과 단친, 무친 자녀들을 만들어 가정은 불안전하고 사람들은 고민과 방황으로 모대기게 되였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전화상담은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였습니다.    기자: 객관적인 환경의 수요와 사랑의 맘을 지닌분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생명의전화》상담연구소가 우리 연변에도 세워지게 됐는데 이미 15년이라고 하셨지요?   상담연구소가 연변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십여년이라면 짧지 않은 시간일 텐데 주로 어떤 설립 취지와 목표를 가지고 이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까?    강소장: 가정의 행복을 찾고 인간관계가 더 밝아지게 하는 일에 좀더 전문적인 지식과 사랑을 불어넣어 우리 사회가 보다 조화롭고 안정되게 함에 우리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저 하는 것이 우리 상담원들의 의무이고 바램인 것입니다.《연변생명열선, 녀성열선》은 바로 이러한 취지로 하여 개통되였고 1995년 8월부터 현재까지의 10여년동안 사회 방방곳곳에서 걸려오는 혼인가정문제, 가정법률, 청소년교육, 심리건강교육 등을주요내용으로 한 수백여통의상담전화를받아왔고전화상담과 사회교육, 국내외 유관단체들과의 문화교류, 정보교환, 사랑과 나눔의 자원봉사활동들을 진행하고있습니다.       기자: 인생은 실패할 때 끝나는것이 아니라 포기할 때 끝나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이런저런 실패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힘과 용기를 가지게 하는《생명의전화》가 있어 많은이들이 다시 희망을 가질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사랑의 맘으로 힘든이들을 돕는 상담기관으로서《생명의전화》상담연구소는 어떤 성질의 조직입니까?    강소장: 비영리성을 띤 사랑과 봉사의 조직으로서 사회 각 분야의 일정한 지식과 능력을 가진 지성인 상담원들이 무상으로 사회를 향해 복무하는 기구인 것입니다.       기자: 이런 취지와  목표를 가지고 지금까지 상담연구소를 운영해오셨는데  그러면 지금 구체적으로 상담연구소의 활동범위와 내용은 어떻게 잡고있습니까?     강소장: 최근의 상담내용들을 보면 주요하게 청소년들의 교육문제, 그들의 심리적 불안감, 자녀교양문제, 혼인가정문제, 제3자 개입과 리혼문제, 부부재산문제, 취업문제 등등이였는데 래담자의 근 90%가 녀성들입니다. 이만큼 녀성들의 문제가 절실한것이 현실이지요.   "녀성이 밝아야 사회가 밝다"고 하지 않습니까? 녀성을 일컷는 "안해"란 말은 어쩌면 집안의 해(태양)라는 말인듯싶습니다. 집안의 해가 빛나면 사회는 환히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생명열선, 녀성열선 상담원들은 언제나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는 어머니처럼, 항상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오랜 친구처럼 그 누구의 그 어떤 문제든지《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마음과 당신의 아픔을 나누려는 뜨거운 가슴으로》귀를 기울리고 문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상담원들의 따뜻한 접대는 래담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주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정시하고 역경을 이겨낼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삶의 지혜와 용기를 북돋우게 합니다.    기자: 그동안 단체의 조직기초 건설을 많이 틀어져 온 줄로 알고있습니다. 어떤 방면의 노력들을 해오셨는지요?     강소장: 1995년부터 15년간 해마다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에서 심리상담교육 학습반을 꾸려서 이미 1000여명의 상담원들을 교육하였으며 상담수료증을 쟁취한 상담원들만도 380여명이 됩니다.    그외에도 한국상담연구소와 손잡고 2년에 1차씩 집단상담과 감수성훈련을 하였으며 해마다 열리는 한국생명의 전화 전국대회에도 이미 6차나 참가하여 50여명의 상담원들이 좋은 학습과 실천의 기회를 가졌고 국외와의 교류중 부단히 상담소질을 높이고 있습니다.    현재구성인원:  소장 1명, 부소장 2명, 상무리사 7명, 리사 50여명, 직접상담봉사자 20여명입니다.    기자: 상담연구소의 구체실무에서 보면 여러가지 형식의 상담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상담실천에서 보면 생명의 전화가 어떤 역할을 하고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그 작용도 크리라고 생각됩니다.     강소장:  오늘날 물질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최대의 편의와 복지를 가져왔지만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공허감과 피곤감을 느끼고있습니다. 로인들은 더욱더 외로워졌고 어린이들은 더욱더 영약해져 가고 있으며 어른들은 더욱더 무기력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기본적인 생존욕구가 충족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싶어합니다. 사랑은 실천할 때가 더욱 아름답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작은 실천이 큰 희망을 만들고있기에 우리는 언제나 즐겁게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런 봉사활동은 우리 민간단체의 힘으로 정부가 미처 하지 못하는 실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므로서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하여 또한 조화로운 연변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저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였지 않나 생각합니다.       기자: 상담연구단체를 운영해오면서 지금까지 여러면의 성적들도 적지 않게 쌓아온줄로 압니다. 그동안 이룩한 성과들을 개괄적으로 짚어주시겠습니까?    강소장:  10여년래 해마다 사회를 향한  심리상담 무료교육을 진행하여왔고1999년부터 지난해까지 여섯차례나 와 에 참석하였으며 한국 KBS방송, 중국 중앙인민방송, 연변인민방송, 연길시방송,연변일보,연변텔레비보,현대가정신문  등 각종 매체들에 수차 우리단체의 활동들이 보도되였으며 우수단위, 의 상무리사단위 및 선진 집체 등 정부 유관부분의 인정과 표창을 수차 받아왔습니다.    기자: 그동안 지역사회에 하나의 도움이 되는 단체를 이끌어오면서 눈에 뜨이는 성과를 거두며 일하는 보람도 많이 느껴왔을겁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상담연구의 실천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이런 단체가 우리 지역사회에서 활약하고있다는것은 당당하게 자체의 존재적인 의의를 가지고있다는것이 되지 않습니까?     강소장: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분들이 상담교육을 받고 오직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다년간 《생명의전화》를 위해 자원봉사를 하면서 그동안 많은 수고를 하여 왔습니다. 그 수고와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많은 문제들이 우리에 의해 해결되였고  사회적으로도 그 반향이 좋은줄로 알고있습니다. 기대했던바의 사회적효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직접 상담연구소를 맡고 운영해오면서 구체적인 실천속에서 얻어지는 감수들도 적지 않았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주로 어떤 면에서 느낌이 크셨습니까?     강소장: 1995년 생명의전화가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에서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할 때 혹자는 그 유용성과 효률성을 념려하였습니다. 자원봉사자로 어떻게 그 일을 할수 있을가? 그들은 일단 비전문가가 아닌가? 특히 심리료법이나 면접전문가의 립장에서는 비판적이였고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긍정적인 시각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연변생명의전화, 녀성의전화는 수년간 바로 이런 비전문가 상담원들의 봉사에 의하여 이어져왔고 그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있는 추세입니다.      전화상담은 자원봉사 상담자를 주축으로 해서 이뤄집니다. 이들은 단순한 협력자가 아닌 집행자이고 수행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로 자원봉사자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함은 이 사회에 있어서의 하나의 효시로 됩니다. 상담봉사자들이 수년을 긍지와 보람으로 그 일을 담당해 나가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들의 참여동기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인간애, 사회적 공헌, 돕는자의 보람과 기쁨, 여가활용, 자기발전의 욕구와 성취감 등을 꼽을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 만연되여있는 허다한 문제들은 전문가의 전문적인 치료나 상담에 의해 도움을 받기보다는 많이는 비전문가인 가족이나 친구, 동료의 도움으로 충족됩니다.      비전문가 상담원들은 자신의 인생경력으로도 남을 도울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들속에 깊숙이 파묻혀있는 순수한 마음,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은 래담자들에게 많은 위로를 주며 희망을 줍니다. 그들은 전문가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보다 공감할수 있고 보다 많은 시간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래담자들을 위하여 바칠수 있습니다.      이런 기초에서 더한층 상담지식을 배우고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며 능력을 개발하고 갈고 닦는다면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도 능히 남을 도울수 있는 훌륭한 상담원이 될수 있을것입니다.     기자: 다년간의 상담실천에서 경험들도 적지 않게 쌓아왔을줄로 압니다. 주로 어떤 면의 경험들을 쌓게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강소장: 전화상담은 그 언제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즉시성, 낮설고 어색함이 없는 익명성, 래담자에 의해 통제 할수 있는 주동성으로 하여 많은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효과적인 전화상담은 기술과 인식을 필요로 하며 상담 전체 과정에서의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행위, 비판하지 않고 수용하는 마음, 그리고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상담이라는것은 수준과 지식,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것은 상담의 기본주체인 인간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통창력이 있는 사람이 상담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가질 때 효과적인 상담은 이루어 질수 있습니다.   경청, 공감, 반영, 탐색, 직면, 의견제시, 의사결정 이런 상담의 기본적인 기술들은 자신에 대한 인식과 리해를 증진시키는 과정에서 부단히 실천해 가고 이해해나가야 하는것입니다.     기자: 지금까지 지역사회를 위한 유익한 상담기관을 운영해오면서 적극적인 사회적효과를 기대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여오셨는데 앞으로의 발전전망을 보면 어떻습니까?      강소장: 사회가 발전할수록 무한경쟁도 갈수록 치렬해질것이고 그런 환경에서 도전하며 살아가자면 우리 모두가 갖가지 어려움이나 부딪치는 난제들앞에서 용기있게 이겨나가는 자신심이 필요하지요. 생명의 전화를 지켜가고있는 상담원들이 바로 이런 용기와 자신감을 줄수 있는분들 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수요가 나날이 늘어나는 추세에 비추어 상담연구소도 자체 존재의 가치를 빛내가면서 계속 힘있는 발걸음을 내디디리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상담연구소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기원합니다. 아무쪼록 갖은 어려움속에서 힘들어하는분들에게 사랑의 맘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며 언제나 힘이 돼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그런 사랑의 천사로 거듭나셨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봅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강소장: 예, 감사합니다.                                  ( 방송시간 : 2010년 4월 11일 일요일, 방송총길이 : 39분 30초 )                  
47    조선족 가족구조의 변동과 가정교육에 관하여 댓글:  조회:5635  추천:60  2010-11-03
                             조선족 가족구조의 변동과                     가정교육에 관하여                                          一. 개혁개방이후 조선족 가족구조의 변동    중국의 개혁개방 30여년래 조선족사회는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몇십만을 헤아리는 조선족 청,장년과 녀성로동력들이 "출국열", "도시열", “섭외혼인열”에 휩쓸려 한국, 일본, 미국, 싸이판, 러시아, 카나다, 독일, 터키 등등 수십개의 이름 모를 나라와 연해지구로 대량 진출한데서 비록 매년 국가재정수입을 초과하는 딸라들을 벌어 들여 경제생활에서의 전례없는 향상은 가져왔지만 그 반면에 이로 인한 인구의 대 이동과 낮은 출산률로 인한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은 민족학교의 대대적인 감축을 가져왔으며 농촌 민족 집거구의 해체와 민족교육의 위기설까지 불러 왔다. 조선족 학생이 한족학교로 많이 가므로 조선족 반과 조선족 학교가 적어지는 현상에 뒤이어 근년에 와서는 한족소학교에서 조선어과 까지 설치하였으므로 더더욱 조선족학생들을 몰아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발전에 따라 산업화와 세계화의 경제과도시기에 처한 조선족이 격어 나가야 할 필연적인 도경이기는 하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 역시 홀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연변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룡정시 모 진에는 9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7개 조선족소학교에 1100여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인구가 줄면서 촌 소학교들이 점차 폐교되여 2000년에는 하나의 소학교, 540명 학생이 남았었는데 최근 몇년간 또 해마다 약 70여명씩 줄어들어 지난해에는 150명이 남았다고 한다. 학교가 하나뿐이니 집이 먼 학생은 왕복 50리길을 다녀야 하므로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고 한쪽거리가 20리나 되는 18명 학생은 뻐스가 없는 날이면 학부모들이 손잡이뜨락또르로 자녀들을 학교까지 실어 와야 한다. 이것이 농촌 조선족학교들의 현실이다.      90년대초 부터 시작하여 나날이 증가되는 결손가정이 인제는 반수도 (전주적으로 2003년에 53.2%)퍽 넘어나니 조선족의 가족구조는 크게 변동되였고 따라서 가정교육은 엄중히 결여되고 있는 상태이다. 엄마, 아빠, 혹은 두 부모 모두 출국했거나 리혼하여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친척이나 남에게 의탁해 있는 아이들이 전체 학생의 절반을 넘는다는 사실은 력사상 그 어느나라, 그 어느 민족에게도 있어 본적이 없는 불행한 현실이다. 이는 조선족 청소년들의 심신건강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바 민족교육의 질 향상은 물론, 우리 민족의 후대양성에도 홀시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조성하고 있다.    청소년은 조국의 미래이며 민족의 희망이다. 그들에게 정확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심어 주어 나라의 기둥으로 건실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것은 이 세대 부모들의 책임이자 의무인 것이다. 때문에 이런 특수한 산업화와 경제적인 전환기에 처한 우리민족 가족구조의 변동과 가정교육의 실태 및 그 대책에 대하여 우리는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二. 가정교육이 자녀성장에 주는 작용   현실 생활에서 살펴보면 어떤 애들은 생기발랄하나 어떤 애들은 우울하고 수심에 껴 있고, 어떤 애들은 례의범절이 바르고 해박하나 어떤 애들은 무뚝뚝하고 조폭하며, 또 어떤 애들은 총명하고 재간이 많고 진취심이 있으나, 어떤 애들은  비교적 아둔하고 늦되며 용속한 등 차이가 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가정환경과 가정교육의 부동한 결과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특히 결손가정과 같은 특수가정의 자녀들을 보면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잃었기에 그들의 정감, 정서 세계는 괴이하게 발전하여 내성적이고 랭랭하며 조폭하고, 주변 친구들과 교제하기를 꺼리고, 자사자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대리 부모역을 하는 부양인들의 문화 수양이 대부분 차한 탓으로 아이들의 학습에 무관심하고 따라서 그 성적이 상대적으로 낮고 행위와 규률이 산만하며 품덕이 불량한 것이다. 지어 학교를 중퇴하고 범죄의 길로 나아가는 현상까지 있는데 지난해 연길시에서 련속 세차례나 저지른 강탈사건의 주모자들이 바로 15-16세 되는 7명의 중퇴생들이였다. 학교를 떠나 가정의 교육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사실상 사랑이 고갈되여 인성까지 잃어 가는 불행아들인 것이다. 연길시 모 학교에서 결손가정 애들을 조사했는데 그들중 71.3% 학생들이 부모가 신변에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연변대학 녀성연구소에서 조사한데 의하면 전주 소학생부모 출국률이 이미 반수를 훨씬 넘어 제일 엄중한 상태였다. 즉 7세-13세사이 어린이를 가진 젊은 부모들이 그 이상인 중로년 세대들에 비해 해외진출이 더 많았고 그에따라 상대적으로 자녀교육에 대해 무책임함을 보여 주었다.   북경사범대학 교육전문가인 신도교수는:《제일 직접적으로 어린이들에게 큰 상처를 주는 것은 흔히 젊은 부모들이다. 이는 이미 하나의 보편적인 사회문제로 되었다.》라고 지적하면서 그 무책임 행위를 다음과 같이 렬거하였다.    (1) 부부가 쉽게 갈라진다. 2002년말 공포한 최근 3년간의 전국 리혼비례 수자에서 보면 자녀를 두고 리혼한 부부가 리혼 총수의 68%를 차지한다고 하니 68%의 리혼부부 애들이 단친어린이로 되었음을 의미한다.    (2) 애들을 장기적으로 기숙시킨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몇달 지어 몇년씩 애를 찾아 보지 않으니 애가 부모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조사에 따르면 부모와 함께 있는 애들의 심리, 신체건강은 정비례를 이룬다고 한다. 그러기에 장기적인 기숙은 취할바가 못되는 것이다.    (3)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 가정의 불화목이 어린이들에게 주는 상처는 리혼의 버금으로 간다. 소학교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89%의 학부모들이 애들 앞에서 싸우고 33%의 부모들은 심지어 애들 앞에서 손찌검까지 한다고 하니 애들에게 주는 상처는 아예 념두에도 없는 듯 하다.    (4) 애들에게 물질면의 만족을 준다. 전문가들은 애들에게 물질적 만족을 주는 것은 제일 과학적인 방법이 못된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사치한 습관을 양성할 것이 아니라 정신면으로 관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5) 범죄를 유발 시킨다. 이는 아주 심중한 화제이다. 지난해 한 보도매체에서 14살짜리가 5년간 매음한 사실을 보도했는데 이 녀자애를 매음의 길로 내몰아 간 장본인이 바로 친 엄마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부모와 애들이 함께 절도, 강탈에 참여한 사건도 적지 않다. 부모의 위법범죄는 자식까지 망쳐버리는 것이다.        三. 현실사회 가정교육의 류형     정상적인 인간으로 태여 났다면 천성적으로 나쁘고 아둔한 애는 없다고 한다. 즉 후천적 교육이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가정은 자녀교육의 첫 학교이고 가장은 자녀의 첫 단임 교원이므로 자녀의 정감, 행위의 배양 및 금후 능력의 형성은 태여나는 그 시각부터 부모와 가정에서 묵묵히 감화되고 형성되여 가고 있다. 때문에 가정교육은 한 사람의 계몽과 인격의 완성에 있어서 학교교육이 대체할 수 없는 특유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세상에 태여 난 후 제일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부모이고 가정이며 또 그들로 부터 감화와 교육을 받게 된다. 하기에 가정은 어린이가 사회와 접촉하는 출발점이고 성장하여 한 인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각종 능력의 배양기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매개 부모 자신들의 문화수양, 사상관념, 도덕수평, 교양방식이 부동함으로 하여 자녀에 대한 교육방법도 다르게 되고 따라서 자녀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면 현실사회 가정교육의 류형은 어떻게 나누어 볼것인가?    첫째는 과학적인 지도형이다. 이 부류의 학부모들은 우선 부모가 되기 전 부터 어린이 교양과 자녀교육에 유관되는 교육학, 심리학, 아동영양학 등 지식을 참답게 학습하며 자기 자녀의 특점에 결합하여 과학적인 교양방법으로 자녀를 교육하고 있다. 어릴 때 부터 책을 읽는 것을 가르키고 독서로서 천재를 키우려 노력한다. 여러 가지 지식으로 아이의 두뇌를 의식적으로 개발해 주고 지도해 준다. 이런 부모들은 어린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터 글자를 가르키고 그림책, 자연동화나 아동명작들을 볼 수 있게 지도하며 어린이가 학교에 가게 되면 또 학교와 배합하여 학생의 전면발전을 중시하고 각 과목들에 편차가 없이 기초를 잘 닦도록 밀어준다. 또한 자녀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 주며 자신의 흥취와 애호에 따라 각종 문체활동과 써클활동에도 참가하게 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생기발랄하고 주동적으로 학습는 습관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학생들은 당연히 덕,지,체,미가 겸비한 훌륭한 인재로 성장되여 갈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은 조사평의에서 보면 아직까지 3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둘째는 과분한 보호형이다. 이 부류의 학부모들은 자녀가 마치 부모의 소유물인양 여기며 아이들의 능력을 전혀 믿지 못하고 언제 어디서나 과분하게 보호하려 하고 부모가 모든 것을 도맡아 하려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여 주고 밥을 먹으면 옆에서 닭알을 까주며 학교에 가려하면 책가방에 책을 정리해 넣어 주고 돌아오면 지어 숙제까지 대신하여 써 준다. 이렇게 습관 된 애들은 공부가 마치 부모를 위한 일인양 생각되고 모든 것을 부모에 의뢰하므로 자립능력은 아예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자란 애들은 과분하게 남에게 의뢰하고 일마다 남의 손을 바라며 생활능력이 없고 독립사고 능력이 약하며 곤난에 쉽게 머리숙이고 의지력이나 개척정신의 발전에 많은 제한을 받는다. 과보호가 만들어 낸 온실의 화초는 찬 바람과 폭우에 견딜 수 없듯이 이런 가정속에서 성장된 애들은 앞으로의 복잡다단한 인생길에서 여러 가지 애로와 곡절에 쉽게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류도 조사평의 수에서 35%나 차지하였다고 하니 놀라운 수자가 아닐 수 없다    셋째는 과분한 간섭형이다. 학부모가 자녀에 대한 과분한 간섭은 아이들의 언행을 제한한다. 학교에서의 교육과 결부하지 않고 현대적인 관념으로 사고하지 않으며 그저 부모 자신의 낡은 생각과 관념, 방식에 따라 애들의 행동을 사사건건 그 틀에 맞추려 한다.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지령식, 책망식, 명령식 언어만 쓰면서 집에만 오면 아이들을 안절부절하고 어쩔바를 모르게 한다. 이런 애들은 항상 어떻게 하면 부모의 욕을 먹지 않겠는가에만 명심하고 눈치를 보며 따라서 성격도 위축된다. 때문에 무슨 일이나 부모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면 되려니 하여 전혀 자체로 독립사고 하지 않으므로 형성되여야 할 지력과 개성의 발전은 억제되고 창발정신이나 비판능력이 결핍하게 된다. 이 부류의 가정도 조사평의에서 25%나 되었다고 한다.    넷째는 소위 엄격한 징벌형이다. 자녀를 교육하는 태도가 언제나 딱딱하고 언어는 거칠며 감정이 결핍하고 심지어 욕하고 때리는 것을 소위 교육으로 삼기에 아이들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꺽이고 있다. 특히 애들 앞에서 술주정 하거나 부부 싸움을 하며 망탕 욕들을 해 댄다면 애들의 눈에 이런 부모는 오직 무지막지한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므로 스스로 부모의 권위와 위망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부모들은 지어《때리지 않으면 사람이 안된다》거나《몽둥이 밑에서 효자가 나온다》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이런 교육방법은 아이들의 성격을 억누르고 심리상 자비감이나 반발심을 갖게 하며 항상 숨은 밸을 참아 오기에 성격이 괴상해 지고 담은 작아지며 무슨 일에서나 자신심을 잃게 된다. 이런 소위의 교육 방식은 가정교육에서 역작용만 만드는 최대의 금물인 것이다. 최근에 적지 않게 발생하는 청소년 가출 현상을 보면 대부분이 이런 가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부류도 조사평의 수에서 7%나 차지하였으므로 결코 홀시 할 일이 아니다.     다섯째는 자유 방임형이다. 이런 가정은 자녀 교육의 주요 책임을 아예 학교에만 떠밀고 아이의 학습생활을 전혀 관심하지 않는다. 우리 조선족사회의 많은 결손자녀들이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하고 있다. 부모들은 장사요, 출국이요 하면서 돈벌이에만 신경쓰고 아이는 로인들이나 남에게 의탁하여, 공부는 잘하나마나 먹고 입고 학교에만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학하여도 관리하지 않으니 사회의 나쁜 물에 젖고 부모가 외국에서 보내 준 돈으로 과소비나하며 심지어 가출하여 PC방에서 밤을 새우기도 한다. 공부는 뒷전이고 놀음에만 정신을 팔므로 학교에서는 문제소년, 사회에서는 위법 범죄소년으로 전락되기 일수이다. 애들을 이렇게 만들고 부모가 돈은 벌어서는 무엇하며 또 그 애들의 창창한 앞길은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이런 애들을 가르켜 <사랑 없는 세대>, <희망 잃은 세대>, <비극의 세대>라고 까지 하지 않는가?! 우리 주위에서 무시로 볼 수 있는 가정 파탄의 사실들은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런 가정도 전국적 조사평의 수에서는 3%로 나왔지만 우리 조선족 사회에는 퍽 많은 수자로 보이고 있다.         四. 가정교육 기능의 구축에 관하여     전국 부녀련합회에서는 해마다 9월달을 <가정 도덕교양 선전실천월>로 확정하고 학부모학교에 대한 지도와 봉사를 중시하고 있는데 각지에 온라인학부모학교, 주말학부모학교, 가정교육자문소 등을 세우고 학부모들을 도와 가정교양지식과 방법을 가르키는 등 가정교육의 효과적인 조치들을 가강하고있다.      우리 주의 각 학교들에서도 이 문제들을 중시하고 학교교육 뿐 아니라 가정교육도 가강하는 방법들을 여러 가지로 연구 모색하고 실천해 오고 있다. 학부모 강습반을 꾸리고 주말 가정교양 특강을 진행하고 있으며 가정교양상식 소책자를 학부모들에게 발급하여 학습하게 하였다.          연길시 신흥소학교, 연신소학교 등 학교들에서는 또 심리상담실을 설치하고 경상적으로 결손자녀들과의 상담활동을 벌리여 그들의 애로를 해결해 주고 사랑의 손길을 보내며 결손자녀가 많은(60-70%이상) 특수반급에서는《그들에게 사랑을 주자》는 주제로 반활동을 하여 좋은 효과를 보았다.         화룡시 두도진 신민촌에서는 1998년부터 <촌학부모학교>를 꾸리고 13개 촌민소조에 청소년활동중심을 세워 하학후 풍부하고 다채로운 활동들을 조직할 뿐 아니라 방학이면 학업이 우수한 학생, 3호학생, 특장생, 우수학부모를 표창하였는데 몇 년래 중퇴생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난해 11명이 우수한 성적으로 고중에 입학하고 4명이 대학입학 통지서를 받았다. 이 촌의 학부모학교는 주 표준화학부모학교로 명명되였다.      사회 각 분야에서는 또《사랑의 집》을 만들어 결손자녀들의 안신처를 마련하였으며 연변텔레비 <사랑으로 가는 길>, <사회교육방송>등 기금의 후원으로 그들의 학습생활상의 곤난과 심리상의 고통을 풀어 주는 등 많은 노력들을 하여 일정한 성과도 거두어 오고 있다.        가정교육 기능 구축에서 학부모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자식을 교양함에 있어서 자녀들의 심리 특점에 맞게 흥취를 발굴하고 그 토대에서 아이의 지력에 근거하여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하여 끝까지 견지할 수 있는 의력을 키워 주어야 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한두가지 흥취를 갖고 의력을 키우며 지력을 잘 개발한다면 잘해 보려는 승벽심이 생길 것이고 이 승벽심은 또한 완강한 의력으로 변하여 성공하려는 필사 정신을 갖게 한다. 이 성공 과정에서 두뇌는 개발되고 사업은 성취되여 나라의 훌륭한 인재로 될수 있는 것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애들이 책읽기를 즐기고 책을 많이 읽게 하므로서 세상과 접촉하고 안계를 넓이며 적극 향상하는 자신심을 가지게 해야 한다. 부모가 앞장서 독서함으로서 항상 책읽는 습관을 양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독서 중에서 인생을 알고 인생의 가치를 탐구하며 세상만물에 진취심을 갖고 발명창조해 보려하며 분발 노력하는 자신력을 키워가야 한다.      노벨상 수상자의 15%를 차지한 유태인들의 가정교육 핵심이 바로 독서라고 한다. 최근 한국에서 화재가 된 <내 아이를 지키려면 텔레비를 꺼라>는 책에서 소개한 가정교육의 성공 사례는 독서의 중요성을 충분히 보여 준다. 다섯 살부터 텔레비를 안보도록 하고 대신 도서목록을 정해 주어 소학교 6학년까지 500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 학생은 그 흔한 과외 교육을 한번도 안하고도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 중학, 고중에 올라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의 긍정적인 사유와 표양 위주의 교육 방법 또한 애들의 정서를 북돋우고 학습에서의 신심을 키워주는 훌륭한 방법임을 지적하고 싶다. 아이들의 저그마한 진보라도 소홀히 하지 말고 제때에 표양하고 고무해 주며 혹시 잘못한 일이 있다면 또한 제때에 그 위해성을 밝혀 주어 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긍정적 믿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이들의 심리 소질을 키워 주고 자신심을 키워주는 교육에서 더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개괄한다면 당대 사회의 가정교육은 시대의 요구에 부합되여야 하는 것이다.     즉 (1) 부모의 역할이 교육자로부터 공동학습자로 되어야 한다.         (2) 자녀와의 관계는 높고낮음이 아니라 평등하고 민주적이여야 한다.         (3) 교육의 도경은 단일한데로부터 다각적인 방향으로 전변돼야 한다.         (4) 교육방식은 봉페로부터 개방에로 전변되여야 한다.         (5) 교육의 내용은 작은 교육으로부터 큰 교육에로 전변돼야 한다.     한마디로 가정교육은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해야 하는 그 감수의 조기성, 온갖 삶의 지식을 가르키는 학과의 종합성, 부모와 자식이라는 강열한 감염성, 그리고 평생을 이어가는 장기적인 의존성, 가정마다 다양한 방법의 령활성이 있어서 한 인간이 자연인으로부터 사회인으로 발전하여 인류의 사회화를 실현하는 필수 도경이며 한 사람의 덕, 지, 체, 미, 로 등 각종 소질의 형성과 발전에 전면적이고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가정교육은 하나의 극히 간고하고 복잡하며 창조성적 로동으로서 한 인간을 배양하는 과학이라 할 수 있다.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 사회교육반                                            특강자료     2010년 9월                               
46    조선족과 남한 녀대생들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비교연구 댓글:  조회:5230  추천:67  2010-11-01
           중국조선족녀대생들과 남한녀대생들의                  사회화 과정에 대한 비교연구         지식화, 정보화와 세계화의 새 시대에 들어서면서 세상은 크게 변하였고 사회가 녀성의 능력수준에 대한 요구도 부단한 제고를 가져왔는바 따라서 녀성의 고등교육참여 수준도 그 량이나 질적으로 모두 놀라운 상승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세계적인 고등교육사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녀성자신의 교육에 대한 욕구는 고등학교 녀학생들의 비례를 부단히 증가시키고 있는데 통계자료에 의하면 중국소수민족 대학생들 가운데서 녀학생의 비례는 40%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조선족 녀대생들은 근 50%를 차지하고 있어 전국의 평균수준을 훨신 초과하고 있다.       남한녀대생들의 대학진학률도 80년대의 22.5%에서 90년대 말에는 61.6%로 크게 증가하였다. 남한의 남학생 대학진학률이 66.4%인데 비하면 남한의 남녀진학률 차이가 4.8%밖에 되지 않았다. 석사학위나 박사학위수준까지를 원하는 녀학생의 비률도 48%로서 남학생비률 50%에 비해 별반 차이가 없었다. 2000년 서울이화여대 졸업생 현황조사에 의하면 전체 졸업생 3229명중 22.8%가 취업대신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으니 이는 남한녀대생들의 교육에 대한 욕구를 충분히 설명한다.      상술한 사실들은 녀성들의 고등교육 참여 기회가 두나라 교육체제에서 기본상 남성들과 평등한 조건을 부여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녀대생이라는 이 특정된 군체는 모두 고등학교입시의 간고한 관문을 통과하였고 일정한 지식축적과 신분에 따르는 사고방식 및 가치표준을 가진 청년중기의 성원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에서 한 성인으로 성장되고 사회구성의 일원으로 되는 준비단계에 처해 있으며 인생관과 개인적 가치체계를 나름대로 확립해 나가는 사회화의 과정에 처해 있다. 비록 심신발전이 아직 미숙 되고 실천경험이 결핍하며 사회적응능력이 약하지만 다른 한 면에 그들은 일정한 독립사고 능력과 분석능력이 있으므로 이 특정된 사회화 단계에서 현대의식에 따르는 여러 가지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시절은 한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형성되는 관건적 시기에 처해 있기에 인생로정의 전환적인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의 사회화 과정과 그 특징을 비교하고 연구하는 것은 녀성교육연구에 일정한 자료적 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사회전반에 대한 리해까지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의 현실적인 의의가 있다고 본다.      본 문에서는 중국조선족녀대생들과 남한녀대생들의 심신발전 특점에 근거하여 그 실태의 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조사연구의 방법을 취하였다. 조사의 대상은 연변대학 3개 학원, 10개 전업의 1학년부터 3학년사이 194명 조선족녀대생들과 남한의 서울과 각 대도시, 소도시에 분포한 녀자대학, 남녀공학, 전문대의 부분적 녀대생으로서 지역별과 학급별로 골고루 표집한 통계자료와 직접적인 면담자료 등이다.      본문에서 제기된 문제들로는 녀대생들의 인생관, 직업관, 련애관, 대학생활과 동아리활동 등이다. 정체분층표본법(整體分抽樣法)을 채용하여 임의로 선택한 대상으로서 각 학교 각 전업을 골고루 고려하였으므로 조사결과는 일정한 대표성을 띠였고 가히 두나라 녀대생들의 현시대 사회화과정 현황을 기본상 반영하였다고 생각한다.     一. 녀대생들의 인생관 문제     조선족녀대생들에게 당신의 생활동기는 무엇입니까? 하는 물음을 주었을 때 48.97%의 학생들이 사업의 성공을 첫 자리에 놓았고 다음으로 원만한 가정(28.35%), 사회에 유익한 인간(11.86%), 경제가 부유하기 위해(5.67%),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위해(5.15%)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로부터 우리는 조선족녀대생들의 자아가치에 대한 긍정성을 보아낼 수 있고 또한 사회와 가정, 현대의식과 전통 관념간의 모순충돌도 보아낼 수 있다.      남한녀대생들의 경우를 보면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함이 32.5%, 좋은 직업의 선택이 30.4%로 제일 많은 수를 나타내였고 학문연구도 14.0%로 적지 않은 수자를 보여주었다. 한 지방대학의 조사에서 앞으로의 교육진로를 묻는 질문에서도 석사학위나 박사학위수준까지를 원하는 녀학생비률이 4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 남한녀대생들의 교육에 대한 특수한 욕구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즉 남성과 가족, 사회에만 의존하던 예전의 전통 관념과는 달리 자신의 내적 성숙과 전문성을 성취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개개인의 개성과 재능을 파악하여 자신의 미래에 주체적으로 대응해 나감을 볼 수 있다.       二. 녀대생들의 직업관 문제     설문조사에서 “만약 국가에서 배치하여 주지 않고 학생들 자체로 취업하라고 하면 리상적인 직업을 찾는데 대한 동무의 신심은 어떠합니까?” 하는 물음에 76.8%에 달하는 조선족녀대생들이 매우 신심이 있거나 비교적 신심이 있다고 하였고 “취직에 따르는 외적 압력에 대해 동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95.36%를 차지하는 녀대생들이 더욱 노력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과감히 경쟁에 뛰어들겠다고 하였다. “당신이 직업을 찾는 방법은?”라는 물음도 60.3%를 차지하는 녀대생들이 자기능력으로 면접시험 등 직접적인 형식으로 채용자 측의 인정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조선족녀대생들이 사회개혁의 엄준한 시련에 직면하였어도 여전히 특유한 자신심과 성숙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장경제의 변화된 체제에 적응하는 자아의식과 취업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22.26%를 차지하는 조선족녀대생들이 치열한 경쟁에 충분한 인식과 신심이 없고 부모와 친척관계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보여 진다. 이는 직업관 형성에서의 독립성과 의뢰성 간의 모순심리를 보여주고 있다.      직업모험의식에서 보면 수입이 높고 사업이 긴장하고 잘하지 못하면 해고당하는 직업에 52.58%로 제일 많이 선택되였고 다음으로 수입이 비교적 높고 사업이 비교적 긴장하나 노력하지 않으면 실업당하는 직업에 43.81%가 선택하였으며 수입이 낮으나 사업이 수월하고 실업할 우려가 없는 직업에는 2.09%밖에 선택하지 않았다. 또 조사대상의 57.22%에 달하는 녀대생들이 개인의 우세와 특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첫 자리에 놓았다.      상술한 사실은 조선족녀대생들의 현시기 경제발전 수요에 적응하는 경쟁의식, 주체의식과 모험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적 지위를 중시하던데로부터 개인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는 직업, 그리고 지위나 성망보다 경제수입의 다소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실제문제로의 전환현상을 보여준다.      남한녀대생들을 볼 때 이들은 비교적 장시기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생활해 온것 만큼 취업경쟁의식에서 조선족녀대생들에 비해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국가 철밥통”에 대한 미련은 기본상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IMF이후 한국여성들이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많이 고려하는 것은 직업의 안정성(42.3%)이고 그 다음으로 수입(31.4%)이였다. 각 대학 녀대생들의 직업선택 기준을 조사해 볼 때 서울녀자대학교에서는 첫째가 적성개발 가능성(48.5%)이고 그 다음으로 안정성(39.0%)이였고 경기신구대학에서는 자신의 취미와 소질을 살릴 수 있는 직업(42.7%), 안정성(24.1%), 보수(13.0%)의 순으로 나타났다. 즉 그들의 직업선택 기준은 자신의 적성과 맞는지의 여부가 제일 중요하였으며 안정성은 두 번째로 고려되고 그 다음 수입도 중요한 기준으로 나타났다. 자신의 적성개발 가능성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모습에서 녀대생들의 자아발전욕구가 강함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녀성의 수가 갈수록 늘어가는 사회분위기를 잘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녀대생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홀로서기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낀다고 하는데 저급 학년 때의 다소 랑만적이고 추상적인 계획이 고급 학년에가서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향에로 변함에 따라 직업의 안정성이 소질개발에 못지 않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게 되었다. 이들이 비록 강하게 취업을 원하지만 취업에 대한 자신감은 약하다고 한다. 2000년 이화여자대학교 졸업생 취업상황을 보면 총 취업률이 72.0%였다. 학과별로 보면 약학대학이 92.45%로 제일 높고 그 다음으로 간호과학대학 89.5%, 의과대학 88.9%, 가정과학대학 84.7%, 공과대학 77.5%, 경영대학 77.5%, 인문과학대학 73.1%, 조형예술대학 73.1%, 음악대학 72.1% 등의 취업률로 모두 총 취업률의 평균치(72.0%)를 초과하나, 사회과학대학(69.3%), 사범대학(67.9%), 자연과학대학(62.5%)등은 평균수치에도 이르지 못하고 특히 법과대학 같은 곳은 근근히 19.1%가 취업한 외 대부분이 계속 진학하거나 대학원고시준비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는 법학전업에 대한 사회의 질적 요구가 높아졌고 그 경쟁률도 치열함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三. 녀대생들의 련애관 문제      조선족녀대생들의 련애동기를 볼 때 “좋아하는 이성과 같이 서로 방조하고 리해할 수 있다”가 69.47%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대학기간에 련애하는 것이 제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이 시기는 감정이 진실하고 순결하며 세속의 방해를 적게 받으며 또한 공동한 학습생활가운데서 서로 료해하고 서로 방조하며 서로 관심하고 서로 추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른 한면 “혼인은 인생의 중요한 과제이며 련애는 혼인을 위한 준비이다”가 22.63%로서 그 다음의 수를 나타내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련애혼인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리상적이며 명확함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학습이 긴장하기에 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감정위탁을 찾는다(4.21%)든지, 때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2.11%)등 원인이 일부 녀대생들의 련애동기로 나타나고 있었다.      배우자 선택표준을 보면 설문조사에서; 능력이 29.69%, 사상품질이 22.4%, 흥취와 성격이 13.2%, 학력이 10.94%, 경제조건이 9.9%, 용모가 6.25%, 총명이 3.65%, 가정상황이 2.6%, 년령이 1.56%등 순위로 나타났다.      위의 수치에서 우리는 조선족녀대생들의 배우자 선택에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특점을 종합해 볼 수 있다.      첫째, 배우자의 능력, 품질, 흥취, 성격 등 개성적 특징을 비교적 중시하고 용모, 년령, 가정조건, 등 외적인 요소를 상대적으로 경시한다. 이는 그들이 련애를 감각적 만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감정적인 일치에 보다 중요한 자리를 놓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둘째, 품질, 성격 같은 정신적 요소를 경제조건과 같은 물질적 요소보다 더 중히 여긴다. 이는 그들의 자주의식과 독립의식을 과시하는 동시에 개혁개방이래 사회문화 가치체계의 새로운 변천을 반영한다.      셋째, 대상자의 능력, 품질, 학식 등 내적인 미를 그들의 용모, 년령 등 외적인 미보다 더 중시함을 볼 수 있다. 이는 현대 녀대생들의 올바른 련애, 혼인관으로서 평생의 동반자를 잘 선택하여 함께 진정 행복한 생활을 창조해 가려는 념원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애정과 사업사이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조사대상 94.21%에 달하는 녀대생들이 훌륭한 사업과 원만한 가정을 동시에 가지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이는 당대 녀성지성인들의 이중배역의 리상형 목표로서 노력하여 실천해 보려는 결심과 희망을 표달한 것이다.      남한의 녀대생들을 볼 때 이성교제가 사회적 관계망을 확충하거나 개인적인 안정감을 주는 등의 장점을 가진다(69.64%)고 보는 반면에 또 이성교제가 경제적 부담을 주고 학업에 지장을 초래한다(30.36%)는 등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다(경남: 진주 산업대 면담사례). 한 지방 남녀공학 2학년 녀대생은 말하기를: “이성교제로 하여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서 좋은 것 같다. 지금 사귀고 있는 오빠가 대인관계가 좋아서 오빠의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 ... 그냥 되게 좋다.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단점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시간랑비, 돈 랑비, 마음고생, 괜히 의심하게 돼서 사람이 치졸해지기도하고 공부라던가 동아리활동에 지장을 주고, 또 녀학생들은 대체로 남자친구에 더 신경을 쓰기에 심각해지면 대인관계가 협소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헤어지게 되면 서로에게 타격이 크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면담에서 한국 녀대생들의 련애동기와 그 장단점이 조선족녀대생들과는 어느정도 다름을 쉽게 보아낼 수 있다.      이성친구를 선택하는 조건으로는 대화의 가능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53.6%), 인간성(34.7%), 성격(29.6%), 경제력(24.6%), 성실성(16.8%), 사랑(16.3%)등 순으로 선택되였는데 보다싶이 상대방과의 공통한 언어, 품질과 성격적 요인을 가장 중요시 하고 있었다. 한 지방 남녀공학의 2학년 녀대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키는 180이상, 근육질은 싫지만 몸집은 좀 있으면 좋겠다. 안경 안 끼고, 눈 크고 잘생기고 깔끔한 인상이 좋다. 유머감각도 있고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돈도 많으면 좋고 하지만 외모보다는 성격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리상적인 남성상에서 성격이나 외모가 주로 언급된 반면 리상적인 녀성상에 대한 질문에서는 직업적 성취가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었다. 또한 굳이 직업적인 성취가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모두 완벽하게 해내는 초인적인 녀성의 모습을 본받고 싶은 방향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20대 고학력 녀성들에게는 남성과 녀성의 구별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 리유라면 이사회는 남녀가 공동이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우선 “한 인간”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남녀를 구분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타당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녀대생들은 자신이 녀성이라는 사실에 그다지 불리함을 느끼지 않았으며 성별보다는 능력에 의해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는 측면이 크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한국사회는 적어도 대학교에서의 성별차별은 어느 정도 극복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한 녀대생들의 역할모형조사에서 보면 자신이 선호하는 리상형 녀성상에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계속적으로 직업적인 성공을 이루어내는 녀성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물을 선택하고 있었다. 이는 녀대생들의 완벽함에 대한 추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성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운 용모역시 성공을 빛내게 하는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외에 력사속의 인물이나 주변의 인물을 역할모형으로 꼽는 현상은 녀대생들이 사회나 대중적으로 제시하는 가치기준보다는 자기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더 높이 고려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방향을 결정해 나간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四. 녀대생들의 대학생활과 동아리 활동      청소년 시기의 량호한 가정환경과 그 분위기는 자녀들의 사회화로 하여금 적극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한다. 그러나 자녀들의 년령 증가에 따라 가정의 교육과 정보는 그들의 성장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가정이 자녀들의 사회화에 주는 영향은 점차적으로 감소되고 있다. 조사에 의하면 76.6%를 차지하는 녀대생들이 “현재 부모가 자기에게 주는 영향이 동배군체(同辈群体)가 주는 영향보다 적다.”고 하였다. 즉 청년기에 이르러 동배군체 및 대중전파매개물 등의 사회적 인소영향이 점차적으로 가정적 영향을 초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배군체는 하나의 중요한 사회화인소로서, 그들 사이는 언어 심리가 잘 통하고 쉽게 각종 수효를 만족시킬 수 있어 충분한 자유권리를 향수할 수 있고 개성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년령의 증가와 교제범위의 확대는 이런 영향을 더욱더 심화하고 있다.      대학생활에서 조선족 녀대생들이 동아리 활동에 참가하는 동기를 보면 66.32%가 자신의 능력을 단련하기 위함이고 21.58%가 자신의 학습과 생활을 조절하기 위한데 있다고 하였다. 즉 그들의 행위목표는 명확하며 주동성과 실천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류형의 활동을 즐기는가 하는 물음에는 42.19%가 실천형, 18.75%가 오락형, 15.1%가 문화형, 6.77%가 체육형, 6.25%가 전업형, 복무형 등으로 나타났다. 그 특점을 볼 때 도시나 농촌으로 진출하는 자원봉사단 등의 실천성이 강한 사회활동을 즐기며 또 문화학습 오락활동과 각종 사회문제토론에 광범한 흥취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반면에 정치활동 참여 열정은 점차 하강되고 있었는데 조사에 의하면 당, 단조직의 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매우 원하는 학생들이 13.2%밖에 안 되며 대세에 순응하거나 이런 활동을 원하지 않는 학생이 27.6%나 차지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적 활동에 참가하는 학생은 59.38%로서 비교적 다수를 차지하였다.      조선족 녀대생들이 가정교사나 각종취업기능양성 등 경제활동에는 신경을 쓰나 자신들에게 존재하는 각종문제를 가지고 벌리는 집체토론이나 강좌, 좌담 등은 매우 적은 형편이다.      남한 녀대생들이 대학생활에서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인간관계(32.9%), 취업진로(27.7%), 학문전공(26.1%)의 순으로 나타났으며 대학생활 중 가장 큰 걱정거리는 진로문제(59.4%), 인생관과 가치관적립문제(16.8%), 학업문제(10.7%)로 꼽고 있었다.      동아리 활동에서도 녀학생들의 참여목적은 친목도모가 44.5%로 가장 높은 빈도를 나타내고 그 다음으로 취미활동(18.6%), 다양한 경험축적(17.0%)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의 경우 남학생들의 61.6%가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녀학생들은 73.2%가 동아리 활동에 참가하고 있어 참여의 적극성이 더 높게 나타났다. 그들이 많이 참가하는 활동은 예술동아리(22.7%), 취미교양(22.0%), 사회과학(14.4%), 학술부분(11.5%) 등으로 나타났다. 그들의(서울여대 2학년) 말에 의하면 “동아리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이고 이런 경험은 매우 독특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침목 도모에도 좋다.”고 하였다. 한 지방 남녀공학 2학년생은 “현재 정치, 경제에 관한 토론 모임에 종종 참여하고 있다. 발표능력을 키우고 싶었고 지식도 늘일 수 있어서 좋다. 자료를 찾는 것이 좀 벅차지만 토론을 위해 공부하게 되고 상식도 느는 것 같아서 좋다.”라고 하였다.      대학의 동아리 활동은 그들의 흥취와 능력을 키우고 자기가 관심하는 분야의 지식을 늘이며 금후 사회에 독립적인 주체로 서기 위한 준비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동아리 활동에서 녀학생이 리더가 되는 경우 남학생들은 거부감을 나타내고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역할이 부각되도록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남존녀비사상이 비쳐짐을 볼 수 있다. 남성이든 녀성이든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이 필요하며 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의 능력을 열심히 키워나가야 앞으로 사회의 유용한 인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五. 요약 및 론의     총적으로 볼 때 중국조선족 녀대생들의 사회화 과정은 아래와 같은 특성을 볼 수 있다.     1. 자아가치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높아 자신의 분투를 통해 인생가치를 실현하려는 신심이 있는 한편 아직도 남강 녀약의 전통 관념이 존재하고 있다.     2. 직업관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왔는바 직업의 사회적 지위와 성망을 추구하며 안전한 철밥통을 선호하던 취업관이 현시대에 와서는 비교적 도전적이고 창발적이며 모험적인 취업관으로 대체되었다.     3. 청춘기 성의식의 각성은 심리상의 미묘한 변화를 일으켜 련애문제가 그들의 학습생활에 침투되었으며 배우자 선택표준이 물질형으로부터 정신형으로 전변되었다.     4. 대학생활에서의 동아리활동은 서책에 머물던 과거와 달리 사회진출의 실천성으로 전변되고 능력배양 추구를 중요시하였다. 그 규모와 성질은 다양하나 구체문제를 가지고 해결하는 강좌나 연구토론 등 학술활동이 결핍하다.     남한녀대생들의 성별사회화 특징을 보면 보편적으로 교육에 대한 욕구가 높고 졸업 후의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직업을 선호하며 이성 친구를 사귈 때 성격적인 측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의 가치기준을 정립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노력이나 투자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 남한녀대생들이 교육에 대한 요구는 남학생들과 거의 차이가 없으며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가정이나 사회도 이런 추세에 긍정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2. 남한녀대생들의 이성교제는 상당히 자유로움을 보여주는데 그 리유가 결혼을 위한 준비나 탐색이라는 것과는 달리 폭넓은 친구관계나 대인관계 경험을 위해서, 대학생활의 활력소, 생활의 안정감 등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리상적인 남성상은 성격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였고 녀성상에서는 “현처량모”는 아니고 자신의 직업성취를 중요하게 꼽고 있었으며 적어도 대학생활에서 남녀 성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고 있었다.     3. 졸업 후 직업에 대한 전망에서도 녀대생 반수이상이 취업을 요구하였는데 남학생인 경우 졸업 후 취업은 필수사항이라는 점에 비해 녀학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현대적 교육을 받는 녀대생들도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가정의 전통관념 사이에서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고 이러한 생각은 다시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요소와 충돌하게 되어 결국 녀대생들에게 완벽한 능력을 가진 초인간적 리상형 녀성에로의 환상을 가지게 만든다. 이러한 환상은 대학졸업 후 직장에서 깨어지게 되고 또 일부는 결혼 후 직장과 가정의 실질적인 도전을 받게 된다. 즉 결혼 후 자신의 역할에 대한 갈등이 심화되어 양자에서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경우가 남한에서는 빈번한 것이다. 물론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이나 교육 분담이 많이 증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초인이 아니면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본 연구에서는 중국조선족녀대생들과 남한녀대생들의 성별사회화를 료해하기 위하여 가능한 대표적인 표본을 대상으로 삼으려 노력하였지만 조사 자료의 수집 중 특정한 학교의 자료에 국한된 경우가 많으므로 그 결과를 일반화하기에는 신중을 가하여야함을 밝히고 싶다. 그리고 본 연구는 녀대생들의 사회화 실태에 대한 자료분석을 중심으로 현상파악에 그쳤지만 앞으로의 연구는 보다 광범하고 대표적인 표본들을 조사 연구하여 두 사회 녀대생들의 사회화과정을 좀더 깊이 있게 조사연구하고 또한 어떻게 이와 같은 형태로 녀대생들의 사회화가 이루어지는가하는 그 과정에 대한 분석이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운남소수민족대학에서 열린 전국녀성학학술회 발표론문 2008.5)                      《少数民族女性学学科建设与妇女发展》(中文版)                                         --- 云南民族出版社 出版 2008.8
45    《혼외련》현상에 대한 몇가지 사고 댓글:  조회:5640  추천:84  2010-05-31
                《혼외련》현상에 대한 몇 가지 사고                                                                                                                                       글 / 강 순 화    《혼외련(婚外情)》현상이란 법적 부부관계가 있는 남녀가 배우자 외의 다른 미혼 혹은 기혼의 이성과 발생하고 있는 정애(情愛)관계를 말한다. 사람들이 보통《애인》관계라고도 말하는 이《혼외련》현상은 표면상에서는 마치 당사자들의 감정문제에만 국한되는것 같지만 실질상 이는 현실사회 성인 남녀들의 혼인과 애정생활에서 나타난 한개 홀시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로 되고 있다. 러시아 장사길에서 시작된《짝무이》(搭伴儿)현상으로 부터 한국,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 점차 보편화되고 있는《림시동거》현상,중국에 드나드는 외상(外商)이나 한국《사장님》들에 의한《현지처》현상, 돈과 권력의 향락터에서 기생처럼 살고 있는《미모의 첩》들, 유흥업소 홍등가에서의 란잡한 이성교제... ...등등 이런 비정상적인 남녀관계의 존재는 이미 현사회의 경제, 문화, 생활, 도덕 등에 그 사회적 배경과 바탕을 두고있다.     사람들이 이런 현상에 대한 태도 역시 애매한바 마치 류행이나 따르듯이 점차 너그러워지거나 지어 묵과되고 있으며 그《혼외련》당사자들의 견해 또한 그 무슨《진실한 사랑의 추구》인양 놀랄만큼 파렴치하다. 그럼 아래에 소수 당사자들이 주장하는 몇가지 견해들을 분석하여 보자.     一.《<혼외련>현상은 사회의 진보적 현상》인가?     인류력사 이래 사람과 사람지간의 관계, 특히 이성지간의 관계는 시종 존재하여 왔다.《혼외련》현상은 혼인 이외로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남녀의 정애관계로서 혼인생활 외의 또 다른 제3자와의 만남이기에 필연적으로 당사자들의 혼인과 가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 인류의 혼인과 가정의 력사를 볼 때 이성관계는 최초 원시사회의 혼란한 군혼(群婚)상태로부터 사회의 발전과 진보에 따라 부단히 진화되고 변화되여 왔으며 건국후에는 나라의 헌법으로 일부일처제를 규범화하였다. 이런 력사적 과정을 거친 인간의 혼인관계 속에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혼외련》현상은 그 무슨 신생사물이거나 진보적 현상인 것이 아니라 일찍 사유제사회에서 부터 존재하여 왔던 남녀 불평등과 불륜관계의 낡은 물건인 것이다. 다만 락후하고 미개하던 성 혼란의 형식과 방법이 점차 더《고급적》이고 더《개방적》이면서도 또한 더욱더 위장된 형태로 발전했을 따름이다.     가정은 사회의 세포로서 가정의 행복과 온정은 사회의 안녕과 발전의 기초이다.《혼외련》현상의 존재는 우선 당사자들이 가정과 자녀에 대한 무책임으로 부터 시작하여 점차 가정의 파괴를 조성하는 행위로서 사회의 안정과 발전의 장애물이지 결코 그 무슨 사회의 진보적 현상은 아닌 것이다.     二. 《<혼외련>현상은 인성이 되돌아 온 (人性的回归)것》인가?    일부 제3자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론리에 의하면《정욕과 성욕은 인간의 본능이기에 사람들이 혼외로 성애를 찾는 것은 본능의 정상적인 표현이다. 장기간 법률과 도덕으로 혼외의 정애관계를 제한한 것은 사람의 성자유를 억압한 것이기에 인성(人性)에 대한 부정과 압제이다. 때문에 현재 류행되고 있는 <혼외련>현상은 인성이 되돌아 온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성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즉 기타의 동물과는 다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격, 성질, 개성, 감정 등 인간성을 말한다. 인성은 여러 가지 속성의 총화로서 거기에는 인간의 자연속성, 사회속성과 사유(私有)속성이 포함된다. 사람의 성욕이나 성애는 자연속성의 조성부분으로서 사람의 본질 속성인 사회성의 제약을 받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가히 혼인관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혼외에서 마음대로 성애를 찾는다면 그것은 곧 사람의 본질속성인 사회성을 무시하고 생물성만 돌출이 한 것으로서 결국은 인성에 대한 외곡과 부정이지 그 무슨 인성이 되돌아 온 것이 아니다. 또한 사유속성은 인성의 중요한 한개 속성으로 거기에는 사람의 리성(理性)과 도덕성이 포함된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성행위를 포함하여 응당 사회, 민족, 국가가 허용하는 규범에 따라야 만이 진정한 인성을 갖춘 사회화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법률적, 도덕적 규범으로 사람들의 모든 행위를 공제하고 일정한 한계에로 조절하는 것은 인성의 부단한 완선화이며 인류가 문명한 사회에로 나가는 진보적 현상이고 발전이지 그 무슨 인간 자유에 대한 제한이라고 말할 수 없다.      三.《혼외련》당사인들이《새것을 좋아하지만 낡은것도 싫어하지는 않는다(喜新不厌旧)》고 할 수 있는가?   《새것을 좋아하지만 낡은것도 싫어하지는 않는다》,《밖에는 채색기가 나붓겨도 집안의 붉은기는 넘어지지 않는다》하는 것은《혼외련》당사인들의 또 하나의《론리》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사람들이 혼외에서 정애(情愛)를 찾는것은 오직 일종의 새 자극과 쾌락을 위한 것이지 원래 가족에 대한 감정을 크게 방해하지 않으며 싸우지도 리혼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평화공처>의 국면은 타인이나 사회에 모두 방해가 되지 않으므로 이런 혼외련현상은 반대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가정이란 무엇인가? 주지하다시피 가정이란 남녀쌍방이 애정의 기초상에서 결혼하여 합법적인 부부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런 가정에서의 남녀쌍방은 모두 상대에 대하여 특수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된다. 만약 부부중 일방이 혼외로 애인이 있다면 이는 우선 부부애정의 독자성을 파괴한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부부의 감정은 멀어지고 혼외의 새로운《쾌락 대상자》에 대한 감정이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부부지간의 권리와 의무는 그 진실한 내용을 잃게되고 대신 허위성과 기편성만이 커지게 된다. 이런 상태가 발전해 나간다면 부부는 자연적으로 모순과 충돌에 빠지고 가정의 화목은 파괴되며 혼인은 실패하게 된다. 또한 현실사회에서 혼외로 애인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요구조건이 있는바 그 조건에 변화가 생기면 그 관계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례하면 상대방의 금전이나 지위, 권리 등등이 변동 혹은 상실되여 리용가치가 적어졌거나 또는 상대의 용모, 성격, 행동거지가 싫어졌거나 하는 등등 조건들의 변화에 따라 그 관계도 점차 파렬되게 되고 새롭던《쾌락》은《낡은정》으로 변화되며 이런 당사자들의 감정은 또 새로운《목표》에로 전이되는 것이다. 때문에《새것을 좋아하지만 낡은것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은《혼외련》에 대한 괴변이고 방패이며 가족이나 주위사람들을 기편하는 구실에 불과 할 뿐이다.     四. 《혼외련》이 부부쌍방의 자아수양을 촉진할 수 있는가?    일부사람들은《혼외련이 생기는 것은 가정으로 놓고 말하면 일종 외재적 위협이며 경각성을 불러 일으켜야 하는 일이기에 부부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대방이 만족하게끔 각 방면에서 제고하고 일정한 수양을 갖추어야 한다, 때문에 혼외련은 사람의 소질제고를 촉진한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수양이란 무엇인가? 수양이란 바로 사람들이 사회생활중에서 각 방면의 신근한 노력과 배움, 그리고 부단한 자아교양을 거쳐 도달하는 능력과 수평, 품위와 기질을 말한다. 수양은 고상한 정감의 발휘와 표현이며 자각자원적인 것이다. 그런데《혼외련》은 가정에 대한 일종의 파괴적 인소이므로 사람들은 이런 현상이 자기 신변에서 발생되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 하여 수시로 자신과 대방을 단속하거나 또는 자아반성을 할수 있다. 그러나 이런《제고》와 노력은 조심스럽고 눈치를 보아가며 무엇을 예방하려는 압제된 정서에서 출발하게 되므로 절대 그 무슨 고상한 정감으로 될 수 없고 자각적인 수양은 더욱 아닌 것이다. 마치 일종의 전염병이 만연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집안을 소독하고 청결하는 것과 같으니 이렇게 위생을 잘하게 된 공로가 그래 전염병의 발생에 있다고 할수는 없지 않는가!     이상의 분석에서 보다시피《혼외련》현상은 그 존재의 리유나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개방이래 가정을 둔 남녀들의 해내외로의 대량적인 로무송출과 이로 인해 생긴 수많은 리산가족의 산생은 이런 현상의 사회적, 문화적, 물질적 배경을 만들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또한 현실사회의《혼외련》현상은 남녀를 불문하고 마치 그 당사자들의 권리나 부, 능력이나 조건을 보여 주듯이 자랑거리삼아 선양되고 있고 그 어떤 법적인 제재(制裁)조치가 없는것 또한 현실이다.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 이미 적응이니 된듯이《애인》을 두면 그젯날처럼 망신스러운 일이거나 위법이므로 응당 처벌받아야 할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날로 엄중하게 확산되고 있고 수많은 가정들의 혼인생활에 직접적인 타격과 고통을 주고 있다.      행위문화로서의 혼인, 가정은 물질문화 그리고 정신문화의 복잡한 역동관계속에서 부단히 변화 발전한다.《혼외련》현상은 바로 시장경제가 몰고 온 물질의욕의 증장, 가치관념의 변화, 생활방식의 개변에 따라 나타난 퇴페문화의 산물이며 륜리도덕에 대한 반역이고 인간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문명시대라면 이런 오물과 흑점들을 깨끗이 없애버려야 하며 필요한 조직적, 법률적 조치들을 제정하여 엄격히 단속해 나감으로서 이런 현상의 위해가 우리사회에 지속적으로 만연되는 것을 방지하는 일이 이제는 하나의 시급한 과제로 되여야 하지 않을가 생각된다.                                                                                      2010. 5. 28                     
44    엄마의 지혜는 어디에? 댓글:  조회:4847  추천:83  2010-05-06
               엄마의 지혜는 어디에 ?                                        --- 5월9일 어머니절을 맞이하여      올해는 계절이 좀 늦어지는가 싶더니 그래도 제철은 어김이 없는 모양이다. 요지음 들어 연길거리 곳곳마다의 가로수들에는 연분홍빛과 하얀빛 살구꽃, 복사꽃들이 만발하여 사람들에게 상쾌한 새봄의 기쁨을 안겨주고있다. 그 어느해 부터인가 달력에까지 반듯이 오른 5월9일 어머니절도 어느덧 화창한 봄날과 더불어 우리곁에 사뿐 다가왔다.         이 아름답고 호화로운 계절에 우리 예쁜 엄마들은 무엇을 생각하고있을가? 자식도 남편도 가정도 사회도 한마음 가득 품고 사는 우리 엄마들,《꽃》이자《대지》라 일컫는 우리 엄마들의 삶의 지혜는 무엇일가? 어머니절을 맞는 이 시각에, 자식들의 축복속에서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만남자리에서 한번쯤은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하는것이 이 물음이 아닐가 싶다.        《엄마는 예쁘지 않을수는 있지만 지혜가 없어서는 않된다》고 우리는 늘 말하고 있다. 지금의 시대는 능력과 지혜가 있는 엄마의 역할이 우세를 발휘하고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미모로만 사람을 끄는 전통적인 시대는 이미 우리와 멀어지고 있으며 사회나 가족이 녀성이나 엄마에 대한 평가는 오직 그들이 갖추고 있는 종합적인 자질과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일가? 지혜는 재질이고 능력이며 량호한 생활습관이고 적극적인 인생태도이다. 지혜는 독립적이고 자신감 있는 인격이며 활발하고 락관적인 성격이다. 지혜는 세상을 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며 관용과 용서를 바탕으로 하는 바다같이 깊은 도량이다. 지혜는 명석한 두뇌이며 견인분발한 의력이며 영구불변하는 매력이다.          용모의 아름다움은 늪에 비친 달빛과 같이 사람들에게 잠시 동안의 미감은 줄수 있지만 영원한 매력은 줄수 없다. 오직 내재적인 미, 기질적인 미야말로 영원한 젊음을 과시하고 있어 그 무궁한 흡인력으로 사람들에게 신성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지혜로운 엄마는 성숙의 미가 넘치고 지혜로운 엄마는 온유하고 따뜻하며 지혜로운 엄마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사업의 성공과 가정의 행복은 그 누구나 갈망하고 있는 인생의 추구이지만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능력이나 수준보다도 정확한 사유방식과 생활의 지혜가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혜가 있으면 자연히 흉금이 넓어지고 지혜가 있으면 그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움을 모르며 지혜가 있으면 기질도 우아해지고 행동거지가 아름다워진다.             그러면 우리 엄마들의 삶의 지혜는 어떻게 가꾸어질가?  아래에 몇가지만 라렬해 보자.        우선 자신의 고정적인 사업(혹은 하고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이는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관념이다. 녀성이 사회에서 남성들과 경쟁하려면 명석한 두뇌는 물론 자신의 능력도 꾸준히 개발해야 하며 부단히 업적을 쌓아야 한다. 자신의 지혜로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발명창조하고 분발진보하며 게으름없는 노력을 기울린다면 성공의 기회도 뒤따르기 마련이다. 아이들 눈에도 일하는 엄마의 모습이 가장 신난다고 하지 않는가!        다음으로는 일정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엄마의 경제적 독립은 인격적 독립의 본전이다. 자신의 두손으로 창조한 재부와 고정적인 수입이 안받침해 줄 때 엄마는 자연히 당당해지며 가정에서는 총리로 사회에서는 남을 도울수 있는 지성인으로 자신의 총명과 재질을 남김없이 발휘할수 있다. 금전은 만능이 아니지만 온당한 경제기초는 가정에 안녕과 평화를 가져다 주며 가족들간의 화목과 행복을 만들어 주는 기본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령활한 생활능력이 있어야 한다. 생활은 우리에게 쾌락을 가져올 수도 번뇌를 가져올 수도 있다. 너무 완벽한 생활추구는 쉽게 피로를 가져오고 권태를 느낄수 있지만 또한 너무 라태하거나 허무한 생활방식은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기 쉽다. 지혜로운 엄마는 항상 즐거운 마음과 신근한 노력으로 현대감이 넘치는 가정환경을 만들고 가정생활을 사랑하며 자식의 성장을 기뻐하면서 그들에게 온갖 심혈과 정성을 다 쏟아 넣는다. 엄마는 이런 생활속에서 삶의 쾌락을 느끼고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면서 즐겁게 매 하루를 보낸다.         또 다음으로는 자신을 항상 가꿀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우리 엄마도 화장을 좀 했으면 이쁠텐데 ... ...》한 소학교 설문조사에서 아이들의 말이다. 몸과 마음의 미를 알기전에 우선 외모부터 눈에 띄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금은보화로 온 몸을 장식하는것 보다 수수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멋이 더 매력적이라는 것이 현시대의 심미관념이다. 단정한 머리스타일에 자연스러운 화장을 살짝 올리고 몸매에 어울리는 복장에다 건강미까지 갖추어 진다면 이 아니 금상첨화인가? 선천적인 조건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부단히 보완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며 전통적인 관념은 현대적인 감각으로 부단히 고쳐나가야 하는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엄마들의 지혜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것은 부단한 배움이다.《영원히 살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것처럼 살라.》고 하지 않는가? 인생의 배움은 끝이 없으며 엄마의 삶의 지혜도 바로 배움에서 오는것이다. 현대화 정보화와 세계화시대에 따라가자면 배워야 하고 삶의 질을 높이려면 배워야 하며 놀랍게 성장해 가는 자식들을 뒷받침해 주자해도 배워야 한다. 배움은 엄마의 품위와 풍격을 높혀주며 배움은 엄마의 지혜와 매력을 더한층 가꾸어 준다.        경인년 새봄의 어머니절을 맞이하여 우리 엄마들 모두다 더욱더 아름답고 더욱더 세련되며 더욱더 건강하고 더욱더 활기에 넘치는 새세기의 신녀성으로 되자. 가정에서는 사랑스러운 안해로, 존경스러운 어머니로 사회에서는 능력있는 일군으로, 성공하는 녀성으로 자신을 부단히 승화시키자. 우리 엄마들께 이보다 더 신나고 멋진 삶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2010년 5월 6일  
43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독립정신 드높인 의사 윤봉길 댓글:  조회:5039  추천:75  2010-04-02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독립정신 드높인 의사 윤봉길 윤봉길의사 "상해홍구공원의거"78주년을 기념하여 연변대학 한국학연구중심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뜨락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력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출신과 교육     20세기초, 기울대로 기운 한말의 풍운은 마침내 나라마저 무너져내려앉으려는 피빛노을녘이였다. 한반도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빌미로 설치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반도 강점준비의 그물을 쳐나가기에 혈안이 되여있던 숨가쁜 위기의 나날, 어두컴컴해지는 한민족의 력사의 박명기에 한 줄기 빛이 이름없는 농가에서 쏟아져나왔다.     1908년 6월 21일 저녁 8시경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은 그 생애의 고고성을 우렁차게 울렸다. 산지수명(山地秀明)한 두메산골,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수려한 예향(禮鄕) 충청도 예산땅 한 촌락에서의 일이다. 일명《목발이》라고 하는 이 마을의 한미한 농가에서 듬직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목계천 건너 섬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늘의 광현당(光顯堂)에서 갓 20세의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 새댁이 첫 옥동자를 분만하자《대장감이로구나!》 하며 할머니가 제일 먼저 반겼다. 덕산《목발이》마을에서는 이 가문이 5형제씩 두게 되여 마침 앞산인 수암산(修岩山)에《5형제바위》가 있으므로 수암산 5형제바위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 뒤산 가야산(伽倻山)줄기에 장군봉(將軍峯)도 있어서 장군감이 또 태여났다고 반겨마지않았다. 갓난아이때 부터 대장감이라 해서 집안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부모님들은 첫아들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겼고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달랐다. 이렇게 열여덟된 아버지 윤황(尹璜)씨와 두살우인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사이에서 태여난 윤봉길, 자(字)는 용기(鏞起)요,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은 별명이였다. 서당을 마칠즈음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이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후일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대의거에 성공하고 투옥되였을적에 옥중의 가명으로 희의(熙儀)를 쓴적이 있다.     윤봉길이 태여난 집안은 몰락한 량반가문으로서 전형적인 농가였다. 평생 땅만 파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윤두더지》로 통했고 억척스런 성미와 철저한 근면성실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마침내 벼 백여석을 거둬들이는 풍수를 이루었다. 흙에서 태여나 생애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흙의 주인으로서《목발이》마을《내 건너》에 농사왕국을 꾸민 할아버지는 그처럼 당찬 농민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가문의 택호가《내 건너》로 통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1913년 다섯살때부터 큰아버지 경(坰)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918년에는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유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가운데 애국심을 키웠는데 열두살때인 1919년에 일어난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의 자극을 받으면서 민족적 분노를 목격하였다. 그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후 최병대(崔秉大)의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한학을 배웠다. 1920년경《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 사상에 접하면서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가에서 자라면서도 남달리 비범한 기상을 보였다. 1921년부터는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공부했는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고 뛰여난 시재를 보여 약 300여편의 자작한시를 수록한《명추(鳴推)》,《옥수(玉睡)》,《임추(任椎)》 등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산천초목도 서광어린 정기를 어린 심신에 불어넣어 어두움으로 치달리는 력사에 새 불씨를 심어 일으키도록 해주는듯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척박한 산골, 한미한 시골집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련마하는 한편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농민들의 가엾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였다. 경제적으로 빈곤할뿐만아니라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문맹으로 생활하는 농촌사회의 참경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 하였으며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용기를 익혀 체질화해 나갈수 있었다.     1926년 19세되던 해《학문이 학문으로 그 가치를 나타내는 일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그는 서숙생활을 마치고 고향 목바리마을 49가구 200여명을 상대로 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시도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한글, 력사, 산수,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농민계몽, 농민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를 더욱 리론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하여 3편으로 된《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유인물책자도 펴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있는데《계몽편》은 례절 등 개인의식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으로 일깨워주었고《농민의 앞길》은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즉 농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는바 20세 청년으로서는 너무나도 초시대적인 선진적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보여주었다.     《농자 천하지대본이요, 농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잠들었던 가난한 농민들을 흔들어깨워야 산다, 알아야 산다, 협동해야 산다》라고 생각한 그는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1월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2월 18일에는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우화극《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여우같이 교활한 일제를 풍자했기에 관중의 대환영을 받자 곧 일본놈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경찰에 불려가서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지방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농촌진흥을 위하여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였다. 한편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로서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후 서울 시조사잡지 기자 리흑룡(李黑龍)이라는 독립운동공작원과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항일의 성격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바뀌였다.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한 순국의 정신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매헌 윤봉길로 하여금 민족혁명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농민이 우매하기때문에 우리가 못사는 줄 알고 농민운동을 펴왔는데 알고보니 그 왜놈들때문에 못사니 이 불효자식 갈길이 무엇인가는 아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어머님전상서에 올리고 23세때인 1930년 3월 6일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의 책상에는《사내대장부로 집을 나가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휘호 한폭을 남겼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에는《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리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라고 썼다. 이 처연한 글귀들에는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같은 신념으로 항일운동에 나선 한 젊은 독립투사의 단호함과 비장함이 서려있다.     중국으로의 망명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여 45일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뒤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해 단신으로 대련(大連)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한 윤봉길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고 이곳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취직하면서 돈을 벌어 야학과 농민운동으로 빌린 돈을 갚으라고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보다 큰 일을 수행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갔다. 우선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浦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동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미리공사(美利公司)에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하는 한편 로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리봉창(李奉昌)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였다. 더우기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중일 량군의 총소리를《민족과 민족이 부딪치는 소리》로 들은 윤봉길은 자신의 길을 찾은듯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마랑로(馬浪路. 지금의 馬當路) 보경리 4호에 있는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백범 김구를 만나《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고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은 림시정부의 행동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지휘하여 이미 리봉창, 류상근, 최흥식을 일본과 만주로 파견하여 큼직큼직한 일을 도모하고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1931년 9.18사건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대한 림시정부의 대책이기도 했다. 림시정부에서는 리봉창을 적의 심장부에 파견하여 일본왕 히로히또(裕仁)를 폭살하는 한편 류상근과 최흥식은 만주 방면의 고관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만주의 한, 중련합군의 중요한 지원작전이였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확보를 위하여 중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 반격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상해사변이고 윤봉길은 그 흉계를 다시 뒤집어 응징한것이다.    《제가 큰뜻(大志)을 품고 상해에 천신만고로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중일전쟁도 중국에 굴욕적인 정전협정으로 결착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자리를 구할 길이 없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도해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하는 윤봉길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보니 평시에 보아온 학식있고 착실한 청년로동자뿐이 아니라 정녕 살신성인의 대의(大義), 대지(大志)를 품은 의기남아였다고 백범 김구는 말했다.    《뜻이 있으면 일도 이룬다(有志者事竟成)고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참이였소. 전쟁중에 연구 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는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승한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왕의 천장절 경축례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모양이요. 그러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날에 달함이 어떠하오?》 하는 물음에 윤군은《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는 한인애국단 단장인 김구앞에서 혈서로 다음과 같은《선서문》을 써 이 사명을 수행할것을 맹세하였다.     《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   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여 중국을 침략하는 敵의 장교를 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大韓民國 14년 4월 26일                                                         선서인 尹奉吉                                                         한인애국단앞 》      력사적인 순간인 4월 29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봉길은 말쑥한 일본식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것을 살펴보며 그날 자기가 거사할 위치를 점검했다. 한편으로 시라가와(白川)대장의 사진을 구하고 태양기(일본기)를 사는 등등의 일로 매일 홍구에 래왕하면서 듣고 본것을 김구에게 회보하였다.    《오늘 홍구에 가서 식장설비를 구경하는데 시리가와 이 놈도 왔습니다. 제가 그 놈의 곁에 섰을 때에 어떻게 래일까지 기다리는고, 오늘 폭탄을 가졌더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쳐죽일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꿩을 쏠 때는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는것이나 숲속에 자고있는 사슴을 쏘지 않고 달리게 한 후에 사격하는것 모두가 쾌미(快味)를 위함인것이요. 군은 래일 성공의 자신감이 박(薄)하여 그러는거요?》라고 물으니《아닙니다. 그 놈이 내곁에 선것을 보았을 때 문뜩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에 성공할것을 나는 확신하고있습니다. 군이 일전에 내 말을 듣고서 한 얘기중에 이제는 가슴의 번민이 그치고 편안해진다는것이 성공의 철증으로 믿고있습니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지다를 죽이려 했을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선생으로부터 들은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란 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군이 결심하고 일을 행하려는것과 똑같은 리치이요.》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낯빛을 가지는것이였다.     4월 29일 새벽,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 집에 갔다. 최후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윤봉길의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였다. 시계가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면서 그의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주었다. 윤봉길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김구의 손에 쥐여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있는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김구를 향해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향했다.     오만한 일본, 천장절(天長節)행사에서 폭탄공격을 받다     상해사변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끝날무렵에 정전회담이 열리고있었다. 의기양양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그들의 소위 천장절행사를 크게 열어 승전기념을 겸한 군사적시위를 펼치고저 획책하였다. 천장절이란 일본왕의 생일로 군국주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 일본인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요하고 그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낼 목적으로 왕을 신격화하고 왕의 생일을 일본의 최대의 명절이자 신성한 날로 지켰던 그들의 국경일이다. 일본은 마치 1871년 프로씨야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궁전(凡爾賽宮)에서 윌헬름 1세 독일황제 대관식을 연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남의 나라에서《만세 일본》이라는 프랑카드를 붙이고 오만한 행사를 펼친것이다. 당시 홍구공원안은 상해거주 일본인 1만여명, 상해 침략 일본군 1만여명, 그밖에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여명 인파가 회집하여 성황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에 한국의 청년 윤봉길이 일본국기를 들고 도시락과 물통을 메고 잠입한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분렬식과 사열식을 마치고 기념식을 시작하였다. 높은 단위에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도열하고 그 오른쪽에 도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닭벼슬모자를 쓰고 사회를 봤다. 식이 시작되고 오전 11시 40분쯤 되여 윤봉길은 성난 사자처럼 뛰여나가 지니고있던 도사락을 던졌다. 중국군 병공장(兵工廠)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 귀주의 륙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이 만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내며 작렬하였다.     단상에서 기고만장하게 서있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아래로 쓰러졌다. 제국주의가 쓰러지는 모습이였다. 축하객으로 참석했던 한 쏘련인이 촬영한 현장필림을 보니 일본뿐아니라 세계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모습 같았다. 이때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대장과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찌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등 나머지 놈들도 눈과 다리를 잃었다. 당시 주중(駐中) 일본공사였던 시게마쯔(重光葵)는 왼다리를 잃은채 13년뒤인 1945년 9월 2일 패전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윤봉길은 거사후 군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쓰러졌다.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가 그의 몸우로 퍼부었다. 그가 입고있은 회색정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의 형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여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군경들은 경계선을 치고 그를 감시하다가 이윽고 차가 와서 머리와 다리를 집어들어 짐짝처럼 차 뒤좌석에 처넣었다.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 륙군성 극비문서 만밀대일지(滿密大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4월 29일 상해에서 시라가와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 25일 살인, 살인미수, 상해, 폭팔물 단속벌칙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윤봉길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 륙군 공병작업장내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륙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의 지휘하에 사형이 집행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유해(遺骸)를 씻고 납관(納棺)한 다음에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약 6척을 파서 매장하여 오전 10시 30분 모두 종료 되였음.     처형직전의 윤봉길의사:《사형은 미리 각오한것이니 지금에 림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 (일본 헌병사령관 보고서)》      꼭 실현되고야말 대한독립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멀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없이 떠나가오.》 이는 1932년 12월 19일 윤의사의 희생직전 마지막 유언이였다.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략하던 김학철씨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바로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하였다. 홍구공원의 정의로운 죽음은 우리 계레의 갈길을 밝혀주었을뿐아니라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공명을 남겼다.     이 쾌거로 인하여 수괴를 잃은 일제는 기세가 크게 꺾기여 급진적침략행보를 늦추지 않을수 없었으며 중국은 민족적 자각의 계기로 삼아 일제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서두름과 동시에 한국을 동반자로 재인식하게 되였다. 또한 전세계가 베르사이유(凡爾賽) 체제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없이는 세계평화를 기대할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도 시작되였고 독립을 기다리다 지친 세계 모든 약소민족의 가슴에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심어주게 되였다.     일제가 윤봉길의사를 가두고 처형하여 땅에 매장해도 윤봉길의사의 기개는 싹이 트고 일제의 모든것을 태워버릴만한 폭발적이고 값진 민족의 에너지로 작동되였다. 윤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한 통쾌한《독립전쟁》의 한 장면이였으며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계기가 되였음도 당연한 리치였다. 당시 세계언론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였고 그 정의의 기록은 지금도 력사속에서 살아숨쉬고있다.     안중근의사의 할빈 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사상 2대 쾌거인 상해의거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이 의거로 말미암아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은 놀랄만큼 호전되였다. 특히 이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정부는 림시정부에 대한 물심 량면으로의 협력과 원조를 베풀기로 다짐했다.     둘째, 이 거사로 말미암아 미국, 하와이, 메히꼬, 꾸바 등에 사는 한인교포들의 애국열정은 전무후무했으리만큼 높아졌고 그리하여 림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백범에 대한 후원이 격증했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성재 리시영(省齋 李始榮)도 조국광복 이후 출판한《도왜실기》에서 상해의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땅을 밟게 된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요. 우리 림시정부와 윤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난 어린이가 깊은 련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있는것이요. 조국독립투쟁이 우로부터의 부과된 의무조항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솟아오르는 민중의식의 일환이기에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결코 일회적투쟁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항일투사의 출현과 열렬한 투쟁의 지속과 확산을 예고하는것이였다. 윤의사의 의거이후 중국 국민당은 적극적인 지원책을 모색하여 김구와 장개석은 중앙륙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서 영수회담을 갖고 군사교육에 관한 지원을 협의했다. 어쨌든 한국독립군의 본격적편성을 위해 독립군장교양성에 착수했다는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일이였다. 이 획기적 조치가 마련된 촉매제는 바로 홍구공원 의거이며 그 주인공은 윤봉길의사였던것이다.》     김구-장개석 회담의 산물로 락양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광복군조직의 기간요원 확보책이 마련된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된것이다.     상해의거로 림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로 하게 되였다.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20년대이후 침체상태에 있던 림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후 중국정부의 지원이나 동포들의 지원도 모두 한인애국단의 김구를 통하여 림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여 자연 림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도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의 기반은 굳어졌고 체제가 강화되였다. 독립운동가는 모두 살신성인의 자세를 가지고있었지만 의열투쟁자(義士)처럼 죽음과 직결되는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봉길의사의 길은 그래도 죽음의 길이다. 그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윤봉길의사의 용기와 여유, 그야말로 순결무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태도는 누구보다 먼저 독립운동자 모두가 따라배웠다. 윤봉길의사는 무식하거나 천박한 청년이 아니므로 그의 상해의거는 충동적이거나 감상적행동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식민지하 청년의 력사의식이 투철하였고 배웠기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윤의사의 활동은 일제가 지적하는것처럼 단순한 테러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림시정부에 의한 의렬투쟁의 일환이였다.     이와 같이 림시정부의 기반이 굳어짐에 따라 림시정부가 초기처럼 전체 독립운동계의 주심적위치를 회복한 점이다. 림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만주와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포용 통일하게 되여 그 수립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체 또는 통합기능을 회복하였고 특히 미주지방의 동포들은 초기처럼 다시 림시정부에 재정지원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한중련합 항일운동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였다. 만보산사건 등으로 한중민족감정이 소원하던무렵이고 더우기 상해사변 등으로 중국인의 배일감정이 팽배한 시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한중련합전선이 형성되였다. 상해의거 직후 각 신문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중국청년의 행동이라고 잘못 보도하였는데 김구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에야 전세계가 진상을 알게 되였다. 각 신문에서 중국청년이라고 오보할만큼 상해전쟁뒤 중국국민의 항일감정이 치솟아있었던것이다. 동북의 땅(만주)을 빼앗기고 또 상해에서 굴욕을 당한 중국이였다.     그런데 상해의거후 장개석정부와 중국국민은 일변하여 장개석이 김구를 초청하여 량자 단독회담이 이루어질 정도로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은 림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였고 그들의 군관학교 락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주기까지 하였다. 림시정부가 중국에 있으면서 그들의 지원이 없이 활동할수 있는 일은 아니였다. 물론 그들도 일제의 침략을 받고있었으니 당연한것으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통하여 장개석을 비롯한 그의 정부가 한국 림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결과라고 보는것이 옳을것이다.     상해의거는 국제적으로 전례없는 외교적효과를 올렸다. 상해의거는 전세계의 각광을 받은것이 사실이고 그 충격적인 사건에 전세계가 놀랐다. 림시정부 수립후 어느 외교활동보다도 한국인의 독립항쟁이 한낱 감상적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립증하고 과시한것이 상해의거였으니 그 외교적성과는 가히 짐작될것이다. 세계 모든 신문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다루었고 오래동안 친일로선을 택하던 영국에서도《런던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이 일본을 규탄하였다.     상해의거는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의거이후의 항일독립투쟁은 비밀결사적인 투쟁이 지닌 의의를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후일의 한국광복군성립으로 이어졌고 군관양성에 주력하여 한국독립운동은 다시 무력항쟁의 실마리를 풀기에 이르렀다.     이무렵 림시정부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내막을 기록한 소책자를 만들어 각국 령사관과 단체에 배포하였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 김오연이라는 사람이 두동강난 일본도(日本刀)를 그려놓아 통쾌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더욱 통쾌하고 신선한 반응은 국민당정부의 장개석의 언급이였다.《중국의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의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놓았다.》 중국인들의 감정과 감탄을 너무나 잘 집약해서 표현한 말이였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한 의혈남아의 의협적테러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상하는것이라고 해석한것이다.     1946년 6월 30일, 윤봉길의사에게 해방후 첫 국민장이 엄수되였고 서울 효창공원에 그의 유해가 안장되였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였고 1988년《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의사를 크게 소개하였다.     맺음말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는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력사적인물을 평가한다면 매헌 윤봉길이 걸어간 력사의 길은 항일독립투사의 길이였다고 감히 결론짓고 싶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시대를 매개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시대정신일진대 윤봉길의사의 행위와 발자취는 력사의 발전방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였다.     매헌 윤봉길은 일신의 안일과 가족의 평안을 돌보지 않고, 일생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일관하였다. 매헌은 멸사봉공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 없었고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지적방황과 고뇌와 충절의 길을 걸어온 의사의 신념과 행동을 관통하는 기본적전제가 애국충절이였다. 매헌의 고결한 일생은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조국광복의 정의를 위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 영원한 귀감이 아닐수 없다.     매헌 윤봉길은 조국광복의 순교자이기에 앞서 농촌부흥운동의 선구자였다. 매헌은 선각적지식인이요,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식견과 신조를 지닌 인격자요, 량심가였다. 그는 농촌을 배우기 위하여 살고 농민을 살리기 위하여 배웠다.     매헌 윤봉길은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비타협주의와 민족의 독립을 찾고야말겠다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지녔다. 즉 매헌은 량심과 행동을 겸비한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정녕《민족정기의 화신이며 행동적지성의 본보기이며 구국애족의 영원한 사표》였다.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둘러싼 자기희생과 처형의 비장성(悲狀性)은 한민족의 숙명 또는 한반도의 상황이 지닌 독특한 비극성(悲劇性)을 의미하는것이다. 이에 윤봉길의사의 정신은 언제나 구국의 길이자 통일의 길임을 굳게 믿기에 윤의사의 충의혼을 기려 민족정기 함양의 산 교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윤봉길의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한가닥의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걸어 소신과 량심에 어긋나는 일은 단 한번도 한 일이 없거니와 추호도 량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사표요, 한국독립운동사의 화신이며 조국광복의 초석인것이다. 나라와 민족독립의 틀과 뼈대를 세운 렬사였다고 하겠다.     어두운 력사의 하늘에 한때 찬란하게 수놓은 광망(光芒)의 상해의거를 감행한 윤봉길의사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장거가 한민족독립운동의 기관차역할을 하였고 그 우에 대한민국이 섰다. 이렇게 보면 의사는 켤코 죽지 않았다. 의사는 이 땅의 력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조국광복의 밑거름이였고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었던 의사가 오늘날에도 길이 추모되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한국명인연구》에 수록                                             연변인민출판사    2007년 7월 출판                    참고문헌: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 제279페지-제281페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 백범일지 김구 저 제289페지-제294페지 서문당 출판. 3. 윤봉길의사 상해의거의 력사적의의 신용하 백범 김구기념관. 4. 윤봉길의사의 출생과 가정환경 윤남의 홈페지 자료. 5. 선구적인 농민운동가 윤봉길 한호선 농협중앙회. 6.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륙군성 극비문서 월간조선 2002년 5월호. 7. 선구적인 개혁운동가 윤봉길 한호선 농협중앙회. 8.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와 가나자와순국의 의의 윤병섭. 9. 광복의 력사인물 제260페지-제263페지. 조동걸 한국 국민대학교. 10. 윤봉길의 농민운동과 민족독립운동 신용하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42    미국서부기행 댓글:  조회:5597  추천:72  2010-03-29
              미 국 서 부  기 행 글  /  강 순 화                                                중국이 세계를 향해 문을 열면서부터《돈을 벌자면 외국에 가야하고 배우자고 해도 외국에 나가야한다》는 것이 거의 진리처럼 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일본 등 아세아지역은 모두들 많이 다녀왔어도 서방의 발달한 나라들, 그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나라인 미국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모지이며 쉽게 가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게다가 지난 몇년간 미국 부시정부가 책동한 이라크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이란 나라가 세상의 인심을 다 잃어 버려서 그곳과 우리는 평생 가도 별 인연이 없을 듯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변해도 많이 변했다. 글로벌화, 정보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하는 때이다. 2만리 밖에 있는 지구촌 한끝에서, 그것도 체제와 리념이 전혀 다른 태평양의 건너편 나라인 미국땅에서 중국연변에도 녀성들의 교육과 권익신장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조선족녀성단체가 있다는 소식을 알고《문화교류와 협력》의 차원에서 우리들을 초청한 것이다. 지난 2008년 3월, 우리는 이렇게 미국 로스안젤레스에 있는 KAWA한미여성회(Korean American Women's Assciation) 의 초청으로 생각지도 못한 미국행을 떠나게 되었다.                    미국서부의 관문도시 로스안젤레스 `   북경공항에서 국제항공편으로 장장 13시간, 망망한 구름바다 우에 떠올라 태평양을 날아넘으며 미국으로 향하고 있는 비행기의 좌석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어려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이라면 침략자이고 제국주의자였다. 그들은 우리의 철천지 원쑤였고 그들이 살고있는 땅은 헐벗고 굶주리며 인간이 살 곳이 아닌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물밀듯 들어오는 서방나라들의 영화나 비디오, 그리고 미국을 다녀온 류학생이나 교수들의 이야기를 통해 점차 미국이란선진국의 물질문명과 과학문명을 다소나마 알게 되었다. 하지만그이미지를 바꾸어 놓기에는 너무나도 피상적이고 보잘것 없는 지식뿐이였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15일 동안의 짧은 려행이였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서방 선진국에 대한 첫 수업이였으므로 그 감수 또한 유달리 깊었다. 저녁 9시 비행기에 탑승했으니 장밤을 자며말며 태평양을 날아 넘어 도착한 곳은 바로 불야성을 이룬 미국서부의 관문도시 로스안젤레스(Los Angelees)였다. 백인, 흑인, 멕시코인들로 이루어진 미국세관 관원들의 안내하에 손님들은 질서정연히 줄을 섰다. 한 20여분이 지나 내 차례가 되자 멋진 멕씨코 관원아저씨가 앉아 있는 창구에서 나를 불렀다. 그런데 영어로 재빠르게 묻는 그의 말을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리세대로 보면 중학교시절에는 로어를 배웠고 대학에서는 일어를 배워서 영어는 겨우 인사말이나 할줄 아는 수평이라 언제 대화를 할수 있겠는가? 하는수 없이 미안한대로《노 잉그레스!》하고 말하니 그가 다시 중국어로 몇가지를 묻는 것이였다. 세계각국 손님들을 대상하여서인지 세관 관원들이 중국어도 좀 알고 있어서 영어를 모르는 우리들도 순리롭게 입국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마중 나온 중국류학생들을 따라 맨 처음 도착한 곳은 로스안젤레스에 있는 이였다.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들에는 눈에 띄게《꽃게랑 아구랑》,《시누랑 올케랑》이요,《종로 설렁탕》,《순천 고추장》이요 하는 재미있는 한글간판들이 걸려 있어 마치 서울의 종로나 인사동의 한 거리에 온 것만 같았다. 뜨끈뜨끈한 된장찌개, 두부찌개에 얼큼한 배추김치로 저녁을 배불리 먹고 역시 한국인이 경영한다는《뉴 서울호텔》에 가서 행장을 풀었다. KAWA 한미여성회와도 인츰 연락을 취하고 이튿날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우리 동포들이 모여 사는 로스안젤레스의 은 아늑한 고향마을 처럼 우리를 정답게 맞아주었다.   이튿날오전 일찍 호텔 경리의 안내로 택시를 불러 타고 약속지점인 JJ 호텔에 도착하니 KAWA한미여성회의 에스터김회장일행 세분이 달려 나왔다. 그녀들은 마치 오랜 옛 친구를다시 만나기나 하듯이 우리들을 반가히 맞아 주었다. 우리일행은 화려한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불고기며 아구탕으로 정성스레 차린 점심을 맛나게 먹으면서 행사일정들을 토론하였고 신문, 방송을 통해 홍보하고 대회장을 마련하는 등 일에서도 의견을 모았다. 그녀들은 또 호기심에 찬 우리들의 물음에 따라 이곳 한인들의 이민사에 대해서도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로스안젤레스는 18세기만 해도 에스빠냐인들이 차지했던 땅이라고 한다. 로스안젤레스란 이름도 에스빠냐말로 《천사의 마을》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곳은 동방에서 미국으로 들어가는 관문도시였다. 1965년 10월 죤슨대통령이 력사적인 이민법에 서명한 후부터 미국은 구라파 백인위주의 이민사회에서 비구라파, 비백인 위주의 이민사회로 성격이 바뀌게 되였고 아시아인들도 이 이민법에 따라 대거 미국에 들어올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살고있는 한인 1세들도 그때 로스안젤레스에 들어왔었다. 그들은 중국인, 일본인,필리핀인, 멕시코인, 흑인 등 유색인종들과 함께 이 일망무제한 사막지대에 길을 빼고 집터를 닦았으며 학교와 가게를 세웠다. 지금은 이 을 중심으로 한국어로 방송하는 텔레비죤방송국 2개, 라지오방송국 3개, 한글로 된 일간신문 7개, 주간신문 2개 가있다. 하여 로스안젤레스는 명실공히 미국에 있어서의 한국문화의 중심지로 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로스안젤레스는 참으로 천사의 마을이라는 이름 못지않게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였다. 워낙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데다가 백인, 황색인, 흑인에 혼혈종들까지 섞여 살고 있어 그야말로 세계의 인종전시장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이 쏠리는 것은 수십만의 한국인을 포옹하고 있는 과 중국 남방의 한 도시를 방불케 하는 붉은색 건물들이 즐비한 이였다.  밝고 깨끗한 한국식 거리와 울긋불긋한 중국특색의 건물들, 그리고 그 삶의 모습들은 바로 이 머나먼 아메리카대륙에 와서도 자기들의 전통문화를 끈질기게 고수하면서 모국의 풍격 그대로 집을 짓고 학교를 꾸리며 대대손손 부지런히 가계를 이어가는 근로하고 총명한 한인과 화교들의 인생 축도인 듯 싶었다.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해안도시라 공기 또한 더없이 맑고 싱그러웠다.  거리와 골목마다는 온통 푸르른 잔디를 입혔고 각가지 아열대식물들이 키 돋음을 하고 있었다.  규칙있게 심어놓은 길 량켠의 종려나무들과 그 사이사이에 흐드러지게 피여 있는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들은 아담한 고급주택들과 어울려 생기롭고 평화로운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2월말은 그곳도 겨울철이라하지만 거짓말 같았다. 집집의 정원마다에는 파란 참대숲이 곧게 뻗어 올라가고 있었고 오렌지나무에는 황금빛 열매가 무너지게 열려 있었다. 또 어떤 가옥들에는 붉은 장미꽃 타래가 너울같이 뒤덮여 황홀한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듯이 높이 자란 야자수는 이상하게도 곧게 솟은 전선대처럼 허리통에 난 가지들은 말끔히 쳐버리고 머리통만 둥그렇게 피여 가지고 큰길 량옆에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들은 마치 그 거리를 지키고 줄지어 서 있는 키다리 초병들 같았다.                    로스안젤레스 명승지의 이모저모    다음날 KAWA한미여성회에서는 차를 내여 시교에 있는 헌틴턴삼림공원을 유람하게 하였다. 헌틴턴(HunTingTon)이라는 한 부자가 세상을 뜰 대 평생 이루어놓은 재산인 이 수백평에 달하는 정원과 진귀한 도서관을 나라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간직한 부자였다. 그날따라 관람객 대부분은 백인이였고 가끔씩 흑인과 황색인들도 보였다. 공원에는 또 각가지 아열대 식물들이 앞다투어 자라고 있어 마치 세계적인 식물박람회를 한눈에 보는듯 하였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최근에 신축하였다는중국 특색을 보여주는 류방원(柳芳园)이였다. 중국 남방도시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푸른호수며 정교한 루각의 조각들, 거기에 또 전통적인 중국차집도 있어서 여기가 소주나 항주가 아니냐고 착각할 지경이였다. 그 외에도 일본식 다다미방이며 하얀 인공자갈밭이며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과 식물들이 이채를 돋구어주었다.   저녁에는 친구의 초대로 미국식 레스토랑에 갔는데 여러 가지 삶은 육류들을 양념에 절여서 만든 료리가 나왔다. 푸른 남새 잎으로 정교하게 포장한 서양식 음식이였는데 나이프와 포크로 이쁘게 썰어 먹는 그 맛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로산젤레스 북서쪽에 위치한 세계적인 영화의 거리인 할리우드(HOOLLY WOOD)에 갔었다. 그 곳에는 미국의 명배우들의 이름이 새겨진 오각별야광등이 거리바닥 한켠에 현란하게 밖혀 있었다. 책에서나 보았던 거리이름인지라 매 하나하나의 전성기시절의 옛건물들이며 그 호화로운벽에 그려진 여러가지 영화장면들이 신비하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쉴새없이 샤터를 누르면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사흩날에는 한미여성회 심영이리사의 초청으로 그녀가 살고 있는 바다가거리 싼타모니카(SanTaMonKa)로 갔다. 그곳의 특이한 풍경은 넓은 바다와 아름다운 주택들이였다. 바다가의 드넓은 백사장에는 이라크전에서 희생된 전사들을 기념하는 십자가가 수없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옆을 지나가는 시민들은 숙연히 묵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어느 나라나 백성들은 모두 침략전쟁만은 똑같이 반대하는 것이였다.    다시 기분을 풀어 멀리 내다보니 푸른 바다가에 정연하게 줄지어 지어진 양옥마다는 그모양과 꾸밈새가 특이하여 마치 그곳에서 나 열리고 있는듯 싶었다. 앞뜰마다에 활짝 핀 꽃나무들이며 파란 잔디로 뒤덮인 정원, 그 한가운데는 맑고푸른 수영장까지 있어 그야말로 그림속의 에덴동산을 방불케 하였다. 여러가지 한식료리와 자연산 나물뭍임으로 정성들여 차린 저녁상에 마주앉아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웃음꽃을 피워가니, 그 만찬은 참으로 진주성찬에 금상첨화가 아닐수 없었다.       그 다음날에는 로스안젤레스 중심거리에 가보았다. 주민구역과는 달리 높이 솟은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길 량옆에는 푸르른 록움이 우겨져서 행인들에게 서늘한 그늘길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건물 주위에는 목에 명찰을 걸고 서로 무언가를 토론하며 분주히 오가는 백인, 흑인 공무원들이 많이 보였다. 내가 정말 미국에 왔구나 하는 실감을 가지게 하는 곳이였다. 전자사전을 손에 들고 영어간판들을 번역해 보면서 용케도 시청까지 들어가 보았고 반나절이나 큰거리들을 쏘다니며 길옆의 상점들마다 기웃거리고나니 다리가 아팠다. 마침 길 건너에 지하문화광장이 있는지라 우리는 긴 걸상을 찾아 휴식할 수 있었다. 시골뜨기 녀인들에게는 그곳에도 구경거리가 많았다. 죄송하지만 허리통이 마대같이 뚱뚱한 백인신사들이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도 가관이지만 맥주컵을 올려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괴상하게 툭 삐어져 나온 흑인녀인들의 엉덩이는 참으로 볼만하였다. 우리는 마치 아메리카신대륙에서 새 인종이나 발견한듯이 놀랍고 신기한 눈길들을 감출수가 없었다.       행사 이튿날엔 에스터 김회장이 직접 우리를 안내하였다. 그의 고급 승용차에 앉아 한시간반이나 달려서 도착한 곳은 바로 봄나무온천이라는 뜻을 가진 팜스프레이의 카지노(Casino)였다. 높은 언덕우에 솟아있는 희한한 고층건물의 대청에는 가로세로 줄지어 늘어선 도박기계들이 황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노랗고 흰머리를 한 백인남녀들이 오색찬란한 컴퓨터 화면에 파란 눈동자들을 몰밖고 있었는데 그 화면의 수치변화에 따라 밑도 끝도 없이 동전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 관경을 보노라니 가슴이 섬뜩하였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동전을 밀어 넣어야 딸라를 벌수 있을가? 잃으면 분해서 못 일어나고, 따면 더따보려고 자리를 못뜬다는 자석같은 그 자리, 부자들이나 할 노릇이지 돈 없는 서민들이야 어찌 엄두나 낼수 있겠는가. 놀지도 않으면서 기웃거리는것이 미안스러워 얼른 나가자고 하였더니 김회장은 미안해할것 없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길가는 사람들도 들어와 보는것을 환영한다고 한다. 누구든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만 간다하여도 카지노주인한테는 무료의 홍보효과가 생기므로 그냥 들어와서 화장실만 쓰고 가도 좋다는것이다.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무서운 경영정신이였다. 말 타고 꽃구경하듯 도박판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는데 아직 오후 시간이 퍼그나 남았으므로 우리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케티박물관에 가보기로 하였다.       케티박물관을 다녀오는것은 문명한 관광코스라고 한다. 1983년 정부에서는 산타모니카산맥의 산기슭 91만 8천평의 부지에 모더니즘건축예술가로 유명한 건축사 마이어를 모셔다가 박물관을 설계하였다한다. 그는 독특한 스타일과 전통적인 자재를 결합하여 케티의 뿌리와 현재, 미래에 대한 신념을 이 건물에 완정하게 부여하고 표현하였다. 캘리포니아 후추나무 숲의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언덕우에 우뚝 솟은 박물관이 보였는데 투명유리로 된 웅장한 건축물과 그 주변의 세련된 조경이 조화를 이루어 밝음과 개방성을 련상시키고 포괄적이면서도 미묘하고 명쾌한 기분이 들게 하였다.    풍요롭고 다양한 조경들을 감상하고 나서 미술관에 들어섰다. 본래 미술에는 문외한이지만 서방 중세 회화의 진수를 그대로 보존한 작품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800년에서부터 1800년에 이르는 사이에 창작된 작품들은 그 기교와 예술성, 그 재료의 화려함에 있어서 극치를 이루었다. 15세기 금박유화에서 정교한 삽화가 있는 중세기의 책, 한때 금붕어를 담았던 웅장한 샹들리야에서 반고호의 친숙한 꽃 유화에 이르기까지 그 생동하고 정밀함이 모두가 마치 살아숨쉬는 마리아의 눈빛처럼 신비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이루고있었다.                        선진국의 발달한 시스템들        닷새 되는 날 저녁, 우리는의 초대약속으로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런데 거리에는 온통 고급스런 자가용뿐이지 택시라곤 한대도 찾아 볼수 없었다. 하도 이상하여 주인집 아줌마에게 물었더니 여기는 집집이 차가 있고 사람마다 차가 있어 택시를 쓸 필요가 없으며 혹시 외지인들이 택시를 부르자면 전화 한통이면 택시가 곧바로 온다는 것이다. 그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200-1818을 누르면서 여기는 웨스턴 4거리 윌턴820호라고 하니 5분도 안 되여 까만 승용차 한대가 달려와 멈춰서는 것이였다. 마치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듯 금세 달려온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시스템이였다. 현지인들이 알려준대로 5딸러의 택시비에 1딸러의 팁을 얹어 6딸러를 드리니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실어다 주었다.       차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와 그 위로 달리는 각양각색의 차량들은마치 줄을 맞추고 달리는 듯 질서정연해 보였다. 고도로 발달한 시스템들이 작동하고 있는지 거리에는 경찰 한명 볼수 없었지만 모두들 교통규칙은 철칙으로 지키고 있었다. 음주운전을 했을때는 벌금 뿐 아니라 아예 영창에 잡아들이고 위법운행으로 사고를 냈다면 그 당사자들에게는 몇천 달러의 거액의 벌금은 물론, 일주일간이나 교통법을 다시 배우는 학습반에 참가해야 한다니 출근하지 못하여 직업을 떼울 위험까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밥통과 목숨이 다 걸려 있는 최대의 불이익을 알고서는 그누가 감히 교통규칙을 위반할수 있으랴? 참으로 인간을 다스리는 놀랍게 발달된 제도였다. 하기에 우리 이곳에서는 흔히 볼수 있는 크고 작은 교통사고들을 그곳에서는 찾아 볼 수도 없었다.       승용차에 앉아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두루 살펴보니 그 성시에는 높은 빌딩이 별로 많지않았다. 까닭을 물으니 택시기사 아저씨가 하는 말이《로스안젤레스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므로 사람들이 사는 집들은 다 이처럼 단층집을 짓는답니다. 그리고 미국은 원체 땅이 흔하니까 땅을 넓게 차지하고 써도 무방하지요.》하고 알려주었다. 100년전 큰 지진이일어난 후 부터 정부에서는 안전을 기하기 위해 높은 집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한다. 그래서 개인 주택들은 모두가 단층이 아니면 이층으로 된 양옥이였다. 그리고 나라적으로 이웃이 같은 양식의 집을 꾸미지 못하게 함으로 주택 하나하나가 색다른 풍격으로되여 있었다. 미국에서는 국가나 개발상들이 아름다운 양옥들을 지어놓고 세를 주든지, 아니면 수년간, 지어 평생을 할부로 집값을 갚게끔 하고 판매한다고 한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몇십만 딸러에서 100여만 딸러씩 하는 가옥을 쉽게 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수준차를 고려하여 물건구입도 저소득층이 감당할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상점들을 따로 만들어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 삼점들은 통칭으로《99센트》라 하는데 대부분의 물건가격이 1달러 이하인 99센트이므로 아무리 수입이 적어도 능히 사서 먹고 살수 있는 가격의 식품과 생활용품들이였다. 또한 무릇 그 나라 시민이라면 65세이후 로후보장에서도 능히 생활할 수 있는 700-800딸러의 최저표준 보장에서 부터 시작하여 그 사람의 일생동안 국가에 바친 세금과 공헌의 다소에 따라 그 이상(2000-3000달러)의 로후생활금과 저렴한 가격의 주택을 분여 받을수 있다고 하니 그 땅의 국민이라면 어찌 평생 열심히 일하지않고 그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국민의 건강의식을 제고하는 힘있는 조치였다. 매년 3월의 첫번째 일요일을 미국 전 국민의 마라톤행사일로 정한 것이다. 마침 3월2일은 일요일이라 아침 일찍부터 맑고 푸른 하늘에는 [MARATON]이라 쓴 하얀 프랑카트들이 채색풍선에 걸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주간 거리의 차량들은 모두 통제되였고 골목마다는 사람들로 명절의 분위기를 이루었다. 마라톤경기의 로정은 로스안젤레스 공항에서부터 시청까지 26마일(약42km)이라고 한다. 남녀로소나 백,흑,황색인 할것 없이 자원적으로 참가하는 전민의 운동이였다. 운동원들은 넓은 길을 꽉 메우며 달리고 있었고 길 량켠에 늘어선 관중들은 그들에게 부단한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이 마라톤에 참가하려면 적어도 3년간의 체력단련은 거쳐야 한다니 평시에 꾸준히 운동해야 함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런 마라톤운동에 참가할 수 있음은 건강한 신체의 표지로 되고 매 국민의 영광으로 인정될 뿐 아니라 참가자에 한해서는 증서와 기념품은 물론 사회생활의 여러모에서 높은 우대점수를 준다고 하니 이아니 꽁먹고 알먹는 일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전 국민의 의식을 제고하고 건강을 지켜주는 하나의 훌륭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행사 외의 짬들을 타서 우리는 백화점과 슈퍼마켓들을 돌아보았다. 여러 가지 기념품과 약품들을 사 보면서 우리는 저도 몰래《이 나라는 참으로 세금의 나라, 팁의 나라이구나》하는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모든 경영자는 물론이겠거니와 소비자에 한해서도 빠짐없이 물건값의 8-10% 이상의 세금이 지출되였었다. 세금액 규정은 물건마다 다르고 상점마다 달랐다. 중국에서는 오직 기업에서나 장사군들만이 세금을 낸다고 생각한 우리에게 있어서는 생소한 일이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으로 공평합리한 제도임이 느껴졌다. 무릇 이 땅에서 먹고 살려면 소비해야하고 소비하는 사람은 국가에 세금을 내야하니 나라경제가 온당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모든 서비스업에서 소비자는 자기가 소비하는 금액의10-15%좌우를 팁으로 내야 하는데 이 팁은 가계주인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일 밑바닥에서 땀흘리며일하는 서비스일군들의 손에 나누어진다니 기분이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국내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자본주의의 경영방식이며 또한 최하층 인간에 대한 존중의 표현인듯도 싶었다.                          중국조선족과 재미교포들        며칠후 우리는 중국조선족축구의 발전을 위해 거대한 기여를 한 최은택 감독님의 망명인 양평자사모님의 초대를 받게 되였다. 남편이 그토록 애써 춰세워 온 조선족 축구의 고향--연변에서 온 손님이라는 리유하나에서였다. 약속장소인《명동교자집》에 들어서니 홀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손님을 맞아들이는 아가씨가 별로 눈에 익었다. 다가가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가 그 역시 연길에서 온 녀성이였다. 참으로 우리 조선족녀인들은 못 가는데 없었다. 그녀의 안내로 양사모님과 함께 아늑한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사모님이 들고 온 최감독 부부의 사진액자를 앞에 모시고 최감독님의 연변사랑이야기며 양사모님의 조선족에 대한 따뜻한마음의 이야기들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누어 가면서 따끈한 교자와 졸깃졸깃한 칼국수를 맛나게 먹었다.       마침 이《명동교자집》바로 옆이 우리가 기숙하는 주인집 연변아줌마가 일하는《나루터》술집인지라 저녘식사 후 우리는 그 식당의 주방을 찾아 들어갔다. 그녀는 한창 땀을 흘리면서 물고기 튀김을 하고 있었다. 손님들의 주문과 재촉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돌아치고 있었는데 안주는 만들어지는 족족 멕시코애들의 쟁반에 담겨 손님들 상으로 옮겨졌다. 좁다란 주방에서 매일 12시간씩 펄펄 끓는 기름가마를 마주하고 비오듯한 땀을 훔치며 일하는 그 연변아줌마를 바라보니 저도몰래 코등이 찡해났다.        3월1일, 행사일이였다. 오전 일찍 행사장에 당도하니 에스터 김회장 일행도 이미 와 있었다. 마련된 대회장의 좌석들에는 멋진 재미교포 녀성들과 단정한 옷차림의 조선족녀성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신들린 사람처럼 무대 옆 텔레비죤화면에서 나오《연변중로년모델표연》과《연변녀성태권도표연》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가지고 간 비디오테이프가 방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들 중국에 사는 조선족녀성들의 멋지고 씩씩한 모습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회의실 주석대의 정면에는《KAWA한미여성회와 중국조선족여성회 간의 상호교류협정 의식》이라는 현수막이 유표하게 걸려 있었다. 한국 중앙일보와 한국일보 미국지사의 기자들이 촬영기를 들고 인터뷰에 분주하였다. 대회에서는 두 단체 회장의《교류협의서》서명과 내가 준비한《중국조선족과 녀성문제》라는 테마로 된 특강이 있었다. 개혁개방 후 중국조선족녀성들의 변화된 삶과 산업화시대의 새로운 이산가족의 출현 및 그 극복 대책에 포인트를 둔 이번 강연은 재미교포에게는 물론 그곳에 체류하고있는 조선족형제자매들에게도 훌륭한 내용이였기에 모두들 흥미진진하게 청취하고 있어 기분이 좋았다.        KAWA한미여성회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재미한국인의 력사에 대해 다소나마 료해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초기이민은 20세기초에 이루어졌는데 그때는 주로 로동이민의 성격을 가졌었고 그들은 이미 오늘날 재미한국인의 주체가 아니였다. 현재 재미한국인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은 모두 1965년이후에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망명이민이나 강제이민이 아니라 보다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 또는 자녀들에게 더 훌륭한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한 사람들로서, 그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며 한국에서도 중류 혹은 상류층의 생활기반을 가졌던 엘리트들이였다. 김회장이나 한미여성회 주요리사들 역시 한국의 명문대인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를 나왔었고 지금 모두 병원이나 복장가계 등을 차리고 있어 그들의 경제생활은 보편적으로 유족하였다.       중국인 거리인 을 한나절 돌고 기숙사에 돌아오니 재미중국조선족동포련합회에서 련락이 왔었다. 신문과 방송에서 우리의 소식을 듣고 찾았다는 것이다. 정작 만나고보니 리사장이라는 40대 남성은 연변대학교법률계 졸업생이고 상담소 소장이라는 녀성도 연길에서온 분이라 금시 가까워졌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 로스안젤레스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조선족은 무려 800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참으로 생각밖이였다. 수많은 우리동포들이 낯설고 물선 미국땅에서 말을 모르고 법을 몰라서 무시당하고 배척 당하며 모진 고생들을 겪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조선족동포들을 대변해 말하지 않으면 누가 말하겠습니까? 이 자유와 기회의 땅에서 열심히 일해서 모두들 부자가 되며 언젠가는 이 L.A(Los Angelees)의 땅에 을 세워서 우리동포들의 합법적 권익을 수호하고 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들을 하려합니다.》라고 말하는 강성 리사장과 김정화 소장의 당찬 모습에서 나는 재미조선족동포들의 밝은 미래를 보는것만 같아 마음이 흐뭇하였다.               세계적인 명승지 -- 라스베가스와 그랜드캐년        3월5일, KAWA한미여성회의 초대로 마침내 본격적인 미국서부 려행이 시작되였다. 애들마냥 호기심에 들뜬 기분으로 아침 일찍 에 도착하니 커다란 관광뻐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50세 중반이 될가말가한 한인 가이드아저씨가 우리를 반겨주었는데 그는 한국 설악산에서 수년간 산악가이드로 일했고 이 아주관광에서도 13년간이나 근무했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좋은 가이드를 만난것 같아 출발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이어 6년째나 이회사에 다닌다는 듬직하게 생긴 과테말라 출신의 기사아저씨가 운전석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길이 13.5메터나 되고58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크고 화려한 뻐스에 43명관광객이 탑승하였는데 그 대부분이 한국인이였다. 모두가 이 대자연의 정취와 문화의 숨결을 찾아 이곳 미국땅에 찾아 온 것이다.   쉴새없이 이어지는 가이드아저씨의 소개에 따르면 미국의 인구는 3억에 달하고 그 땅은 한반도의 44배에 달한다고 한다. 성조기의 50개의 별은 미국의 50개 주를 대표하며 미국의 인구밀도는 한반도의 10분의 1도 안된다는 것이다. 일망무제라는 성구가 바로 이런 곳을 말하는듯 싶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고원의 사막지대에 정,반 두 방향의 넓은 고속도로가 시원히 펼쳐져 있었다. 낮다란 가시철망으로 끝없이 이어가며 고속도로와 격리시켜 놓은 사막지대에는 이깔나무와 비슷한 수목들이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었다. 모래밭에는 가시 돋인 선인장들이 사람 키만큼씩 자라고 있었는데 떡 뻗치고 서 있는 모양이 마치 그 땅을 지키고서 있는 초병들 같았다. 멀리 나무숲 속으로 드문드문 바라보이는 인가들을 보면서 나는《저 사람들은 고독해서 어떻게 살지요?》 하고 물으니 가이드아저씨가 하는 말이 그들은 절대 고독을 모른다는 것이다. 조상때부터 세세대대로 유목민 생활을 하면서 정처없이 떠돌아다녔기에 살기 좋은 곳이면 그 어디든지 다 찾아다니며 저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평생을 한곳에만 눌러 살고 있는 우리들로는 리해할 수 없는 일이였다.       달리는 뻐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모하비사막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한나절이나 달려서 도착한 곳은 바로 캘리포니아주의 교통중심지인 바스토우였다. 영어로《코리아 레스토랑》이라 쓴 한인음식점에서 간단한 한식부폐로 점심을 마치고 오후에는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서너시간이 넘게 달리고 나니 날이 어두워지고 이어 온갖 채색불빛으로 천지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은 시내가 눈앞에 다가왔다. 이곳이 바로 세계적인 카지노도시 라스베가스였다.      엔지엘호텔에 행장을 풀고 인츰 휘황찬란한 야경을 향해 시내관광에 나섰다. 뉴욕 맨하탄에 우뚝솟아 있는《자유녀신상》이 이곳에서도 부드러운 불빛에 싸여 손짓하고 있었고 황금빛으로 솟아오른 프랑스《에펠철탑》이 눈앞에 다가왔다. 마치 미국의 뉴욕이나 프랑스 빠리, 영국의 런던에나 도착한듯 서방 여러나라의 상징물과 유명건축물들이 곳곳에 그대로 모방, 축조되고 있어 한눈에 서방세계를 다 굽어보는것 같았다. 86개나 된다는 호텔들의 대청마다에는 최고급 카지노기계들을 설치해 놓고 세상의 부자들을 부르고 있었다. 황금빛 붕어가 뛰놀고 채색 뽀트가 오가는 푸른 강을 사이 두고 사철 꽃피고 열매 맺는다는 이 도시, 불야성을 이룬황궁같은 호텔들마다는 정녕 세상부자들의 천당인듯 싶었다. 고도의 심리전이라 일컫는 카지노 도박업이 이곳에서는 자본주의경제의 주축으로 되고 있으니 참으로놀라운 일이아닐수 없었다.       저녁식사는 호텔에서 마련한 미국식 부폐였는데 우리 동양인들이 먹을수 있는 종류는 아무리 골라 보아도 겨우 마른 빵이나 익힌 땅콩 뿐이였다. 큼직하게 삶아 썰어놓은 육류와 건 우유들은 보기만 해도 느끼한 생각이 들었다. 식사후 야경관광의 첫 코스는 호텔 옆 빌딩 옥상에 마련된 쥬빌리쇼였다. 오색찬란한 전등빛으로 정밀하게 전산화하여 제작한 화면에는 천변만화하는 천연색무대가 펼쳐졌다. 미끈한 서양미녀들이 아릿다운 미니치마를 입고 멋진 몸매를 자랑하며 사뿐사뿐 춤을 추고 있었다.       저녁 여덟시에 시작 된 는 입장권 한장에 80달러를 받을 만큼 그야말로 세계적인 무대였다. 장장 두 시간 동안 반 라체의 미남미녀들이 수시로 새로운 스타일의 복장들을 번갈아 입고 현대식 춤을 추고 흥겨운 노래를 불러 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뮤지컬로 된《타이타니커호》공연은 1912년 대서양에서 빙산과 충돌한 뒤 침몰하여 1500여명의 희생자를 낸 그 력사적인 비극을 재현하였다. 현대화 설비의 작동으로 전체 무대가 마치 검푸른 파도 우에서 몸부림치는 거대한 기선의 몸체 같았다. 무대우의 배우들과 관람석의 관중들이 함께 움직이면서 아이스쇼는 크라이막스로 올라갔다. 온 장내 관객 전체가 마치 무서운 파도에 휘말려 깊은 바다속에 함께 빠져들어간듯 일제히 고함을 질러댔다. 참으로 미국땅에서나 볼수 있는 현대예술의 극치였다.      다음날의 려정은 아리조나고원을 거쳐 인디안들의 보호산으로 불리는 독수리산을 지나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그랜드캐년(GRAND CANYON)에 가는것이다. 그랜드캐년이란 웅위로운 협곡이란 뜻인데 해발 2100메터 고원지대에 있는 평균 폭이 16킬로메터이고 길이 1600킬로메터나 되는 거대하고 신비한 대협곡을 말한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것만 같은 그 웅위하고 절묘한 풍경의 붉은색 화산 절벽들은 정녕 하늘의 조화요, 신의 창조물인듯 싶었다. 1억 5천만년전 바다밑에서 올라왔다는 설, 600만년전 화산폭발로 이루어졌다는 설, 아무튼 여러가지 설이 있었다. 지질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일찍 4000년전 이 협곡에는 고대선민인 안나사시인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남아있고 그후에는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없다고 한다. 콜롬브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지 50년도 안되는 1540년 에스빠냐 탐험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1826년에는 프랑스 사냥꾼들에 의해 그 대자연의 신비가 살아 숨쉬는 계곡들을 탐험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1869년에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공훈을 세웠던 외팔의 소교 웨한 위쓰리뽀위얼장군이 아홉명의 탐험가들을 데리고 이 217영리의 미지의 세계를 80여일간이나 답사했다고 한다. 그 탐험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은 6명 뿐 세 사람은 그 무지의 협곡세계에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한다.     관광의 마지막 코스로 들린곳은 서부의 민속촌 칼리코(CALICO)였다. 유령의 도시로 불리는 이 부락은 본래 해마다 200만딸러에 달하는 은과 900만딸러에 달하는 붕사(硼砂)를 캐내던 유명한 광산이였는데 1907년에 페광되여 버렸었다. 1951년 워텔 코네트(Walter knott) 라는 부자가 그곳을 사서 민속관광지로 만들었고 1966년에 나라에 기증했다 한다. 겉보기에는 별 볼품없는 페허같았지만 길 량옆에 늘어선 옛 건물과 선물가게들에는 한때 흥성하였던 19세기 캘리포니야광산의 진품들이 숨쉬고 있었으며 당년 광부들의 삶을 생동하게 보여주는 땅굴집과 수공으로 다듬어 진 가구들이 관광객들의 발목을 잡았다. 력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세상 사람들의 발길은 오늘도 래일도 끊기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짧은 15일의 미국서부 려행을 마친 나는 귀향길에 오르며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발달한 선진국 부자의 나라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의 한인들, 돈을 벌어 잘 살아 보려고 부모처자를 두고 고향을 떠나 이 머나먼 아메리카대륙에 와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있는 조선족 형제자매들, 또 거기에다 온갖 무겁고 어지럽고 힘든 일들을 운명처럼 도맡아 하고 있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그 땅에서 그처럼 열심히 살아가고 있거늘 미국이란 이 초대국이 정녕 이들 모두를 껴안을 수있는 관용과 아량을 보여주었으면, 그리고 이들 모두의 꿈이 정녕 현실로 되어어 좀 더 행복 하고 알찬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보게 되였다.        대형문학잡지《장백산》 2010년 제2기에 실렸음                 
41    희망을 만드는 유쾌한 실천 댓글:  조회:4792  추천:68  2010-03-28
                희망을 만드는 유쾌한 실천                                       --  생명열선, 녀성열선 상담에 관하여                                                                                                                         글 / 강 순 화       복잡한 삶의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인간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따라서 상담자는 그들의 어려움이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과정이 상담이기에 상담은 개인의 일만이 아닌 사회의 문제를 치료하고 예방하는 최신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변생명열선, 녀성열선(273-9595, 296-1004)》은 바로 이러한 취지로 하여 개통되였고 그동안 사회 방방곳곳에서 걸려오는 수백여통의 상담전화를 받아 왔다. 그 내용들을 보면 주요하게 청소년들의 교육문제, 그들의 심리적 불안감, 자녀교양문제, 혼인가정문제, 제3자 차입과 리혼문제, 부부재산문제, 취업문제 등등 이였는데 래담자의 90% 이상이 녀성들이였다. 이만큼 녀성들의 문제가 절감한 것이 현실이다.      "녀성이 밝아야 사회가 밝다"고 하지 않는가? 녀성을 일컷는 "안해"란 말은 어쩌면 집안의 해(태양)라는 말인듯 싶다. 집안의 해가 빛나면 사회는 환히 밝아지지 않겠는가?! 우리 생명열선, 녀성열선 상담원들은 언제나 따뜻한 품으로 안아 주는 어머니처럼, 항상 그모습 그대로 받아 주는 오랜 친구처럼 그 누구의 그 어떤 문제든지《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마음과 당신의 아픔을 나누려는 뜨거운 가슴으로》귀를 기울리고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상담원들의 따뜻한 접대는 래담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 주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정시하고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삶의 지혜와 용기를 북돋우게 하였다.    가정의 행복을 찾고 인간관계가 더 밝아지게 하는 일에 좀 더 전문적인 지식과 사랑을 불어 넣어 온 사회가 조화롭고 안정되게 함에 우리의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저 하는 것이 우리 상담원들의 의무이고 바램인 것이다.     사랑은 실천할 때가 더욱 아름답다. 우리들의 작은 실천이 큰 희망을 만들고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즐겁게 자원 봉사에 나서고 있다.                       전화상담에 관하여      전화는 현대 문명이 만들어 낸 가장 경의로운 것 중의 하나로서 우리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필수품으로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밤중에 걸려 온 전화 한통을 잘 받지 못하여 결국 자살시도를 막지못한 침통한 사실로 하여 호주 시드니의 알랜워커 목사는 1960년대에 벌써 생명을 살리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여 오늘날 국제 생명의전화로 발전되였고 금년에 이르러 한국은 34년(1976년), 우리 연변은 15년(1995년)이라는 력사를 가져오게 되였다.     오늘날 물질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최대의 편의와 복지를 가져왔지만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공허감과 피곤감을 느끼고 있다. 로인들은 더욱더 외로워졌고 어린이들은 더욱더 영약해져 가고 있으며 어른들은 더욱더 무기력해 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기본적인 생존욕구가 충족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1995년 생명의전화가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에서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할때 혹자는 그 유용성과 효률성을 념려하였다. 자원봉사자로 어떻게 그 일을 할수 있을까? 그들은 일단 비 전문가가 아닌가? 특히 심리료법이나 면접전문가의 립장에서는 비판적이였고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긍정적인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변생명의전화, 녀성의전화는 수년간 바로 이런 비 전문가 상담원들의 봉사에 의하여 이어져 왔고 그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전망이다.     전화상담은 자원봉사 상담자를 주축으로 해서 이어진다. 이들은 단순한 협력자가 아닌 집행자이고 수행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로 자원봉사자들이 본격적으로 활용함은 이 사회에 있어서의 하나의 효시로 된다. 상담봉사자들이 수년을 긍지와 보람으로 그 일을 담당해 나가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들의 참여 동기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인간애, 사회적 공헌, 돕는자의 보람과 기쁨, 여가활용, 자기 발전의 욕구와 성취감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우리사회에 만연되여 있는 허다한 문제들은 전문가의 전문적인 치료나 상담에 의해 도움을 받기보다는 많이는 비전문가인 가족이나 친구 동료의 도움으로 충족된다.     비전문가 상담원들은 자신의 인생 경력으로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들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는 순수한 마음,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은 래담자들에게 많은 위로를 주며 희망을 준다. 그들은 전문가 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보다 공감할 수 있고 보다 많은 시간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래담자들을 위하여 바칠 수 있다.     이런 기초에서 더한층 상담지식을 배우고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며 능력을 개발하고 갈고 닦는다면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도 능히 남을 도울 수 있는 훌륭한 상담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화상담은 그 언제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즉시성, 낮설고 어색함이 없는 익명성, 래담자에 의해 통제 할수 있는 주동성으로 하여 많은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전화상담은 기술과 인식을 필요로 하며 상담 전체 과정에서의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행위, 비판하지 않고 수용하는 마음, 그리고 분별력과 자기인식이 있어야 한다.     사 랑     사랑하는 마음, 보살피는 마음은  상담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요소이다. 사랑이 결핍되였을 때 아무리 좋은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상담해도 그 상담은 잘 이루어 질 수 없다. 어느 사람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의 방향으로 도울 수 있는지는 모르나 최소한 문제를 가진 사람의 아픈 마음은 위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이고 긍정적인 관심, 진정한 인간 존중의 태도와 정직한 사랑은 훌륭한 상담자의 기본 조건으로 된다.     사랑과 수용으로 타인의 내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신뢰의 분위기를 촉진하게 만든다. 사랑이 없이 상담한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것으로 성실성이 결여된 것이다. 사랑을 실제로 행하면서 실천하게 되는 체험적 학습은 전화상담의 훌륭한 기초로 되어 왔다.     겸 손      상담자로서 기술과 지식과 경험이 아무리 풍부하다 해도 상담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겸손한 마음이다.     어떠한 상황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도움을 청하던 래담자 한사람 한사람 모두는 인격적으로 존중 받아야 할 귀한 존재이므로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마음대로 적용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상담원은 상대방보다 많이 알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잘못된 우월감에 젖어 있다면 래담자의 모든 정황을 다 알지 못하면서도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며 대방을 무시 또는 경시하는 오유를 범하게 된다.      만성적으로 의존적이거나 타인을 조종하려하는 래담자가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이럴때엔 강력한 지시적 상담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지시적 상담에 있어서도 거만하거나 생색을 내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된다.     비판적 수용              상대방을 현 상황 그대로, 인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서 그의 표현에 비평을 가하지 않을 때 상대방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고 동기가 있다는 사실을 념두에 두고 래담자를 유일한 존재로 대하며 무비판적일 때 전화자는 이야기를 계속하게 된다. 만일 상담자가 전화 도중 어떤 신념이나 확신을 가지고 래담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경청하는 대신 성급하게 개인적인 조언을 한다면 상대방의 뜻을 탐색, 설명, 이해할 기회가 감소되게 된다. 비판적 수용과 긍정적인 지시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상담자의 삶의 태도와 성격 문제이다.      분별력     상담원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려면 우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분별력을 지닌 사람이여야 한다.      상담이라는 것은 수준과 지식,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상담의 기본 주체인 인간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리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통창력이 있는 사람이 상담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가질 때 효과적인 상담이 이루어 질 수 있다.     대화를 청하는 자가 도움을 원하는지 그저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러는지를 분명히 해야 하며 자기 삶의 개선을 갈망하는지 혹은 끝없는 불만을  습관적으로 토로하는지를 직관할 수 있어야 한다. 상담 중 거짓과 진실을 분간하는 통창력도 필요하다. 래담자가 도움을 받기를 원하고 진실을 말하면서 삶의 개선과 자신의 성장을 강하게 열망할 때 상담자는 래담자와 공감하면서 상담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올라 갈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인식      상담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의 상담자 자신이다. 상담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 통창력은 모두 그 사람의 인격과 수양만큼 표현되고 상담하게 되는 것이다.      타인을 돕는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긴장과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 때문에 “정서적으로 련루되지 않고 정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는 일정한 재능과 능력이 있음과 동시에 또한 우리 나름대로의 결함과 비 효률적인 경향과 혹은 어려움들을 갖고 있다. 이는 부단한 실천과 체험적 학습, 그리고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경청, 공감, 반영, 탐색, 직면, 의견제시, 의사결정 이런 상담의 기본적인 기술들은 자신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과정에서 부단히 실천해 가고 이해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연변생명열선, 여성열선》상담연구소 제공                                                               2010년 3월 28일
40    직업녀성의 이중배역에 관하여 댓글:  조회:4792  추천:55  2010-03-24
                             직업녀성의 이중배역에 관하여                                                   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  강순화      개혁개방 30여년래의 중국의 억만 직업녀성들은 줄곧 회피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전통적인 현처량모로 생활하느냐, 아니면 평등하고 독립적인 한 성원으로 사회에 나서느냐? 남편의 성공으로 자신의 존재를 체현하는데 만족하느냐, 아니면 자신의 주체성으로 자기의 인생가치를 실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2001년 전국부녀련합회에서 조직한〈전국부녀사회지위 조사자료〉에 의하면 중국의 성시와 농촌의 로동자중 녀성이 3.3억명으로서 전체 로동자 총수의 47.7%를 차지한다고 하였다. 그중 국영, 민영, 사영기업에서 일정한 경제력을 가진 녀성은 녀성로동력의 67%나 차지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녀성들의 취업정도가 세계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민경제의 발전에도 홀시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음을 설명한다.      녀성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이미 오늘날의 대세로 되였으며 직업녀성들은 이미 현시대 중국 부녀의 주체로 되었다. 하지만 취업권리와 상응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직업녀성들은 개혁개방후의 풍랑 속에서 인생의 압력을 느끼고 있으며 다다소소 이중 배역의 곤혹에 빠질 때가 많다. 조사에 의하면 현단계 직업녀성의 90%가 가사로동에 부담을 느끼고 있고 80%의 녀성들이 이중 배역의 곤혹을 느낀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직업녀성들에게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로 되고 있다.     개혁개방의 경제전형기에 들어 선 후 녀성들의 사고방식, 생활방식, 행위방식과 가치관념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중국부녀》잡지를 통하여 전개된 “녀성의 출로” 대 토론에서 “부녀귀가(回家)론”은 부정되었었다. “부녀귀가”는 직업녀성들이 전통적인 배역에로 돌아가야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실상 녀성의 가치를 말살하는 대가로 남성의 최대가치를 실현하려는 것이므로 력사적인 퇴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사회가 녀성배역의 가치를 가늠하는 표준은 가사와 공작을 모두 잘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녀성들은 단순히 이런 결론만을 인정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녀성들에게만 모든 것이 완미할것을 요구함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직업녀성들의 주관의식 변화를 고찰하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를 보아낼 수 있다.     첫째: 단순한 공작형으로부터 사업형으로의 전변이다. 오늘의 직업녀성들이 생각하는 것은 취직하여 자기 앞일 만을 잘하는 것 뿐 아니라 좋은 형세를 리용하여 더 크고 좋은 사업을 벌려 자신의 인생가치를 실현해 보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개방이래 수많은 녀성기업가, 녀강자, 녀장원, 녀박사 등 전형인물들이 용솟음쳐 나온 내재적 원인이다.      둘째: 자발적인 혼인이 자각적인 혼인으로 전변되였다. 오늘날의 직업녀성들은 자신이 우선 하나의 사회인으로서 가사나 자식을 기르는 일보다 더욱 중요하고 광범한 사회적 책임을 인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단신귀족”, “두사람세계” 현상이 점차 증가되었는데 특히 고층차 문화의 지식녀성들 중에서 더욱 보편화 되였다.           셋째: 남녀평등이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에로 전변이다. 이전의 직업녀성들은 왕왕 경제상 독립하고 가정에서 “총경리(一把手)”의 지위만 가지면 만족하였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경제상의 평등은 물론 정신상의 평등도 요구한다. 즉 남녀는 인격상 상호 존중하고 가사와 자녀교육 및 로인부양 등 가정의무에 대해 공동히 부담하고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변화는 당대 직업녀성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의 전변을 의미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중국의 가정들은 현대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핵심가정이 늘어나고 독신자녀가 증가 되였으며 사람들이 가정건설에 대한 요구도 제고된 것이다. 핵심가정에서 주부는 가사로동의 주요책임자이고 가정이 독신자녀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높아 졌으며 자녀교육의 책임은 대부분 어머니가 맡고 있기 때문에 녀성들의 어께는 더욱 무거워진 것이다.     직업녀성에 대한 사회의 기대는 또한 직장에서 직무를 훌륭히 담당하고 현대식 조류에 바싹 따르는 사업형이다. 그런데 가정에서의 남편의 기대는 왕왕 전통적으로서 아내가 훌륭하게 남편을 공대하고 부모를 잘모시며 자녀교육 역시 잘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남성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의 고정관념은 성공한 녀성에 대해 가정을 돌보지 않고 생활을 모르는 녀성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니 녀성이 사업상에서 성공을 하려면 반드시 가정의 희생을 대가로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외에 직업녀성들 중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완미주의경향도 배역의 곤혹을 조성하고 있다. 조사에 의하면 35~49살의 녀성들 중 “무엇을 하던지 나는 모두 완벽할 것을 요구한다.”가 92%를 점하였다. “사업과 가정을 모두 잘 돌보”는 리상적 배역이 주류로 되어 직업녀성의 배역을 한층 높은 차원에로 끌어 올렸다. 하지만 현실생활은 그렇게 완전완미한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다. 사업에 대한 추구와 가정을 위한 헌신적 행동이 충돌될 때, 사회와 가정이 녀성에 대한 이중 요구와 녀성의 내심에 잠재하는 전통관념은 상호 대응하여 자책감 혹은 죄책감이 생기게 된다. 하여 녀성들은 늘 자신의 가치를 희생하는 것으로서 아내와 며느리, 부모로서의 심리평형을 바꾸게 된다.      현대녀성에 대한 배역의 기대는 사회배역과 가정배역의 내재적 통일이며 현대녀성의 인생가치는 인간의 가치와 녀성가치의 내재적 통일이다. 이 두 가지가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려면 우선 남성들이 인생가치와 배역기대에 대한 관념상의개변이 있어야 한다. 즉 현대 남성들도 사회배역과 가정배역의 이중 의무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업녀성이 남성의 “현처량모”의 기대를 받아들일 때 직업남성도 응당 녀성의 “현부량부(賢夫良夫)”의 기대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생가치와 배역기대에서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통일이 이루어지고 남녀 각자의 인생 가치도 실현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이 가정배역에 들어서면 아래와 같은 부동한 정황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부부의 사회배역이 동등할 때 가사를 공동이 부담할 가능성은 크다. 부부 모두다 사회에서의 공작이 있는데 가사로동을 아내가 혼자 맡아하는 것은 불공평함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쉽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가정에 끌어 들여 가사에 적게 참여하며 가족에 대해서도 높이 올라 앉아 아랫사람을 다루듯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만약 아내가 직장이 없다면 <남주외 녀주내>로의 자연분공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녀성의 취업상황과 가정배역은 직접적인 련계를 가지고 있다. 녀성이 광범하게 취업하고  또 높은 층차로 취업하게 되면  전통적인 가정모식도 점차적으로 개변될 수 있으며 남녀평등의 경지에도 능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직업녀성 본신이 령활하게 이중배역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부동한 단계에 따라 배역의 치중점을 옮겨 어느 단계에서는 한 배역을 위해 잠시 다른 배역의 요구를 낮출 수도 있다. 례하면 육아시는 자연히 정력을 가정에 두고 아이를 잘 키우고 아이가 좀 크면 다시 정력을 사회사업에 두는 것이다. 당대 중국조선족 녀걸의 년령구조 통계가 바로 그 실례로 된다. 개혁개방이후부터 최근까지의 녀성선진인물 중 40~50살 좌우가 59%를 차지하였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녀성의 황금시기는 중년이다. 이 시기 녀성들은 상대적으로 가정배역의 압력에서 벗어나 사회배역에서 자신의 총명과 재질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직업녀성은 응당 열심히 가정(家庭)건설 및 가정(家政)관리에 관한 학문을 배우고 가정설비의 현대화를 실현하여 가사로동의 부담을 가능한 감소하여야 한다. 가정배역의 규률을 장악하고 가정 식구내의 인적관계를 잘 처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가정에 대한 책임성과 의무성을 가지게 하는 것도 자못 중요하다. 가족들과 함께 가사 로동에서 생활의 취미를 얻고 천륜지락을 향수하는 것은 배역충돌을 완화하는 가장 좋은 조치이다. 이렇게 한다면 직업녀성들은 현모량처의 심리만족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가정배역의 무거운 압력도 감소할 수 있어 이중배역에서의 성취감과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직업녀성의 사회배역 압력은 주요하게 녀성들의 직업소질과 직업지위의 낮음에서 온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녀성들의 교육정도는 아직도 비교적 낮은 편이고 따라서 직업지위도 상대적으로 낮다. 6천만의 녀직공을 통계한데 의하면 초중이상 문화를 가진 녀성은 동등문화 총수의 38%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녀성은 총 수의 33%밖에 안되였다. 목전 우리나라 녀성들은 주요하게 공업, 상업, 복무업 등 여러 가지 체력로동에 종사하고 있는데 이런 항업에 녀성 직공은 평균 43%나 차지하고 있다. 교육, 문화, 과학연구, 기관단체에 종사하는 녀직공은 30%로서 퍽 적은 수자이며 공정기술인원은 18.6%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길림성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정리실업당한 직공중 재취업에 성공 한 비례는 남자 28%이지만 녀성은 9.5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은 녀성이 취업에서의 성별적인 차별시를 받는 것도 있지만 더욱이 교육수준의 제한을 받았음도 홀시할 수 없는 한 원인으로 되고 있다.       과학지식은 한 사람의 소질과 능력을 개변하는 중요한 전제로서 진보와 락후의 표지이기도 하다. 중국 직업녀성의 주요임무는 우선 문화소질과 직업소질을 높여 자신의 공작능력과 사업능력을 제고하며 경쟁력을 증강하는 것이다. 나약한 보수심리를 극복하고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창조하여 성과를 올림으로서 사회배역에서 진정한 평등을 찾아야 한다.      직업녀성은 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그들이 이중 배역에서의 조화로운 통일은 사회 환경의 화합과 통일의 기초 우에서 건립된다고 본다. 때문에 사회는 직업녀성의 이중 배역 통일을 위하여 조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례하면 국가에서는 립법의 형식을 통하여 남녀에게 공평 합리한 취업권리를 제정해 주어야 하고 여러 항업의 부동한 특점에 근거하여 녀직공의 비례를 규정함으로서 녀성이 취업경쟁에서 성별의 제한을 받지 않도록 담보해야 한다. 녀성들은 인구재생산과 물질생산의 이중 직능을 부담하고 있기에 국가에서는 응당 생육보상 제도를 건립하여 사회로 하여금 생육의 사회성을 승인하도록 하여야 한다. 참정방면에서도 각급 령도직위에 녀성의 일정한 비례를 충분히 고려하며 대표성이 있게 하는 것 등등이다. 이렇게 되면 직업녀성의 진보와 발전은 량호한 사회적 환경의 기초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부단한 진보와 물질문명의 발전에 따라 가사로동의 사회화 정도도 제고될 것이며 전 사회의 륜리관과 가치관의 완선화에 따라 이런 시대적 특색을 가진 직업녀성의 이중배역 곤혹도 점차적으로 완화되여 나아갈 것이라고 본다.                                              (2007년 연변대학 여성학학술회 발표론문)                                <中国当代社会科学论文选粹>(중문판) 에 수록                                          
39    우리민족 녀성형상의 시대적 변천 댓글:  조회:4072  추천:66  2010-03-20
                 우리민족 녀성형상의 시대적 변천                                                  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 연구원  강 순 화     머리말     력사상 그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시대의 영웅이나 사회의 전형으로 내 세우는 녀성 역할모델로서의 녀성형상(女性像)은 한개 특정한 사회현존문화의 한 부분으로 그 사회에서의 녀성지위와 작용을 반영하며 또한 그 사회의 발전수준과 문명정도 그리고 그 사회의 주류로 되고 있는 가치관념과 전통의식 및 사회적 심리를 반영한다. 때문에 녀성형상은 줄곧 문학, 사회학, 민속학, 녀성학 등 여러 분야에서 중시되고 탐구되여 온 주제의 하나였다.     녀성형상의 특점 및 그 변천에 대하여 분석 정리하고 계통적인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학 각도로부터 우리나라 각 력사시기의 거대한 변천을 인식하고 그 시대의 정치환경, 경제발전, 문화풍토 등 부동한 사회현실속에서 용솟음쳐 나온 녀성형상들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인정하는 면에서 홀시 못할 하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연구방법    주요하게 근, 당대 중국조선족 녀성 영웅형상과 사회주의건설시기, 개혁개방시기 녀성형상에 대한 문헌연구와 조사의 방법을 결부하여 통계학적인 분석을 위주로 하였다. 총체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으로 현실사회 생활 중 녀성들에게 공유한 주류형상과 그 특징을 인식하고 묘술하자면 량적 방면의 대량적인 통계와 개괄이 수요된다. 필자가 인정하건대 사회발전의 각 력사시기에 각종 도서출판물과 신문매체들을 통해 전파되고 홍보되여 온 녀성역할 모델들은 바로 그 시기 녀성형상을 대표하는 한면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그 시기에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또한 선택, 추대된 그들은 바로 그 시대 주류문화의 가치관을 대표하고 있으며 그 사회에서의 리상적인 녀성형상을 대표할 수 있다고 본다.    본 론문에서 탐구해 보려는 것은 항일전쟁시기인 1930년대로부터 개혁개방을 실시한 8-90년대와 근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의 녀성형상은 어떤 것이였는가? 이런 형상들은 어떤 력사적 특점을 가졌었는가? 그후 각 시기 녀성형상은 대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녀성형상의 변화발전 중 우리는 사회의 어떤 변천을 보아낼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시대가 요구하는 녀성형상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필자는 70만자에 달하는《당대중국조선족녀걸》상,하집에 수록된 112명 녀걸(女杰)과 2000년대 연변조선족 10대 녀걸에 대하여 년령, 직업, 정치면모, 문화정도, 사적(事績)상황 등을 조사통계하고 30년대부터 건국 이전, 건국 이후부터 문화혁명 이전, 문화혁명 이후부터 개혁개방 이전, 개혁개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네개 시기를 나누어 녀성형상의 몇가지 특점을 분석연구해 보려 시도하였다.      1. 년령구조특점 : 매 부동한 시기의 년령 특점을 따져보니 30년대부터 건국이전까지의 녀성형상에는 20세미만이 38%, 20세 이상이 62%로 그 평균년령은 21세밖에 안되는 젊은 녀성들이였다. 이들은 대부분이 15-16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혁명에 뛰쳐 나선 독립의용군전사, 항일투사, 학생운동가와 토지개혁시기 농촌 부녀간부들이였는데 여기에는 항일련군 지도자 리조린장군의 부인이며 항일투사인 김백문, 조선의용군전사이며 2등영예군인인 리화림, 전국 농업로력모범 김명성, 청춘을 후방 근거지 창설에 바친 40년대 료녕성 특등로력모범 최룡실 등 녀성 인물들이 있다. 위에서 볼 수 있는바 건국 전 중국사회에서의 조선족 녀성형상은 기본상 청년녀성들이였다.    건국 후 문화혁명이전까지의 녀성형상에는 20세 이하가 16%밖에 안되고 20세 이상이 84%나 되며 그 평균 년령은 25세로 나타났는데 전 시기보다 평균 4세 증가된 셈이다. 이 시기 녀성형상에는 청년의 비례가 하강되였고 대신 중년의 비례가 많이 증가되였다. 여기에는 고아 넷을 키워 인재로 만든 1등 영예군인 한향옥, 광명을 안겨주는 천사로 불리우는 연변병원 안과주임이며 전국 3.8붉은기수인 심옥진교수, 겨레의 구슬로 불리우는 국가일급안무가이며 길림성로력모범인 최옥주, 시간과 경쟁하는 녀인으로 불리는 연변고무공장 제화공이며 전국로력모범인 석순희 등이 있었는데 당시 인구보편조사결과와 대비할 때 이 시기 녀성인구와 녀성형상의 년령분포는 비교적 합리하게 분포되여 있었다.   《문화혁명》이후부터 1978년까지의 녀성형상에는 20세 좌우가 33%이고 30세 이상이 67%나 차지하여 그 평균 년령이 31세로 증가되였다. 즉 이 시기에 와서는 청년녀성의 비례가 진일보 내려가고 중년녀성의 비례가 현저히 상승되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고객의 참된 벗으로 불리는 길림성 로력모범 고순옥, 광산의 딸인 전국<5.1>로력모범메달 수상자 김경혜, 모든 지혜와 힘을 후대양성에 바친 전국 우수소년아동사업일군 박순덕, 서안에 핀 진달래-섬서성 로력모범 정숙자 등이 있다. 이 시기의 년령구조를 보면 녀성청년 년령이 진일보 내려가고 중년 녀성 년령비례가 현저히 상승되였음을 볼 수 있다.    1978년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의 조선족 녀성형상에는 20대가 16%뿐이고 30대가 25%이며 40-50대가 59%나 차지하여 그 평균년령은 39세로 올라갔고 2000년에 와서는 녀성형상의 평균년령이 44세까지 올라갔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바 녀성형상은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와 중로년 녀성의 비례가 다섯 시기 중 최고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시기 녀성형상에는 우리말 교수연구의 개척자인 흑룡강성의 김순희, 강소성 민족단결모범이며 중학고급교원인 류연, 버림받은 생령들의 천사로 불리는 전국특수교육모범 리계영, 하늘과 인연을 맺은 녀인- 중국우주항공연구소 고급공정사 장정자, 농민기술원 왕진영, 연출가 방미선, 로인들을 친 부모처럼 모신 광영원 부원장 김신옥, 백화점의 총경리 원수월 등이 있었다.    녀성형상의 년령변화는 일정한 정도에서 중국의 사회적 변천을 반영한다.  건국 전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적 통치와 국내 통치자들의 압박착취하에 짓밟히고 억눌린 조선족녀성들은 사회의 최하층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므로 과감히 사회에 뛰쳐나오기 매우 힘들었다. 물론 일부 글이나 좀 읽은 신 녀성들이나 독립군 후대들이 가정울타리를 벗어나 용감히 혁명활동에 참가하였지만 필경 소수였으며 그 년령도 어리였다.     건국 직후는 신,구 두 사회의 거대한 변혁시기였다. 수백년래 억압당하였던 광대한 녀성들은 해방을 받아 나라의 주인으로 되었으며 한피 또 한피의 젊은 녀성들이 륙속 새중국 건설의 선줄군으로 나섰다. 그들은 부녀해방의 앞길을 대표하였고 나라건설에 있어어도 홀시 할수 없는 력량으로 되었다. 특히 사회주의건설이 생기발랄하게 전개되고 있은 50-60년대에 와서 각종 년령층차의 취업 부녀수는 모두 대대적으로 증가되였고 그들이 각 전선에서 취득한 성과도 뚜렷하였다.   《문화혁명》이후부터 1978년 이전까지의 상황은 중국《문화혁명》영향의 직접적 실례로 되고 있다. 이 시기에 성장된 한 세대의 청년들 한테는 불가피적으로 시대가 조성한 일부 부족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젊은 녀성들이 녀성역할 모형에 오름이 극히 적었고 50-60년대의 젊은이였던 한피의 중로년녀성들이 다시금 녀성형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청년녀성 년령비례가 하강되고 중로년녀성 년령비례가 증가된 국면을 초래한 기본 원인이다. 10여년이나 지속되였던 중국사회의 대 동란은 이곳에서도 깊은 상처를 남겨놓은 것이다.    1980년대 이후부터 활발해진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사회적 환경은 천백만 조선족녀성들이 마음껏 재간을 피울 수 있는 광활한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아울러 항창 사업의 황금시기에 들어선 중년녀성들은 각개 령역에서 눈부신 성과를 따내여 그들로 하여금 이 시기 녀성형상의 명실에 부합되는 대표인물로 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녀성형상의 년령 구조가 최대로 높아간 기본 원인이라고 본다.    2. 정치신분특점 : 정치신분은 주요하게 녀성형상 중 중국의 집정당인 공산당원의 비례와 정계인물의 비례로부터 통계하고 분석하여 보았다. 정치적 비례가 가장 높은 시기는 건국 이전으로서 100%의 공산당원에 92%의 정치활동가였다. 건국 후《문화혁명》이전까지를 보면 그래도 81%의 당원에 16%의 정계인물이였는데《문화혁명》이후부터는 그 비례가 신속히 하강되였다. 그후 두 시기 녀성형상 중 중공당원의 비례는 각각 50%, 52%밖에 안되고 정계의 인물은 8%, 7%밖에 안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아 낼수 있는바 사회풍운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도 변화하고 있으며 정치색채도 급속히 약화되고 있은 것이다. 이는 바로《문화혁명》이후 사람들이 정치투쟁이라던가 정치운동에 랭담해지고 렴오를 느끼는 사회적 심리와 관계될 뿐만 아니라 녀성형상에 대한 가치척도도 정치제일로부터 사회적인 정신문명과 물질문명 창조에로 옮겨진 것과도 련관되는 것이다. 따라서 녀성형상의 정치적 내용도 점차적으로 감소되고 있는 객관현실로 보여졌다. 그런데 2000년의 연변10대 녀걸에는 정계인물은 없지만 90%가 당원으로서 사회풍기가 경제제일로부터 어느 정도 다시금 정치신분을 중요시 하는데로 전화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는듯 하였다.     3. 직업결구특점 : 직업은 녀성형상의 중요한 사회적 내용이다. 중국조선족 녀성형상의 직업결구를 보면 30년대부터 건국이전 까지는 77%가 정계(政界) 인물이였고 15%가 기층부녀간부 였으며 나머지 8%가 의료위생사업 일군이였다. 건국후《문화혁명》이전까지는 문예체육계가 23%, 공업상업계 19%, 의료위생계 16%, 교육계 13% 등 각 분야에 골고루 분포되여 있었다. 《문화대혁명》이후부터 개혁개방 이전 까지는 체육계가 29%로 제일 높고 다음 공상(工商)계가 16%였다. 개혁개방 이후 현재까지는 주요하게 교육계가 32%로 제일 높고, 과학기술계가 18%이며 문예체육계, 공상계, 의료 위생계가  각각11%였고 정계는 7%밖에 안 되였다.    이와 같이 부동한 력사시기 녀성형상들의 직업 비중은 부동하였으며 모두 일정한 변화를 표현하였다. 즉 건국이전에는 정계가 위주였다면 50-60년대에 와서는 문체, 공상, 정계, 교육위생계가 모두 자기들의 녀성형상을 내세웠으며《문화혁명》후에는 비교적 집중적으로 교육계, 공상계에서 녀성형상이 나타났고 개혁개방 이후엔 더욱 큰 변화를 가져와서 교육계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계가 뚜렷이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새롭게 기업계에서 녀성강자들이 두각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7%)  2000년 연변 10대 녀걸을 보면 상업과 복무업종에 50%, 과학연구와 문화교육이 30%, 농업 목축업이 20%로서 개혁개방 후 시장경제체제의 주류 흐름에 따른 녀성형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보다시피 각 시기 녀성형상들의 직업분포는 그 시기의 특점을 나타내고 있는데 건국 전 항일투쟁과 조국해방투쟁에서의 녀성영웅들의 혁명활동과 건국 후 나라건설시기 녀성선줄군들의 역할은 모두 중국의 신,구사회 모습의 진실한 재조명 이였다. 특히 개혁개방이래 나라적으로 사업의 중점이 경제건설로 옮겨진 후 전 사회에서는 교육을 중시하고 과학기술을 중시하는 열조가 일어났다. 이런 사회적 변천은 녀성형상의 직업결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교육계, 과학기술계의 비례가 신속히 제1위로 상승한 것이다.     80년대에 이르러서는 고위지식층의 녀성형상이 놀라울 정도로 많아졌으며 동시에 녀성기업가와 전업기술 골간 인물들이 륙속 나타났다. 즉 지식형, 전업형, 관리형의 직업형상이 새롭게 형성된 것이다. 2000년의 녀성상에서 나타난 상업위주 농업위부의 사실은 경제개혁에 따른 사회적 변천에 의해 산생된 녀성형상의 변화를 보여주며 더 깊이 있게 분석해 볼 때 녀성형상의 직업소질의 제고와 녀성형상을 평가하는 사회가치관, 사회심리가 진일보 전업성, 경영성에 돌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4. 문화소질특점 : 문화정도 혹은 지식수준은 한 인간의 소질을 가늠하는 중요한 표지의 하나이며 또한 녀성형상 중 홀시 할 수 없는 한가지 내용이다. 부동한 시기 녀성형상의 문화적 소질을 고찰해 본 결과 30년대부터 건국 이전까지는 중학이상의 문화정도가 38%, 소학이하가 62%였다. 이는 해방 전 우리 조선족녀성들의 문화정도가 보편적으로 낮았던 객관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이 시기에는 문화지식이 녀성형상 내용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건국 후 각종 교육제도의 신속한 보급과 제고는 녀성들의 문화소질을 재빨리 제고시켰다. 특히 교육을 중시하는 조선족들로 말할 때 그 발전속도는 매우 놀라웠다. 녀성형상 중 중학이상의 문화정도가 건국 후《문화대혁명》전까지 71%로부터 그후 두시기 모두 100%로 상승되였으며 대학문화정도도 건국 전 15%로부터 그후 세 시기 각각 26%, 48%, 52%로 제고 되었다. 개혁개방 후 녀성형상 중 반수이상이 대학졸업생이라는 이 수자적 사실은 중국 현실사회에서 광대한 조선족 녀성들의 문화소질이 질적인 제고를 가져왔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중국사회도 날이 갈수록 지식인을 중시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는 녀성형상의 지식화 과정이며 전 사회의 현대화 과정인 것이다.    5. 사적(事績)특점 : 낡은 사회의 전통문화에 따르면 녀성에게는 사회의 사업이 없고 녀성의 존재의의는 오직 가정에만 있다고 하였다. 때문에 녀성의 역할이란 오직 안해, 며느리나 어머니로 만이면 다였다. 새 중국 건립 후 낡은 전통관념에 의존되던 사회기초는 점차 타파되고 한세대 또 한세대의 신 녀성들이 부단히 자신의 사업을 개척하고 창조하여 왔고 허다한 감동적인 사적들을 엮어 왔으며 각 력사시기 녀성형상의 사적특점도 부동하였다.    건국 이전에는 혁명활동가들의 사적형상이 위주였는데 주요하게는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싸워 온 가렬처절한 환경속에서 육성된 전쟁마당의 영웅사적들이였다. 건국후《문화혁명》이전까지는 복구건설에서 공훈을 세우고 각 령역에서 업적을 창조한 사적들이였으며 인민을 위하여 전심전의로 복무하는 사적 등이 절대적 우세였다. 이는 새중국의 신 녀성들이 나라건설사업에 떨쳐나선 후 표현된 거대한 로동열정과 숭고한 정신면모를 반영하였다. 소박한 사상감정, 자기를 잃고 가정을 잃고 사회에 나서서 일심으로 사업하는 정신은 이 시기 직업녀성들의 주선률이였다.   《문화혁명》이후의 정황은 점차 변화를 가져와 본 전업에 노력하고 업적을 창조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기는 하지만 50-60년대에 비하여 어느 정도 하강되고 반면에 고심연찬하여 과학성과를 따내고 후대양성사업에서 공훈을 세운 등 사적형상이 상승되였다. 특히 개혁개방이래 과학기술전선과 고등교육령역에서 고급지식인들이 악전고투하여 놀라운 연구성과를 취득한 사적이 주요한 형상으로 상승되고 기업계의 녀성강자들과 문체계의 세계급 명장들의 사적형상이 돌출히 나타났다. 2000년 연변 10대 녀걸도 반수이상이 과학기술과 문화교육 및 전업성이 강한 사업중의 선줄군들이였다. 이러한 결과는 바로 시대와 사회의 발전 과정 중 우리 녀성도 점차 생산로동형으로 부터 전업형, 개인성과형과 전면발전형으로 전화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총적으로 볼 때 상술한 다섯개 방면의 결과는 비교적 높은 일치성을 보여 주는데 개괄해 보면: 건국 이전에는 젊고, 낮은 문화층의 정계인물로서 당원과 기층간부의 혁명활동 사적을 위주로 하는 녀성형상이였다면 건국 후 50-60년대에 와서는 중등문화정도의 젊은층의 로동모범, 생산능수의 업적이였고 70년대 말부터는 중년녀성으로 비교적 높은 문화층의 문교, 과학 의료일군 위주의 개인성과형, 복무형 등 다종다양한 형상이 특징으로 되였다. 80년대 이후부터 2000년에 이르러서는 높은 문화층의 중로년 과학일군을 대표로 전업에서의 성취나 녀성강자식 사업업적이 주요특징으로 되고 있었다. 녀성형상의 이러한 특점은 부동한 측면에서 중국 각 력사시기 사회의 풍모와 거대한 변화를 보여 준다.    당대 중국 조선족 녀성형상들의 수년간 알찬 노력과 눈물겨운 사적들은 그야말로 감격 없이는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그토록 정열에 넘쳤으며 그토록 간고분투하였고 또한 저마다 녀성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혁명선배들의 피어린 발자취는 물론이거니와 건국초기 혁명렬사안해들이 남편의 뒤를 이어 발벗고 나선 그 장거, 조국건설에서의 특등 로력모범, 백의전사, 광산의 딸과 개혁개방이래 뛰여난 성과를 올린 녀과학일군, 훌륭한 명문대 학부장, 녀기업가들의 감격적인 사적들은 그야말로 남성이 할수 없는 녀성들로서의 특유한 기백과 재능, 노력과 분투의 결실들이였다.     리상적인 녀성상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의 개혁개방시기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녀성형상은 어떤 것이여야 하는가?  아래에 몇가지를 나렬하여 보자.    첫째, 녀성형상은 응당 사업형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랜시기 사회의 공인을 받아왔고 또 역할 모형으로 내 세워왔던 방향인물들이다. 마치 사업은 공적이고 생활은 사적이므로 공(公)을 위해서라면 사(私)는 영원히 희생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렬거한 중국조선족 녀성형상들도 그 대부분이 사업을 위하여 가정을 잊었고 지어 사업 때문에 자식을 종신 불구로 만들어 가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어머니도 있었다.     녀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모든 조건이 주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 시기 사회생활 조건 하에서 이런 단순 사업형은 녀성들에 대한 불공평한 요구이며 오직 가정의 희생으로만이 사업의 성과를 취득할 수 있다는데 그치게 된다.    둘째 관점은 녀성이라면 우선 현처량모의 생활형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 남성들한테서 나오는 견해인데 그들은 녀성들이 관념상 심리상에서 더욱 전통화할 것을 희망하며 녀성은 응당 남성을 받들고 남성에 의뢰하며 가정에만 발을 붙혀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남성청년들의 배우자 선택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업형이거나 개성이 강한 녀성강자는 싫어하며 반대로 온순하고 순종하며 믿음직하고 가사일을 잘하는 녀성을 더 좋아한다. 이런 남녀 녀성관의 차이로 하여 녀성 대학졸업생이나 녀성 석, 박사연구생들이 저학력 처녀들보다 배우자를 찾기 힘든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부류 사람들의 요구나 평가는 시대의 발전에 뒤떨어짐은 물론 사회와 녀성들의 인정도 받을 수 없다. 광활한 사회적 무대에서만이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음을 인식한 현시대 녀성들의 추구는 오직 한 남편과 자녀 그리고 자기가정 뿐인 것이 아니라 한개 완정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사업형이여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생활형이여야 가장 완미한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런《전면형》의 녀성형상은 녀성자신들의 자아실현의 요구이며 또한 사회발전의 필연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사회에서의 중국부녀들은 바로 사상, 도덕, 관념상 갱신되고 심미관념이 진일보 승화되는 계단에 처해 있으므로 이런《전면형》의 추구는 녀성발전의 요구이며 새로운 심미리상인 것이다. 조사에 의하면 현대 중국녀대생의 76%가 이런 전면형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는 녀성의 내재적 소질에 더욱 높은 요구를 제출함으로서 녀성 자신은 문화, 정치, 도덕, 업무 등 면에서의 완벽화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가사로동의 현대화와 사회화를 완전히 실현하지 못한 현시대 중국의 실정에서 이런 이중 부담의 리상적 욕망은 실현하기 퍽 힘든 것이다. 이런 사업의 강자와 가사로동의 능수는 확실히 비범한 재능과 뛰여난 정력이 안받침 되어야 하며 또한 리상적인 혼인과 행복한 가정이 겸비 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완전완미한 환경과 능력은 사실상 녀성들만의 추구와 노력으로 모두 쉽게 실현될 수 있는 일은 아닌것이다.    그렇다면 당전 어떤 녀성형상이 가장 실제적인 추구로 될 수 있는가?    《전면형》의 추구는 바로 녀성들의 자아실현의 추향을 반영하고 있음으로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문명에 따라 점차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녀성들은 사업의 주인으로 되려하며 또한 현숙한 안해, 따사로운 어머니로 되려 한다. 녀성해방의 과정이 바로 녀성자신을 부단히 완선화하는 과정이 아닌가? 그런데 인구가 많고 생산력발전이 불 평형한 중국실제의 복잡한 사회조건과 녀성자신의 소질차이는 녀성형상을 한 모형에 맞추어 넣을 수 없다. 즉 부동한 류형에 따라 사회와 가정이 수요하는 다층차, 다류형의 형상을 수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가정에 남편을 초과하는 녀성과학자가 나올 수 있고 반면에 남편의 성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안해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안해들의 희생과 전업주부현상이 보편적인 것으로 되고 있지만 중국사회에서는 아직 소수의 형태이다. 가히 말해 우리가 추구하는 녀성형상에는 동량형, 기초돌형, 작은풀잎형이 동시에 병존하고 있는 것이다. 힘의 강약에는 차이가 있겠으나 그들 모두가 자신의 독립적인 인격과 자주권이 있으며 부동한 위치에서도 사회의 발전과 녀성들의 진보에 공동하게 공헌하고 있으므로서 모두가 그 특유의 존재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의 녀성의 취업과 사회활동의 증가는 녀성의 사회지위를 크게 제고하였고 녀성들은 이로부터 전통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적이고 평등한 사회성원이 되었다. 현실사회에서 녀성에 대한 평가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 남편은 안해가 마음속의 벗처럼 사상을 교류하고 상호 리해하며 상호 방조할 것을 수요하며 아이들은 어머니가 먹고 입는 것 뿐이 아닌 자기들의 환상과 의문을 해답해 줄 것을 바란다. 또 모든 가정성원들은 모두 다 더욱 풍부하고 취미있는 업여생활의 향수를 추구한다.   《현처량모》의 전통표준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녀성들은 오직 착실한 지식, 능란한 기능만이 사업과 생활의 경쟁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공고케 할 수 있는 것이다. 녀성들은 자신의 문화소질 제고에 따라 더욱더 사업상 자강하고 감정상 독립하며 혼인상 자주를 요구하게 된다. 결과로 녀성들의 가정과 사회에서의 지위는 진일보 제고되고 시간과 정력은 합리한 분배를 얻게 된다. 조사에 의하면 중국의 대 성시들에서 부부쌍방의 가사로동 공동 담당수는 조사수의 89%라고 하였다. 이는 녀성들의 가사로동 부담을 경감하고 더 많은 시간과 정력으로 사회와 직장에 진출하여 자신의 총명재질로 인생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지어 주고 있는 것이다.      맺으면서      문명한 사회는 문명한 인간을 요구하듯이 사회가 발달하고 인간의 정신면모가 밝아질수록 녀성형상에 대한 시대적 요구차원도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녀성들에 대한 한차례 도전이며 또한 기회이기도 하다. 사회의 획기적 발전은 녀성형상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또한 녀성형상에 부단히 새로운 내용을 부여해 준다.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대륙의 놀라운 발전은 녀성형상의 다양한 역할과 진보에 훌륭한 조건을 지어주고 있다. 시대의 요구에 발맞춰 허영심과 맹목성을 버리고 자만하거나 자비하지 않으며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고 자기의 개성에 따라 인생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 녀성들이 걸어야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녀성형상은 력사와 시대의 흐름속에서 더욱 풍부화되고 완미화되여 나갈 것이다.                                                     (2004년 한국이화여대여성연구원에서의 발표론문)    
38    녀성들의 삶의 변화를 보면서 댓글:  조회:4481  추천:66  2010-03-06
                               녀성들의 삶의 변화를 보면서   《3.8국제부녀절》을 기꺼이 맞이하는 이때, 우리 녀성들의 삶을 한번 돌이켜보고 점검해 보는것도 보람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찍 1910년 단마르크에서 열린 제2차 국제사회주의 부녀대표대회에서《부녀와 아동의 합법적 권리를 보호하고 8시간 로동제와 부녀의 선거권을 쟁취하는》문제를 토론하였고 이 회의에서 제정된《3.8국제부녀절》도 어언간 한세기가 되고 있다. 이 기니긴 세월 지구촌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우리 녀성들도 놀라운 변화와 진보를 가져왔다.   녀성들의 사회참여를 녀성해방의 기본척도로 삼아온 우리나라는 일찍부터《남자들이 할수있는 일이면 녀자들도 할수 있다》,《전국의 부녀들이 일떠서는 날이자 중국혁명이 승리하는 날이다》라는 모택동의 말씀에 고무되여 용약 생산제일선에 나서서 절반하늘을 떠이는 기세를 보였다. 하여 중국 녀성들의 취업률은 세계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   특히 개혁개방 30여년래 조선족녀성들의 경제활동참여는 더욱 활발해졌다. 시장경제가 보편화됨에 따라 녀성들의 물질욕구는 늘어났고 가치관념은 변화되였으며 따라서 생활방식도 개변되였다. 녀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한층 높아졌으며 자아가치의 실현은 갈수록 중요시 되어왔다.    녀성들의 놀라운 변화는 아래 몇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째는 혼인, 생육관념의 변화이다. 최근 녀대생들을 대상으로하는 설문조사에 의하면 배우자 선택기준에 있어서 이전에는《정치조건, 경제토대, 가정상황, 직업》등 외적인 조건을 중시하던데로부터 지금은《능력, 성격, 품성, 재간》등 내적인 조건을 우선시하며 중매나 부모에 의한 선택보다는 당사자들간의 접촉과 료해를 중요시하면서 애정에 바탕을 둔 혼인을 위주로 한다. 이는 혼인관념의 새로운 변혁이며 진보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생육면에서도《다자다복(多子多福)》하다거나《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한다》는 전통적인 대가족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자기자신의 성공과 향수를 첫 자리에 놓으며 아들이건 딸이건 상관없이 하나만 키우면 만족해 한다. 높은 소비문화와 엄청난 교육비용은 아이 하나도 힘에 부치는 일이니 민족인구의 감소는 뒤로하고 자식 하나만이라도 잘 키우면서 경제적으로 좀 풍요롭게 지내는 것이 리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가정가치관의 변화이다. 경제가 상대적으로 락후했던 지난날 가정의 중요한 가치는 공리성을 띠고 있었다. 가정과 자식을 위해 부부는 서로 의존했고 서로 불쾌한 일이 있어도 그것을 쉽게 밖에 내비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사회에서는 가정의 공리적 가치가 낮아지고 심미적 가치가 높아져서 남녀모두가 더욱 새롭고《질 높은》혼인생활을 추구한다. 근년에 부쩍 많아진《제3자》,《애인》현상과 밖에서 나붓기는《채색기발》들이 이를 충분히 보여준다. 전통적인 가치관에서는 가족이나 가문의 명예가 중요했지만 현대가정에서는 삶의 질 문제가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다. 농경사회의 대가정은 산업사회의 핵가정으로 변했으며 결손가정, 재혼가정, 독신가정, 새롭게 생긴 짝무이, 동거형식 등 생활공동체는 가정형태의 새로운 발전모식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로는 자녀교양관념의 변화이다. 우리민족 부모들이 자식을 룡이나 봉황으로 키우려는 념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그 욕망과 방식에는 질적인 승화를 가져왔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키듯이 오늘의 부모들은 아파트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낸다. 어릴때 부터 아이의 흥취와 애호를 살리고 개성을 개발하며 그들의 다방면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고 애쓴다. 지금 부모들은 자식을 공부시켜 취직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것이 아니라 능력만 된다면 석사나 박사까지라도 밀어주어 성공시키려고 노력한다. 아마 우리민족의 교육사에서 지금처럼 고차원의 인재가 수없이 배출되고 있는 시대는 없을것이다.    넷째로는 직업관념의 변화이다. 현대녀성들의 가치척도는 자아희생으로부터 자아성취로 전변했으며 단순한 취직형으로부터 창발적인 사업형으로 변했다. 그들은 대담히 시장경제의 물결속에 뛰여들어 경쟁을 벌리고 능력을 비기며 분발노력하고 악전고투한다.《지금 세상에는 게으른놈이 못산다》는것이 그녀들의 좌우명이다. 남편의 성공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던 현처량모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녀성들은 자신의 주체적인 인격과 능력으로 자기의 인생가치를 실현하려고 한다. 녀성군체의 80%이상을 차지하는 직업녀성들은 남성과 평등하고 독립적인 자격으로 사회에 나서고 있다. 그들은 가정에서의 경제적인 독립은 물론이요, 인격상에서도 독립하려 하며 감정상에서도 남편과 자식뿐이 아닌 광범한 사회적 교제를 즐긴다. 여가시간이면 여러가지 사회교육에도 적극 참가하고 문체활동과 건강관리 등에도 중시를 돌리면서 자신의 삶을 충실히 하고 있다.   다섯째로는 심미관념의 변화이다. 오랜시기를 두고 녀성미의 표준은 오직 예쁘고 온순하며 선량한데 두었다. 그러나 현시대에는 독특한 개성이 있고 품위가 있으며 현대감이 넘치는 녀성이 매력적이라고 한다. 그러자면 당연히 외모뿐이 아닌 자신의 지식을 부단히 넓혀야하고 문화수양을 제고해야하며 인격과 품위를 높혀 내재적인 미를 갖추어야 한다. 각종 녀성학원의 새로운 붐은 이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고차원의 녀성일수록 남성과 동등한 목표를 추구하며 모든면에서 남성과의 거리를 단축하려한다. 하여 자신을 자연적인 녀성의 삶에서 사회적인 녀성의 삶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하기에 그들은 사업성공의 기쁨뒤에는 생활의 억제감과 감정의 고독감도 느끼게 된다. 사실상 녀성의 남성화로 남녀의 평등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력사적인 착오인 것이다.    시대와 사회의 발전에 따른 이런 변화들은 물론 인간의 추구에 따르는 진보적인 현상이지만 이로인한 문제점 또한 적지않게 나타나고 있다. 례하면 생육관의 변화에 따른 근 90%에 달하는 독신자녀률은 조선민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을 불러왔고 혼인가정관의 개방은 리혼률을 력사상 최고수치로 끌어올렸다. 시장경제바람으로 인한《도시열》,《한국열》은 또한 많은 리산가족과 결손자녀들을 만들어 사회의 불안전요소를 산생하고 있다. 전통적인 효도관념은 사라져서 웃어른의 권위는 낮아지고 부모중심의 가정은 자녀중심의 가정으로 전변되고 있는 것이다.   녀성을 잃으면 가정을 잃고 가정을 잃으면 사회를 잃는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민족사회에 나타난 이런 현상들은 바로 녀성들의 삶의 변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경인년 새해도 밝았으니 우리 녀성들의 일년지계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매일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듯이 우리의 마음도 활짝 열어보자. 새해에는 우리모두 가족들에게는 지혜롭고 살뜰한 주부로, 직장에서는 성실하고 참된 일꾼으로, 남편에게는 사랑받는 안해로, 아이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어머니로 자신의 삶을 충실히 가꿔보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힘은 추호의 사심도 없이 오로지 남을 위하는 모성애의 힘이다.  그래서 녀성은 대지이며 또한 녀성은 꽃이라고 하지 않는가!                                                                                                                       (2010년 3월 6일)
37    21세기 장수사회 로년의 미학 댓글:  조회:4793  추천:52  2010-03-04
                      21세기 장수사회 로년의 미학                                                            강 순 화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연구원)          一. 한계 수명에 도전하는 21세기       “참 요즘 로인들은 나이에 비해 정정하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된다. 70, 80이 되여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례가 많고 100세이상 로인들을 만나는 것이 예전만큼 신기하고 흥분되는 일 만이 아닐 정도로 주위에 로인 인구가 많다.     통계에 의하면 18세에 불과하던 전세계 평균수명이 최근 100년동안 65세로 늘어 났으며 지난 40년간, 미국의 경우  85세이상 고령인구의 증가폭이 300%나 되였고, 일본은 100세 이상의 고령인구가 100배나 증가했으며 한국, 중국도 65세이상 고령인구가 신속히 증가하고 있어 고령화시대가 곧 도래하고 있음이 예견되고 있다. 사실 현재의 속도로 장수인들이 늘어 난다면 미국의 경우 21세기 중반에는 100세이상의 로인 인구가 4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며 생명공학의 발달과 함께 2025년에는 인간의 한계수명이 125세까지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범세계적 고령화의 추세는 생명을 다루는 의학과학 분야가 빠르게 발달하고 있고 영양이나 위생 등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장수사회의 도래는 역시 인류가 축복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떻게 이를 옳바르게 정시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30년 후엔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로인 인구    인간수명의 연장과 출산력의 저하는 인구의 고령화를 재빠르게 초래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만보더라도 60세 이상의 로인인구가 1990년에 벌써 --영국은 20% , 프랑스는 19%였는데 2030년에는 각각 28%, 29%로 증가된다고 하며 일본은 90년의 18%로 부터 2030년에는 32%, 즉 거의 1/3이 로인 인구로 된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은 인구10명중 한명이 65세이상이며 미 전국에 37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2%를 차지한다.  그중 85세 이상도 530민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로령화와 비례해 심각한 문제는 로인들을 위한 년금을 뒷받침해 줄 젊은 세대의 수는 상대적으로 점점 줄어 들고 있는 것이다. 주요 선진국들이 로인 1명의 년금을 위해 로동하고 있는 인력이 4-5명 정도인데 2030년이 되면 미국은 3명, 기타 유럽국가는 2.5명으로 감소될 것으로 예산된다고 한다.    퇴직금이란 우리가 평생 저축해 놓은 돈을 로후에 찾아 쓰는 것이 아니다. 그 로동가치는 그 시기에 모두 상품가치로 전환되고 지금의 퇴직금은 현재 실제로 로동하는 사람들이 또 자신의 미래를 위해 부어 넣는 생산가치로 지불하게 됨으로 훗 세대들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면 지금의 퇴직금 제도도 파산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하나로 인정되는 일본도 날로 급증하는 장수로인들의 생활보장을 위한 년금제도를 어떻게 꾸려 나갈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대비하여 선진국들은 오래도록 일하기를 권하는 사회, 정년퇴직 년령을 높이는 사회로 변모해 가고 있다. 그러나 목전 선진 산업 국가들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산업사회에서 고령자에 대한 차별대우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왜냐하면 산업사회는 높은 교육수준과 기술을 갖춘 로동인력을 수요하기 때문이다. 즉 늙으면 생산력이 떨어져 조직에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청장년, 예비로인 시기의 학습과 진보를 더 박절히 요구하고 있다. 정보화와 인터넷, 컴프터화의 시대에 학습하지 않고는 시대에 뒤따를 수 없기 때문이며 배우고 가면 삶에 자신감이 있는 것과 같은 도리이다.      건강하고 활동적인 상태로 장수하는 것이 바램    우리가 예견하는 장수사회는 마지막 생애의 20-30년을 병약한 상태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면서 장수하는 그런 사회인 것이다. 미국에서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65-74세사이의 로인들 가운데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취약한 로인은 11%밖에 되지 않으며 89%의 로인들은 별 큰 문제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서《신로년학》이라는 개념이 나왔는데 과거에는 병약하고 무력한 로인들을 위해 어떻게 양로원이나 로인 보호시설을 확장하고 보건의료 제도를 가강하겠는가가 중점이였는데 현재는 이런 전통적, 부정적 시각에서 탈피하여 현재의 로인 다수는 건강하고 활동적이며 동시에 생산적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이다.     인제는 “여생”이라는 개념에서 “인생의 재 시작” 또는 “제2의 인생”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때문에 장수사회의 로인복지를 위해서는 정년퇴직 년령을 최대로 늘이면서 능력있는 로인들은 생의 마지막까지 일할 수 있는 취업 구조와 사회 환경의 조성 그리고 매개인의 노력이 필수 되는 때인 것이다.      二 .성공적인 로년 생활의 창조       1. 직장에서는 나왔다하여 모든 일을 포기해서는 않된다.   지금 현실에는 50만 되면 직장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기에 자연수명은 길어 졌지만 사회수명은 짧아진 모순 속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사회수명을 연장할 것인가? 여기에는 각자의 노력에 달린 것이다. 이런 장수사회에서 아무 일도 않고 안일하게 여생을 소일함은 빠른 세상에 비해 너무나 긴 시간이다. 퇴직후 짧게는 20년, 길게는 30-40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이 시간을 더 보람있고 훌륭하게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례하면 평생 쌓아 온 지식과 기술을 젊은세대들 한테 가르치면서 소득을 확보하는 길이라든지, 여러 가지 사회활동에 주동적으로 참가하여 뜻있는 사업에 힘을 보탠다던지, 재직 때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 못한 일이나 공부를 다시 해 보는것 등, 그리고 등산이나, 여러 가지 알맞은 운동 혹은 일주일 한번씩이라도 부근의 농촌에 내려가서 채소나 곡식이라도 심고 가꾸어 보는 등등 일들이다.      중요한 점은 정력과 신체가 허락하는 한 무엇인가는 실천해 보는 활동을 지속하면서 그 속에서 성취와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일본의 100세로인 마을의 생활형태를 보아도 항상 소식하고 매 하루를 로동의 하루로 보내며 자신이 가꿔 온 채소를 자신 뿐 아니라 이웃과 나누어 먹는 재미로 매일 매일을 즐겁게 보낸다는 것이다.        2. 로화의 자아의식에서 스스로 해방해야 한다.    우리 문화에서는 60이되면 당연히 로인이고 따라서 은퇴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즉 황혼기는 무력한 존재라는 편견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지적, 신체적 능력을 과소 평가하면 스스로 빠른 로화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50대 이후 툭하면 “나이가 들어서”, “이젠 늙어서 기억력이 떨어 진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등등 푸념을 하는데 이는 자신이 늙었다고 확인하면서 로화의 길을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지금 시대에 50-60은 중년이고 70-80이 되여야 로년이라고 한다. 때문에 벌써부터 누구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니라 항상 큰언니와 큰오빠로 살아가야 한다. 대부분 로인은 건강하시므로 정신적, 신체적 활동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관념의 부동은 생산적 활동, 건강, 장수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유지에 현저한 차이가 있다. 현재의 보건의술의 조건에서 우리들의 관념과 생활방식 그리고 삶의 태도를 바꾼다면 의존적이고 소외된 존재로부터 새로운 생산 인구로 변화시켜 갈 수 있다.        3.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자.    늙음이란?  마모리론에 의하면《물건을 오래 쓰면 닳는 것과 같이 몸도 오래 쓰면 낡아 변한다》는 것인데 새차도 오래 쓰면 중고차가 되고 더 오래 타면 페차가 되여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음으로 축적리론인데《로페물이 쌓여서 그 독성으로 늙는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매일 쓰레기를 내듯이 우리 몸도 외부로부터 흡수한 모든 것을 에너지화 하는 과정에 땀, 소변, 대변으로 배설도 하지만 세월이 감에따라 축적도 많이 된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론리로는《컴프터가 입력되지 않은 정보는 재생시킬수 없듯이 사람도 태여날 때부터 자신의 수명이나 늙음의 과정을 프로그램으로 타고 난다》는 것이다. 물론 상술한 인소가 모두 작용하겠지만 과학의 발전에 따라 조만간 늙음의 기전도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례외없이 늙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역시 불쾌한 일만도 아니다. 일년내내 농사를 지어 이제 막 수확을 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들판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남은 시간이 살아 온 시간보다 짧다고 느낄 때 아무렇게나 지나버릴 것이 아니라 매우 소중한 시간임을 새삼스레 느끼기도 한다.    “늙어 보세요, 재미있어요.”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한 로인이 젊은이들게 한 말이다. 삶의 궤적을 다라 가느라면 재미없는 나이가 어디 있으랴. 나의 정도마다 그 나이에 알맞은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책읽기, 글쓰기, 음악감상, 들놀이, 려행, 등산, 친구와의 만남, 사회활동  등등 젊어서 마음껏 할 수 없던 많은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았는가?!     三. 즐겁고 활기찬 여가 활동       정년퇴직 이후면 직업적인 일, 의무적인 활동과 자녀 양육등에서 벗어난 시기로서 일상생활의 대부분이 여가 시간이라고 할수 있다. 최소 20-30년의 여가생활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우리나라 로인들은 대체로 텔레비 시청, 집안일, 손자손녀 돌보기, 친척친구 방문 등 단순한 모임이나 화토, 장기, 마장 등으로 여가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여러사람이 함께 모여 활동하는 경우도 적은 편이다. 특히 학습활동이나 체육활동에 참가하는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여기에는 단조로운 일상을 당연한 듯 수용하는 무기력한 자세 역시 문제이고 또한 로인복지 시설이나 로인대학, 공원휴식터 등 시설이 다양하지 못한 현실도 중요한 원인으로 되고 있다. 우리는 여가문화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고 참된 여가문화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아래의 몇가지 활동들을 보자     문화활동       로년기는 다른 기능과 달리 문화예술과 관련된 창작력이나 종합적 판단력이 오히려 발달하는 편이라 한다. 인간 뇌의 여러 가지 기능 중 계산능력이나 기억력 같은 결정형 기능은 장년기에 들어서면서 떨어지는 반면, 창작이나 종합적 상황 판단과 같은 류동형 지능은 로년기에 오히려 최고에 달한다고 한다. 때문에 직접적 창작활동 뿐 아닌 각종 문화행사나 문화공간을 자주 접하는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조선족의 저명한 문학가 김학철선생님이 80고령에서의 창작활동과 조선족의 저명한 학자이고 교육가이신 정판룡교수의 생의 마지막 저서활동들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교육활동    지금 로인대학이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이외에도 평생교육원이나 사회교육원 등 에서도 배움의 기회를 찾을 수 있다. 연변대학 민족문화교육원이나 연변사회교육연구소, 연변대학여성기업가반, 연변녀성발전촉진회 녀성교실, 천선복중로년활동중심 등등, 사회교육분야는 다양하다. 자신이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한 교육, 지금 알고 있는 기술이나 지식을 공고히 하기 위한 교육, 특히 정보화 사회에서 컴프터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은 글을 아는 것 만큼 중요하므로 이에 대한 교육도 받아야 한다. 조금만 노력하면 인터넷을 통하여 이메일로 자식들과 통신하고 보다 넓은 세상과 접할 수 있으며 원격진료나 홈쏘핑 등 자신의 생활도 퍽 간편하고 다채롭게 할수 있다.     체육활동    나이가 드시면 체력이 저하되고 면역능력이 약해지므로 쉽게 감기나 기타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적당한 운동은 심장과 폐의 기능 향상을 도와 주고 근육의 기능향상을 도모하는데 효과가 현저할 뿐 아니라 정신적 안정감을 갖게하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갖추는데 촉매역할을 한다. 한국 체육과학 연구원에서는 로인을 위한 스포츠활동으로 건강체조, 걷기운동, 자전거 타기, 수영, 등산 등 유산소 운동을 권장하고 있다. 이런 운동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운동량과 시간을 조절할 수 있으며 상해의 위험이 적고 운동중 신심이 유쾌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건강에 매우 유리한 것이다.     닫힌 사회에서열린 사회로    80년대까지만 하여도 그 누가 려행을 다녀 왔다고 하면 돈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특수층의 전유물로만 여기고 부려움만 가질 뿐 자기는 해 보려는 엄두도 못했다.     이제 21세기는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변하여 지구촌이란 말이 실감이 날 정도이다. 세계 려행자 총수는 1년에 10억명에 도달한다고 한다. 중국의 현실에서도 단체로 려행을 조직할 경우 그 비용이 퇴직인원들로도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들 한다.    스웨덴 사람들은 젊어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받는 봉금액의 30%를 세금으로 내고 정년이 된 후이면 퇴직금이 기본 생활비를 해결하고도 1년에 한, 두차례 해외로 려행 할 수 있는 경비까지 보장된다고 한다. 로인들의 건강복지라는 관점에서 볼 때 려행이 최상의 보약이라는 것이다.    려행이야 말로 살아있는 교육 그 자체이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섰다가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풍물과 인간들로부터 여러면에서 배우고 느끼면서 생각하다 보면 많은 공부를 하게 된다.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사물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교실이고 교재가 되는 셈이다. 이런 새로운 견문을 통해 인간적인 성숙을 이루고 폭 넓은 인생관을 갖게 된다.    려행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리해와 협동심도 배우게 된다. 사람이 늙어가면 고집이 세 지고 못말리는 행동이 나오는데 려행은 곧 이에 대한 치료 효과가 좋다. 려행을 통하여 애국심과 향토애를 가질 수 있으며, 독립심이 강화되고, 타인을 통해 자률적 사고를 가질 수 있다. 또한 그 준비와 계획과정에 소박해 지고 겸손해 지며 인내력이 강해진다. 려행중 항상 긴장하고 움직이므로 심신이 건강해 지고 새로운 것에 대한 견문도 넓어지며, 호기심이 강해지고 탐구의욕이 높아져 즐거운 추억으로 될 수 있다.     의미있는 삶을 열어주는 자원봉사     남을 돕는 것 만큼 보람 있는 일은 없으며 나이가 들수록 그 보람은 커진다. 남을 위해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봉사하는 것은 로년의 삶에 특별한 가치를 주기에 삶의 영광인 것이다.   로년기의 자원봉사 활동은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은 로후에 일상의 무료함과 고독감을 해소하고 사회적인 유용감을 갖게 하는 등 질적인 삶을 영위하게 한다. 즉 퇴직 후 생활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고 상실되였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보충해 주는 중요한 대체역할을 하며 또 사회의 련대감을 제고시키며 세대간의 사회통합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례하면 “새일대 관심협회”라던가 “사회조사” “업무보조”, “가정교사” “보육교사 보조”, “교통질서 도우미”, "로인료양시설" 에 대한 자원봉사 등을 들수 있다. 즉 “봉사를 받는 수혜자”로 부터 “봉사를 하는 주체자”로 되자는 것이다. 로년기에 직면한 우리는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존재로 생활하기 위해 스스로 활기찬 로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인식하고 이를 위해 실제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래에 “제2의 인생”에 적합한 사회활동을 찾고 준비하는데 고려할 사항을 덧붙혀 둔다.   (1) 자신이 가장 원하는 욕구를 확인하라   (2)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인가?   (3) 이러한 활동에 대한 정보, 서적, 인터넷, 주위사람, 사회단체들을 찾아보라.   (4) 이런 일을 미리미리 조금식 실천해 보면서 과연 이런 일들이 나의 삶에 적합한지를 확인한다.                 <로년세계> 잡지  2005년 3기에 실렸었고  최근에 부분 내용을 더 보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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