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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엄마의 눈물 댓글:  조회:414  추천:0  2020-11-25
엄마의 눈물 궁금이 글 궁금이 · 방송 구서림        您的浏览器不支持 audio标签     “행복리의 이야기”라는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를 만났다.     [너의 아이지만 너의 아이가 아니다. 자기 운명을 만들어가기 위해 태여났다. 엄마를 빌려 이 세상에 나오기는 했지만 엄마를 위해 이 세상에 태여난 게 아니다. 분명 옆에 있지만 엄마의 소유물이 아니다. 모든 사랑을 쏟을 수 있지만 그게 너의 뜻 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도 자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를 보호해줄 수는 있지만 령혼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들의 령혼은 현실이 아닌 미래에 있다. 모지름을 쓸 수 있고 또 써야 하지만 아이를 본인과 같게 만들 수는 없다. 생명에는 후진이 없고 과거에 브레이크도 없다.  너는 활이고 아이는 화살이다. 쏜 사람은 과녁이 목표지만 화살은 멀리 갈 수 있는 데까지 간다. 뿐만 아니라 신나게 너와 멀어진다. 활이 심하게 휠수록 화살은 더 멀리 간다.]     물론 이런 기가 막힌 내용은 인터넷상의 수많은 글에서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되지만 이날따라 적고 싶어져서 일시정지까지 해가며 구절마다 옮겨두었다. 도리는 그런데 현실은 다르기 때문에 저런 내용들이 정확한 헛소리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다만 리론이 없는 실천은 있을 수 없고 백프로 리론 대로 옮겨지는 실천도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 끌끌한 아들이 있고 손녀까지 본 로부부지만 할머니가 먼저 가니 순간 무너지는 할아버지의 생활을 보면서 과연 자식은 어디까지 부모가 의지할 수 있는 언덕이 될가 싶기도 하다. 반쪽이 없어졌지만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그건 50%가 아닌 99%가 떠나가버린 충격이였다. 급격히 로화되여가고 있는 모습이였고 모든 일이 의미가 없어지는 허무함이였다.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다가도 목이 말라 깨면서 물을 찾는데 항상 옆에서 가져다주던 할머니가 이제 안 계신다. 순간 몰려오는 허탈감은 한숨으로 이어지고 그 빈자리는 갈수록 커져만 간다.     지난 일요일은 엄마의 기일이였다. 엄마는 남편이 없는 빈자리를 30년간 사셨다. 그 30년의 빈자리를 나는 과연 얼마나 헤아렸을가.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엄마가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빨리 새아버지를 찾아드리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의 깊이를 잘 알지 못했다.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는 동반자의 중요성을 어렴풋하게 알아갈가 할 때에는 엄마가 싫다고 했다. 그냥 아들만 믿고 가면 된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런데 크게 앓은 후의 상당기간 매일 옆을 지켜준 건 결국 양로원의 간호인이였다.      “그러게 다 쓸 데 없다.”     간혹 가다가 엄마가 외웠던 말씀이다. 섭섭하지만 그래도 자식인데 참아야지 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는 저도 모르게 튀여나오는 감정 표출이였다. 자식에게 부담이 될가봐 수술을 두번 거치면서도 하나도 안 아프다고 했던 엄마의 강인함은 초인간적이였고 자식 한곬으로만 집중된 희생정신이였다. 더 안타까운 건 나중에 치매기가 생기며 참는 게 절제가 되지 않는 순간이 오니 엄마는 울음으로 표달했다. 그때까지도 언어로는 섭섭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러나 눈물샘은 엄마가 어떻게 막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여서 그대로 쏟아졌다.      일년전까지만 해도 엄마의 기일이면 친구를 찾아 술잔을 기울였다. 약속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친구가 오기전에 맥주 한잔 부어놓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눈물이 샘 솟듯이 흘러내린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있고 해서 억지로 참지만 손등은 계속 눈물을 훔쳐야 한다. 엄마한테 괜히 짜증을 내고 엇나가고 묻는 말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던 여러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머리를 스쳐가며 그게 다시 눈물로 쏟아진다. 그런데 그런 자리를 가질 생각도 이제 와서 서서히 희박해져간다.      “이제 내가 죽으면 니 후회할게다.”     엄마도 외할머니에게는 딸이였으니 자식으로서 후회되는 바가 많았던가 보다. 그런데 그 후회를 내 자식도 할거라고 생각하니 그것마저도 아깝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게 그 소리고 자식이 어디 조금이라도 아프면 자신이 대신 아파주고 싶은 게 부모의 심정이다. 2003년 사스 때에도 자주 나가서 술자리를 가졌던 나를 보고 엄마는 이런 말을 하셨다.     “내야 이제 다 늙은 게 걸리면 죽으면 되지만 니가 걱정이다.”     “내가 왜 걸립니까.”     엄마의 걱정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답을 하며 그냥 제멋대로 살았다. 주말의 아침에 보면 네가 오랜만이라고 할 정도로 아침 일찍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왔다. 물론 아버지가 술을 안 드셔서 다른 안해들보다는 술주정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겠지만 대신 자식한테서 그 걱정을 돌려받고 있었다.      “어이구 아 싹 머저리 됐소.”     휴일이면 종일 침대에 누워 끙끙 앓고 있었던 나를 보면서 엄마가 했던  말이다.      지금 내가 버젓이 이런 위챗을 쓰고 있지만 엄마를 위해 나에게 두번 다시 기회를 준다면 잘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활을 쏜 사람은 과녁이 목표지만 화살은 활을 쥔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멀리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버린다. 뿐만 아니라 신나게 당신과 멀어져간다.     화살 같은 자식이였고 속으로 눈물을 삼킨 엄마였다. 중국조선어방송넷 
5    달팽이의 약속ㅣ그 시절의 반주임 댓글:  조회:372  추천:0  2020-07-13
달팽이의 약속ㅣ그 시절의 반주임   글 김현철 ·   졸업시즌이다. 또 한기의 친구들이 졸업장을 안고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난다. 그러나 시기가 시기인지라 화려한 졸업식이 없고, 졸업사진이 없고, 크고 작은 리별의 풍경도 펼쳐지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친구들은 출입규제로 인해 숙소에서 챙겨갈 자기의 짐들도 직접 정리하지 못한채 누군가가 대신 정리해 우편으로 부쳐주게 됐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비상 리별이다.    졸업학년 학생들의 담임을 맡은 최선생님의 마음은 더욱 그렇다. 매일과 같이 교내출입신청을 하여 들어가서는 친구들의 서류를 포함한 자잘한 뒤처리들을 해주며 씁쓸한 배웅을 해준다. 혹은 잠깐 얼굴을 보며, 혹은 전화로, 혹은 위챗으로 정든 학생들을 이렇게 떠나보내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취직은 어떻게 하려는지, 류학은 계획대로 될려는지, 고향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쉽게 가셔지지 않는 하나하나의 걱정들은 무거운 축복이 되여 문자를 타고, 음성을 타고 개개인의 마음속에 전해진다.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난 4년을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는 일은 그 누구한테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수없이 반복했을 그 한마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며칠전 우연히 사무실에 들렸다가 홀로 씁쓸히 서류들을 들고 계시는 최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 이런 저런 유감을 남긴 채 맡았던 반급의 친구들을 떠나보내던 기억도 새록새록 살아났다. 만약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 그 일은 그렇게가 아닌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들도 주저리주저리 갈마들었지만, 만약은 없다. 이미 발생한 유감은 지금 앞에 있는 일들을 통해 미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저런 현실과 기억들을 마주하며 오늘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나의 반주임’ 선생님들을 한번 모셔보려 한다. 대학공부를 마치기까지 반주임을 만나기도 참 많이 만났다. 추억의 종착역에 도착할 무렵, 나는 과연 뭔가 특별한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을가?   소학교 1학년, 엄하기로 소문난 김선생님을 만났다. “물 뿌린 듯이 조용하다”라는 것이 어떤 조용함을 가리키는지, 나는 반주임의 수업을 통해 알게 되였다. 자습시간이 되여 선생님이 간혹 사무실에 다녀오시느라 자리를 비워도 교실은 글쓰는 소리, 교과서 펼치는 소리, 약간씩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군대규률이였다. 교실문은 앞문과 뒤문 두개였는데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소란스럽던 친구들이 일제히 뒤문 유리를 주시한다. 그러다가 선생님의 머리카락이 슥 스쳐지나는 것이 보이면 일제히 바로 앉은 자세를 취하며 숨을 죽인다. 선생님이 앞문을 뚝 떼고 들어오는 순간, 교실은 그야말로 비장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러면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강의를 시작하시였다.    반주임은 숙제를 많이 내주시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특히 련휴가 있을 시에는 숙제가 얼마나 많은지 차라리 쉬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매번 휴가전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친구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숙제포치를 기다렸다. 법관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의 마음이라 할가… “련습집 세벌, 과문 두벌, 수학문제집 몇페지부터 몇페지까지, 1 하나 2 둘 이렇게 100까지 갔다가 다시 거꾸로 오기를 두번…” 몰래몰래 입을 딱 벌리며 숙제를 표시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련휴를 앞둔 즐거움과 설레임은 꼬물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음이 나오는 풍경이다. 간혹 놀음에 탐해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련휴가 끝나고 첫 수업에 들어오는 모습은 세상 무너지는 표정이였다. 그럴만도 했다. 반주임은 결코 그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숙제를 안해오거나 하면 꾸중은 물론이고 선생님은 에누리없이 매를 선사했다. 한번은 친구와 교실에서 ‘붙잡을래기’를 하다가 교탁에 부딪치는 바람에 먹물이 쏟아지면서 선생님께서 며칠간 정성들여 꾸려놓은 벽보란에 붙일 자료들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날 나와 친구는 호되게 맞았다. 또 한번은 장난을 치다보니 아래 학년 교실에 들어가고 말았는데 그 일이 선생님한테 발각되여 또 엄청 맞았다. 맞을 당시에는 무섭기도 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귀한 자식 매 한대 더 치라는 말이 있 듯이, 귀한 학생 매 한대 더 쳐도 되는 세월에 선사받았던 선생님의 ‘매’는 지금 생각해봐도 귀한 매가 맞았다.    1998년, 조선족학교들이 하나, 둘 합병되던 시절, 내가 다니던 소학교도 어느날 예고없이 진중심소학교에 합병되였고 나는 새로운 반주임을 만났다. 예쁜 얼굴에 맵시나는 차림새를 한 한선생님은 전교에서 유일하게 전동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매번 운동장에 그림처럼 나타날 때면 많은 사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누가 봐도 우아하고 멋져보였다. 오후 자습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간식으로 아이스크림 혹은 과자를 사주시군 했는데, 아이스크림이 20전 정도 더 비쌌다. 매번 선생님은 “동무네 똰쟐삥치린 먹겠슴까, 발바닥과자 먹겠슴까?”라고 물었고, 친구들은 대부분 아이스크림을 원하면서도 가격차이를 아는지라 쉽게 대답하진 않았다. 마침 반급에 넉살좋은 개구쟁이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항상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똰쟐!”하고 대답하군 했고, 그러면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상점에 다녀오시군 했다. 한학기 밖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신 미녀선생님이셨다.    6학년이 되니 또 다른 마을의 친구들이 편입되면서 반급 조정이 이루어지고 나는 처음으로 남자반주임 김선생님을 만났다. 준수한 얼굴에 축구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주시는 선생님이셨다. 특히 남학생들한테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셨는데, 수업이 끝나고나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를 하곤 했다. 당시 싱글이였던 선생님은 “시간이 많았다”. 방학 기간에도 친척집을 빌려 우리한테 수학을 가르쳐주셨고 기회만 되면 우리를 데리고 자연을 만나러 나갔다. 겨울이면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난로에 학생들이 들고 온 도시락을 덥혀주시였고 축구공이 귀한 세월에 질좋은 공을 구해오셔서 남학생들의 귀인이 되기도 했다. 훈훈하면서도 자상하셨던 선생님, 그후에도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3호학생이 됐니? 하시며 다른 동학들의 안부도 함께 물으셨다. 한번은 선생님이 수학응용문제를 설명해주셨는데 ‘사탕꿀’을 읽는 발음이 얼마나 구수한지 저도 몰래 침을 꿀떡 삼켰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또 새로운 반주임을 만났다. 년세가 있으시고 원칙성이 강한 원로 선생님이셨는데, 교실에서는 박력있게 강의에 열중하셨고 수업이 끝나면 자식들을 대하듯이 구석구석 까근하게 관심해주셨다. 집이 학교와 가까웠지만 선생님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몸이 꽤 웅장하셨던 선생님이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 척 들어서는 걸 보면 우리는 저도 몰래 어깨에 힘이 들어가군 했다. 목소리에 독특한 울림이 있었던 선생님은 교단과 교실 밖에서 서로 다른 풍격을 선보이며 학생들의 존경을 사시였다. 하지만 2학년이 되여 중학교들마저 합병되면서 반주임이 또 바뀌게 되였다. 선생님은 그게 못마땅하셨는지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를 만나도 웃어주지 않았다. 전에 없던 굳은 표정으로 완전 다른 사람이였다. 우리는 못내 서운했고 혹시 우리가 뭘 잘못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그 비밀 혹은 그 리유를 우리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고 이후에도 알 수 없게 되였다.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새로 바뀐 반주임은 젊은 남자선생님으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학생들과 롱담도 별로 하지 않으셨고 교류도 많지 않으셨다. 요즘으로 말하면 차도남에 가까운 분이셨는데 학생들이 부적절한 언행을 보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까주군 했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반급을 이끌어나가셨다. 말하자면, 굳이 포치하지 않아도 학생들이 알아서 움직이게 하는 마력 같은 걸 갖고 계셨다. 누구든지 인정 사정 봐주지 않고 공평성을 기하셔서 얼핏 보면 차가운 분 같지만 그 속에 따뜻함도 묻어있었다. 아쉽게도 또 1년만 함께 하고는 재차 반급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반은 절반으로 깨져 다른 두개 반급에 합병되였다. 선생님과의 더 깊은 교류도 불가능해졌고 이후에도 기회는 없게 되였다. 또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관건적인 중3, 녀자선생님이신 김선생님이 맡으신 반에 나는 편입되였고 ‘굴러들어온 이방인’의 신세로 마지막 학년 스타트를 떼게 되는가 싶었는데, 마음이 넓으신 선생님은 편입된 우리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푸셨다. 그래서 반장도 셋이나 되였다. 원래 반급에서 직무가 무엇이면 그대로 유지시켜준다는 것이였다. 쪼개짐으로 인한 잠깐의 ‘상처’는 그렇게 빠르게 아물어갔다.    아이를 둘씩이나 키우면서도 선생님은 고중입시를 위한 밤자습에 나오셔서 우리를 지켜주셨다. 공부를 하다가 문득 머리를 들어 교탁을 바라보면 선생님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계셨고 간혹 눈이 마주치면 웃으시군 했다. 따뜻한 보온병물에 두유를 들고 오셔서는 배고플 텐데 타먹으라 하셨고 집에 딱한 사정이 있을 때면 아예 두 애들을 데리고 교실에 오시군 했다. 가끔 가다 친구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꾸중은 안하시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면 애들은 자세를 바로 하며 책을 보는 시늉이라도 내군 했고, 고중입시 막바지가 되여서는 하나같이 열공모드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늘 솔직하셨다. 다 집어치우고 한국에 나가 돈도 벌고 싶지만 너희들 때문에 안간다, 하는 얘기도 무람없이 하셨다. 그러다보니 애들 역시 선생님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 밖에 없었다. 사생관계를 떠나서 동지 같은 가족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덕분에 친구들은 무난하게 고중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고1,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짐이 없는, 옷에 구김살 한줄 없는 녀자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다. 처음 만난 날부터 다른 반에 옮기는 그날까지 단 한번이라도 선생님의 빈틈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철저한 분이셨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중 가장 빈도가 높으셨던 것은 여차여차 하면 문제 없죠예? 하는 것이였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일이여도 선생님의 차분한 설명을 듣고 마지막에 문제없죠예? 하는 마무리멘트를 들으면 거짓말처럼 자신감이 생기고 진짜로 별 문제 없어보이군 했다. 차분하면서도 자신감을 심어준 반주임, 태선생님은 그런 매력을 가진 분이셨다. 문과반, 리과반을 선택해야 될 시점에 이르러 마음 속으로는 언녕 문과를 택하고 있었지만 반주임을 떠나기가 싫어서 옹근 이틀을 숙소에서 끙끙 속을 앓았던 기억이 어제 같다.    문과반으로 옮겨가면서 또 새 반주임을 만났다. 듬직하고 위엄있고 멋진 남자선생님이셨는데 멀리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분이였다. 강의에서도 그렇고 회의나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불필요한 얘기는 철저히 하지 않으셨다. 정치과목을 강의하시는 분답게 항상 “전반 우리 학교의 진학률을 볼 때…”, “전반 중국의 대학교 분포 상황을 볼 때…” 등 폭넓고 개괄적인 용어들을 즐겨 사용하셨고 자주는 안하시지만 가끔 선보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동반한 유머는 번마다 그렇게 적절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알람시계의 고장으로 지각을 하게 되였는데, 허겁지겁 학교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셨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해서 걱정했다 하고 한마디 하시며 시름을 놓는 반주임께 인사드리고 교실로 들어오는 마음이 더없이 따뜻했다.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60이라면 그걸 90이상으로 발휘하게끔 하는 힘을 지닌 분, 업간체조시간이면 우리반 대렬 젤 앞에서부터 유유히 뒤쪽으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존재만으로도 안전감을 부여하는 분, 그분이 우리에게 자주 해주신 말씀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큰 일은 작게, 작은 일은 없던 걸로”라고 하는 철학이였다. 그 말씀은 오늘을 살면서도 수시로 검증되고 있다.    대학에 오면 반주임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입술이 매력적인 한 남자선생님이 입학한 첫날부터 졸업할 때가지 우리 옆을 지켜주셨다. 옹근 4년이라는 시간, 얘기가 적으셨고 항상 묵묵히 챙겨주셨다. 별 일 없이도 우리가 수업하는 교실에 스윽 들어와서는 한바퀴 돌고 나가시군 했고 남학생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궁할 때면 묘하게 기숙사를 방문해 술 한잔 사주셨다. 모든 학생들을 공평하게 대해주셨고 학생들한테 시켜도 되는 잔일도 가급적 본인이 직접 하셨다. 학생들은 누가 베풀어줬는지도 모르고 어떤 혜택을 받고나서는 나중에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반주임이 챙겨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전혀 변함없는 반주임, 묵묵히 흐르는 두만강처럼 오늘도 그 자리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폐교와 더불어 합병되고, 다시 조종되고, 그러기를 반복하며 나는 큰 걱정없이 학업을 견지할 수 있었고 그런 덕으로 많은 반주임을 만났다. 짧게는 반년, 길게는 5년반, 그러나 함께 한 시간과 상관없이 ‘나의 반주임’들은 내 마음속에 정중히 모셔져있다. 격변의 시절, 어려움도 적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은 그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은 추억, 소중한 기억으로 정히 기록되게 되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본인들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학생들에게 최선의 배려를 부여해주신 그 은혜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고맙게 느껴진다. 선생님들에도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겠거늘, 선생님들에게도 이런저런 생활고가 있었겠거늘, 본인이 맡은 반급의 친구들을 끝까지 품어주고 가르쳐주고, 한번 또 한번 보내주고, 그 마음을 이제 조금씩, 그러나 더 깊게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썩 오래전에 그분들이 이미 가르쳐줬는지도 모른다. ‘반주임’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 책임에 대해서, 역할에 대해서, 한계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받아서 간직하고 있는 그 기억과 가르침들을 되새기며 오늘도 열심히 자기의 색상을 만들어가려 한다. 그렇게 쉼없이 찾아가는 동안, 그분들에게 괜찮은 학생으로, 현재 맡고 있는 친구들에게 무람없는 선배 같은 반주임으로 기억되고 싶다.    올해는 많은 것들이 ‘구름’ 우에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세상이 평온을 회복할 그날, 지금의 이 흔적들이 비를 통해, 혹은 눈을 통해 우리의 피부에, 마음속에 잔잔히 적셔지기를 기대해본다. 영웅, 평범한 사람, 안타깝게 떠난 사람들, 그리고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된 어떤 사람들이 문득문득 마음을 울리는 요즘이다.    중국조선어방송넷 
4    상해지식청년과 조선족남편의 반세기의 정 댓글:  조회:502  추천:0  2020-05-19
필자(수림제): 하향 51주년에 즈음하여 이 글을 써 평범치 않았던 그때 그 나날들을 기념하련다 1969년 4월 19일, 상해지식청년인 나와 나의 고향친구들은 동북 변강의 연길현에 와 자리를 잡았다. 힘들고 아름다왔던 그 행복한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속에 생생하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하향 51주년에 즈음하여 이 글을 써 평범치 않았던 그때 그 나날들을 기념하련다. 1969년 7월 상해지식청년 수림제는 ‘무쇠 처녀’전투대를 이끌고 세린하저수지 시공에 참가했다.(좌1 수림제) 우리의 혼인은 남들과는 달랐다. 나와 류정윤은 만난 그날부터 모든 사람들의 강렬한 반대를 받았다. 원인은 아주 간단했다. 나는 상해지식청년이고 그는 토배기 농민이고 나는 한족이고 그는 조선족이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혼인은 연길현 세린하판에서 큰 풍파를 일으켰다. 그의 부모님들은 외부의 강렬한 영향을 받아 이 혼사를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나섰다. 그는 여섯 형제자매중 맏이다. 조선족의 풍속습관에서 맏아들은 가정의 모든 중임을 짊어져야 한다. 하기에 며느리를 고르는 것은 가정의 운명과 관계되는 일이였다. 허나 나에게는 조선족며느리로 될 조건이 하나도 없었다. 조선말도 모르고 살림 할 줄 몰랐으며 밭일 할 줄도 몰랐다. 그와의 결혼은 그야말로 허황한 꿈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압력과 부모님들의 반복적인 반대로 류정윤은 그만 앓아눕게 되였다. 공산당원이 어찌 지식청년과 련애를 할 수 있나? 집형편이 이렇게 어려운데 이런 계집애를 데려왔다가는 언젠가는 달아날 것이 뻔하다. 이런 저런 소문에 견디다 못해 그는 단식했다. 그는 단식으로 부모님들에게 항의했다. 얼마 안지나 그는 크게 앓았고 그 바람에 부모님들은 더럭 겁이 났다. 듣자 하니, 그때 시어머님은 모든 친척들을 모아놓고 이 혼사를 어떻게 하겠는가를 의논했단다. 결국 친척들도 할 수 없이 이 혼사를 인정했고 시어머님은 집체호에 와서 나를 찾아 말했다. “우리는 네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후에 우리 집의 가난한 생활에 네가 견뎌내지 못할가봐 그런거다. 만약 네가 상해로 돌아간다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하겠나? 그리고 우리 집안의 큰며느리를 하려면 네가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짊어지겠느냐 ? 네가 우리 조건에 부합되지는 않으나 아들의 뜻이 이러하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나더러 이튿날 아들을 가서 만나 보라고 했다. 풍파가 지난 뒤 처음으로 정윤과 만났을 때 나의 마음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수로 복잡했다. 그래 우리의 만남이 잘못된 만남인가? 아니면 연분일가? 그는 우리가 서로 부부로 되지 못하면 나더러 자기의 동생으로 되여달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사랑은 순결했고 진실했다. 이 사랑을 위해 나는 길림공업대학으로 갈 기회를 포기했고 시내에 들어가 일할 기회도 포기했고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도 포기했으며 눈앞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변의 가난한 산골에 남았다. 그것은 이 사랑을 지키기 위한 것이였고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시집간 그날부터 나는 꼭 좋은 며느리로 되리라 작심했다. 나는 조선말을 알아들어야 했고 조선말을 할 수 있어야만 했다. 나는 낮이면 그들의 대화를 한어로 번역해서 기록했고 저녁이면 2메터 길이에 1메터 너비의 침대에 누워 종이로 벽을 바른 작은 방에서 신문지로 도배한 천정을 바라보며 낮에 적어놓았던 조선말을 암기했다. 근 일년이라는 시간을 애써 공부했더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말은 자기의 특색을 갖고 있었다. 로인, 어린이에 대해 한어로는 같은 말이나 조선말로는 말하는 방법이 여러가지였다. 언어를 배우면서 나는 많은 웃음거리를 만들었다. 시부모님과 많은 불경스러운 말을 했으나 사후에 그들은 모두 리해를 해주었다. 나는 자신의 총명과 나날이 향상하겠다는 결심으로 언어의 관문을 넘어섰다. 나는 지금 조선말로 회의를 사회할 수 도 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조선족의 며느리로서 밥 짓는 이 관문을 꼭 넘어서야 했다. 그때 나는 너무 두려웠다. 부엌에는 세개의 크고 작은 검은 가마가 줄느런히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났다. 시어머님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자기와 함께 밥을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 어려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고비를 넘겼는지 모르겠다. 조선족은 또 하나의 범절이 있는데 바로 아침식사를 다 준비하고는 반드시 두개의 밥상을 차려야 했다. 하나는 남자들 밥상이고 다른 하나는 녀자들의 밥상이다. 언젠가 손님이 왔는데 나는 기쁜 나머지 정윤의 옆에 가서 앉았다. 이를 본 시누이가 말했다. “올케는 어찌 자기 앉을 자리를 몰라요? 지금 어디에 가서 앉았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았으나 끝내는 참고 녀자들의 상에 돌아와 앉았다. 조선족은 또 한가지 습관이 있는데 다 만든 음식은 꼭 먼저 남자들 상에 놓아야 한다. 하여 그 시대에서 가마솥안의 제일 우층의 이밥은 시아버님과 남편 등 남자들이 먹었고 밑층의 옥수수 누룽지는 나와 시어머님이 먹었다. 그 시절 나는 시어머님의 지도하에 조선족의 여러가지 음식 료리법을 배워내 소위 말하는 진짜 조선족 아줌마로 되였다. 1973년 봄, 연길현 룡정 세린하공사 세린하 5대에서 나는 남편네 35평방메터되는 초가집앞에서 가족사진을 남겼다. 이 가정에서 나는 인내와 순종을 배웠다. 나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최고 지시’로 삼았다. 우리 집은 나까지 식구 아홉명이서 35평방메터 되는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모든 가족에게 다 이불이 있는 것은 아니였다. 료리를 하든 국을 하든 기름을 넣지 않는다. 기름을 살 수 도 없었다. 매일이다싶이 된장에 된장이였다. 어떤 때는 소금 살 몇십전도 없어 돈을 꿔서 사야 했다. 이런 모든 것을 나는 다 겪어내야 했다. 그때 나는 상해 부모들이 나에게 보낸 돈을 모두 이 가정에 썼으나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은 내가 이 가정을 선택했기 때문이였다. 어느 하루, 시어머니가 나를 찾아 말했다. 이전에 자기는 닭사양을 하면 닭이 죽고 돼지를 기르면 돼지가 죽어 부업수입이 없었고 배당금(分红)도 량식값을 제하기에 타지 못했단다. 그러면서 며칠뒤 동불사에 장날이 있는데 나보고 시아버님과 같이 가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님이 나더러 내가 좋아하는 씨암퇘지를 사오라고 했다고 정윤에게 알렸다. 남편은 동의했다. 그날은 4월의 어느 한 장날이였다. 나는 아침 일찍 시아버님의 소수레에 앉아 동불사로 향했다. 어쩐지 나는 그날 무척 기뻤다. 아주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아버님은 나더러 장마당에 나온 모든 돼지들을 돌아보게 했고 나는 그중에서 35원 주고 검고 큰 씨암퇘지를 샀다. 집에 돌아오자 시동생과 시누이가 돼지우리를 돌며 보고 또 보더니 돼지가 왜 이리 못생겼느냐고 했다. 온통 주름투성이인 돼지얼굴을 보며 나보고 돼지 고를줄 모른다고 놀려주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수십리 길을 오가며 돼지를 사왔는데 이렇게 놀려대니 나는 기분이 언짢았다. 하지만 나는 꾹 참고 꼭 돼지를 잘 키워내리라 작심했다. 그땐 돼지 기르는데 사료가 없었다. 모두들 산에 가서 풀을 캐다가 먹여야 했다. 나는 매일 산에 올라가 야채를 캐서는 마대에 메고 내려오면서 알심들여 돼지를 길렀다. 매일 아침 일어나 처음으로 하는 일이 바로 닭과 오리에게 먹이를 주고 돼지죽을 먹이는 것이다. 이 또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다. 닭들이 먹이를 빼앗아 먹는 것을 보노라면 나는 너무 재미있어 내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모두 잊군 했다. 곱지 않은 그 주름투성이 돼지가 우리 집에 온 뒤 우리 집 운명이 바뀌여졌다. 그놈은 해마다 두 배씩 새끼를 낳았는데 번마다 12마리 내지 15마리씩 낳았다. 처음에 25근에서 30근되는 새끼 돼지들은 15원 내지 25원에 팔 수 있었다. 이는 가난한 집안으로 말하면 재부가 아닐 수 없었다. 예닐곱근 되는 수탉이 그때는 4원 50전에 팔렸으니 말이다. 번마다 장에 갔다 돌아 올 때면 나는 나 절로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때로부터 시어머님은 우리 집의 모든 돈을 나더러 관리하게 했다. 시부모님도 모두 나한테서 돈을 타갔다. 이 역시 조선족 풍속의 하나다. 큰 며느리가 가사를 관리하고 살림을 주관한다. 시동생, 시누이가 시집 장가를 가기전까지 그때는 아주 가난했으나 우리 집은 모두가 한마음이였다. 나는 자신의 노력으로 고되고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경에 적응하면서 이 가정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여주었고 그것으로 이 가족의 인정을 받았다. 남편 정윤은 여섯명의 형제 자매중에서 맏이다. 그이와 그의 형제 자매들은 지금까지도 화목하다. 막내 녀동생은 그이와 17살 차이가 난다. 하여 그들은 형님이며 오빠인 그이를 아버님벌로 대한다. 정윤은 나와 형제 자매들에게 모든 일에서 옳거니 그르거니 하면서 쟁론하지 말고 모두 자기부터 문제를 찾아보라고 당부하군 했다. 이 또한 가훈이라고 할수 있었다. 나의 큰 시누이는 남편이 집을 떠나면서 8살, 6살과 4살배기 아이들을 남겨놓았다. 둘째 시누이는 남편이 병으로 돌아가면서 8살과 6살 나는 아이를 남겼다. 그들은 모두 좋은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시집도 우리 집보다도 가난했다. 그때 나는 벌써 세 아이의 엄마로 되였다. 우리 집에 속하지 않았던 아이 다섯명이 한꺼번에 더 생겼다. 이는 우리 가정에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 가정의 살림을 맡은 나는 정윤의 얼굴을 보고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결정을 내렸다. 나는 시어머님과 로투구에 둘째 시누이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다. 그때는 뻐스가 없어 모두 걸어가야만 했다. 이튿날 아침일찍 나는 20리를 걸어서 세린하에서 동불사로 갔다. 시어머님은 원래 나를 가지 말라고 했다. 길이 너무 멀어 내가 걷지 못할가봐 걱정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걸어서 동불사까지 갔다. 맙소사, 동불사에서 로투구까지 아직 십여리 길이 남았다. 어떻게 갈가? 나는 세린하와 동불사 길목에서 로투구로 향하는 화물차를 얻어 타고 가려 했다. 차량은 한대 두대 지나갔으나 누구도 세워주지 않았다. 나는 애가 날대로 났다. 로투구로 가는 차를 불러달라고 하늘에 대고 빌어보기도 했다. 나는 정말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느 차가 나의 앞에 와 서주기를 바라면서 계속하여 손을 흔들었다. 갑자기 돌을 실은 차가 나의 앞에 와서 멈춰섰다. 희망이 보였다. 운전기사는 나를 로투구 철도 옆에 있는 마을까지 데려다주었고 나는 쉽게 둘째 시누이네 집을 찾았다. 나는 그녀의 처지를 정말 동정했다. 남편 없는 녀자가 어찌 홀로 농촌에서 생활하고 농사를 짓겠는가? 나는 정윤과 시부모님과 토론도 하지 않고 그날로 둘째 시누이네 일가를 데려와 시부모네 집에서 같이 살게 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모순이 생기기 마련, 모녀 사이도 매 한가지였다. 둘째 시누이는 엄마가 자기 애들을 원래 이 가정에 속하지 않은 애들이라며 다른 눈으로 본다고 여겨 말다툼의 씨앗으로 되였다. 그러자 시어머님은 매섭게 나에게 말한다. “너는 왜 내 동의도 없이 제 마음대로 그들을 데려 와서 집안이 부산해지게 만드냐?” 맙소사, 내가 잘못 했나? 시어머님과 딸의 불화로 시어머님은 늘 나에게 화를 냈다. 어느 하루, 나는 시어머님과 말했다. “어머님 딸은 나보다 어머님이 더 사랑하고 아낄겁니다. 맛 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딸이지 내가 아니잖아요. 이건 현실이에요. 내가 시누이를 어머님과 함께 있으라 한 것은 딸에 대한 사랑이 어머님이 나보다 엄청 더 크기 때문이예요.” 그뒤로 모녀 관계는 아주 좋아졌다. 외부모 가정에서 자란 두 시누이네 자식들은 모두 출세했고 지금은 미국, 일본과 한국에서 살고 있다. 다들 유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어 나는 시름이 놓인다. 살아가면서 부부사이에는 모순이 생기기 마련이다. 절대적으로 순탄한 부부가 없다. 어느 여름날 밤, 갑자기 누군가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그때 우린 자고 있었다. 정윤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사람이 없었다. 다시 문을 닫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뚝뚝뚝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련속 세번이나 정윤이가 문을 열어보았으나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무서워 이불속에 숨었다. 누구야? 야밤중에 와서 문을 두드려? 그림자도 소리도 없이. 뭐하는 짓이야? 정윤은 문을 닫은 뒤 큰소리로 나보고 일어나라고 했다. 나는 그가 그토록 성내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나보고 말했다. 문 두드린 사람이 누구야? 너는 꼭 알거야, 빨리 그 사람을 대라. 나는 무섭고도 놀랐다. 누군지 내가 어찌 알랴? 의도가 무엇일가? 나는 울면서 정윤에게 말했다. “오랜 세월동안 당신을 위해 나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토록 어려웠던 나날에도 우리의 감정은 그렇게 확고했다. 당신이 평생 가난했지만 나는 당신의 인품을 보고 살아왔다. 그런데 도리여 나를 믿지 못하고 그 사람이 누군지 대라고?” 나는 엄청난 억울함을 당했지만 어떻게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정윤은 화김에 뒤방 창문 유리를 발로 찼다. 발에서 피가 흘렀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려 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이튿날 점심, 내가 시어머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게 되였는데 시어머님이 물었다. “눈이 왜 그렇게 부었느냐? 어데 아프냐 ?” 나는 울면서 시어머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어제 야밤에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온 저녁 내내 싸웠어요. 정윤은 내가 바람났다고 의심하며 화김에 유리창을 박살냈어요.” 시어머님도 그 사람이 누굴가 하고 이상해 했다. 점심에 시아버님이 밭에서 돌아왔다. 시어머님은 어제 저녁 누군가가 아들집에 와서 몇번이고 문을 두드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아들 며느리가 온 밤 싸웠다고 시아버님께 말했다. 시아버님의 대답은 우리 모든 사람들을 놀라 펄쩍 뛰게 만들었다. 시아버님이 우물쭈물 말했다. “바로 나야, 내가 술을 마시고 세번 문을 두드렸어요, 손자를 보고 싶어서 말이야.” 남아선호사상의 조선족 시아버님이 얼마나 손자를 아끼시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는 야밤삼경에 문을 두드렸다고 우리가 뭐라 할가봐 번마다 문을 두드리고는 우리 집 뒤마당의 옥수수밭에 숨어서 우리가 찾지를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뒤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을 호되게 닦아세웠다. 그러나 나는 시아버님의 마음을 리해했다. 그리고 정윤이도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보아냈다. 리해와 순종은 가장 좋은 약이였다. 아들이 여섯살때 가족사진 낮에 일하는 외에도 밤이면 마을사람들을 도와 옷이며 모자며 앞치마를 가공해 수입을 늘여서는 살그머니 돈을 저금했다. 시부모님 환갑 되는 해에 그 돈으로 비단이불 한채를 마련하여 시아버님 환갑 선물로 드렸다. 환갑날에 며느리가 마련해준 비단이불을 덮어보는 것이 그때 많은 로인들의 념원이였다. 물론 시아버님의 념원이기도 했다. 조선족으로 말하면 이는 가족의 영광이였다. 나는 시부모님을 35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벽돌집으로 이사시켰고 그들로 하여금 천륜지락을 누리게 했다. 시어머님은 어느 한번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취재를 받으며 이렇게 기자에게 말했다. “미옥이와 같은 며느리는 하늘 아래 하나뿐이라오. 우리는 정말 행복하오.” 할머니는 어디 가나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자랑한다. 나는 그의 혈연없는 딸로 되였다. 시부모님 환갑잔치에서 큰절을 올린다. 나와 정윤의 사랑은 순결하고 진실하다. 사랑에는 계선이 없다. 진실만 있다면 기적은 반드시 있게 된다. 우리는 서로 보완하며 쉽게 이룰 수 없는 이 가정을 영위해왔다. 모순속에서 인내를 선택하고 론쟁속에서 순종을 선택했다. 나는 자신의 행동으로 그와 그의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수림제(寿林娣)며 상해 미옥이다. 이 이름은 빈하중농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나 또한 시간으로 증명했다. 나는 조선족의 큰며느리가 되기에 손색없고 이 대가족의 큰 살림군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는 것을. 정윤은 자식으로서 효도하고, 아버지로서 자애롭고, 남편으로서 사랑을 주고, 인간으로서 관용을 베풀고. 자신에게 엄격하며 착실하게 일하고 청백하게 행동하여 나와 아들딸들에게 건강한 가정문화를 만들어주었고 화목하고 청렴한 가풍을 형성시켰다. 나의 마음속에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정신적 재산이다. 살아가면서 나는 진정으로 녀강자로 되였고 ‘민족단결모범’, ‘선진사업일군’으로 되였다. 나의 우수한 세 아들딸들은 사회를 위해 공헌을 하고 있다. 나는 그때 이 가정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본 대로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수림제(寿林娣) 편역: 길림신문 최승호
3    스파티필름의 도전 댓글:  조회:405  추천:0  2020-05-12
수필   스파티필름의 도전         (연길)연서     돌돌 말린 하얀 꽃송이가 파릇파릇한 잎사귀 사이로 솟구쳐 고개를 내민다. 청초하고 우아한 자태로 베란다의 정원을 아름답게 아우르고 있었다. 몇년 동안 푸른 잎만 무성해서 꽃을 피우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지만, 그래도 겉흙이 마르면 듬뿍 물을 주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전은 작열하는 태양처럼 강렬했다. 급기야 따스한 해빛 세례를 받으며 수줍게 움추렸던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반듯한 자태는 견정해보이기까지 했다.    마침내 성공이다. 그동안 어두운 흙속에서 얼마나 많은 용솟음을 시도했을가. 겨울 내내 삭막하던 베란다에서 이제 막 꽃대를 올리며 아름답게 피여난 스파티필름은 함초롬히 여유로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더없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한송의 꽃을 피우는게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시도 끝에 얻을수 있었던 보귀한 성공이다.    진한 초록색 잎과 뽀얀 하얀 꽃의 조화가 주는 싱그러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순간 도전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과연 나는 그동안 어떤 도전을 해왔던가? 그리하여 삶의 당당한 주인공이라고 할수 있나. 뒤돌아보면 자신만의 길을 찾아 헤매느라 갈팡질팡하며 살아온 듯 싶다. 명예로운 삶을 소유하고자 아등바등 애를 쓴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좋은 직장, 빠른 승급, 높은 월급을 위해 치렬하게 살아왔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숭고한 리상을 위한 도전은 뒤로하고 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충만된 어깨가 무겁기만 했다.    딸애를 가슴에 품은채 엄마란 이름으로 마주한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 하나의 희생으로 완벽한 세상을 만날수 있는 것이 못되였다. 매순간 책임감과 강박감사이에서 맴돌고 있었다.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강박에 몰아넣고 있고 그래도 불안감이 엄습하면 다시 자신을 다독이며 행진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를 위한 도전은 결코 록록치 않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목숨줄에 위협을 가한채 랭혹한 현실을 맴돌고 있다. 나락으로 떨어진 내게 한송이 스파티필름꽃의 거침없는 도전은 희망의 꽃으로 다가왔다.    도전앞에서 식물인 꽃도 인간과 흡사하다. 한떨기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며 줄기며 쓰디쓴 인내의 고달픔을 견뎌야 했다. 모든 식물이 생명을 다해 꽃을 피우고 꽃을 통해 최고의 매력을 발산한다. 심지어 꽃이 피여있는 동안은 뿌리와 줄기와 잎도 꽃을 위해 진력을 바치며 희생한다. 나 역시, 딸애를 온전히 지키고자 나의 삶은 땅속 깊숙히 묻어두었다. 소중한 시간들을 한가한 취미생활에 할애할 여유도 없었고, 수북히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겨를조차 없이 바삐 돌아쳤다. 오로지 딸애를 보다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시도 쉴틈이 없었다. 풍요로운 성장환경이 못되여 스스로 딸애를 풍족하게 키우기에 력부족이지만, 그래도 빈틈없이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고저 했다.    다행히 부족한 보살핌에도 딸애는 씩씩한 모습으로 자랐다. 틈틈히 밤을 새가며 여러가지 잡다한 일들을 해오면서 빈곤함을 메우려고 애썼다.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고 딸애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그렇게 다시 일터로 향하고 다시 퇴근하여 딸애를 집에 데리고 오면 하루가 금새 저물어갔다. 어머니 날, 부족한 사랑을 따뜻한 밥으로 대신할 요양으로 이른 새벽 일찌기 부엌에 들어섰다. 순간 식탁에 언뜻 곱게 접은 편지가 보였다. 어둠을 몰아낸 새벽빛에 보이는 것은 ‘엄마 그동안 키워줘서 고마워, 사랑해!’라고 삐뚤삐뚤 써놓은 딸애 필치였다. 그옆에는 노오란 카네이션꽃도 정히 놓여졌다.     평소 표현이 서툰 딸애에게 사랑 고백을 받으니 코마루가 찡해났다. 아마도 어제 학교를 마치고 오던 길에 미리 준비해놓았으리라. 마냥 철부지 같았던 딸애가 이젠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정도로 성큼 성장한 것 같아 대견했다. 딸애의 친근한 표현은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밤샘작업에 빠져있어도 지칠줄 모르는 활력소가 되였다. 무거웠던 시간들은 정처없이 흘러갔다.     딸애의 성악에 대한 새로운 도전은 힘찼다. 처음 시작하면 끝까지 견지하는 아이인지라 성악가수가 꿈인 딸에게 진중한 선택이였으리라. 그렇게 딸애의 힘찬 도전이 시작되였다.    운동대회날,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꼬마가수로 된 모습이 제일 먼저 안겨왔다. 소소한 공연이였지만 실수 한번 없이 풍부한 음성으로 우리 민요를 열창했다. 엄마의 소홀함에 딸애는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 성장하는 법을 터득하였을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부단히 자신을 이기고자 도전하는 자세는 당당하고 용기가 넘쳤다.    딸애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스파티필름가 싱싱하게 자라듯 활기로 넘쳤다. 집에서도 이번 무대를 준비하고자 녀석은 많은 시간을 무던히 련습했다. 딸애의 당찬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떠안고 빙빙 돌고 있는 세상을 바라본다. 나는 한 동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춤하여 자신을 은페시키고 있었다. 실은 차가워 보이는 현실의 벽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차마 그 벽을 정시하지 못하고 생소한 것에 대한 공포감에 휩싸여있었을 뿐이였다. 스파티필름의 화려한 출현과 딸의 용감한 도전이 나의 잠재웠던 열의을 불타오르게 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수놓은 꽃송이의 자태는 싱그럽다. 흙 속에서 내내 머물렀다면 어찌 해빛찬란한 세상을 만날수 있을가. 이제 딸애에게 나의 도전을 보여 줄 차례이다. 움츠렸던 어깨를 쭉 펴고 앞날을 향해 도전의 씨를 뿌려본다. 료녕신문 
2    70년대 그 격동 시절 속 청춘 (현룡운) 댓글:  조회:532  추천:0  2020-05-11
  (1)농민의 공수(工数)     73년도 2월말부터 나와 졸업동기들인 새파란 청년남녀들은 집체호를 구성하고 정식으로 농촌인민공사 생산소대 사원(社员) 으로 되였다. 쉽게 말하면 소위 이라는 감투를 쓴 농촌농민이고 더 나가서 소궁둥이를 두두려야 할 촌민으로 된것다.   옹근 동네에는 한족이란 한집도 없어 성인들은 한어말을 전혀 몰랐고 편지봉투의 한자 주소를 쓸때마다 지식청년들이랍시고 집체호를 찾어오군하는 동네,세개 자연툰에 달랑 대대 사무실에 전화 한 대,그게 유일한 정보망이였던 동네.   혹간 영화를 이동봉사대가 상영할라치면 조선말 이라는 기가 막히게 현장 해설하는 화술가가 있어 전반영화의 모든 남녀로소 배우들의 대사를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 수 우리 조선말로 즉석 배음(配音)해야만이 영화내용을 알어보 는 조선족 마을이였다.    밭갈이 철이 오자 당시로서 시내 공인가족들 집에서는 명절 이라야 맛이나 볼가말가 하는 찰떡을 잔뜩쳐서 밭갈이 소한테 먹이는것을 처음 보았고 소한테 우철을 신기는것도 보았다.    소를 형틀에 묶어 매고 소의 네 발바닥에 철판으로 만든 우철을 박는다.부림소한테 미끄럼 방지용이자 발바닥 보호용 철판을 대는데 쓰는 쇠못을 우철꼭지라고 불렀다. 소한테 신겨주는 구두같은 평면 철신이였다.  촌의 대장간이 소수레와 소우철, 우철꼭지를 뽑는등등 일이 유일한 철공일이였다.   송아지가 어느정도 커서 부림소로 자격을 가지자면 코를 가로 구멍뚫고 꼬뚜레를 꿰야 다.    소의 코을 꿰매고 수레나 발구를 끌기 위한 전 단계 련습인 송아지의 목을 틔운다면서 발구에 석마같은 무거운 걸 싣고 련 며칠간 "전문훈련"을 받어야 부림소,일군소로 승급하여 고삐를 끌고 다니게 된다.   송아지의 부림소로 승격이나 학생이 청년농민으로 어른이 되는 과정과 똑같은 것 같았다.  어찌보면 우리는 송아지의 부림소에로 진화과정처럼 목을 틔 우고 코를 꿰거나 손발에 철판은 안박아도 장알이 박혀야 농군 이 될 것이라고 지방 청년형님들이 충고삼어 롱담조로 "너네도 저 쇄지 (송아지)들처럼 고생해야지" 한다.   당시에는 소가 제1생산력이였기에 "애비없이는 살어도 소 없이는 못산다" 하는 시대, 그래서 생산대의 최고건물이 소사 양간 -- 우사(牛舍)였다. 전례없던시기인지라 거의 매달마다 터져나오는 정치구호와 계급투쟁만 선동하던 여러 매체들의 사설(社论)과 상급회의 정신이요, 무슨 동원 이요하는 등등 회의가 거의 매일 있던 시절이다.  생산소대의 제일 큰 건물인 우사칸에 회의실용으로 붙여지은 회의실이 집합장소이자 활동실이였다.하루의 고된 전간로동에 지칠대로 지쳤지만 정치활동에 빠지면 안되였다.  일에 지친 소들은 우사 량편에 서렬대로 줄지어 비스듬히 누워 서 그 퉁방울 눈을 꺼벅거리면서 한가하게 새김질을 하고 있고 농군들은 또 정치를 해야 하는 저녁이다. 소들은 정치가 필요없 고 여물만 잘 먹이면 된다. 사람은 정치가 꼭 필요했다.   하향지식청년이 시골농촌에서 단련 받으면서 로동도 잘하고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여야 그 표현에 따라 당지 “빈하중농” 사원들과 간부들의 공동평가와 추천을 받아야만이 농촌에서 할 수 있었다.   지루한 회의 후엔 또 라고 하는 로동공수평의를 하는 로동평가회의가 있었다. 산서성 석양현의 대채대대의 발명 이라 해서 이라 하였는데 우리는 이라 고도 하였다. 얼굴도 붉힐 필요없이 대충대충 평하자는 뜻.     농촌의 생산로동이라는 것은 일년내내 거의 한가지 일로 고정 된 작업이란게 없었다. 춘하추동에 밭고랑과 씨름하고 자연과의 박투에 고정된 일이라곤 없다만 그러한 여러종류의 일에 대한 평가만은 꼭 매일해서 그 공수(工数)만은 각자 기입해야 한다.  도시공인들은 고정된 기술직종에 따른 고정작업분야가 있는데 이런면에서 보면 농민들이 로력현장에 대한 적응력이 공인들 보다는 더 강하다고 내가 공장직장 생활한 후에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당시에는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것 같다.  그때 이란 영화에서 한 농장원에 일년에 600공 을 벌었다는 뚱뚱한 녀자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지역에서도 좀 뚱뚱하고 인물이 차하지만 일을 뚝심있게 하는 녀자들을 가르켜  라고 불렀다.  땡 볕쬐이는 삼복철,사래긴 밭에서 하루동안 고된 김매기를 하 고서도 또 밭머리에 둘러 앉아서 하루로동 평공을 작업조별로 해야한다.  로동태도, 숙련정도, 적극성 등등을 가지고 서로 평비를 하는데 정말로 골치가 아팠다. 그 평비에 근거하여 본인이 자기공수는 자기가 기록했다가 생산대 기공원이라는 가 따로 있어 매달 기공부를 서로 맞추어서 루락이 없도록 해야 한다.  년말에가서 생산대 일년 총수입을 합계한 후, 일년 내의 전 생산대 남녀로소의 총공수를 합계하고 나누면 한 공수의 값이다.  분홍(分红)이라는 일년분배 잔치 전에 일년 왕래명세를 공개 해서 공제한다.  되놀이,개추렴에서 마셨던 술값도 싹싹 적어야 한다. 그걸 가르 켜, 혹은 라고도 했다. 농민들은 일요일라는게 없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라야 자동 휴일이여서 힘들 때면 비가 오길 얼마나 고대했던가. 지식청년의 선진일군 추천표준은 일도 잘해 공수도 잘 벌고 정치활동에서도 적극적이여야 했었다. 일년가서 년말에야만 “년봉”형식인 현금을 받는 시골에서 받 는 공수종류에는 일공(하루일 공수),계건제공수,탈리공수 혹은 반탈리공수,출장공수,의무로동공수,단독작업공수 등등 여러가지 명목이 있었다.(탈리-- 집체로동을 떠난다는 말) 청춘시절 6년을 그런 공수벌이를 하였었다.야들야들한 잔뼈를 굳히는 작업이였다.  년간 300공내지 400공을 벌면 갑급이요, 200~300공은 을급, 100~ 200공이라면 병급으로 된다. 3, 4년정도 농사일을 하고 나중에 겨릿소를 몰고 밭갈이 가대 기를 잡고(집탑) 이라쨔쨔 하면서 밭갈이나 후치질,엎어갈이* (*감자밭 후치질 정도의 일종) 정도는 해야 진짜농군으로 된다. 그 정도의 일을 다 할수 있는 농군은300~400공을 받을수 있는 농군이다. 300~ 40공을 버는 총각들은 장가가기 좋은 대상 들이였다. 우리 지방의 말로는 "명주바지에 답싸리"붙듯 처녀 들의 청혼이 든단다. 그땐 당뇨병이란 용어도 없었고 고혈압이니 저혈압이니 3고 니하는 용어도 없었고 심지어 근시안경이나 돋보기를 끼는 로인 도 극히 적었다. 한공수에 따른 가치를 공치라고 하였는데 공치가 높은 생산 대나 지역이 잘 사는 동네였다. 기본상 공치가 최대의 정치가 아니였던가 생각한다.  나는 힘든 일에 청년들 대장노릇 하다보니 년간 300공 아래 는 받은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식 청년이라서 약혼,청혼은 금지 구역이였다. 지금 같으면 안 그럴텐데. . .   (2)  지식청년의 고민   그때는 "계급투쟁을 기본으로,혁명을 틀어쥐고생산을 촉진한다 " 는 등등의 정치구호가 항상 귀등을 때릴 정도로 많았는데 처음 농촌에 내려가서 결심 발표도 여러번 하긴 하였는데 제일 큰 자아고민은 "본인은 한평생 농촌에 뿌리박고 혁명을 하겠 나이다" 라고 지극히 극단적인 선서문을 써서 올려야만 했고 여러가지 회의에서도 이러루 한 태도표시 한 후 고민이 깊었다.  한 두해도 아니고 한 평생을 농촌에서 농민으로서 소궁둥이만 두드려야 한다는 그 정도 결심을 해야 뭔가 진보적인 지식청년 으로 락인이 찍히는데.   한 두해 지나면서 깊은 고민만 고여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덕화 공사의 당위 김서기(덕화공사의 최고령도)님이 우리 대대 에 시찰차로 왔다가 려관도 없는 동네라 그런대로 잠자리가 편 한 우리 집체호에 오셨다가 나의 침실에서 투숙하시게 되였다.  그때 당시의 우리 눈에는 공사당위서기는 "태양"같이 높은 존재였다.    매일마다 이리저리 보내면서 일을 시키는 생산대 대장, 그 위에 대대주임이나 대대 당서기님, 또 그 윗분이 아닌가, 현, 시장 아래가 공사서기인데.   잠자리에 누워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의 부친과 친분 이 있었기에 용기내여 벌떡 일어나서 물어본 말이있다.  "김서기님, 농촌에 영원히 뿌리박고 혁명하겠다구 했는데 그런 우리같은 적극분자는 정말 한뉘 농촌에서 남아 농사일만 해야 하구 군대도, 학교두, 공인으로도 못감둥?"  "오, 네가 그런게 고민인 모양이구나", 높은 간부라서 인차 내말 뜻을 낌새를 챈것 같었다. "야, 그래 농촌에 단련내려와서 발전하겠다는 늠들이 그 정도의 결심발표는 해야 조직에서도 저 늠이 결심이 괜찮다고 인정하구 밀어줄게 아니야.그게 조직의 의무야, 그렇다구 앞길이 창창한 놈들을 전부 이 농촌에 뿌리박게 하구 어데두 못가게 하는 정책 은 없어.    전쟁판에서도 결사대가 다 죽어버리라는게 아니고 그런 정신 으로 임하라는 뜻이 아니겠어, 다 죽으면 전투는 누가 하구. . . "  아하, 그런 뜻이였구나, 피끓어 번져지는 내 가슴에 와닿는 가장, 가장 깊은 훈시, 눈앞이 훤해졌고 머리에 부담이 훅 날려 갔다.  그 이튿날 아침, 식사후 어깨를 펴고 김서기님을 모시고 대대 전간에 이리저리 모시고 다녔다. 전야를 둘러보시는 김서기님이 그렇게 자상하고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개인의 전도와 리상이 당시 정치풍도에 어울리지 못하고 언행 이 불일치하지 않는가 하는 깊은 우려에 빠진 젊은이의 머리속 고민을 하루밤새 대화로 훨훨 풀러 주셨다. 꽉 막힌 장기(象棋) 의 수를 신의 한 훈수로 풀어주듯이. 그때 그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조언해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내 인생의 첫 정치적 고민을 풀어준 첫 은인이였다. 썩 몇 년지난 후, 내가 화룡에서 자동차정비회사 사장할 때 이미 현급간부로 계신 그 분을 우연한 장소에서 딱 한번 만나 인사드리고 한잔 올리면서“김서기님,그때 그 말씀이 정말고마 웠습니다”하니 “다, 정치가 문제야, 펀펀이 공부할 놈들을 시골 에 내쫓고, 니도 잘 성장해줘 고맙다, 이제부터 잘 해봐, 뿌리는 어디에 가도 박고 살어야 산다, 뿌리가 마르면 생물이 죽지. 옳 지?” 하시면서 내 등을 다독여주시던 하늘나라에 가신 그 분이 정말 그립다.  그리고 고마웠던 분이시다.그때 그시절 정치적 기후에 정치 적인 솔직한 멘토(mentor)가 희소한 세월에 젊은 나한테는 첫 멘토였다.   (3)   일등 이라? 1975년 마가을, 일년에 한 번씩 진행하는 화룡현덕화공사,  지금의 남평鎭 운동대회는 두만강가 옆 남평 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말이 公社운동대회였지 분위기는 지금의 우리로 말하면 올림 픽경기 못지 않는 체육행사였다. 11개 大隊(지금의 村)의 시골 운동 건장들이 치고, 박고, 결투를 진행하는 경기대회였다. 내가 하향내려간 룡연대대는 운동실력이 강하고 농사도 잘되 고 돈이 많은 부촌인지라 연길, 화룡등 연변을 훝어가면서 운동 특기선수를 영입하여 집체호에 끌어왔다. 마치 지금의 이적 선수를 영입하듯이……. 3일간 운동대회와 문예경연도 하는데 마지막 날 오후는 축구 결승결기가 펼쳐졌다. 결승경기날, 가을비는 내리고 해는 저물고 분위기는 살벌한 룡연대대와 남평대대간 축구결승전은 두 마리 황소 싸움같었다. 농촌 운동대회는 언제나 점잖게 끝을 본적이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전반전에 비긴 두 팀, 후반전에 패널킥 시비로 대판 싸움이 벌어졌는데 변심(邊審)이란 자가 오프사이드(offside)(旗)를 쳐들 었는데 주심(主審)은 변심이 살짝 들었다 급히 내리운 절충적인 모호한 동작을 보질 못하고 그냥 경기를 진행하다 보니 결국 꼴로 판정이 난 판.  전반전에도 상대편 핸들링(handling)을 불지 않은지라 경기장 은 서로 주심과 으렁으렁하는데.  룡연과 남평은 운동회 력사적으로 앙숙인지라 또 싸움판에 시비소리에 거기에 각 大隊 대대장(지금의 촌장)들이 가세하게 되여 그야말로 말릴수록 더 아우성이 터지는 운동장이였다. 남평이라는 곳은 공사 소재지로서 텃세가 좀 있었다. 결국 심판이라는 중학교 체육선생이 욕설과 주먹이 오가는 야유속에 호르래기 던지고 강둑을 따라 달아나자 심판대행이 들어왔는데두 량팀은 불복으로 으르렁. (원래 심판대행은 불가)  찬가을비는 내리고,해는지고,나중에 절대권세자인 주석단(主席 團)의 주임,서기어른들의 결재(決裁)로 운동대회질서 파괴罪로 두 팀 다 2등이라는 불명예를 가지는것으로 운동회는 막을 내리고 서로 손사래를 쳐가면서 명년에 다시보쟈 하고 으르렁 거리고서는 우리 룡연팀은 무한궤도 뜨락또르를 전용 운수기처 럼 타고 흥분한 상태에서 툴툴거리면서 30리 귀촌길에 올랐다. 대대당(大隊黨)서기들도 서로 주먹 휘두르며 야단치다가 결국 거룩한 공사 당서기의 질책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면 그때 세월은 一等이던 2等이던 3等이던 전부 똑같은 거울(鏡子50CM* 1M정도)에다 榮獲 1975년 德化公社 運動大會 축구 一, 二, 三等 이라고 뼁끼 (페인트)칠을 하고는 금박(金薄)가루를 뿌려 하사하면 끝이였다.   당시 민병련장(民兵連長)이자 인솔자인 나는 운동선수들을 다독여 뜨락또르에 태워 마을로 오는데 우리 팀의 중앙방어수로 유명한 박 아무개란 자가 이번 대회에 받은 狀章인 거울을 부둥 켜 안고 싱글벙글 하는것이였다. “너 임마, 비기구서도 무슨 좋은 일이라구 싱글벙글이야” “야, 그래두 상장을 봐, 一等 이잖어…하하하” 하느님 맙시사, 이 자식이 글쎄 둘 二 字의 가로금 하나를 저꺽 손칼로 긁어버렸다. 둘二가 하나 一 로 변한게다. 마을로 돌아가면 개선장군들처럼 대대 사무실에 번듯히 걸어 야 할 거울, 또 뒤풀이 행사때 정중히 대대 간부어른들한테 “본팀은 죽울 내기로 싸웠지만 2등의 영예만을 가져왔습니다” 하고 상납해야 하는데 글쎄 글자 획하나 가로채 빼서 일등으로 둔갑한 저 거울 상장을 어히하리요, 뼁끼도 없고 금박도 없는데 다시 더 써넣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원래는 공동2등인데 저눔 자식이 가로금 한 획 빼먹었소이다 할 수도 없고, 운동대회서 난리소동 소문은 이미 날대루 다 난 판국인데…….   더 기막힌것은 공사지도부 모함이라는 중죄론까지 나온다는데 당시 총인솔자인 내가 그 한劃때문에 덤터기를 쓴 판국이였다. 영문 모르는 일부 대대 간부님들은 송아지까지 잡아놓구 기다 리던 차 내가 상장을 바치자 하시는 말씀 ”그래 잘했다 축구야 당연히 우리 룡연 대대가 일등이지…….   그런게 몇 일후에 그 어르신들이 공사마을 (남평촌)출장 갔다와서 나를 다잡어 부르더니 “너네 임마들아, 무슨 판이야… 남평대대(공사마을소재지)사무실에 가보니 거기두 축구 一等라고 번듯히 걸려있더라니까?? 후에 알고 보니 남평대대의 웬 불복자 하향지식청년이라는 늠들이 역시 둘二에서 한劃을 빼낸것. 제길할, 公社當書記님, 진작에 그럼 倂列 一等이라고 하시지.    1等字를 만드는 기교는 그 후날부터는 누구의 묘안인지 冠軍, 亞軍, 季軍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뺄 劃이 없었다. 壹等, 第一名 優勝팀,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올림픽에서 나오는데 그때 그 시절엔 금, 은, 동 귀하였지. . ㅎㅎ    (4)손시계 임대 시계란? 손 시계, 사발 시계(탁상시계)벽 걸이시계, 탑 시계, 전자 시계, 회중시계 등등 여러 가지가 많다. 거기에다 날짜 나오는 시계, 라이터 시계. . . . . . . .  약속을 지키는데도 시계, 일 하는데도 시계, 밥 먹는데도 시계,잠 자는데도 시계… 하여간 시계의 공능은 지금 시대에 와서는 여러가지 기능이 있다. 그런데 예전에는(70년대에는) “올 해 죽게 벌어 시계를 사야지”, “저 총각 시계를 찼다(있다)”, “그 집에 시계가 있다”, “시계 있는 집”, “결혼 부조에 벽시계가 덩그러니” …  “시계를 찬 걸루 보아서는 똑똑한 것 같다”   시계 없는 가정에서 시계 있는 집에 코흘리개를 시켜서는 "야, 아무개네 집에 가서 지금 몇 시인가를 물어보구 오너라" 하면 " 이집 시계 몇 십둥?" 하고 물어 올 때가 많았다. (자기네는 시계 도 없으면서?)    1974년 양력설(원단)이 지나서 내가 하향지식청년으로 처음 년말 소득분배총결을 맞었다. 년말 분홍이라고 용어를 썼다.  그때, 농촌 생산대 분홍(수익분배)라면 굉장히 복잡하고 재미도 있었다. 매년 일년 수익분배를 하고 현금 분배 할 때면 끝나고 돼지나 소를 잡고 집집의 인원수에 따라 육류 분배를 하는데는 저울이 아니라 기지치기*를 하였다. (*싸리나무 꼬챙이에 고기를 적절 하게 뼉다구랑 함께 꿰쳐 나누는 원시적 육류분배 계량 단위)  온 동네가 축제의 분위기로 들쑥 거리고 공급판매합작사 (지금 의 매점)문지방돌이는 불이 날 지경이다. 농촌에 내려간 첫 해는 국가의 식량을 타먹게 되였다. 그리고 농촌 안치비(安家落戶(安置費)라는게 국가에서 주었기에 첫 해만 120원씩 지원하여 주는 “우대 정책”이 있었다. 그러니깐 첫 해에는 생산대 측과는 왕래(거래 발생)가 거의 없어 일만 잘하 면 목돈을 쥘 수 있었다. 그것도 좋은 고장에 가야 그렇구… --지금 젊은이들을 다시 한번 한 해에 인민페120원을 꿍져 주고 농촌에 가서 농사를 시켜보면 어떤 진풍경들이 연출 될가 한다.   생산대 별로 공치(工値)를 계산하다보니 자연히 경쟁도 심하 였다. 대략 계산방법은 전체 생산대 모든 남녀로소 사원들의 일한 공수(工數)로 전부 수입을 제하고 다음 공적금으로 이듬해 쓸 생산비용을 떼내고 보조금 같은걸 떼낸후 한 工値 얼마 라는게 나오는데 1974년 우리 생산대는 한 工値가 2원90전 이나 되여 전 화룡현에서 최고였다고 할수 있었다. 당시 어떤 시골에서는 하루 工値가 한장 우표값인 8전도 안되는 고장도 있었다.   딸 부자 집들은 음주파티 참가 往來가 적어 타는 돈이 좀 많고 잔 식솔이 많은 세대주들이거나 지병으로 환자가 있는 집은 비용을 공제하고 나면 별로 탈 돈은 없었다. 참 보기가 궁색하였다. 생산대 왕래 내역서를 보면 그 내용이 다 적혀 있다. 하여간 그 해 나는 2월에 내려간 후로 열심히 시키는 일만 하고 신체가 그 고장 말대루라면 “무릎에 피가 한 동이씩 고인놈 들인지라” 좋아서 거의 만출근하다싶이 열심히 일하고 나니 전 집체호 16명중 거의 최고수입을 올리게 되였다. 년말에 400여원이란 거금을 현금으로 타게 되였다. 물론 이듬 해 먹을 자기 식량값, 감자, 배추, 무우 같은 분배하는 채소값 이랑, 기름 값은 제하고서였다. 1973년의 인민페 480원이라면 시내 일반 살림집 한, 두채 를 살수 있는 자금이였고 그때 우리 동네 중학교 교장의 월급 이 45 원였다. 순수입으로 거의 일년 교장월급을 타게 된것 이였다. 그런 거금을 나는 난생 처음으로 쥐여 보았고 그 해 양력설에 화룡에 계시는 아버지한테 한 푼도 안남기고 전부 인편에 보내 드렸다. 이 큰 아들이 번 돈이랍시고. 그런데 아버님은 평생 이 맏아들이 처음 억척스레 벌어보낸 돈인지라 고민중에 글쎄 180원이나 주고 나한테 일본제 세이꼬 (精工牌)손목시계를 덜렁 사서 보내주시는게 아니겠는가? 혹여 이 아들한테 품위를 심어 주시는라 그랬는지 몰라도 전 화룡현에 해마다 두 개정도만 년말이면 귀품으로 내려 오는 백화점 일본제 손목시계 구입표(당시는 표가 있어야 구입 가능) 를 지인통해 얻었다고 한다. 나는 시계라는것을 그때 처음 손목에 차고 다니였는데 그 일 본제 세이꼬 시계 때문에 많은 일화를 만들었다. 생산대장은 일 안배를 할 때면 한 무리 일군들에는 반드시 시계를 찬 사람을 한 명씩 특파하여 시간 알림이로 고정안배를 하였다.   보통 전간에 가서 일을 할 때면 배고파나면 점심이요, 해가 서산에 넘어가면 저녁이였다. 한 여름철이면 두만강 건너편 조선 측 공로에서 茂山行으로 올라가는 上向뻐스가 보얀 먼지를 일쿠면서 올라가면 거의 점심 때인지라 배고프거나 힘들 때면 우리네 젊은놈들은 조선쪽 언덕을 눈이 빠지게 서로 목 빼들고 살피다가도 조선측의 뻐스가 올라가면 “에라, 점심먹으러 간다” 고 집체호로 줄행랑을 놓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가을철 잎담배 건조실 일로 빠쁜 와중에 우리 생산대에 총각인 찬길이란 당지 청년이 아침전에 집체호에 날 보자구 찾아왔다. 자기네 집에서 초두부(순두부)를 하였는데 자꾸 가자구 하기에 이상하다 하면서 따라갔다. 나 한테 소수레를 모는 것부터 배워준 소위 빈하중농 청년대표였다.   당시는 중국의 농촌은 계급사회 성분을 획분하여 지주, 부농, 중농, 하중농, 빈농, 고농으로 인간사회의 출신 성분을 분류하여 딱지처럼 붙여놓고 젊은 청년들의 전도도 그것으로 가름하여 로 뽑기도 하였다.   지금말하면 해방 전에 거지처럼 살었거나 빈 털털이나 고농 (顧農)이면 혁명에서 가장 깨끗한 출신이고 잘 사는 지주, 부농 자녀나 그 당사자들은 거의가 혁명대상딱지가 이마에 붙어 있는 것이였다.   그래서 우리같은 하향지식청년은 농촌 빈,하중농(무산계급에 상당)의 재교육을 받으라는것이 모택동 주석님의 지시였다. 말이 빈하중농대표지 빈하중농 자제라 해야겠다. 우리보다 조금 년상이였으나 맨날 “야, 이 빈하중농의 재교육 잘 받어야 해” 하면서 우리를 데리구 일을 하면서 자상히 배워주던 무던한 형 이였다.  항시 헤헤하고 그 힘든 소 외양강 언 소똥 두엄끄기 작업 이던, 언 통나무장작패기 같은 일, 돌을 까고, 목도를 하는 일을 해도 항상 힘이 넘치는지 웃기도 잘하는 하루에 담배 두 세쌈 지을 태우는 왕골초 담배지골인 빈하중농 자제였다. 사람이 진국이였다.   영문도 모르고 형을 따라 따라가서 음식솜씨 좋은 그 형의 전라도 고향인 어머님이 해준 따끈하고 핫들핫들한 초두부에 입쌀에 감자와 기장이 적당히 섞인 밥한 끼 푸짐히 하고 나서야 그 형이 하는 말이 참 머쓱하였다. “야, 룡운아, 내가 사실 말이지, 이건 비밀인데 헤헤, 래일 내가 상화 (우리 아래 동네)로 말 뗄러 간다(선 보러 간다는 뜻), 너 그 손목시계를 좀 빌리렴, 군대 모자와 옷은 저 옆집 군대 갔다온 영호한테서 빌렸다, 단 이건 절대 비밀이야, 알었지?” 그때 제대군인 복장에 데트론 군대모자(的确良帽), 군용혁대를 차면 다 지금의 최고의 행차용 제복이였다. 원래 마음씨 곱고 평소에도 남과는 얼굴 한번 붉힐줄 모르는 위인이 내 한테서 일본제 세이꼬표 손목시계를 림시 임대하려고 초두부(순두부)초대 작전을 어머님과 이틀전부터 짠 것이다. 초두부 먹은 놈이 방법이 없었다. 나 한테서는 가장 귀중한 손목시계를 자의반, 타의반의 손목 에서 벗어 넘겨주면서 한 말이 지금 생각하면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지경이다. “형, 이 시계 내 조만에 (웬간해서는) 누구도 빌려 안주는데 첫째,어디라도 오리우면(긁힌 자리) 나면 안돼요, 다음,세수랑 할 땐 꼭 벗어 놓고서 하고 잘 때면 손수건에 감아서 베개 밑에 잘 감추구 자야 돼요” 등등.  “알었다, 알었서…” 찬길이 형은 옆 집 군대 갔다온 친구의 색바랜 제대 군인의 군관복을 입구서 군모를 빠딱하게 쓰고는 손목시계를 차구서 벙어리 례장받은 것처럼 기뻐하면서 타동네 색시 맞선 행차 출동준비 완료 초두부 두 사발 얻어 먹고 세이꼬 시계를 임대하여 준 셈이다. 귀하디 귀한 내 손시계를 벋어빌려 준 그때 그 순간은 손목이 허전했었다. 저형이 술 먹고 흥분돼서 혹시 잃어 먹기나 하면? 하고 부질 없는 생각두 했고.  아침식사 후 건조실이라고 부르는 당시 농촌의 최고층 건물 에 숱한 일군들이 모여 일하는데 마을 동구를 향해 입이 함박만 해서 찬길이 형이 나오는데 마을 처녀 총각들이 앞다투어 일은 안하구 어딜 가냐 하고 시샘조로 탐문하니 그저 헤헤 할 뿐이 였다. 찬길이 형은 몸이 좀 왜소해서 빌어입은 군복이 좀 컸으나 그래도 좋다구 펄럭이면서 자기 이모를 앞세우고 어깨를 으쓱 거리면서 가는 모습, 왼손 잡이여서 오른쪽 손목에 나한테서 한 손시계를 차고 씩씩하게 다섯 발자국, 열 발자국마다 걷다가도 자꾸 오른손을 휘익 휘둘러 올렸다 다시 내려 시계만 보는 행동을 하면서 우쭐우쭐하고 새 색시사냥 간답시고 가던 그 형의 뒤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동료 처녀총각들은 모두들 의아해서 휘휘한다, ”언제 저 자식 손 시계를 샀지?”…… 갑돌이가 맞선보러 간다니 동네 갑순이,영순이들이 싱숭 생숭 하는 판이요, 여늬 갑돌이들도 둥둥 마음이 떠있는게 분명 했다. 며칠후, 그 형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상화 촌의 매파역을 한 그 형의 이모(원 고향이 상화촌인 약혼 참모)가 와서 하는 말이 더 걸작이다. 생산대 담배 건조실에 숱한 사람들이 일하는데 옛말 거리가 없어 궁금한 판에 그 집 이모가 나왔는데 “찬길이 혼사 어히 됐슈?” “말을 뗐소?” “오호, 그 사돈 될 바깥량반 우리 상화촌에서 호랑인데, 에이 그, 우리 찬길을 보더니 입이 귀에 가붙더라니까.” “사위감이 시계를 찬 걸 보니 꽤나 똑똑하겠다고 그러던데 아이고, 호호, 잔치는 금년 부농(분홍)하문 하자구 하잽둥. 새기(색시)두 시계를 이제 찰게 꾸마…. 그 집두 잘 사는데… 호 호호. ” 결국을 시간을 맞추는게, 알리는게 목적인 시계를 찬 사람이 시계때문에 성깔머리가 호랑이 같다는 장인될 사람한테서  “똑똑해, 똑똑해 허허, 우리사위 될사람,  일본제 세이꼬 시계를 찬 걸보니 똑똑해, 허허”하면서 걸직한 막걸이 대접하더란다.  게다가 동네방네 50리 이내엔 어디도 없는 일본제 세이꼬 아닌가…. 그 때 상화촌은 정치는 대단히 잘 하는 동네였는데 룡연에 비해서는 구차했다. 아마도 그런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이 없었을 가능성 때문에 찬길 형의 혼사도 잘 된게 아닌가 하고.   물론 그 형은 후날 마음 좋은 상화색시와 결혼해서 잘 살구 애들도 인제 다 커서 장가간지도 오라단다. 하기야 그 때문에 내 시계는 찬길 형의 결혼 잔치날, 삼일 사돈인사때까지도 사돈 들 눈치 때문에 또 임대하여 드려야 했다. 전기도 없고 라디오도 없는 골연으로 감자 캐러 갈 때도 난 그 시계 때문 차출되여 오지로 파견되였다. 그 후 학교에서 교직에 있을 때도 내 시계가 제일 명표라서 사도존엄(師徒尊嚴)정신이 무지하게 강한 교장님도 가끔 내 손목시계를 빌어 차고 피식 웃으며서 행차할 때도 있었다. 그 땐 아갸들 손목에도 잉크로 손시계를 그려 줄 때도 있었다. 지금 애기들 손목에 손시계를 그려주면 젊은 엄마들이 뭐라 할가? 하여간 흘러간 세월에 옛말도 많지만 시계, 자전거,라디오, TV, 재봉침, 전기밥솥, 전화기, 냉장고, 휴대전화기, 컴퓨터 등 가전 제품들 때문에 우리 생활의 일화들이 많은것만 사실이 였다. 이게 40여년전에 내가 내려가 땅을 뚜지던 덕화룡연 골안 에서 있었던 시계의 일화이다. 하긴 요즘 그런 시계도 없어졌다, 실시간으로 언제 어디서나 시간을 알수 있으니 몇 천불 주고 소장용으로 로렌스 시계 같을 걸 찬 사람이 어찌 보면 덜 똑똑 해 보일 때도 있다. 저마다 스마트 모바일(손전화)를 다 차고 다니는데 전부 똑똑 해진 세월이 아닌것 같아 고개를 개우뚱하고 가끔 생각 한다. 연변일보
1    울고 넘는 박달재(궁금이) 댓글:  조회:543  추천:0  2020-04-29
난 작사가들이 정말 존경스럽고 부럽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는 불후의 명곡들은 곡도 곡이겠지만 더욱이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그 가치가 더 빛난다. 한때 후배들을 따라가겠다고 한국 아이돌의 이름도 외우고 심지어 그룹의 성원이 몇명인지도 애써 기억하며 발악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최고봉일 때였으니 한때 파릇했던 그들도 이제 다 30을 넘겼다. 후배들은 치고 올라오고 연예인의 생명인 피부도 나이가 들면서 옛날 같지 않고 격한 댄스도 이제 소화하기 버거워지는 안타까운 나이가 온다.       아무리 시대를 따라가려 해도 노래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전에 부르던 노래만 계속 부르고 새노래는 배울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걸 어느 시점에 깨닫게 되였다. 노래는 우리 웃세대들의 “눈물젖은 두만강”  “나그네 설움”  “칠갑산”에 이어 우리 금방 아래 세대의 “바꿔”  “반”  “머니”까지는 그런대로 아래우로 련결이 되는데 그 뒤로는 노래를 하는지 글을 읽는지 알길이 없는 힙합에 이르기까지 아예 범접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포기 단계에 이른다.        전에 라지오를 들으며 노래가사를 받아적어서 배우던 때가 원시사회 같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노래하며 살면은 젊어진다오” 이런 노래를 수없이 불렀던 세대들도 이제 노래 가사가 무색하게 중후한 나이로 자리잡았다.  “살구나무”  “달 마중 님 마중”과 같은 노래를 열창하던 청춘도 이제 자식이 당년의 나이가 된 세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명곡 자체는 늙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 불리워도 세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야말로 불후의 명곡이다. 어떤 감정은 나이에 관계없이 영원한 주제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가요무대로 널리 알려진 김동건 아나운서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 노래는 사랑 이별 눈물이 없으면 가사가 완성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노래 가사만 봤을 때 작사가들은 사랑에서 고수들이다.  “그 겨울의 찻집”이란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     아 ~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생화도 아니고 다 말라버린 꽃, 그것마저 꽂혀있는 게 아니고 대충 걸려 있는 창가에 앉아서 커피나 맥주도 아닌 외로움을 마시는 그림은 울적함의 극치다. 그러니 허구픈 웃음만 나오고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이게 다 “내 사랑 그대” 때문이다.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적어도 창가에 앉아 있는 주인공으로서는 실련이든 숨겨진 감정이든 일방적인 사랑이든 상대방에 대한 정이나 미련이 아직 남아 있을 때의 눈물이다. 어찌됐든 일말의 희망이나 정이라도 붙어 있는 애절한 사랑의 여운을 추억으로라도 되새길 수 있다는데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감정이다.        그런데 “배반의 계절”이라는 노래 가사는 아주 실망적인 비련의 운명을 담았다.       〖그 어느날 우연히 널 보았어 내 친구집 앞에 서 있는 널     너 나한테 했던 말 또 하겠지 영원히 너만을 사랑한다고     저 하늘에 너를 기도해 다시는 사랑할 수 없기를〗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기의 친구를 선택했을 때 전 남친도 증오스럽지만 친구로부터 몰려오는 배신감 또한 황당하고 슬프고 억울하다. 결과적으로 헤여졌다는 결론은 마찬가지지만 리별의 리유에 따라 상처가 다르다. 배반의 리유가 하필이면 내 친한 친구였다는 걸 알았을 때 그것도 모르고 그 사이 함께 어울려 놀러도 다니고 했을 건데 기가 막힌다. 그리고 그 사이 나한테 했던 온갖 사랑의 서약을 친구한테도 똑같이 할 것이라는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흐른다. 오죽했으면 다시는 사랑할 수 없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까지 할 심정일가.       이렇게 배반한 련인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를 갈며 복수의 서슬 푸른 칼을 품고 있는가 하면 스스로 고배를 마시며 이미 떠나간 사랑을 잊지 못하는 아쉬움이 가득찬  사랑도 있다. 리별이후로 항상 자신이 남친한테 빚지고 사는 것 같고 내가 조금이라도 더 잘했더면 이별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자책에 묻혀서 헤여나오지 못한다. “빚”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다들 그랬어 사랑은 사랑으로만 잊혀지고     녀자에겐 지금의 사랑만이 첫사랑인 거라고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하난데 아직 가슴에 남았는데     또 다른 인연이 올수록 네가 더 보고 싶어〗       한 사람을 잊는데는 또 다른 사랑이 최고의 약이라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리별후에도 장시간 깊게 남은 미련이다. 오죽하면 다른 인연이 왔는데도 갈수록 원래 사랑이 더 보고 싶을가. 이 상황에서 “녀자에게는 지금의 사랑만이 첫사랑”이라고 염장을 지르는 근거없는 론리까지 펼친다. 그러니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사랑만 가슴에 남은 녀자에게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녀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그냥 속담으로만 받아들였다가는 어마어마한 고배를 마시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는 수도 있다. “용서 못해”라는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왜 너는 나를 만나서 왜 나를 아프게 하니     모든 걸 주는데 왜 날 울리니     나에게 상처 준 만큼 다 돌려줄거야     악한 여자라고 하지마 용서 못해〗       죽고 못살겠다고 할 때가 있었으니 오로지 그 말만 믿고 모든 걸 다 바쳐서 사랑을 했건만 돌아온 건 실망과 슬픔뿐이다. 그래서 더도덜도 말고 그 사이에 내가 받은 상처 만큼 다 돌려줄테니 악하다고 원망하지 말라는 깊은 한이 여실히 담긴 불타는 복수심을 그렸다.       그런가 하면 서로가 좋은데 여직 이루어지지 못한 애틋한 사랑을 그린 노래도 있으니 “잊지 말아요”란 노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혹시 알고 있나요 뒤돌아서      가슴 쥐고 그댈 보내주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그 사람을 사랑해줘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언젠가는 돌아와줘요〗       사랑하기 때문에 헤여진다는 말 같지 않은 론리도 있다. 어이가 없기는 하지만 분명 사정이 있는 감정도 있으니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더 이상 다가가지 말아야 하고 눈물을 삼키며 보내줘야만 하는 사랑이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한때 사무치게 사랑했던 사람이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언제라도 돌아와달라는 애절한 바람이다.       이쯤 되면 꿈보다 해몽이 많이 길었는데 앳된 련인들의 사랑을 그린 노래를 하나만 더 례를 들면 “잔소리”라는 노래는 쥐면 부서지고 놓으면 날아갈 것 같은 사랑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 뻔한 잔소리     그만하자 그만하자     사랑하기만 해도 시간 없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시름이 놓이지 않고 열에서 스물까지 다 관여하고 싶고 스물에서 서른까지 다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지나친 사랑의 표현이다. 이름하여 잔소리라고 한다. 밤에 늦게 다니지 마라, 술자리에서 남자들을 조심해라,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 상대방 이성이 착각할 행동을 하지 마라...       련인사이에서는 너무 사랑한 나머지 과잉 보호를 하고 관여가 간섭으로 바뀌면서 다툼이라는 게 생긴다. 물론 칼로 물베기로 끝나면 좋겠지만 원래 “너무”라는 단어에는 부정이 맞물려서 따라오는 결론은 과유불급이다.        노래 가사에는 심오한 도리가 많이 담겨졌고 이런저런 배울 점도 많다. 노래 방에서 별 생각없이 부른 노래에서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 워낙 사랑 리별 눈물이 도배를 한 게 노래 가사인지라.        노래하며 살면은 젊어진다오. (중국조선어방송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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