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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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기자 그리고 꽃 댓글:  조회:16424  추천:0  2018-04-18
지난 8일은 기자절이다. 아침에 출근하니 연길시당위에서 보내온 생화묶음이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16년전 도문시 김종수시장이 년말총화대회에서 “오기활기자를 표창할데 대한 도문시정부 문건”을 읽고나서 기공(記功)표창을 하던 날만큼 기쁘고 감사했다. 나는 언저부턴가 기자와 꽃을 대비하며 련상한다. 지난 60년대이다. 그때 우리 마을에 서명준(연변인민방송국)이라는 기자가 사회주의공작대로 왔는데 그는 우리에게 많은 세상사를 흥미진진하게 얘기해 준데서 너무나 인상이 깊었다. 나는 정말 기자기 부러웠다. 그런데 좋은 꿈을 꾼 덕분이라 할가? 서기자를 만나서 꼭 20년 만에 나는 승진의 기회를 포기하고 “연변일보”기자로 입선되였다. 기자는 무엇인가? 기자는 사회의 제1목격자, 공익과 민의를 뒤받침한 “백성의 고발자”, 미움을 사랑으로 이끄는 조애사, “신”의 뜻과 인간 “기원”을 서로 전달해주는 “천사”이다. 바로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지난 80년대에 도문양로단 고만길의 영응사적을 써내 전 성적으로 “뢰봉학습 우수로동자 ㅡ 고만길”을 따라배우는 열조를 일으킬수 있었고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거금을 주고 살수 없다는 미국고추종자(황관)를 산동성에서 기증받아 도문시 향양촌 남새기술원(리명달)한테 보내줘 그의 원을 풀어주었다. 또 내가 기자였기때문에 여라가지 비리를 다스릴수 있었고 기자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기를 당한 룡정 녀성을 다시 출국시킬수 있었다. 또 기자였기 때문에 연변의 “이웃절”을 발기하였다. 기자사업은 나로 하여금 사업 먼저 인간이 되도록 하였다. “참다운 언론인이 되자, 금전과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자. 독자들의 가슴속에 메아리를 치는 글을 쓰며 꿈틀거리는 사건현장에서 십자가의 참된 “천사”로 되겠다. 나는 바다물에서도 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기자사업에서 줄곧 지켜온 맹세였다. 나는 기자를 꽃과 비긴다. 옛날에 하늘의 “신”이 천사를 불러 “지상에서 3가지 아름다음을 보고 돌아오라:고 명했다. 천사는 천상과 손색 없는 아름다운 꽃, 어린아아의 웃음, 어머니의 사랑을 지상의 3가지 아름다움으로 선택하였다. 꽃은 지상과 천상의 “미의 상징”이다. 꽃은 웃어도 소리가 없다. 곷은 묵묵히 향기를 뿜는다. 꽃은 철을 어길줄 모르며 음지와 양지를 탓할줄 모른다. 눈속에서도 탈없이 약속대로 핀다. 아름다운 련꽃은 흙탕에서 피지만 오염을 모른다.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삭막하고 어두울 때 곷을 보면 저도 몰래 부드러운 위로를 받는다. 사색, 사랑, 희망, 용기를 주는 꽃은 영원한 인생의 오아시스이다. 필자는 꽃을 가꾸는 아름다운 마음과 흙을 만지는 소박하고 부지런한 손이 되여 언제 어디서나 오염을 모르는 “련꽃기자”가 되려는 다짐으로 오늘도 이 밤을 설친다. ( “길림신문” 2006.11.21.)
251    [오기활] “이는 제 탓입니다” 댓글:  조회:4439  추천:0  2018-04-13
우리말에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다’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잘되고 좋은 일은 자기가 챙기려 하고 못되고 귀찮은 일은 남에게 미는 것이 상례인상 싶다. 모 우정국 J국장의 이야기다. J는 26살에 우정국에 취직하여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근무년한이 30년이 넘는다.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J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한 일을 끝까지 책임지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였다. J가 중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 공놀이를 하다가 그중 한 친구가 그만 교실 유리창을 깼다. 그런데 그 친구네 집생활이 가난하고 부모들도 ‘제노릇’을 못하다 보니 남들의 축에서 빠지는 처지였다. 친구의 이런 가정형편을 잘 아는 J는 그 친구가 유리값을 물 형편이 못될 것 같아서 주동적으로 선생님을 찾아가 자기가 유리를 깼노라며 그 친구를 대신해 유리값을 내기도 하였다. 그가 우정국에 취직하여 국장으로 있을 때 한 부하직원이 도박에 빠져 가산을 축내자 가정불화가 잦아졌다. 개별적으로 여러번이나 그한테 충고주고 타일렀으나 그는 국장의 교육과 권고를 마이동풍으로 흘려듣다가 결국 도박으로 진 빚을 갚으려고 공금을 빼돌린 착오를 저지르고 해당 처분을 받게 되였다. 이에 J국장은 부하가 착오를 진 것은 자기가 국장책임을 바로하지 못했다며 사직서를 쓰고 스스로 국장직에서 물러났다. 주변을 보면 사업단위나 회사의 임직원들이 자기가 맡은 일을 하다가 알게 모르게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원망이 없이 그 잘못이 자기 때문임을 인정하는지, 그리고 그 당사자의 상관이 부하의 잘못을 자기의 직책범위내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잘못을 감히 자기의 책임이라고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에 있다. 이런 실례가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 모 향의 ‘5.7’(하향지식청년) 책임간부 S가 농전비(農傳非) 문제로 상급 부문으로부터 행정처분을 받게 되였다. 그런데 실제 조작과정을 조사하니 농촌호구를 도시호구로 천이시킨 사람들의 대부분이 C향장의 지시로 한 것이다. 그래서 S가 C를 찾아가서 과정을 말하며 상급 부문에 설명해달라며 ‘도움’을 청했더니 C어른이 푸르뎅뎅해서 “그 때 내가 당신이 할만하면 하라고 했지 정책을 위반하면서 억지로 하라고 했소?”라며 성을 내는 통에 별수없이 S가 고스란히 처분을 받고 직무에서 물러나야 했다. 상관이라면 자기의 부하가 알게 모르게 일단 잘못을 저질렀다면 상관으로서 그 부하를 믿고 “이는 내 탓입니다”며 그 잘못의 책임을 자기의 탓으로 분담하는 상관이 부하를 아낄 줄 아는 존경받고 믿을 만한 상관이라 하겠다. “이는 내 탓입니다”는 처세술을 갖춘 상관은 직업도덕을 갖춘 준비된 상관이며 명지한 상관이라 하겠다. / 길림신문 기고인 오기활
250    리상은 전진의 교량 인생의 희망 댓글:  조회:3921  추천:0  2018-04-10
 삶은 하루하루가 창조의 련속으로 오늘이 결코 어제의 재연일 수 없다. 창조엔 새로운 삶을 향해 전진할수 있는 튼튼한 교량이 준비되여야 한다. 리상은 새로운 삶을 향해 전진하는 교량이고 창조의 주제며 인생의 희망이다. 리상은 높을수록 좋다. 그러나 리상은 손이 닿을수 있는 한계가 되여야지 하늘 높이 떠오르는 고무풍선과 같아서는 안된다. 리상이 현실을 도외시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리상은 현실을 원점으로 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땅 속에 뿌리를 박고 하늘 높이 뻗어가며 지구의 인사를 받으면서 분사한 인공위성에 담긴 인류의 꿈이다. 리상의 실현은 그 리상을 쫓아 끊임없이 달리는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현실을 긍정하되 거기에 머물지 말고 현실의 토대 위에서 래일을 내다보며 달려야 한다. 물은 만인의 생명수이다. 허나 목이 타는 갈증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물의 시원한 참맛을 알지 못한다. 인생을 진지하게 회의하며 인생의 길을 목마르게 탐구하지 않는 자에게는 인생의 진리란 무미건조할 뿐이다. 빛은 있는데 보지 못하고 길이 있는데 찾지 못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 인생은 영원히 허무한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제 19차 전국당대표대회에서 습근평동지는 “리상이 있고 재능이 있으며 책임을 떠메는 청년들이 있어야 나라에 앞날이 있고 민족에 희망이 있다.” “청년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청년이 강하면 나라도 강해진다. 광범한 청년들은 리상과 신념을 확고히 다지고 원대한 뜻을 품고 성실하게 일하며 과감히 시대의 선행자로 되여 중국꿈을 실현하기 위한 생동한 실천속에서 청춘의 나래를 펼치고 인생의 아름다운 장을 엮어나가야 한다.” 고 명시 하였다 이는 새시대 청년들에게 대한 당과 인민의 기탁이고 믿음이다. 이 기탁과 믿음이 모든 청년들에게 분투의 동력이 된다. 중국의 세계적 대문호인 림어당(林語堂)이 꼭 40년 전 6월 19일에 한국 서울 시민회관에서 행한 강연때 한국 청년들에게 부탁한 말이다. “여러분은 지금 비틀즈(영국가수)의 흉내를 내고 로큰롤(50년대 미국서 세계로 퍼진 대중음악)이나 고고춤을 추며 방종한 생활을 할 여유가 없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부지런히 뛰고 노력한 덕분으로 일국의 재상으로 된 것처럼 (례로 말함) 여러분은 커다란 꿈을 가지고 눈앞에 가로 놓인 많은 일들을 극복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눈도 팔지 말고 오직 전진, 전진 또 전진해야 합니다!” 오기활
249    뢰봉은 선생이다 댓글:  조회:4435  추천:0  2018-04-10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 둘에서 하나를 빼면 하나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하나를 알면 둘을 알라”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중 누구가 선생인가?   공자는 “선악으로 분별되는 인생과 삶의 길을 인도하는 사람을 선생이다”며 “세 사람이 함께 간다면 그중에는 반드시 내 선생이 될만한 분이 있게 마련이다”고 하였다.    선생은 무엇이 맞고 무엇은 틀린다를 가르치는 일보다 무엇은 옳고 무엇은 그르다를 가르쳐야 한다. 선생은 사람이 되는 길로 인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그 길로 안내하고 그 길을 걷도록 바란다.   선생은 아는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꼭 실천하기를 바란다.   지난세기 60년대에 모택동주석은 전국인민들에게 “뢰봉을 따라 배우라”고 호소하였다 .   뢰봉은 립장이 견정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그에게는 혁명과 당에 충성하며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바보정신”, 사업에 충성하는 “라사못 정신”, 곤난을 극복하고 뚫고 들어가는 “못정신”이 있었다. 하여 전국인민들은 모주석의 호소를 받들고 뢰봉을 좋은 본보기로 따라 배웠으니 필경 뢰봉은 선생이였다.  근년에 “현대에 학교는 지식을 전댤하고 쌓게 하는 교사(敎舍)나 교수만 있을 뿐 사람을 가르치는 진정한 스승이 없다”는 신조어가 있다.  새롭다는 지식은 낡게 마련이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바른 길은 낡을수 없다. 지식을 가르치는 분은 제자에게 압도당할 여지가 있지만 인생을 가르치는 선생은 압도당할 수 없다.  삶의 모범이 되지 못하는 선생은 이미 선생이 아니다. “선생의 그림자를 밟으면 않된다”는 경언이 있을 정도로 선생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다. 오기활
248    기자생애서 제일 뿌듯했떤 16일 댓글:  조회:4569  추천:0  2017-12-31
27년 전인 1990년은30여 년 기자인생에서 정녕 제일 자랑스럽고 제일 뿌듯했고 제일 바삐 돌아친 나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중국 첫 대형국제운동회 특파기자로 제 11차 북경아세아운동대회는 로 불리던 우리 나라가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41년 만에11억 중국인민이 자기의 땅에서 33억 인구의 아세아주의 를 취지로 처음으로 주최한 대형국제 종합운동경기였다. 제 11차 북경아세아운동대회는 아세아운동회40년 력사에서 규모가 제일 상당한 대회로 37개 국가와 지구의 대표, 운동원이 6578명(운동원 6122명)참가하여 27개 정식경기를 진행한 대형국제운동대회였다. 이 중국의 첫 대형국제운동회에 필자는 특파기자로 물불을 모르고 밤낮이 따로 없이16일간(9. 22ㅡ10.7)이나 죽자살자 뛰여 다녔다. 이 대회에 중국이 636명의 선수를 참가시켜183금, 107은, 51동상을 따내 본 운동대회 제1위를 차지했다. 중국 조선족의 위상을 온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갖고 는 11차 아세아운동대회에 파견된 유일무이한 소수민족지역신문이였다. 이런 신분에 비춰 필자는 운동대회소식기사보다도 중국의 첫 대형국제운동마당에서 우리 조선민족과 중국 조선족의 위상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조선민족이 숨쉬는 기사를 발굴하면서44세 나이에 운동화바닥이 닳아서 구멍이 날 정도로 뛰여 다니며 매번 200부나 되는 를 선수촌과 대회장에 발부하면서 세계속의 조선민족을 만나보았다. 그속에는 중국의 조선족은 물론 조선, 남조선(한국), 재일 조선인, 재미조선인과 본 운동회의 최고 거인선수 리명훈(조선 남자롱구선수 ,23세, 키 2.32)을 만났었다. 그때 선수촌에 입주한 1만 명 촌민의5분의 1이 조선민족이였고 가 선수촌에 배달되는 유일한 조선문신문으로 가장 인기가 높아 번마다 삽시간에 거덜이 났다. 한 남조선(한국)의 동업자는 며 비록 신문을 꾸리는 방침과 방법은 다르겠지만 참고를 하라며 기사 배치며 신문인쇄에 관한 건의까지 제기하였다. 그때 담은 기사의 단락들이다. ㅡ 9월 24일,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 조직위원회와 기금회가 인민대회당에서 조직한 11차 북경아세아운동회 자금모임에 기여가 큰 개인, 단위를 표창하는 대회에 해내외의 인사 1000명이 참가하였는데 그 중에 유일한 중국 조선족으로 리송관이 참가 하였다. ㅡ 왕청현 하마탕뱀술공장에서 생산한 표 뱀술이 선수촌 부근에 자리잡은 북경장백산특산부종합경영부의 인기상품으로 되였다. 선수들은 선수촌에 술을 가지고 들어갈수 없는 규정 때문에 먼저 선불금을 내고 술병에 자기의 이름을 써 놓는 방법으로 뱀술을 차지하고 돌아갈 때 갖는다는 계약까지 맺었다. ㅡ 연변을 벗어나니깐 조선족녀성들의 치마저고리가 얼마나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가를 처음 느꼈다. 개막하는 날인9월 22일 오후 천안문광장에 아름다운 조선족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성8명이 나타나자 많은 해외의 관광객들이 둘러섰는데 그들 속에는 눈물을 짓는 할머니, 함께 아리랑을 부르자는 조선인, 사진을 함께 찍자고 기다리는 향향처녀들과 일본사람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ㅡ길림성매화구시 조선족처녀 김향란이61키로그람급 유도결승전에서 일본선수를 재끼고 1등보좌에 올랐다. ㅡ 남북조선녀자축구경기에서 대방선수가 넘어지면 대방선수를 일어나도록 쫓고 뺏던 뽈까지 포기하고 부추키거나 심지어 안마까지 해주었다. 경기가 끝나니 량측선수들이 손에 손을 잡고 경기장을 돌면서 관중들게 인사를 하자 경기장은 큰 박수소리와 함께 이란 노래소리가 울러 퍼졌다 . 고맙고 기쁘던 날 10월 2일은11억 중국 인민의 자기땅에서 제 11차 아세가경기대회를 맞은 11번째 날로 나의 일생에서 잊을수 없이 고맙고 기쁜날이였다. 오후 2시 40분경, 우리 일행은 분주히 돌아치다 보니 제때에 점심식사를 못하고 려관에서 지친 몸을 달래였다. 문뜩 노크소리가 나더니 들어오라는 소리와 함께 며 한족손님이 50원짜리 현금을 들고 들어왔다. 알고보니 이 분이 우리를 태웠던 택시기사인데 우리가 택시를 탈 때 낸 선불금을 그만 잊고 결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응당 받아야 할 돈이라고 해도 손님이 려관까지 찾아서 를 결산하는 깨끗한 그의 마음에 감복되여 문밖까지 멀리 나와 전송하였다. 오후 3시가 퍽 넘어서야 우리는 천안문광장 전문(前门)부근에 자리한 을 찾았다. 반갑게 인사하던 출납윈이 우리가 자리에 앉자 맥주 두병을 들고 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뜻밖의 대접에 우리는 오늘은 전부 만 생긴다며 기뻐하였다(후에 보니 이 집주인은 당년에 연변서 명망이 높았던 “마씨네 씨름형제”의 셋째였다). 저녁 6시 20분경, 우리는 남자배구경기를 보려고 조양체육관으로 갔다.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꼬리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 경로로는 표를 살수 없다고 판단한 필자는 를 찾아가 기자증을 보이며 입장권을 4장을 사겠다고 하였다. 매표원은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 원래는 인당에 한장만 파는데 특수대우로 4장을 드리겠으니 7시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오후 한시 반부터 줄을 섰다는 료녕, 산동에서 온 손님들이 우리가 조선과 마중한 연변서 왔다니 묘 자리를 양보했다. 이날은 운수가 좋았던지 아니면 우리에게 특별좌석표를 배치했는지 우리는 뜻밖에도 국제재판석의 바로 뒤자리에 앉았는데 우리들의 오른쪽 두 남녀는 재미조선인, 왼쪽은 북경시 조선족리직간부, 뒤쪽은 재일조선족로인들이였다. 북경아세아경기가 세계각지의 우리 민족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던 것이다. 이날 경기에서 진다고 말에 올랐던 중국이 아짜한 격전끝에 3:2로 일본을 재꼈다. 우리는 너무도 흥분된 나머지 경기결속후 한참을 기다려서 중국선수들의 싸인을 받고서야 자리를 떴다. 이날은 여느 때는 손을 들어도 세우지 않던 택시들도 손을 들자 잘 멈춰섰다. 우리는 너무도 고맙고 기뻐서 며 귀로에 올랐다. 여운 1 2 3 그때 통신수단은 전화, 우편, 팩스엿다. 16일간 필자는8편외 문자기사외10여 폭의 사진 기사를 발표하였다. 한번은 경험이 없는 필자가 본사 원고지에 띄여쓰기까지 한 원고를 한 건을(기억에 16페지)팩스로 급히 보냈는데 그때는 팩스비가 비싸다보니 개인돈 140원을 썼다니 편집반공실의 홍춘식부주임이 원고를 띄여쓰지 말고 한 장에 촘촘히 쓰라고 당부하였다. 그때 선수촌에 설치한 컴퓨터를 많은 중국 기자들은 컴푸터를 다를 줄 몰라서 쓰지 않았고 외국 기자들은 자기들이 갖고온 컴퓨터를 쓰기에 는 우수개 말까지 있었다. 10월 21일 지경화(독자)의 글이다. 그때 필자는 선농단운동장에서 처음 만난 왕청하마탕뱀술공장 최석준공장장의 청탁으로 하마탙뱀술공장과 북경모회사와 합작의향 토론에 참석하면서 며칠간 최석준의 책사로 활약 하였다. 그때 필자는 11차 북경아세아경기대회 기금회로부터 라는 영예를 받았고 김성계사장(겸 주필)의 주필상과 영예증서를 수여 받았다. 이 밖에 부언으로 개막식에서 중국방송원들이 을 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한국측에 며 답변하던 중국 대변인의 재치있는 답변도 잊혀지지 않는다 오기활 길림신문 2017,12,29.
247    내가 만들어 가는 운명 댓글:  조회:4485  추천:0  2017-12-17
11월 16일 “길림신문”은 톱기사로 한국 고려대학교 비교문학과 박사과정인 조선족녀성(필명: 小葵-작은 해바라기)의 글 “내 인생의 선택 ‘나 자신이 되고 싶다’ “를 실었다. 글의 주인공은 이국 땅에서 갖은 간난곡절을 겪어내며 결코 포기하지 않은 삶을 곁들며 “나는 나 자신이 되련다. 왜냐면 내가 다른 사람으로 되려 했으나 나중에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너는 바로 너 자신이며 다른 사람에게 운명을 맡기지 말라.’ ”는 삶의 경종으로 글을 마감하였다.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다. 이 할머니는 길을 가다가 갈림길을 만나면 지팡이를 공중에 던져 땅에 떨어지면 지팡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군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갈림길에서 지팡이를 한번 아닌 계속 반복하여 공중에 던졌다. 이에 지나던 사람이 “왜 그럽니까?” 고 물으니 “이 막대기가 계속 오른쪽만 가리키니깐요, 나는 왼쪽으로 가고픈데”고 대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쉽게 풀리는 사람이 있는가면 반대로 일이 꼬이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운명 때문일가? 물론 사람에 따라 얼마는 행운일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자신의 노력에 달린 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부족한 부분을 노력으로 메우고 다가올지 모르는 기회를 잡기 위해 항상 미리 준비해야 한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차례진다. “사람은 있는데 할 일이 없고 할 일은 있는데 사람이 없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삶의 시련을 “작은 해바라기”마냥 굴함 없는 인내와 지혜로 극복할 때 그 운명이 기필코 불행이 아닌 희망(행운)으로 이어진다. “인생의 시작은 태여남이 아닌 만남이고 매사의 헤여짐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 하겠다. 자기에게 차려진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작은 해바라기”의 삶이 돋보인다. 오기활
246    얼굴이 뜨거워 졌다 댓글:  조회:4799  추천:1  2017-12-03
11월 30일 오기활선배와 함께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 출판을 위하여 조양천진 세집에서 밤낮으로 고군분전하는 연변대학 농학원 김수철교수님(94)을 방문하였다. 첫 눈에 안긴 저택대문 어구에 자리한 큰 종이함 “보간상(報刊箱)”, “오늘 새벽 4시까지 글을 쓰다 보니 방금 잠에서 깨여났습니다”며 손님 맞이에 등한했다는 사과말씀, 지금까지 해마다 연변일보, 길림신문 등 신문잡지를 주문한다는 소개, 며칠 전에 900원을 팔아 “연변문학사전집”을 샀다는 자랑…에 실로 젊은이로 얼굴이 뜨거워 났다. 배움의 길은 끌이 없다. 94세 고령에 초심을 잊지 않고 뭉치 돈900 원을 팔아 문화사료전집(全集)을 사놓고 열심이 구독한다는 김교수님의 구지욕에 감동되고 머리가 숙여지며 어쩌면 내고향 산천의 한 줄기 시내물이 계곡을 혜치며 쉼없이 용용히 대해로 내달리는 경관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필자가 얼굴이 뜨거워 진 데는 이런 원인도 있다. 지금은 년말이라 새해의 당보, 당간행물을 주문하라는 상급문건정신에 따라 큰 단위는 만 여원, 작은 단위는 몇 천원씩 당보, 당간행물을 주문한다. 그런데 문제는 참답게 구독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다. 필자가 알아 본데 따르면 령도분들은 시간이 없다는데서, 또 재직 공무원들은 별로 볼 내용이 없다는 데서이다. 그래서 많은 당간행물들이 봉투도 뜯지 않은 채 년말이면 쓰레기 신세로 년 초의 몇 만원어치의 돈이 년 말에 몇 백원의 페물로 외면되여 팔린다. 이런 현상과 현실은 단 마디로 재정랑비이고 지식재충전이 랑비다. 글쎄 공작시간에도 핸드폰에 눈을 떼지 안으면서 신문잡지는 시간이 없고 내용이 없어 안 본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94세 김옹이 2600종에 달하는 “중국 길림성 식물도감” 출판을 위해 지난 2년간 거의 혼자 몸으로 길림성과 길림성과 접근한 몽골지구산천을 다니며 사진을 찍으면서도 신문사와 잡지사를 찾아 다니며 신문잡지를 주문하는데 그에게 시간이 남아 돌아설가? 아니면 “볼 것이 없는” 신문잡지에서 남없는 “보물”을 찾으려고? 김옹의 말씀이다.  “나는 신문잡지에서 칼럼과 수필을 빠짐없이 다 봅니다. 거기에는 인생을 깨우치는 철리가 있으니까요?” 이에 비춰 도문시 법원 최은호법관의 자랑이 생각된다.  “몇 십년간 신문에서 수집한 ‘법률해석’ ‘법률문답’ 자료책이 나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였습니다” 90고령에도 인생의 철리를 찾아 방황하는 김수철교수님을 새 시대 새 삶의 모델로 모시며 뜨거운 얼굴을 식혀본다. 성송권  (필자는 도문시공회주석조리임)
245    “로인교육법” 출두를 고령화사회 급선무로 댓글:  조회:4624  추천:0  2017-11-27
19차 전국당대회보고에서 습근평동지는 “교육사업을 인민들에게 만족을 주는 사업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평생교육을 잘 운영해나가고 학습형사회를 조속히 건설하며 국민자질을 크게 향상시켜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60세 이상이 총인구의 14.9%에 달해 고령화시대에 진입했다고 한다..  전통적인 단명시대에서 로인들이 경험과 년륜으로 사회적으로 젊은들의 존경과 우대를 받았다면 고령화시대는 로인들의 지위와 세대적 차이로 100세 이상 로인들이 인터뷰 대상이나 사회의 혜택을 받는 시대로 되였다.   이에 비춰 현대과학문화의 발전속도가 빛마냥 빨라 지난 1년속도가 과거 10년 속도와 맞먹기에 그에 따른 로인들의 “비참상”이 문제로 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사회학교수는 “60까지 일해온 사람이 할 일이 없는 사람으로 제외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잘못된 일이며 경제학으로 보면 랑비다.”고 하였다. 어느 95세 로인의 일기이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 덕에 65세에 당당히 은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95번째 생일에 얼마나 후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전 65년의 생애는 자랑스럽고 떳떳했지만 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였다. 나는 퇴직 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그냥 덤이다’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이 없이 죽기만을 기다 렸다. 덧없고 희망이 없는 삶... 그런 삶을 무려 30년이나 살았다. 30년은 지금 내 나이로 보면 3분의 1에 해당한 긴 시간이다. 만일 내가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 스스로가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다. 나는 지금 95세지만 정신이 또렷하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 모른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하려 한다. 그 리유는 단 한 가지. 10년 후 맞이 하게 될 105번째 생일날, 95세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실로 100세시대 로인들을 대표한 감동적인 일기라 하겠다. “어려서부터 책 공부를 하면 젊어서 유익하고 젊어서 공부하면 늙어도 쇠하지 않고 늙어서 배우면 죽어서 썩지 않는다.”는 명언이 있다.   미국은 동네마다 로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많은 로인들이 배움의 기회를 갖는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는 배우고 싶어도 배울수 없던 과거와 달리 누구나 마음만 가지면 마음대로 배우수 있고 욕심대로 교육을 받을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고령화 새시대에 “로인교육법” 출두는 로인들의 과학문화의 제고와 함께 로인사회  “비참상”을 해소하는 급선무라고 한다.  연변이  전국의 처음으로 “로인절”을 법(조례)으로 제정했다면 문화민족자치주인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다시 한번 남 먼저 “로인교육법”(조 례)을 출두하자. 필자는 새로운 시대에 정부, 기업, 사회의 후원으로 중소학생과 로인들이 함께 등교하고 함께 공부하는 신형의 학교가 기대된다. 오기활
244    라철룡 19차 전국당대표와 수남촌 댓글:  조회:4068  추천:0  2017-11-26
11월 13일 필자는 중국공산당 제 19차 당대표정신 전달로 팽이 매일 돌아치는 도문시 석현진 수남촌당지부서기(촌주임 겸)라철룡을 만나 대담하였다. “기층대표로 행운스럽게19차 전국당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자신감을 높히고 사업방향을 뚜렷히 하였습니다. 영광스러운 사명감과으로 초심을 명기하고 수남촌 건설을 위해 힘을 다 할 것입니다!” 아직도 흥분된 마음을 걷잡을수 없다며 “무엇부터 말하면 좋을 가요?”며 자신 있게 반문하는 라대표다. “순서가 따로 없이 경청하겠습니다.” 필자는 라철룡의 언보(言步)에 따라 려과 없이 그대로 채록을 올린다. 라대표의  “3가지 제일” ㅡ 가슴이 제일 벅차던 시각은 기층당원으로 전 세계 세인들의 주목속에서 전 국민의 심근을 울리는 자신감에 넘친 습근평총서기의 획기적인 보고를 한자리에서 청취 할 때, 변강 소수민족의 농촌당원을 대표로 새로운 당중앙위원들을 선거(투표) 할 때(라철룡은 대회에서 발급한 전문투표용 만년필을 보이며 흥분조로 투표시각을 회포), 대회가 끝난 후 습근평총서기가 강택민, 호금도 전임 당중앙 총서기와 당과 국가의 원로지도자들을 모시고 우리를 따뜻이 접견할 때였습니다. ㅡ 농민당원대표로 제일 큰 “흥분제”와 “안심환”이 당중앙에서 “향촌진흥전략”을 제기와 함께 “3농”문제의 해결을 당의 전반 사업의 으뜸위치로 하는 것, 제2회 토지도급기한이  차면 동 기한을 또 30년을 연장한다는 것입니다. ㅡ 제일 확고히 신심을 얻은 것이 “문화는 한 나라, 한 민족의 령혼이다. 문화가 륭성해야 국운이 흥하고 문화가 강해져야 민족이 강성해 진다.” “ 문화에 대한 드높은 지신심, 문화의 번영과 흥성을 떠나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룰수 없다”는 습근평총서기의 론설에 비춰 우리 촌 당지부에서 “촌이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촌을 살찌운다.” “문화가 없는 촌은 미래가 없다”고 제정한 발전사로가 정화감을 증명한 것입니다. 새 세대에 더 높이 서서 더 멀리 내다 보면서 습근평 중국특색사회주의 새 사상에 따라 수남촌 건설의 새로울 려정을 열것입니다. “부모 없는 대표단”에 부모사랑을 ㅡ 대회기간에 성당위 책임동지들이 연변대표단에 특별한 관심을 돌렸습니다. 장엄서기의 사업터 변동으로 하여 연변대표단(3명)이 순 조선족기층대표단으로 되였기에 우리가 더욱 스스로 모든 언행을 당과 조직에 책임져야 했습니다. 소수민족의 대표로서 우리는 옷차림을 결코 개인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한복 세벌을 가졌는데 개막식과 페막식 때 어느 옷을 입으면 좋겠는가를 파음초로서기와  장안순비서장한테 물어보고 그분들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내가 유모아로 파음초로단장에게 “연변대표단이 장엄서기의 사업변동으로 ‘엄마 없는 대표단’이 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면에서 더 주의해야 할 것임을 제때에ㅓ 지적해 주십시요”라고 하니 “라대표가 형식을 버리고 구속이 없이 기층에 존재한 문제를 실제적으로잘 반영했다” “라대표의 발언이 향후의 사업에 참조가치가 크다”며 긍정하였습니다(자기의 발언이 대표들의 박수도 받았다면서). 류국중성장도 “연변대표단을 눈여겨 살폈는데 모두 습근평동지의 보고를 열심히 학습하며 적극적 발언 했다”고 표양 하였습니다.. 한번은 내가 혼자서 식사를 하는데 파음초로단장이 나의 어깨를 도닥이며 생활에 불편이 없는가며 물었습니다. 또 한번은 “지난 번에는 정장복장을 하지 않아 사진을 못 찍었는데 오늘 우리 함께 사진을 찍읍시다”묘 기념사진을 찍었답니다. 정신빈곤 탈출이 우선 ㅡ 습근평동지는 “빈곤퇴치난관돌파전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빈곤구제와 함께 빈곤자에게 투지와 지혜를 부여해주는 데 모를 박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빈곤탈출은 “정신빈곤탈출”이 수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찍 부모들이 “가난 구제는 나라(나라님/임금)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며 남의 가난을 돕기란 끝이 없는 일이니 가난을 벗어나려면 스스로 정신을 차리라고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빈곤서 탈출하려면 앉아서 누가 도와줄 것만을 바라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분투해야 합니다. ㅡ19차 당대회 보고는“부강, 민주, 문명, 조화로운 사회주의현대화강국”의 앞에 특히 “아름다움”을 규정어로 하였습니다. 이는 생태문명건설에 대한 당의 중시를 충분하게 증명합니다. 아름다운 중국, 아름다운 가원건설은 인민들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수남촌은 물자원과 림자원이 풍부한 촌입니다. "청산록수가 바로 금산은산이다"는 리념을 확고하게 수립, 실천하여 보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수남촌을 자손후대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줄 것입니다. ㅡ 수남촌 입구에 "문화가 있는 마을에 미래가 있다"는 유표한 표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남촌에 살아있는 봉오동홍색전적지문화기지를 홍색관광기로로 잘 건설하여 홍색관광기지로 하여금 기층 당지부의 당원학습기지와 청소년들의 애국교양기지로 할 것입니다. ㅡ 모두어 말하면 나는 변강, 소수민족, 기층 당조직의 대표로서 책임이 중하고 사명 또한 간고합니다. 수남촌의 향후 발전변화의 여하는 19차 당대표정신체현의 실질적인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매체를 통하여 사회 각 계층, 각 분야의 적극적인 지지와 꾸준한 협력을 간절히 부탁합니다. 제목식으로 읽어 보는 라철룡대표 수남촌은 ,  “전국선진기층당조직”, 중국전통매력촌, 등 영예로 최근에 년 방문관광객이 5천명을 웃돈다. 수남촌의 초속적인 릉곡지변(陵谷之变)은 라철룡(49세)이2010년에 촌세대주를 떠멘 후부터다 라철룡은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동네방네 로인들을 찾아 다니며 툰사, 촌사와  함께  독립군의 발자취를 따라  많은 항일전적지를 탐방하였다. 라철룡은 수남촌 공청단지부서기, 민병련장직을 지냈고 기업을 운영하고 외국을 나들면서 식견을 넓히며 돈을 벌었다.  라철룡은 촌민위원회주임으로 선거 되자 첫 행사로 렬사비 앞에서 “선렬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게 선렬들의 뒤를 이어 기필코 수남촌을 잘살게 건설 할 것입니다”고 맹세, 그 뒤를 이어 민족의 혼과 혁명선구자들을 기리기 위해 마을의 한복판에 이라는 큰 글을 새겨 넋비를 세웠다.. 라철룡은 촌주임을 맡자 외지사람들에게 양도했던 80헥타르의 밭을 몽땅 회수했고 남방서 해보식용균생산 항목을 유치해 전 성에서 규모가 제일 큰 식용균재배기지를 건설하여 수남촌의 효자기업으 로 부상시켰다. 라철룡은 하루에 낡은 집을28채씩 밀어버리는 기백으로 새농촌건설을 다그쳤기에 2011년에 도문시51개 촌에서 새농촌건설속도가 제일 빠른 촌으로 경험을 소개했다.   2014년에 “봉오동반일전투86주년기념하여 수남촌에서 ‘중국 조선족장기 수남초청’ 문화행사를 조직했고 2015년에 한국 ”여천 홍범도장군순국 71주기 추모식 및 학술회의”에 “봉오동전투전승현장대표”로 초청되여 홍범도장군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하였다. 오기활  
243    “대머리비참병”을 떼기까지는 … 댓글:  조회:4065  추천:0  2017-11-23
잠깐 동안 “대머리”를 필제(笔題)로 함은 독자들과 함께 소탈하게 웃어 보고 싶은 외 “대머리” 와 “대머리자식”을 둔 부모들게  “치료비방”을 제공 하려는데 있다.  지금 일본 케이오대학庆应义塾大学) 교수직에 있는 나의 아들은 2000년에 일본류학을 갈 때 머리가 더부룩한 건장한 사나이였다. 그런데 몇 년간 일본서 알바로 박사공부까지 끝내려니 고된로동, 여러가지 압력과 스트레스, 흘여 내리는 동이 땀..에 휴식이 따로 없이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며 밤잠까지 설치다보니 몇 년 사이에 제 자식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대머리”로 변모하였다. 몇 년만에 “대머리아들”을 처음 만난 부모들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하던지…  그래서 멀쩡했던 아들을 대머리로 만든 부모의 죄책감으로 아무튼 대머리 치료에 좋다는 약처방을 만나면 그대로, 제때에 아들한테 보내 주었다. 그런데 생각밖에 아들은 보기좋은 웃음을 지으며 “대머리”로 인하여 기분이 상했거나 기를 죽여 본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여하튼 결혼 후 장모가 사위에게 머리를 심는 미용을 해 주겠다고 나서도 못 들은 척 외면하는 고집통이라며 배풍까지 하더라니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재밌죠?!”표 “대머리 례찬약”을 보내 올 줄이야! 대머리 예찬 1. 존경스런 분들 : 이번 미국 여행 중에 많은 존경스런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갈보리 채플의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공통점은 척 스미스, 그렉 로리, 라울 리즈 목사님 등 모두가 대머리라는 점이다. 그네들은 그냥 재미있게도 헤어 스타일이 같아서 좋았다. 2. 샌디에이고의 탐한 기자 : 샌디에이고에서 자전거를 같이 탄 탐한(Tom Han) 기자도 대머리였다. 같은 두 빛나리가 자전거를 타니 호흡이 잘 맞았다. 인간적으로도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스프를 먹는 중에 탐한 기자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드려 주었다.  "너는 대머리이니 거지는 되지 않겠다. 거지 중에 대머리 봤니..." 둘 서로가 대머리 례찬을 시작했다. 3. 대머리 례찬 : 머리는 카락의 수에 관심을 갖지 말라.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든 것이다. 시저(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도 정복하지 못한 것이 머리카락이다. 시저도 대머리이다. 개를 키운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 가장 똑똑한 개는 귀와 배 부위에 절대 털이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털과 지성은 결코 량립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머리가 가장 존귀하다. 대개 아직까지 분별력이 약한 청년들은 머리카락이 무성하다. 그러나 늙은 지혜자는 머리카락이 없다. 스파르타가 망한 리유는 중간 이후 사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이 머리카락을 손질 하다가 국력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하긴 모국의 녀대통령도 머리치장에 몇 시간씩 허비했다는 탄핵건도 있다 ㅡ 필자) 그리고 전사들의 투구를 보라. 다 대머리 형상이다. 왜? 대머리는 위엄과 권위,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자기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자랑하다가 상수리 나무에 매달려서 죽었다. 대머리는 능력이다. 대머리는 겸손이다. 대머리는 지혜와 지성이다.. 멋진 남자는 빛난다. 남성은 광택이 필요하다.   아들의 끝 말이다. “지금까지 대머리의 자기 위로의 말이었습니다. 재밋쬬?” 아들이 보내온 “재밋죠?”자가 료법이 필자의 “대머리비참병”까지 뚝 뗄 줄이야!   오기활
242    초심을 기억함은 의무이다 댓글:  조회:3937  추천:0  2017-11-23
중국공산당19차 전국당대표대회에서 습근평동지는 전당에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명기하자는 주제교양활동을 전개하여 자각적으로 새시대 당의 력사적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 꾸준히 분투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호소, 계속하여 대회 페막후 7일만에 새 중앙지도자들과 함께 제1차 당대회현장 당기 앞에서 입당선서를 재현하며 동 주제교양활동에 앞장을 섰다. “잊지 말자”는 “꼭 기억하자”이다.  “초심을 잊지 말자”는 “하는 일을 처음 먹은 마음으로 끝까지 하자”로 “룡두사미”(龙头蛇尾)가 아닌 “수미일관”(首尾一貫)을 말한다.   초심은 인생의 방부제며 삶을 식별하는 시금석(試金石)이다.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万人之下)”를 지낸 조선왕조의 문신인 한명회가 73세에 인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 소망이 무엇인가?”는 성종의 물음에 자기의 후사나 자식들의 일에 대한 부탁이 아닌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오니 원컨대 전하께서 끝까지 처음의 시작대로 하소서!” 라는 소망만 남기고 운명을 하였다.   초심은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가르키는 라침판이며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원동력이다.  “초심”을 화제에 올리면 스스로가 학교 입학의 첫 날의 꿈, 첫사랑의 첫 고백, 입당 첫 날의 첫 선서, 취직, 승진 첫 날의 첫 맹세…를 점검하며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인생은 초심, 열심, 뒷심으로 가꾼다.  초심은 모든 일을 시작할 때의 목표와 다짐이고 열심은 일하는 자세이며 뒷심은 포기함이 없이 끝까지 해내는 힘이다. 초심에서 열심이 생기고 열심에서 뒷심이 생긴다. 초심을 기억함은 사업과 인생의 의무이다. 의무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책임에는 수평적 책임과 수직적 책임이 있다. 수평적 책임이란 우리세대가 져야 할 모든 의무를 말하고 수직 적 책임 이란 후세들이 선배들을 계승해야 할 력사적인 의무와 사명을 말 한다. 력사란 사람들이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기억하는 학문이며 기억을 기 초로 시간에 의해 쓰고 이어지는 전설이다. 력사를 잊는(은) 인간과 민족은 미래가 없다.   오기활
241    초심을 기억함은 의무이다 댓글:  조회:4654  추천:0  2017-11-23
중국공산당19차 전국당대표대회에서 습근평동지는 전당에 “초심을 잊지 말고 사명을 명기하자는 주제교양활동을 전개하여 자각적으로 새시대 당의 력사적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 꾸준히 분투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호소, 계속하여 대회 페막후 7일만에 새 중앙지도자들과 함께 제1차 당대회현장 당기 앞에서 입당선서를 재현하며 동 주제교양활동에 앞장을 섰다. “잊지 말자”는 “꼭 기억하자”이다.  “초심을 잊지 말자”는 “하는 일을 처음 먹은 마음으로 끝까지 하자”로 “룡두사미”(龙头蛇尾)가 아닌 “수미일관”(首尾一貫)을 말한다.   초심은 인생의 방부제며 삶을 식별하는 시금석(試金石)이다. “일인지상, 만인지하(一人之上, 万人之下)”를 지낸 조선왕조의 문신인 한명회가 73세에 인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 소망이 무엇인가?”는 성종의 물음에 자기의 후사나 자식들의 일에 대한 부탁이 아닌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오니 원컨대 전하께서 끝까지 처음의 시작대로 하소서!” 라는 소망만 남기고 운명을 하였다.   초심은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가르키는 라침판이며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원동력이다.  “초심”을 화제에 올리면 스스로가 학교 입학의 첫 날의 꿈, 첫사랑의 첫 고백, 입당 첫 날의 첫 선서, 취직, 승진 첫 날의 첫 맹세…를 점검하며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인생은 초심, 열심, 뒷심으로 가꾼다.  초심은 모든 일을 시작할 때의 목표와 다짐이고 열심은 일하는 자세이며 뒷심은 포기함이 없이 끝까지 해내는 힘이다. 초심에서 열심이 생기고 열심에서 뒷심이 생긴다. 초심을 기억함은 사업과 인생의 의무이다. 의무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책임에는 수평적 책임과 수직적 책임이 있다. 수평적 책임이란 우리세대가 져야 할 모든 의무를 말하고 수직 적 책임 이란 후세들이 선배들을 계승해야 할 력사적인 의무와 사명을 말 한다. 력사란 사람들이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기억하는 학문이며 기억을 기 초로 시간에 의해 쓰고 이어지는 전설이다. 력사를 잊는(은) 인간과 민족은 미래가 없다.   오기활
240    벗이란? 댓글:  조회:4443  추천:0  2017-11-22
백 사람을 두루 아는 것보다 속을 다 털어 보일수 있는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는데 그 한 사람을 바로 벗이라고 한다.  벗이란 마음이 서로 통해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벗 “朋”자가 이를 알려준다.  달면 오고 쓰면 가는 것은 리득을 따져 만나고 헤여지는 것이다. 이련 교유는 겉으로만 친하고 속으로는 경쟁을 하거나 시샘을 하는 경우가 거의 태반이다. 일하는 곳이 같아서 서로 만나고 헤여지는 것은 공통의 일로 서로 만나는 경우이다. 이런 만남은 동료의 선을 넘지 못한다. 벗은 서로간에 허물이 없다. 벗은 상대를 사랑하므로 무엇이든 잘되기를 바란다. 만일 벗이 어떤 결함이나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으면 서슴이 없이 솔직하게 충고하고 곁들어 준다. 벗이 아니면 충고를 해주기가 어렵다. 다들 제가 잘났다는 생각으로 사는 세상에서 충고를 하려고 들면 고깝게 듣기가 일쑤이다. 좋은 말을 하고도 감정을 사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수 있다. 남의 일에 관심을 쓸 것이 무어 있느냐며 자기나 잘하라고 핀찬을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벗끼리는 쓴 말을 달갑게 받고 고마워 한다. 서로의 믿음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한 믿음을 함부로 다루어선 안된다. 서로 믿음을 소중히 갈무리하면서 붇돋아 주어야 벗은 란초의 향기마냥 오래 은근해 진다. 현대는 벗이 없는 세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리로우면 서로 벗이 되고 해가 되면 서로 원쑤가 된다면서 말이다.  리익 때문에 벗이 되는 경우는 없다. 서로 마음이 통해야 벗이 된다. 현대인은 고독한 성주(城主)가 되여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서로의 내통을 거부하는 단독자처럼 살아 간다. 그처럼 누구나 벗을 소망하면서도 벗을 사귀지 못하는 것이 무슨 때문일가? 아마도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 버린 탓이 아닐가. 공자는 벗을 사귀는 길을 “충고를 하여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충고를 해도 말을 듣지 않으면 그만 둬라. 지나친 충고를 하다가 도리여 욕을 당하는 경우가 없게 하라.”고 하였고 증자는 “군자는 글로써 벗을 사귀고 벗이 됨으로써 서로의 인덕을 돕고 높인다”고 하였다. 오기활
239    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삼고 오늘을 살라 댓글:  조회:5316  추천:0  2017-11-09
“당신이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지,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이런 물음에 확답할 사람이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루는 것이 보편적인 현실이다. 그런데 연변대학 농학원 식물학박사 김수철(93세)교수는 침대머리에 ‘죽음체험’이란 글을 큼직이 붙여놓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 것처럼 일한다’며 죽음을 맞이한다. 김교수는 정년퇴직 후에 식물학연구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맞이하며 인생 후반전에 멋진 ‘꼴’을 넣고 있다. 김교수는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너무 많아 내가 보충해야지...” 하며 몇년 전부터 자기가 수십년간 수집한26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독본》을 출판할 타산이다. 90고령에 안해를 딸네 집에 보내고 영, 한(汉)문 설명문에 직접 그린 2600폭의 그림을 배합하고도 더 좋은 책을 만들겠다며 지난해부터 거의 혼자몸으로 성내외를 다니며 사진을 찍으며 고군작전을 하고 있다. 올해 그가 성내외에 다니며 찍은 사진만 해도 4만장에 달한다. 지난 10월 27일에 김교수가 들려준 얘기이다. “지난 겨울 어느 날 새벽에 찬바람을 맞고 잠에서 깼지요.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말을 안 들어줘서 약 15분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중풍징조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악을 쓰고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다음 억지로 뒹굴며 보건상자 앞까지 기어가서 준비한 뜸쑥으로 발바닥에 뜸을 떴지요. 한참 지나니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더라구요.” “그 일이 나한테는 죽음체험이 되였지요, 그래서 침대머리에 ‘죽음체험’이란 대자를 써 붙여놓고 래일을 생의 마지막 날로 생각하며 오늘의 일에 열심 합니다.” 죽음은 삶의 가장 큰 상실이 아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가 어떤 것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삶은 기회이고 아름다움이며 놀이이기도 하다. 삶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몫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된다. 독일의 노벨상 수상자 하우프트만은 “매일을 당신의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처럼 살라”고 말했다. ‘오늘은 인생의 최초의 날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고 또 얼마나 많은 계획을 세우며 도전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인생의 최후의 날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삶의 희망과 계획을 이루기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며 매진하겠는가.   길림신문 ( 2017-11-09 ) 길림신문 칼럼리스트 오기활  
238    리광남대좌의 ‘효’ 댓글:  조회:10274  추천:58  2017-11-09
일전에 필자는 리광남대좌(67세)를 만나 ‘효'를 화제로 대담을 하였다. 특수 사정외에 해마다 청명, 추석에 조상 성묘를 한다는 공군대좌의 이번 걸음도 추석성묘를 위해서 였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교육으로 뼈를 굳혔고 민족의 혼을 키웠습니다. 아버지는 늘 ‘남의 물건은 벼짚 한오리라도 집에 가져와서는 안된다’, ‘내 가정 일부터 잘 해야 한다’, ‘가족, 국가, 민족에 효도 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참군하는 것을 부모와 나라에 효도하는 것이라면서 군대는 ‘종합대학’이요, 군대에 가 자기만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다 배울 수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버님을 그리는 공군대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1970년 11월에 제가 입대하자 아버님은 생산대로부터 분배 받은 저의 몫의 1년 량식을 수레에 싣고 애국량으로 바쳤습니다. 돌아오던중 찬바람을 맞고 중풍으로 쓰러졌답니다. 제 한테는 소식을 알리지 않아서 몰랐지요…”, “…중풍으로 3년간 시달리다가 63세에 타계했는데 그때도 저는 아버님 곁에 없었지요… 생전에 부모님께 효도를 못한 것이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남의 물건은 벼짚 한오리도 집에 가져 오면 안된다는 아버님께서 입대한 아들 몫의 량식을 애국량으로 바치다가 쓰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때부터 나는 ‘가족, 국가, 민족에 효도 해야 한다’는 아버님의 부훈(父訓)에 따라 나라에서 맡긴 일을 잘 하는 것으로 하늘 나라에 계시는 아버님께 효도 하리라고 결심하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리광남은 효자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초중 문화수준밖에 안되는 문화기초로 해방군 ‘종합대학’에서 모든 일에 미친듯 배우고 일하며 공군장비고급공정사, 과학기술발명가, 국무원 특수보조향수자,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 전국로력모범 등등의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참군할 때 어머님은 “군대에 갔다 와서 조선말을 안하면 동네에서 너를 ‘덜 된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하기에 40여년간 군생활을 하면서도 우리 말을 잊지 않았고 한족들속에 묻혀 있는 두 자식들도 우리 말을 잘 배우도록 강요한 그다. ‘효’는 부모를 섬기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충’은 ‘효’의 정성으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덕을 근본으로 안으로는 ‘효’를 다하고 밖으로는 ‘충’을 다하는 것이 리광남대좌가 말하는 ‘효’의 실질이라 하겠다. 길림신문 (2017-11-08)       길림신문 칼럼리스트 오기활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베테랑 연구원 뢰의(雷顗)는  “지식인은 직업적 기준과 정신적 기준이라는 두 가지 기준이 있어야 한다. 직업적기준으로는 학자, 작가, 문인, 교수, 예술인 등이 속하고 정신적 기준으로 “독립”적인 것이다. 지식인은 보편적인 정의를 대표해야 하는 외 독립과 비판을 견지해야 한다. “ 고 했다. 일전에 있은 “남희철교수 음악연구 35주년 기념학술회”에서 발언자들이 뢰의의 이한 지식인에 대한 정의에 비춰 남희철교수가 바로 직업적기준과 정신기준이 겸비된 지식인이라고 평하였다. 이날 발언에서 남희철교수는 “이번 모임이 중국조선족음악연구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계기가 되였으면 한다”며 이런 두 가지 주장을 피력하였다. 첫째, 지금까지 이주시기 중국조선족전통음악에 대한 연구는 조선민족전통음악이라는 큰 그늘에 가리워 거의 연구되지 못한 채 방치되였다. 중국조선족음악사연구는 이주시기 전통음악에 대한 연구로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한다. 중국조선족의 이주력사의 상한선을 1620 ㅡ1677년까지의 강제이민시기, 1677 ㅡ 1881년에 이르는 불법월경잠입시기, 1882 ㅡ1910년에 이르는 이민초간(移民招恳)시기, 1911 ㅡ 1920년에 이르는 자유이민시기, 1921 ㅡ 1931년에 이르는 이민제한시기, 1931년 “9.18’사변으로부터 1945년 “8.15”광복에 이르는 강제집단이민시기 등 6개 단계로 나뉜다. 장장 320여년에 달하는 기나긴 이주시기에 중국조선족은 본토로부터 어떤 음악들을 가져왔을가? 그리고 중국이라는 새로운 생활터전에서 어떤 음악(전통음악)들을 창작하였을가? 이와 같은 물음에 중국조선족음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답해야 할 과제이다(남희철 저”중국조선족음악연구”ㅡ 연변인민출판사) 둘째, 진달래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화(州花)이며 연길시 시화이다. 그러므로 화룡에서 “진달래축제”를 조직, 주도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화룡은 화룡만이 갖고 있는 우세로 브랜드를 창출하고 육성해햐 한다. 화룡에는 남들이 없고 또 남들이 본 따지도 못하는 “정효공주묘”를 화룡의 문화유산으로 하고 이 우세를 리용하여 화룡브랜드를 창출육성하여야 한다. 례하면 “정효공주미인선발대”회 등 정효공주와 관련있는 력사와 문화로 홍보하여야 한다. 남희철교수는 “중국조선족의 력사문화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함께 보는 폭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장장 320여년이란 기나긴 이주시기에 중국조선족들이 본토에서 어떤 음악문화를 가져왔을가? 그리고 중국이란 새로운 생활터전에서 어떤 음악(전통음악)문화를 창작하였을가? 중국조선족음악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이런 물음에 해답을 줘야 한다.  중국 조선족들의 유구한 력사문화를 발굴하고 루적된 력사문화를 재현시키는 일 역시 "사회주의문화의 번영흥성을 추진"하는 일이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행보이다. “ 고 주장한다. 오기활  
236    피보다 더 짙은 “물” 댓글:  조회:4933  추천:0  2017-10-29
지난 9월 29일, 연길 백산호텔 신라혼례청에서 범상치 않은 쌍희(双喜)잔치가 하객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다. 이 날의 잔치는 연변범서방프라스틱유한회사 조광훈총경리가 신랑 최성관, 신부 김미영(31)의 혼례식과 이들의 딸애 최형월의 첫돌생일을 위해 마련한 쌍(双)잔치이다.   “조사장이 오늘 마련한 쌍희례는 뜻이 깊고 값진 것으로 정말 범상치 않습니다. 나의 일생에서 처음 봅니다!” 행사가 끝난 후 선임,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지낸 김헌씨가 광훈씨의 두 손을 굳게 잡고 하는 말에 광훈씨가 화답한다.  “지금까지 고아거나 경제가 궁핍한 불우대학생을 100여 명을 도왔는데 책임 있게 좋은 일을 끝까지 할려니 쉽지는 않았습니다.”       피보다 더 짙은 “물” 혼례식에서 신부김미영이 읽은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아버지 어머님에게 올리는 편지”가 모든 하객들의 가슴을 들먹이게 하였다. …이 자리를 빌어 남부럽지 않게 이쁘고 건강하게 나를 키워주시고 나에게 오늘 같이 인생에서 제일 눈부시고 빛나는 무대를 손수 마련해 주신 고마운 그 은정에 더없이 감사한 마음을 담고 또 담아 이 딸이 두분님께 편지를 올립니다.  나는 “피는 물보다 짙다”는 말을 늘 들어 왔지만 아버지 어머니께서 저를 친 자식마냥 아끼고 사랑해주시고 소중히 키워주신 17년이란 세월은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피보다 더 짙은 물도 있구나!)는 현실을 가슴 깊이 느끼도록 하였습니다.   2000년 12월에  “사랑으로 가는 길” 프로 제 7회에 제가 출연된 며칠 후 아버지(조광훈)는 추운 엄동설한도 마다하고 나를 찾아 도문시 5 중에 오셔서 나의 두 손을 꼭 잡아주시며 금방 친아버지까지 잃고 꽁꽁얼어 붙은 저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주던 그 때 그 모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주마등마냥 나의 눈앞을 스쳐 지납니다. 제일 힘들고 제일 어려웠던 그 시기에 아버지와 어머님과의 사랑의 만남은 나한테 생명의 명줄과 큰 희망이 되여 두렵게만 생각해온 어린 고아라는 슬픔속에서 바로 헤쳐 나와 다시금 현실 사회에서 씩씩한  살수 있게 하였습니다.  17년 동안 두 분께서는 저한테 친 자식마냥 맛나는 음식을 해주고 삶의 도리를 깨우쳐 주면서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키워주신 그 사랑 그 은정에 다시 한번 뜨거운 감사를 올립니다. 아버지와 어머님이 항상 나의 튼튼한 뒤심으로 되였기에 내가 항상 밝고 명랑하게 살면서 남부럽지 않게 대학공부까지 무사히 끝낼수 있었고 오늘의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였습니다. 존경하는 아버지와 사랑하는 어머님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수고가 엄청 많으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저한테 주신사랑과 배려를 나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은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앞으로 그 누구보다도 더욱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에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님을 본 받아 가난한 이웃을 돕기에 있는 힘을 다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비록 부모님들의 따뜻한 슬하를 떠나 멀고 먼 바다건너 일본 땅에서 살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자주 찾아 뵐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맘속으로 두 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행운스러운 아버지와 어머님의 딸 미영 올림.  2017년 9월 29일 조광훈은 대학생 “부자”였다. “생활이 곤난한 가정을 돕는 것은 기업인의 사회에 대한 책임으로 정부를 돕는 일이다”고 늘 말하는 조광훈은 지금까지 100여 명의 생활난 가정의 자녀와 고아를 말없이 도와 대학생, 류학생으로 키워 내는것으로 나라와 사회에 기여했다. 2006년 2월 9일, 필자는 조광훈부부가 6명 대학생과 예비대학생 몇 명을 데리고 연길비원회집에서 대학생 황순화의 생일을 위해 마련한 생일파티에 참가하였다. 아래에 그날의 견문을 줄여서 소개한다. 먼저 조광훈이 주제를 말했다. “오늘은 너희들이 한번도 먹어보지 못한 값이 엄청하게 비싼 일본 참치회를 먹는다.  비싼 참회를 먹는 원인의 첫째는 너희들이 먹어보지 못한 비싼 료리를 먹이고 싶고 둘째는 너희들에게 아무리 먹고 싶은 음식이라고 해도 능력(돈)이 있어야만 먹을수 있다는 사실로서 너희들에게 생계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도리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 남편의 말에 안해(리향련)가 부언했다. “우리가 생활에 여유가 있다지만. 그렇다고 큰 부자는 아니다. 남편이 사랑으로 가는 길에 나서는데 안해로서 나도 지지해 나서는 것뿐이다. 우리들의 바람은 너희들의 성공외 다른 것이 따로 없다...” “…” 생일주인 연변대학 황순화학생의 감사말이다. “우리는 한 방울의 피방울도 섞이지 않은 대가정입니다. 나는 이때까지 조회장의 뒤심으로 언제 어디서나 부모가 없고 생활이 궁하다는 위축을 받은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중국농업대학 김미영학생이 말을 이었다. “나는 조회장네 한집식구가 되여 한집에서 설을 같이 쇤지도 7년이 되였습니다. 내가 첫해에 지망했던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해서 너무나 서운해 하는 눈치를 챈 조회장은 나더러 미안해 하지 말라며 지망하는 대학에 가라며 재학을 시킨데서 지난해에 620점 성적으로 중국농업대학에 입학했습니다. “ “조회장은 지금부터 나의 기를 살려준다며 졸업후의 사업자금이라며 나의 이름으로 3만 원이나 저금을 하였답니다...” 뒤따라 김걸(연변과기대), 김미화(길림대학), 렴계화(연변대학), 조명광(무한대학), 미량(예비대학생)이 페부로부터 울리는 감사의 말을 이었다. 조광훈부부는 이들의 학비, 생활비, 교통비를 전담을 하는데. 해마다 7~8만원씩 투자 한단다. 축의금이 없는 잔치 지난해 김미영은 일본서 만난 남자친구(최성관)를 데리고 양부모를 찾아와서 부모들께 사위감을 “고찰”(考核)해 달라고 했다. 조광훈부부는 여러모의 “고찰” 결과 “합격장”을 찍고 올해에 결혼식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결혼식을 하려 온 미영이가딸애까지 엎고 올 줄이야! 너무나도 기뻤다. 조광훈부부는 딸의 결혼식과 손녀의 돌생일을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무척 신경을 쓰다가 손녀의 첫돌 생일날에 딸의 결혼식을 치르기로 아퀴를 지었는데 문제는 쌍희례를 어떤 규모로 하는 것이였다. 간소하게 할려니 미영이가 서러워 할것 같고 그럴듯하게 할려니 돈벌이로  양딸의 일에까지 손님을 청한다”는 여론, “조회장의 초청에 축의금봉투가 두텀해야 한다”는 등사회여론과 하객들이 걱정되였다. 그래서 광훈씨는 “타인의 립장에서 나를 생각하자”는 “조광훈법칙”에 따라 하객의 범위를 동창, 전우, 회사원, 친척, 사회 등 부류로 나누어 “축의금이 없는 잔치”로 여섯상을 차리기로 하고 축의금 없는 잔치 청첩을 발부했다. 광훈씨는 청하는 하객들게 축의금을 안 받는다고 분명히 밝혔으나 그래도 (혹시나…)를 걱정하여 잔치 전에 술상까지 차리고 “핵심인물”들을 불러 반복적인 설명과 해석으로 “축의금이 없는 잔치”를 통과시켰다. 그래서 이날 쌍희례식장에 축의금등기석과 방명록이 없었다. 대신 회사원들을 조직하여 모든 하객들에게 “잔치선물”을 챙겨드리게 하였다. 잔치 후 어느 동창이 조광훈씨에게 보낸 위챗내용이다. “평생 대 희사에 부조 돈 한푼 없이 참가하여 선물까지 받는 잔치를 처음 밨소. 천하에 이런 일이 없을 것이요. 사람들은 영원히 당신의 처사를 잊지 못할 것이요. 당신은 우리 동창의 교오며 방향이요.” 광훈씨는 이번 쌍희례에 친딸의 결혼 때보다도 신경을 더 쓰다보니 부인이 입술이지 터졌더라고 하였다. 조광훈은 소처럼 일하고 정승처럼 돈을 쓰는 “대학생부자”이다.  “‘건강, 돈, 덕’은 나의 인생리념이다.  나는 건강한 몸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 사회에 기여하며 덕을 쌓겠다.”  “사람은 욕심을 버렸을 때 제일 행복하다.  이는 조광훈의 좌우명이다. 오기활
235    연변축구 “龍尾” 아닌 “蛇頭”로 댓글:  조회:4870  추천:0  2017-10-22
필자는 축구에 외항이고 팬도 아닌, 연변축구의 怒와 哀를 글로 쓰는 정도다.    일례로.1998년 갑A경기 때5월 6일과 31일 연변팀의 홈장에서 “검은호르개기”의 수난을 당했을 때 필자는 《연변일보》기자로 “잔디밭 민족기시”란 내용과 사진을6월 2일 등록우편으로 주용기총리에 올렸다(당년 국가축구협회가 연변축구협회에 공개사과를 했음) 오늘도 필자는 연변팀의 성적으로 안타깝게 모대기는 사람들의 “ 연변팀 ”사로”에 도움을 주고자 필을 들었다.    분수(分数)를 삶의 자대라고 한다. 분수란 “어떤 수를 다른 수로 나눈 몫을 분자와 분모로 나타 내는 것”, “분”은 곧 “몫”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팀도 자기가 치켜야 할 분수(자리)가 있다.    필자는 연변팀의 분수를”룡미”가 아닌 “사두”라고 주장한다. 이는 연변팀의 처지, 실력, 연변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 현대축구팀의 강약비교는 정신력만이 아닌 경제력의 비교다.    연변경제의 현실은 자체로 “룡”을 키울수도 없고 거금으로 외적을 사올수도 없다. 하여 연변팀이 계속하여 분에 넘치는“ 룡”마당싸움을 한다면 정부, 코치, 운동원, 축구팬 및 모든 州민들이 한동안은 그냥 “보급(保級)”을 위한 축구마당에서 목을 말이고 속을 태워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연변팀이 분수에 맞는 “뱀” 마당 싸움에서 “사두”를 목적으로 향기가 넘치는 축구마당을 만들자는 주장이다. 력사적으로 봐도 “사두”가 맞다. 길림(연변)팀이 지난 세기에 돋보인 것은 우리 민족의 선천적이고 전통적인 축구기질이 있은 것 외 그 때는 축구를 말하면 대국의 한족들이 “잠든 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국가주석이 축구팬이 되여 “잠에서 깨여난 사자”의 축구강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지난날의 찬송가“조선족이 뽈을 잘 찬다”는 오늘에 “흘러간 노래”로 거의 되고 있다. 분수를 삶의 자대라면 “분수에 넘친다“ “분수를 모른다“ “분수를 지킨다“는 평가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분수에 맞게 그칠 줄 알고(知止) 분수에 맞게 만족을 아는 지족(智足)적 삶이 분수있는 삶이다. 월전에 인터뷰한 50년대 조선족축구명장의 걱정이다. “연변이 경제력이 약한데다가 체력과 속도가 좋은 한족들이 잠에서 깼고 그에 비춰 50년대 주덕해마냥 축구를 사랑하는 지도자가 적은데서 연변축구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한동안의 시간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 오기활 2017-10-22 길림신문 朝闻体育  
234    텔레비 화면 유감1, 2 ,3 댓글:  조회:8565  추천:0  2017-10-21
필자는 연변 텔레비(시, 현 텔레비를 포함)를 보면 이런 유감(遺憾)이 뒤 따른다. 유감 1 화면이 백성을 모셨으면... 가장 가까운 두 가지 례다.  올해 연변의 로인절에 주로령사업위원회에서 조직한 “2017년 연변‘가장 아름다운 년장자(最美长者)”표창이란 기사에서 화면이 주 1 급 지도자를 지낸 로간부들로 거의 주체였다.  지난 “2017 룡정 제 8 회 중국조선족농부절 축제”기사도 화면 주체가 문예연출이나 축제관중들이 아닌 현직 각급지도자와 주 1 급 지도자를 지낸 지도자들의 화면이였다.  스위스 화교가 중국기자와 오간 얘기이다.  “나는 해마다 중국신문과 스위시신문을 함께 주문한다. 어떤 날 중국신문 1 면은 거의 3/2 지면이 관리들의 기사였다. 스위스신문은 국왕이나 총리, 부장들의 활동소식은 거의 없다. 있다면 간단한 ‘성냥갑’소식이 아니면 어느 부장이 탈세를 했다, 국비를 랑비했다는 풍자기사이다”  “중국신문은 관리를 위촌하고 스위스신문은 민생을 다룬다.” 유감 2 우리 말을 안 하는 대표와 주인공들이다 금년 1월의 주 3회(당대표대회, 인대, 정협회의)와 지난10월 11일 ‘전주 민족문화사업회의’뉴스에서 출연한 민족복장을 입고도 우리 말을 안 하는 대표와 수상자들로 기분이 잡쳤다. 자기 민족의 말을 하지 않는 지도자. 대표들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하겠는가?! “이번에 한복을 3벌을 갖고 갑니다. 래일 환송회에서도 우리 말로 발언하겠습니다.” 어제(12일) 만난 19차 당대표 라철룡(도문시 석현진수남촌 당지부서기겸 촌민위원회주임)의 이 말에 민족애에 머리가 숙여진다.  “언어문자를 상실하면 민족정체성도 사라진다.” 북경민족출판사 우빈희선임사장의 말이다. 유감 3 조선족들이 일하는 화면에 한복을 입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필경 평상시에 입는 평복, 일할 때 입는 로동복, 조상(弔喪)떼 입는 상복, 명절 때 입는 례복이 분명하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조직하는 화면을 보면 조선족들이 한복을 입고 과일을 따고 가을울 하는 화면들이 많았다. 이런 화면을 보고 타민족들은 무엇이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우리 조선족들이 거의 모두가 (저것은 형식인데…)하며 뒤여론을 한다.  “중국송장예술사생협회” 정호표(鄭虎彪)부회장이 연길 “정호표풍경사생전” - 《고향정》 전시회 때 하던 말이다. “오랜 준비 끝에 그토록 그리고 싶었던 고향의 풍경을 마음껏 화폭에 담으면서 무한한 행복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민족화를 그리려면 조선족들이 평상시에는 한복을 잘 입지 않기 때문에 늘 민족복장차림을 하는 장(쫭)족들을 찾아 서장으로 갑니다.” 오기활  
233    주정부의 초청을 받은 “북경변호사”강산혁 댓글:  조회:3948  추천:0  2017-10-18
주정부의 초청을 받은 “북경변호사”강산혁 북경 명태(銘泰)변호사사무소 강산혁변호사 지난 9월초순 필자는 연길성보호텔에서 북경 명태(銘泰)변호사사무소 강산혁변호사를 만났다. 강변호사의 이번 연길행차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북경사무처의 초청을 받고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65주년기념 및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단설립 10주년 축제”계렬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주 정부에 올리는 마음의 선물 이번 초청에 감사한 산혁씨는 주 인민정부에 드릴 감사의 선물로 연변투자유치를 선정하고 여러모로 물색한 후 북경합력만성(合力万盛)회사와 연변 체육국의 합작에 가능성을 품고 제1 중매자로 지난 8월 31일에 량가에서 “상견례”까지 올렸다고 한다. “이들의 합작성공여부를 아직은 말하기가 좀 이르지만 아무튼 제가 연변주정부의 초청에 빈손으로 올수 없다는 마음으로 여러모로 노력을 했다는 성의를 인정받으면 만족입니다.” 산혁씨는 연변주정부의 초청에 감사의 말을 전달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이들의 ‘결혼’을 위하여 계속 노력할 것” 이라며 내심을 밝혔다. “전국 우수변호사” 1964년에 흑룡강성 계동현 농민의 아들로 출생한 산혁씨는 고중문을 나서자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군, 퇴역후 선후로 인민경찰, 공무원, 변호사를 지내면서1985년부터 중앙민족학원(대학)에서 재직간부반을 모집할 때 선후로 두 차례나 흑룡강성 장원으로 입학, 두 번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끝내고 북경호적까지 쟁취한 실정에서 귀성하여 흑룡강성 계서시의 제일 젊은 당원간부, 흑룡강성 사법분야에서 직함이 제일 높은 “후비간부”로 발탁되였다. 하자만 산혁씨는1997년에 남들이 그처럼 부러워하는 직업과 직무를 대담히 버리고 1998년에 상경하여 북경사조화(谢朝华)법률사무소에 적을 올렸다. 이하는 북경시 밍타이변호사사무소에서 제공한 강산혁변호사의 간력이다. 강산혁, 중국인민대학경제법전업연구생 학력, 고급변호사, 현임 북경시명태변호사 사무소 변호사, 당지부서기, 북경시 조양구제 13기 정협위윈, 조양구인민정부 법률고문, 전국변호사협회 서부강사단 성원, 청화대학 법학원 련합도사, 국가상무부 투자촉진국 외상고발(投訴)및 투자자문위원회 전문가, 수도법학법률 고급인재, 길림성 사평시인민정부 자문위원회 고문, 중국한국상회 법률고문, 흑룡강성기업회유권(維權)위원회 부주임, 북경자본시장 전문가복무단 성원… 현임(력임) 사회직무; 중국법학회 회원, 제 6ㅡ9기 중화전국변호사협회 외사위원회 위원 등 13개 부문의 위원, 대표, 주임, 리사. 획득한 영예: 전국우수변호사(2011ㅡ2014), 북경시사법국우수변호사당원, 등 15개 분야에서 선진공작자상을 획득. “법률세계” , “중국변호사” 등 국가급 잡지와 “론단”에 20여 편의 중량급 론문을 발표. 강산혁변호사는 국내는 물론 한국, 조선, 대만 등 나라와 지구의 민상(民商)법률봉사로 활약, 최근 년간 국내외대상(부분)의42가지 전형적인 안건을 맡고 원만히 처리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65주년 기념행사에 초청을 받고 2017년 7월 26일 인테넷“중국변호사”는 “소사대애”(小事大愛)란 제목의 3500여자(한자) 편폭으로 “전국우수변호사 강산혁”의 사적을 대서특필하였다. “소사대애”는 이렇게 쓰고 있다. 34년 당령, 26년 변호사 경력을 갖고 있는 강산혁씨가 당과 국가에 충성하고 백성과 사회에 고도로 책임지는 그의 직업리념은 “소사불소”(小事不小), “소중견대”(小中見大). “소사대애”(小事大愛)이다. “소사대애”는 강산혁변호사가 북경시 조양구 인민정부의 법률고문으로 10사회구역에 66870명 주민을 갖고있는 조양구 호가루가도를 도와 파가이주, 시용건설 등 공공사업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고 28세대 빈곤호와 로당원 련계호를 맡고 사랑을 베풀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고태”로 불리는 청백리이다. 특히 한 외상이 “대회장에 당기를 걸지 말자”는 주장을 당장에서 반박하며 “오히려 아주 선명한 위치에 당기를 걸어야 한다”는 강변호사의 정치인생을 소개하였다. 연변조선족들의 법정위탁대리인을 맡고 1998년에 강산혁변호사는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신방국책임자로부터 “연변 조선족농민들이 신소를 왔는데 들어 보니 쉽지 않은 사건으로 강변호사가 와서 법률적으로 해석해 줄수 없겠는가?”는 문의전화를 받고 당장에서 찾아가 조선족농민들을 만나 보았다. 알아 본데 따르면 본 안건은 연변의 206명 농민들이 1996년 3월에 “중국사달(四达)회사(국가로동부관할회사) 연변분사”와 월로임을 700딸라로 로무수출계약을 맺고 매인당4만2000원의 수속비를 내고 출국수속을 끝냈는데도 3년간이나 출국도 못하고 수속비도 돌려 받지 못한 안건이였다. 하여 조선족농민들은 집체 또는 대표를 파견하는 방법으로 여러 지방정부와 법원에 다니며 계속되는 신소를 했는데 지방정부와 지방법원에서는 당년에 이와 류사한 로무수출관련 안건이 많고 게다가 본 안건은 국가로동부와 직접 관계되는 큰 안건이라며 감히 접수를 못하고 법적인 립안도 못한 실정이였다. 본 안건의 자초지종을 세밀히 조사하고 내용을 파악한 강변호사는 직접 연변에 와서 206명 농민을 대면하고 “법률적으로 완전히 해결할수있다”는 립장을 밝혔다. 이에 107명의 농민들은 당장에서 적극 호응해 나섰고 99명의 농민들은 “백성이 정부를 이길수 있을가?”며 주저한 데서 강변호사는107명의 법정위탁대리인을 맡고 장춘시 중급법원에 기소, 길림성고급법원의 최종 판결로 승소하여 “중국사달회사”로부터107명 농민들이 낸 수속비를 리자돈까지 결산하여 받았다. 이에 신심을 얻은 나머지 99명 농민들도 강변호사에게 위탁하여 북경시제2중급법원에 기소하여 승소한데서 99명 농민들도 모든 수속비외 리자돈을 결산받았다. 2008년 5월 14일 “북경석간”은 “206명 농민들의 망가진 출국 꿈이 공도로 처리 받다”는 제목으로 강산혁변호사의 사건소개를 대서특필하였다. 지난 2012년 12월 12일 강산혁변호사는 연변성보국제무역청사유한회사(이하 성보회사로 간칭) 정영채회장(외국인)과 조선족인 김성순총경리와의 재산권분규로 김성순총경리의 법정위탁대리인을 맡았다. 안건을 맡은 강변호사는 중국법률분야의 최고권위인물 10명을 모시고 안건을 분석하고 론증한 기초우에서 6년간의 법정변론을 거쳐 원고와 피고간의 계약의 법률적 근거와 계약의 진실성을 법적으로 확인하고 김성순(피고)의 성보백화부동산(3,953.40평방메터)의 부동산소유권, 김성순(원고)의 성보건축물 5층부터 15층까지의 부동산소유권의 정당성을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의 최종판결(2017년 5월)로 두개 안건 모두 김성순의 승소로 매듭지었다. “물론 변호사에게도 압력이 있고 모험도 있지만 참다운 직업정신과 법적판단의 수준과 능력을 고심히 키우면 능히 대처해 나갈 수 있습니다" “직업변호사는 심리상태가 좋아야 하고 신용으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고객을 감동시키야 합니다.” 이는 26년간의 변호사경력에서 특별한 체득이 무엇인가는 필자의 물음에 주는 강산혁변호사의 회답이였다. 길림신문 2017.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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