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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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스스로 자기 수족을 얽매지 말자 (윤운걸) 댓글:  조회:2120  추천:103  2008-08-22
스스로 자기 수족을 얽매지 말자글에서 먼저 '38선'을 지워야조선어 교육 '실용'에 기반 두자 윤운걸언어란 의사소통의 주요 수단이라는 것은 더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의사소통"이란 이 개념을 아는 것 같지만 실지 모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조선족 사회 현실이다. 현재 조선반도를 비롯한 세계 한겨레는 7000여만 명인데 조선과 중국조선족을 제외하고는 세계 각지의 동포들은 모두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할 진대 중국조선족이 한국과의 교류는 물론 중국과 한국사이에서의 중개작용을 할 때에 반드시 한국어를 사용해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문제는 현재 수많은 조선족학생들이 조선어로 공부하고 있다는 점이고 또 조선족은 조선어로 된 신문, 방송을 접촉하고 있기에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해 거리감이 있으며, 의사소통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평소에 한국 드라마나 한국신문을 보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고 주위의 조선족들에게 문의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현재 연변대학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고 있고 길림대학 청도,상하이, 베이징 등지의 유수의 대학들에서는 모두 한국어과를 설치하고 한국어로 교육하고 있는데 그런 대학들에서 왜 조선어과를 설치하지 않고 한국어과를 설치했겠는가? 또 이런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다니는 학생은 절대대부분이 한족이다. 이는 장래에 조선족이 한국기업진출은 물론 제반 한국과의 문화교류에서 한족학생들에게 뒤지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난날 중국조선족은 조선어를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배워왔기에 일상 의사소통에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실지 1992년도 중한 수교 후 한국과 중국조선족 사이에 빈번한 교류가 있으면서 한국인이 조선족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조선족이 한국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언어생활에서 상대방의 얘기를 엉뚱하게 이해해 갈등이 생긴 것만은 기정 사실이다. 수많은 조선족 통.번역인원들이 한국기업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중국기업과의 합자, 합작 및 협의서 등 각종 법률문서 작성 과정에 중요한 대목에서 오역을 하는 등 실수를 빚어 법률적문제가 생긴 심각한 사례들도 있다. 또 현재 40여만 명 조선족이 한국에 나가 일하거나 공부하고, 또 방문취업제가 실시되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바야흐로 나가게 되는데 언어상의 소통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줄로 안다. 실지 필자가 수차 한국에 가서 취재해 보면 조선족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또 한국인이 조선족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것이 보편적인 지적이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얘기를 엉뚱하게 이해하는 바람에 생기지 말아야 할 마찰이 생기고 있다. 물론 한국인들이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또 현재 재중 한국인이 70만을 넘어 향후 100만시대를 앞두고 있어 중국진출 한국인들이 필경 조선족 신문 방송을 통해 중국을 이해해야 하는데 조선어로 된 신문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방송을 알아듣지 못하면 이것이 더욱 큰 문제가 아닌가? 현재 조선어 규범화로 신문, 출판을 통제하고 있지만 스스로 자기 수족을 얽매 놓는 것은 개방된 오늘의 사회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조선족 신문, 잡지 혹은 방송사, 출판부문에서 한국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조선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국조선족의 제반 이익에서 또 중국진출 한국인들이 중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그저 흘려보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진 중요한 과제라 하겠다.  아직까지 남북언어가 통일되지 못한 현실에서 중국조선족은 언어생활에서 굉장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유럽과 미국 등 서양국가에서는 영어를 공통어로 하기 때문에 언어소통에서 큰 지장은 없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주중 영국대사관에서는 영국식 영어 즉 야스로 중국인들에 한해 시험을 치고 있으며 주중 미국대사관에서는 토플로 미국식 영어를 중국인들에 한해 시험을 치고 있다. 영국식 영어가 원조라 하게 되면 미국식 영어는 개량된 영어라 하겠다. 영어가 미국에서 주체어로 된 것은 바로 이전에 영국의 정치범 등 범인들이 아메리카에 정착해서 오늘날에 와서 발전한 영어인데 이는 개량 언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학길에 오르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토플영어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중국 현실이다. 한마디로 공통어는 경제와 밀접히 관계된다.어느 나라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 나라의 언어를 우선 배우게 되기 마련이다.   /윤운걸 길림성 특파원     13944391376@hanmail.net
8    17.주인 잃은 연길인민체육장과 그 ‘파장’(윤운걸) 댓글:  조회:2385  추천:135  2008-08-08
윤운걸기자문집주인 잃은 연길인민체육장과 그 ‘파장’ 윤운걸축구로 울고 웃던 연변,그 축구경기?도가니속에서 희열과 유감을 느끼던 축구팬들,허나 연변은 올해부터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길림오동축구팀이 지난해에 갑A에서 갑B로 내려간 뒤에 돈 없어 기르지 못하는 자식처럼 저 멀리 절강성에 팔려갔다.팔려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얼마나 많은 축구팬들이 통탄했고 그 얼마나 많은 축구팬들이 가슴을 치며 슬픔의 눈물을 흘렸던가?수많은 축구팬들과 친지,가족들이 연변의 "자식"들을 공항에서 눈물로 보내며"남의집에 가서라도 잘 자라주기를 바랐다"전국축구갑급팀 A조련맹경기도 이미 15라운드가 지났지만 오늘의 연길시인민체육장은 한적하고 쓸쓸하기 그지 없는 신세로 되였고 그 열광 띤 연변의 모습을 다시는 찾아 볼 길이 없게 되였다.그제날 수만명 축구팬들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것 같다.한적하고 쓸쓸하게 된 연길시인민경기장,그로 해서 그 주변에는 또 어떠한 엄청난 변화가 생기고있는가?   경기장주변 및 도로 량켠 맥주점 련이어 부도슬퍼도 술이고 기뻐도 술인것이 아마 축구팬들의 마음일것이다.조사에 의하면 이 몇해사이에 연길시인민체육장에서 도심으로 내려오는 주변과 길옆에는 100여개소의 맥주점이 앞다투어 일떠섰다.홈장경기가 있을 때마다 이 100여개의 맥주점은 경기를 관람하기전부터 초만원,경기를 관람한 후에도 초만원을 이루어 지어는 바깥에다 상을 림시로 차려놓고 맥주를 팔았는데 손님들의 주고받는 내용은 전부 길림오동팀의 이야기였다.기자가 한족이 경영하는 한 맥주점에서 주인에게 올해에는 장사가 어떻겠는가고 넌지시 물으니"진낸완러,건번메이유츌미"라고 대답했다.그 한족주인의 소개에 따르면 자기는 길림오동팀의 흥기로 1997년도에 작은 식당을 꾸렸는데 두해에 집값을 다 갚고 또 그자리에 새로 큰 맥주점을 앉혔다고 한다.일단 봄부터 초가을까지 연길에서 갑A경기가 시작되면 축구팬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그 수입이 가관이여서 겨울 한철은 그저 놀아도 별문제 없다고 했다.허나 인젠 덩그런 식탁에 먼지가 앉을 정도라고 한다.한 맥주도매상에게서 알아본데 의하면 홈장경기가 있을 때마다 경기장도로주변의 맥주점에 만여병의 빙천맥주를 공급했지만 지금은 찾는 집이 거의 없다고 한다.올해에 빙천맥주 판매량이 내려갈것이라는것이 축구팬들의 지적이다.연변축구의 저락으로 경기장 도로주변의 음식점은 물론 전반 연길시의 맥주퍈매도 저조기에 들어설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택시경영자 울상40만도 안되는 연길시에 근 4000대에 달하는 택시가 있다.100명당 택시 한대가 있는셈이다.하여 평소에는 손님을 끌기에 신경을 도사리고있다.허나 축구경기가 있을 때마다 택시운전수는 손님을 끌 필요없이 굉장히 분주히 돌아쳐야 한다.한 택시운전사와 문의하니 평소에는 하루에 150원도 벌기 힘들지만 일단경기가 있으면 라지오로 축구실황경기를 만끽하면서도 300원 지어는 400원을 쉽게 벌었다고 한다.비록 연길시는 이 몇년래에 기수,우수 택시제도 즉 기수날에는 우수번호택시가 다리를 건느지 못하지만 저 멀리 흥안향을 에돌아가는 축구팬들로 붐비여 우수번호택시도 10원 료금(연길시내는 보통 5원 택시값)으로 돈을 짭짤하게 벌었다고 한다.축구경기날이면 그만큼 택시타기 어렵다는 얘기이다.허나 올해부터는 그 모습을 찾을길 없어 택시운전수들은 울상을 하고있다.어떤 사람은 택시의 이런 호황세를 보고 작년에 돈을 빌려가면서 택시를 샀는데 올해에는 이런 꼴이 되였다고 한탄하고있다.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체육장운영 문제시상업화시대에서 연길시인민체육장도 자체의 운영길을 나가는 길밖에 없다.올해 축구불경기로 경기장 재보수도 어려워지게 될것이다.그제날 주석대 입장권은 50원,일반표는 20원이였지만 그 입장권이 열광기에는 표가 며칠전에 다 팔려 암거래 장사군들이 판을 치기도 했었다.지어는 표를 미처 사지 못했거나 돈없는 애들은 경기장바깥의 솔나무에 매달려 축구경기를 관람하여 솔나무에 마치도 "사람열매"가 달린듯 했다.그렇게도 관람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예 담장바깥에 앉아 귀로 "관람"했다.매번 평균 3만명(최고로 5만명)으로 추산해도 60만원,일년 입장권수입은 600만-700만원은 잘 되였을것이다.허나 올해부터는 그 수입이 딱 끊어졌다고 관계자는 한탄한다.쓸쓸하게 된 연길시인민체육장,이제는 잔디밭도 푸른 옷을 입은지가 오래다.그렇다고 해서 잔디밭에 염소를 풀어놓아 기를수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이밖에 돗자리장사군,광천수장사군,이이스크림장사군,해바라기장사군 등 떠돌이 장사군들도 이제는 부득불 축구경제권에서 퇴출하는수밖에 없었다...  강뚝축구팬연길시 시민들은 강뚝축구팬이라 하게 되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없다.길림오동팀의 훈련평가는 강뚝축구팬들이 한다.이 훈련장소가 바로 연길 부르하통하 강뚝옆에 있기때문에 훈련때마다 수백명 지어는 수천명이 거기에 찾아가 축구평론을 하는데 축구전문가 못지 않다.허나 오늘에 와서는 강뚝은 쓸쓸하게 세월을 보내고있다.이 축구팬들이 지금은 무얼하고있는지 알길 없지만 그 마음들이야 오죽하겠는가?어떤 축구팬들은 올해에 절강록성팀이 연변에 와서 몇껨의 경기를 치를것을 간절히 바라고잇지만 다수 축구팬들은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것이다.또한 이제는 장춘,목단강 축구팬들도 연변축구 동산재기가 있기전까지는 연변을 찾지 않을것이다.축구팬들의 말에 의하면 남의 집에서 자라는 자식을 다시는 어루만질 신세가 못되였다는것이다.   던져주는 사색오늘날의 시장경제에서 축구는 바야흐로 시장화로 나가고있다.연변경제는 길림성에서 다섯번째 자리를 차지하고있지만 연변에는 재력으로 뒤심이 될 그런 기업은 없다.오직 연변경제가 춰서야만이 연변축구가 되살아날것이고 그에 따르는 일련의 상업도 활기를 띨것이며 연변사람들의 정신생활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을것이다.연변의 한 책임자는 "연변은 축구가 없으면 공허해지게 되고 연변의 축구는 우리의 이미지와도 밀접히 관계된다"고 했다.이제 연변의 축구는 새 일대들에게 희망을 두고 있다.그날이 언제 올지 기대해 본다. (본문은 2001년 7월12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7    16.연변축구팀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시절 댓글:  조회:2461  추천:112  2008-08-07
윤운걸기자문집연변축구팀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시절윤운걸   1989년 가을,필자가 연변방송국에 근무할 때였다.어느 날 보도부 체육기자인 김남룡(현 연변텔레비전 부주필)씨가 찾아와 길림축구팀이 갑급팀에서 탈락했는데 축구의 고향인 연변에서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90년도 전국축구시즌에 대비해 축구팬협회를 설립하고 조직적인 지원과 응원을 제안했다.이에 맞장구를 쳐 연변축구애호자협회를 설립하기로 하고 회장단을 구성하다보니 회장을 필자가 맡게 됐고 상무비서장에 김남룡,상무부회장 겸 홍보담당에 남명철(현 도문시 부시장),상무부회장 겸 조직담당에 양동섭(전 연변텔레비전 기자)씨 그리고 상무부회장에 연변가무단 김동관 단장 모두 5명이 맡게 됐다.     자금 후원과 응원단 구성 회장단은 먼저 지역 언론이 앞장서 연변축구를 살려야 한다는 취지 아래 언론사를 찾아갔다.당시 길림신문사 이송영사장을 찾아가니 적극적인 보도협조와 함께 1천 위안의 지원금을 쾌척했으며 연변일보사,연변인민출판사,중국조선족소년보사,대중과학잡지사,동북과학기술신문사 등 각 언론사들이 경제적인 후원과 함께 인력 후원에 나서 연변팀을 지원하기 위한 준비가 빨리 진척되였다.한편 연변가무단악대와 연변라디오텔레비전악대가 잇따라 합세하였고 조선족 가수 유병걸씨가 악대를 지휘했다.또 응원단 수송을 위해 연길버스운수공사도 경기 때마다 버스를 무상지원하기로 했다.협회가 발족했다는 소식에 연변변경무역공사 ,연변건축공사 등 일반 기업들의 후원행렬도 이어졌다.    90년도부터 경기마다 인파몰이 초보적인 응원단을 구성한 협회는 북,괭가리,연변축구팀만세 등의 머리띠 등 각종 응원도구를 준비하는 가하면 붓글씨 솜씨에 뛰여난 박운학,허일춘 기자 등은 표어판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새는 등 준비작업이 시작됐다.특히 감동스러웠던 것은 전 연변텔레비전 주필 김희관(현 연변공공관계협회 회장),부주필 김영택씨 등 언론인들도 "축구팬"이란 머리띠를 매고 응원 대열에 합세해 질서유지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경기가 시작될 때마다 국가연주가 있었는데 협회 관악단이 유병걸씨의 지휘 아래 연주했고 연변축구팀이 승승장구를 이어갈 때는 <아리랑>,<나가자 나가자>등을 연주하면서 축구장 관람석에서는 자연스럽게 파도타기 인파물결이 일어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협회는 경기마다 득점 선수 또는 최고활약 선수들을 선정해 상금을 주는 등 선수들이 민족의사명감을 갖고 공을 찬다는 정신력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그래서 당시 최고 공격수였던 고종훈 선수는 "축구팬들의 사랑과 성원에 힘입어 민족 정신의 사명감을 갖고 푸른잔디위를 원 없이 달렸다"고 말하기도 했다.연변에는 지금도 "고종훈노래방"등 그의 이름을 딴 상점들이 많다.    가는 곳마다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   연변팀의 홈 경기는 가끔 용정,도문시에서 치르게 되었는데 92년 도문 경기 때였다.연길에서 3대의 버스로 출발한 응원단들이 도문시 경기장에 들어서자 도문시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영했고 열띤 응원을 벌이는 등 지역 응원단도 구성됐다. 이런 응원의 결과였을까,7월 삼복 더위에도 선수들은 3대0으로 대승을 거둬 관중들의 열띤 응원에 보답했다.경기가 끝나자 도문시 정부 차원에서 연길에서 온 200여명의 축구팬들을 위해 저녁식사를 마련하는 등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하지만 이날 저녁식사는 미리 연길에서 협회와의 예약이 돼 있어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축구팬으로서의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재미있는 뒷이야기   협회 회원은 반드시 축구장에 들어갈 때 머리띠를 착용해야 했다.당시 입장료가 비싸 입장권을 구입하는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입장권이 모두 팔리는 바람에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관중들은 경기장 바깥에서"귀"로 관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무에 올라가 경기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아마도 이런 진풍경은 연길경기장에서만 있었을 것이다.당시 입장하지 못한 관중들가운데는 혹시 조직담당자 가운데 자신이 아는 사람이 없는지 수소문하며 경기장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이런 사람들은 조직담당자와 눈길만 마주치면 입장이 어느 정도 가능했고 이런 일을 부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에는 없었다.   92년 8월,연길경기장에서 응원을 마친 뒤 응원단 만찬장에서였다.관악단을 온몸으로 지휘해온 유병걸씨가 단번에 냉면 두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었다.이를 옆에서 보던 나는 "형님 한 그릇 더 하시죠"라고 농담을 건네니"내가 쓩튀냐"(사투리로 게걸이라는 뜻)라고 받으면서도 또 한 그릇을 거뜬히 해치우던 그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지금도 추억으로 남는다.협회 회원이 늘어나면서 연변연극단 코미디 배우 이옥희(별명 쑤이러우)씨를 선두 지휘자로 선정했다.그가 응원단을 지휘하면서 관중들은 축구를 관람하면서도 중간 휴식 때는 재미있는 그의 연기를 즐길 수도 있었다.   경기에서 연변축구팀이 승전하면 회원 만찬에는 맥주가 동이날 정도였고 패하는 날이면 안타까운 탄식으로 다음 경기를 기약했다.그리고 회장단은 축구선수들을 찾아 축하와 함께 위로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수들은 감동을 금치 못했다.   이런 결과 연변축구애호자협회는 93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로부터 표창금기까지 받는 행운을 누렸다.그때 그 시절 축구팬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날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연길축구팬협회가 연변축구에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한 떨기의 꽃이 되길 기대한다.(본문은 2005년 3월13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6    15.범이 사람을 해쳤나 사람이 범을 해쳤나(윤운걸) 댓글:  조회:2030  추천:82  2008-08-06
윤운걸기자문집범이 사람을 해쳤나 사람이 범을 해쳤나-악덕사냥군의 옹노에 걸린 동북호랑이 구급실기윤운걸2002년 1월 29일 훈춘시인민병원에서 호랑이한테 오른 팔을 물린 환자를 응급치료2002년 2월 2일 훈춘시자연보호구에서 호랑이가 한 녀성을 잡아먹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2002년 2월 3일 저녁 훈춘시인민병원 외과전문가 김수철 주임의사 등이 옹노에 걸려 생존력을 거의 상실한 동북호랑이를 수술치료2002년 2월 9일 12시 45분경 동북호랑이는 구급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끝내 숨졌다. 나이는 10-12살로 추정 왜 동북호랑이는 사람을 해치게 되었는가?중국내에서 보기 드문 사건인 동북호랑이가 선후로 사람을 물어놓았고 잡아먹기까지 한 끔찍한 사건이 훈춘시자연보호구에서 생겼다.그럼 이 사건은 우연한 사건인가?올해 연변에는 50여 년래 보기 드문 폭설이 내렸다. 이로 하여 한시기 동안 연변 각지는 교통이 마비되였고 부분적인 가옥과 대부분의 남새비닐하우스가 무너졌으며 수천마리의 소와 양이 잃어졌거나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한편 폭설에 의해 산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대량으로 하산했다.지난 1월 29일 오후,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춘화진의 농민 곡창희(47살)는 본촌에 거주하고 있는 흑룡강성 오상시의 농민 윤석종(34살)과 함께 다른 촌에 일보러 갔다가 오후 2시경에 스키타고 되돌아 오던 중 한 초막집(빈집)옆에서 범의 발자국과 큰 사슴()의 잔해를 발견했다.범이 금방 큰 사슴을 잡아먹고 자리를 떴던 것이다. 그들은 범이 먹다남은 큰 사슴의 다리와 고기를 주어 배낭에 넣고 계속 마을로 향하던 도중 약 2시간 후에 뒤에서 범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범이 뒤를 따랐던 것이다. 곡창희가 웃옷을 벗어 불을 달아 범을 쫓으려 했으나 라이타가 켜지지 않았다. 범은 곡창희의 뒤잔등에 덮치기 시작, 본능적으로 오른팔로 덮치는 범을 막으려는 순간 범은 오른팔을 물었다. 범은 뒤이어 넘어진 곡창희의 뒤잔등을 허비기 시작,윤석종은 급기야 스키를 벗어 범의 머리를 쳤으나 범은 끔쩍 안했다. 범을 당해 낼 길이 없게 된 윤석종은 동료를 구하지 못한 채 줄행랑을 놓았다. 팔을 물린 곡창희도 어쩌는 수가 없어 숨도 감히 쉬지 못한채 눈우에 죽은듯이 누워 있었다. 약 반시간 지나니 범은 웬 영문인지 그 자리를 떠났다.범이 떠나갔다는 것을 의식한 곡창희는 단숨에 집으로 달려왔고 당지 사람들이 곡창희를 훈춘시인민병원에 호송했으며 지금까지도 치료중에 있다.련달아 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2월2일 훈춘시 삼도구림산작업소에서 범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사연은 이러하다 훈춘시 삼도구림산작업소의 3명종업원이 산에 올라가 작업하고 돌아오던 도중 맨 앞에서 걷던 양모(34살,한족)녀인이 옹노에 걸린 범한테 물려 뜯기우기 시작햇다.기급해난 두 남성은 줄행랑을 놓아 훈춘시자연보호구 삼도구자연보호소에 가 신고했다.구급대원들 현장에 도착제보를 받은 훈춘시자연보호관리구와 훈춘시림업국에서는 즉시 구급대를 조직, 한편 이 사건을 길림성림업청에 보고, 길림성림업청에서도 즉각 국가림업부에 보고, 이번 돌발사건을 감안해 급기야 연길동물원의 마취수의사 김광수도 훈춘시에 도착했다. 양모의 시체는 찾았지만 이미 뜯어 먹히워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구급대원들은 훈춘시 삼도구의 삼림에서 옹노에 걸린 범을 발견, 구급대원들이 3메터 가까이 접근했지만 사람에게 덮쳐들 맥을 잃은 상태였다.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범에게 마취총을 쏘았다.약 반시간 지나 범은 완전히 늘어졌다. 철옹에 범을 싣고 하산할 때는 이미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때였다.이제 범을 장춘까지 호송하면 도중에 숨이 끊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긴급구급이 시간을 다투었다.그러나 그때까지 바라던 북경,할빈 등지의 수의전문의들이 훈춘시에 도착하지 못했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북경등지의 수의들이 긴급제보를 받았지만 북경-연길행 비행기표는 이미 매진되여 하는 수 없이 2월3일 북경-장춘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에 장춘-연길-훈춘행 코스를 잡게 되어 2월5일에야 훈춘시에 도착했던 것이다.외과전문의 범구급에 착수범의 상태는 점점 위급해졌다.지휘부에서는 즉시 춘춘시인민병원에 구급치료를 요청, 병원의 부원장이며 외과전문가인 김수철 주임의사가 이 중임을 떠메게 되였다.범이 훈춘시내에 도착한 시간은 2월3일 저녁 7시 30분경,호송차가 100여킬로메터를 달려서야 도착했던 것이다.김수철 의사는 25년간의 의사생애에서 수백명의 사경에 처한 환자들을 성공적으로 구급했지만 동물구급은 물론 범을 구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하기야 중국내에서도 이렇게 심하게 상처를 입은 범을 구해본 사례는 없다고 한다. 범에 대한 상관자료도 없는 상황이였다. 다급히 해당 부문에 동북범의 기본생활자료를 요청했다. 페스가 날아왔다.동북범의 기본생활에서 필수되는 실내온도는 5-6*C,체내온도는 38-38.8*C(사람은 36.5*C좌우)호흡은 8-16차/분,심장박동차수는 100-124차/분이였다.체중은 약 150킬로그람 좌우이고 10년내지 12년생으로 추정되였다.구급수술을 시작하자니 정규수술대처럼 네온등도 갖추어지지 못한 상황, 사람처럼 범을 반듯하게 눕히지도 못하게 된 처지였다.2월3일 즉 호송된 당날 저녁 8시 30분부터 수술이 시작되였다. 그날 수술기록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범을 마취한 뒤 수술대에 좌측 모로 눕힘, 상처는 심하게 감염,상처를 탐사해보니 옹근 목이 둥그렇게 찢어져 있었고 목의 근육도 대부분 터지고 째여졌는데 깊이는 5센치메터,목의 경추뼈가 드러나 있었고 인두아래 기관(숨통)이 이미 3분의 2가 끊어졌음, 수술중, 수술후 호흡, 심장박동이 평온함.3시간반동안의 수술을 거쳐 기관과 식도 및 근육 등 봉합이 잘 되었고 상처처리도 깨끗이 되었다.2월 5일에 북경동물원 부원장 겸 고급목축사 장금국 등 2명, 할빈시해방군211병원(동물치료에 경험이 있는 병원임)의 2명 의사가 선후로 훈춘시에 도착했다.이들이 범의 수술정황을 검토하고 결과 수술이 아주 성공적이였다고 치하했다.한편 그들은 이렇게 상처를 심하게 입었고 피도 엄청나게 흘렸으며 상처입은 시간도 오랜 범을 구급하기는 국내에서 처음이라고 했다.범은 사람과 달리 기초대사률()이 높고 수분과 약물의 수요량은 사람의 킬로그람당 3배라고 한다. 이에 대비해 김수철의사는 소염제,영양제,비타민제 등을 정맥주사하면서 치료에 진력했다. 한편 그는 감염으로 인한 페,간,콩팥 기능마비가 올가봐 크게 우려했다.날이 감에 따라 감염증세가 심해졌고 콩팥 기능이 점차적으로 쇠퇴해지면서 오줌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끝내는 최악의 상태가 나타나고야 말았다.2월9일 12시 45분경,동북호랑이는 드디여 구급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피검사 결과 범은 불동간균()감염에 의한 패혈증이란 합병증이 왔던 것이다.사체해부에서 밝혀진데 의하면 량측 흉강내에는 농성()액체가 있었고 페에는 다발성 농양()이 있었으며 간은 충혈상태였고 콩팥에는 만성농양()이 있었다.범을 죽인 장본인은 누구?사건이 발생한 뒤 해당 부문에서는 즉각 수사에 달라붙었다.우선 1월 30일에 범에게 물린 곡창희와 윤석종을 혐의대상으로 짚었다.윤석종은 타고장으로 달아났다가 붙잡혔다.해당 부문에서 그의 집을 수색한 결과 범의 목에 걸렸던 옹노와 같은 강철쇠줄(직경이 약 손가략만큼 굵음)을 발견하고 전문기관에 의뢰하니 틀림없었다고 한다.그렇다면 곡창희의 팔을 물어놓은 범이 바로 2월2일에 재차 사람을 해친 범이 아니겠는가?첫 사건발생지는 훈춘시 춘화진의 한 산골,두번째 사건발생지는 훈춘시 삼도구의 한 산골,이 두곳의 거리는 수백킬로메터,그렇다면 범은 옹노에 걸렸다가 뛰쳐나와 첫 사건을 저지르고 몇백킬로메터를 헤매다가 두 번째 사건을 저질렀을가?혹은 첫 사건을 저지른 뒤에 옹노에 걸려다가 뛰쳐나와 두 번째 사건을 저질렀을가...지금 해당 부문에서는 계속 수사망을 조이고있다.악덕사냥군의 행실로 처녀도 숨지고 범도 숨져통계에 따르면 사육동북호랑이는 수십마리 되지만 중국내의 야생동북호랑이는 불과 몇 마리,그것도 훈춘시자연보호구에 4-5마리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있다.“자연재해는 바로 인재()”다 전문가들의 소개에 따르면 사람이 범을 해치지 않으면 범은 절대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한다. 동북호랑이는 국가1급보호둥물이다.그래서 국가에서는 거액을 들여 훈춘시에 동북호랑이와 극동표범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보호구를 세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보호구안에다 몰래 옹노를 놓았으니 참으로 무지몽매한 행실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렇게 약손가락 굵기만한 옹노는 결코 토끼나 노루같은 것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메돼지나 호랑이를 잡으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한편 악덕사냥군은 분명히 범이 다니는 길을 아로 옹노를 놓는 것이라고 추정하고있다.이제 이 끔찍한 사건은 진상이 밝혀지면 악덕사냥군은 마땅히 엄한 법적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본문은 흑룡강신문 2002년 2월21자에 실렸음)
5    조선어서적 출판 '쌀에 뉘' (윤운걸) 댓글:  조회:2029  추천:96  2008-08-05
조선어서적 출판 '쌀에 뉘' 윤운걸책을 많이 읽었다 해서 반드시 인재가 되는 법은 없지만 책 안 읽은 인재는 없다. 한 민족의 흥망성쇠는 인재 수량과 밀접히 관계된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발전은 궁극적으로 수많은 인재가 있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구국 사상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한창 꽃피고 있음을 단적으로 설명한다.   사실 같은 연령대의 조선족학생과 한국학생들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얘기를 나누어 보면 보편적으로 지식수준 차이가 엄청나게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인재의 첫째 조건은 한 사람이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의 수업 외에도 얼마만큼 책을 많이 읽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특히 오늘날 글로벌 시대에 전문지식도 중요하겠지만 다방면의 지식을 소유한 사람만이 자신있게 또 떳떳하게 세계무대에서 활개치는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사실로 증명되었다. 이러할진대 오늘날 중국조선족사회의 서점가를 살펴보면 중문으로 된 서적, 이를테면 전문서적을 제쳐놓고도 고금동서의 정치,경제,문화 등 제반 요소들의 서적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조선어로 된 서적은 쌀에 뉘만큼이고 그것마저 초중학교학생 심지어는 청년들이 읽을 만한 책들이 아주 적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 그 자체이다. 조선어 서적은 출판량이 적고 또 청소년들의 지식갈증을 해소할 만한 서적들이 적으며 더욱이는 조선문 출판부문에서 자금난으로 각종 다양한 서적들을 출판하지 못하다보니 자연히 책 읽는 풍조가 이 사회에서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책 안 읽는다고만 탓하지 말고 과연 "오곡잡곡 즉 뇌수에 필요한 '영양분'"이 들어있는 책이 조선족사회에 얼마나 있는지, 실제적으로 따져봄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또 필자가 평소에 몇몇 조선족 학생 심지어는 젊은이들에게 한국어 서적을 본 일이 있는가 문의하니 읽어봤지만 적지 않은 단어들을 이해 못해 대충의미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문제 또한 심각한 문제다.   연변대학 유연산 교수는 "지금 조선어를 가르치는 대학은 연변대학밖에 없다"며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에서도 한족을 상대로 해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조선족학생을 상대로 조선어를 가르쳐 일원량제(一院两制)정책을 실시하고 있다"고 하고 일찍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대표대회 제12기 제5차회의에서 대표의 신분으로 "조선족의 언어환경을 한국어로 전환할 데 대한 의안"을 제기한 바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당면의 중요한 문제는 교육에서 조선어를 사용할 것인가? 한국어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초점인데 이는 바로  '조선문 조례'수정이다.   유연산 교수는 "1988년에 처음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어문조례를 제정하고 그후 2003년에 조선어문조례에 대한 수정을 했지만 시장경제체제가 초보적으로 건립되고 경제와 사회 각 방면에서 변화가 이루어진 상황에 계획경제체제에서 만들어진 조례의 여러  조목들은 이미 효율성을 잃었거나 현실에 부합되지 않고 있다”"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지금 독자들이 읽어야 할 우리 글 서적들이 적고 또 서적내원이 없다고 보는데 서적내원은 무진장하다. 필자가 한국에 다녀오면서 매번 서울교보문고 등 서점가를 찾아가고 있는데 한마디로 눈이 뒤집힐 질 지경이다. 즉 원하는 대로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의 또 다른 초점은 이런 서적들은 중국에 아직까지 수입금지되고 있는데 이는 중국출판총서에서의 정책적인 문제다. 깊이 얘기하면 소수민족 정책을 제대로 낙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수많은 지성인들이 중국조선족단체에 책을 무료로 기증하고 있고 또 기증하려고 하지만 세관통관에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는 민족자치를 행사하는 조선족사회 더욱이는 정부차원에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조선어로 된 고금동서의 서적 더 나아가서는 청소년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서적들은 한국에서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금난, 출판난만 부르짖고 한탄하지 말고 이미 한국에서 출판된 서적들을 대량 수입하겠끔 수입에서의 문호를 개방하는 노력이 바로 조선족사회의 당면에 부딪친 문제이고 또 해결해야 할 중요한 도경이며 이것 또한 조선족사회가 사상해방에서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중국에서 소수민족문화사업을 밀어나가기 위해 정책적, 경제적 후원을 하고 있지만 중국은 아직까지 개발도상국으로서 소수민족에게 이른바 별도의 '가마밥'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국민의 일원인 조선족으로서도 나라의 걱정을 헤아려 '지리,천시,인화'인 한국과의 서적인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중국출판관련당국과의 조화사업을 힘있게 추진함이 가장 바람직한 사고방식이라 하겠다.이 또한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는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국가에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데도 국가에만 손을 내미는 것은 진정 주인의 행실이 아니다.   '갈증이 생기면서도 앉아서 메말라 죽기를 원하는 사고'방식을 고집한다면 결국 망하는 길이고, 결국  스스로 동화의 길을 택하는 행실이라 하겠다.
4    13.가자,절승경개 칠보산으로...(윤운걸) 댓글:  조회:1788  추천:88  2008-07-31
윤운걸기자문집가자, 절승경개 칠보산으로...  윤운걸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 지리산, 한라산은 조선(한)반도의 6대 명산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칠보산은 조선에 위치해 있고 지리산, 한라산은 한국에 위치해 있다. “연변해란강여행사가 중국에서 유일하게 칠보산관광코스를 개발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길림성 용정시관광국 김기호 국장은 얘기하면서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칠보산을 가보지 않으면 한평생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럼 도대체 칠보산관광코스는 어떻게 그런 매력을 띠고 있는가? 이 궁금증을 풀려고 기자는 지난 7월7일부터 10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이 코스에 몸을 실었다. 기자가 택한 일정에는 바로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신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지 12주기가 되는 7월8일날이 겹쳤다. 이날 청진시의 각계 인민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김일성 주석의 동상을 찾아 추모를 했는데 아름다운 꽃송이와 꽃바구니를 든 추모행열은 구름바다를 이루었다. 조선의 북동부에 위치한 함경북도는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러시아와 인접해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함경북도는 3개시, 12개 군으로 이루어졌는데 함경북도는 지리상 산이 많고 벌이 적으며 바다(동해)를 가까이 하고 있는 특이한 자연조건으로 해산물이 풍부하고 공기가 깨끗하며 그 어디로 가나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어 관광자원은 말그대로 매우 풍부하고 다양해 관광객들을 매료하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중국 용정시 삼합통상구를 거치면 바로 조선 회령시 땅을 밟게 된다. 회령시로부터 칠보산으로 가는 코스인 청진시와의 거리는 거리는 90㎞, 청진시에서 칠보산까지의 거리는 130㎞, 청진시에서 경성군까지의 거리는 35㎞이다. 우리는 이번에 이 3개 시, 군과 칠보산코스를 택했다. 조선칠보산여행사 관광버스에 몸을 싣고 차창밖을 내다보니 길 양옆의 밭에서는 곡식들이 한창 무륵무륵 자라고 있었으며 열심히 기음을 매는 농부들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밭에 심은 곡식들은 옥수수와 콩이 주종을 이루었고 가끔 논밭과 감자밭들이 있었는데 감자수확철이라 수확에 열을 올리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했다. 소개에 따르면 올해에 농사가 풍년이 들 가능성이 있어 기자를 즐겁게 했다. 한창 자라?있는 옥수수와 콩은 그 자람새가 아주 좋았다. 어디를 살펴보나 밭에는 풀 한포기 없이 깨끗해 조선농민들의 밭을 다루는 모습을 한눈으로 읽을 수 있었다. 비록 고난의 행군을 지속하고 있는 조선이지만 도시들은 정결함을 잃지 않았고 길거리에는 종이 한나도 없이 깨끗해 마음을 상쾌하게 해 참으로 백의민족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되새기게 했다. 조선 회령시는 인구가 약 12만여명으로 조선의 북쪽지방에서 가장 오랜 도시이며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동북지방과 마주하고 있어 교통상 변경관광에 아주 유리한 지역이며 이곳에는 북부지대의 특유한 자연풍경과 김정숙(김일성 주석 부인)동지 혁명사적관을 비롯한 혁명사적지가 있어 일행이 찾아갔을 때에도 수많은 학생들과 현지인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었다. 청진시는 함경북도의 소재지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인구는 60만여명이며 아름다운 항구문화도시로 손색이 없었다. 경성은 함경북도에서 가장 오랜 군의 하나이고 조선의 이름난 도자기 산지이며 온천휴양지이다. 그리하여 경성자기, 경성온천, 경성구기자라 하게 되면 세계적으로도 알아 준다고 한다. 예로부터 “함북금강”으로 널리 알려진 칠보산은 특이한 자연풍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조선의 명산이다. 다른 명산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산악미, 계곡미, 바다경치 그리고 계절에 따라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칠보산은 지역별 특성과 참관코스에 따라 내칠보, 외칠보, 해칠보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내칠보는 칠보산의 내륙쪽에 전개되어 있는 명승구로서 수많은 봉우리들과 기묘한 바위들이 우뚝 솟아있어 그 장엄하면서 수려한 것이 특징이어서 신비의 세계에 들어온 미묘한 느낌을 주었고 외칠보는 높이 솟은 웅대하고 기묘한 봉우리들과 기암절벽, 수정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가 많아 산악미와 계곡미를 이룬 것이 특징이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원 826년에 세운 개심사는 조선 함경북도의 건물중에서 가장 오래 된 건물이자 가장 큰 절. 개심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심검당, 음향각, 만세루 등 건물이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었다. 해칠보는 바위우에 우뚝 솟은 크?작은 섬들과 각양각색의 기암들 그리고 기복을 이루면서 밀려오는 맑은 물결이 바위에 부딪쳐 물보라를 날리는 특이한 해안절경을 펼쳐보여 자연의 신비함을 더욱 짙게 했다. 지리적으로 칠보산은 함경북도 어랑군, 명간군, 화성군, 명천군에 위치해 있으며 상매봉이라는 봉이 최고봉으로서  그 높이는 1103미터에 달한다. 수많은 봉우리마다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고 있지만 그중 몇 개 봉만 소개한다. 외칠보의 노적봉은 일년 농사가 끝나서 양식가마니를 높이 쌓아놓고 농부가 흐뭇이 아래로 내려다본다 해서 조선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한 만물산은 어느 물건이나 생각나면 즉시 재생한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고 모성암이라는 바위에는 이런 전설이 깃들었다. 까마득한 옛날에 네 딸과 아들 하나를 둔 어머니가 너무 일찍 사망하게 되니 아이들은 어머니 무덤앞에서 밤낮으로 울어 이것이 재생 되어 돌로 굳어 졌다고 한다.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이 칠보산에 민박숙소를 짓고 관광객을 봉사하라는 지시하에 2004년에 칠보산맥 명천군에 20채의 민박숙소를 지었습니다”라고 설명한 조선칠보산여행사 관광안내원은 비교적 유창한 중국어로 중국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매년 1000여명의 중국관광객들이 이 지역을 찾고 있는데 조선족은 물론 베이징, 상하이, 천진, 남경, 신강 등지의 관광객들이 있는가 하면 만족, 요족, 묘족, 토가족 등 중국의 소수민족들도 이 지역을 관광했다. 관광객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코스의 하나가 또한 어린이들의 공연이다. 이 어린이공연팀은 청진제강소 유치원어린이공연팀인데 현재 이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는 250명이고 그중 노래와 춤 그리고 전통악기를 다루는 어린이가 70명이나 된다고 한다. 공연이 시작되자 두 어린이가 각기 중국어와 조선어로 인사말을 건네 관광객들의 박수세례를 받았다. 공연프로마다 동심에서 흘러나오는 모습들이 돋보여 너무나도 영특했고 그 어느 연기도 관광객들이 마음을 사로 잡기에는 충분했지만 특히 어린이들이 중국노래인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좋은 친구”를 불러 한족관광객들의 절찬을 받았다. 연변에서 간 한 한족관광객은 이 노래를 듣고 너무나도 기특해 자기 아이도 여기 유치원에 보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취재팀은 이들 공연을 관람하면서 눈물이 젖어 수시로 눈을 찍으면서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짜릿한 느낌이 생겨 마음을 심하게 설레이게 했다. 칠보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조선측에서 배치한 식사메뉴는 아주 깔끔하고 정결했으며 전통적인 맛이 났다. 특히 끼니마다 오르는 된장국, 미역국, 여러가지 전통김치는 그 맛이 진국이여서 한족 관광객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끼니마다 돼지고기반찬과 해산물반찬 그리고 나물반찬이 올랐지만 워낙 돼지고기를 잘 먹는 한족들도 돼지고기반찬에는 젓가락을 대지도 않고 조선전통음식에만 수시로 젓가락을 대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칠보산관광코스의 하나가 바로 해변가에서 “어죽”을 즐기는 식사다. 해산물로 정교하게 끓인 어죽에다, 현지인들이 직접 숫불에 구운 낙지를 곁들여 술 한잔 마시니 참으로 신선이 울고 갈 지경이라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참으로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명언을 이번 칠보산관광에서 느꼈습니다”라고 감탄을 금치못하는 연변과학기술대학 당위서기 임용세 교수는 이번에 오지 않았더라면 진정 한평생 후회 했을 것이라고 했다.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연변해란강여행사와 조선칠보산여행사는 이 관광코스를 개발하면서 조선과 중국인들의 우의증진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으며 더욱이 관광경제창출에도 많은 업적을 쌓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으며 용정의 경제발전에도 큰 목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취재에 도움을 준 연변해란강여행사와 조선칠보산여행사 그리고 칠보산 정상까지 굽이굽이 아찔한 산길을 너무나도  안전하게 운전해준 조선측 운전사에 심심한 사의를 드린다.  2006/07/19 흑룡강신문 /조선 칠보산 특별취재팀: 윤운걸 기자, 금성, 류연산, 윤완주
3    6.재한 조선족사회 믿음과 갈등 엇갈려(윤운걸) 댓글:  조회:1680  추천:103  2008-07-22
윤운걸기자문집재한 조선족사회 믿음과 갈등 엇갈려  윤운걸현재 한국 체류조선족 16만명으로 추산 향후 최대 50만명으로 늘어날것으로 예상 중국 조선족 동포들은 90년대부터 친척방문, 연수, 위장결혼 등 다양한 경로를 거쳐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중국동포는 이제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문이 활짝 열리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16만여명으로 추산되는 한국 체류 중국 동포사회 규모가 일단 ‘방문취업비자 제도’가 도입되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 되여 최대 50만명의 동포사회 형성도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국정부에서 자진출국정책을 시행한 후 최근 중국 동포 재입국이 본격화 되고 있다.  년말까지 10만명 가량 입국할 전망이며 최대 50만명 이상의 중국 동포사회가 형성될 경우 다양한 현안들이 제기될 전망이다. 위장결혼과 불법체류 등은 사라지겠지만 중국 동포들 요구가 집단화될 경우 사회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건설현장 등 비숙련 로동시장에서  한국 로동자와 중국 동포 사이의 갈등도 부각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비숙련 로동현장 변화 시작   중국 조선족동포의 대규모 유입으로 건설현장 등 비숙련 로동시장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일용직 건설 로동자의 많은 수가 중국 동포들로 채워지고 있어 한 국내 건설 로동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가리봉 인력시장에서 만난 김성도(54살)씨는 “경기도 파주 LCD산업단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일용 로동자 대다수는 중국동포”라며 “일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들의 수자가 많아지면서 일당이 내려가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국 로동부 관계자도 “중국동포 입국 확대가 국내 로동시장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내국인 고용기회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 동포의 대규모 입국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1월부터 중국 동포들의 취업이 제한돼 왔던 제조업, 농축산업, 연근해어업 등에 대해 취업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바꿨지만 건설 로동현장으로 로동력 류입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국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리해춘 교수는 “건설 서비스업에서는 중국 동포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보다  커질  가능성이 높다”며 “제조업의 경우 내국인 로동자를 대체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보완적인 관계도 많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차별하는 사회풍토 개선돼야 지난날도 그랬지만 지금도 중국 동포를 하층 집단으로 생각하는 시선도 문제다. 중국 동포 상당수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사회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 룡정시에서 한국 전라북도 모 시에 들어와 8년째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박선화(40대,가명)씨는 “전에 비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우리를 불쌍한 사람쯤으로 보는 손님들이 있다”며 “새로 입국하는 사람들은 이런 시선에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토로 했지만 식당 사장은 재중 동포 아줌마가 잔 머리를 굴리지 않고 너무나 일을 열심히 하기에  보낼 수 없다고 정을 토로했다. 불법체류 신분일 경우에는 차별을 받더라도 참는 경우가 많지만 합법적 신분일 경우에는 항의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런 불만이 집단화 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국 명지대학교 박화서 교수는 “50만명 규모의 동포사회가 형성될 경우 집단적인 리해와 요구를 표출하는 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비합법적인 체류와 로동현장에서의 문제를 줄일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한국국내에 남아있는 불법체류자에 대한 조치도 필요하다. 중국 로동자센터 오천근 소장은 “수자가 많이 줄긴 했지만 위장결혼으로 입국했거나 정상적으로 결혼했지만 가정불화로 불법체류자 처지로 전락한 사람들도 아직 많다”며 “이들이 설 자리를 잃을 경우 범죄의 유혹에 빠질 우려도 있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상호보완은 물론 문화 동질성 회복 급물살 탈 듯 중국 조선족동포들이 이러저러한 경로를 거쳐 한국에 가서 엄청난 부를 창조한 것은 중국의 개방 덕분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만 보더라도 지난해에 한국 로무를 위주로  벌어들인 돈이 8억2000만 달러,이는 연변의 년간 재정 총수입의 2배 이상을 훨씬 웃돈다고 한다.한편 한국에서 만난 대부분 조선족동포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서울에서 만난 한 고향친구는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 돈도 많이 벌었고 그간  기술도 배웠으니 인젠 중국에 돌아가  번 돈으로 회사를 차리겠다”면서 “한국에 와서 몇 년간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전통 문화가 몸에 배게 되였고 따라서 민족문화 구축에서 앞길이 트이게 되였다”고  말했다.  재한 조선족동포들의 고국과의 문화 동질성은 지금 한창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피부로 느꼈다. 특히 로인을 존중하고 불우이웃을 돕고 남을 사랑하는 한국사회의 풍토 인정은  조선족 동포들이 반드시 따라 배워야 한다고 기자를 만난 재한 조선족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 중국의 “뢰봉이 지금 한국에 와 있다”고 익살스레 얘기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취재를 마치면서 이제 한국 방문취업제도가 도입되면 제반 동포사회에 주는 영향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르는 갈등의 장벽은 점차적으로 해소될 밝은 전망이 보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특히 한국방문 취업 동포들이 경제적인 토대를 만들고 돌아올 경우 문화적 동질성도 잇달아 회복되고 발전해 나가면서 현재보다 더 끈끈한 동포사회 네트워크가 형성될 가능성이 많다. 2006/04/10 흑룡강신문  
2    5.국외나들이로 진통겪는 연변조선족(윤운걸) 댓글:  조회:2685  추천:127  2008-07-21
윤운걸기자문집국외나들이로 진통겪는 연변조선족윤운걸통계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이 로무로 나간 나라들로는 한국,러시아,일본 등 23개 나라이다. 그중에서 한국으로 간 조선족은 80%이상에 달한다. 연변에서는 근 10만명이 한국 등 나라에 다녀왔는데 지난해에 해외에서 들어온 외화가 2억3500만딸라 (인민페로 약 19억4100여만원)로서 지방재정년간창출액 15억을 초과했다.국외에서 벌어온 돈 유흥업소에현재 연길시에는 노래방,사우나,다방 등 유흥업소가 수백개나 된다. 이런 유흥업소의 절대 대부분은 국외에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이 꾸려놓은 것이다.근간에 국외에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유흥업소경영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몇년동안 관찰한데 의하면 어떤 유흥업소는 괜찮게 되고 있지만 적지 않은 유흥업소는 불경기상태이다. 또한 이런 유흥업소에 드나드는 손님은 그 절대 대부분이 조선족들이다. 그럼 연변조선족들은 돈을 어디에 쓰고있는가?연변의 한 농민은 한국에 가서 6년간 뼈빠지게 벌어 20만원을 챙기고 돌아왔다. “한숨 푹 쉬여야겠다”는 것이 그의 입말로 되었다고 한다.하긴 그 힘든 3D업종(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에서 차별시와 천대를 받으며 피땀으로 벌었으니 한쉼 쉬는 것도 나무랄바 못된다. 헌데 농사는 짓기 싫고 잔돈은 벌어봤자 취미가 생기지 않아 마작판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원치기, 그것도 재미가 없자 수중에 돈이 있으니 크게 놀기 시작했다.5월,10원,100원까지 올라가면서 불과 1년사이에 20만원이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그 바람에 잘 살아보자던 안해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초중 다니던 아들애는 나쁜물에 물젖어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또 “한쉼 쉬자”는 일부 귀향농촌 로무일군들은 거의 매일이다싶이 술과 고기로 허송세월을 보내고있으며 어떤 이는 증권투자에 망해 허탈감에 쌓여 있는 것도 오늘의 현실이다. 또 어떤 귀국로무일군들은 해외에서 벌어온 돈으로 집장만에 신경을 쓰다보니 생산 재투자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있다.연변의 모 현 농촌의 정모는 그래도 한국에 가서 벌어온 돈으로 현소재지에 노래방을 앉혔는데 소방시설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아 전기화재로 하루저녁에 “거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얼 노리고 있는가? 그들과 대화해 보면 이구동성으로 또 출국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국내에서 아무리 일해봤자 1년수입이 한국의 한달수입밖에 안된다는 것이다.일리가 있는상 싶다.한국행 이루기 위해 물불가리지 않아주심양한국령사사무소에 따르면 상업고찰 등 명목의 출국비자신청은 적지 않게는 위조,변조 비자신청서류이다.아울러 위조,변조 비자신청에 대비해 심양 서탑에는 이러저러한 민박집들이 촘촘히 늘어섰다.이런 민박집 아기씨들은 매일 주심양한국령사사무소 문어구에서 비자신청을 하러 온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면서 꼬드긴다. 여차여차하게 심양령사사무소책임자를 알고 있으니 자기 민박집에 들라는 것이다.연변의 한 무던한 농촌남자가 한 민박집아가씨의 꼬임에 걸려 투숙했다. 민박집아가씨의 해사한 얼굴에다 꿀같은 감언리설에 우선 비자발급비로 2000원을 맡겼다. 헌데 오늘,래일,차이피일 미루면서 된다던 비자발급이 나무아비타불이 되었다. 택시비,접대비,1000원 령수증을 내놓으면서 나머지 1000원을 돌려주는 것이었다.그럴만도 했다.이른바 “노력하다 안됐으니...”그 시골남자도 리해가 갔던 모양이다.이럴바에는 어쩌다 심양에 왔는데 “즐기고 보자”고 맘먹은 그는 그 아가씨가 “수고”했다는 마음으로 함께 즐기기 시작했다. 돈 빌어 갖고 간 5000원을 며칠사이에 탕진해 버렸다. 헌데 어느하루 음경에 통증이 생겼다. 문제의 심각성을 뒤늦게야 느낀 그는 호주머니 돈을 긁어모아 겨우 차비를 해서 연길에 되돌아왔다. 소설에나 불 수 있는 이런 사건들이 현실로 되었는데 이 사실은 연변의 모 성병진료소의 의사가 기자에게 피로한 것이다.지난 6월말에 기자가 주심양한국령사사무소에서 목격한 일이다. 길림에서 왔다는 한 40대의 녀성은 비자신청을 했지만 또 퇴짜를 맞았다.허나 그는 락심할 대신 히쭉 웃으면서 “다음번에 또 와 봐야지”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한테 왜 퇴짜를 맞았느냐고 문의하니 초청서류가 완벽되지 않았다면서 이번까지 7차나 비자신청을 했다고 한다.참으로 “출국마라손선수”못지 않았다. 이렇게 7차나 비자신청을 하려고 이모저모 신경을 썼으니 가정은 언제 돌보고 아이는 어떻게 길렀겠는가? 이렇게 거듭 비자신청퇴짜를 맞는 “마라손선수”가 연변에는 기수부지인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이런 “마라손선수”는 늘 요행을 바라는 것이 공동심리이며 또 쉽게 초청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다.1996년도에 연변에서 한국초청사기가 큰 이슈로 되었는데 그 피해자가 1만6000여명이나 되었다. 이직까지도 상당수의피해자들은 빛 때문에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있다.혼인문제심각 리혼사건 잇달아연변의 경우 한국 등 나라에 결혼,로무송출 등으로 나간 사람들 중 절대 대부분은 녀성이다. 룡정시 백금향만 보더라도 남녀 비례가 43:1이라는 통계가 있다. 통계에 따르면 위장결혼이건 합법결혼이건 한국에 시집을 간 조선족녀성의 수는 1993년도에 1463명,1994년도에는 1995명.1995년도에는 7693명,1996년도에는 1만명선을 넘어섰다.현재 한국인과 결혼한 조선족녀성은 7만여명이나 된다.조사에 따르면 결혼적령기인 20-30세 중국조선족 녀성은 20만명으로 추계되고있는데 그 가운데 7만여명이 한국으로 시집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즉 중국에서 아들딸을 낳아 조선족공동체를 유지해야 할 조선족녀성 3명중 1명이 한국에 가 있다는 얘기이다. 자료에 따르면 중국조선족녀성과 결혼한 한국남성들의 경우 대부분은 시골농민,로동자로서 약84%를 차지하고 중국조선족녀성의 경우는 문예계,대학생,호텔직원,공무원 등이 대부분이다. 이밖에 연변의 경우 한국 등 나라에 나간 로무일군 중 대부분은 가정부녀이다. 연길시의 괜찮다는 모 기관에서 한자리를 하고있는 한 남성의 안해는 10여년전에 러시아로 갔는데 종무소식, 최근에 그 녀성은 아르헨띠나에 갔다는 얘기도 있다.일전에 KBS 텔레비죤에서도 방송했지만 룡정의 모 가정의 학생은 어릴적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선량한 사람들의 주선하에 어머니 찾으로 서울로 떠났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서러운 눈물로 인천공항을 떠나는 수 밖에 없었다.참으로 눈물 없이는 보지 못할 장면이다. 새로운 리산가족이 바야흐로 생기는 것이 현실이다.한편 적어서 5년, 길게는 10여년씩 한국에서 불법체류를 하고있는 사람들 중에서 리혼제출사건도 빈발하고있다. 연길시법원의 관계자의 소개에 따르면 한국불법첼자들이 리혼자문을 하러오는 사람들이 매일이다싶이 있다고한다. 그들이 리혼소송을 제기하는 리유는 한국에서 뼈빠지게 일해 송금한 돈을 남편(안해)이 공짜로 생긴 것처럼 탕진해 버린다는 것이고 또 출국 전에 이미 리혼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지난 7월, 서울 구로구 가리봉 1동 가리봉시장부근의 한 산적점에서 있은 일이다.40대의 두 남녀가 뀀을 구우면서 중국술을 마시고 있었다.중국 동포임이 틀림없어 신분을 밝히고 한자리에 않자고하니 그들은 상당히 반기는 기색으로 청했다. 남성은 흑룡강사람(원적은 전라도),녀성은 연변사람(원적은 함경북도)이었다 .참으로 “전라도 사람과 함경북도 사람이 함께 모인 격”이었다. 남성은 불법체류 8년, 녀성은 불법체류 6년이었다. 취중 한담중에 그 남성과 녀성은 한 전세집에서 살고있는데 전세값은 각각 얼마씩 지불하고 저녁에는 누가 먼저 오면 김치찌개라도 끓여놓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소개에 따르면 이런 일은 불법체류자들중에서 상당 수 차지한단다.불법체류자들 막일과 차별시에 한설음적지 않은 중국조선족동포들이 산업연수생 이름으로 한국에 갔다. 한국로동법에 따라 산업연수생은 한국로동자와 동일한 일을 하면서도 로임은 한화 30만-40만원이며 각종 인권유린을 당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직장을 리탈해 불법체류를 하고있는데 지난해말 한국SBS텔레비젼 보도에 따르면 중국동포 리모가 살고있는 집은 허름한 월세집,아빠트공사장에서 남자들도 어렵다는 천장공사일을 하면서 지내온지 이미 9년째,그동안 남동생의 장례식도 큰 딸 결혼식도 첨석하지 못한채 고된 일을 해야 하는 실정,하루 꼬박 일해야 일당 고작 한화로 4만원,그마저 두달 로임은 받지도 못한 실정이었다.7월달에 중국조선족동포 불법체류자들이 모여산다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 일대로 가보니 300여메터 시장길은 양고기뀀냄새가 코를 찔렀다.마치도 연길시의 어느 한 골목의 양고기 뀀거리를 방불케 했다.료해에 따르면 이 동네가 중국조선족 동포거리로 바뀌여진 것은 1998년도부터라고 한다. 저녁이면 막로동에 지친 조선족동포들이 이 거리에 몰려드는데 거기에는 중국산술까지도 있고 건두부도 있었다.조선족동포들은 이런 음식점에서 서로 설음과 한을 달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기에서 로임체불을 당한 조선족불법체류자도 수 없이 보았다.한 인사의 소개에 따르면 구로동과 가리봉동 일대에 조선족불법체류자들이 수천명이 살고있고 대림동과 가산동까지 합하면 1만여명이 살고있다고 한다. 허나 이들은 불법체류라는 딱지가 붙어있기 때문에 늘 근심어린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말치 않아도 알 수 있다.통계에 따르면 한국내에 취업중인 중국조선족동포는 20만여명으로 추산하고있는데 이는 200만 조선족동포중에서 10명당 한명이 한국에 있다는 계산이다.이밖에 러시아,싸이판,미국,일본 등 나라에 나간 조선족을 합치면 그 수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창 일하는 나이인 20대부터 50대 사이의 청장년들이다.자녀교육 심각한 문제연길시 제13중에서 알아본데 이하면 2학년4반의 70명 재적학생중 부모와 함께 있는 학생은 근근히 32명, 그 나머지 학생들의 부모 혹은 일방은 모두 해외에 있지 않으면 외지에 있다고 한다. 연변 교육관계자의 소개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연변의 각지 조선족학교에서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이런 가정의 학생은 평소에 매우 우울해하고 또 자칫하면 기로에 빠지고있는데 소년범죄률중에서 이런 소년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있다고 한다.우리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산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 잃는다”는 말이 있다.중국조선족의 대이동은 불가피한 현실이다.허나 어제날 시종 56개 민족중에서 앞선다고 자랑하던 중국조선족은 오늘에 와서 이런 상태에 처해있으니 그 수습대책을 어떻게 마련할 것일가? 심사숙고가 요청된다.(본문은 흑룡강신문 2001년 11월 15일자에 발표되였음)
1    4.조선족 이동원인 및 우리의 자세(윤운걸) 댓글:  조회:2623  추천:114  2008-07-17
윤운걸기자문집조선족 이동원인 및 우리의 자세윤운걸거의 매일 매시각 가슴아프게 하는 우리 겨레들의 소식, 밀입국시도자 조선족xxx,특대 살인사건 조작자 조선족xxx,중국의 12억 인구가운데서 208만을 헤아리는 우리 겨레들의 범죄률이 줄곧 상승선을 긋고 있다.그중 밀입국시도자는 아마 중국 해당 범죄률의 90%를 차지하는 것 같다.오죽하면 근간에 산동성 위해시에  전문 밀입국자를 수용심사하는 구류소를 앉혔겠는가.-1996년 2월 13일 7시 45분, 중앙텔레비죤“동방시간과 공간”프로에서 85명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밀입국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산동성해안에서 배사고로 8박9일 표류하다가 잡힌 사건”을 방송.-1995년 9월 16일,흑룡강신문에서 “베일속에 싸인 위장결혼”이란 제목으로 조선족 처녀,과부 지어는 남편을 두고 이른바 가짜리혼을 하고“한국신랑”,“한국로인”과 위장결혼을 하고 떠나는 시실을 피력.-1995년  9월 20일,흑룡강신문에서 “서해안해상 밀입국현장”이란 표제로 조선족동포들의 한국밀입국경로를 피력. 지급까지의 불완전한 통계(한국언론매체)에 의하면 1994년부터 시작한 해상,항공편으로 밀입국하려던 사례는 근 100건,밀입국시도자는 20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이 현상을 두고 일부학자들은 역이민이라고도 하지만 실질은 정착을 목적에 두지 않고 돈벌이를 목적에 둔 이동형태로 필자는 본다.력사적으로 본 이민민족 중국조선족의 이민사를 간략해보면 1627년-1867년사이에 봉금령을 무릅쓰고 이민한 시기로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살길을 찾아 중국에 온 시기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1867년-1910년 사이에는 청정부에서 봉금령을 페지하고 개척시기를 마련했기에 살길을 찾아,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에 이민해왔다.1910년-1945년 사이에는 생존을 위한 자발적인 이민도 있었지만 정치적 즉 일제와 싸우기 위해  온 항일투사들도 있고 또 일제의 강제이민도 있었다.1945년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주로 중국의 동북지역에 216만3000명이 건너왔다.그중 강제이민,집단이민이 3분의 2를 차지했다.헌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시기의 통계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100여만명을 헤아렸다.절반 넘어되는 우리 민족은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다시 조선(한)반도로 역류한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이민민족으로서의 중국조선족의 심리는 정착심리보다 이동심리가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리고 중국조선족은 이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형제민족과 함께 공동히 적과 싸우며 중국을 조국처럼 지켜가면서 중화민족일원으로서의 역할도 남김없이 발휘했다.1943년의 통계를 보면 우리 민족이 동북지역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으로 만든 것이 31만6899헥타르로서 당시 전 동북지역 논면적의 90%를 차지했다.또 일례로 항일투쟁은 물론 중국해방전쟁시기에 각오가 높은 우리 민족은 새 중국 창건을 위해 6만3000여명 사나이들이 해방군에 용약 참가했는데 이는 조선족인구의 5%를 넘는다. 전쟁시기 목숨을 잃은 연변지구의 조선족렬사는 3550명으로 길림성렬사의 93%에 달한다. 때문에 이민민족으로서의 우리 조선족은 중화민족력사에 빛나는 편장을 엮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해방후에도 우리 민족은 당의 방침,로선에 따라 사회주의건설에서도 하냥 앞장서기만 했다.이런 민족의 일부가 왜 개혁개방시기에 들어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법을 무시하는 정도에 까지 이르게 되였는가?개혁개방의 물결이 일게 되면서 조선족은 엄청나게 변한 세상을 알게 되였다.이런 크나큰 충격속에서 일부 사람들은 가치관념이 따라서지 못해 국법을 무시하는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그제날 토막나무를 때면서 이밥을 먹으면 대만족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180도로 바뀌여졌다.그제날에는 자전거도 없이 몇십리 지어는 몇백리 길을 걸어야 했고 시골에서는 지금도 소수레를 주요교통도구로 쓰고있는 우리 조선족은 한국에서 자전거는 보건체육용으로 리용되고 소는 식용으로 하기 위해 기르며 수레는 력사사명을 완수하고 “골동품”으로 취급되여 박물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한국의 일인당 소득은 만딸라,중국의 일인당 소득은 겨우 350딸라라는 수자적대비도 알게 되었다.친지방문차로, 공무차로 한국나들이를 한 사람들에게서 조상의 나라가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이야기를 전설에서 나오는 신화처럼 들은 이웃과 동료들은 부럽기만 했다. 처음에는 약장사로, 다음에는 단기취업으로 부자가 된 조선족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직 우리 혈맥이 이어진 한국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부자로 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조선족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우리 조선족의 대부분은 시골에서 살고있다.동북3성의 통계에 따르면 60%이상이 농사에 종사하고있다. 도시와 농촌의 수입차이,로동강도차이,문화생활조건차이,자녀교양차이,..이 모든 것은 농촌에서 도시로,농업에서 다각경리에로,해외에로 진출하는 대이동을 초래했다. 례하면 얼마전 5000여명으로 통계수자가 나오던 북경의 조선족인구가 지금 5만여명으로 급증, 몇백명밖에 안되던 산동성의 조선족인구가 지금은 4만여명으로 급증하고 있다.따라서 출국열을 올리는 우리 민족의 사례는 천지개벽의 변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국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중국조선족의 한국방문인수는 12만 1049명,1992년까지 두만강통상구를 거쳐 조선을 방문한 인수(대부분 장사의 길)는 16만여명,1993년도에 러시아장시길에 오른 연변의 조선족만도 2만여명,이밖에 연수,로무송출로 미국,싸이판,아르헨띠나,리비아 등 나라에 나간 우리 민족은 중국의 그 어느 민족보다 인구당 비례가 높다.중국조선족의 대이동은 정상적인 현상으로 불 수 있다.한족들도 그제날 나라가 동아병부로 되니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미국 등 나라로 가지 않았는가?한국에서도 60년대에 살기 힘들어 많은 사람들이 구라파,중동으로 이동하지 않았는가?우리의 자세그제날 조선(한)반도가 망국의 설음으로 신음할 때 중국이란 나라는 그래도 우리 조상들을 한몸에 안아주었다. 그래서 조선족은 한족들과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고있다.특수한 지리,자연 환경으로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회고해볼 때 조선(한)반도는 “친부모”이고 중국은 “양부모”이다.중국조선족은 “친부모”를 잊지 말아야 하거니와 “양부모”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 잊지도 않을 것이다.시장경제의 거세찬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조선족들이 대도시로 대이동하고 한국 등 해외로 나가고 있지만 돈만 벌면 꼭 정든 고향을 찾아와 고향건설에 참가한다. 연길시만 보더라도 연길시의 문화생활이 이 몇 년래 몰라보게 변한 것도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온 사람들의 공로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류학갔다가 돌아오는 중국의 한족류학생은 43.2%밖에 안되지만 조선족은 미국 류학을 하고도 대부분 돌아와 고향건설에 기여하고있다.우리 조선족의 집단구역인 농촌이 대이동으로 인하여 허물어지기 시작한다.이로 인해 자녀들의 교육난이 생기고 있다.큰 근심을 할 필요는 없다.워낙 중국교육체제에 허점이 있고 교원 특히 조선족교원 원천이 빈약하다.그래서 시골에서 억지로 “소학생이 소학생을 기르치고”,“중학생이 중학생을 가르치는 식으로”교육방침을 운영해나갈  것이 아니라 즉 분산된 교육사업을 집중적인 교육사업으로 벌려나가야 한다.그러면 엄청난 자금이 수요된다.이런 자금은 단지 정부에만 의거해서는 안될줄로 안다.바로 우리 조선족들의 대이동 속에서 나올 줄로 안다.현재 료녕성 심양시에 조선족으로 똘똘 뭉친 서탑거리가 새로운 면모로 나타났는데 이 거리의 부지값은 기타 구역의 3배라고 한다.그래도 이 거리에는 교육,상업이 일체화로 되어나가고있다.이 돈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바로 우리 민족이 번 돈이요,한국인들이 투자한 것이다.우리 조선족의 이렇듯 강한 삶의 의욕 속에서 어느 때부터인지 서로 헐뜯는 고약한 습관이 자라났다.한피줄로서 고난에 처해 있을 때 도와나설 대신 사기협잡으로 피를 빨아먹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권세깨나 쥐였다고 지기 민족의 리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 아부하는 인간도 있다.아직도 해외진출문이 활짝 열린 것이 아니다. 웬 영문인지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 해외진출을 하자해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외진출(문)이 좁으니 자연 담장을 뛰여 넘는다. 밀입국은 국법을 무시하고 도덕을 어긴 행실이지만 이런 사람들을 범죄의 길에 들어서게끔 올가미를 쳐놓은 자들이 있다.해외진출(문)이 좁은 기회를 리용해 해내외로 결탁하여 폭리를 얻은 고약한 자들이 있는가 하며 또 그들을 두둔해 비렬한 “정책”을 제정해 놓은 관리들도 있다. 이런 자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민족의 건전한 대이동이 있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백성들만 골탕을 먹게 된다.어느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재일본 한국인이 일본국적을 얻기 위해 시종 한국인아라는 것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일본국적을 가진후에 한국인이라는 것이 발각되여 일본국적법에 의해 기소당했다.헌데 한고장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들이 이 한국인을 대신해서 “그 사람이 한국인이면 어떠냐?”며 데모로 정부의 행실을 질책했다.이 기사를 읽으며 코마루가 찡해났다. 제2차세계대전후에 일본에서는 중국땅에 남아있던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로 갈 수 있게끔(적지않은 일본인들이 중국국적에 가입한 것으로 알고있다)허용했을 뿐더러 중국땅에 묻혀있던 일본인 해골까지 다 파서 가져갔다.헌데...우리 자신도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을 때 왜 우산을 갖추지 못했는가?”고 후회하지 말고 평소 “일기예보”에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한다. 큰 사단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무단행동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에서도 조선족들의 해외특수한 관계를 높은 차원에로 끌어올려 “우산”도 마련해 줘야 하거니와 탄탄대로를 질주하게끔 넓은 길을 마련해 줘야 하며 또 “도로표식”도 잘해 놓아야 할 것이다.우리는 한족들의 만만디성격도 일부 배우는 것이 좋을상 싶다.앞뒤를 챙겨가면서 “도로표식”도 잘 보고 빨리 뛸 때에는 빨리 뛰고 천천히 뛸 때에는 천천히 뛰여야 한다.개구리도 멀리 뛰기 위해서는 잠시 뒤걸음질하지 않는가?조선족의 호미와 한족의 호미를 비교해보아도 그 성격을 알 수 있다.조선족은 자루가 짧은 호미로 김을 매다보니 허리가 곱사등이 되어 밭 한고랑도 절반쯤 매고는 단김이 빠져 “에라 모르겠다”고 하고는 벌렁 앉아 휴식을 취한다.그쯤 한족은 우산같은 초모자를 쓰고 허리를 쭉 펴고 호미질하다 보니 힘도 크게 들이지 않고 서서히 따라잡는다.이런 리치에서 볼 때 우리 조선족은 기회가 왔다고 너무 성급해하지 말고 나라에서 제정한 각종 정책과 법규들을 잘 집행해나가야 한다. 오직 이래야만 우리 조선족들은 정든 땅을 영원히 고수할 수 있다.(본문은 연변일보 1996년9월30일자에 실린 뒤에 이어 연변라디오TV신문에 게재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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