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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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념전변 기술형 인재양성이 급선무 (윤운걸) 댓글:  조회:1833  추천:113  2008-08-19
관념전변 기술형 인재양성이 급선무  ——— 조선족 권위인사들의 견해를 들어본다 윤운걸조선족직업교육의 방향문제를 가지고 동북 3성과 북경시의  4명  교육계 조선족 권위인사들의 주장을 들어보았다.  새로운 관념수립이 소중한 첫 걸음이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교육국 성인직업교육처 장활처장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현재까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직업학교에서 설치한 전업은 14가지 종류에 70여종에 달한다. 그러나 고중입학률이 부단히 높아지면서 직업교육의 비률이 고중단계 교육비률에 비해 30%밖에 안된다. 즉 많은 가정들이나 학생들은 직업교육에 대한 인식이 낮다는것을 설명해준다. 우리 학부모나 학생들의 관념에 문제가 있는것이다.  대학진학에 희망이 없는 학생들은 량호한 직업교육을 받아야 한다. 현재 기업들에서 기술형, 실전형 인재를 아주 중시하는 현실에서 말이다. 사회의 경제구조는 각종 차원의 인재를 수요한다.  우리 나라는 근 30년간 대외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많은 기술형 인재가 수요된다는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몇년전부터 우리 나라는 대학 본과층차의 인재양성을 중시하는 동시에서 대학에서도 고등직업기술학원을 세우고 고중에서는 중등직업기술학교를 꾸려 각종 기술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조선족직업교육의 밝은 미래를 구축하자면 반드시 교육부문과 학교에서 일반고중교육을 중시하는 동시에 적극 조건을 창조하여 취직에 적정한 직업학교를 꾸려 더 많은 조선족학생들이 사회에서 튼튼한 기반을 닦도록 해야 한다. 료녕성기초교육교연양성센터 조선족교육연훈부 강만석주임은 이같이 피력했다. 흑룡강성교육학원 민족교연부  최룡수 주임은 "무엇무엇해도 우리 조선족 학부모와 학생들이 오직 대학교에 가야만 출로가 있으며 앞으로 큰 출세를 할수 있다는 낡은 관념을 버리고 현 사회에서 직업기술교육도 대학교 교육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자기의 아름다운 인생을 창조할수 있는 기반으로 될수 있다는 새로운 관념을 수립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술형 인재육성이 '발등의 불' 중국 삼농교육전문가, 국가교육부 중앙과학기술교육연구소 리수산주임은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우리 조선족교육에서 가장 박약한 고리는 직업교육을 홀시하고있는 점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대학입시교육만 중시하다보니 직업교육은 한족들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 상황이다.  이중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방문취업제에서 나타난 문제이다. 비록 한국어시험에 합격되여 한국으로 인력송출을 갈수 있는 이것은 다른 형제민족들과 비하면 더없이 발전의 기회라고 할수 있겠지만 문제는 대부분이 직업기술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들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이  한국이나 일본에 가서 힘든 육체로동이 아니면 기타 말을 꺼내기 싫은 업종에 종사하는 실정이며 한국에 계속 남아 취직하거나 창업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다.  만일 농업기술을 포함한 한두가지 경영기술을 가지고 해외에 진출했더라면 승승장구로 더 발빠른 성장과 발전을 가져왔을것이다. 국내 한족지역에서는 20여년전부터 도시진출지식과 기술연수교육 즉 농촌직업기술교육에 집착해서 지금은  한국의 LG, 삼성 등 회사에서  판매후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조선족기술공은 거의 찾아볼수 없다. 지어 기술경영 업종에 취직한 대졸생들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금도 늦지 않는만큼 민족사업의 중요한 일환으로 민족직업교육을 바싹 틀어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문문서나 번역 등 분야를 제외하고도 농촌경제중개인 등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한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과  겨룸할수  있는 직종에 종사할수 있는 기량을 닦으면 앞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서 한껏 헤염을 칠수 있는것이다. 기술형 인재양성에서 민족의 장래를 항상 관심하고 걱정하는 민족간부들의 솔선수범 역할도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정봉길 윤운걸 기자     fengji-zheng@hanmail.net 
6    18.최은택 교수 "축구는 정신력이 원동력" (윤운걸) 댓글:  조회:2203  추천:125  2008-08-11
윤운걸기자문집최은택 교수 "축구는 정신력이 원동력"  --고 전 연변오동축구팀 감독 최은택교수님의 명복을 빌면서윤운걸기원 2007년 2월 5일 새벽 전 연변오동축구팀 감독이였던 한국 한양대 최은택교수가 66세를 일기로 너무나도 일찌감치 이 세상을 마감했다는 비운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연변은 물론 중국 각지의 수많은 축구팬들이 충격에 쌓여 분분히 애도의 뜻을 표하고있다. 기자도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비운에 쌓인 나머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그제날 최은택교수를 취재하면서 적어내려간 수첩을 뒤져보고 재정리한다. 1997년 중국축구 갑A련맹 제12륜경기가 끝난 7월 28일에 기자는 연변오동축구팀의 최은택감독이 심장병으로 한창 치료중이라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고훈씨(현 연변축구팀감독)에게 의뢰해 취재를 부탁했었다. 그랬더니 “금방 죽지 않는데 왜 취재를 접수 못하겠는가”며 바로 만나자는것이였다. 일단 만나고보니 죄송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한창 점적주사를 맞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굴에 만면의 웃음을 띄우면서 인자하게 기자를 만나주었다. 당시 기자의 인상은 그가 호랑이같은 축구감독이 아니라 아주 선비다운 교수 그 자체였다그가 연변팀의 사령탑을 잡게 된 배경 1987년 중국 광주에서 아시아축구련맹회의가 있었다. 당시 한양대학교수로 있던 최교수도 회의에 참가했는데 연변에서 안내로 온 추명(당시 연변오동팀의 부감독)을 알게 되였다. 이를 계기로 1996년 여름에 연변을 방문, 그 기회에 연변축구관계자들의 요청에 의해 축구강습반을 조직했는데 그는 축구지도에 대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나면서 연변축구관계자들은 연변축구팀의 감독을 맡아달라는 청구를 했다. 당시 최교수는 한양대에서 학장을 4년간 련임했기에 97년도에 1년 안식년(휴식년)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안식년도 마다하고 휴식의 한때를 제쳐놓고 바로 이듬해인 97년도에 연변오동팀의 사령탑을 잡게 되였다.처음 연변오동팀을 맡았을 때 당시 최은택교수는 중국축구의 정황을 잘 몰랐고 더욱이 연변오동팀의 진짜 실력도  잘 몰랐으며 다만 이 팀이 중국축구팀에서 하위수준이라는것만 알았다. 그가 나중에 알게 되였지만 프로축구에서의 연변팀 선수들은 수준이 낮고 또 수자적으로 훌륭한 선수가 적고 쓸만한 선수들은 간염이 아니면 위염이 있었으며 당시 연변팀에서 주력으로 활약하던 리홍군선수가 북경국안팀으로 이적했다는것도 몰랐다. 소개를 통해 연변팀의 선수들의 능력수준은 괜찮은걸로 알았는데 접촉해보니 그가 생각한것보다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굉장히 당황했단다. 실력도 실력이겠지만 연변팀의 정신력이 대단히 부족하다는것을 최교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에 따르면 축구는 11명이 치르는 단체경기로서 어느 개인이 설사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단합심이 없으면 경기는 엉망이 되고 감독의 전술배치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개개인의 수준이 낮은것을 단합심을 통해 강한 축구팀으로 키우는것이 가장 빠른 길일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 길을 걸어 정신력을 키워야 연변축구가 살아나갈수 있다는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팀을 틀어쥐자마자 정신력고취에 전력당시 연변팀을 맡고보니 선수들이 선배인지 후배인지 친구인지 뒤섞여 례의란 도무지 찾아볼 없었단다. 또 감독을 우습게 보고 감독에게 인사하는 기본적인 례의도 갖추지 못하고있었다. 그래서 우선 례의 즉 감독과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하는 정신력부터 고취시켰다. 기술이나 체력이나 전술에서 단결력을 강조, 선수들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불러서 인사를 반드시 하게끔 “채찍질”했다. 결과 처음에는 인사성도 없고 말도 반말을 쓰던것이 점차적으로 나아지면서 인사례절도 밝아지게 되였고 후배들도 선배들의 말을 잘 듣는 기풍이 이 팀에 서서이 일어나게 되였다. 당시 주력선수로 있었던 고종훈선수에 따르면 최은택감독이 사령탑을 쥐면서 선수들은 조금도 숨돌릴 사이없이 훈련을 그렇게도 이른바 “악독”하게 시켰단다.하여 1996년도에 갑급팀에서 강급의 변두리를 헤매던 연변오동축구팀을 1997년도에 일약 4강에로 껑충 끌어올려 이 팀은 중국축구협회로부터 “진보가 가장 빠른 상”을 수여받았으며 따라서 연변축구팀이라 하면 모두 겁나하는 팀으로 부상했다. 당시 중국의 한 스포츠언론은 “연변축구팀 선수들은 마치도 들에서 줄기차게 달리는 야생말처럼 좀처럼 지칠줄 몰라 상대방팀이 기진맥진했을 때에는 어디서 오는 힘인지 더욱 기승스러웠고 강자와는 더욱 강해서 이른바 중국에서 강자라고 스스로 자랑하던 팀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했다”고 평했다. 바로 그 힘이 정신력이 아니겠는가.중국축구에 대해최은택교수는 당시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 한국, 일본은 동북아시아에 속하는데 축구의 기술적 능력이나 수준은 비슷하다. 중국선수들의 체력이나 기술이 한국에 떨어지는것은 없다. 중국이 자주 한국에 지는 주요원인은 주로 정신력이다. 중국선수들은 직업에 대한 근성이 몸에 배지 못했다. 축구경기에서 정신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좋은 일이고 이런 정신력을 키우자면 우선 “머리부터 씻어야 한다”. 그는 또 축구는 전쟁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전술을 알아야 할뿐만아니라 상대방의 력사, 문화, 풍속도 알아야 한다. 중국축구가 한국을 이기지 못하는것은 바로 한국의 축구를 모르기때문이라고 했다.당시 한동안 최은택교수는 연변팀의 사령탑을 내놓을 생각도 했다. 그 원인이 바로 중국축구 심판의 편파적인 추태였다. 당시 연변팀 대 북경팀과의 경기뿐만아니라 12륜경기에서도 심판의 불공정한 판결을 받았다. 최은택교수는 내가 몸도 좋지 않고 돈을 받자고 여기에 온것도 아닌데 연변팀이 손해를 보고있으니 괴롭고 굉장히 불쾌하다고 밝혔다.당시 슬라프나(중국국가팀 첫 감독)는 최교수에게 돈을 얼마나 받는가고 문의했단다. 다 아는바와 같이 그는 일전 한푼도 받지 않고 연변팀을 이끌어 왔던것이다. 황차 이런 판국에 중국땅에 와서 감독을 맡아나선 자신이 바보같다는 느낌이 들어 떠나고 싶은 마음을 잠시 가졌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변팀이 이기든 지든 자기가 선수들을 대신해 모든 책임을 지려는 각오는 돼있었다. 중국축구가 발전하자면 심판원이 심판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얘기했다.최은택교수가 1999년 3월에 중문으로 “축구와 예술”이라는 책을 청도에서 펼쳤는데 그는 이 책을 펴내면서 “1년 더 되는 시간에 중국에서 감독을 맡으면서 중국축구를 잘 알게 되였다. 여기에서 재삼 얘기하고 싶은것은 축구는 육체적인 대항성 운동일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정신력의 싸움이므로 중국축구가 발전하자면 반드시 심각하게 결핍한 정신력에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피력했다. 국가팀 감독설이 나왔을 때최은택교수가 연변팀 사령탑을 잡으면서 고종훈선수도 제2의 청춘이 꽃피기 시작했다. 한동안 소침하게 지냈던 고종훈선수가 당시 연변팀의 주력순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일찍 고종훈선수가 국가팀에 가담했을 때 최은택교수는 몇번이나 당시 국가팀을 맡았던 척무생감독에게 고종훈의 능력을 과시하게 하라고 얘기했지만 척무생은 시종 듣지 않고 국가팀이 국외의 몇차례 월드컵예선 경기에서 고종훈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이른바 “척가군단”이 “10강경기”에서 망신을 당하게 되자 중국본토 감독의 명성이 잇달아 일락천장이 되였고 따라서 중국본토에서 감독을 맡은 외국적 최은택교수에게 눈길이 돌려지기 시작했다. 연변구단의 4강신화, 축구팬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의 절박한 호소, 일부 축구관원들의 추천도 잇달았다. 그러나 최은택교수는 기자가 당시 취재시에 그럴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사실 그가 연변팀에 오게 된것은 한피줄이라는 단 한가지 리유에서였다. 연변팀을 잘 춰세웠다면 일개인으로서 죽어도 보람이 있다고 그는 당시에 호매롭게 얘기했다. 자기는 대학교수로 있기때문에 1년이란 안식년이 있어 여기에 왔지만 명년에는 올수 없다고 했다. 만년에 대학에서 조용히 정년퇴직하겠다고 그는 기자에게 얘기했다. 그는 또 세계적으로 보아도 스포츠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듯이 연변팀이 몇차례 이겼다해서 자기를 재차 초빙하려는것은 성급한 처사라고 했다.현시점에서 사색해볼 점한개 민족, 한개 국가의 정신력을 어떻게 보는가? 최은택교수가 연변팀을 떠나 1998년도에 귀국한 뒤 2002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4강의 신화를 창조했다. 최은택감독이 강조하던 정신력은 단순히 축구에만 귀속되는것이 아니라 제반 조선민족의 정체성구축에 굉장히 귀감이 되는 리론이라 하겠다.고 최은택교수의 명복을 빌면서 축구의 정신력과 민족의 정신력이 동심일체라는것을 심각하게 느낄 시기라고 본다. (본문은 흑룡강신문 2007년03월2자,5일자,9일자 3기에 나누어 발표) <<윤운걸기자문집>> 연재 완결
5    14.동북아 엘리트양성중심대학 꿈꾼다(윤운걸) 댓글:  조회:1693  추천:98  2008-08-04
윤운걸기자문집동북아 엘리트양성중심대학 꿈꾼다윤운걸 김진경,그는 중국에서 최초로 그것도 편벽한 지역으로 알려지는 국경도시 연길시에 대학을 세운 미국적 한국인이다.그럼 그는 어떻게 하여 이런 편벽한 지역에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시설이 구전하며 이미 중국국가교육부로부터 몇개 학과를 중점학과로 부상시킨 대학을 설립할수 있게 되였을가? 이 문제의 해답을 찾고저 기자는 얼마전 김진경총장(박사)을 찾았다.     중국에 대학 세울 꿈 어릴 적부터 싹트기 시작    김진경총장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반도를 강점한 시기에 태여났다.그가 어린 시절 때 아버지가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농업학교를 세우면서 중국 동북에 올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나이는 10여살이였다.그가 당시 어릴적에 받은것은 "일본천황의 은혜속에서야 생활이 윤택해질수 있고 일본이 불원한 장래에 미국과 영국을 전승하면 더욱 좋아진다"라는 교육 그 자체였다.이렇게 그는 어린 시절에 철저하게 일본군국주의교육을 받아왔던것이다.그러나 그가 받은 교육과 시대변화는 정반대였다.    소학교(당시 일본이 국민학교라고 호칭)2학년 시절,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일본이 전패하고 광복을 맞게 되자 드디여 자기는 일본천황의 아들이 아니고 일본국민도 아니며 조선반도의 아들이라는것을 알게 되였고 더 나아가서는 조선반도가 일본에 침략당해 경제적인 략탈을 당한것은 물론 민족의 언어,문자마저 박탈당하게 된 치욕을 알게 되였으며 따라서 어린 마음을 앗아갈번 했던 일본의 철저한 로화교육과 기편성 교육을 알게 되였다.광복후에 자기언어로 교육을 받으면서 또 일본이 어떻게 조선반도를 침략했다는 "반일교육"도 받으면서 중학교에 입학했다.그의 나이가 겨우 15살 되던 중학교 3학년때 그는 국가가 다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마음으로 참군했는데 한국에서 나이가 제일 어린 군인이였다해도 과언은 아니다.그는 이 세상에는 전쟁이 없어져야 하고 평화가 와야 한다는것을 깨닫게되였다.동년시절의 이런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장차 커서 반드시 아버지가 밀고나갔던 교육사업을 계승하리라 결심했다.교육사업을 하려면 연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것을 피부로 느낀 그는 광복후에 영국류학의 길에 올라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다.그에게는 대학에서 첫 동양인 졸업생대표로서의 연설할 기회가 생겼다.그는 연설에서 자기는 금후 광활한 천지인 중국에 가서 교육사업으로 자기의 리상을 실천하겠다고 했다.그러자 많은 외국인들은 경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면서 현실적으로 실천할 수 없는 짓이라고 비꼬아 말하기도 했다.그럴수도 있었다.당시 중국대문은 굳게 닫겨져 있어 외국인의 출입은 금물이였다.하지만 불원한 쟁래에 중국대문이 열리리라는 신념을 굳게 믿으면서 그는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전공했고 또 수많은 돈을 벌어 재벌이 되였다.     중국대문이 열리자바람으로 중국 향발   1986년,그는 미국공민의 신분으로 중국에 왔다.그러나 미국공민으로 중국에 오고싶으면 오는것이 아니고 왔어도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고싶어도 마음대로 실현할수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이 당시 중국 현실 그 자체였다.이러저러한 조소와 비난과 각종 저애력이 그로 하여금 리상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느낌을 가지거게 했다.그러나 그는 이런 지역일수록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을 랭정한 시각으로 보게 되였고 아무리 험난하고 고생스럽더라도 애심으로 충만된 리상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것을 마음속으로 다지고 또 다졌다.당시의 중국은 대문이 열리면서 서양세계의 호감은 가지게 되였으나 어떤 대국은 비난의 목소리도 서슴치 않고 내뱉었다.즉 이런 대국은 자기의 자대로 중국을 재고 있었다는 점이다.당시의 중국은 후진국이였지만 이른바 문명선진국이라는 국가도 아주 락후한 력사와 후진국 경험을 했던것이?그래서 그는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 중국을 모독,멸시하는것을 한 동양인으로서 그저 보고만 있을수 없어 중국을 변호하기 시작했다.첫 변호사건은 1989년에 일어난"천안문사건"이다.당시 그는 마침 북경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미국정부는 미국공민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그를 인차 떠날것을 권고했다.그러나 그는 떠날 대신 숙소를 천안문광장을 바로 바라볼수 있는 충문문호텔로 옮기고 력사적인 그 시각을 모두 바라보았다.중국을 변호하기 위해 그는 미국"뉴스저널"에 "미국공민이 본 천안문사태"라는 글까지 발표했다.글이 실리자 그를 중국에서 돈으로 매수했다는 등 이러저러한 여론들이 쇄도했다.그러나 그는 서양매체의 과분하고 편향적인 보도에 질책을 했을뿐이고 또 당시 외국인으로 변호에 나선것은 그가 혼자였다.그리하여 많은 중국인들은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기도 했다.그뿐이 아니다. 90년대 초반기에 미국은 계속 중국의 인권문제를 들먹거리면서 경제제재와 함께 련결시키려고 시도하는것을 보고 또 언론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미국 클린턴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냈다.그는 서한에서 "중국에서 력사상 처음으로 12억 인구의 먹는 문제를 해결한것은 절대 작은 성취가 아니다.중국은 아직 4억 문맹이 있고 서양식 민주주의를 실시하는데는 여러가지 한계가 있다.중국이 중국식 사회주의길을 걷는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므로 미국이 중국인권문제와 최혜국대우를 련계하는것은 옳지 않다."라고 했다.    클린턴대통령은 1994년 6월  그에게 답복편지를 보내와 "중국의 인권련계정책"을 다시 수정하겠다고 했다."인권은 정치사상도 아니고 인류생존의 목표도 아니며 근근히 인류존엄의 필요조건"이라고 그는 말하면?기본인권은 인민이 밥을 먹을수 있고 직장을 얻을수 있는것이라고 했다.개방이래 중국은 굶어죽는 사람이 없어졌고 중국 동북3성은 곡물이 적치될 정도에 이르렀는데 미국같은 나라가 자기의 자대로 중국을 재면 안된다고 했다.     중국에 대학을 세우려는 꿈이 현실로    김진경총장은 중국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대학을 창설해 지금까지 18년 생활하면서 중국의 발전하는 모습을 피부로 느낀 산 증인인이다.그는 "중국이 그제날 5천년을 지내면서 왕권의 력사가 변하지 않았는데 모택동,등소평의 위대한 사상으로 왕권의 력사가 인민의 력사로 변한것은 천지개벽이다"라고 하고나서 궁극적으로 중국식 사회주의 개혁개방으로 즉 그제날의 투쟁방식이 아니라 인민의 복지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중국정부가 노력하고있는 점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현재 많은 나라들에서 큰 문제점들이 속출하고있지만 중국만은 안정과 번영으로 매년 8-9%의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다는것은 세계경제력사에서 희소한 일이고 또 모든 국가도 경의로운 눈길로 보고 있다는 점이 특히 주목할 일이라고 했다.또 중국에서 최초로 외국인을 고등교육에 참여할수 있게 한것은 바로 중국정신이라고 했다.현재 개교 불과 14년만에 연변과기대의 많은 학과들이 국가중점학과로 지명 되였고 중국속에서의 국제대학으로 13개 나라의 교수진들이 모여 전일제교육을 실시하게 된것은 중국정부의 관용과 갈라놓을수 없다고 했다.    현재 이 대학을 졸업한 학생 100%를 각 회사들에서 앞다투어 받아가고 있는데 그중 20%가 세계 각국에 류학을 가고있다.이런 교육이 실천에로 옮겨진데는 평화와 인애를 학생들에게 꾸준히 부여한데 있다고 그는 말하고있다.그것은 바로 그가 전쟁이란 동란시기엔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정처없이 떠돌았는가를 자기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기자가 몇번 이 대학식당에 가서 오찬을 한적이 있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교수진들은 학생들과 똑같이 식권을 내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경의스러운 마음이 생겼고 또 매번 대학을 다녀 갈 때마다 학생들은 무릇 어른을 만나면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못했다.이런 모습을 보면 이 대학은 교수와 학생사이는 물론 사회와도 평화 인애의 화기애애한 기분이 봄날처럼 감돈다는 느낌을 가졌다.    동포사회를 보는 시각과 대학생 양성목적   그는 중국조선족집거구가 해체되는것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있다.지금 중국 200만 조선족사회 특히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연변조선족사회의 조선족인구 감소,학생감소로 인한 학교감소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고있다.중국의 소수민족정책에 의해 소수민족들이 끼리끼리 모여 살고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소수민족 자치를 준것은 중국밖에 없다.미국도 다민족국가로서 민족자치를 실시하지 않았고 모두 섞여 살고있다.끼리끼리 모여사는것도 좋지만 경제,문화 등 요소로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사는것은 시대의 흐름이다.조선족의 이동을 퇴보라고 볼것이 아니고 또 끼리끼리 모여 사는것이 발전과 성공이 아니므로 다른 민족과 다같이 어울려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지는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국계가 불원한 장래에 없어지기 마련이므로 국제사회에서의 협소한 민족주의는 금물이다.유럽에서 독일이 전쟁치욕을 철저하게 반성한 결과 현재 유럽은 이미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가 작년 11월 26일에 일본 마쯔무라 외무상의 초청에 의해 도쿄에 갔을 때에도 그들에게 일본도 독일과 같이 철저히 반성하고 아시아의 일원으로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특히 아시아의 일원으로,친구로 될 때야만 아시아의 평화가 온다고 그는 역설했다고한다.전 세계적으로 일본제품은 선호하지만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반성해야 한다.중국 역시 불원한 장래에 국경이 없는 시대가 돌아온다.특히 중국 동북3성은 조선,한국,일본,러시아 등 나라와 잇대여 있는 삼각지역으로서 서로 협력하고 서로 부족점을 미봉하면서 공동번영의 길을 걷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동북아는 유럽보다 지하자원,인적자원,자연자원,기술자원이 매우 풍부하므로 모든 국가들의 상호 협력이 매우 필요하다.이런 절박한 필요성을 감안해 연변과기대를 동북아 평화와 공동변영의 길로나가는 엘리트들을 양성해 동북아련합을 구축하는 "산실"로,중국,한국,조선,일본 등 동북아 젊은 엘리트들이 모인 동북아 평화"산실"로 부상시키고 있다고 그는 설명하고있다.    (본문은 2005년 4월 6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4    12.우리는 희망의 "까레이스키“(윤운걸) 댓글:  조회:2006  추천:99  2008-07-30
윤운걸기자문집우리는 희망의 "까레이스키“윤운걸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가 어떤 지역이고 그곳의 우리 동포들 즉 고려인들이 어떻게 정착했고 현재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연변대학 박창욱 역사교수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지난날부터 우리동포를 러시아어로 "까레이스키"즉 고려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곳 동포들도 그대로 자기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한다.    피눈물로 얼룩진 고려인의 과거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50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고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에는 약 5만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총 80여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블라디보스톡(일명 해삼위)는 울창한 삼림속을 방불케 하는 경치가 아름답고 자연이 잘 보존돼 있는 도시로 그야말로 한편의 산수화를 방불케하는 해변도시이다.    이런 해변도시에 50만 명 고려인의 근원지이며 마음의 고향이라 불리는 신한촌이라는 마을이 100여년전에 형성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신한촌은 일제시대에 고향을 떠났거자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로 갔던 우리 선조들이 불라디보스톡에 만든 집단 거주지이다.이곳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무기와 탄약을 구할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권총도 바로 신한촌에서 구했고 동지들과 새끼손가락을 끊어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곳도 바로 신한촌이다.    블라디보스톡의 해변을 따라 걷노라면 고려인들의 집이 늘어선 번화가가 있는데 이 번화가의 이름이 "서울"이다.그러나 1937년에 러시아정부가 한국인의 모습이 일본인과 비슷해 일본과의 전쟁에서 구분이 안되고 또 일본의 간첩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해서 신한촌과 그 주변지역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켰다고 한다. 강제이주 한인들의 숫자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6만 80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도중에 굶고 병들고 해서 5분의 1의 한인들이 처참하게 숨졌다.다섯 명 중의 한명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그 참경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강제이주로 기차에 실려진 역은 바로 블라디보스톡에서 자동차로 약 한시간종정도 가는 라즈돌로예역이다.이 역에서 한인들이 강제로 기차에 몸을 실어야만 했는데 그것도 객차가 아니라 화물차였다.정부의 명령에 의해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살던 집을 떠나야 했고  떠날 때 살림살이조차 챙기지도 못한 채 시베리아의 무서운 찬바람을 맞으며 화물차에 올랐다고 하니 그 얼마나 처참했겠는가.    신한촌 하면 또 이(리)상설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이상설선생은 한국 충천북도 진천에서 태어나 1917년에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독립운동가이다.1907년 7월에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이(리)준과 함께 불라디보스톡에 와서 헤이그밀사 파견에 깊이 관여해 헤이그망국평화회의에 파견돼 한국독립을 주장했고 이어 연해주에서 선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중 순국했다.그의 유언에 따라 시체를 화장하고 뼈가루는 스이픈강물에 뿌렸다.이상설선생의 기념비는 우수리스크에서 외곽을 나가면 발해성터가 바로 보이는 수이픈강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고려인 이 베체슬라브(블라디보스톡 고려인문화자치주 회장,연해주고려인 문화재단 단장)은 처음에 신한촌에 기념탑을 세웠을 때 현지의 스킨헤드족들이 기념탑에 아주 나쁜 글을 자주 써 기념비가 자주 훼손되는 바람에 이렇게 작은 울타리를 만들고 지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말 글이 사라져가는 고려인사회    동북아평화연대 강경주 사무국장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 중에는 10대 후손들도 있고 4-5대 후손들이 많다.60-70살의 고려인들도 간단한 생활용어나 구사할 뿐이고 깊이 있는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다.그러다 보니 후손들도 우리말은 물론 우리 글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뻔한 일이다. 더욱이 지난날 한글학교가 거의 없다싶이  해 우리말과 글의 정체성을 고려인들에게서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이베체슬라브 회장도 우리 말을 잘 하지 못해 통역의 도움을 받아서야 취재가 가능했다.고려인 4대로 1937년에 강제이주를 당했다가 돌아온 이베체슬라브 회장은 비록 우리말과 글은 잘 알지 못하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고 살아 숨쉬고 있는 고려인들의 삶의 현장을 현지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2년전에 "아침햇살"이란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해 현지방송국에 전달해 방송하고 있다고 한다.많은 러시아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지금도 불이익을 많이 당하고 있어 매주 두 차례씩 한시간의 방송으로 러시아인들에게 생활용어 정도의 우리말을 가르쳐주고 우리 민족노래와 고려인들의 생활사를 러시아어로 방송한다고 했다.그는 기자에게 미리 녹음한 "아침햇살"프로그램을 들려줬다.한 예까쩨리나라라고 하는 83살의 고려인할머니가 유창한 러시아어로 자기가 겪은 고려인 이민사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흘러간 옜노래 아리랑 등 애환이 담긴 우리 민족노래도 흘러나와 코끝이 찡했다.    경제적인 사정도 여의치 않아 초라한 방송 장비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겨울에는 난방시설도 제대로 되지 않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혼자서 열심히 방송을 견지해 나가면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 민족의 끈끈한 생명력을 재확인 했다.그에 따르면 현재 블라디보스톡에는 약 3천 5백여 명의 고려인이 살고있는데 그들은 주로 교사,의사,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있다.정부 요직에는 고려인들이 중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특히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국록을 타던 수많은 지식인들이 졸지에 물가폭등으로 궁지에 몰린 것이 오늘의 고려인 실정이다.우리말에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공부는 시킨다"는 속담이 있듯이 고려인들도 공부만은 열심히 해서 지식계층에서 많이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그에 따르면 불라디보스톡 수산대학 학자인 김 게로르기니꼴라예비치도 러시아에서 유명한 수산학자라고 한다.    서울이라고 간판을 건 불라디보스톡의 한 식당에서 젊은 세대 고려인 남녀를 만났다.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이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쓰라와워와 (27살)는 스무살 즈음에야 자기가 조선인 후예라는것을 알게 되었고 스탈린 집정시대에 할아버지세대로부터 조선에서 건너왔다고 들었다고 한다.현재 어른들은 모두 우즈베크스탄에 살고 있고 생활이 너무 어려워 이렇게 식당에서 잡일을 한다는 그는 한국으로 가는 것이 꿈이라면서 이제부터라도 한글을 열심히 배우겠다고 했다.식당에서 함께 근무하는 유리아(허순희,23살)도 할아버지,할머니가 한국에서 건너와 지금 이렇게 살고있다면서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남자친구는 러시아인이라고 한다.    우리 말과 글 언어환경은 그토록 열악하고 또 생활용품은 비싸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고려인들의 현실이다.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물가는 걷잡을수 없이 폭등했다.게다가 연해주는 다른 지역보다도 경제가 낙후해 월급은 중국월급과 거의 맞먹지만 물가가 비싸서 구입은 상상초차 할 수 없었다.한 예로 돼지고기 1킬로그램에 인민폐로 80여위안이다.그래서 웬만해서는 돼지고기를 사먹기 힘들다고 한다.기자가 우수리스크의 한 슈퍼에 들어가니 소시지 1개가 인민폐로 40위안씩이나 했고 보드카 한병도 40-50위안이나 했다.    우수리스크에 한인마을 선다    제반 연해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는 바람에 우수리스크 고려인들도 강제이주를 갖다가 오고 왔다가 가기를 반복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의 삶의 현장은 지금도 기막힌 상황은 마찬가지다.그래서 한국의 동북아 평화연대 등 단체와 뜻 있는 민간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오는 고려인들의 삶의 현장을 개척하려고 많은 애를 쓰고 있다.이런 단체와 민간인들은 고려인들에게 우수리스크 외곽에 "우정마을"이라는 한인마을을 건설하고 있는데 러시아인들은 이 마을을 "고려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동북아평화연대 강경주 사무국장에 따르면 계획은 1000채의 집을 짓기로 되어 있지만 여러가지 원인으로 지원을 약속했던 사람들의 사정 때문에 지금까지 33채밖에 짓지 못했다.우수리스크 외곽은 넓은 땅들이 많은데 무공해 농사에는 적격이다.그래서 현지 정부도 고려인들이 우수리스크에 와서 농토를 개간하는 것을 적극 환영하고 해외에서도 농토를 개간하는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그러나 "우정마을"에 집 한 채를 짓는데 4만 달러나 든다고 하니 지원없이는 고려인들이 여기에 다시 돌아와 땅을 개간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 있다.    모스크바에서 장사를 하다가 이곳에 오게 된 리에우와안또노치(남,63살)는 현재 1500평방미터의 땅을 청부 말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토마토 ,고추,무,오이 등 채소를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지금 우수리스크에는 동북아평화연대를 비롯한 한국단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학교도 세우고 러시아한인아주 140주년 기념관도 세우기로 계획하고 있지만 자금난과 인력난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고려인 중 러시아 국적도 취업권도,사회보장도 없이 무국적자의 멍에를 안고 이국인의 지위에서 고통과 빈궁 속에서 시달리는 고려인들이 수없이 많지만 앞으로의 희망을 안고 열심히 뛰고있는 현실이 바로 연해주 고려인사회다.이들을 일어서게끔 하려면 고국은 물론 중국동포를 비롯한 전 세계 해외동포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요하다고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강경주 사무국장은 "고려인은 물론 중국동포들을 도와야 하는 것은 그들을 한국국적을 가지게끔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잘 살게끔 돕는 것이므로 고국에서 당연히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우수리스크의 한 재래시장은 연변 조선족들이 거의 독점 경영을 하고 있어 이제 고려인과 중국 조선족의 새로운 사회구도가 형성될 조짐도 보이고있다.연변 화룡시에서 간 한 조선족아주머니에 따르면 이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대부분이 중국조선족들이 차지하고 있고 구체적인 통계는 없지만 약 1000여명의 조선족이 중국의 의류,생활용품 등을 여기에서 팔고 있는데 한달수입은 최소 만여위안이라고 한다.이 재래시장은 마치 연길시 서시장을 방불케 했다.     취재를 마치면서 러시아의 고려인은 더 이상 역사의 수난 속의 고려인이 아니고 어둡고 낙후한 고려인이 아니며 살아있는 고려인,활기가 넘치는 고려인,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고려인,한겨레와 러시아인들과 함께 손잡고 나아가는 고려인들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본문은 2005년 10월 23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3    11.한글발전에 공헌한 조선족학자 (윤운걸) 댓글:  조회:2399  추천:107  2008-07-29
윤운걸기자문집한글발전에 공헌한 조선족학자  — '한글발전유공대상' 수상자 류은종교수 윤운걸 연변대학의 류은종교수(전임)가  한국정부로부터 “한글발전유공대상”의 영예를 안고 미국 하브드 대학 등 5개 나라의 한글발전에 공헌이 있는 학자 교수들과 나란히 로무현대통령의 포상을 수여(2006년10월)  받았다는 것은 실로 조선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하다면 그가 어떻게  이렇듯 훌륭한 한글학 교수, 그것도 중국에서 뛰여 난 한글학 교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였는가?“워낙 내가 한글과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에 입학해 조선 글을 익히게 되면서 그때로부터 우리 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위대성과 집현전 학자들의 꾸준한 노력의 열매가 얼마나 탐스럽고 알차고 우리 문화유산에 빛을 뿌렸는가를 알게 되었다”고 류은종교수는 한글공부와 연구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경위를 밝혔다.1966년 문화혁명시기에 류은종 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연변대학 교사들과 학생들의 추천을 받아 북경 민족출판사에 가서 자본론,반듀링론을 비롯한 6권의 번역과 모택동 저작 번역, 모택동 시사번역에 참가하게 되였다.당시 모든 학교가 문이 닫기고 연구기구마저 마비상태에 있는 조건에서 유일하게 모택동 저작 번역실 만이 활약적 이였단다.전국에서 이름있는 번역가들과 언어학자 10명이 모여 저작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연구기구가 없는 조건에서 모택동 저작 번역실에서는 언어 규범화가 절실 했다.모택동 저작에 실린 어휘들은 뽑아 규범화대상으로 선정하고 류은종 씨는 언어조사 팀과 함께 동북3성 조선족거주지구를 돌면서 언어조사를 했던 것이다.대중에게 쓰이는 언어가 어떤 것인가를 조사한 후 모택동 저작 번역에 반영했다.당시 언어 사용에서의 초점은 중국조선족들이 쓰는 말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아니면 조선의 평양 말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있었다.그때로 보면 당연히 한국어는 입밖에도 내놓지 못하는 현실이였다.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일찍 70년대부터 언어연구소에서 우리말 규범을 책임지고 우리말 서사규범과 원칙제정을 위해 류은종 씨는 중국 동북3성 조선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돌면서 대표적인 방언지역,조선어문사업기관,교육기관을 찾아 다니면서 우리말 사용 실태를 조사했다.이 기초에서 우리말 서사규범 팀을 구성하고 우리말 맞춤법,발음법,띄어쓰기,문장부호법 등 서사규범원칙을 제정함에 있어서 그는 맞춤법과 문장 부호법 등을 작성했다.1980년대부터 류은종 씨는 조선어사정위원회의 상무리사로 활약하면서 어휘규범원칙의 제정,어휘규범화사업의 선두에서 우리말을 지키고 우리말을 살려쓰기 위한 사업을 이끌어나감과 아울러 신문,간행물,공개된 출판물들에서 어휘사용실태를 조사하고 한자어,외래어를 람용한 자료들을 수집 정리했다.지속적인 조사와 수집정리 끝에 그는 마침내 “조선말맞춤법사전”을 편찬하는데 성공했는데 이 사전은 후세에 “조선말규범집”을 묶어내는데 훌륭한 자료로 제공되기도 했다.1987년8월 류은종 씨는 조선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에 입학해 1990년4월까지 선후로 “조선어의미론연구”등 수 편의 박사론문을 펴냈다“중한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그젯날 한국과의 교류가 없었던 관계로 중국에서의 한글 연구와 보급은 거의 정지상태나 다름없었기에 하루속히 남북언어통일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한 조선족 언어학교수로서 미루지 못할 사업이였다”라고 류은종 씨는 설명했다.그는 우선 용어통일사전편찬에 참가해 컴퓨터 통일용어사전을 ISO국제 통일기준으로 나가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경주해 왔다.그는 체육용어통일 자료수집을 위해 여러 차례 평양을 오가면서 지속적인 연구를 해왔고 또 조선학자들을 연길에 초청해 서로간의 교류를 다그쳤다.그리하여 그는 기타 연구일군들과 함께 체육용어와 관련된 올림말 1만 2000여 개를 수집 정리하여 2008년 북경올림픽 “우리말 체육용어사전”편찬의 기초작업을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2005년은 류은종 씨에게 있어서 범상치 않은 해였다.절강성 소흥시 월수외국어대학 동방언어학원에서 그를 부원장으로 초빙했던 것이다.정다운 연변대학을 떠나서,또 사랑하는 친척 친인,벗들을 떠나 저 멀리 절강성으로 간다는 것 역시 이미 60에 나는 그로서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그러나 저 멀리 절강성에서 까지 우리말,우리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초빙했을 때에는 반드시 가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이 기간 그는  월수에서 “한국어 열독(상,하)을 편찬 출판했고 또 지금 한국어정독 교과서 (시리즈)와 한국력사,한국문화,영화로 배우는 한국어 등 교과서 편찬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류은종 교수는 지금까지 저서(공저포함)20여부,론문 80여 편을 펴냈으며 국가급,성급 이상의 우수성과상과 우수도서상을 여러 차레 수상했으며 특히 연변동서방문화연구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중국경내의 조선족 문화유산정리사업과 발굴,계승,발전,보존사업을 힘있게 추진하기 위해 무려 280여종의 책들을 무료로 펴내주는 쾌거를 지니게 되였다.“한국 로무현대통령의 상을 받고 월수에 돌아오니 저를 위해 굉장한 경축대회를 열어 참으로 감동되였다.특히 주한중국대사관과 한국문화위원장 박영대씨가 중국교육부 외사사에 축하신을 보내왔고 모처럼 경축대회에 상해,녕파,산동,항주 등 전국 각지의 150여명의 한글연구전문가 교수와 학생들이 참가해 선물하는 생화를 받았을 때 나의 일생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페부로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본문은 2007년9월24일자 흑룡강신문에 발표)  
2    7.민족교육의 허점은 어디에(윤운걸) 댓글:  조회:1706  추천:138  2008-07-23
윤운걸기자문집민족교육의 허점은 어디에-연변대학 교육심리학부 황형규박사 인터뷰윤운걸우리 민족의 희망은 우리 민족교육의 발전여하에 달렸다. 새로운 천년에 우리 교육의 줄기찬 발전을 시도해보자면 오늘을 열심히 진맥하는중에서 우선 허점과 부족점을 찾고 그것을 대담히 정시해야 할 것이다.이런 시대적인 감각을 느끼며 기자는 교육학을 깊이 전공한 연변대학 교육심리학부 황형규박사를 찾았다.문;조선족교육전망연구는 어느 정도인가?답:지금까지 중국 조선족교육에 대한 전망연구는 아주 빈약한 실정이다.그러므로 새 세기를 넘게 되는 오늘에 와서 반성해도 크게 반성해야 될 일이다.지금 교육계에서는 조선족교육의 구조,자금 등등의 현상만 거론할뿐 실질적으로 깊은 연구는 하지 못하고 있다..문:그럼 조선족학교 교육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다고 보는가?답:우선 조선족교육은 우리 민족의 주인을 양성하는것이 아니라 일군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라고 본다.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주인보다는 성실한 일군이 되기를 더 강조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뿐만아니라 교육방침은 교육방침대로 가고 교수일선에 선 학교들에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를 제시하고있다.우리 조선족학교 교육의 목적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살수 있을가?’하는 생존확보수단이였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이 교육목적은 어찌보면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교육목적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가장 원시적인 목적이 아닐수 없다.그동안 우리는 주인의 자질을 키우는 교육에는 등한시했고 그대신 충직하고 유능한 일군을 양성하는 교육에 정성을 다해왔다.다행스러운것은 그래도 일부학교들에서는 주인의식을 가진 학생양성에 눈길을 돌리고있다는 점이다.연변1중에서 제기한 교육목표는 우선 ‘수령품성을 가진 걸출한 민족인’이다. ‘걸출한 민족인’이란 현대화건설에 필요한 다방면의 자질을 겸비한 인간이며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력사적사명감을 안고 과감히 헌신할수 있는 인간이다.다음으로 우리 민족교육은 조선족의 진흥보다 사회정치형세에 따른 교육이라고 본다.중국 교육이 무산계급정치를 위하여 복무하고 사회주의건설에 이바지하며 사회정치형세의 변화에 따라 상응하게 변화되는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소수민족교육은 그 민족적특색이 짙어야 한다.특히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하에서 락후한 민족경제의 진흥을 위해서는 민족인재를 많이 양성해야 한다.조선족경제가 날따라 락후한 책임을 추궁한다면 우리의 교육이 제일 큰 책임을 져야 한다.문:조선족학교 교육의 체제면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답:우선 조선족학교 교육은 획일적이고 군사문화적이다.전반 나라의 교육체제가 획일적이고 군사문화적인것처럼 조선족교육도 집단적 획일성을 체제로 하고있기 때문에 상급자에 대한 무조건 존경의 권위주의를 요구하고 젊은 세대들의 개성과 다양한 생각을 길러주지 못하고있어 꼭같은 구호만 외우고 꼭같은 생각과 행동만 하도록 훈련시키고 경쟁시키는것을 사명감으로 삼게 한다.다음으로 조선족학교기관의 설치와 담당인원의 배치가 모두 사회체제를 심통히 닮았다.민족지역은 민족자치교육의 권리가 있으나 그 권리를 충분히 행사하지 않고 언제나 중앙과 성정부로부터의 어떤어떤.몇호몇호 정신에 의해 교육의 일체를 운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속에서 교원은 단순 지식전달자로서의 기능만 강요당하고 교유자로서의 자률성과 창조성은 억압당하고 학생들은 인간으로서의 전면적발달이 억제당하고있다.세번째로 우리의 교육은 제도권학교교육의 중심이였다. 지금까지 조선족교육은 학교교실안에서의 교과서내용중심의 지식습득과 기술훈련일뿐이다. 비록 유치원으로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완정한 교육체제를 갖고 있지만 사회교육이나 산업교육,가정교육은 아주 미개발상태이다.문:교육내용면에서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가?답:조선족교육은 아주 페쇄적이다. 우리의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웃과 동포,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이나 친근감을 갖도로 가르치지 못하고있으며 교원과 학생사이, 반급과 반급사이, 학교와 학교사이에 페쇄적 장벽이 있다. 특히 각급 학교의 교육내용으로는 다른 나라의 문화와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도 리해할수 없다.그 결과 이질적인 대상과 타지방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배타적정서가 학생들 심리에 싹튼다. 다음으로 비민족의 교육이다.우리 교육은 단순한 지식전수의 응시교육에만 응부하고 있지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은 몹시 홀시하고있다. 학생들은 더 말할것도 없고 허다한 교원들까지도 민족 고유의 전통사상과 민족문화, 민족력사를 너무도 모르고있다. 한마디로 우리의 교육은 학생은 공부하는 기계이고 교원은 기계가 돌아가게 하는 기술자에 불과하다. 진학률이 높으면 우수학생, 우수교원으로 평가되여 공부는 좋고 나쁜 학생을 가르치는 유일한 기준으로 되고있다.문:세 세기를 맞는 오늘 조선족교육의 화제는 무엇인가?답:조선족교육은 민족화,주체화,민주화,인간화의 교육으로 나가야 한다.오직 이래야만이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않고 동화되지 않으면서도 타민족, 타문화와 더불어살 수 있고 더불어 사는 민족으로 발탁할수 있다고 본다.(본문은 1999년 12월24일자 흑룡강신문에 실렸음)
1    3.조선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윤운걸) 댓글:  조회:1589  추천:99  2008-07-16
윤운걸기자문집조선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연변대학 정판룡 교수 인터뷰윤운걸얼마 전 기자는 연변대학 정판룡 교수를 만나 조선족사회의 발전 및 진로에 관련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현재 중국에서의 조선족의 위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총화적인 각도에서 법칙성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사실만을 가지고 론할 것이 아니라 리성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을 분석해야 만이 21세기에 새로운 도약을 할수 있을 것이다.20세기는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정착한 세기라고 할 수 있다.조선민족이 중국으로 대량 이민해오기는 19세기중엽부터라 하겠다. 물론 학술계에서는 19세기 20년대요,40년대요,60년대요 하지만 확정적으로 그 어느날부터 라고는 말하기 어렵다.19세기60년대에 조선북부지역에서 련속 재황이 일어나 리재민들이 월강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중국에 넘어온 초기 이주민들은 청나라의 민족차별시정책의 유린을 몹시 당했는데 청나라는 우리 민족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처럼 머리태를 땋고 호복을 입을 것을 강요하면서 “변발이복,귀화입적”의 동화정책을 썼다.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전후하여 많은 우국지사들도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므로 그때부터의 이민은 단순히 살기 위한 이민만이 아니라 상당수가 나라를 찾기 위한 정치망명이민이였다. 그리고 흑룡강지역은 일본이 만주땅을 침략한 뒤에 대량적인 이민이 생겼다.우리 민족의 이민은 1945년도까지였다고 할 수 있는데 50년 사이에 많이 류입되였다. 그러기에 20세기는 우리 민족이 이 땅에 들어와 정착한 시기라고 불수 있다.정착문제에서 거주국과의 관계문제가 제기된다. 거주국에서 신임하고 그 국가에서 뿌리를 박아야 하는 문제인데 이는 해외에 나간 우리 민족이 그 어느 곳에서도 부딪치게 되는 문제이다. 이민한 사람이 거주국의 말을 잘 듣고 거주국에 유리해야지 불리하면 배척을 당하게 된다. 우리 민족도 진통을 겪었다. 우에서도 얘기했지만 청나라 때에는 환영을 받지 못하였기에 분규도 많았다. 그 뒤로는 봉계군벌 즉 동북군벌이 우리 민족을 배척하는 정책을 썼다. 왜나하면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에 조선사람은 자기 사람이라고 하고 동북을 칠 때 조선사람을 많이 리용했고 또 조선사람을 보호한다는 수법을 썼기 때문이다.그래서 장학량군벌은 당시 조선사람을 두 번째 일본사람으로 봤다. 장개석의 국민당정부도 우리 민족이 소수민족이라는 것을 워낙 승인하지 않았고 우리 민족을 다만 “한교 ‘대한민국교민’”라고 여겼다.허나 유일하게 중국공산당은 우리 민족을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고 단합의 대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여기에 온 우리 민족은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이고 또 일제를 반대해 나섰고 지주,자본가를 반대해 나섰으니 이는 중국공산당의 주장과 맞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온 우리 민족은 20년대부터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제와 싸웠고 또 중국의 해방을 위해 국민당과 싸우면서 피를 많이 흘렸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그 어느 민족보다 적극적으로 시종 진두에서 싸우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에 기여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중국공산다의 신임을 얻고 중국인민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떳떳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주인공의 위치를 찾게 되었다. 이는 20세기 다른 국가에 이민 간 동포들과 비교해볼 때 아주 잘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조선족이 중국이라는 이 큰 땅덩어리우에서 한족들 속에 섞여 살면서도 자기의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우리가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국의 민족정책이 좋았기 때문이다.비로 소수민족이 자기의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킬수 있다는 정책이다.이 정책이 없다면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민족성을 보존할 수 없다.다른 하나는 집거구가 형성되였기 때문이다.집거구가 형성되였기에 조선족자치주도 세워졌고 언론매체도 세워졌다.그리하여 자기의 문화도 잊지 않고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러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은 거주국과의 마찰은 없는데 민족성을 보존하는 면에서 문제가 있다. 러시아의 경우 강제이민이다보니 집거구가 형성되지 못해서 민족성 보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는 많은 조선족집거구가 있는데 연변집거구,할빈을 중심으로 하는 송화강집거구,심양소가툰을 중심으로 하는 집거구, 목단강집거구 또 그 속에는 조선족향,촌이 있어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근거지가 있고 이것이 또 온상이 되었다. 셋째로 민족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문화의 선진성에 있다.우리 문화가 한족문화보다 높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와 정착해보니 다른 동네의 한족보다 문화자질이 높았고 또 벼농사도 잘 했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애들의 공부만은 등한시하지 않았다.-해외동포와 조선족은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세가지면에서 그 차이를 보아낼 수 있다.첫째로는 주인공위치이고 둘째로는 민족성보존이고 셋째로는 생활수준이다. 이 세가지면에서 볼 때 미국의 동포들은 거주국과의 관계는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주인공위치도 큰 문제가 안되고 잘 살기도 하지만 민족성보존과 발전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다. 미국에 사는 동포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우리 말을 잘 모르고 민족문화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동포들은 정치적문제가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공위치,민족성보존이 큰 문제로 되고 있다.허나 살기는 잘살고 있다.러시아의 동포들은 강제이민이다보니 주인공위치,민족성보존에 큰 문제로 될 뿐만 아니라 잘 살지도 못하고 있다.-조선족이 잘 살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조선족이 여기로 이주한 목적은 잘 살기 위해서였다. 못살기 위해 외국으로 나가는 법은 없다. 헌데 우리는 지금 세계 어느 나라의 동포들보다도 못살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중국이 아직 발전도상의 나라(실지 워낙 락후하다)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한)인은 중국의 땅만 보았지 “집형편”은 보지 못했고 또 건너오기 쉬웠기 때문이다.다른 하나의 중요한 장기적인 전쟁과 정치투쟁이였다. 조선족은 이민온 날부터 즉 19세기말부터 20세기 50년대까지 싸웠다.의병투쟁,독립운동,항일투쟁,해방전쟁,조선전쟁 또 이어서 반우파투쟁, 문화대혁명 등 정치운동만 하다보니 언제 경제건설을 할 기회가 있었는가?연변은 또 구쏘련과 국경을 사이둔 곳이기에 극히 페쇄되였으며 공업기초란 운운할 수 없는 지역이였다.개방이 되면서 우리 조선족은 생활향상을 위한 조급성이 생기였다.조급성이 생기니 맹목성도 생기게 되었다.이에 따른 집거구인구감소로 연변만 해도 400여개소 중소학교가 문을 닫게 되었다. 물론 생활의 질은 어느 정도 향상되였으나 자녀교양에 큰 문제가 생기고 있고 문화교육질이 낮아지면서 민조선진성도 낮아지고 있다.그제날 모택동시대에는 조선전우들과 함께 싸웠기 때문에 우리 민족과의 감정이 깊었다. 특히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상태에 있을 때 우리 민족은 국민당과 별로 거래하지 않고 무산계급감정으로 공산당에 의거해 잘 싸웠기 때문에 전쟁시기 중요한 경비는 다 조선족전사들이 맡을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허나 지금은 달라졌다. 특히 조선(한)반도가 분단된 상태에서 한국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또 구쏘련이 민족분렬로 해체되면서 정부는 민족문제에서 그 어느 때보다 경각성을 높이고 있는네 이는 우리가 응당 리해해야 한다.-그러고 보면 주인공위치를 확고히 해야 하는 문제도 제기되는것이 아닌가?그렇다.우리는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이다. 그제날 우리 민족은 이 땅에서 공동히 나라를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제일 말을 잘 듣는 민족이였는데 지금은 법을 잘 지키지 않고 말을 잘 듣지 않는 민족으로 되었다.그래서 주체민족의 눈에는 정치상의 불신임,도덕상의 불신임이 생겼다.또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연변 땅은 한반도 땅이요, 하는 바람에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우리가 100여년 동안 중국에서 힘들게 쌓은 신임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위치도 확고히 하고 민족성도 발전시켜야 한다.특히 경제발전을 다그쳐야 하지만 너무 성급해서는 안된다.중국의 특성에 맞게 실제에 근거해서 처사해야지 맹동해서는 안된다. 주인공의 자세를 잃고 있는데 대해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국외나들이,도시진출로 조선족거주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는데 조선족의 대량 이동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대이동은 불가피적이다.꼭 벼농사만 지어야 하고 농촌을 고수해야 할 필요성은 없다.그제날 어디에 정착했으면 거기를 고수하라는것은 틀린 틀린 생각이다.우리가 대대손손 몇천년 살아오던 고향도 떠나올라니 왜 더 살기좋은 고장으로 이동하지 않겠는가?척박한 두메산골에서만 살지 말고 우리도 발달한 지역으로,바다가의 해변도시에도 나가 살아야 한다.지금 리론적으로는 농촌집거구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왜 그럼 당신은 거기에 가서 살지 않고 남만 거기서 살라고 하는가?”럭ㅎ 반문하고 싶다.미국에 가보니 동포가 많이 살고있는 곳이 첫째로 로스안젤스이도 둘째로 뉴욕이고 셋째로 시카고이다.일본도 동포가 제일 많이 살고있는 곳이 대도시인 오사까와 도꾜이다.헌데 우리가 왜 멍청이라고 산골만 차지하고 대도시에 이동해서 살지 말아야 하는가,지금 학교가 줄어 드는것은 이동과도 관계되잠ㄴ 관건적인 문제는 아이를 하나만 낳기 때문이다.교육,문화가 발달한 연길시의 조선족인구는 불어나고 있는데 이는 매우 좋은 일이다.교육,문화를 발전시키려면 애들이 발달한 지역에서 교육을 받아야 되지 않겟는가.이는 일존 진보로 봐야 한다.우리는 개혁개방의 기회에 우리의 거주분포를 조정해야 한한다.흑룡강은 할빈을 중심으로 하는 큰 집거구를 새로 형성하고 료녕은 심양을 중심으로 하는 큰 집거구를 형성해야 한다.교통이 발달하고 경제가 발달한 지역에 집거구를 형성하고 열심히 돈을 벌게 되면 거기에 자연히 학교가 서게 될것이고 교육,문화기과도 발전하게 될것이다.현재 북경에도 우리 학교가 서고있고 산동에도 우리 학교가서고있지 않는가.물론 새로 일떠선 집거구에 우리 학교가 세워지자면 수속 때문에 애로가 많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반드시 국영학교만 세워야 한다는 도리는 없기에 민영학교도 설수 잇으니 우리가 가서 배워주면 되지 않는가? 여기서 더 언급할 것은 전망없는 두메산골은 내버려두고 전망있는 농촌은 교통을 하루속히 발전시켜 도시화로 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 연변도 돈을 번 사람들이 조선족이 많이 모여사는 연길,룡정 등 도시에 투자해 민족경제를 하루 빨리 춰세워야 한다.취재를 마친 기자는 조선족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지성인들이 거시적인 안목으로 조선족의 실태를 분석하고 진로를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본문은 흑룡강신문 1998년6월6일자 1면에 실렸음, 원문 제목은 “21세기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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