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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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嚴打 댓글:  조회:4518  추천:65  2005-03-14
嚴打 우상렬/연변대학 부교수 嚴打, 중국에서 공안들이 치안질서를 잡는 상투적인 한 방법. 우리말로는 집중단속이 되겠다. 한국 경찰도 이와 마찬가지의 행태를 취하고 있다. 무슨 ‘불법체류집중단속기간’이요, ‘음주운전집중단속기간’이요, ‘학교폭력집중단속기간’이요하는것이 그 보기가 되겠다. 그리고 현대최신식기기를 리용한 ‘몰래카메라작동지역’이요, ‘비디오카메라24시록화중’ 등 표지판도 같은 맥락에서 리해할수 있다. 그런데 중국공안들이 거저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무슨무슨嚴打기간같은것을 설정해놓고 눈이 화등잔만해 돌아다니는 반면에 한국경찰은 무슨 ‘단속기간’이요 하는것을 사전에 뿐만아니라 그 기간에도 공공연하게 눈에 잘 띄이는 곳에 요란스럽게 프랑카트를 내걸어놓고 눈을 밝히는것만이 좀 다를뿐이다. 50보에 100보, 피장파장. 나는 이 嚴打기간이요, ‘단속기간’이요하는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래서 오늘은 그 부당함을 좀 꼬집어볼까 한다. 그럼 嚴打기간이요, ‘단속기간’이요하는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적어도 법 및 그 집행 그리고 범법자들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줄로 사료된다. 첫째, 법 및 그 집행의 객관적인 형평성을 잃게 된다. 법은 일단 정해지면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수 없는 객관적인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법의 엄숙성을 지키는 기본전제로 된다. 그런데 일단 嚴打기간이요, ‘단속기간’이요하는것을 설정했을 때 같은 법조목이라도 여느때보다 이 ‘기간’의 범법에 적용할 때 이른바 嚴하게 단속하게 되는 실정이다. 이것은 이 ‘기간’을 벗어난 평상시의 법적용과 형평성을 잃게 됨으로써 법의 객관성도 상실하게 된다. 여기에 상응하여 이것은 객관적인 랭정함을 유지해야 할 법집행자들의 주관적인 감정요소를 자극하여 이 ‘기간’에 범법하는 자들에 대해 ‘嚴打기간인데도...’, ‘우리를 무시해도 한도가...’하는식의 전근대적인 ‘괘씸죄’같은것이 발동되여 법집행의 객관적인 형평성을 잃게 한다. 법 및 그 집행이 객관적인 형평성을 상실할 때 현단계 로선, 방침, 정책같은 것 혹은 그 어떤 ‘장관의지’나 관료들의 기분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행태도 면할수 없다. ‘형세가 이러하니 이번에는 이것을 엄하게 다스려...’, ‘현재 이것이 기승을 부리니...’, ‘그 놈 좀 혼내줘...’등은 그 보기가 되겠다. 그리고 인맥이니 뢰물이니 하는 인위적인 요소의 개입에 따라 법집행이 고무줄놀음이 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기간’에 공안이나 경찰들이 범법자들을 얼마 잡으면 무슨 두당 뽀나스 얼마요 하는 관행도 지극히 애매하거나 억울한 ‘범법자’들을 만들 소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 ‘嚴打기간’이 대개 새해나 설명절때 이루어져 공안들이 술소비돈 마련을 한다는 뒤소문도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로부터 공안이나 경찰이 미끼를 던져 걸려들게 하는 범죄조장도 없지 않아 있을것이다. 이 ‘기간’ 설정은 또한 공안이나 경찰을 이 ‘기간’에만 신경을 쓰도록 만들고 평상시에는 해이해지게 만드는 소지도 갖고 있다. 둘째, 상습적인 진짜 범법자들은 오히려 이 ‘기간’을 피해 다 잠복한다. 이들은 이 ‘기간’과 평상시 범법의 輕重緩急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 ‘기간’만 피하면 다다는 요행심리속에 평상시범법심리가 더 조장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반복되는 이 ‘기간’을 겪으면서 싹수가 터 범법방법과 수단이 고단수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이 ‘기간’설정은 평상시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우연한 실수로 이 ‘기간’에 ‘범법’했을 때 오히려 큰 코 다치는 격이 되고만다. 이로부터 이런 선량한 사람들을 실의에 빠뜨려 오히려 상습적인 범죄의 길로 내몰수 있다. 보다싶이 이 ‘기간’설정은 범죄심리 차원에서도 대단히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 ‘기간’설정은 공안이나 경찰에게 더러운 교역의 빌미를 제공할 소지도 없지 않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嚴打기간’같은것을 아무리 비밀에 부친다해도 실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것은 언녕 공공연한 비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공안이 이 ‘嚴打기간’비밀을 어떤 더러운 교역의 수단으로 삼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 언젠가 매스컴에서 때린 경찰이 암세력과 결탁하여 ‘단속’비밀을 흘려보냄으로써 업주와 거래를 한 사실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보다싶이 이런 ‘嚴打기간’, ‘단속기간’설정은 법치사회의 행태가 아닌 전형적인 人治사회의 행태이다. 완전히 법치사회가 이루어진 선진국에서는 이런 무슨 ‘嚴打기간’이요, ‘단속기간’이요하며 요란스럽게 부산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온전하고도 세밀한 법을 제정하고 정말 법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원칙을 적용한다. 그리고 법집행자들, 이를테면 법관들은 법의 객관성, 형평성, 엄숙성을 지키기에 최선을 다 하고 최일선에서 뛰는 경찰은 정상적인 근무로서 항상 범법자를 잡아내는데 촉각을 세운다. 물론 그들도 방법과 수단을 강구한다. 이를테면 깜직한 프랑스경찰은 잠복근무를 하면서 일반적인 ‘음주운전’이나 ‘과속운전’같은것을 잡아내기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기간’같은 설정은 하지 않는다. ‘嚴打기간’, ‘단속기간’설정은 범죄집중단속으로 인한 일정한 사회적효과같은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우에서 본바와 같이 법 및 그 집행이나 범죄심리 차원에서 볼 때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니 법치사회로 가는 우리는 이 ‘기간’을 없애야 한다.
10    민족사회건설 온라인네트워크가 한몫해야 댓글:  조회:4182  추천:62  2005-03-14
민족사회건설 조선족온라인네트워크가 한몫해야 우상렬/연변대학 부교수 개혁개방 이래 우리 조선족은 발 빠른 대응을 해왔다. 중국 관내로, 해외로 우리는 잘도 떠났다. 그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른 흐름으로 인하여 심각한 화제로 대두되는 문제의 하나가 인구감소로 인한 조선족 집거구의 흔들림이다. 여기에 지난세기 90년대부터 절대적인 마이나스 인구출생률이 합세하니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조선족의 가장 큰 집거구인 우리 연변의 경우만 보아도 소재지 연길의 조선족 인구가 37%로서 개혁개방전 절반을 차지하던 인구비률로부터 현재 그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자치주의 절대적인 민족인구수 요구로부터 볼 때 이것은 자치주의 존립여부에 관계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그리고 잡거지역 조선족집거구도 절대적인 인구감소로 해체될 위기에 있다니 이 또한 심각한 문제 가 아닐수 없다.여기에 잇따른 교육문제도 심각한 편이다. 그래서 우리 조선족지성인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며 대안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한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무슨 2세낳기운동을 벌려 인구출생률을 높인다거나 미국의 코리아타운처럼 새로운 조선족집거구로서의 코리아타운이나 거리를 만든다든가하는것이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그리고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어 참 보기에 좋다. 우리 연길의 40대에 들어선 내 또래들가운데는 이미 2세를 안고 흐뭇해하는 친구들이 제법 있다. 그리고 북경의 望京이나 심양의 서탑, 산동성 연태, 청도같은데 실제로 코리아타운이나 거리가 형성되여 조선족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어 그럴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눈에 보이는 이런 가시적인것들이 꼭 실속있거나 확고한것이라고 보기 힘들다는것이다. 나는 중국 인구 몇십억에 조선족 인구 200여만 할 때 벌써 기가 탁 죽어버린다. 우리가 얼마만한 인구를 확보해야 인구적우세를 차지하겠나 말이다. 우리가 인구를 절대적으로 아무리 많이 늘려도 그것은 망망한 중국인구의 바다속에서 그야말로 滄海一粟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구수로 조선족자치주확보니 뭐요 하는것은 별 의의가 없다. 자치주확보는 어디까지나 자치주력사와 문화에 기초한 중국공산당의 소수민족에 대한 민족정책의 배려에 의해야 될줄로 안다. 여기에 현재 개방된 사회에서 인구류동은 필연적인것으로 한곳에 매여둘수도 없는 노릇이니 문제는 더 확실해진다. 그리고 코리아타운이니 거리요 하는것도 주로는 직업을 비롯한 리해득실에 의해 우연히 결집된 경우가 많은만큼 그것은 내실을 기하지 못한 貌合神離 일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그런만큼 언제든지 쉽게 떠나고 갈라질 소지가 없지 않아 있다. 초봄의 눈덩이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한된 인구를 감안할 때 그 또한 어디까지나 제한성을 띨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요새 좀 늦은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온라인네트워크를 자꾸 떠올려본다. 일단은 조선족온라인네트워크를 구성하자는것이다. 몇년전에 어떤 사람이 네트워크상에 사이버국가, 그리고 근간에 심심찮게 생겨나는 사이버대학설립은 우리에게 힌트하는바가 많다. 우리도 네트워크에 조선족세상을 꾸려나가자는것이다. 이로부터 조선족을 온라인으로 하나로 묶어보자는것이다. 조선족의 구심점을 컴퓨터네트워크에서 확보하자는것이다. 그중 하나의 고리를 례로 든다면 교육은 민족진흥의 관건이라 우리도 각종 인터넷학교를 꾸리자는것이다. 소학교로부터 대학교에 이르는 전일적인 교육체계를 갖춘 학교를 말이다. 물론 이런 학교에서는 조선족의 력사 및 전통문화에 대한 교육 및 홍보도 맡아나서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조선족의 정신적인 민족동질성을 확보하는 바탕이 된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뭐니뭐니해도 경제적인 리해득실을 따지는 시대라 조선족경제를 같은 리해득실우에 선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통합할수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될줄로 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각종 경제정보의 교환은 더 말할것도 없고 조선족경제실체들이 상호 보완할수 있는 련결고리역할을 해야 한다. 이로부터 조선족기업체제품홈쇼핑도 한번 마련해볼 필요가 있을줄로 안다. 그리고 조선족경제실체의 수익금 및 조선족들의 적극적인 참여하에 금융조합같은것도 구상해볼수 있다. 일제식민지때 조선사람들이 외채갚기위해 떨쳐나선 경우나 한국IMF때 금붙이모으기캠패인 등의 경우를 놓고볼 때 우리민족에게는 개인의 리해득실을 떠나서도 얼마든지 뭉쳐나설수 있는 저력이 있다. 관건은 명분문제이다. 민족의 장원한 발전을 위한 대의명분을 잘 내세우면 된다. 물론 이 금융조합은 저축에 따른 리자, 그리고 융자 등을 통한 본격적인 은행구실을 해야 될줄로 안다. 그리고 구체적 업무진행은 온라인서비스를 통해 진행하면 될줄로 안다. 여기서 한국의 네트워크를 통한 은행온라인시스템을 도입하면 될줄로 안다. 그리고 민족의 금융조합 등에서 창출되는 수익금은 조선족장학금기금회같은것을 설립하여 조선족학생들, 특히 발전전도가 촉망되는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충당되도록 한다. 이로부터 우리 민족의 인재들이 정녕 민족적혜택을 받으며 커 가도록 한다. 그래서 이들이 커서, 인재가 될 때 내심으로부터 조선족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일제식민지때 일제의 금융잠식에 맞선 조선은행 , 그리고 현재 거대한 영향력을 발생하고 있는 화교들의 화교은행, 이외에 부문별 금융기관, 례컨대 우리나라의 농업신용사나 한국의 농협(은행)같은것도 결국은 다 같은 맥락에서 리해할수 있다. 이외에 이런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민족적행사를 벌리수 있다. 작게는 학생들의 백일장, 크게는 조선족이면 누구나 참여할수 있는 전반 민족한마당축제같은것을 벌려 민족동질성 및 귀속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장을 마련하여 민족구성원들지간에 서로 돕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될뿐만아니라 대화, 교류의 장을 마련하여 살아가는 얘기도 서로 나누고 고민거리를 푸는 화합의 장이 되게 해야 한다. 물론 문학예술의 발표교류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정서함양에도 대단히 좋을줄로 안다. 특히 현단계 조선족신문잡지경영이 어려운 마당에 네트워크를 통한 인터넷 조선족문학예술원지개척은 작은 투자에 큰 효과를 가져오는 일거량득의 일로 될것이다. 사실 현재 조선족 지성인들은 이런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매우 효과적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례컨대 중국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에서 꾸리는 홈페이지 ‘문화산맥’이 말 그대로 조선족문화함양과 홍보에 크게 한몫 하고 연변대학 김관웅 교수가 꾸리는 홈페이지 ‘우리동네 문학동네’는 말 그대로 조선족문학예술의 향연을 베풀고 있으며 김삼 총편이 이끄는 홈페이지 ‘조선족연우포럼’은 사랑과 지혜를 나누는 조선족의 모임으로서 조선족사회문제,민족문제에 관한 과 를 통하여 활기찬조선족사회만드는데 필요한 포근한 쉼터, 깊은 대화, 활기찬 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제각기 노는 홈페이지보다는 조선족온라인네트워크라는 타이틀하에 유기적으로 련결되여 하나로 아우러지는 전반 조선족의 홈페지가 되였으면 한다. 그리고 여기에 민족동질성 차원에서 조선과 한국을 아우르는 코리아온라인네트워크가 이루어져 보다 넓은 범위에서 민족적인 교감을 형성할 때 조선족은 그대로 존재하게 될 뿐만아니라 발전의 전기를 마련할수 있게 될줄로 안다. 현대는 컴퓨터시대라 온라인네트워크, 이것이 가장 손쉽게 조선족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길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이것이 당분간 많은 컴맹의 존재 및 프로그램개발문제 등 이러저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당장 실현에 옮기기에는 시기상조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지향적인것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2005. 3. 14
9    뉴스콤플렉스 댓글:  조회:5376  추천:60  2005-03-11
뉴스콤플렉스 우상렬l연변대학 부교수현대인간들은 알게모르게 많은 콤플렉스에 싸여 자기의지와는 관계없이 코꿰인 소신세의 안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뉴스콤플렉스다. 무슨 정보통신사회요 하는 지금 세상은 이것을 더 부추기는듯 하다. 그럼 뉴스란 무엇이냐? 쉽게 말하여 세상 돌아가는 최근간의 소식쯤으로 리해하면 될듯하다. 세상이 사람사는 세상일진대 먹고 싸고 자며 정상적으로 돌아가다가 좋든나쁘든 삐꺽하고 정상을 벗어나는것들이 다 좋은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고대 로자가 상상속에 구상한 ‘鷄犬之聲相聞而人不相往來’하는 ‘寡人小國’의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들은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뉴스에 대한 관심도를 점점 더 높혀왔다. 현대인간들은 뉴스와 차단되거나 하루의 뉴스를 알지 못하면 괜히 가마우의 개미처럼 안절부절 못하거나 덩달아 허전해난다. 현대인간들에게 신문의 급속한 확산, TV뉴스시청률상승은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그럼 인간은 왜서 뉴스에 집착하며 콤플렉스증세까지 보이게 되는가? 뉴스콤플렉스는 인간의 구지욕, 호기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인간은 구지욕, 호기심의 만족을 위해 항상 ‘개처럼 흑흑 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 인간은 일상의 정상을 벗어난 새로운 그 무엇, 이른바 뉴스에서 강한 구지욕, 호기심의 만족을 느낀다. ‘사람이 개를 물었다’, 좋은 뉴스거리. ‘개가 사람을 무는’ 정상을 역전시켰기 때문. 인간은 일상의 정상을 많이 벗어난 뉴스거리일수록 눈이 번쩍 뜨이며 구지욕, 호기심을 최대한대로 만족받는다. 뉴스콤플렉스는 인간의 안전수요에 의해서 생겨나기도 한다. 모종 의미에서, 특히 부정적인 의미에서 몸에 와닿는 일상의 정상을 벗어난 뉴스거리는 인간의 안전수요에 대단히 역행하는것이다. 이를테면 살인사건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하겠다. 인간은 바로 이런 뉴스거리에서 정신을 차리며 자기의 안전수요를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전을 확보해 나간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국제화라 얽히고설힌 더 없이 복잡한 국면이 펼쳐질뿐만아니라 瞬時萬變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국면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 복잡하고도 새로운 국면을 파악하기에 힘에 겨웁다. 그러나 적자생존이라 살자면, 잘 살아나가자면 힘에 겨웁더라도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린다. 조금만 정신탕개를 풀면 남한테 떨어지는듯 하다. 그래서 현대인간들은 늘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한것은 인간의 안전수요하고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뉴스콤플렉스는 바로 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고저 내지는 해소하고저 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뉴스콤플렉스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인간 대 인간의 뉴대감에 기초한 깊은 인간적동정에 의해 기인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동류의식, 인도주의라는것이다. 뉴스거리형성의 가장 원초적바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과 대립해왔다. 자연에 비해 인간은 약자다. 인간은 뭉쳐야 자연을 전승할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속에서 생겨나는 모든 이변들은 전반 인류의 뉴스거리가 되기에 족하다. 이번 인도네시아의 해일피해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그리고 인간은 종족, 민족, 나라별로 뭉쳐 산다. 이로부터 인간적협력의 相反相成의 한 모멘트로 인간지간에는 라이벌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바로 이 라이벌관계로부터 다른 사람 사는데 눈을 돌리게 된다. 라이벌관계가 밀접하면 할수록 더 신경을 써서 많은 뉴스거리, 특히 부정적의미에서의 많은 뉴스거리를 발견해낸다. 현재 글로벌화, 특히 시장경제가 전세계를 강타하게 되자 사람들은 직접 부딪치며 그 어느때보다도 ‘타자’ 즉 다른 사람, 다른 종족, 다른 민족, 다른 나라를 많이 의식하게 되면서 홍수가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뉴스거리에 정신을 못차린다. 사람들은 이런 뉴스거리에 신경을 쓰며 라이벌경쟁에서 기선을 잡으려고 한다. 이로부터 뉴스콤플렉스는 따놓은 당삼이다. 뉴스콤플렉스는 또한 뉴스에 대해 先讀爲快, 先睹爲快의 先占을 함으로써 남보다 더 똑똑해지는듯한 착각, 그리고 先占한 뉴스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일종 먼저 앎을 뽐내는 과시욕을 만족받는데 기인한다. 이로부터 최초로 내보내는 뉴스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새 뉴스를 접하게 되면 남한테 횡설수설 얘기하는것으로 뉴스콤플렉스를 푼다. 그리고는 새 뉴스를 기다리며 다시 뉴스콤플렉스에 사로 잡힌다. 보다싶이 인간은 이래저래 뉴스콤플렉스에 싸인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데는 이 뉴스콤플렉스를 효과적으로 리용할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뉴스거리는 분명 일상의 정상을 벗어난것이되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로 대별해볼수 있다. 뭇사람들이 숭앙할 무슨무슨 모범이 났소 하는것이 전자에 속하겠고 자연재해나 살인강도사건같은것이 터졌소 하는것이 후자에 속하겠다. 지금까지의 뉴스관행을 보면 사회주의쪽에서 좋은 뉴스를, 자본주의쪽에서 나쁜 뉴스를 많이 선호한것같다. 이것은 사회주의쪽에서 ‘따라 배우기’효과, 자본주의쪽에서 警戒효과를 노린 매스컴의 특성과 관계된다. 교육차원에서 론의하면 긍정적인 교육과 부정적인 교육의 갈래판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나라 문화대혁명시기 TV가 보급되지 않은 마당에 정식영화를 돌리기 전에 꼭 한 10분간 시간을 내여 ‘新聞簡報’, 그것도 정치관련 뉴스로 가득찬 ‘新聞簡報’를 내보낸것은 극단적인 한 사례로 볼수 있다. 인간의 뉴스콤플렉스를 자극하는데는, 바꾸어 말하여 뉴스의 흡인력 차원에서 얘기할 때 나쁜 뉴스가 분명 더 효과적이다. 나쁜 뉴스가 그만큼 충격감, 자극성, 신선감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시장효과에 영합한 자본주의사회의 매스컴이 성업중인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여기에 견주어 우리를 좀 돌아보자. 언어문자, 인구 등의 제한으로 우리의 매스컴은 시장경쟁에서 경쟁력이 없다. 여기에 우리는 무슨 기관보요, 후설이요 하는데 딱 매여 구태의연하게 좋은 소리, 듣기 좋은 소리 중심의 좋은 뉴스에 치중하니 사람들 식상해한다. 그래서 문화대혁명시기 아무리 ‘放眼世界’요, ‘關心政治’요, ‘緊跟形勢’요하고 현재 아무리 ‘歟時俱進’이요하며 신문방송매스컴의 뉴스거리로 내리먹여도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현재 우리에게 좋은 소리, 듣기 좋은 소리 중심의 좋은 뉴스도 뉴스겠지만 보다 필요한것은 나쁜 뉴스다. 근간에 시장의 자률에 보다 많이 내맡긴 연길시라디오방송이나 가 그래도 이런 뉴스거리에 신경을 써 적어도 뉴스생태에 평형감각을 이루며 시청자나 독자의 뉴스콤플렉스발산을 시원하게 해주고 있다. 뉴스거리는 또한 거창한것과 자잘한것으로 나누어볼수 있다. 전반인류가 주목하는 자연재해 혹은 전쟁폭발 혹은 우리 중국상황하에서는 당대회개최 등등이 거창한 뉴스가 되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수 있는 살인방화같은 시시껄렁한것들이 자잘한 뉴스가 되겠다. 뉴스의 친화도차원에서 볼때 사람들은 자기와 먼 거창한 뉴스보다는 관계가 밀접한 자기와 가까이 있는 자잘한 뉴스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쓴다. 자잘한 뉴스가 일반 사람들의 뉴스콤플렉스를 더 잘 발산시킨다는 말이 되겠다. 대체적으로 볼때 사회주의매스컴이 거창한 뉴스거리를 많이 다루어왔다면 자본주의매스컴이 자잘한 뉴스거리를 많이 다루어왔다. 사회주의는 인간들을 교육하는 정신적효과를 많이 노렸다면 자본주의는 시청률이나 구독률을 높이는 시장효과를 많이 노렸다. 문화대혁명시기 우리나라에서 ‘放眼世界’요, ‘關心政治’요, ‘緊跟形勢’에 초점을 맞춘 뉴스보도, 그리고 한국에서 ‘남똥뀐소리’까지 다 주어대는 뉴스보도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우리 조선족의 경우를 보면 가 당기관지로서 회의관련 뉴스를 비롯한 거창한 뉴스를 많이 다룬다면 는 생활세말사적인 자잘한 뉴스거리를 많이 취급한다. 전반적으로 볼때 사회주의식 거창한 뉴스보도와 자본주의식 자잘한 뉴스보도 사이 평형을 잡는것이 바람직한 뉴스보도의 길인것같다. 이래야만 사람들은 뉴스콤플렉스를 골고루 발산시킬수 있게 될것이다.
8    종교소론 댓글:  조회:4915  추천:51  2005-03-10
종교소론 연변대학 우상렬 종교하면 얼마전까지만해도 談虎變色하는 우리. 우리는 법적으로 종교신앙 자유라 하지만 사실상 누가 종교를 믿는다면 좀 이상한 눈길로 보아온것도 우리. 여하튼 전반 사회분위기, 무드가 종교하고는 좀 삐꺽하는 쪽으로 흘러왔음. 그것은 종교는 아편이요, 미신이요 하며 귀에 따까리 앉도록 교육을 받은 조건반사적 자연스러움 그 자체. 나는 유물론자이다. ‘종래로 그 무슨 구세주가 없다’는 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종교는 분명히 허황하고 미신적인것으로 확신한다. 그런데 과학문명이 찬연히 꽃피는 현대에 있어서조차도 종교라는 이 괴물이 사라지지 않고 그 세를 더 떨치니 나로서는 좀 아연해지고만다. 그래서 괴물로 인정할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만 보아도 6만이 넘는 교회가 있고 해외에 세워진 한인교회는 43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저녁에 서울남산에 올라가 여기저기에 보이는 헤아리기에 바쁜 교회의 붉은 십자가만 보아도 실감이 간다. 사실 종교는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고 선진국을 비롯한 사람이 사는 곳이면 다 존재하는 인간 삶과 문화의 한 양상이다. 그럼 우리는 왜 종교라는 괴물을 못 벗어나는가? 첫째, 주지하다싶이 인간은 감성과 리성의 유기적통일체이다. 이 량자가 엇갈려 나타나거나 얽혀 나타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런데 심층심리학에서 지적하다싶이 우리의 감성에는 생래적으로 맹목적인 신앙심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신앙심을 전제로 한 종교적성향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여기서 신앙심은 그 어떤 대상을 믿고 우러르며 따르는 경향을 말한다. 이로부터 마조히즘적인 안온감과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것이다. 이른바 전지전능한 전일적인 하느님과 같은 허황한 우상에 대한 숭배는 이런 안온감과 희열을 최고로 느낄수 있는 환영에 놀아남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인간은 약한 존재라는 말의 가장 좋은 주석으로 된다. 둘째, 인간은 지적인 동물. 인간은 과학을 통하여 지적인 욕구를 만족받는다. 그런데 현대과학이라는것이 아무리 발전했다해도 그것이 인간의 모든 지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줄수 있는것은 아니다. 새로운 미지의 세계는 항상 련속부절히 우리앞에 펼쳐진다. 인간의 기원 하나만 놓고 보아도 다윈이 과학적인 원숭이진화설을 내오자 이것에 대한 반론 또한 지금까지도 만만치 않다. 그러니 인간기원설은 아직도 중구난방.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기독교기원설은 그 가운데 하나. 인간기원설에 뚝 부러진 정설이 없다고 할 때 하느님창조설이 인간의 이 방면의 지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족하다. 한마디로 말하여 인간이 종교의 우주관, 세계관, 인간관을 통하여 지적인 만족을 받는것은 가장 손쉬운 방편의 하나다. 현대과학의 거장들인 뉴톤, 아인슈타인 등이 과학연구의 끝발에 가서 결국 신의 세계로 떨어지고만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셋째,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 생로병사의 약한 존재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종교는 허황한 약속, 세계에서나마 죽음의 두려움을 갈무리해준다. 천당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 연장선상의 저 세상 설정은 바로 새로운 보다 복된 삶의 시작에 다름 아니다. 이로부터 어쩔수 없이 다가오는 무거운 죽음의 숙명앞에서 천당 운운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그만큼 홀가분해지고 초탈의 맛을 볼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눈물보다는 찬송가로서 동료들의 죽음을 보내는것은 전형적인 한 보기가 되겠다. 넷째, 현대는 화려한 물질문명을 자랑하지만 아직도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재부의 불공정한 분배 및 끊임없는 경쟁의식 등으로 말미암아 절대적빈곤 혹은 상대적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개성이 강조되고 살아나는 시대다. 개인본위로 따로따로 많이 움직인다. 그만큼 현대인간들은 외롭다. 개개인이 남남이다. 이로부터 현대인간들은 인간의 귀소(歸巢, 자궁회귀본능), 귀속(歸屬)본능을 만족 못받고 사는 불쌍한 존재들이다. 생존경쟁이 도사리고 있는 직장생활같은데서 이런 귀소, 귀속본능을 만족받을 여지는 도저히 없다. 현대인간들이 무슨 등산애호단체요, 테니스협회요, 바둑협회요 하며 많은 동호인단체를 무어 휩쓸려 다니며 노는것은 이런 귀소, 귀속본능을 만족받기 위한 모지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종교는 신적존재를 매개로 하여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어느때든지 언제든지 누구나 다 수시로 받아들여 도닥여주는 포옹력으로 인간의 귀속, 귀소본능을 가장 충분히 만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불행한 사람의 귀의처인것이다. 현대 여러모로 많이 소외되고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가장 지성을 자랑하는 과학자들조차 종교에 귀의하는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미국의 종교세력이 한국에서 대성을 하고 한국종교가 그토록 빨리 세를 확장할수 있은 원인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외되고 불행한 자들을 많이 포옹한데 있다. 한국교회계통의 많은 자선단체의 활약은 그 구체적보기가 되겠다. 이상 종교의 보편적론의를 전제로 우리 조선족의 상황을 좀 보도록 하자. 현재 우리 조선족의 종교인수는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는듯하다. 연길교회의 크리스마스같은 특이한 날은 더 말할것도 없고 주일례배때 차고 넘치는 인파만 보아도 그간의 사정을 잘 알수 있다. 그리고 도시뿐만아니라 농촌까지 파고든 교회당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우리도 얼마전, 특히 개혁개방전에는 확고히 맑스주의, 공산주의를 믿었다. 맑스주의, 공산주의가 우리의 ‘종교’이고 신앙이였다. 그런데 개혁개방 및 있따른 시장경제도입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격변기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신앙면에서 많이 헷갈렸다. 이른바 신앙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돈을 믿었다. 돈이면 이 세상 다인줄로 알았다. 우리는 아직도 많이들 이렇게 믿고 있는듯하다. 그런데 진작 돈을 잡고 보니 분명 돈이 이 세상 다 아니였다. 우리는 돈 때문에 너무도 많은 대가를 치렀다. 인격적, 도덕적 파탄, 농촌파탄, 가정파탄, 아이들 교육란맥상 등등 코앞에 들이닥친 많은 문제들은 우리를 경악케하고 허탈감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돈이라는것이 생각대로 그리 쉽게 벌어지는것이 아니다. 손에 있던 돈을 날리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이른바 뼈빠지게 일해도 돈이 안 모아지는! 경우도 있다. 한국초청사기에 우리가 당하고 한국 3D업종에서 우리가 고역을 치르는것은 그 한 보기가 되겠다. 이래저래 우리는 불행하다. 아직 많이 어렵다. 이래서 우리는 우의 첫째의 경우 인간의 본능적인 신앙심이나 넷째의 경우 인간의 귀소, 귀속본능이 발동되여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게 된다. 여기에 맞닥뜨린것이 ‘하느님’품. 물론 우리에게도 우의 둘째, 셋째의 경우처럼 지적인 문제, 죽음의 문제로부터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을것이다. 우리의 경우 많은 종교인들이 늙은이들임은 그간의 사정을 얼마간 말해주고 있다. 종교는 어디까지나 리성적인 령역보다는 감성, 감정적인 령역에 속한다. 그래서 맹신이나 광신으로 흐르기 쉽다. 모종 의미에서 ‘異端’이라는것이 그 보기가 되겠다. 이런 맹신이나 광신이 광적으로 흐를 때는 사회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 얼마전에 우리나라에서의 ‘법륜공’, 일본 옴진리교의 독가스살포사건, 그리고 지난세기말 한국 등 일부 나라의 종교단체에서 나타난 말세론설교 등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종교는 강한 결집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력대의 농민봉기들이 종교의 기치를 많이 들고 나왔고 유태인들이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온것도 다름아닌 종교의 결집력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민족, 한 나라의 지도자들은 종교에 대해 대단한 신경을 쓴다. 그런데 종교문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약이 될수도 있고 독이 될수도 있다. 종교문제, 어디까지나 생각의 문제이고 의식의 문제이다. 그런만큼 강압적인 조치를 취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깨닫게 하고 유도하는것이 상책이다. 이로부터 과학 및 그것의 미래비전 등 과학성에 대한 제시로 인간의 지적인 문제, 죽음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본능적인 신앙심같은것은 잘 유도해서 허황한 우상숭배나 미신으로 나아가게 할것이 아니라 확실한 진리나 과학을 신앙하게 함으로써 승화를 가져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완벽한 사회복지를 마련하여 인간의 귀소, 귀속본능을 비롯한 삶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켜 소외되고 불행한 사람을 줄이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요’사회의 추구, 그리고 선진국에서의 복지사회추구는 바로 이 방향과 일치한줄로 안다. 한마디로 말하여 종교문제는 과학성, 승화, 복지의 문제를 잘 풀이하면 스스로 잘 풀릴 문제로 사회의 약이 되는 존재로 남을것이다. 현단계 우리 조선족의 경우도 여기서 례외가 아니다.
7    웰빙 댓글:  조회:5634  추천:74  2005-02-22
웰빙 우상렬|연변대학 부교수 작년에 한국에 한 둬번 갔더니 심심찮게 눈에 띄이고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웰빙, 웰빙이다. 무엇인가 했더니 영어 well bing을 한국으로 옮긴 말이다. 영어에 햇눈을 뜬 주제라 가만히 음미해보니 좋을 혹은 잘 well에 존재 bing이라 좋은 존재로 리해하고 말았다. 그것이 사람의 삶에 씌이는 말이라 하니 거저 “잘 살기”로 리해하는 것이 무방할 줄로 알았다. 그런데… 잘 살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잘 살려고 왔다. 이것은 天賦人權의 가장 소박하고 보편적이며 진실한 의미. 그러나 잘 살기의 내연은 시기와 때에 따라 다르다. 한국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보리고개” 넘기기 바쁜 1960년대에 있어서 “잘 살아보세”의 의미는 주로 거저 배불리 먹어보는 그런 수준이였다.현재 우리 중국은 溫飽문제에 비중을 둔 小康수준을 추구하고 있으니 한국 1960년대 “잘 살아보세”와 50보100보인셈이다. 이런 삶은 어디까지나 물량공세를 앞세운 삶의 량의 추구에 있다. 이를테면 의, 식, 주 해결에 있어서 량적으로 충분한 만족을 받는데 있다. 그런데 새로운 밀리니엄시대에 들어서 한국(미래지향적으로)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추구하는 잘 살기는 이와 질적으로 다르다. 가장 근본적인 다른 점은 삶의 량보다도 질 추구에 있다. 그들이 외우는 이 웰빙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 그럼 그들의 삶의 질을 좀 보도록 하자. 가장 몸에 와 닿는 의, 식, 주를 좀 보도록 하자. 의, 옛날 어려울 때 못사는 사람들은 앞을 가리는것으로 만족했고 잘 사는 사람들은 일종 신분과시용으로 뽐냈다. 그러나 웰빙식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옷은 정말 별볼일 없는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들도 옷을 적시적소에 따라 입기도 하겠지만 포인트는 어디까지나 자기편리만세 방향으로 가닥을 잡는데 있다. 식, 화학비료에 찌든 대량의 공해식품보다는 소량이나마 무공해식품을 선호한다. 록색식품이라는 말이 이로부터 등장했다. 인공사료로 대량으로 키운 동물의 육류보다는 자연방치상태에서 키운 동물의 육류를 선호한다. 笨鷄니 土鷄니 土鷄蛋이요 하는 말이 이로부터 생겨났다. 주, 청정공기에 일조권이 충분히 보장되고 소음이 없는 친자연적인 주거환경을 선호한다. 아파트단지일 경우라도 거기에는 적어도 록음이 우거져야 한다. 산수가 어우러지면 더 좋고. 그리고 건강센터가 있고 사생활이 충분히 보장되여야 한다. 웰빙식 삶의 질추구는 어디까지나 건강을 둘러싼 과학성을 그 핵으로 하고 있다. 의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콜레스터롤이 생기는 육류보다는 채소류를 많이 섭취하고 록색식품을 먹을지라도 영향을 살리는 차원에서 생식을 많이 하도록 한다. 그리고 생식을 할 경우에도 싹 내지는 씨를 많이 먹는 것이 이상적이라 한다. 요즘 청정바다나 1급수에서 잡은 물고기회나 사시미가 보편화되는 추세도 같은 맥락에서 리해할수 있다. 바로 이 과학성에 기초하여 음식을 달게, 짜게 그리고 너무 맵게 먹지 않는다. 그리고 포식하거나 과음하지 않고 小食小飮을 한다. 그리고 웰빙식 삶의 질추구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것은 물질적인것보다는 정신적인것을 더 추구하는데 있다. 쉽게 말하면 정신적인 즐거움을 더 추구한다는 말이 되겠다. 이로부터 소유욕보다는 소비욕이 강하다. 그러므로 벌고 쓸줄 모르는 구두쇠나 “경제동물”하고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하여 벌어서는 오늘 무엇사고 내일 무엇사고 하며 살림을 늘이는 알뜰살림군하고도 다르다. 개인재산 1호라 할수 있는 집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그들 웰빙족은 집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들 웰빙족은 사용권에 신경을 쓴다. 그들은 집 하나 장만하기 위해 한생을 다 바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 웰빙족은 소유권이 확보되는 집사기보다는 월세나 전세를 내고 드는 사용권이 확보되는 公寓같은것을 선호한다. 편리하게 사용할수 있으면 된다는것이다. 이로부터 인생의 그 어떤 목적에 매여 모든것을 희생하기 보다는 과정적인 즐거움추구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들 웰빙족은 눈에 보이는 먹고 마시고 노는 물질적인 소비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안보이는 정신적인 자아충전, 개발, 확장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들 웰빙족은 우리 현대인들에게 주어지는 많은 여가생활을 독서나 예술감상, 스포츠활동을 비롯한 건전한 취미생활로 보내거나 배우고싶은것을 배우는것으로 지낸다. 현대인들이 많이 하는 등산이나 려행, 탐험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이런 등산이나 려행, 탐험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야를 펼쳐준다. 언젠가 한국 KBS TV에서 진행한 “지구의 오지탐험” 프로그램은 그 생생한 보기의 하나가 되겠다. 그리고 그들 웰빙족은 정신적인 자아충전, 개발, 확장에 신경을 많이 써기 때문에 그만큼 개성적인 삶을 산다. 나만의 개성이 드러나는 삶이 아름다운 삶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놓고볼 때 사실 웰빙은 우리에게 그리 생소한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량적변화가 질적변화를 가져오는 현대적인 삶의 필연적추세이다. 그럼 여기에 비추어 우리 조선족의 삶을 잠간 되돌아보자. 우리는 삶의 물량면에서 그만하면 잘 살고 있다. 그런만큼 우리에게도 웰빙식 삶의 질추구가 필요하다. 우리 조선옷, 그만큼 편리한 옷도 없다. 올방자 틀고앉기, 구들생활… 여하튼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에 딱 맞게 개발된 옷. 녀자들 옷, 생리적인 약점 커버하기에 만점. 한국에서 이런 편리함에 더해 “개량한복”을 고안해내니 금상첨화. 우리 음식, 생식, 날것 좋아하고 자연발효식에 인스턴트음식 저리 가라 한다. 우리 집, 공기 잘 통하고 친자연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다니기를 좋아한다. 한국으로, 로씨야로, 미국으로… 우리의 천지는 넓다. 우리에게는 분명 천생적으로 웰빙식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 또한 웰빙식과 다른 초라한 면도 있다. 조선옷은 분명 거추장스러운데가 있고 음식은 너무 짜고 매운데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촌놈처럼 너무 포식하고 과음한다. 하루저녁 몇차, 몇차까지에 “뚜포”까지, 정말 못말리는데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대해 너무 집착한다. 소유욕이 강하다는 말이 되겠다. 우리처럼 집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끙끙, 사서는 인테리어에 제정신이 아님. 그리고는 집문서를 꼭 쥐고는 아~ 내집 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우리의 자화상은 좀 초라하다. 여기에 내집, 내집 하다가 한술 더 떠 “자손팔대”까지 집장만해주기 위해 끙끙 거리는 우리는 정말 못말려. 이제 우리의 삶의 지표는 빤하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문제이다. 생각문제는 두말할것 없이 중요하다. 생각을 바꿀 때 우리는 현재 어려운 상황속에서나마 웰빙을 맛볼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문제를 하나 설정하여 보자. 우리는 훌훌 잘 떠난다. 그런데 3D일 잘 붙어다닌다.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래서 우리는 억울하고 서럽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는 생각을 좀 바꾸어 보자는것이다. 너무 돈, 돈 하지 말고 외국 가 3D일 하는거, 려행, 탐험쯤으로 홀가분하게 생각해볼수 없겠는가 말이다. 자, 그러면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우리도 한번 웰빙 해보세나!
6    사나이 댓글:  조회:5287  추천:65  2005-02-22
사나이 연변대학 우상렬 나는 어릴 때 “안쪽”에서 한족들과 섞여 살았다. 그때 한족 남자들 우리 조선족 남자들 제일 부러워했다. 한족 남자들 자기네 녀자들앞에서 어깨 축 처지고 손발 싹싹 비비며 꼼짝 못할 때 우리 조선족 남자들 에헴 어깨에 힘을 주고 손으로 머리 쓱 빗어넘기며 너무 당당한 모습에 차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조선족 남자들 어깨 축 처지고 고개 숙인 남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 남자들을 깍듯이 공대하던 우리의 녀자들도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는듯 하다. 리혼만 놓고보더라도 이전에 녀자들이 많이 당했다면 지금은 남자들이 많이 당한다는것이다. 조선족 녀성지성인들조차도 우리 남자들을 씁쓸하게 본다. 우리 조선족의 녀류 중견작가 허련순은 자기의 작품에서 가냘픈 녀자에 기탁해 스스로 자기의 존재마저 잃어버리며 자기 삶의 “성공”을 이루는 인생을 오물이 흘러드는 “하수구”에 비기면서 거기에 “돌을 던져라”라고 저주한다. 그리고 바야흐로 떠오르는 젊은 녀류작가 박초란은 어쩔수 없이 녀자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우리네 남자들 인생을 기생에 습관되다보니 모든 생리기능이 퇴화해 버린 물고기 “꺽저기”에 비유하여 놀리고 있다. 참, 얼굴이 뜨거워난다. 언제 우리 남자들이 이렇게 못나게 변했는지? 참, 현재는 우리 남자들이 살기 힘든 세상인만큼은 분명하다. 현재는 후기공업화사회이다. 소프트 정보화사회이다. 거의 모든 생산이 자동화온라인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 힘의 작동보다는 섬세하고 소프트적인 작동이 더 통한다. 그리고 남아도는 물량 및 소비력을 전제로 한 제3산업인 서비스업이 우후죽순마냥 생겨남에 따라 녀자들의 로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로부터 남자들의 로동력은 많이 도외시되며 “무용지물”이 되고만다. 이로부터 고개숙인 남자들이 량산됨은 더 말할것도 없다. 우리 연길의 경우만 놓고보더라도 지정학적인 특수한 국제적관계 및 민족적기질 등으로 말미암아 다른것은 별볼일 없지만 서비스업은 다른 그 어느 곳보다도 발랄하다. 그래서 우리 연길의 취업상황을 보면 녀자들이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한다. 이로부터 우리 남자들도 많이 고개숙여진 처지가 되지 않을수 없다. 이것은 어쩔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의한 비극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 남자, 사나이들의 역설적인 징표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문제는 단지 고개숙이는데 거치지 않고 어깨까지 축 처지며 진짜 남자-사나이들의 자존을 땅에까지 떨구는데 있다. 자기는 백수건달이 되여 가냘픈 안해가 벌어주는 밥만 날렵날렵 잘 받아먹는 남자들, 자기가 펀히 살아있으면서도 안해를 위장결혼시켜 기생하는 우의 “하수구”나 “꺽저기”같은 남자들, “년상의 녀자”한테 장가가서 “姐姐, 姐姐, 姐姐問題”하며 편하게 살려고 하는 남자들… 이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꼴볼견의 남자들, 우리 남자들-사나이들의 얼굴을 먹칠해도 한정없이 한다. 정말 더는 못 봐주겠다. 원래 우리 남자들은 이러지 않았는데… 고고학자들이 갑자기 덮친 화산재로 인해 페하가 된 어느 한 마을을 발굴할 때다. 화산재에 파묻혀 뒤범벅이 된 남녀시체를 구별함에 골치가 아플가 했는데 결국 덮치는 화산재를 맞받으며 타서 죽은 시체는 례외없이 남자로 판명되여 일대 위대한 인간성증명의 생생한 한 현장이 되였다한다. 그리고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많은 집단살인을 한 죄증으로 현재 발굴된 “萬人坑”을 관찰해보면 남자는 대개 총알받이로 앞가슴을 벌리며 죽어있다고 한다. 그리고 교통사고가 날 때도 남녀동석의 경우 남자가 녀자보다 죽는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그것은 남자가 위험을 맞받아 끌어안기 때문이라는것이다. 보다싶이 남자는 위험한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죽을둥살둥 모르고 본능적으로 녀자들을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것이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멋지게 생겨먹었다. 그래서 녀자들은 본능적으로 우리 남자들의 넓은 가슴을 파고든다. 나는 현실에서 우리 남자들의 이런 멋진 모습을 많이 보아 오기도 했다. 한국 IMF때 나는 마침 한국에 있었다. 줄줄이 정리해고되여 나오는 남자들, 보기에 참 안스러웠다. 처자식을 부양하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참 말이 아니였다. 처자식을 대할 면목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결연히 집을 뛰쳐나오는 남자들. 주동적으로 홈리스(homelesser)가 되는것이다. 그리고는 몇날며칠 배를 굶고 자지 않으면서 자학의 나날들을 보낸다. 이들은 사회적원인으로 인해 불가피적으로 야기된 금융위기에 의해 희생품이 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잘못인양 자학의 심연에서 모대긴다. 이것이 바로 진짜 남자-사나이의 기본자세의 하나이다. 나는 한국에서 또 하나의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한국에도 홈리스가 많다. 이런 홈리스는 대개 남자들이다. 한국에는 종교단체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꾸리는 홈리스를 위한 무료급식소가 많다. 그런데 이런 무료급식소에서 신문지같은것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며 밥을 타먹는 홈리스들이 있는데 나는 저어기 놀랐다. 나는 홈리스하면 대개 생의 모든 희망을 포기한 타락자, 될대로 되라하는자, 알콜중독자등 사회쓰레기들로 알고 있었다. 이런 홈리스가운데도 밥 한끼 얻어 먹는것을 그렇게 얼굴이 가려워하는것은 진짜 남자-사나이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마지못해 홈리스가 되였을뿐으로 가슴속에서는 진짜 남자-사나이의 자존 하나 가득히 품고 재기의 꿈을 꾸고 있었을것이다. 안그래도 며칠전에 한국TV몰카영예시민포착프로에서 홈리스출신이 재기하여 영예시민의 영예까지 따는 광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현단계 진짜 남자-사나이로 되기가 참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시대적특징에 맞추어 진짜 남자-사나이의 개념을 새로 정립한다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男主外女主內의 패턴을 바꾸어 볼수도 있다. 즉 女主外男主內로 말이다. 이것을 陰盛陽衰라 해도 좋다. 그것은 陰陽互補의 시대적인 균형감각을 잘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쩔수 없이 녀자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면 남자들은 집에 들어앉아서 내조를 잘 하자는것이다. 투덜거리며 불만을 부리거나 자비감에 빠져 울며겨자먹기로 “억지신랑”노릇을 할것이 아니라 웃으며 멋기게 당당하게 하자는것이다. 이 면에서 한국남자들이 차를 몰고 출퇴근하는 와이프를 아침저녁으로 바래주고 마중한다는 근간의 새로운 진풍경 하나가 진짜 멋지고 중국에서 한족남자들이 언녕부터 주방에 틀고 앉아 료리를 해제끼는것은 전통적인 중국 한족남자들의 진풍경의 하나이다. 자, 그럼 남은것은 우리 조선족남자. 우리도 진짜 남자-사나이로 한번 되여 봅시다. 우리는 한국남자, 한족남자들을 아우를수 있는 최적의 좌표에 서 있다. 이제 남은것은 단지 우리의 결심뿐. 결심발표!!! 丈夫一言重千金, 그럼 우리 말한대로 해봅시다.
5    “허씬칸우”콤플렉스 댓글:  조회:5145  추천:65  2005-02-16
“허씬칸우”콤플렉스우상렬| 연변대학 부교수 요새 대학교수 버젓이 잘 나가는듯하다. 우리 연길만해도 에헴 연변대학에 있소하면 아, 그렇소!하며 좀은 부러운 눈길로 보는듯하다. 그런데 천만에, 말마소! 우리 대학교수들 힘들어 죽겠수다. 바로 “허씬칸우(核心刊物)”콤플렉스때문이라오. 대학교수들사이 시장경제도태제를 실시하여 국가급 “허씬칸우”에 론문이든지 무엇이든지 발표를 해야 장땅이고 지방급 잡지같은데 발표해서는 꼴찌라는것이다. 그래서 수익도 여기에 의해 좌우지됨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러니 자연히 “허씬칸우”콤플렉스에 걸려 우리 대학교수들 자나깨나 너도나도 “허씬칸우”, “허씬칸우”하며 발을 동동 구른다. 바로 여기에 우리 대학교수의 초라한 또 하나의 자화상이 있다. 대학교수의 정도(正道)나 사명을 잠간 보도록 하자. 대학교수하면 뭐니뭐니해도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가 본령인줄안다. 이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정삼각형우에 굳건히 설 때 대학교수의 위상이 바로 선다. 현재 우리 대학교수들을 볼 때 승다죽소(僧多粥少)라 차례지기에 바쁜 강의에 열심히 하지 않을래야 않을수 없는것으로 인재양성은 그럭저럭 되는판이고 “허씬칸우”에 내기 위해 아득바득하니 과학연구쯤 역시 되는것으로 보아 무방한줄로 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봉사에 있다. 현재 우리 대학가에 있어서 “허씬칸우”의 고유료에 비겨 사회봉사는 말 그대로 봉사인셈이다. 신문, 잡지같은데 원고료없는 글이나 라지오방송, 텔레비 무료출연은 더 말할것도 없고 가령 유료라 하더라도 그것은 “허씬칸우”의 고유료에 게임이 안된다. 그러니 우리 대학교수들의 마음도 자연히 “허씬칸우”고유료에 끌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대학가에는 바쁘오, 뭐요 하면서 무료원고나 출연은 아예 사절하는 동취(銅臭)의 구린내가 나고 있다. 이로부터 대학교수들이 맡아야 할 고상하고도 레벨 높은 정신적인 사회봉사가 멍들고 죽어가고 있다. 잡지나 신문, 방송에 흐드레 잡소리가 많은것은 그 한보기가 되겠다. 우리 연변의 경우는 더 심한줄로안다. 조선글이나 말을 매개로 한 고급적인 사회봉사감이 워낙 적은데다가 우리 조선족교수들까지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나는 교수일반을 떠나 우리 조선족교수에 대해 좀 얘기하려고 한다. 조선족 교수, 우리 200만동포의 엘리트들이다. 우리는 일단 스스로도 이런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자부심을 가질 때 사명감도 살아난다. 그럼 엘리트란 무엇인가? 엘리트에는 많은 멋진 타이틀이 붙겠지만 적어도 지성이 안받침된 리드십으로 개괄해볼수 있다. 일반적의미에서 이런 엘리트들의 리드십이라는것이 굳이 거창한 정치적인것보다는 정신적인 정도나 비전을 제시하거나 보여주면서 이끄는것이다. 그래서 엘리트들은 기회나는대로 글을 쓰고 연설을 하며 사회에 참여하고 봉사해야 한다. 한 민족에게 있어서 이런 엘리트들이 죽어지낼 때 그 민족도 죽게 되는것이다. 우리 연변대학은 명실공히 조선족대학이라고 말할수 있다. 학생은 더 말할것도 없고 교수도 우리 조선족교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는 쌀 한줌에 어렵게 창업했고 오늘도 어렵게 꾸려가고 있는듯하다. 다른 대학에 비해 교수들의 돈주머니사정이 여의치 못하다. 그만큼 교수들의 돈주머니를 넉넉히 못채워준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허씬칸우”콤플렉스에도 더 많이 빠지는듯하다. 그래서 박사학위소지자 내지는 박사지도교수들까지 돈주머니사정이 좋은 대학으로 줄줄이 가기도 한다. 현재는 시장경제 돈세상이라 이것도 그리 탓할것은 못되지만 적어도 조선족엘리트라는 자부심에 따른 의무와 책임감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오직 이 의무와 책임감을 잊지 않을 때 오늘날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망이 발전한 세월에 어디에 있어나 가나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수, 적어도 우리조선족 대학교수들이 대학교수 본연의 모습을 찾자면 하루빨리 “허씬칸우”콤플렉스를 떨쳐버려야 한다. 주머니가 텅텅 비였어도 쟁쟁 쇠소리나는 대쪽같은 말을 하는 옛선비의 도고하고도 멋진 모습을 떠올려 볼 때다. 선비는 가난해야 되거늘, 예로부터 그 식이 정상으로 가난해왔음을. 가난해야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게 되고 동정하게 되는 법. 그리고 가난해야 사회참여적이고 비판적이 될수 있다. 사회발전은 바로 이런데서 온다. 이것이 바로 청빈락도(淸貧樂道)의 경지. 공자의 수제자 안회가 허름한 집에서 죄기밥 한덩어리 먹고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여유작작하게 웃을수 있는 경지가 바로 이런 경지다. 대학교수, 특히 우리조선족 대학교수들은 바로 이런 경지에서 놀아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비대”해져 옛선비의 깔끔한 그 모습에 부끄럽다. 우리가 이런 경지에서 놀 때 우리는 아직도 많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우리 조선족의 절대 다수와 한덩어리가 되는 기본 바탕이 마련된다. 바로 이럴 때 우리는 일단 감정적으로 하나가 된다. 그래서 우리 대학교수를 비롯한 조선족엘리트들이 민족지성의 빛을 발할 때 우리 민족구성원들은 정녕 그것을 빛으로 받아들인다. 오직 이럴 때만이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은 구심점과 더불어 미래비전을 갖게 되며 민족엘리트들에 대해 숭엄한 경의를 보낼것이다. 엘리트들에게 주어지는 부(富), 그것은 청빈락도경지의 뽀나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현대는 시장경제인만큼 이런 당위성에 선진국의 교수평가제처럼 지방급 잡지같은데 발표하는 “꼴찌”딱지에나마 더 힘을 넣어주고 방송출연가산점, 사회특강가산점 등 다양한 사회봉사 시스템을 구축하여 실제적인 동기부여를 하는 합리적인 교수평가제가 도입될 때 그것은 금상첨화식의 실제적인 동기부여의 뽀나스가 될것이다. 이렇게 될 때 청빈락도의 당위성과 시장경제의 합리성이 조화를 이룬 대학교수, 특히 우리조선족 대학교수의 바람직한 현실적좌표가 이루어질것이다. 내가 연변을 못 떠나가는 리유, 바로 청빈락도에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잘 안되는 글이지만 끙끙거리며 쓴다
4    실속파(實屬派)와 허속파(虛屬派) 댓글:  조회:5084  추천:63  2005-02-16
실속파(實屬派)와 허속파(虛屬派)우상렬| 연변대학 부교수 이가 빠졌거나 금이 간 사기그릇, 식당에 가 이런 거 눈에 띠였을 때 금시 눈이 찌뿌둥해지며 재수 없다는둥 시벌리며 빨리 바꾸어 달라고 야단을 피우는 우리. 그러나 그 식이 정상이라는듯 시무럭히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漢族“맏아바이들”. 내 기억에 어릴 때 이가 빠졌거나 금이 간 사기그릇은 냠냠, 쩍쩍 강아지들이 맛있게 먹는 밥그릇. 그리고 거렁뱅이들이 가련하게 들고 다니는 밥그릇. 그러면서 귀에 따까리 앉도록 많이 들은 “×놈은 ×놈이야! 저런 그릇들을 다 쓰다니. 쯔쯔…”. 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말 漢族들이 더럽고 지저분해서 이가 빠졌거나 금이 간 사기그릇을 쓰는가고 했었다. 많은 깔끔한 한국사람들이 여기에 가세하니 그것은 자연히 정설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좀 “잘 나가면서” 고급식당 나들이를 하면서 이거 아닌데하고 머리를 갸웃하게 되었다. 漢族들이 꾸리는 고급식당에서도 심심찮게 눈에 띠이는 이가 빠졌거나 금이 간 사기그릇. 漢族들 풀이 좀 들어보자. 碎碎가 歲歲라, 歲歲가 平安이라 그러니 결국 碎碎平安=歲歲平安이니 무엇이 나쁘나 말이다. 그러니 좀 碎하고 깨지고 금이 간 사발이 대길하고 복된다는것이다. 분명히 碎해서 궁색하고 초라하건만 덩치 큰 漢族“맏아바이” 멋진 변증법적반전을 한다… 여기에 한술 더 뜬다. 보시오, 이 집이, 이 식당이 얼마나 오래되고 전통이 있었으면 사발이 碎하도록 해 왔겠소? 아아, “漢族“맏아바이”, 그만! 이가 빠지지 않고 금이 가지 않은 그릇만을 고집해온 우리를 오히려 무참하게 만드는 漢族“맏아바이”, 워, 쏸 服라! 혹떼러 갔다가 혹 붙인 셈. 그런데 어쩐지 나는 그 漢族“맏아바이” 붙여준 “혹”이 그리 싫지 않았다. 요새는 심심하면 그 “혹”을 만지작거리며 음미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삐걱찌걱 이런저런 문제가 수시로 생긴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를 골치 아프게 만든다. 그러니 이런 문제들가운데서 큰 시시비비문제는 시시비비를 따져야 하겠지만 우리 인생에 피할수 없이 지척에 보다 많이 깔려있는 자질구레한 “碎”같은 경우에는 漢族“맏아바이들”처럼 자기 합리화를 통해 웃고 넘기는 대범함을 보이는것이 삶의 지혜다. 이가 빠지고 금이 간 사기그릇은 절대 봐줄수 없어서 그런지 놋그릇, 쇠그릇까지 만들어내는 결벽증에 가까운 우리의 깔끔함, 항상 새롭고 완미한 경지를 추구해서 좋다. 그런데 이것은 실속없이 허속에 놀아날 때가 많다. 그 이가 빠지고 금이 간 사기그릇, 사람들이 얼마든지 쓸수 있다. 漢族들 잘 쓰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버린다. 漢族“맏아바이들” 대범함, 우리의 깔끔함. 인간은 대범한속에 느긋이 참고 견디는 끈기가 형성된다. 깔끔함속에는 신경질만 늘고 결국 제풀에 물앉고 만다. 많이 들었을 “돼지우리이야기”, 한번 더 해보자. 좀 쿠린내가 나더라도 참고 들어주기를. 중국사람, 조선사람, 일본사람, 쿠린내 풀풀 나는 더러운 돼지우리에 들어갔다. 누가 오래 견디는가를 내기 했다. 오래 견디는 사람이 그 돼지우리를 가지도록 했다. 결론은 빤 했다. 하루에 목욕 세번하며 제일 깔끔함을 자랑하는 일본사람이 가장 먼저 뛰여나오고 그 다음 두번째로 깔끔하다는 조선사람이 두번째로 뛰여나왔다. 그 다음 가장 깔끔하지 못하다는 漢族“맏아바이”는 아예 나올념을 하지 않고 그만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동무하며 쿨쿨 잘도 자 버렸다는것이다. 그러니 그 살찐 돼지와 돼지우리는 당연히 漢族“맏아바이”꺼! 그 배포유하고 대범함이 얼마나 실속있는가? 카~ 배갈 한잔에 고소한 돼지고기 한점 맛 있게 먹는 漢族“맏아바이”를 군침 흘리며 보는 일본사람, 거기에 후회막급이라 땅을 치며 통탄하는 조선사람. 나는 어릴 때 “안쪽”에서 漢族“맏아바이들”속에서 자랐다. 거무틱틱, 그들 사는 집도 별볼일 없이 거무틱틱. 도저히 사람이 살지 않을것같은 “돼지우리”. 그런데 아침해살이 창살을 비집고 들어올 때면 그 어둠기만 한 집안에서 “一毛, 二毛, 三毛…” 끈질긴 생명들이 부시시 눈을 뜬다. “山高皇帝遠”에 “人多就是力量”이라고 그 무슨 “計劃生育”니 뭐니 무뽑듯이 아이들 많이 낳고 보기. 그래서 농촌도거리제를 실시하자 “一毛, 二毛, 三毛…” 총동원에 한몫 잡은 漢族“맏아바이”. “人多爲患”이라, 흥! 漢族“맏아바이” 코방귀 뀐다. 미국놈들도 우리 중국사람 어쩌지 못해. 미국사람보다 코대 더 높은 漢族“맡아바이”. 나는 좀 커서 연변에 왔다. 버섯모자같은 포근한 지붕을 쓰고 흰 회칠을 한 정다운 초가삼간들, 여기에 가을이 되여 붉은 고추타래들이 매달리고 노란 강냉이들이 황금빛을 내며 마당에 널려 있을 때면 정말 살맛이 난다. 생명이 약동하며 넘칠것같다. 그런데, 그런데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計劃生育”만세에 둘 낳아라는 아이도 안낳는 우리! 우리는 정말“計劃生育”에 너무 깔끔했다. “計劃生育”이 울고 간다. 인구마이나스 성장! 아이러니. 그래서 지금 돈을 주면서 더 낳으라고 야단들이다. 그래도… 아직도 깔끔해 실속을 못 차리나… 漢族“맏아바이” 디디하다. 거러지(거지)궁상은 떼놓은 당상! 우리가 보기에 그렇다. 우리는 깨끗하다. 다 신사다. 하이칼라에 삐까삐까 구두… 그런데 漢族“맏아바이” 죽으면 삿자리밑에서도 베개안에서도, 옷깃에서도 돈이 막 나온단다. 미래를 대비해, 후대를 위하여 차곡차곡 모아두었다는 돈-이것이 漢族“맏아바이들”의 底蘊=실속! 우리는 죽고나면 먼지밖에 안 남는 빈털터리 신세-빛 좋은 개살구=허속! 아직도 한국인에게 악몽처럼 남아 있는 IMF. 나는 경제락제생이라는 판정을 받은 IMF. 한국은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더불어 아세아의 4마리 룡으로 떴다. 그렇지, 한국은 소한민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였지. “大”자 콤플렉스에 싸여 편집광적인 집착을 보인 한국. 그래서“大”자를 시도때도 없이 외우는 한국사람들. 우리 회사 세계 제일 큰 재벌, 우리 제품산량 세계 제일 높고, 우리 GNP 만불… “大”자 추구 좋다. 사나이 기백 살아나는듯하다. 그런데 그것이 빛 좋은 개살구일 때 허구픈 웃음만 나온다. 우리 회사 세계 제일 큰 재벌이면 뭘 해, 은행빚더미에 앉았음에라! 우리 제품산량 세계 제일 높으면 뭘 해, 경쟁력이 없는 쓰레기같은 물건짝들임에라! 우리 GNP 만불이면 뭘 해, 남의 돈 꿔 쓰는 신세임에라! 그래서 한국은 IMF 때 쫄딱 벗기웠다. 치부가 다 들어났다. 룡은커녕 다시 구렁이로 물앉고 말았다. 그런데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어떤가? 이들은 그 “大”자, 그 뜨르르한 실속없는 “大”자를 고집하지 않는다. 이들은 워낙 漢族“맏아바이들”이다. 이들은 무슨 대재벌이니, 공업단지니 하는데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소규모의 家內공업, 빌게이츠식의 벤처기업, “大”자지만 약하고 허속적인것보다는 작지만 탄탄하고 강한 실속적인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들 漢族“맏아바이들” IMF 뭐언지 모르고 GNP 만불 언녕 웃돌았건만 그래도 래일, 래일을 위한 착실한 준비, 준비에 딸라를 귀한 딸처럼 잘 모셔둔다. 그런데 한국은 허울 좋게나마 겨우 GNP 만불 택(턱)걸이를 하다가 중국이 “띵호와”, 미국이 “띵호와”, 프랑스가 “띵호와”…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줄 모르다가 IMF 꽝꽝에 정신 버쩍 들어 허리띠를 졸라매고 와신상담하며 실속파가 되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또 살금살금 “띵호와”놀이에 정신이 없단다. 어이, 漢族“맏아바이들” 좀 봐. 손에 들어오는 딸라 헤기 바쁜 漢族“맏아바이”말이요!
3    고운 아이 매 하나 더 댓글:  조회:5305  추천:72  2005-02-16
고운 아이 매 하나 더우상렬| 연변대학 부교수 고운 아이 매 하나 더, 요즘 부모들 들으면 놀라 혼비백산할 얘기다. 내 아이 어떤 새낀데말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 금싸락같은 내 새끼. 우리는 아이들을 “할아버지”모시듯 키운다. 모심받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오히려 아이들을 학교에 모셔가고 모셔오기에 바쁘다. 허리꼬부랑, 기침 콜콜, 불쌍할시구. 부모님들 아이들 키 잘 커는 보약, 뇌영양보충 보약 먹이기 바쁘다. 그리고 시험칠 때는 엿가락에 찰떡 학교대문에 붙이고 안절부절 못하며 기도하기에 바쁘다. 꼭 시험 잘 쳐다오, 꼭 붙어다오… 오, 대학에 붙었냐, 곱다. 그 다음 대학문앞까지 손 꼭 쥐고 가는 우리. 마치 우리의 명줄이 그놈 아이들한테 붙어있는듯하다. 그렇다. 우리는 계획생육을 하다보니 “아새끼” 달랑 하나, 참 외롭고 애처롭고 안스럽다. 그래서 온 신경을 기울인다. 여기에 무슨 우생이니 우육(優育)이니 하는 바람까지 가세하니 우리는 아이들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못 차린다. 정말 우리의 온 삶이 아이들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는 셈이다. 이로부터 중앙TV에서 때린 요, 과잉보호요, “온실속꽃”이요 하는 인위적인 역효과가 드러난다. 내가 태국에 려행갔을 때다. 많은 볼거리가운데서 나를 가장 경악케한것은 많은 관광객들이 호랑이와 정답게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법석을 피우는 광경이였다. 나는 원래 호랑이하면 낯이 새파래지는 무우깍지다. 그래서 나는 겁이 나면서도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그 호랑이는 어떻게 되여 먹었는지 사람이 포즈를 잡아주는데로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한없이 순하디 순하기만 하였다. 사육원의 말을 들으니 이 호랑이는 나서부터 사람의 손에서 컸는데 사람이 먹여주면 먹고 재우면 자는 그런 귀염둥이라는것이다. 그러니 절대 사람을 해치지 않으니 걱정 말라는것이다. 그래서 나도 마음 놓고 호랑이몸둥이우에 올라타고 사진을 한방 박았다. 참 그 호랑이는 사람같았다. 지금 사람같은 체온이 아련히 안겨온다. 이럴때면 사람이 못된 의 우리의 호랑이가 불쌍해났다. 그러나 잠간, 다음 순간 나는 태국의 그 호랑이가 불쌍해
2    강신무(降神舞)와 세습무(世习舞) 댓글:  조회:5901  추천:59  2005-02-16
강신무(降神舞)와 세습무(世习舞)우상렬| 연변대학 부교수 무당에는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다. 강신무는 “신”이 들려 스스로 무당이 된 경우이고 세습무는 다른 무당으로부터 배워 무당이 된 경우이다. 한 사람이 대성하는데는 강신무와 세습무적 방식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강신무-끊임없이 눈을 안으로 돌려 자기의 총기를 발휘하며 스스로 깨닫고 터득해나가는것. 세습무-끊임없이 눈을 밖으로 돌려 다른 사람한테서 배워나가는것. 간단히 말해 강신무는 자학(自學)의 경지이고 세습무는 타학(他學)의 경지라 할수 있다. 인간에게는 강신무적인 자학의 능력이 천성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나는 일자무식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가감승제를 배우지 않았으련만 돈계산은 귀신처럼 해제낀다. 나는 우리 아버지도 신기하다. 서당문앞도 가보지 못했다는 당신이 두손가락을 폈다접쳤다하면 웬만한 계산은 다 해내고 주먹을 불끈 쥐고 올록볼록 손가락밑둥마디를 짚어나가면 60갑자는 얼음판에 표주박 밀듯이 짚어나갔으니 말이다. 나는 소학교에 입학해서도 깜박 놀랐다. 혁명도사 레닌이 말했다는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자!”, 위대한 수령 모주석이 교시했다는 “학습을 잘 하여 나날이 향상하자!”는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나는 워낙 학교에 가기전에 우리 아버지로부터 이러루한 말을 수없이 들었던것이다. “촌놈” 우리 아버지가 혁명도사, 위대한 수령과 통하는데가 있는듯하여 나는 그때로부터 우리 아버지를 정녕 당신으로 보게 되였다. 그래서 나는 쩍 하면 물었다. 아버지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하면서 왜 아는것이 그렇게 많아요? 그때마다 우리 아버지 하는 말이 강신무적인 걸작-생각해보면 알지! 나는 우리 아버지에게서 바로 이 “생각해보”는 걸작을 배웠다. 나는 누구에게 묻고 배우기전에 먼저 생각해본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보며 미립이 트다보니 나는 스스로 깨닫는바가 있었다. 그 많은 명언명구들, 별로 아닌걸.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사람들 제 아니…” 내 입에서도 이러루한 명언명구들이 튀여나올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선생을 깔보기도 했다. 대학이 들어와 “어느어느 작가 몇년도 몇월 몇일에 탄생했소”를 신기한 지식이냥 졸졸 외우며 시험에까지 내는데는 그만 나를 질리게 해버렸다. 책을 보면 다 알것을 왜서 졸졸 외우게 하지?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를 “세습무”로만 만드는 주입식으로 대변되는 고질병의 발작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충분히 믿어야 한다. 인간의 뇌는 동물중에서 가장 큰 용량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잠재력은 대영박물관 하나를 다 기억하고도 남는다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비극은 한생에 있어서 이 잠재력을 몇백만분의 1도 발굴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세습무적인 따라 배우기가 가장 큰 주범의 하나라고 한다.따라 배우기, 학교에서의 선생, 선배나 “어른”들을 “타습”하는것은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가장 빠르고도 손쉽게 장악할수 있는 지름길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것을 미신하게 되면서 맹목성을 띠는데 있다. 자기 스스로 아는것 혹은 알수 있는것도 꼭 강의를 들어야만이 마음이 놓이고 그 식이 정상으로 느껴지는것, 변태에 다름 아니다. 소학생들이 책보 미여지도록 교과서를 넣어 다니고 대학생들이라는 우리도 하루에 1, 2, 3, 4, 5, 6, 7, 8, 9, 10절까지 수업을 하는데는 나는 그만 정신이 아찔해난다. 우리는 스스로 깨닫는것-강신무적인 자습의 경지에 들어서야 한다. 사실 우리 인간의 많은 지식은 이런 자습의 경지에서 스스로 터득되는것이다. 이유목염(耳濡目染)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것, 우리 삶의 많은 기본바탕들은 바로 이렇게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말로 많이 일컬었다. 또 어떤 일이나 분야에서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숙능생교(熟能生巧)의 경지에 들어 배트랑이 될수도 있다. 사실 종교적 묵상이니 참선이니 하는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무의식세계를 포함한 전반마음의 경지를 읽는것이다. 현단계는 말 그대로 지식이 폭발하는 시기다. 인간이 지식을 따라 가기가 힘에 벅차다. 컴퓨터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그것이 더 없이 편리한 우리 인간삶의 방편임은 더 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그것을 다 배워내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나는 이 순간도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워드밖에 모르는 신세다. 지식을 많이 배우면 좋겠지만 그 많은 지식을 다 배울려 하다가는 코 꿰인 송아지신세가 되여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십상이다. 특히 세습무적인 “타습”의 외곬으로 나아가는것은 우리를 매우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신무적인 삶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강신무는 일단 신이 들리게 되면 자기는 무당이 될 운명이라 무당노릇을 열심히 한다. 우리도 일단은 스스로의 적성을 판단해야 한다. 내가 문과형인가, 아니면 리공과형인가 등등. 그리고 적성에 맞는 쪽에 몰입해야 한다. 나의 적성은 이미 그런 쪽으로의 성공을 절반 먹고 들어갔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적성에 바탕한 강신무적인 자습은 아는것은 넘어가고 모르는것을 주공(主攻)할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학습방법이다. 세습무적인 타습이 언제어디서나 주어지는것이 아니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공간적으로 제한적인것인데 반해 강신무적인 자습은 마음만 먹으면 할수 있는 영구적인것이다. 물론 모르는것을 주공하는데 세습무적인 타습의 방조가 필요하다. 선생의 역할은 바로 이런데 있다. 여기서 잠간 세계 최고 갑부 빌 게이츠를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빌 게이츠는 분명 강신무적인 존재다. 그는 컴퓨터에 “신들려” 세습무적인 타습이 싫어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든가? 그리고 그는 주로 강신무적인 자습으로 컴퓨터황제가 되지 않았는가? 물론 그 와중에는 세습무적인 타습도 곁들였겠지만. 사실 세계 위대한 발명가나 인물들을 보면 거의 다 강신무적인 자습의 경지를 많이 추구했음을 알수 있다. 현재 계발식의 창신(創新)교육이라는것도 따지고 보면 이 강신무적인 자습의 경지를 떠날수 없다. 세습무적인 타습은 일종 힌트나 계발의 계기가 되고 강신무적인 엑스타시(迷狂)나 도취속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자습의 경지를 개척하도록 하는데 있다. 자습의 방법, 방식, 기교… 지식의 바다에서 빠져 죽지 않고 유유작작하게 노닐려면 모종 의미에서 현단계는 배우는 내용물보다 이런것이 더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1    우상렬 프로필 댓글:  조회:4688  추천:49  2005-02-02
우상렬(禹尚烈)---------------------연변대학 조선-한국어학과 교수1963년 3월 심양 출생.간력1971.9-1981.7 료녕성 심양시에서 조선족소,중학교 졸업.1981.9-1985.7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1985.9-1987.7 료녕성 무순시 조선족제1중학교 교원.1987.9-1990.7 연변대학조문학부 석사연구생.석사학위 취득.1990.9-1993.7 연변대학조문학부 강사1993.8-1998.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박사연구생.1998.9-2000.3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강사.2000.3-2001.3 조선김일성종합대학 조문학부 객좌교수.2001.3-2002.2 연변대학조문학부 부교수.2002. 3-2002. 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전국어전업 박사학위 취득.2002.8-현재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문예리론교연실 인민교원.2005. 3-2006. 2 한국 배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2007년~2009년 현재, 사천대학교 박사후 과정.(성도에 체류중)이메일: yushangli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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