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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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내 이름은 아Q (우상렬91) 댓글:  조회:4573  추천:41  2007-10-14
내 이름은 아Q우상렬중국 사람치고 아Q하면 기분 좋아할 사람 없다. 중국 사람들에게 아Q는 그렇게 못나 있다. 나도 아Q를 우습게 보아왔다. 중학교 때 <아Q정전>을 배울 때 머저리 아Q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요새 내가 점점 아Q를 닮아가니 참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 아Q, 너는 누구냐? 뿌리칠 수 없는 혼령이여!이 세상 사람들 돈 잘 벌어 떵떵 거리며 사는데 나는 돈이 없다. 그래서 나는 한다는 얘기가 요새 돈 잘 버는 놈 개아들 놈이나 잘 벌지, 나 같은 정인군자는 별 수 없지.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뱉는 말이 그 잘난 개도 안 먹는 돈, 나도 안 먹는단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내 인생 한 자리 하기는 다 글렀다. 四十不惑라 적어도 40대 초반이면 한 자리 한다고 하든데 나는 내일 모레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 벼슬꼬리도 못 쥐었으니 거저 요 모양 요 대로 살밖에. 그래도 속은 내려가지 않아 한다는 얘기가 우리 8대 조상도 벼슬을 했다 말이요. 우리 집은 중앙에 모모씨하고 친척이다 말이오. 우리 집도 정말 양반이다 말이요. 그 잘 난 벼슬, 하기 싫단 말이요.영웅호색. 나도 영웅이다. 이 세상 고운 여자들 다 차지하고 싶다. 내 주위에 3천 궁녀를 만들고 싶다. 그런데 그것은 그림에 떡. 그래서 나는 꿈의 신기루를 쌓는다. 오늘은 이 미녀와 내일은 저 미녀와...나는 글을 잘 못 쓴다. 그래서 글 잘 쓰는 ‘놈’들 보면 배가 아프다. 文人相輕, 이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문인 축에도 못 드니 말이다. 그래서 한다는 얘기가 너희들 밥 먹고 할 일 없냐? 그 잘난 글 쓰는 꼬락서니라구야! 그렇게 쓰면 누가 못 쓰나. 나는 눈 감고도 쓰겠다. 안 쓰서 그렇지. 참!나는 오늘도 터벅터벅 6층 집을 올라간다. 힘이 들다.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이 누가 1층집을 못 들어 6층집을 드는 줄 아냐? 누가 엘리베이터 있는 집을 못 들어 이렇게 터벅터벅 하는 줄 아냐? 다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지. ...아Q가 되면 요렇게 편한 데가 있는걸. 그래 아Q로 남을 것이냐? 남기도 하고 떠나기도 해야지. 2007. 7. 10
90    홰불축제(火把節) (우상렬90) 댓글:  조회:4930  추천:41  2007-10-10
홰불축제(火把節) 우상렬이번 방학 간 우연한 기회에 雷波縣 정부의 초청을 받아 火把節라는 것을 구경할 수 있어서 내 생에 또 하나의 두고두고 흥분과 기쁨을 더 할 소재를 만들어서 좋았다.   雷波縣은 사천성 남쪽에 있는 凉山彝族自治州에 있다. 金沙江을 사이에 두고 운남성의 永善縣과 마주보고 있다. 나는 같은 소수민족 처지라 해서 그런지 일단 彝族에 대해 구미가 버쩍 동했다. 彝族, 약 3백만 인구에 사천 凉山지구에 많이 사는데 줄곧 노예제사회에 머물러 있다가 새 중국이 성립되면서 하루아침에 ‘一步跨千年’을 하여 사회주의사회로 들어섰다고 한다. 彝族의 彝자는 바로 위로는 쓰고 살 집, 중간에는 먹을 쌀과 입을 옷, 아래는 부엌을 나타내는 글자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년에 모택동이 이 彝자를 이렇게 풀이하면서 彝族의 휘황찬란한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고 한다.   火把節는 彝族의 전통적인 축제라고 한다-驅蟲祈福과 스스로 즐기는 축제. 凉山彝族自治州의 수부인 西昌에서는 이미 국제적인 명절로 부상하여 이번 8월 6일을 기해 제5차 중국 凉山彝族國際火把節狂歡夜를 가졌다한다. 적어도 3년마다 이런 火把節狂歡夜를 한 번씩 가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중심에는 火把廣場까지 만들어 놓았다. 雷波縣은 이번 8월 29일을 기해 처음으로 火把節를 개최한단다. 그래서 사람들 많이 들떠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들은 자기네 火把節를 아예 東方狂歡節이라고 부른다. 彝族들은 축제 전날부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화려하고 천, 지, 인이 잘 조화된 뜻 깊은 민족복장으로 단장을 한다. 彝族 여자들의 머리에 얹는 기와장 모양의 머리장식이 참 인상적이다. 그리고 우리 남자 한복 가랑이를 뺨칠 정도로 무지하게 넓어 치마를 방불케 하는 남자들의 바지와 이마를 비롯한 머리가장 둘레를 머리테처럼 감아싼 듯한 둥근 모양의 검은 모자에 오른 쪽 옆으로 삐죽이 나온 뿔 모양이 참 인상적이다. 그리고 여느 명절 때처럼 소나 양을 엎어 잡는다. 그리고는 집안끼리 모여 그 소나 양을 먹어주기란다. 彝族들은 가문, 집안 의식이 대단히 강하다한다.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온 가문,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인다한다. 내가 이들 모임에 가보니 이들은 아직도 형님, 동생 부어라, 먹어라 하며 태고적 인심이다. 그리고 이들이 먹는 방식이래야 양념을 약간 곁들인 삶은 大塊大肉를 뜯거나 삶은 감자나 옥수수를 먹는 지극히 간단한 조리법의 음식들이었다. 술은 또 얼마나 잘 마시는지 부어라, 마시라 모두들 근들이다.       火把節 당일 오전 9시부터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雷波縣 공설운동장 주위로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서고 운동장 가운데 민속공연팀들이 도열하자 모모한 분의 火把節 선포와 더불어 주석대 모모한 분들이 죽 내려와 운동장 중간에 설치한 높이 3-4미터 받침대에 놓여진 직경 1-2미터 크기의 나무무지에 손에 든 작은 횃불들로 불을 지핀다. 삽시에 횃불이 확 타 오른다. 운동장은 온통 환호성이다. 풍선이 날아오르고 비둘기가 우르르 날아간다. 그 다음 모모한 분들의 한 바탕 축하연설이 있은 후 민속공연이 펼쳐진다.   민속공연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孟獲무사대가 전신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방패와 번쩍이는 검을 들고 베고 막고 하는 무예쇼는 그럴 듯 했다.『삼국연의』의 제갈량의 ‘七擒七縱’에 나오는 孟獲이 彝族 무사들의 神인 것이다. 孟獲의 사당이 중국의 3번째 高山深水湖로서 경치수려한 馬湖에 있다. 그들은 제갈량의 ‘七擒七縱’을 소설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한다. 그리고 彝族의 전통적인 혼속을 반영한 공연이 참 재미있었다. 일단 처녀총각지간에 프러포즈의 情歌가 오가고 서로 눈이 맞아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으로 간다. 그러면 신부 집 사람들은 물을 뿌리며 신랑 쪽 사람들을 막는다. 그렇지만 신랑 쪽 사람들이 용감무쌍하게 밀고 들어가 신부를 빼앗아낸다. 이른바 搶婚 형식이다. 그렇지만 신랑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신부에 대해서는 신랑 쪽의 가까운 사람이 신부를 업어서 모셔 들여야 한다. 이외에 彝族 전통적인 처녀들의 노란 양산춤이나 물 긷기 춤도 정말 근사했다. 괴성을 지르고 이상한 동작을 하며 귀신들을 쫓는다는 무당들의 춤도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기상천외의 맛이 있었다. 오전은 이러루한 재미나는 민속공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으로 ‘신선놀음’을 했다. 오후는 각종 경연이 벌어진다. 彝族미녀선발대회, 민요경연대회, 彝族민속씨름경연대회, 경마경연대회, 소싸움, 양싸움, 그리고 蘇尼들의 특기쇼 등이 이어진다. 彝族 鬪鷄도 유명하다던데 이번에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빠졌다. 이런 경연들은 세 장소에 나뉘어 진행되는데 시간상 관계로 동시에 진행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걸 보자면 저걸 못 보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나는 주저 없이 먼저 彝族미녀선발대회로 달려갔다. 내 같이 엄큼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아니, 미에 대한 흥취는 사람들 살아있다는 징표니 곱게 봐주자. 彝族 전설 속의 미녀 呷嫫阿妞조각상이 있는 锦屏광장의 야외대회장은 어느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래도 나는 VIP佳賓이라 좋은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일반 彝族 여자들을 보니깐 고산지대 자외선이 센 곳이라 그런지 얼굴이 좀 붉어스레하거나 감장색을 띠어 피부색은 별론되 했는데 여기에 나온 미녀들은 정말 월드미스선발대회에 내놓아도 추호의 손색이 없을 정도로 미녀, 미녀들이다. 彝族 미녀는 雷波縣 옆에 있는 凉山彝族自治州에 속하는 屏山縣에서 많이 난다고 한다. 햇살이 너무 눈을 시려 미녀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느꼈는데 그날 저녁 연회에 이 미녀들이 와서 술 한 잔씩 부어주고 민요 한 곡씩을 불러주니 정말 평생원을 껐다. 彝族 미녀선발대회에 이어 진행되는 민요경연대회도 계속 보고 들었다. 독창, 對唱, 組唱, 다양한 방식의 경연이었다. 그런데 민요를 부르는 아가씨들을 보니깐 앞에서 미녀선발대회에 나왔던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彝族은 미녀들도 노래를 참 잘 부르고나라고밖에 결론지을 수 없었다. 彝族 민요의 특성은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소리로 톤을 매우 높게 떼는 만큼 고음일색인 것 같다. 그리고 여자들의 음성이 특히 명랑하고 맑진데 있다. 모르긴 해도 톤을 좀 낮게 떼고 점점 고음으로 올라가되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나며 탁한 감을 많이 주는 우리네 선율하고는 정반대인 것 같다. 그 원인을 물었더니 彝族 민요는 金莎江을 사이에 두고 주고받던 노래라는 것이다. 사품치는 金莎江 물소리를 누르자니 그렇게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雷波縣은 중국 彝族민요의 고향으로 이름이 나 있다. 彝族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민요를 잘 부르는 것은 정평이 나 있다.   민요경연이 마무리되기 바쁘게 나는 부랴부랴 공설운동장으로 달려갔다. 蘇尼들의 특기쇼를 보기 위해서다. 재수가 있을라니 공설운동장에서 경연이 좀 늦어지다 보니 소싸움 막판에 양싸움이 시작될 판이다. 소싸움이나 양싸움은 출전 소나 양의 주인들이 자기 소나 양을 부추켜 상대방의 소나 양과 정수리를 부딪치는 것으로 판정승이 난다. 소나 양은 정수리를 부딪쳐봐서 적수가 자기보다 한수 위에다 싶으면 두말없이 물러서 달아나는 것으로 깨끗한 승복을 한다. 그러면 이긴 놈도 더 쫓지는 않는다. 우리 인간이 한수 배울 바가 있다. 소싸움은 우리 연변 도문에서 진행한 상황과 비슷하다. 소싸움에 이어 양싸움이 벌어지는 사이에 운동장 한쪽  켠에서는 불무지 세 개가 활 타오르고 있었다. 蘇尼들의 특기쇼를 준비하는 중이다. 양싸움이 끝나자 蘇尼들의 특기쇼가 시작되었다. 먼저 오른쪽 불무지와 중간 불무지 옆에 각기 좀 나이 지긋한 蘇尼와 젊은 蘇尼가 앉더니 소고를 뚜드려대며 주절주절 주문을 외운다.   이 사이에 조연들이 불무지들을 뚜져 타나남은 나무토막들을 걷어내고 시뻘건 숯만 남은 불무지를 고루고루 잘 다진다. 숯밭을 만든다. 이때 쯤 되면 두 蘇尼의 소고 뚜드리는 속도는 더 빨라지고 주문 외우기도 더 빨라진다. 이렇게 빨라, 빨라지면서 그들의 몸도 부르르 떨더니 신이 드는가 싶다. 드디어 그들은 펄펄 뛰기도 한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런 경황 속에서도 그들은 자기가 신은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양말도 벗는다. 그리고는 맨발상태에서 또 한바탕 뚜드리고 외우고 뛰고 야단법석을 피우더니 그 붉은 불이 이글거리는 숯밭을 걸어갔다 걸어왔다 한다. 삽시에 운동장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람이 신들리면, 제 정신이 아닐 때는 저런 기적 같은 일도 해내구나하고 나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불무지의 두 蘇尼의 특기쇼를 보고는 사실 이것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구나, 정말 특기쇼의 일종 뉴스에 불과한 걸 하는 감이 들었다. 그럼 마지막 불무지의 蘇尼들이 어떤 특기쇼를 하는가하면 그 불무지에서 일단 벌겋게 단 보습날(우리의 보습날보다는 좀 작고 폭도 좁다)을 꺼낸다. 그리고는 두 蘇尼가 집게로 보습날을 집고는 노려보며 ‘붇다붇다’라는 주문을 반복적으로 외운다. 그러다가는 광천수를 한 모금 입에 넣고는 보습날에 확 뿜는다. 그러자 흰 김이 확 피어오른다. 그러면서 ‘붇다붇다’라는 주문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또 광천수 한 모금 뿜고 ‘붇다붇다’ 외우기를 반복하더니 기상천외의 쇼를 펼친다. 혀를 날름거리더니 그 뜨거운 보습날을 핥는다. 신경이 곤두서는 순간들이다. 그리고는 혀를 쑥 내밀어보인다. 별일 없다는 것이다.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이번에는 맨발로 보습날을 힘껏 비벼댄다. 그리고는 맨발바닥을 쓱 들어서 보인다. 발바닥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蘇尼들의 특기쇼가 끝나자 쇼장소를 정리하던 조연들이 보습날에 물을 부어 식히는데 그때까지도 보습날에서 흰 김이 확 피어올랐다. 그날 이 蘇尼들의 특기쇼가 절정을 이루었는데 중앙텔레비며 각종 매체들이 취재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蘇尼, 蘇尼 하니 무언가 했더니 우리네 무당들하고 비슷하다. 우리네 무당들이 대개 여자로서 일인다역으로 이런 특기쇼도 했다면 蘇尼들은 대개 남자로서 전문 특기쇼만 한다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거나 벽사기복의 행사를 하는 司祭者는 별도로 따로 있다는 것이다.   날이 어두무레해지는 저녁 정각 8시, 정말 火把節 이름에 걸 맞는 횃불축제가 시작된다.   일단 彝族의 전설 속 呷嫫阿妞미녀조각상이 있는 锦屏광장에 사람들이 모인다. 정각 8시가 되니 광장 중간에 큰 횃불이 타오른다. 현장을 비롯한 모모한 분들로부터 각기 손에 든 작은 횃불에 불을 단다. 그 다음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불을 단다. 불을 달고는 두 줄로 서서 현장을 비롯한 모모한 분들의 뒤를 따라 공설운동장으로 향한다. 횃불은 대개 사천지역에 흔한 대나무로 만든 것이 대종을 이루었다. 대나무 끝에 참대조각이나 나무조각들을 붙들어매고 그기에 불을 부치는 그런 식이였다. 锦屏광장으로부터 공설운동장까지 가는 데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이 두 갈래 길은 온통 횃불을 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높은데서 보면 마치 두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듯 했을 것이다. 정말 헬레곱타라도 타고 이 광경을 봤어야 되는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도 횃불을 높이 들고 대열 속에 끼어들었다. 한 낮의 더위가 아직 식지 않고 확확 열기를 내뿜건만 사람들의 흥분의 도가니와 타오르는 횃불은 한 낮의 열기를 쫓아낸 듯했다. 以熱治熱, 여하튼 사람들은 더위를 까맣게 잊고 희희닥닥 거리며 주거니 받거니 웃음꽃을 피우며 걸어 나갔다.   일부 사거리 같은 데서는 어느새 사람들이 던진 횃불로 작은 불무지가 이루어지고 그 불무지를 중심으로 알든 모르든 처녀총각들이 손에 손을 잡고 어울려 둥근 원을 그리며 彝族 특유의 達體舞를 추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횃불을 아래위로 흔들어대고 환호성을 울리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약속된 공설운동장으로 들어서니 어느새 인산인해.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하늘에는 둥근 달이 뜨고 별들도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한동안 북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네 뎃 곳에 불무지가 타오른다. 사람들은 손에 쥔 타나 남은 횃불을 그 불무지들에 던져 넣는다. 어느새 곡이 꽝꽝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각기 불무지를 둘러싸고 약속이나 한 듯이 손에 손 잡고 達體舞를 춘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우~ 우~ 괴성을 질러댄다. 達體舞는 추기 참 좋다.   그저 손에 손 잡고 불무지를 빙빙 돌되 곡에 맞추어 두발을 번갈아 가면서 앞뒤로 차면 된단다. 처음 내가 어리벙벙해 하니 내 손을 잡고 추던 彝族 복장을 입은 고운 처녀애가 깜찍한 동작까지 해보이며 그렇게 살듯이 알려준다. 그래서 한번 해보았더니 그 처녀애 말대로 쉽게 추어졌다. 達體舞 추다보면 연애도 쉽게 이루어진다던데 정말 연애충동이 불끈불끈 솟아났다.   내 손을 잡은 彝族 복장을 입은 고 고운 처녀애하고 연애를 하고 싶었다. 내 친구 한 놈은 중앙민족대학교를 다녔는데 바로 彝族年마다 학교 캠퍼스 안에서 추는 達體舞가 인연이 되어서 멋진 彝族 처녀와 연애도 해보았단다. 나는 그 친구한테 얼마나 시샘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래 오늘 나에게도 그런 행운이 차례지는 것은 아닌지. 나는 흥이 도도해졌다. 그래서 붉은 불에 상기된 내 곁의 고 고운 彝族 처녀애를 한번 훔쳐보았다. 순간 나는 너무 실망하고 말았다. 나의 마음은 삽시에 주저 않고 말았다. 고 여자애가 너무도 애티났던 것이다. 이제 한 열 몇 살이나 되겠는지, 처녀라기보다는 소녀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겠지. 연애하기에는 너무도 나이를 많이 먹고 너무도 밉게 훌쩍 늙어버린 나. 나는 제풀에 그만 한풀 꺾이고 말았다. 그리고 고 도덕관념이요, 윤리관념이요 하는 것들이 나를 꽁꽁 얽매놓는다. 정말 나는 고 소녀의 야리야리한 작은 손을 잡기조차 민망해났다. 참, 못난이 같으니라구!   達體舞를 출 때 중간의 활활 타오르는 불무지는 나에게 태양으로 안겨왔다. 그리고 그 불무지를 빙빙 도는 우리는 마치 태양을 싸고도는 달 같이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우리의 달춤-강강수월래가 생각키웠다. 정말 達體舞와 우리의 강강수월래는 비슷한 데가 있다.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돌며 원무를 추는 것이 비슷하다. 그리고 그 정열이나 활력 면에서도 비슷하다. 그런데 남녀가 손을 잡고 불무지를 중심으로 거저 돌기만 하고 변화가 적은 것이 우리와 다르다. 달의 이지러지고 차는 모습을 나타내는 강강수월래의 역동성이 없다. 그러나 돌고 돌다 나면 속도가 빨라지기도 하고 몇 겹의 원을 이루어 추는 중층의 원무는 彝族 여자들이 입은 치마에 밑으로부터 위로 몇 겹으로 색무늬결이 올라간 모양을 방불케 한다. 達體舞는 彝族 여자들이 춤을 출 때 치맛자락이 날리며 그 무늬결이 빙빙 돌아가는 모양새 같기도 하다. 나는 이 達體舞를 추다가 또 자기도 모르게 조선의 4.15태양절 김일성광장에서 추던 청춘남녀들의 원무가 생각키웠다. 원무는 원무니까 達體舞와 비슷한 데가 있다해야 하겠다. 그런데 조선의 원무는 達體舞보다 이듬이 약하고 절주가 좀 느리다. 그러나 ‘옹해야!~’, 처녀총각 손을 잡고 원무를 추되 전통민요 가락에 맞추어 처녀총각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짝이 되어 돌아가기도 하는 역동성이 있어 좋다...   중간의 불무지의 불도 얼마간 사그라지고 사람들도 어지간히 기진맥진한듯하다. 그런데 바로 이때 예포소리가 연발 하더니 하늘 공중으로 오색찬란한 무지개 색갈의 예포들이 앞다투어 터지면서 온 하늘을 온갖 꽃무늬로 장식을 한다. 그리고 그 꽃무늬의 줄기들은 우리 머리 위로 축복의 구술 알이 되어 떨어지는 듯하다. 순간 너무도 황홀한 정경에 사람들은 達體舞를 추던 손발을 멈추고 너도나도 아~ 환성을 지르며 하늘을 장식하는 꽃무늬들을 보느라고 모두들 머리를 뒤를 젖혔다. 그런데 이것도 잠시, 하늘에 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꽃무늬들도 원무를 추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다시 손을 잡았다. 다시 達體舞를 추기 시작했다. 머리 위 하늘에 예포는 계속 터지고 꽃무늬 원무도 계속되고... 땅 위 사람들의 達體舞도 계속되고... 하늘과 땅이 하나의 원무가 되어 돌아간다. 그런데 불무지의 불은 마지막 열과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 마지막을 아쉬워하며 達體舞를 더 빨리, 더 힘껏 추댄다. 일종 광란의 도가니에 빠지는 듯하다. 東方의 狂歡節이라는 말이 몸에 와 닿는 순간이다. 그런데 哪有不散的宴席呀! 불무지는 사그라지고 사람들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체 흩어진다. 젊은이들은 괴성을 질러대기도 한다.   그렇다. 횃불은 사그라졌다. 그러나 사람들 마음속의 횃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마음의 횃불을 계속 활활 태우고 있다. 彝族들의 열정적인 손님접대에서 나는 이 횃불을 보았다. 彝族들의 정열적인 사랑에서 나는 이 횃불을 보았다. 彝族들의 열심히 사는 모습에서 나는 이 횃불을 보았다.  
89    학위콤플렉스 (우상렬89) 댓글:  조회:4712  추천:49  2007-09-27
학위콤플렉스우상렬동물은 학위콤플렉스가 없어서 참 좋겠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스스로 참 많은 콤플렉스를 만들어간다. 학위콤플렉스가 그 중의 하나. 요새 한국에서 가짜학위파문으로 시끌벅적한 것은 그 한 보기. 사실 그리 시끌벅적할 것도 없다. 학위 일방통행사회에서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사건이 우리의 학위콤플렉스를 자극하면서 학위가 뭐길래하는 생각을 해보게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이런 콤플렉스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하나하나의 통과제의인지도 모른다. 학위콤플렉스를 보자. 너도나도 똑똑하단다. 그러니 머리만 까딱 놀리고 입만 냠냠 놀리며 큰 떡 먹겠다고 개미떼처럼 몰리기. 그래서 똑똑度 차원에서 레벨을 두는 학위제도라는 것을 내왔지.   그리고 바로 이 맹목성이 없지 않아 있는 학위제도건만 현실에 안주하고 나태하기 쉬운 인간을 분발하고 향상하게 하는 하나의 기폭제이기도 하지. 옛날에는 소학교만 졸업해도 대단한 학위 맞잡이였는데 현재는 대학교가 다 뭐야, 석사, 박사가 줄을 서 있다. 여기에 또 박사후(포스트닥)라는 것이 척 죽 치고 앉아 있다. 정말 이 산 올라가면 저 산 높고 저 산 올라가면 또 ...... 끝없는 학위의 바벨탑, 바라보기조차 아득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로부터 큰다.  그런데 이런 콤플렉스가 분명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이런 콤플렉스를 날려버릴 방법을 생각해본다. 우선 학위를 우습게 보자. 학위가 빛 좋은 개살구일 수 있다는 거, 기억하자. 턱걸이 하듯이 겨우 학위를 딴 것도 있다는 거, 기억하자. 그럭저럭 내지는 얼렁뚱땅 학위도 있다는 거, 기억하자. 여기에 좀 더 심하면 가짜 학위도 있는 법. 결론적으로 학위는 별 볼일 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학위 없이도 대성을 하여 명인이 되고 위인이 된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학위제도는 현재 별 수 없이 취하게 되는 인간사회의 苦肉제도의 하나. 그러니 학위를 위한 학위, 학위를 위해 전 생을 거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 앞으로 학위제도가 없는 사회가 오겠지! 그럼 학위콤플렉스는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그리고 眞才實學가 진정으로 통하는 사회가 올 것이다. 한국에서 고시시험 때 학위고 자시고 오로지 그때 시험성적에만 따라서 인재를 선발하기, 그리고 일부 대기업에서 고정관념을 깨고 무슨 졸업증이고 학위고 자시고 실무시험이나 실제 면접시험을 통하여 직원을 채용하는 것은 학위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운 한 길을 틔운 셈이다.    우리 한번 기대해보자!  
88    농민콤플렉스 (우상렬88) 댓글:  조회:4704  추천:58  2007-09-27
농민콤플렉스우상렬 인간은 이 세상에 와서 땅을 뚜지는 것으로 기본 생계수단의 하나로 삼아왔다. 그래서 背朝天, 脸朝地, 농민이 생계를 위하여 치르게 되는 고역이다. 노동의 신성함이고 자시고 땅뚜지기는 일종 고역이다. 햇빛에 얼굴은 가마 잡잡해지고 ‘베적삼이 흠벅 젖는 것’이 우리 농민의 자화상이다. 농민 스스로가 주눅이 들어 허리 굽혀진다. ‘시내놈’에 비긴 스스로의 자조 섞인 ‘우리 촌놈...’, 우리 어릴 때는 중국의 10억 인구에 8억이 농민. 物以稀爲貴 차원에서도 농민은 많은 것이 문제라 천대꾸레기. 그래서 자연히 쌓이는 것이 농민콤플렉스.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다. 우리 집은 워낙 시교에 있은 지라 내가 다닌 학교에도 工人(그때 우리는 노동자를 이렇게 불렀음) 자제와 농민 자제가 섞여 있었다. 그때는 工人階級이 領導一切할 때라 그 기세가 욱일승천할 때다. 학교에까지 工人선전대가 들어오고.그래서 우리 소학교에서도 工人자제들은 좀 우쭐렁거린다. 그 대신 우리 농민자제들은 기가 죽는다. 그때 工人자제나 농민 자제를 판단하는 데는 겉모양만 보고도 곧바로 알 수 있다. 工人들은 대우가 좋은지라 그 자제들은 얼굴도 해맑고 옷도 깔끔하다. 그러나 우리 농민자제들은 얼굴도 디디하고 옷도 데데하다. 그때 쩍 하면 工人호구나 농민 호구를 조사한답시고 工人호구 손 들엇, 농민호구 손 들엇 하던 선생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工人호구 손 들엇 하면 工人호구 자제들은 기분이 좋아 손을 높이높이 들지만 농민호구 손 들엇 하면 농민호구 자제들은 기분이 잡쳐 손을 보일락말락하게 든다. 나는 그때 학교운동대회가 제일 싫었다. 그때는 운동대회를 할 때면 학부모들이 동참하도록 되어 있다. 바로 이 운동대회 때 나는 주눅이 든다. 우리 ‘촌놈’ 부모들은 너무 겉늙었고 시커멓고 데데하다. 여기에 반비례하여 ‘시내놈’ 부모들은 젊어 보였고 희어멀끔하고 깔끔하다. 이는 우리 ‘촌놈’ 부모 자제들을 기죽인다.   전 사회적으로 죽으나 사나 工人階級이 되고 볼 판이다. 그때 농민이 工人으로 되는 것은 일대 출세! 工人이 되면 皇粮을 먹게 되고 이런저런 부대적인 대우도 받게 된다. 그래서 농민들은 목을 쭉 빼들고 工人을 쳐다본다. 그리고 농민자제들은 너도나도 군에 지원한다. 군에 갔다 오면 대개 工人으로 직업배치를 해주기 때문. 그러다가 대학문이 열리자 죽기 살기로 모여든 곳이 대학입시. 光宗耀祖고 자시고 그저 대학에 입학하여 촌놈 딱지를 떼는 것이 유일한 소원. 내가 대학에 입학하니 모두들 축하한다는 말이 출세했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 개천에서 용이 나듯 촌놈 딱지를 떼어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 보니 우리 반에는 이 촌놈 딱지를 떼기 위해 대학시험을 네댓 번 친 친구들이 수두룩하다. 그때 처녀들도 工人에게 시집가기가 붐. 工人이면 코가 눈덩에 붙었어도 장가는 가는 세상.   오늘날 工人이 下崗하는 세상, 그 대신 농민이 農民工으로 부상.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농민콤플렉스를 떨쳐버리는 듯하여 좋다.   어느새 우리 중국의 농촌이 근대화 바람을 타고 도시화에로의 박차가 가해지고 있는 듯하다. 새 농촌 건설의 국가적 정책과 더불어 아스파트길이 쭉쭉 들어오고 기와집이 쭉쭉 일어선다. 눈에 띄는 하드는 그럴듯하다. 이른바 새 중국이 성립되어서 공산주의 실현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농민과 工人의 차이, 농촌과 도시의 차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 등 3대  차별 가운데 첫 번째, 두 번째 차별소멸을 실현하는 듯하다. 많은 곳에서 농촌호구와 도시호구 구별제를 폐지하고 있다. 전국 각 곳에서 심심찮게 눈에 띄는 農民工 및 이들에 대한 권익보호는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현재 내가 있는 중경에서는 농촌인구의 도시진출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데 어떤 데서는 정착금에 장려금까지 준다고 한다. 농민 자제들도 부담 없이 시내학교에 다닐 수 있단다. 농민콤플렉스가 확 풀리는 듯하여 좋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장 핵심적인 농촌의 도시화와 더불어 농민이 얼마나 실속 있게 사회보장을 받는가 하는 소프트문제가 놓여있다. 생계보장, 의료보장, 퇴직보장 등 생로병사에 관계되는 일련의 보장이 뒤따르는가 하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의 고향인 심양 소가툰의 일부 조선족촌의 농민들은 이런 아무런 보장도 없이 땅을 팔아 일시불로 돈을 얼마씩 챙기는 것으로 농민딱지를 떼며 만사대길인 줄로 안다. 그들의 앞으로의 생계는 무엇으로 하겠는지?  
87    척병시리즈(1) (우상렬87) 댓글:  조회:4046  추천:65  2007-07-29
척병시리즈(1) 우상렬문학예술가들은 제2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현실에 제일 안주할 수 없는 족속들이다. 욕구불만의 덩어리들이다. 그래서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안주할 수 있는 제2의 문학예술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務實와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를 추구한다. 19세기 프랑스문학대가 발자크는 항상 자기의 작품세계에서 노닐다보니 현실의 자기를 망각하고 있는지라 산보하다가 자기 집문 앞까지 와서는 자기가 써놓은 ‘발자크는 산보를 가고 없음’이라는 쪽지를 보고는 돌아서곤 했다. 그리고 프로벨도 자기의 ‘뽀파리부인’이 비상을 먹고 죽을 때 그 스스로가 비상을 먹은 듯 혀가 뻣뻣해나기도 했으며 ‘뽀파리부인’이 죽었을 때는 ‘뽀파리부인’이 바로 자기라 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문학예술가들은 바로 자기가 짜놓은 예술세계에서 노닐기에 현실감각이 떨어지거나 현실에 잘 적응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修邊服하는 등 현실적 생활의 디테일하고 멀다. 그래서 自然渠成으로 꾀죄죄하기도 하고 머리칼이 텁수룩이 길기도 하다. 그리고 인간관계도 원활하지를 못하다. 발자끄는 한평생 사랑을 추구했음에도, 그 문학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 없었으며 결국 저 북구의 별 볼일 없는 한 과부에게 반해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그들은 자기의 문학예술세계에 빠져 현실세계에 적응을 잘 못할 때 결국 정신병자가 되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파 예술의 거장의 하나인 화가 반 · 고흐가 바로 그렇다.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한 가운데 스스로 자기 귀를 베면서도 아픈 줄 몰랐고 귀가 떨어진 나간 상처를 싸맨 자화상을 스스로 그리기도 한다. 결국 그는 자살로써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자기의 문학예술세계에만 도취되어 있는 문학예술가들이 일단 자기의 문학예술세계의 마지막 한계를 느낄 때 그들이 택하는 길은 자살밖에 없다. 노벨문학수상자인 일본의 川端康成이 전형적인 이 경우에 속한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적 인간들이 보기에 괴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드가 말한 문학예술가들은 백일몽을 꾸며 그 속에서 노닌다는 명제는 천만지당하다.그런데 문제는 우리 현실에서 문학예술가들의 이런 삼매경을 진실로 이해하거나 터득하지도 못하고 문학예술가연듯한 사람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일부러 머리칼을 길게 하거나 수염을 이상하게 기르거나 해괴망칙한 옷을 입기 등등 만화경. 이것이 우리 현실의 척병의 하나다. 그들은 진짜 문학예술가들의 皮毛나 배웠지 그 치열한 혼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다분히 造謠過市의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2007. 7. 6
86    문학상에 한 마디 부쳐 (우상렬86) 댓글:  조회:3871  추천:61  2007-07-26
문학상에 한 마디 부쳐 우상렬우리 문단은 무슨 상 평심이 끝날 때마다 시끌벅적하다. 잘 했소, 못했소, 평심들을 둘러싼 공방이 난무하다. 정상이다. 입 가진 사람들은 다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대명천지거늘. 그러나 우리가 그 별 볼일 없는 상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상이 무엇이냐? 그것은 제3자가 ‘나’한테 대한 평가이다. 旁觀者淸이니 가장 공정한 평가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왜 안 됬지? 꼭 내가 되어야 한다는 과대망상증을 버려야 한다. 깔끔한 승복의 미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在局者迷라 하지만 그래도 사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그래도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당선되었다 해서 기고만장할 필요가 없고 낙선되었다 해서 비관실망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신을 잘 파악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래야만이 당락의 연결선상에서 자기 위치를 잘 파악하게 되며 노력의 방향설정이 이루어진다.  나는 나다. 확실한 주체성의 방향이 서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있고 상이 있었지, 상이 있고 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상을 타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다. 그러니 상을 쫓아 글을 쓰는 것은 웃기는 일. 글은 내가 좋아서 쓰는 것이다. 내 멋에 쓰는 것이다. 재미로 쓰는 것이다. 좋아서, 내 멋에, 재미로 쓰지 않는 글은 일종 억지고 고역이다. 내 글이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상까지 타게 된다면 그것은 금상첨화 격이고 우연히 주어진 뽀나스에 지나지 않는다. 상을 우습게 볼 줄 알아야 한다. 그 잘난 상, 할 줄 알아야 한다. 문학은 생겨먹기가 그리 빤한 것이 아니다. 미묘한 감정에, 아리숭한 가치판단을 씨줄과 날줄로 하여 얼기설기 짜 놓은 것이 문학이다. 그러니 仁者見仁, 智者見智, 나름대로의 가치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한명의 헴리트에 천명의 독자’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을 가진 심사위원들이라 해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 심사위원들도 사람인지라 안면이나 시장조작 같은 것들이 개입될 때 그 상은 정말 개망태기가 된다. 그래서 요새 권위적이고 귀족적인 심사위원제도 대신에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인터넷심사제도로 나가자는 경향이 대두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터넷 点擊率이나 댓글 등에 의한 수상작 선정하기. 그런데 이것도 그리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点擊率 조작은 민주주의적 허상만 부풀리고 중구난방의 즉흥적이고 선정적인 댓글은 오리무중에 빠지게 하기만 한다. 그리고 상이라는 것이 아무리 공정성을 기한다 해도 그것은 현실적 공리성이 가미되기 마련이다. ‘문화대혁명’시기 적어도 ‘高大全’ 식의 긍정적 형상을 부각하거나 빠뽀스를 토로해야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현실의 좌적인 정치적 공리가 절대적으로 작용한 까닥이다. 그리고 대중들의 현실적 구미가 크게 작용하는 수가 많다. 센세이숀을 일으킨 작품들이 현실적 구미에 잘 영합한 경우가 많다. 이래저래 별 볼일 없는 작품이 당선되고 오히려 인류보편의 가치를 다룬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명작들이 매장되는 수도 있다. 그래서 문학사에서 작품발표 당시 별 볼일 없다가 세월이 얼마 흘렀거나 작가가 세상 뜬 썩 후에야 이른바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상이라는 것은 상 성립자의 의도나 취지, 그리고 이러저러한 명목이나 명분 때문에도 절대적인 공정성을 기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상을 거부할 줄도 알아야 한다. 샤르트는 노벨문학상까지 거부한다. 그는 구경 실존주의철학가였던 것이다. ‘타인은 나의 지옥’ 같은 치열한 생존경쟁이 난무하는 개코같은 인간실존임에 그 잘난 상은 한바탕 눈요기하기 좋은 신기루에 다름 아님에라.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盖棺定論이 가장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한 작가가 죽고 난 후, 그 작가와 이래저래 알고 있었던 같은 시대 사람들이 죽고 난 후, 즉 그 작가와 이해관계나 현실적 공리성을 벗어난 시대에 가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줄로 안다. 그러니 이것은 문학사에 명작으로 영원히 남는 상이 심사되는 레벨일 것이다. 코앞의 그 허황한 상에 아웅다웅하지 말고 이런 큼직한 상을 기대해보자! 2007.7.5
85    成都와 날씨 (우상렬85) 댓글:  조회:4627  추천:71  2007-06-20
成都와 날씨우상렬사천성 성소재지 성도란 곳에 와보니 매일매일 날씨가 흐리터분한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霧都-안개의 도시 중경이 이런 줄 알았는데 100보에 50보라 할가 성도도 거기서 그기. 중경보다 단지 안개가 좀 적을 뿐. 금방 와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다. 눈을 뜨면 시침은 아침 9시에 육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침에 워낙 해가 늦게 뜨는데다 그 해라는 것이 뜨는 둥 마는 둥 하니깐 집안은 오전 8~9시가 되어도 희여뿜하다. 그러다가 밖에 비라도 오는 날에는 집안은 온통 까막 나라가 되고 만다. 3월 달 쯤 되어도 아침 6시면 환히 밝는 세상에서 온 나로서는 아침의 이런 희여뿜하거나 까막 나라에서는 아침 기상감각을 잃고 만다. 그래서 결국 할 수 없이 알람시계를 사놓고 강박적인 기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달팠다. 나만이 머저리가 된가 했더니 한번은 농촌으로 놀러 갔다가 아침도 한참 지난 오전에 시도 때도 없이 꼬기요~ 울어대는 닭들을 보고는  저것들도 나하고 같은 꼬라지(꼴)구나 하면서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가만히 보니깐 성도는 경도 상 우리 연길보다 한 2시간 해가 늦게 뜨는 것 같다. 사실 성도는 동쪽에 해가 뜬다고 해야 거저 희여뿜한게 흉내만 낼 뿐이다. 그리고 낮에는 중천에 해가 걸렸는지 말았는지, 그리고 저녁에는 해가 지는지 마는지 도저히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동서남북의 방향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집 방향도 남향이고 무어고 거저 막 짓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집안은 낮에도 항상 희끄무레하다. 전등을 켜야 한다. 그런데 전기 값이 아깝다. 그래서 일반 서민들은 희끄무레한 대로 그대로 산다. 바로 이 희여뿜하고 흐끄무레한 자연적 풍토에서 벗어나고자 성도지역의 전통적인 가옥은 기와는 검은 기와를 뒤집어 썼으되 벽만은 흰색을 칠해놓고 있다. 검은 지붕에 흰 벽의 전형적인 남방가옥이 그것이다. 우리 연변의 조선족들이 깨끗함을 추구하여 흰 벽을 칠한 것과는 좀 다르다. 성도지역의 현대건축들은 이런 자연적 풍토를 커버하는 면에서 좀 화려한 색상의 겉모양새라도  많이 갖추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직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다.   미인이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보여 줄듯 말듯 성도의 해님은 쉽사리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그래서 그 미인, 아니 그 해님이 더 값진 줄로 안다. 보라, 어쩌다가 그 해님이 얼굴을 내밀면 사람들의 얼굴은 삽시에 밝아지고 일종 축제분위기에 들어간다. 해님을 보지 못해 우울하고 찌부둥했던 기분들을 날려버린다. 내가 있는 사천대학교 캠퍼스만 해도 학생들은 옷가지나 이불 같은 것을 말린다, 그리고 해쪼임을 한다 부산을 피운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아침 해 찬란히 일찍 뜨서 조선이라 했다는 조선,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지만 해 잘 뜨는 우리 연길이 부럽고 그립다. 한 번은 성도 미인보고 한다는 소리가 야, 우리 그기, 찬란한 해 뜨는 우리 그기에 가 나하고 살자~ 싱거운 나는 못 말려! 그랬더니 성도 미인 정색을 하며 하는 말이 그런 강한 햇빛 속에는 피부에 치명적인 자외선이 많아 피부를 까맣게 태우거나 거칠게 하고 심할 경우에는 피부암까지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는 미인의 첫째 조건인 흰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런 곳에 가서는 못 산다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보니 아닌게 아니라 얼굴은 뽀얗게 희다. 목덜미를 보니 목덜미도 희다. 그 아래를 좀 더, 좀 더 자꾸만 내려가면서 보고 싶었는데 볼 수 없어서 아쉽다. 그놈의 옷이 웬쑤다. 아니, 엄큼한 나지. 무슨 미인이고 자시고 성도여자들은 성도가 최고란다. 왜서 그런가하면 해가 적게 뜨는, 그리고 해가 뜨 봤자야 강렬한 빛을 발하지 않는 성도의 해님인지라 여인들의 피부를 흰 색으로 만들 수밖에 없단다. 정말 그런가, 긴가민가. 사천여자들을 데리고 사는 우리 북방 남자들한테 은근히 물어보았더니 확실히 그렇단다. 사실 그럴 듯하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감방에 오래 갇혀있는 죄수들의 얼굴이 햇빛을 적게 보는 만큼 희지 않는가. 창백하기는 해도. 그러니 성도 미인의 말도 일리는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성도 여인들의 보드라운 피부를 만드는 데는 아마도 성도의 바람 한 점 없는 잠풍한 날씨 덕택이 아닌가고 생각된다. 성도는 1년 사시절 가도 바람이 불지 않는다. 산들 바람이라도 좀 불었으면 하는데 바람이 부는 것 같지 않다. 여기에 1년 사시절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지 않으니 서리가 앉지 않는다. 그러니 풍상고초를 겪지 않는 성도 여인들의 피부는 부드러울 수밖에. 사실 성도여인들은 피부뿐이 아니고 성정도 대단히 부드러운 편이다. 사천 辣妹는 다른 얘기고. 성도여인들이 코가 좀 맨 듯한 코맹맹이 소리로 大哥 할 때는 정말 사람 죽인다. 성도는 전반 날씨가 음기가 성하니 여자가 잘 될 수밖에.여하튼 성도는 이래저래 해가 적게 뜨는 것만은 확실하다. 해가 적게 뜨니 성도는 바다를 멀리 한 내륙에 있지만 날씨는 습하다. 바로 이 습한 날씨 때문에 성도를 비롯한 남방의 전통적인 집들은 대개 2층 집을 짓는데 1층은 식사칸이나 창고로 쓰고 2층에만 사람이 기거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습한 날씨 때문에 성도 음식에는 花椒가 약국에 감초처럼 꼭 들어간다. 이 얼얼하게 맺게 하는 麻辣맛을 풍기는 花椒가 바로 去濕-습함을 제거한단다. 그리고 플라스 알파로 바로 이 去濕하는 花椒가 성도여인들의 피부를 희고 보드랍게 한단다. 그리고 해가 적게 뜨는 만큼 성도는 춥다. 물론 우리 연길처럼 영하로 내려가는 하늬바람이 부는 그런 추움은 아니다. 이른바 陰冷, 습기가 있는 음산한 추위라는 것이다. 여기에 비라도 구질구질 내리는 날에는 정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찌부둥해진다. 陰雨가 사람 기분을 잡친다. 그런데 巴山夜雨라 중경 쪽이 그런가 했더니 성도의 비라는 놈도 夜行晝伏性을 가졌는지라 밤에 잘 내리는 반면에 낮에 잘 내리지 않아 그런대로 괜찮다. 그런데 우뢰나 번개를 잘 동반하지 않는 그 구질구질한 비는 정말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성도 사람들은 음산한 추위에 대단히 못 견디는 것 같다. 3월 달인데도 파카를 입고 다니는 양반들이 심심찮게 눈에 뜨이니 말이다. 내가 좀 두꺼운 와이샤츠 하나에 좀 두꺼운 양복을 하나 달랑 입고 다니니 다 놀라운 눈치다. 성도 사람들은 바로 이 추움을 견디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우리처럼 늘얼하게 맵은 고추가 아니고 톡 쏘듯이 매우면서 화끈하게 땀을 나게 하는, 우리가 말하는 남방고추를 기를 쓰고 먹는다. 辣椒去寒이란다. 참 그래서 사천 음식에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 花椒辣椒, 나는 그만 질려버렸다. 사천 음식에 열을 올리는, 풀풀 끓여 먹는 찌개류(火锅도 이런 유로 볼 수 있을 듯)가 많은 것도 이런 去濕去寒의 한 방편이겠지.해가 늦게 뜨고 늦게 지는 성도. 그러니 사람들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자는 것도 자연의 순리에 맞는 법. 사천대학교 학생 식당도 아침식사시간이 아침 7~10까지다. 오전 일찍 수업 있는 놈은 일찍 먹고 늦게 있거나 없는 놈은 천천히 먹어라는 것이다. 참 느긋하다. 출근시간도 물론 학교 같은 데는 8시에 수업을 시작하지만 일반 사업단위나 기관은 대개 8시반이나 9시에 출근이란다. 점심시간은 일반적으로 12시부터 2시30분까지, 이 기간에 낮잠은 필수란다. 저녁은 6시에 퇴근. 겨울 때도 저녁 6시는 아직 밝은 세상인 성도. 그래서 밤생활이 풍부한 성도. 한 번은 저녁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산보를 하느라고 사천대학교 동문을 나서서 빈둥빈둥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 앞에 불빛이 현란하여 발이 끌리는 데로 가보았더니 요란한 먹자거리가 아닌가. 성도시를 꿰찔러 흐르는 錦江기슭을 따라 난 좁은 길 왼 편에 술집들이 죽 늘어섰다. 남방풍치를 살린 대나무숲집이며 북경풍치를 살린 ‘四合院이며 북구 해적들의 소굴을 모방한 듯한 집이며 제법 각양각색으로 분위기를 살렸다. 집안뿐만 아니라 바깥마당에까지 술상을 벌려놓았다. 거창하게 왕창 술을 퍼 마시는 것 같은데 가만히 보니 우리 연길하고는 게임이 안 될 정도로 거저 작은 맥주 몇 병 시켜놓고 떠들어들 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분위기만은 무르녹는 듯 했다. 술 한 잔 못 얻어 마시는 내가 가련해나기도 했다. 밤생활에 술이 곁들어지고 길어지니 로맨스도 많은 법. 저기 벌써 쌍쌍이 사랑을 하러 가는 놈, 아니 벌써 키스에 사랑의 열을 올리고 있구나... 성도 사람들 말로는 성도 날씨도 1년 사계절이 분명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리 변화가 없는 것이 성도 날씨다. 하루 날씨만 보아도 해가 뜨는 둥 마는 둥 지는 둥 마는 둥 거저 그렇고 그렇다. 1년 사계절도 그저 그렇고 그렇겠지. 아니, 1년 사시절 햇빛이 비축하고 비축하여 여름 한철에 집중적으로 내리 쬐이니 여름은 찌물쿠고 찌물쿨 수밖에. 성도사람들 말로는 悶熱 그 자체다. 그러니 적어도 겨울과 여름은 변화가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 그러나 그것도 반짝 한 두 달 뿐이라니 예외로 치자. 그러니 성도 날씨는 변화 없는 것을 특색으로 꼽을 수밖에. 그러니 사람들 세월의 흐름에 둔감하고 세월아 네월아 니 가느냐 마느냐 하고 여유작작하게 사는 줄 안다. 모든 것이 아직 느리고 편안한 줄 안다. 좀 조용한 골목들을 찾아 들어가면 늙은이고 젊은이고 마작판이나 카드판이 한창이다. 성도사람들은 개혁개방 현대화의 빠른 절주를 잘 모르는 듯하다. 아니, 그들은 천성적으로 그런 빠른 절주를 싫어하는 듯하다. 이제 서부대개발이요 하며 들이닥치는 진정한 성도의 개혁개방 바람에 성도 사람들은 자기네를 잘 살게 한다하니 좋아하는 듯하면서도 자기네들의 여유작작한 생활이 깨여지는 듯해서 그런지 심드렁해하는 표정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좀 어렵더라도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현재의 자기네 생활이 더 좋다는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외지인들한테 항상 자랑 비슷이 하는 얘기가 성도는 悠閑한 도시라고 한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이 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인지 養老할 도시라고도 한다. 2007. 4. 5                  
84    四川辣妹와 조선여자 (우상렬84) 댓글:  조회:4895  추천:87  2007-06-02
四川辣妹와 조선여자우상렬조직에서 사천 가 한 1년 있으라니 지극히 흥분되었다. 단방 떠오르는 것이 四川辣妹. 그런데 다음 순간 별론걸 하고 심드렁해진다. 四川辣妹, 작달막한 키에 이마뻬기 톡 튀어나오고 눈확이 좀 꺼지고 또 광대뼈까지 튀어나오고 여기에 하가 빠진 것이 뛸 데 없는 원숭이상. 그리고 얼굴은 가마잡잡한 것이 떼국을 못 벗어난 촌스러운 상. 막 주물러 만들었다할가, 아니면 모양새가 없게 아무렇게나 생긴 못난 토종감자라할가... 여하튼 四川辣妹가 나한테 준 인상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 사천에 가서 볼라니 나의 눈은 빛구리가 된다. 얼굴이 희고 쫑쫑빵빵한 것이 단방 나의 눈을 끌었다. 남자들 다 이런가? 어느 외딴 곳에 가면 그곳 여자들 훔쳐보기에 바쁘다. 여자의 맛을 알대로 다 안 나 같은 나그네는 더 한가봐. 쫑쫑빵빵에 포인트를 맞춰 굴레 벗은 말처럼 무한한 상상을 날리기. 그리고는 깜박 잘 못 하다가는 개꼴망신하기. 그런데 고 잘록한 허리에 뛰뚱뙤똥 걸어가는 모습만 보아도 그 노긋노긋함이 묻어나는 데는 나로서는 또 어쩌라 말이야! 여기에 양양 코맹맹이 소리로 말을 걸어올라치면 그 애교성에 그만 껌벅 죽는다 죽어. 사천 말은 부드럽다. 사천사람들은 중국어 일, 이, 삼, 사성에서 뻑센 사성발음을 아예 하지 않고 전부 부드러운 이성이나 삼성으로 해치운다. 그러니 사성 발음을 해야 할 四도 이성 발음인 十과 거의 같게 발음한다. 금방 와서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카운터 四川辣妹가 十块라 하기에 10원인갑다하고 10원짜리를 하나 내 주었더니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이며 해쭉 웃는다. 그러자 4원인 줄로 알았다. 그 후 여러 곳에서 두루 물건을 사보았는데 四川辣妹는 4가 들어간 돈 액수를 말할 때는 10과 구별시켜 준다고 정답게도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인다. 그리고 四川辣妹는 자기 의지를 나타낼 때도 우리 북방 여자들처럼 직설적으로 툭툭 하는 것이 아니고 ‘我們一起去嚒~’식으로 어린이가 어른한테 귀여운 떼 질을 쓰듯이 종결토 ‘嚒’를 좀 길게 뺌으로써 결국 자기의 의지를 관철하는 그런 미묘함을 풍긴다. 以柔克剛이라 할까. 四川남자들이 이렇게 말을 할 때는 참 메스꺼운데 四川辣妹들이 이렇게 말을 할 때는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몸을 좀 꼬기라도 하고 엉치를 조금 흔들어대기만 하면 남자들 뽕 가고 만다. 똑 마치 우리 연변의 여자들이 ‘야양 가기시오~!’, ‘아이 가겠습니꺄~?’할 때 사랑스러운 것과 같은 경지라 할까. 그럼 四川辣妹와 우리 연변 여자 누구 더 곱지? 한번은 이런 시시껄렁한 문제로 사천대학의 모모한 치들과 쟁론이 붙었다. 나는 단연히 우리 연변 여자가 곱고 그들은 단연 四川辣妹가 곱단다. 그들 말로는 四川辣妹 피부 희고 부드럽고 애교성에 최고란다. 그러면서 요 얼마 전에 세계 무슨 미인대회가 있었는데 중경 처녀 둘이 冠亞軍을 했단다. 중국의 미녀는 항주고 대련이고 다 제쳐두고 중경이 최고란다. 그래도 내가 우리 연변 여자 더 곱다고 하니 그들은 연변 여자들 못 봐서 모르겠단다. 그래서 내가 들이댄 것이 우리 연변 여자는 전통적으로 말할라치면 다 부드러운 춘향 같고 현대적으로 말하라 치면 다 한국의 톡톡 튀는 김희선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입을 하 벌리며 좀 수긍하는 표정을 짓는다. 춘향이나 김희선은 알고 있은 듯 모양이다. 四川辣妹, 발본색원! 四川辣妹, 왜서 四川辣妹라 했는지 아느냐? 매운 거 잘 먹는다고? 아니, 고추처럼 맵다해서, 고 작은 남방고추처럼. 절반 맞았음, 50점. 사실 고 고추처럼 맵기만 한 것이 아니고 ‘독’한데도 있더라. 언젠가 성도의 地方名小吃음식절에 가 보았더니 곱상스레 생긴 四川辣妹 둘이서 시커먼 날 것 가재를 와삭와삭 씹어먹으면서 시식을 해보이는데 어지간히 놀랐다. 四川辣妹, 성격이 潑辣하고 火辣해서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럼 성격이 왜서 潑辣하고 火辣하지? 그녀들이 생활의 전부 짐을 매고 나가다보니 그렇게 되었단다. 그렇게 潑辣하고 火辣하지 않으면 그 많은 식구의 생활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활의 강인함이 그녀들을 그렇게 만들었단다. 그럴 듯도 했다. 중국에서 그 많은 특구나 경제개발구의 노동력 수요를 만족시키는데 바로 이 四川辣妹가 톡톡히 한 몫 한다. 그녀들은 억척스레 일을 해서 한푼 두푼 돈을 모아서는 집으로 부친다. 그녀들은 자아희생적인 일벌레로 정평이 났다. 그래서 四川辣妹는 전국 어디서나 통하는 일벌레의 대명사로 되었다. 그 가마잡잡하고 화장끼와 먼 토종 四川辣妹는 사랑스럽다. 나는 四川辣妹와 우리 조선여자들을 매치시켜본다. 정말 비슷한 데가 있다. 우리 여자들도 ‘베적삼이 흠뻑 젖’도록 일밖에 몰랐지 않았느냐? 나는 우리 여자들이 더 대단해 보인다. 지금도 한국으로, 저 먼 미국으로, 유럽으로 일하러 간다. 억척스레 벌어 아이며 남편이며 온 가정을 먹여 살린다. 어디 이뿐인가. 돈을 벌어서는 투자할 줄도 안다. 우리 연길의 잘 나가는 식당이나 노래방이나 사우나 같은 제3산업은 이런 여성들에 의해 일떠섰다. 그런데 나는 우리의 여자들이 四川辣妹보다 불쌍해난다. 四川辣妹는 전통적으로 女主內, 男主外에 관계없이 집안일, 바깥일 가리지 않고 다 해치웠단다. 지금도 시내에 다니다 보면 공사판에서 여자들의 활약이 보인다. 그러면 남자들은 뭐 하지? 했더니 남자들은 논단다. 休閑한단다. 차물 마시며 와작작 마작하기. 남자기생! 우리 남자들도 좀 그렇다. 아니, 더 하다. 뒤짐 지고 팔자걸음하기 좋아하는 우리, 그리고 세월아, 네월아~ 술 마시고 놀아나기 좋아하는 우리, 사천남자들 뺨 친단다. 四川 남자들은 요새 와서는 四川辣妹가 힘들어 할세라 바깥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집안일도 잘 한단다. 그래서 四川辣妹들 웃음꽃 핀단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집안일 하는 ‘놈’ 몇 놈이나 되는고? 言歸正傳, 四川辣妹는 영원히 사랑스러운 妹로 남고 싶단다. 사천에서는 식당 같은 서비스업종에서 小姐라는 말은 잘 안 통한다. 小姐하면 그 기생적인 냄새에 그리 좋아하지 않는단다. 妹子라야 되돌아보며 해쭉 웃으며 기분 좋아한다.  四川辣妹, 한번 데리고 살고 싶다. 아니, 품에 안고 싶다. 언감생심! 엄큼한 나그네 생각. 외로운 나그네 신세거늘 이해하시라!   阿妹~ 阿妹... 你要老實講, 今天是否喜歡我!
83    행복한 낮잠자기 (우상렬83) 댓글:  조회:4513  추천:57  2007-05-24
사천성 소재지 성도, 서부 대 개발 중추역의 하나. 나는 무슨 서부대개발이요, 뭐요 하니깐 성 도 사람들 붕붕 뜨서 들볶아치는 갑다 생각했다. 그런데 성도에 도착해서 볼라니깐 여기의 잠풍한 날씨마냥 여기 사람들 조용하다. 나른하게 조용하다. 얼마나 조용한가 하니 낮잠을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잘 자는 사람들이다.   내가 성도에 제일 처음 오기는 지난 12월말, 한겨울. 물론 한겨울이래야 우리 동북의 겨울  하고는 게임도 안 되는 꽃샘추위 같은 추위. 그런데 나는 사천대학의 하루 출퇴근시간표를 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특히 점심 12시부터 오후 2시 30반이라는데 머리가 갸웃해졌다. 적어도 우리보다는 1시간쯤 길다. 점심시간 왜 이리 긴 거야, 하고 그 영문을 알아보니 낮잠 자기 위해서란다. 어, 낮잠 자기~ 한 겨울철에도 낮잠 자기를 공식 출퇴근시간표에서 배려하니 이 아니 신선노름인가? 한번은 2시 30분이 되어 내가 소속된 학과사무실로 일을 보러 갔더니 비서노릇을 하는 아가씨, 아니 아줌마라 해야 더 적절하겠지, 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하~하~, 하품을 하고 앉아있는데 오늘 낮잠을 잘 못 자 피곤하다는 둥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눈에 노란 눈곱이 묻어있는 걸 봐서는 열심히 잤겠는데 말이다. 사실 나도 낮잠 자기다. 아니, 나는 여기에 아침잠자기에 저녁잠자기까지 합해 정말 못 말리는 잠자기다. 나는 아침밥을 먹고 한잠, 저녁밥을 먹고 한잠이니 낮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원래 식곤증이란 것에 약한가봐. 밥만 먹으면 잠이 오니 말이다. 그래서 언제가 병원에를 찾아 갔더니 의사선생님 말쌈이 원래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밥만 먹으면 포만감에 식곤증이란 것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때까지 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소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점심때 한잠 재워주는 것이었다. 나는 불쌍하게도 유치원이란 걸 못 다녀봤으니깐 더 행복했을 유치원 때 낮잠 잔 기억 같은 아쉽게도 없다. 그때 책상을 아무렇게나 쭉 이어놓고 담요 한 짝 덮고 자는 것이 하루 학교생활에서 제일 달콤한 시각이다. 그러다가 나의 낮잠 자기는 위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아니 나이가 들수록 무형의 그 무엇에 빼앗기고 말았다. 고중 때 대학시험을 칠 임박에는 마치 누가 낮잠을 안  자고 밤잠을 적게 자는가에 따라 대학입학의 입낙이 결정된다는 착각 하에 정말 낮잠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냈다. 우리 선생님들이랑 부모들이 정색해서 하시는 말쌈이 잠을 적게 자는 놈이 대학입학이란다. 그러니 점심밥을 먹고 밀려오는 식곤증에 눈을 비비고 잡아 뜯으며 싸움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깜박 머리를 책상에 처박고 한잠 자고는 머리가 개운해지기는커녕 자서는 안 될 잠을 잔 죄책감에 그만 머리가 띵 해나기만 한다. 정말 고중 때 낮잠 안자고 공부해서 그런지 대학에는 겨우 붙었다. 그래서 이제는 한숨 훌 쉬면서 그 자고픈 낮잠을 푹 자자고 맹세했다. 그런데 이것이 또 개맹세될 줄이야! 내가 대학을 입학한 1980년대 벽두에는 전국이 4개현대화를 실현한다고 야단법석을 피울 때다. 그때 세계 선진국 일주를 시찰하고 돌아온 어마어마한 분들이 쩍 하면 하는 소리가 왜 선진국이 발전했는지 아오, 그 사람들은 낮잠을 안잔다 말이요. 우리가 낮잠을 잘 때 그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으니. 그때 내가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아주 존중하는 한 조선족의 거목도 한다는 소리가 꼭 이런 소리다. 그래서 나는 낮잠공포증에 걸렸다. 4개현대화를 위해서는 낮잠 자서는 안 된다. 낮잠 자면 개새끼. 이것이 나의 신조였다. 그래서 나는 또 지겨운 낮잠 자기와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대학교시절은 그래도 나의 주체사상이 확고하게 서 가던 시기였다. 그래서 낮잠 자기와 한참 싸움을 하다가 4개현대화고 무어고 60점 만세에 낮잠이 오면 오~ 왔냐? 반갑다하고 한잠 푹 자기. 사실 나는 낮잠을 자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대학교 때부터 나의 낮잠자기는 굳어진 습관으로 되었다. 내가 낮잠을 잘 자서 그런지 그래도 대학을 원만히 졸업하고 연구생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의 이 낮잠 자기는 박사공부한답시고 한국에 유학가면서 흐지부지해지고 말았다. 한국은 이른바 현대화사회라는 것이다. 사람들 무엇이 바쁜지 종종 걸음들이다. 낮잠 잘 시간도 없어 사람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는 꺼벅꺼벅 잘들 존다. 쯔~쯔~, 불쌍한 사람들. 낮잠 잘 시간도 없다니. 나는 처음에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좀 지날라니 내가 그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낮잠을 자자니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모두들 안자는 분위기가 나를 기죽이고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저 사람들 안자고 어떻게 견디나 했더니 커피를 뽑아 훌쭉훌쭉 마시며 정신을 차린단다. 그래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나도 훌쭉훌쭉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정신이 좀 맑아지는 듯 했다. 그런데 그놈 커피 많이 마시면 억지로 낮잠귀신은 몰아내되 코카인 중독에 속이 망가진단다. 그래서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은 다시 낮잠이 오면 오~ 왔냐? 반갑다, 한잠 자자이다. 마치 그립던 연인을 만난 듯이 말이다. 그때 나는 은근히 한국친구들로부터 저 봐, 중국 사람들은 저렇게 낮잠을 자니깐 못 살지 하는 눈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아, 네월아~ 나의 낮잠은 그 모양 그 대로.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낮잠효용론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낮잠자기거부종주국인 미국에서 어떤 대단한 신경과학가의 연구에 의하면 점심식사 후 한잠 자는 것은 몸에 그렇게 좋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거저 약 10분간을 눈을 감았다 뜨도 그렇게 좋단다. 그러기에 차 운전할 때 식곤증이 올 때는 갓길에 들어서 한잠 자라는 것이다. 고속도로 갓길이 낮잠자기장소로 둔갑하는 순간. 송이송이 해바라기 미국을 따라가는 한국과 일본에서도 낮잠자기에 대한 시각교정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약삭 바른 일본에서 화이트칼라들의 점심낮잠자기를 곁들인 휴게소들이 성업 중이란다. 점심 밥 먹고 곧바로 가까운 휴게소로 달려가 국부마사지나  받으며 눈 지긋이 감고 낮잠 흉내 내기가 가장 행복한 시각이라는 것이다. 이래저래 나는 낮잠옹호론자고 만세론 자인 것 같다. 천하 낮잠 없이는 못살 것 같으니 말이다. 여자, 애인은 없어도 살겠는데 말이다. 낮잠 한번 자고 나면 그렇게 정신이 거뿐하기로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사천성 성도에 오니 눈꼴사납고 꼴 볼견이 많다. 그런데 유독 세월아, 네월아~ 낮잠 잘  자는 내 친구들이 많아서 좋다. 나랑 어느새 친구가 되어버린 四川辣妹의 말이 재미있다. 자기는 여름이 무더우면 무더울수록 좋은데 그때 낮잠이 제일 달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세월아, 네월아~ 여름아 빨리 오너라하고 애인을 기다리듯이 기다린단다. 그리고 자기는 낮잠을 많이 자야 미녀가 된단다. 四川辣妹뿐이 아니고 여하튼 성도는 세월아, 네월아~ 낮잠을 즐기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낮잠 없이는 하루의 즐거움을 생각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성도는 休閑城市란다. 그래서 그들은 서부대개발이니 뭐요 하며 현대화요 뭐요 하며 낮잠을 빼앗아갈 가봐 은근히 두려워하는 듯도 하다. 사실 서부대개발이요, 현대화요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복된 삶을 위해서다. 점심밥을 먹고 나면 식곤증이 오는 것, 그래서 한 잠 자고 나면 거뿐한 거, 행복한 거…이것도 인간의 조그마하나마 복된 삶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잠이 오면 자는 거, 억지로 커피니 뭐로 부산을 피우지 말고 한잠 자는 것이 자연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사는 만병통치약이다. 그러니 세월아, 네월아~ 낮잠 잘  자는 우리 족속들, 할 얘기가 있다.
82    SexualCross (우상렬82) 댓글:  조회:3874  추천:88  2007-05-03
SexualCross 우상렬세상은 정말 돌고 도는 갑다. 언젠가 여자들이 남성억압 하에 죽겠다고 지랄이더니 이젠 남자들이 참 죽을 맛이다. 남성의 여성화, 남자들이 여자처럼 되어야 잘 나가는 세상이니 말이다. 세상이 딱딱한 하드-남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분명 부드러운 소프트-여자들의 세상으로 번져가니 말이다. 노지심이 왼 힘으로 나무를 뽑아버리고 무송이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던 시대는 언녕 지나가고 버튼을 누르거나 컴퓨터자판을 뚜드리는 시대가 아닌가? 아무리 껑껑 거리며 일해봐야 개밥에 도토리신세밖에 안되고 굽실굽실 ‘いらぃませ’쯤 해야 밥 벌어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 먹었는지 페미니즘의 여권신장 같은 것은 약과고 오히려 남성 스스로가 남성이기를 포기하고 여성화-SexualCross로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남자들한테도 무슨 매너니 화장이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따라 붙는다. 무슨 남자가 그래, 매너 하나 없이. 요새 남자가 여자들한테 심심찮게 듣는 소리다. 여자들한테 반말을 썼거나 여자들 앞을 안면고시 없이 획 지나갔거나 엘레베이터 같은 거 탈 때 남자가 여자 먼저 탓을 경우에조차 이런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이런 소리를 듣는 남자는 이거 아닌데... 속으로 이렇게 되뇌이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거저 이거...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 거세당한 송아지새끼처럼, 아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노새처럼 제풀에 물앉고 만다. 못난 남자들 같으니라꼬. 이러니깐 나 같이 표정이 굳고 행동이 거친 남자들은 설 자리가 없지. 아니, 무슨 표정이고 행동을 떠나서 나 같이 험상굳게 생긴 놈은 아예 SexualCross에서 도태다. 요새 봐라, 남자들 화장하고 매니큐하고 여자들 흉내낸다고 야단들 아니냐. 거리바닥에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 남자들 화장품이란다. 아이고 화장품쯤이면 약과지, 정형외과까지 남자들이 붐빈다고 하니, 이것이야 말로 격세지감이로세! 그래서 결론적으로 요새는 꽃미남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다 말이요. 그리고 꽃을 든 남자들이 줄을 선 시대란 말이요. 참 우리가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니는 내꺼야! 하며 남자들이 독점욕을 풍겨야 여자들이 따라주었는데 이제는 나는 니꺼야! 하며 아양을 떨어야 여자들이 받아 줄가 말가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한심할시고’! 남자들이 백기를 든 분명한 여성상위시대. 내 친구 한 놈은 저녁에 그 일을 할 때도 여성상위시대, 올라옵소 한단다. 그러니 땀 뻘뻘 흘리지 않고 그 거창한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단다. 처음에는 남성상위시대, 올라탑소 해야 꼭 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성상위시대, 올라옵소로도 되니 희한하고 재미나고 좋더란다. 내 친구 더 기가 막히는 한 놈은 돈을 벌어서는 꼭꼭 마누라한테 챙겨주고는 여성상위시대, 올라탑소와 남성상위시대 올라옵소를 떠나서 여하튼 열심히 그 일을 해주어야 용돈으로 돈을 조금씩 타 쓴다고 한다. 나보다는 못한 놈! 아니 피장파장, 아니 그래도 나보다는 못하지. 여성상위시대, 여성동지들 좋캈소! 그런데 여성동지들 많이 남성화 되었구려~ 그래서 남자들 많이 기 죽는다 이거여. 아니 피장파장이구려. 남성의 자성화⇔여성의 웅성화, SexualCross의 본래적 의미도 이런 것으로 보아야지. 모계사회니 부계사회니, 모권제니 부권제니, 남권이니 여권이니 하는 우리 역사의 일그리진 면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좀 矯枉過正으로 나가도 괜찮다. 남성중심을 폭파하고 올라탑소와 올라옵소의 논리도 폭파하고 남성과 여성이 대등한 키스의 원리로 SexualCross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요, 해체주의요 하는 요즘 좀 아리숭한 얘기들도 이런 SexualCross의 확대판에 다름 아니겠지!
81    누이동생 콤플렉스 (우상렬81) 댓글:  조회:4191  추천:73  2007-04-26
누이동생 콤플렉스 우상렬생사로(生死路)는여기 있으매 두렵고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느냐어는 가을 이른 바람에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한가지에 나고가는 곳 모르는구나아으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도(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신라의 명승 월명사가 부른「제망매가」다. 속세의 인연을 끊은 중이건만 누이동생의 뜻하지 않은 죽음에 애틋함을 금하지 못해 부른 노래다. 나는 대학교 때 이 노래를 접할 때 누이동생에 대한 오빠의 절절한 정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나고 말았다.나는 지금까지도 우리 엄마, 아버지에게 그 무슨 한스러움이 있다면 나에게 누이동생 하나 낳아주지 못한 것으로 치겠다. 우리 집에는 줄줄이 육형제뿐이었으니깐. 내가 누이동생을 가지고 싶었던 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 나하고 제일 딱친구인 옆집의 창수 여동생을 보면서부터였다. 창수네 집은 아이라고야 달랑 창수와  여동생 옥경이뿐이라 어른들이 들에 일하러 나가고 나면 옥경이 보는 몫은 고스란히 창수에게 돌아갔다. 창수는 우리 또래들이 노는 데까지 옥경이를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분명 좋아서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마지못해, 때로는 역정을 부리면서 데리고 왔다. 친구들도 자꾸 옥경이를 데리고 온다고 아니꼬운 핀잔이다. 그런데 나만은 나도 모르게 옥경이가 좋았다. 나는 창수가 부러웠다. 나에게도 저런 여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그래서 옥경이가 어려 업어줘야 할 때는 내가 창수 대신 업어주고 옥경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탈 때는 내가 걷기며 놀았다. 이 통에 창수놈은 좋아라고 딱지치기며 다마까기 같은 놀음에 빠지고 만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나를 바보 같은 놈이라고 놀려댔다. 그러면 나는 히죽 웃고 만다. 내가 좋아하는 노릇이니 막무가내라 식으로. 내가 여동생을 봐준 덕분인지 나와 창수는 유별난 친구가 되었다. 참, 그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매부 좋고 누이 좋고...그런데 好景不長이라 우리 집과 창수네 집은 갈라지게 되었다. 창수네 집이 이사를 갔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의 여동생와도 갈라지게 되었다. 허전했다. 죽을 기분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공책이며 지우개며를 산다고 거짓말을 해서는 계집아이 꼬마인형을 하나 샀다. 그리고는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엄마와 아버지는 이 자식 정신 나갔다고 야단이다. 은근히 아마 이 자식 올되 사춘기쯤 왔는 줄로 생각했을 것이다.사실 나는 올되지도 못하고, 사춘기도 무엇인지 모르고 지났다. 한번은 몽정을 하고는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는가고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몰랐다. 나는 대학교에 가서야 사춘긴지 무언지 좀 알았다. 그래서 한번은 열람실에서 은근히 짝사랑하는 처녀동지가 우연히 옆에 와 앉게 되어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모른다. 그날 밤은 온통 뜬 눈으로 보내고 말았다. 나는 바로 대학교 때 이 사춘병에 걸려 흘레 못한 개처럼 처녀동지들 뒤꽁무니를 많이 따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방학간 내가 집에 갔을 때다. 짜개바지 친구 창수가 찾아왔다. 반가웠다. 놈은 술을 마시잔다. 긴히 할 말이 있단다. 여하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술이 한 두 순배 돈 다음 그 자식 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자기 여동생 옥경이를 책임지란다. 옥경이가 지금 나를 짝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렸단다. 어, 나는 놀라면서도 한편 진정을 찾았다. 고 머루알 같은 눈에 까만 눈썹에 단발머리 계집애... 언제가 방학간에 집에 와 시내를 거닐다가 이제는 제법 처녀티가 나는 숙성한 옥경이를 만났었다. 그녀는 몹시 부끄러워하는 눈치다. 얼굴은 확연히 달아오르며 두 손은 옷깃만 매만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태연했다. 그녀 앞에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어렸을 때 업어주고 손잡고 다니던 그때가 생각키웠다. 나는 그녀가 귀여운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쓱 쓰다듬어주고 말았다. 그녀는 여전히 나의 깜찍한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나보고 무슨 책임을 지라니, 아니, 사랑을 하라니 나는 정말 어안이 벙벙해났다. 나는 옥경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나를 짝사랑한 여인이건만. 그래서 결국 창수에게도 상처를 남기고. 창수는 네놈이 대학에 가더니 출세했다고 농촌여자가 싫다 이거지 하며 두 눈을 부라리며 나의 멱살을 잡았다. 나는 창수가 잡아 흔드는 대로 몸을 내맡기고 말았다.내가 연구생 공부를 할 때다. 한번은 술이 얼근하게 되었다. 늙은 노총각의 욕정이 타올랐다. 다짜고짜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어두컴컴한 곳으로 끌고 갔다. 그녀는 기급을 하며 낯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나의 키스폭포와 가득 찬 물총이 겁이 났던 것이다. 오빠, 이러면 안 되, 우리는 영원한 오빠와 누이동생이잖아, 나를 누이동생으로 남게 해줘. 아, 누이동생이란 말에 나의 키스폭포와 물총은 그만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나는 그녀를 조용히 끌어않았다. 나의 영원한 누이동생으로!누이동생, 나에게는 일종 징그스적인 콤플렉스로 남아 있다. 오빠, 사랑해!하면 나는 그만 신경이 곤두서며 기겁을 하고 만다. 아이참, 누이동생을 어떻게 사랑하지? 안될 소리! 그래서 나는 결국 누이 같은 여자를 사랑하고 말았다.  
80    重慶사람들과 火锅 (우상렬80) 댓글:  조회:4882  추천:67  2007-04-25
重慶사람들과 火锅 우상렬 연변대학 교수중경사람들은 참 먹기를 좋아한다. 천부지국의 풍부한 물산이 먹기를 만들었으리라. 사천요리는 중국의 8대 명요리 가운데 하나다. 사천요리하면 떠오르는 것이 火锅. 그런데 火锅는 사실 중경이 원조고 오리지날이란다. 중경火锅는 명말청초에 중경 嘉陵江가 부두의 배끌군들이 모여서 먹던 음식이란다. 소천엽, 소피, 돼지내장, 오리밸 등 시시껄렁한 것들을 중경음식 특유의 조미료인 톡 쏘는 고추(태양초)와 화한 향내를 풍기며 입안을 얼얼하게 하는 花椒를 넣어서 끓인 국물에 익혀서 먹던 음식이란다. 그래서 중경火锅를 달리 毛肚火锅나 麻辣火锅라 하기도 한다. 물론 중경火锅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왔다. 처음에는 시시껄렁한 몇 가지만 샤브샤브 해 먹던 대로부터 지금은 소고기, 양고기... 실로 샤브샤브 못하는 것이 없는 듯하다. 한번은 사천외국어대학교 한국어과 강걸 교수의 안내로 별로 이름이 있는 것 같지 않은 火锅店에 간 적이 있다. 식당에 들어서니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왔다. 자리를 잡고 앉는 순간 나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 원래 그 귀맛 좋은 시냇물 소리는 내 자리 옆의 타원형으로 된 한 20센치 내외의 너비로 된 물도랑에서 나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 물도랑으로 앞뒤로 끈으로 느슨히 연결된 조그만 나무배들이 둥둥 떠가고 있었다. 그 배위에는 火锅에 샤브샤브해 먹을 먹을거리들이 작은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제야 깨도가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 일본식 회전초밥을 먹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먹을거리가 물위에 동동 떠가니 그 얼마나 낭만적이냐? 포석정에서 술잔을 동동 띄워서 마셨다는 멋쟁이 신라왕이 생각키운다. 나도 왕이나 된 기분. 사실 나는 신라왕보다 낫다. 먹을거리가 워낙 무진장이다. 전혀 이름도 모르고 먹어보지도 못한 것들이 많다. 샤부샤브,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어도 좋다. 천부지국의 사천이라는 말이 몸에 와 닿는 순간순간들이다. 그리고 이 많은 것들을 1인당 단돈 인민폐 45원에 맥주까지 곁들여 마음대로 갖다 먹으라니 이 참 기가 막히지 않은가? 일본식 회전식당의 빈 접시 헤아리기 보다는 얼마나 대범하고 호쾌하냐? 그래서 나는 샤브샤브 싫큰(싫도록)에 맥주 맥 빠질 때까지 빵빵 마셔주었다. 식성에 술성이 작은 남방사람들은 부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그런데 나의 똥배는 또 나오고... 중경火锅는 먹는 양식도 대단히 다양화되었다. 또 한 번은 강걸 교수를 따라 중경뿐만이 아니고 전국적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중경의 嘉陵江가 산에 의지한 懸空式 전통양식이 밀집된 洪崖洞먹자오락거리에 있는 小天狗火锅娥火锅店에 간적이 있다. 우리 일행이 좌정하자 어여쁜 사천아가씨가 상냥히 웃으며 다가온다. 鴛鴦锅를 하겠는가 아니면 平锅로 하겠는가... 紅湯으로 하겠는가 아니면 淸湯으로 하겠는가... 같이 먹는 큰 솥 火锅로 하겠는가 아니면 개개인이 나름대로 먹는 작은 솥 火锅로 하겠는가... 魚锅로 하겠는가 아니면 鷄锅로 하겠는가... 양손에 떡 쥔 격으로 어리뻥뻥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무거나 좋을 대로, 여하튼 연길에서 먹어보지 못한 걸로, 나의 결론. 그래서 중경火锅는 현재 이름도 다종다양한데 먼저 串串香火锅, 이름 듣기 좋쟈? 무언가 했더니 우리 연길에서 별라별란 것을 다 뀀에 꿴 꼬치를 구워 먹듯이 역시 그런 꼬치를 火锅湯 같은데 넣었다 익혀서 먹는 것이다. 우리 연길 뀀하고 좀 다른 점은 건두부나 채소류 뀀이 더 있는 편이고 뀀을 양념류에 찍어 먹지 않고 거저 먹는 것이다. 그리고 狗火锅도 있다하나 아직 먹어보지는 못했음. 아쉽다. 그러니 오늘도 연길의 狗火锅로나 떼울 수밖에.중경火锅는 뭐니 뭐니 麻辣火锅가 제격. 麻辣, 얼얼하고 매운 맛이 특색이다. 花椒와 辣椒를 주조미료로 하여 기름에 넣고 팔팔 끓이니 花椒와 辣椒의 맛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麻辣 맛이 제격인 붉은 국물-紅湯이 이루어진다. 그 다음 모든 것은 이 紅湯에 넣었다가 꺼내서 먹기. 팔팔 끓는 기름 紅湯이니 일단은 아무리 시시껄렁한 것을 넣어도 멸균이 잘 되니 몸에 탈이 날리 없어 좋았다. 그리고 이 火锅는 共食과 個食이 잘 어우러져 좋다. 紅湯 가마를 빙빙 둘러싸고 앉아 여럿이 같이 먹으니 한가마밥을 먹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쳐난다. 그런가하면 또 나름대로의 식성에 따라 먹을 거리를 넣어 먹거나 건져 먹을 수 있어 좋다. 共食과 個食의 조화,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음식법. 사실 火锅는 중경의 풍토기후에 가장 잘 맞는 음식. 원래 음식이란 그 지방의 풍토기후에 어우러져서 생겨나는 법. 중경하면 우리에게 떠오른 것은 중국의 안개 도시-霧都. 중경은 여름을 제외하고 해 나오는 날이 드물다. 촉나라의 개가 어쩌다 나온 해를 보고 이상하다 여겨 짖는다는 蜀犬吠日, 그럴듯한 이야기다. 그래서 어쩌다 해가 나오면 명절 같은 분위기가 되어 너도나도 해쪼임에 여념이 없는 중경사람들. 아파트의 베란다가 유난히 큰 것도 이 해쪼임을 위한 것인지. 중경은 확실히 습하다. 해가 적게 나오니 습할 수밖에. 공기가 언제나 촉촉이 젖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중경사람들은 우리 북방에 가면 날씨가 너무 건조해서 코구멍과 입안이 마르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목구멍까지 칼칼해난다는 것이다. 이 습한 날씨 때문에 중경처녀들은 피부가 촉촉하고 매끌하며 희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 북방의 건조한 날씨가 피부를 거칠게 만든다고 한다. 처녀동지들, 정말 그런가? 그런데 세상일은 모두 일장일단이 있는 법. 중경은 바로 이 습한 날씨 때문에 전통적인 주거도 1층은 객실이나 주방, 창고로 쓰고 2층에다 침실을 마련한다. 아파트도 1층이나 2층 같은 낮은 층은 습기 때문에 값이 싸단다. 사람들도 이 습기에 젖어 있는 듯. 중경사람들이 火锅를 먹는 것은 바로 이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란다. 花椒맛이 우러난 火锅湯에 먹거리를 익혀 먹음으로써 습기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花椒去濕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중경음식에는 이 花椒가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경 날씨는 춥다. 아니, 가장 덥다는 불가마 중경이 아닌가? 그렇지. 그런데 내가 말하는 것은 주로 겨울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네. 사실 겨울 날씨도 우리 북방에 비하면 조금도 안 춥지. 섭씨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가 없으니. 그러나 집안은 무지무지 춥다. 전통적으로 스팀시설을 갖추지 않은 집안 날씨가 바깥 온도하고 같으니 말이다. 집 밖에서는 움직여 추운 줄 모르겠지만 집안에서는 가만히 있으니 추워서 못 견디겠단다. 그래서 우리처럼 술을 마시고 지랄발광하는 것이 아니고 톡 쏘는 태양초 먹고 얼얼한 속에 추움을 이기기. 火锅에 태양초가 많이 들어가는 것은 맛도 맛이거니와 주로는 추위를 들기 위해서다. 辣椒去寒이란다. 그럼 더운 여름날에는 왜 火锅를 먹지? 중국사람 특유의 삶의 지혜-以毒攻毒란다. 한마디로 火锅는 이래저래 좋단다. 중경사람들이 추구하는 음식의 麻, 辣, 鮮, 香 맛을 고루 다 갖추었다는 것이다. 麻, 辣에 대해서는 얼마간 얘기했으니 鮮에 대해서 잠간 더 보고 넘어가자. 중경사람들은 얼마나 음식의 鮮-신선도를 따지는지 바다를 못 끼어 해산물을 마음대로 못 먹는 ‘콤플렉스’가 가득 차 있겠지만 죽은 물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단다. 일반 식당에 가서 물고기를 주문할 경우 식당 안쪽에 들어가 산 고기임를 확인하거나 주방장이 저울에 펄쩍 뛰는 놈을 손님들 앞에 가져나와 확인하게 한다. 중경사람들은 이 세상에 먹기 위해서 온 사람인듯. 食者天下之大本이기도 한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특히 먹거리에 喜新厭舊한단다. 매끼마다 별다른 음식을 먹기에 신경을 쓴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끊임없이 구닥다리 음식은 갈아치워도 火锅만은 그 모양 그 대로 열심히 먹는다는 것이다. 정말 火锅에만 情有獨鐘.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오래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는 중경날씨,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단다. 이 세상 오직 그들만이 하느님한테 소외받은 듯한 기분 속에. 그래서 무엇이든지 두드려 부시고 누구와 싸움을 해서라도 그 우울함을 떨쳐버리고 싶단다. 그런데 바로 이때 火锅가 생각나며 火锅를 먹으며 그 우울함을 떨쳐버린단다. 그래서 1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火锅를 먹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단다. 중경사람들은 그 무엇을 두드려 부시고 그 누구와 싸움하고 싶은 욕망을 火锅로 승화시킨 셈이다. 입안이 화해나고 얼얼해나는 麻辣火锅로 말이다. 좀 자학적인 맛이 난다. 긴가민가? 사천외국어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계시는 김병활 교수한테 물어보았다. 해가 적게 뜨는 중경의 날씨는 확실히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단다. 그런데 자기가 중경사람들하고 다른 점은 火锅 먹는 것이 아니라 이쪽저쪽 기웃 거리는 산보로써 우울함을 푼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중경사람들은 火锅하고 찰떡 궁합으로 되어 있다. 중경사람들은 火锅에 열광한다.  몇 년 전부턴가는 ‘중국(중경)火锅美食문화절’을 요란스럽게 한다. 며칠 전인 3월 20일에는 '제3차중국(중경)火锅美食문화절'을 굉장히 벌렸다. 문화절 당일 40여 만 명의 중경시민이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본 문화절에는 糖酒會니 뭐니 여러 행사가 곁들여졌지만 그래도 가장 인기를 끈 것은 '萬名火锅宴'. 2000여개 火锅宴을 벌려 동시에 만 명이 火锅를 먹도록 한다는 것이다. 직경 3-5메터의 태극모양의 음양火锅宴으로부터 번쩍번쩍 누른 옷을 입고 두 줄로 늘어앉아 용의 배속의 火锅를 먹는다는 龍火锅宴... 실로 엄청난 규모고 다채롭다. '萬名火锅宴'이 끝난 후 각종 매체에서는 대서특필한다. 이번 火锅宴에서 소천엽 몇 톤 먹어치웠고 무엇, 무엇 몇 톤 먹어치웠고 하는 식으로. 중경사람들이 火锅에 대해 이렇게 성세를 올리는 데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제 몇 차, 제 몇 차하는 식으로 요란스럽게 행사를 함으로써 火锅가 확실히 중경 것임을 만천하에 홍보하는 셈이다. 이번 '제3차중국(중경)火锅美食문화절'만 놓고 보아도 火锅는 기네스세계기록 체크위원들에 의해 기네스북에 오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중경은 중국미식가협회로부터 '火锅之都'라는 영예를 따낸다. 이로부터 火锅는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확실한 중경직할시의 브랜드로 자리 잡는다. 중경사람들은 중경火锅를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사천火锅하고도 확실한 변별성을 두면서 사천火锅는 저리 가라한다. 이로부터 중경사람들은 모택동의 ‘不到長城非好漢’을 패로디하여 ‘不到重慶不吃火锅非好漢’이란다.   火锅브렌드얘기가 나오니 자연히 김치얘기가 나온다. 우리 조선사람들 김치는 두말하면 잔소리인 일미다. 그런데 어떤 족속들이 기무찌로 넘본단다. 무슨 특허를 내고 어쩐단다. 얼마 전에 사천외국어대학교의 일본어를 가르친다는 교수하고 식사를 했는데 사천 泡菜 어떻고 하다가 그 교수 말쌈이 일본기무찌 참 맛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래도 민족심이 발동되어 교수 양반, 그것은 기무찌가 아니고 김치요, 일단 이렇게 시정해주고 다음 그것은 우리 조선사람들이 원조고 오리지날이요, 일본사람들이 자꾸 흉내를 내며 귀찮게 기무찌, 기무찌 한단 말이요. 아, 그래요. 교수가 이 모양이니 일반 사천사람들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중경의 ‘덕수궁’이라는 한국사장이 경영하는 한국식당에서 기가 찬 맛으로 승부하며 한 근에 10원의 고기가격보다 더 비싼 호가로 중경사람들 눈을 삑 틔어놓는다. 얼마 전에 성도에 있는 사천연합대학에 갔다가 학생들 교내 식당에 조선사람 김치를 판다고 하기에 일부러 들어가 먹어보았다. 역시 김치 맛은 김치 맛이로다. 학생들도 열심히들 맛 있게 먹는 모습들이다. 후에 알고 보니 우리 연변의 조선족 젊은 기업인이 성도에 진출하여 김치브렌드를 창출한 것이다. 나는 김치 말고도 중경火锅 못지않게 우리의 많은 음식들도 브렌드화하여 세계적인 각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빔밥, 비빔비빔 냠냠, 얼나나 맛 있냐? 쌈밥, 너무 희기하다, 야들야들 상추에 고추장 듬뿍, 이 아니 녹색건강식품이냐? 설렁탕, 설렁설렁 탕, 끼니마다 탕류 꼭 올리는 중국 남방사람들의 구미에 설렁설렁 먹혀들어갈 것 같다... 좋다! 우리도 브렌드화해 세계진출 해보세!  
79    溫泉魚療 (우상렬79) 댓글:  조회:5070  추천:91  2007-04-13
溫泉魚療 우상렬溫泉魚療, 이런 소리 들어보았는지? 온천에서 물고기 먹으면서 병 같은 거 치료하는 것이겠지. 이쯤으로 필링이 온다. 나도 처음에 그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똑똑한 나의 생각도 빗나가고 만다. 그래 물고기나 먹으면서 병 같은 거 치료한다는 것, 자연요법 어방에 가기는 갔으나 얼마나 범상하고 촌스러운 발상이냐?溫泉魚療는 이렇게 범상하고 촌스럽지가 않다. 적어도 이 우상렬이 모르고 지낸 것은 범상하고 촌스럽지가 않다. 溫泉魚療, 물고기 먹는 거 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오히려 물고기가 사람을 먹는다 해야 할지? 이만하면 희한하지.그래 물고기가 사람을 먹는다? 세상에 웬 그런 일이? 식인어, 두려울시고! 그런데 니는 어찌 안 먹히고 안 죽고 왔냐?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임마, 그래 내 정직한 공산당원이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그럼 귀 구멍 크게 열고 눈 크게 뜨고 한번 잘 들어보아라. 그러나 그 기상천외의 얘기에 정신이 획 돌지나 말아라.  자, 그럼 溫泉魚療하러 가자.溫泉魚療, 중경직할시 統景泉世界에 있다. 統景鎭 지역에 온천이 무진장 많아 아예 泉世界-온천세계라 했단다. 이름이 멋졌쟈? 거저 무슨 무슨 온천이라 하지 않고 泉世界-이 세상 모든 온천을 다 자기 것인양 좀 욕심은 부린 듯하나 얼마나 배포유하고 호쾌하냐? 조용하던 중국 사람이 꿈틀거리고 있는 거야.  사실 統景泉世界, 한국의 수운보온천 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런데 분명 다른 것은 다양화 전략을 추구한 것 같다. 크게 A區, B區 두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A區는 남부유럽 목욕스타일을 추구한 古羅馬浴場區, 북부유럽 목욕스타일을 추구한 北歐風情浴區, 일본 목욕스타일을 추구한 東瀛湯地區 세 구역으로 나누어지고, B區는 통털어 時尙動感區라 하는데 여기에는 人造海嘯池, 休閑大池, 水晶宮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B區의 최고 VIP호텔은 아니지만 준 VIP호텔이라 할 수 있는 水晶宮에 짐을 풀었다. 水晶宮은 水晶宮답게 거의 투명유리로 되어 있고 둥근 모양새에 그리 크지 않고 아담했다. 각 객실의 표시도 멋대가리 없는 아라비아수자가 아니고 海倫溫情이요, 貴妃出浴요, 芙蓉出水요 하는 시적이고 낭만적인 雅名이 붙어있다. 이런 雅名 뒤에는 괄호 열고 닫은 속에 해당 영어로 표기를 해 놓았다. 나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 미녀 海倫의 따뜻한 정이 흘러넘친다는 海倫溫情, 영어로는 HelenWarmth라는 객실에 들었다. 내가 든 객실에는 타원형의 온천욕장이 별도로 갖추어져 있는데 버튼 하나만 누르면 욕장 주변의 벽면으로부터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거침없이 뿜겨져 나와 마사지작용을 한다. 나는 이 욕장에 들어가는 순간에 海倫의 溫情에 녹아나고 말았다.   사실 나는 海倫溫情이요 뭐요 하는데 그리 흥취가 없었다. 醉翁之意不在酒. 나는 사천외국어대학의 강걸 교수로부터 統景泉世界의 온천에 대해 소개받으면서 바로 溫泉魚療에 구미가 버쩍 동했던 것이다. 나의 마음은 언녕 溫泉魚療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착하는 길로 溫泉魚療로 달려갔다. 溫泉魚療는 A區의 古羅馬浴場區에 있었다. 내가 든 水晶宮하고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데 열차바구니 같은 깜찍한 셔틀차가 손님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남자들은 사각수영팬티 하나, 여자들은 비키니 하나 달랑 입은 위에 나처럼 단독 VIP나 준 VIP 객실에 들은 '놈'들은 잠옷 같은 가운을 입고 그렇지 못한 '놈'들은 등허리를 덮을 수 있는 큰 목욕수건 하나를 걸치고 끌신을 딸딸이며 셔틀차를 탄다. 셔틀차는 곧 바로 溫泉魚療가 있는 A區의 古羅馬浴場區 로마광장 동쪽 켠 가장자리에 가서 멈춘다.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주위에 원주형의 기둥이 죽죽 서 있는 로마식 원형분수광장을 가로질러 김이 하얗게 물물 피어오르는 溫泉魚療 욕장으로 향한다. 溫泉魚療 욕장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욕장 가장자리로 머리만 내놓고 느긋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물은 수정처럼 맑아 욕장바닥까지 들여다보였다. 물속에는 거무스레한 물고기들이 떼 지어 다니며 여유작작하게 놀고 있었다. 희한한 것은 많은 고기떼들이 욕장의 물속에 잠겨있는 매 사람들을 감싸고 맴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눈을 지긋이 감고 이 세상 여기가 바로 극락인 듯 흡족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물론 언제나 못 말리는 어린애들과 젊은 처녀들은 희희작작이며 떠들어대기도 했다. 나는 한시바삐 욕장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잠옷가운을 물품보관 카운터에 맡기고 욕장으로 종종 걸음을 쳤다. 그런데 욕장에는 조용히 들어가는 것이 예의다. 요란스럽게 뛰어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의 魚療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두발을 천천히 따뜻한 물에 담그는 순서로 시작하여 온 몸을 물속에 가라앉히고 머리만 내놓고 욕장에 들어앉았다. 들어앉는 순간 미묘한 느낌에 그만 나도 모르게 아, 좋아 하며 눈을 지긋이 감게 되었다. 물고기들이 삽시에 나의 몸을 둘러싸고 프로포즈의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물고기들은 토이기에서 수입하여 들여온 중국말로 坎貝爾이라는 온천수물고기인데 섭씨 43도의 온수에서도 거뿐히 잘 산단다. 坎貝爾는 사람이 온천수에 들어오면 삽시에 온 몸 주위를 감싼다. 전문 사람 피부에 생성되는 노화된 각질이나 죽은 각질을 먹으며 현미경하에서 볼 수 있는 세균들을 먹는다. 그래서 일종 인체 물고기청소기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참 희한하다. 그리고 온천수에 들어가 확장된 사람의 땀구멍을 입으로 뚫어주어 몸속의 노폐물이나 독소를 배출시키고 온천수속의 여러 광물질을 잘 흡수할 수 있게 해줌으로 신진대사를 촉진한단다. 그러니 강걸 교수의 말대로 美容养颜,延年益寿가 제격인 셈이다. 그래서 젊은 처녀로부터 연세가 지긋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다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坎貝爾이 사람 몸 위의 더러운 물건들을 냠냠 맛있게 먹을 때 사람들로 하여금 그 어떤 아픔이나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 황홀감에 잠기게도 한다. 내가 느낀 바로는 첫 사랑 첫 키스의 짜릿짜릿하면서도 묘한 쾌감 그 자체였다.  이런 坎貝爾들은 魚療라 할 만큼 치료효과도 가져온단다. 무좀, 피부병, 상처자리 등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도 한단다. 긴가민가 나는 魚療를 한 나의 발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무좀 때문에 항상 지저분하던 나의 발이 어느새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참 희한하다면서 나는 나의 턱을 기준으로 한 얼굴가장 자리를 물밑에 담그어 보았다. 坎貝爾떼들이 욱 몰려왔다. 나의 여드름 자국에 흥취를 느끼는 것 같다. 坎貝爾떼들이 입으로 열심히 물질러주는 덕택에 투덜투덜한 여드름 자국이 매끌매끌해진 것 같다. 기분 좋아 내친 김에 나는 아예 온 얼굴을 물속에 담그어 보았다. 와~ 坎貝爾떼들이 기분 좋게 달려들었다. 여드름 흔적 투성이의 얼굴에 감질맛이 났다. 좋았다. 그런데 숨이 막힌다. 할 수 없이 물 위로 솟아올랐다. 얼굴을 훔쳐보았다. 매끌매끌했다. 기분이 좋았다. 다시 물속에 잠복하기. 그리고 오래 동안 뻗치기. 그런데 결국 숨이 막혀 아쉬움을 떨어버리며 다시 물 위로 나오기. 그리고는 다시 잠복하기... 나는 나의 거시기고 뭐고 모두 魚療를 시켜보고 픈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암거시기'를 의식하는 나의 이성은 살아있어 언감생심 행동으로는 촌보도 나아가지 못하고 마음뿐인걸. 나는 참 세상에 이런 희한한 자연요법이 어디 있나 생각하며 統景泉世界에 있는 동안 몇 번이고 溫泉魚療욕장으로 달려갔다.          坎貝爾들은 참 묘하다. 사람 몸에서도 발쪽으로 가장 많이 모여든다. 발에 워낙 노화된 각질이나 죽은 각질, 그리고 세균 같은 더러운 것들이 제일 많지 않은가? 坎貝爾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하나의 서글픈 점을 발견했다. 원래 제일 깨끗하다는 사람의 몸 둥아리가 그렇게 더러울 수 없다는 것. 정말 우리 몸이 그렇게 깨끗하다면 왜 坎貝爾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겠는가 말이다. 坎貝爾들은 물살을 일구며 쫓아도 달아나는가 싶더니 다시 되돌아온다. 나는 내 옆의 하얀 피부의 백설공주 같은 미모의 사천처녀를 먼 산을 보는 척 하며 몰래 훔쳐보았다. 정말 한 입에 삼켜도 비린내 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처녀의 몸 주위에도 온통 거무스레한 물고기 천지다. 순간 나는 매스꺼워났다. 언제나 씻고 바르고 야단법석을 떠는 처녀들도 저렇게 더러울세라구야. 나는 인간의 이른바 깨끗함에 대해 회의를 느껴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坎貝爾들이 얼마나 고상하고 대견해보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고기 가운데 물고기를 제일 먹기 좋아하지만 坎貝爾에 대해서만은 입술에 와 매달리며 간지렵혀서도 추호의 먹을 염이 나지 않았다. 별 볼일 없는 풀을 먹고 값진 우유를 짜낸다는 소에 대한 노신의 유명한 명구가 생각났다. 坎貝爾은 바로 우리 인간의 몸에서 불필요한 노폐물이나 더러운 것을 먹고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친구가 여러 종류의 관상용 물고기를 키우는 큰 어항 안에 전문 다른 물고기들의 배설물이나 어항에 끼는 때를 먹고 산다는 물고기를 가리켜 주기에 참 고상하다 했는데 사람의 노폐물을 먹어치우며 사람의 몸 둥아리를 깨끗하게 해주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황홀감에 가까운 쾌감까지 주는 坎貝爾이야 말로 진실로 고상해보였다. 다음 순간 나는 한국 제주도의 똥돼지가 생각났다. 사람이 위에서 내리갈기는 똥을 주어먹고 무럭무럭 잘 자라난다는 돼지. 이 똥돼지는 고기 맛도 좋아 서울 같은 도회지에서 아주 비싼 값에 팔린단다. 언젠가 한국에 갔다가 이 똥돼지 삼겹살을 먹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똥돼지니 뭔지 해서 좀 꺼림직했는데 한입 먹는 순간 너무 고소하여 그만 혼자 독차지하고 못 먹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똥돼지 얘기가 나오니 우리 똥개가 떠오르기도 한다. 인간의 뒷 배설물을 먹고 열심히 살아간다는 똥개, 그 고기 또한 얼마나 맛있냐! 다음 순간 나는 또 악어새와 악어가 떠올려졌다. 산 동물들을 잡아 날 것으로 먹는 악어의 입에는 항상 찌꺼기가 남아있든가 가시가 끼이든지 한단다. 그래서 자기 재간으로는 어쩔 수 없는 악어가 물 위로 솟아나거나 뭍에 나와 입을 쩍 벌리고 있으면 작은 새들이 억어의 입안으로 들어가 그런 찌꺼기를 먹어치우거나 가시까지도 처치해준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가장 무정하고 악한 동물의 하나가 악어라고 하지만 악어는 자기에게 이로움을 주는 그 작은 새의 고마움을 안다. 그래서 악어는 그 작은 새를 잡아먹지 않는다. 눈을 지긋이 감고 그 작은 새의 고마움에 감사하기도 하는 듯하다. 이로부터 악어새와 악어의 공생공존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세상은 사실 이렇게 공생공존의 상생관계에 놓여있다. 사람이 눈 똥을 돼지가 먹고 사람은 그 돼지를 먹고 다시 똥을 누고 돼지는 다시 그 똥을 먹고... 그래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고마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과 자연의 조화, 天人合一이 아니겠는가?   統景泉世界의 溫泉魚療, 돈 안 받고 이 만한 광고 해주었으면 중경직할시시장이 영예시민증서를 수여하든지 統景泉世界의 회장이 감사패라도 주어야 할지고.   나는 우리 연변의 온천을 떠올려 보았다. 단연 백두산 온천이 떠오른다. 우리도 여기에 溫泉魚療 같은 거 할 수 없는지? 사실 溫泉魚療, 별거 아니고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니 말이다. 坎貝爾 같은 물고기를 확보하면 되니 말이다. 없으면 수입이라도 하지. 坎貝爾은 똑 마치 우리 연변의 붕어 같게 생겼다. 작은 것은 3cm 내외이고 큰 것이라야 아이들 손바닥 길이를 넘지 않는다. 붕어가 좀 흰 파란 색을 띠었다면 坎貝爾은 거무스름한 색을 띠었을 뿐이다. 坎貝爾은 우리 백두산 온천에서도 잘 살 것 같다. 우리 백두산온천도 統景泉世界의 온천처럼 유황성분이 많으니 말이다.   그럼 우리 연변에서 溫泉魚療 한번 기대해보세!  
78    진짜 사나이는 한국사나이 (우상렬78) 댓글:  조회:4726  추천:115  2007-04-11
진짜 사나이는 한국 사나이우상렬내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공부할 때 가장 존경하는 한국교수 한분이 있었다. 그래도 이 교수가 쩍 하면 명절이요, 뭐요 하며 술을 잘 사주었다. 이 교수를 우습게 보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나는 여하튼 좋았다. 이 교수는 확실히 좀 웃기는 데는 있기는 하다. 우선 관상 자체가 얼굴이 좁고 하가 빠진 것이 원숭이상에 가깝다. 여기에 술을 자주 마셔서 그런지 눈은 항상 풀린 상태에 게스츠름하게 뜨고 다닌다. 게다가 입가장 자리는 침을 자주 흘려서 그런지 금방 잠에서 깬 사람처럼 좀 디디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교수가 연구원에서 한문뿐만 아니라 현대중국어에도 통달하여 중국전문가로 활약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워낙 대만유학생으로서 박사학위 취득까지 대만에서 장장 12년을 보냈단다. 그런데 이 교수님이 미모의 漢族사모님을 데리고 산다는데 놀랐다. 그리고 그 사모님이 부자집 아가씨였다는 데는 더욱 놀랐다. 그래서 긴가민가 하다가 한번은 교수님댁에서 사모님이 해준 중국요리를 먹게 되면서 확연한 사실로 인정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좀 초라해보이는 우리 교수님이 어찌 이렇게 멋진 사모님을 얻을 수 있었지 하는 궁금증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궁금증은 사실 너무나 쉽게 풀렸다. 좀 맹랑했다. 워낙 우리 교수님은 술 한잔 들어가면 자기의 이왕지사, 특히 연애사를 녹음테프 풀어놓듯이 잘도 얘기한다. 대만유학할 때 말이 잘 통하지 않지, 특히 학비 때문에 너무 어려웠단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구두닦기란다. 다른 일은 할 자신이 없는데 구두닦기만은 잘 할 자신이 있었단다. 워낙 자기는 힘이 없어도 손재간만은 좋았단다. 그래서 열심히 구두닦기에 전념. 바쁜 와중이지만 한국노래 한 곡조 뽐으면서. 삐까삐까 구두를 너무 잘 닦으니 사람들 줄을 지어 발을 들이민단다. 그래서 한국노래는 저절로 흥얼흥얼. 신사숙녀들 많아 기분은 더 좋고. 그러다가 어느 하루 인연은 닿고. 다음 분... 하는 순간에 뾰족한 꽃구두에 연결된 미끈한 여인의 신다리가 눈앞으로 안겨오더란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미끈한 신다리를 더듬어 위쪽의 존귀한 머리까지 쭉 훑어보았단다. 그런데 아차, 쌍겹진 커다란 눈에 늘씬한 전형적인 중국사람 팔등신 미인이 아닌가. 그래서 기분은 붕~ 떠서 죽을둥살둥 모르고 열심히 닦아주기. 그런데 더 재미나고 기분 좋은 것은 이 늘씬한 팔등신 미인이 오며가며 그 뾰족 꽃구두를 자주 들이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구두닦기는 꼭 그녀만을 기다리고 위한 데이트가 된 듯한 기분. 그러던차 어느 하루 조용히 데이트 신청을 했단다. 아가씨, 오늘 저녁 나하고 식사나 하지요. 어, 좀 놀라는 듯하는 아가씨. 그러면서도 반가워하는 기색. 어디서요? 저, 고급 한식점 있잖아요, 저녁 6시에 만나요. 좋아요. 기껏 폼을 잡는다고 대만에서 일류로 꼽히는 고급한식점을 잡아놓고는 속은 얼고. 그러나 꼬깃꼬깃 구두닦기 돈을 챙겨 저녁 6시에 어김없이 달려가기. 와, 반가워라, 그녀는 어느새 와서 기다리고. 날 것만 같은 기분. 그 다음 정열의 와인 마시기. 왜 나를 초대하지요? 멋지니깐, 아니 사랑하니깐. 아니, 이렇게 쉽게 사랑해도 되는가요? 사랑에 무슨 쉽고 어렵고가 있어요. 사랑하면 다지. 나는 사랑 안 하는데. 물론 그러겠지, 그렇지만 이제 사랑하게 될거요... 당돌한 진공에 그녀는 좀 당황해나는 듯. 그러나 기분은 좋은 듯. 그래서 데이트는 계속 이어지고. 그러다가 어느 하루 그녀가 시물거리면서 물었단다. 구두닦이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 나를 자꾸 이렇게 고급스러운 데로 끌고 다니지? 사랑을 위하...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이제부터는 내가 사는거요. 그리고는 빨칵빨칵. 그래서 결국 사랑은 이루어지고, 학비까지 그녀가 챙겨주더라는 것이다. 긴가민가, 거짓부리 하면서 은근히 사모님한테 알아보기. 그러자 사모님 말쌈이 한국총각 구두닦이 열심이에 감복했고 그 대범하고 씩씩함에 반했다더라. 그리고는 자기는 우리 대만남자들이 싸구려만 찾아다니는 쫀쫀이들인가 하면, 일본 남자들이 와리깡만 하는데 진절 머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러던차 바로 한국남자들의 사나이 같은 호쾌함에 깜박 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내가 그것이 허영이고 실속이 없지 않는가고 하자, 그런 허영쯤은 부려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자기는 지금도 자기 남편이 돈 없어 기 죽지 않는 그 모습이 너무 멋지다는 것이다. 자기 남편 항상 하는 말이 자네는 부자집 딸이지만 나는 선비집안의 자식이다 말이요, 선비는 돈이 좀 없어서 그렇지 똑똑하다 말이요... 그러니 부자집에서 선비사위를 맞느라 돈을 좀 쓰는 것도 무방하지. 이렇게 주눅 좋게 능청을 떠는 자기 남편을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일곱살에 할아버지한테서 한문을 배웠소 엇쩠소 하는 교수님보다 우리 사모님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인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수입만 놓고 보아도 마음 좋은 교수님은 한달 월급 인심 쓰기에 바쁘지만 우리 사모님은 중국어, 일본어 강의로 한 몫 톡톡히 잡는다. 그러니 가장 살림은 전격 사모님 덕. 교수님은 차운전도 몰라 항상 사모님 신세지기. 내가 연구원에 금방 유학 갔을 때 대만 유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데 참 재미나는 것은 한국 남학생들과 대만 여자 유학생들 사이 연애가 잘 되고 결국 결혼까지 골인한다는 것이다. 역시 대만 여자 유학생들 얘기가 한국 남자들 쫀쫀하지 않고 여자를 위해 돈을 잘 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 같은 맛에 그만 뿅 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 남자는 돈 잘 써는 거 장땅? 그때 대만 GNP는 언녕 2만불이고 한국은 1만불에 가 닿겠다고 안간힘을 쓸 때다. 그러니 돈은 대만 사람들이 잘 써야 하거늘. 그런데 한국 남학생들은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대만 여자 유학생은 여자라는 이유 하나로 씀씀이는 뒤집어져 있었다. 사랑은 이렇게 역설적인 것.나는 한국 남자들 그렇게 호쾌한 줄 모르겠다. 특히 나한테 있어서. 남자 대 남자라서 그렇겠지. 나는 이렇게 웃고 넘긴다. 맞다. 바로 남자 대 남자, 아니 남자 대 여자에 있어서 한국남자들은 정말 사나이가 된다. 멋지다. 사랑은 돈으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주고받으면 더러워지고 구린내가 나고 결국은 파탄이다. 그러나 이 돈이 남자의 보호본능을 나타내고 여자의 안온감을 가져올 때 사랑의 접착제가 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근사한 식당에 들어갔다고 하자. 맛 있는 음식을 재미나게 먹었다. 그런데 결산을 할 때 남자가 AA制니 와리깡하자고 해봐라, 여자들 얼마나 기분 나쁘겠나. 먹었던 음식 도로 올라오겠다. 남자는 여자에게 베푸는 동물. 베풀면서 보호본능을 과시하고 남자임을 느끼게 된다. 괴짜 여자 패미니즘들 싫어할 소리 스톱.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탕탕탕 오토바이 뒤에 태워서 출근시키는 남자보다 근사한 승용차 뒤 자리에 태워서 출근시키는 남자가 멋 있다. 한국 남자들 이렇던가... 여자들 기분 좋쟈?    
77    연안과 조선사람 댓글:  조회:3063  추천:106  2007-02-11
  언젠가 연안에 꼭 가보고 싶었다. 연안은 이래저래 나를 흡인하는 곳이다. 얼마나 많은 열혈청년들이 순수한 혁명정열을 안고 연안으로 모여들었던가?   1.중국혁명 승리의 메카-연안  1934년 10월 모택동이 이끄는 중앙공농홍군은 정강산혁명근거지를 떠나 북상항일의 기치를 들고 첩첩으로 되는 장개석 국민당군의 포위토벌을 뚫고 1년 여 만에 유명한 2만5천리 장정을 끝마치고 연안에 도착하여 섬감녕혁명근거지를 세운다. 중국혁명은 바로 정강산에서 불길을 지펴 연안에서 승리의 서광을 안아왔던 것이다.    나는 연안에 도착하는 길로 중국혁명의 사령탑 역할을 한 楊家嶺을 찾았다. 楊家嶺에는 연안에 도착한 중국공산당의 최고리더들인 모택동, 유소기, 주덕, 주은래, 임필시가 살던 窯洞이 있다. 이들 窯洞은 야트막한 산언덕에 나란히 있었다. 생각보다는 아담하고 깔끔하였다.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환했다. 벽은 흰칠이 되어 있었다. 안은 모두 두 칸이었는데 바로 들어서는 칸은 접객실이고 접객실과 좌우로 뚫려 있는 안쪽은 침실용이다. 사무용 책상이고 걸상, 그리고 침대 등 모든 집물은 사치함과는 거리가 먼 투박하고 소박함 그 자체다. 그러나 窯洞안은 안온했다. 12월말의 맹겨울이건만. 冬暖夏凉의 窯洞이라는 말에 실감이 갔다.   모택동은 바로 이 窯洞 안의 흰 보를 덮은 더 없이 수수한 책상 위에서『모순론』,『지구전을 논함』등 중국혁명을 이끌어간 많은 노작들을 집필했다. 모택동은 자기의 窯洞 앞에 있는 돌걸상에 돌상으로 이루어진 담화장에서 미국 기자 스터랑과 담화를 하면서 모든 반동파와 제국주의는 종이범에 불과하다는 호매로운 말을 내밷기도 했다.朱德의 窯洞 앞에 있는 돌상에는 장기판과 다른 놀이판이 새겨져 있는데 그는 자기의 경위원이나 부하들과 때때로 여기서 장기를 두며 휴식의 한 때를 보냈다고 한다. 그의 격의 없이 후덥고 따뜻한 인정미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가고 없는 일말의 허전함을 달래보고자 그들이 잡아본듯한 우물손잡이를 楊家嶺을 떠나면서 잡아본다.  후에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楊家嶺을 떠나 대추가 많이 난다는 棗園으로 옮겨갔다. 모택동은 바로 이 棗園의 窯洞에서 주로 밤에 석유등을 밝혀놓고 중국혁명의 진로를 밝히는 많은 글들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棗園의 불빛이 중국혁명의 길을 밝힌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棗園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朱德의 窯洞 안에 그때에는 꽤나 고급상스러운 긴 소파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때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 임필시 등 중국 공산당의 최고급 간부들이라도 특수화라는 것이 없고 일류로 평등하게 물품을 분배받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구소련에서 증정 받은 짚차를 폐기처분하면서 스프링이 있는 앉음자리를 이용하여 그 소파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스프링이 있는 소파는 고급품으로 취급되어 모택동이 당시 60에 가까운 나이가 가장 많은 주덕에게 선물로 그 소파를 주었다고 한다.   나는 중국혁명의 거장들의 체취가 슴배어있는 楊家嶺과 棗園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택동과 유소기, 그들은 동지였고 연안에서부터 손발이 잘 맞아 돌아갔다. 바로 이 楊家嶺의 中央大禮堂에서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유소기는 모택동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새 중국이 건립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들 사이에는 일대 회오리바람이 인다. 정치의 무상함을 실감하게 하는 전형적인 한 보기.  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 그 유명한 ‘연안문예좌담회’가 생각키웠다. 연안문예좌담회는 바로 楊家嶺에 있는 中央辦公廳樓에서 소집되었다. 中央辦公廳樓는 1941년에 지었는데 그 당시로는 상당히 멋진 청사였다. 비행기 모양으로 지어 ‘飛機樓’라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도합 3층으로 되었는데 1층의 북쪽 ‘날개’ 부분은 중앙도서실이었다. 그리고 남쪽 ‘날개’ 부분은 식당 칸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1942년 5월 2일부터 23일까지 중앙선전부에서 조직한 ‘연안문예좌담회’가 진행되었다. 근 100명에 가까운 문예일군들이 참가했다.    모택동은 바로 이 좌담회에서 유명한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을 했다. 문예는 혁명의 기본 역량인 로농병을 위하여 복무해야 한다는 근본성적인 방향을 제시했으며 정치 제1, 예술 제2의 문예비평의 표준을 제시했다. 그리고 광범한 예술인들은 인민대중 속으로 뛰어들어 사상을 개조하고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되며 그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창작해야 된다고 호소했다. 모택동의 이 연설은 상당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丁玲은 바로 이 연안문예좌담회 후 산서 태항산의 농촌으로 내려가 토지개혁을 반영한 유명한『태양은 상간하를 비춘다』라는 장편소설을 써서 일약 새로운 작가면모를 보이며 성장한다. 당시 가열처절한 항일의 나날에 한가히 화조월석이나 노래하고 ‘발가락이 닮았다’식을 쓰고 있을 계제가 못된다. 문학은 정치를 위해 복무하는 투쟁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시 자아의 협소한 감정에 매몰되고 센티맨탈한 감상성에 잘 빠지는 소부르죠아출신의 문예일군들이 대부분인 상황 하에서 문예의 적절한 방향설정이고 자리매김이다. 그런데 이것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며 새 중국이 성립된 평화적 시기에 좌적 정치경향에 이용되어 문학예술이나 예술가들을 일대 수난으로 내몬 것은 중국 당대역사에서 지극히 빗나간 한 보기가 아닐 수 없다.중국공산당은 문학예술을 혁명투쟁의 무기로 여기며 항상 중시해왔다. 그래서 연안시기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로신예술학원을 세웠다. 중국 공산당의 초기 예술인재들은 바로 이 로신예술학원을 통해 커 갔다.  중국 공산당은 항상 선전사업을 중시해왔다. 延河를 끼고 있는 유명한 도교성지의 하나인 청량산의 ‘萬佛寺’ 입구에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중앙인쇄소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陸定一 등이 골간이 되어『解放日報』등을 꾸렸다. 여기에는 또 모택동이 친필로 쓴 ‘新華書店’도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 중국 공산당의 신문, 잡지들을 발행하던 총 본산이었다. 현재 중국 각 곳의  ‘新華書店’의 기원도 바로 여기다. 현재 바로 이 중공중앙인쇄소와 ‘新華書店’ 자리와 멀지 않은 청량산 아래에 ‘연안신문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연안하면 우리에게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寶塔이다. 그럼 寶塔이 무엇이냐? 사실 이 寶塔은 혁명과 그리 관계가 없다. 그것은 송나라 때 세운 불교전탑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혁명이 일어난 곳의 전탑이요, 혁명가들이 활동하던 곳의 전탑이 되면서 연안을 상징하는 명물의 하나로 되었다. 窯洞도 마찬가지다. 窯洞은 사실 정말 별 볼일 없는 주거다. 원시적인 穴居에 가까운 가장 간단한 주거방식이다. 적어도 채광도나 공기순환도 면에서 문제가 있는 줄로 안다. 그러나 연안지구 사람들은 토질 등 자연조건에 따라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아 窯洞을 구축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일종 전통적인 주거형태로 고착되었다. 그러다가 중국 혁명의 수령들인 모택동, 주덕, 주은래. 유소기, 임필시 등이 窯洞에 기거하게 되면서 窯洞은 일종 중국 혁명의 요람이 되고 승리의 상징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 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窯洞은 홍색낭만의 기호가 되기도 했다. 연안사람들은 이 기호에 일종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연안대학 캠퍼스 운동장 오른 쪽의 산언덕에 한일자로 줄줄이 늘어선 窯洞集落은 멋지다 못해 숭엄하기까지 한다. 연안사람들은 현재 窯洞기호를 브랜드화하여 호텔 같은 현대식 건축에도 窯洞 특색을 살려 눈길을 끌고 있다.  혁명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 가치를 창조하고 천지개벽을 일으키기도 한다. 연안사람들도 바로 이 혁명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서안에서 버스를 타고 연안으로 가는 도중의 도로표지판만 놓고 보아도 그것은 거저 연안이 아니고 꼭 ‘혁명성지 연안’이라 표기한다. 연안대학 교직원들은 연안대학이 중국의과대학을 비롯한 연안의 여러 대학을 통합하여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세운 종합대학이라는데도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모택동이 말한 ‘小米加步銃’에서 小米는 연안의 小米-좁쌀을 말한다. 중국혁명은 연안의 좁쌀에 떠받들여 진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안은 토질상 좁쌀이 잘 된다고 한다. 지금도 연안사람은 좁쌀을 잘 먹는 것 같다. 좁쌀이 찰지고 구수하다. 아침 식사로 좁쌀죽을 먹어보았더니 참 맛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연안대학의 배소기 교수는 나에게 토산품 선물로 좁쌀을 선물한다.   연안은 홍군을 키워냈다. 그래서 그들은 회색바탕에 붉은 별과 견장이 달린 소박한 홍군의 군복을 연안의 명물로 내세운다. 관광명소마다 홍군 군복을 마련해놓고 사진 한방 박아라고 야단이다. 그래야 멋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홍군의 진모습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이 찌고 머리카락이 길고 어줍잖은 표정이건만 홍군의 군복을 한번 입어보고 폼을 잡아보았다.   연안사람들은 중국 혁명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최고 수령들과 같이 했다는 자부심 또한 대단한 것 같다. 棗園에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최고 수령들인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 임필시의 조각상이 있다.  당지의 많은 사람들이 이 조각상 앞에 와 참배하는 것 같다. 이들 혁명수령들은 일종 신적인 존재로 부상되기도 한다. 연안사람들은 이 혁명수령들을 많이 그린 것 같다. 그들은 모택동이 연안을 떠난 후 한 번도 찾아주지 않은데 대해 좀 섭섭함을 금치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1960년대인가 1970년대에 주은래 총리가 연안을 찾아주었을 때 연안은 온통 감격과 환호성으로 들끓었다고 한다. 당시 주은래 총리가 탄 승용차가 보탑 앞 길거리에서 진흙탕에 빠지자 연안인민들이 차를 들고 나아갔다고 한다. 그들은 재작년에 호금도 서기가 연안에 와서 구정을 쉰데 대해 많이 외운다. 중앙의 고위급 간부들이 자기네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데 감사해한다.   연안은 혁명의 성지이되 물질적으로 그리 풍족하게 잘 사는 것 같지 않다. 시내도 좋고 사람들의 몸에서 소박함이 많이 묻어난다. 내가 楊家嶺에 갔을 때 마침 한 窯洞에서 剪紙를 팔고 있었다. 가위로 색종이를 오려 여러 가지 모양을 낸 것이 剪紙다. 섬서성의 대표성적인 민간예술인데 어느 한 현은 전문 이 剪紙로 먹고 산단다. 그런데 이 窯洞에서 剪紙를 파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전국 剪紙시합에서 1등을 한 李福愛 여사이다. 그래서 剪紙집 하나를 골라 잡았다. 그런데 돈을 안 받겠단다. 나를 배동해간 연안대학 剪紙 전문가 배소기 교수와 잘 아는 처지라 돈을 안 받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싸움하다시피 하면서 돈을 찔러주었다. 그리고 무료로 섬북 민요 ‘信天遊’調를 듣도록 했다. 그녀의 민요는 애절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이 약동했다. 녹음을 못 해온 것이 아쉬웠다. 푸더분하게 생긴 맏며늘감 같은 李福愛 여사가 그립다.  나는 연안이 우리와 비슷한 데가 많다고 생각된다. 延河를 끼고 형성된 도시. 연안의 延河는 똑 마치 우리 연길의 부르하퉁하 같다. 그 물줄기, 그 위에 놓인 다리...   우리도 중국 혁명에 대한 자부심 대단하다.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열사비, 너무도 우리에게 와 닿는다. 그래서 우리도 위로부터의 관심을 바랐고 갈망했다. 주은래, 주덕, 동필무... 중앙의 고위급 간부들이 우리를 찾아줄 때 우리는 감격하고 환호했다. ‘연변촌놈’으로 뒤떨어지거나 왕따 당하지나 않을가 하는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서북대개발 정책과 전략, 연안사람들 대환호한다. 우리도 대환호다. 그 혜택이 우리에게도 미친다. 우리 연변대학만 해도 서북대개발 정책의 혜택을 받는 대학이다. 내가 이 말을 했더니 연안대학 교수들 말이 참 재미있다. 연변대학은 연안대학과 한 글자 차이라 형제자매나 다름 없으니 서북이고 뭐고 떠나서 응당 그런 혜택을 받아야 된다고 한다.  연안사람들 잘 살아보려고 움직인다. 우리도 움직인다. 연안사람과 우리 연변사람, 다 같이 홍색낭만에 새로운 경제낭만 꿈꾸어 볼 차례다.     2. 연안과 조선사람  연안은 우리 조선사람과 인연이 깊다. 우리 조선사람과 연안의 인연은 뭐니뭐니 해도 혁명이다. 조선의 열혈남아들이 혁명의 정열을 안고 혁명성지-연안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정률성의「연안송」, 김산의「아리랑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 하고 무정장군의 다구진 모매가 선히 보이는 듯하다...  정률성, 음악천재. 그의 음악적 재능, 영감도 사랑도 연안에서 피어난다. 1937년 10월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금빛 정장본『세계명곡집』을 들고 연안에 와서 陝北公學에서 공부한다. 1938년 3월에 졸업하고 성립된지 얼마 되지 않는 노신예술학원 음악계에 들어가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한다. 8월에 졸업한 후 항일군정대학 선전과에서 음악지도를 담당한다. 그는 1938년과 1939년 사이 음악창작의 첫 고조를 연안에서 맞이한다. 그는 1938년 봄 노신예술학원의 학생신분으로「연안송」을 창작한다. 졸업한 후에는「10월혁명가」, 「항일돌격운동가」, 「연수요」,「생산요」, 「아랑에 부쳐」 등 일련의 가곡을 짓는다. 이후 그는 노신예술학원의 성악선생으로 활약한다. 합창시리즈곡『팔로군대합창』은 이 시기에 짓는다.「연안송」과『팔로군대합창』은 이 시기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중국음악사의 명작으로 꼽힌다.「연안송」은 정률성이 노신예술학원의 뒷산에서 연안의 전경을 바라보면서 혁명성지 연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격정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후에 연안강당에서 열린 문예야회에서 이 노래를 불러 모택동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연안송」은 연안에서뿐만 아니라 섬감녕변구를 비롯한 항일근거지 내지는 국민당통치구 및 동남아화교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불리워지며 연안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고 항일의 뜻을 키웠다고 한다. 公木를 비롯한 많은 젊은 청년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연안으로 달려왔다고 한다.『팔로군합창곡』가운데「팔로군진행곡」은 가장 성공적인 군가로 평가되고 있다. 『팔로군합창곡』은 1940년 초에 정률성의 지휘로 연안중앙대강당에서 공연을 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1941년 5 ․ 4청년절에는 ‘음악갑등상’을 받는다.「팔로군진행곡」은 항일전쟁시기 각 항일부대와 항일혁명근거지에서 불리다가 1945년 후에는 화북지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이름이 바뀌고 점차 중국인민해방군의 군가역할을 하다가 새 중국이 성립된 후 정식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명명된다. 정률성은 1942년 5월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연안문예좌담회에 참가한다.   정률성의 이런 음악적 재능은 처녀들의 사랑을 얻기에 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1941년 드디어 당시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 대장으로 있은 사천처녀 정설송과 노신예술학원의 큰 교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무정, 군사천재. 중국 포병부대 창설자의 한 사람. 유일하게 중국 공농홍군 2만5천리장전부대를 따라 연안에 도착한 조선사람.   무정은 연안을 조선인혁명성지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1937년 1월에 조선인 공산당원 서휘와 연안에서 담화하면서 ‘화북지구의 조선청년들을 연안으로 불러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1939년에 무정은 자기가 솔선하여 사인한 섬북조선청년연명신을 발표하여 관내 각지의 많은 조선청년들을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으로 불러들여 정치교육을 받게 한다. 이때 무정의 배려 하에 이화림은 연안의 중국의과대학에 가서 배우게 된다. 그의 노력 하에 1940년대에 들어서 화북조선독립동맹본부는 진기로예변구로부터 결국 연안으로 옮겨오게 된다. 그 분회는 섬감녕변구와 진찰기변구에 두게 된다.  무정은 포병퇀의 퇀장으로 있을 때인 1941년초 주덕의 명령을 받들고 연안의 남쪽에 있는 南泥灣으로 최초로 들어가 황무지 개간운동을 벌렸다. 자력갱생, 자급자족의 전범을 보였다.   1941년 9월21일 오후 2시 연안군민구락부에서 주덕사령의 조직 하에 동방 각 민족 友人이 참가한 좌담회가 열렸는데 무정은 조선인대표로 참가했으며 발언을 했다. 22일 그의 발연이 연안의『해방일보』에 실렸다. 10월 26일 무정은 연안에서 진행한 동방각민족반파시즘대표대회에서 대회주석단성원으로 선거된다. 그는 대회에서 조선인대표로서 발언을 했고 폐막사를 했다.   김산, 박학다식한 견정한 혁명가. 그는 1936년 8월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파견을 받고 섬서의 중화소베트구역으로 들어온다. 연안에 도착한 후 중앙군위의 요청에 의해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 및 화학, 물리 등 과목을 주로 강의했다. 그런데 그는 康生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내부의 좌적인 경향에 의해 결국 별 볼일 없는 소외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연안 중앙도서실의 맑스주의 원작들을 독파하며 사색의 즐거움을 즐기고 있다가 미국 기자 님 웨일즈에게 연안의 공산당 대선비로 발견된다. 그래서 그가 드팀없는 혁명가의 일생을 들려주게 되는데 님 웨일즈의『아리랑의 노래』는 이로부터 탄생된다.  조선의용군, 강철의 부대. 일찍 1938년 10월 한구가 점령당할 때 ‘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의 성원들은 견결히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기타 조선 혁명단체들이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하는 항일근거지 연안으로 철수 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조선의용군이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나아가는 한 계기가 된다. 그러다가 1943년 말에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조선의용군 각 지대로 하여금 연안으로 들어가 군정훈련을 받을 것을 지시한다. 이리하여 백여 명의 조선의용군이 1944년 4월 7일에 연안에 도착한다. 조선의용군 총부는 연안에서 5키로 떨어진 羅家坪溝에 자리 잡는다. 이때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터가 마련된다. 1945년 2월 5일에 羅家坪溝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설립된다. 주덕, 임백거 등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간부들이 출석하여 축하연설을 하였다. 교장에 김백연, 부교장에 박일우가 맡았으며 과목으로는 맑스주의철학, 정치경제학, 군사학, 일본문제, 조선문제를 개설했으며 간부를 키우고 조선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는 것을 기본 종지로 내세웠다. 이 군정대학은 변구정부로부터 전격적인 지원을 받았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3개의 지대로 나뉘어졌는데 제1지대 40여명은 농장생산대원이 되어 연안에서 약 15키로 떨어진 西南甘川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메밀을 심었다. 제2지대 15명은 東邊橋二購에 가서 窯洞을 파고 숙소를 짓는 작업을 했다. 제3지대는 벽돌공장을 세워 벽돌과 기와를 굽어냈다. 이외에 채소조, 목공조, 방사조, 사탕조 등을 무었다. 일부 노약자는 시내에 ‘三 . 一’상점을 세워 연안의 군민을 위해 복무했다. 후에 80여명의 조선의용군은 몇 천 명의 연안의 항일군민과 더불어 延河 강변에 연안비행장을 건설했는데 비행장건설지휘부로부터 몇 차례나 되는 표창을 받고 붉은 기를 수여받았다. 실로 조선의용군은 당시 연안의 대생산운동에서 솔선수범을 보였다.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은 실로 중국 공산당의 동지였고 반가운 손님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국제주의전사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행사에도 초청받는다. 1945년 4월 23일부터 5월 하순까지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가 연안에서 열렸다. 여기에 조선인 박일우, 서휘가 정식대표로 참가하고 최창익, 박효삼이 방청대표로 참가했다. 박일우가 대회발언을 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4일 일제의 폐망소식이 전해지자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사생들은 무정 등의 인솔 하에서 홰불을 들고 羅家坪溝에서 축하행진을 했다.   일제가 완전히 패망한 1945년 8월 말 신화사12일 주덕사령의 제6호 명령에 의해 조선의용군은 조선군정학교의 전체학생을 새로이 편입하여 동북에로의 진군을 다그치면서 조선인과 연안의 인연은 일단 끝난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도는가,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들어서 연안과 조선인은 다시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는 듯하다. 연안 시내를 돌아보노라니 보탑산과 그리 멀지 않은 번화한 거리에 있는 한 대형상가의 3층에 한국상품센터라는 간판이 버젓이 보인다. 나와 같이 다니던 배교수에게 주로 무슨 물건을 파는가고 물으니 옷류가 대종을 이룬다고 했다. 이른바 한류라는 것이 이 연안에도 불고 있는 것 같다. 고중에 다니는 배교수의 따님이 CD나 MP3로 열심히 듣고 있는 노래가 바로 한국노래라고 한다. 대서북의 편벽한 오지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연안의 젊은이들에게는 ‘한류’나 나 같은 ‘조선인’들을 이젠 그리 생소하게 느끼지 않는 눈치다. 그런데 정률성, 무정, 김산... 이런 조선의 건아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워낙 연안에서 이들의 흔적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연안대학의 배교수에게 이들 조선인들을 알고 있는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무정, 김산은 잘 모르겠는데 정률성은 좀 들은 것 같다고 했다. 연안사람에게 그래도 정률성은 얼마간 알려진가봐. 그래서 나는 정률성에 관한 무엇 좀 없는가고 물었다. 그녀는 박물관에 가면 일부 자료들이 있을거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 박물관문은 닫아걸고, 그래서 터벅터벅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76    누나콤플렉스 댓글:  조회:4894  추천:68  2006-11-29
누나콤플렉스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보니 나에게는 누나가 없다. 형보다 더 좋은 누나가 없다. 남이 다 있는 것 같은 누나가 없다. 마음이 허전해났다. 그래서 나는 엄마, 아버지보고 누나를 하나 만들어내라고 떼질도 써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马后炮, 행차 뒤에 나발불기. 아,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누나 없는 허전한 내 마음! 나는 누나콤플렉스에 쌓였다. 앉으나 서나 누나생각. 소학교에 다닐 때 나는 내 위의 형의 손길에 끌려 학교에 다녔다. 그때 다짜고짜로 나를 끌고만 다니는 것 같은 형이 미웠다. 다른 애들은 누나들이 살뜰히 손잡고 다니거나 업어주기도 하면서 다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쩍 하면 형이 여자라도 되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때로는 형이 누나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정말 ‘형의 사랑도 사랑이겠지만 누나보다는 못한 사랑이여라!’, 그런거였다. 형이 유하게 부드럽게 나를 대해줄라치면 나는 그만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그때면 형은 영문을 몰라 거저 바보 같은 놈 하고 만다. 나는 소학교 때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초중 때까지만 해도 싸움질을 잘 했다. 특히 내 앞에서 이것은 우리 누나가 사준거야, 이것은 우리 누나가 뜨준거야 하고 자랑을 하는 놈하고는 괜히 기분을 잡치며 트 잡이를 했다. 그 누나라는 말이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부족한 때라 우리가 끼는 장갑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입는 세타며 두르는 목도리며 귀에 거는 귀걸이에 이르기까지 토실로 많이 뜬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우리 엄마도 이런 것을 우리에게 뜨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우리 엄마의 지극정성이 슴배인 이런 것들을 끼고 입고 두르고 걸고 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그런데 자꾸 나는 마음이 허전해났다. 남들이, 그 누나가 뜨 주었다는 것들이 부러워났다. 부러워나다 못해 시샘이 났다. 그래서 나는 주먹질에 발길을 날리군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심술쟁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누나 없는 나의 무의식적인 누나콤플렉스의 병적인 발산이니 나도 가련할씨구!나에게는 이 누나콤플렉스가 유난히 강했던 것 같다. 지금 나의 아내는 사실 누나 같은 존재다. 나이도 나보다 한 둬살 위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녀가 말 없이 묵묵히 누나처럼 나를 잘 챙겨주었기 때문이다. 거저 누나 같은 편안함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도 나를 남동생처럼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누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하며 피씩 웃었다. 그래서 나는 누나이기 때문에 더 사랑한다고 하며 지궂게 달라붙었다. 참, 그때까지만 해도 연상의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들 눈에 좀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물불을 가릴 계제가 못 되었다. 누나이기 때문에 더 사랑하고 싶은 욕망은 나를 미치게 하였다. 그래서 무조건 진공-결국 나는 그녀의 사랑을 얻어내고 말았다. 나의 사랑은 무의식적인 누나콤플렉스의 순수함에 많이 놀아난 셈이다. 그러니 나의 사랑은 현상적으로는 어쩔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요새 연상의 여인한테 장가들어 편안하게 살아가려는 얄팍한 존재의 남자기생들하고나 姐姐、姐姐,解决问题하는 그런 찰나적인 만족만 추구하는 동물성적인 남자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 점 명기해주시기를!2006-11-29
75    성적콤플렉스 댓글:  조회:4554  추천:84  2006-11-28
성적콤플렉스동물은 참 좋겠다. 성적콤플렉스가 없어서. 나는 늘 이렇게 생각을 굴리본다. 인간은 게임의 존재다. 1등, 2등, 3등… 무엇이나 1등이 좋단다. 모듬 매도 먼저 맞아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1등, 2등, 3등… 우리를 너무 피곤하게 만든다. 성적콤플렉스까지 쌓이게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1등, 2등, 3등…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분명 행복하러 왔건만. 그런데 이 세상은 우리에게1등, 2등, 3등…을 강요한다. 이래야 세상이 발전한다나. 세상은 발전하겠지만 ‘나’는 초라하게만 되는 이 인생의 아이러니, 역설 속에 우리는 산다.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학교계통에서 교편을 잡아왔다. 처음에는 중학교에서 고중생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대학입학을 위해 너도나도 열심히 공부했다. 아니, 열심히 공부라기보다는 너도나도 1등, 1등하기에 제 정신들이 아니었다. 학교서 강의 듣고 학교 밖에서 과외보도 받고 집에서 밤 늦게까지 공부하는 아이들, 피기없이 창백하게 말라만 간다. 아무 근심걱정 없이 뛰어다니며 놀 애들이 老态龙钟의 겉늙은이가 된다. 오직 1등을 해야만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간다는 착각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아이들, 그래서2등을 하고도 맥삭해하는 아이들, 전형적인 성적콤플렉스의 노예들. 보기에 참 안스러웠다. 입시지옥 바로 그 자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노신선생의 ‘아이들을 구하라!’를 외쳐본다.그 다음 나는 줄곧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쳐왔다. 대학교도 성적콤플렉스가 팽배하기는 마찬가지. 1등 장학금, 2등 장학금, 3등 장학금…에 자유로울 학생이 없다. 너도나도 1등 장학금. 기말시험 끝나고 갸날프게 생긴 학생 하나가 울먹울먹이며 찾아온다. 교수님, 이번 시험 저 꼭 90점 이상 맞아야되요. 그래야 1등 장학금을 타요. 1등 장학금을 못 타면 저 죽을 것 같아요. 뭐, 나는 겁이 더럭 났다. 안 그래도 이전에 시험성적 때문에 학생이 자살하고 어쩌고 하는 소동이 벌어졌는데…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그 애의 시험지를 찾아 눈을 찔 감고 90점을 주고 말았다. 시험이고 뭐고 사람 살리는 일이 더 급하지 않은가. 사람이 있고 시험이 있었지, 시험이 있고 사람이 있었냐. 나는 그 학생의 성적콤플렉스에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사실 요새 대학생 애들 불쌍도 해 나다. 학교에서 규정한 과목시험성적 외에 무슨 자격증, 자격증하는 시험들이 줄을 서 있으니깐. 그러니 성적콤플렉스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다. 불쌍할시구!나는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일이 생각키운다. 1980년대 초반, 대학에 금방 입학했을 때 우리는 장학금이라는 것을 모르고 다 같게 조학금이라는 것을 받았다. 모두들 마음이 천하태평이다. 공부에 그리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성적콤플렉스라는 것도 운운할 여지가 못되는 것 같다. 그런데 한 3학년 쯤 되었을까 했을 때 장학금이라는 괴물이 나타나며 우리를 확 성적콤플렉스의 1급 태풍에 휘말려들게 했다. 공부를 잘 해야, 성적이 높아야 돈을 많이 탄단다. 그러니 너도나도 최고성적, 1등장학금에 혈안이 되어 돌아친다. 모두들 마음 편한 날이 없는 듯 하다. 모두들 시험성적이 높다. 나는 도저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 편한 쪽을 택하도록 했다. 90점이 아니라 60점 만세로 거저 고만고만 공부해서 퇴학 맞지 말고 졸업이나 하면 장땅이다. 그 무슨 애글타글이냐. 나는 배포유해졌다. 아니 배포유해지려 했다. 성적콤플렉스에 쌓여 애글타글하는 우리 반 애들이 불쌍해났다. 그런데 50보에 100보 존재로 나도 힘들었다. 딱 60점만 맞을려고 하는데 그것이 잘 되어 주지 않았다. 자꾸 점수가 오바된다. 61점, 62점, 63점… 1점, 2점, 3점… 오바되는 점수가 아까왔다. 괜히 낭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오바되는 점수들을 사랑하는 그녀들에게라도 주고 싶었다. 사실 나한테는 이 오바되는 점수가 별로 쓸모없고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나의 후반기 대학생활은 이 오바되는 점수를 줄이고 60점으로 근접해가는 모지름이었다. 사실 이런 성적콤플렉스는 학생들만의 얘기가 아니고 등차를 매기는 어른들의 게임 같은 데서도 쉽게 생겨난다. 월드컵에서 꼭 몇강 진출, 몇강 진출해야 한다고 하는 강박관념, 그리고 올림픽에서 금메달, 금메달하는 ‘주술’, 바로 그것이다. 나는 어느 나라든지 월드컵에 진출한 것만해도 대단하게 본다. 그리고 그 누구든지 올림픽에서 겨루어본 것만해도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금메달을 못 따고 동메달을 땃다고 우는 선수들이나 아쉬워하는 관객들을 참 이해할 수 없어한다. 동메달이면 어떠냐? 세계 60여억 인구에 3등이 아니냐? 정말 이것 또한 대단한 것이다. 내내 1등, 1등하며 성적콤플렉스에 쌓여있을 때 언제 이 대단한 3등을 즐기지? 그래 정말 성적콤플렉스는 우리 인생의 하나의 큰 함정이다. 그래서 나는 이 큰 함정에서 벗어날 知足者常乐을 떠올려본다. 자꾸 좌우 옆으로 보면서 1등, 1등 하는 정신적 탕개를 너무 조이지 말고 꼴찌해도 내 마음만 편하면 되지 하는 느슨함에 인생을 즐기며 내실을 기하는 것이 더 멋지지 않은가? 그래 이것이 정녕 사람같은 삶이 아닌가? 2006. 11.27
74    學而優則仕 댓글:  조회:4140  추천:53  2006-11-24
學而優則仕學而優則仕이라 우리 전통적인 유교사회에서 공부를 잘 하면 출세한다는 법. 그래서 남자들 기를 쓰고 學而優則仕하기. 일자무식인 우리 아버지도 學而優則仕하기.우리 아버지는 우리 큰 형님을 대단하게 여겼다. 우리 큰 형님이 워낙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이다. 우리 큰 형님의 명언 한마디 들어보시라. 공부, 그 잘난 거 호박에 대침놓기. 공부가 그렇게 쉽다는 것이다. 우리 큰 형님은 그 대학가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는 1960년대 초반에 대학에를 척 붙었다. 學而優則仕할 가망이 보였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우리 이 큰 형님이 우리 아버지를 그렇게 실망시키다니 참. 1960년대 초반의 조선바람에 다니던 대학 중도이폐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격으로 제 친구들 몇이하고 덜컹 조선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잠간 다녀온다고 갔건만 영영 못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의 學而優則仕의 꿈은 산산쪼각이 나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 口頭闡 하나 생겼지-상철이 그 자식 있으면 크게 출세하겠는데~ 참! 우리 아버지의 이 口頭闡은 우리 둘째 형, 셋째 형, 넷째 형, 다섯째 형 줄줄이 대학에 못 붙으니깐 푸푸 내쉬는 한숨과 더불어 더 잦아졌다. 그러다가 내가 대학에 붙으니 이 口頭闡은 사라졌다.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효자노릇 한 거 별로 없어도 대학 하나 붙어준거만은 대단한 효자노릇을 한 것이다. 내가 대학에 붙었다는 순간 아버지는 밝은 표정에 이마의 주름살을 쫙 펴며 없는 수염이나마 쓰다듬는 손놀림을 하며 으흠, 그럼 그렇겠지! 하고 하하하~ 호쾌한 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동네방네에 광고~ 우리 아들 대학에 붙었네, 우리 아들 대학에 붙었네… 그리고는 술상 벌리고 동네사람 불러들이기. 얼씨구 지화자 좋다 연일. 아버지는 내가 공부 안 한다고 그렇게 눈을 부라리더니 이젠 나를 제일 고와한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 모아놓고 하는 말이, 이 자식들아, 그래도 우리 집에 출세한 놈은 상렬이뿐이다. 너네 돈 많이 벌어 상렬이한테 많이 보내거라. 그래야 공부를 잘 하지. 누구의 지엄한 명이라고 우리 형제들은 대학기간에 나한테 경쟁적으로 돈을 부쳐왔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버지덕택에 대학기간에 돈을 여유롭게 주물럴 수 있었다.그런데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 아버지한테 그렇게 실망을 안겨 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우리 집 쪽의 중학교 교원으로 배치 받았다. 우리 아버지는 이것이 못 마땅했다. 짜식, 4년 대학 공부했다는 꼬라지가 고작 그 꼬라지냐 하는 시답지 않은 표정. 우리 아버지 마음속에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금의환향’을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옆에 비서들이 따라 붙고 기사들이 삐까삐까 승용차로 모시는 적어도 ××시 인민정부의 주임이나 장쯤이나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시세말로 문중을 빛내고 조상을 영예롭게 하는 光宗曜祖할 것을 바랐다. 그런데 내 꼬라지가 개도 안 먹는 똥을 싸는 훈장노릇을 한다니 허구픈 마음에 멍 하니 앉아 할 말을 잊은 그 모습만 보이셨다. 우리 아버지에게는 인민교사요, 인류영혼의 기사니 하는 신성한 말이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는 워낙 선생노릇을 좀 우습게 보았다. 우리 삼촌 둘 가운데 큰 삼촌은 중학교에 작은 삼촌은 소학교에 교원노릇을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농사짓는 자기보다 늘 못하게 보았다. 훈장 노릇한다는 양반들이 자기보다 못 산다는 것이다. 내 어릴 때 기억에도 우리 교원노릇을 하는 두 삼촌은 쩍 하면 우리 집에서 쌀을 가져가든가 무엇을 잘 가져갔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이제 한다는 얘기가-야, 저 봐라, 저 누구 집 자식은 대학 졸업하고 무슨 주임을 한다든데, 저 누구 집 자식은 대학 졸업하고 무슨 국장을 한다든데, 저 누구 집 자식은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막 번다든데... 그래서 나의 연구생공부도 시작. 아버지 내 연구생에 붙었어요. 무어, 연구생? 얘, 이제 연구생 졸업하는 날엔 한 자리 크게 합니다. 어 진짜냐? 그래 해봐라. 그런데 3년 연구생공부도 우리 아버지에게는 나무아무타불. 내가 대학교에 훈장으로 남았으니 말이다. 나는 또 우리 아버지를 속인 셈이다. 연구생 졸업하고도 아무런 주임이나 장자 자리 하나 못 얻어했으니깐. 그래서 나는 아버지 보십시오, 대학 선생은 중학교 선생하고 다름니다, 돈을 많이 법니다하고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허리띠 졸라맨 덕택에 장만한 얼마간의 돈을 우리 아버지에게 안겨주었다. 돈으로 떼워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니 그 꼬락서니 다 알고 있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표정에서 헤이, 그래도 한 자리 해야지 하는 아버지의 비탄에 가까운 애원을 읽었다. 그래서 나는 효자노릇 하느라고 마음에 없는 무슨 주임이요, 주석이요 하는 나부랭이가 붙은 것들이 차례지면 아니 아니 하면서도 말없이 받아 물었다. 그리고는 꼭꼭 아버지한테 회보하기. 아버지, 내 무슨 주임, 주석입니다. 은근히 과대포장까지 하면서. 내가 우리 학과의 자습대학 주임자리를 맡아볼 때다. 정말 별 볼일 없는 자리다. 그러나 동료들이 우교장하기도 한다. 농담하느라고. 그래서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아버지 내 자습대학 교장입니다, 차도 타고 다닙니다고 회보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우리 아버지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구나. 그리고는 임마, 교장을 하자면 사람이 성실해야 되고 말을 적게 해야 되고 위엄이 있어야 되고... 어쩌구 하며 교장학을 한바탕 강의하시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말 우기는 일이었다.우리 아버지는 박사도 우습게 본다. 내가 어렵게 박사공부 할 기회를 얻어 한국에 간다고 야단법석을 떠니 한다는 말씀이 공부만 자꾸 해서 뭘 하냐, 그 잘난 박사 한 자리 하는 것만 못하니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또 포스터닥을 하러 떠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한테 말을 할까말까 고민이다. 말씀을 드려보았자 박사하러 떠날 때 하시던 말씀을 그대로 반복할 것 같다. 괜히 심기만 불편하게 할 것 같다. 금년 여든이 훨씬 넘은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나한테 學而優則仕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나는 學而優則仕의 출세가도와는 인연이 없다. 내 체질학적으로도 學而優則仕와는 맞지 않다. 나는 교수본연의 평상심으로 애들이나 가르치고 아카데미적 정신유희를 즐기는 것이 낙이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 벼슬길과 학문의 길이 양자택일로 주어질 때 나는 서슴없이 후자의 길을 택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버지한테는 영원한 불효자식인지도 모르겠다. 2006. 11. 23
73    민주주의의 허허실실 댓글:  조회:4046  추천:64  2006-11-22
민주주의의 허허실실정치의 민주화, 경제의 시장화는 현 단계 전반 세계적인 추세다. 사실 민주, 자유, 평등은 중세 봉건주의에 대항하여 내건 근대의 기본 이념들이다. 민주, 독재에 대한 안티테제. 主權在民, 누구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며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민주다. 대통령도 민주 앞에서는 어쩌지 못한다. 민주 참 좋다. 민주는 그대로 자유로운 분위기고 평등이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평등의 원칙, 그리고 기권, 나는 자유다. 그런데 모든 사물은 허와 실이 있는 법. 그래서 나는 민주의 허를 찔러본다. 민주의 기본원칙의 하나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다수가결의 원칙. 다수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이 민주다. 그런데 다수란 어떤 존재냐? 다수란 평균치다. 그리고 隨大流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많다. 그래서 이 평균치에서 벗어난 톡톡 튀는 생각을 가진 선구자나 개혁자는 소외된다. 선구자나 개혁자는 항상 외로운 법. 그리고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모난 돌이 징 맞거나 槍打出頭鳥하는 법. 그리고 신생산물은 그것이 미래발전추세를 대변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인 만큼 다수의 논리에서 배제된다. 여기서 다수의 맹목과 횡포를 보게 된다. 선거전에서 입후보자들이 다수를 쫓아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헤매는 꼴은 다른 또 한 보기.다수를 얻기 위해 민주주의는 말농창치기. 여차여차하게 자기 자랑 늘여놓기. 전부 毛遂自薦하는 자들, 겸양의 미덕은 싹 가셔지고 없다. 정말 철면피 그 자체다. 그리고 여차여차 다수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기. 자기가 당선만 되면 천지개벽을 할 듯이 떠벌인다. 쇼적인 과대포장이다. 여하튼 말 잘하고 보기. 주눅이 들거나 어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요새 세상은 전부 말 잘하는 똑똑한 사람 천지다. 그래서 애를 키워도 기 죽이지 않고 당당하고 말 잘하도록 키운다. 민주주의의 허허실실에 헷갈리기 쉬운 요즘 세상, 정신 바짝 차리고 살지어.2006. 11.20
72    문학민주주의 댓글:  조회:4239  추천:54  2006-11-22
문학민주주의요새 문학은 잘 나가는 편이다. 시장경제의 세례를 겪으면서도 문학인구는 더 많아진 것 같다. 워낙 문학은 자아표현, 자아발산의 인간내면의 깊숙한 요구와 매치되어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학은 선택된 일부분 사람들만 하는 줄로 알았다. 전직작가나 전문문학인들만 하는 줄로 알았다. 워낙 문학은 일반 사람들이 근접하기 힘들었다. 문학은 고상하고 신성한 것. 그래서 ‘인류영혼의 기사’들만 하기. 그리고 발표원지도 너무 좁았다. 그래서 어쩌다가 한편 발표하면 그것은 똑 마치 하늘에 별 딴 듯한 희열.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우리가 문학을 보는 시각교정이 많이 이루어졌다. 문학은 단지 교육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니다. 문학은 숫처녀의 순정을 노래해도 좋고 장가 못 간 노총각의 고민을 읊어도 좋다. 그리고 발표원지도 더 없이 많아졌다. 인터넷문학은 문학발표의 가장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한다. 그래서 인터넷세상엔 나름대로의 문학이 흘러넘친다. 문학이 정말 별 볼일 없는 시시껄렁한 것이 되고 말았다. 전직작가도 별 볼일 없는 작가로 되고 말았다. 이전에는 문학을 배고프거나 고통스러워서 많이 한 것 같다. 중국 고대『詩經』시절의 飢者歌其食나 서양의 憤怒出詩人이 바로 그것이다. 처절함 그 자체다. 그래서 존재의 고민을 읊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문학을 배가 부르고 즐거워서 많이 하는 것 같다. 우리 연변의 ‘어머니수필회’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낳을 애를 다 낳고 볼 장 다 보았다. 별로 할 일이 없다. 심심하다. 그래서 문학을 한다 이런거. 그래서 그 문학은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거저 시시껄렁한 신변잡사를 넉두리한 것 같다. 그래서 너도나도 수기 같은 수필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의 진실한 토로일 때 나는 체증을 떨어버린 즐거움을 얻는다. 아이 낳을 때 즐거움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리고 니 작품까지 발표했다고 옆에서 떠들어대니 명예욕도 충분히 만족 받는다. 여기에 금상첨화 격으로 수상까지 하는 날에는 정말 기분이 붕 뜬다. 이 세상 모두가 내 것. 여기서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인 즐거운 고민의 소산.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문학은 홀가분한 존재 그 자체.이것은 다른 한 의미에서의 문학의 백화제방이다. 이것을 문학의 민주주의라해도 무방하겠지. 200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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