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연안에 꼭 가보고 싶었다. 연안은 이래저래 나를 흡인하는 곳이다. 얼마나 많은 열혈청년들이 순수한 혁명정열을 안고 연안으로 모여들었던가? 1.중국혁명 승리의 메카-연안 1934년 10월 모택동이 이끄는 중앙공농홍군은 정강산혁명근거지를 떠나 북상항일의 기치를 들고 첩첩으로 되는 장개석 국민당군의 포위토벌을 뚫고 1년 여 만에 유명한 2만5천리 장정을 끝마치고 연안에 도착하여 섬감녕혁명근거지를 세운다. 중국혁명은 바로 정강산에서 불길을 지펴 연안에서 승리의 서광을 안아왔던 것이다. 나는 연안에 도착하는 길로 중국혁명의 사령탑 역할을 한 楊家嶺을 찾았다. 楊家嶺에는 연안에 도착한 중국공산당의 최고리더들인 모택동, 유소기, 주덕, 주은래, 임필시가 살던 窯洞이 있다. 이들 窯洞은 야트막한 산언덕에 나란히 있었다. 생각보다는 아담하고 깔끔하였다.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는 훨씬 환했다. 벽은 흰칠이 되어 있었다. 안은 모두 두 칸이었는데 바로 들어서는 칸은 접객실이고 접객실과 좌우로 뚫려 있는 안쪽은 침실용이다. 사무용 책상이고 걸상, 그리고 침대 등 모든 집물은 사치함과는 거리가 먼 투박하고 소박함 그 자체다. 그러나 窯洞안은 안온했다. 12월말의 맹겨울이건만. 冬暖夏凉의 窯洞이라는 말에 실감이 갔다. 모택동은 바로 이 窯洞 안의 흰 보를 덮은 더 없이 수수한 책상 위에서『모순론』,『지구전을 논함』등 중국혁명을 이끌어간 많은 노작들을 집필했다. 모택동은 자기의 窯洞 앞에 있는 돌걸상에 돌상으로 이루어진 담화장에서 미국 기자 스터랑과 담화를 하면서 모든 반동파와 제국주의는 종이범에 불과하다는 호매로운 말을 내밷기도 했다.朱德의 窯洞 앞에 있는 돌상에는 장기판과 다른 놀이판이 새겨져 있는데 그는 자기의 경위원이나 부하들과 때때로 여기서 장기를 두며 휴식의 한 때를 보냈다고 한다. 그의 격의 없이 후덥고 따뜻한 인정미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가고 없는 일말의 허전함을 달래보고자 그들이 잡아본듯한 우물손잡이를 楊家嶺을 떠나면서 잡아본다. 후에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楊家嶺을 떠나 대추가 많이 난다는 棗園으로 옮겨갔다. 모택동은 바로 이 棗園의 窯洞에서 주로 밤에 석유등을 밝혀놓고 중국혁명의 진로를 밝히는 많은 글들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棗園의 불빛이 중국혁명의 길을 밝힌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棗園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朱德의 窯洞 안에 그때에는 꽤나 고급상스러운 긴 소파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때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 임필시 등 중국 공산당의 최고급 간부들이라도 특수화라는 것이 없고 일류로 평등하게 물품을 분배받아 썼다고 한다. 그런데 구소련에서 증정 받은 짚차를 폐기처분하면서 스프링이 있는 앉음자리를 이용하여 그 소파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스프링이 있는 소파는 고급품으로 취급되어 모택동이 당시 60에 가까운 나이가 가장 많은 주덕에게 선물로 그 소파를 주었다고 한다. 나는 중국혁명의 거장들의 체취가 슴배어있는 楊家嶺과 棗園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택동과 유소기, 그들은 동지였고 연안에서부터 손발이 잘 맞아 돌아갔다. 바로 이 楊家嶺의 中央大禮堂에서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유소기는 모택동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새 중국이 건립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들 사이에는 일대 회오리바람이 인다. 정치의 무상함을 실감하게 하는 전형적인 한 보기. 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 그 유명한 ‘연안문예좌담회’가 생각키웠다. 연안문예좌담회는 바로 楊家嶺에 있는 中央辦公廳樓에서 소집되었다. 中央辦公廳樓는 1941년에 지었는데 그 당시로는 상당히 멋진 청사였다. 비행기 모양으로 지어 ‘飛機樓’라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도합 3층으로 되었는데 1층의 북쪽 ‘날개’ 부분은 중앙도서실이었다. 그리고 남쪽 ‘날개’ 부분은 식당 칸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1942년 5월 2일부터 23일까지 중앙선전부에서 조직한 ‘연안문예좌담회’가 진행되었다. 근 100명에 가까운 문예일군들이 참가했다. 모택동은 바로 이 좌담회에서 유명한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을 했다. 문예는 혁명의 기본 역량인 로농병을 위하여 복무해야 한다는 근본성적인 방향을 제시했으며 정치 제1, 예술 제2의 문예비평의 표준을 제시했다. 그리고 광범한 예술인들은 인민대중 속으로 뛰어들어 사상을 개조하고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되며 그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창작해야 된다고 호소했다. 모택동의 이 연설은 상당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丁玲은 바로 이 연안문예좌담회 후 산서 태항산의 농촌으로 내려가 토지개혁을 반영한 유명한『태양은 상간하를 비춘다』라는 장편소설을 써서 일약 새로운 작가면모를 보이며 성장한다. 당시 가열처절한 항일의 나날에 한가히 화조월석이나 노래하고 ‘발가락이 닮았다’식을 쓰고 있을 계제가 못된다. 문학은 정치를 위해 복무하는 투쟁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시 자아의 협소한 감정에 매몰되고 센티맨탈한 감상성에 잘 빠지는 소부르죠아출신의 문예일군들이 대부분인 상황 하에서 문예의 적절한 방향설정이고 자리매김이다. 그런데 이것이 극단적으로 강조되며 새 중국이 성립된 평화적 시기에 좌적 정치경향에 이용되어 문학예술이나 예술가들을 일대 수난으로 내몬 것은 중국 당대역사에서 지극히 빗나간 한 보기가 아닐 수 없다.중국공산당은 문학예술을 혁명투쟁의 무기로 여기며 항상 중시해왔다. 그래서 연안시기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로신예술학원을 세웠다. 중국 공산당의 초기 예술인재들은 바로 이 로신예술학원을 통해 커 갔다. 중국 공산당은 항상 선전사업을 중시해왔다. 延河를 끼고 있는 유명한 도교성지의 하나인 청량산의 ‘萬佛寺’ 입구에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중앙인쇄소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陸定一 등이 골간이 되어『解放日報』등을 꾸렸다. 여기에는 또 모택동이 친필로 쓴 ‘新華書店’도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당시 중국 공산당의 신문, 잡지들을 발행하던 총 본산이었다. 현재 중국 각 곳의 ‘新華書店’의 기원도 바로 여기다. 현재 바로 이 중공중앙인쇄소와 ‘新華書店’ 자리와 멀지 않은 청량산 아래에 ‘연안신문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연안하면 우리에게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寶塔이다. 그럼 寶塔이 무엇이냐? 사실 이 寶塔은 혁명과 그리 관계가 없다. 그것은 송나라 때 세운 불교전탑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혁명이 일어난 곳의 전탑이요, 혁명가들이 활동하던 곳의 전탑이 되면서 연안을 상징하는 명물의 하나로 되었다. 窯洞도 마찬가지다. 窯洞은 사실 정말 별 볼일 없는 주거다. 원시적인 穴居에 가까운 가장 간단한 주거방식이다. 적어도 채광도나 공기순환도 면에서 문제가 있는 줄로 안다. 그러나 연안지구 사람들은 토질 등 자연조건에 따라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아 窯洞을 구축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일종 전통적인 주거형태로 고착되었다. 그러다가 중국 혁명의 수령들인 모택동, 주덕, 주은래. 유소기, 임필시 등이 窯洞에 기거하게 되면서 窯洞은 일종 중국 혁명의 요람이 되고 승리의 상징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 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窯洞은 홍색낭만의 기호가 되기도 했다. 연안사람들은 이 기호에 일종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연안대학 캠퍼스 운동장 오른 쪽의 산언덕에 한일자로 줄줄이 늘어선 窯洞集落은 멋지다 못해 숭엄하기까지 한다. 연안사람들은 현재 窯洞기호를 브랜드화하여 호텔 같은 현대식 건축에도 窯洞 특색을 살려 눈길을 끌고 있다. 혁명은 이렇게 대단한 것이다. 가치를 창조하고 천지개벽을 일으키기도 한다. 연안사람들도 바로 이 혁명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서안에서 버스를 타고 연안으로 가는 도중의 도로표지판만 놓고 보아도 그것은 거저 연안이 아니고 꼭 ‘혁명성지 연안’이라 표기한다. 연안대학 교직원들은 연안대학이 중국의과대학을 비롯한 연안의 여러 대학을 통합하여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세운 종합대학이라는데도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모택동이 말한 ‘小米加步銃’에서 小米는 연안의 小米-좁쌀을 말한다. 중국혁명은 연안의 좁쌀에 떠받들여 진행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안은 토질상 좁쌀이 잘 된다고 한다. 지금도 연안사람은 좁쌀을 잘 먹는 것 같다. 좁쌀이 찰지고 구수하다. 아침 식사로 좁쌀죽을 먹어보았더니 참 맛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연안대학의 배소기 교수는 나에게 토산품 선물로 좁쌀을 선물한다. 연안은 홍군을 키워냈다. 그래서 그들은 회색바탕에 붉은 별과 견장이 달린 소박한 홍군의 군복을 연안의 명물로 내세운다. 관광명소마다 홍군 군복을 마련해놓고 사진 한방 박아라고 야단이다. 그래야 멋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홍군의 진모습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이 찌고 머리카락이 길고 어줍잖은 표정이건만 홍군의 군복을 한번 입어보고 폼을 잡아보았다. 연안사람들은 중국 혁명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최고 수령들과 같이 했다는 자부심 또한 대단한 것 같다. 棗園에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최고 수령들인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 임필시의 조각상이 있다. 당지의 많은 사람들이 이 조각상 앞에 와 참배하는 것 같다. 이들 혁명수령들은 일종 신적인 존재로 부상되기도 한다. 연안사람들은 이 혁명수령들을 많이 그린 것 같다. 그들은 모택동이 연안을 떠난 후 한 번도 찾아주지 않은데 대해 좀 섭섭함을 금치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1960년대인가 1970년대에 주은래 총리가 연안을 찾아주었을 때 연안은 온통 감격과 환호성으로 들끓었다고 한다. 당시 주은래 총리가 탄 승용차가 보탑 앞 길거리에서 진흙탕에 빠지자 연안인민들이 차를 들고 나아갔다고 한다. 그들은 재작년에 호금도 서기가 연안에 와서 구정을 쉰데 대해 많이 외운다. 중앙의 고위급 간부들이 자기네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데 감사해한다. 연안은 혁명의 성지이되 물질적으로 그리 풍족하게 잘 사는 것 같지 않다. 시내도 좋고 사람들의 몸에서 소박함이 많이 묻어난다. 내가 楊家嶺에 갔을 때 마침 한 窯洞에서 剪紙를 팔고 있었다. 가위로 색종이를 오려 여러 가지 모양을 낸 것이 剪紙다. 섬서성의 대표성적인 민간예술인데 어느 한 현은 전문 이 剪紙로 먹고 산단다. 그런데 이 窯洞에서 剪紙를 파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전국 剪紙시합에서 1등을 한 李福愛 여사이다. 그래서 剪紙집 하나를 골라 잡았다. 그런데 돈을 안 받겠단다. 나를 배동해간 연안대학 剪紙 전문가 배소기 교수와 잘 아는 처지라 돈을 안 받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싸움하다시피 하면서 돈을 찔러주었다. 그리고 무료로 섬북 민요 ‘信天遊’調를 듣도록 했다. 그녀의 민요는 애절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이 약동했다. 녹음을 못 해온 것이 아쉬웠다. 푸더분하게 생긴 맏며늘감 같은 李福愛 여사가 그립다. 나는 연안이 우리와 비슷한 데가 많다고 생각된다. 延河를 끼고 형성된 도시. 연안의 延河는 똑 마치 우리 연길의 부르하퉁하 같다. 그 물줄기, 그 위에 놓인 다리... 우리도 중국 혁명에 대한 자부심 대단하다.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열사비, 너무도 우리에게 와 닿는다. 그래서 우리도 위로부터의 관심을 바랐고 갈망했다. 주은래, 주덕, 동필무... 중앙의 고위급 간부들이 우리를 찾아줄 때 우리는 감격하고 환호했다. ‘연변촌놈’으로 뒤떨어지거나 왕따 당하지나 않을가 하는 콤플렉스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서북대개발 정책과 전략, 연안사람들 대환호한다. 우리도 대환호다. 그 혜택이 우리에게도 미친다. 우리 연변대학만 해도 서북대개발 정책의 혜택을 받는 대학이다. 내가 이 말을 했더니 연안대학 교수들 말이 참 재미있다. 연변대학은 연안대학과 한 글자 차이라 형제자매나 다름 없으니 서북이고 뭐고 떠나서 응당 그런 혜택을 받아야 된다고 한다. 연안사람들 잘 살아보려고 움직인다. 우리도 움직인다. 연안사람과 우리 연변사람, 다 같이 홍색낭만에 새로운 경제낭만 꿈꾸어 볼 차례다. 2. 연안과 조선사람 연안은 우리 조선사람과 인연이 깊다. 우리 조선사람과 연안의 인연은 뭐니뭐니 해도 혁명이다. 조선의 열혈남아들이 혁명의 정열을 안고 혁명성지-연안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정률성의「연안송」, 김산의「아리랑의 노래」가 들려오는 듯 하고 무정장군의 다구진 모매가 선히 보이는 듯하다... 정률성, 음악천재. 그의 음악적 재능, 영감도 사랑도 연안에서 피어난다. 1937년 10월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금빛 정장본『세계명곡집』을 들고 연안에 와서 陝北公學에서 공부한다. 1938년 3월에 졸업하고 성립된지 얼마 되지 않는 노신예술학원 음악계에 들어가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한다. 8월에 졸업한 후 항일군정대학 선전과에서 음악지도를 담당한다. 그는 1938년과 1939년 사이 음악창작의 첫 고조를 연안에서 맞이한다. 그는 1938년 봄 노신예술학원의 학생신분으로「연안송」을 창작한다. 졸업한 후에는「10월혁명가」, 「항일돌격운동가」, 「연수요」,「생산요」, 「아랑에 부쳐」 등 일련의 가곡을 짓는다. 이후 그는 노신예술학원의 성악선생으로 활약한다. 합창시리즈곡『팔로군대합창』은 이 시기에 짓는다.「연안송」과『팔로군대합창』은 이 시기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중국음악사의 명작으로 꼽힌다.「연안송」은 정률성이 노신예술학원의 뒷산에서 연안의 전경을 바라보면서 혁명성지 연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격정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후에 연안강당에서 열린 문예야회에서 이 노래를 불러 모택동을 비롯한 중앙지도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연안송」은 연안에서뿐만 아니라 섬감녕변구를 비롯한 항일근거지 내지는 국민당통치구 및 동남아화교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불리워지며 연안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고 항일의 뜻을 키웠다고 한다. 公木를 비롯한 많은 젊은 청년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연안으로 달려왔다고 한다.『팔로군합창곡』가운데「팔로군진행곡」은 가장 성공적인 군가로 평가되고 있다. 『팔로군합창곡』은 1940년 초에 정률성의 지휘로 연안중앙대강당에서 공연을 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1941년 5 ․ 4청년절에는 ‘음악갑등상’을 받는다.「팔로군진행곡」은 항일전쟁시기 각 항일부대와 항일혁명근거지에서 불리다가 1945년 후에는 화북지구에서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이름이 바뀌고 점차 중국인민해방군의 군가역할을 하다가 새 중국이 성립된 후 정식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명명된다. 정률성은 1942년 5월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연안문예좌담회에 참가한다. 정률성의 이런 음악적 재능은 처녀들의 사랑을 얻기에 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1941년 드디어 당시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 대장으로 있은 사천처녀 정설송과 노신예술학원의 큰 교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무정, 군사천재. 중국 포병부대 창설자의 한 사람. 유일하게 중국 공농홍군 2만5천리장전부대를 따라 연안에 도착한 조선사람. 무정은 연안을 조선인혁명성지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1937년 1월에 조선인 공산당원 서휘와 연안에서 담화하면서 ‘화북지구의 조선청년들을 연안으로 불러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1939년에 무정은 자기가 솔선하여 사인한 섬북조선청년연명신을 발표하여 관내 각지의 많은 조선청년들을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으로 불러들여 정치교육을 받게 한다. 이때 무정의 배려 하에 이화림은 연안의 중국의과대학에 가서 배우게 된다. 그의 노력 하에 1940년대에 들어서 화북조선독립동맹본부는 진기로예변구로부터 결국 연안으로 옮겨오게 된다. 그 분회는 섬감녕변구와 진찰기변구에 두게 된다. 무정은 포병퇀의 퇀장으로 있을 때인 1941년초 주덕의 명령을 받들고 연안의 남쪽에 있는 南泥灣으로 최초로 들어가 황무지 개간운동을 벌렸다. 자력갱생, 자급자족의 전범을 보였다. 1941년 9월21일 오후 2시 연안군민구락부에서 주덕사령의 조직 하에 동방 각 민족 友人이 참가한 좌담회가 열렸는데 무정은 조선인대표로 참가했으며 발언을 했다. 22일 그의 발연이 연안의『해방일보』에 실렸다. 10월 26일 무정은 연안에서 진행한 동방각민족반파시즘대표대회에서 대회주석단성원으로 선거된다. 그는 대회에서 조선인대표로서 발언을 했고 폐막사를 했다. 김산, 박학다식한 견정한 혁명가. 그는 1936년 8월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파견을 받고 섬서의 중화소베트구역으로 들어온다. 연안에 도착한 후 중앙군위의 요청에 의해 연안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경제 및 화학, 물리 등 과목을 주로 강의했다. 그런데 그는 康生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내부의 좌적인 경향에 의해 결국 별 볼일 없는 소외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연안 중앙도서실의 맑스주의 원작들을 독파하며 사색의 즐거움을 즐기고 있다가 미국 기자 님 웨일즈에게 연안의 공산당 대선비로 발견된다. 그래서 그가 드팀없는 혁명가의 일생을 들려주게 되는데 님 웨일즈의『아리랑의 노래』는 이로부터 탄생된다. 조선의용군, 강철의 부대. 일찍 1938년 10월 한구가 점령당할 때 ‘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의 성원들은 견결히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기타 조선 혁명단체들이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하는 항일근거지 연안으로 철수 할 것을 주장한다. 이는 조선의용군이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나아가는 한 계기가 된다. 그러다가 1943년 말에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조선의용군 각 지대로 하여금 연안으로 들어가 군정훈련을 받을 것을 지시한다. 이리하여 백여 명의 조선의용군이 1944년 4월 7일에 연안에 도착한다. 조선의용군 총부는 연안에서 5키로 떨어진 羅家坪溝에 자리 잡는다. 이때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터가 마련된다. 1945년 2월 5일에 羅家坪溝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설립된다. 주덕, 임백거 등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간부들이 출석하여 축하연설을 하였다. 교장에 김백연, 부교장에 박일우가 맡았으며 과목으로는 맑스주의철학, 정치경제학, 군사학, 일본문제, 조선문제를 개설했으며 간부를 키우고 조선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쟁취하는 것을 기본 종지로 내세웠다. 이 군정대학은 변구정부로부터 전격적인 지원을 받았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3개의 지대로 나뉘어졌는데 제1지대 40여명은 농장생산대원이 되어 연안에서 약 15키로 떨어진 西南甘川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메밀을 심었다. 제2지대 15명은 東邊橋二購에 가서 窯洞을 파고 숙소를 짓는 작업을 했다. 제3지대는 벽돌공장을 세워 벽돌과 기와를 굽어냈다. 이외에 채소조, 목공조, 방사조, 사탕조 등을 무었다. 일부 노약자는 시내에 ‘三 . 一’상점을 세워 연안의 군민을 위해 복무했다. 후에 80여명의 조선의용군은 몇 천 명의 연안의 항일군민과 더불어 延河 강변에 연안비행장을 건설했는데 비행장건설지휘부로부터 몇 차례나 되는 표창을 받고 붉은 기를 수여받았다. 실로 조선의용군은 당시 연안의 대생산운동에서 솔선수범을 보였다.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은 실로 중국 공산당의 동지였고 반가운 손님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국제주의전사들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 공산당의 중요한 행사에도 초청받는다. 1945년 4월 23일부터 5월 하순까지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가 연안에서 열렸다. 여기에 조선인 박일우, 서휘가 정식대표로 참가하고 최창익, 박효삼이 방청대표로 참가했다. 박일우가 대회발언을 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4일 일제의 폐망소식이 전해지자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사생들은 무정 등의 인솔 하에서 홰불을 들고 羅家坪溝에서 축하행진을 했다. 일제가 완전히 패망한 1945년 8월 말 신화사12일 주덕사령의 제6호 명령에 의해 조선의용군은 조선군정학교의 전체학생을 새로이 편입하여 동북에로의 진군을 다그치면서 조선인과 연안의 인연은 일단 끝난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도는가, 오늘날 글로벌시대에 들어서 연안과 조선인은 다시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는 듯하다. 연안 시내를 돌아보노라니 보탑산과 그리 멀지 않은 번화한 거리에 있는 한 대형상가의 3층에 한국상품센터라는 간판이 버젓이 보인다. 나와 같이 다니던 배교수에게 주로 무슨 물건을 파는가고 물으니 옷류가 대종을 이룬다고 했다. 이른바 한류라는 것이 이 연안에도 불고 있는 것 같다. 고중에 다니는 배교수의 따님이 CD나 MP3로 열심히 듣고 있는 노래가 바로 한국노래라고 한다. 대서북의 편벽한 오지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연안의 젊은이들에게는 ‘한류’나 나 같은 ‘조선인’들을 이젠 그리 생소하게 느끼지 않는 눈치다. 그런데 정률성, 무정, 김산... 이런 조선의 건아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워낙 연안에서 이들의 흔적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연안대학의 배교수에게 이들 조선인들을 알고 있는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무정, 김산은 잘 모르겠는데 정률성은 좀 들은 것 같다고 했다. 연안사람에게 그래도 정률성은 얼마간 알려진가봐. 그래서 나는 정률성에 관한 무엇 좀 없는가고 물었다. 그녀는 박물관에 가면 일부 자료들이 있을거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 박물관문은 닫아걸고, 그래서 터벅터벅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