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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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천주교의 비교연구 외 1편 (소이연)
2013년 01월 23일 10시 07분  조회:9725  추천:1  작성자: 최균선
   설명: 모 평심위원이 엄중한 정치문제가 있다고 상급에 고발한 논문임)                 

                                 摘要

    众所周知,天主教是世界三大宗教之一基督教的一个分教。天主教、东正教和新教都隶属于基督教。但在中国基督教则是专指新教(俗称耶稣教)。虽然天主教传入亚洲已经有相当久的历史,但即使作为一名教友,也有很对人对天主教的历史并不熟悉。天主教传入中国已经有上千年的历史了,而传入韩国也有两百多年的历史了,在中韩两国,天主教都获得了不错的发展。但问及天主教的发展历史时,很多人一脸茫然。为什么会出现这样的情形,为什么大家对那些历史都不知晓?
    两千多年前,耶稣做在耶路撒冷创立了基督教,而天主教与基督教是同源的,所以,至今也有两千多年的历史了。但人们对天主教的传入和发展却是一问三不知,更有甚者,问及天主教的教义时,也是模棱两可。天主教从唐代传入中国开始,历经误解、不支持,甚至迫害,直到今天,得到国人乃至政府的认可和支持,经历了一个漫长的过程;而在韩国,天主教也获得了很好的发展,现在越来越多的人开始相信耶稣,走进圣殿。天主教进入的同时也给当地国民的生活、思想带来了一定的影响。虽然一开始当地文化遭到了冲击,但随着天主教的发展,与神职人员的努力,使东西方的文化能够和谐共处,最终导致今天百花齐放的局面。
    面对这种越来越好的局面,我认为每一个奉教者都应该了解自己所信仰的宗教,否则不能成为一名合格的教友。所以,作为一名奉教者的我,决定对这方面展开探讨。
关键词  天主教 中韩 历史

                                        초록
 
   이 연구과제를 선택한 이유는 본인이 천주교 신자이고 한국어학과 학생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다시피 천주교는 기독교중의 한 분파이다. 천주교와 동정교 그리고 신교가 기독교에 속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기독교는 신교의 특직이다. 천주교가 아시아에 오래전에 유입되었지만 많은 신자들이 천주교의 역사와 연변과정에 대하여 거의 모른다.
    천주교가 중국에 유입된지는 천년이 넘고 한국은 이백 여년이 된다. 이처럼 천주교는 중한 양국에서 잘 발전하여 왔지만 사람들에게 천주교의 역사에 대하여 물으면 거의 몰랐다.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2천년 전에 예수가 기독교를 창립하였다. 천주교와 기독교는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는바 천주교도 이 천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천주교의 전입과 발전과정을 거의 몰랐거니와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서조차 모르고 있다.
    천주교는 당조때에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기시와 박해를 많이 받았는데 오늘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지지를 얻고 있지만 너무 긴 과정을 겪었다. 천주교는 다른 민족에 전파되면서 당지의 문화와 충돌하면서도 당지 국민들의 사상과 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천주교가 발전함에 따라 동서방의 문화가 점차 조화되면서 평화공처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많은 오해가 있었고 박해당했지만 지금은 온당하게 발전하고 있다. 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천주교에 가입하고 있다. 한국에서 천주교는 자기의 TV방송국과 출판물을 가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신자들이라면 사람마다 자기의 종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합격된 신도가 될 수가 없다. 하여 본논문에서는 한 보통 신자로 이 방면에 대해 나름대로 검토하기로 한다.
 
키워드: 천주교  중한 역사  사상영향
 
 

 
논문 초록……………………………………………………………1-2
 
제 1 장 서론 ………………………………………………………… 3
2장 본론 ………………………………………………………
2.1역사의 비교 …………………………………………………
2.1.1천주교의 역사 ……………………………………………
2.1.2중국 천주교의 역사 ……………………………………
2.1.3한국 천주교의 역사 ……………………………………
2.1.4중한 양국의 비교 ………………………………………
2.2중,한양국 국민들의 생할과 사상에 끼친 천주교의 영향……………… 3
제3장 결론 ……………………………………………………
 
감사의 말 ……………………………………………………
 
참고문헌 ………………………………………………………

                                        서론
 
Ⅰ. 머 리 말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17~18세기의 전환기적 사유 구조는 물론 19~20세기의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다시 말해 천주교회사 연구는 폐단의 논리를 고수해 오던 성리학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질적인 서양의 종교관념이 수용될 수 있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탈주자학(脫朱子學) 내지 반서학 (反西學)의 입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출발하였다.  
    아울러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사와 천주교회, 신자 집단의 성격,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겪게 된 민족사와 교회사의 관계도 연구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개화기나 광복 운동기에서의 교회와 국가, 현대사 안에서 차지하는 천주교회의 위상 문제도 연구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교회 내적인 문제, 즉 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교회의 정착, 천주교 신앙의 확대과정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특히 이러한 연구는 한국사의 한 분야라기보다는 실천신학의 한 분야로 이해되기도 하였고, 실제로 내용면에서 이러한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점도 있었다. 반면에 교회사를 민족사의 전개과정과 별개인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으며, 때로는 구교론(護敎論)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민족사와 호교론이라는 두 관점을 별개로 생각한다면 천주교회사에 대한 이해는 價値中立的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교회사 연구자들의 고뇌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實證史學의 입장에서 교회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으며, 그 결과 민족사와 함께 교회사를 이해하려는 연구가 하나씩 결실을 맺게 되었다.
   "가톨릭'이라는 말은 전체성, 완전성, 보편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화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가톨릭' 교회, 또는 '천주교'라고 한다." 이는 천주교용어위원회에서 정리한 개념이다.
    한국의 가톨릭 교회는 중국을 통하여 전파되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쓰는  '천주교' 라는 말을 그대로 함께 쓰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이라는 말은 천주교와 그 신자는 물론 교리나 가르침, 사상, 전통, 예법, 단체운동 등을 꾸미는 말로 널리 쓰인다. 그리고 동방 정교회의 작은 분파들에서도 해당 예법의 수좌 주교를 가톨릭 총대주교(KaqolikoV)라고도 한다.
  조선의 학자들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천주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서양에서 들여온 서학서적들을 통해 서구 과학기술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천주교 사상과 한국의 전통 사상은 그 후 2세기 정도 탐색기를 거쳤고 1784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함께 본격적인 조선 천주교가 시작되었다.
   16세기 초 전래된 서구 사상은 17세기 후반 조선의 실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학문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주요 책자는 <한역 서학 서>로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천주교와 서학 을 전할 목적으로 쓰여진 책으로 종교, 윤리, 지리, 천문, 과학, 역사, 기술 등의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한 다른 나라와는 달리 지식인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특징이 있다. 청나라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의 선교사와 사신으로 청나라에 간 조선의 지식인 간의 교제로 로마 가톨릭, 즉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간 것이다. 주로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던 시파가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적인 벽파에서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탄압했다. 즉, “조상을 몰라보는 사람” (무부지자[無父之者])이라는 게 박해의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성을 띤 사건이었다.
    실제로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백서’에서 ‘천주교가 반대 당파를 제거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선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이 수없이 나오는 가혹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청나라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 등 활발히 성장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16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교구는 서울, 대구, 광주의 3개의 관구 안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국 내 각 교구장의 협의회인 한국 천주교 교주회의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있다.
 
                                           본론
 
2.1 역사적 비교
2.1.1 천주교회의 발전약사
   1) 천주교는 공교、로마공교、로마천주교라고도 한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신교와 동정교 그리고 천주교 기독교라고 한다. “천주교”는 16세기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와서 선교를 한후 중국의 원래의 명칭을 빌어 전파되었다. 전설에는 기독교는 예수가 타륵사탄에서 창설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님 탄생의 기원이며 천주교의 기원이다.
   2) 고대 교회(1~604년) :교회 창설부터 311년까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참혹하게 박해하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함으로써 313년에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392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세계의 그리스도교화를 이루게 된다.
  3) 중세기 교회(605~1500년)
  1054년에 콘스탄틴의 총주교가 천주교회의 교황권을 거부하여 동방 정교회(東方 正敎會 그리스 정교회)를 세움으로써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 와 1차 분열이 된다.
  4) 근세기 교회(1500~1965년)
  1517년 천주교 신부인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교황권에 반대하고 이탈하여 개신교 (改新敎) 를 세우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2차 분열된다.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교회의 현대세계에 대한 적응을 목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소집하였다. 교회는 안으로 자각과 밖으로 개방을 목표로 '아조르나멘토' (Aggiornamento 적응-개혁과 쇄신)란 담대한 표어로써 오늘날 세계와 대화 중에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5)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베드로가 첫째 교황에 임명된 후, 현 교황 요한 바울로 2세까지 264대에 걸쳐 천주교회는 사도들로부터 끊임없이 이어 오고 있다. 세계 천주교 현황 (2000년 1월 1일 )신자 수는 10억 4천5백여만명으로서 전 세게 인구의 17.4% 이며 아시아 인구의 3.0%이다.
   1054년, 동서 기독교가 분열하였다. 동파교회는 정교를 자청하고  서파 교회는 공교로 자칭하였다. 천주교와 교황은 독특하고 단일한 교회와 체제를 정식으로 확립하게 되었다.
   중세기 천주교는 서유럽 각국 봉건사회에서 통치지위를 차지한 종교이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 후에 천주교는 유럽의 부분적 국가에서 통치지위를 잃어버렸다. 종교의 개혁운동에 대항하고 자체의 통일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천주교 로마교정에 일계열의 조치를 반종교개혁이라고 하였다.
2.1.2중국에서의 천주교회의 발전사
    천주교는 처음 당조때 중국에 전파되었다가 13세기에 다시 유입되었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 중국에서 천주교가 거의 없어졌다. 16세기에 천주교는 서방 식민주의 물결을 타고 또 중국에 다시 유입되었다.
    1840년에 아편전쟁이 발발하여 중국이 반식민지, 반봉건의 국가가 되면서부터 선교사들이 중국에 육속 들어오면서 천주교가 발전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중국정부의 보호를 받아서 여기저기 교당과 수도원을 짓고   학교와 병원 그리고 고아원을 창설하였는바 이런저런 방법으로 천주교를 재빨리 전파하고 발전시켰다.
    1840년부터 1949년까지 백년 동안의 발전을 통해 300만의 천주교 교우가 있지만 교회의 지도권은 아직도 외국 주교가 장악하고 있다. 중국  천주교는 외국 세력이 지배하는 종교로 되었다.
    50년대에 중국 천주교는 “독립자주적이고 자체로 꾸리는 꾸린다”는  반제애국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십년 대동란중에 천주교는 엄중한 박해를 받아 원기를 손상받았다. 신도 뿐만 아니라 성직자도 박해받았다. 그런데 이런 잔인무도한 박해를 겪었지만 헌신적인 예수의 자민들은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살벌한 시대에도 그들은 모두 자기의 신조를 잘 지키었다. 그처럼 일종의 신앙은 그들에게 용기를 주어 가슴속에 사랑과 힘이 가득차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중국에서 개혁개방을 하게 되어 당과 정부에서 실시한 종교신앙자유정책의 덕분에 중국 천주교는 재빨리 회복되었고 발전하게 되었다. 몇 십년의 발전을 거쳐 중국천주교는  자기의 권리를 찾게 되었고 천주교 애국종교조직 중국 천주교애국회를 성립하였다.
  개혁개방 후 중국 천주교애국회는 희망소학교 70여개. 유치원 30여개,  진료소 200개를 건립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중국천주교의 신도가 530여만이나 된다고 한다. 지금 전국 각지에 교당이 6000동, 대수도원 12개소, 수녀회 70개가 건설되었다.
 
2.1.3 한국 천주교의 역사
1.한국 천주교회 성립의 배경
 1) 대외적 배경 :
  16세기 말엽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문물과  종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던 한국은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마태오 릿치가 쓴 「천주실의」이다. 마태오 릿치는 기존 중국 문화를 바탕으로 해 천주 교 신앙을 전파시키는 선교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도 천주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천주실의」는 진리에 목말라하던 소수의         실학자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17세기까지는 지식과 사회문화운동의    대상이었을 뿐 실천적 신앙의 대상은 아니었다.
2) 대내적 배경 :
  문화의 변동으로 15세기 리씨 조선의 건립이래 조선의 지도 이념이었던 주자학은 18세기 후반에 그 긍정적 역할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는바 이에 지식인들이 성리학의 가치를 대체할 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념적인 면에서 볼 때 서학이란 천주교를 가르키는 것이다.
3) 사회적 배경 :
18세기 후반 신분제 사회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서학 즉     천주교의 평등사상에 기초한 이론은 한국에 천주교가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있는 활력소로 되었다.
2. 교회의 성립
  위에 설명한 배경하에 천주교가 일종의 학문으로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기독교의 인권과 평등사상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 을  얻게 되었다. 이벽, 정약전, 권일신 등 신앙 선조들은 중국의 교리서를 통해 몸소 신앙을 실천하였고, 주어사를 중심으로 강학을 시작하다가 마침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는 이승훈에게 교리를 더 깊이 배워오게   하였다.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교회를 성립하였다. 이벽은 이승훈이 중국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연구한 후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 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양반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전교를 시작하였고, 점차  신분의 차이를 건너뛰게 되었다. 그러나 1789년 윤지충에 의해 조상제사 문제가 생기자 그것으로 인해 갈등이 생긴 양반층들이 떨어져나가고 하층 계급의 서민들속에서 더욱 순수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갔다.
3. 가성직 제도와 성직자 영입 운동
   1786년부터 지도급 신도들은 북경의 교회제도를 본따서 주교직과   사제직을 맡아 교회의 발전을 꾀했다. 이것이 가성직 제도로서 2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이 제도의 타당성을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북경의 주교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우쳐 주었고, 이에 조선교회는      성직자를 조선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1794년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활동했으나,   1801년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조선교회는 그 이후 33년간 성직자가 없이 지내면서 계속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교회부흥운동을 펴나갔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183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16세는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소 주교를 초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소 주교는 조선으로 오는 도중 병사했고,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프랑스인 모방, 샤스땅 신부와 소 주교의 후임인 앵베르 범 주교가 차례로 입국하게 된다.
4. 방인 성직자 배출 
    교우의 수가 늘어나면서 범 주교는 방인 성직자 양성을 꾀한다. 그는 3명의 소년을 마카오에 보내고자 그 적격자를 물색하는 한편, 학생을   가르쳐 짧은 기간에 신부가 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그 결과 1838년에 4명의 장년 신학생을 얻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 때까지 성직자 를 맞아들이기 위해 열두번이나 북경에 왕래한 정약전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 이승훈의 친손이던 29세의 홀아비 이재용(도마)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최방제(프란치스코)의 맏형 최 베드로 등이었다.)
  범 주교는 이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정하상과 이문우는 몇 해 사이에 신품을 받게 될 것 같았으나 이듬해 일어난 기해박해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24일에 방인으로서는 최초로 서품을 받고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하지만 1846년 6월에  체포된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조선의 조정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노력하나 결국 실패한다. 이에 9월 16일에 한강가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된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에 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신부가 된다. 그는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조선에 입국하게 된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전교와 저술활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쓰러져 보름만에 사망하게 된다.
5. 천주교 박해
  천주교는 조선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받게 된다.  그 중에서도 네 차례의 큰 박해가 있었는데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이다. 박해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사상적 원인 - 유교사상과 그리스도교 평등사상의 충돌.
2) 사회적 원인 - 조상 제사문제
3)정치적 원인 - 당파싸움의 방편(남인에 대한 박해)
(1) 신유박해 (1791년)이 때 주문모 신부와 300여명의 신도들이 순교하 였다.
(2)  기해박해 (1839년): 이 때 성직자 세 명과 신도 200명이 순교하게 된다.
(3) 병오박해 (1846년): 이 때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많은 신도들이 순교하게 된다.
  (4) 병인박해 (1866년): 대원군의 탄압으로 9명의 성직자와 8천 여명의 신도들이 순교하게 된다.
6. 오늘의 한국 천주교
    천주교는1886년에 한불통산조약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된다. 이 후 일제시대, 6.25 등을 겪으면서 점차 음지에서 양지로, 간헐적 탄압을 받아 오면서도 꾸준히 발전해 왔다. 한국천주교회는 현재 103명의 성인을 배출하였고, 14개의 교구를 가진 교회로 발전했다. 한국천주교회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순교자들의 피를 바탕으로 이 땅 위에 세워졌다.
2.1.4 한국 천주교의 연구
   한국은 일본을 통해 천주교를 접촉하였지만 전파되지는 못하고 명나라 때까지 중국을 통해 정식으로 전파되었다. 천주교는초기에 양국에서 다 박해를 받았지만 신앙에 대한 신도들의 열성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준엄한 시각에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일부분 사람들이 희생했지만 교회는 장구한 발전을 가져왔다. 이로부터 볼 수 있는바 시대의 발전은 피의 대가를 필요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현세적 입신양명만을 목적으로 하는 유교사상이 성하였다. 겨우 시문이나 지어서 벼슬자리에 앉은 이후 사상적 결함으로 당파 싸움이 노골적으로 계속 되었다.
     한국 실학 운동의 선구자는 이수광(1563~1628)이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348종의 책을 읽고 그 개요를 부문 별로 정리하여1614년 20권으로 된 『지봉유설』이라는 일종의 백과사전을 편찬하 였는데 그 속에 『천주 실의』, 『만국여도』등을 수록하였다. 170여 년이 지나 그의 후손 중에서 이경도, 이순이, 이경언 등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이후 천주교 사상은 백여 년 간 묻혀 있다가 경기도 광주에 숨어살던 이익과 그의 제자 안정복에 의해 다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모두 남인 파의 학자들로 그 제자들 중에는 이가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기양, 이윤하, 황사영, 김범우 등의 천주교 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779년 겨울, 권철신은 앵자산에 있는 주어사의 천진암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천주교리 강학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정약전, 이승훈, 김원성, 이총억 등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출발하여 호랑이가 많은 높은 산을 넘어 100 리를 걸어가 자정 쯤 그 절에 도착하였다.
    이 강학회는 10여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하늘, 세상, 인성 등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탐구하였다. 이 강학회가 끝난 뒤 정약전은 『십계 명가』를, 이벽은 『천주 공경가』를 지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벽은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여 진리를 깨달은 후, 천주님께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그 복음의 씨앗을 전파하기 위하여 만나는 남인 학자들마다 가르쳐 주었다.   

2.2 중한 양국 국민들의 생활과 사상에 끼친 영향
    명조와 청조 시대의 천주교 선교사는 수학가、역사가、천문가、 예술가 그리고 선교사를 겸한 신분으로 중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천주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동시에 서방에 발달한 과학기술을 가져왔다. 그중에서 천문역법、 수학、 농전수리 광학, 건축학、 물리학、 생물학、 철학、 음악、예술 여러 방면에서 중국의 과학기술과 문화발전에 큰 추진력이 되었다. 동시에  선교사들도 서방에게 중국문화를 소개해 주었다.
마테어리치는 <대학> <중용> <론어> 등을 라틴문으로 번역하여 서방에 전파하였다. 그는 서방에 중국 문화를 소개한 첫사람이다. 18세기 30년대 선교사가 조국에 보낸 편지에 중국 문화와 역사 풍속습관을 많이 소개하였 다. 동시에 많은 문학작품를 외국어로 번역하였다. 선교사들은 학문적으로 굶주린 중국사람들에게 풍부한 정신양식을 가져다 주었다. 중국 문화 발전의 석표에 공전의 이색적인 곡선을 그려준 셈이다.
   <중국종교사>에서는 중국 근대발전에 대한 천주교의 공헌에 대해 이렇 게 쓰고 있다. “천주교와 사회 사업이 중국사회문화의 하나로 되고 중국 근현대사회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 천주교는 사람에게 남을 자기 처럼 사랑하는 관용정신을 격려하고 물질향수와 부패타락을 반대하였다.
    전국 정치 협상 회의 위원 중국 천주교 애국회 부주석 류박년 (刘博年)는 중국 천주교회는 사회의 약세군체에 관심과 배려를 많이 돌려 희망소학교. 유치원, 양로원을 자주 도와주었다고 말하였다. 수녀가 병원에 가 환자를 돌보주었다.
    가난한 사람과 허약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우리 천주교의 일관된 종지이다. 천주교는 도박과 폭음과 주정 등 악습을 반대 하였다. 중국 천주교회의 타이름으로 한 실족한 청년은 인생의 방향을 찾은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화해사회 건설에 공헌하고 있다.
 
                                      결론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형성되고 종교는 번성한다. 사람의 능력은 유한 하여 절대자의 도움을 구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들의 기본적 욕구이다. 사회질서의 윤택함과 인간다움의 생활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종교의 기능은 중요하다. 천주교는 중한 양국 역사의 질곡 속에서 민중의 애환을 보듬어 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멘토 역할을 다하였다.  반듯한 사회형성을 위해 천주교는 나름대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천주교는 초기박해를 순교로 극복하며 성장하여 한국의 민주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종교가 종교 간 갈등으로 인한 국론통합의 장애가 되어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 종교갈등은 사회와 종교 간의 간극이 커지고, 종교 간의 이해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종교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기능할 수 있는 사회적·종파적 통합의 의식과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종교 간의 대화와 소통을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 어를 동시에 작동시켜, 종교가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선진 법치주의의 활착을 향도하는 국민의 우군으로 자리매김되어, 항상 종교에 대한 감사함이 넘치는 내일을 기대한다. 종교는 결코 아편이 아니다. 종교는 사회통합을 위한 진한 향기이다. 
    현재 종교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의론도 많고 오도하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천주교에 대해 바로 알게 되면 그들을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오해했던 천주교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던 것을 배움으로 새로운 안목을 가져보자.  
   우리가 바로 알아야 자기 신앙심이 견정해지는게 아닐까? “산의 정상에 오르는데 여러 가지 길이 있듯이, 구원의 길 역시 여러 가지다.” 이것을 세상사람들과 타 종교는 좋게 볼 진 몰라도 성경적으로 위배되는 이 발언과 또 그들의 행태를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사실 상 천주교나 교황, 추기경 등은 많은 이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천주교가 시대의 추세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 통합, 종교 다원주의가 오늘날의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다. 이에 유일하게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기독교 뿐이다. 이 땅에 있는 산의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을지 모르나,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늘나라에 가는 길은 단 하나 뿐이다. 종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인생관, 세계관, 내세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해 주고, 내세에서의 행복과 영원한 삶을 제시해 준다.
  가톨릭 교회는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으로 살펴 본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해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더불어 지혜와 사랑으로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내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 키기를 원한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2항 참조).
    세계의 여러 종교를 볼 때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여 타민족을 배척하는 폐쇄적인 종교는 결코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다. 참 종교는 모든 인류와 우주 전체의 구원을 위한 것이며, 종교를 창시한 이들의 사상 속에 이미 인간의 보편적 염원과 이상을 배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사의 말
 
논문 작성에 많은 지도를 하여 주셨고 심열하여 주신 최균선선생님께 삼가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격려와 응원을 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학우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나에게 자료를 제공해준 왕건공 신부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드립니다.
 
 
참고문헌
 
1.《官府、宗族与天主教--17-19世纪福安乡村教会的历史叙事--宗教与中国社会研究论丛》 张先清 中华书局 2009-5-1
2.《两头蛇——明末清初的第一代天主教徒》黄一农 上海古籍出版社 2006-8-1
3.《中国天主教史人物传》方豪 宗教文化出版社 2007-8-1
4.《中国天主教基础知识》任延黎 宗教文化出版社 2003-9-1
5.《中国天主教评述》顾裕禄

6.《天主教研究论辑》赵建敏 宗教文化出版社 2006-9-1
7.《当代天主教》傅安乐 东方出版社 1996-6-1

8.《한국천주교회사 (,,)》 서울 교회사 연구소 1995  

9.《한국천주교회 창역사 논고》변기영(卞基榮),  광주, 천진안성지, 1997

10.《한국천주교회사의 용위》 주재용(朱在用), 서울 천주교 중앙협의회, 1970

11.《한국천주교회사 연구》 이원순(李元淳), 서울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소, 1986

12.《한국천주교회사(,,)》유홍열(柳洪烈), 서울 천주교출판사, 1962

                                      摘要
 
长篇小说《九云梦》,是朝鲜17世纪小说家金万重(1637—1692)的代表作之一。关于小说的主题问题,学术界一向众说纷纭,莫衷一是。现将其大体归纳为三种不同观点,主要批评了佛教的禁欲主义,歌颂了男女主人公的爱情自由和个性解放。
小说《九云梦》着重反映了儒家“修身齐家、治国平天下”的立身扬名思想。主要体现了富贵功名是一场春梦的人生虚无主义观念。这些观点,都从不同角度触及到了这部长篇所显示的本质的东西,但在对这部长篇真正思想内涵的把握上,显然缺乏全面性、准确性、科学性。本文认为, 《九云梦》有明显的佛教倾向,表达了作者“富贵功名,如一场春梦”的佛教“空观”思想。
 
关键词:金万重 九云梦 富贵功名“空观”思想
초록
장편 소설 <구운몽>은 조선 17 세기 소설가 김만중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소설의 주제 문제에 대해 학술계에서 의론이 분분하여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세가지로 귀납할 수 있다. 주요하게 불교의 금욕 사상을 비평한 것, 남녀 주인공의 연애자유와 개성해방을 찬양하였다는 것 등이다.  
<구운몽>은 착중하여 유가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사상을 반영 하고 있다. 주요하게는 부귀공명은 일장춘몽이라는 인생허무주의 관념을 체현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모두 부동한 각도에 이 장편소설에서 현시된  본질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장편 소설에 담긴 진정한 사상내함을 파악하는 데서 전면성, 정황성, 과학성 등 면에서 부족하다. 본논문은 <구운몽>에는 분명히 불교경향이 엿보이고 작자의 "부귀공명은 일장춘몽 같다(富貴功名,如一場春夢) "의 불교의  "공관(空观)" 사상이 체현되고 있다고 본다. 이 문제가 본논문에서  필자가 천명하려는 골자이다.
키워드: 김만중 구운몽 부귀공명 공관사상
 
목차
 
초록 …………………………………………………………………………………2
1 서론……………………………………………………………………………… 4
2 본론……………………………………………………………………………… 5
2.1 김만중의 생애 및 창작동기………………………………………………… 5
2.1.1 김만중의 생애……………………………………………………………… 5
2.1.2 김만중의 창작동기………………………………………………………… 5
2.2 대표작<구운몽>의 줄거리…………………………………………………  7
2.3 이해와 감상 ……………………………………………………………………9
2.4 주제와 사상적 배경………………………………………………………… 10
2.5 내용 연구 …………………………………………………………………… 12
2.6구운몽적 환상의 의미 ………………………………………………………14
3 결론……………………………………………………………………………… 16
감사의 말 ………………………………………………………………………… 17
참고문현…………………………………………………………………………… 18
 
1 서론
1.1 “구운몽”연구사
구운몽은 환상설화와 소설의 완결편으로서, 불교사상을 허구적으로 극대화한 독보 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고전문학의 한 정점을 점령한다고 할 수 있으 며 그에 따라 구운몽은 많은 고전소설 가운데에서도 가장 풍성한 연구량을 생산해 내었고, 더불어 그만큼의 다양한 연구 방법과 논란의 갈래도 만들어 내었다. 그 가운데서도 구운몽의 연구사는 거의가 구운몽이 지닌 사상이 무엇이냐고 따져온 것이라고 할 만큼 사상 문제에 직결되어 왔다.
애초에 구운몽에 대한 사상풀이는 유,불,도(儒,佛,道) 삼교사상의 화합내지 혼합설이 등장하였고 이가원(李家源), 김기동(金起東)에 의해 불교사상으로 좁혀져 논의되다가 정규동(鄭銈東)에 의해 불교사상의 공관(空观)으로 훨씬 좁혀져 논의 되어 이제는 대승불교(大乘佛教)의 중심인 금강경(金剛經)의 공관(空觀)으로 굳어진 추세이다.
구운몽에 대한 학계의 주제관의 갈래는 대체로 불교적인 주제로 보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 그리고 불교적인 주제로 보는 측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리고 非佛敎的인 主題라고 보는 측은 제각기 달라서 “꿈같은 세계를 지양한 참세계 즉 본질적인 세계에 대한 확신을 준 것” 이라고 학자도 있고, 성현경교수는 “불교사상이 근저에 있기는 하지만 유교적 부귀공명을 지향한 것” 이라고 보았으며 김병국교수는 심리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재생체험의 생생한 경험 자체가 주제”이 바로 구운몽의 주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구운몽의 주제는 분명 불교 사상과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불교 교리의 핵심이랄 수 있는 금강경의 공사상(空思想)이 바로 그 주제라고 보는 정규복(丁奎福)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며 본논문의 논점을 나름대로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1.2 구운몽 연구 목적과 의의
서포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은 한국 고전 소설 중에서도 커다란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연구사의 뿌리가 다른 고전소설 작품들에 비해서 깊은 편이다. 또한 현재에도 수많은 연구자들이 다각적으로 접근하여, 구운몽 속에 담겨진 다양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각적인 연구가 구운몽에 대한 해석의 견해를 다양하게 함으로써 상충된 견해가 나타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즉, 아직도 구운몽에 대한 연구는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견해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연구 방법론의 선택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로는 기존의 견해 중 하나를 선택해서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기존의 학자들이 연구해왔던 견해에 동조하는 것으로, 구운몽을 해석하는데 있어 자신만의 뚜렷한 해석 방법을 얻기 어렵고 자칫하면 작품이 갖고 있는 다양한 의미 중 일부만 보게 된다는 점에서 나로선 취하기 어렵다.
또 다른 방법은 기존의 연구들을 부정하거나 기존의 연구에 각주를 다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독창적인 해석과 기존의 연구보다 더욱 깊이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러한 견해들이 자칫하면 단순히 부정을 위한 부정이 될 수 있으며 다른 견해들과의 차이를 뚜렷이 보일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기존의 다양한 견해들이 구운몽의 어떠한 특성들에 주목했는가를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방법론적 접근은 작품과 연구들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또한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작품에서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다는 점은 이러한 작업을 더욱 필요하게 만든다. 이런 작업들이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스스로 ꡔ구운몽ꡕ과 그간의 견해들 사이에 미약하지만 새로운 징검다리를 놓아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본논문의 성격을 구운몽과 그간의 연구들 사이를 잇는 작업으로 규정지었다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은 기존의 연구들 중 어떤 부분들과 그 관계망을 만들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필자는 구운몽이 구현하고 있는 세계관이 어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구운몽”은 다양한 사상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상관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 혹은 서포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창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구현하고 있는 세계관이 다르게 나타난다.
하여 기존의 연구들 역시 이러한 측면에서 상당한 혼선을 빚고 있다. 따라서 작품에 나타난 세계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 작품의 원전 비평 및 비교 문학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비교의 방법, 구조주의 비평방법으로 저작 시기 논증, 구운몽의 표기 문자론, 그리고 비교 문학적 연구를 검토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본논문의 집필을 시도하고자 한다.
 구운몽의 인생 무상은 인생이 무상하고 허무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허무 하니까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영웅 소설과 몽유 소설을 변형 시켜 결합한 소설이다. 기본 구도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 속에서 이루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 속의 일이 허망한 한바탕의 꿈인 것을 깨닫는다. '현실 - 꿈 - 현실'의 과정을 그리고 있으나 양소유가 8 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독특하게 꾸미고 있고, 8 명의 여인들이 각기 개성적으로 행동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 등장 인물들의 심리 상태 등을 우아하고 품위 있는 문체를 통해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지은이의 창작력이 돋보인다. 유교, 도교, 불교의 화합을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소설적 흥미는 물론, 사상적 깊이까지 더하고 있어 지식 계층의 독자를 확보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본론
2.1김만중의 생애 및 창작동기
2.1.1김만중의 생애
김만중의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아버지 익겸(益謙)은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부수찬 (副修撰)이 되고 헌납 (獻納)· 사서(司書)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任用,录用)되어 대제학 (大提学)·대사헌(大司宪)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被。。。放开)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没落为庶民) 그도 왕을 모욕 했다는 죄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이렇게 유배길에 자주 오른 것은 그의 집안이 서인의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치열한 당쟁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현종초에 시작된 예송(禮訟)에 뒤이어 경신환국·기사환국 등 정치권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1]
2.1.2 창작 동기
가) 개인적 동기 :
  노모(老母)를 위로하기 위해 창작.(김만중의 어머니는 청춘과부로서 가난한 살림살이를 이끌어 나가면서도 오직 두자 식에 마음을 붙여 정성껏 길러 여생을 즐기려 했는데, 그 장자 만기를 잃어버리고 또 만중조차 유배지로 자주 귀향가게 되어 허무한 삶을 한탄하며 살았다. 김만중은 그 같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즐겁게 하는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고, 이 작품 역시 작가 자신의 생명의 원천인 그의 어머니를 향하여 내면화된 결과라 하겠다. 즉 이 작품은 어머니를 위해서 쓰면서 어머님께 지금 현실의 고통은 한 순간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싶었고, 한편으로 삶의 유한성과 허망함을 극복하는 영생의 길을 갈망하여 자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
나) 문학적 동기 :
  한국인은 한국어(韓國語)로 작품을 써야 한다는 '민족자주문학론'을 내세운 그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창작에 임함
사상 : 유·불·선 사상이 혼합되었으나 불교사상이 주가 되고, 김만중이 바라던 이상의 세계를 묘사  

 

  1. 불교적인 부분: 핵심적 주제를 이루는 사상으로 유복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부친의 얼굴조차 못한 것을 전생의 죄악이라고 보는 데는 인과응보사상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결말 부분에서의 구절 "보살 대도를 얻어 모두 극락세계로 갔더라" 라는 것에서 불교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유교적인 부분: 입신양명, 부귀공명 (당시 양반 사회의 이상적 인생관)은 자기를 길러 준 어머니의 은혜와 스스로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있는 데는 유교적인 효사상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일부다처제의 모순을 안고 있으며, 조선조 귀족 사회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
3) 도교적인 부분: 작품의 비현실적 내용을 이루는 신선 사상은 부귀 영화 끝의 허무감을 그린 것은 도교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2.2 “구운몽” 의 문본(文本) 연구
2.2. 1소설의 경개
내용은 당(唐)나라 때 천축(天竺)으로부터 육관 대사(六觀大師)라는 고승(高僧)이 중국에 와서 큰 절을 세우고 제자를 모아 불도(佛道)를 강론(講論)한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가 성진(性眞)이었다. 어느날 성진은 대사의 심부름으로 용궁에 가게 되었는데, 용왕의 융숭한 대접에 술을 몇 잔 마시고 돌아온다. 한편 선녀 위진군(魏眞君)은 팔선녀(八仙女)를 대사에게 보내 약간의 보물을 선사한다. 길 중간에서 팔선녀와 성진이 만나게 되어 서로 희롱하다 돌아온다.
절에 돌아온 성진은 선녀들을 그리워하며 속세의 부귀 영화만 생각한다. 끝내 그는 죄를 얻어 지옥에 떨어지고 다시 인간 세상에 환생하여 양소유(楊少遊)가 된다. 한편 팔선녀도 같은 죄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각각 다시 세상에 환생한다. 양소유는 차례로 그들 여덟 여인과 인연을 맺게 된다. 드디어 벼슬은 승상에 이르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린 양소유의 화려한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회남 수주현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난 성진[양소유(楊少遊)]은 15세에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나 혼약하고, 난을 피해 있다가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중 낙양의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고, 경사에 이르러 거문고를 타는 여자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정경패'를 만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경패의 시비인 '가춘옥'과도 인연을 맺는다.
하북의 왕이 역모하려 아니 양소유는 절도사로 나가 이를 다스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인 줄 알고 만난 여자가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상경하여 예부 상서가 된 양소유는 황제의 누이인 '난양 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인연으로 부마로 간택이 되는데.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2].
토번왕이 쳐들어 오자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 양소유는 토번왕이 보낸 여자 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고, 백룡담에서는 용왕의 딸인 '백릉파'를 도와 주어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에 난양 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을 이루지 못하여 실심한 정경패를 만나 보고 그 인물에 감복하여 제 1 공주인 '영양 공주'를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의 벼슬에 오르고, 영양 공주 난양 공주 2처와 진채봉, 계섬월, 가춘옥, 적경홍, 심요연, 백릉파의 6첩을 거느리게 된다.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아홉'이라는 숫자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아 이제는 승상의 벼슬에서도 물러나 한가히 그의 여생을 즐기던 양소유는 어느 가을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리고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문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이때 한 노승을 만난다. 때마침 찾아온 어느 고승에게 불도(佛道)에 귀의할 것을 말하자 그 도승은 쾌히 승낙하고 짚고 온 지팡이로 난간을 두드린다. 그러자 모든 것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에 백팔 염주를 들고 있고 까칠까칠한 중의 머리를 한 자기(성진) 뿐이었다.
당황한 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귀 영화는 하룻밤 꿈이었고 자기는 분명히 연화 도량(蓮花道場)의 성진이었다. 꿈을 깬 성진은 황망히 대사 앞에 뛰어가 엎드린다. 팔선녀도 이어 들어와 제자되기를 청한다. 후에 대사는 도(道)를 성진에게 물리고 천축으로 돌아가고 팔선녀는 성진이 앞에서 계속 도를 닦아 후에 아홉 사람은 모두 극락 세계로 갔다고 한다.
소설은 이원적 환몽 구조를 지닌 일대기 형식, 곧 액자소설(환몽세계 부분) 현실 세계 → 환몽세계 → 현실복귀이다. 이처럼   '구운몽'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조신 설화와 그 구조를 같이 하고 있다. 성진이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해서 회의를 품고 형이하학적 세계로 내려가 온갖 욕망을 성취하였으나, 그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고 형이상학적 세계로 복귀하는 꿈의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현실과 꿈의 세계를 이중(二重)으로 그리고 있는 이 구조는 결국 인생의 무상함, 삶의 덧없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작품 구조 상 꿈의 세계로 되어 있는 양소유의 일생은 오히려 현실적이고, 현실 세계로 되어 있는 선계(仙界)는 오히려 신비로운 꿈의 세계이다.


현실 세계(선계)  
성진과 8선녀: 천상 세계 수도자로서의 의지(불교적). 8선녀에 미혹되어 불도 수련에 회의함 파계(天上)
환몽 세계(인간계)  
양소유와 8부인: 지상 세계 영웅으로서의 생애(유교적), 세속적 욕망의 성취 단계.  입신 양명, 일부다처의 향락적 생활 환생(地上)
현실 세계로 복귀(형이상학적 세계)  
 미혹과 환몽을 거쳐 대각(大覺)의 경지로 이룸 각성(天上)
① 1 단계 :
  육관 대사가 제자 5, 6백 명을 거느리고 서역천축국으로부터 형산(衡山)의 연화봉(蓮華 峰)에 수도할 즈음에 남악(南岳) 위부인(魏夫人)이 상제의 명에 따라 선동 옥녀를 거느리고 머문다. 그 때 수부에 갔다가 산으로 돌아오던 육관 대사의 수제자와 위부인의 명을 받고 육관 대사에게 문안드리고 돌아가던 팔 선녀가 만나게 된다. 그 후 여덟 개의 명주로서 인연을 맺고 산문으로 돌아온 성진이 팔 선녀와 인간 세계를 동경한 때문에 육관 대사의 노여움을 사서 중국 회남도(淮南道) 수주현(秀洲縣)의 양씨집에 환생하기까지의 과정.
② 2 단계: 속세에 환생한 성진, 즉 양 소윤는 과거에 응시하려고 가는 길목에서 규수 진채봉을 만나 혼인하려 했으나 구사량의 수해로 진소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노모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도인 두연사에게 혼처를 부탁한다. 소유는 그곳에 찾아가서 제일부인 정경패와 그의 몸종 가춘운을 맞는다. 그러니까 팔 선녀 중 네 선녀가 인간으로서 양소유를 만나기까지의 행동 단계.
③ 3 단계: 양소유가 사신, 원수로 활약하면서 팔 선녀를 모두 만나게 되기까지의 행동 단계.
④ 4 단계: 양소유가 승상이 되어 팔 선녀 중 여섯 명은 첩이 되고 두 공주는 부인이 되어 모두 궁중에 모여 단란한 세월을 보내는 시기.
⑤ 5 단계: 인간 양소유가 속세에서 불도로 소생하여 팔 선녀와 더불어 다시 극락 세계로 귀의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데까지. 대부분의 우리 나라 고대소설이 한결같이 그렇듯이 "구운몽"도 중국을 무대로 했다. 하지만 "구운몽"의 세계는 당나라처럼 광활한 무대가 아니며 그 많은 등장 인물들의 활동을 자유자재로 표현 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그 무대가 선계와 인간 세계 등 두 세계에 걸쳐 있어서 더욱 흥미롭다. 흡사 단테의 "신곡"처럼 이차원의 세계를 일차원의 세계로 구성시키고 있는 구성의 묘를 거두고 있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언뜻 보면 이율배반적인 것 같으면서도 수긍되는 점이 많고, 산만한 듯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작가적 역량을 과시하는 점이라 하겠다.  
2.2.2 이해와 감상
조선 숙종 때 김만중 ( 金萬重 )이 지은 고전소설. 이본에 따라 1책부터 4책까지 분량이 다양하다. 1725년(乙巳年, 영조 1)에 간행된 금성판(錦城板) 한문목판본을 비롯하여 국문방각본· 국문필사본 · 국문활자본· 한문필사본·한문현토본 등 50여 종이 넘는 많은 이본이 전한다. 김만중은 노론 벌열층(閥閱層)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당시로서는 이단시되던 불교나 패서(稗書)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이 소설을 지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작자의 종손인 춘택(春澤)은 김만중이 속언(俗言)으로 많은 소설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남정기 南征記 〉 만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규경 ( 李圭景 )의 ≪ 오주연문장전산고 ≫ 의 〈 소설변증설 小說辨證說 〉 에 의하면,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어머니 윤씨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하룻밤 사이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어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우에도 어머니 를 위하여 속성으로 지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규경은 특히 이 작품이 김만중이 귀양갔을 때 지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었다. 즉 그가 장희빈(張嬉嬪)의 아들 균( 悠 )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선천에 귀양간 숙종 14년(1688)인지, 아니면 장희빈이 인현왕후 ( 仁顯王后 ) 대신 왕후로 책봉된 기사환국으로 숙종 15년에 남해로 귀양갔을 때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근래에 ≪ 서포연보 西浦年譜 ≫ (일본 天理大學 소장)가 출현함으로써 일단 선천 귀양시기로 확실해지고 그 완성은 남해 귀양시기로 추정된다. 이재 ( 李縡 )가 〈 구운몽 > 의 대지(大旨)를 인생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는 데 둔 바와 같이 〈 구운몽 〉 의 주제는 역시 대승불교의 중심인 금강경의 ‘ 공(空) ’ 에 있다. 공은 표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역설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 구운몽 〉은 ≪ 금강경 ≫ 이 소설화 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2.2.3 주제와 사상적 배경
인간의 부귀공명(富貴功名)이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 즉 이는 불교적인 '제행무상관(諸行無常觀)'에서 온 것이므로 이 소설은 또한 인생의 무상함을 독자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구운몽"은 불교 사상을 중심으로 한 불교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소설의 주요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은 불교 사상만이 아니라 유, 불, 선(儒佛仙)사상의 융합 상태를 이루고 있다.
그가 유복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부친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것을 전생의 적악이라고 보는 데는 불교적인 인과응보 사상이 깃들어 있고, 자기를 길러 준 어머니의 은혜와 스스로 효도를 다하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데는 유교적인 효 사상이 있으며 영화 끝의 허무를 그린 것은 도교 사상의 영향이라 하겠다. 유가적인 부귀영화는 사실상 김만중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상이었고, 선망의 적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욕망이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이상의 삶을 갈망한 끝에 한바탕 꿈을 꾸어 본 것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 보니 그것은 분명히 꿈이었고 따라서 허무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처해 있던 환경과 현실이란 확실히 그 꿈과는 같지 않았던 것이다.[3]
여기에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고, 스스로의 처지는 더욱 허망함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에 몸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그는 종교심을 발휘하여 평소에 잘 이해되고 있던 불교에라도 귀의해 볼까 하는 심정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인간 생명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이상의 낙원이란 과연 없는 것일까? 김만중은 이와 같이 꿈의 세계보다도 더 이상적인 세계를 갈망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극락 세계를 동경하여 천상으로의 영생의 길을 떠났다. 이렇게 볼 때 "구운몽"은 불교 위주의 소설이기도 하지만 유교적인 이상세계는 언제나 서포의 염두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설에는 또한 여성들의 생활 해방을 갈구하는 구절도 있지만 여자들 스스로가 일부 다처주의를 자인하는 언사가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그 당시 유교 사회의 귀족이나 양반들의 생활 이념에 따르는 일부다처주의의 옹호가 어느 만큼 깃들어 있어 보인다.
2.2.4 구운몽적 환상의 의미
  인간 의식의 내부에 소용돌이치는 상충적 갈등, 즉 욕망의 내향 운동과 외향 운동의 부단한 반복은,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 환희와 고뇌, 광명과 암흑, 천국과 지옥 등 모든 상충적 이미지 패턴을 낳는데 이 순간에 느끼는 좌절과 상실의 심연 에서 재생하는 이미지로부터 인간은 신(神, God)의 모습을 창안하였다. 서양에 있어 서, 신의 이미지는 이러한 인간 욕망의 상충적 양면성의 중간에 서서, 이를 화해시 키는 조정자 내지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양에 있어서는 수 천 년 동안이나 이 재생 또는 구원의 이론이, 어떤 조정자로서의 인격을 심상화(心像化)하지 않고, 오직 인간 자신이 스스로 희구하는 '전인격으로서의 자기' 속에 통합시키려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구운몽에서 성진의 마음 속에 소용돌이친 번뇌는 그 양극성을 화해할 인격적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는 오로지 자기 실현에의 노력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 전체의 내용처럼, 인생은 어떻게 보면 한순간의 꿈과 같을 수도 있다.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덧없듯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 단순히 무더운 여름날 잠시 눈 붙이는 오침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꿈과 인생은 서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꿈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병도 있다고 하던데, 어쩌면 그 병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름대로 명확하게 꿈과 현실을 구별하고 있는 우리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것이고, 꿈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와 정반대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실제의 인물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꿈이 아닌 것이냐`. 이러한 대사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꿈이 현실의 바탕이라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무의식적으로 꿈에 나온다는 설, 현실이 꿈의 바탕이 된다는 설도 있다.
 
                                      3 결론
 
이 작품의 기본설정은 주인공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꿈 속에서 실현 하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 꿈 속의 일이 허망한 한바탕의 꿈인 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김시습의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같은 몽유소설(夢遊小說)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꿈 속에서 이룬 욕망성취가 오히려 허망하고, 꿈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화합이 이루어진다고 한 점은 다른 몽유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몽유소설과는 달리 꿈 속의 주인공인 양소유의 삶이 ‘영웅의 일생’에 따라 전개되는데, 투쟁이 약화되는 대신 남녀의 만남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은 영웅 소설의 일반적인 양상과는 거리가 있다. 결국, 〈구운몽〉은 몽유소설과 영웅소설을 변형시켜 결합한 작품이라 하겠다.
한편, 〈구운몽〉은 현실-꿈-현실로 바뀌는 과정이나 양소유가 8명의 여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미있게 꾸며 독자를 사로잡았다. 또한, 8명의 여인이 각기 개성을 갖추도록 배려를 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환경·인물·심리를 우아하고 품위있는 문체를 활용하여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것에서 작자의 뛰어난 창작력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소설적 흥미를 유지하고, 품격을 높이며, 사상적 깊이를 가지도록 하여 유식한 계층까지도 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구운몽〉은 이후의 소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구운몽〉자체를 늘리거나 축소하여 개작한 작품이 계속 나왔을 뿐만 아니라, 〈구운몽〉과 같은 설정을 하면서 다른 사건을 결합시킨 작품들도 대거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구운몽〉은 고소설 창작에 전형적인 모범을 제시하여 소설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어, 〈춘향전〉과 더불어 고소설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감사의 말
 
  논문 작성에 많은 지도를 하여 주셨고 심열하여 주신 최균선선생님께 삼가 감사 의 말씀을 올리며 격려와 응원을 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학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올립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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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丁奎福 韓國古小說史의 硏究 韓國硏究院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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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丁奎福 九雲夢의 比較文學的 考察高麗大學校論文集 16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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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국, <구운몽>저작 시기 변증, 1997
정규복, 구운몽연구, 고려대출판부, 1974
박하철, 구운몽 연구:사상과 구조 및 교육방안을 중심으로, 인하대 교육대학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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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金一烈 九雲夢과 雲英傳의 比較硏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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