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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시어의 예술미
2015년 12월 19일 16시 39분  조회:4639  추천:1  작성자: 최균선
                               시와 시어의 예술미
 
                                       진 언
 
   대저, 시라하면 주로 그 형식적측면을 가리켜 문학장르로서의 시작품을 떠올리고 그 작품이 주는 예술적감동의 내적인 시적정감 및 시적요소를 론의하게 된다. 일정한 형식에 의하여 통합된 언어의 메아리, 리듬, 조화 등의 음악적(청각적) 요소와 언어에 의한 이미지, 회화적(시각적) 요소에 의해서 독자의 감각이나 감정 또는 그 상상력에 작용하며 깊은 감명이나 고양된 존재감을 제공하는 예술가치가 곧 시의 가치이다.
   앨런 포의 "시란 미의 운율적인 창조이다"라는 말이나 아놀드의 "시는 인생의 비평이다"이라는 말이나 폴 발레리의 "시는 절규, 눈물, 애무, 키스, 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명하고자 하는것, 또 물체가 그 외견상의 생명이나 가상된 의지로써 표명하고자 하는 그런것, 또는 그런것을 절주있는 언어로 표현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라고 내린 정의는 정당하면서도 보편성을 가진다. 이러한 시이므로 그 감화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는데는 불가피적으로 언어의 선택, 시행배렬, 구성이 요구된다.
   폴 발레리는 이런 의미에서의 시와 산문의 차이를 전자를 무용에, 후자를 보행에 비유했다. 산문은 보행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명확한 하나의 대상을 가지며 그 대상을 향한 하나의 행동이므로 그 대상에 도달하는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비해 시는 무용과 마찬가지로 행위의 한 체계이기는 하나 오히려 그 행위 자체를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고 정의하고있다. 즉 시는 무용과 마찬가지로 어딘가를 목표로 삼고 나아가는것이 아니라 하나의 황홀한 상태, 생명의 충일감을 목적으로 하는것이라는 뜻이다.
   언어적요소의 기능에는 발신에 초점을 두는 정서적기능, 수신에 초점을 두는 사역적기능, 관련된 상황에 초점을 두는 지시적기능, 전언자체에 초점을 두는 시적기능, 접촉에 초점을 두는 친교적기능, 신호체계에 초점을 두는 메타언어(다른 언어를 기술 하거나 분석하는데 쓰는 언어)적기능으로 나누어 고찰된다. 시적언어란 시에만 국한된 언어가 아니라 일상인의 어법과 다른 시인의 어법을 의미할뿐이다.
   싸르트르에 따르면 산문작가는 도구로서의 언어를 사용하며 시인은 사물로서 언어를 사용한다. 발레리가 도구로서의 언어는 보행이고 사물로서의 언어는 무용에 해당한다고 했듯이 후자에선 비실제적효용성 즉 심미성이 강조되는바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시인이 창조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의미인 그러한 세계이다. 즉 어떤 객관적상관물을 지시하는게 아니라 시인의 애증, 분노, 고뇌, 기쁨, 비판 등을 그대로 담아낸 세계이다. 그 세계에 시인의 령혼이 살아숨쉰다.
   시어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론의대상이 된것은 워즈워즈의《서정민요집》재판서문에서이다. 워즈워즈는 시의 언어는 과연 본질적으로 산문의 언어와 다른것인가? 라고 질의하였다. 시에는 반드시 시에만 쓰일수 있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개념이 그로부터 거부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의 정서를 전달할수 있는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좋다는 주장이 제기된것이다. 그런데 코울리지에 의하여 오유로 인정되여 자기의 저서《문학평전》에서 많은 편폭을 들여 교정하려 시도했다.
   소쉬르가 해명했듯이 모든 언어기호는 소리심성과 개념으로 나뉘여진다. 량자는 어떤 필연성은 없지만 동전의 앞뒤와 같은 관계로 존재한다. 전자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 지각되며 후자는 감각으로는 지각할수 없는 언어기호의 요소 즉 비물질적인 의 미에 해당한다. 무카졸브스끼는 전자를 소리요소, 후자를 의미요소로 명명하였다. 언어의 비물질성인 의미를 전달하는 시적언어가 노리는것은 시가 표현하는 내용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언어 그 자체가 야기하는 미적쾌락이다.
   특히 시적언어의 예술적특성은 언어의 미적기능에서 비롯된다. 시는 하나의 새 구조이며 시적구조는 모종 특정된 심미적효과를 이루는 양식이다. 시어는 시라는 구조속에서 혹은 유기적통일된 체계속에서 심상, 상징, 운률, 수사 등 수법들과 긴밀하 게 조화되면서 비로소 시어가 된다. 하다면 시적언어의 특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무카졸브스끼는 시어의 특성을 총체적언어체계속에서의 위치중심으로 해명한다. 한마디로 시적언어의 특성은 미적기능을 지향한다는 말로 요약하는데 결코 실제적 내용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포용의 원리를 따라 운행된다는 설명이 된다.
    말하자면 시인은 의도의 통일성에 지배되는 총체적어법을 사용하며 기호와 지시물의 관계는 작품이 재현하는 보다높은 질서로서의 어법속에 포섭되며 객관적현실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 시속에서 독자들의 리해력에 힘입어 류추되고 독자들의 의지는 하나의 실존경험이 된다. 이를테면 시인이란 언제나 집단의 일부이기에 현실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궁극적으로 집단적가치체계와 어떤 형태로든 조화되여야 함은 자명하다. 그런 조화속에서만 시는 전체사회가 창조하는 세계적인식의 방법에 영향준다.
   시적언어의 본질은 정서적언어, 곧 화자의 감정적표시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은 야꼽슨의 견해처럼 모든 시는 감탄사로 환원되여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리해하면 근사할것이다. 시적언어와 정서적언어는 시의 경우, 론리적언어와는 다른 공통점을 가 지고있기때문이다. 주정시든, 주지시든, 시적언어의 구조는 력동적구조로 되여진다. 무카졸브에게서도 시적언어의 구조는 소리양상과 의미양상으로 되고있다. 시는 읽어서 좋은것만 아니라 읊어서 좋은것이라는 결론이 지어진다.
   이는 시어의 애매성에서 비롯되는 사유능력의 고험이라 할수 있다. 시어의 애매성에 앞서 애매성은 언어학적견지에서도 제기되는 문제이다. 언어의 애매성에는 음성적애매성, 문법적애매성, 어휘적애매성에서 규명된다. 현대시에서 리해력문제가 제기되게 한 요인은 어휘조합의 애매함 혹은 모호성이다. 이 시점에서 현대시해석의 원리란 전문리론이 등장하였다. 말하자면 의미해석이다.
   시를 산문적으로 풀어서 말할수 없는 원인은 시의 의미의 독특성때문이다. 재래로 사람들은 운문의 감미로움을 규칙적인 언어조합 내지는 배렬에서 비롯되는 음악성에서 느끼려했다. 물론 이는 전통시에 한한것이다. 그러나 현대적관점에서는 가장 훌륭한 운문들은 대체로 불규칙성에 있다고 여긴다. 하여 운문이 률격적류형에 일치되여야 한다는 전통관념이 시를 바람직하게 읽는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시의 리듬이 체현하는 불규칙성을 지나치게 무시함으로써 시를 기계적으로 읽게 하고 따라서 어떤 률격의 형태와 조화되지 않은 시에 대해 생경함을 느끼게 하며 전통적인 흔상기준으로는 옳게 파악하며 읽을수 없게 만든다. 사실 시의 문체의 주요한 비밀은 형식과 의미의 밀접한 상호협동에 있는것이다. 그리하여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이란 명제는 아무리 격진적인 현대파라도 부인하지 못할만큼 불가피하며 시를 지음에서 자연스러운 불문률이 되고있다.
   기실 형태가 가장 요긴한것이 아닌것으로서 시형식에 하나의 방편일뿐이다. 시의 운률이 시적의미에 의존하지 않지만 시적의미의 예술적전달에는 백번도 더 유익하다. 그런데 현대시에서는 곧잘 잊혀지는듯싶다. 여기서 시에 대한 평범한 반응문제가 나선다. 몽롱시에서 시의 의미라는 천속에서 날줄이나 씨줄을 찾기 힘겨우며 더구나 그것으로 이미지를 감상하려는 발상은 불가능하며 무모한 작업이 된다.    
   그런데 아무리 낯설게 한 시라해도 시적언어에 고유한 사물성을 무시하지는 못한다. 현대시에서도 사물과 언어사이의 문제이기때문이다. 이는 시와 신념문제 혹은 진지성의 문제를 형성시킨다. 전통시나 현대시냐를 정서적측면과 지성적측면에서 갈라볼수 있지만 시에서 중요한것은 사상이 독자들의 감정과 태동에 야기하는 효과성에 있다는것은 량자가 공인하는바의 인소이다. 량자 모두에 시적신념은 지적, 정서적신념의 혼합물이여야 발휘되는 예술적마력이 어떤 시적경지에 이르기때문이다.
   전통시이든 현대시이든 진정 훌륭한 한수의 시는 자률적인 정신세계이다. 그만큼 독자에게는 하나의 해석의 지평으로 다가온다. 해석의 지평선에 독자가 알려고 하는 일체의것이 들어있을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들어있지 않을수도 있다. 현대시는 전통시보다 독자가 시를 임의대로 해석할수 있는 공간을 더 넓게 제공한다. 그러나 시인의 립장에서는 자기 시에서 내적인 수미일관성의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가 상호배반적이고 혼란된 요소들을 내포하는 상황에서 하나의 단일하고 지배적인 장치속에 종속시키는게 바람직하다는것이다. 시는 수미일관성의 세계이기때문이다.
   워즈워즈는“고요속에 회상되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류출”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이 시점에서 본다면 시가 독자들에게 미적희열을 주는것은 독자가 아는것을 례증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독자가 모르는것을 새롭게 조명하기때문인가? 전자는 현실을 그림처럼 재현한 세계요 후자는 탐구를 남겨둔 미지의 세계이다. 이면에서 전통시는 상상력이 아니라 규칙과 원리에 얽매인 교묘한 글재주에 의해 그려진 정서세계이며 더 나아가서 말하면 어디까지나 시인의 감정이나 정조의 세계라고 말할수 있다.
   쉘리는 독자를 보이지 않는 음악의 멜로디에 매혹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어둠속에 앉아 향기로운 목소리로 자신의 고독을 즐기기 위하여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워즈워즈는 시인이 시인들만을 위해 시를 쓰지 않고 인류를 위해서 쓴다고했다. 그 리유는 시가 가치로운 목적을 지향하기때문이였다. 일컬어 자발성의 시론, 독백의 시론, 자아표현의 시론을 모두 시를 정서의 표현이라는 관점속에 포괄시켜 시를 각이하게 론의하고 있지만 시는 시인의 내면적정서를 표현한다는 견해로 합의된다.
   현대시만이 아니라 전통시에서도 언어와 사물이 뒤범벅이 될 때, 언어가 사물이 되고 사물이 언어가 되는 이중적인 동일화가 일어난다. 이때 사물을 인간주체의 의식이 어찌할수 없고 도리어 인간의 의식주체가 사물의 힘에 올라탐으로써 성립되는 것처럼 언어 역시 인간주체의 의식에 의한것이 아니라 되돌아와 인간의 의식주체가 언어의 힘에 의해 구성된다고 한다. 그럴때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것이 아니라 시적상 관물이 말하고 흐느끼고 분노하고 몸부림치는것로 된다.
   시에는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이미지가 사용되면서 공감각적 이미지로 발전한다. 시적언어는 이미지 자체로 변함으로써 더 의미롭다. 주정시인은 사물의 미적양태에 도취되지만 주지시인은 시적대상에서 시작하는 말의 조합에 도취된다. 그런데 이런 도취가 어디까지 진실이며 어디까지 정서이고 사상경지인가? 이게 난제이다.
   거듭 인용하거니와 벨린쓰기는 말하고있다. “위대한 시인은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일반에 대하여, 인류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은 시인의 슬픔에서 자신의 슬픔을 알게 되며 그의 정신에서 자기 정신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에게서 시인뿐만아니라 인간 즉 인류의 견지에서 본 자기 형제를 본다.”라고, 일체 전통을 부정하는 현대시이든“고루한”경물시이든 시에 나타난 자아의식으로 통하는 예술작업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우리 인생에도 공통분모가 없을수 없다. 내가 살아가고있는 인생과 엇비슷한 삶을 살아가기에 공통분모를 가질수밖에 없다.
   주지시든, 주정시이든 자신도 무엇을 쓰는지 알수 없고 독자는 더구나 모르게 하기 위하여 시를 쓰지는 않을것이다. 다만 전통과 달리 직설이 아니고 빙빙 에두르고 파내고 추단하는 재미로 쓸수는 있을지라도 시인의 제1상상력은 유한한 정신이 무한한 자아속에서 이루는 영원한 창조행위로서 시의 직접적인 목적도 진리의 전달 혹은 쾌락의 전달로서 그 사명을 알심들여 선택한 시어들이 완성한다. 그로써 시어의 예술성도 체현된다. 그로써 시의 사명이 빛나게 완수된다.  


                                 2014년 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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