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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심 그 산생의 시공간법칙
2011년 08월 05일 10시 50분  조회:3261  추천:3  작성자: 리명근
                   질투심 그 산생의 시공간법칙
                                                                                리명근

 

      질투란 무엇이냐고 많은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거개가 “남의 일이 잘되는것을 미워하는게” 아니냐는 간단명료한 대답을 줄줄로 생각한다. 정작 사전의 올림말해석을 헤쳐보아도 질투는 “남이 잘되는것이나 자기보다 앞서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것 등을 공연히 미워하며 깎아내리려 하는 마음 또는 그런짓”을 뜻하는것이니 상기의 간단명료한 대답이 사전의 해석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아무튼 질투는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 배일대로 배여 깊은 락인을 찍어놓을 정도로 사람마다 너무 익숙한것이라 할수 있다.
      질투란 인간의 심리상태의 일종이고 더 나아가서는 보편적인 사회현상이라고 할수 있다. 뿐만아니라 질투는 현대사회의 “새 제품”이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대물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은 질투에 관한 명언들을 적지 않게 엮어놓았다. 례하면 질투를 삼가하라는 뜻에서 질투를 롱하는 말 즉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파한다”, “심사는 없어도 이웃집 불 난데 키 들고 간다”, “패는 곡식 이삭뽑기”, “되는 호박에 손가락질”, “나 못 먹을 밥에는 재나 넣지”, “논두렁게 구멍뚫기” 등등은 참으로 형상적이고도 생동하게 우리 사회생활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있다.
       질투가 우리 생활과 밀접히 련관되여있는 만큼 그것이 산생되는 시공간에 대하여 따져볼 필요도 있다고 느껴진다. 종종의 질투현상에 대하여 자상히 살펴보면 질투의 산생은 시공간의 거리와 반비례를 이루고있음을 심심히 느낄수 있다. 말하자면 시간적으로 오래 지나서 현존하지 않는 사람,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일수록 질투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가령 질투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 할지라도 자기 주위에서 살아숨쉬는 현존의 대상에 대하여 질투심을 가질뿐 고대인 또는 아득히 먼 옛날의 낯설은 사람한테 대한 질투심은 가질수가 없을것이다. 또한 아득히 먼 지구촌 어느 일각에서 여유작작하게 유족한 살림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도 시샘의 감정을 느끼기 어렵다는 말이다.
      승진의 갈망으로 불태우던한 한 직원이 자기의 동료가 일약 과장급으로 승진한데 대해서는 “자기의 복”을 빼앗았다고 내내  가슴앓이을 하면서 그 동료를 자기의 적수로, “눈에 가시”처럼 대할수는 있어도 저 멀리 태평양피안의 오바마가 하루밤새로 미국태통령보좌에 성큼 올랐다고 해서 시샘은 절대 내지 않을것이다. 금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유망한 작가일 경우 자기의 동료가 자기보다 더 우수한 작품을 내놓아 대상을 타게 되면 질투심으로 낑낑 발편잠을 잘수는 없어도 결코 조설근이나 쉐익스피어와 같은 대가나 문호들을 새암하지는 않을것이다. 이와 같은 “질투심산생의 시공간법칙”으로 말미암아 성공한자는 흔히 자기의 동료들이거나 가까운 주위의 사회로부터 오는 미움, 비방과 중상을 받기마련이다. 그러나 상응한 한계 즉 질투심이 생길수 있는 시공간을 벗어난, 보다 넓은 사회권에서는 성공자의 실적은 승인과 존중을 받을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가. 이것이 철같은 법칙이라고 제나름대로 굳게 믿어왔건만 최근 년간에는 질투심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심술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지구촌 저 멀리 서방세계에서 쩍하면 배률높은 “망원경”을 들고 지구촌 동방세계의 일거일동을 관찰하다가도 “남의 상사(丧事)에 머리를 푸는” 격으로 남의 가문의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소행을 보노라면 상기 “질투심산생의 시공간법칙”의 합법칙성이 무효가 되지 않았는가 싶기도 하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이 개혁개방의 30여년동안 온 지구촌을 놀래울 정도로 급속한 발전을 가져와서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점하는 13억 인구의 먹고입는 온포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였을뿐아니라 날로 안정된 초요사회를 바야흐로 구축하고 또한 빈곤한 나라와 지역에 대한 지원의 력도도 갈수록 높이여 세계의 평화와 발전에 거대한 기여을 하고있는건 세인들이 다 아는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종합적국력도 갈수록 높아지고있는 중국의 오늘과 앞날을 두고 온 나라 공민들은 긍지감으로 벅차지 않을수 없고 세계인민들도 축복의 마음으로 설레이지 않을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중국의 거족적인 발전이 아세아권을 썩  벗어난, 공간적으로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저 태평양피안의 미국을 비롯한 서방나라들한테 무슨 불편한 점을 갔다주었는지, 무슨 비위를 거슬려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쩍하면 “인권”, “민주” 등등의 상투적인 “표본”을 들고 나와서는 다 여물어가는 남의 집 호박을 두고 손가락질 아니면 침질까지 하려고 하는걸보니 실로 “질투심산생의 시공간법칙”으로서는 비뚤어진 그들의 심사를 진단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또 미국 등 서방나라들의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답습하고있는 노르웨이의 “노벨상위원회”에서 징역살이를 하고있는 “류효파”란 죄수의 목에 이른바 “민주화운동의 상징, 인권수호자”란 간판을 걸어주고 인류의 평화와 발전에 뛰여난 기여를 한 공로자에게만 주는 상—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하는걸보니 중국의 발전을 두고 서방나라들의 머리는 시샘의 열이 오를대로 올라 인젠 미쳐날 지경이 아닐가 싶다.
       류효파란 사람한테 노벨평화상을 주었다고 해서 중국의 백성들은 놀라지도 않는다. 더우기는 관심이나 흥미도 가지지 않은줄로 안다. 한것은 13억 백성들의 유족한 살림을 위해 진정 로심초사하여 동방대국의 안정사회를 마련하고 세계의 평화와 발전에 탁월한 기여를 한것으로 하여 세상 뜰 때 유엔으로부터 반기를 드리워 애도의 뜻을 표한 대우까지 받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등소평어른과 같은 위인한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것이 아니였으니말이다. 더우기는 13억 인구의 온포사회구축을 위해 “일전한푼”의 기여는 커녕 도리여 중국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을 담보해주고 삶의 질을 높여주고있는 중국의 현행 시정정책을 마구 비난하고 서방세계의 구미에 따라 횡설수설 많이 떠들어댄 류효파란 사람한테 일부러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니 이 평화상의 “함금량”을 누가 믿을수 있겠는가. 노벨평화상의 적임자를 뻔이 알면서도 내전보살(内殿菩萨)처럼 시치미떼고있는 서방인들의 고약한 심보를 중국의 백성들은 꿰뚫은지도 오래다.
       지구촌의 인류는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갈색인종 등 4대 인종에 2000여개 민족으로 분류되여 각이한 종교, 인정세태, 풍습, 문화, 세속을 가지고 200여개의 국가와 지역에 널리 분포되여있다보니 “외를 껍질을 깎아서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꼬리를 쥐고 대가리로부터 먹는 사람”도 있으며 지어는 “꺼꾸로 쥐고 꼭지가 달린 쓴데로부터 먹는 사람”도 있기마련이다. 말하자면 안정된 생활을 영휘하는 방식이 제마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미국식이나 서방식의 민주, 인권만이 지구촌 어디서나 본받아야 하고 엄하게 지켜야 할 “사회생활규칙”이라고 억지를 부리니 참으로 그 심술을 인젠 말려내기도 힘들다. 남이야 어떻게 살던 자기 실정이나 기호에 맞게 “갓 쓰고 박치기” 해도 좋고 “작두로 수염을 깎아도” 좋고 “전보대로 이를 쑤셔도” 다 제멋이니 그 가문만 흥성해지고 유족하며 안정하고 태평스럽게만 지내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피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선조가 다른 서방세계의 량반들이 남의 가문의 불청객이 되여 “사돈네 제사에 가서 감 내라 배 내라”는 식으로 떠들어대니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하겠다.
      질투란 이처럼 안정되고 쾌락하고 행복하고 부유한 남의 생활을 두고 더없는 고통을 느끼다 못해 우울증까지 가지고 미칠 정도까지 될 때라면 심리적장애가 아닐수 없다. 물론 질투자에게 있어서 성공자에 비하여 볼진대 자기에게도 그만한 능력이 있고 기회도 있었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면 자연히 시샘심리가  생길수 있으니 타할바는 못된다. 문제는 우리 나라처럼 특수한 사회환경에 봉착하여 13억 인구의 온포문제를 원만히 해결할수 있도록 자국의 특색을 띤 적시적인 결책을 내리여 기회를 포착하고 기적을 창조할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없음에도 시샘하고 성공자를 무작정 헐뜯으며 그 성과를 부정하고있으니 서방세계의 질투적인 행세는 세인들의 통책을 받으리라.
                                                                                           (201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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