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 양
내가 처음으로 평양유람을 다녀온것은 1998년9월이였다. 그때 평양유람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컸던것도 사실이였다. 평양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오늘 과거 서류들을 뒤적거리다가 평양유람때 쓰던 작은 수첩을 발견하게 되였다. 번져보니 당시의 유람일정과 소감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아주 반가운 발견이였다. 하여 오늘 나는 그것을 정리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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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7일 연길에서 출발하여 삼합해관에 도착. 정심에 회녕에도착. 늦은 정심식사를함. 저녁6시 청진어랑비행장에 도착. 저녁8시 평양순안비행장에 도착.
9월8일 오전 만수대 수령님동상에 꽃바구니를 드림.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 인민대학습당 만수대극장앞에서 기념촬영. 오후 개선문 천리마동상참관. 만경대고향집을 방문. 돌아 오는 길에 소년궁전을 참관. 저녁 교예연출을 관람
9월9일 오전 김일성광장 관례대에서 열병식을 관람. 오후 김일성체육장에서 학생들의 집단체조를 관람. 저녁 김일성광장에서 군중연출과 회불행진을 관람.
9월10일 아침7:30식사 묘향산으로 출발. 정심 청강산려관에서 식사. 묘향산국데친선전람관을참관. 오후 묘향산 등산 . 만폭동 구천폭포 정자3개등을 구경. 저녁 9시 평양에 돌아옴
9월11일 아침 뻐스로 원산을 출발. 5시간의 로정. 평양에서원산까지 거리 200킬로메터. 원산에서 정심식사. 원산에서 금강산130킬로메터. 금강산에 도착하여 온천욕함. 저녁식사후 노래방.
9월12일 금강산에 오름. 폭포높이 73메터 담깊이14메터. 하산후 정심식사는 3일포에서 어죽을 먹음. 원산에서 저녁식사함. 우리유람단에 환자가생겨 강원도 도립병원을 찿음.
9월13일원산에서 평양으로 출발. 오후 사적지를 방문. 조국해방전쟁기념탑 강사 홍련희 주체탑강사 김씨
9월14일 개성과 3. 8선을 방문. 평양으로 돌아와 지하철을 참관. 저녁에 조선기록영화를 관람.
9월15일 귀국. 평양에서 청진까지 비행기로 이동 청진에서 회녕까지 조선뻐스로 이동. 삼합에서 연길까지 려행사뻐스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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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0일 조선방문을하고 돌아온지도 벌써 2주일이되였다. 방문기간은 9일8박이라 짧고 긴장한 려정이였으나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았다.
9월7일(월요일) 아침 택시를타고 연변직공려행사에 도착하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스산한 날씨였다. 그래서 인지 아직 도착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허나 뻐스가 떠날 때 보니 70여명의 대부대 못지 않은 제법 큰 유람단이였다.
같은 뻐스를탄 이들로는 강동무와 이름모를 사람들이다. 어쩐지 면목있는 사람이 한분 있었는데 후일 알고 보니 한계통에 사업하는 김씨성을 가진 분이였다.
그때 한창 룡정삼합도로를 수리하고 있었다. 뻐스는 연길을 떠나 2시간넘게 달려서야 삼합해관에 도착하였다. 회녕해관의 검사까지 마치고나니 정심시간도 훨씬 지나간때였다. 하여 회녕식당에서 정심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채와밥은 상에 올린지 이슥하여 모두 식었다. 두부전이며 고사리무침이며 감자탕도 올랐다.
정심식사를 끝내고 우리뻐스는 청진시를 향해 달리였다. 뻐스는 일본제중고차였다. 차에는 이미 평양에서온 안내들이 타고 있었다. 회녕과 청진사이 거리가80킬로메터라 그리 먼거리가 아니였지만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꽤나 오랜 기간을 달리였다.
오래만에 보는 조선경치라 나는 무시로 차창밖을 내다 보았다. 작은 시가지 몇개를 지나니 멀리에 청진시가지가 보인다. 청진시내에 들어설렵부터는 제법 큰 비가 린다. 어랑비행장을 바라고 달리던 뻐스는 도중 다이야가 펑크내고 말았다. 기사동무는 비를 맞으며 다이야를 수리하였다.
어랑비행장에 도착하고서야 시름이 놓인다. 어랑비행장은 군용 비행기장이였는데 프로펠라식 비행기도 보였다. 모든 검사와 수속을 마치고 우리는 드디여 탑승하게 되였다. 비행기는 쏘련제품이였다. 우리는 자기의 물품을 선반에 올려놓았다. 안전띠를 매고 차창밖을 내다보니 비는 끊었고 서쪽하늘에는 붉은노을이 지였다.
비행기에 탑승한 대부분 사람들은 중국유람객들이고 소수의 조선분들이 우리와 함께 탑승하였다. 가슴에는 많은 훈장들이 달고있었는데 나라에 공훈이 큰 분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강동무에게 사진한장 찍어달라고 부탁해 놓고 밖을 내다보니 아무것도 보이지않는 밤이다. 근 한시간을 비행하여 우리는 평양순안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평양상공에서 바라본 평양야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비행기에서 내려 맥주상자를들고 약싹바르게 달려나오는데 촬영사들이 사진을 찍는다 록화한다하며 분주하다. 참으로 체면이 깍기는 일이였다. 돈을 절약한다고 맥주와 명태를 가지고왔는데 하필이면 이장면을 찍을건 뭐람. 나는 촬영사들을 향해 손을저으며 "찍지마세요"라고 말했다. 출국하기전 려행사에서하는 말이 우리의 모든 행적은 록화하여 매개인에게 나누어 준다고 했다. 우리 유람단이 7개소조로 나뉘였으니 7명의 촬영사가 공항에 나온것이다.
공항에서 유람뻐스를 타고 시계를보니 평양시간8시다. 회녕까지 마중나왔던 조선측안내 김씨가 우리4조사람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을 향해 선포하기를 내가 단장이라 한다. 하여 9일간의 단장벼슬을 하게되였는데 사실은 심부름꾼이자 출납이다.
저녁은 청광산호텔 2층3호식당에서 먹었다. 연회식당은 규모가 컸다. 식사후 나는 안내원동무를 침실로 청하였다. 나는 상냥한 어조로 평양에사촌누님들이 살고 있는데 만날수없는가고 문의하였다. 헌데 허가가 나야 만날수있지 사사로이는 절대로 안된다고 그루를 박는다.
그날저녁 우리는 조선의 최고급 호텔 고려호텔을 찿았다. 호텔은 규모가 아주 컸는데 깔끔한 옷단장을 한 사람들이 오갔다. 커피와 쥬스를 마시면서 호텔안을 살펴보니 외국손님들도 적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서 보니 많은사람들이 손에 꽃을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12시가 다되여가는 이때 무얼하는걸까 물어보니 국경절 절목 연습학생들이라고 한다. 대단히 수고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운동복차림을 하고 호텔에서 나왔다. 빙산관 체육관이 눈앞이다. 말지 않은 곳에 채완공되지 않은 류경호텔도 보인다. 사람들은 아침 청소에 분망하다. 뻐스정류소에서는 신문을 보는 사람들도 보였다.
오전에는 만수대 김일성수령님 동상에 헌화하고 인사하는 행사가 있다. 우리 순서가 되여 만수대언덕에 도착하니 많은 차량들이 정차되여 있다. 정복차림의 사람들이 손에 생화를 들고 줄을 지어 수령님동상에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린다. 재일본교포들 행렬이 많이 보인다. 평양시민과 재일본교포들 모두 수령님초상을 가슴에 모시고 있었다.
제132차 방문단의 인사순서가되여 우리는 꽃바구니를 드리고 정중히 인사를올리였다. 귀중한 기념사진도 남기였다. 다음 뻐스를 타고 만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려 떠났다.
기념궁전에 도착하여보니 재일본교포방문단이 이미 도착하여있었다. 안전검사를 마치고 차레순서로 자동인행도를 리용하여 궁전안으로 이동하였다. 내부는 대단히 깨끗하게 정돈되여 있었다.
우리는 수령님석상이 모셔진 홀에 들어 섰다. 일렬에 다섯명 씩 앞으로 나와서 수령님석상에 인사를 드리였다. 군인들이 총을 잡고 량켠에 줄지어 서있었다. 이때 기념록화는 전문으로 안배된 촬영사들이였다.
기념궁정 정상에 올라가니 수령님의 유체를 모신 곳 이였다. 수령님 몸위에는 붉은 천이 덮혀 있었다. 우리는 허리 굽혀 세번 인사를 올리였다. 그때 조선주재 외국공관의 군관들이 들어 와서 군례로 인사를 올리는 것이였다.
돌아오는 길에서 우리는 천리마동상을 보게 되였다. 어릴쩍 조선예술영화를 관람할때 첫화면이 바로 천리마동상이였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그것도 실물을 바라보니 너무도 흥분된다. 그리고 개선문도 마찬가지다. 어제날 화보나 기념사진에서만 보아 왔던 웅위로운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보니 너무도 격동된다.
인민대학습당은 조선에서 가장크고 선진적인 도서관이다. 우리는 인민대학습당과 만수대극장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정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만경대고향집을 찿아 떠났다. 만경대고향집은 평양시중심에서 18킬로메터 떨어지였는데 그곳에는 나무들이우거지고 땅에는 잔디가 곱게 자라고 있었다. 고향집을 방문하려 오는사람 방문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으로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하는 우리의 마음은 경건했다. 우리는 수령님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차레로 찿아 인사를 올리였다.
강사선생님의 소개에 따르면 이집은 옛날 지주의집이였는데 할아버지때 산소를 봐 주기로하고 빌린 집이 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바로 이집에서 탄생했다. 김정숙어머님께서 아버지 어머님한테 선물한 벽시게가 고향집의 벽에 걸려 있었다.
장군님께서 조국광복후 나라일을 보시던나날에도 다녀간곳 하루밤깔고주무시였던 멍석과 이전짜리 독도 전시되여 있었다.
우리는 만경대고향집 울바자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우물맛도 보고 만경대정자에 올라 평양시내도 바라보고 이야기꽃도 피웠다.
돌아 오는 길에 보니 만경대유람터가 잘 정비되여 있었다. 우리는 소년학생궁전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저녁에는 예술인들의 교예공연을 관람하였다. TV를 통하여 익숙해졌고 또 연길까지와서 공연을 벌리였던 종목들이라 너무도 친근하였다.
9월9일은 조선의국경절이다. 우리는 아침 일찍일어나 식사하고 열병식과 군중시위를 관람하려고 서둘렀다. 안전검사를 마치고 김일성광장 오른쪽 관례대에 올랐다.
인민군의 검렬은 위풍당당하였고 군중시위는 열열하였다. 김정일총비서께서 나오시여 군중들에게 손을 젓어 인사한다. 격동된 군인과 시민들은 만세를 외치는데 그소리가 하늘을 진동한다. 전투기가 하늘을 날아가는데 김정일총비서를 옹호하는 글발이 달려있다.
오전 행사가 끝난뒤 정심에는 특식이 있다고 했다. 연회주최측에서 남자들에게는 긴바지에 넥타이를 착용할 것을 요구하였다. 특식전에 행사주최측의 간부연설이 있었다.
특식은 서양식 비슷하게 칼 포크 잔3개씩을 올리였다. 여러가지 맛나는 료리들이 나오는데 당시 조선의실정을 감안하면 진짜로 특식이다. 당시 조선은 몇년을 이어오는 자연재해로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학생들의 집단체조공연을 관람하게 되였다. 5. 1경기장에는 10만명의 관중이 입장 할수 있는 대형 경기장이다. 과거에 록화나 영화에서 만 보았던 집단체조 너무나도 환상적이였다. 세계의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집단체조였다.
수만명의 청소년학생들이 공연하는데 동작이 일치하고 멋지게 하는 품이 그 어떤 나라에서도 할수 없는 최고급 수준이다.
저녁에는 회불시위를 관람하게 되였는데 아름차다! 가관이다! 힘이다! 결사적이다라는 느낌이 가슴에 닫는다. 그처럼 곤난한 국제환경과 국내사정에도 상관없이 주체조선을 온 세상에 시위하고 있었다.
저녁에도 김정일장군님께서 나오시여 집회를 관람하시였다.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하늘 땅을 진감하고 꽃불이 밤 하늘을 곱게 수 놓았다. 멀리 주체사상기념탑의 회불이 밤하늘을 비추어 준다.
다음날은 묘향산구경이다. 아침 일찍일어나 시내구경한답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같이 유람간 두분을 만났다. 그들과 이야기하며 보통강변을 거닐다 보니 아침식사 시간을 어기였다. 부랴부랴 식당에 뛰여가 아침을 먹고 나오니 다른팀들은 다 떠나가 버리고 우리 팀만 남았다. 묘향산까지의 거리는 두시간 정도라고 한다.
도중에 차집에 들려 차도 마시고 휴식도 하고 우리는 계속 묘향산을 바라고 길을 조였다. 우리는 먼저 국제친선전람관을 관람하고 식사후 묘향산 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국제친선전람관에는 세계각국에서 보내온 선물들이 가득 전시되여 있었다. 국제사회의 여러나라 령수 군인 상인 우호인사들이 김일성원수님께 선물한 례품은 한점앞에서 일분씩 하루에 8시간씩 관람하여도 1년6개월이 수요된다고 한다. 그러니 그수가 얼마나 방대한지 알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에서 자기들이 전쟁에서 사용했던 무기등 별라별 선물이 다 있었다. 중국정부의 력대 령수들이 선물한 례품도 많이 전시되여 있었다. 자지오 축음기 가구도 있었다. 이제 김정일관도 세운다고 하는데 명년쯤이면 그곳도 관람 할수 있다고 한다.
관람을 끝내고 6층 로대에서 맥주를 마시며 사진도 찍고 또 노래도 하였다. 묘향산의 안개낀 골짜기를 바라보니 참 신선이 된 같은 느낌이다. 조선동지들과의 휴식의 한때는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오전의 활동을 마치고 정심은 청강산여관에서 먹었다. 식사후 모두들 신들메를 바싹조이고 등산준비를 하였다.
묘향산은 말 그대로 아름답고 절묘한 산이였다. 우리가 등산하는 선로에는 폭포가 여러번 나오는데 폭포 옆으로는 등산길이 나져있다. 우리가 묘향산에 오르던 날 평양상업대학 급양학부의 1학년학생들과 상업부복장공장의 청년들도 묘향산에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휴식의 한때를 즐기였다.
난폭동 비성폭포등은 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조차 어려운 아름다움과 정결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질무렵에야 우리는 하산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도토리를 줏는 어린이 젊은이 노인들을 만나게 되였다. 등에진 배냥은 허리휘도록 무거워 보였다. 우리는 빈손으로도 등산하기 힘든데 그분들은 그 가파로운 길을 오르고 내리고 할려니 얼마나 힘들까. 안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묘향산에서 촬영가 동무가 수고 많았다. 7킬로그람이나 되는 촬영기를 메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의 모든 행사를 촬영해주었다.
늦게 돌아 왔다고 총안내의 꾸지람도 들었지만 유람의 기쁜 하루를 보낸것으로 하여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내일은 금강산으로 간다.
금강산은 강원도에 위치하고 있는데 평양시에서 200킬로메터 거리다. 원산에서 정심을 먹고 금강산으로 달리던 도중에 차집이 있어서 우리는 차에서 내려 휴식하였다 . 그리고 어떤이들은 바다물에 뛰여 들어 수영하고 어떤이들은 해변가에 가서 조개도 주었다. 내륙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이라 바다 구경이 흔치 않다. 넓고 푸른 바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놓아 주질 않는다. 수영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바다물에 발목을 적신다.
세시간 가량 바다가에서 놀다가 다시 뻐스를 타고 우리는 금강산호텔에 도착하니 이른저녁이다. 1974년도에 건축한 금강산호텔은 아주 멋진 건축물이였다. 이전에 중국의 대학들이 건축양식을 배우려 조선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금강산에는 온수욕이 있었다. 2인용이 48원이라고 한다. 물이 어쩌나 맑은지 유리 같은데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어느새 온갓 피로가 다가시여 진다.
저녁까지 먹고 나니 기분 또한 만점이다. 식후에는 꼭대기층에 올라가 맥주를 마시였다. 노래도 하고 춤도 추었다. 흥이난 우리들은 옛노래와 아름다운 춤사위로 놀이판을 고조에로 끌어 올리였다.
아침을 먹고 나서 우리는 금강산구경에 나섰다. 유람객들은 신비한 금강산의 모습을 보려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조인다.
금강산은 돌이 많고 계곡이 많은 것이 특점이라 하겠다. 기암괴석이 많다. 여러가지 모양을 한 바위들 돌 쯤 사이에 자라난 소나무들 그리고 바위 사이로 흘러 내리는 계곡의 맑은물 이 모든 것이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내였다.
금강산은 조선5대명산중의 하나로서 4개절의 변화에 따라 4개의 듣기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봄에는 금강산이요
여름에는 봉래산이라
가을에는 풍악간이요
겨울에는 설봉산(개골산)이라
부동한 계절에 각이한 측면을 보여주는 실감적인 이름이다. 옛 사람들은 금강산의 매력에 매료되여 많은 글귀들을 남기였다. 큰바위들에는 고인들이 적어 놓은 글흔적들이 많았다.
금강산에서 제일높은곳의 폭포의 길이는 73메터 담의 깊이는 14메터라고 한다. 우리는 폭포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묘향산의 방문과는 달리 금강산에는 조선유람객들이 많이 찿아와 있었다. 옷차림이 평범한 유람객들이 질서 정연하게 등산도 하고 여럿이 모여 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기념촬영도 하고 있었다.
금강산구경내내 수옥동무는 맥주와 음료를 넣은 보온상자를 메고 우리들의 안내를 해주었다. 너무 힘들어 하는 같아 우리는 주동적으로 맥주와 음료를 사마시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말이다.
돌아 가는 길에 수옥동무는 하차하고 우리는 그대로 3일포로 향했다. 옛날 왕이 하루만 쉬여가려고 했다가 경치가 하도나 좋아서 3일묵어갔다고 해서 지은 이름 3일포다. 그리고 김정숙어머님께서 총한방에 300메터밖의 물오리를 쏘아 떨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3일포이기도 하다.
원래 3일포에서 조개구이를 먹으려고 했으나 가스가 없어서 못하고 어죽을 먹고 나왔다. 어죽맛이 일품이였다. 그후 조선분들과 배놀이도 하고 이야기나누다 헤여지고 또다시 원산을 바라고 길을 떠났다.
원산에 들어서니 우리를 맞는것은 송도원려관이다. 요지음 조선은 사정에 의하여 전력이 부족하다. 하여 우리가 려관에 들어설 쯤에도(이미 날이 어둡기 시작함) 대청에는 불이 밝혀 있지 않았다.
원산은 조선의 해군기지라고 한다. 원산의 앞 바다가 아름다웠다. 송도원려관은 바다가에 들어선 소나무숲속에 자리 잡았는데 진짜로 풍경 좋고 공기 좋은 곳이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 먹고 우리는 평양을 바라고 떠났다. 평양에 들어서니 정심 시간이 되여간다. 우리의 뻐스가 통일거리를 지나는데 그거리는 넓고도 평탄했으며 길량쪽의 건축물들도 굉장이 아릅다웠다.
정심을 먹고 오후에는 조국해방전쟁탑 주체탑을 견학하였다. 주체탑의높이는 176메터이고 주체건물의 높이는150메터라고 한다.승강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보니 평양시내가 한눈에 안겨 온다. 평양시인구가 약170만명정도라고 한다. 그곳에서 영어안내를 맡은 한 안내원동무를 만났다. 내가 영어는 출국하여 배운것인가고 물으니 국내에서 배웠다고 한다.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였다.
평양에 도착하던첫날 뻐스가 평양시내를 들어 서는데 높은 건물우에 네온등으로된 "조선은 하나다"라는 글발이 보였다. 어릴때 조선방송을 통하여 익숙해진 노래 제목이다.
통일이냐 분렬이냐
엄숙한 이시각에
대를잇어 나가자
통일의 한길로
조선은 하나다.
이튿날 우리는 3.8선을 참관하기로 하였다. 먼저 개성시내에 들려 거리도 구경하고 정심도 먹었다. 개성시하고 판문점은 아주가까운 거리다.
판문점의 회의장소 사이에는3.8선이 놓여있었다. 한20센치메터폭의 콩크리트뚝이 남과 북을 갈라 놓았다.
민족의 비극이였다. 남쪽 하늘에는 태극기가 휘날리 였고 북쪽 하늘에는 공화국국기가 휘날린다.
3. 8선을 중심으로 량측 2킬로메터내는 비군사지역이다. 여기에서는 학이 날아 예고 이름모를 새들이 지저긴다. 듣는바에 의하면 비군사지역에는 많은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에 돌아온 우리는 지하철을 견학하였다. 지하궁전같은 평양지하철은 세상에도 이름 높다. 1974년도에 완공된 지하철은 아주 높은 예술성과 전략성을 보여주었다. 시간의 세례를 받은 벽화와 커다란 전등불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세인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기록영화를 관람하였다.
이튿날 우리는 비행기편으로 순안비행장에서 떠나 청진 어랑비행장에 내리였다. 때는 오전9시다. 다음 회녕을 바라고 달리다가 도중에 평양에서 가지고 온 곽밥으로 정심을 해결하였다.
오후3시에 삼합에서 뻐스를 탓는데 연길에 도착하니 5시가 넘었다.
9일8박의 조선방문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진짜로 한번쯤 경험해 볼 만한 유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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