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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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사랑은 산이랍니다
2021년 06월 20일 16시 16분  조회:759  추천:0  작성자: 한영철
수필
아버지 사랑은 산이랍니다
 
한영철
 
 
 
     나의 아버지의 외모상 가장큰 특점은 키가 크고 얼굴색이 붉은것이였다. 얼굴이 붉어 지게 된 것은 중국 동북지역에 들어와서 고생하며  얼굴이 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고향 경상북도는 기후가 우리 동북보다 많이 따뜻한 곳이다. 지난 세기 30년대 말 아버지는 살길을 찿아 고향을 등지고 중국에 건너 온 뒤 목재판이며 광산을 떠돌면서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나무도 얼어 터진다는 한겨울 살림에서 일하며 얼굴이 붉게 얼어들었다. 그리하여 원래 하얀 얼굴색이 영원히 붉은 색으로 변하게 되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붉은 얼굴색은 고생 많던 지난날의 증명이였다.
 
   품팔이로 살아가던 1947년 아버지는 흑룡강성 학강에서 해방을 맞이했고 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게 되였다. 참군한 뒤 료심전역, 평진전역에 참가하였고 부대의 명령에 따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자다가도 자주 총소리,대포소리에 잠에서 깨여난다고 했다. 그만큼 가열처절했던 전투가 남긴 휴유증이였다. 조선 정전협정뒤로 연변에 오시였고 그뒤로 소영에 행장을 풀고 가정을 이루었다. 전에 우리 어머니와 친척처럼 가깝게 지내는 집이 있었는데 그집 할아버지가 나보고 그때 마을사람들은 군복을 입고 소영에 온 너의 아버지를 '붉은 군대'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성격이 매우 락천적이였다. 동네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곧잘  우스개를 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였고 아주 소탈하고 상냥한 분이였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별로 집에 계시지 않았다. 목재판이며 건축판 소방목 양봉장 인삼장같은 곳에 가서 장기로동을 하였다. 평소에 우리집에는 술이 없었다. 내가 술병을 들고 공소합작사에 가면 판매원은 나보고 웃으며 아버지가 집에 오셨냐고 물었다. 커서야 아버지가 밖에 나가 있는 원인을 알수 있었는데 밖에 나가 로동하면 공수가 높고 또 오래 일 할수 있어 다문 얼마라도 수입을 더 올릴 수 있기 때문이였다. 우리 자식 4명이 다 같이 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 어머니 두분이 그 뒤바라지를 할려니 한시도 쉴 사이가 없었다. 아무리 생활이 힘들고 몸이 고달프더라도 아버지는  내색을 내지 않았고 락천적이였다.
 
 
    내가 어릴때 아버지는 산에 들어가 방목을 하였다. 생산대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도구들을 소수래에 싣고 풀이 많은 곳을 찿아 막을 짓고 소를 방목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젊은이 여러명을 데리고 장안진 룡가대대 산속에 들어갔는데 그중에는 한족 총각 한명도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능숙하게 한어를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였다. 먼 후날 그 한족분이 나보고 하는 말이 전기도 없고 방송도 없는 산골에서 저녁이면 너무 답답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들에게 전쟁이야기를 해주는데 너무 재미 있었다고 했다. 후일 그들은 전화선에 레시바이선을 잇으면 방송을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산골에 살면서 방송도 없으니 가장 큰 난제가 일기예보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날씨를 모르니 제때에 소를 몰아 올수도 없고 생활에서 불편함이 많았다. 하여 레시바이를 구해서 전화선에 련결하였더니 정말로 방송이 흘러 나왔다고 했다. 소식도 듣고 노래도 듣을 수 있고 일기예보도 들으니 그이상 더  좋을수 없었다. 물론 남의 통화내용도 들을수 있었지만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좋은 일도 얼마 가지 못하였다. 전화반에서 전화에 잡음이 많아 선로를 검사하다가 방목장에서 사사로이 레시바이를 련결한 것을 발견하였다. 하여 혼쭐나게 훈계 받고 레시바이도 몰수되였지만 하도 태도가 좋아서 벌금은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소영대대 인삼장에 가서 여러해 일하였다. 인삼장은 하룡촌 농골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한달에 한번 쯤 집에 왔었다.  매번 집에 올 때면 산에서 나오는 가래토시며 더덕이며 고사리같은 산에서 나는 토산품을 가져 왔다. 하여 우리 집에서는 항상 산나물을 먹을수 있게 되였다. 겨울이면 옹노를 놓아 산 토끼를 잘 잡았는데 가죽을 벗기여 말리웠다가 합작사에 팔아 술을 사고 고기는 반찬으로 하였다. 온 겨울 두분이 삼장을 지키였는데 물이 없어 얼음을 녹여 밥도 하고 국도 끓이였으니 실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한밤이 되면 집지키기 개가 엄청 짖어대여 렵총을 들고 밖에 나가보면 메돼지무리들이 보였다고 한다. 여름이면 하룡촌 원정가지가 삼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오고가며 이야기라도 할수 있었지만 겨울의 긴밤을 보내려면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한사람이 집에 가고 나면 며칠간 인적없는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야 하는데 그럴 때면 고향생각 혈육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을 것이다.
 
  하룡촌에서 소영으로 오려면 해란강을 건너고 또 부르하통하도 건너야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집에 오는 길에 강물을 건너다가 우연하게 큰 물고기를 발견하였다. 아마 누가 터친 남포에 정신을 잃은 물고기 같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허리를 넘는 강에 헤염쳐 들어가 그 고가를 잡았다.  강역에 나와서는 인츰 광주리에 담고 풀로 덮어 놓았다고 했다. 집에 오는데 자식들에게 물고기를 맛보 일 생각에 그렇게도 즐거웠다고 했다. 부모란 그렇다. 뭘 색다른 것이 있으면 먼저 생각 나는 것이 자식이다.
 
    아버지의 몸에서는 군인으로서의 생활습관이 고스란이 남아 있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옷을 벗어 개여서 꼭 머리맡에 놓고 이불은 안으로 감쳐 놓았다. 장기간 전쟁가운데서 양성된 습관이였는데 그래야 찬바람을 막을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한테 자기용품은 꼭 고정된 곳에 놓아야 찿기쉽다고 말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군대습관으로 이불을 모나게 개였는데 자식들 한테 말 없는  좋은 교육이 되였다.
 
   아버지는 자식교육을 중시하였고 교원을 존중하였다. 어려서 생활난으로 얼마 공부못한 것이 원이 되였다. 해방군시절 행군면서도 앞에선 전사의 행낭에 글을 붙혀 놓고 한자공부를 했다고 이야기 했다. 비록 아는 글자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 바쁜 번체자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에게 공부해야 운명을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하긴 아버지가 조금만 더 문화가 있었더면 부대에서 전업하여 연변에 왔을 때 여느 기관에 배치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엄한 교육이 있었기에 훗날 자식들은 3남1녀중 3명이 공무원으로 1명이 로동자로 근무하게 되였다. 아버지는 길에서라도 선생님들을 만나면 꼭 인사를 하였다. 그것이 본보기가 되여 나도 길에서 어르신들 만나면 바로 인사한다. 내가 초중에 다닐 때 한번은 학교에서  봄놀이를 가게 되였는데 선생님이 아버지를 요청하였다. 보배 찿기 등 유희항목이 끝나고 선생님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였는데 아버지는그날  매우 즐거워 하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버지의 일생에서 가장 즐거웠을 때가 자식들이 출세할 때였다. 누나는 중앙민족학원에 추천되여 갔고 큰 형님은 부대로 갔고 둘째 형님은 재무학교를 갔다. 부모님이 돌아간 이듬해에 내가 대학에 입학했고 후일 기관에서 근무하게 되였다. 아버지가 가장 격동되였을 때는 40여년 갈라져 생사마저 모르고 있었던 녀동생이 1981년 8월 일본에서 왔을 때였다. 오랍누이의 상봉은 장춘공항에서 이루어졌는데 눈물없이는 보지 못할 광경이였다고 큰형님이 말했다.
 
    내가 연변일중에 다닐 때였는데 아버지가 몸이 편찮으셔 연길병원에 주원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나보고 병원에 와서 아버지병문안을 하라고 하였다. 그날 점심 병원병실에 들어가니 아버지는 침상에 누워계시였고 어머님이 침대머리에 앉아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년세가 60대 초반이였다. 나의 인상속의 아버지는 키꼴이 장대하고 언제나 억센 모습이였다. 그런데 그날 침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는 그렇듯 왜소해 보이고 힘이 없었다. 내가 아버지한테 몸은 좀 나으신가고 여쭙는데 아버지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왜 어린이 같이 우시냐고 한다.
 
    고향을 떠나 갖은 고생을 해오다가 또 전선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전투하시다가 어머니를 만나서야 아버지는 비록 안정을 찾을수 있었다. 이제 딸과 장남은 결혼하였고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소식도 전해들을 수 있고 또 녀동생과의 력사적인 상봉도 실현하였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하였기에 좋은 일들을 이루고 나서야 몸이 허약한 것을 체험하신것 같았다. 그러니 몸이 피로하여 병상에 누우신 것이였다.
 
   이제 자식들이 성인이 되고 살림이 좀씩 피울가 싶은 때에 어머님은 60세를 일기로 하늘나라에 가시였다. 그 때 누님 나이가 30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의 눈에는 큰사람으로 보였다. 누나는 아버지를 도와 어머니 후사를 치루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누나 보고  막내는 시력도 좋지 못한데 어떻게 하나 공부하여 성공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도 그해 가을에 돌아가시였다. 우리는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었다. 그때는 진짜로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였다. 꿈인가 사실인가 .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아버지는 정신상에서 매우 허전해하였다. 동거동락 30여년의 동반자 안해를 잃고 기운이 없어하였다. 없는 살림에 4명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려니 아버지는 좋은 의복 한 벌 입어보지 못하고 좋은 음식도 잡수어 보지 못했다. 남들은 고생 끝에 락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자식들을 성인으로 성장시키고 나서 그만 어머니를 따라 총망히 하늘나라로 가시였다. 아마 두분의 관계가 너무도 좋아서  떨어지기 싫어서 아버지가 쫓아갔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부모를 모신 친구들을 보면 부럽다. 특히 망내로 자라서 나는 부모님과 같이 한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중국말에 충과 효는 다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 형제들이 사업에서 성과를 내고 부모님한테 효를 하려니 너무도 빨리 떠나시였다. 지금도 고향마을에 가면 로인들은 자네 부모님들은 너무 일찍 돌아갔다고 아쉬워 한다.
 
   아. 올해는 아버지가 태여난지 백주년이 되는 해이자 돌아가신지 36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인지 꿈결에도 아버지를 볼 때가 있다. 키가 크고 얼굴색이 붉고 연변말에 남도 사투리를 썩어 쓰시던 아버지, 뭘 좀 한다고 하면 손등을 긁히거나 옷을 째서 어머니한테 꾸지람 듣던 아버지, 자식들이 무슨 성과라도 올리면 그토록 즐거워 하던 아버지가 눈앞에 생생하다.
 
   아버지는 겉은 강했으나 속은 불같이 뜨거운 분이였고 온갖 풍상고초를 겪어온 분이였다. 곤난에 부딛쳐도 언제  한번 내색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이겨내시였다.  그런 아버지가 계시였기에 우리 형제들 모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을 가질수 있었다.
 
   오늘은 부친절이라고 위챗에서는 난리다. 나는 그저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으로 오늘 부친절을 보낸다.
  아버지 우리 모두 잘 보내고 있습니다. 막내도 이미 쉰을 넘었구요. 하지만 아직도 아버님을 못 잊겠어요.
  하늘 나라에서나마 부디 명절을 잘 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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