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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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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회 연안에 모인 조선혁명가들
2015년 02월 10일 10시 32분  조회:5416  추천:0  작성자: 김성룡

조선민족이 키운 천재적인 음악가 정률성은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 마음껏 자기의 재주를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혁명의 격정으로 들끓는 연안의 학습과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큰 충격을 주었다. 연안은 일제의 강점구와 국민당 통치구에서는 전혀 볼수 없었던 새로운 기상을 그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1939년 봄, 정률성은 연안의 예술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로신예술학원이 설립되자 학원 음악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는 늘 학우들과 함께 산언덕에 올라가 노을 비낀 보탑산을 바라보면서 혁명과 예술을 담론하군 하였다. 망치를 들고 가는 로동자, 낫을 들고 가는 농민들, 무기를 들고 씩씩한 대렬로 행진하는 팔로군 전사들의 모습은 그에게 너무나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는 학우인 막야(莫耶)에게 가사를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며칠도 안되는 사이에 그는 격정에 넘치는 《연안송(延安頌)》을 작곡해 냈다.

 

보탑산 산봉우에 노을 불타고

연하수 물결우에 달빛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고

산과 산 금성철벽 이뤘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승리의 노래 울리누나!

 

노래는 나래 돋힌 듯 신속히 퍼져 섬감녕 변구 인민들이 누구나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연안송》은 중국 8년 항일전쟁에서 정식 출판되지 않았지만 나래 돋힌 듯 연안으로부터 해방구로, 국민당 통치구로 전해졌으며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까지 퍼졌다. 노래에 감화된 더욱 많은 열혈 청년들이 수천리 길을 마다하고 혁명의 성지 연안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노래는 중국항일전쟁시기에 창작된 불후의 명작중 하나로 되였다.

 

보탑산의 보탑

 

조선족 혁명가이며 중국의 저명한 음악가인 정률성

 

(권립 교수) “팔로군에는 우리민족 용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주로 세부류의 혁명가들로 구성됐는데 한부류는 2만 5천리 장정을 거쳐 연안에 온 로홍군지휘원과 전투원들이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양림, 무정, 최정무 등입니다.”

 

1930년대 중반, 섬북에 모인 조선인 혁명가들은 많지 않았다.

중앙홍군을 따라 섬북에 온 대표적인 조선혁명가로는 양림과 무정이다. 이때 홍군부대는 재편성을 거쳐 양림은 간부단 참모장으로부터 새로 편성된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고 무정은 홍군총부 작전과 과장으로 사업하였다.

1937년을 전후로 조선민족해방동맹의 대표로 장명(김산)이 연안에 도착하였고 적통치구공작회의 대표로 리철부가 연안에 왔다. 그리고 장학량의 동북군 학병련(學兵連)에 있던 지하당원 서휘(徐輝), 광동 중산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조직하던 진광화가 연안에 있었으며 국민당 통치구로부터 연안에 찾아온 혁명청년 정률성도 가장 일찍 연안에 도착한 조선혁명가의 한사람이였다.

홍군 장령이였던 양림과 무정은 홍군의 동정전역에 참가하였다. 황하 도하작전을 성공시킨 양림은 황하기슭의 적을 숙청하던중 장렬히 희생되였다.

홍군동정이후 국내정세의 변화에 따라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으로 상승하였다. 당중앙에서는 홍군과 간부들을 새로운 정세변화에 신속히 적응시키기 위해 홍군대학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 6월 1일 림표를 교장으로 하고 모택동을 정위로 하며 라서경을 교육장으로 한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이 와요보에서 개교되였다. 장문천, 주은래, 모택동, 엽검영, 라영환(羅榮桓)을 비롯한 당과 홍군의 지도자들이 직접 교수를 맡았다.

조선혁명가 무정은 홍군대학 제1기 1과(科)에서 학습하였다. 홍군대학은 3개과로 나누었는데 1과는 고급간부과로서 홍군부대의 사급 이상 간부들이 학원으로 들어왔다. 1과의 36명 학원은 8년 이상의 혁명경력이 있고 전투에서 세번이상 부상을 입은 공헌자들로 선정되였다. 개교 한달후인 7월에 홍군대학은 적의 습격을 피해 보안현(保安縣 지금의 연안시 지단현志丹縣)으로 옮겼다. 보안현에 옮긴후 교명을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中國人民抗日軍政大學)으로 고치고 지금의 연안시 이도가(二道街)에 자리잡았다. 학교 원 건물은 언녕 사라졌고 1964년에 그 자리에 학교 전시관을 만들었으나 전시관건물도 문화대혁명기간 페쇄되였다가 지금은 백화상점의 창고로 사용되고있었다.

 

(권립 교수) “두번째 부류는 쏘련에서 연안으로 온 로간부들입니다. 주덕해와 주춘길 등 열명입니다. 이들은 1939년 모스크바를 떠나 하바롭스크를 거쳐 신강의 우룸치, 란주, 서안을 거쳐 연안에 도착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전국각지에서 연안에 모여든 청년혁명가들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적 점령구에서 온 정률성이나 정면전장에서 온 리유민, 김영숙 등입니다.”

 

     주덕해

주덕해는 1930년 2월에 길림성 룡정시 지신진 성지촌에서 혁명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에 기입한 로 공산당원이였다. 그는 7년동안 지하투쟁을 견지하다고 1936년 6월에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에 가서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정치, 군사지식을 배웠고 2년의 학습을 마친후 연안에 왔다.

주덕해는 연안에서 팔로군 359려 718퇀 특무련의 지도원 사업을 맡았다. 그는 부대와 함께 국민당 군대와의 전투에도 참가했고 대생산운동에도 뛰여들었다. 1943년후 주덕해는 당중앙의 결정에 따라 연안 조선혁명군정대학 조직사업에 나서게 되였다.

 

(권립 교수) “정면전장에서 온 우리민족 혁명지사 대부분은 대학 특히는 각 군사학교에서 온 분들이였습니다. 례하면 북경의 문정일동지, 연변의 김학철, 황재연 그들은 모두 남경중앙군사학교에서 연안에 왔습니다. 그들의 일부분은 팔로군 각사에 배치되여 일제의 침략군과 싸웠습니다. 태항산근거지의 류백승사장과 등소평정위가 거느린 129사에도 조선족간부들이 있었습니다. 129사의 사부에 리유민, 정치부에 송기창 위생부에 김영숙이 있었습니다.”

 

리유민은 상해동제대학을 나왔고 로당원이며 상해에서 지하당사업에 종사한적이 있다. 조직의 명령에 따라 팔로군 129사에 편입된 리유민은 서향전 부사장을 도와 일본군 포로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였다. 중국항일전쟁이 대치단계에 들어서면서 팔로군은 많은 일본군을 포로하였다. 1940년 팔로군의 백퇀대전에서만 하여도 백여명 일본군 병사들을 포로하였다. 일본어를 할수있었던 리유민은 일본군 포로들을 설득하였다. 일본군 포로들은 팔로군에서 리유민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을 통해 일차적인 교육을 받은뒤 연안에 모였다. 이들은 연안에서 계속 일본반전조직의 교양을 받았다.

1941년 1월에 화북조선청년 련합회가 창립될자 리유민은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는 주로 화북지구 조선인에 대한 사업을 전개하였고 조선의용대 사업을 도왔다. 그후 조선독립동맹이 건립될 때 리유민은 동맹의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조선의용대 창설이후 최창익을 위수로한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남 먼저 연안으로 왔다. 이들은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하반기에서 1939년 상반기 기간에 항일군정대학에 등교한 조선학생은 30여명에 달하였다. 1938년 제4기에는 화가인 장진광과 리명 등이 있었고 1939년 제5기에는 한청(韓靑), 리상조, 로민, 김영숙(金榮淑), 김웅(金雄), 서휘, 윤공흠, 리극, 리근산(李根山), 리유민, 한경(韓景), 한락산(韓樂山), 허금산(許金山), 홍림, 리철중(李鐵重)등이 있었다. 그후 1940년 동북간부훈련반에는 주덕해, 방호산(方虎山), 김창덕(金昌德), 리권무, 장복(張福), 전우(全宇), 주춘운(朱春雲), 리림(李林), 진반수(陳班秀) 등이 있었다.

1939년 7월 10일에 항일군정대학은 전장으로 이동하였는데 졸업한 학생들은 속속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진입해 투쟁하였다.

항일전쟁 승리를 앞두고 항일군정대학 본교는 다시 섬북에 옮겼다가 항일전쟁 승리후 동북으로 진출해 동북군정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학교는 북경으로 옮겨 중국인민해방군 군정대학으로 되였다.

 

답사팀은 보탑산을 보고 나서 바른편의 청량산에 올라가보았다.

산기슭에는 낡은 주민 가옥들이 있었고 산에 오르는 길도 여러 갈래였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차를 타고 청량산 뒤로부터 산에 올랐다. 산정에는 태화산도관(太和山道觀)이 있었다. 도관은 당나라 초기에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에서 비교적 유명한 도교성지의 하나이다. 도관의 중심 건물인 진무전(眞武殿) 주변에 비석과 크고 작은 절이 있었고 절에는 산신과 재물 신, 성인들을 각기 모셔놓고 있었다. 지금도 한해에 10만 이상의 관광자와 신도들이 이곳을 찾아온다고한다.

산에서 연안을 한눈에 굽어볼수있었다.

바른편에 보탑산이 우뚯 솟아있고 그 아래로 굽이굽이 흐르는 연하가 있었다. 옛날과는 달리 지금은 가로세로 널찍한 도로가 뻗어있고 아담한 주민 아빠트가 즐비했으며 이따금 높은 빌딩도 보였다.

섬북 연안, 항일전쟁시기 이곳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있었던 혁명의 성지였고 수많은 혁명투사들을 양성한 혁명의 요람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중국 군민들과 어울려 이곳에서 학습하고 생활하였으며 수요에 따라 무기를 들고 전선으로 나갔던 것이다. 연안에서 활동한 조선혁명가들의 사적지는 지금까지도 남아 우리를 부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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