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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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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회 서안과 락양 답사
2016년 02월 15일 11시 21분  조회:3864  추천:1  작성자: 김성룡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되기 전인 1936년 12월 12일, 중국의 전면항일전의 시작을 직접 촉발한 중대한 사건이 서안에서 발생하였다. 중국국민당의 동북군 장령 장학량과 서북군 장령 양호성은 서안 교외의 화청지(華淸池)에서 무력으로 장개석을 억류함으로써 중외를 진감한 서안사변을 일으켰던것이다.

20세기 30년대 초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발동하여 중국은 심각한 민족위기를 겪게 되였다. 전국적으로 항일구국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있을 때 장개석은 되려 이른바 《외적을 물리치려면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6년 12월 4일 그는 직접 서안에 와서 홍군을 공격하도록 장학량과 양호성을 독촉하였다. 내전을 반대하는 장학량과 양호성은 장개석에게 수차 간하였지만 수락을 받지 못하자 드디어 병간(兵諫)을 시도하였다. 12월 12일 그들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화청지를 포위하고 장개석을 연금하였다.

화청지의 장개석을 체포하는 행동에는 조선혁명가 서휘도 참가하였다. 그는 당시 중국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장학량의 동북군 학병련에서 근무하면서 지하투쟁을 진행하고있었다. 그는 기타 병사들과 함께 홀몸으로 도주하려던 장개석을 체포하였다.

장개석을 연금한 장학량과 양호성은 시국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공산당 대표를 서안에 초청해 구국대계를 토의할것을 제의하였다. 중공중앙에서는 주은래를 비롯한 대표단을 서안에 보냈다. 수차의 담판을 거쳐 장개석은 할수없이 내전을 중지하고 공산당과 함께 공동으로 항일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서안의 장학량공관 전경

장학량공관의 동루

 

서안시 건국로(建國路) 69번지에는 서안사변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서안사변의 주인공이였던 장학량의 옛집을 보수하여 만들었다.

장학량공관(張學良公館)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정원이 나타났다. 왼편에는 단층 줄집이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3층으로 된 서양식 건물 3채가 있었다. 벽돌과 나무로 만든 서양식 건물은 각기 동루(東樓), 서루(西樓), 중루(中樓)로 불리우고있다. 서루는 장학량이 서안에서 사무를 보고 거주하는 곳이다. 1935년 동북군을 거느리고 섬북의 홍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학량은 무한으로부터 서안에 와서 이곳에 거처를 정했다. 사변을 해결하기 위한 장학량과 양호성 그리고 국민당 당국과 공산당 3자사이의 평화담판이 바로 서루 2층 사무실에서 진행되였다.

동루는 중국공산당 대표단이 머물렀던 곳이다. 장학량의 초청전보를 접한 공산당에서는 즉각 주은래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을 서안에 파견하였다. 장학량은 공산당 대표단의 안전을 돌보고 수시로 그들과 접촉하기 위해 이들을 가까이에 있는 동루에 배치하였다. 동루와 장학량이 거처하는 서루는 가운데 중루를 사이두고 있다. 중루는 군부대 사무실로 사용되였고 비서와 경위일군들이 있었다.

장학량 공관의 낮은 단층집은 전시실로 사용되고있었다.

공관을 나서면서 장학량과 양호성의 비극적 운명을 생각하게 되였다. 서안사변후 장학량은 장개석과 함께 서안을 떠나 남경에 갔다. 그때로부터 장학량은 반세기 넘도록 줄곧 장개석에게 연금되여 자유를 잃고 생활하였다. 그는 영영 중국의 력사무대에서 물러나게 되였으며 태평양의 호놀룰루에서 만년을 보내다 세상을 뜨게 되였다. 양호성은 더욱 비극적이였다. 그는 국민당 정보일군들에 의해 비밀리에 암살되고 말았다.

개인의 생사를 제쳐두고 진행한 장학량과 양호성의 과단한 조치가 있었기때문에 중국력사에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드디어 전민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이룩되게 되였다. 서안사변과 국공합작은 다년간 중국내에서 격렬한 내부 분쟁에만 전념하던 조선혁명가들에게도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많은 지사들이 좌우 합작을 주장하면서 전 조선민족의 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드디어 조선의용군의 창립을 이끌어내게 되였다.

답사팀은 서안에서 오래 머물 계획이 아니였기때문에 몇곳을 보고나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기차 시간을 알아보니 오후 2시에 락양으로 가는 기차편이 있었다.

오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우리는 서안의 명소 대안탑을 보기로 하였다.

시 중심에서 약 4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대자은사(大慈恩寺)라는 유명한 사원이 있다. 사원의 대안탑은 고도 서안의 상징인 불교명탑(佛敎名塔)이다.

탑은 기원 652년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인도에서 가져온 657부의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축조한 불경 수장 탑이다. 처음에는 60킬로메터의 5층탑으로 축조하였지만 후에 여러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탑은 더욱 높게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지금은 64킬로메터 높이에 7층으로 되여있다. 이곳은 서안을 찾는 관광자들이 꼭 찾아보는 관광명소로서 사원 앞 광장은 사람들로 붐비고있었다. 광장에는 철로 된 현장법사의 조각상이 있었다.

사원의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장경각(藏經閣)을 지나니 대안탑이 한눈에 안겨왔다. 현장법사가 직접 설계한 정방형 모양의 이 탑에는 층마다 사리(舍利)가 있다고 한다. 탑을 대안탑이라고 한데는 재미나는 전설이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자은사의 스님들은 모두 삼정식(三淨食)을 하였다고 한다. 삼정식이란 기러기, 노루, 송아지 고기만 먹는것이다. 그런데 오래도록 이 세 가지 고기를 먹지 못한 스님들이 하루는 하늘의 기러기 떼를 보았다. 한 스님이 하늘의 기러기를 쳐다보면서 《부처님께서 우리 모두가 굶고있는것을 헤아려 기러기 고기를 보내 온것이 아닌가?》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하늘의 기러기 한 마리가 그 스님의 품에 뚝 떨어져 죽고 말았다. 놀란 스님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뿐이였다. 이때 다른 한 스님이 이는 분명 부처님의 화신일것이라고 하면서 기러기를 정중히 안장하고 탑을 만들어 제까지 지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사람들은 탑을 기러기 안(雁)자를 따서 안탑이라고 했는데 현장법사의 불경 수장탑을 높이 생각해 대안탑이라고 불렀다한다.

탑 뒤에는 또 정교하게 축조된 목제 건물인 현장삼장원(玄奘三藏院)이 있었다. 원에는 거폭의 목조와 한백옥 조각이 있었는데 모두가 현장법사의 공적을 소개하는 내용이였다. 이곳에는 현장법사의 두개골 사리가 수장되였다고 한다.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는 대자은사와 대안탑은 서안 력사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일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문화의 리정표로서 오늘도 수많은 관광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서역 만리에서 불교 경전을 가지고 온 현장법사의 굳은 의지와 불후의 공적은 천추에 길이 빛나고 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에서 피땀을 흘리며 조국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항쟁해온 우리 혁명자들의 불굴의 정신과 업적도 만대에 길이길이 전해져야 할것이다.

현장삼장원

서안의 대자은사 일경

대자은사의 탑림

대안탑

 

서안에서 오후 2시 기차를 타고 하남성 락양에 도착한것은 10월 30일 새벽이였다.

락양에서도 오래 체류할 계획이 없기때문에 호텔을 잡지 않고 역시 기차역에 짐을 맡기고 저명한 황하 나루터인 맹진으로 향했다.

락양시 북쪽으로 1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이르니 황하가 나타났고 거대한 황하대교가 놓여있었다. 이곳이 바로 옛 맹진 나루터였다. 맹진은 황하의 중류와 하류를 나누는 분계점이기도 하다. 이곳으로부터 황하는 강폭이 훨씬 넓어지고 물도 비교적 맑았다.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를 흐르는 황하처럼 누런 흙물이 아니였다. 수천년전부터 맹진은 황하의 중요한 나루터로 유명했다. 중국 노예사회시기 주무왕이 맹진에서 800제후를 회합하여 상(商)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정벌하기로 맹약(盟約)하였던 곳이다. 그후 주무왕은 제후들과 함께 5만 정예군사를 이끌고 목야(牧野)에서 상주왕의 70만 대군을 격파하고 드디어 상나라 폭정을 전복했다.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대는 바로 이 맹진 나루터를 거쳐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다. 맹진에서 황하를 건너면 맹주(孟州)에 이른다. 이곳에서 산서성 남부에 진입하면 곧 태항산에 이르게 되고 쉽게 팔로군 본부가 위치한 마전에 갈 수 있다. 그리하여 팔로군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모두 락양에 모여 맹진을 통해 황하를 건널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1938년 10월 포화가 울부짖는 무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무한보위전에 참가하였지만 드디어 무한 함락을 맞게 되였다. 무한이 함락되자 의용대는 미래 전투방향을 두고 지도사상면의 혼잡을 겪게 되였다. 의용대 출신인 문정일 선생이 회억한데 의하면 당시 일부 사람들은 북상항일을 주장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남부로 가서 국민당과 손잡고 싸우자고 하였다.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나중에는 각기 자기 주장대로 북상할 사람은 북상하고 남하할 사람은 남하하였다한다.

무한 함락직후 리유민의 인솔하에 허정숙, 리근산, 리달, 김철 등이 무한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가장 먼저 연안으로 갔다. 그 뒤를 이어 최창익이 장지민, 오민성, 공량우을 비롯한 10여명을 이끌고 연안으로 갔다. 최창익은 화북을 지나 중국 동북으로 진출하여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던것이다. 이들은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였다.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국민당 각 전구로 흩어져 싸웠다. 대본부는 김원봉의 인솔하에 국민당을 따라 계림으로 이동하였고 제1구대는 박효삼의 인솔하에 호남성의 제9전구에서 활동하였고 제2구대는 리익성의 인솔하에 호북성 제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새로 편성된 제3구대는 하남의 국민당 제1전구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민당 각 부대에 흩어져 활동하였기때문에 통일적인 행동과 령도를 진행하기 어려웠다.

1939년부터 1940년 사이 국민당 각 전구에 흩어졌던 의용대 대원들도 여럿이 뜻을 같이하여 북상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각 구대는 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리익성이 거느린 제2지대와 부분적인 1지대, 3지대 대원들은 락양에 모였고 락양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으로 일부는 맹진에서 황하를 건너 북상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본부와 1지대, 3지대 주력이 박효삼과 윤세주의 인솔하에 중경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팔로군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락양에 모였다. 김학무, 왕자인, 리익성, 김세광, 리춘암, 양민산, 최채를 비롯해 무려 80여명이 도강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박효삼은 제1전구의 사령인 위립황(衛立煌)을 찾아 교섭하였다. 위립황 역시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였지만 그때는 환남사변 직후였기때문에 의용대의 팔로군 지역 진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는 부분적으로 수차에 나누어 황하를 건넜다. 이들은 맹진 나루터에서 목선을 타고 황하를 건너 태항산 근거지로 들어갔다.

황하의 맹진나루(지금은 큰 다리가 나루배를 대체했음)

동북진출을 압두고 모인 조선의용군 주요 간부들

락양에서 적후공작을 할때의 문정일

 

황하 기슭의 맹진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이따금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멀리 황하대교를 지나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화북대지와 중원을 이어주는 길목에 놓인 맹진 나루터는 옛날의 번창함이 사라지고 지금은 인적 하나 찾아보기 힘들다. 맹진을 떠나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적들과 싸우려는 만강의 정열을 지니고 황하를 건너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은 윤세주가 작사한 《최후의 혈전》을 부르며 팔로군을 찾아갔던것이다. (불멸의 발자취 련재 전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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