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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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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빛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3402  추천:73  작성자: 김혁



반 고흐의 《해바라기》


나의 서재- 《허강재(虛崗齋》에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으니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이다.

미대 지망생 이였던 나에게서 물론 반 고흐는 익숙하다. 짧은 생애동안 1천 2백여 점의 유화와 1천 점 이상의 소묘를 제작한 광열의 화가, 살아서는 한 점의 작품밖에 싸구려 헐값으로 팔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그 작품이 최 상류층만이 소장할 수 있을 만큼 세계최고의 비싼 액수에 거래되고있는 기인... 전기적인 색채로 가득한 그의 삶과 작품세계는 미술사에서 신화의 반렬에 오르고 있다.

반 고흐의 그림 중에서도 황금빛으로 늠실거리는 《해바라기》가 압권이다. 그 그림이 미술품 경매의 기적을 탄생시켜서만이 아니다. 내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예술적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붓끝에 쏟아낸 그의 에너지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화폭 위에서 살아 생생하게 꿈틀거리기고 있기 때문이다. 계절의 열정과 작열하는 태양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그림들, 풍경 속에 태양이 보이지는 않지만 화폭 가득 그 빛은 담겨져 있다.

반 고흐의《해바라기》를 좋아하다 보니 우연히 손에 잡은 총서에서 해바라기에 관련된 과학문장을 진지하게 읽게 되였다.
해바라기 씨앗의 배렬은 시계 방향과 반 시계 방향의 라선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해바라기의 라선수는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이렇게 배렬 할 때 좁은 공간에 많은 씨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꽃잎 또한 이리저리 겹치면서 효률적인 모양으로 암술과 수술을 감싸있다. 잎을 배렬할 때도 맨 우의 잎에 가리지 않고 햇빛을 최대한 받을 수 있도록 엇갈리면서 잎을 배치한다. 이러한 잎의 배렬은 결코 한 장의 잎의 립장만이 아닌, 전체 잎의 립장을 고려한 것이다. 결국 해바라기는 생존에서 최적의 수학적 해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총합으로서 최적을 추구하는 자연계의《상생의 지혜》다.

과학총서를 읽으며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화두 하나를 잡아 보았다.
그 화두가 곧바로 바로 상생(相生)!이다.


오늘의 화두



상생! 오행설(五行說)에서는 상생을 가리켜 《쇠는 물을, 물은 나무를, 나무는 불을, 불은 흙을, 흙은 다시 쇠를 생(生)하여 줌을 이르는 말》이라 하였다.
자연의 리치로 생각해 보면, 목은 식물 또는 생물을 의미한다. 목은 태우면 화가 되고 화는 타고나면 재가되어 땅으로 돌아와 흙이 된다. 흙이나 바위 속에서 금속이 채취된다. 금속은 보기에는 단단하지만 불로 열을 가하면 액체가 되어 물이 된다. 수는 식물의 중요한 영양분이 되어 나무를 자라게 한다.

문자 그대로 상생이란 서로 相자, 살릴 生자로서 서로 도와 가고 살아가는 관계,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감을 뜻한다.

또한 상생은 상극에 대립되는 말이다. 상극적 관계, 불과 물의 관계를 비롯하여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따뜻한 것과 차가운 것, 곡선과 직선 등과 같은 대립적 요소를 융화, 조화시키는 것이 상생의 본질적 특성이다.

순 우리말로는 《어우름》이란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벌레들의 합창


자연계에서 상생 즉 어우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해바라기뿐이 아니다.
우리의 자연은 사계절이 가고 오는 순리와 먹이사슬에 따른 생태계의 질서를 섭리처럼 간직하고 있다. 산과 들, 강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언제고 《상생의 합창》을 그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 하면 흔히 《약육강식》이다 《적자생존》이다 하는 표현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식물학자 다비드 애틴 볼은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저서에서 식물들은 경쟁이나 투쟁보다는 상호의존을 통하여 번식과 번영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이 지구생태계에서 생물중량 면에서 제일 으뜸은 식물들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동물들을 다 한데 모아도 식물의 무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생태계에서 숫자로 가장 성공한 생물은? 바로 곤충들이라 한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움직여 다닐 수 없는 식물을 위해 곤충은 대신 꽃가루를 날라준다. 그 대가로 식물은 곤충에게 달콤한 꿀을 제공하여 배를 불리게 한다. 이처럼 파리나 벌 등이 가루받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식물은 멸종에 직면해야 할 판이다. 만약 열심히 땅을 파고 사체를 먹어대는 개미가 없다면 토양의 영양소는 순환할 수 없을 것이고 땅에는 죽은 동물만 쌓여갈 것이다.

생태계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암벽 우의 잡목과 풀이 손을 잡듯이 서로가 협력해 상생한다. 자연계의 생물들에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남을 제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일찍이 터득했다. 수와 무게에서 가장 막강한 생태계의 두 생물집단이 서로 물고 뜯는 상잔관계가 아니라 함께 손을 잡아 번창한 사실은 우리네 삶에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자연을 둘러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삶의 무질서와 혼돈, 그리고 욕망에 사로잡힌 세속의 문제들을 반추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무모한 전면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생물들보다 남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한 생물들이 우리 곁에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바 자연철학의 핵심내용은 곧바로 상생(相生)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질서와 륜리, 그리고 욕망에서 벗어난 공존의 드라마를 자연은 겸허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왜가리가 이른 봄 일껏 튼 둥지를 가을백로에게 넘겨주는 양보에서 꽃을 다치거나 다투지 않고 꿀을 얻는 벌, 나비의 춤사위에서 만물의 령장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얼굴 붉히며 배워야할 덕목이 보인다.
즉 상생의 덕목을 키워 오늘을 지키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인간의 지혜가 요청되는 시점이라고 하겠다



화가들이 그린 의자



다시 《해바라기》를 즐겨한 반 고흐로 돌아와 보자.

반 고흐는 의자를 주제로 해서도 그림 두 점을 남겼는데 바로 《반 고흐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이다. 여기서 고갱은 19세기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인물 폴 고갱을 가리켜 말한다. 따라서 이 의자를 그린 두 개의 그림을 잘 살핀다면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반 고흐의 의자》는 짚으로 엮고 소나무로 만든 수수하고 투박한 의자이다. 방 한 귀퉁이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의자에는 파이프 하나와 잎담배 쌈지 하나가 놓여 있다.
《고갱의 의자》는 반 고흐의 의자보다 더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그의 의자에는 소설책 두 권과 촛불이 놓여있으며 의자는 화려한 주단 우에 놓여 있다.
미술사에서 중요한 일석(一席)의 위치를 남긴 반 고흐와 고갱은 매우 특별한 관계였다. 1887년 프랑스 아를르에 있는 고흐의 작업실을 방문한 고갱은 고흐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함께 작업했다. 이 기간은 두 대가에게서 예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그러나 또한 매우 비극적인 시기였다.
고갱과 고흐는 서로의 교류를 통해서 각자의 예술세계를 풍부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배후에서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갈등과 더불어 서로 성격이 부딪치면서 드디여 그 유명한 귀를 자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최근 독일의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고흐의 《귀 절단사건》에 대한 새로운 설이 나와 미술계를 놀래 우고 있다.
지금까지는 반 고흐가 고갱과 싸우다가 격분해서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보는 것이 정설 이였다. 허나 사학자들이 1888년 당시의 경찰 보고서와 사고 무렵의 상황을 분석한 결과, 유일한 목격자였던 고갱의 행동에 미심쩍은 데가 너무 많았다. 고갱은 사고가 난 다음 서둘러 빠리로 떠났고 경찰들이 조사한 그의 소지품 목록에 펜싱 장갑은 있었으나 펜싱 검만은 빠져 있었다. 따라서 고갱이 서두른 나머지 펜싱 검만 챙겨 달아났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말하자면 고갱이 펜싱 검을 휘둘러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펜싱 검이란 유럽의 검술에 쓰이던 가늘고 긴 검의 일종.

반 고흐가 그린 두개의 의자그림은 두 화가의 역학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반 고흐 자신의 실상과 고갱의 이미지와의 대비로서 그들 지간의 라이벌 의식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작품인 것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 속의 의자가 놓였는 집에서 고갱과 한집살림을 하며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고 급기야 유명한 반 고흐의 《귀 절단사건》을 유발시켰으며 그 뒤 반 고흐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의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 의자들은 대화를 하고 있다. 두 의자의 주인도 그렇게 대화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결과는...



사대부들의 풍경


조선 후기 실학자로 리중환(李重煥)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기 위하여 세상천지를 떠돌아다닌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저서 《택리지(擇里志)- 인심》조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무릇 사대부가 사는 곳 치고 인심이 무너져 내리지 않은 곳이 없다. 그 리유는 사대부들이 당파를 만들어서 일없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권세와 리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리중환은 사대부들이 《자신의 행실을 잘 닦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자기를 론하는 것을 싫어하며… 당색(黨色)이 다른 사람과는 한 곳에서 살지 못한다.》라고 엄연하게 비판했다. 몇 백년전에 남긴 글이지만 그의 글을 보면서 얼굴이 붉어지는 리유는 오늘날 우리의 풍토가 그때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

반 고흐와 고갱의 이야기처럼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례가 우리 주변 《사대부》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재현되고 있다. 너나가 그 소용돌이 속에 있으면서도 꺼내기 싫어하는 화제이지만 짚고 보면 《문인상경(文人相敬)》이 아니라《문인상경(文人相輕)》의 부박한 바람에 문단이 썰렁한 한기를 느낀 지가 오라다.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고 수년 여 동안 내내 불어 치고 있으며 갈수록 그 부조리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어제 날 함께 문학도의 길을 걸으며 정차고 벅찬 눈빛을 주고받던 이들이 하나 둘 서로 반목해 버렸다. 세대는 세대끼리, 장르는 장르끼리, 녀류는 녀류끼리... 간혹 가다 맞 띄우면 소 닭 보듯 혹은 먼 산 보기를 하는가 하면 아예 고개를 탈아 버린다. 문학관련 달변들을 토하고 작품을 읊조리던 입으로 상대에 대한 험구를, 독설을 뿜는다. 서로에게 아주 못질을 해 댄다. 지어 문학행사가 펼쳐진 장소에서조차 팽팽한 기분으로 서로의 파벌을 찾아 짝지어 앉는 모습들이 눈꼴에 시리다. 환란이 끝임 없던 춘추전국시대면 오죽할 가 싶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문인들은 상대방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자신만이 문단의 일인자요 자신의 작품만이 력작이라고 역설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모든 문제는 나를 중심으로 한 본위적 생각에서 비롯한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밀어붙이는 편협한 자세, 스스로의 힘만을 믿는 자세 때문에 오만과 방자함에 빠져든다. 그리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정의로움이요 진리란 착각에 빠진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너야 어떻게 되든 나만의 효용극대화를 추구하겠다는 독선과 대립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인집단과 문인리더의 위상상실과 그에 동반한 인간소외, 왕따, 금전만능주의, 집단리기주의... 등등으로 파생된 현상들은 진정한 문인의 존재가 왜곡되고 부정되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문단전체로서의 최대 리익보다는 개인이나 개인을 둘러싼 작은 집단의 리익을 최대로 하는 경우가 많고 지독한 개인 리기주의가 팽배해 있어 전체적인 조화와 총합으로서의 최선을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로서 사회에 존경받는 이미지로 남아야 할 문인들이 오히려 남에게 베푸는데 린색한 사람, 맡은 바 일에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람, 자기 자랑 많이 하는 사람, 남을 헐뜯기를 잘 하는 사람으로 각인 되여 버렸다.

이러한 풍조의 다년간의 루적은 문단 인심을 그만큼 메마른 불모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언제 함께 공멸(攻滅)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형의 창에 찔리고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 으스스 들곤 한다.

부끄러움의 부재,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문인들의 초상이다.
처절한 싸움판으로 변해가고 있는 오늘의 문단상황을 보면 인간에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잘된 것으로 생각을 하는 속성이 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문학을 알건 모르건, 상대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건 말건, 오직 상대와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지금 아귀다툼의 주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싸워서 얻는 행복이 타인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죄악에 지나지 않는 바, 타인을 짓밟고 행복을 소유하게 되면 그들의 원망과 저주를 받아 점점 그 독성에 물들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인데... 이는 문학에 심취 되여 문단에서 양명하고자 하는 생존본능이 아니라 개개인의 치사하고 야비한 속물적 근성이 발휘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되어 우리는 마음속에 서로를 구분 짓고 생활 속에 차별을 두며 너무 오랫동안을 대항 론리 속에서 살아오게 된 것 일가???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될 경우에는 그 어느 쪽도 리득을 얻기는커녕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마음속에 갉아져 있는 오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의 잔인성과 시기심에 근거를 둔 이러한 악취미를 계속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결투문화를 정착시켰던 로마인들은 크게 지은 원형경기장에서 노예끼리 서로 참살하는 장면을 보고는 흥분하고 열광했었다. 그러한 결과 끝내 로마제국에서 사랑과 양보의 미덕을 몰아내고 내분을 일으켜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하게 되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보면 이러한 비극은 옛날 얘기만은 아닌 듯 하다.

인간관계에선 서로의 격려와 사랑 속에 생의 에너지가 창조됨은 물론이요, 미완의 존재인 인간의 결점을 서로 보완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대결구도를 취하게 되면 발산되던 에너지마저 줄어들게 되고 인간의 결점은 상대의 시기와 공격을 받아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이점을 저마다 똑 부러지게 나오는 우리의 《사대부》들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섣부르고 설익은 몰지각한 행태는 상생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다. 상생. 인간사에서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이 언제 중요하지 않을까 마는 요즘 우리 문단만큼 절실할까 싶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지금까지의 인류력사는 대립과 경쟁 그리고 투쟁의 력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의간의 태생적 갈등관계와 불협화음, 그 속에서 수많은 인간이 깊은 원과 한의 질곡 속에서 피와 눈물을 흘렸고 죽어갔다. 그 력사의 장하(長河)속에 우리의 민족도 참으로 오랫동안 싸우며 살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사고 방식은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적대론리와 투쟁론리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왔다. 옳은 내 편과 틀린 네 편을 갈라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의 적대적 관계를 열심히 만들어 왔다.《싸워야 잘 큰다》는 속담까지 만들어내다시피 타자의 소멸을 전제로 하는 극과 극의 생짜 개념에 버릇 되여 왔다.

부패무능 한 지배 계층으로 인한 탈향(脫鄕)이 그 한 양상이며, 일제하 왜적에 대한 항거가 그러했으며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이 그러했으며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더욱 그러하였다. 《계급투쟁을 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날마다 말해야한다. (年年講,月月講, 日日講》란 표어가 네거리에 붙여있는 환경에서 저마다 투계 닭처럼 목 볏 살리듯 하고 지내왔다. 이외에도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들에 대한 한국 브로커들의 사기행각과 그로 인한 서로의 거부와 반발 역시 또한 그러한 양상의 부류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달라져야만 한다.

이제 우리의 력사, 우리의 삶은 적개심과 대항의 구도가 아니라 리해심과 사랑으로 서로 더불어 껴안고 서로 생명을 살려 나아가는 상생의 구도와 철학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설문기구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필요한 가치관으로 20대-50대가 한결같이 《공동체의식》을 1위로 꼽았다고 한다. 21세기는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 다 함께 잘 살자는 우리 동양 고유의 상생의 문화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 가치관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을 위해 필수불가결 한 륜리인 동시에 크게는 지구촌 사회 생존의 륜리인 것이다.

전문가들이 분석하다시피
《지금까지 인류의 선택지는 대륙이냐 해양이냐, 독립이냐 종속이냐의 이항 대립적 택일(擇一)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세계는 상호의존관계라는 제3의 선택지가 생겨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랭전(冷戰)이데올로기의 종식과 함께 공생공존의 전략적 제휴가 확대되어 가고 있다. 서로 전쟁을 하던 적대국들이, 종교적 색깔이 다른 나라들이 유럽연합(EU)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이 그 좋은 사례다.
경제적으로는 경제주체들의 상호의존성이 높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통한 지속가능 한 성장을 모색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사회적 련결망의 구축과 행위주최의 상호의존성에 기존한 정보화 사회가 정착되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지역적 문화의 탈피와 문화의 국제화, 사상적으로는 이원론(二元論)의 붕괴와 상생원리가 지구촌을 시시각각 변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서로 독립돼 있으면서도 문화적 동질성과 지리적 린접성을 토대로 지배. 피지배관계가 아닌 네트워크를 만든다. 》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에서 벗어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전략과 상생의 철학이 시나브로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 아는 《순망치한》 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먹여 보자.

脣 : 입술 순 亡 : 잃을 망 齒 : 이발 치 寒 : 차가울 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함께 지내던 사람이 망하면 다른 한쪽 사람도 위험하다는 뜻.
춘추시대 말엽, 우(虞)와 괵은 린접한 형제 국으로 우는 강국 진(晋)에 이웃해 있었다. 진나라는 진작부터 두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형제 국인 만큼 그 중 한 나라가 도울까 두려워 주저하고 있었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진나라는 건널목인 우나라 왕에게 길을 빌려주면 많은 재보를 주겠다고 구슬렸다.
우나라의 궁지기(宮之寄)라는 현인이 진나라의 속셈을 간파하고 우왕에게 간언 했다.
《괵나라와 우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옵니다. 만약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고 했습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왕은 충신의 간언도 무시한 채 진나라에 길을 내주었다.
우나라가 길을 내준 터에 진나라는 괵나라를 정벌했고 궁지기의 예견대로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하고 우왕을 포로로 잡았다. 우나라 왕은 궁지기의 《순망치한》의 충고를 무시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만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專)》에 수록된 이야기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보내주는 것만 같다.
입술과 이발처럼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보다 중시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적 미덕이었다. 우리 민족의 지명편람을 보면 약수동이요 청수동이요 하는 지명이 많고도 많다. 동은 물(水)을 함께(同) 쓴다는 의미로 선조들은 마을이 물을 공유하는 공동체임을 리해하고 한 우물 한 강을 쓰며 오순도순 살아 왔다.
허나 오늘날 그러한 공공적 가치나 공동선은 제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지금 지축을 뒤흔드는 극적인 변화 속에 빠져들어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은연중 흔들리는 민족이 되어 버렸다. 조선족위기설이 나올 지경으로 그 현안은 여실하다. 이러한 급변 속에서도 내부의 갈등과 분렬에 빠져있다는 암매가 두렵다. 개개인의 아픔에 사로잡혀 과거의 상흔에 안주하고 반목과 불평만 하는 것은 인과의 진리를 모르는 소치(所致)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안은 누가 누구를 밟고 얼마를 버는가 하는 소아적 리기심을 충족시키는 싸움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개인의 명분에 얽매어 입술을 잃고 이를 앓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진정으로 상생의 묘수가 필요한 때이다. 급변하는 세상을 상대로, 미래를 책임질 상생의 힘을 키우는 것만이 우리의 존속과 발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로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상생의 해법을 찾아 나아가는 성숙한 모습을 모여줄 필요가 있다. 강하고 힘있는 민족은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전진해 나아갈 때 가능해 진다. 갈등과 분렬을 극복해낼 줄 아는 상생을 통해서만이 작지만 힘있는 민족을 이룩해 나아갈 수가 있다고 본다. 반목과 질시가 풍조로 되고있는 속에서는 힘있는 민족으로 남을 수가 없다. 반목과 질시를 극복하고 선진민족의 양상을 마음속에 새기며 손에 손잡고 목전의 진통을 이겨 나아가야 한다. 상생만이 우리의 불안한 불면을 잠재워 주고 고난의 암초를 피해 가는 주문을 열어 주리라 믿는다.

우리의 삶의 무대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연으로 이어진 세계임을 의미함에 다름 아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상극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상생의 원리를 깨달을 때 우리의 문단은, 나아가서 우리의 민족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이렇듯 상생은 우리의 미래의 비전과 직결 되여 있다.

일상 곳곳에서부터 서로가 어우러지는 세상이다. 양장을 한 사람과 한복을 입은 사람이 함께 팔 겯고 걸어도, 햄버거 집에서 콜라 마시면서 김밥을 우겨먹어도, 오페라와 판소리가 한 무대에서 만나도 어우러질 수 있는 조화와 상생의 시대다. 서로가 정면대응으로 시퍼런 펜싱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의자를 마주하고 무릎을 마주하고 서로의 마음을 열며, 발맞추어 박자에 맞추어 상생의 군무(群舞)를 추는 것이 바람직한 세상이다.

진부한 살풍경의 의식에 채찍을 날리면서 한 가닥 기대를 가져본다.

모두가 우리 안의 염치를 되살리면서 오래 동안 굳어빠진 관행을 떨쳐버리고 욕망의 크기를 조금씩만 줄이고 상반된 립장을 잘 조화시키면서 흔쾌히 과오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때, 또 이를 아름답게 받아들일 때 진정한 상생의 기운이 넘칠 터이니

빛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전후좌우 둘레둘레 어우러진 따사로운 풍경을 치유와 공생을 담은 량자의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을가!
새해에는 상생을 좌우명으로 삼고 청정한 넓은 가슴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며 함께 하는 세상, 함께 살아가는 일원으로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만드는 주인공으로 거듭나기를 약속해 봄이 어떨가?

찬바람이 부는 계절, 봄바람처럼 훈훈한 우리 공동체를 살려 가는 진정한 상생의 화두를 던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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