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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
춤추는 엔돌핀
김 혁
안해가 점 보러 갔다왔다.
가탈만 자꾸 지는 운수 사나운 팔자인 나를 위한답시고 외지에까지 가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점을 보고 왔다.
저녁 무렵에야 들어 선 안해의 표정은 썩 개운치 못했다. 점괘가 좋지 못하다고 했다. 이렇게 나쁜 점괘는 처음 본다며 점쟁이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다. 뭐 내 인생이 <<수레바퀴 밑의 풀>>같은 팔자라나...
<<어쩜 당신은 벼락이 내려도 꿈쩍 않을 수 있어요. 배포가 두텁기는>>
무감각한 채 책을 펼쳐들고 있는 나를 나무람하며 무언가 나에게 내밀었다. 붉은팥을 골 막하니 채워 넣은 작은 주머니. <<방토>>를 한답시고 그것을 저녁마다 베개 밑에 깔고 자란다. 내내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해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안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일이다. 미국병사 몇 명이 찦차를 몰고 경축회장으로 가다가 차 사고를 내고 죽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충돌에 머리가 묵사발이 된 그들이 웬일인지 대단히 행복한 표정,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흥미를 가지고 과학자들이 죽음, 나아가서 행복의 의미, 쾌락의 의미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대에서 신경학을 강의하고 있는 포스터 올리브 박사와 그의 연구팀은 이에 대한 연구를 장기간 진행해 왔다. 그들은 실험용 쥐들에게 알콜, 코카인, 암페타민, 니코틴, 식염수 등을 투여해 보았다. 그 결과 알콜, 코카인, 암 세포 등을 투여했을 때 쥐의 뇌 부위에서 어떤 물질의 분비 량이 급격히 증가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돌로 죽은 그 미국병사들의 뇌 속에도 이러한 물질이 대량 분비되어 있었다.
그 물질을 엔돌핀(endorphin)이라 부른다. 엔돌핀은 사실 단어 자체만 놓고 보면 체내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진정제, 즉 '몸속의 아편'을 뜻하는 말이다. 몸에 통증자극이 가해질 때 뇌는 상처를 입었다고 판단해 자연진통제인 엔돌핀을 분비하는데 통증이 심할수록 엔돌핀 분비가 최고도에 달하여 극단 상황에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엔돌핀은 마약 모르핀보다 100배정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엔돌핀은 스트레스가 있을 때 그에 대항해 통증, 불안 등을 경감시켜 즐거움과 진통 효과를 나타나게 하는 아주 고마운 물질이다.
인간의 린색한 뇌는 일생동안 그 엔돌핀을 이쑤시개 끝으로 찍어 맛볼 정도로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100번의 구애(求愛)끝에 사랑의 승낙을 받았을 때, 자식을 보지 못해 내내 고생하다 중년의 나이에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생각지도 않던 먼 친척에게서 거액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달랑 한 장만 쥔 복권이 거액으로 당첨됐을 때... 이런 환희에도 엔돌핀은 좁쌀눈만큼 나온다. 그런데 죽음에 림박하면 엔돌핀이 마지막 축복처럼 샤워라도 하듯이 뿌려 진다고 한다.
어깨가 처져있는 안해에게 그 무슨 의대교수처럼 인체호르몬에 대해 신나게 강의하며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엔돌핀 분비 량이 많은 사람이라고 웃어 보였다.
<<수레바퀴 밑의 풀>>.
안해가 받아 온 점괘를 되여보며 나는 지지부진한 한 자기의 인생을 은연중 되새김질 해 보았다.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정말로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 왔다. 어떻게 되다보니 내가 걸어 온 길은 다른 사람들이 여유 작작 노량으로 걷고 있는 탄탄대로가 아닌 뒤안길, 아니면 국도를 벗어난 진창 길이 아닌가 싶다. 삶의 길이 너무나 울퉁불퉁했다. 연거번거 들이닥치는 불상사가 호된 일격처럼 육신을 강타했고 무릎이 탁탁 접히는 것 같은 고통이 정신을 촛농처럼 만들어버리곤 했다. 세상살이의 올곧지 못함에 부대껴온 나날 이였기에 화려하고 거창한 것 과 내 인생은 거리가 멀었다. 그저 구질구질하고 고달픈 것의 련속이였다. 장애물경주에 나선 사람처럼 그런 것들을 나는 회피할 수 없었다. 때로 운이 좋아 작은 휴식과 성취를 맛볼 수 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굽이 우에 떠올랐다 꺼지고 마는 거품과도 같은 것 이였다. 그리고 세상은 한번도 나에게 출구를 내여 주지 않았다. 설사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조금 보였다하더라도 언제나 개구멍을 지나는 것 같은 주눅들림과 비굴함으로 그것을 통과하게 했을 뿐.
허나 나는 중력에 굴복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였다. 세상의 불쾌한 먼지와 소음의 기류를 덮어쓰고 나는 절망감의 정체와 아득바득 싸웠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어둠에 적응하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나를 고통의 류황불에서 빠져 나오게 한 구원의 빛이 바로 문학 이였다. 절망의 정체를 저울질하게 하는 도구, 말 못 할 사정과 가슴 터질 슬픔을 상쇠 해 주는 엔돌핀이 바로 문학 이였다. 문학, 그 비 실제적인 효응에 대한 매혹을 기르며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탐미해 들었다. 작품의 문학성보다는 환금성이 중요시되는 세월에 하필이면 이 세상 가장 열렬한 문학 광으로 등장했다.
현학적인 표현이 넘치는 왕성한 실험으로 현실과 환상사이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자신의 령역을 만들었다. 내 작품의 제재는 모두가 욕망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의 구도 속에서의 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과 그 개체가 어떻게 부서져 가는지를 갈파한 작품들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모두가 상식, 륜리, 가정, 법의 규정된 테두리 속에서 숨 막혀 죽어 가는 인물들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내장을 상하게 하는 맹독(猛毒)의 절실한 아픔이 남에게는 풀잎에 손 베는 아픔처럼 일편의 동정도 자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픔을 웃음 속에 삭이고있는 내가 어데 가나 귀를 열어야 하는 것은 똑같은 화제인 집을 산 얘기, 자가용을 갖춘 얘기, 승진한 얘기, 돈 번 얘기, 애인을 사귄 얘기... 들 이였다. 그런 항간의 귀 맛 도는 얘기들은 마냥 나와 무관한 것 들 이다. 자기보다 잘 난 녀자를 추구해 결혼하고 승진하고 집 늘이는 거에 목숨걸고 사는 사람들, 어쩌면 내가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세계가 그들의 인생 속에서 그렇게 순탄하게 그렇게 찬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돈, 권력, 출세, 류행... 모두들은 한사람같이 남들이 택한 욕심의 가치를 숭배하고 그 길에 합류해 한몫보려 뒤질세라 달려간다. 하나의 자대로 몰아대는 똑 같은 삶의 형태를 추구하며 그 대오에서 탈락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똑 같아 진다. 똑 같은 말을 하고 똑 같은 복장을 하고 ...
사회가 만들어 낸 그런 실용적인 관계의 체계에 나는 도무지 호흡을 맞추지 못해 했다. 세속의 요령에 젖어있는 능수 능란한 그들과 나는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낀다. 나는 그들과 엉겨붙고 싶어하면서도 밥의 뉘처럼 단호하게 고립된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누군가 <<삶은 결코 지고한 희망 따위가 아니고 무수한 타협의 련속이다. 적당한 타협이 안락과 쾌적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타협이 무언지 몰랐다. 낮은 처마 밑에 머리 수그리고싶지 않았다. 무리가 규정하고 무리가 인정하는 확실하다는 가치에 무언의 반항을 보여 왔다. 그래서 마냥 내가 제물(祭物)이 되었고 보이지 않는 횡포의 주먹에 매맞고 코피를 흘리곤 했다. 금전과 권력의 오만이 나의 성한 육신을 격리시키는 것을 보았고 내가 일껏 만들어 낸 가치가 다른 가치에 종속되거나 수단화되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어찔할 바를 몰라했다. 내 몸 우로 쏟아지는 부조리의 폭우를 막을 우산이 없어 그냥 맞기만 해 왔다. 그래서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이 시대에서 멀어지는 련습을 하는지도 모른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기실 괴로운 일이다. 어쩌면 줄곧 예술적인 요구와 현실사이의 간극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의 률법대로 살아가는 실성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유페된 자아를 지니고 세상으로부터 중절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생의 어느 시기 블랙홀에 잘못 빠져 들어가 중력을 상실해 버린 사람일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 진 운명을 속여 비켜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미 나는 혼자서 달리는데 익숙해 있다.
내 서재에 스스로 붙인 이름은 <<허강재(虛崗齋)>>이다. 빈 언덕, 몸과 마음을 비운 곳이라는 뜻. 그 <<허강재>>가 나의 소우주(小宇宙)다.
그 속에 쌓여있는 5천여권의 책과 2천여부의 영화 테잎이 나의 전부다.
신간 잡지와 서적들을 미친 듯이 사 읽고 새로 개봉되는 영화 테잎들을 대량 소장하고는 보고 읽고, 읽고 본다. 그리고 쓴다. 그 피스톤의 작동 같은 따분한 동작이 여태껏 내가 해 온, 그리고 하고 있는 짓거리다.
전국유명체인서점인 석수(席殊)서점은 책 안 읽는 풍토의 연길에서 고작 한해가 못 되여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의 가장 충실한 고객 이였고 회원 이였다. 보통회원으로부터 준회원 고급회원으로 되려면 천원 어치씩 사야 한 급씩 오른다. 남들이 4,5년 지나야 될 수 있는 고급회원증을 나는 불과 일년도 안 되는 사이에 땄다. 일년사이에 3천원 어치, 매달 평균 3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 살수 없듯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 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프점에서 나를 모르는 보스가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이다. 개봉영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 그리고 신예감독들의 끼 넘치는 실험영화 지어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모조리 사들여 본다. 열심히 영화지를 사들여 새 영화의 개봉일시를 알아내고 련인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새로운 개봉 작을 기다린다. 어느 음향점의 구석에서 남들이 내쳐 둔 흑백의 경전을 찾아내도 나는 그 테잎 한 장에서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한다.
좋은 작품 한 권에, 좋은 영화 한 부에서 나는 법열(法悅)을 느끼듯 몸을 부르르 전률한다. 그 속에 진리의 말씀이 있고 슬기의 샘터가 있고 고난을 이겨 나가는 주문이 있고 뮤즈의 노래가 있다. 순수한 심안(心眼)으로 보고 읽는 그것이 내 인생에 보탬이 될 황금의 열쇠인줄을 나는 안다. 그것은 내 불운을 <<방토>>해 줄 팥 한 주머니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살아가게 한다. 그런 아름다움에 집요히 천착(穿鑿)하며 나는 불운한 내 신세를 잊는다. 어쩌면 나는 문학과 예술을 위해 태여 나고 내내 그에 목말라 하며 홀로 서성이는 우주적인 짐승 한 마리 일가!
그래서 치명적인 아픔을 껴안고도 남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언 제보나 여유있는 모습이다. 마냥 정장을 거부하는 편한 캐주얼(休閑)차림으로 어깨를 솟구고 다니며 입만 열면 유머가 폭포로 쏟아져 나오고 맥주 집 가서는 맥주 반 박스쯤은 거뜬히 재끼며 남보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온갖 화제를 터뜨리고 둥글게 만드는...
주체하지 못할 감성으로 팽배해 있고 터무니없이 행복해 하는 남자.
어찌 보면 산다는 건 객기이다. 삶은 그저 도취이며 마술 같은 것이다. 진정한 성숙을 꿈꾸는 자는 늘 미숙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항상 자기의 처지를 최악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여유와 달관이 보인다.
그런 긍정적 자세와 행동은 엔돌핀의 분비를 촉진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체 내의 호르몬 체계와 세포의 활성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엔돌핀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기분이 좋을 때 많이 분비된다. 그러나 반대로, 걸핏하면 재수 타령을 하면서 짜증을 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우리를 불안하고 긴장하게 하며 피곤하게 하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목표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측면만 캐고 드는 이들에게 엔돌핀은 없다.
물질만능의 사고에 젖어 호사스런 여유를 보이는 유한인, 시대의 명제에 응분의 힘을 주지 못하고 시간의 전부를 외형의 보전에 소비시키는 무책임한 권력인, 이들에게 엔돌핀은 없다.
작은 것에 탐하는 소인, 큰 것에 질려 아부하는 겁쟁이, 자기의 일신만을 위해 양심의 벽을 무너뜨리는 자, 이들에게 엔돌핀은 없다.
엔돌핀은 오늘에 머물지 않으려는 자의 육신 속에 저장된 무진한 에너지,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자의 마음속에 고여진 진 다홍빛 희망이 아닐가!
스스로의 무드를 만들고 그로서 생성되는 엔돌핀에 도취되는 나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씻김굿의 휘모리에 신들려 있다. 그래서 <<쇠 바퀴>>의 짓눌림 밑에서도 싹을 쳐드는 <<풀>>이 되어 있다. 죽음 같은 유혹의 감미로움으로 그 엔돌핀의 생성을 위해 나는 계속 꿈꾸어야 할 가보다. 계속 뛰여야 할 가보다.
샌프란시스코의 연구팀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내인성 호르몬이라는 뜻에서 발견해 낸 성과에 엔돌핀이라는 학명을 붙였다. 내가 추출해 낸 엔돌핀에도 이름을 지어본다. 나를 나 이게 하는 엔돌핀의 학명은-
문학이라 부른다.
예술이라 부른다.
그리고
아집(我執)이라 부른다...
"연변문학" 200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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