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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잠수함과 토끼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2805  추천:73  작성자: 김혁

. 칼럼 .

잠수함과 토끼



깊은 바다 속을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잠수함에 심취되였던 때가 있었다. 과학환상소설의 대부- 쥘 베르느의《바다 밑 2만리》를 읽고 서였다.

잠수함이 나오기 130년 전에 그 출현을 예측하고 씌여진 환상소설, 신비한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펼쳐내는 박진감 넘치는 모험은 당시 꿈 많은 초중생이였던 나를 흥분시키기에 족했다.
《노틸러스》호는 그후로도 오랜 시간동안 나의 뇌리속을 떠나지 않고 잠항(潛航)했다. 지금도 그 흥심을 떨치지 못해 할리우드의 환상영화 DVD라면 모두 사들이는 나다.

잠수함은 1624년 네덜란드인 드레벨에 의해 발명, 당시는 고작해야 3메터 정도의 깊이에서 노를 저어 움직였다고 한다. 그러다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잠수함은 최초로 그 군사적인 가치를 드러냈고 19세기말 디젤기관과 어뢰 장비를 갖추면서 빠르고 위협적인 해상의 무기로 등장했다. 지금의 잠수함은 원자력의 힘을 입어 보다 우람한 몸체로 보다 신속하게 심해를 누비고 있다.

잠수시간이 오래되면 잠수함 속의 산소가 부족해지고 이산화탄소의 량이 증가되며 나중에 승무원들은 생사의 고비에까지 처할 수 있다.
초기의 잠수함은 이산화탄소를 측정하는 장비의 미달로 그 대용으로 토끼를 실었고 한다. 토끼는 후각이 민감해서 공기의 변화에 대해 재빠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였다. 보통 인간이 이산화탄소의 영향에 대해 알기 7시간 전에 토끼는 이미 심각한 반응을 느낀다고 한다. 잠수함 속의 승무원들은 토끼의 상태를 보고 공기오염도를 가늠, 잠수함이 언제 떠올라야 하는지를 파악하곤 했던 것이다.

오늘의 잠수함은 이산화탄소 량이 위험수위를 넘지 않도록 통풍관 속에 필터를 장치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 보았다.



약소민족의 고난과 운명을 묘사한 문제작 《25시》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렬에 오른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비유한 적이 있다.

토끼가 남보다 먼저 잠수함 속의 산소결핍을 감지하듯이, 작가는 그가 소속해 있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 남 먼저 감지할수 있어야 한다는 금언(金言).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그렇다면 우리의 작가들은 이 시대 산소함량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걸가?
우리는 과연 어떤 함량의 문학을 소지하고 있으며 또 요구하고 있는걸가?

문학상품화의 탁류에 휘말리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론의는 이제 진부한 말씨름처럼 들린다. 그리고 문학이 인간과 삶의 여러 양상에 대해 그 동안 진지하게 제기해온 질문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우리 작가들의 문학에 대한 우환의식, 사명감 같은 것은 점점 증발해가고 있는 것 같다. 어제 날 순수문학의 외줄타기를 선언했던 그 일사불란하던 행보가 하나 둘씩 흐트러지고 있는 것이다.

치렬했던 문학혼, 고심하던 자세는 오간데 없고 헐어버린 리념, 변질된 가치가 볼썽사납게 드러나 보인다. 기문종상(棄文從商), 기성문인의 동면, 필봉(筆鋒)의 자리바꿈, 량산되고 있는 작품질의 저하 등등의 현상들...

작가들의 시각 또한 흐릿하고 애매하다. 령혼도 정열도 석화되여 오로지 낡은 명성에 기댄 채 수준미달의 작품을 부끄럼없이 뽑아내는 이들, 글의 가치보다도 그것으로 교환되는 금전의 수치에 대해 매끄럽게 연구하면서 돈벌이 글에만 눈 박는 이들, 대다수인간들의 희로애락과는 관계없는 순 개인적 세계에만 침잠하여 제멋에 겨워 잠꼬대 같은 독백만 중얼거리는 이들, 우리 곁에 엄존하고 있는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 눈을 감고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는 이들....

문학을 명예나 날리고 고독이나 달래는 소일거리로 대하며 섣부른 안주에 빠지는가 하면 작가들이 상업주의와 영합하여 싸구려 시정배 꼴이 돼 버리기도 한다. 구경 이제 몇몇이 남아서 상업적 발상이나 자본의 론리에 휘둘리지 않고 문학본연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는가에 더럭 걱정이 가게 하는 거동들이다.

대체로 이런 작가, 이런 작품들은 가벼운 재치에 의존한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내용이나 문맥조차 통하지 않는 요설(饒舌)적인 말놀이, 현실기피와 삶에 대한 상투화적인 환멸의 표출 등에 소제(小題)를 걸고 경박한 직설적 토로를 보여주는데 그치고 만다. 자기 의존적 가치추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현실과 괴리되여 바라만 보는 관조미학의 온상 속에서 자기 소모적인 글쓰기에 정력을 허비하는 것이다.

이런 글들은 아무리 많이 써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아도취의 알량한 표현에 불과한 지저분한 것으로서 언어의 공해, 시간의 랑비만 조성할 뿐이다. 이런 경우 문학적 심상은 표면에서 겉돌 뿐, 작자의 문학적 존재는 망각되어 다만 저속한 잡 문학, 특히 문체에 있어서 극히 조악한 비 예술품으로 남게된다. 이러한 부박한 현상이 우리 문학의 주류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시나 소설을 읽고 거기에서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들이 이러한 느낌을 받는 것은 문학이 삶의 반영이고 창조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문학은 작가가 생존했던 동시대인들의 삶의 모습, 가치관과 시대의 소망을 담고 있다. 그 창조와 향유의 과정에서 작가와 독자는 자신의 주체를 확인하거나 또는 발견하면서 남다른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삶을 형상화하고 그 삶에 가치와 빛을 부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한 문학의 역할과 소명이라고 할 때 탁월한 소명의식을 지닌 작품, 작가들을 독자들은 경모의 마음으로 접하게 된다. 《조선고전문학의 꽃》이라 격찬 받고있는 연암 박지원, 박지원이 그처럼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은 그의 작품에 시종 강렬한 민중의식이 관통되여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허생전》,《량반전》과 같은 명저에서 그는 당시 량반계급의 부패한 현실에 대한 통분과 야유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동시에 하층민의 순진한 인간미와 비천한 생활 속에서도 의리와 덕행을 지키는 인간상을 진솔하게 그려냈다.

실학사상이 크게 대두되었던 당시, 문학인들은 민중생활과는 거리가 먼 공허한 토론만을 일삼아 왔던 도학자들의 성리학을 배격하고 이제까지의 풍류문학 같은 것에 맞서 상류계급의 향락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을 풍자하고 시민 생활의 애환을 적극적으로 노래하였던 것이다.


뛰여난 사실주의작가 최서해. 그의 체험문학은 가난한 민중의 굴욕, 체념과 반항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최서해의 작품은 《쫓겨난 조선, 고민하는 조선, 굶어죽는 조선》 즉 일제식민지에서 설움을 받는 민중의 현실을 누구보다 더 극명하게 표현한 문학으로서 그 깊이와 무게가 있다.


우리 조선족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로씨아문학을 살펴봐도 그렇다. 로씨아문학은 재래로 사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그들의 문학은《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문제와 철학, 종교, 륜리 도덕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민중들이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현실을 보고 로씨아작가들은 량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괴로워했다. 작가들은 민중이 가지고 있는 강인함과 정신적 아름다움을 인정하였으며 그 풍부함을 찬미하고, 문학 속에서 그리려고 노력했다. 로씨아문학만큼 진지한 휴머니즘으로 그때 그때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강하게 반영해온 문학은 없다. 그리하여 로씨아에서는 작가들을 실존의 수수께끼를 해명해 줄 현인, 항상 진실탐구에 힘쓰는 현자로 기대했으며 높이 선망했다.


인류 력사에서 볼 때, 많은 우수한 문학작품은 새로운 사회지평을 여는 열쇠의 역할을 해왔다.
《홍길동전》은 조선조 서자차별의 불합리한 사회적 관습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고, 《춘향전》은 녀성들이 자기 존엄성을 지키는 본보기를 보였으며, 로신의 작품들은 중국인의 고질화된 렬근을 해부하면서 사회계몽의 역할을 했고, 《톰아저씨의 작은 집》은 흑인노예를 위해 해방의 장을 여는데 기여했다.

이렇듯 좋은 작품일수록 그 작품이 주어진 력사적 시대나 력사적 현실에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말해 준다. 따라서 작품에 묘출(描出)되어 있는 인생의 모습이 영구히 숨쉬면서 비록 지나가 버린 시대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시간의 제약이 없이 길이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시대정신과 민족적인 문화의식이 뚜렷하게 결합되면서 생성된 문학적 가치가 그들을 명가로 그들의 작품을 명작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가 진부한 말씨름이 아닌 진지한 자세로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문학이냐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검토해볼 때 현실과 유리된 곳에서 문학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는 지극히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조선족사회는 후기산업사회의 여러가지 특징적 징후가 <<잠수함 속의 이산화탄소처럼 루적>>되여 몸살을 앓고 있으며 미증유의 충격에 부침(浮沈)을 겪고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의 문학이 과연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지 반성과 모색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다. 무병신음이나 음풍영월 식으로 작가 개인의 탐미나 작은 고뇌나 읊조리는 문학은 우리에게 그닥 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지금처럼 사회적 현안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시점에서 말이다.

문학작품은 작가라는 개인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에 반영되는 모습은 작가들의 시각(視角)에 따라 저마끔 다르다. 따라서 각자의 문학이 도달한 높이도 결과적으로 다르다. 문학의식이나 창작기법, 세계인식 등에서 각자의 기호에 따라 그리고 문학의 배경이 되는 력사와 환경에 대한 희원(希願)을 달리한 까닭에서 나온 결과다.

진정한 작가는 시대와 력사의 이방인이 되여서는 안 된다. 너나가 다 가지고있는 것이 아닌 창조적인 감성과 혜안으로 력사적인 현장에서 그 현실과 의미에 마땅히 관여하면서 문학이 우리 삶의 경험이 되도록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코드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 우리공동체의 운명 속에 몸을 던지고 우리의 삶과 인생에 따뜻한 시선을 주면서 우리 사회가 겪고있는 각종 문제들을 아우를수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 문학적인 기법과 장치를 리용하여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표현하고 그러한 삶의 의지, 혹은 소망을 다각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작가들은 우리 삶의 체험과 고뇌를 작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그것과 동화하고 일체가 되는 작업을 문학의 가장 선차적인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시대와 운명을 함께 하는 올바른 생각을 글에 담는 사람들이 많아야 우리의 문학이 살고 우리의 개개인의 문학이 세월의 시련을 이겨내고 불후에로의 접근을 시도할수 있게 될 것이다.

갈수록 복잡화 되여가는 사회의 메커니즘속에서 우리의 작가와 작품이 그 존재의 리유를 획득하는 길은 창작자세의 진지함과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부박한 시대의 통증을 견제하며 밝은 미래상을 여는 길과 통할 것이니,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진지한 예술양식으로서의 문학을 우리는 정녕 소지(所持)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시련 속의 토끼처럼 마냥 령민한 후각을 벼려가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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