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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3602  추천:73  작성자: 김혁


리얼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 강경애탄신 100주년을 맞으며

                       김 혁

 
1

    소학시절, 학교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그 산으로 오르는 자드락길에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가 호젓이 서있다.
작가 강경애를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문학전통으로 삼으려는 취지하에 조선족문인들이 비암산 기슭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를 세운 것이다. 비석의 뒤면에는 강경애에 대한 간력소개와 함께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강경애는 다년간 룡정에서 살면서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작가이다.
강경애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국 녀성문인들의 사랑과 지원에 힘입어 이 문학비를 세우는 바이다>>.
   1999년 8월 8일, 룡정에 강경애 문학비가 경립되던 당시 <<연변일보>> 기자로 뛰고 있던 나는 열심히 취재하여 뉴스도 싣고 강경애 특집도 꾸몄었다. 룡정출신으로 문학에 심취되여 있는 나에게서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왔다.
 

 
2

  강경애는 일제식민지시대의 <<간도>>- 룡정에 건너와  살면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대어 궁핍한 민중의 삶과 항일운동의 현실을 진실하게 그려내고 그 시기 <<시대정신의 최대치를 구현한>>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강경애는 1906년 4월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부자의 딸로 태여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자 어린 딸을 데리고 생활 대책이 막연했던 어머니는 장연에 사는 남자와 재혼을 하여 강경애는 장연에서 성장하게 된다.
일곱 살 때 벌써 집안에 굴러 다니는 <<춘향전>>에서 한글을 깨치고 고전소설을 독파하자 동네에서 다투어 데려다 먹을것을 사주며 소설을 읽게 했다. 그래서 <<도토리 소설장이>>라는 별명도 얻는다.
1915년 열 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소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수업료, 학용품 값 등을 제때에 마련하지 못해 눈치 공부를 하며 학업을 쌓는다.
   1921년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한 뒤 평양의 진보적 학생들로 조직되었던 친목회 독서조 등에 망라되어 교양을 쌓던 강경애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동맹휴학에 관련하여 1923년 10월 퇴학당한다.
이후 강경애는 주로 장연에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시작한다. 똑 부러지던 녀학생 강경애가 아무 성취한 것 없이 돌아온 것에 대한 주위의 비난에 심신의 고통을 겪으며 강경애는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한때는 야학교를 열어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1929년 10월《조선일보》에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 사이에서 절충주의 문학리론으로 성가를 올리는 이들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 그가 전공한 쟝르도 처음의 피상적인 서정시에서 특정된 정치적 립장과 비평적 시각에 근거한 리론을 담은 평론과 소설로 바뀐다.
  또한 집안 문제, 련애문제로 고민하던 청춘남녀가 만주 지역 항일무장 투쟁에 헌신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파금(破琴)>>(1931)을 발표한다. 그런가 하면 봉건적 인습과 성적, 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녀성의 해방을 로동자 계급의 전망으로부터 찾고자 시도한 최초의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1931-1932)도 집필한다. 한동안의 습작기간을 거쳐 강경애는 감상적인 문학소녀로부터 철저히 계급의식에 립각하여 글을 쓰는 작가로 변신한다.

 
  이무렵 강경애는 수원 출신으로 장연 군청에 부임한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을 만난다. 장연으로 발령을 받은 장하일은 장연에서 강경애의 집에 세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였고 곧 친구들을 모아놓고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로 장하일은 강경애의 문학세계를 리해하고 제일 먼저 강경애의 작품을 읽어주고 서로 토론하고 조언을 하는 좋은 독자였으며, 강경애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그런데 장하일의 조혼했던 안해가 나타나면서 두 사람은 장연에서 더이상 살기가 곤란하게 된다. 두 사람은 장연을 떠나 한동안은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지내기도 하다가 1931년 6월 경 간도로 이주한다.
  1932년 1월 <<신녀성>>에 수필 <<간도 풍경>>을 발표하는데 이는 강경애가두만강을 건너서 간도로 들어서는 감회를 피력한 글이다.
  강경애는 이후 중간에 간혹 서울이나 장연을 왕래하지만 주로 간도에 거주하면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한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씌여졌다. 체험의 현장인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는 체험을 한다. 간도에서의 방랑체험으로 강경애는 1932년 9월《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을 발표한다.
  룡정시절의 강경애는 남들한테 녀류작가로가 아니라 한낱 평범한 아낙네로 보이기가 일쑤였다. 문학동인이고 그녀의 이웃에 살았던 작가 안수길의 회고에 따르면 강경애는 《수수한 품이 여느 부인네들과 다를 것이 없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인상, 《살림살이에 열심인 가난한 주부작가》의 모습이였다고 한다.
    여기서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은 꼭 짚고 넘어가야할 인물이다. 장하일은 투철한 반일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일제가 완전한 노예화교육을 실시하자 룡정 동흥중학교 교도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장하일은 학교 교장과 더불어 사직서를 냄으로써 지대한 분노와 항의를 표시했다. 장하일이 사직할 때 전교학생들은 일제의 강압통제에 항거하여<<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한다>>면서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건실한 반일사상을 지니고 작품창작에 림 (臨)했으며 룡정에서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30년 《5.30》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항일무장투쟁이 발랄하게 전개되자 일본간도총령사관에서는 미친듯이 탄압, 검거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2,000명을 돌파했고 그 가운데《유죄》가 되는 사람이 무려 350명에 달했다. 1931년 7월,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2년 3월에는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우면서 《치안숙청》공작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했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 19사단을 《간도 파견대》로 삼고 1932년 4월부터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고 또한 지병(持病)인 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난다. 8월과 10월의 <<동광>>지에 발표된 수필<<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 있거라>>에 이때 간도를 떠나는 감회가 세세히 적혀 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와 안수길 등과 함께 조선족들의 문학단체인《북향》회 동인이면서도 고문격으로 또 가정주부로 창작에 몰두, 1939년에는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담당한다.
1938년 무렵부터 신병이 악화되어 1939년에는 고향인 장연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으나 병이 악화되여 귀가 먹고 앞조차 보지 못하게 된다. 결국 1944년 4월 26일 한달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면서 영면한다.
1949년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은 자신이 부주필로 있던 로동신문사에서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강경애는 치렬한 문학생애에 21편의 소설, 2편의 장편련재소절, 24편의 수필과 7편의 시, 3편의 평문을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간문제>>(1934), <<소금>>(1934), <<지하촌>>(1936), <<어둠>>(1937)등을 들수 있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소금》,《축구전》등 많은 작품들이 간도체험과 갈라 놓을수 없기에 룡정에 그의 문학비가 세워진 것이다.
 
 

조선과 한국에서 출간한 강경애의 <<인간문제>>


   강경애가 창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30년대는 일제의 파쑈적 탄압이 전에없이 기승부린 시기였다.  민족의식, 반일사상이 구현된 작품은 출판이 불허되였고 자그마한 요소도 수정이 강요되고 삭제당하였으며 신문련재가 중단되고 문예지, 종합지들이 결간, 페간되였다..
이런 렬악한 상황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개인의 안락을 찾아 민족을 등진 문인들, 매문가들도 나왔다. 그러나 강경애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시종 가난하고 천대받는 민중, 수난당하는 우리 민족의 편에 서서 그들의 운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그들을 형상화하는데 커다란 필봉을 기울였고 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였다. 강경애는 많은 녀류작가들중 드물게 하층녀성의 목소리를 공식 기록으로 끌어올린 식민지 시대 하층 녀성의 대변자였다.
  일개 가정주부로 더우기 신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진보적인 창작활동을 줄기차게 벌릴수 있은 것은 당시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간도지역에서 살면서 시대에 대한 투철한 인식에 기초하여 글을 쓴데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간도에서 살면서 창작에 전념한 것이 작가 강경애에게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긴장을 주었고, 그러한 긴장감에서 당대 어느 작가보다 뛰여난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일람해보면 그 뚜렷한 구현이 료연하게 알린다.
<<유무>>는 1934년 일본군의 잔혹한 토벌을 묘사한 작품이다.
<<소금>>은 간도에 이주한 조선인의 참혹한 삶과 그에 저항하는 무장투쟁 부대를 묘사한 중편소설이다.
<<어둠>>은 제4차 간도 공산당사건으로 사형 당한 항일혁명운동가의 가족의 고난과 과거 운동가의 전향을 그린 소설이다.
<<모자(母子)>>, (1935), <<번뇌>>와 같은 작품들은 1930년대 초의 항일무장조직이 패퇴하면서 전향해 가는 사람들과 남겨진 가족들의 고난 그러면서도 억눌리지 않는 기상에 대해 이야기한 작품이다.
이와 같이 가렬처절한 현장에 직접 서서 강경애는 항일 무장 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면모를 목격하고 그들의 혈투와 정당성을 기록으로 증언하고 그것을 일제의 직접 지배를 받는 식민지 조선에 전할 수 있었던 작가로 시대정신의 최대치를 구현했다.
강경애보다 앞에는 최서해가, 이후에는 안수길이 간도에서의 체험을 자신들의 문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녀성 작가의 경우에는 강경애가 유일하다.

 

강경애의 육필원고

 

3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강경애를 잘 알지 못한다. 한국의 문인이나 관광객들을 가이드해주면서 보면 <<별세는>> 윤동주를 알았지 <<소금>> 같은 강경애가 누군지 몰라했다. 지어 <<선구자>> 노래로 유명한 일송정을 둘러보면서 그 너무나도 가까이에 서있는 강경애 문학비앞에서 그제야 강경애가 누구냐고 묻는다.
소모적인 쟁론만 횡행하는 풍토에서 응당 올라야 할 문화인물선정에서도 구설수에 올랐다가 신고끝에 락방을 면하는 등 저승에서도 그의 운명은 편치 못하다.
강경애의 간도에서의 처절한 삶과 고투, 어둠의 시대에 남긴 빛나는 업적으로 하여 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오랫동안 현대녀성문학의 기초이며 높은 봉우리에 서있는 이 녀류소설가를 경모해 왔으며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다행인 것은 강경애가 차츰 대학원들의 학위 론문에서 자주 연구 대상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식민지 시대에 산출된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로 평가받고 있으며 또한 비평 담론의 주류로 등장한 페미니즘 비평의 제 측면을 감당할 수 있는 폭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살아 생전 저널리즘의 각광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작품집 한 권 가지지 못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쓸쓸하게 눈을 감은, 하지만 리얼하고도 치렬하게 주어진 삶을 사아온 녀성작가 강경애가 탄생한지도 어언 100주년을 넘겼다.
그의 작품을 더 널리 읽고 깊게 읽음으로써 바람세찬 오늘을 이기고 밝은 미래를 창조해나가는 우리의 정신적량식으로, 문학발전의 계기가 될수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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