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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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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의 잔치, 그리고…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3925  추천:73  작성자: 김혁

. 잡문 .


 노벨의 잔치, 그리고…

 
김 혁

 

 

 황금의 10월, 해마다 이맘때면 기다려지는것이 있다. (“몽룡의 알성급제를 바라 기다리는 춘향의 심정”이랄가). 은근히 기다려지게 되는 그것은 바로 세계인의 문학잔치 노벨문학상의 발표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장 마리 르 클레지오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실험적인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아동문학에서도 뛰여난 업적을 남긴 작가로 새로운 출발과 서정적 모험, 관능적 황홀감, 인간애 탐험등에 몰두한 작가”라고 그 선정리유를 밝혔다.

 
르클레지오

 9일 저녁 8시, 수상자가 밝혀지자 곧 웹에 떠오른 소식을 서둘러 나의 문학 블로그(http://blog.daum.net/ckkh99)에 담았다. 수상자의 략력이며 작품해제며 사진들을 정성껏 퍼서 소식은 종합해서, 조금 작아보이는 인물사진은 포샵처리를 해서 큼직하게 올렸다. (올해 수상자는 프랑스 배우 알랜들롱과 어딘가 비슷한 반듯한 얼굴이다. 지성과 미모가 빛나는 모습.)

이튿날도 사이트들마다의 문학코너를 메우며 쏟아지는 르 클레지오에 대한 평문들을 뽑아 블로그에 올렸고 내가 꾸리고있는 신문의 문화면에도 대서특필해 실었다. 마냥 문학적 행위에 걸신들려있는 나에게서 그 과정이 그렇듯 신날수가 없다.

이제 남은건 내가 읽을수 있는 어종(语种)으로 번역돼 나오는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들을 읽는 작업이다. (솔직히 변강의 오지인 이곳에서 국내국외의 이슈작이나 문학상 수상작들을 시효성있게 접해 읽기란 쉽지않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我的名字叫红)”은 상해인민출판사의 판본으로 2006년 11월에 출판되였지만 이곳까지 책이 당도하고나니 2007년 4월께에야 접해 읽을수 있었고,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의 작품도 “고양이는 정말 별나(特别的猫)”를 겨우 구했는데 절강문예출판사에서 2008년 3월에 출간된 판본을 올해 7월에야 접해 읽을수 있었다.)

르 클레지오의 작품을 읽자면 아마 명년 봄께 정도까지는 기다려야 할것같다. (그의 작품소개를 보노라니 “혁명”이라는 작품이 읽고싶어 진다.
태생지인 프랑스를 떠나 섬나라 모리셔스로 이민, 그 섬에 정착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장장 5대에 걸쳐 묘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 자서전적인 소설, 그 력사와 애환이 우리 조선족들이 겪은 삶의 질곡과 사뭇 흡사하니깐.)
 

 올들어 노벨문학상 “잔치”를 기다리고 “주객”, “하객”으로의 참석을 목마르게 기다렸던 한국은 또 한번 그 문턱에 가닿지 못하고 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해외언론 등에서 유력후보로 거론돼 기대를 모아왔으나 시인 고은에게서 올해도 노벨문학상은 비껴갔다. 4해째 반복되는 일이다. 잔뜩 부푼 기대로 수상후보로 거론된 고은이나 황석영의 집앞에 죽치고 앉아 발표를 기다렸던 기자들이 아쉬움을 씹으며 되돌아 갔다.


고은

문학인들의 비원(悲愿)이 결과를 보지못한것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다. 현대 일본문학의 대명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을 기다렸지만 탈락되고말았다. 하지만 일본은 4명이 한꺼번에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렬도전체가 다른 환희로 들끓었다. 그야말로 일가환희 일가우(一家欢喜 一家忧) 의 형국이다. 
 
중국에서도 막언(莫言), 한소공(韩少攻), 소동(苏童) 등이 후보로 거론되였지만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1997년 석가장에서 열린 전국청년작가창작좌담회에 참가했던 필자는 회의기간 내내 소동의 곁좌석이였다. 소동은 63년생으로 나보다 겨우 두세살 많은 나이, 하지만 짧은 시간에 크게 거듭나며 이룩해낸 그의 거족적인 성취와 작가적 변모는 나 그리고 우리세대 작가들에게 많은 귀감을 보여주고있다.)

동양권 작가들에게서 노벨문학상의 “벽”은 아직도 높다. 동양권에서는 지체높은 신분으로 “잔치”에 갔다가도 “문전박대”를 받기가 일쑤다.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동양인은 인도 시인 타고르,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타리, 오에 겐자부로, 중국의 극작가 고행건 등 고작 4명에 불과하다. 1901년 노벨문학상이 시행된 이후로 106명의 력대 수상자들 가운데 서구작가들이 90명에 육박할 만큼 노벨문학상은 서구중심으로 운영되여 왔다. 근 10년 동안에도 이번에 수상한 르 클레지오를 포함해서 무려 9명이나 되는 유럽인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타고르


가와바다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고행건


또 하나의 병폐가 있다. 유럽중심주의만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은 소설이 중심이기도 하다. 1996년 필란드의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 이후로 어느 시인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다고 한 나라 한 민족 문학의 존재유무가 정해지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동양권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원인을 다른데로 돌리는 행위는 그만두는것이 명지한 처사일것이다. 한 세기동안이나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되여 있는 그 황금의 문을 두드리기에는 우리가 지닌 한계점은 분명해 보인다.

노벨문학상이 또 한번 한국을 비껴간 소식이 터지기 바쁘게 한국문학의 수준미달과 그릇된 문단풍토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 고언(苦言), 한국문학의 발전방향과 대안에 대한 (高言)들이 쏟아져 나왔다.

종합해 보면-
뽀르뚜갈어 번역가는 "한국문학은 서정적이고 감성적이며 섬세하다. 반면 중남미 문학은 지성적이고 랭철하다. 한국문학작품을 번역해 놓으면 순수와 서정, 섬세함 같은 장점은 모두 사라지고 얼핏 유치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 문학은 지성적 측면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에스빠냐어 번역가의 판단도 비슷하다. "중남미 독자들은 수준높은 작가를 원한다. 한국의 작가와 독자들은 무턱대고 높은 상만 꿈꿀 게 아니라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영어권 번역가는  또다른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국 소설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외국문단에 발 붙히려면 몇명의 우수한 작가에 집중해서 장편을 번역해 내놓아야 한다."
우선 동양권, 더우기는 한글문학이 너무 민족주의적인 패러다임(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리론적인 틀이나 체계.)에만 갇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짚어 낸다.

한국적인 미학 자체만을 추구함으로서 너무 “한국적”이 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세계성이나 보편성보다는 개별성, 특정성이 두르러지고 있어 한국이란 령역을 벗어나서 느낄수 있는 문학사적인 가치가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고 모두들은 입을 모은다. 그 특정성 자체가 오히려 주제의 다양한 파생과 변환을 막아왔다는것이다. 자기만의 력사적, 정치적 배경과 너무 밀착돼 있어서 이 배경을 충분히 알고있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는 쉽게 리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지고 그것이 작품에 대한 흫미를 떨어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것이다.
이처럼 한글문학은 정서적, 환경적으로는 매우 복잡하고 론리로는 취약점을 안고있다.

서구 작가들의 수상작이나 유명한 작품을 보면 자신의 국가나 민족에 머물지 않고 인도주의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우는데 앞장서고있다.

(올해의 수상자 르 클레지오 역시 그러하다.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라는 조국을 가졌으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유와 작품의 변화를 추구해왔다.
그는 한민족의 김치와 설렁탕을 아주 좋아해 지한파(知韩派)라는 별호도 갖고있다. )

우리 조선족작가들에게도 이들의 경험은 적용된다.
중국문단과의 접목, 한국문단에로의 진출을 갈망하고 있는 우리문단의 고충은 글로벌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한국문단의 몸부림과 닮은데가 있다.
전세계 문학인들의 “대향연”을 지켜보며 내내 우리 조선족문학의 중국문학 내지 세계문학과의 접근방식에 대해 나름대로 사색을 더듬어 보았다.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문학중의 하나의 작지않은 지류(支流)이다. 여기에 중국조선족문학의 이중성이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문학의 하나라는 조선족문학의 기본성격 그리고 넓은 의미의 한글문학으로서 한국문학과 무관한 존재일수 없다는것이 조선족 문학이 갖는 이중성인것이다. (우리의 조선족 문인들이 작품의 독자층으로 한국의 독자를 념두에 두라는 제안도 한국전문가들에 의해 나왔다. 이러한 발상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와 있어서 좀 미묘한 문제이다.) 우리들만이 가진 이 이중성은 분명 조선족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수 있을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어느 민족 못지않게 다채롭고 치렬하며 력동적인 시대를 살아왔다. 이민, 전쟁과 혁명, 개혁, 리산(离散)의 굵직한 사건들을 피부로 겪으면서 그 현장을 낱낱이 펜에 담았다. 민족은 불행했지만 그만큼 문학적 소재는 풍부했다.
그런데 감히 말하거니와 그 파란만장한 력사에 어필할 대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연변안이라는 공간적 제한성과 시간적 한정성에서 작품을 썼고 쓰고있다.

따라서 단순히 우리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아집은 이제 타당하지 않다고 봐야할것이다. 우리 작가들의 필끝에서 주조된 어딘가 고루하고 과장된 우리만의 정서가 타민족, 그리고 타지역인들에게 공감을 주기는 힘들것이다.
(일밭에서도 부엌에서도 무대복장처럼 때깔고운 한복을 떨쳐입고 랭면이나 찰떡같은 특색 음식만 먹으며 틈만 나면 장구치고 퉁소불며 춤추고 노래하는 연극무대위같은 과장된 모습들. 대외홍보용으로 쓰이는 우리의 이미지는 향용 이렇다.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억지스럽고 면구스러운데 타민족들은 공감해 줄런지?)

우리의 작품들은 창작적 기량이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틀안에 대부분 잠겨 있다. 하기에 세공(细工)이 훌륭할지라도 동네 사당에 놓인 토우(土偶)에 그치고 도회지 번화대가에 놓인 거대한 청동의 조각에는 못 미치는것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국에 정착해 살면서도 대륙적 나아가 동아시아의 횡단성이 아니라 연변식 진부한 사유체계에 내내 갇혀 있는것이다. 조선족문학이 같은 언어를 쓰고있는 한국에서의 출판이 어렵고 또 번역출판된후에도 중국문단과 시장에서 판매가 부진한 리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 조선족 문학이 본령을 잡으려면 여러 문화가 교차하는 가운데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고 그 교차의 흐름속에서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는 작가들을 길러내고 그러한 작품을 출품해 내는 일일것이다.

다음 “개구리가 우물속의 풍경을 노래”하듯이 자화자찬에만 머물지말고 이러한 우리만의 울타리에서의 부글부글 괴여오르고있는 활력을 어떻게 국내, 국제화하느냐에 더 큰 과제가 있다.
우리의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저마다 이구동성으로 한목청 높이는 “어떻게 자체의 문학적 정체성을 보증하고 써내느냐” 하는 주제론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이 “어떻게 세상과 만나느냐”는 방법론도 함께 연구되여야 한다고본다. 그렇지않으면 “깊은 골목의 술이 잘 팔리지않는” 형국, “규방처녀의 얼굴이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형국이 될터이니.

물론 그동안 우리 문학계가 나서서 “조선족문학 알리기”를 힘써오지 않은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문단과 세계화에로의 접목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것이 아닌만큼 장기간에 걸쳐 조선족문학 자체가 스스로 조성한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반이 조성돼야 한다. 조선족문학의 좌표와 위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것이다.

여기서 첫보조로 번역문제가 제기된다. 수준높은 번역을 통해 우리의 작품을 중국문단에 소개하는 번역작업이 꾸준히 시행되여야 한다.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많게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두명이나 배출한 일본의 경우, 지난 45년부터 국가가 번역사업을 지원해 다른 나라에 2만여 종의 문학 작품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의 작품들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그것이 노벨문학상과 같은 큰 성과로 이어지는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온 식으로 중국문단에서 소수민족을 배려하여 제정한 상의 시상에 맞추어 한두편 선정해 그때 그때에 맞추는 성급한 번역작업같은 방식은 이제 바뀌여야 한다. 이런 수동(受动)적인 작업은 오히려 작품의 원색과 질을 떨어뜨리고 우리문학에 대한 중국문단의 혼란을 가중시키게 될것이다.

우리문단에서 해마다 수백권의 책이 쏟아지데 번역작품집이 나오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해마다 잡지사 별, 민간단체별로 적지않은 상을 세우고 시상하고있지만 각종 쟝르중에 번역작품에 대한 시상은 없다.
번역에 있어서 번역유능자가 많지않고 젊은 일대가 단절을 보이는것도 큰 문제이다. 아직도 작가의 길을 꿈꾸는 작가지망생들은 있지만 번역지망생은 보이지않는다. 지망생들을 상대로 펼치는 각종 문학강습에서도 번역강습은 결여되여 있거나 그 비중이 아주 적다고 봐야할것이다.

번역가에 대한 대우를 높이는것도 필요하다. 조선족을 세상에 알리는 방대하고 번중한 번역작업은 개인의 취미나 사명감으로만 강요하는것은 무리이기에 작가협회 등 관련부서에서 나서야하며 여기서 연변을 “춤과 노래의 고향”으로육성한적 있는 우리 정부의 관심이 요청된다. 우수한 우리 문학을 조선족의 하나의 브랜드로 중국무대에 알리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에서 번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바래본다.

번역을 앞두고 꼭 우리 시각과 입맛만이 아닌 어떤 작품들이 중국, 세계출판시장에 어필할수 있는지?  그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다음 연변작가협회를 비롯한 우리의 문학지, 언론지는 번역을 마친 좋은 작품이 중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출간될수 있도록 작가와 출판사를 련결하는데도 힘써야 한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것은 중국, 외국문학을 우리 조선족작가들이꾸준히 접하여 우리문학에 지적 자극을 줄만한 선진적인 문학을 동시대적으로 호흡할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우리의 작가들이 책 안읽고 자체의 독선에 빠져있는 풍토에서 이러한 기대는 과연 너무 큰것일가?) 우리의 작가들은 마땅히 그러한 변화를 알고 세계작가들과 인식을 같이하며 공통의 주제의식에 동참해야만 한다. 이러한 상호보완이 있어야 우리의 문학이 제자리 답보에서 벗어나 더 큰 족적을 남길수 있는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지에 갇힌채 아직도 웃기는 독선에 사로잡혀  붕당(朋党)끼리 비생산적인 싸움에만 정력을 허비하지고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에 부단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새로운 문예리론을 게으름없이 공부하며 오로지 창작에만 전력투구해야 한다.

하여야만 범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갖는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될것이며 바로 그럴 때, 중국문단은 자연히 우리를 인정할것이고 세계문학은 우리를 포옹해 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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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마을에서 큰 잔치가 치러질적이면 담모퉁이에서 이쁜 색시를 내내 훔쳐보거나 틈을 타서 잔치고물을 훔쳐 먹는 “악동”들이 있었다. 이 시각 나도 들뜬 “악동”이 된 기분이다. 변강의 오지에서라도 세계 최대의 문학잔치를 지켜보면서 그 향기를 맡노라니 “배고프던” 마음은 나름 풍성하다.

 "연변문학" 200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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