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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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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의 《탈무드》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4147  추천:73  작성자: 김혁

 

. 수기 .


내 청춘의 《탈무드》

 
김 혁


(1)

 행자 하나가 길을 떠났다. 나귀 한마리, 개 한마리, 등잔 하나와 책 한권과 동반하여…
어느 한 동네에 이르러 행자는 려장을 풀고 빈집에 잠자리를 청했다. 등잔불빛을 빌어 책장을 뒤적이며 밤의 고적함을 달랬다. 그런데 고삐에서 벗어난 나귀가 도망가버렸고 개는 늑대에게 먹혀버리고말았다. 책에 깊이 빠진 행자는 이를 감감 모르고있었다. 나중에  기름이 떨어져 등잔이 꺼져서야 행자는 잠이 들었다. 이튿날 잠에서 깨니 더 엄청난 변고가 행자의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떼강도가 들이닥쳐 마을의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모조리 앗아가고 마을사람들을 깡그리 주살(诛杀)했던것이다. 행자는 나귀며 개며 유일한 재산들을 모두 잃고말았다. 지어 기름마저 떨어져 불조차 켤수 없게 되였다. 허나 바로 그렇기때문에 강도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고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행자는 모든것을 잃었다. 허나 또한 모든것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는 귀중한 생명과 그 생명을 탐탁하게 가꿔줄 책이 남아있지 않는가!

유태인들의 법전(法典)《탈무드》에서 읽은 토막이야기이다. 역경과 좌절, 무원조한 삶에서 구원받고 그것을 이겨나갈 호신부가 바로 책이라면 이한 탈무드의 가르침이 내게도 적용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를 내 삶과 일상의 가장 비중 큰 분동으로 다루고있는 내게 있어서, 욕심보 넓게 이 세상 모든 책에 현혹되여있지만 그중에서도 혹애하는 책이 있다면 (간행물류쪽에서) 바로 내 청춘의 입문과 끈끈한 관련의 동아줄을 잇고있는 《청년생활》일것이다.

(2)

 나는 어릴적부터 룡정에서 책이 가장 많은 아이로 불리웠다. 《전례없던 시기》의 고생을 빌미로 중환에 계시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터에 우리 가정살림은 그닥 유족치 못한편이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가 책 사는 용돈만은 어김없이 내주었다. 그것도 하루건너 한번씩 나오는 새 책에 감질난 눈빛으로 어머니에게 어줍게 손바닥을  내밀면 어머니는 다른 애들과는 달리  《개눈깔》사탕이나 《신바닥》과자에 신경줄을 매달지 않고 책에 혼줄를 매단 아들녀석이 대견한  모양 선선히 돈을 내주군 했다. 그저 서점문가로 다가가도 나는 이슬람교도들이 가장 신성하시는 성지-메카로 들어선것처럼 경건해지고 그 어떤 아집(我执)에 자기를 잃군 했다.
사들인 책이 종이상자에 넘쳐나게 되자 어머니는 나에게 책장을 마련해주셨다. 책장이라야 다름아닌 집에서 쓰던 신발장이였다. 그 세층 높이의 신발장에 아니, 《책장》에 나는 몇백권에 달하는 그림이야기책들을 빼곡이 챙겨곶았다. 그것도 잠시, 그 《책장》마저 넘쳐나게 되자 어머니는 쓰던 찬장에 또 한번 색을 먹여 책장을 만들어주었다. 그《책장》에 바로 우리 말 《청년생활》이 종속국을 멸시하는 종주국처럼 버젓이 자리틀고있는것이였다.

나는 잡지를 많이 읽는편이다. 허나 15년 가까이 꼬박 한호도 빼놓지 않고 읽은 잡지는 단 다섯가지뿐-《소설월보》《독자》《이야기모임》(故事会),《오묘한 비밀》(奥秘) 그리고 유일한 조선말로 된 《청년생활》지뿐이다. 나는 《청년생활》지를 창간호로부터 읽었다. 우리  언어로 된 그리고 나의 첫 독서욕에 첫 키스같은, 화약같은 인상을 남긴 《청년생활》지에 대해 나는 종시 편애를 감추지 못하고있다.

《청년생활》지를 통해 나는 안중근, 홍범도 같은 우리의 영웅지사들에 대해 알게 되였고 《몽떼 크리스또백작》,《돈 끼호떼》같은 명작들을 접하게 되였다. 간추린 명작이였지만 그 매력만은 무진한 힘으로 나의 문학에 대한 홍심을 위발시켰고 세계문학의 진수에 대해 깨치게 했다.《청년생활》지에 상재한 아가샤 크리스티나 에도가와 람뽀의 추리소설은 미지에 대한 탐구심을 격발시켰고 구쏘련 당대소설 《보내지 않은 편지》등은 나를 열루에 젖게 했으며 뿌쉬낀이나 뻬떼피의 시구들은 청춘의 격정과 사색을 머금게 하였다. 밀로의 비너스로부터 우리 민속에서 동지죽을 먹는 유래에 이르기까지 맥주마시기 상식에서부터 장기 수풀이에 이르기까지 《청년생활》지는 우리에게서 생활의 세세한 구석구석까지를 어루만져주는 지침서로 간주되였다. 번쇄한 생활의 일상사로부터 깨도의 어섯눈과 지혜의 마음눈을 틔여주는 유태법전 《탈무드》처럼…

 (3)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중학시절부터 나는 학교나 사회적으로 《문제아》였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엄청난 비밀이 깨여지면서 오는 타격과 나에게는 우호적이 못되였던 의부아버지가 이 원체 복잡한 가정에 들어오면서 나의 무양하던 심기는 정을 잘못 맞은 못처럼 외곬으로 고부라지기 시작했다.
과대표로 지내면서 공부, 더우기는 글짓기에서 큰 기량을 보였던 나는 고중 2학년때 무리싸움으로 퇴학처분을 받고말았다.

본의 아니게 사회에 덜렁 버려진 뒤 석달도 못되여 내가 학교 다닐 때 쓴 작문이 콩클상에 입선되여 상금과 상장이 학교에 내려왔다. 학교지도부에서 사람을 보내여 다시 등교하라는 의향을 보였으나 나는 고리끼처럼 사회대학 나와 큰 작가가 되련다는 오기로 큰소리로 호의를 품고 찾아온 학교선생님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 대가로 열일곱살의 나이에 룡정원예농장의 스팀관과 하수도덮개를 만드는 공장으로 출근해야 했다. 삽질이나 메 휘두르기가 힘에 버거웠고 자전거로 반시간푼 걸려야 하는 먼 공장길이 힘들어 속눈물을 떨군적이 한두번 아니였다. 허나 나는 학교교원들앞에서 한 호언장담을 더우기는 나를 《속곳의 가시처럼 미워하》는 의부아비앞에서 한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쉼없이 읽고 쉼없이 썼다.
미구에 주물공장 청년종업원들의 생활을 반영한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의 집필을 끝냈다. 실말이지만 나는 어쩐지 첫 작품에 대해 신심이 컸다. 그때 《범 무서운줄 모르는 하루강아지》였던 나는 연변 나아가서는 전국에 내놓아도 인기를 끌 작품이라 스스로 만족의 미주를 기울였다. 당연히 내가 혹애하는 《청년생활》지에 투고해보냈다.

 원고지도 변변치 않아 어머님의 교수용 교수안지 뒤면에 쓴 그 글을 읽고 《청년생활》지에서 신씨성을 가진 편집 하나가 룡정으로 찾아왔다. 련계주소를 어머님이 근무하는 룡정신안소학교로 했는데 나를 이 학교의 로교원으로 알았고 이름도 필명인것으로 알고있었다. 어머님의 대동하에 집까지 찾아와서 애숭이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의 나를 본 그 편집이 헛밟은듯 움찔했다. 그리고 입가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저 한번 편집부로 왔다가라는 말만 남기도 두수없는 행차를 한듯 가버렸다.

일주일후 신문지를 넣어 운두를 잔뜩 높인 국방색모자를 눌러쓰고 나는  《청년생활》편집부를 찾았다. 편집선생들이 위조품을 보는듯한 미심쩍은 눈길로 나를 에워쌌다. 토끼를 품은듯 높뛰는 가슴을 엎누르며 나는 표절 혹은 번역작품으로 미심쩍어하지만 그 의사를 완곡적으로 표현하고있는 편집원들에기 미덥지 못하면 내가 또 하편의 작품을 새로 써서 가져올터라고 배심 두둑히 여쭈었다. 친지를 볼모로 둔 심정으로 돌아와 그 작품을 구하기 위해 다른 작품을 썼다. 《단꼬와 백설공주》라는 제명의 좋은 일한 하여 《백치》로 몰리는 남편과 그를 사람하는 안해의 밀월기간에 일어난 사연을 소재로 엮었다. 결혼은 둘째, 녀자 손끝도 건드려 못본 애숭이로 밀월을 어떻게 썼던지 기억 안나지만 그 작품마저 읽은뒤 편집원들은 내 어깨에 신뢰의 손길을 얹어주었고 대견의 눈길을 보내주었다. 한번 소설의 뒤머리에 짤막한 략력까지 달아주었다. 1985년 8월호 《청년생활》지에 드디여 나의 첫 소설(처녀작)《피그미의 후손》이 실리게 되였다. 지금 보면 가위의 장정 설계도 조야하기 그지없고 잡지값도 겨우 45전…허나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듯했다. 대번에 잡지 여섯부를 사서 친지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들의 외곬행위에 대해 당혹에 쳐들린 눈매를 하고있던 어머니는 나의 작품을 받아들고 눈시울을 붉혔다. 소학시절의 담임교원이 실과를 사들고 축하를 보내왔고 친지들도 모여 술상을 벌리고 그 며칠간 우리 가정은 숫제 명절기분이였다.

소설원고료 170원이 나왔다. 한달동안 꼬박 용광로앞에서 살갗이 익어번지게 일해도 한달로임이 고작 37원인 내게있어서 굉장한 액수의 거금이 아닐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 돈의 일부를 잘라 내게 양복을 해주었다. 내가 일생에서 처음으로 입어본 양복이였다. 처녀작이 발표되여 일주일만에  《연변일보》에 두번째 소설 《맥주 두병》이 발표되였고 그로부터 일년이 못되는 사이에 《북두성》잡지에 《까막골 박아Q전기》,《개간지》잡지에 《노아의 방주》가 발표되였다. 《피그미의 후손》으로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킨 뒤 나는 그 자매편으로 《모함메드의 후손》을 썼는데 후에 《은하수》잡지에 발표되였다.


처녀작의 발표는 내 인생의 궤적을 바꾸어주었다. 창사초기의 인원결핍으로 고민하던《길림신문사》의 요청으로 나는, 고중도 채 졸업하지 못한 《문제아》였던 나는, 당시 연길 동광에서 부란공으로 닭알깨우기를 하고있는 허드레 림시공이였던 나는 필재가 양양한 청년으로 인정받고 신문사기자로 단연 발탁이 되였다. 그때 내 나이는 만 스무살이였다.

(4)

 이러구려 시간은 10여년 흘러 애초 편집원들이 미심쩍은 눈길로 흘려보던 나도 편집기자생활에서 초단수를 넘겼고 선배들의 본을 내여 애숭이문학도들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꽂은 어중간한 나이로 박두했다.
97년께, 나는 온 사회에 콜레라처럼 만연되고있는 출국열과 그 진통에 잇따른 사기피해문제를 두고 큰 글을 쓰려 뼈물고있었다. 한국인사기행각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추적해보면서 《코리안드림(한국환상)》에 흔들리고있는 우리 사회를 진맥해보고저 기자의 사명감, 작가의 필재로 나섰던것이였다.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라고 제명을 달고 특종기사집필에 착수하게 되자 나는 또 한번 내가 혹애하는 《청년생활》지에 맨처음으로 투고를 했다.

한편 취재하고 한편 집필하면서 한편 련재를 했다. 기성작품 아니고 사건발생과 동조하여 언제 어떻게 끝낼지 모른 련재였기에 신고가 적지 않았다.  그보다 나의 작품을 조갈들게 기다리고있는 임철씨를 비롯한 편집원들의 로고가 컸다. 때론 인쇄공장에 반납할 시간이 코앞에 박두했는데 나의 련재만은 그만큼 자리를 비운채로 간작을 기다리는 논밭처럼 휑그레 비여있군 했다. 그때 나의 BP호출기에 열에 열은 모두다 편집원들의 호출이였다. 그네들의 진지한 청탁과 성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장편기사를 채 마무리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청년생활》지에 1년 가까이 련재되면서 조선족사회의 최대열점을 건드린 아 장편특종기사는 그해 《청년생활》화연문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흑룡강신문사 《한얼》표 실화문학 1등상을 거듭 수상했다. 잇달아 단행본으로 묶어져나왔다. 그러고보니 나의 첫 창작집 역시《청년생활》지와 인연을  맥(脉)으로 출산된 셈이다.

누가 말했는지 세상사는 원자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이루어진것임이 틀림없다. 나와 《청년생활》의 인연담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천국의 꿈》을 집필하던 당시, 문학에 현혹된 나머지 가정생활에는 빵점이였던 나는 가정파탄의 고배를 마시고 심신을 앓던 중이였다. 게다가 어머니와 녀동생의 출국으로 혈혈단신으로 남은 나는 어느 한 극성스런 문학팬과 의지하여 북대의 달팽이세방집에 들어박혀 나의 붕괴된 인생의 좌표계를 정하지 못해 술로 자탄하고만 있던중이였다. 오직 필을 들어야만이, 필을 들고 원고지우를 광분하는 들말처럼 달려야만이 내 신상에 부착해오는 행복의 깨심을 잠시나마 잊을수 있었고 저그만 원고료였지만 그 원고료로 로임마저 체불받는 불우한 문인의 주린 위와 빈혈증세를 보이고있는 머리를 달랠수 있었다. 그러던중《청년생활》지에 실린 련재를 읽고 문학이 소박맞는 세월에 하필이면 문학에, 문학인에 심취된 처녀 하나가 나를 문의해왔고 《청년생활》의 주선으로 나는 부진을 씻고 새로운 코스를 달리는 선수마양 젊음과 활기의 희망과 활력소를 주입받게 되였다. 그야말로 문학은 나의 구원의 녀신이였고 《청년생활》지와 같은 원지들은 참담한 이 세계에 남아있는 한뙈기의 록빛 흥건한 오아시스임이 틀림없다.

원체 새 천년을 맞아 역시 당당한 모습으로 뛰고있는 《청년생활》지에 대한 덕담을 념두로 시작한 글이였는데 자기 신세담만 넉두리한듯 필이 안스러움에 주춤인다. 여기서 이 글을 서둘러 마무리하면서 죤 웨이 쉴레터의 서적에 대한 찬미사 전문을 빌어 《청년생활》에 축복을 보낸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끼거나
외롭다고 생각될 때
그대를 찾습니다
나의 마음이 의심으로 흔들리고
자신감은 먼 기억처럼 사라질 때
당신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내 삶에서 무엇인가 혼란스러울 때
당신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나의 몸이 아플 때
어머니가 따뜻한 죽을 끓여주시군 했던것처럼
내 령혼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당신은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과 사랑에 대한 당신의 따뜻한 이야기가
나를 고독한 동구에서 걸어나오게 했습니다
용기와 참을성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가 나에게
생의 의지를 갖게 했습니다
당신의 처방전에는 지혜와 령감을 주는
강한 약재가 포함돼있습니다
도전의 산이 앞을 가로막을 때
그우로 올라 구름과 별사이에 선
용기있는 사람들이 제공한 약제들입니다
나의 생이 유머를 잃었을 때
그리고 나의 재능을 세상과 나눌 기회를 잃었을 때
이 약으로 나의 존재는
새로운 에네르기와 기운으로 채워집니다
진정한 사람을 산 사람을
인생에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의 발걸음에 가벼움을 주고
나의 꿈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지혜로운 령혼을 가진이들의 생각이
나를 구속하고있는 두려움을
한순간에 날려보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나에게
미래를 볼줄 아는 영양제를 주었습니다
기쁨과 행복과 승리
건강과 충만함과 사랑으로 가득찬 미래를…


“청년생활” 2000년 3월호

 
 


 


 


..........Sundan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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