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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無字碑)
김혁
"드라마 “무미랑 전기(武媚娘传奇)”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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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부의 무측천의 일대기를 보여준 드라마 “무미랑 전기(武媚娘传奇)”가 브라운관을 달구며 안방극장을 찾았다.
빅스타 범빙빙의 주연으로 된 드라마는 3억원이나 투자 된 대형 사극으로 지난해 말 부터 중국 곳곳에서 촬영, 제작되여 올해 년초에 방영되였다. 끝임없이 리메이크 된데서 이 드라마가 무측천의 몇번째 드라마인지 모른다. 하지만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유명 녀배우와 거대 자금의 투입으로 “무미랑 전기”는 또 한번 가장 핫한 드라마로 떠올랐다.
무측천은 중국 력사상 유일무이한 녀제(女帝)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 부임한 뒤 2000여년, 중국 력사에서 녀성 황제는 단 한 명, 바로 무측천이였다.
하지만 그녀만큼 중국 력사상 호훼포폄(护毁褒贬)의 대상이 된 인물도 드물다. “정권 유지를 위해 무자비한 숙청을 일삼고 자신의 딸과 아들마저 죽인 천륜을 저버린 철녀”라는 평가와 “거의 반세기 통치기간중 강력한 중앙집권제 확립으로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을 꾀한 성군”이라는 평가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럼에도 무측천은 중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두드러지게 강력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정치에서 적절하게 당근과 채찍을 병용했고, 국제정세에 밝았고 인재를 등용했다. 그 결과 그의 집정기를 “당나라의 황금시대”로 평가받기도 한다.
때문에 극적인 줄거리로 가득 찬 그녀의 이야기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 자주 오르는 “1순위의 소재”로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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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은 당나라 초기 624년에 상인 무(武)씨의 가문에서 태여났다. 빼여난 미모 덕분에 그녀는 14살때 태종(太宗) 리세민의 후궁으로 뽑혔다.
리세민은 그녀를 “미랑”이라고 부르며 끔찍하게 아꼈다. 그런데 태자 리치도 그녀를 보고 사모에 빠졌다. 궁에서 벌어진 희한한 “삼각관계”였다.
그러다 리세민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화살을 맞은 상처로 앓다가 붕어(崩御)하고말았다. 태종이 죽자 무측천은 머리를 깎고 장안 감업사(感业寺)의 비구니가 되였다.
태종의 5주기에 고종(高宗)으로 등극한 리치가 그 절을 찾았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무측천은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궁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후궁이였던 녀자가 다시그 아들의 후궁이 된것이다. 그때 무측천은 이미 서른한 살, 고종보다 네살이나 많았다.그러나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인차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녀는 기개와 권모로 천하의 대세를 바꾸었다.
고종이 두통과 시력의 저하로 정무를 힘들어하자 무측천이 점차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타고난 정치적 수완으로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나 인사 문제를 잘 처리하였다. 남편은 천황, 본인은 천후로서 실질적인 국정의 동반자가 되였다.
황위를 찬탈한 사악한 요녀로 알려졌지만 그녀는 뛰여난 정치재능을 보였다. 그녀는인재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하는 “광초현재(广招贤才)”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요즘 영화와 텔레비에서 셜록 홈즈를 뺨치는 정탐인물로 부각되여 자주 등장하는 재상 적인걸을 비롯하여 준재가 그의 주위에 즐비하였다. 그녀는 특히 적인걸을 신뢰하여 이름대신 “국로(国老)”라 부르고 늘 그의 뜻을 따라 자신의 뜻을 굽혔다.
또 과거제도를 개편하여 특별한 재능인을 뽑았고 호구와 토지를 철저하게 조사하여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먹고 살수 있도록 했다. 황족이나 문벌귀족에게 그녀는 공포의 대명사였지만 백성의 립장에서는 구세주였던 셈이다.
무측천은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려고 애썼다. 면류관을 쓰고서 직접 신하들을 만나국사를 처리했다. 남성 황제들처럼 후궁도 두었는데 때문에 후세의 사가들이 그녀를 천하의 음탕녀로 그렸다. 그녀의 통치에 대해선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폄하의 시각이였다.
무측천이 문인들을 우대하면서 그 풍조가 정착되여 당대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광범위한 예술과 학술의 무대에서 활보 할수 있었다. 2,200명의 당대 시인들이 지은 근 5만여편의 시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왕유(王維)․두보(杜甫)․백거이(白居易)․리상은(李商隱)등 기라성 같은 뛰여난 시인들을 연줄로 배출한것도 이러한 풍조가 시문학 발전에 큰공헌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자치통감(資治通监)”은 "정사를 스스로 펴서 명찰, 선단하였기에 당시의 영현들이앞을 다투어 그를 섬기다"라고 그녀를 정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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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의 서쪽에서 90키로메터 떨어진곳에 건릉(乾陵)이 있다. 고종과 무측천이 함께묻힌 묘역이다. 건릉에 이르는 약 1키로메터의 길은 문무 석상들이 시립해 있는데 이 묘역은 당 18릉 중 최대 규모라고 한다. 고운 돌로 포장되여 있는 좌우에 석상을 낀 이 길은 과거엔 4품 이상의 벼슬아치만 걸을수 있었다고 한다.
묘역의 목구멍이라 할 위치에 이르면 우측에 흰빛의 거대한 비가 서있다. 이름하여무자비(无字碑)이다. 하얗게 비여 있어 백비(白碑)라고도 한다.
중국 최초의 녀황제 자리에 스스로 등극하여 중원을 호령해 온 그녀였지만 대신들에게 유언을 남겨 굳이 무자비를 세우게 했다. 그렇게 갈래 많은 전설을 루루히 남긴 녀황제는 막상 죽어서 비석에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깨끗하게 비여있는 햐얀 그 비석은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색조의 사색을 당혹감에 덧칠하게 한다.
비석은 무덤에 묻힌 사람의 이름 및 행적을 나타내거나 어떤 사적(史蹟)이나 업적을널리 알리기 위하여 돌에 글을 새겨서 세우는것을 말한다. 자고로 돌이나 쇠에 글을 새기는 까닭은 그 기록을 천년, 만년 남기를 원해서이다. 하지만 절대권력을 휘두른 무측천은 자신을 위해 거대한 빗돌에 명가의 필체로 현란한 수사를 그들먹히 새긴 비문이 아닌 비여있는 무자비, 백비를 세웠다. 한 글자도 적지않은 무자비는 무측천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성찰과 평가유보의 의미로 남겨 놓은 기념물이 아닌가 싶다.
어찌보면 무자비는 한 덩이의 돌같아 보인다. 우리가 그에서 력사의 행간을 읽어내지 못하면 무자비는 아닌게 아니라 그저 오래된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다시 헤아려보면 그것은 그저 돌덩이가 아니며, 비여있는듯 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것으로 가득차 있다.
자신의 명리를 챙기고 현시하기 위해 거품많은 명함과 프로필을 흩뿌리고 다니기를 좋아하는게 요즘 현대인들의 풍경이다. 적지않은 이들은 품 들이고 돈 들여 속세의 돌을 화려하게 쫗아서는 본인 이름 석자를 크게 새기길 원한다. 그러한 이들에게 많은것을 말해주는 무자비이다.
저저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쉼없이 빼곡히 적어 내려가고있는 우리의 삶이 세상의평가를 저만치 넘어서는, 깨끗하게 여백이 있는 삶이였으면 좋겠다.
무자비에 관한 김종제씨의 시 한수 읊으며 글에 끝점을 찍는다.
버려진 뼈같은
비석에 글자가 하나도 없다
묵언으로 여태 면벽의 수행 중일까
아니면 침묵으로 등을 보이며
아직 항거하고 있는 것일까
움직임 없이 굳건하게 서 있는것이
좌탈(坐脫) 같기도 하다
눈을 감고
돌속에 새겨진 점자를 읽으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니
다투어 튀여나오는 파란의 생애
분명 죽지 않는
저 삶이 세상 그 무엇보다 높은
탑이 아닐까
파헤칠 관도 없으니
살아온 나날들을
흔적없이 지우고 간것이다
비석마저 세우지 말았어야 하는데
무덤 대신 남겨놓은것이리라
뼈 속에 새겨진
흰 무늬의 혈서 같은것
살갗에 새겨진
지울수 없는 문신 같은것
그가 원했던 자서전 같은 글들이
야생의 꽃속에서 피여나고 있다
조만간 불에 타버릴 나도
들녘에 뿌려져
백비로 서있어야 함을 알겠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송화강"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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