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느 화백의 실크로드
김혁 (소설가. 인물전 “한락연의 이야기”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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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길을 따라 소통하고 교류하며 문명을 꽃피워 왔다.
그 대표적인 길이 중국 장안에서 시작돼 중앙아시아를 관통, 유럽 지중해까지 연결 된 실크로드다.
중국의 고전 “서유기”에서 등장하는 당승의 원형인 현장법사가 1,300년 전 기록으로 남긴 귀중한 자료 “대당서역기”에 대서특필했던 곳이 바로 그 실크로드다.
고구려 고선지 장군의 활약과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혜초 스님의 법경이 바람소리로 남아 있기도 한 길이 바로 그 실크로드다.
이 길을 통하여 도자기, 향신료, 유리, 보석, 옥, 직물, 쌀, 밀 등 인류가 생산해 낸 모든 물건들이 거래 되였으며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비단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길을 따라 물건만 오고 간것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도 함께 주고받았다.
동서양의 교역과 문화의 네트워크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약 6400 킬로메터에 이르는 방대한 륙로 교통망이 구축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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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실크로드는 또 한번 굳잠에서 깨어 나고있다.
중앙아시아의 경제성장 잠재력이 부각되면서 주변국인 일본에서는 실크로드 루트의 동방의 종점은 일본이라고 력사를 왜곡하고 있는가 하면, 중국을 비롯한 한국, 로씨야 등 린접국들은 그 경제협력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도 있다.
따라서 한국이 중국의 동부 도시들과만 교류에 그치지 말고 특색있는 서부지역과 교류의 다변화를 꾀해 새로운 “한중-로드”를 구축 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나오고있다.
한반도 종단 철도를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확장하겠다는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에서 실크로드는 “장미빛” 환상의 길목이며 그 길 위에서 한국과 중국은 경쟁자이자 동반자인 셈이다.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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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우에 혼을 묻은 화가가 있다.
1898년 이주민들이 일군 북간도의 룡정촌에서 태난난 그의 원명은 한광우, 한락연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1914년 룡정에서 헤이그 밀사 리상설이 창설한 “서전서숙”이 전신이였던 룡정보통학교를 마쳤고 용정에서 3 ·1운동의 추동을 받은 독립시위에 가담하였다. 일경의 리스트에 오르자 1919년 상하이로 갔고 임정의 초기 멤버로 활약하였다. 상해에서 중국 최초의 미술전문학교를 나왔다.
1923년 심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29년 프랑스로 가서 루브르예술학원을 졸업했다. 재학 당시 유럽 각국을 돌며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자 그는 곧 중국으로 돌아와 무한, 중경등지에서 항일투쟁에 적극 투신하였다.
서역의 풍광을 담아 낸 한락연의 유화
그는1943년부터 중국에서 처음으로 서역의 벽화모사와 유물 고찰작업에 착수한 사람이다.
이때 장족, 몽골족, 위구르족 등 중국 소수민족의 생활풍습 등을 생동감 있는 화법으로 그려냈는데, 이는 당시 중국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의 이름난 석학 성성(盛成)선생은 1980년대 한락연의 그림전을 보고 이런 글발을 남긴적 있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었다. 또한 그는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차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낙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곳, 그때를 발견했다. 그는 변경 동포로서, 변경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1947년 다시 벽화모사와 유물고찰을 마치고 둔황에서 란저우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한락연은 실크로드 위에 육신을 바쳤다.
한국에서는 광복 60주년을 맞으며 덕수궁미술관 한락연 특별전을 가졌고 이어 “대통령상”이 추서(追敍)되였다.
2010년 고향인 룡정에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조성되였다.
피카소등 세계화단의 불세출의 인물들과 실크로드에 깃들어있는 인류의 보귀한 유산들이 한락연의 꿈을 키울 모판이 되였고 그의 화법에 그러한 심력이 녹아 들어있다.
고향 룡정에 조성된 한락연 공원
조선인 이주민의 후예로서
,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력사문물의 지킴이”로서 그는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을 위해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혼신을 던졌으며 무엇보다도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주력하여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전기적 색채가 짙은 한락연의 경력은 깊은 잠에서 깨어 난 실크로드와 더불어 뒤늦게 나마 중국과 세계 화단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청우재(听雨斋)”에서
“문화시대” 201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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