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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장암촌
2016년 01월 20일 10시 01분  조회:1883  추천:11  작성자: 김혁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6)

피로 물든 장암촌 

김혁

 


"장암동참안유적" 표지석 (사진 리련화 기자)

세전이벌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잡고있는 오붓한 마을 하나가 있다. 지금은 동명촌 제2촌민소조라 불리지만 옛적에는 장암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노루골이라는 이름의 마을, 초가집과 벽돌 기와집이 어우러져 섞인 작은 마을,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 이지만 수십년전 이곳에서는 일제의 몸서리치는 만행이 자행된 참변의 현장이였다.

봉오동, 청산리 대첩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일제는1920년10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조선인 마을들에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였다. 그중에 장암동 마을이 당한 참화가 가장 컸다.

마을 마을 앞쪽 언덕을 따라 오르니 기념석 하나가 유표히 보였다.
철책에 둘러쌓인 석비정면에 “장암동참안유적(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뒤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에 용납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6月30日

유적비에는 몇글자로 응축된 그날 장암동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일었던가!

청산리 전쟁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지역 조선인들에 대한 야수적인 보복으로 혈안이 되였다 조선인들이 독립군들에게 지원의 손길을 뻗친데 대한 분풀이였다. 이참에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ㆍ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이대첩을 이룰수 있었던것은 지역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군을 쫓아 씨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일본군과 남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은 도로변에서 조선인 마을만 보면 수색하여 청년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녀성들을 간음하며가옥에 방화하는 등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삼광전략(三光戰略)” 즉 모조리죽이고, 략탈하고, 불지르는 초토화 섬멸 작전이였다.

1920년 참안을 앞둔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 있었다. 마을에능 영신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 “3,13”반일시위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원들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한다.
이에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여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1920년10월30일 새벽 0시30분, 룡정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였다.(일본 제19사단사령부, <간도출병사>)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리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다시 불속에 던져넣었다.

가슴치며 절규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그런데 며칠후,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아직 채 마르기도 전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강요했다. 유족들이 위협에 못이겨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조짚단우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귀축같은 만행을 지르고도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을 축하했다.

그후 이중학살된 참혹한 시체가 누구의것인지도 가릴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일제는 장암촌에서 류례가 없는 잔악한 행위을 우리 동포에게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장암촌은 폐허가 되고말았다.

이를 목격한 룡정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기시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와 “로이터 통신사”등에 보도되였다.

사책들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해 훈춘에서 있었던 “훈춘참변”과 함께 우리 민족이 동북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였다.

유적비에 묵념을 올리고 마을 동쪽골짜기에 자리잡고있는 노루바위를 찾아보았다.
마을의 주병근(79세) 할아버지에 의하면 “노루바위는 원래는 제법 운치가 있는 바위였는데 한때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바위 일부를 부셔버렸다”고 한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하지만 답사 내내 노루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처연히 들려오는 꿩 우는 소리만이 어제날의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픈 수난을 이야기 하는듯 했다.


"연변일보" 2015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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