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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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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제전 (2)
2007년 06월 29일 05시 58분  조회:2835  추천:73  작성자: 김혁

 

.2006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소설본상작품

 

의 제전 (2)

김 혁


 




 

진, 세상과 부딪치다


적봉,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산은 세월가도 벌거벗은 진솔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적봉, 그 넉넉한 산세의 품에 안겨 북소리의 주술을 타고 화동들은 서서히 자랐다.
적봉, 그 기슭에 자리잡은 《화택》에서 북소리는 가득했다.
초가집 지붕에 처마물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고 멀리 물레방아 방아공이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은 그 은은한 북소리가 매일같이 부락의 아침을 깨웠다.


춤이 좋은 사람들이 모여든 《화택》은 몽환이 뒤얽힌 또 하나의 세계였다. 거기에 박혀 고치에서 나오려는 작은 벌레처럼 날개를 털면서 진은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진에게서 삶의 즐거움이 묻어났고 그 얼굴에는 분명 천상의 기쁨이 어려있었다. 학당패가 없기에 마냥 말석의 위치가 차려졌지만 춤을 출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진은 가슴이 들떴다. 그 와중에 초동머리를 겨우 면한 나이에 무용단에 입단했던 진이 어느새 코밑이 거뭇한 청장년으로 자라있었다.

뜰의 평상에 앉아 명이 진과 교와 염을 불렀다. 그들의 작고 느린 성장을 독려해왔던 명에게 세사람은 이미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위치에 서있었다.

―이제 너희들이 한번 익힌 기량을 펴보일 때가 왔다.

남하족은 3년에 한번 꼴로 무용제를 펼치곤 했다. 다른 부락에서도 이 성대한 축제에 동참해 춤군들을 송파(送派)하곤 했다. 경색에서 방(枋)에 오른 이들을 부락에서 크게 장려했다. 부림소 한마리와 밭 세마지기를 상으로 내렸고 그 집안의 화세(火稅)를 3년간 면해주었다. 그보다도 이는 무용권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화신무용단에서의 위치의 승격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무용제는 남하족과 산북족을 가르는 지경인 곡성부근에서 거행되였다. 행사는 사흘씩 열렸다. 이는 화신제날에 못지 않은 부락의 큰 행사였다. 부락사람들이 좋은 나들이옷들을 꺼내 입고 희희락락 모여들었다. 담곁에 커다란 무대가 설치되였다. 족장과 장로들, 그리고 무용계의 권위들이 나와 평을 맡았다. 역시 투석(投石)으로 평점을 했다.

진의 어머니는 무용제가 열리기 며칠전부터 서둘렀다. 아들에게 줄 《천인병(千人餠)》을 빚었다. 한집 한집 다니며 쌀을 한줌씩 빌었다. 그렇게 빌린 쌀을 찧어 떡을 빚었다. 그 백명, 천명의 손을 거친 정성어린 떡을 먹고 진이 방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춤경색이 열리는 장소까지 나가지 못했다. 아들의 성적에 념려되여서였다. 그저 무용제가 열리기 전날 《화택》으로 찾아가 명에게 《천인병》이 들어있는 떡보자기를 넘겨줬을뿐이였다.

드디여 무용제가 열렸다. 수천의 깃털이 날아오르듯 명절의 장소는 노란 해빛으로 가득했다.
등장을 앞두고 진은 어지간히 긴장된 모습이였다. 이는 3년간 해달을 이고 뛴 고심에 대한 한차례의 검증이였다. 학당패도 없는 몸으로 온갖 수모를 삼키며 뛴 자기의 존재를 증명할 기회였다. 혜안으로 발탁해준 무자 명에 대한, 홀몸으로 아들의 양명을 바라며 지내온 어머니에 대한 보답의 시간이기도 했다.

진의 긴장을 보아내고 스승이 먼저 교를 내보냈다. 언제 보나 자신으로 넘쳐있는 교.
교는 홍석 8개, 백석 2개의 평점을 받았다.

―잘했어!

명이 무대에서 내려온 교를 포옹해주었다.
염을 올려보냈다.
염은 홍석 6개 백석 4개의 평점을 받았다.
명이 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허나 염은 울상이 되여 담아래 쪼그리고앉아버렸다.

맨나중에 진이 올랐다. 긴장의 너울을 뒤집어쓴채 손아귀에 흥건한 땀을 쥐고 올랐던 진은 무대에 오르자,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짜장 다른 사람이 되여버렸다.
머리우에서 빛나오르는 태양은 어머니가 빚어준 《천인병》처럼 둥글었다. 그 병을 잡으련듯 진은 팔을 길게 뻗쳤다. 태양은 뜨거운 열기의 손을 펼쳐 진의 온몸을 만져주고있었다. 그 빛의 은혜에 보답하련듯 진은 하늘을 우러르며 뛰고 솟고 굴렀다. 진이 팔다리를 저을 때마다 춤사위에 묻어오르는 해빛을 사람들은 보았다.

잘헌다아!!!

무대아래의 사람들이며 돌담에 가맣게 매달린 산북사람들마저도 갈채를 보냈다. 진의 춤사위를 면밀히 주시해보는 명의 긴 눈섭이 격동에 푸들푸들 뛰였다.
진은 홍석 9개 백석 1개의 평점을 받았다. 지금까지 제일 높은 평점이였다. 화동들이 무대에서 내려오는 진을 우르르 에워쌌고 환성을 지르며 진을 헹가래쳐올렸다.
 

이튿날, 돌담에 경색결과를 알리는 방이 나붙었다. 격전뒤에 찾아드는 무기력감으로 해가 적봉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꼬박 내리 잠을 자고난 진은 게나른해서 방을 보러 갔다. 방앞에 가맣게 모여 목을 빼들었던 사람들의 눈길이 일시에 진을 향해 몰부어졌다. 그 눈빛들을 축복처럼 받으며 진은 의기양양 돌담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의 입으로 헛비명이 새여나갔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방의 으뜸에 오른 사람은 진이 아니였다. 무용단 성원도 아닌, 집에서 사인무용도사를 모시고있는 어느 응모자가 방의 첫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조랑말을 타고 시중군을 거느리고 생색을 내며 춤경색장에 나타난 한 존재를 진은 머리에 떠올렸다. 그는 홍석 10개로 만점의 평점을 받았다.

현기증으로 눈앞이 어지러워하고있는 진을 향해 개가 뛰여왔다. 불독이 진을 바라고 다급하게 짖어댔다. 진의 바지가랭이를 물어당겼다. 불독이 그렇게 안달을 떠는 모습을 진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늦은 더듬이로 진의 머리속을 후볐다. 진은 얼른 불독의 뒤를 따라나섰다.
 

불독은 진의 집으로 곧추 뛰여가고있었다. 진이 헐레벌레 달려 이른 그곳에 집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큰 참화(慘禍)가 진을 기다리고있었다. 진의 집에 불이 났던것이였다. 《천인병》을 빚어 만드느라 며칠밤을 샜던 어머니가 그만 아궁이앞에서 잠에 떨어졌는데 튀여나온 불똥에 집이 타고 어머니는 불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한것이였다.


진, 가르침을 받다


그해 여름을 진은 염병에 걸린 사람처럼 지냈다.
그해 여름을 진은 가슴이 내려앉는 현기증속에서 보냈다.
그해 여름을 진은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방에서 떨어진 렬패(劣敗)감에 사로잡혀 보냈다.

산다는게 이처럼 불확실한것이였을가? 불운이 예고하고 닥치는것은 아니겠지만 그에게 닥친 불운은 너무나 급작스러웠고 엄청난것이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춤경색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의 백부가 부락에서 가장 큰 대호(大戶)였다. 돈으로 구워삶은것이 뻔했다. 그 내놓고 거래되는 부정에 진은 경악을 금치 못해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진은 북채를 잡지 못했다. 불앞에 나서지 못했다. 불이 무서웠다. 불은 이미 진의 생활 전체를 휘둘렀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육신을 사른 불이 그렇게 무서울수가 없었다. 진은 다시 어제날의 불을 무서워하던 아이로 돌아가있었다. 동인인 교와 염의 권고도 스승 명의 엄벌도 진을 북채를 잡지 못하게 했다. 손끝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력감에 짓눌려 우두커니 누워있기만했다.
세상의 외진 곳으로 달아나고만싶었던 진은 홀로 적봉으로 오르는 계단을 톺았다. 화신상이 모셔져있는 그 동굴속으로 향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튀는 소리를 내며 언제나처럼 화당에서 불이 이글거리고있다. 불이 더운 숨을 내뱉는다.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들이 알큰한 냄새를 풍기며 동굴안으로 퍼진다. 깊은 물에 잠기듯 어지러우면서도 아늑하다. 그 불의 기운에 진은 잠시 멍해지고만다.


진은 화신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화신상이라야 흙으로 빚어만든, 아이들 인형에 다름없어보이는 작은 토우(土偶)였다. 화당의 정가운데 삼발이(三脚架)를 놓았는데 그우에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정좌한 형상인 토우를 모셨다. 푸짐한 불빛이 토우의 작은 몸에 금박을 입혔다.

―불이 무섭더냐?

문뜩 동굴속에서 하나의 질문이 메아리친다. 진이 움찔 놀라며 머리를 쳐들었다. 토우가 눈을 번쩍 치뜨고있다. 그리고 입술을 어눌하게 놀리며 묻는다.

―참말로 불이 무섭더냐?

그 조화(造化)에 놀라 멍청해있는 진에게 또 한번 물음은 날아왔다. 작은 토우의 목소리는 생각밖에 웅장하였다. 소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으므로 목소리는 종소리처럼 동굴을 맴돌았다. 진이 급기야 머리를 끄덕였다. 낯빛이 심한 어지러움으로 무눌져 심각한 혼돈에 자맥질하는것 같다. 절실한 두려움으로 입을 열었다.

―무섭습니다. 참말로. 무서워서 더는 가까이 하지 못하겠습니다. 더는 춤을 출수 없을거 같아요.

불구덩이의 불은 진한 선홍빛으로 물들어 진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 색조 현란한 꽃잎 같은 불빛에 진은 눈이 아프다. 토우가 그런 진을 내려다보았다.

―괴로움도 좋은데 쓰면 약이 된다. 어머님을 여읜것은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할 고통의 벼랑인셈이다. 그러나 춤에서 락방한것은 네가 아직 완숙치 못한 신을 신고 섣불리 길을 나선 결과다.

무엇이 되겠다고 규정하는 순간 세상은 그것이 욕망임을 안다. 네 이름자 껍질에 너무 집착하지 말어라.
진은 미처 다 알지 못한 표정으로 화신을 쳐다보았다.

―저 불을 보아라. 보았느냐?
―네 보았습니다.

화끈한 느낌이 드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진은 답했다. 불의 화기에 살갗이 따끔거린다.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얼굴이 그 화기에 쓸려 쓰라리다.
토우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신에게 불을 내려주기를 바랬더니 신은 불을 주었다. 불만 준것이 아니라 죽음도 더불어주었다.
불에는 청정(淸淨)한 불과 부정(不淨)한 불이 있다. 불은 락원에서도 빛나고 지옥에서도 탄다. 불이 따스하고 그 빛도 화려해서 사람들을 매혹시키지만 불에 닿는것은 파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은 감미로움이며 또 고통이다.
네 몸을 태우는 불은 결국은 네 자신의 손에서 인다. 큰불에도 꿈쩍 않고 버티며 살아가다가도 내부에서 튕기는 불꽃에 끝내는 마음이 타서 무너지고만다. 외부의 불보다 더 무서운 불은 언제나 너의 내부에 있다.
네 마음속의 부정한 불을 버려라.

진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말을 마친 토우는 눈을 내려 감고 입을 다물고있다. 자신의 감성을 리성의 쇠도리깨로 내려친 화신의 말 마디마디가 선명한 울림으로 진의 가슴에 꽂혔다. 지그재그 모양을 그리는 빛이 머리를 뚫고 쏜살같이 지나가는듯하다. 질러져있던 쇠빗장이 조금 열리려고 한다.
 

밤, 화택의 동자들은 아닌 밤의 북소리에 잠에서 깨였다. 진이 석등을 밝혀놓고 마당에서 뛰고있었다.




진, 사랑에 눈뜨다




곡성부근에서는 간혹 장이 펼쳐지곤 했다.
칼자루를 잡은 이들에 의해 같은 족속끼리 서로 반목했지만 생계를 위해 암암리에 펼쳐지는 민간적인 교역은 막아내는수가 없었다.
돌담의 틈새로 서로 건너가고 서로 건너와서는 서로의 토산물을 바꾸곤 했다.
남하에서 나는 과일과 산북에서 나는 약재를 바꾸기도 했고 산북에서 구워만든 도자기와 남하에서 결어만든 대바구니를 바꾸기도 했다. 바람이 잦다싶으면 두 부락사람들이 슬렁슬렁 모여들었고 구석구석에 자잘한 생필품들로 난전이 펼쳐졌다.
이에 대해 부락의 족장들은 한눈은 감고 한눈은 뜨고있다. 그러다가도 지나쳤다싶으면 문뜩 장터에 뛰여들어서는 재수없이 걸려든 이들에게 벌금을 시키고 징벌로 태형(笞刑)을 가했다.

그날은 좋은 날씨였다. 날씨는 너무 맑아 해가 쨍그랑쨍그랑 명랑하게 소리내어 웃는것처럼 보인다. 진은 교와 염과 함께 장으로 나갔다. 개가 킁킁대며 뒤를 따른다. 어데 가나 진의 뒤를 묻어다니는 불독이다.
교는 떠오르는 일월이 새겨져있는 도자기를 사들였다. 선물할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진은 북채에 달았던 붉은 술이 닳아져 패물난전을 찾았다. 패물이 일매지게 늘여진 가게에서 붉은 술을 보아내고 값을 물었다.

―그냥 넣으세요.

진은 눈을 치떴다. 패물가게의 주인은 진을 보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가게의 물품으로 보아 산북의 장사치였다. 섶을 깔끔하게 여민 옷매무새의 녀자는 산수화속의 인물처럼 단아하고 고즈넉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진을 보고 녀자가 웃으며 말했다.

―화신무 추는걸 봤습니다. 저번 춤경색때…
―춤 좋아해요?

진이 물었다.

―예. 녀자가 아미를 숙이며 대답했다. 녀자의 볼에 홍조가 번졌다.
곁에서 불독이 어딘가를 바라고 컹컹 낮은 소리로 짖었다. 그러자 그쪽에서도 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북종의 화견(火犬) 한마리가 조금 떨어진 돌담근처에 오줌을 지린다. 녀자가 손짓으로 개를 불렀다. 개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진이 귀엽게 개의 머리를 다독여주었다. 반들반들한 코가 손바닥에 와닿는다.

―홍모(紅毛)얘요. 우리 개. 귀엽죠.
―저, 저의 개는 불독인데요.

진도 자기 개자랑을 했다.

―전 유(柔)라고 합니다. 우린 건너말서 살아요.

어느사이 산북종과 남하종의 개는 서로 어울려 꼬랑이를 흔들며 목털을 비빈다. 그런 개들을 재미있게 지켜보다 녀자가 붉은 술을 진에게 내밀었다.

―선물하지요. 이름난 화신무용단 춤군인데…

그런 그들을 한쪽에서 염이 눈을 동그랗게 뜬채 매초롬하여 지켜보고있다. 그의 손에도 붉은 술 한개가 들려있었다.
이때 개들이 다급하게 짖어댔다. 장터에서 급작스런 소요가 일었다. 누군가의 깨지는듯한 비명이 터져올랐다.

―포리(捕吏)가 온다아!

진은 얼핏 고개를 돌렸다. 대도를 차고 창을 꼬나든 남하의 포리들이 득달같이 달려오고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흩어지면서 닭이 풍겨올랐고 개들이 짖어댔다. 남하의 사람들은 가까이 숲속으로 몸을 감추었고 산북의 사람들은 돌각담을 넘느라 허둥대였다. 서로 찾고 부르는 사람, 넘어져 비명지르는 사람, 포리들에게 잡혀 울부짖는 사람…
장거리는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였다.
분만해오르는 먼지속에 진은 담을 넘지 못해 설레발치는 녀자를 보았다. 산북의 그 녀자를 보았다. 무거운 패물이 가득든 함을 껴안은채 녀자는 담을 넘지 못해 쩔쩔매고있었다. 그러다 밀쳐 넘어졌다. 패물들이 땅에 흩어져널렸다. 포리들의 추상같은 호령을 등뒤로 하며 진은 달려가 흩어진 패물들을 주어담아주었다. 그리고는 담아래 넙죽 엎드렸다. 자기 등을 밟고 넘으라고 손짓해보였다.

―빨리 타요!

머뭇거리던 녀자는 포리들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진의 등을 밟고 담으로 올랐다. 그리고 담우에 선채로 진을 내려다보았다. 녀자의 눈에 진한 감동이 어려있음을 진은 볼수 있었다. 잠시후 녀자는 청남색 치마자락을 부풀리면서 담 저쪽으로 뛰여내렸다. 진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가 채 사라지기도전에 진의 목에 쇠사슬이 철렁 걸렸다.

장을 보다가 두수없이 걸린 사람들은 태형 20대의 엄벌을 받아야 했다. 산북의 장사치를 도왔다는 죄명에 진도 태형을 받았다. 그러나 화신무용단 성원이고 무자 명의 간청이 있었기에 매는 10대로 줄었다. 하지만 엉뎅이가 흐드러져 진은 근 며칠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자리에 엎드린 자세로 진은 벽에 걸린 북과 북채를 바라보았다. 경황중에도 손에 꼭 품고 온 붉은 술이 북채에 달려있었다. 장터에서 돌아온 뒤로 산북녀자의 붉은 도화볼이 진의 눈에 어려 삼삼히 떠나지 않았다. 단지 일별만으로 그만두기엔 무언가 설명못할 미진함 같은것이 진의 마음에 걸려있었다. 발목을 잡아채는듯한 끈끈한 느낌, 그것을 일컬어 인연이라 해야 할가.

유!
마음속에서 돋아오르는 순(筍)같은것을, 참을수 없는 근지러움으로 감지하면서 진은 입속말로 녀자의 이름을 자그맣게 되뇌여보았다.
그날 이후로 진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태형을 받은 사람답지 않게 볼에는 붉은 화색이 돌았고, 가끔 떠오르는 입가의 부드러운 미소는 마음속의 희열을 내비치고있었다. 그런 진을 두고 교며 염이 이상한듯 눈을 마주쳤다.
컹! 컹!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불독의 소리가 아닌것 같았다. 환청인듯싶어 창을 열고 보던 진이 경희에 차 소리질렀다.

―홍모야!

어떻게 그 먼 길을 달려왔던지 산북종의 홍모가 뜰에 나타나 짖고있다. 홍모의 목에 바구니가 걸려있었고 바구니에 서찰 한통이 담겨져있었다.

적봉에 해 떨어지면 곡성곁의 과수밭으로 오세요.― 유.

진은 흥분에 몸을 떨며 홍모를 그러안았다. 붉은 털을 어루만져주었다.

 

 

 

진, 담을 넘다


  

  밤, 진은 담을 넘었다.

  밤, 진은 긴장과 흥분을 억누르며 곡성을 넘었다.

  밤, 진은 야경순찰사들에게 잡히는 날이면 월경죄로 옥에 떨어 질 위험도 무릅쓰고 담을 넘었다.

   담을 넘자 날카롭고 사나운 풀숲이 이어졌다. 바늘같이 메마른 풀 넝쿨들이 다리를 긁고 팔을 긁었다. 어느 결에 손등에 새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주술처럼 닥쳐온 사랑의 전갈은 그로 하여금 서슴지 않고 담을 넘고 숲을 가르게 했다.

 

   오래 동안 방치해 둔 데서 무인지경인 곡성부근은 둘도 없는 옥토로 되였다. 두 부락의 과농(果)들은 가만히 이곳에 숨어들어 과수밭을 일구었다. 점호를 앞둔 화동들처럼 종대로 나란히 렬을 지은 과수나무, 그 나무들이 천국의 풍경을 그리며 어우러져 있는 곳에서 진은 유를 만났다.

 

  - 오셨군요.

 

   옷에 가득 봄밤 냄새를 묻히고 나타난 진을 유가 수태를 머금고 반겼다. 그 한마디는 천년의 행복보다 길고 아름다웠다. 어둠 속 이였지만 그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온유함과 기쁨, 밝음을 진은 분명 보았다.

  둘은 과수나무에 등을 붙이고 나란히 섰다. 유는 말없이 풍성한 머리다발을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손가락에 말렸다가 도르르 풀어지는 머리칼이 진에겐 싱싱한 이파리처럼 보였다. 얼핏 드러나는 어깨가 동그랗고 목선이 매끈하다. 그 모습에 진은 어질머리가 인다.

 

  부끄러움을 잉태한 침묵이 과수밭에 흘렀다. 달은 떠오르지 않고 있다. 그것이 다행 이였다. 그렇지 않다면 유의 붉어진 볼과 진의 손 둘 바를 모르는 모습을 샅샅이 비출 것 이였다. 홀연 진의 발치에서 불덩이가 폴짝 뛰여올랐다. 어지간히 놀란 진이 그처럼 풀쩍 뛰였다. 유가 웃었다. 그 불덩이를 주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작은 몸체에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벌레였다. 벌레들은 더듬이 끝에 자그만 불을 켜 달고 있었다.

 

  - 당랑이 얘요. 화당랑(火螳螂). 짝짓기 할 때면 정수리에 불을 켜들죠.

 

  유가 알려 주었다. 그제야 진은 마을의 년장자들에게서 화당랑이라는 신기한 벌레에 대해  들은 생각이 났다. 화당랑은 산북에서만 나는 곤충인데 산북사람들은 화당랑을 잡아두었다가는 밥 지을 때 불을 지피면서 땔나무와 함께 아궁이에 집어넣는다고 했다. 유리 병 속에 가두어 놓고 그 불빛을 빌어 책을 읽기도 한다고 했다.

 

  - 이 세상 당랑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싶은 적이 있었어요.

 

  유가 문뜩 감개에 젖은 소리를 했고 그 소리에 진은 놀라하며 유를 쳐다보았다. 유가 이야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무더웁던 유월, 산북사람들과 남하사람들은 서로에게 창부리를 들이대고 활촉을 겨누었다. 토포(土炮)까지 제작해 가지고 서로에게 포탄을 퍼부으며 상잔에 혈안이 되었다. 포에 화약을 재워 넣고 화당랑을 집어넣으면서 사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화당랑을 잘못 떨군 바람에 화약통이 폭발하면서 유의 할아버지를 비롯한 몇 명이 비명에 갔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유에게서 화당랑은 보지 못한 할아버지를 죽인 원흉으로 생각 되였다. 밤만 되면 뜰에 뛰여드는 화당랑을 잡아서는 발로 짓이겨 죽였다고 한다.

 

  - 다시 생각해보니 버러지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요. 모두다 한 혈통끼리 죽인다 살린다 원쑤를 만든 사람들의 탓이지요.

 

  진은 사색 깊은 유의 얼굴을 새삼스레 지켜보았다. 손바닥에 쳐든 화당랑의 불빛이 유의 반 쪽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고 그 절반 얼굴만으로도 유는 예뻤다.

 

  - 이제는 화당랑과 친구가 됐는걸요.

 

  유가 입술을 오므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은은한 휘파람소리가 과수밭에 메아리쳤고 다음순간 진은 희한한 광경에 입을 퀭하니 벌리고 말았다. 휘파람 소리를 듣고 풀숲의 여기저기서 화당랑들이 폴짝 폴짝 뛰쳐나왔다. 저마다 정수리의 더듬이에 불을 켜들고 뛰여왔다. 뛰여 와서는 진과 유를 에워싸고 맴을 돌았다.

 

   주위가 등롱을 켜든 것처럼 환해 졌다. 유의 청순한 얼굴이며 갈람한 몸매가 불빛에 드러났다. 길고 숱 많은 머리털이 흩어져 후광처럼 유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진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릴 적 불에 데였던 왼편 이마 전에 동전잎 만한 흉터가 력력히 돋아났다.

 

  진은 유의 손을 당겨 잡았다. 진의 몸 속에 욕망의 열기가 서서히 고여 오고있었다. 여태껏 춤밖에 모르고 지내온 일심이 욕망의 건드림에 흔들렸다.

유가 수줍은 손을 뺄 듯 뺄 듯하다가 자기의 허리 전에 놓아주었다. 허리띠가 잡혀 졌다. 진이 떨리는 손으로 허리띠를 잡아 당겼다.

유가 핑그르르 맴을 돌았고 당랑의 날개 같은 옷이  스르르 벗겨져 내렸다.

유의 농익은 몸매가 드러났고 진은 넉을 잃고 바라보았다.

불빛 어린 유의 몸매는 뇌쇄()적으로 아름다웠다.

작은 입술이 꽃잎처럼 뚜렷하다.

어깨가 좁다랗고 가슴은 높다.

엉덩이는 알밤같이 도드라졌다.

화당랑의 움직임과 함께 유의 몸매에는 수묵화 같은 그림자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 그림자들은 유의 볼에 머물렀다가는 뛰여서 목선 아래의 쇄골에 머물렀다가는 뛰여서 높은 가슴에 머물렀다. 묵직한 가슴아래 머무른 그림자가 아름다웠다. 풍요로운 배를 타고 내려 기름진 숲에까지 그림자는 머물렀다.

 

  진이 유의 살갗에 손을 가져갔고  손길이 닿자 유는 진을 향해 전신이 무너져 내렸다. 진의 손과 혀 바닥은 불줄기가 되었다. 불줄기가 되어 유의 일신을 훑어 내렸다. 유가 신음을 흘렸다. 소리가 높아졌고 그 소리에 당랑들이 일제히 더듬이에 켜든 불을 죽였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을 켜들었다. 두 사람의 몸 속에 내연하고있던 불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밀어젖히며 받아 안으며 애욕의 춤사위를 벌렸다. 과수나무를 품은 산줄기도 이렁이렁 떠도는 것 같다.

 

  적봉에 떠올랐던 달이 서천으로 콩알처럼 굴러 떨어질 때에야 진은 유와 갈라졌다. 진과 유의 사랑을 목격한 화당랑 하나가 손바닥에 놓여져 진의 밤길을 밝혀 주고 있었다. 진은 경쾌한 몸짓으로 담을 넘었다.

  이때 진과 멀지 않은 곳에서 그처럼 날렵하게 담을 넘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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