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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별”을 우러르며
2월 16일은 민족의 시성- 윤동주 옥사 64주기를 맞는 날이다.
필자는 지난해 여름 연변행차를 했던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 녀사와 자리를 같이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오늘 윤녀사에 대한 인물탐방을 다시 게제하여 친인의 눈에 비친 시인의 진솔한 모습을 조명하는 것으로 시인의 넋을 기리고자 한다.
윤동주라는 고고한 별이 스러진지도 어언 반세기를 넘었다. 현재 윤동주의 친족중에서 유일한 생존자는 친누이동생인 윤혜원(尹惠媛)씨뿐이다.
무더위가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 여름, 연변행차를 한 윤혜원씨(83)와 남편 오형범씨(83)를 만났고 그들을 통해 윤동주의 생애를 반추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사실 두분과의 만남은 어렵게 이루어졌다. 윤혜원 부부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한데다가 스케줄이 빼곡한것도 있었지만 두분은 매스컴의 취재를 잘 접수하지 않는 편이기때문이였다. 윤혜원녀사의 인터뷰기피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윤동주는 나의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님이요 오빠이기때문에 공연한 말들로 그의 <티없는 초상>을 훼손시켜서는 안된다. 동주오빠가 온 민족의 추앙을 받고 그의 생애가 대체로 잘 정리되여있는 마당에 녀동생이라고 해서 자꾸 나서는것도 덕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극구 인터뷰를 사양해왔다.
일제 강점기에 레지스탕스 시인으로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흠이 될가봐 조용히 숨죽여왔던 윤혜원씨. 그러던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살아서 오빠의 추모행사를 지켜보는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만이 알고있는 오빠와 관련한 비화를 털어놓기로 마음먹은것이다. 때론 장난기가 발동하여 동생들을 울리기도 했던 오빠, 대학진학문제로 거의 반년 가까운 세월을 아버지와 대립한 끝에 문학의 길을 걸어간 오빠, 일본 류학시절에 만난 녀자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적극적인 프로포즈를 하지 않아 남의 부인이 된 뒤에야 가슴아파했던 못난 오빠, 자기에게만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예쁘지 않으냐고 물었던 일 등은 윤혜원씨만이 전해줄수 있는 일화들이다.
더우기 앞으로 오빠의 시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통한 문학적가치를 더듬는것과 함께 오빠의 인품과 인격을 리해한 기초에서 시에 대한 리해를 깊이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윤혜원, 오형범 부부
윤혜원녀사를 만난것은 연변국제무역청사 7층 커피숍에서였다. 여든의 나이였지만 너무나 잘 정돈된 깨끗한 이미지를 수호하고있는 윤혜원녀사였다. 낮고 조신스러운 말투로 그녀는 말머리를 뗐다.
“해마다 특별한 리유 없이 몸이 아프다하면 또 그날입니다. 그토록 념원하던 해방을 목전에 두고 오빠가 옥사한 그날이 오면 느껴지는 애석한 감정이지요.”
오빠가 옥사한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는다는 윤혜원씨, 반세기도 더 지났지만 차마 떨쳐낼수 없는 정신적외상에 시달리고있는 그다.
그만큼 오빠의 각별한 애정을 받아왔던 윤혜원씨였다. 윤동주가 류학생활을 보내는 과정에서 보낸 수많은 편지의 수신인은 윤혜원이였고 매양 오빠가 귀향할 때마다 강 건너 삼삼봉역까지 마중 나갔던이도 윤혜원씨였다.
윤혜원씨는 윤동주와 일곱살 터울, 1924년 길림성 화룡면 명동촌에서 태여났다. 윤동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독자인지라 대를 이을 장손 윤동주의 출생은 집안의 큰 경사였다고 한다. 몸이 허약했던 윤동주의 어머니는 한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7년만에 딸 혜원씨를 얻었다. 광명소학교와 명신녀교를 다닌 뒤에 결혼하기전까지 윤혜원씨는 현지의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윤혜원씨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오빠의 가장 어린 시절은 윤동주가 외삼촌 김약연목사가 시무하던 명동교회당의 맨 앞줄에 앉아서 례배를 드릴 때다.
은진중학교에 진학한 오빠가 늦은 밤까지 등사용지에다 글을 써서 등사하던 모습도 기억난다고 했다. 윤동주는 명동시절부터 등사판 학교잡지를 만들어왔던것이다. 그런 오빠의 손가락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윤동주가 방학을 맞아 돌아오면 할머니는 두부를 만들어서 먹이시곤 했는데 윤동주는 할머니와 마주앉아 매돌을 돌리며 콩을 갈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동네에 나갈 때는 사각모자를 쓰고 다니라며 서울서 공부하는 손주에 대한 자랑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생색을 내는것을 싫어했던 윤동주는 할아버지 소원인지라 사각모자를 쓰고 나갔다가도 집식구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담장너머로 훌쩍 던져버리고 밀짚모자를 쓰고 다녔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소떼를 몰고 산등성이로 올라가 하루종일 책을 읽다가 해질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 오빠가 입었던 삼베옷과 밀짚모자를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알고있는 윤동주는 과묵하고 수줍은 모습이지만 윤혜원씨에 의하면 사진속의 모습처럼 늘 심각한건 아니였다고 한다. 늘 조용하던 그가 녀동생 윤혜원씨에게는 무척 지꿎은 오빠였다는것이다. 몇번 아주 심각한 오빠의 모습을 목격했는데 연희전문을 지원하면서 의대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문과를 지망할 때였다. 윤동주는 절식까지 감행해가면서 문과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할아버지께서 아버지에게 젊은이의 뜻을 꺾지 않는게 좋겠다고 거들어서 윤동주가 문과로 가게 됐다.
윤동주가 즐겨부르는 노래는 흑인성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오”였다고 한다. 이 노래는 오래동안 타지를 떠돌던 윤동주가 고향 북간도와 부모형제를 그리며 자주 불렀던 노래다. 또 방학때마다 고향에 와서 동생들에게 가르쳐주며 함께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다. 윤동주시인은 이 노래뿐만아니라 동생들과 동네 아이들에게 “아리랑”, “도라지”도 가르쳤다고 한다.
윤동주가 옥에 갇힌후 간혹 집에 엽서가 왔는데 번마다 일경의 서신검열에 걸려 줄이 까맣게 지워져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자기 장가보낼 걱정은 하지 말고 혜원이부터 시집보내라”는 뜻을 전해와 부끄러우면서도 감격스러웠다고 했다.
윤혜원씨는 1948년 한국으로 이주하면서 고향집에 남아있던 오빠의 시 원고와 사진들을 챙겨왔다. 그중엔 윤동주시인의 초기와 중기 작품 대부분이 들어있었다. 시 원고를 고이 챙겨온 윤혜원씨 덕분에 우리는 더욱 풍성한 윤동주의 시세계를 만날수 있게 된것이다.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증보판에는 116편이 실려있는데 그중 85편이 윤혜원씨의 품에 안긴채 보존된 작품들이다.
윤혜원씨는 1947년 당시 청년사업가였던 오형범씨와 결혼했다. 한국으로 이민한 뒤에는 주로 고아원에서 지도선생을 했고 나중에는 건축업을 하는 남편의 뒤바라지를 했다. 2남1녀를 보았고 기독교 집안답게 목사 사위를 두었다.
윤혜원씨 내외는 1986년 오스트랄리아로 이민온 뒤 교회에 다니는것을 유일한 활동으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왔다. 때문에 교회 목사와 교인들은 한동안 윤혜원씨가 윤동주의 녀동생이라는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어느날 우연히 윤동주의 책을 보다가 윤혜원씨의 사진을 보게 됐고 깜짝 놀라서 책을 들고 찾아가 물으니 그제야 빙긋이 웃어보였을뿐이였다.
윤혜원씨는 일거리를 찾아 오스트랄리아로 오는 연변동포들의 대모(代母)이기도 하다. 그의 신분을 알고 찾아오는 고향사람들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주고 후견인으로 되여줄뿐아니라 관광안내원까지 자청해 맡곤 했다.
“고향 사람들 아닙니까. 믿고 찾아온 사람들이니 힘닿는데까지 도와야지요. 대신 연변으로 돌아가면 윤동주 생가나 묘소를 찾아보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고령에 병환에 시달리면서도 두 량주는 윤동주를 위한 일이라면 적극 로구를 움직인다. 그들이 여러차례 연변땅을 밟은것도 여름철이면 고향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있는 윤동주를 기리는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오빠의 묘소를 돌아보기 위함이였다.
이번 연변행차에 앞서 두분은 일본을 거쳐 왔다. 1995년 일본 도시샤대학 이마데와 교정에 윤동주시인 시비가 처음 세워진 뒤를 이어 일본 교또의 교또조형예술대학 교정에서도 윤동주시비제막식이 거행되였던것이다.
교또조형예술대학 교정은 윤동주가 일본 도시샤대학 류학시절에 주숙했던 아빠트가 있는 곳이며 또한 창작의 불꽃을 지폈던 마지막 거소였다. 시인은 이곳에서 사상범으로 몰려 일경에 체포되였고 1945년 2월에 일본 후꾸오까교도소에서 옥사했다. 그날 제막식에서 발기자들은 “시인의 인생을 돌연히 닫아버린것은 전쟁이고 식민지화였다”며 예술과 문화의 힘으로 평화를 되돌리자고 호소하였다.
윤동주추모비건립운동은 일본의 다른 곳에서도 활발하다. 안자이 인꾸로리쓰메이칸대학에서 설립된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위원회”는 윤동주가 체포되기 2개월전에 도시샤대학 학우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장소인 교또 우지시 아마가세다리부근에 기념비를 또 세우기로 하고 추진중이라고 한다.
윤동주는 숨진 일인들의 땅에서도 아세아의 평화와 화해의 상징으로 부상되고있는것이다. 윤혜원씨는 오빠의 시와 삶이 나라를 초월하여 사랑을 받고있다는것을 실감하고있다고 감개를 머금었다.
윤동주 시인 만큼이나 정갈하게 한 평생을 살아오신 윤혜원씨, 언제부턴가 그가 거주하는 시드니는 윤동주 연구의 중심지가 된 느낌이다. 1995년에 열린 윤동주 50주기를 비롯하여, 2005년의 60주기 추모행사가 가장 큰 규모로 열린 곳도 시드니였다. 또한 윤동주에 관한 각종 소식이 전 세계로부터 시드니로 전해진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카나다, 독일, 로씨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삶에 쫓겨 서울, 부산, 필리핀, 오스트랄리아 등으로 계속 자리를 옮겼지만 윤동주라는 별은 윤혜원씨의 마음 한자락에 늘 떠서 빛나고있었다.
커피숍가까이 게임방과 테이프매장 스피카에서 흘러나오는 시끌한 소음이 새여들어오는 가운데서도 장장 4시간동안 인터뷰는 이어졌다. 일제강점의 암흑기에 깊은 고독과 번뇌와 참회 그리고 슬픈 소망으로 빚어진 시어(詩語)들을 각혈하듯 토해냈던 윤동주, 그의 친족을 통해 직접적으로 한 민족시인의 삶과 철학을 유추해본 소중한 시간이였다.
윤혜원 부부를 모시고
윤동주 '서시'
노래: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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