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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버려진 자의 고뇌
- 김혁의 소설집 출간에 부쳐
우리의 조선족문단에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30대의 젊은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김혁, 문학의 거의 모든 쟝르를 섭렵하면서 기자라는 딱지까지 붙이고있는 사람, 소설에, 시에, 수필에, 르포에, 다큐멘터리에, 아동문학에... 문학이라는 궁전의 구석구석에까지 그가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런 그가 소설창작집을 묶었다. 참으로 경축할만한 일이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란 말이 있다. 김혁의 소설을 읽고나면 그 말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김혁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얼마만큼은 알고있다고 자부하고있는 나에게 있어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강렬한 느낌이 있다면 바로 그 <<<문여기인>>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문학과 자신의 인격이 하나의 동체, 일심동체가 되여있다는것은 문학인으로서는 바라는 일이요 집념의 의미의 전부가 아니겠는가!
이 글을 쓰기 위하여 그가 창작한 소설 <<적(笛)>>, <<바람속에 지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올린>>, <<천재죽이기>>, <<박쥐는 낮이면 날지 못한다>> 등 소설들을 읽었다. 수편은 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으나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모름지기 나대로의 사색에 잠기지 않을수 없었다.
김혁의 소설이 부각하고 있는 인물의 대부분은 지식인이다. 기자, 음악가, 무용가, 아무튼 그가 조명하고있는 인물의 대부분은 오늘의 사회를 힘들게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형상이였다. 그러한 인물들의 형상성격에서 나는 김혁이라는 인간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었고 하나의 침울하고 생활과의 비장한 혈투로 고민하는 령혼을 읽어내지 않을수 없었다. 비창(悲愴)으로 가득한, 진실에로 통하는 길을 찾아 쓰러질듯 휘청거리면서도 약속없는 미래를 향해 무거운 한걸음을 디미는 외로운 나그네를 보았다.
소설이란 한 개인의 창작품인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창작품을 만들면서 고민하는 령혼을 읽어주는 독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나는 김혁의 소설을 읽으면서 하나의 생명이 자기의 소설에 내린 혼의 뿌리를 보듬고싶었고 창조하는 생명의 불안과 실망, 아픔과 초극으로 떠들고있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보려고했었다.
김혁에게 <<적>>이라는 소설이 있다. 악(樂)의 최고의 경지로 도달하기 위하여 외롭게 쓸쓸하게 피리를 불고있는 나그네가 김혁의 소설에서 방황하고있다. 저 어느년대인지 알길없는 그때 세상을 깨우치는 악론(樂論)을 펴기위해 초야에 묻힌 궁정악공의 수제자가 있었다. 스승의 뜻을 이어, 자연이 불어주는, 생명에 대한 희생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름마저 등장하지 않는 이 제자는 사형제들의 신념상실과 살붙이같던 안해의 배반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형제들은 스승의 악리를 떠났고 안해는 지저분하게도 어느 소금장수와 튀여버렸다. 용서를 주며 돌아오라고 달래는 악사에게 안해는 매정하기만 하였던가?
<<... 그 피리에서 그 <악론>이라는데서 쌀이 나옵니까? 무명이 나옵니까? 부끄러운 얘기지만도 마을서 첫손꼽히는 녀잘 색시로 맞아들이구 저한테 은비녀를 꽂아주어보았습니까? 금팔찌를 끼워주어보았습니까? 애녀석이... 그 다 못가고만 애녀석에게 엿가락이라도 뻐근히 녹이게 해주었댔습니까? 사형처럼 넉넉히 재물이 있습니까? 사제처럼 높은 귀골이 있습니까?>>
악사는 대답을 잃는다. 이 장면을 써나가면서 작가인 김혁이도 말을 잃었으리라. 어떤 아픔이 이러한 장면을 엮어나가게 했을가? 어찌하여 악사는 대답을 잃었을가? 나는 이 대목을 써내리고 원고지우에 머리를 숙이는 작가를 보는듯하다. 망연해지는, 청춘과 랑만으로 광란하던 디오니소스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세상을 보는것만 같았다.
결혼 십년에 이사를 13번, 결혼후 가장 큰 희망사항이 있었다면 당시 한뀀에 20전씩 하는 양고기산적이라도 배불리 먹어봤으면 좋겠더라는 김혁, 지금도 그는 연길시 북쪽에 있는 북대의 옹지종기 주저앉은 단층주택가에 세집을 살고있다. 5천여권의 장서만이 유일한 재산인 그에게 생활고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지금도 엮어진다. 얼마 안되는 세집의 지출을 줄이고저 문단의 동배와 함께 세집 하나를 잡고 칸막이로 베니야판을 대여서 신혼의 밤작업비밀을 숨길수 없어 텔레비죤의 불륨을 최대한 높이지 않으면 안되였었다는 김혁에게 신혼은 화려한 랑만뿐은 아니였을것이다. 18원짜리 구두를 사신고 결혼하여 배광주리로 24개나 되는 책과 밥 끓여먹을 가마를 달랑 놓고 새살림을 시작한 김혁에게 펼쳐진 운명의 가락은 악사의 외로움과 고독과 꼭 같은것이였을가?
누구에게나 색다른 세상을 살아가면서 김혁에게 차례진 운명은 그렇게 산뜻하고 깔끔한 삶이 아니였었다. 그러하기 때문이였을가, 그가 부각하고있는 인물을 모두와 같이 아름차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체험한다. <<적>>에서 나오는 악사는 결과적으로 자기의 생명처럼 여겼던 피리와 리별하기 위하여 자기의 손가락을 돌멩이로 짓부시고 <<바람속에 지다>>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녀자를 칼로 찍고 <<천재죽이기>>의 주인공은 정신질환자로 정신병원의 보탬이 되고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이올린>>에서의 주인공은 자기를 지키는 길을 택하여 바다의 귀(鬼)가 된다. 비극적인 주인공들을 선택하는 김혁의 숙명적인 아픔은 어떻게 온것일가? 무엇이 그러한 주인공을 묘사해나가도록 부추켜주고 밀어주었을가? 그의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가 외롭고 고독하고 무원조(無援助)하다. 이런 주인공들이 김혁이의 심층구조속에서 그처럼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것일가?
작년(1998년)여름의 일이였다. <<장백산>>잡지사에서 문학상을 발급하게 되여 장춘으로 김혁이와 함께 동행한적이 있었다. 기차칸에서 김혁이는 끝없는 실면을 호소했고 어떻게 들으면 그것은 거의 아비규환에 가까운 절규였다. 그 호소를 들으면도 나는 그 고통의 깊이를 리해할수 없었다. 그때가 바로 <<천재죽이기>>를 완성한지 얼마 안되는 때였다. 나는 <<천재죽이기>>의 주인공 man을 볼때에야 김혁이가 호소한 실면의 근원속에 도사리고있는 절통한 아픔의 깊이와 원인을 알수 있을것 같았다. 자기를 완성하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그에게 피타는 절규가 있음은 당연한 것이였다.
1986년 19세의 소년은 윤효식선생의 추천으로 <<길림신문>>사의 기자로 취직을 하게 된다. 조건은 2년간 월급이 없다는것이였다. 그럼에도 김혁이는 달갑게 그 조건을 접수하고 견습기자로 필객(筆客)의 대렬에 들어선다. 연길시의 교외에 자리잡은 동광부화공장에서 병아리를 부화하던 부란공이 기자로 된다는것은 인생의 구도를 바꾸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부화기앞에서 쓴 <<피그미의 후손>>, <<노아의 방주>>, <<까막골 박Q>>를 창작하여 발표하기까지 오래인 문학공부가 있었지만 이제야 어떤 기회가 들이닥친것이였다. 그러나 생활은 기회는 주었지만 생활의 모든것을 준것은 아니였다. 어려운 생활에 새로운 생명인 딸 소정이가 뛰여들었고 생활난에 도전해 어렵사리 시작해놓은 <<쉐익스피어서점>>은 부도를 내고 이를 악물고 시작한 <<소정음식점>>은 1년만에 2만5천원의 빛만 남겨주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94년에는 엄마와 누이가 한국행을 하면서 김혁이는 완전한 고아가 된다. 이렇게 그는 그렇게 갈망했던것은 아닌 이 세상에 동댕이쳐진다. 이런 엄혹한 현실이 그에 주었던것은 자기완성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아니였겠는가 한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의 소설 <<천재죽이기>>에서 리상(李相)의 <<박제된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라는 시구를 소설시작의 서두로 하고있는지 모른다. 껍데기만 남은 천재, 그러면서도 유쾌한 천재, 절망과도 같은 슬프디 슬픈 아이러니를 김혁은 자기를 마취하는 술처럼 음미하고있다. 그러나 김혁에게는 젊음이라는 재산이 있었고 디오니소스와 같은 열광의 무용과 진리와 진실에 도달하려는 무리할만큼한 집착이 있었다.
김혁의 소설 <<적>>에서는 진리의 궁극으로 천착하는 주인공 악사가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생명처럼 귀중했던 악(樂)을 버리기 위하여 자기의 손가락을 짓부신다. 다만 자기의 귀중한 악(樂)이 하늘같은 국왕의 노리개가 되는것이 싫어서! <<바람속에 지다>>에서 주인공 현수는 사랑하는 녀자의 가슴에 사랑과 저주로 번뜩이는 칼을 꼽는다. 다만 예술의 진혼(眞魂)이 비정한 금전의 노예가 되는것을 참을수 없어서! <<바다에서 건져낸 바이올린>>에서 주인공 방황은 인생을 더불어 함께 하리라던 바이올린과 함께 진실의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으로 열반에 들어간다. 다만 예술진실의 추구와 집념이 물욕과 허위에 더렵혀졌기 때문에! 이러한 주인공들을 조각해나가는 김혁이의 가슴에서는 무릎을 꿇고 두손을 진실의 하늘로 우러르는 디오니소스가 침묵해있었으리. 진리와 예술은 죽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서리서리 맺힌 심혼의 아픔과 생활고를 힘들게 물리쳤으리. 문학에 던져진 주사위에, 이제 살아가야 할 숙명의 후광(後光)에 차디찬 미소를 던졌으리.
불우했지만 김혁에게는 행복한 동년이 있었다. 경찰관인 아버지를 두었고 이제 다잡아나가야 할 문학의 길에 걸음마를 띄워준 어문교원인 어머니를 둔 그의 동년은 새록새록 돋아나는 꿈으로 가득한 현란한 세계였다. 5살 때 조선어를 깨쳐 6살에는 독서가 가능하였고 애기티를 벗지 못한 6살 입학시에는 당시에는 명작으로 불리우던 장편서사시 <<서사군도에서의 싸움>>을 줄줄 암송해 입시교원들을 놀래우던 아이, <<들소를 불태우다>>라는 소설을 읽고 소설속의 주인공처럼 자기 집 헛간에 불을 질러 <<불조심>>라는 별명을 붙이고있던 개구장이, 학교에서 책이 가장 많은 아이로 불리우던 소년, 학교의 예술써클에서 활약자로 순회공연까지 해보던 싹수 보이는 남자애, 작문이라면 언제나 범문(范文)만을 뽑아내던 소년에게 어느날 불운의 검은 기운이 덮쳐온다. 경찰관을 거쳐 농업국의 간부로 일하던 아버지, 그에게는 친아버지로 가까이 있었고 사랑과 자애로움을 주시던, 그토록 존경스럽고 부애로 가득하시던 아버지가 <<문화혁명>>의 피비린 몽둥이에 살륙을 당한다. 그에게는 그렇게 우호적이 아니였던 이붓아버지가 가정의 가장으로 들어오고 그때에 김혁이는 자기는 이 가정과는 아무런 혈연의 관계가 없는 주어온 아이, 필경은 낳아준 엄마가 있고 생명을 부여한 아버지가 있으련만 그들에 의해 무정하게 거리바닥에 버려졌던 아이라는것을 알게 된다. 그 아름찬 정신적충격을 어린 소년은 감내할수가 없었고 그때로부터 세상풍진에 덜익은 소년은 삐뚤어지기 시작하고 그 콤플렉스는 그의 생활의 그림자로 비운을 던지고 문학창작의 심적인 고통으로 창조하는 사유에 아슬아슬한 디모크리스의 검으로 머리우에 드리운다. 고중 2학년을 다니면서 소년은 무리싸움을 했다는 경력자로 퇴학을 당하고 소년은 고리끼처럼 사회대학을 다닌다고 소년다운 오기로 룡정과수농장의 주물공장에 주물공으로 취직을 한다. 그때 그의 나이가 17세. 그 이듬해에는 연길시교의 닭을 깨우는 부란공장에 부란공으로 자리를 옴기고 그 이듬해에는 소설로 문단에 등단을 한다. 금방 사회인으로 들어선 19세의 소년으로서는 파란만장하고 화려하다 할만한 경력이였다. 바로 이러한 경력과 이제 쌓아가야 할 경력이 그의 소설의 심층구조를 이루고있음은 당연한것이 아니겠는가.
거의 비슷한 경력의 소유자인 현수를 우리는 <<바람속에 지다>>에서 만난다. 예술학교교육의 경력이 없는 현수, 그는 다만 자기의 노력과 추구로서 무용인이 된 사람이다. 현수에게 있어서 예술은 그의 생명이요 생활의 전부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금전앞에서 예술의 무릎을 꾼 사랑하는 선배를 용서할수 없었고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을수 없었던것이였다. 소설적인 구성과 모순의 해결의 방책이라면 서투른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는 리기와 탐욕으로 얼룩진 포위권에 진리와 진실에로 통하는 천공(穿孔)을 만들고있는 김혁이의 인격성격을 보지 않을수 없다.
조선의 30년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시인, 소설가 리상(李相)에 심취해있고 술과는 친구로 지내고있는 김혁, 거치장스러운 식구가 없는 그의 세집은 아예 문학청년들이 모이는 구락부가 되여버렸다. 세속의 모든 속박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고 14년간의 기자생활이 준 보답이 대학졸업증이 없다는 리유 하나로 지금까지 견습기자라는 모자를 벗지 못했다는 현실에 가볍게 미소 하나 던져주는 김혁이는 문학 하나에 기대여도 살멋은 있다고 자부한다. 언제나 친구들 사이에서 비비적거리고 친구가 많은덕에 책을 팔아 친구 술사줘야 하는 어려움도 없지 않으나 사용료를 물지 못해 사용정지가 되여있던 BP가 어느날 울기 시작해 알아보니 이름도 남기지 않은 친구가 사용료를 대신 지불주었더라는 그에게는 문학을 지향하고있는 동년배의 지기들이 수두룩하다. 어쩌면 <<박쥐는 한낮이면 날지 못한다>>의 주인공 박무도 그 친구들속에 있는지 모른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삼륜차부로 된 박무, 어떤 우연으로 돈많은 녀자의 성상대로 몽둥이감으로 사용되는, 타락의 심연앞까지 가게 되는 어느날 진실한 사랑을 잃고 어렴풋한 깨여남의 혼돈속에서 해탈의 죽음을 맞는 박무, 박무는 그래도 성실하고 호방한 남자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가 김혁의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슬픈 친구로 등장을 하는것이라 믿어진다.
고통과 방황, 고민과 실의로 가득한 무용가, 음악가, 기자, 시인들이 김혁소설의 주인공의 주류를 이루고 줄느런히 서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오욕으로 가득한 세상을 탈출하기 위하여 피어린 싸움을 벌리고 자기훼멸의 운명을 맞으면서 령혼의 비상(飛翔)을 완성한다. 비극적인 주인공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담고 김혁이는 그러한 주인공들과 함께 자기가 훼멸하더라도 진리와 문학의 진실옆에 서고싶다는 마음의 자리를 더한번 굳혔으리라 믿어진다. 대개 추구로 불타는 사람들의 마음이란 끝에서 끝에로 이르는 집념에 시달리기 잘하지만 김혁의 소설속 주인공들은 초극으로 향하는 <<열반>>에 서슴없이 뛰여든다. 바로 김혁이 자신이 그러한 <<열반>>을 꿈꾸고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완성에로 도달하는 전령병이 김혁이의 옆에 다가서는것을 보고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의 운명을 창조하는 사람, 평가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정의 씨앗을 버리게 하는것이다.
<<바다에서 건져올인 바이올린>>에서 주인공인 방황의 친구인 철인이가 예술혼의 상실과 함께 인어(人魚)로 되여 열반에 든 친구 방황에게 안데르쎈의 <<인어공주>>를 읽어주며 그 책을 친구의 제단에 올리는 장면을 대하게 된다. 설쳐대는 바다가에서 <<인어공주>>를 읽고있는 철인, 소설을 마감하는 이 장면은 선과 미에로 통하는 길우에 걸려있는 현란한 칠색의 무지개와도 같다. 이것은 또한 김혁의 령혼이 부르면서 안기려고하는 진선미의 품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뱀(김혁은 뱀띠생)은 인식의 날카로운 눈초리로 세상을 도사리고있다. 이제 다가오는 생활의 모든 파편들이 그에 의해 또다른 예술작품으로 등장을 할것이라는것을 믿어마지 않는다. 필자의 개인적으로 바라는바가 있다면 개인적이 아픔의 송곳에 찔리우기보다는 사회생활이라는 유리파편우를 걷는것이 문학인으로서는 더 바람직한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것이다. 이 작품집의 출간에 작자와 함께 기뻐할수 있는 자리가 되여 기분이 사뭇 유쾌하다.
1997년
우광훈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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