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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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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그리고 윤동주
2009년 12월 01일 07시 36분  조회:2716  추천:38  작성자: 김혁


. 칼럼 .


친일인명사전 그리고 윤동주


김 혁


1


“친일인명사전”이 한국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의해 발간됐다. 3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되여있고 수록된 친일파 명단만해도4389명이 된다고한다.

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친일파의 정의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규정했다.

 


편찬자들은 친일파선정 원칙에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밝혔다.
이어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다”고 밝혔다.

 높은 위치의 정계인사들뿐아니라 문화예술계의 이름이 쟁쟁한 인사들도 대량 포함되여 세간을 경악케 하고있다. 한국 각계의 논란이 가열화되는 등 역풍이 거세지만 력사적 진실 규명을 위한 작업은 계속 되고있다. 

 

2

지난세기 30,40년대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고 민족문학사가 실종된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였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물자를 수탈하고, 징용령을 만들어 조선인을 군인, 보국대, 로무자, 위안부로 징발했다. 1938년에는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아침마다 일장기를 향해 황국신민 서사를 암송하게 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단행해 조상이 준 이름을 일본식대로 뜯어고치게 했다. 그 마수는 문화예술계에도 미쳤다. 조선말로 된 유명 일간지며 문학지들을 폐간시켰고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 어용 문학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과 징병제를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더욱 슬픈것은 민족의 수난기에 안일과 부귀를 위해 일제에 무릎 꿇은 문인들의 친일행위였다. 그동안 민족주의 작가로 주목받던 문단의 대표적 인사들이 대거 친일문학의 대렬에 끼여든것이다.

지울수없는 오명을 진 문학인들로는 신체시(新体诗) “바다에게서 소년에게”로 민족시의 전환점을 지었던 시인 최남선, “화사집”, “귀촉도”등  탐미적인 시편들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것으로 평가되였던 시인 서정주,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감자”, “운현궁의 봄”의 저자 소설가 김동인… 등등이다.


  춘원 리광수 

  리광수의 창씨개명소식을 실은 일본신문

 

그 전형으로 개화계몽기부터 1920년대까지 언제나 민족주의적인 립장에서 앞장 섰던 “무정”, “흙”의 작가 리광수를 들수있다.

리광수는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그 뛰여난 문필가의 기량을 황국 신민화, 징병, 징용, 학병, 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글을 써내는데 허비했다.
남보다 앞서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가며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인으로서의 본질과 껍데기까지 모조리 던져버리고 일본인으로 변종할”것을 공공연히 웨쳤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류학생들을 선하며 일본군에 입대하여 천황폐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자고 선동했다.
근시안적이고 삐뚤어진 그들의 행태는 우리의 민족문학사에 치명적인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3

문단을 대표하고 민족의 지성을 상징한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칭송하고 “황군(皇军)”을 위해 비루한 붓을 들고있을때, 숭앙했던 문인들과 자기 학교의 교장마저 친일에 앞장설때 중국 동북변강의 오지인 룡정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작은 촌부락에서 태여난 한 문학청년이 괴로움에 찬 시편“참회록” (忏悔录)을 내놓았다.

윤동주, 식민지시기 스물네살의 문학청년이 령혼의 잉크를 재워 각혈처럼 지었던 그 시작(诗作)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을 전률하게 만든다.


 윤동주의 대표시 "참회록"의 육필원고

 

“참회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1942년 일본류학을 준비할 무렵에 쓴 시이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담은 자기고백을 또박또박 원고지에 각인해 내려갔다.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원고의 하단 여백에는 도일(渡日), 시란? 문학, 생존, 생과 같은 시인의 고뇌를 짐작케 하는 절절한 락서들이 남아있다.

“… 래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굴욕, 치욕, 릉멸, 방황,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그때 그 시가 담고 있는 고뇌와 슬픔과 반성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다.
그리고 2년후 일본 도지샤대에 수학하던 윤동주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체포되여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것은 일제가 전시에 수요되는 혈장을 얻기위해 생리식염수를 투여하는 생체실험을 한데서 기인된것이라고 한다. 
 

 

 윤동주가 체포되여 옥사한 후쿠오카 감옥

 
윤동주는 식민지체재에 동화될수도 저항할수도 없던 여리고 섬세한20대의 문학 청년이었다. 당시 그에게서 생의 출구는 막혀있고 현실은 랭혹하고 폭력적이며 미래는 어둡고 삶의 리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분열을 거듭했다. 윤동주는 “나약”했고 “감성적”이였지만 감정적이지는 않다. 그는 주변부 식민지의 생활과 속악한 삶의 행태에 수치심을 느꼈다. 의지할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그의 마음은 종국에는 때묻지않은 령혼의 시줄에 깃들었다.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고있는 정신적 바탕은 시대적 현실에 대해 방관자적 립장에 처해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고뇌라 할수 있다. 그의 시의 중심적인 심상을 이루고있는 “부끄러움”은 이 같은 자기 반성과 고뇌의 필연적인 결과인것이다.

물론 당시는 극한의 식민지 현실에서 그 누구도 정상적인 문학을 할수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에 가장 먼저 민족문학의 전통과 자존을 지켜야할 문인들이 저항은 커녕 오히려 굴종과 어용과 변절로 민족문학사를 훼손한 친일행위에 민족사의 심각한 비극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한국의 지성인들이 사회의 압력과 역풍에도 친일인명사전을 굳이 간행한것도 바로 이러한 력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여 민족 정통성의 확립과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한 취지여서였다.

력사의 갈피에 지울수없는 오점으로 남은 이러한 문인들의 행태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에 매달려 권력과 리념과 공리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철새처럼 이동하는 문인들을 찾아볼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를 다시금 떠올려 보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윤동주, 그의 시를 읽을때마다 우리는 먹먹한 시대를 돌아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것만으로도 우리는 부끄러워진다.
민족과 언어를 빼앗겼던 정말 암울하고 힘들었던 식민지 시대에 자아와 민족이 부재한 력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초극하고자 윤동주는 참회와 헌신의 신앙적 결의로 마침내 도래할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확신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영글어가는 겨울하늘의 별이 또렸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고향의 시인이 읊었던 별의 밝음을 낱낱이 헤고 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친다

 

연변일보 周刊 “종합신문” 2009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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