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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하는 고독한 영혼
- 소설가 김혁인상기
김촌
김혁은 우리 문단에서 특이한 존재다. 10대에 문단에 등단했고 아울러 신문계에 입사하여 여태껏 문학과 신문기자사업을 병행해 왔다. 인생리력도 그나이에 비해 파란많고 굴곡적이여서 그러한 담금질속에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과 빛깔을 지닌 개성파 작가로 문단에서 자리매김해 왔다.
남들이 모두 동쪽으로 갈때 홀로 서쪽으로 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남자, 마를줄 모르는 감성으로 팽배해 있고 웃음속에 울음을 감출줄 아는 남자. 그런 용기와 개성이 오늘의 “반골”기질을 가지고있고 각종 쟝르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중견작가 김혁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경인년이 금방 걸음마를 뗀 정초의 어느날 나는 촬영기자와 함께 연길시 덕명호텔 부근에 위치한 김혁씨의 집문을 노크했다.
꽤 오래돼 보이는 건물, 값가는 기물은 별로 눈에 밟히지 않지만 그 대신집이 무너지게 겹겹이 둘러쌓인 책들이 유표하게 눈에 뜨인다. 높은 서가에 다 챙길수 없어 서가앞에까지 두겹세겹으로 거실 거의 중간까지 포진해있는 책이 저그만치7천여권이라고 한다.
수자도 대단하지만 문학저서뿐만이 아닌 력사, 종교, 철학, 영상학, 민속학등으로 갖가지 학과를 넘나드는 품종의 다양함이 충격적이다. 그뿐이 아니다. 수십년간 수집한 수천장의 영화테잎과 CD가 별도로 서가를 매고 꽃혀 있고, 지금은 구경하기도 어려운 수십년전의 련환화도 천여권이 넘게 차곡차곡 잘 정리되여 있었다.
그의 줄기찬 문학적행보의 원류를 만나는 대목이다. 고금중외의 명작들이 그의 사유와 영감의 샘을 깊게 하고, 온라인과 영상 등 다양한 양식으로 접하는 콘텐츠가 그의 정신세계의 반경을 한껏 드넓혀주고 있었다. 그의 문학세계가 남달리 다양하고 높고 깊은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님을 알수 있게 했다.
변두리를 허물고 글로벌시대의 중심을 향해 줄기차게 뻗어가는 거대한 파워의 실체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그 많은 책과 영화와 씨름하며 다져온 지적인 바탕,무서운 가능성을 지닌 미래형 작가의 존재를 육감으로 느끼며 나는 가슴이 뜨겁도록 흥그러운 전율을 느껴야 했다.
김혁의 간단한 프로필에서도 그의 오로지 문학으로만 점철된 생애를 력력히 보아낼수 있다.
문화대혁명이 일던해 용정에서 출생
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과 "노아의 방주"등 작품을 발표하며 19세에 등단
20세에 파격적으로 신문사 기자로 발탁 되여 "길림신문", "연변일보" 등지에서 20년간 신문기자로 활약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연변일보[해란강]문학상, [장백산]문학상, [도라지]문학상, [아리랑]문학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자치주 [진달래]문학상
한국재외동포재단 한민족 청년상 등 20여차 수차 수상
지금까지 “마마꽃, 응달에 피다”등 장편 3부 중편소설 “전재죽이기” 등 중단편소설 80여부, 시 300여수, 수필, 칼럼 200여편 명상 300여편 그리고
신문기사 천여편을 창작, 발표,간행했다.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정말로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 왔다.”라고 말하는 담담하게 말하는 김혁씨. 그 담담한 어조에 비해 그의 삶의 길은 어쩌면 너무나 울퉁불퉁했다.
친부모의 버림으로 남의 집 양자로 자랐지만 다시 그 양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아 혈육친지하나 없이 내내 홀로였고 혼인의 파국, 생활의 궁핍을 벗어보려 매달렸던 음식점, 서점, 신문사 등 사업의 잇달은 실패들로 오는 생활의 곤고, 때문에 오래동안 천문수자같은 거액의 부채에 시달렸고 게다가 사회의 부당한 대우 등으로 어려서부터40대가 된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무원조한 그에 대한 운명의 조롱과 학대는 오늘에도 계속되고있다.
세상살이의 올곧지 못함에 부대껴온 나날이였지만 그는 세상의 불쾌한 먼지와 소음의 기류를 덮어쓰고도 절망감의 정체와 아득바득 싸웠다. 그를 고통의 류황불에서 빠져 나오게 한 구원의 빛이 바로 문학이였다.
김혁은 “나에게서 극심한 고통과 거대한 불화를 해소할수 있는 방편은 오직 문학뿐”이라고말한다. 그의 블로그를 펼치면 메인화면에 “삶 자체는 오류의 련속이고 고통스럽지만 문학은 그 오류를 시정하고 그 고통을 덜어준다. 그 롱담같은 힘을 나는 믿는다”고 씌여있다. 그처럼 고통이 닥쳐오고 오래 될수록 그는 오로지 작품에 매달렸고 작품을 통해 낯선 인물들을 만나 현실에서 이룰수 없는 일들을 대신 이룰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는 다만 림시라도 웬만큼은 행복할수 있었다고한다. 하여 문학, 그 비실제적인 효응에 대한 매혹을 기르며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탐미해 들었다. 작품의 문학성보다는 환금성이 중요시되는 세월에 하필이면 이 세상 가장 열렬한 문학광으로 김혁은 등장했다.
소설, 시, 수필, 칼럼, 시나리오, 아동문학 등으로 각종 쟝르를 넘들며 끊임없이 수백, 수천편의 작품들을 량산했고 현학적인 표현이 넘치는 왕성한 실험정신으로 현실과 환상사이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자신의 작품세계의 령역을 만들었다.
온몸에 얼룩진 상처와 눈물자국... 그 눈물의 소진끝에 이룩해낸 문학세계, 누가 말했던가? 문학은 상처위에 핀 꽃이라고.
그가 유명한 독서광이고 영화광이라는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신간 잡지와 서적들을 미친 듯이 사 읽고 새로 개봉되는 영화 테잎들을 대량 소장하고는 보고 읽고, 읽고 본다. 그리고 쓴다. 그 피스톤의 작동 같은 따분한 동작이 여태껏 그가 소신을 잃지않고 해 온, 그리고 하고 있는 일상의 전부다.
일년사이에 4,5천원어치, 매달 박봉을 잘라 평균 3,4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는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 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프점에서 그를 모르는 주인장이 없을 정도로 그는 영화광이다. 개봉영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 그리고 신예감독들의 끼 넘치는 실험영화 지어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모조리 사들여 보면서 다양한 참조물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가꾸어간다. 어느 음향점의 구석에서 남들이 내쳐둔 흑백의 경전을 찾아내도 그는 그 CD한 장에서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한다.
스스로의 무드를 만들고 그로서 생성되는 엔돌핀에 도취되여 그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씻김굿의 휘모리에 신들려 있다.
이 몇년간 문단에서는 그의 열절적이던 모습을 더는 찾아볼수가 없다. 그는 근 6년간이나 세상과 담을 쌓은채 두문불출하고있다. 오로지 창작과 독서만이 그의 일상이요 그의 전부이다.
그 속에 쌓여있는 7천여권의 책과 4천여부의 영화 테잎과 cd가 그의 전부다.
이 인고의 시간에 그는 오로지 창작에만 몰입하여 두부의 장편과 수백편의 칼럼과 명상을 펴냈고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장백산”문학상”, 자치주 진달래”문학상, 윤정석아동문학상 등 굵직한 상들을 따냈다. 지금 그는 시끌벅적한 곳을 피해 조용히 은둔하며 자신과의 어려운 싸움을 벌리고 있는것이다.
지금 우리의 문단에서 필요한 덕목이 바로 김혁씨와 같은 이러한 은둔자들의 자세라고 생각된다. 예술적완성도를 위해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와 끈기, 오랜 시간동안의 잊혀짐을 감수하면서도 단 한편의 작품을 위해 생의 모든것을 거는 장인정신이 요청된다.
최근년간 그는 다시 잠시 떠났던 신문계로 돌아왔다. “중국조선족이라는 공동체는 지금 새로운 격변기의 갈림길에 서있다. 사회발전과 생활환경의 변화로 나타난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황들은 참신한 분석과 연구를 수요한다. 따라서 사실과 진실을 바라보는 랭정과 온유와 절제의 쟝르가 더 절실하게 수요된다.
이런 현실은 다소 떠있고 격정적인 형식인 픽션(虛构)을 보완하는 다큐(紀录)나 논픽션(非虛构)에서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다시 떠났던 신문계로 돌아왔다”고 그는 근일의 행보에 대해 해석한다.
옛 기량을 살리며 맹활약하여 흔들리는 우리 공동체의 동태를 보여주는 신문기사들을 수백편써내고 그 진로를 진맥하는 칼럼 100편 가까이 펴냈다.
한편 이 몇해간 <<중국조선족테마소설 계렬>>이라는 제명으로 조선족사회의 현황을 다룬 소설작품을 각 문학지에 련작하고 있다. 지금까지 10여편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선족 력사를 소급하고 그 인물들을 만방에 알리기 위한 일환의 작업으로 항일로간부의 인물전기를 집필해냈고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금방 마무리 했다.
올해는 또 룡정 개척 110주년을 위한 장편기행문 집필에 이미 착수했다.
이후의 그의 모든 작품, 모든 쟝르와 문체는 모두 오로지 중국조선족의 운명과 비전에 대한 탐구로 이어질것이라고 한다.
“이 작업이 언제 끝날는지 기약할수 없다. 나의 필봉이 멈추지 않는한 우리 민족의 비전을 위한 한 문필가의 고뇌적인 동참작업은 그냥 될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김혁의 서재에 커다랗게 걸고있는 편액속의 글은 “녕정지원 (寧靜致遠)”이다.
제갈량(諸葛亮)의 ‘계자서(誡子書)’에 나오는 문구로 전문은 “담백이명지(淡泊以明志) 녕정이치원(宁静以致远)”이다. 담백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먼곳에 이르지 못한다는 뜻으로 깨끗하고 고요함을 유지하면서 또한 마음에 선입견을 두지 않아 평온함을 유지하면서 먼곳에 이르는 경지의 선비의 옳바른 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김혁은 이 편액을 걸고 하루에도 몇번씩 바라보면서 진정한 문학인, 선비의 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진정한 작가라면, 진정한 가(家)라면 이렇게 남의 이목에 띄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을 저버리고 고절(高絶)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이지 않을가!
"연변문학" 201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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