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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영화황제”
김 혁
김염(金焰본명은 김덕린)은 1910년 4월 7일 서울의 명문 의사집안에서 태여났다.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아버지 김필순은 중국으로 망명했고 이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김염은 고모의 집에 의탁되였다.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운동과 예술 분야에서 감출수없는 끼를 보였던 김염은 1927년 열일곱살때 친구들이 마련해준 차비7원을 갖고 상해로 향했다.
당시 세계에서 뉴욕과 시카고 다음으로 가장 번화한 금융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상해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김염은 1929년 손유 감독의 과감한 기용으로 드디여 꿈을 펼치게 되였다.
손유감독은 코날이 오뚝하고 눈매가 시원시원한 발군(拔郡)의 풍모를 금세 알아보고는 그를 무성영화 “풍류검객”에 주연으로 내세웠다. 영화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틀)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그후로 김염은 ”일전매'(1931년) “도화읍혈기'(1932년) “모성지광'(1933년) 등에 주연으로 발탁된다. 내용은 대부분 중국 봉건시대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로 그의 뛰여난 연기력과 용모를 연거번거 확인해 주었다. 1932년 그는 서생과 건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을 그려낸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염과 그의 첫 부인 왕인미.
이 영화는 중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외국에서 영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중일 전쟁이 터지자 일본이 제안한 출연요구를 거절하고 향항으로 피신했고 1947년 녀배우 진이(秦怡)와 재혼했다.
1962년 은퇴할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궤적을 남겼다.
신중국이 성립된후 김염은 상해 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해 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리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여느 거장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리혼의 아픔에다 재혼한 진이와의 사이에 태여난 아들이 정신질환을 앓게되는 불행을 겪었으며 문화대혁명때는 농촌으로 하방되고 안해와 함께 수용소에 갖히는 비운을 경험했다. 장기간의 고역에서 얻은 폐기종 등의 합병증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김염은 1983년 12월 27일 73세로 상해에서 눈을 감았다.
현재 상해시내 용화렬사릉원 기념관에 그의 유골이 안치되여 있고 북경영화박물관에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중국영화사 100년을 통틀어 유일하게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그이지만 그의 탄생100주년이라는 이 명기해야할 날자에 그에 대해 그에 그렇다할만한 기념행사도 관련이슈도 없다.
하지만 오래된 일일수록 또렷이 기억나는 “망각의 역현상” 은 20살에 정점에 이른뒤 계속 하강한다고한다.
기억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만드는 하나의 큰 요소가 바로 기억이라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심리학 학자이자 영화감독인 루이스 브뉘엘은 일찍 “기억은 우리들의 일관성이자 우리들의 리성이며, 우리들의 행동이며,우리들의 감정이다. 기억없이는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한적있다.
그 누구나 과거의 기억과 망각들을 같이 끌어안고 앞으로도 삶을 살아가야 한다.
어제의 세대를 기억해둘 우리의 지금의 세대가 사라진후 이 세상에는 어떤 기억들이 기억되고 어떤 기억들이 망각될까? 우리 또한 다음세대들에게 아무런 기억도 없이 망각되지 않을가?
학자 문인 기업가들로 결성된 이 연구회는 "영화황제의 명성에 맞지 않게 그에 대한 자료발굴 연구 및 기념모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한 점에 미루어 앞으로 김염에 대한 연구와 자료수집 및 발굴 홍보에 만전을 기할터”라고 설립취지를 밝혔다.
“어떤 사실을 잊어버리는” 망각과 비슷한 단어는 “지워버린다”는 말 즉 삭제를 가리켜 말한다. 따라서 기억과 비슷한 말은 저장이다.
과거의 력사와 그 굴곡진 장하를 거슬로 온 인걸들, 그들의 력사의 공적을 새기며 그 보고를 후세에 남기는것은 그 나라 그 민족에게서 밀어버릴수 없는 책임이며 또한 망각할수 없는, 망각해서는 안되는 그 기억들이 그 민족의 소급과 비전을 위한 받침돌이 된다.
“종합신문” 2010년12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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