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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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인생그라프
2013년 03월 13일 13시 42분  조회:3531  추천:0  작성자: 김철균
□ 허길성
 
 
사람들은 길고도 짧은것이 인생이라고 한다. 순간순간과 하루하루가 모여 하나의 트랙이 되는것 또한 인생이라고도 한다.
나 자신을 놓고볼 때 1939년생(고향은 조선 함경북도 길주군 갑산동임)이니까 만으로 올해 75세이다.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나이가 들어서는 추억으로 산다”고 70세를 넘어서자 나는 어릴 때와 젊었을 때의 회포가 주마등처럼 갈마들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어릴 때 소꼴을 베러 다니면서 도시의 애들을 부러워했던 일, 공소합작사의 점원, 제지공장의 견습공을 하면서 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며 새로운 “극락세계”를 꿈꿔왔던 일…등 일들을 오늘 다시 돌이켜보노라니 그제날의 그 순간순간들이 모두가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농촌일만은 “질색”이던 소년시절
 
어렸을 때 왜서였던지 그렇다고 할만한 리유도 없이 그냥 농촌일이 싫어졌다. 1943년 아버지의 쪽지게에 앉아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룡정시 석정향 중성촌에 정착할 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지만 후에 점차 셈이 들며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면서부터는 농촌과 농촌일이 싫어졌던것이다. 1951년 룡정시가지로 이주한 후에는 더욱 그랬다. 도시의 애들은 늘 깨끗한 옷을 입고다니면서 부모들이 주는 용돈으로 얼음과자같은것을 사먹고 그랬지만 나만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꼴을 베러 다니지 않으면 밭으로 기음매러 다녀야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서인지 한시기 나는 자신이 천성적인 게으름뱅이 아닌가 하고 호되게 꾸짖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일을 한다고 하면 아주 잽싸고도 요령이 있었다. 특히 겨울에 가마니를 짠다고 하면 하루에도 20개 이상(가마니 하나에 50전이였음)씩 짰기에 부모님한테서 칭찬을 받았었다. 그러니 내가 천성적인 게으름뱅이가 아니였던것만은 분명했다.
당시 나의 계몽선생은 룡정고중에 다니는 둘째형님인 허길룡(후에 연변일보사에서 퇴직)이였다. 길룡이 형님은 늘 나한테 공부를 잘해야 하거니와 자신의 앞날은 자신이 선택하고 개척해야 한다고 일깨워주군 했다. 그래서인지 당시 나는 자신의 앞날을 두고 깊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17살이 되던 해에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는 연길현로동국 마당에서 “앉아버티기”를 하던끝에 일자리를 배치받게 되였는데 그 일자리인즉 연길현 태양향공소합작사의 점원직이였다. 그 일자리는 100% 만족되는것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비교적 마음에 들었다. 헌데 나는 그 일을 오래동안 할수가 없었다. 약 1년후 전 연길현적으로 직원정간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미성년인 내가 걸려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또 로동국 마당에서 “앉아버티기”를 한 보람으로 이번에는 석현종이공장의 통나무껍질을 벗기는 일자리가 차려졌다. 헌데 한달로임이 18원밖에 되지 않는 보수로서는 그 작업량이 너무 많았고 힘들었다. 거기에 숙소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생활비용을 제하고나면 남는것이 별반 없었다. 또한 한평생 이런 고된 로동으로 살아간다는것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그 직업을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공부마저 팽개치고 사회로 나온 나 자신이 한심했다. 사회에 나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딸것 같았지만 결국 사회에는 내가 설 자리가 없었다. 나는 재차 자신의 앞날을 검토하던끝에 군에 입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현무장부에 가서 신청하자 무장부에서는 우리 형제중 한명이 이미 군대에 갔다는 리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어떡한단말인가?! 사정하고 떼질쓰고 “앉아버티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중 때마침 부대에 간 둘째형님 허응산한테서 오래지 않아 곧 제대된다는 기별이 왔다. 그러자 나는 곧바로 형님한테서 온 편지를 갖고 재차 현무장부로 찾아갔고 이어서 신체검사 및 기타의 심사에서 통과되여 군대로 갈수 있게 되였다. 모든것이 드라마틱한 인생과정이였다.
 
부대생활에서의 ABC
나의 군부대생활은 료녕성 려순에서부터 시작되였다. 당시 우리 부대는 려순 앞바다의 소평도섬에서 산굴을 팠다. 당시 힘든 부대생활이였지만 나는 그 모든것을 용케도 이겨내면서 나중에는 제법 훌륭하게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한어 한마디도 번지기 힘들어하던 시기라 언어상의 애로는 아주 오래동안 나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약 1년뒤 부대는 길림성 교하쪽으로 이동하였고 부대는 46군 136사 고사포부대로 개편되였다. 때는 1960년대초로 당시 대만의 장개석군대가 “대륙수복”을 한창 떠들던 시기였다. 그리고 국민당의 비행기는 자주 한국을 거쳐 우리 동북지구로 날아와서는 전단지같은것을 뿌리군 하였다. 그러던중 1961년의 섣달 그믐날 대만의 국민당비행기가 또 연변일대에 날아와 전단지를 살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듣는 말에 의하면 당시 연길 공원뒤산에 해방군 고사포부대가 있었지만 기계작동문제로 국민당군비행기가 둔중한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것을 눈을 펀히 뜨고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였다고 했다.
한편 그해 음력설날 우리 부대에도 명령이 떨어졌다. 기차에 고사포 등 기자재를 싣고 이동한다는것이였다. 당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알수가 없었다. 새벽 3시 교하역에서 기차에 올라서는 창문도 없는 컴컴한 화물바곤에 앉아 한동안 가다가 내리니 낮이였고 지점은 조양천이였다.
조양천으로 온 뒤 우리 부대는 조양천일대에 고사포진지를 구축하기 시작, 모두 3개 련대였는데 한개 련대는 지금의 광석촌부근에 진지를 구축했고 한개 련대는 삼봉동에 구축했으며 우리 련대는 인평촌 논에 고사포진지를 만들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진지를 구축하고 밤낮 하늘을 감시하기 시작하자 국민당군대의 비행기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일이 흘러 봄이 되여 농민들의 논갈이가 시작되자 우리 부대는 구축했던 진지에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2개 련대는 다시 교하로 돌아가고 우리 련대는 화룡 청산으로 갔다.
당시 나는 군부대생활을 하면서 학습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한문학습에서 더욱 품을 들였다. 그때 우리 부대 전사들은 이전에 지원군들이 입던 솜옷을 입었는데 옷속이 흰광목천으로 누빈것이라 나는 한자 한글자를 익힐 때마다 그것을 옷속의 흰광목천에 적어두군 했다. 물론 종이가 귀하니 옷속에 적은것이였다. 그래서 한동안 다른 전사들한테 “정신환자”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어느 하루 련장이 옷을 벗으라고 해서 벗었더니 련장은 왜 옷속에 글을 쓰는가고 물었다. 이에 나는 당당하게 사실대로 고백했다. 련장은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얼마 안있어 나는 부패장으로 되기도 했다. 또한 그해 련대에서 추천되여 교하에 있는 사부에서 문화시험을 쳤는데 모두 26명이 친 결과 2명이 시험에 합격되였으며 그 2명중에 내가 들어있었다. 당시 부대의 인당 화식비는 한끼에 13전이였고 하루의 화식비는 39전으로서 모자라는 부분은 련대 자체로 해결하는것을 제창하였었다. 그래서였던지 그때 사부에서 친 작문시험은 “련대에서는 어떤 부업으로 화식비를 보충하는가”란 제목이였다. 그러자 나는 작문쓰기에 능력이 없었지만 부대에서 돼지를 어떻게 치고 남새는 어떻게 가꾸었으며 절약은 어떻게 하고 랑비는 어떻게 방지했는가 하는 등으로 별로 순서와 앞뒤가 잘 맞 난 작문쓰기에서 나는 76점을 맞았으니 그 모든것이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였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되다보니 나는 사부에서 추천한 전사로 강소성 무석에 있는 중앙군위에서 세운 문화학교에 입학하는 행운까지 지니게 됐다.
 
추억속의 나의 첫사랑
 
내가 무석에 있는 부대문화학교에 입학하고보니 전교 학생이 도합 1000여명이 되였으며 그중 대부분이 국내전쟁이나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적이 있는 로병들로서  90% 이상이 문맹이였다. 나를 놓고말하면 나이가 젊은데다 지식수준은 거의 앞자리 10위권에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리고 나 자신은 몰랐지만 학원생들마다 나를 “멋쟁이젊은이(佳小子)”라고 불러주면서 부러워하는 한편 아껴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인기가 있었다고나 할가? 전 학급에 6명밖에 없는 녀학생중 한 녀학생이 내가 조선족인줄 알고 찾아왔다. 왕순자라고 부르는 그 녀학생은 자신은 워낙 조선인이라고 하면서 조선말도 어느 정도 할줄 알았다. 그녀는 전쟁때 폭격에 고아가 된 자신을 지원군군관이 구해주었으며 후에 그 지원군군관이 귀국하면서 자기를 데려와 양딸로 삼아주었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원래의 성은 왕씨 아니라 김씨라고 알려주면서 지원군군관의 성을 따라 왕씨로 고쳐지게 되였다고 했다.
그 왕순자는 바로 당시 상해경비사령부 사령원이였던 왕××장군의 딸이였던것이다. 나는 왕순자의 가정환경에 혹했다기보다는 그녀가 원래 조선인이였다는 배경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 또한 나를 다른 학원생보다 다르게 보는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련애라기보다는 우정이상으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드디여 왕순자가 나한테 상해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가자면서 아버지도 “미래의 사위감”을 보고싶어한다고 했다. 그러자 거기에 마다할 내가 아니였다. 당시 매 주말마다 왕순자는 아버지가 보낸 경비사령부의 차에 앉아 집으로 가군 했는데 그 덕분에 나 역시 왕순자와 함께 왕사령원 경위원이 모는 짚차에 앉자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되였다.
왕순자의 집은 상해도심에 있는 단독주택이였고 방이 여러개가 딸린 호화주택이였다. 농민의 자식이였던 나로 놓고 볼 때 모든것이 꿈만 같았다.
왕사령원은 나한테 이것저것 물었다. 부모는 뭘하는 사람들이고 형제는 몇명 있으며 공부는 어디까지 했느냐 등등으로 묻는것은 많았지만 가정생활따위의 지저분한 물음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할 때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군 했다. 내가 썩 싫지는 않은 모양이였다.
……
내가 왕순자의 부모님을 만나본 뒤로 우리 둘은 공개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학교규률에는 학교에서 련애를 하면 안된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학교지도부 역시 왕순자의 가정배경을 아는지라 묵인해주는 태도였다. 그녀와 친하면서 나는 도움도 많이 받았다. 상해위수구사령부 사령원의 딸인 왕순자는 경제상 어려움이 거의 없었으며 매번 차를 타고 밥을 먹고 할 때마다 그녀가 돈지갑을 털군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학교의 교정과 학교뒤 공원에서 수많은 발자취를 남기면서 “검은머리 백발이 되도록 변치 말자”고 수없이 맹세를 하기도 했다.
한편 나는 자신이 부대문화학교에서 조선출신의 한 녀학생과 사귀고있으며 이제 돌아오는 겨울방학만 되면 함께 부모님을 뵈러 연변으로 가겠다고 집에 편지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것이 세상사와 인생살이인 모양이다.
1962년 여름의 어느날밤, 갑자기 집합나팔소리가 울려 부랴부랴 학교운동장에 모였더니 학교지도부로부터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미 이동학원생명단이 작성되였던지 학교지도부 주요 책임교원이 서류장을 펼치며 점명하면 명단에 오른 학원생은 무조건  “옛”하며 대렬앞으로 나와야 했다.
명단에 올라 점명된 학원생은 50% 이상에 달했다. 뒤이어 명령이 떨어졌다. 점명된 학원생들은 생필품과 책만 휴대하라고만 했다. 그리고 기타의 물건은 짐에 집주소만 적어놓으면 학교지도부에서 책임지고 집으로 부쳐준다는것이였다. 어딘가 이상했다. 이전에도 이런 긴급집합하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딘가 이상했다. 아니나다를가 그날밤 떠난 학원생부대는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아니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해 여름 대만의 장개석군대가 이른바 “광복대륙”이란 명목으로 미친듯이 날뛰였기에 대륙의 인민해방군은 전쟁준비의 수요로 잠시 내가 다니던 학교같은 문화학교를 적지 않게 휴교하였다고 한다.
첫패로 절반 이상의 학원생이 떠난 며칠후 또 야밤집합이 있었고 이번에도 적지 않은 학원생들이 떠나갔으며 역시 그들도 돌아오지 않았고 어디로 갔는지조차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아있는 우리가 초조해났다.
그것은 나보다 왕순자 그녀가 더했다. 순자는 녀자인 자기가 남을것이고 남자인 내가 떠날것이라고 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그녀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에 나는 제딴에는 그래도 남자노라고 그녀를 달래는수밖에 없었다.  
“순자, 우리 둘 다 군인이니 명령에 복종하는것을 천직으로 삼아야 할게 아니오?! 너무 괴로와하지 마오. 그리고 중국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꼭 다시 만나게 될것이요. 내가 순자네 집을 아니 말이요.”
우리는 공원에 있는 한 아름드리 나무를 가르키며 후에 누구든 여기에 오면 그 나무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넣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 나무를 우리 사랑의 견증수(树)로 되게 만들자고 서로 손잡고 약속했다.
리별은 빨리도 찾아왔다. 헌데 순자의 생각대로 내가 먼저 떠난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보다 며칠 앞당겨 떠나게 됐던것이다. 이는 순자의 아버지였던 상해경비사령부의 왕사령원도 예견하지 못하던 일이였다. 아무리 부대의 고급수장이라고 하지만 부문이 서로 다르다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모든것은 그렇게도 급작스레 들이닥쳤다. 첫패의 학원생들이 떠나서부터 한달안에 생긴 “사변”과도 같은 상상밖의 일이였다. 그러다보니 나와 순자는 매일 서로가 갈라져야만 한다는 애절한 생각으로 가슴을 쥐여뜯으면서도 막상 갈라질 때 서로 상대방한테 줄 선물같은것을 생각하지 못했거니와 지어는 상대방 가정의 집주소를 서로 교환해야 한다는것조차 까맣게 잊고있었다.
상대방의 집주소의 교환 - 그것을 망각하는통에 후일 나는 엄청 많은 후회를 남겼고 70고개를 넘기고 손군들을 두고있는 오늘까지도 가끔씩 그때의 일때문에 참회속에 젖어들군 한다.
한편 그후 어느 해엔가 내가 무석에 있는 군사문화학교 뒤에 있는 공원을 찾아가 우리가 늘 앉아있던 “사랑의 견증수”밑에 가서 살폈으나 그녀가 남긴 글을 찾을수가 없었다. 아마 순자가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슨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였다. 그러다가 또 몇년뒤 심양역에서 당시 문화학교시절의 어느 한 동창생을 만나 행여나 하고 순자의 행방을 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자기도 순자가 상해군의대학을 졸업했다는것만 얻어들었을뿐 그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길지는 않지만 약 1년간에 있은 나와 왕순자와의 로맨스ㅡ 오늘 내가 그것을 세상에 밝히는것에 대해 나 자신도 그것이 옳고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의 나의 마누라는 1966년 나와 결혼한 뒤 수십년동안 나한테 충성하였거니와 두 자녀를 키워 출세시키느라고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체험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할 때 그 옛날 젊은 시절의 로맨스를 끄집어낸다는것은 마누라한테 너무나도 미안하기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70고개를 넘겨 인생을 정리할 때도 되였고 또한 그렇다고 지금 마누라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털끝만치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시점에서 젊은 시절의 자초지종에 대해 마누라한테 고백하는것도 그닥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이 글을 통해 밝히는바이다.
 
북경생활과 나의 전성기
 
왕순자와 갈라진 뒤 학교지도부에서는 중앙군위의 지시에 따라 소수민족학원생만은 별도로 남겼다가 어느 날 드디여 그 소수민족학원생들마저 집합시켰다. 그러고는 역시 다른 짐에는 집주소만 남기게 하면서 챙기지 못하게 했다. 그렇찮아도 당시 나한테는 짐이라고는 별로 없었기에 몇벌 안되는 옷같은것은 그대로 버렸다. 나의 짐으로는 다른 학원생들이 버리고 간 책들로 한트렁크가 잘되였다.
그날밤 9시경 우리는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여러 시간을 달려 남경에 도착했고 남경역에서 하차한 우리는 배를 타고 장강(당시 장강에는 다리가 없었음)을 건넜으며 장강을 건너 다시 기차에 오른 우리는 계속 북상하다가 나중에 종착역으로 내린 곳이 북경이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상급에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에 대해 물을수도 없었고 가령 묻는다고 해도 인솔자가 대답해주지 않거니와 그 인솔자 역시 알고있을 가능성이 극히 적었다.
북경에서 하차하자 대기하고있던 자동차들이 우리를 싣고 어디론가 달렸다. 그러다가 어느 한 큰 건물의 대문안으로 들어갔는데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많은 군인들이 북을 치고 징을 울리며 우리를 맞아주었으며 높게 걸린 프랑카드에는 “신입생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알고보니 그 건물은 군위에서 세운 북경공정병학원이였던것이다.
 
 
순간 나는 코마루가 찡해나도록 감격을 금할수가 없었다. 나라에서는 장개석군대의 대륙진공을 막기 위해 전쟁준비에 분주한 상황에서도 원 문화학교의 다른 학원생들과는 달리 우리 소수민족학원생들만은 계속 공부를 할수 있는 배려를 주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수가 있으랴! 나는 당과 정부와 그리고 인민군대의 고위층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렸다.
북경공정병학원에서 나는 기계 및 건축설계학과에 배치받았다.
당시 20대 청년인 나는 셈이 들대로 든지라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지식의 중요성을 이미 잘 알고있는 상황이라 머리를 싸매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그때 당시 문화기초가 박약한 나로서는 시험을 치러갖고 대학에 간다는것은 그닥 장담할 일이 못되였다. 그렇다고 할 때 시험도 치지 않고 해방군공정병학원에서 공부할수 있다는것은 그야말로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때문에 이 모든것을 잘 알고있는 내가 공부에 게을리할수 없었던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당시 나 자신은 잘 몰랐지만 남들은 모두 나를 “키가 크고 멋지고 잘 생긴 청년”이라고 했다. 그래서였던지 내가 하마트면 외교관으로 될번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북경공정병학원에 입학해서 얼마후에 있은 일이다.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에는 3명의 조선족학원생이 있었는데 한번은 중앙민족학원 지도일군이 우리 3명을 찾아왔다. 그 지도일군은 우리한테 국가인재를 양성하려고 그러는데 조선어를 더 전공하고싶은 생각이 없는가고 하였다. 나와 다른 한명은 당장에서 거절하고 흑룡강성 밀산이 고향인 친구가 거기에 응했던것이다. 중앙민족학원 지도일군의 제의에 거절한 우리 2명은 조선어는 이미 장악한것으로도 사회에 나가 활용할수 있기에 더는 배울 필요가 없고 기술을 많이 장악하는것이 그저 “땡”이라고 여겼던것이다. 그래서 밀산친구는 민족학원으로 가고 나를 포함한 기타 2명은 북경공정병학원에 계속 남아서 공부하게 되였다. 
 
한편 북경공정병학원에서 공부하면서 1963년과 1964년 련속 2차 북경 천안문광장에서 있은  10월 1일 “국경검열식”에 참가하였었다. 특히 1963년의 검열식때 “모주석만세!”란 대형표어를 멘 대오가 천안문앞을 지나면서 모택동주석과 기타 중앙지도일군들의 검열을 받았는데 바로 그 대오중에 내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해전인 2009년 한 조선족군인(연변적)이 국경60주년 열병식에 참가해 화제로 되고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나니 대뜸 근 50년전 내가 검열식에 참가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그 감회가 깊어졌다. 또한 지금은 열병식장면을 록화하고 사진도 찍어두는가 하면 많은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취재하기도 하니 그 조선족청년군인이 몹시 부럽기도 했다. 
 
문화혁명과 뒤죽박죽이 된 인생
 
1965년 7월 나는 북경공정병학원을 졸업하고 심양군구에 배치받았다. 사업터는 심양군구 공정병사령부였다. 내가 전공한대로 그것을 활용할수 있게 되였는데 주요 업무는 전쟁준비용산굴설계같은것이였다.
헌데 운명의 희롱이라고 할가? 나는 심양군구에 오래동안 있을수가 없었다. 그 이듬해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됐고 나를 포함한 많은 조선족사병들이 이른바 “좌파지지”의 수요로 연변으로 나오게 됐다. 당시 연변은 문화혁명의 “선봉지구”였다. 특히 당시 주장이며 주위서기였던 주덕해동지를 보호하느냐와 타도하느냐를 두고 2개 조직의 대립과 갈등이 몹시 심했다. 그러던중 묘한것은 “좌파지지”로 파견된 군인이였던 나와는 달리 연변일보사의 기자였던 나의 둘째형님인 허길룡은 주덕해의 결사지지파였으며 부대에서는 이 관계에 대해 알고있었던것이다. 당시 허길룡형님은 연변대학에 가서 자주 강연같은것을 하였는데 하루는 부대에서 이를 알고 나더러 연변대학에 가서 길룡형님을 설복하라는것이였다. 명령이였고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다. 별수 없이 부대의 명령에 따르긴 했으나 그냥 그대로 갈수 없었다. 특히 군복을 입고는 더욱 갈수 없었다. 그리하여 시내에 있는 형님네 집에 들려 형님의 옷을 바꾸어입고 서민처럼 해갖고 연변대학으로 찾아갔다.
서민복장을 하니 형님을 쉽게 찾을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형님을 설복하려고 들자 형님은 “넌 이곳의 상황을 모른다. 그냥 돌아가거라. 못들은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형님을 설복할수도 없었거니와 딱히 설복하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나는 그냥 부대의 명령이니 어쩔수 없었을뿐이였다.
 
부대로 돌아온 나는 연변대학으로 찾아갔으나 형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부대의 수장은 그냥 “알았다”고 했으나 후에 알고보니 그때로부터 부대수장은 나의 “정치적립장”을 의심하기 시작한것이 분명했다.
그뒤 문화혁명의 거센 폭풍이 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전쟁준비열풍이 몰아쳤다. 도처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방공호와 산굴같은것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시 나의 부대에는 대졸생이 2명뿐인데다 그중 공정병학원출신은 유일하게 나뿐이여서 나는 연변의 거의 모든 산굴설계를 도맡다싶이 하게 되였다. 연길현 팔도공사에 있는 “전쟁준비총지휘부” 산굴을 비롯하여 룡정, 훈춘 등지에 있는 전쟁준비용산굴은 모두 나의 손을 거쳐 탐사되고 설계된것들이기에 나는 지금도 그 산굴마다의 내부구조에 대하여 손금보듯 알수가 있다.
이어서 “좌파지지”사업도 끝나고 기세드높던 전쟁준비열풍도 흐지부지하게 되자 부대는 다시 심양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부대는 심양으로 돌아가기 전야에 한차례의 정간을 하였는데 그만 그 정간에 내가 걸려들었던것이다. 내가 정간당하게 된 리유는 다음과 같았다. 즉 1963년 내가 북경공정병학원에 다닐 때 방학기간을 리용해 가만히 월경(그때 연변에서는 거의 맘대로 조선으로 다니고있었음)해 조선에 있는 누님을 만나본 일이 있었다.

 헌데 그것을 혼자만 알고있었더면 아무런 탈도 없었을것을 개학때 방학기간의 생활을 회보할 때 내가 덜컥 자랑삼아 털어놓고말았던것이다. 그러자 학원에서는 중국외교부와 문의한 뒤 나한테 탈주병이란 처분을 주었고 그것을 나의 서류에 기록했던것이다. 거기에 조선에 누님을 비롯한 친척들이 있는데다 문화혁명기간에 형님은 “보수파조직”의 골간이였고 나 또한 정치적리념이 강하지 못한것 등등으로 의해 결국 나는 군복을 벗을수밖에 없게 되였다.
군복을 벗자 나는 곧바로 연변뻐스공장에서 로동단련을 받게 됐다. 말이 로동단련이지 기실은 감시를 받으며 일하는 개조대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로임도 50% 이상이 줄어들었다. 부대에 있을 때는 고급기술군인이였지만 공장의 말단로동자로 되니 46원밖에 되지 않았다. 불과 며칠사이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셈이였다.
나는 갑자기 과묵한 인간으로 변했다. 온종일 거의 입을 열지 않으면서 정신없이 일하는것(용접공으로 일했음)으로 화풀이를 할 때도 자주 있었다. 또한 그때 “외국특무”란 모자를 쓴 차충섭이란 분도 나와 함께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고있었는데 나와 그는 늘 함께 어울리군 했다. 우리 둘은 갖고온 도시락도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 상대방의 고충을 묻기도 하고 마음을 달래주기도 했다.
  
그러던 언제인가 상급에서 참관단이 와 연변뻐스공장을 참관하게 되였는데 그 참관단 성원중 한분이 나를 유심히 뜯어보는것이였다. 이에 나 역시 어딘가 낯이 익은지라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당시 북경공정병학원을 다니지 않았소?”
“예, 다녔습니다.”
“그때 중앙민족학원에서 데려가자고 한것을 거절한적이 있었지 않았소?”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신데 저의 내막을 그렇게도 잘 아십니까?”
“허동무 맞구만, 내가 바로 당신네들을 데려가려고 북경공정병학원을 찾아갔던 사람이우다.”
“예?!…”
나는 대뜸 목석처럼 굳어지고말았다.
운명의 장난치고는 너무나도 극적인 상봉이였다.
“그때 당신이 기술을 배워갖고 뭔가 큰일을 할것처럼 그러더니 고작 이런 일을 하려고 우리의 제의를 거절했단 말이오?!”
그러면서 그는 그때 중앙민족학원에서 북경공정병학원의 조선족학생을 선발할 때 제일 먼저 선택한 학생이 바로 나였다고 나서 그때 중앙민족학원을 선택한 밀산의 친구는 지금 중국외교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말에 나는 더욱 큰 쇼크를 받았다.
한명은 국가외교부의 고급관원이고 한명은 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는  “땜쟁이(용접공)”ㅡ 인생이란 참 이렇게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많았으며 우리 둘의 운명이 이렇게 뒤바뀌울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리고 몇년후 내가 북경에 출장갔던 걸음에 겨우 외교부에서 사업하는 친구를 만나보았는데 거주 및 사업 환경이 나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때 그 친구의 궤속을 보니 모태주와 오량액을 비롯한 고급술만 수십병이나 있었다. 진짜 부러웠었다. 그리고 그때 북경에서 돌아올 때 그 친구가 그 고급술 30여병을 몽땅 포장해서는 나한테 선물하는것이였다. 하지만 이는 그에 대한 나의 부러움만 더하게 할뿐이였다.
 
명예의 회복과 중년의 인생
 
내가 연변뻐스공장에서 말단로동자로 일하는 동안, 당시 나처럼 억울하게 군복을 벗은 사람이 연변에도 적지 않아 수십명이 되였고 전국적으로는 무려 70만명에 달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매달 5원씩 내서는 돈을 모아 사람을 북경에 파견해 중앙군위에 고소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도 “4인방”이 살판치는 때라 우리가 아무리 고소해도 그것이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북경에 사람을 파견했다. 1973년, 1974년과 1975년… 드디여 1976년 10월 “4인방”이 꺼꾸러졌고 전국정세가 차츰 안정세를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1978년에 있은 당의 11기 3중전회와 더불어 류소기동지의 명예가 회복된 뒤를 이어 군복을 벗었던 우리도 명예를 회복(경제적보상은 없었음) 하게 되였다. 다만 벗었던 군복을 다시 입을수는 없었고 지방에서 간부편제에 다시 넣어주면서 새로운 근무터를 배치했던것이였다.
당시 나의 요구는 설계부문에 가는것이였으나 당원이였던 나는 조직의 배치에 복종해야 했다. 어느날 내가 연길시당위 선전부에서 부르기에 갔더니 연길시방송국 지도일군이 선전부일군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있었던것이였다.
선전부일군은 이제 곧 연길시에도 TV방송중계소가 서게 되는데 TV방송중계소를 세우자면 나같은 설계분야의 인재가 수요된다고 했다. 이렇게 나는 연길시라지오TV에 배치받았다.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TV방송중계소의 건립은 내가 가자바람으로 가동되였다. 당시TV방송중계소의 대부분 설비는 할빈으로부터 들여오게 되였는데 나는 한달사이에도 할빈출장을 몇번씩 다녀와야만 했다. 나는 제2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결심으로 일했다. 한편 안해한테는 몹시 미안했다. 결혼뒤 몇년이 안되여 군복을 벗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안해를 지지리도 고생시켰는데 명예를 회복한 뒤에도 잦은 출장으로 집과 자식들의 뒤바라지는 몽땅 안해한테 맡겼으니말이였다. 게다가 매번 출장때마다 출장비와 실제 쓴 돈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로임을 타면 그 로임봉투가 얇아져 안해한테 내놓기가 송구스럽기가 그지없었다.
하지만 안해는 가타부타 바가지를 긁는법이 없이 근무터(연길시병원)로 출근하는 한편 나의 내조와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열심히 하는것이였다. 나는 그것이 고마웠다.
이렇게 TV방송중계소가 세워지고 모든 업무가 가동되자 나의 가정생활도 차츰 안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물론 자녀 2명의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고 경제상에서는 늘 딸리는 상황이였지만 가정이 화목하고 화기가 돌았으며 거기에 자녀 둘 다 공부를 잘하기에 그야말로 인생이 보람있다는 느낌이 늘 들군 했다.
행복하고도 보람있는 생활은 빨리도 흘렀다.
1995년 나이 57세가 되자 나는 1선에서 물러나 서서히 은퇴를 준비했다. 그런데 당시 마침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에서 유선TV국을 새로 내오게 되자 나는 또 몸을 뺄수 없었다. 나는 단위지도부의 요청에 의해 유선TV국을 세우는 일에 동조하게 되였는데 그러면서 또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고 그뒤에는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직원주택을 짓는다기에 그 설계를 맡아달라는 요청에 의해 그 주택이 마무리될 때까지 참여하다가 2000년에 접어들어서 정식으로 퇴직휴양이란 새로운 인생을 맞게 되였다.
 
 
 
 
나의 가정 
 
1966년에 나는 지인의 중매로 당시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의 처녀인 송금자씨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였다. 결혼뒤 우리는 한동안 연길과 개산툰 이렇게 두곳에 떨어져 생활하다가 안해가 연길시병원 화험실로 전근돼오면서 비로소 안착된 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 그러다보니 우리 부부는 결혼 2년후인 1968년에야 딸 허영혜를 보게 되였다. 딸 영혜는 령리하고도 재롱을 잘 피웠다. 특히 두살이 되자 라지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제법 그 곡조에 따라 춤도 잘 추었다. 이러한 딸애를 보면서 동네사람들은 후에 음악을 전공하면 크게 성공할수 있을것이라고 했다. 그렇찮아도 우리 부부는 딸 영혜를 음악인재로 키울 타산이였다. 우선 우리는 딸애한테 피아노 한대를 사주기로 했다. 그 당시 일반 가정에서 피아노를 산다는것이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이 없었지만 우리는 어떻게 하든 노력해보기로 했다. 헌데 인생이란 한치 앞날도 내다보지 못한다고나 할가? 1971년 내가 군복을 벗고 연변뻐스공장에서 로동단련을 하게 되면서부터 생활은 급작스레 내리막질을 하기 시작했고 잇따라 1971년 아들 영동이 태여나면서 딸 영혜한테 피아노를 사준다던 계획은 아득한 먼 앞날의 일로 간주되였다. 하지만 안해는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안해는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았다. 말그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밤낮이고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친정집에도 손을 내밀고 또 여러 친구들한테 시정해서는 드디여 딸애한테 피아노 한대를 사주었다. 당시 피아노값은 적으만치 인민페로 6800원이였다. 6800원- 이는 당시 둘의 로임을 합해도 100원이 안되는 우리 가정으로 놓고볼 때 그야말로 거금이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무리 어려운 역경속에 처하더라도 힘과 희망만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것을 안해를 통해 알게 되였다.  나는 진짜 안해한테 고마웠다.
그뒤 딸 영혜는 드디여 연변예술학교(지금의 연변대학 예술학원 전신)에 입학하여 자신이 꿈꾸던 음악공부를 할수 있게 되였다.
바로 그러던 나날에 안해는 지병으로 인해 한창 일하는 나이인 49살에 앞당겨 퇴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지만 안해는 휴식하며 병치료에 전념할 대신 다시 자녀들을 위한 새로운 일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처음에 안해는 자녀들의 뒤바라지를 위해 밤마다 삯일을 했다. 복장점에서 재단한 옷감을 가져다 가공하는것이였는데 한견지에 겨우 2전씩 하는것이였다. 삯일치고는 너무나도 보잘것 없었다. 내가 퇴근하여 밤마다 도와주어도 1년에 겨우 1000원 정도나 벌었가고 할가? 그뒤 딸애에 이어 아들 영동이까지 대학으로 가니 그런 삯벌이로는 도무지 자녀들의 뒤를 댈수가 없었다. 그래서 벌여놓은것이 해리서치기였는데 그것은 투자금만 해도 수천원씩 들어가는 사양업이였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는 오래동안 할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뭔가 잘되는가싶더니 나중에는 원가가 많이 들어가는 한편 시장도 없었다. 그만두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을 벌여서 만 3년만이였다.
…그야말로 힘든 나날이였다. 돈이 나올 구멍은 적고 돈쓸 일은 태산처럼 많았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겠다는 자식들의 마음에 찬물을 껴얹을수도 없는 일이였다.  
아무렴 갈 때까지 가본다. 나한테는 일종 배짱이 생겼다. 만약 잘못되여 빚더미에 올라앉더라도 내가 몽땅 안고갈 배짱도 생겼다. 그것인즉 곰사양이였다. 내가 안해한테 상의했더니 안해 역시 동의하였다. 아니 내키고말고간에 그 당시 자녀의 뒤바라지를 하자면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됐기때문이였다.
곰사양은 처음부터 어려운 조건으로 시작했다. 사양장이 없으니 집안 객실에 사양실을 만들고 곰 한마리부터 사놓았다. 그러고는 관련 책들을 보면서 하나부터 익히군 했다.
고생도 많이 했다. 곰이란 녀석은 강아지나 고양이와는 달리 주인을 알아보는 녀석이 아니였다. 먹거리를 줄 때 까딱 주의하지 않으면 손을 덥썩 물거나 긁어놓기도 하여 나와 안해는 자주 손을 상하군 하였다. 또한 먹을것을 장만하는것도 고역이였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겨울이 특히 문제였다. 그래서 가을마다 우리 부부는 과수원과 배추밭 등을 돌면서 이삭주이를 하여서는 과일, 채소 등을 수천근씩 저장하군 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딸과 아들을 대학까지 마치게 했는데 그중 아들 허영동은 대학을 마치고 다시 일본에 가서 석박사과정을 거쳐 일본 모 회사의 중견으로 사업하고있는 상황이고 딸 역시 일본류학을 마치고 현재는 북경의 모 일본회사에서 근무하고있는 상황이다.
  
한편 이러는 사이 우리 부부는 어언간 고래희를 훌쩍 넘어섰고 특히 안해로 놓고보면 그옛날 처녀시절의 이쁜 모습은 거의 찾아볼수 없도록 얼굴이 망가지고 몸도 몹시 지쳐있는 모습이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나같은 무능한 인간을 만나 이 가정을 거의 홀로 영위해왔으니 그 몸인들 어떻게 견디여낼수 있었으랴?! 게다가 우리 부부는 아직 환갑잔치도 치르지 못한 상황이다. 안해한테 몹시 죄진 마음이다.
지금 우리 부부의 “고난의 행군”시대는 이미 지난해 곰사양업을 정리하면서 막을 내렸다. 나는 이제부터라도 안해한테 행복과 즐거움을 선사하고싶다. 그리고 이제 3년이 지나면 우리 부부의 결혼 50주년이 된다. 그때가서 나는 자녀들한테 부탁하여 결혼50주년 이벤트를 마련하는것으로 안해를 한번 크게 기쁘게 해주려고 한다.

에필로그
 
인생을 한번 쭉 돌이켜보면서 그것을 정리해보는 이 시각, 나는 행복이란 이 단어를 놓고 여러가지로 생각해본다. 어떤이는 대부자로 되는것을 행복의 최고치로 생각할수도 있고 또 어떤이는 크게 출세하는것을 행복의 최고치로 간주할수도 있다.
그중 나는 큰부자도, 큰벼슬도 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하며 그것을 최고의 만족으로 여긴다. 수십년간 나를 따라준 현숙한 안해가 있고 거기에 많지는 않지만 해외류학까지 한 아들과 딸이 있는가 하면 귀여운 손녀가 있으며 또한 지금도 나 자신의 취미와 능력에 따라 살고있으니 더욱 만족이다.
나의 취미란 곧바로 독서, 스케트타기와 가끔씩 친구나 일가친척들과 모여앉으면 즐겁고도 유쾌하게 마시는 술 한잔 등이라고나 할가?
그렇다. 나는 결코 지나온 나의 인생에 대해 큰 후회가 없으며 또한 이제 다시 태여나고 시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지금의 나의 취미와 생활방식대로 살고싶음을 고백하는바이다. ()   김철균 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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