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http://www.zoglo.net/blog/jinzhenglong 블로그홈 | 로그인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

중국인 폐쇄의식은 담장문화 때문
2013년 06월 03일 09시 10분  조회:6446  추천:3  작성자: 김정룡
중국인 폐쇄의식은 담장문화 때문

 

‘시가지’를 뜻하는 말로 한국에서는 도시(都市)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성시(城市)라고 이름 한다. 도시와 성시가 얼핏 보면 같은 의미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문화적으로 엄밀하게 따지면 많이 다르다. 도시는 도(都)와 시로 이뤄진 것이고, 성시는 성(城)과 시(市)가 합쳐진 것이다.

도는 무엇이고 성은 무엇이며 시 또한 무엇인가?

먼저 성부터 살펴보자.

성을 논의하려면 북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다. 왜냐하면 북경이 가장 대표적인 성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북경의 고칭은 ‘계(薊)’, ‘계성(薊城)’, ‘연경(燕京)’, ‘유주(幽州)’, ‘금중도(金中都)’, ‘원대도(元大都)’ 등등이며 역사의 시기에 따라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대하고 웅장한 모습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지금 남아 있는 북경성(北京城)의 모습은 명·청 시대 유물이고 그마저도 1949년 이후 많은 성벽이 철거된 상태이지만 성에 대한 역사는 살아 있다.

명·청 시대 북경성은 궁성(宮城), 황성(皇城), 경성(京城) 등 세 겹의 성으로 구성된 ‘성지성(城之城)’이다. 당의 장안도 북경처럼 세 겹의 성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궁성이 황성의 가운데 있은 것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궁성(宮城)은 황성의 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황제와 그의 가족이 거주하고 황제와 황족을 시중드는 환관과 궁녀와 호위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자금성(紫金城)이 곧 궁성이다. 자금성의 성벽(城牆)은 둘레길이가 6리(3키로 미터)이다. 6리라는 수치만 보아도 자금성의 규모가 얼마나 큰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금성은 4개의 문(오문:午門, 신무문:神武門, 동화문:東華門, 서화문:西華門)이 있다.

황성은 성벽의 둘레길이가 18리(9키로 미터)이며 역시 4개의 문(천안문:天安門, 지안문:地安門, 동안문:東安門, 서안문:西安門)이 있다.

황성의 외곽이 경성이다. 경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눈다. 내성 성벽 둘레길이가 46리(23키로 미터)이며 9개의 문이 있고 그 정양문(大前門)이 가장 웅장하다. 외성은 1553년 건립 시에 내성을 둘러싸게끔 설계하였는데 자금이 부족하여 남성(南城)밖에 건설하지 못했고 둘레길이가 28키로 미터이다.

경성은 황제가 거주하는 정치 중심 수부라는 뜻이며 궁성과 내성·외성을 포함한 총칭이며 凸자형으로 되어 있다. 중화민국이 명나라 초기 수도인 남경에 자리 잡고 나서 북경을 북평(북평)이라 불렀던 것은 ‘경(京)’은 천하에 하나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맥락에 의해 격하시킨 거에서 유래되었던 것이었다.

성은 담장을 의미하는데 성벽 높이에 의해 신분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 의해 자금성의 성벽이 가장 높고 황성의 성벽 및 경성 외곽 성벽이 차등으로 낮아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 의해 아문의 성벽도 급에 따라 높낮음이 결정되고 주택 담장도 신분에 따라 높낮음이 결정된다. 이는 신분이 높고 고귀할수록 평민과 더 멀리 거리를 두는 하나의 징표였다. 당연히 황제가 가장 신분이 높고 고귀하니 거주하는 궁성의 담장 높이가 가장 높았던 것이다.

성벽이 많으면 그에 따라 문이 많아진다. 북경이 성지성이기 때문에 문도 굉장히 많다. 문이 어찌나 많은지 북경시 주요간선도로는 절대다수가 문으로 명명되어 있다. 예하면 전문(前門), 복흥문(復興門), 건국문(建國門), 덕승문(德勝門) 등등의 수많은 문에 내외대가(內外大街) 혹은 동서남북의 위치에 따라 대가(大街)를 붙여 시가지 간선도로를 이름 지었다. 내가 1990년대 북경에 많이 다녔는데 길을 물으면 당지 사람들은 거의 다 00문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또 당지 사람들과 약속하면 거의 모두 00문으로 오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북경의 성벽과 성문은 북경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다. 실제로 스웨덴 학자 희인룡(중국명)은 북경의 역사와 문화는 성벽과 성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북경의 성벽과 성문》이란 저서를 출간하였다.

북경의 성문은 과거 역사문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에서도 굉장한 의미를 지녀왔다. 현대 중국인은 <나는 북경천안문을 사랑한다.>는 노래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현대 중국인은 북경에 가면 반드시 천안문구경을 빼놓지 않는다. 또 과거 황제가 외출할 때 사용했던 정양문(大前門)도 현대 중국인에게 매우 친숙했다. 바로 ‘대전문(大前門)표’ 담배 때문이었다. 아무튼 천안문과 대전문은 현대 중국인이 북경을 알게 되는 ‘키잡이’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는 도(都)의 의미를 살펴보자.

고대중국의 성은 주요하게 왕조국도(王朝國都), 제후봉지, 대부채읍(大夫采邑)의 중심 구역이었고 당연히 그들의 지위가 같을 수가 없었다. 《좌전》에 이르기를, “천자지역은 사방 9리, 제후는 7리, 후백(侯伯)은 5리, 자남(子男)은 3리이다.” 면적과 규모만 다를 뿐만 아니라 부르는 명칭도 존비에 따라 달랐다. 제후의 봉지를 도(都), 대부의 봉지를 읍(邑)이라 하고 도의 중에서 천자가 거주하는 곳을 경(京)이라 한다.

도는 크고 읍은 작으며 읍이 커지면 도가 된다. 민간에서는 크고 작은 성을 통칭하여 도읍(都邑)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도는 또 국(國)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국도(國都)라는 말은 있어도 국읍(國邑)이란 말은 없다. 하지만 읍의 의미는 작은 것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국가, 성시, 향촌, 이 세 가지 사구(社區:사회구역)를 모두 읍이라 부를 수 있었다. 주나라 때 800여 개의 제후국이 있었으니 그 규모를 따질 때 국보다 읍이 더 타당했을지도 모른다.

읍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글자 풀이에 따르면 위는 입 구(口)이고 아래 파(巴)는 인간이 변형된 모습이다. 사람(人)이 있고 구(口)가 있는 읍(邑)은 당연히 사구에 속할 것이다. 또 다른 해석에 의하면 읍(邑)자 위 구(口)는 인간의 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울타리를 둘러쌓아놓은 토성(圍墻), 일정한 범위를 의미한다고 한다. 나는 후자의 해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중국인은 울타리 의식이 강하고 이로서 외부, 외지,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폐쇄적인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市)를 분석해보자.

중국에서는 도시와 농촌을 성과 향이라 부른다. 고대중국에서는 이 성과 향의 가운데 자리한 곳이 바로 시라 불렀다. 시(市)는 사람들이 모여 매매교역을 진행한 곳이었다. 즉 성 안의 아무리 고귀한 신분의 인간도 알곡을 먹고 야채를 먹어야 하고 과일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하는데 그 내원은 향촌에서 온다. 아울러 성 안의 고귀한 인간들이 향촌에 가서 직접 구입할 수는 없고 하여 신분이 천한 촌민들이 성과 가까운 곳에서 매매교역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옛날 3일장, 5일장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성 안의 인구가 나날이 증가하고 알곡과 야채 및 과일에 대한 수요량이 증가하여 3일장과 5일장으로는 매매교역이 턱 없이 부족하여 주요 명절을 제외하고는 상시로 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또 가축에 의한 육류와 해산물 교역도 이뤄지고 땔감도 교역하고 옷가지 및 수많은 생활필수품을 교역해하기 때문에 상시 시장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점차 음식점도 생겨나고 기생집도 생겨나고 책방도 있어야 하는 등 문명의 발전과 발달에 의해 점차 시장이 활성화됨에 따라 시가 성과 가까이 옮겨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과 시가 하나가 되는 사회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성과 시가 하나가 되었으나 여전히 귀천이 존재하고 이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성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하다. 그 징표로서 성의 성벽은 높은데 비해 시를 둘러싼 토성은 낮았다. 그러므로 성벽은 장(墻)이라 부른데 반해 시를 둘러싼 토성은 담(垣)이라 불렀다. 한국인이 토성을 담장이라 부르는 것이 이와 같이 낮은 토성의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시 구역에서 장사하는 상인이 부자가 되면 주택을 호화롭게 짓고 담장을 높이 쌓는다. 그들은 비록 정치적인 신분은 없으나 경제적으로 부를 나타내기 위해 시민들과 격리하는 심리가 강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일반 소상인들은 주택에 간혹 담장을 쌓아도 낮게 하거나 보통 담장이 아니라 울바자를 쳐놓았다. 상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는 담장이 없다. 왜냐하면 가게가 시민들에게 격리감을 주면 장사가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도리로 향촌에서 토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호족이나 지주들은 주택 주위에 높은 담장을 쌓아 신분과 부를 과시하였다. 이에 비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평민들은 주택에 담장이 없었고 기껏해야 울바자를 쳐놓았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성, 성벽, 담장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어 바깥세상과 이질적인 존재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그 이질적인 존재가 바로 신분이고 이로서 신분사회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또 성에 살고 있는 높은 신분의 인간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겨난 것이 시(市)였기 때문에 성은 고귀하고 시는 비천했다. 시정잡배라는 말은 있어도 성도(城都)잡배라는 말이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대중국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다르게 먼저 성이 생기고 성 안의 인간의 생계를 위해 시가 생겨나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 성과 시가 하나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극히 짧은 상해나 20년의 역사밖에 안 되는 심천(深圳)는 성이 아닌 순수한 시이다. 그러므로 성의 대표적인 북경과 시의 대표적인 상해 두 지역 시민들의 인생관, 가치관을 비롯해 문화가 매우 이질적이다(북경인과 상해인의 비교는 별도의 글로 발표하겠다).

고대중국은 물론이고 지금도 행정구역으로 진(鎭)이 있다. 진은 고대중국에서 군사요충지였다. 그러므로 성은 정치 중심지였고 진은 군사 중심지였다. 무한(武漢)은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으로 이뤄진 대도시이지만 습관적으로 무한삼진(武漢三鎭)이라 부른다. 고대의 무한은 군사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중국정부가 농촌과 도시의 최소 행정구획을 ‘사회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왜 이렇게 고쳤는지? 나는 실상을 잘 모르겠다. 다만 여기서 사(社)의 유래를 짚어보고 아울러 중국의 많은 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보면 ‘社’를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해석했다. 이 해석이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에 깃든 함의는 심오하다. 다시 말해 내가 중국 고향 동불사에 가서 흙을 쌓아놓기만 하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인류가 씨족사회에 진입해서 대지의 일정구역을 자기네 삶의 터전으로 간주했는데 그 일정구역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타씨족에게 알릴 징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최초에 씨족이 차지하고 있는 땅 한 곳을 선택해 흙을 뫼어놓는 것으로 징표로 삶았다. 그러다가 단순히 흙을 쌓아놓는 것으로 씨족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부족하게 인식되어 쌓아놓은 흙 위에 나뭇가지를 꼽아놓기도 하고 또 일정 세월이 흘러 집을 짓고(사당) 씨족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관습이 생겨났다.

한 개 씨족의 족장은 이 ‘사’ 내에서 부족민을 거느리고 제사를 맡고 농사를 책임지고, 부족민은 족장의 인솔 하에 ‘사’에 모여 제사를 올리고 농사를 짓는다. 대체적으로 한 개 부족이 공동한 ‘사’ 내에서 같은 언어, 종교, 생활관습을 갖고 공동한 생활을 영위한다.

‘사회(社會)’란 부족민들이 ‘사’에 모여 공동생활을 영위한다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씨족사회에서 생겨난 사(社)의 문화가 국가시대, 정확히 말해서 왕조시대에 이르러 성(城)의 문화로 진화되었던 것이다. 왕조시대 왕도(王都) 뿐만 아니라 하나라 1만 개에 달하는 제후국, 상나라 3천 개에 이르는 제후국, 주나라 800여 개의 제후국의 수부가 전부 성(城)이었고 제국시대 23개 왕조 및 천도사건까지 합쳐 수많은 성이 있었다. 중국에 왜 고적(古迹)이 있는 도시가 그토록 많은지? 성의 문화를 이해하면 답이 보인다.

역사가 유구하고 분포범위가 굉장히 넓은 성의 문화(담장문화)는 찬란한 중화문명을 창조해낸 동시에 내와 외, 자와 타를 구분 짓는 문화로 자리매김 되었고 아울러 중국인으로 하여금 폐쇄의식을 갖게 만든 결과를 빚어냈다. 중국 절강성의 00지역의 이야기이다. 불과 백 리 사이 두고 두 마을이 있는데 A곳의 사람들은 짐을 나르는 멜대(扁担:한국인은 지게로 물건을 나르고 중국인은 멜대로 물건을 나른다) 자료로 무게가 가볍고 단단하며 탄성이 강한 대나무를 사용하는데 비해 B곳의 사람들은 멜대 자료로 무겁고 탄성이 약한 버드나무를 사용한다. 중국남방에는 대나무가 흔하다. 그러니까 대나무를 구하지 못해 불편한 버드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한테 영문을 물으면 대답이 아주 의외이다. “조상 때부터 버드나무를 사용해왔으니 우리도 이렇게 할 수밖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5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25 한류의 문화기원(2) 2011-08-03 1 6388
24 한류의 문화기원(1) 2011-08-03 1 6519
23 동포관리 전담부처 설립이 필요하다 2011-07-02 7 6169
22 아리랑의 수난 2011-07-01 7 10316
21 천년고도경주의 아쉬움 2011-06-16 21 6266
20 차이나타운이 조선족에게 미친 영향 2011-06-16 25 6528
19 백청강의 효과 2011-06-06 35 6569
18 차이나타운이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 2011-06-02 45 6150
17 김문학과 김관웅의 수준차이(1) 2010-10-06 13 8969
16 연길에 조선족이 있는가? (김정룡) 2010-07-28 32 7322
15 연변사람 우월의식? 2010-06-25 46 7220
14 조글로가 개인사이트인가? 2010-06-11 32 5990
13 누가 김문학을 뜨게 했나? (김정룡) 2010-05-07 64 6974
12 연변문화메카론 재고 (김정룡) 2010-05-07 59 5766
11 두부 한 모 12원? 2009-08-19 36 6045
10 나와 나의 아버지 누가 더 행복할까? 2009-01-28 55 5895
9 봉사(奉仕)와 복무(服務)는 어떻게 다른가? 2008-11-19 60 6879
8 한국에서 보는 연변의 의미와 가치(김정룡) 2008-10-10 90 6921
7 모어의 유래와 조선어논쟁에 대하여 2008-09-16 95 6271
6 中혐한증은 韓의 부메랑 효과 2008-09-03 112 6833
‹처음  이전 1 2 3 4 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