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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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총 균 쇠』 댓글:  조회:2776  추천:2  2020-02-07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총 균 쇠』 중국 무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병원균의 주범은 박쥐란다. 앞서 있었던 사스, 에볼라의 병원균 주범도 박쥐다. 메르스의 병원균은 낙타이며 이 외 광우병이요, 조류독감이요, 돼지열병이요 하는 지구촌을 공포에 몰아넣는 전염병들의 공통점은 바로 동물 균이 인간의 몸에 옮겨져 병을 일으키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동물이 이렇듯 인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만 인간은 동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 특히 가축의 역사가 이미 가까우면 반만년, 멀면 일만 년이 되니 ‘이혼’하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가축의 역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축의 역사는 농사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가축역사 및 가축의 균이 어떻게 인류를 몰살(아메리카 대륙의 사례)시키고 어떻게 인류역사에 해를 끼쳐왔는가에 대해 가장 생동하게 잘 설명한 사람으로서는『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1937년 9월 10일 생, 미국 생태학자)다. 때는 1972년 7월, 오스트레일리아주에 위치한 뉴기니 해변가에서 한 백인 생태학자가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마침 얄리라는 뉴기니 흑인정치가도 그곳에 있었고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선생님,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총 균 쇠』는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이 흑인의 질문에 대답으로 지은 책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백인이 흑인을 지배하고 지구촌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던 것은 백인이 DNA가 우수해서, 지능이 뛰어나서, 체력적으로 전투력이 뛰어나서 등등 때문이란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헌데 이런 보편적인 인식에 찬물을 확 퍼부은 사람이 바로 재레드 다이아몬드다. 저자는 책에서 먼저 배경설명을 간단히 하고 나서 168명의 스페인 군대가 8만 명의 잉카제국의 대부대를 무너뜨리고 아타우알파 황제까지 생포한 과정을 영화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1532년 11월 16일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와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의 고지대 도시인 카하마르카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양측의 거리가 좁혀오자 놀란 쪽은 피사로 군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잉카제국의 황제를 모시고 나선 군대의 수는 8만이니 눈에 담을 수 없는 무리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어가(御駕)를 안내하고 인도하고 길을 정비하는 군대만 2천이고 그들의 복장은 바둑판처럼 두 색깔로 된 화려한 옷에 금과 은으로 눈이 부시게 치장하여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이 2천 명의 어가 앞의 군대는 싸우는 무기 대신 모두 손에 빗자루를 정중하게 들고 있었다. 황제가 지나갈 길에 개미 한 마리, 지푸라기 한 오라기라도 없애기 위해 깨끗이 쓸어야 했다. 스페인 군대의 표정은 전투를 임한 전사의 굳은 얼굴들이었으나 잉카의 부대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환영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양측이 마주할 거리가 좁혀졌다. 피사로는 긴장하지 않고 성경을 아타우알파 황제에게 건넸다. 황제는 처음 접하는 책이라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 거 뭐야?” 라고 못마땅해 하면서 땅바닥에 홱 던져버렸다. 성경을 목숨처럼 여기는 독실한 크리스찬인 피사로에게는 황제의 행위가 최대의 모욕이었다. “감히 성경을 던져.”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순간 “공격!” 하고 외쳤다. 장군의 군령이 떨어지자마자 스페인 군은 총을 쐈다. 당시 총은 살상목적이 아니라 공포를 던지는 무기였다. 그런데도 잉카부대는 처음 접하는 소리를 듣고 마치 천둥이 지구를 휩쓸어가는 소리처럼 기겁해서 오금이 저려났다. 또 행동이 민첩하고 영민하기 그지없는 말들이 방울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손살 같이 달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몹시 당황해났다. 그들은 말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스페인군대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잘 갈아진 칼로 잉카군의 목을 베기 시작했고 황제까지 손쉽게 생포할 수 있었다. 168명의 군대가 목을 벤 숫자가 7천이었다. 당연히 스페인군은 한 명의 사상도 없었다. 만약 날이 저물지 않았다면 나머지 7만여 명의 목도 모두 거둬졌을 것이라고 피사로는 말했다. 168명VS8만명. 현대화 핵전쟁도 아니고 재래식 전투에서 있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양측의 비례이지만 결과는 168명의 승리. 그것도 전혀 손실을 보지 않은 아주 깨끗하고 손쉬운 승리.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전투의 승리의 요인 및 소수 유럽인이 아메리카대륙을 정복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총과 쇠의 덕이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는 총이 없었던데 비해 유럽은 총기가 발달해 있었다. 살상무기로 사용하는 예리한 칼도 잉카제국에는 없었다. 이 두 가지 무기는 기술의 발달을 설명한다. 둘째 정보의 덕이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인 1519년, 그러니까 13년 전에 스페인 정복자 코로테스가 이끈 군대가 아젝트제국(멕시코)을 멸망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피사로는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정보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데 비해 잉카제국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잉카제국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균의 덕이었다. 유럽인이 달고 온 균에 의해 아메리카 토착인 인디언은 95%가 목숨을 잃었다. 균은 이렇듯 총 한 방 쏘지 않고,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토착인을 몰살시켰던 것이다. 백인이 흑인노예를 데려와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한 이유가 바로 토착인 노동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 균 쇠』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유럽의 천연두, 장티푸스, 홍역, 매독 등 전염병이 아메리카대륙을 비롯해 다른 대륙에 전파되어 많은 인류가 생명을 잃었다는 사실을 많이 밝혀냈지만 재레드 다이아몬드처럼 자세하고 설득력 있게 정리한 사례는 없었다. 총∙균∙쇠 그리고 정보, 유럽인은 어떻게 이것들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농사의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지구촌에서 1천만 부가 팔린 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농사를 인류역사 이래 최대의 사기극이었다고 말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데 비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사 장점과 긍정적인데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우선 농사는 수렵 채집시대에 비해 잉여물이 생겨난다. 잉여물은 먹거리를 확보한다. 먹거리가 안전하게 확보되면 여성은 시름 놓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가사에 집중하게 된다. 중국의 ‘남주외, 여주내(男主外, 女主內)’ 전통도 농경문화의 전형적인 산물이다. 또 잉여물이 생겨나면 사람마다 가진 재간에 따라 분업이 생겨나고 발달한다. 예를 들어 전문직인 목공, 석공, 도공, 성직자, 교사, 작가, 예인(藝人), 기생 심지어 이야기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야기꾼이 나타난다. 이것은 기술의 발전과 발달을 의미한다. 농사의 발달은 부족이 도시를 낳고, 도시는 국가를 낳고 국가는 제국을 낳는다. 농사의 최대 성과는 문자의 탄생이다. 문자 이전을 선사시대라 하고 문자기록 이후를 역사시대라 한다. 최초의 문자들은 모두 농사가 발달한 지역에서 새겨났고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상형문자이다. 최초 상형문자는 무엇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을까? 점의 결과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구석기시대에도 점치고 제사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왜 그때 문자가 탄생하지 않고 신석기시대 즉 농사가 시작되어 문자가 창제되었을까? 설득력이 떨어진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에 의하면 최초의 문자는 가을 수확물을 분배하고 저장하고 새해 농사준비 등등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 언제 밭을 갈고, 언제 씨앗 뿌리고, 언제 기음을 매고, 언제 수확해야 하는지를 기록으로 남겨야 경험이 누적되어 실패를 줄이고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문자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문자는 농사일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점차 각 영역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좋은 것은 선배들의 시행착오를 기록함으로써 데이터베이스 구축이었다. 이를 통해 실패를 피하고 새로운 것을 기록하여 정보로 사용하는 등 문자는 이렇듯 인류사회를 높은 차원으로 진화하게 만들었다. 인류가 농사를 발명한 것은 대략 1만 년 전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농사가 비록 1만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 년 전이다. 2천 년 전,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중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중국은 그때 천하가 대혼란에 빠진 전국시대가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분열시대를 나쁘기만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좋은 일도 많았다. 분열은 경쟁을 촉진하고 그 가운데서 새로운 것들이 창조된다. 또 혼란한 천하를 수습하려는 ‘구급처방’들이 생겨나는데 이를 정리한 것이 인문학이며 여기서 새로운 사상들이 탄생된다. 유가, 도가, 묵가, 명가, 법가 등 사상이 춘추시대에 싹트고 전국시대에 성숙되어 갔다. 여기서 사상이나 인문학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당시 농사 상황인데 중국역사상 그때 농사가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전국시기에 천하는 무한경쟁체제에 돌입했다. 은나라가 상공업을 중시했다면 주나라는 농업을 위주로 했다. 정치체제, 사회제도, 문화시스템 모두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이런 환경에서 전국시대에 무한경쟁의 가장 큰 성과는 철제농기구의 발명과 사용이었다. 철제농기구는 농업생산을 획기적으로 촉진시켰고 생산물도 대폭 늘었다. 쉽게 말하자면 재산이 갑자기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재산의 급증은 신흥지주계급을 탄생시켰다. 신흥지주계급은 기존의 사대부인 귀족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갈등을 빚기 마련이었다. 진나라 상앙이 바로 이 신흥지주계급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한편으로 철제전쟁무기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한족이 주변소수민족을 지배하고 광활한 영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철제품 사용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 균, 쇠 중에서 쇠의 역할이 이토록 인류사회발전에 기여가 컸던 것이다. 지구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흔히 인간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을 쉽게 한다. 옥스퍼드대학 생물학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에서 지구의 주인은 유전자라고 주장한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랑하는 인간도 유전자를 전달하는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부에서는 지구의 주인은 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을 예로 들면 사람의 얼굴피부에만 1천종에 달하는 균이 있고 전체 몸에 지니고 있는 균 종류는 얼마 될까? 인간은 실로 균덩어리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외계인을 만나 싸우게 된다면 누가 이길까? 아마 십중팔구는 외계인 쪽에 손을 들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정반대이다. 인간이 이긴다. 그런데 인간이 힘으로 이길까? NO! 외계인이 지구의 인간의 세균에 항체가 없어 죽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외계인이 스스로 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만 보아도 지구의 주인은 균이라고 말해도 맞는 말인 것 같다. 특히 외계인의 입장에서 볼 때 더욱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균 가운데서도 동물균이 무서운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동물의 균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어찌된 영문일까? 농경문화에서 가축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하나의 문화형태이다. 하지만 가축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각 지역에 따라 상황이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대륙은 가축으로 적합한 포유류가 소, 말, 되지, 개, 양, 당나귀 등 13종이나 있었다고 한다. 가축으로 적합하다는 것은 식성(가성비)이 맞아야 하고, 성격이 유순해야 하며, 성장속도도 고려대상이다. 다이아몬드가 든 예를 보자. 같은 무게 450킬로그램의 소와 사자를 비교했을 때 소를 잡아먹기까지 소에게 먹이는 옥수수가 4,500킬로그램이 필요한데 비해 사자를 잡아먹기까지 사자가 열 마리 소를 먹어야한다고 가정하면 사자 한 마리에 옥수수가 4만5천 킬로그램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성비가 맞지 않아 사자는 가축에서 탈락되었다는 것이다. 고릴라와 코끼리는 15년이 되어야 잡아먹을 수 있기에 성장속도가 느려 수지가 맞지 않아 가축으로 탈락, 회색곰은 무게도 좋고 육질도 좋고 기름도 많지만 그놈의 성격이 더럽게 좋지 않아 탈락이란다. 이래저래, 이런저런 조건을 다 배제하고도 유럽대륙에서는 13종이나 되는 포유류가 가축으로 선발되었던데 비해 아메리카 대륙에는 가축으로 달랑 라마 한 가지만 있었다고 한다. 가축은 인류에게 젖, 비료, 털, 노동력, 교통도구, 군사도구, 고기, 가죽을 제공해주어 인류사회에 지대한 기여를 해왔다. 이 외 가장 중요한 선물을 제공해 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균’이다. 다이아몬드는 이것을 가축이 인류에게 준 ‘사악한 선물’이었다고 표현한다. 왜 사악한 선물인가? 가축 균 때문에 인간이 병들고 전염병이 돌아 많은 생명을 잃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럽인은 아프고 죽고 하는 시간을 거듭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대대로 내려오면서 항체가 생겨나 아픔에 시달리지 않고 죽음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유럽인은 13종이나 되는 가축 균을 몸에 달고 사는 것이 일상화되고 체질화화 되었다. 유럽인은 이미 새로운 질병을 이겨낼 만큼 면역력이 강해졌다. 이렇게 면역성이 강한 유럽인이 새로운 대륙인 아메리카에 가서 토착인을 접촉하게 되면 몸에 한 가지 항체밖에 없는 그들이 13종의 병원균에 노출되어 유행병이 돈다. 결국 몸이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병들어 죽고 만다. 심할 때 원주민 99%가 유럽인의 균에 의해 죽었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하나 생겨난다. 지금까지 논의했던 농사의 성과와 결과, 그렇다면 유럽만 농사짓고 아메리카대륙이나 아프리카대륙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메리카도 아프리카도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는 유럽에 비해 그토록 낙후되어 있었을까? 이에 대한 논의를 통해 다이아몬드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아프리카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은 횡적인 넓이보다 종적인 길이가 길다. 종적인 길이가 길면 농사의 확산과 발달이 매우 더딜 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는 확산자체가 안 된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귤을 서울에, 평양에 옮겨 심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즉 제주를 벗어나면 서울과 평양일대에서는 귤농사 자체가 안 된다. 엉덩짝만한 한반도에서조차 이런 폐단이 있는데 하물며 아프리카대륙이나 아메리카대륙에서는 더 말치 않아도 명백한 일이다.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 이 속담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을 유력하게 증명하고 있다.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대륙에 비해 유라시아대륙은 횡적 넓이가 매우 넓다. 지리학적으로 말하자면 같은 위도에 있는 땅이 넓다는 뜻이다. 같은 위도에 처해 있는 지역은 기후가 같고 식생이 같고 토양성분도 같아서 농사의 확산이 매우 유리하다. 유라시아대륙의 이러한 자연환경이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대륙에 비해 농사가 발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총 균 쇠’도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환경은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예를 들어 적도 가까운 너무 더운 지방 사람과 시베리아나 캐나다북부 같이 너무 추운 지방 사람은 게으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비해 온대대륙성과 온대해양성 기후 일대에서 사는 인간이 삶의 개척에 가장 적극적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문명창조와 진화에 앞장서왔던 것이다. 여기까지 논의하고 나서도 아직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즉 농사의 역사를 논하자면 유럽보다 중국이 앞서 있었고 농경에서 파생되어 생겨난 문명, 이른바 다이아몬드의 논지에 따라 말해도 각종문명이 중국이 유럽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유럽이 중국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은 겨우 150년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거두절미하고 뒤에서 허우적대던 유럽이 중국을 앞서게 된 요인이 무엇이었을까? 명나라 정하의 함대만 해도 콜럼버스함대에 비해 수백 배, 수천 배 규모였다. 그런데 왜 중국은 아메리카대륙을 발명하지 못했으며 새로운 식민지 개척에 나서지 않았을까?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중국은 쇄국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더 발전이 없이 정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통일된 거대한 제국이 쇄국 때문에 모험에 인색하여 사방에 담장을 치고 안일하게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유럽은 갈기갈기 수백 개의 소국(독일은 2백 년 전 프로시아 시절 200여개로 분열된 상태였음)으로 찢어져 분열되어 있었는데 오히려 이 분열상태가 경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 다이아몬드의 주장이다. 과학은 무지의 상태에서 호기심에 의해 탐구정신이 작동하여 발명된 것이듯, 본래 무였기 때문에 중국처럼 내세울 자존심도 없었고 내세울 체면도 없이 오로지 호기심으로 서로 경쟁에 뛰어든 결과 전근대적인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결론을 도출할 때가 되었다. 유럽이나 중국(황하와 양자강유역을 중심으로)은 농사에 가장 적합한 환경에 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빛나는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데 비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인류는 환경이 좋지 못한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문명 발전과 발달에 뒤쳐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환경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700페이지에 달하는 를 다섯 글자로 요약하면 ‘환경결정론’이다. 참고로 다이아몬드의 ‘환경결정론’이 다 맞는다고는 긍정할 수는 없다. 일례로 태풍이 많고 지진이 많은 환경이 매우 열악한 일본은 자연을 극복하고 세계선진국 반열에 오른 전형적인 좋은 사례도 있다. 때문에 다이아몬드의 학설을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우리 지식을 넓혀주는데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되기 때문에『총 균 쇠』가 훌륭한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62    인형의 유래 댓글:  조회:3644  추천:0  2017-12-04
인형의 유래 “인형을 처음 만든 자는 대가 끊길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乎!)” 옛날 종법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대를 잇는 것이다(傳種接代). 만약 대를 잇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대가 끊긴다면 이는 곧 불효 중 최대의 불효요. 불효는 죄악이니 대가 끊긴다는 것은 죄악 중의 무거운 죄악이다. 그런데 ‘대가 끊길 것이다’고 욕을 퍼부으니 악담도 이와 같이 무시무시한 악담이 더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이 무시무시한 악담의 주인공이 길거리에 나선 남루한 옷차림에 봉두난발, 입이 거칠고 상스러운 파부(婆婦)일 것으로 짐작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인즉슨 위대한 성인 공자님이라는 것이다. 도덕군자의 상징인 공자는 왜 이와 같은 악담을 퍼부었을까?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상나라가 망한 이유 중 주요 이유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민심, 민심은 천심. 민심을 얻은 자는 이기고 민심을 잃은 자는 망한다. 많이 듣던 얘기이다. 상나라가 잃은 민심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 상나라는 어떻게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을까? 증거는? 그 주요 증거가 바로 순장제도와 인간제물이었다. 순장제도란 왕이나 귀족 더 나아가서 돈 있고 세력 있는 권세가들이 죽으면 그를 따르던 무리를 산 채로 무덤에 파묻는 일종 관습이다. 순장의 숫자에 따라 부를 가늠하는 척도로 삼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을 산 채로 파묻으니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다음 상나라 때 사회 가장 큰 특징은 곧 모든 일에 길흉화복을 점치는 제사의식이었다. 제사의식에 필요한 것은 귀신에게 바치는 음식인데 주로 동물을 제물로 사용했다. 제물로는 양이 많이 사용(소뢰:小牢)되었고 소도 사용했다(대뢰:大牢). 물론 이 두 가지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개도 돼지도 염소도 사슴도 말도 있었다. 이런 동물을 짐승이라 하는데 집에서 짐승을 기를 때는 ‘축(畜)’이라 부르고 제물로 도살할 때는 ‘생(牲)’이라 한다. 사람을 ‘축생’이라 욕하는 관습이 여기서 생겨났던 것이다. 짐승을 도살하여 제물로 쓰는 것은 세계역사에서 보편적인 일이었다. 이와 좀 다르게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사례도 있었다. 상나라인이 바로 사람을 제물로 사용했다. 순장의 숫자가 부를 가늠하는 척도였던 것처럼 사람을 제물로 사용하는 숫자의 다소에 따라 부를 매기기도 했다. 노예와 평민을 제물로 사용한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개별적으로 귀족을 제물로 삼은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귀족 한 사람의 값이 노예나 평민 1만 명에 해당되었다고 하니 왕이나 굉장한 부자만 귀족을 제물로 삼을 수 있었다. 산 사람을 잡아서 제물로 삼았으니 이것도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상나라인은 이렇듯 순장과 인간제물을 통해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고 결국 주나라인에게 천하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천하를 얻은 주나라인은 상나라인의 교훈을 아로새기고 그들과 완전히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였다. 즉 순장제도와 인간제물을 폐지하였다. 그런데 수백수천 년의 관습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을까? 된 것도 안 된 것도 있었다. 된 것은 주나라 때 인간제물 관습이 기본상 사라졌다. 이에 비해 순장은 그 생명력이 매우 질겨 청나라 때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주나라 때부터 제도로서의 순장은 사라지고 순장에 대해 사회적인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순장은 기어코 하고 싶은데 산 사람을 파묻자니 사회적인 비난을 받아야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냥 손 놓고 포기하자니 아쉽고 맘에 걸린다. 평생 후회할 것 같다. 밀고 나아가는 것과 포기하는 것 사이 절충대안이 없을까? 대책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대책이 바로 사람 같은 형상 즉 인형을 만들어 사자의 무덤에 파묻는 것이었다. 일종 대리만족의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야 맘이 편했다. 진시황의 병마용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쉽게 답이 얻어진다. 주나라 때 순장에 산 사람을 사용하는 대신 인형을 사용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궁여지책인 이마저도 거품 물고 반대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곧 위대한 성인 공자님이었다. BC 641년 송나라 양공이 조(曹), 주(邾) 두 나라와 동맹을 맺고 정(鄫)의 군주를 죽여 토지신에게 바칠 제물로 쓰고자 했다. 이때 자어(子魚)라는 ‘군법무관’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큰 짐승으로 작은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사람을 사용하다니요! 제사는 손님 접대와 같은데 어찌 인육을 먹겠습니까? 그렇게 세상일에 반하는 일을 하시면 결말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자어의 반대는 성공하지 못해서 그 운수 나쁜 군주는 끝내 살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순장에 반대한 제나라 진자항(陣子亢)은 자기 뜻을 관철시켰다. 그의 형인 진자거(陣子車)가 죽었을 때 형수와 집사는 산 사람을 순장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진자거가 다른 나라에서 보살핌도 잘 못 받고 병사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진자항은 즉시 그것이 예법에 맞지 않는 데다 자기 형을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두 사람이라고 반박했다. 진자거의 부인과 집사는 당연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자항은 왜 그토록 반대하였을까? 진자항은 공자의 광팬이었다. 공자는 순장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 대신 인형을 사용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순장용 인형에는 흙인형과 나무인형이 있었다. 이런 종류의 물건을 공자는 극도로 혐오해서 심지어 “인형을 처음 만든 자는 대가 끊길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乎!)”라고까지 했다. 흙인형과 나무인형을 발명한 것은 본래 산 사람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을 산 채로 묻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진보적인 방식이었는데 공자는 왜 그런 저주를 했을까? 공자는 근본적으로 순장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보기에 순장은 인에 어긋났고 예가 아니었다. 그래서 산 사람을 쓰든 죽은 사람을 쓰든 안 되는 일이었고 또한 진짜 사람을 쓰든 가짜 사람을 쓰든 역시 안 되는 일이었다. 인형으로 순장을 하더라도 그것은 순장의 합리성과 합법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거짓으로 진실을 어지럽히는 짝퉁 순장인 셈이었다. 그런 식으로 빌미를 남기면 언제든 진짜 순장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철저히 제재해야만 했다. 확실히 그것은 소박하고 원시적인 인도주의였다. 바로 이것이 나중에 인(仁)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인의 본래 의미는 바로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이다. 중국 최초 인본주의는 주나라 때 이렇게 탄생되었던 것이다.
61    여자는 기쁘게 해주는 사람 위해 화장한다 댓글:  조회:3770  추천:1  2017-11-26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두 자객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한다” 1. 역사상 최초로 자살한 자객, 서예 춘추시대 진영공(晉靈公)은 후세 진시황보다 인간적으로 더 악독하고 악랄하기 짝이 없는 폭군이었다. 얼마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면『좌전』『국어』『공양전』『여씨춘추』『사기』의「진세가」와「조세가」등 사서에 기록되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영공은 산해진미를 먹거나 백성의 소혈을 쥐어짜 궁궐을 꾸미는 데에만 열중했다. 이런 행위는 임금으로서 흔히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다음 행위는 너무 끔찍해서 소름이 돋는다. 높은 누대에서 활로 탄알을 쏘아 사람을 맞히고 행인들이 그 탄알을 피해 허겁지겁 숨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기원전 607년 즉 노나라 선공(宣公) 2년의 어느 날 그는 곰발바닥이 설익었다는 이유로 요리사를 죽여서 키에 그 시체를 담아 밖에 버리게 했다. 진영공의 이 악랄한 행위는 정경(正卿:국무총리에 해당되는 직위)인 조순(趙盾)의 눈에 띄었다. 조순은 정의로운 관리였다. 진영공의 행위에 당연히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진영공의 앞에 선 조순은 눈엣가시였다. 횡행패도(橫行覇道)하려면 조순을 제거해야 했다. 그런데 내놓고 광명정대하게 죽일 수가 없어 자객을 파견하여 없애기로 하였다.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암살하려 했으니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자객도 보통 자객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영공이 물색한 자객은 서예(鉏麑)였다. 서예가 조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동틀 무렵이었고 저택의 세 대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조정에 나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으므로 조순은 의관을 차려 입고 방 안에 단정히 앉아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다. 자객이 왔는지는 당연히 몰랐으며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순의 모습이 하도 대바르고 있어 서예는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서예는 깊은 감동을 느끼고 내심 탄복했다고 한다. ‘홀로 있을 때도 정중함을 잃지 않다니 실로 백성들을 책임질 만한 인물이로구나!’ 이런 사람을 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다. 실제 죽여야 할 사람은 조순이 아니라 진영공이라는 생각이 서예의 머리에 떠올랐다. 『중화사』저자 이중텐(易中天)은 당시 서예의 처지를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햄릿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아버지의 원혼을 본 이후로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곤경에 빠져들었다. 아버지가 피살되었으며 그 범인은 자신의 숙부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숙부는 왕위가 탐이 났고 또 햄릿의 어머니의 미모에 반해 그런 짓을 저질렀다. 햄릿이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인은 승승장구하며 잘 살고 있는데 아버지는 지옥에서 갖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햄릿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다. 아들로서는 마땅히 복수의 검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신하로서 군주를 죽이는 것은 불가했다. 어머니를 죽이는 것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악으로 악을 응징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햄릿은 자살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책임의 방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구차하게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숙부인 왕을 죽이는 문제가 자신을 죽이는 문제로 번졌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살아야 하는가, 죽어야 하는가?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그 유명한 햄릿의 대사가 탄생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서예도 마찬가지로 진퇴양난에 처했다. 명령에 따라야 했지만 충신을 죽일 수는 없었다. 나라의 동량을 죽이는 것은 불의였다. 그러나 군주의 명을 어기는 것은 불충이었다. 서예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는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홰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은 그는 역사상 최초의 ‘자살한 자객’이었다. 2.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자객, 예양 조씨 가문에서 조순보다 5대 아래인 조양자도 자객에게 암살당할 뻔 했다. 그 자객의 이름은 예양(豫讓)이었다. 예양은 춘추에서 전국시대에로 과도하는 시기의 인물이었다. 그는 晉나라의 대권을 손에 쥔 여섯 씨실(氏室) 중 하나였던 지백(知伯)의 부하였다. 지백은 천하다툼에서 조씨 가문 실세 조양자에게 살해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양자는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지백의 두개골에 색칠하여 술 마시는 도구로 삼기까지 했다. 일설에 의하면 요강으로 삼았다고도 했다. 이 일은 예양에게는 엄청난 치욕이었다. 예양은 자신의 주군을 위해 복수하기로 맘먹었다. 예양은 이름을 바꾸고 진양(陳陽)에 잠입한 뒤 노역형을 받은 범죄자로 변장해 궁 안에서 변소에 석회를 칠했다. 이때 석회를 바르는 흙손 속에 비수를 감추고 있었다. 조양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단칼에 저 세상으로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늘은 조양자의 죽음을 원치 않았다. 막 볼일을 보러 걸어오던 조양자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매 같은 눈초리로 예양을 노려보았다. 예양은 꼼짝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전혀 거리낌 없이 자기가 지백의 복수를 하려고 한다고 자백했다. 호위무사들이 포위한 채 검을 뽑아 들었을 때 갑자기 조양자가 손을 흔들어 제지했다. “이 자는 의로운 인물이다. 죽은 지백에게는 후손도 없는데 가신이 이렇게 복수를 하러 나서다니 보기 드문 일이로다!” 그러나 예양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제 본래 얼굴로 활개 치며 다니는 것은 당연히 힘들었다. 용모를 바꿔야 했다. 그래서 예양은 눈썹과 수염을 뽑고 몸에 반점을 가득 그려 넣은 뒤, 시험 삼아 거지를 흉내 내어 구걸을 나섰다. 아내조차 그를 몰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신기하기도 해라. 이 사람 목소리가 내 남편을 닮았네.” 이처럼 갖은 고생 끝에 마침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제야 예양은 조양자가 늘 다니는 길에 몸을 숨기고 습격할 준비를 취했다. 드디어 조양자의 수레가 정해진 길을 따라 다리를 건너왔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말이 놀라서 요동을 쳤다. 뭔가를 알아챈 조양자가 벌떡 일어났다. “예양이 분명하다.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예양은 다시 붙잡혔다. 이치대로라면 이번에는 다시 풀려날 가망이 없었다. 본래 예양은 복수를 위해 그토록 가시밭길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 예양이 고통스럽게 용모를 고칠 때 한 친구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말렸다. “이럴 필요가 뭐 있나? 자네 재주라면 투항해서 어렵지 않게 조씨에게 중용될 걸세. 그렇게 친해졌을 때 일을 도모하는 게 더 편하지 않겠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가? 자네가 이러는 건 기개는 있어보일지언정 너무 미련한 방법일세!” 예양은 웃으며 답했다. “자네가 말하는 방법은 확실히 가능성이 더 크긴 하지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좀 있다네. 만약 조씨가 정말 나를 가까이하고 신뢰한다면 내가 그를 죽이는 것은 옛 지기를 위해 새로운 지기에게 복수하고 예전 주공을 위해 지금 주공을 죽이는 꼴이 되지 않겠나. 지금 내 방법은 성공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만천하에 대의를 밝히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의 목적일세. 내가 어떻게 남의 밑에서 일하면서 그 사람의 머리를 취할 생각을 하겠는가!” 이런 ‘정의로운 뒷이야기’를 조양자가 반드시 알고 있었을 리는 없다. 이 순간 조양자는 예양 앞에 우뚝 서서 왕이 쓰는 ‘과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 입을 열었다. “예양, 네가 왜 복수를 하려는지 과인이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는데 너는 과거에 범씨와 중항씨를 섬긴 적도 있지 않느냐? 지백이 범씨와 중항씨를 멸했을 때 너는 그들을 위해 복수를 하기는커녕 도리어 스스로 지백을 찾아가 주군으로 섬겼다. 똑같은 주군이건만 너는 왜 지백에게만 충성하고 범씨와 중항씨에게는 충성하지 않았느냐? 똑같은 원수이건만 너는 왜 과인만 미워하고 지백은 미워하지 않고서 죽을 둥 살 둥 그를 위해 복수를 하려고 하느냐?” 예양은 당당히 대답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오. 범씨와 중항씨를 위해 일할 때 그들은 나를 보통 사람으로 취급했으니 나도 당연히 보통사람처럼 보답했을 뿐이오. 그러나 지백은 나를 하늘 아래 가장 뛰어난 인물로 여겨주었소. 이에 나는 가장 뛰어난 인물처럼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조양자는 눈물을 흘리며 길게 탄식했다. “알겠네. 알겠어. 예양 선생, 자네는 지백에게 충성을 다했고 명예도 이루었네. 그리고 과인은 벌써 충분히 아량을 베푼 셈이니 이번에는 놓아주지 않겠네." 말을 마치고 그는 호위무사들에게 예양을 에워싸라고 명했다. 조양자는 이 존경할 만한 자객이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싸우다 죽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듯했다. 그것은 조양자가 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존경과 존중이었다. 그런데 예양은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자기가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지혜로운 군주는 다른 사람의 뛰어남을 가리지 않고 충신은 절개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의리가 있다고 들었소. 오늘 나는 마땅히 엎드려 죽음을 기다려야 하지만 부디 내 청을 하나 들어주시오. 당신의 옷자락을 베어 소망을 이룬 셈 치게 도와주시오.” 뜻밖의 부탁이었지만 조양자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네. 그러면 검을 뽑게.” 예양은 검을 뽑아들고 뛰어들어 조양자의 옷을 베었다. 검을 휘두르면서 그는 울고 있었다. 하늘이시어, 마침내 지백의 은혜를 갚았나이다!“ 세 번 검을 휘두른 뒤 예양은 태연히 자신의 목을 베었다. 이 일을 전해들은 천하의 인의지사들은 슬프게 울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군자는 예양처럼 고귀하게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양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도 모두 동감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
60    서민(庶民)과 인민(人民)의 뜻 차이 댓글:  조회:3507  추천:0  2017-04-05
                                             서민(庶民)과 인민(人民)의 뜻 차이 교육부 고위간부였던 나향욱 씨가 지난해 ‘99% 개돼지’ 발언으로 곤혹을 치르다 결국 공직에서 파면되고 말았다. 다른 부처의 관료도 아니고 하필 대한민국 교육을 관장하는 주무부처의 고위 관료 입에서 나온 발언이라 나라 전체가 충격에 빠질 정도로 시끌벅적하게 이슈로 떠올랐었다. 00일보 00논설위원은 “표현을 하지 않을 뿐이지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위관료들이 나향욱 씨와 같이 ‘99% 개돼지’ 의식을 보편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계급사회가 사라진 지도 반세기가 넘었건만 아직도 1%엘리트가 나머지 99%를 ‘개돼지’로 보는 데는 99%를 부르는 잘못된 호칭이 부채질 한 것 아닌지? 필자는 의심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99%를 공식적으로 서민(庶民)이라 부른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서민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 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 비슷한 말로 서인(庶人)ㆍ인서(人庶)ㆍ하민(下民)등이 있다. 둘째 경제적으로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 비슷한 말로 범민이 있다. 그런데 서민이란 어휘의 글자 뜻과 그 유래를 살펴보면 폄하의 의미가 다분하다. 서민이란 ‘庶’는 적서(嫡庶)관계에서 첩의 자식을 뜻하는 글이고 ‘民’도 역시 폄하의 뜻이 짙은 글자이다. 그 유래는 중국 주나라 때부터 신분을 나타내는 5계급, 즉 천자(天子), 제후(諸侯), 대부(大夫), 사인(士人), 서민(庶民) 중 가장 낮은 계급이다. 계급사회에서 서민은 천대받는 천민이었다. 조선시대를 말하자면 신분을 크게 양민(양반, 중인, 상인)과 천민으로 나눴는데 천민이 바로 서민이었다. 역사적으로 서민은 역사무대에 주인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농민봉기로 황제가 된 명태조 주원장 같은 인물은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무대에 오를 수 있었지 계속 서민신분을 유지한 사람이 주인이 되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사마천은『사기』를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 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 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나눠 구성하여 지었다. 여기서 제도 문물의 연혁에 관한 서 8편과 연표를 집대성한 표 10편을 제외하고 본기, 세가, 열전은 모두 인물을 다뤘는데 본기는 천자(제왕), 세가는 제후 왕, 열전은 무왕의 은주(殷紂) 토벌을 반대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먹다 죽은 이념과 원칙에 순사한 백이와 숙제를 시작하여 마지막에 이(利)를 좇는 상인의 열전 화식열전(貨殖列傳)까지 위대한 성현뿐 아니라 시정잡배가 도덕적 당위의 실천과 탐욕적 본능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뇌하는 생생한 모습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 다수의 인물은 바로 대부와 사인(士人)이었다. 말단 계급인 서민은 ‘명함’이 없었다.『사기』뿐만 아니라 모든 사서가 다 그러하다. 유교의 이념인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도 서민이 설 자리는 아예 없었다. 즉 사인은 수신하고 대부는 제가하며 제후는 치국하고 천자는 평천하의 의무가 각각 주어졌던 것이다. 이것을 수학공식처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수양을 쌓아 수신이 잘되면 제가가 따라서 잘 되고, 제가가 잘 되면 따라서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천하가 자연스레 태평해진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 계급분할이 아니었다. 사인이 공부를 통해 출세하여 권력을 잡으면 사대부가 되는 것이고, 대부가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실력이 향상되면 제후의 자리를 빼앗고 제환공처럼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에 들어 새로운 신흥지주계급이 탄생되어 사회신분판도를 바꿔놓기도 하였다. 어찌되었든 전국시대에 들어 제후국들의 공왕(共王)이었던 천자가 유명무실해지다가 결국 진 영정에 의해 역사무대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춘추시대의 서민은 전쟁에 참전할 자격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누가 군대를 하나? 사인이 했다. 병사란 사(士)가 사인의 사(士)인 것이 바로 이렇게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사인이 병사로 충당되었기 때문에 춘추시대 전쟁은 진짜 ‘문명’했다. 왜냐? 병사인 사인들은 모두 배운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자. 춘추시대 사인이 병사로 주축이 된 전쟁은 네 가지 규칙이 있었다. 첫째 시간을 엄격히 지켰다. 보통 아침 해가 떠오르면 집합하여 싸우고 아침밥을 먹기 전에 끝냈다. 아무리 길어도 하루를 초과하지 않으며 해가 지면 그만두었다. 둘째 지정된 장소에서만 싸웠다. 두 나라 국경선 변강(封疆이라고도 함)에서 싸웠다. 셋째 예의를 엄격하게 지켰다. 쌍방의 군대는 변강에 도착하면 일단 합숙에 들어간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 포진을 시작한다. 포진이 끝나면 각기 장군이나 사절을 파견해 대화를 시작한다. 넷째 유희규칙을 중시했다. 우선 적진에서 온 사자를 절대 죽이는 법이 없었다. 다음 상대가 전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하지 않는다. 그다음 거듭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 다친 사람을 더 가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네 번째는 머리가 흰 사람은 포로로 삼지 않는다. 다섯 번째 오십 보 후퇴하는 자를 쫓지 않는다. 오십 보만 후퇴하면 되는데 굳이 백 보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맹자의 '오십 보 백 보' 이야기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어떻게 그토록 재미나는 전쟁이 가능했을까? 전쟁목적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시 전쟁목적은 ‘겸병(兼竝:상대국을 멸망시켜 삼킨다는 뜻)’이 아니라 ‘쟁패(爭覇)’였기 때문이다. ‘쟁패’는 천자의 이름을 빌어 천하를 정치적으로 제패하는 것이지 영토 뺏기 싸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춘추오패’는 기타 제후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패주가 되었을 뿐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배하지 않았다. ‘겸병’전쟁은 전국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겸병’의 수요에 따라 오기, 손빈 등 군사가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류의 전쟁은 냉정하고 야비하고 야만스러웠고 참혹했다. 춘추시기 일선에서 싸움하는 자가 ‘사’였고 서민은 기껏해야 후방지원군 노릇을 하였다면 전국시기부터 서민이 싸움의 주력이었다. 그렇지만 서민출신군인을 ‘전민(戰民)’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춘추시기 관습에 의해 그냥 ‘전사’라고 불렀고 현대사회도 여전히 이 호칭이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역사를 돌이켜보면 23개 왕조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에 있어서 개국황제들은 하나 같이 서민을 병사로 이용해서 승리하여 옥좌에 오르면 바로 돌아서서 서민을 착취하고 압박하는 사례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의 새 중국이 창립됨에 따라 서민, 신민(臣民), 백성, 평민 등등의 호칭 대신 인민이란 어휘를 주로 사용해왔다. 북한도 중국처럼 인민이란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인민이란 호칭은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먼저 民이란 글자에 대해 살펴보자. 民은 본래 좋은 어휘가 아니었다. 적어도 존칭은 아니었다. 옛날에 이 글자는 보통 어둡다는 뜻의 ‘명(冥)’과 ‘명(暝)’ 그리고 맹인을 뜻하는 ‘맹(盲)’과 서민을 뜻하는 ‘맹(氓)’으로 해석되었다. 아마도 최초의 민은 모두 전쟁포로와 노예였기 때문에 눈을 찔러 장님이 된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여민(黎民)은 전쟁에서 패한 구려족(九黎族)이었고, 축민(畜民)은 상인이 다스리던 늙은 노예들이었으며 완민(頑民)은 주나라인에게 패하고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던 은상(殷商)의 귀족이었다. 이미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자연히 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노예는 평민으로 변했지만 역시 피통치자였다. 이른바 의민(蟻民), 초민(草民), 소민(小民), 천민(賤民), 조민(刁民), 비민(屁民), 순민(順民), 신민(臣民)과 마찬가지로 모두 명확하게 경멸과 차별의 뜻을 띄고 있었다. 臣民이란 전통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던 어휘로서 서양에서 말하는 시민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臣이란 본래 노예였다. 전쟁포로와 죄수도 포함되었다. 전쟁포로가 최초에는 살해되었고 나중에는 남자는 노예, 여자는 첩이 되었다. 그들은 목에 밧줄이 걸려 주인에게 가죽처럼 끌려 다녔다. 개별적으로 재주가 있으면 조금 대우를 해주기도 했다. 춤을 추는 무신(舞臣)처럼, 또 드물게나마 간수나 중간 보스 격으로 주인을 도와 다른 노예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농업 노예들을 관리하던 적신(籍臣), 목축 노예들을 관리하던 목신(牧臣) 등이 그것이다. 시민은 최초 그리스에서 생겨난 것이고 공자가 말한 소인에 해당될 것이며 주나라의 국인(國人)과 흡사한 개념이다. 국인은 도성의 주민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민은 여자와 외국인은 제외되어 있었고 그리스적 성인 남자에게만 주어진 권리였으며 그들의 권리는 투표권이 있었고 자유를 의미하였다.  한편 人은 승리자와 통치자를 뜻했다. 상고시대에 인과 민은 평등하지 않았다. 가장 높은 등급의 사람은 大人, 그 다음은 小人, 가장 낮은 등급의 사람은 만민(萬民)이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인과 민을 합쳐 인민이라 부르는 것은 서민이라 부르는 호칭보다 훨씬 낫다. 적어도 폄하의 뜻이 없다는 것이다. 인민이란 호칭은 폄하의 뜻이 없는 일반 개념이지만 한국에서 사용하지 않고 있고 폄하의 뜻이 다분한 서민이란 호칭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북에서 인민이란 호칭을 쓰고 있어 매우 꺼려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99%를 폄하의 뜻이 다분한 서민이란 호칭을 쓰는 한 평등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59    인문학이란? 댓글:  조회:3622  추천:1  2017-02-11
인문학이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네이버 선생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대답이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 자연을 다루는 자연과학에 대립되는 영역으로 자연과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현상을 다루는 데 반하여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으로 한다. 광범위한 학문영역이 인문학에 포함되는데 미국 국회법에 의해서 규정된 것을 따르면 언어, 언어학, 문학, 역사, 법률, 철학, 고고학, 예술사, 비평, 예술의 이론과 실천 그리고 인간을 내용으로 하는 학문이 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 기준을 설정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역사와 예술이 인문학에 포함되느냐 마느냐에 대한 이론(異論)들이 있기도 하다. 너무 잡다하다. 해석이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위 해석대로라면 마치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대비되고 인문학이 자연과학과 구분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과 같이 이해할 수 있어 굉장한 오류를 안고 있다. 사실 인문학은 자연과학과의 구분을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의 중심문화에서 탈피하고자 생겨난 하나의 학설이고 학문이다. 서양에서 인문학이 생겨난 것은 역시 근대화시기에 들어섬에 따라 나타났다. 근대화시기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예하면 기계문명의 탄생을 근대화시기 진입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지만, 막스 베버는 ‘탈주술시대의 개시가 바로 근대화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무슨 말이냐? 서양은 신이 통치하는 암흑기를 천여 년이나 지속해왔다. 이 시기를 중세기라 표현하는데 서양의 중세기 문화는 인간중심의 문화가 아니라 신의 중심 문화시대였다는 것이다. 즉 신 중심 문화에서 인간중심문화시대로의 진입이 바로 인문학의 시대 진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서양의 인문학시대 진입은 기껏해야 3백여 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의 인문학시대는 이미 3천여 년 전에 개시 되었으니 서양에 비해 역사가 거의 3천년 앞서고 있다. 중국역사를 돌아보면 夏나라 때는 ‘천명’을 중시했다. 지상의 모든 존재와 인간의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믿음이 굳건히 자리 잡았는데 이것이 바로 천명사상이다. 천명사상이 그 시대 종교역할을 하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지만 너무 추상적이어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래서 은나라에 들어서면 좀 더 구체적인 숭배대상을 지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귀신’이다. 귀신이란 ‘귀’와 ‘신’이 합쳐진 개념이다. 원시인류는 낮과 밤이 바뀌고 사계절이 바뀌고 땅에서 식물이 생겨 자라고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데는 필시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한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그 힘이 바로 신이다. 그런데 신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힘을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귀’이다. 추상적인 신과 구체적인 귀를 합쳐놓은 것이 바로 귀신이다. 은나라 때 인류는 귀신이 모든 세상만사를 지배한다고 여기고 길흉화복을 전부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점을 쳐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래서 은나라를 ‘숭귀문화(崇鬼文化)’시대였다고 말한다. ‘숭귀문화’의 핵심은 제사였다.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이른바 ‘제정일치’시대였다. 제사는 제물이 필요하다. 그 제물로서 여러 가지 음식이 있을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희생이란 말이 제사에서 생겨난 것이다. 천지종묘(天地宗廟) 제사(祭祀)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을 일컫는 말로, 희는 색이 순수한 것, 생은 길함을 얻지 못해 죽이는 것 을 뜻한다. 희생양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유태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쳤던 사실(하나님이 받아주지 않았지만)이 그 시대 사람도 제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좋은 증거이다. 그리고 왕이 죽으면 왕비와 후궁들 및 내시들을 따라서 생매장하는 이른바 ‘순장’제도가 있었다. 제사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제도는 사람보다 귀신을 더 중히 여기는, 즉 사람 위에 귀신이 있고 귀신을 사람보다 더 중히 여기는 문화, 이것이 바로 귀신의 중심문화였다. 이와 같은 ‘숭귀문화’는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섬에 따라 타파된다. 주나라에 진입하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과 순장제도를 없애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 중심 문화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숭귀문화’를 타파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인문학을 창조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사람중심문화를 구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무엇이었을까? 주나라 초기 주공이 예악(禮樂)제도를 지어냈다. 예는 명분이고 등급질서이다. 예하면 천자는 여자를 72명 소유할 수 있고 제후와 대부 및 사는 내리 차등으로 여자를 소유하고 백성은 여자 하나만 거느릴 수 있다는 제도가 바로 예이다. 제나라 재상 관중은 ‘사농공상’ 등급 제도를 실시하여 사회질서를 구축하였다. 이런 식으로 전체 사회는 등급과 질서에 따라 움직였다. 주나라 예악제도는 어떻게 실시가 가능했을까? 은나라가 상공중심시대였다면 주나라는 농경중심시대였다. 상공시대 인간관계는 횡적인 패턴이 강했던데 비해 농경시대 인간관계는 수직적인 패턴이 강했다. 즉 농경은 경험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나이 들수록 경험이 많고 그래서 연장자들이 받들리게 되는 데서 예가 생겨나고 실시되었던 것이다. 효는 예의 실시에 의해 자연적으로 따라서 실시되기로 되어 있다. 농경문화에서 예와 효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바이블이다. 주나라 초기 주공이 구축했던 예악제도는 대략 300년 지나자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백가쟁명, 백화제방으로 소문난 춘추시대에 진입하였다. 당시 주요한 학파로서 공자를 위수로 하는 유가, 묵적을 두목으로 하는 묵가, 노자를 중심으로 하는 도가 등 세 학파가 가장 두각을 드러냈다. 공자는 주나라 예악제도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구체적인 처방으로 ‘인애’를 내세웠다. 공자의 인애는 부모를 효도하고 형제우애가 좋아야 하고 가족의 화목이 사회에 전파되면 나라는 잘 다스려 지고 그러면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이다. 본문의 주제와 연관시켜 말하자면 우리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중시를 돌릴 필요가 있다.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 이것이 바로 인문학사회로 진입했음을 말해주는 가장 유력한 징표이다. 묵자는 등급질서를 반대하고 사람마다 평등하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사상을 주장하였다. 노자는 인위적인 예악제도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어 폐지해야 하고 따라서 사람을 속박하는 모든 법과 제도를 없애고 사람은 본능에 따라 있는 그대로 자연적인 행위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무위’사상을 주장하였다. 춘추시대 이 세 학파는 나름대로 중시를 받았으나 천하를 구하는 처방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그래서 천하는 더 복잡하고 혼란한 전국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서로 패주가 되어 ‘칭패(稱覇)’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전국시대 전쟁은 서로 먹어치우는 ‘겸병(兼竝)’이 목적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수요에 의해 오기와 손빈을 위수로 하는 병가들이 중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병가는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천하를 얻는 전쟁에는 도움이 컸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평화 시기에 진입하면 금세 잊혀 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병가는 인문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국시대 ‘겸병’의 맹주가 되려면 부국강병을 이뤄야 했는데 현실을 떠난 이상만을 주장하는 유가, 묵가, 도가는 환영 받지 못하고 새로운 학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법가이다. 법가는 상앙의 법, 신불해의 술(術), 신도의 세(勢) 등 세 가지 파를 한비가 하나로 집대성하여 하나의 학파를 이뤘다. 이 가운데서 가장 역할이 지대했던 것은 상앙이다. 상앙이 처음 진효공을 찾아 유세할 때 오제의 帝道를 말했더니 진효공은 끄덕끄덕 졸았다. 다음번에 요순의 왕도를 이야기 했더니 진효공은 여전히 아무 취미를 느끼지 못하고 졸고 있었다. 세 번째는 춘추오패의 패도를 말했더니 진효공의 눈이 금세 황소눈이 되고 두 귀를 바짝 세우고 서로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이 해서 경청했다고 한다. 상앙이 진효공의 마음에 들어 재상이 되자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을 이뤄냈고 후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초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있어 한비의 사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한비의 책『한비자』를 읽은 진시황은 한비를 얻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다. 물론 한비는 이사의 음모술수에 걸려들어 모함당해 살해되었으나 진시황은 한비의 사상과 책략을 받아들여 천하를 통일하였던 것이다. 법가는 이렇게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너무 각박하여 민심을 얻지 못해 천만년 가리라던 진왕조는 15년 만에 가장 단명으로 끝났고 법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상앙과 한비 및 송나라 왕안석 등 모두 비명으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역중천 교수는 “법가는 피로 물든 사상”이라고 평가한다. 진왕조의 패망을 지켜본 유방은 한나라 초기에 노자의 무위사상으로 천하를 다스려 성공한다. 그러나 한무제에 이르러 유가가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진 이후 2천년 제국의 역사는 겉으로는 유가로 다스리고 암암리에는 법가로 다스리는 이중적인 ‘명유암법(明儒暗法)’으로 천하를 통치해왔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의 인문학은 3천 년 전 주나라시기부터 시작되었고 제자백가 중에서 유가와 법가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어 현재까지도 중국사회제도를 지배하고 있다. 한편 중국인의 사상을 지배해온 학파로서는 유가와 도가 양대 산맥이다. 이에 대해 임어당 선생은 “중국인은 문화적으로는 유가를 숭상하고 본능적으로는 도가를 받든다.”고 말했다.
58    『삼국유사』로 보는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1) 댓글:  조회:3591  추천:9  2017-02-04
『삼국유사』로 보는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 1 .『삼국유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영토를 잃은 민족은 회생이 가능하지만 역사를 잃은 민족은 희망이 없다.”『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신채호의 말씀이다. 유태인은 2천 년 동안이나 나라를 잃고 디아스포라로 지구촌에 흩어져 살았어도 민족이 소실되지 않고 존재했으며 끝내 자기들의 나라 재건에 성공했다.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역사를 지켜온 덕분이었다. 실제로 유태인은 그들의 역사이자 그들의 종교이며 그들의 종교이자 그들의 역사였다. 세상에서 이렇게 역사와 종교가 일치한 민족은 유태인밖에 없다. 또 유대율법을 풀어 쓴 유태인의 삶의 지침서인『탈무드』는 어느 나라에서 살든 무릇 유태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그래서일까, 하여튼 유태인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약 배달민족이 2천년 동안, 아니 200년 동안이라도 나라를 잃었다면 재생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배달민족은 자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배달민족은 기록에 굉장히 약한 민족이다. 역사서다운 역사서『삼국사기』는 1145년, 야사이긴 하나 해방 후 한국학계의 중시를 받고 있는『삼국유사』는 1280년 출간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서라고 말할 수 있는『춘추』를제쳐놓고『사기』에 비하면 1200년 뒤쳐져 있고 일본의『고사기』와『일본서기』에 비해도 600년이나 떨어져 있다. 늦게나마 출간되었으니 좋은 일이지만 이 두 사서에 대해 갑론을박이 자자하다. 먼저 김부식이 지은『삼국사기』부터 살펴보자. 김부식이『삼국사기』를 편찬한 목적은 그가 왕에게 올린 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의 식자층들조차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첫째 중국 문헌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지나치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둘째 현존의 여러 역사서의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해야겠다는 것, 셋째 왕·신하·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 규범을 드러냄으로써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고 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유교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는 데 거울로 삼으려 한 것이 최종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12세기 당시 상황에서 그때의 지식인이 갖출 수 있는 최상의 민족주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김부식이 취한 철저한 사대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모처럼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필요성을 자각하였지만, 지나친 중국 의존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입방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찌되었든『삼국사기』는 후세 사학자들이 고대한반도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참고서 역할을 하고 있고 그래서 이 책의 역사적 가치는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사를 크게 정사와 야사로 나누는데 이른바 왕조중심의 역사를 기술한 것을 정사라 하고 민간 역사문화를 서술한 것을 야사로 취급한다. 이런 맥락에 따라『삼국사기』를 정사,『삼국유사』는 야사로 취급한다. 왕조중심의 정사도 중요하겠으나 신화를 포함한 민간 역사문화를 서술한 야사가 매우 중요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정사인『삼국사기』에는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대한 언급조차 없는데 비해 야사인『삼국유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지금 우리 겨레가 주장하고 있는 배달민족 조상을 단군으로, 최초 국가를 조선(고조선)이라 하는 것은『삼국유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배달민족의 고대 신화, 민속, 경제, 종교, 풍속 등 여러 분야의 역사를 담은 사서는『삼국유사』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사서인『삼국유사』는 오늘날 제대로 된 번역서조차 없는 상황이라 서글프고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삼국유사』는 고려 때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한문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을 현대 한국어로 번역을 시도한 학자는 이병도 선생이며 1943년이 최초였다. 그때는 일제강점기어서 이 책의 번역서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병도 선생은 1956년 재출간했다. 그 후 지금까지 십 수 명에 이르는 학자들이 이 책의 편역, 번역, 역주에 매달려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필자가 보건대 전부 이병도 선생의 번역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절대다수가 베껴내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심지어 이병도 선생의 번역에 비해 어휘사용과 문법을 포함한 문맥이 더 어색한 것도 있다. 번역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그나마 넘어갈 수 있으나 번역이 원문에 비해 엉뚱한 뜻으로 번역되어 있거나 명사와 동사를 구분 못하거나 한문 어휘 뜻을 이해하지 못해 저자가 전하려는 의도가 전혀 전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후 문맥이 뒤죽박죽이 되어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 못할 번역이 수두룩하다. 번역이 이토록 수준이 낮기 때문에『삼국유사』의 진정한 가치가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혀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폐단이 존재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번역이 이토록 엉망이지만 대한민국교육부 관리들과 사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필자는 우리민족 역사서를 집필한 학자에게『삼국유사』제대로 된 번역본이 한 권도 없다는 말을 했더니 ‘금시초문’이란다. 아마 절대다수 사학자들이 이 분처럼 모두 ‘금시초문’일 것이다. 문제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어느 드라마 대사가 떠오른다. “당신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아는가? 당신의 문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사학계의 현주소이다. 이병도 선생을 포함해 왜 수많은 사학자들이『삼국유사』를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한국 사학자들은 보편적으로 한문에 밝다. 문제는 한문에는 밝으나 한어에는 까막눈이다. 가령 현대한어 즉시의 뜻인 ‘立刻’을 세워서 조각하다, ‘老虎’를 늙은 범, ‘開胃’를 위를 짼다는 등 전부 천자문식으로 번역하다 보니 뜻이 엉망이다. 우리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중국말 속담 ‘車到山前必有路’를 수레가 산에 이르려면 반드시 길이 있어야 한다로 번역하니 한심하다는 말밖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삼국유사』에서 등장하는 한어를 천자문식으로 번역하다 보니 한어 어휘들이 제대로 번역 될 리가 없다. 예를 들어『삼국유사』권3 彌勒仙花 未尸郞 眞玆師 편에 ‘下榻’라는 어휘가 있는데 이병도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들이 이를 ‘말석’이라 번역했다. ‘下榻’은 동사이지 명사가 아니다. 그 뜻은 ‘머물다’이다. 하정룡 선생이 유일하게 ‘머물다’로 번역했다. 원문의 뜻은 ‘절간에서 잠시 머물면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겠습니다.’인데 나머지 분들은 전부 ‘이 절간의 말석에서 기다리겠다.’고 오역하고 말았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서점인 교보문고에 진열되어 있는『삼국유사』역본 십 수 권 일일이 살펴보았는데 첫머리 번역부터 중구난방이다. 예를 들어『삼국유사』첫머리가 ‘敍曰’로 시작되는데 역자마다 제각각으로 번역했다. 이병도 선생은 ‘敍曰’을 현대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한문 ‘自敍’라고 달았다. 최호 선생은 ‘서(敍)한다’, 하정룡 선생은 ‘차례를 정하여 말하기를’, 이재호 선생은 ‘서술해 말한다’, 최광식 선생은 ‘서문에 이른다’, 최광식 선생과 백대재 선생 공역에서는 ‘서에 이른다’고 옮겼고 신태영 선생과 임명현 선생은 아예 ‘敍曰’을 무시해 버리고 번역하지 않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공동 편역에서는 ‘머리말’로 옮겼다. 이 중에서 ‘머리말’로 옮긴 것이 가장 적합한 번역이고 ‘敍曰’을 무시하고 옮기지 않아도 무방하다. 임명현 선생의『삼국유사』편역에서는 첫 구절에 등장하는 ‘仁義’를 ‘人義’로 잘못 표기하는 오류를 범했다. 물론 뜻을 모르고 한 일이 아니고 실수로 인한 오류라고 하지만 첫 구절부터 오류가 발견되면 이 책을 읽을 맛이 삽시간에 도망가고 만다. 또 첫 머리에 등장하는 ‘大抵古之聖人, 方其禮樂興邦, 仁義設敎, 則怪力亂神, 在所不語.’ 이 구절의 번역도 중구난방이다. 고전연구실 옮김 신서원 편집부 꾸밈으로 된『삼국유사』는 “무릇 옛날 성인이 바야흐로 문화(예악)로서 나라를 창건하며 도(인의)로써 교화를 베풂에 있어서 괴변이나 폭력이나 도깨비 이야기는 어디서나 말하지 않았다.”로 옮겼다. 여기서 예악을 문화이고 인의를 도라고 옮긴 것은 오류이다. 괴력난신의 ‘怪’를 괴변이라 옮기는 것 오류이고 ‘力’을 폭력으로 옮기는 것은 더욱 오류이고 ‘神’은 도깨비가 아니다. 이 문장에서의 괴력난신은 초자연적인 힘을 의미한다. 즉 공자 같은 성인은 철저히 현실주의자로서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라는 말씀을 남겼듯이 그 어떤 초자연적인 신을 믿지 않았다. 또 이민수 옮김 을유문화사 출판본인『삼국유사』는 “대체로 옛날 성인은 예절과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세웠고 인과 의를 가지고 백성을 가르쳤다. 때문에 괴상한 일이나 힘이나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로 옮겼고 나머지 편역본, 번역본, 역주본 전부 똑 부러지게 정확하다 싶게 맞게 번역한 것이 없다. 이병도 선생의 지적처럼『삼국유사』는 불교지식을 비롯해 난삽하고 난해한 용어들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번역이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병도 선생은 자신의 번역이 많이 미흡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후대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예를 들어 彌勒仙花 未尸郞 眞玆師 편에 ‘禮儀風敎, 不類於常’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병도 선생은 “예의와 풍교가 보통사람들과 달랐다.”라고 옮겼는데 후학들이 이 구절 번역을 전부 이병도 선생의 이대로 베껴내고 있다. 전체 대한민국 사학자들 중에 혹은 한학자 중에 禮儀風敎가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 참으로 비극이다. 필자는 이병도 선생의 역주본을 처음 접하고 이 번역이 무슨 뜻인지가 이해되지 않아 교보문고에 가서『삼국유사』모든 편역, 번역, 역주본을 샅샅이 훑어보았는데 전부 똑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 역주를 시도한 이병도 선생이 이 어휘의 뜻을 모르고 옮긴 번역을 후학들이 역시 모르고 그대로 베껴낸 결과였다. 대저 禮儀風敎란 무슨 뜻일까? 당시 신라 사람들은 외래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에 비해 달랐다. 즉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가령 불교가 유입되면 중국식 명칭을 따라 불교라고 그대로 따라 불렀다. 유교도 마찬가지였고 기타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신라에서만은 독특한 시각을 갖고 중국식 명칭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즉 당시 신라 사람들은 무릇 세상의 모든 종교는 풍교일 뿐인데 저마다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성격에 따라 풍교 앞에 달리 이름을 달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불교를 불교라 부르지 않고 석가모니가 창안한 종교(풍교)라는 뜻을 따라 ‘釋氏風敎’라고 불렀던 것이다. 禮儀風敎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답이 아주 간단하다. 즉 유교에 있어서 ‘禮’가 가장 중요한 바이블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유교를 禮敎라고 불렀다. 신라 사람들은 유교를 유교라 부르지 않고 예의를 중시하는 종교(풍교)라고 인식하고 자기네들의 식에 따라 ‘禮儀風敎’라고 불렀던 것이다.『삼국유사』彌勒仙花 未尸郞 眞玆師 편에 ‘禮儀風敎, 不類於常’이란 구절을 마땅히 “유교지식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뛰어났다”고 번역해야 한다. 자아~, 禮儀風敎가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옮기지 못함으로 하여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가? 이것은 단순히 어휘 번역의 오류인 것이 아니라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즉 신라 사람들은 외래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당시로서는 가장 문명이 앞서 있는 중국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에 따라 부르므로 하여 주체성과 정체성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서양문물이 동양에 불가항력적으로 밀려드는 근대화 시기 중국의 구호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구호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인데 비해 조선의 구호는 ‘동도서기(東道西器)’였다. 이렇다고 내세울 만한 우리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삼국유사』의 재해석을 통해 배달민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밝혀내어 청소년들에게 민족적인 자부심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이 해야 할 마땅한 책무이다. 요즘 온 나라가 어수선한 정국에 더욱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57    육룡이 나르샤가 남긴 교훈 댓글:  조회:3827  추천:1  2016-04-20
  육룡이 나르샤가 남긴 교훈 세종대왕의 업적은 이방원 덕분   여말선초(麗末鮮初) 역사를 다룬 사극이 여럿 있다. , , , 얼마 전 성황리에 방송된 등등이다. 제목은 본래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부터 세종대왕까지 여말선초 이 씨 왕가를 찬양하는 에 있는 구절이며 육룡은 목조(이성계의 고조부), 익조(이성계의 증조부), 탁(도)조(이성계의 조부), 환조(이성계의 아버지), 태조(이성계), 태종(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등 조선 왕조의 조상 넷과 왕을 지낸 두 인물을 뜻하는 말이다. 사극에 등장하는 육룡은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이방지, 분이, 무휼 등 개국 주역이며 이 중에서 정도전과 이방원이 비중을 크게 차지한다. 만약 정도전이란 역사인물이 없었다면 고려의 수명이 더 길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설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도전이란 인물이 나타나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새로 세웠다. 우리는 조선개국을 주도한 정도전이란 인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려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는 종교적으로는 불교 천하였고 정치적으로는 귀족세력이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강했다. 958년 광종이 귀족세력을 약화하려고 과거제를 도입하여 유교세력을 키웠으나 귀족들이 여전히 나라의 지배세력이었다. 최씨 일가 무신정권 80여 년 동안 왕은 허수아비였고 실권을 그들이 전부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여말(麗末)에 이르러 정몽주와 정도전이라는 두 걸출한 유학자가 배출되었고 이 두 거목은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정몽주(1337~1392)는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한 이후로 승승장구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고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한편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機智)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정도전(1342~1398)은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해 고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했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 정책에 반대해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 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함주 막사로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 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해 조준(趙浚)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되자 유배에서 풀려 나와, 같은 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에서 이를 트집잡아 내정을 간섭하자, 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 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해 군량미확보, 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해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 여름에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해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해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스승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둘 다 총명과 재질이 뛰어나 여말 가장 주목 받는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이라면 정몽주는 온건파, 정도전은 급진파였다. 오늘 한국정치에 비유하자면 정몽주는 보수이고 정도전은 진보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유교사상이 골수까지 침투된 인물들이지만 추구하는 길이 달랐다. 정몽주는 유교사상의 가장 근본인 역성혁명불가를 목숨 바쳐 지켜가려는 반면에 정도전은 썩어빠진 고려를 버리고 백성을 위해서라면 역성혁명도 불사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정도전이 오로지 백성이 편안하고 잘 사는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는 나라를 구상하고 백성을 중히 여겨 계민수전(計民授田) 같은 개혁을 밀어붙인 것은 그의 유배생활에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왕권을 약화하고 대신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는 군신조화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등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이상주의자였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서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에 비춰보면 본래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씨조선 개국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제거하고 건국 후 왕권강화에 가장 큰 벽인 정도전을 살해함으로써 이씨조선의 정착에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이성계가 가장 아끼던 인재였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그를 끝까지 설득하여 함께 새로운 조선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반대하며 오히려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를 무너뜨리려고 하자 이방원은 아버지 문병 왔다가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여 버렸던 것이다. 이방원은 이씨 조선을 건국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과 한 배를 탔다가 정도전이 너무 안하무인으로서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들자 두 사람은 갈등이 극에 달했다. 정도전은 지나친 이상주의자로서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백성을 위하고 종묘와 사직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눈에는 정도전도 역시 권력에 눈이 어두운 대신에 지나지 않았다. “당신이 하면 정치고 내가 하면 사심이냐? 너무 자신을 합리화하여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려는 야망을 내가 박산 내 줄 것이다.” 이방원의 말이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경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고집하다가 결국 목숨을 이방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방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도전이 책동하여 책봉한 나이 어린 세자 방석을 죽여 버리고 자신은 손에 너무 피를 많이 묻혀 직접 왕위에 등극할 수 없음을 알고 둘째 형을 왕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둘째 형은 자신도 언제 이방원의 손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주동적으로 왕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하였다. 이방원은 재위 시에 모든 정적을 제거하고 셋째 아들 이도를 후계자로 삼았다. 이도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은 총명이 뛰어나고 재주가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해도 정적이 많으면 그에 휘둘리다 보면 정사는 엉망일 것이고 새로운 업적은 꿈도 꿀 수가 없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선왕인 아버지 이방원 덕분에 걸림돌이 없이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문화 분야에서 집현전 설치, 훈민정음 창제하였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발명하였다. 경제사회 분야에서 조세의 공평화, 노비의 지위를 개선하였다. 대외정책 분야에서는 국가주권 확립, 영토 확장 등 많은 업적을 남겨 위대한 군주로 칭송되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은 나름대로 당시 역사적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고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세종의 업적은 선왕 이방원 덕분이었다.
56    공자와 예수 이야기(1) 댓글:  조회:4016  추천:0  2016-03-10
克己復禮는 복고주의 아니다 민변독서모임 9주년 기념행사 강의고   지난 3월 7일 저녁 서초구에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독서모임 9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독서모임은 보편적으로 처음엔 열정이 높다가 점차 식어져 3년을 넘기기 힘들다. 이런 독서모임의 ‘보편적인 생리’를 깨고 만9년 동안 이어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그 동안 모두 204회 모임에 총 259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였다. 지금 회원들의 열기를 보아 10주년은 거뜬히 넘길 것 같다. 필자는 2015년 6월부터 이 독서모임에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지금은 열성회원으로 매번 빼놓지 않고 출석하고 있다. 나의 지식을 한국사회 최고 엘리트들과 공유할 수 있어 굉장히 좋고 또 한국 상층사회의 정서를 배울 수 있어 좋다. 한편 이날 기념행사에서 필자는 영광스럽게도 기독교 영지주의 교리 ‘에이돌론과 다이몬’을 동양 최고 성인인 공자의 克己復禮와 연관시켜 30분간 강연을 진행하였다. 기독교를 靈知主義와 文字主義 두 가지로 나누는데 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가 주류였다. 4세기 초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됨에 따라 문자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 지금까지 문자주의 기독교로 흘러왔다. 영지주의란 로고스(진리, 이성, 논리, 원리, 윈칙)를 추구하고 그노시스(신비한 앎)를 얻는 것이며 입문식을 거쳐 세례를 받는 절차가 있고 최종 영적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영지주의 세례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가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는 흙의 단계로서 의식이 없는 상태이며, 물의 단계에 이르면 심적인 수준이 형성되며, 공기 세례를 받으면 영적 수준이 되고, 불의 세례를 받으면 영혼의 구원에 도달한다. 영지주의는 또 인간을 수준 낮은 자아(에이돌론)와 수준 높은 불멸의 자아(다이몬)로 나누고 에이돌론에서 다이몬으로 도약하려면 위와 같은 입문식과 세례를 거쳐야 한다. 문자주의란 성경문자 그대로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어떻게 처녀 뱃속에서 태어날 수 있는가? 어떻게 물을 아무 설비도 없이 즉석에서 포도주로 만들 수 있는가? 어떻게 5병2어로 5천 명을 배 불리 먹이고도 남게 할 수 있는가?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부활 승천할 수 있는가? 등등의 의문을 품거나 제기하지 말고 성경문자 그대로 믿기만 하면 천국에로 간다는 것이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본래 기독교의 본질은 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요즘의 기독교는 영혼의 구원은 거론조차 되지 않고 흔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복 받고 천국에 간다든가, 예수를 믿으면 부자 된다는 기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의 일이다. 조선족이 한국에 오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친인척 연고가 없는 조선족은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가짜비자 받고 한국행을 성사시킬 수 있었는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연길시 장모 여인(당시 34세)은 남편과 가짜 이혼하고 한국인과 가짜결혼으로 코리안드림의 꿈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비자가 기각되었다. 오로지 한국행 꿈에 빠져 있던 그녀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기막힌 조언을 듣게 되었다. “교회에 등록하고 헌금 내면 비자가 나올 거야!” 장모 여인은 무신론자라 처음엔 친구의 말에 뚱딴지같은 헛소리라고 듣지 않았다. 그런데 비자는 한 달 지나고 반년 흘러도 여전이 나오지 않는다. 친구 왈, “우리 사촌언니도 너처럼 3년 동안 애타게 기다려도 비자는 여전히 소식조차 없어 교회에 다녔는데 글쎄 다니자마자 비자가 나왔지 뭐야.” 장모 연인은 하도 절망에 빠져 있던 터라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어서 마음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헌금 얼마 내면 되나?” “각자 자기 마음이긴 한데 한 50원~100원 정도.” 장모 여인은 곧바로 교회에 가서 신도로 등록하고 예배 시 헌금 80원을 납부했다. 불과 며칠 후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의 한국행 비자가 거짓말처럼 나왔던 것이다. 장모 여인은 동네방네 홍보하고 다녔다. 예수를 믿으라고. 예수를 믿으면 소원했던 일이 다 성사된다는 것. 사람들은 흔히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의 고등종교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는 신이 아니라 심양영사관의 영사노릇을 담당하고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예수를 신앙하는 그리스도교는 고등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평범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에 등록하고 헌금 바쳐서 원했던 일이 소원성취 되는 행위는 민간에서 말하는 방토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것은 분명히 기독교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가 영지주의였는데 왜서 문자주의로 전환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고등종교는 보편적으로 제국의 통치도구 내지 통치무기로 이용당하는 과정에서 본래의 교리 의미들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왜곡된 교리들이 전파됨에 따라 그것이 정설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일례로 불교는 지금의 네팔에서 생겨날 때는 소승불교(경전의 교리교의에 따라 개인의 수도를 통해 구원 받는 것, 지금도 남아, 동남아 불교는 소승불교임)였으나 후한말기에 중국에 유입되면서 도교식 불교 즉 격의(隔意) 불교로 변이 되었고 기복신앙을 위주로 하는 대승불교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한국 부녀들이 부처님 상을 만지며 아들을 점지해 주시기를 비는 행위는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다. 중국의 도교는 본래부터 종교가 아니라 일종 학설이었다. 즉 춘추시기 초나라 중앙도서관 관장을 맡고 있던 노자가 복잡한 난세의 구국처방으로 내놓은 학문이 하나의 대표적인 학파인 도학으로 승화되었다. 도학의 기본은 도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처사하는 것, 유학과 달리 인위적인 윤리니, 도덕이니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지 않고 無爲自然의 치국방침으로 천하를 태평성세로 만드는 것, 개개인의 수도를 통해 인간의 최고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제국에 이르러 도학은 신선숭배와 연단술 및 양생술로 변하면서 하나의 종교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유교도 본래부터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처음엔 하나의 학설, 즉 유학이었다. 한제국에 이르러 한무제 때 동중서가 매니저로 나서서 한무제와 ‘흥정’한 결과 유학이 제국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선정되었으며 따라서 선비들은 관료집단에 진출하여 사대부로 되어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학은 유교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유학이 유교로 변화됨에 따라 본래 공자의 학설이 제국의 통치자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된 것들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유학의 ‘군군신신, 부부자자’는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가 군주를 따르지 않는다. 가령 겉으로 억지로 따르는 척 하면서 진심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역이용하여 자신의 이속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 그래서 어리석은 군주가 있으면 ‘뛰어난 신하들’이 많기 마련인데 그들은 나라를 말아먹기가 일쑤였다. 군주가 군주다우면 신하도 역시 자신의 푼수를 알아야지 하극상이 되면 천하가 어지러워지기 쉽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 자격이 없으면 아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이며 가문은 혼란에 빠지기 쉽다. 유교의 ‘군군신신, 부부자자’는 신하는 무조건 군주에 복종해야 하고 아들은 무조건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유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제국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왜곡되어 전반 사회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극기복례’도 유학 때와 유교의 시기에 들어 하늘과 땅 만큼 엉뚱하게 해석되었던 것이다. 먼저 유교의 ‘극기복례’를 살펴보면 자기를 억제하고 예에 맞게 행동하라는 것인데 여기서 예는 周禮, 즉 주나라 정치제도와 정치질서를 일컫는 것이므로 공자는 복고주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보수분자로서 마땅히 타도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문화혁명 때 특히 비림비공(批林批孔) 시기에 배운 ‘지식’이었다. 그렇다면 유학에서 말하는 ‘극기복례’의 참뜻은 무엇일까? 우선 禮는 농경문화의 산물이며 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며 일상생활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농사는 철저히 현실에 안주해야 하며 경험이 많아야 잘 지을 수 있다. 경험을 쌓으려면 나이를 먹어야 한다. 그래서 중국문화는 노인을 존중하는 禮와 孝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禮는 점차 농경사회에 가장 성스러운 바이블로 떠올랐다. 종교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禮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경지로서 聖이며 기독교 영지주의 교리에 따르면 수준 높은 불멸의 자아 다이몬이다. 己는 俗이며 수준 낮은 자아 에이돌론이다. 기독교 영지주의에 따르면 속에서 성으로 도약하려면 입문식을 치르고 4단계 세례를 거쳐야 한다. 공자는 나라는 己, 즉 俗이 禮라는 聖에로 도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공자는 인간사회를 소인과 군자라는 두 계층으로 나누고 수준 낮은 자아인 소인이 수준 높은 불멸의 자아(군자)에로 도약하려면 배우라고 호소하였다. 즉 소인은 배움을 통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공자의 어록이라 말할 수 있는『논어』는 학이편으로 시작되고 첫 구절이 곧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學而時習之, 不亦悅乎)"이다. 이는 공자가 배움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는 증거이다. ‘극기복례’는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하자면 속물인 小我를 죽이고 성스러운 大我에로 도약하는 것이며 그 루트는 배움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똑 같다. 다만 목적에 이르는 방법과 방식이 다를 뿐이다. 서양은 유목문화의 환경에서 속세에서 성세에로 도약하려면 종교의례가 필요했고 동양은 농경문화의 환경에서 리얼리즘이 발달했기 때문에 속세에서 성세에로 도약하려면 종교의례가 아닌 배움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55    선비와 권력의 유착역사 댓글:  조회:4631  추천:0  2015-02-17
선비와 권력의 유착역사   가. 선비의 유래 선비는 곧 ‘사(士)’이다. 조선시대 사회계층을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농공상이며 여기서 사가 곧 선비를 뜻한다. 사의 계층은 사대부와 구분된다. 사람들은 흔히 사와 사대부를 구분 못하고 혼용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사는 공부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고 대부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로서 공부하여 권력을 갖게 되면 곧 사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럼 사(士)는 어떻게 생겨나고 대부(大夫)는 또 어떻게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대략 4천 년 전 은나라 때 문자가 생겨났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귀신을 섬기고 길흉화복을 점치고 점의 결과를 거부기 껍데기에 새겨놓는데서 상형문자가 탄생되었고 그것을 역사에서는 갑골문이라 부른다. 문자를 만들고 새기고 하였으니 공부한 사람이 있긴 하였으나 극히 드물었을 것이고 전반 사회가 귀신을 섬기는 기풍에 의해 삶을 영위하는 풍토에서 문화를 중시했을 리가 만무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공부한 사람이 사회 하나의 계층을 이룰 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은나라 시기 사(士)가 어떻게 활동했다는 기록이 없다. 중국에서 사(士)가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주나라시기였다. 은나라 때는 청동기를 제작할 만큼 수공업이 굉장히 발달하였고 따라서 상업도 굉장히 발달하였다. 그런데서 은나라를 상나라라고도 부르며 장사업을 상업(商業), 장사치를 상인(商人)이라 부르는 관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은나라는 말기에 이르러 주왕(紂王)이 타락하고 정사를 바로 돌보지 않아 힘을 잃은 틈을 타 주의 민족이 궐기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3천 년 전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정복하고 중원에 주나라를 세웠다. 중국역사학자들은 은(殷)에 대한 주(周)의 승리는 곧바로 농경문화가 경상(經商)문화에 대한 승리이고 문화의 숭배가 귀신숭배에 대한 승리였다고 평가한다. 주무왕은 은을 정복하여 얻은 땅을 친척과 전쟁에 기여한 장군들에게 나눠주어 경영하게 되었는데 땅을 분봉 받은 자를 제후라 부르고 제후가 또 자신의 토지를 친척들에게 분봉하였는데 이들을 대부라고 한다. 즉 주나라 왕은 자신의 통치범위를 천하라 여기고 자신을 하늘에서 내린 아들이란 뜻으로 천자를 자칭하고 나섰다. 제후가 분봉 받은 토지의 영역을 국이라 하는데 제후는 국왕에 해당된다. 제후는 왕이고 국과 가의 구체적인 경영은 대부가 맡아 한다. 대부 밑에 사가 있는데 사는 대부를 도와 가를 고르게 한다. 사가 공부하여 수양을 쌓는 것이 수신(修身)이고 대부를 도와 가를 고르게 하는 것을 제가(齊家)라 한다. 사는 또 춘추시대까지 전쟁이 일어나면 일선에 나가 싸워야 한다. 전사(戰士), 병사(兵士)란 말이 이렇게 생겨났다. 당시 백성은 싸울 자격이 없었고 싸움의 주체는 사의 계층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전쟁은 상대를 멸망시키고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패권을 이루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었다. 전국시대에 전쟁이 더는 패권의 목적이 아니라 겸병, 즉 상대를 먹어치우는 싸움이기에 백성들도 전쟁에서 싸우는 주체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주나라는 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농후하여 공부하는 자가 많아 졌고 이들이 사회 하나의 계층으로 등장하였으며 춘추전국시기에 이르러 이들은 혼란스런 천하를 구제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노자, 공자, 묵자, 맹자, 장자, 한비자 등등의 유명 인물들이 눈부시게 역사무대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제후와 대부는 자신들의 영지가 있었으나 사는 영지가 없이 마치 중국현대사에서 집단화 농업체제에서 가가호호 자류지(自流地)를 조금씩 남겨 채소나 심어먹을 수 있을 만큼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는 그 조그마한 땅을 믿고 생계가 어려워 대부나 제후한테 붙어먹고 살지 않으면 연명이 어려웠다. 쉽게 말하자면 사는 털과 같은 존재로서 가죽이 없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춘추전국시대 각 학파 배운 사의 집단이 이 나라 저 나라 천하를 주유하면서 감투를 얻기 위해 몸부림친 것이 바로 이를 증명한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공자라는 것을 세인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공자를 비롯한 사의 집단이 단순히 감투에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학문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건립하고 대대손손 이어 내려가 영광을 빛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 선비가 진나라 천하통일에 기여 중국왕조역사는 하나라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라 시기 제후의 수는 1만이었고 은나라에 이르러 절반 이상으로 줄어 3천이었고 주나라 초기엔 8백의 제후가 있었다. 춘추시기에 서로 패권을 다퉈 제후의 수가 줄어들더니 전국시대 말기엔 7웅이 남았고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다. 왜 역사가 흐를수록 제후의 수가 줄었고 이윽고 하나의 국가만 남았을까? 인류역사는 혈연으로 이뤄진 씨족공동체→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부족→부족연맹→부족국가→부족국가연맹→방국→제국으로 흐르는 패턴이었다. 중국역사의 경우 하나라 시기는 부족연맹, 은나라 시기는 부족국가, 주나라 시기는 서주 때 부족국가연맹, 동주에 이르러 방국형태에서 최후 제국으로 과도되었다. 이 공식에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인류역사는 원시공동체에서 매우 분산된 분권사회로 이행되었고 그 분권이 점차 하나의 권력으로 집중되는 중앙집권제 제국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분권은 봉건을 의미하는데, 봉건이란 ‘봉토건국(땅을 나눠주는 것이 봉토이고 그 땅과 그 땅에서 사는 백성을 다스리는 제후를 세우는 것이 건국임)’이며 주나라 왕은 천자로서 천하의 주인이지만 제후국의 치국에 관여하지 않아 허수아비 같은 존재이다. 각 제후국에 왕이 따로 있고 세금징수, 군대양성, 인사권까지 모두 행사하는 권력과 권리를 갖는다. 제국이란 권력집중과 관원대리제도를 실행하는 중앙통일집권체제를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중국역사는 분권사회로부터 어떻게 통일집권(統一集權)사회인 제국으로 이행되었을까? 전국시기인 기원전 4세기까지 진나라는 7국 중 별로 볼꼴이 없는 촌놈의 나라였다. 문화적으로도 낙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재도 없어 그저 그런 후진국이었다. 그러던 데로부터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 진나라는 강대국으로 부상하였고 종국적으로 천하통일을 이루어냈다. 진이 천하통일 할 수 있었던 내막에는 진영정 썩 전에 상앙이란 선비가 이미 국력을 부강 시키고 군사를 가강하여 토대를 잘 닦아놓은 덕분이었다. 진효공 때 성은 공손이고 이름이 앙(鞅)이란 선비가 위나라에서 왔다. 그래서 처음엔 그를 ‘위앙(衛鞅)’라 불렀는데 효공이 그에게 상(商) 지역에 봉하여 그때부터 상앙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앙은 법가계열의 인물이다. 당시 법가는 이른바 진보파로서 기존의 체제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초, 위, 한, 제 등 나라들에선 획기적인 개혁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앙은 후진적인 진나라를 선택하여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로 맘먹었다. 상앙의 변법에는 정치, 경제, 군사 등 제반 분야의 개혁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개혁의 핵심내용으로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영주제’를 폐지하고 ‘지주제’를 실시한다. 먼저 귀족 영주의 지위와 특권을 몰수하여 일반 백성가운데 지주나 부자 정도로 강등시킨다. 군공이 있는 종실의 경우라도 후(後)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 후는 조세만 징수할 뿐 백성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기존의 영주에 부속된 신민은 재편하여 지방관이 관리토록 한다. 둘째 ‘세습제’를 폐지하고 ‘임명제’를 실시한다. 모든 관원은 국군이 임명하는데 능력에 따라 직책을 부여하고 더 이상 작위가 세습되지 않도록 한다. 능력과 재능이 있는 자는 진나라 사람인지 여부를 떠나 정책을 결정하는 영도자가 될 수 있다. 당시 관직은 대부와 사 출신들이 맡았으며 대대로 세습되어 가는 귀족들이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관리세습제를 타파하고 임명제를 실행한 것은 큰 혁명이었다. 셋째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한다. 전국에 31개 현을 설치하고 현령과 현승(縣丞:부현장)이 다스리도록 한다. 이후 새롭게 얻은 땅에도 군현을 설치하고 더 이상의 봉국은 개설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정전제’를 폐지하였다. ‘정전제’는 일정한 토지를 아홉 등분한 것인데 분할된 농지가 우물 정(井)자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농가 8호가 각기 한 곳씩 맡아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토지는 공동으로 경작한다. 하지만 농부들은 자신의 몫으로 할당된 농토는 열심히 경작하지만 공전을 가꾸는 데는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다. 또 정전제는 가로 세로 길이 너무 많아 개간농토를 점하고 있는 면적이 많아 생산이 비효율적이다. 정전제를 폐지한 이후에는 새로 생긴 땅을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게끔 허락하고 관은 세금을 징수하면 그만이기에 관과 개인 모두 좋아하는 개혁이었으며 생산량이 현저히 제고되고 생산력이 크게 증가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전공에 따라 상벌제도를 실시하여 귀족계층도 전공이 없으면 기존의 권력을 내놓아야 했다. 전투에 나서는 모든 장군과 병사들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죽기 내기로 싸우니 전투력이 크게 증가하였다. 종합하여 말하자면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에 의해 임금의 권력이 확대되고 군사력이 가강되고 생산력이 크게 증장하여 부국강병을 이뤄 천하통일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서서히 제국의 틀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성과는 진영정에 이르러 천하통일을 이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앙이란 한 선비가 변법을 통해 진나라를 부국강병 시켜 천하통일을 이뤄내는데 토대가 되었고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제국의 출현에 막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다. 진시황은 법가에 의해 성공하고 법가 때문에 망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게 된 것은 법가의 덕분이었다. 이미 상앙과 같은 법가 선비가 있어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도 있거니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인재를 긁어모으기 시작하였는데 역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법가계열의 인재를 모시기 위해 아무리 큰 대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재모시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비자를 데려오기 위해 한나라와 전쟁도 불사하고 한을 정복하고 나서 한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한비자는 대표적인 법가인물이며 제왕통치술을 집필한 인물이다. 진시황은 한비자의 법가사상을 많이 섭취하였고 또 한비자와 동문이었던 역시 법가계열의 인재인 이사(李斯)도 신변에 두었다. 이사는 본래 초나라 출신이었다. 말단관리직이 성차지 않아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구학(求學)의 길에 나섰고 순자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가장 앞날이 창창한 진나라에 갔다. 그는 객경(客卿) 출신이라 본토 배기 관료들과 마찰이 심해 아슬아슬하게 쫓겨날 위기에도 처했으나 기민한 술수로 남아 진시황의 통일대업에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통일 후에는 진시황에게 분서갱유를 권장하여 황제의 권력 강화에 큰 힘이 되었다. 이사는 또 진시황이 천하통일 집권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화폐를 개혁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심지어 거동륜(車同輪)에까지 신경을 써 모든 분야에서 통일된 하나의 기준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중국역사에서 첫 제국인 진나라가 강대하고 천년만년 이어갈 것처럼 보였으나 이사와 같은 법가의 강력한 밀어붙이기 조치에 의해 사회 여러 분야에서 모순이 격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분서갱유를 통해 지식인 선비들을 부들부들 뜰게 만들고 강력한 법제도는 백성들을 숨을 못 쉬게 만들어 도처에서 곪고 있었다. 그리고 법가 문화는 너무 삭막하여 인간사회 정을 메마르게 하여 사람 살기 굉장히 피곤한 사회를 조성하였다. 형벌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쩍하면 죽임을 당하는 사회, 게다가 연좌죄를 실시하여 한 사람이 죄를 범하면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시름 놓고 숨조차 쉴 수 없는 각박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전반 사회에서 모두 반기를 들지 않으면 이상하리만치 폭정이 삭막하여 재빨리 망하는 길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역사에서는 진승, 오광 농민봉기에 의해 진나라가 망했다고 서술한다. 허나 필자는 그 강대했던 첫 제국인 진나라가 15년이란 극히 단명한 수명을 맞게 된 것은 농민봉기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법가문화가 유가와 도가를 비롯한 기타 문화에 대한 패배라고 결론내리고 싶다. 물론 진승, 오광 농민봉기가 이미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 도화선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라. 한무제 덕분에 유생들이 2천년 동안 천하를 지배 중국역사에서 첫 제국이었던 진나라는 비록 15년이란 단명으로 끝났으나 그 후 모든 왕조들이 진제국의 정치제도를 2천년 동안이나 지속하여 실행하여 왔다. 진제국의 정치제도는 군현제와 관원임명제 실시를 통해 지방 귀족들이 관리하던 토지와 백성을 모두 황제의 소유로 귀속시켜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유방이 항우와의 초`한전에서 승리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자 어떤 정치제도로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제국이 재빨리 망한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몸부림 때문이었다. 일부 신하들은 진제국이 빨리 망한 것은 잘못된 정치제도 때문이라면서 아예 군현제를 포기하고 본래 주나라 후기 방국제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고, 다른 일부 신하들은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인지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느냐고 하면서 군현제가 선진적인 정치제도이므로 이를 도입해야함이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유방은 두 부류의 주장을 절충하여 장안과 그 주변 즉 경기지역은 군현제를 실시하고 지방은 방국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일국양제(一國兩制)’이다. 이렇게 정치제도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무슨 이념으로 천하를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또 풀어야 하고 통치이념과 사상을 수립해야했다. 진제국처럼 법가의 이념과 사상을 받아들인다면 또 급속히 망할 것 같아 아예 포기해버렸다. 진제국 시기 백성들이 지친데다 후기 농민봉기와 또 초`한전을 겪고 나서 더구나 백성들이 지쳐 있기 때문에 충분히 맘 놓고 편하게 삶을 영위하도록 만들자는데 입을 모았다. 그렇게 하려면 도가의 ‘청정무위’ 이념을 도입해야 했다. 이렇게 되어 한나라 초기 제국통치이념으로서 도가가 선발되었다. 백성을 닦달하지 않고 들볶지 않으니 천하가 태평해져 문제와 경제 때 성세를 이루어 그 후 세대들이 본받을 만한 ‘문경지치’를 남기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제국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힘이 없어 흉노를 비롯한 주변 오랑캐들이 집적거리고 제국 내에서도 여기저기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무제 때 오국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군사재정의 뒷돈을 조사해보니 염전(鹽田)과 제철(製鐵)이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무제가 염전과 제철의 사유권을 몰수하고 국가소유로 귀속시켜 그때부터 중국역사에 국영기업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한무제는 장건(張騫)을 파견하여 흉노를 제압함으로써 내유외란(內揉外亂)을 제거할 수 있었다. 한무제가 풀어야 할 과제로서 남은 것은 한나라 초기엔 도가의 이념이 나름대로 효과를 보았으나 이젠 강력한 제국의 통치이념과는 거리가 멀다고 인식하고 새로운 통치이념을 수립하기로 맘먹었다. 바로 이때 유생그룹의 대표이사 격인 인물이라 말할 수 있는 동중서가 나타나 한무제와 흥정을 붙였다. 결과 한무제는 유가를 통치이념으로 삼을 것을 동의하였다. 이렇게 동중서는 황제와의 흥정에서 얻을 것을 모두 얻어 승자가 되었고 그 후 2천 년 동안 유생들이 천하의 권력중심에 자리하게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마. 유교가 2천년 제국역사의 통치이념으로 선택된 이유? 중국문화는 선진(先秦)시대에 이미 기본 틀을 다 갖췄고 이미 완성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세계역사에서 가장 앞선 사례이다. 선진시대 각 학파의 이념을 간단하게 살펴본다면 도가는 ‘청정무위’를 주장하는데 전후(戰後) 백성을 숨 돌리게 만드는 데는 일정한 효력이 있으나 통치이념으로 지속하여 써 먹기는 너무 물렁해 보인다. 법가는 진나라가 도입하여 천하통일에 성공하였으나 지나치게 형벌을 중시하여 사회를 너무 삭막하게 만들고 민심이 지나치게 각박해져 왕조가 단명을 맞을 위험이 굉장히 크다. 묵가의 ‘겸애’사상은 좋은 것이나 전반 사유재산이 등장한 이후 인간사회는 개개인의 의식수준이 이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제국의 통치이념으로 삼기엔 부적격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의 힘을 강력하게 만드는 통치이념은 유가가 가장 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유가는 사회 각 영역에서 모두 질서를 추구한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군군신신(君君臣臣),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부부자자(父父子子), 연령에 따라 아래 위가 있어야 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 또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처강(夫爲妻綱)은 국가적으로 집안에서 모두 강력한 질서가 서기를 바라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 각 영역에서의 질서는 결국 따지고 보면 황제가 최고의 존재로 군림하는 것을 각인시키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유가는 또 예와 효를 매우 중시하는데 이는 농경문화에서 경험을 우선으로 받드는 풍토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것을 무기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유가는 또한 도덕과 윤리라는 무기로서 인간사회를 속박하고 질서를 지키고 공공의식을 키우며 인간의 됨됨이를 만들어간다. 도덕과 윤리를 강조함으로서 제국은 돈과 힘을 들이지 않고도 관료집단을 바르게 서게 할 수 있고 백성들도 따라서 사회 룰에 따르도록 만들 수 있어 수지가 가장 맡는 장시임에 틀림없다. 유가는 종법사상으로 국가와 집안의 질서를 유지케 하였던 것이다. 황족의 직계는 대종이고 기타 가족은 소종이다. 가문에서는 맏아들이 대종이고 차남부터 전부 소종이다. 대종과 소종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대종이 가산을 이어받고 제사를 주관한다. 제국시대엔 제사가 매우 중요한 행사이므로 제사를 통해 대종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상기 여러 가지 유가의 이념과 사상은 제국의 힘을 키우고 유지하고 백성들을 전부 황제의 신민(臣民)으로 만드는데 가장 좋은 무기였다. 그래서 한무제는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고 그 후에도 여전히 통치무기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 과거급제제도가 유생들이 천하를 장악하게 만들었다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가 먼저 귀족세습제를 폐지하고 관료임명제를 실시하였고 이를 통해 군현제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 제도는 진시황 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고 지금도 중국은 간부임명제를 실시하고 있다. 제국시대 관장(官場)은 관(官), 요(僚), 이(吏) 등 세 가지로 나눴다. 관은 정무관이라면 요는 관의 보좌관이며 이는 사무관(서기관)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관료와 관리라는 말은 있어도 요리(僚吏)라는 말은 없다. 보좌역할 하는 사람과 단순히 서기 일만 하는 사람만으로는 관장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관을 중심으로 요와 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제국시대 관원을 도대체 어떻게 임명하였을까? 황제가 그 수많은 관원의 내막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일면식 없는 자들을 어떻게 알고 관원으로 등용하고 임명하였는가 말이다. 한나라 시기엔 찰거제를 실시하였다. 찰거를 향거리선(鄕擧理選)이라고도 하였다. ‘효(孝)’와 ‘렴(廉)’의 유교적 덕목에 기초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대신이나 지방 장관의 추천을 받아 선발하는 제도이다. 선발 과정에서 향리(鄕里)에서의 평판과 세론(世論), 곧 향론(鄕論)이 중시되었기에 향거리선(鄕擧理選)이라고 한다. 대신(大臣)이나 열후(列侯), 주(州) 자사 등이 추천하는 ‘수재(秀才)’와 군(郡)·국(國)의 장관이 추천하는 ‘효렴(孝廉)’ 등으로 나뉘는데, 효렴 출신자의 비중이 높았다. ‘수재(秀才)’는 후한에서는 ‘무재(茂才)’라고 불렀다. 향거리선은 한(漢)이 향촌 공동체의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위진남북조시기엔 천거제(薦擧制)로서 찰거제를 대체하였다. 천거제는 찰거제 때와 같이 관원으로 등용되는 자가 갖춰야 할 덕목은 비슷하였다. 천거제는 매개 주군 관원들이 몇 품 이상의 관원을 몇 명씩 추천하는 할당제를 실시하였다. 추천된 관원이 부정을 저지르면 추천한 관원이 책임을 져야 한다. 뒷문거래를 막기 위함이었으나 연대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죄를 덮는 사례가 많아 역시 부정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찰거제이든 천거제이든 이상적인 인물 적합한 자격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는데 폐단이 많았다. 그래서 수나라 때 생겨난 것이 과거급제제도이다. 과거급제제도는 말 그대로 공부한 자가 시험을 통해 합격되어 관원으로 등용되는 제도이다. 문제는 시험과목을 무엇을 기준으로 하며 무슨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가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도 포함되어야 하고 법가의 사상도 있어야 하고 더 멀리 주역도 끼워야 하며 역법지식에도 밝아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유가사상이다. 유가사상은 사서오경을 위주로 한다. 그러니까 과거시험의 주요 내용 7할 정도가 유교경전이 차지하고 나머지 모두 합쳐 3할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소매가 길면 춤추기 좋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당연히 유생들이 과거시험 참여도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다. 혹시 도가나 법가에 심취한 선비라 할지라도 출세하려면 반드시 유가에 기울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급제제도를 통해 유생들이 대거 관장에 진출하게 되었고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역사는 조정에서 유생출신 관원보다 황제의 신변에서 맴도는 환관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례로 당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을 때 환관인 고대력사(高大力士)가 황제를 대신해 윤허하고 재가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명나라 시기엔 10만에 달하는 환관도 모자라 조선에서 빌려다 썼다는 기록도 있다. 환관들이 아무리 판쳐도 제국의 통치이념은 여전히 유가적인 것이며 유생출신들이 관장을 휩쓴 것은 사실이었다.   사. 천하위공과 관원대리 제국 이전, 예하면 주나라 말기까지 제후국들의 재산은 주나라 왕의 소유가 아니라 각 제후들 및 그 밑에 있는 대부들의 사유재산이었다. 당시 관원이라 말할 수 있는 계층은 대부와 사 두 계층인데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부가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귀족세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재부가 사유재산이면 타락은 있을지언정 부패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사유재산인데 그 재산을 자기 주머니에 넣으려고 부패를 저지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혹시 대부와 사가 주색에 빠져 제가에 신경을 전혀 쓰지 않을 경우 재부를 탕진하여 날려버릴 수 있는데 이는 부화타락이지 부패가 아니다. 부패는 제국시대부터 생겨났던 것이다. 제국시대에 진입함에 따라 하늘 아래 전체 모든 재부는 공(公)가의 소유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드넓은 하늘 아래 황제의 땅이 아닌 것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皇土)”고 표현하였다. 제국시대 혹시 사유 토지가 있어 매매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관원의 사유 토지를 황제가 몰수할 수 있고 지주 호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유 토지는 황제를 위해 일하는 아문에서 언제든 맘만 먹으면 몰수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천하의 모든 것은 공가의 소유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라 말한다. 이로부터 정부에서 사무에 관계되는 직종을 공직,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공무원, 정부에서 만든 문서는 공문, 국가재정에 의해 닦은 길은 공로라고 하였던 것이다. 천하의 모든 것이 공가의 것, 천하위공이기 때문에 국가의 구성원인 백성 개개인도 공민인 것이다. 그러나 제국시대 백성은 공민의 권리가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공민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백성은 전부 황제의 신민(臣民)일 따름이었다. 어찌되었든 제국의 재부(땅과 백성)가 모양새로 천하위공이기 때문에 그 엄청난 재부를 황제 1인이 절대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를 대신하여 다스려 줄 사람이 필요하였고 그 사람들을 관원이라 부르고 황제가 임명하며 임명받은 관원은 황제를 대신하여 맡은 땅과 백성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황제를 대신하는 대리관원이 될 자격이 있을까? 우선 천하의 모든 것이 공가의 것이기 때문에 대리관원이 될 사람은 덕을 갖춰야 한다. 제국시대 겉으로는 유가, 내부적으로는 법가로 천하를 다스리는 외유암법(外儒暗法)이었으나 가장 강조한 것은 덕치(德治)였다. 중국인이 조금만 이상한 짓을 하거나 조금만 상식에 어긋난 짓을 해도 ‘결덕(缺德)’라는 말을 곧잘 쓰는 것이 바로 2천여 년 동안 덕치사회를 걸쳤기 때문이다. 윤리치국이란 말도 있는데 이덕치국(以德治國)과 쌍둥이형제이다. 게다가 예치와 효렴을 빼놓을 수 없었다. 제국시대 이덕치국과 윤리치국 및 예치와 효렴의 실천자로서 가장 적합한 부류가 바로 유생출신들이다. 2132년의 중국제국역사에서 번진(藩鎭)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역모를 꾸민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유생출신 관료들이 반기를 든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아. 조선왕조가 518년 지속된 비결 중국 수나라 시대 때부터 시작된 과거제가 한반도에는 788년(신라 원성왕 4년)에 ‘독서삼품과’라는 형식으로 전래되었다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고려 시대 초기이다. 958년(광종 9년)에 광종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시행했다. 이는 신분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던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과거제 대신 신분을 기준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음서제가 더 융성했다. 또한 문과(문관)와 잡과(기술관)만 시행되고, 군인을 뽑는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에 와서야 과거제가 일반적인 관직 진출 수단이 되었고, 무과도 시행되었다. 학자들은 고려시대 국가통치이념을 불교였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고려 초기부터 실시된 과거제에 의해 유가학설이 선비 층에선 넓고 깊게 스며들었다. 고려 말기 양대 산맥을 이룬 정몽주와 정도전은 모두 유생출신이며 가장 걸출한 학자들이었다. 그런데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목숨 걸고 반대하였는데 반해 정도전은 목숨 걸고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주도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따지고 보면 정몽주는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고 왕족은 대종이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으며 대체하여서도 절대 안 되는 일이다. 만약 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면 천벌을 받는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거꾸로 정도전은 고려가 썩을 대로 썩어 맹자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길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고 조선조를 창건하는데 일등공신으로 역할 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몽주는 유가의 가장 보수적인 인물이고 정도전은 맹자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는 유가의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역사는 결국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어 고려를 뒤엎고 조선조를 창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무장이고 정도전을 비롯하여 권력층에 포진된 인물들은 거의가 유생출신들이었다. 따라서 왕권을 제약하려고 왕족의 정치참여를 금지시켰다. 단종 때 왕이 어린 탓에 김종서가 천하를 호령하였다. 수양대군이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 금기를 깨고 정치에 뛰어들었고 결국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전체 조선조를 통 털어 수많은 역모와 반란이 있었지만 왕의 성이 바뀌는 역성혁명은 단 하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원인이 바로 유생들이 천하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생들은 왕도에 붙어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 목적만 달성되면 더 큰 욕망이 없다. 따라서 왕이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게 되면 사서오경을 들먹이면서 왕에게 한 방 먹이는 것으로 왕권을 제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조선조를 통 털어 권력의 중심에는 항상 유생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조선조 초기인 1446년 세종대왕이 백성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자 유생집단이 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만약 백성이 눈뜨면 자신들의 권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학문을 독점함으로써 유생집단이 영원히 권력의 중심에 서기 위한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과거제의 경우 본산지인 중국에서는 무릇 하자가 없는 양민이면 전부 시험응시자격을 부여받은데 비해 조선은 양반 자식만, 그것도 양반의 적자만 시험응시자격을 부여받았다. 이는 권력을 소수양반층이 독점하여 조정을 쥐락펴락하고 왕권을 제한하여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현 관료집단에 불만을 품고 조선시대 선비들은 대쪽 같이 자신들의 할 말을 다 했고 정의를 주장하고 수호한 인물 또 청렴하고 도덕적이고 아무튼 한 입으로 자랑하기엔 모자라는 것 같다. 요즘 관료사회와 조선조의 관료사회는 차이가 엄청 크다. 우선 조선조의 관료사회에 진출하려면 도덕적이고 사리가 밝아야 한다. 요즘 세월엔 도덕을 우선시 하지 않는다. 무슨 학교를 나왔고 이력이 어떻고 무슨 공적이 있고 사회인맥이 어떻고, 이를 기준으로 선발한다. 또 예전엔 재부가 많지 않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청렴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겼지만 요즘은 경제시대라 금전이 모든 것을 결정지을 만치 재부가 중요한 사회로 변질하였기에 청렴을 크게 보지 않는다. 따라서 도덕이니 윤리이니 하는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세상사가 동전의 양면처럼 절대적인 것이 없는 것처럼 조선조의 선비도 공부하여 과거제를 통해 관료사회에 진출하기까지 굉장히 도덕적이고 정의적이고 대바르지만 일단 관장에 발을 담그면 파벌정치에 휘둘리어 사리사욕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자신이 모시는 직접 상관이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모른 체하다가 나중에는 한통속이 되어 함께 부정을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 매사에 너무 정직하고 정의적이면 정계 및 관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정치와 권력이란 본래 치사스런 것이다. 내가 살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것이 정치의 생리이므로 정치의 중심에 선 선비라 하여 마냥 정직하고 정의적일 수 없다. 개별적으로 해서(海瑞)와 같은 관원이 조선조에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이고 또 다수 관원들이 본받을 우상도 아니었다. 선비출신의 다수 관원들은 역사가 평가하는 것처럼 대쪽 같은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관장에서 권력을 부여잡고 생존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전반 글의 내용을 한마디로 마무리 지어 말하자면 선비는 털이고 권력은 가죽이다. 털은 가죽에 붙어야 생존한다. 털은 가죽을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비는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자신들의 생존무대가 사라질까봐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물론 글 가르치는 훈장 선비도 있고 모든 선비의 역할이 반드시 권력과 유착된 것은 아니지만 큰들에서 말하자면 한무제 이후 중국역사와 조선반도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선비사회가 권력과의 유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이와 같은 맥락을 짚어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54    변소간보다 더 많은 사장님, 회장님 댓글:  조회:5616  추천:1  2015-01-03
변소간보다 더 많은 사장님, 회장님   도시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인 1980년대까지 중국 도시골목마다 공용변소가 많았고 아침이면 줄 서 순번을 기다리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으나 당시 연길시에 1천여 소에 달하는 공용변소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정확한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튼 공용변소가 그만큼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중국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 중후반부터 경제 분야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독립적인 경제활동이 법적 인가를 받은 00꿍스(公司)가 자고 깨면 생겨날 정도로 우후죽순마냥 많이 나타났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당시 다수 꿍스(公司)들을 내실도 실적도 없고 하여 허수아비라는 뜻이 담긴 피바오꿍스(皮包公司)라 불렀고 꿍스(公司)의 법인(法人) 경리(經理)들을 빗대어 “경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고 비꼬았다. 당시 피바오꿍스(皮包公司) 중국식 경리들을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사장님들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사장님이 변소간보다 더 많았다”는 말이 성립된다. 중국에선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업체의 법인을 경리 혹은 규모가 크면 총경리라 부르고 규모가 굉장히 작은 업체 혹은 구멍가게의 법적등록인은 보편적으로 ‘라오반(老板)’이라 부르고 개별적으로 ‘짱꾸이(掌櫃)’라 부른다. 한국은 규모가 크든 작든 하다못해 부부가 운영하거나 심지어 혼자 운영하는 구멍가게 책임자조차도 전부 사장이라 부른다. 거기에 한국식 특유 경어를 붙여 ‘사장님’이라 부른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선 길가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할 경우 상대를 높여 사부(師傅)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이럴 경우에도 상대를 ‘사장님’이라 한다. 한국엔 ‘사장님’이 어떻게나 많은지 인파가 북적거리는 동대문상가에서 “감사장!”라고 부르면 열에 다섯이 머리를 돌린다고 한다. 이 경우 김씨가 많다는 말이 되겠지만 그만큼 ‘사장님’의 호칭이 남발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이란 호칭이 서로 다르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회장이란 호칭도 사용법이 엄청 다르다. 중국에선 계열사를 갖고 있는 대기업 오너를 ‘동사장(董事長)’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회장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중국에서 말하는 주임(主任)이 한국에선 회장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를테면 시골마을이나 도시 부녀회 책임자를 중국에선 ‘주임’이라 부르고 한국에선 ‘회장’이라 부른다. 정부기구도 중국에서는 인대(人大) 책임자를 중앙기구는 위원장이라 부르고 성급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주임이라 부른다. 화교사무실, 외사사무실 등등의 많은 기구의 책임자도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정부기구의 모든 직책에 거의 다 ‘장(長)’자를 붙이는 호칭이 보편적이다. 전형적인 실례로서 중국에선 가도(街道) 책임자를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장(長)’자를 붙여 ‘동장(洞長)’이라 부른다.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과 회장이란 호칭이 왜 이토록 다르게 사용되고 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사장이란 ‘사(社)’의 역사적인 의미부터 살펴보고 또 회장이란 말의 유래를 알아야 한다. 에 의하면 ‘社’는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한다. 그런데 아무 사람이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흙을 뫼어놓으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 부족이 조상을 기리기 위한 징표로 흙을 쌓아놓았고 그 징표를 중심으로, 즉 사(社)를 중심으로 족장이 백성을 거느리고 생산 활동을 진행하고 제사를 지내며 종교 활동을 하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회란 이 사(社)에 모여서 삶을 영위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社)’란 뜻이 워낙 이렇듯 거창하기에 중국역사엔 ‘사장(社長)’이란 말이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남발로 사용하고 있는 사장이란 호칭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일본이 동양 삼국에서 서양의 근대화를 따라 배우는 선두에 섰고 많은 서양의 어휘들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지어낸 것들, 이를테면 과학, 화학, 물리, 지식인 등등이 일본이 지어낸 어휘들이 중국에 수출되었고 따라서 한반도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그 중에 사장이란 호칭도 포함되어 있다. 변소를 화장실(けしょうしつ:化粧室)이라 하는 용어도 일본인이 지어낸 어휘이다. 일본이 사장이란 말을 지어낸 것은 중국식 번역인 서양식 꿍스(公司)를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에 결부시킨 결과였다. 즉 사람이 모여 기도 올리며 종교 활동을 진행하는 곳을 ‘신사(神社)’라 부르는 것처럼 사람이 모여 경제활동을 벌이는 업체를 ‘회사(會社)’라 지어내고 그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적인 용어인 사회를 거꾸로 하여 회사란 용어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즉 사회를 거꾸로 하면 회사가 되는데 사회는 ‘사(社)’가 포인트이며 사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뜻이라면 회사는 ‘회(會)’가 포인트로서 사람이 모여 ‘사(社)’를 꾸린다는 의미이다. 일본인은 이 사람이 모이는 것을 여러 포기라는 표현을 빌려 ‘주식회사(かぶしきかいしや(株式會社)’라고 불렀다. 사장이란 호칭은 본래 이렇듯 주식회사 대표자를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는데 지금 한국에선 구멍가게 주인, 길 가는 아저씨한테도 사장님이라 남발하고 있다. 회장이란 말도 중국역사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 어휘인데 일본이 동양에서는 매우 낯설었던 서양의 상공회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조직의 책임자를 회장, 또 NGO단체 같은 사람이 많이 모여 시민 활동하는 조직의 책임자를 역시 회장이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영향에 의해 사장, 회장이란 호칭을 도입하였으나 중국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고 있는데 반해 한국에선 진짜 변소간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에선 큰가마밥 제도가 실시되던 인민공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불렀고 당시 사장이 관할하는 인구는 적어도 수천 명이었다. 또 신문사, 출판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기는 하였으나 사장보다 편집과 편제(編制)를 총괄한다는 의미로서 총편(總編)이란 호칭을 더 선호하였던 것이다. 신해혁명 전 역사에 없었고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사장과 회장 호칭을 적게 사용하는데 비해 한국에선 남발로 사용하고 있을까? 첫째 한국은 중국보다 일본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둘째 한국인은 멋을 추구하는 겉치레 문화를 즐기기 때문에 아무데나 무작정 ‘長’을 붙이기를 굉장히 선호한다. 셋째 양반과 상놈의 문화에 한이 맺혔던 한국인은 일단 ‘長’을 붙이면 출세의 의미가 다분하기에 사장, 회장을 남발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자유 민주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각종 비영리단체 등록이 쉬워지고 따라서 그 단체들을 협회라 부르는데서 회장이란 호칭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상기 한국사회 물에 듬뿍 젖어 역시 중국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사장, 회장 호칭을 남발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업체를 꾸려봤자 무역업체나 제조업체는 매우 적고 또 대규모의 음식점이 없고 절대다수가 소규모의 음식점이나 식품상점 등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명함에 사장이라 박고 공중장소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스스로 ‘사장’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인은 보편적으로 스스로에게 사장을 붙이지 않고 “00를 운영하고 있는 00입니다.”라고 겸손하게 자아소개 한다. 그리고 한국식을 따라 배워 영양가 없는 협회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 실체도 내실도 없이 회장님이랍시고 어깨에 힘주고 남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재한조선족사회 다수 사장님, 회장님들은 중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들, 즉 한국에서 ‘長’을 스스로 붙이고 아Q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유리하므로 무조건 나쁜 일이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53    두뇌문명과 마음문명 논고 댓글:  조회:4350  추천:4  2014-07-01
 요즘 신세대들은 아침에 “아이 러브 유!”를 외치고는 오후에 헤어지자고 통보한다. 며칠 전까지 아니 어제 “사랑해!”를 날리고는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혼서류에 도장 찍을 것을 요구한다. 이 세상 남녀들이 “아이 러브 유!” “사랑해!”를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하지만 이혼율이 높다 못해 부부가 한 사람 건너 헤어지는 세월이다. 왜일까? 사랑이란 ‘애(愛)’자에 마음 ‘心’이 들어 있듯이 사랑은 머리로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연애(戀愛)란 연자에도 마음 ‘心’이 들어 있다. 연애는 머리로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선조들은 평생 “사랑해!”를 입 밖에 번지지 않고 살아왔어도 금슬 좋게 잘만 지내왔다. 무슨 영문일까? 사랑을 머리로 입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했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들은 연애를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하고 스킨십도 사람들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다. 통신이 발달하여 데이트도 쉽고 수시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통신수단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사랑하는 상대와 데이트 한 번 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더욱이 그 당시엔 연애를 사람들 앞에서 내놓고 할 수 없어 ‘도둑연애’ 하느라 가슴을 조일 때도 많았다. 그토록 애타는 연애를 하려면 머리로 입으로는 절대 성사될 수가 없다. 진지하게 가슴으로 연애한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맺어진 인연이기에 쉽게 깨지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 세대들의 연애는 너무 쉬워 쉽게 사귀고 쉽게 깨진다. 그 이유가 바로 남녀 사이 가슴으로 친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입으로 친하기 때문이다. 연애를 하나 사랑을 하나 가슴으로 하는 것은 동양문명전통이고 머리로 입으로 하는 것은 서양문명의 영향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서양은 대개 사물을 가슴으로 대하지 않고 머리로 대한다. 연애도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인 석학 임어당 선생은 저서 《생활의 발견》에서 “서양인은 여자를 대함에 있어서 그냥 섹스파트너로만 여길 뿐이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서양에도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있지만 대체로 서양인의 성향은 남녀 사이 머리로 입으로 하는 사랑이 많고 진정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적다. 요즘 세대들이 “사랑해!”를 남발하는 현상은 역시 서양두뇌문명의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이다. 서양은 여자를 연구함에 있어서 해부학적으로 생리학으로 호르몬이 어떻고 난소와 자궁세포조직이 어떻고 하면서 물건 연구하듯 세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가령 음모가 없는 여자를 서양에서는 생리학으로 체내 모(毛)를 생산하는 인자(因子)가 모자라 그렇다는 식으로 연구할 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조금 부연하자면 음모에 균이 차 있을 확률이 높아 위생청결을 지키려면 음모를 제거해야한다는 식으로만 떠들 뿐이다. 중국인은 여성의 특징을 생산성에 포인트를 맞추고 여자의 음모는 대지의 초목과 같다. 대지에 초목에 없으면 곡식생산도 되지 않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음모 없는 여성은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열심히 ‘가꿔봐야’ 헛수고여서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이와 같은 여성관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관념의 문제인데 역시 마음문명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여자에 대한 연구는 단연 노자가 으뜸이다. 노자는 여자를 물과 같다고 했다. 물이 여인처럼 부드럽고 약하면서도 강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물보다 유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강한 것을 공략하는 데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맞는 말이다. 돌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물방울에 뚫린다. 흙이 물보다 단단하지만 빗물에 쓸려간다. 노자는 유약한 물이 강한 돌을 이기는 것과 같은 이치로 부드럽고 유약한 여자가 강하고 힘이 센 남자를 이긴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이기는가?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비하(卑下)’이다. 여자도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비하’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하’는 남존여비의 뜻이 전혀 없다. 노자는 남존여비를 주장한 적이 없고 오히려 여존남비를 외친 사람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비하’는 무엇일까? 바로 위치이다. 무슨 위치인가? 바로 남녀성교에 있어서 여자가 낮은 곳, 즉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상위에서 먼저 들어가고 빠져나오는 공격을 가하기 때문에 강해 보인다. 그러나 물 뺀 거시기란 속담이 있듯이 일단 파정하면 기고만장하던 태세가 서리 맞은 뱀처럼 온몸이 나른해 얌전해진다. 남자는 비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체력을 소진하고 최고급 단백질을 주는 ‘밑지는 장사’이다. 여자는 비어 있기 때문에 쾌락도 얻고 잉태도 가능하다. 노자의 생각을 빌려 말하자면 여자는 움직이지 않고 피동적이기 때문에 좋다. 여자는 누워서 남자를 기다린다. 노자는 이를 “고요하기 때문에 아래에 스스로 머문다. 천하의 성교는 암컷의 부드러움이 항상 고요함으로 수컷의 강함을 이긴다.”고 했다. 이와 같은 성교관계를 역중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남자는 여자보다 좋다. 아래가 위보다 좋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보다 좋다.” 노자는 이를 보편적인 진리로 여기고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했다. 예를 들어 치국이나 군사 외교적인 측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큰 나라는 마치 강의 하류와 같아서 부드러운 암컷의 위치에 있다.” 따라서 노자는 국가도 여인처럼 자세를 낮추고 겸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대해 자신을 낮추면 작은 나라를 끌어 모을 수 있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스스로 낮추어 큰 나라의 보호를 받는다.” 노자의 방중술로 천하의 이치를 보는 세계관에 대해 역중천 교수는 멋들어지게 개괄하고 있다. “노자는 그저 한 걸음에 방중술에서 제왕술(帝王術), 음도에서 패도(覇道)까지 자유롭게 노닐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서양에서는 여자를 생리학적으로 연구하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도의 원리로 연구하였다. 이것이 바로 서양의 두뇌문명과 중국의 마음문명의 차이이다. 서양의 머리로 세상을 사는 두뇌문명과 중국인의 가슴으로 세상을 사는 마음문명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서양인은 ‘정확성(精確性)’이 강한데 비해 중국인은 ‘정확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지적한 이는 100년 전 미국 선교사 아더 스미스였다. 아더·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폐단을 설명했다. 중국인은 상대가 나이를 물을 경우 똑 부러지게 정확한 나이를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이 먼저 물어온 상대에게 얼마 되어 보이는 가고 되묻는다. 그러고 나서 겨우 하는 대답이 “불혹의 나이요, 환갑이 지났소, 고희에 가갑지요.”라고 대충 나이를 말한다. 노인들은 흔히 61세이면서도 “올해 60~70 먹었어요.”라고 나이를 말한다. 만약 61세를 정확히 똑 부러지게 말한다면 그것은 머리의 나이이고 60~70 살은 마음의 나이인데 중국인과 한국인은 흔히 머리의 나이를 말하지 않고 마음의 나이를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마음문명의 표현이다. 중국인은 일반 사물에 대해 정확성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자적인 것에까지 정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심하다. 그렇지만 남이 나의 흉을 보면 용납 못하듯이 중국지식인들은 아더·스미스의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폐단을 지적하자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아더·스미스는 중국인에 대해 유(流)만 말했을 뿐 원(源)을 짚지 못했으니 편견이다.”라고 비판하고 나서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모든 사물을 머리로 따지지 않고 맘으로 대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인의 정신》의 저자인 고홍명(辜鴻銘)은 “중국인이 정확성을 무시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심령미를 추구한 까닭”이라고 받아쳤다. 서양인은 사람의 나이를 매개인의 생일을 기준으로 따진다. 동양에서는 모든 사람이 춘절을 기준으로 한 살 더 먹는다(요즘에는 양력설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음). 한반도 사람들은 엄마 뱃속의 나이까지 계산한다. 돌이 갓 지난 아이가 세 살일 경우가 많다. 머리로 따진 나이가 아니라 역시 가슴으로 먹는 나이이다. 사람의 나이를 정확히 계산하듯 모든 것이 정확(正確)하고 또 정확(精確)하기 때문에 머리를 잘 쓰는 서양에서는 과학을 발명 발전시킨데 반해 중국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보니 과학은 발상조차 하지 못했다. 한편 서양인이 ‘정확성’에 집착한 결과 과학이 발달하고 중국인은 고대에 사대발명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발명으로 인류문명에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확성’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이 전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충지(祖充之)의 원주율 계산이 세계적으로 가장 앞섰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중국인은 화약으로 기껏해야 폭죽을 만들었는데 비해 서양은 중국의 화약을 도입해 총포를 만들었다. 서양인의 정확성은 상무문화(商貿文化)와 큰 관련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한 상무문화는 주고받는 장사이기 때문에 신뢰가 우선이고 다음 모든 것이 정확(正確)하고 또 정확(精確)해야 한다. 서양의 과학이 발달한 것은 물론 이 세상 너머 미지세계에 대한 동경을 추구하는데서 창의성이 발달한 측면도 있지만 그들의 정확성이 과학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양의 과학이 인류역사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너무 두뇌문명에 치중하다 보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우스꽝스런 사건도 있었다. 되지 귀에 황금 귀걸이를 걸어 넣고 항문에 온도계를 꽂아 체온을 측정한다. 체온이 올라가면 되지가 흥분되어 있다는 증거라나. 참 이상한 과학도 있다. 왜 이와 같은 우스꽝스런 과학이 나타나는가? 두뇌문명에 너무 집착한 결과라 볼 수밖에 없다. 중국이 고대에 서양에 비해 훨씬 앞서 있다가 근대화시기에 들어 밀리기 시작한 것은 과학과 철학과 법률이 낙후돼 있은 탓이었다. 고대 중국에 철학이 있어나? 물론 음양철학도 철학이니 철학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논리추리를 추구하는 철학인데 비해 중국철학은 인간 삶의 생활 철학이며 서양철학에 비해 논리성이 매우 미약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인은 논리적사유가 발달되지 못했을까? 그 원인은 바로 중국인은 이성적 사고가 부족하고 대신 정감과 심미적 사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 법률이 있었나? 법은 있어도 법률은 없었다. 고대 중국의 법은 주로 형법이 위주였고 법이 완벽한 ‘율’로 이뤄진 ‘법률’로 자리매김 되지 못했다. 중국에서 법이 법률로 흐르지 못했던 것은 사람 위에 법이 있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법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중국역사는 진 제국 이 후 명유암법(明儒暗法)의 형식으로 흘러왔지만 실제로는 인치, 덕치였고 인간세상을 지배한 것은 예치(禮治)였다. 법치는 인간이 죄를 범하면 처벌하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예치는 범죄예방 역할이 강하다. 어찌되었든 법률 앞에서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말은 법치사회에서 생겨난 것이고 예치사회에서는 법률 앞에서 사람마다 평등할 수가 없으며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 병폐가 많이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법치는 두뇌문명의 산물이고 인치, 덕치, 예치는 마음문명의 산물이다. 머리로 살아가는 서양인은 성격이 대체로 강인해 보이는데 비해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온 중국인은 성격이 온화한 편이다. 공자는 주공의 혼인으로 이뤄진 가정을 나라와 연관시켜 국과 가가 합쳐진 개념인 ‘국가’의 관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예와 의를 겸비하게하고, 조상숭배를 근간으로 하는 제사제도를 완벽하게 함과 동시에 이를 천자에 대한 충성에 이르게 하고, 부모에 대한 효와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고, 인의예지신이 겸비된 인간이 되는 군자의 도를 제시했으며, 대의명분을 지켜 사회질서에 따를 것을 호소함과 아울러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우량시민이 되기를 호소했다. 공자는 또 군자의 도는 부부생활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부부, 부모자식, 형제, 친척, 친구, 나아가서 모든 사회구성원은 맘(정:情)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호소했다. 공자는 이러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으로 중국인의 인간타입을 형성시켰다. 따라서 중국인의 인간타입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곧 ‘온화함’이다. 고홍명은 저서《중국인의 정신》에서 중국인의 ‘온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한 중국인은 간혹 거친 느낌이 없진 않지만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저속하지는 않다. 간혹 못생긴 느낌이 없진 않지만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추하지는 않다. 간혹 덤벙거려 비속함이 없진 않지만 방자하거나 오만하지는 않다. 간혹 무딘 면이 없진 않지만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 간혹 성격이 원만하고 영리한 면이 없진 않지만 남을 해칠 정도로 사악하지는 않다. 진정한 중국인의 마음이나 품행에 나타나는 결점이나 흠집을 굳이 말한다 해도 그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점은 없다. 중국의 구식학교에서 성가신 사람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려운데 설령 그 사람이 사회의 최하위 계층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공자는 타인에게만 온화함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온화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예수는 제자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나의 문중에 들어오려면 세금 거두는 공무원은 두말없이 장부정리고 뭐고 당장 때려치우고 오라하고, 고기잡이는 고기그물을 당장 집어던지고 오라고 닦달하였다. 공자는 나의 문하에 들어오겠으면 적당히 부모와 밥도 먹고 인사도 깍듯이 나누고 오라고 타이른다. 예수는 사랑하겠으면 나보다 못한 자의 발을 씻어주라고 한다. 극단적인 사랑법이다. 공자는 내가 타인에게 바라는 만큼만 사랑하라고 주장하며 내가 하기 싫은 일은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이른다. 예수와 공자를 비교해 보면 여러모로 예수는 머리로 세상을 대하고 공자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자는 마을과 마을 사이 개가 짓고 닭의 울음소리가 서로 들리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제창하면서 인위적인 도시문명을 극구 반대하였다. 이른바 도시문명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규칙과 법칙, 원칙 및 이러저런 룰이 소털처럼 많다. 인간이 도시에서 살자면 이런저런 일에 신경을 쓰면서 사노라면 자연스레 가슴이 아닌 머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노자는 인간이 조물주가 만들어준 대로 생긴 대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제창한다. 이것이 바로 노자철학 핵심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장자는 노자보다 한 술 더 떠 공자를 심하게 비판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인’이니, ‘의’이니, ‘예’이니, ‘지’이니 하는 따위가 인간의 본성을 말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호소한다. 임어당 선생이 저서 《중국인》에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받든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인이 왜 질서 없는지?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중국인이 ‘도’가 제창한 ‘무위자연’의 영향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쯤해서 왜 서양인은 머리로 세상을 살아왔고 동양인은 왜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오게 되었을까? 이를 밝힐 필요가 있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유목문명이다. 유목문명의 특징은 이동이다. 어디로 이동하는가? 풀을 따라 이동한다. 풀을 발견하는 자가 구세주이다. 그것이 어린 아이, 즉 목동이든 노인이든 상관없다. 노인은 이동이 불편하여 풀을 발견하는 확률이 낮은데 비해 목동은 생기가 넘쳐 이동성이 강해서 풀을 발견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래서 서양문명에는 노인을 존경하고 공경하는 ‘예(禮)’와 ‘효(孝)’ 문화가 없다. 서양의 상업문명은 그리스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는 땅이 척박하여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 먹고 살기 굉장히 힘들었다. 다행히 지중해를 끼고 있고 아프리카, 아세아 쪽에 가는 교통이 편리했다. 고대그리스인은 편리한 교통의 장점을 발휘하여 무역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무역은 신뢰가 필요하고 계약이 필요하고 상도의 룰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가슴으로 대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무역은 정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계산되는 머리로 해야 한다. 고로 서양인은 머리로 하는 두뇌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역사를 보면 은나라 시기 공(工)과 상(商)이 발달하여 그 시기 문화를 ‘공상문화’로 명명한다. 은나라 시기 상업이 발달하여 은나라를 商나라라고 부르며 오늘날까지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상인(商人)’이라 부른다. 만약 은나라 공상문화가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면 중국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새롭게 흘러왔을 것이다. 허나 역사는 가설을 허용하지 않는다. 재방송도 없다. 오로지 생방송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다. 3천 년 전 주나라가 은나라를 대체함에 따라 공상문화가 자취를 감추고 농경문화가 자리하게 되었다. 그 후 진 제국부터 청 말까지 2천 년 제국역사는 농경문명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가령 송나라 초기처럼 시장이 발달하고 지폐가 등장하여 자본주의맹아가 싹튼 시기도 있었지만 제국의 수장들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고 줄곧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실시해왔다. 그래서 중국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농경문명의 기본 특징은 정착과 경험이다. 농경문화는 이동하면 농사를 망친다. 한 곳에서 꾸준히 정착하며 지어야 한다. 정착문화는 낯선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매우 적고 아침에 만난 사람 점심에 만나고 저녁에 또 만난다. 자주 얼굴을 맞대게 되면 자연스레 정이 들기 마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정이 들면 머리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머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 농사는 목동이 풀을 발견하면 메시아가 되듯 그런 문화가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경험을 쌓아야 한다. 24절기를 잘 파악하는 것은 물론 3일 개이고 3일 비 내리는 기후 규칙부터 시작하여 책에 없는 경험을 많이 습득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농사는 경험을 수요로 하고 따라서 경험을 많이 쌓으려면 나이를 먹어야 한다. 나이가 지긋할수록 경험이 더 풍부하다. 농경문화에서 노인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양학자들이 중국고전을 번역할 초기에 ‘예’와 ‘효’를 서양언어로 어떻게 옮길지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서양은 유목문화 전통이기에 ‘예’와 ‘효’와 같은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논의가 있었듯이 은나라시기에 공상이 발달했다가 주나라에 들어 전면 농경문화로 바뀌면서 머리로 살아가던 패턴이 가슴으로 살아가는 패턴으로 전이되어 마음문명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두뇌문명과 마음문명을 연구하면서 확실하고 정확한 근거를 찾아보려고 신화자전을 뒤적여 보았다. 한문은 편방부수(偏旁部首)가 붙어 이뤄진 문자이다. 재미나는 것은 그 많은 편방부수 중 마음 ‘心’을 뜻하는 수심(竪心) 변(忄)이 붙은 글자가 가장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문은 뜻글자로서 문자는 문화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국문명에서 마음문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을 증명해주고 있다. 마치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나의 연구가 부질없는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확실하고 정확한 근거를 찾은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마음 ‘心’이 붙은 글자가 가장 많은 것은 중국문명은 마음문명이고 따라서 마음문명은 ‘정의 문명(情文明)’이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서양은 유목문명이고 유목문명의 특징이 이동이기 때문에 늘 이동하여 낯선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정이 존재할 겨를이 매우 적다. 이에 비해 농경문화의 특징은 정착이고 정착문화의 특징은 만난 사람을 늘 만나고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관 인간 사이 자연스레 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로서 농경문화의 특징을 ‘정의 문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뿐 아니라 한반도문명도 ‘정의 문명’이라 말할 수 있고 아울러 한반도의 ‘정의 문명’은 중국에 비해 훨씬 농도가 짙었다. 한반도는 산이 75%이고 평야가 25%이며 가장 북쪽에 있는 백두산이 산세가 험악하고 웅장하여 남성형(男性型) 산인 외에 그 밑의 묘향산부터 남쪽에 이르는 모든 산은 산세가 험하지 않고 아늑하고 온화하여 여성형(女性型) 산이다. 여성의 특징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포용성이 강하다. 그래서 한반도문화를 아기자기한 보자기문화로 표현한다. 보자기문화의 핵심이 바로 ‘정의 문화’이다. 따라서 정은 한반도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우리생활에서 사용하는 정과 관련한 어휘를 보면 유정, 무정, 격정, 열정, 온정, 냉정, 동정, 역정, 진정, 위정, 상정, 비정, 순정, 사정, 다정, 세정이 있는데 이는 한문에서 온 것이다. 이 외에 우리말로 된 덧정, 속정, 옛정, 잔정, 풋정, 미운 정, 고운 정, 정들다, 정겹다, 정을 두다, 정을 붙이다, 정을 떼다, 정을 주다, 정을 뺐다 등등은 우리민족의 생활문화정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여타 다른 민족에게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이다. 삼천리금수강산이란 말이 있듯이 한반도는 자연환경이 매우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인간의 심리에 투영되어 한반도 사람은 멋을 추구해왔다. 또 옛날 한반도 마을은 절대다수가 방곡이었는데 방곡이란 산 밑에 샘물이 있고 샘물이 내를 이루고 내가 양 옆에 나지막한 산맥이 있고 그 산 아래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그러한 거주 환경을 방곡이라 불렀던 것이다. 방곡의 자연환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오순도순 모여 사는 마을사람들은 서로 정이 좋게 살아왔으며 멋을 추구하고 살맛나게 살아왔다. 요즘 중국인 관광객이 밀물처럼 한국에 밀려드는데 그들은 한국의 화장품, 복장, 성형수술에 가장 관심이 많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멋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한국인이 멋을 발전시켜온 결과이다. 맛이란 것도 우리민족의 특유한 문화인데 음식문화에서 말하는 맛 외에 사람 살맛이 난다는 뜻이 말해주듯 멋과 맛은 인간의 심미적인 정감에서 생겨난 것이고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역시 마음문명의 산물이다. 서양과 동양의 문화특징을 구분 짓자면 서양인은 두뇌문명에 의해 과학, 철학, 법률 및 상무업이 발달하여 사회 전반에 이르러 정확한 것이 많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 잘 지켜져 민주화가 잘 되어 선진국에 먼저 진입하였지만 인간세상이 너무 딱딱하고 삭막하여 사람 살맛이 매우 적다. 이에 비해 동양은 서양에 비해 과학, 철학, 법률 및 상무업이 발달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빈곤하였으나 인간사회는 정이 많아 사람 살맛나는 사회였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어느 문명이 우월하고 어느 문명이 비천하다는 판단은 맞지 않으며 서로 각자 장단점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같은 유교와 한문을 공통분모로 하는 중화문명권에 속하는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에 비해 문명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일본열도는 땅이 척박하여 농사가 잘 되지 않고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아 삶이 각박하고 메말라 있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세상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2천 년 전 농사를 시작한 것은 서부 나라지역인데 그곳은 진(津)과 포(浦)가 많았으며 그 변두리에서 자그마한 땅을 개간하여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왔다. 진과 포는 모두 못이며 못의 특징은 유동이 아닌 고인물이다. 일본인의 성격은 마치 고인 물처럼 고독하다. 아울러 고인 물이 서로 교류가 없듯 일본인은 친구 간 외식해도 식비를 똑 같이 분담하는 ‘와리끼리’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총적으로 말해서 일본인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 정의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 정의 문명이 발달하지 못하고 머리로 세상을 살아오다 보니 서양과 비슷한 두뇌문명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동양 삼국 중 일본이 가장 먼저 서양문물에 눈을 뜨고 받아들여 자본주의를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일본에서 생활해본 중국인과 한국인은 모두 일본이 여러모로 발달하여 좋긴 하지만 기계처럼 너무 딱딱하여 정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어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미사회나 일본은 두뇌문명이 강해 사람 사는 맛이 부족하고 중국은 비록 한반도와 같은 문화에 속하지만 너무 크고 넓어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지는데 비해 한반도는 아기자기한 자연환경에 정의 문명이 발달하여 사람살기 좋은 고장이라 말하고 싶다. 동포문학2호
52    김종서와 장성택, 2인자의 비운 댓글:  조회:4930  추천:4  2014-06-14
김종서는 조선왕조 초기 세종부터 단종까지 삼대 왕을 거쳐 요직에서 활약했던 인물이고 장성택은 이북 현대사에서 역시 삼대 ‘임금’을 거치는 과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김종서와 장성택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2인자 역을 맡았던 이력이 같으면서 삼대 ‘임금’을 거친 역사도 비슷하며 최후 ‘왕실세력’에 의해 제거된 운명도 비슷하다. 다만 김종서는 세종대왕의 손자 단종의 왕위를 지키려다가 수양대군한테 철퇴를 맞고 저승에 갖고 장성택은 현 ‘임금’한테 형장의 이슬이 된 점 조금 다를 뿐이다. 김종서와 장성택은 여러 ‘임금’을 거치면서 정치적 입지가 그 누구보다 확고하여 2인자가 되었는데 왜 제거 당했을까?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역모를 일으켜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조선왕조 왕실법에 의하면 왕족은 조정의 요직에 출마할 수 없다. 수양대군은 장차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려면 일단 먼저 조정에 진출하여 정치성과를 올려야 했다. 당시 수양대군의 의도를 강력하게 가로막은 인물이 바로 김종서였기에 수양대군이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왜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하였을까? 11세에 왕이 된 단종이 나이 탓에 김종서를 비롯한 사대부들에게 휘둘리울 수밖에 없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왕실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수양대군이 나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 강력한 군주가 되어 이씨조선의 위엄을 다지려는 목적이 강렬하였다. 단종뿐만 아니라 518년 조선왕조역사에서 어린 왕을 올려놓고 아낙네들이 수렴청정하고 사대부들이 천하를 쥐락펴락 하는 사례가 많았다. 중국 청나라말기   자희태후가 수렴청정 하였고 사대부들이 나라를 이끌어 간 사례와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에서 수렴청정 하는 아낙네들이 자희태후처럼 강한 인물이 못 되면 천하는 사대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사대부란 구경 어떤 존재인가? 중국 주나라 시기 대부(大夫)는 제후 밑에서 나라 살림을 맡은 자이며 세습귀족이었다. 사(士)는 공부한 선비이다. 본래 대부와 사는 분명히 계급이 달랐지만 제국시대 진입한 이래 공부를 통해 출세하여 권력을 쥐면 사대부(士大夫)가 된다. 중국에서는 제국시기에 진입한 이래 사대부들이 세습귀족이 아니고 임명제를 통한 관리였으며 수나라 이후로는 과거제를 통해 출세한 관료들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도 중국 사대부역사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김종서와 장성택은 사대부들 중 으뜸의 요직에 있었던 사대부라고 보면 하자가 없을듯하다. 두 인물이 다르다면 김종서는 비왕족출신이라면 장성택은 김일성 주석의 사위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이며 김정은의 고모부 되니 ‘왕족’ 출신관료라 말할 수 있다. 왕족출신이든 비왕족출신이든 두 사람 모두 ‘사대부’이며 또 두 사람은 기존의 ‘왕’에 충성하는 사대부정치 본연을 지킨 인물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중국이든 조선이든 지방토호세력들이 반기를 들고 역모를 일으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도한 사례는 있어도 사대부들이 역성혁명을 일으킨 사례는 중국도 조선에도 없었다. 이것이 조선왕조 518년 장수비결 중 하나이다. 사대부들은 왜 역성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정확히 말해서 왜 일으키지 못했을까? 중국 한나라 무제 때 동중서가 군주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다는 이른바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주장하고 따라서 군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은 신의 영역을 건드리는 으뜸의 죄로서 신성불가침의 성역을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이 유교의 왕도법칙이 되었고 사대부들은 유생출신으로서 모두 이 왕도법칙을 철칙처럼 지켜야 했다. 고려 말기 무너져가고 있는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와 썩어빠진 고려를 때려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려는 정도전 모두 유생출신 사대부들이다. 다만 그들이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 가는 길이 달랐던 것이다. 정도전은 유배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고달픈 고난생활을 친히 목격하고 몸으로 부대끼며 체험하였기에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 즉 백성은 배를 태울 수도 있고 배를 번질 수도 있어 군주의 도보다 백성의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맹자의 이상국가를 표방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려고 유교에서 가장 꺼리는 역성혁명마저 불사하였던 것이다. 정몽주는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목숨처럼 받들고 왕씨 일가의 군주통치를 지켜내려고 온몸을 던져 싸웠던 것이다. 결과는 정몽주가 실패하고 정도전이 성공하였지만 그 이면을 따져보면 이성계라는 막강한 무관이 결국 승패를 가르는 잣대가 되었던 것이다. 즉 모택동이 즐겨 말하던 “총대에서 정권이 나온다.”가 진리로 작용하여 470여년의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의 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조선조 518년 동안 정도전의 백성 위주의 왕도정치 이상과 이념이 먹힌 것이 아니라 정몽주의 성리학을 사대부들이 받들어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절대 진리로 간주하고 크고 작은 당파싸움과 역모사건이 빈번하였으나 종당에는 518년 동안 이씨 성이 바꾸지 않은 왕조정치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사대부들이 왕조정치를 지키는 첨병이 되어 왕조의 수명이 길어졌지만 김종서와 같이 중종 때 2인자 역을 맡았던 조광조 역시 제거당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이퇴계와 같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던 선비들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2인자 역을 맡았던 사대부들 및 그 추종자들은 그 당시 왕한테 제거당하지 않았다면 후세 왕한테 변을 당하거나 한명회처럼 연산군한테 죽어서까지 부관참사(剖棺斬死)를 당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대권도전에 최대 걸림돌이 되어 제거 당했고 장성택은 현 ‘임금’이 조카라 어릴 적부터 자라는 모습을 겪어오면서 내심의 존경이 부족해 절대권력 군림에 걸림돌이 되어 역시 비운으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장성택의 처형사건을 두고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말들이 많은데 이북은 유교적인 사회주의국가(지도자의 세습제)로서 ‘짐(朕)’의 한마디가 곧 법인 왕조시대의 예치가 잔존해 있기에 민주사회 법치 잣대로 논할 일이 아니다.
51    현대여성은 왜 꽃미남을 좋아할까? 댓글:  조회:6100  추천:10  2014-01-10
현대여성은 왜 꽃미남을 좋아할까?   남자들의 미녀에 대한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다르듯이 여자들도 미남에 대한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우선 과거 전통시대 미녀의 기준은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안성 맞춤해야 한다. 시쳇말로 보기 좋아야 한다. 어떤 키가 보기 좋은가? 중국고대 4대 미녀로 꼽히는 양귀비가 지금의 치수로 158센티였다고 하니 아마 155~160센티 사이가 보기 좋은 키였을 것이다. 필자가 어릴 적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키 큰 여자를 싱거워 보인다느니 두렛줄 같다느니 수숫대 같이 멀뚱하게 보인다느니 하면서 쩍하면 흉보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키 큰 여자는 죽었다 깨도 미녀의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전통사회 미녀의 얼굴은 동그스름하고 복스럽게 생겨야지 길쭉한 말대가리 형의 얼굴은 빵점이다. 몸매는 오동통해야 한다. 말라빠진 여자는 죽었다 깨도 미녀 될 수 없다. 왜냐? 농경문화는 다자다복문화이며 따라서 생식숭배가 종교처럼 사람들의 머리에 뿌리박혔다. 아이를 많이 낳아야 가문이 번성해지는데 말라빠진 여자는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몸매가 오동통한 여자를 선호한다. 미녀의 기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현대인은 모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발이 작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귀비가 당현종과 같이 쫓겨 다니다가 지금의 사천성 일대에서 추적군한테 목 졸려 죽었다. 한 노파가 그 자리에서 양귀비의 한쪽 신발을 주었는데 크기가 지금의 치수로 10센티 되나마나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중국에서 전족(쫑발)문화가 생겨난 것이 송나라인 점을 미뤄볼 때 양귀비의 발은 천족(天足)으로서 소족(小足)을 타고났다. 지금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스월드, 미스코리아, 미스차이나 등등의 미녀선발대회에서 미녀의 기준에 있어서 발의 대소를 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고대사회에서 왜 발이 작아야 미녀로 될 수 있는가? 단순히 작은 발이 깜찍하다는 인식뿐만이 아니었다. 발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데 발이 작은 여성은 거시기도 작아 매력적이라는 소족숭배 성문화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송나라에 이르러 돈 많고 할 일이 없었던 객가(客家)들이 전족문화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현대사회의 미녀 기준은 우선 신장이 굉장히 커야한다. 160센티를 넘지 못하면 난장이에 속하므로 미스선발대회에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얼굴형은 마형(馬形)이 좋고 작아야 한다. 몸매는 메스꺼울 정도로 마간(麻竿)처럼 마르면 마를수록 좋다(전통 관념에 의해 하는 말). 이렇게 현대 미녀 기준은 전통문화가 결여된 상업시대에 TV화면발을 잘 받기 위해서 요구되는 조건이다. 다음 미남의 조건에 대해 논의해보자. 미남에 대한 조건과 그에 따르는 시대적 관점 및 여자들이 선호하는 이상형이 다른 것은 주로 전쟁연대와 평화 시대로 획분 된다. 필자가 어릴 적 연변에서는 잘 생긴 남자를 김일성 같다고 비유했다. 김일성 주석은 얼굴이 잘 생긴 것은 물론이고 그보다도 사람을 압도하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는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전쟁을 거친 지도자이다. 전쟁은 힘을 필요로 한다. 군대를 이끄는 장군은 얼굴이 미남형으로 잘 생기면 좋겠지만 그 보다도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처럼 말이다. 중국 10대 원수들을 살펴보면 모두 힘을 상징하는 사나이다운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호한들이었다. 전쟁연대 및 전쟁이 지나고 일정 시기에는 전쟁 후유증에 의해 여자들이 선호하는 남자는 영웅 같은 모습이다. 평화시대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남자들이 강력한 힘을 잃어가고 여자들도 선호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전형적인 실례로서 청나라 초기 팔기군(八旗軍)은 강력한 힘과 카리스마와 용맹이 넘치는 기병들이었다. 평화시대가 200년이 넘어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이들이 하는 일이란 한가하게 한나절 새장을 들여다보고 차나 품평하고 여자를 품평하는 일이었다. 사나이다운 기질을 잃어가고 있어 남불남(男不男) 같은 ‘병신남자’로 변하고 말았고 온 사회 남자는 홍루몽에 등장하는 가보옥처럼 사나이 기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연약한 남자들이었다. 따라서 여자들도 가보옥 같은 연약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대세였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천 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다보니 늘 불안하게 살아왔다. 그리하여 한반도 여성들은 힘을 상징하는 사나이다운 남자를 선호해왔다. 6.25전쟁이 끝나고 반세기 가까이 전쟁 후유증에 의해 여전히 영웅 같은 카리스마가 넘치는 남자를 선호했다. 그러다가 평화시대가 반세기 넘어서면서 힘을 상징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계집애처럼 곱살하게 생긴 꽃미남을 좋아한다. 연예인을 말하자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민수 같은 배우를 좋아하던 데로부터 요즘은 김수현 같은 꽃미남을 좋아하는 것이 대세이다. 20세기 말까지 꽃미남형 남자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고 꺼려하던 것이 21세기 들어 여자들이 남자를 선호하는 기준이 확 바뀌어 버렸다. 요즘 남자에 대한 여자들의 기준이 바뀌게 된 객관적인 원인이 또 하나 있다. 과거 농경문화에서 여자들이 힘(체력적인 힘)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농사는 남자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남자란 남(男)은 상형문자로서 문자 그대로 밭(田)에서 힘(力)쓰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던 것이다. 농사는 남자의 힘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여자들이 아들애를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 중에서도 가장 큰 죄로 몰렸던 것이다. 현시대는 여자들이 아들애를 낳지 못해도 괜찮다. 아울러 과거처럼 남편들의 농사에 필수였던 체력적인 힘이 필요 없다. 여자도 남자처럼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 굳이 힘을 상징하는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강력한 카리스마보다 아기자기한 꽃미남이 더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정서로 변화되어가고 있어 남자다운 최민수보다 곱살하게 생긴 김수현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50    중국인관광객 추태는 문화관성 댓글:  조회:6233  추천:16  2013-11-25
중국인관광객 추태는 문화관성   중국경제가 급속 성장함에 따라 국민들의 주머니가 두툼해지자 해외관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필자가 20년 전 동남아에 갔을 때 태국관광지는 온통 중국인의 천하였다. 한국 통계청에 의하면 2011년 내한중국인관광객이 220만 명이고 올해는 300만을 거뜬히 초과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수년 후이면 중국인관광객이 해외에서 도는 숫자가 1억 명이 될 것이라 한다. 중국인관광객이 엄청 밀려오는 제주도는 경제적으로 호황을 맞이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중국인의 추태 때문에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다. 올해 상반년에만 100만이 넘는 중국인관광객이 몰려온 제주도는 몸살을 앓고 있다. 참다못해 일부 서비스업 업주들(노천 카폐)이 중국인관광객의 돈 벌기를 포기하고 ‘중국인관광객 사절’이란 간판을 내 걸기에 이르렀다. 주변인들을 의식하지 않고 떠들기, 아무데나 가래침 뱉고,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기, 줄서기 의식 부족, 교통질서 무시 등등이 추태로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중질서문화의식이 결핍하여 생겨난 추태들이다. 중국인은 왜 공중질서문화의식이 결핍할까? 중국역사는 국가의 형성이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도시의 출현과 발달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그 바탕이 농경문화의 틀 기초 위에서 세워지고 발전해왔던 것이다. 농경문화는 특성상 공공질서문화의식이 결핍해도 그런대로 사회는 굴러간다. 서구 국가 형성의 기초로 되는 도시는, 예를 들어 그리스 도시국가는 무역과 상업을 기초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질서가 정연할 수 있다. 상업발달과 무역발달은 공공질서문화의식을 필요로 하고 아울러 이와 같은 역사시기를 오래 걸치게 되면 국민의식이 자연스레 높아지게 된다. 중국이 2천 년 동안 국제무역시장에서 최대 수혜자였지만 상호 평등의 입장에서 상도의 룰에 의해 무역을 진행해 온 것이 아니다. 차와 도자기를 일방적으로 팔아먹은 역사였지 서로 주고받는 무역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서구처럼 무역에 따른 상업을 통한 사회공공질서문화의식이 결핍되었던 것이다. 중국 2천년 일방적인 무역역사는 중국인으로 하여금 ‘국제질서’에 편입되지 못하고 자기중심의식을 짙게 만들었다. 중국인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주의가 비교적 강한 민족인데 이는 이 세상너머 이상사회에 대한 동경이 없고 신앙이 없이 철저히 현실주의로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서양인은 빨간 신호등을 만났는데 주변에 경찰이 없고 보는 사람이 없어도 파란신호를 기다린다. 서양인은 경찰이 없고 행인이 없어도 나를 보고 감시하는 존재고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다. 내가 빨간 신호등을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이 나를 처벌한다. 중국인은 하느님의 감시를 받는 문화가 없다. 신앙이 없으니 현실주의를 추구하고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의 추태는 자기중심주의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많다. 객관적인 도덕과 양심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떠들고 아무데나 버리고 줄 서지 않고 등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 한편 중국인이 공공질서문화의식이 결핍한 이유를 전통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전통문화는 유교와 도교 양대 산맥으로 흘러왔다. 유교는 인문전통문화를, 도교는 본능적인 생활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해왔다. 유교와 도교의 차이점은 유교는 예와 효를 비롯해 인위적인 도덕윤리로서 인간을 교화한데 비해 도교는 유교가 주장하는 인위적인 문화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비난하고 사람은 생겨난 대로 스스로 내버려두면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이른바 ‘무위자연’을 주창하였다. 중국인이 질서 없고 산만한 관습은 도교의 영향 때문이다. 추상적인 얘기는 그만두고 실질적인 삶과 직접 관련된 문제를 짚어보자. 우선 중국인관광객 추태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떠들기이다. 중국인(조선족 포함)은 한둘이 모여도 시끌벅적하게 떠든다. 음식점에서도 한두 상만 있어도 되게 시끄럽게 떠든다. 이는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굳이 좋다 나쁘다 이분법적으로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타문화권에 가면 문제가 되고 손가락질 받게 된다. 한국에 사는 조선족도 마찬가지이다. 서울에서 조선족집거지 일번지로 불리는 가리봉시장 골목은 내가 7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인업주들이 적지 않았는데 요즘은 쌀에 뉘처럼 눈에 띄지 않게 줄어들었다. 왜 그들은 떠나야만 했을까?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이곳 00한국음식점에서 조선족 두 명이 술을 마시고 시끄럽게 굴고 말썽을 피우자 업주가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이 업주한테서 사실경과를 들어보고 하는 말이 가관이다. “이 동네에서 장사하려면 이쯤은 감수해야 한다. 시끄러워 싫다면 당신이 차라리 장사를 그만두는 것이 편하지 않겠냐!” 중국인은 왜 떠들까? 역사적 유래가 있다. 고대 중국인의 유일한 오락은 희극이었다. 역사적인 관성에 의해 현대중국인도 희극을 굉장히 좋아한다. 희극의 특징은 남장여분(男裝女扮)하고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소리높이 떠들어댄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연들도 시끌벅적하게 떠들기는 마찬가지이다. 백 년 전 미국 선교사 아더 스미스는 저서 에서 “중국인이 왁작 떠드는 관습은 사람마다 자신을 희극 중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조용히 말할 일도 소리 높이 말하고 만약 자신의 말이 먹히면 흥분하여 떠들고 먹히지 않으면 체면이 깎인다(下不了台)고 여기고 타인이 듣던 말든 점점 소리를 더 높이는데 이런 생활문화에서 형성되었다.” 유독 중국부녀들에게서 나타나는 길거리에서 욕하기(骂街) 현상도 희극문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중국인이 아무데나 가래침 뱉는 관습은 전통가옥생활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인의 전통가옥구조는 주방과 침실 바닥이 크고 흙으로 되어 있다. 신발을 신고 생활하며 가옥 바닥에 코 풀고 가래침을 뱉는다. 집안에서 코 풀고 가래침 뱉으니 밖에서는 아무데나 자유롭게 뱉을 것이다. 문화의 관성 힘은 막강하다. 막강한 힘에 의해 형성된 추태는 법과 제도로만 단기간 해결될 일이 아니다. 시간이 보약이란 말이 있듯이 지구촌에 편입되어 보고 듣는 일이 많게 살아가노라면 시간이 해결할 것이다. 참고로 중국인관광객 추태는 해방 후 공중도덕교육과 인성교육이 결핍했던 원인, 8억 농민국가 국민이 현대도시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원인, 개혁개방 후 급속도로 성장한 경제발전에 비해 국민들의 의식은 여전히 답보상태에 있거나 오히려 벼락부자 되어 안하무인으로 추태를 부리는 경우를 비롯해 여러 가지 원인이 많으나 본문은 역사문화맥락을 짚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49    ‘꽌시(關係)는 ’식(食)‘을 토대로 이뤄진다 댓글:  조회:5278  추천:3  2013-11-01
  ‘꽌시(關係)는 ’식(食)‘을 토대로 이뤄진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수교를 맺은 후 한국인이 중국진출이 많아짐에 따라 중국에서 사업하는데 있어서 우선 중국의 ‘꽌시문화’의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 애로를 겪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중국의 ‘꽌시문화’에 대해 담론을 많이 하게 되고 아울러 ‘꽌시문화’에 대한 글도 많이 발표하고 있다. 중국의 ‘꽌시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중국 국가모습은 ‘가(家)’의 확대모델이다. ‘가’ 내에서 부모의 의무는 가족의 식을 해결한다. ‘국’의 천자는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치국방침 중 으뜸의 대사로 간주하고 백성들의 식을 해결하는 최고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군부(君父)’, ‘국부(國父)’, ‘황모(皇母)’, ‘국모(國母)’란 말은 바로 이렇게 생겨났다. 천자가 ‘민이식위천’을 실천하는 상징물이 바로 보정(寶鼎:보귀한 가마솥)이다. 중국인의 시조인 황제(黃帝)가 만년에 보정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정(鼎)은 소, 말, 양, 돼지, 닭, 물고기 등 가축을 삼는데 사용되며 수요에 따라 대소가 다르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큰 보정은 은허무관촌사모무대방정(殷墟武官村司母戊大方鼎)인데 높이 133센티, 길이 110센티, 넓이 78센티, 무게 875키로다. 가마솥인 정(鼎)은 고대에서 국가정권을 의미하는데 삼국정립(三國鼎立)이란 곧 세 나라 정권의 대치를 뜻한다. 권력자들이 정(鼎)을 둘러싸고 연회를 베푸는데 주요자리가 주석(主席)이다. 천자가 직접 보정을 챙기지만 구체적으로 관리하는 자의 직급은 재상(宰相)이다. 재상은 가축도살을 책임진 자를 뜻하는 말인데 고대 중국에서는 제사용 가축도살을 맡은 자로서 그 직책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오늘날 총리급에 해당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였다. 역중천 교수는 “내각을 주방 내 설치하고 요리사를 파견하여 재상을 맡게 하는 것은 실로 ‘중국특색’이 농후하다.”고 밝혔다. 천자를 중심으로 재상 및 조정대소신료들은 ‘보정을 둘러싸고 각자 맡은바 소임을 다 한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식을 중심으로 내각이 구성되고 조정에 근무하는 크고 작은 여러 관직도 역시 식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국(國)’의 구조가 ‘가(家)’의 구조와 본질적으로 같은 패턴이라 보면 된다. ‘가(家)’는 부모를 중심으로 식을 공동으로 영위한다. 자녀가 성장하여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것은 곧바로 사회 성인이 되기 전까지 먹여 키웠기 때문이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자매가 각별히 친해지는 이유가 역시 바로 한솥밥을 먹었기 때문이다.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더 큰 이유는 자녀에게 젖을 먹였고 밥 지어 먹였기 때문이다. 동부이모(同父異母)의 형제자매보다 동모이부(同母異父)의 형제자매끼리 더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역시 같은 엄마의 젖을 먹고 컸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적 관계는 혈연, 지연, 학연으로 맺어진다. 여러 가지 관계 중 혈연관계가 가장 굳건한 것은 역시 식을 공유하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에서 팔촌까지 한온돌에서 살았다고 한다. 한온돌에서 살았다는 것은 식을 공유했다는 뜻이다. 가난했던 시절 형제간에 누룽지를 빼앗아 먹으면서 서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식을 공유하고 성장하였기 때문에 서로 우애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팔촌 사이도 한온돌에서 살면서 먹거리 때문에 많이 싸우기는 했겠지만 종국적으로 식을 공유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 대가족문화가 혈연관계를 굳건히 하는 장점이 있으나 너무 번잡하여 분가하는 문화가 생겨났지만 고대사회에서는 멀리 떠나지 않고 한마을에 지내는 경우가 다수였다. 비록 분가해서 다른 살림을 차렸으나 한마을에서 살다보면 서로 식을 공유하는 일이 타남보다 빈번하여 여전히 정이 끈끈할 수밖에 없었다. 근현대화사회에 진입하여 형제, 사촌이 고향을 떠나 멀리 낯선 곳에 이주하여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 바뀌었다. 식을 공유할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서로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린다.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났다는 속담은 이웃은 식을 해결하는 농사일을 서로 돕고 맛 나는 음식이 생기면 서로 나눠먹는 데서 정이 깊어 유래된 말이다. 지연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는 역시 어릴 적 짜개바지 친구이다. 짜개바지 친구는 서로 상대의 집에 가서 음식을 얻어먹는 기회가 많다. 사회친구가 배신을 때리면 나 혼자 속을 앓지만 짜개바지 친구가 배신을 때리면 엄마보기 미안해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엄마가 짜개바지 친구에게 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또 어릴 적 짜개바지 친구가 세상 그 어떤 관계 중 가장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어릴 적 누룽지를 함께 나눠 먹었고 차매 서리를 함께 해 나눠먹었고 콩밭에 가서 콩서리를 함께 해 먹었고 미꾸라지를 잡아 함께 먹었던 추억이 그 어떤 추억보다 가장 머리에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친구배신보다 짜개바지 친구한테 배신당하면 흔히 상처를 크게 입게 되는 것이다. 짜개바지 친구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흔히 한고향 사람끼리 서로 친근하게 느끼는 감정은 한고장의 물을 함께 마셨고 같은 강물을 먹고 살았으며 같은 흙을 파먹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식’을 매개체로 서로 친근한 감정이 쌓여지게 된다. 학연이란 관계는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패턴이 달라질 수 있는 것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릴 적 동창도 학연에 속하고 대학동창도 학연에 속한다. 하지만 어릴 적 동창과 대학동창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거리가 멀다. 어릴 적 동창은 한고향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식을 공유하며 성장해 왔기에 정이 더 끈끈할 수밖에 없는데 비해 대학동창은 사면팔방, 방방곡곡에서 모이기 때문에 성장기 식을 공유했던 감정이 없어 정이 쉽게 들지 못한다. 대학동창은 다만 서로 이익관계를 우선으로 친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 진출해 서로 각자 다른 위치에서 서로 도울 수 있는 길이 생기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 중국에서 직장을 단위(單位)라 하는데 중국인의 직장은 하나의 가정과 같은 존재이다. 오너는 직원들의 식을 해결해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직원의 부부갈등 사생활까지 책임지는, 마치 부모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단위를 확대된 가정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한직장 내에서 서로 다투다가도 일단 다른 단위 직원들과 시비 붙으면 모두 한편이 되는 것이 바로 식을 토대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동양 삼국에서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에 비해 혈연, 지연, 학연관계의식이 빈약하다. 한국인이 일본인에 비해 위 삼대 관계를 매우 중시하지만 중국인의 ‘꽌시문화’에 비하면 역시 빈약하다. 이 지구상에서 ‘꽌시문화’를 가장 중시하는 민족은 중국인이라 말해도 전혀 어폐가 없다. 중국인은 ‘꽌시’를 하나의 네트웍으로 인식하고 ‘꽌시왕(關係网)’이라 부른다. 한국인이 중국진출 초창기에 “중국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되는 일도 즉석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아주 적고 차일피일 미룬다. ‘꽌시’를 통하지 않는 한 그렇다는 뜻이다. 일단 ‘꽌시’를 통하면 해결이 쉬운 것이 중국사회 보편적인 현상이다. 참고로 밝히자면 세상의 다수 민족들은 비즈니스에 있어서 일이 성사되면 축하의 의미로 연회를 베푸는데 비해 중국인은 사무실에서 매듭지을 일도 미뤄 술상에서 성사시키는 사례가 많은데 이 또한 중국특색이 농후한 비즈니스이다.    
48    화약으로 기껏 폭죽 만든 중국 댓글:  조회:5558  추천:18  2013-10-26
화약으로 기껏해야 폭죽 만든 중국  김정룡 5천년의 중국역사는 발명의 왕국이었다. 황제(黃帝)는 농기구, 깃발, 가옥, 육십갑자, 의학을 발명했다. 복희씨는 팔괘를 발명하여 음양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은나라 시기 방위론을 발명해냈고, 점복에서 갑골문이 생겨나 한문의 토대가 되었다. 주나라 초기 음양으로 우주를 관찰하는 을 지어냈다. 공자는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사교육을 창설하였고 수나라부터 시행한 과거제는 근현대에 시험제로 지구촌에 전파되었다. 이외 도자기 문화는 이웃나라 고려와 일본은 물론이고 중세기 서양에까지 전파되었다. 고대 중국은 이루다 나열할 수 없는 발명을 이뤄냈는데 그 많은 발명 중에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은 사대발명(화약, 제지술, 인쇄술, 나침반)이다. 수인씨(燧人氏)가 불의 사용을 발명하여 날것으로 먹던 야식이 숙식문화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을 구하기 어려워 한 번 지핀 불을 살려 불씨로 보존하여 사용하는 것이 몹시 번거로웠다. 그래서 고대중국인은 화약을 발명하게 되었고 장소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중국인은 화약으로 오락용인 폭죽을 만들었다. 400년을 거쳐 서양에 전파된 화약은 그들이 총과 대포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혹자는 중국인이 머리가 둔해 화약으로 기껏해야 폭죽을 만들어냈지만 서양인은 머리가 좋아 총과 대포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만약 중국인이 머리가 둔하거나 서양인에 비해 머리가 딸린다면 왜 서양인이 화약을 발명하지 못하고 중국인이 화약을 발명해냈는가? 화약으로 폭죽, 화약으로 총포를 만들어낸 것은 머리문제가 아니라 문화배경에 따른 결과로 보아야 마땅하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농경문화였고 서양은 역사적으로 유목문화였다.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특징이 중국은 기껏해야 화약으로 폭죽을 만들었고, 서양인은 총과 대포를 만들어내는 소이연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농경문화의 특징은 정착이고 유목문화의 특징은 이동이다. 정착문화는 낯선 사람을 만날 기회가 아주 적다. 아침에 만난 사람 점심에 만나고 또 저녁에 볼 수 있다. 마을사람끼리 자주 만나다 보면 정이 들게 된다. 정이 들었기 때문에 서로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유목문화는 풀을 찾아 이동하기 때문에 늘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서로 경계심을 갖게 되고 풀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경우가 많다. 풀은 유목문화에서 생존의 가장 귀중한 존재이다. 풀을 점령하면 생존할 수 있고 풀을 잃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풀싸움은 네가 죽고 내가 사는 서로 죽이고 죽는 극단적인 혈투이다. 농경문화는 사람끼리 정이 들기 때문에 화목을 추구한다. 공자의 에 ‘이화위귀(以和爲貴)’란 문구가 있다. 세상만사 중 화목, 화합이 으뜸이다. 농경문화는 마을사람끼리 서로 협동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화’가 으뜸이다. ‘화’하면 협동이 이뤄지고 ‘화’하지 못하면 마을공동체구성이 깨지게 되고 농사를 망치고 생존에 크나큰 영향이 미친다. 유목문화는 인간관계가 늘 서먹서먹하여 정이라는 것이 존재할 공간이 없다. ‘화’하고 싶어도 생활환경이 허락지 않는다. 오로지 힘의 경쟁에 의해 생존이 결정된다. 이쯤 되면 결론이 나온다. 농경문화에는 살상무기가 필요 없는데 반해 유목문화는 살상무기가 필수적이다. 중국인이 화약으로 기껏해야 오락용 폭죽을 만든데 비해 서양인이 중국의 화약을 수입하여 총과 대포 같은 살상무기를 만들어낸 것은 머리의 총명여부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문화 환경에 의해 빚어진 결과였다. 악수하는 인사문화는 서양에서 유입된 것이며 그 유래는 살상무기와 관련이 있다. 즉 유목민은 수시로 살상무기를 휴대한다. 흔히 낯선 사람을 만나면 서로 경계하게 되는데 내가 상대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뜻을 전하는 방식으로 나의 손에 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고 상대도 마찬가지라는 뜻을 확인하는 방법이 곧 서로 상대의 손을 잡아 보이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중국인은 내성적인 성격에 의해 인사할 때 손에 손을 얹고 자기 몸에 붙이는데 반해 서양인은 외향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인사할 때 손을 밖으로 뻗는다고 말한다. 견강부회의 주장이다. 악수의 유래를 안다면 억지춘향식으로 두들겨 맞추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 늦게 개발된 아메리칸 대륙(미국)에서 아직도 총기휴대가 합법이고 세상에서 안전이 가장 불안한 이스라엘에서 총기휴대가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유목문화 잔재에 의한 현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농경문화 전통국가에서는 총기휴대가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는 것이고 총기휴대가 허락되고 있는 나라는 모두 유목문화 전통국가들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중국이 사대발명에 의해 세계적으로 가장 먼저 부유한 나라였지만 세월 흐름에 따라 가장 빈곤한 나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다. 치명적인 이유가 자신들의 발명품인 화약과 나침반이 서양에 도입되어 서양이 그것을 활용하여 중국을 침략하고 마치 살찐 돼지고기를 나눠 먹듯이 중국을 자기네 나름대로 분할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찬란했던 2천년 제국이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47    일국양제(一國兩制) 유래 댓글:  조회:5325  추천:2  2013-09-16
일국양제(一國兩制) 유래   중국이 1997년 홍콩을 영국 수중에서 되찾으면서 일국양제의 정치체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등소평의 주도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다. 당시 세상만사 지식, 특히 역사지식에 눈이 어두웠던 필자는 일국양제의 정치체제가 등소평의 ‘창작품’으로 간주하고 인류역사에 없던 새로운 획기적인 발상인 줄로 알고 있었다. 10여년이 지나 역사문화에 흥미를 갖고 진지하게 파고든 결과 일국양제의 정치체제는 등소평의 새로운 획기적인 발상이 아니라 중국역사(한나라 초기)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울러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의 명언 “모든 현대사는 역사이다”가 만고의 진리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천년만년 이어가리라 믿었던 진제국이 불과 16년 만에 멸망하고 유방의 한조가 시작되었다. 진제국이 비록 중국제국역사에서 가장 단명한 왕조였으나 어찌되었던 중국 최초의 제국역사의 서막을 연데 대해선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역사에는 아이러니가 굉장히 많았다. 일례로 전국시대 후기에 들어 전국7웅이 남아 겸병을 벌일 때 사실 진나라는 서북쪽에 위치한 편벽한 ‘촌놈’의 나라였고 문화적으로도 초나라,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등에 비해 후진 국가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세련된 나라들이 최후의 패주가 된 것이 아니라 가장 ‘촌놈’의 나라로 여겨졌던 진나라가 통일(정확히 말하자면 統一이 아니라 一統이었음)의 역사 과제를 완수하는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사건을 그저 아이러니로만 취급할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촌놈’의 나라라 평가받았을지언정 통일을 이뤄냈다면 필경 그럴만한 소이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 소이연이란 대체 무었일까? 독자들은 모두 상앙변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상앙변법의 주요 내용으로서 봉건의 핵심이 되는 ‘분봉제’와 ‘정전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황무지개간을 장례하였다. ‘분봉제’와 ‘정전제’의 폐지는 제후국인 방국의 폐지를 의미하고 새로운 황무지개간을 통해 군량도 해결하고 경제적으로 재정의 건실함을 갖게 되었다. 대부와 사 집단의 귀족세습을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관리임명제를 실행하였다. 이 또한 봉건으로 된 방국으로부터 제국으로 가는 길을 닦아놓은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상앙의 변법을 통해 진나라는 제국의 틀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진나라가 통일을 이룬 소이연이다. 하지만 진제국의 수명은 매우 단명이었고 그 뒤를 이은 한조는 천하를 얻고 나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 고민의 초점은 정치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이다. 진나라 초기에도 일부 인사들이 봉건제도인 방국을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일부는 군현제를 중심으로 제국을 건립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시황제는 봉건제도인 방국은 낡은 것이고 아울러 천자는 허수아비여서 강력한 권력을 지향하는 시황제의 맘에 들지 않아 군현제를 선택하였고 이 정치제도가 2천년이나 지속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군현제를 실시한 진제국의 수명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유방의 한조 초기에 한신을 비롯한 충신들이 군현제가 아닌 봉건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군현제가 봉건제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만약 유방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면 새로운 내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방은 양쪽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여 경기지역(한국의 京畿라는 표현이 중국역사에 있었음)을 포함한 수도권에서는 군현제를 실시하고 기타지역은 봉건의 방국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일국양제이다. 한조 초기 유방이 궁여지책으로 일국양제를 실시하긴 하였으나 봉건 방국들의 반란이 여기저기서 그치지 않았고 ‘문경지치’로 소문난 태평성세 시절에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강력한 군주인 한 무제가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체적으로 군현제를 지방에까지 확대 실시하여 제국의 정치체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군현제의 기본은 귀족세습제가 아닌 관료임명제이고 관료들은 한나라 시기에는 ‘천거(薦擧)’, 위진남부조 시기엔 ‘찰거(察擧)’, 수`당부터는 ‘과거(科擧)’에 의해 등용되었는데 이들을 사대부라 부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士)는 공부한 귀족집단, 대부는 권력을 가진 관료집단이며 공부한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곧 ‘사대부’라 부른다. 이 사대부 집단이 제국의 관료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2천년 제국역사를 살펴보면 지방할거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례는 많았으나 사대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권을 위협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조가 518년 동안 지속된 역사는 사대부 집단의 역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조선왕조의 장수비결에 있어서 그저 막연하게 반도인의 민족기질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마땅히 사대부역사를 중점으로 풀어야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조선왕조의 장수비결, 이와 관련해선 별도의 주제로 발표할 계획이다. 2천 년 전 중국역사에 일국양제의 정치체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비록 역사에 존재해 있었던 사실도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저 역사로만 남을 것이나 후세의 현명한 지도자가 나타나 그것을 잘 활용한다면 현시대에 도움이 크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역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울이란 말이 십분 맞다. 등소평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고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만약 홍콩을 수복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대륙의 정치체제에 맞춘다면 큰 혼란이 조성되었을 것이나 등소평의 현명한 일국양제의 도입에 의해 무리가 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한조 초기의 일국양제와 등소평의 일국양제가 다른 점이라면 전자는 실패했고 후자는 성공했다는 것이다.    
46    ‘먹었는가?’, 중국인의 인사말 댓글:  조회:5852  추천:3  2013-08-03
‘먹었는가?’, 중국인의 인사말   100년 전 미국 선교사 아더`스미스가 중국 산동성과 하북성에서 26년 동안 체류하면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중국인의 성격을 반영한《중국인의 소질》이란 책을 발표하여 구미문화권에서 일약 중국통 스타로 떠올랐다. 아더·스미스는 책에서 “중국인은 위를 채우고 돈지갑을 채우는 것을 인생의 전부 보람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지적하였다. 확실히 중국인은 먹는 것을 으뜸으로 간주하는 민족임에 틀림없다고 판단되어 아더·스미스의 지적에 공감한다. 이 지구상의 인류는 같은 문화권에 속한 인간도 민족에 따라 인사말이 다르다. 예하면 중국, 일본, 한국은 한문과 유교를 공통분모로 하는 중화문화권에 속한다. 하지만 세 민족의 인사말이 다르다. 그것은 세 민족이 흘러온 역사에 의해 달라지 게 된 것이라 나는 판단한다. 한국인의 전통 인사말은 ‘무사(無事)한가?’인데 이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천 번의 외침을 받아오면서 늘 ‘일(事)’이 생겨 불안했기 때문에 일이 없는가는 뜻으로 ‘무사한가?’가 인사말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의 인사말은 서양인과 비슷하다. 아침·점심·저녁 인사말이 다르다. 중국인의 인사말은 ‘먹었는가?’인데 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인사말이다. 참 특이하다. 이것도 중국식 특색이 있는 인사말이다. 중국판 도올·김용옥 교수, 중국 CCTV 백가강단 프로에서 강펀치를 날리고 있는 역중천(易中天) 교수는 중국인의 ‘먹었는가?’의 인사말 유래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유목민족은 초창기부터 짐승을 잡아먹었기에 배고픈 고생이 덜했다. 농경에 의지해 먹고 사는 중국인은 농사시간이 길고 흉년을 만나면 배고픈 고생을 많이 해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지인을 만나면 인사말로 ‘먹었는가?’고 묻는다는 것이다. 나는 ‘먹었는가?’의 인사말 유래를 역중천 교수와 달리 생각하고 있다. 중국문화는 선진시대(先秦)에 이미 성숙되고 완성되었다. 선진시대 중국문화를 살펴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와 비슷한 개념이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선진시대 중국문화는 이 현세 지평선 너머에 다른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세상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것이 없었다. 인간이 신앙이 없으면 현세에 묶여 살 수 밖에 없다. 바로 중국인은 선진시대문화의 영향 때문에 현세밖에 모르는 리얼리즘에 빠져 있었다. 신앙이 없는 현세생활이란 곧 인간은 타고 난 본능에 의해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인간이나 동물은 일단 먹어야 생명이 유지된다. 문화고 뭐고 간에 일단 먹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입는 것과 잠자는 것은 모두 먹는 것에 비하면 둘째 셋째 가는 문제이다. 한민족도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란 속담이 있듯이 먹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겨왔던 것이다. 과학이 창명한 현대사회에서 먹을 것이 풍부하다고는 하지만 역시 먹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수 있다. 옷은 10년 전 옷을 입어도 무리가 없고 한국 옷이냐, 중국옷이냐 굳이 가릴 필요 없다. 나는 20년 전 중국에 있을 때부터 줄곧 한국 옷을 입어왔지만 몸이 아무 거부반응이 없다. 이에 비해 음식은 한국에 온 지 강산이 한 번 반 바뀔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한식이 습관 되지 않는다. 연 며칠 한식만 먹으면 나의 몸에서 심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아직도 중식이 입에 더 맞는다는 뜻이다. 나의 회사 직원이 한국인과 중국인이 반반인데 정심 때면 조선족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중국음식점에 향하고 한국인은 한식집에 간다. 음식문제 만큼은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 타협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이 먹고 살기 위한 목적인데 서로 맛없게 먹는 것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 석학 임어당은 그의 저서 《중국인》에서 “애국주의란 듣기엔 거창하나 따지고 보면 각자 어릴 적 먹던 음식기호(飮食嗜好)를 지켜내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아~ 이 지구상의 인류는 공통적으로 먹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주장에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먹는 것이 최우선과제라면 신앙이 없이 현세주의에 빠져 있는 중국인은 당연히 먹는 것이 세상만사 중 으뜸으로 간주하고 인사말도 ‘먹었는가?’로 된 것이 동지섣달에 파리가 얼어 죽는 것이 이상할 것 없는 것처럼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는 본다. 중국인이 식을 세상만사 중 으뜸으로 간주해온 덕분에 중국요리가 세상에서 가장 발달할 수 있었다. 어느 서양 부자가 배부르고 등 따시니 “프랑스격조로 된 가옥에서 일본마누라 꿰 차고 중국요리를 먹는 것이 꿈이로다.”고 한담을 했다고 한다. 지구촌에 이런 삶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프랑스격조로 된 가옥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말이 되겠고, 마누라는 일본여자가 최고라는 뜻이겠고, 요리는 중국요리가 으뜸이란 의미일 것이다. 중국인이 먹는 것을 으뜸으로 간주해왔다는 증거가 또 있다. 문자결구(文字結構)이다. 한문이 상형문자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문을 상형문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따져보면 상형문자보다 회의문자(會意文字) 글자 수가 엄청 더 많다. 우선 아름다울 ‘미(美)’자가 회의자인데 위에는 ‘양(羊)’이고 양 아래는 사람 ‘인(人)’이 붙어 있다. 양과 사람이 합치면 아름답다는 것이다. 양(羊)이 말(言)하면 착할 ‘선(善)’이 된다. 상서로울 ‘상(祥)’자는 앞에 볼 ‘시(示)’ 변이고 뒤에 양이 붙어 있다. 볼 ‘시(示)’는 갑골문에서 하늘에서 무엇이 내래오는 모습인데 이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 국을 뜻하는 ‘갱(羹)’자는 위에 새끼양이고 아래는 또 양이 들어 있는 아름다울 ‘美’이다. 한 글자에 양이 두 개나 들어 있다. 새끼양으로 음식을 만드면 맛이 기가 막히게 좋으니 ‘갱(羹)’이 된 것이다. 의로울 ‘의(義)’자는 위에 양이고 아래는 나를 뜻하는 ‘아(我)’이다. 양이 나의 것이면 의로운 의미로 된다. 앞에 사람 ‘인(人)’변이 붙으면 의리라는 의(儀)가 되고 말씀 ‘언(言)’변이 붙으면 의논하는 ‘의(議)’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양(羊)’이 들어간 글자는 좋은 뜻이다. 상고시대 중국인은 왜 양(羊)을 그토록 미화하였을까? 양은 고기가 많고 맛이 좋다. 음식으로 사용하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양가죽을 벗겨 옷으로 입을 수 있고 양털은 여러모로 사용가치가 높다. 양의 특징은 온순하고 행동이 둔해 빨리 달리지 못한다. 다른 짐승에 비해 사람이 다루기가 가장 쉽고 편하다. 양의 이와 같은 실용가치에 의해 고대사회에서 양을 제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을 제물로 삼은 것은 동서고금(중국어로 古今中外라 함)이 모두 똑 같았다. ‘희생양’이란 서양 종교문화에서 유래된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양을 화폐교한 도구로 사용된 역사가 있고 중국에서는 양을 연 중 가장 큰 명절인 춘절(음력설)에 선물용으로 중시 받아왔다. 지금도 중국인은 양을 선물하는 관습이 유지되고 있다. 중국인이 식(食)을 세상만사 중 으뜸으로 간주했다는 가장 유력한 증거로서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들 수 있다. 먹는 것을 하늘만큼 큰일로 여긴다는 뜻이다. 상고시대 인류는 하늘을 가장 으뜸의 경의로운 대상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서양은 하느님에 목을 맬 만큼 신앙이 발달했고 중국인은 서양인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인 하느님 신앙은 없었으나 아무튼 하늘을 경의롭게 여겨왔던 것만은 사실이다. 무슨 불상사가 생기면 “상제여, 나를 지켜주세요” “하늘이여, 나를 구해주세요”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하늘이 경의의 대상으로 된 것은 하늘은 크고 변화무상하고 지상의 운명은 하늘이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역대황제는 모두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진리로 받들어왔고 치국방침을 세웠다. 위로는 황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을 하나같이 받들어왔다면 중국문화는 먹는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성립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먹는 것과 관련된 중국문화를 알아보는 것이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45    중국 반부패 험난한 길 댓글:  조회:6374  추천:5  2013-07-06
중국 반부패 험난한 길   인민폐 수억 원 들여 만든 영화 에 장개석이 아들 장경국과 나눈 대화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부패, 잡으면 당이 망하고 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腐敗, 反就亡黨, 不反就亡國.).” 그런데 ‘장개석전집’을 연구한 홍콩 00학자에 의하면 장개석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화작가가 지어냈다는 것이 불 보듯 빤한 일이다. 왜 작가가 영화에 이와 같은 말을 집어넣었을까? 해답은 독자들한테 맡기기로 하겠다. 중국부패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래서 매년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릴 때마다 건의 사항 중 첫 번째로 제기되는 것이 바로 부패문제이다. 요즘 시진핑 주석이 반부패운동을 벌여 인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고 국제사회도 희망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중국 반부패의 길은 험난하다고 보고 있다. 왜? 나는 역사문화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시각으로 현대를 조명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보인다고 주장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중국부패역사는 그 뿌리가 너무 깊어 뽑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중국부패역사는 대략 2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혹자는 2천 년 전 중국에 부패가 없었는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답부터 말하자면 전국시대 후기에 들어 부패가 싹 텄고, 대진제국시기부터 부패가 만연되기 시작하였고, 진·한대부터 매관매직이 생겨나면서 부패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청대말기까지 제국시대는 부패가 줄곧 성행하고 있었다. 그 후 중화민국정부도 오늘날 중국도 부패가 치명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후기 전에는 왜 부패가 없었을까? 중국부패역사는 관료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전국시대 후기 전까지 官은 대체로 사관(史官)과 무관(巫官) 두 가지였다. 사관은 사람의 일을 기록하는 직업이고 무관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관장하는 직업이다. 그 당시 사관과 무관은 제국시대 관료들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또 주나라 때 사회지도층인 대부와 사(士)를 관으로 취급할 수 있겠으나 역시 제국시대 관료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는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대부는 자신의 영지와 채읍이 있었기 때문에 ‘직업관료’신분이 아니었고 사는 귀족으로서 영지는 없었으나 대부를 보조해 영지를 가꾸기 때문에 먹고 사는데 지장에 없었다. 더욱이 대부는 자신의 영지가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타락은 있었어도 부패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부와 사는 모두 귀족신분으로서 대대로 세습되어 생계가 보장되기 때문에 부패할 이유가 없었고 정치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대부와 사의 정치참여 의미는 권력 확장이었다. 그러던 데로부터 전국시기 후기에 이르러 진나라가 상앙변법을 도입하면서 봉건을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고 따라서 대부와 사 계급의 세습을 폐지하고 대신 관원임명제를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역사에 부패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진제국이 건립됨에 따라 천하는 하나의 중앙집권통치권력 밑에 귀속되고 제국의 모든 것, 일초일목까지 공공의 재산으로 등장한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 부른다. 이때부터 나라의 길은 공로(公路), 관청에서 사무를 보는 직원을 공무원(공무원),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의 서류는 공문서(公文書)로 등장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 ‘公’은 백성의 몫까지 있는 진정한 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하위공’은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백성을 기만하는 허울 좋은 가면극이었고 실제로는 천하의 모든 것이 황제 일개인의 소유였다는 것이다(普天之下, 莫非皇土). 황제가 어떻게 천하를 소유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바로 황제는 천자요, 하늘이 내린 수권(授權)을 부여받아 천도를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천하가 황제의 것이지만 황제 일인이 직접 경영할 수 없다. 그래서 황제를 대신해 경영을 맡을 자들이 필요했고 그들을 역사에서는 관료집단이라 부른다. 기업을 말하자면 회장님이 직접 경영에 나설 수 없어 사장을 두고 그 밑에 부사장, 이사, 전무, 부장, 과장, 팀장, 대리 등 수많은 간부를 채용하여 경영을 맡기는 것과 같다. 일면 제국의 구조와 현대기업구조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제국의 모든 것은 황제의 소유이지만 현대기업은 주주제와 주식제로 서로 관리감독이 실시되고 있고 층층의 간부들은 모두 자신의 몫이 있기 때문에 회사의 흥망성쇠가 자신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에 책임감이 따른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제국의 관원은 자신의 몫이 없고 황제를 대신해 대리관원을 맡을 뿐이어서 제국의 흥망성쇠에 관심이 없다. 제국이 흥성하여도 개인의 주머니가 두툼해지는 것도 아니고 제국이 망해도 나 개인과는 무관하다. 더욱이 제국의 관원은 세습제가 아니므로 언제 어떻게 잘릴지 보장이 없기 때문에 자리에 있을 때 해먹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나면 빈털터리가 되기 때문에 극구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던 것이다(機不可失, 時不再來, 過期無效). 제국은 군현제(때로는 성·부·현제, 도·부·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제국초기부터 멸망까지 현의 행정단위는 줄곧 존재해왔다. 지금은 말단 행정단위가 향진이지만 제국시대 말단 관원이 바로 현령(縣令:현장, 현관)이었다. 현령은 비록 말단 관원이었으나 백성과 부딪치는 現場의 관원으로서 목민지관(牧民之官)이었기에 비리를 저지를 기회가 가장 많은 자리였다. 왜 역대 현령들이 비리를 많이 저질렀을까? 우선 제국은 농경문화 중심사회였기 때문에 세금을 거둬들이는 데 한계가 있어 재정이 충족하지 못했다. 넉넉지 못한 재정수입으로 황족일가의 사치를 보장해야 하고 제국의 권력보장을 위해 군대도 양성해야 하고 황제를 대신해 대리관원을 맡은 방대한 관료집단을 먹여 살려야 한다. 그래서 말단 관원인 현령의 봉급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현관의 봉급은 한 대의 경우 조 20휘(280키로그램)에 돈 2천 냥이었다. 명대에 인민폐로 환산하면 1,130원 정도였다. 현관뿐 아니라 전체 관료들의 봉급이 매우 낮았다. 명대 정이품에 해당하는 육부상서가 1년에 받는 돈이 은 152냥이었고 청대 일품 관원은 겨우 180냥을 받았을 뿐이다. 제국시대 官과 僚는 간부, 吏는 관청의 직원이었다. 관료와 관리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정무관 관료인 주목과 현관은 그나마 낮은 액수이나 정해진 봉급이 있었지만 사무관인 이원(吏員)과 아역(衙役)들은 정해진 봉급도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목민지관인 주목(州牧)과 현관 및 이원과 아역들이 비리를 저지른 데는 단순히 개인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제국의 관원체제는 임명제(한대에는 察擧, 위진남북조시대는 薦擧, 수당 이후로는 科擧制에 의해 관료를 등용시켰으나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임명제였음)이기 때문에 아래 관원은 윗선에 잘 보여야 자리를 보존할 수 있고 승진도 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을까? 역시 금품을 바치는 것이다(上貢). 이것을 역사에서는 ‘효경(孝敬)’이라 한다. ‘효경’의 내원은 백성을 상대로 수탈하는 것이다. 백성을 수탈하여 효경을 바치는 것은 제국시대에 있어서 하나의 룰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관장누규(官場陋規)’라 부른다. 제국시대 관원들은 거의 다 ‘관장누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해서(海瑞) 같은 청관이 가끔 있었지만 부하들의 사무용 용지조차 직접 챙기는 해서와 같은 ‘각박한’ 청관이 주변사람들로부터 왕따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해서가 파면된 것이 그가 세상이 혼탁한데 홀로 깨끗한 각박한 청관이었던 것이 숨은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제국시대 ‘효경’과 ‘관장누규’는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부간부들에 해당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간부들의 부패가 ‘효경’이 전부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일부 간부들의 과도한 사리사욕이 부패의 주요 이유이다. 일부 공공기관에서 간부 선거제를 실시하고 있으나 비리가 여전한 것은 부패가 단순히 ‘효경’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패의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 우선 제국은 소유권이 불분명했다. ‘천하위공’이 문제였다. 천하의 것이 모두 공이니 관리들은 황제의 대리인 역할만 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고 자리에 있을 때 해먹는 것이 관례로 흘러왔다. 또 ‘천하위공’은 황제 일인에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황제는 방대한 관료집단을 두게 되었고 황제 자신은 자기 황족의 세습만 보존된다면 관료집단의 부패를 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황제가 맘먹고 부패 척결에 팔을 걷고 나선다면 그 방대한 관료무리가 반기를 들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제국은 무너지게 된다. 실제로 제국시대에 할거세력 무리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 사례는 있었어도 관료집단이 반기를 들어 봉기를 일으켜 제국을 전복시킨 사례는 없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황제가 관료집단의 부패를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배만 불리면 반항이 없었다는 증거이리라. 관료들의 부패의 원인 가운데 덕치가 문제였다. 덕치를 강요하기 때문에 관료들의 봉급을 낮게 책정하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그러나 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한다. 덕이 밥그릇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비리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제국시대에 덕치를 주장하였기에 청관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청관은 극소수였다. 임칙서 같은 아무리 청백한 관리라 하더라도 ‘관장누규’에 자유롭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덕이 밥을 먹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간부들이 덕을 강요받기 때문에 청관이 있기는 하나 실제생활에 있어서 간부도 경제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인만큼 집도 마련하고 자녀를 공부시키고 사회 인간관계 처리도 해야 하는데 덕이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부패를 저지른다. 북경의 유명한 왕산 작가는 “당정간부들이 노임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관장에 있는 그들이 지출도 많을 것이니 일정한 회색수입은 눈감아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당정간부를 하려 하겠느냐?”고 주장한다. 제국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중국도 마찬가지, 중국은 전통적으로 ‘가족본위’의 문화이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 부패를 저지르는 요소도 있다. 한국이 민주화사회라 하지만 아직도 간부들의 부패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통유교문화 영향에 의해 ‘가족본위’가 뿌리 깊기 때문이다. 제국시대 황제가 관료집단의 부패를 눈감아 주었다고 해서 제국시대에 반부패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세계역사에서 중국에 감찰기구가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고 한다. 진한시대에 이미 감찰부가 있었다. 서한 때는 ‘어사부(御史부)’, 동한 이후에는 ‘어사대(御史臺)’, 명·청 시대에는 ‘도찰원(都察院)’이라 불렀다. 그러나 고양이가 있다고 해서 쥐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제국시대 ‘고양이’는 ‘쥐’를 잡을 의지가 약했고 오히려 쥐가 마련한 먹거리를 나눠 먹으려는데 신경을 쓰고 있는 판에 부패를 잡는다는 것은 어쩌다 닭을 잡아 족제비한테 보이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기률검사위원회가 있고 반탐국이 있어도 부패가 만연한데 하물며 제국시대에 오죽했겠는가!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는 명언을 남겼다. 즉 오늘날의 사회 제현상은 역사의 관성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의 부패는 제국시대 2천여 년의 부패의 관성표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택동이 건국 초기 ‘삼반오반’운동을 일으켜 부패척결에 나서 효과를 거뒀으나 개혁개방 이후 경제시대에 들어 제국시대 부패가 다시 재현되고 있다. 2천여 년의 제국역사, 중화민족에게 휘황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동시에 사회를 좀 먹는 바이러스도 너무 많이 남겼다. 그 가운데 부패도 하나의 심각한 바이러스로 꼽을 수 있다. 장개석의 중화민국정부도 제국의 부패바이러스 영향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다. 오늘날 부패바이러스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뿌리 깊은 부패바이러스를 제거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그 길이 험난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44    조선여자 거시기 차고, 중국여자 거시기 따뜻하다? 댓글:  조회:13545  추천:4  2013-06-20
조선여자 거시기 차고, 중국여자 거시기 따뜻하다?     내가 소학교는 조선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부터 한족학교를 다녔다. 조선족과 한족의 삶이 여러모로 많이 달라 서로 궁금한 것도 참 많았다. 그때 한족아이들이 나한테 질문했던 중에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남는 것이 하나 있다. “니들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차다고 하는데 진짜냐?” 이 질문은 그 당시 한족성인남자들이 조선족여자에 대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내가 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냐.” 나의 퉁명스런 대답이었다. 사실 성경험이 없었던 고등학생인 내가 조선족여자의 음도가 찬지, 따뜻한지 알 길이 없었고 설사 조선족여자와 성관계 경험이 있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한족여자와 성관계를 해봐야 비교가 될 터이니 말이다.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차다는 것을 거꾸로 추리하면 한족여자의 거시기는 따뜻하다는 말이 성립된다. 사회 성인이 되고 나서, 특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맨발의사 직업에 종사하면서 ‘직업병’ 때문인지 아무튼 나는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진짜 찬 것인지에 대해 살짝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의학상식에 의하면 조선족여자와 한족여자의 정상체온이 같은 36~37도이니 거시기의 온도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한족들이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차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걸까? 의학상식으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과학상식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면 ‘관념상식’에 의해 의문을 풀 수밖에 없지 않는가. 여기서 말하는 ‘관념상식’이란 곧 생활관습에 의해 생겨난 억측일 수도 있다. 한족여자는 뜨거운 물을 마시고, 뜨거운 요리를 먹고, 서리 내리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서 이듬해 얼음이 풀릴 때까지 두터운 솜옷을 입는다. 조선족여자는 냉수를 마시고 냉식(冷食)을 먹고 아무리 살을 에는 엄동설한에도 솜옷이 미에 손상된다고 입지 않는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는 짐작이 올 것이라 믿는다. 조선족여자의 거시기가 한족여자의 거시기에 비해 차다는 인식은 곧바로 이러한 생활관습의 차이에서 생겨난 ‘관념상식’이라는 것을. 조선민족의 음식특징은 냉식이 위주이고 중국인의 음식특징은 열식이 위주이다. 김치는 찬 음식이다. 찬 음식인 김치는 우리민족음식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김치 사촌인 여러 가지 짠지들도 전부 찬 음식이다. 우리민족이 즐겨먹는 생회, 식혜 등도 찬 음식이다. 명태반찬도 찬 음식이고 낙지, 오징어무침 반찬도 찬 음식이다. 조선반도는 산이 많아 산나물도 굉장히 많다. 산나물을 더운물에 데쳐서는 식혀서 여러 가지 양념에 무쳐 먹는데 역시 찬 음식이다. 특히 오이, 고추, 파, 배추 등 여러 가지 야채는 날 것 그대로 장에 찍어 먹는다. 찬 음식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우리민족의 밥상은 이렇듯 찬 음식이 많고 뜨거운 음식은 한두 가지밖에 없다. 냉수에 찬 음식, 찬 술을 마시는 것은 전형적인 냉식이다. 내가 1980년대 초반 장춘에서 공부할 때 있었던 일이다. 한 주 네 끼만 쌀밥을 먹고 나머지는 밀가루 음식이어서 조선족음식습관에 맞지 않아 배고픈 고생을 참 많이 했다. 가끔 집에서 갖고 간 누룽지를 뜨거운 물에 담가 먹는 것이 생활개선이었다. 가을철 학교식당에서 겨울음식장만을 위해 배추를 학교운동장에 말렸다. 조선족학생들이 뜨거운 물에 담근 누룽지에 배추를 훔쳐 기숙사에서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 별미였다. 이를 목격한 한족학생들이 마치 우리조선족을 야만인 대하듯 이상한 눈길로 바라본다. “배추를 날것으로 먹는 것을 머리에 털이 나 처음 본다.” “그렇겠지, 너의 민족과 우리민족이 음식습관이 다르니까.” 이런 대화가 오갔고 우리조선족이 하도 맛있게 먹으니 걔들 입에 군침이 돌고 있었다. 먹어보고 싶어 하면서도 “배추를 날것으로 먹으면 배탈이 나지 않느냐? 균이 살아 있을 텐데.” 말이 많았다. 결국 한 학생이 먹어보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먹더니 맛이 있다고 엄지를 내민다. 왜 조선반도는 ‘냉식’, 중국인은 ‘열식’을 즐기는 음식문화가 생겨났을까? 조선반도는 산이 좋고 물이 좋다. 기후가 좋고 바다에 둘러 쌓여 공기도 맑고 좋다. 수질이 좋고 공기가 좋으니 야채나 산나물을 날것으로 먹어도 탈이 없다(조호길 선생의 지적). 조선반도는 또 예로부터 사계절이 분명하고 산천이 아름다워 ‘풍류’에 집착해왔다. 바람의 특징은 시원하다. 시원한 바람의 특징이 몸에 배인 조선반도 사람은 냉수를 마시면 시원한 느낌이 들어 곧 잘 마신다. 세상에서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 시원하다고 표현하는 민족은 조선민족밖에 없는 데 역시 바람의 시원한 원리에 따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반도 사람은 바람문화가 몸에 배어 시원한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음식문화도 역시 냉식을 즐긴다. 중국인이 냉수를 마시지 않는 것은 수질이 나쁜 이유도 있겠으나 냉수가 위에 들어가면 몸이 차지고 따라서 여러 가지 질병을 유발하기 쉽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반도 사람은 시원한 복장을 선호한다. 전통복장인 치마저고리가 유력한 증거이다. 이른바 한복이라 부르는 치마저고리는 디자인이 널찍한 것이 특징이다. 바람문화로 인하여 몸이 시원해야 생식력이 강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중국인이 조선족을 욕하는 말, ‘따쿠당(大褲襠)’은 확실히 바짓가랑이가 널찍하다. 널찍하다 못해 무릎까지 드리운다. 중국어로 ‘따쿠당’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왜 우리선조들이 바짓가랑이를 그토록 널찍하게 디자인하였을까? 바람문화 때문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통해야 거시기가 항상 정력왕성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남자들이 아직도 한겨울에 내복을 입지 않는 관습이 곧바로 이런 맥락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민족은 남자들이 주방에 얼씬거리는 사내를 영 못 마땅하게 여기고 바보 취급하는 것은 유교적 남존여비에 의해 그렇다고 믿는다. 사실 유교적 영향을 받기 썩 이전부터 조선반도는 사내들이 주방출입을 매우 꺼렸다. 도대체 무슨 이유였을까? 바로 주방엔 불이 있다. 사내 거시기가 불에 쬐이게 되면 정력이 떨어진다고 믿은 데서 비롯된 관습이었다. 중국인의 두터운 솜바지는 이른바 열복이다. 열복은 행동이 몹시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 열복을 즐겨 입는 관습은 역시 몸을 따뜻하게 굴어야 여러 가지 질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중국인은 우리민족에 비해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노인이 적고 고혈압 때문에 오는 여러 가지 질병도 적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산후병을 앓고 있는 부녀가 조선민족부녀들에 비해 현저하게 적은 것이 사실이다. 특수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중국여성의 산후조리는 아마 세상에서도 으뜸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따져 이폐가 어떠한지를 차치하고 일단 그들의 정성 하나만 정말 탄복한다. 중국부녀들이 분만하면 100일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이 드러누워 몸조리 한다. 먹는 것도 말 못할 정도로 잘 먹는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도 돼지고기 반 체, 계란 500개는 기본이다. 조선부녀들이 분만하면 기껏해야 돼지 족발 몇 개, 계란 이삼십 개, 미역 둬 근이면 족하다. 하늘과 땅 차이가 나지 않는가! 조선부녀들은 한 달 지나기 바쁘게 밥도 짓고 빨래도 한다. 중국부녀들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한 달이 아니라 곱하기 셋이 지날 때까지 황후보다 더 대접받는다. 조선부녀들은 한 달이 지나기 바쁘게 남편들이 참지 못하고 덮치는 데 비해 중국부녀들은 100일 동안 남편이 곁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한다. 남편들이 그동안 아예 덮칠 엄두도 못 낸다. 유태인의 율법보다 더 철저하게 지킨다. 남편들이 참지 못하니 시중들러 온 처제와 그 짓거리 한다. 그래서 중국인 속담에 ‘처제는 절반 엉덩이’라는 말이 있다. 열수를 마시고 열식을 먹고 열복을 착용하는 중국부녀들의 몸이 냉수를 마시고 냉식을 먹고 시원한 한복을 입는 조선민족부녀들에 비해 몸이 따뜻할 것이란 인식이 틀리지는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두 민족의 생활관습에 의해 추리하면 “조선여자의 거시기는 차고 중국여자의 거시기는 따뜻하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나의 ‘논리’를 괴변이라 몰아붙여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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