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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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재한조선족유망직종은 관광통역안내사 댓글:  조회:6630  추천:25  2012-03-01
 코리안드림이 20년이 넘었다. 20살이면 성인이지만 재한조선족사회는 아직도 유아기에 처해 있다. 무슨 말이냐? 현재 고국한국에 귀화자를 포함해 53만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연길시의 인구를 넘어서는 거대한 집단이다. 그러나 절재다수가 어렵고, 힘들고, 더럽고, 이른바 3D업종, 음식점, 가사도우미 등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 직종들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겠으나 한마디로 말하자면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다. 그래서 재한조선족사회는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외국인 100만 명의 시대를 맞이했고 다문화사회라고 말한다. 100만 명 중 조선족이 절반을 차지한다. 그러나 2011년 한해 정부가 다문화지원에 퍼부은 돈이 2,800억이 되는데 조선족한테 배정된 금액은 고작 1,200만원뿐입니다. 이래저래 동포로서의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만날 남만 탓하고 살아갈 것인가? 재한조선족사회는 스스로 도약하여 가치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땅에서 머리 들고 떳떳이 살아갈 수가 있다. 가치를 어떻게 높일까? 밑바닥 인생에서 탈피해 차원이 높은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 즉 현재와 미래에 비전이 있는 유망직종에 종사해야 한다. 미래유망직종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조선족이 한국 땅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유망직종이 곧 가이드이다. 조선족은 중국어를 잘하는 유리하고 훌륭한 무기를 갖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무기라도 써 먹지 못하면 폐물에 불과하다. 대동강이 팥죽이라도 곰방술을 들어야 먹는다. 가마목의 소금도 쥐어 넣어야 짜다는 속담이 있다. 재한조선족은 이젠 곰방술을 들 때가 되었고, 소금을 쥐어 넣을 때가 되었다. 지구촌이 점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관광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한국 노태우 전 대통령의 어의를 맡았던 한성호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2015년이면 세계는 곧 중국인의 것이 될 것이다. 즉 해외 화인화교가 5,500만 명에 1억 명의 중국인 관광객이 세계를 누빌 것이니 지구촌은 중국인의 천하가 될 것이다.” 2011년 중국인관광객이 한국에 온 수는 220만 명이다. 조만간에 500만 명의 시대가 곧 도래 할 것이다. 중국은 한국과 거리도 가깝고, 비용도 저렴하고, 인민폐가 가치 높고, 문화적으로도 같은 한자와 유교문화권에 속해 있고, 한국은 예로부터 3천리 금수강산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앞서 있기 때문에 한국이란 나라는 중국인에게 관광지로서 매력적이다. 뿐만 아니라 동남아 화교문화권(홍콩, 마카오, 대만, 싱가폴, 말레시아)이 한국에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현재 한국엔 중국어 가이드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시장원리로 말하자면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엄청 딸린다. 자격증만 있으면 취직은 걱정 안 해도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가이드 하려면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차를 운전하려면 면허증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도리이다. 유망직종의 면허를 따려면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투자는 물질양면으로 이뤄져야 한다. 즉 학비를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시간투자는 결국 정신투자이다. 정신투자는 곧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다른 말로 바꿔하면 노력이겠다.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이뤄지는 일은 결코 없다. 가이드시험은 국사, 자원해설, 개론, 법규 등 네가 과목이 있다. 학습시간은 5개월이며 해마다 4월과 9월 두 기에 나눠 시험이 있다. 노력만 하면 자격증을 충분히 취득할 수 있다. 가이드 하려면 열정이 높아야 하고, 눈치가 빨라야 하고, 화술이 좋아야 한다. 이것이 가이드자격의 3대 자질이다. 이 3대 자질을 갖춘 재한조선족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가이드 자격증을 취득하여 돈도 벌고 가치도 높여 떳떳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59    '황제와 소녀' 창작에 대하여 댓글:  조회:6765  추천:5  2012-02-28
요즘 나의 장편역사소설 가 조글로문학에 오르자 독자들께서 편역이냐? 창작이냐는 시비가 있는데 저자로서 어떤 방식의 논의든 모두 반갑게 생각한다. 중국고전 도교계열작품 중 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인간의 성교행위를 타고난 본능이란 차원을 넘어 양생지도의 의미를 담은 의서이다. 중국과 일본에선 이 책이 꽤 유명세를 탔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예로부터 전해져왔고 현재 나이 40대 이상 남자들은 이 책을 보지는 못해도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내가 이 책을 장편역사소설로 만든 계기는 이렇다. 2005년 여름 한국에서 유명한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중국고전 한국어번역본을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책을 펼쳐보니 번역이 영 말이 아니게 오류투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국도교학회 회장 최창학 교수가 번역하였는데 이를 테면 ‘立刻’을 ‘세워서 조각하다’는 천자문식으로 직역하다보니 번역이 영 엉터리다. 출판사 사장과 어렵사리 연락이 닿아 “내가 다시 번역하겠노라.”고 제안했다. 사장 왈, “이미 최교수한테 번역비를 600만원 지출했는데 자그마한 출판사로서 다시 번역비를 지출하기가 버거우니 험한 곳만 손을 봐 달라.” “알았다. 그럼 그렇게 하자.” 이렇게 되어 600여 곳을 손을 보아 재판에 ‘김정룡 정정’으로 시중에 발간되었다. 5년 세월이 흐른 2011년 3월경 한국 그린나래출판사 사장과 우연한 자리에서 위 이야기를 했더니 다시 번역을 하라고 제안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그 이유로서 중국고전 은 소설이 아니라 서술과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어 영 딱딱해 시장성(상품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럼 스토리를 구성하여 재미가 있는 소설로 만들어보라.”고 사장이 걸고넘어지는 것이었다. 욕심이 났지만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설을 써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 이도 안 나고 콩밥 먹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세상엔 처음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다음이란 것이 있지 않겠느냐. 엤다, 모르겠다. 한 번 시도해 보자. 이렇게 해서 나의 장편역사소설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집필을 시작해서 6개월 뒤인 2011년 10월 나의 장편역사소설 가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책 제목이 이기 때문에 고전의 성교지식과 내용을 바탕으로 5천 년 전 黃帝와 素女의 사랑이야기를 스토리로 구성하여 성을 위주로 다룬 것이며 그 당시 샤머니즘을 포함한 역사문화이야기를 많이 담았고 지금까지 흘러내려온 민간속설들을 스토리를 통해 다뤘다. 문학은 허구를 허용하는 만큼 스토리 구성 7할 내지 8할이 허구이며 소설의 짜임새를 위해 역사전설과 다르게 만든 것들도 있다. 예하면 소녀는 복희씨 유모의 딸로 전해져왔지만 나는 소녀를 서왕모의 딸로 취급하였다. 이렇게 해서 는 단순한 성 가이드북을 뛰어넘어 재미있는 스토리와 함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성의 의미와 기술을 들려준다. 주인공인 황제 헌원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또 그의 파트너인 소녀(아소)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통해 원시 인류가 어떻게 성에 눈뜨고 즐기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아울러 농사와 의학의 발견, 결혼제도의 창시와 부족 간의 충돌, 헌원의 중원 평정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렇듯 방대한 내용을 한 편의 소설에 담아내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나는 과거 칼럼을 많이 썼을 뿐 문학엔 까막눈이었기 때문에 소설을 펴낸다는 것이, 그것도 단편이 아니고 장편소설을 짓는다는 것이 어지간히 벅찬 일이 아니었다. 우리 속담으로 쉽게 말해서 이도 안 난 녀석이 콩밥 먹으려 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한국출판사 사장이 눈이 멀었는지, ‘초’자인 나한테 미리 계약금까지 지불해주면서 쓰라고 했다. 거금은 아니었지만 머리에 털이 돋아 처음 써보는 장편소설인데, 그것도 현대소설이 아닌 역사소설인데 계약금을 받고 집필에 들어가게 되어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한편 미리 계약금을 받았기 때문에 잘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속박되어 최선을 다 하는 동기가 되었다. 내가 자신 있게 달려들었던 것은 고대역사문화, 샤머니즘, 종교, 민간속설에 대한 지식을 널리 섭렵했기 때문이었고 또 한국에서 등 문언문으로 된 고전을 깊이 파고들어 중국고전이해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조선족문학사에서 나는 중국고전을 문학이란 장르를 통해 해외에 알리는 작업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58    중국과 조선족을 비하하는 한국작가 댓글:  조회:7788  추천:36  2009-03-02
중국과 조선족을 비하하는 한국작가 한국작가 박명호 씨가 <만주일기>를 한국 내 모 신문과 사이트에 연재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의 글 제6편(심양과 봉천의 아이러니)을 보고 저자는 중국을 모르면서 주관억측으로 중국을 비하하는 형편없는 글이기에 <<코미디 같은 글>>이라 비판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그가 조선족을 비하하는 느낌이 들어 또 싫은 소리를 해야겠다. 아래 <만주일기> 제21편(하리파인-용정 외이담) 중의 일부를 발췌한다. 한족 아가씨 "개조지 쓰지마!"- 조선족 노인 "젊은 처자가 욕지거리를 …" 말과 문화 다른 이민족끼리 섞여 살며 웃음 참지 못할 해프닝 일상화된 용정 용정은 이민족인 한족과 어울려 살다 보니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해프닝도 많다. 그 재미있는 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한다. ■해프닝 하나 한 여인네가 빈 소달구지에 딸을 태우고 가고 있었다. 이웃에 사는 한족 사내가 5위안을 내밀며 소달구지를 좀 빌려 달라고 했다. 소달구지는 한족말로 '처뉴(車牛)'였다. 한족말을 전혀 모르는 여인네가 듣기에는 '처녀', 곧 딸을 빌려 달라는 줄 알고 너무 어이없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족 사내는 돈이 적어서 그러는 줄 알고 자꾸 따라오더니 10위안을 내밀며 '처뉴'를 빌러 달라고 했다. 결국 참지 못한 여인네가 한족 사내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해프닝 둘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서로가 채소를 사려고 이리저리 밀치고 있었다. 조선족 여인네 뒤에 있던 한족 사내가 그 여인네의 어깨를 살짝 치면서 '빼조지, 빼조지' 했다. 화가 난 조선족 여인네가 누굴 희롱하느냐며 달려들었다. 그것은 '서둘지 말라(別着急)'는 한족말이었다. ■해프닝 셋 주로 조선족 노인들만 탄 버스가 산골 마을에서 장날 시내로 가다가 갑자기 고장이 났다. 버스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이래저래 손을 써보지만 쉽게 해결되지가 않았다. 시간이 급한 노인 승객들의 원성이 높아갔다. 보다 못한 한족 차장 아가씨가 "따쟈, 빼조지" 했다. "여러분, 서둘지 마세요"라는 말인데 한족말을 모르는 노인네들이 듣기에는 욕으로 들렸다. '저 간나 봐라. 뭘 따고 뭘 빼?' 아니래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노인들은 새파란 젊은 차장 아가씨에게 욕까지 먹었으니 감정이 격화돼 삿대질을 했다. 갈수록 태산이라 한족 차장 아가씨는 더 큰소리로 "개조지 쓰지마!"라고 외쳤다. 그 문장은 "오히려 바쁜 사람은 운전기사입니다"라는 뜻인데 결국 노인들에게는 더 심한 욕설이 되고 말았다. '개 무엇이 쓰다'라고?' 그제는 노인 승객들이 차장 아가씨에게 달려들어 큰 소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필자는 중국에서 살아오면서 소달구지(소수레)를 ‘車牛’라 부른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한국에 있는 주변 한족과 조선족들에게 ‘車牛’라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자문을 구해보았으나 모두 처음 듣는 소리란다. 박명호 씨는 중국용정에서 조선족들한테서 들은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내고 있으며, 이는 분명히 조선족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의미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해프닝 둘과 셋, 그리고 한 조선족 할머니가 시장에서 닭을 팔고 있는데 한족할아버지가 닭 값을 물으니 “니디 이양디 우쾌이, 워디 이양디 싼쾌이”라는 이야기는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을 수도 있겠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한족과 어울려 살면서 언어소통장애를 상소리로 웃기는 말을 지어낸 것으로 알고 있으며, 결국 이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데 일상화된 해프닝이 아니며, 이러한 이야기는 용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연변조선족사회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저자에게 충고하고 싶다. 중국과 조선족사회에 대한 글을 쓰려면 많은 공부를 해야지 그렇지 않고 주관억측이나 개인감정으로 써낸다면 결국 한국사회에 중국과 조선족 이미지가 흐리게 되고 중국과 조선족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것을.
57    천주교와 기독교의 구분 댓글:  조회:7777  추천:44  2009-02-05
천주교와 기독교의 구분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황하대륙에서 한 때 ‘멸종’했던 종교가 개혁개방의 흐름을 타고 부활하고 있으며 현재 전통종교인 불교(後漢시기 중국에 유입되었음)와 도교가 주류이고 천주교와 기독교가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천주교와 기독교는 완전 다른 종교라 인식하거나 같은 종교이지만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 필자가 알고 있는 바를 나열해 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주교와 기독교는 모두 예수교로서 본래 뿌리는 크리스트교(기독교)이고 같은 <<성서>>를 사용하고 있지만 교리교의해석과 예배의식상에서 차이가 많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크리스트교(기독교)의 유래와 전파 및 교파 분리과정을 살펴보자. 크리스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구세주)란 뜻이며 2,000년 전 멸망에 직면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망명 간 유태인들이 민족을 구해줄 메시아를 바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라는 인물을 각색해냈고 하나의 ‘종교’로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는데 당시 예수교는 유태인 내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사도바울에 의해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이방인의 세계 즉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전체 유럽에서 자리매김 되었고 세계종교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크리스트교는 본래 그리스를 중심으로 동유럽 러시아에까지 뻗어져 나아간 것을 동방정교라 하고 이것이 정통인데 유럽에서 정치적으로 서로 갈등이 생기면서 로마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보편적이라는 뜻)이 분리되어 하나의 교파를 형성했고 서유럽이 동유럽보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크리스트교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AD324년 로마제국이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정함에 따라 전체유럽에 급속히 전파되었고, 그 후 천여 년의 유럽을 신이 통치하는 암흑시대라 말한다. 1517년 독일인 말틴·루터가 종교혁명을 일으켰는데, 그 배경은 로마교황청이 죄를 지은 사람은 면죄를 받고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이른바 면죄부를 팔아먹는 것이 크리스트교의 윤리에 어긋난다고 루터가 저항했고 종교를 개혁한다는 의미로 이른바 프로테스탄트교(개신교)를 설립한다. 후에 캘빈이 루터의 손을 들어주고 교리교의 확립작업을 한다. 최초 히브리어로 된 <<성서>>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고 후에 가톨릭의 <<성서 >>는 유태인의 역사인 구약46편에 예수생애를 반영한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를 위주로 여러 편지들로 묶여진 신약27편 총 73편인데, 개신교의 <<성서>>는 구약37편에 신약29편 총 66편으로 되어 있다. 다음 크리스트교가 동아세아에 전파된 과정과 종교 명칭을 살펴보자.당나라 때 지금의 이란을 거쳐 크리스트교의 한 개 교파인 일명 경교(景敎)가 장안에 들어왔고 교회도 세웠고 신도도 수 천 명이 되었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이 크리스트교가 동아세아에 가정 먼저 들어온 사례이다. 강희 연대에 이탈리아 천문학자이자 가톨릭 신부인 마테리오치(중국 명 利瑪竇)가 북경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하는 동시에 중국의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 서양에 전했고, 크리스트교를 중국에 전파하는 데는 <<성서>>를 한어로 번역하는 작업부터 착수했다. 당시 그가 ‘하느님’을 한어로 어떻게 옮겨야 하는가는 문제에 봉착했는데 기왕에 중국에 上帝라는 개념이 있으나 어쩐지 신통치 않게 느껴져 결국 ‘하늘의 주인’이란 의미로 ‘천주’라 번역했고 이에 따라 중국에서는 크리스트교를 천주교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 초반부터 미국과 유럽의 개신교 목사들이 대량 중국에 밀려들면서 기왕의 천주교와 구분하는 의미로 개신교를 기독교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고 이 케이스가 한반도에 전파되었다.천주교와 기독교는 본래 같은 크리스트교(예수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고 눈에 보이는 간단한 차이점들을 말하자면, ㄱ.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동아세아에서 가톨릭을 천주교,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를 기독교라 부른다. 천주교를 舊敎, 기독교를 新敎라 부르기도 한다. ㄴ. 하느님과 하나님중국에서는 천주교의 하느님을 ‘천주’, 기독교의 하나님을 ‘상제’라 부른다. 한반도에서는 천주교는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이라 부르는데 사실 우리말 하나님은 어법에 맞지 않는 것이지만 개신교에서 유일신을 주장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신이라는 뜻으로 하느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다(여호와, 알라 , 천주, 상제 혹은 하느님, 하나님 등 그 어떤 호칭으로 부르든 신은 하나이다). ㄷ. 신부와 목사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교단의 설교자를 천주교는 신부, 기독교는 목사라 부른다. 신부는 장가를 가서는 안 되지만 목사는 일반인과 같이 장가도 가고 애새끼도 낳을 수 있다. 신부가 장가를 가지 않는 이유로서, 첫째 하느님도 독신이고 예수도 독신이기 때문이고, 둘째 범인(凡人)이 하는 일(섹스를 추잡스런 일로 여김)을 내가 하지 않으므로 초인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고, 셋째 가정을 이루면 신성한 이미지에 짐이 된다는 것이다. ㄹ. 성당과 교회신도들이 모여 설교를 받는 곳을 천주교는 성당(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성스러운 곳), 기독교는 교회(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이는 곳)라 부른다.성당은 정문을 들어가면 성당건물 옆에 예수의 엄마인 마리아상이 있고 신도들이 먼저 마리아에 향해 십자를 긋는 굿을 한다. 교회건물엔 마리아상이 따로 없다.성당 건물 문 앞에 물 항아리가 있고 신도들은 그 물을 손가락에 뭍이고 십자를 긋는데 이는 손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성당 밖은 더러운 俗世이고 성당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곳 聖世이기 때문에 속세로부터 성세에 들어가자면 반드시 세례를 뜻하는 정화의식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회는 이러한 의식이 없다. 천주교 여신도들은 성당에 들어가서 반드시 머리에 베일로 얼굴을 가려야 하는데 이는 여성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자식이 아니고 직접 하느님의 영광을 받을 수 없는 천한 존재라는 의미로 유래된 것이지만 현재도 이 룰을 고수하고 있다. 또 여신도들은 치마를 입고 성당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교회는 여신도들이 베일을 쓰지 않는다. 성당에서는 신도들이 포도주와 빵을 맞보는 의식이 있는데 이는 포도주는 예수의 피, 빵은 예수의 살을 상징하며 이것을 먹고 마시므로 하여 나와 예수는 동일체가 되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일부교회에도 이러한 의식이 있다. 그리고 밥상에 마주 앉아 십자를 그으면 천주교 신도이고 눈을 지그시 감고 뭐라 중얼거리면 기독교신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를 후세 크리스트교인들이 세로는 하나님과 신자들의 수직관계를, 가로는 인간의 평등을 의미하고 어쩌고저쩌고 해석하는데, 플라톤 시대의 십자가는 네 끝이 각기 흙, 물, 공기, 불 등 자연을 형성하는 네 가지 기본원소를 뜻하며 이는 흙은 인간의 육체적 단계, 물은 심적 단계, 공기는 영적 단계, 불은 영지적 단계를 상징하며 한 단계씩 승화하여 최후 구원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연구가들은 최초 크리스트교가 플라톤시대의 십자가를 빌려다 써먹었는데 후세 크리스찬들이 본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제멋대로 풀이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천주교는 각종 전통예배의식을 고수하고 있는데 반해 기독교는 ‘거추장스러운 의식’들을 제거해 버렸다. 천주교는 아직도 교리교의를 중심으로 설교를 많이 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예수만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죽는 사람도 살아나는 등 복을 많이 받는다는 이른바 祈福신앙이 위주이다(한국과 연변의 경우 더욱 심하다). 예수만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주장이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본래 유대인이 최초 크리스트교를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영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했고,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전도할 때도 영지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지주의란 무엇인가? 영지는 한자로 靈知라 적는데 말 그대로 영적으로 앎(깨달음)을 뜻한다. 영지주의란 쉽게 말해서 그냥 무턱대고 무작정 믿지 말고 영적인 경지에 도달해야만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최초 영지주의 크리스트교인들은 교회가 따로 없고 여럿이 모인 곳을 아무장소 관계없이 교회로 삼고 지정된 목사도 따로 없고 서로 번갈아가면서 목사를 하고 전도사를 하고 집사를 하고 하면서 아주 민주적이었으며 참말로 영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다가 로마를 중심으로 서유럽 쪽으로 전파됨에 따라 크리스트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교회에 권위를 부여하고 <<성서>>에 의문이 있으면 절대 용납하지 않고 무작정 문자 그대로 믿기만 하라는 쪽으로 흘렀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으라는 것을 문자주의라 하는데 이는 영지주의와 대조되고 상반되는 뜻에서 나온 개념이다. 사실 <<성서>>도 인간이 지어냈으면서도 불구하고(신약성서는 AD2세기경 완성되었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의를 갖지 말고 무작정 믿으라는 것이 문자주의이다. 문자주의자들이 한 술 더 떠 예수만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본래 최초 크리스트교의 영적인 구원의 취지에 위배된다. 따라서 영지주의는 문자주의광신도들에 의해 역사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AD645년 모하메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했는데 그 뿌리는 역시 아브라함이고 <<코란(받아 적으라는 뜻) >>의 전반 부분은 크리스트교의 구약성서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이 세 종교의 뿌리는 하나라는 뜻이다. 뿌리가 하나인 세 종교는 역사적으로 서로 적대관계로 수 없이 싸워왔다. 최초로 크리스트교와 유대교의 싸움은 크리스트교권에서 세상의 구세주인 예수를 죽인 유대인은 하나님의 역사(구약)를 이어받을 자격이 없고 마땅히 죄 값을 치러야 한다면서 유태인을 심하게 박해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조상을 모시고 살지만 땅 싸움을 수 없이 해왔고 현재도 싸우고 있고, 유대교는 아예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데 비해 이슬람교는 예수를 그저 설교를 괜찮게 하는 랍비(신부, 목사) 정도로만 인정한다.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는 중세기 200년 전쟁을 할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이슬람교는 ‘알라’신 하나만 믿는데 반해 크리스트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주장하고 예수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받드는데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트교가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미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두 종교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생겨날 때는 하나이지만 후에 추종자들에 의해 수 없는 교파와 종파가 생겨났다. 불교는 소승불교(남아, 동남아)와 대승불교(동북아)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 교파가 있고 조계종이요 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종파가 있다. 이슬람교는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고, 크리스트교는 크게 동방정교, 가톨릭(천주교), 개신교(기독교) 등 세 개 교파 로 나누고 각기 내부적으로 또 수 없는 종파가 생겨났는데 전하는데 의하면 모두 4만 7천여 개 종파가 있다고 하며 각 종파마다 자기네들이 정통이고 다른 종파를 이단이라 주장하고 또 교회마다 자기네들만 정통이고 다른 교회를 모두 이단이라 선전하면서 신도를 긁어모으기에 분주하다. 본래 본 주제를 갖고 책 한 권 분량의 정도로 풀이해야 하는데 편폭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데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필자는 그 어느 종교도 믿지 않는 무신론자로서 다만 역사문화공부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세계 주요종교에 대한 공부도 따라서 하게 되었을 뿐이다.  
56    조국이란 뜻을 알고 살자. 댓글:  조회:7709  추천:43  2009-01-18
조국이란 뜻을 알고 살자.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현대사는 역사다.”고 말했는데, 뜻인즉 오늘의 우리의 삶은 역사의 관성 속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왕조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삶을 형성시킨 문화 역사를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왕조역사 따위엔 관심이 없고 문화역사에 관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여기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국이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국이란 ‘祖’는 본래 갑골문의 표기에 의하면 ‘且’로 되어 있으며 이는 본래 남자의 성기인 남근을 뜻한다. 이는 김정룡의 외설이 아니라 갑골문연구 전문가였던 곽말약의 이론이며 현재 중국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연세대 중문 학과 최영애 교수는 “음운학적으로 조상의 ‘조’는 남근의 속어 ‘좇’ ‘조지’와 연관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혼이란 ‘혼’자는 본래 양기와 음기가 만나는 황혼 무렵에 혼례식을 거행한다고 해서 황혼이란 ‘昏’인데 후세 사람들이 여자 변을 붙여 ‘婚’자로 되었듯이, 조국이란 ‘조’자도 남근을 상징하는 상형문자인 ‘且’인 것에 후세 사람들이 볼 시(示) 변을 붙여 ‘祖’로 되었다. 왜 볼 示를 붙였을까? <<설문해자>>에 의하면 ‘示’는 갑골문에 위에 가로 ~의 모양은 하늘을 뜻하고 하늘에서 뭔가 내려오는 뜻을 나타내는 세로 세 줄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따라서 볼 시 변이 붙은 ‘祈’禱’福(제사 음식)’禮’ ‘社’ 등 모든 글자는 종교적 의미가 있다. ‘祖’는 어떤 종교적 의미가 있는가? 옛날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고 사당 안에 남근의 모형 ‘且’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데 제사의 대상이 곧바로 ‘且’이며 이것이 곧 ‘祖’이다. ‘祖’는 ‘石祖’ 혹은 ‘陶祖’가 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성을 금기시 하는 바람에 ‘石祖’ ‘陶祖’가 ‘木牌’ 혹은 ‘石牌’로 바뀌었다. ‘祖’는 조상을 뜻하며 조상숭배는 곧 남근숭배이고 조상문화는 중국과 한반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모든 일은 조상과 가문의 영광을 빛내기 위해서이고, 심지어 남녀가 좋아서 결혼해도 가문을 잇기 위해서이고 아이를 낳아도 조상을 위해 대를 잇는 것이라 하고, 사업이 실패하면 조상을 욕되게 했다고 탄식한다. 그렇다면 ‘조’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조’는 부계 씨족사회의 성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토템이 ‘조’로 바뀌었던 것이다. 하나의 새로운 씨족이 출현하게 되면 가장 중요한 일이 곧 조상의 사당을 세우는 것이며, 이 조상의 사당을 중심으로 족장이 씨족을 거느리고 주거했고, 이 주거지를 ‘籍’이라 하는데 중국에서는 ‘祖籍’이라 하고 한국에서는 ‘본관’이라 부른다.또 사당을 중심으로 군주가 백성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형태를 ‘國’이라 했고, ‘국’은 ‘조’로 인하여 생겨났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조국’이란 말이 이렇게 생겨났다. 이는 역사적 맥락의 거시적인 개념이고 우리 개개인은 할아버지(조상) 나라를 ‘조국’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라마다 공동조상을 신화 혹은 신화적으로 지어내고 이를 구심점으로 백성을 뭉치게 만들었다. 삼황오제요, 태양신이요, 단군이요, 아브라함이요 모두 ‘조국’이란 개념을 위해 생겨난 것이라 이해하면 된다. 웃기는 것은 남근을 의미하는 ‘조국’이란 말은 있어도 나는 분명 아버지 남근에 의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父國’이란 말이 없다는 것이며, ‘국’은 본래 ‘조’로 인하여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부국’이 아닌 ‘母國’이란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姓’은 여성이 낳는다는 의미로서 ‘성’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본래 ‘성’은 여성을 따르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다(<성과 씨의 구분> 글 참조) . 인류역사를 모계사회와 부계사회로 나누는데, 시간적으로 보면 하루 24에 비유해 부계사회는 근근이 23시 59분 59에 해당되도록 극히 짧다. 비록 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남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모계사회잔재를 없애려고 발버둥 쳐 왔고, 큰 성공을 이루었다. 하지만 ‘姓’이란 글자가 보존되어 왔듯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모계사회에서 아이들은 엄마만을 알고 아버지는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았다. 부계사회에 들어 주나라 초기 첫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불분명하다고 殺首子란 관습이 있었듯이 사실 아이란 낳아준 엄마는 분명하지만 아버지는 불분명한 것이다. 일부일처제가 실시 된지 오랜 현재도 많은 아버지들은 아이가 나의 아이인지를 의심하면서도 어영부영 살아가는 현상들이 존재하고 있다. 또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젖을 먹여 키우고 말을 배워주고 입히고 하는 것이 엄마이기 때문에 나를 낳은 실체로서 엄마는 확실하지만 아버지란 존재는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 온다. 엄마는 땅과 같은 존재로서 땅은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엄마라는 실체는 변함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 개인이 나라라는 개념과 연관될 때 내가 몸담고 살고 있는 실체인 국가를 말하자면 ‘조국’이란 개념은 막연한 느낌이고 ‘부국’이란 말을 쓰지 않고 ‘엄마의 나라’라고 표현한다. ‘엄마의 나라’인 ‘모국’이란 개념 속에는 국에 대한 개인의 애정(민족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과 자녀교육이란 큰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 조선족을 예를 들어 말하자면 조선말을 할아버지 나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엄마의 혀를 통해 배웠다. 영어로 모어를 ‘엄마의 혀(마더팅)’라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기본언어를 엄마의 혀를 통해 배운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언어를 비롯해 여러 기초적인 교육은 엄마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유태인은 해외거주하고 있는 동포가 이스라엘국적을 신청할 경우 부모 양방이 모두 유태인이면 시험을 면제하고, 가령 엄마가 유태인이고 아버지가 이민족이면 시험을 면제하지만 아버지가 유태인인데 엄마가 이민족이면 반드시 시험을 봐야 하게끔 정책으로 규정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세아 국가들에서는 귀화문제에 있어서 아버지 혈통이 우선인데 비해 유태인은 자녀교육의 주체가 엄마라고 엄마의 혈통을 더 중요시하는 이 규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모국’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55    유태인은 좋은가? 나쁜가? 댓글:  조회:7885  추천:65  2009-01-09
유태인은 좋은가? 나쁜가?   김정룡 kzl0917@naver.com    중국학자들은 20세기는 두 유태인 간의 대결이었다고 말한다. 뜻인즉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대표적 인물인 칼·맑스와 자본주의진영을 대변하는 예수(종교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의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와 칼·맑스 외에도 19세기와 20세기 근 200년 역사무대에 등장한 막스·베버, 니체, 아인슈타인, 챠플린, 키신져 및 노벨과학상 수상자 12%를 점한 유태인을 포함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인재들이 많다. 이런 명백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총명하고, 똑똑하고, 장사 잘하고, 어쩌고저쩌고 특수민족이라 하면서 침이 마르도록 유태인 찬양에 나서고 있다. 허나 최근 구미일부에서는 유태인은 질적으로 나쁜 사람들이라는 평가도 있으니 이들의 견해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필자는 이 글을 쓴다. 한 민족을 평가함에 있어서 우리는 근래에 보이는 현상만 논하지 말고 그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현존해 있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민족 치고 2000년 전의 正史만 있고, 그 후 2000년 동안 자기네들의 正史가 없는 것이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유태인이다. 구약성서(실제로 유태인 역사서인데 기독교인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세기부터 유태인의 역사라 하지만 실제로 유태인의 정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지금의 이라크 한 시골마을에 아브라함이라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하루 밤 잠결에 하나님이 나타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가 정착하면 너의 후대들이 번창해진다.”는 계시를 준다. 이튿날 아브라함은 즉시 행동에 옮긴다. 이른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를 끼고 농사를 지어먹을 만한 땅인데 지금의 팔레스티나 땅이다. 아브라함은 우리 단군과 비슷하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정착하여 건국한다. 그런데 후대들이 번창해 질 것이란 하나님의 계시와 달리 그가 환갑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토착 여종과 잠자리를 해 이스마엘이란 남아를 보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정실의 자식이 아니기에 계약을 맺을 수 없다고 생떼를 쓴다. 이스마엘이 14살 되던 해 아브라함은 다행으로 100세 가까운 노년에 본처와 이삭이란 아이를 낳는다. 본처와의 자식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자 여종과 이스마엘은 쫓겨나게 되었고, 이들의 후대가 아랍민족으로 되었고 이삭의 후대가 유태인이 된다. 이것이 유태인과 아랍민족 사이 반목의 단초가 되었고, 그 싸움이 4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아랍민족은 자기네가 아브라함의 장자직속후손들이고 팔레스티나 땅은 당연히 우리 것이라는 주장이고, 유태인은 자기네가 아브라함의 적통후손들이고 팔레스티나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의 싸움은 형제간의 다툼인 셈이다. 이 ‘쟁젼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히 훑어 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를 끼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중간 지점에 있는 나라이며 가나안, 이스라엘, 유대, 주이시, 팔레스타인 등 다양하게 부르는데 마치 조선반도를 코리아, 조선, 한국 등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두 자식을 낳는다. 유태인은 12라는 수자를 중히 여기는데 솔로몬시대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나뉘었다든가 예수의 제자도 12명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유래는 큰 원의 둘레에 12개 작은 원을 맞닿아 놓으면 큰 원과 작은 원 사이 및 작은 원끼리도 서로 변이 맞닿고 이는 인간사회 끈끈한 단합을 상징한다. 기원 전 1800년경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이집트에서 파라오왕의 오른팔 노릇을 하며 200년 동안 그의 후대가 수백만으로 늘어나자 이집트정부가 축출에 나섰고, 유명한 모세의 출애급기가 그때 있은 이야기이다. 아브라함의 후대들이 이런저런 곡절을 겪다가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 중국이 미신사회로부터 인문사회로 전화되는 주나라 건국시기와 비슷한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다윗의 이스라엘 건국이다. 다윗은 왕위를 솔로몬에게 넘겨주었고, 솔로몬이 노환으로 죽게 되자 그의 두 아들에 의해 북쪽에 있던 10개 지방이 한데 묶여 이스라엘이란 왕국이 되고, 남쪽 두 지방이 유대라는 왕국이 되어 둘로 나뉜다.이스라엘 역사는 이민족에게 정복당한 역사이다. BC922년 이집트인에게, BC732년 앗시리아에게, BC586년 바빌론에게, BC332년 그리스에게, BC198년 시리아에게, BC63년 로마에게 정복당했고, AD112년에는 유대라는 나라는 흔적도 없이 완전히 멸망한다. BC63년 로마에게 정복당하자 유대인은 세상 사방에 뿔뿔이 흩어졌고, 기원 전후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국제도시에 망명 갔던 유대지식인들이 후세에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예수라는 인물을 각색해 냈고, 이것이 후에 기독교로 발전한다. 기독교 탄생배경은 이렇다. 유대라는 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일부 지식인들이 2000년 동안 선택된 민족이라 굳게 믿었던 하나님은 어디서 잠자고 있는지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상의 메시아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고, 당시 지중해연안을 중심으로 디오니소스, 오시리스라 불리는 메시아가 성행했고,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도 메시아로 불렸는데 그들은 모두 지상에 복음을 주고 죽었다가 부활해 승천하는 기적을 일으킨다. 예수의 행적과 실로 비슷하다. 그래서 신화연구가들은 예수를 이들의 복사물이라 판단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를 만들어낸 것이 유대인들이지만 당시 유대인들 내에 먹혀들지 않았고,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시 멸망에 직면한 유대인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민족을 구해줄 메시아를 바랐는데 맥없이 십자가에 못 밝혀 죽는 예수가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금식일에도 보리이삭을 훑어먹는다든가 창녀와 허물없이 말을 주고받는 예수는 유대고유 율법으로 말하자면 법을 어기는 망나니이기 때문에 상놈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는 운이 좋게 유대계 로마인인 바울이란 인물이 나타나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는데 대성공을 이루었고 전체 유럽은 물론이고 아메리카 내지 아프리카 및 20세기에 들어 남조선 땅에서 신도를 1200만이나 확보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종교로 발전했다. 기원 324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자 그때부터 유태인 탄압이 본격화 된다. 기독교권에서 본래 도리라면 예수를 배출한 유대인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며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판에 탄압이라니? 그 내막은 이렇다. 예수는 정치적으로 로마인에게 죽음을 당했으나 종교적적으로 기독교권에서는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세주인 예수를 죽인 유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놈들이고 씨도 못 받을 종자이고, 피 값을 지불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억지 같은 주장이 중세기부터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어 유태인은 세상천지에서 혹독한 박해를 받아왔다. 고대 로마제국과 그 식민지 국가들에 사는 유태인은 자신들이 유태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가야 했다. 쉐익스피어의 <<베니스상인 >>에 고리대를 놓고 채무자가 갚지 못하게 되자 살 1파운드를 도려내는 지독한 주인공이 유태인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당시 가톨릭 나라들에서 고리대는 기독교윤리에 맞지 않는 세상에 이런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유태인이며 그들은 박해를 받아 마땅하다는 당위성을 반영한 작품이 바로 <<베니스상인 >>이다. 우리는 문학작폼을 읽으면서 그 작품이 반영된 내용만이 아니라 그 시대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맹인이 기와장 펼치는 격이 되고 만다. 기독교 한 갈래인 동유럽 동방정교국가들에서도 유태인 박해가 심했다. 그 일례로 러시아에서 1883년부터 쓰탈린 정권 전까지 다섯 차례 유태인 축출운동이 있었다.히틀러는 이런 역사적인 맥락에서 게르만민족제일주의를 표방하는데 장애가 되는 유태인을 종자를 남기지 말고 모두 말살해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도대체 무엇이 장애가 된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유태인들이 주장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네 민족만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이 괘씸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공정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만약 하나님이 진짜로 있다면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모두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태어난 것이지 특정민족만이 선택되었다는 주장은 타민족에게 미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로 살면서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이 세계1차, 2차대전을 통해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머리 좋은 자들이 자유의 땅인 미국으로 건너가 세력을 확장했고, 2차대전이 끝나자 영국의 두둔 하에 1948년 떠난 지 2000년이 지난 팔레스티나 땅에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렇다면 팔레스티나 땅은 유태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공백 땅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 땅에 2000년 동안 아랍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태인들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니 왜 유태인들과 싸우지 않겠는가? 유태인과 팔레스타인들의 분쟁의 초점은, 팔레스타인들은 자기네가 2000년 살았으니 당연히 우리 땅이라 주장하고, 유태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았던 땅에 돌아왔을 뿐이어서 정당하다는 것이며 토지문서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토지문서란 바로 인류역사이래 가장 많이 팔린 <<성경>>을 의미한다. 두 민족 간의 또 하나의 분쟁은 가자지구를 비롯한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는 땅마저 유태인들은 영토확장욕심 때문에 현재까지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전체 중동국가 아랍인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힘을 갖고 있으며 그 힘을 바로 미국이 키워주었고 핵까지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힘이 막강하다. 이스라엘은 이 힘의 논리로 팔레스타인을 압박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유태인들이 나쁜 놈들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우물에 향해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를 구한다든가, 길가에 정신 잃고 쓰러진 사람을 엎고 병원에 달려간다든가 이런 정의는 믿어도 나라와 나라 사이 민족과 민족사이 정의를 믿지 않는다. 빈곤한 사람이 금덩어리를 갖고 있다고 하자. 부자가 그 금덩어리가 욕심나서 빼앗겠는 데는 너는 나쁜 놈이라는 여론을 일으켜 명분을 얻고 나는 최신식 무기를 갖고 있는 것이 정당하고 너는 식칼도 갖지 말라 윽박지르고 나와 한 판 붙자고 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마구 갈겨대고 하는 것이 힘의 논리이고 정의를 부르 짓고 하는 것이 미국이고, 이스라엘이다. 자기네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까불고, 영국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우고, 미국을 그늘로 삼고 영토 확장에 나선 유태인이 과연 좋은가? 나쁜가?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나 개인적으로 유태인에 대해 한 가지 부러운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대교라는 종교이고 그들의 율법을 풀어 쓴 탈무드이다. 유태인은 2000년 동안 유랑민으로 살면서도 자기네들의 종교와 탈무드를 지켜왔기 때문에 오늘날 여전히 민족이 생존하고 있다. 만약 우리민족이 유태인처럼 2000년 동안 흩어졌다면 민족생존이 가능할까? 묻고 싶다.  
54    세상에 자동이혼이란 법이 없다. 댓글:  조회:9947  추천:35  2008-12-28
세상에 자동이혼이란 법이 없다.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한 재한중국인들 사이 자동이혼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며 세상에 자동이혼이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법률에 의하면 이혼은 대체적으로 협의이혼과 법정기소이혼 두 가지이다. 협의이혼은 혼인 두 당사자가 재산에 관한 분할문제, 위자료문제, 사건본인(부부사이 낳은 자녀)의 친자행사권지정(양육권)문제, 양육비부담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합의 본 전제에서 향후 서로 모든 법적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약정서(구두로 하는 경우도 있음)를 작성하고 거주지 법원에 가서 이혼신청을 제출한다. 한국 법에 의하면 혼인당사자들이 내국인일 경우 협의이혼신청을 제출하면 3주간의 조정기일을 주는데 이 사이 이혼을 철회하는 경우도 있고, 여전히 이혼을 하려고 하면 3주되어 법원에 가면 이혼조정서를 발급받는다. 혼인당사자 일방이 외국인일 경우 3주 조정기일이 필요 없이 협의이혼신청당일에 이혼이 된다. 기소이혼은 혼인당사자 간의 어느 일방이 원고로서 상대를 피고로 청구취지와 청구원인을 밝히고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소이혼은 원고가 피고를 알게 할 수도 있고, 몰래 제출할 수도 있다. 원고가 소장을 법원에 제출하면 법원에서 피고에게 소장부본을 송달하고 1개월 답변시간을 주는데 피고가 반소를 제기하거나 묵인하거나 인정할 경우에 따라 사건처리가 달라진다.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한 외국인들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결혼 후 얼마 지나야 이혼을 제출할 수 있는가는 것인데, 법적으로 제한된 시간이 없이 아무 때건 이혼소송은 자유이다. 이렇게 이혼은 대체적으로 협의이혼과 기소이혼 두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재한중국인들 사이 자동이혼이란 법적으로 없는 말을 들먹이게 되는 것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부류 국제결혼자들이 주관억측으로 지어낸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가. 한국인 배우자와 혼인생활을 보내다 가출했거나 쫓겨난 자들.이 부류 사람들은 자신이 이혼되었지의 여부도 모른 채 그냥 막연하게 오랫동안 서로 연락이 없으니 자동이혼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외국인 배우자가 스스로 가출했거나 한국인 배우자가 외국인 배우자를 내쫓고도 가출했다고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서에서 발급한 신고서를 증거자료로 법원에 혼인파탄사유로 이혼소송을 제출하면 이혼판결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인 배우자가 법원에 기소해야만 이혼이 되는 것이지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것이 아니며, 만약 한국인 배우자가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혼이 되지 않는다. 나. 위장결혼으로 판결을 받은 자들 위장결혼으로 입건되어 법원으로부터 벌금(100~500만원 사이) 혹은 징역6~8개월 집행유예 1~2년이란 실형을 선고받은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되면 한국인과의 혼인이 무효가 되고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것 아니냐고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위장결혼은 형사사건에 속하고, 이혼은 민사사건이기 때문에 가령 실형을 선고받아도 혼인 두 당사자 중 어느 일방이 호적정리를 하지 않으면 이혼이 되지 않는다. 다만 위장결혼으로 실형을 선고받을 경우 법무부에서 혼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호적을 정리해야 하나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법원의 위장결혼 판결문을 갖고 관할 법원에 직접 호적정정신청을 제출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외국인 배우자는 한국인의 호적에서 말소된다. 다. 한국인 배우자와 결혼생활을 보내다가 갑자기 무작정 한국생활을 접고 중국에 가버리는 자들. 이 부류 사람들은 본인이 한국에 있지도 있고 중국에 가서 수년 지나면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도 역시 자동이혼이 존재하지 않고 한국인 배우자가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출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혼이 되지 않는다. 라. 한국에 혼인신고가 되어 호적이 한국에 올라 있으나 비자가 기각되어 한국에 오지 못한 중국인들. 한국인과 혼인하고 한국에 오지 못한 자들에 관한 공식적인 통계가 없어 그 수가 얼마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7~8천 명이 된다고 한다. 이 부류 속하는 사람들도 사람이 한국에 오지 못했으니 수년 지나면 자동으로 이혼이 되는 줄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에도 역시 혼인당사자 중 어느 일방이 법적으로 이혼소송을 제출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혼이 되지 않는다. 이혼법은 한국과 중국이 비슷비슷하다. 다만 세부적인 문제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하면 중국은 법원의 이혼판결을 중요시하고 호구정리는 차요적으로 보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협의이혼일 경우 3개월 이내 호적정리를 하지 않으면 이혼이 무효가 되며, 기소이혼일 경우 확정일 1개월이 지나 호적정리신고를 하면 벌금을 납부해야 한다. 뜻인즉 중국은 법원의 결과를 중시하고 한국은 법원의 결과보다 호적정리를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든 한국이든 자동이혼이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상기 여러 부류에 속하는 자들은 막연하게 자동이혼이 된다고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혼정리에 나서야
53    중국문화의 뿌리는 도교에 있다. 댓글:  조회:9628  추천:41  2008-12-16
중국문화의 뿌리는 도교에 있다.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노신은 “중국문화의 뿌리는 도교에 있다.”고 말했다. 노신 이후의 중국학자들은 모두 노신의 이 관점에 동의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유교는 인문적인 학설일 뿐이고, 중국의 문화예술, 기공, 무예, 의학, 과학, 방중술, 민속, 풍속에 이르기까지 도교를 근저로 형성되고 발전되어왔다. 중국문화를 도교와 유교(불교가 유입되기 전의 토착적인 것) 양대 산맥으로 으로 보고 있는데, 도교는 모계사회의 잔재문화이고 유교는 부권제를 확립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문화였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선 도교 후 유교이다. 중국학자들은 도교의 원조를 황제(黃帝)라 보고 한나라 때부터 황제와 노자를 묶어서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 불렀다. 또 한나라 때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교삼대계열서(황제·소문경, 황제·영추경, 황제·소녀경)는 모두 황제와의 문답체로 되어 있다. 중국의학은 도교에서 유래되었고 도교의 원조는 황제이며 노자는 황제 때부터 흘러온 ‘도학’을 재정비하여 도를 만물의 본체라 보았고 무위자연론을 주장했다.맹자가 공자의 유지를 계승했다 하여 유학을 공맹지도라 부르듯이 장자가 노자의 뒤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노장학파’ ‘노장철학’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한나라 이전에는 공맹을 하나의 학파인 유가라 불렀듯이 노장도 하나의 학파인 도가였다. 그러다가 한나라 때부터 경학통치가 확립됨에 따라 유가가 유교 즉 종교(국교)로 전환되었듯이 도가도 도교 즉 종교로 전환되기 시작했다.도교는 도를 우주의 본체로 모시고 도를 닦아 신선이 되는 것을 제창했다. 수도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복식(服食)복식에는 영단묘약을 먹고 장수해지는 것과 음식을 절제해 먹는 두 가지가 있다. 진시황이 만세를 살려고 신하들을 바다건너에까지 보내 장생불로초를 구하게 했다는 유명한 전설이 있듯이 중국인은 장수약에 신경을 많이 써왔다. 과식은 불식(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먹지 않기보다 못하다는 뜻)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도교는 음식을 절대 과식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심지어 도교는 배가 불러 있는 여자와는 성교도 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당나라 때부터 영단묘약이라 해서 먹고 죽은 사례가 많아 복식 장수법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대신 기공수도법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둘째 기공(氣功)중국인은 숨을 기라하며 우리말 ‘화를 내다’를 중국어로 ‘썽치(生氣)’라 하는 등 중국인이 말하는 기는 숨, 정신, 영혼 등을 의미한다. 한국 국어사전에 의하면 기를 바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는 바람이고 바람을 곧 기라 말할 수 있으며 기공이란 바람을 잘 잡고 조절하고 저장하는 등 수련법이다. 기공은 체내의 기를 조절하여 건강에 이르는 것을 뜻하며 수도(修道)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기공은 또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효과도 있다. 셋째 방중술고대사회에 있어서 중국처럼 방중술이 발달한 곳이 없다. 이는 중국인 식과 색이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 가장 충실했다는 증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은 세상에서 요리를 가장 발달시켰으며 심지어 중국인은 먹는 멋에 산다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잘 먹고 섹스를 잘하고 참 즐거운 인생이다. 고대사회에서 종교가 보급됨에 따라 수많은 민족들이 성을 단순한 후대번식의 필요로만 인식하였거나, 성을 담론하는 것을 터부시해왔다. 이에 비해 중국인은 섹스를 ‘양생지도’로 여기고 방중술을 연구하고 발달시켰다. 중국인의 방중술을 일명 ‘도교 섹스법’이라 한다. ‘도교 섹스법’을 다룬 책으로서 <<황제·소녀경>>이 있다. 이 책은 남녀 간의 섹스는 건강을 위한 행위라는데 초점을 맞추고 황제와 소녀가 대화하는 형식을 빌어서 다종다양한 체위, 전희부터 성교과정과 사정 및 완성단계까지 자세하게 묘사했고 또 이러한 건전한 섹스를 통해 어떤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까지 제시되어 있다. 중국인이 식과 색에 특별히 신경을 써왔던 것은 임어당의 말대로 “중국인은 문화적으로는 유교를 숭상하지만 본능적으로는 도교를 받든다.”는 것이 진리인 것 같다.  
52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사회 모습은? 댓글:  조회:7788  추천:40  2008-11-28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사회 모습은?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전하는 말에 의하면 중국산동성의 한 시골마을에서는 60여 년 동안 마을 사람들끼리 다툼이 없었고, 그 어떤 분쟁이 일어난 적도 없이 평화로우며 노인이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어른을 존경하며 타인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도와주는 등 화기애애하게 지내왔다고 한다. 말 그대로 도연명(陶淵明)이 그리던 도화원의 모습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한집안 식구끼리도 마찰이 생겨 다툴 수가 있는데 하물며 남과 남이 모여서 사는 마을에서,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60여 년 동안이나 말이다. 중국현대 일부 유학자들이 이 소문을 듣고 직접 그 시골마을을 방문하여 당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았는데 답이 의외로 간단했다고 한다. 즉 60여 년 전 한 유명한 유학자가 오래 동안 머물면서 보수도 받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유교경전을 강의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60여 년 전의 그 시골마을 사람들이 들었던 유교경전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받들고 지키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 시골마을 사람들의 삶을 통해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사회의 모습이 곧바로 그들의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유교의 어떤 힘이 그들로 하여금 갈등이 없고 다툼이 없이 화기애애한 삶을 영위하게끔 만들었을까? 필자는 그것이 바로 인의예지신 오상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인(仁)’을 한국학자들은 어질다고 번역하는데 이는 애매모호한 번역이다. 그래서 필자는 ‘인’을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예수가 본래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순한 계약관계였던 것을 사랑의 관계로 전환시켜놓았듯이 공자는 사람마다 먼저 내 몸을 다스리고 가족 내의 ‘인:사랑’을 사회에 넓히고 이렇게 하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했는데 이것이 곧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이다. 인간이 평화를 이루고 평등을 이루자면 우선 먼저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맘을 갖춰야 한다. 예수의 사랑법은 동양인에게 있어서 실천하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즉 예수는 나보다 못한 자의 발을 씻겨주라고 했으며 이것이 곧 진리라고 했다. <<성경 >>을 읽노라면 “쩍하면 쳐 죽여라, 저주를 받는다.”는 등 무시무시한 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예수의 사랑법도 동양인에 비해 극단적이다. 예수는 나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처자식을 모두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이 시각 즉시 따라 나서라고 호소했다. 공자는 나의 문하에 들어오겠으면 부모와 처자식과 인사도 나누고 적당히 밥도 먹고 오라고 했다. 예수는 나보다 못한 자의 발을 씻겨주라고 한데 비해 공자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不所欲, 忽施於人).”고 했다. 예수는 타인을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베풀라고 했지만, 공자는 “내가 남한테 바라는 것만큼 남을 도와주어라.”고 했다. 이로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사랑법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실천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것이었던데 비해 공자의 사랑법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이다. 그렇지만 공자의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교시를 실천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사람마다 이 공자의 교시를 따르고 실천한다면 기필코 산동성의 그 시골마을처럼 60여 년 동안 아무 말썽이 없이 태평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는 중국인의 발명품이다. 기독교문화는 의는 있으나 예가 없다. ‘지(智)’는 지혜, 지식, 지능 등을 말하는데, 공자는 배움을 통해 군자의 도에 이르는 것을 지라 여겼다. 그다음 믿음이다. 인간사회에서 서로 서로 믿음이 없으면 소원해지거나 원수로까지 변할 수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산동성의 그 시골마을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한결 같이 인의예지신을 잘 지켜왔기 때문에 60여 년 동안 도화원 같은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곧 공자가 추구했던 이상사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51    풍류문인과 청루여인들 댓글:  조회:7911  추천:49  2008-11-09
<풍류문인과 청루(靑樓)여인들>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   김정룡 kzl0917@naver.com   방송이나 출판매체가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 당송시(唐宋詩)와 같은 유명한 작품들이 어떻게 사회에 널리 전파될 수 있었을까? 중국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기녀들이 유명작품을 널리 전파하는데 크게 한몫을 했다고 한다. 성당(盛唐)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왕창령(王昌齡), 고적(高適), 왕지환(王之煥) 세 사람이 함께 청루에 들렀다. 그때 마침 10여 명의 궁중악사가 네 명의 예기와 함께 주연을 열고 있었다. 네 명의 예기는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세 시인은 기생들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서 누구의 노래가 많은지 내기를 하기로 했다. 당시 세 시인의 작품은 노래로 많이 불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한 예기가 왕창령의 작품을 노래했다. 왕창령이 기뻐했다. 다음의 예기는 고적의 작품을 노래하자 고적이 기뻐했다. 또 다른 예기가 다시 왕창령의 작품을 노래했다. 왕창령이 더욱 기뻐했다. 그러자 왕지환이 네 명의 예기 중에서 가장 용모가 뛰어난 한 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만약 저 예기가 나의 작품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평생 당신들과 시의 우열을 논하지 않겠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예기는 과연 왕지환의 <양주사(凉州詞)>를 부르기 시작했다. “황하는 멀리 흰 구름 사이로 올라가고, 만 길의 높은 산에 외로운 성 하나. 오랑캐 피리의 ‘절양류(折楊柳)’ 이별가를 어찌 원망하랴? 봄바람은 아직 옥문관을 넘지도 않았거늘! 청루의 여인들은 시를 읊었을 뿐만 아니라 남송의 명기 엄예(嚴蘂)와 같은 기녀는 춤과 노래는 물론이고 거문고, 바둑, 글씨, 그림 등 문인들이 좋아하는 분야까지 두루 통달했으며 시도 잘 짓는 재녀였다. 그녀가 지은 <복산자(卜算子)>란 시를 감상해보자. “풍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전생의 인연이 잘못된 때문인가 보오. 꽃이 지고 꽃이 피는 것은 자연히 때가 있으니, 모두 봄의 신에게 맡겨두세요. 가는 것은 끝내 가야하겠지만, 멈추는 것은 어떻게 멈추어야 할까요? 산에 핀 꽃을 머리에 가득 꽂을 수 있다면, 이 몸이 돌아간 곳은 묻지도 마오.” 청루여인들이 이렇듯 다재다능했기 때문에 풍류문인들은 그들을 지음(知音)으로 삼았다. 그리고 풍류문인들이 청루에 드나든 것은 단순히 그녀들과 잠자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안식처로 여겼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청루는 고객들로 하여금 심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휴식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청루여인들의 품위가 높았기 때문에 황제조차 그녀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북송말기 풍류황제였던 휘종(徽宗)이 처음 이사사(李師師:당대의 가장 유명한 기생)의 집을 찾아가서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기까지에는 상당히 많은 절차를 거쳐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차가 나왔고, 차를 다 마시자 다시 과일이 나왔다. 과일을 먹고 난 뒤에는 산보를 하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다음에는 시장해져서 다시 야식을 먹었다. 야식 뒤에는 향을 섞은 물에 목욕을 했으며, 목욕을 끝내고 한참 동안을 쉬고 나서야 이사사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사사를 만나고 나서도 휘종은 그녀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한 곡조 들었을 뿐, 이사사의 손가락 하나 만져보지도 못하고 궁궐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런데도 휘종은 이와 같은 이사사와의 만남이 대단히 즐거워 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휘종은 이사사를 만나기 위해 지존의 체면을 무릅쓰고 궁궐부터 그녀의 집까지 땅굴을 팠다고 한다. 풍류문인과 고관대작들은 물론이고 황제조차 기생들을 품위 있게 대했다는 것은 그녀들이 도도한 기품과 다재다능한 소질을 갖추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서양기생문화는 남자들이 화대를 지불하고 옷 벗고 섹스만 하면 끝인데 반해, 중국의 청루와 같은 기생문화는 남녀가 서로 육체보다 마음의 소통에 비중을 더 두었다는 것이다. 허나 중국도 명나라 때부터 청루의 여인들과 같은 예기(藝妓)가 사라지고 색기(色妓)만 남게 되었다. 이는 기생문화의 퇴화이다.  
50    코미디 같은 글 댓글:  조회:7638  추천:46  2008-11-05
코미디 같은 글   요즘 한국 소설가 박명호의 만주일기가 한국 내 00사이트에 연재 중이다. 저자는 글 중 제4편<만주의 봉천, 심양 아이러니>을 아래와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심양역 역사(驛舍) 위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다. 서울역과 흡사한 웅장한 돔 형식지붕 위로 해가 지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해가 지다’는 이 도시의 이름(沈陽)과 기가 막히는 어울림이다. 아니, 차라리 아이러니에 가깝다. 인구 1000만 명에 가까운 만주 제일의 도시로 발전한 이 도시의 이름이 ‘해가 지다’는 지극히 패배적이고 감상적인 이름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심양의 옛날 이름이 ‘하늘을 받들다’는 뜻의 봉천(奉天)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째서 ‘하늘을 받든다’던 도시가 그 정반대의 뜻을 지닌 ‘해가 침몰하는’(沈陽)이라는 이름이 되었을까. ‘심양’이라는 이름에는 한족들의 배만민족주의(만주를 배척하는 민족주의)가 담겨져 있다. 사실 그들은 봉천뿐만 아니라 만주라는 이름도 사용하지 않는다. ······   이 구절을 보면 저자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즉 첫째 봉천을 舊稱, 심양을 新稱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둘째 심양이란 지명유래를 주관억측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고, 셋째 만주를 찬양하고 현재 중국을 비방하는 문제점이 드러난다. 심양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重鎭이었고, BC221년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고 천하를 36郡으로 나누고 심양을 요동군에 예속시켰다. 서한시기 심양은 이미 도시윤곽을 갖췄고 ‘侯城’이라 불렀고, 당나라에 이르러 ‘沈洲’라 개칭했다. 금나라 때 금태조가 심주를 공략하고 ‘심주’란 도칭을 계속 사용했다. 1296년 원나라 때 심주를 ‘沈陽路’로 고치고 遼陽관할에 넣었다. 심양은 沈水이북에 위치해 있는 까닭에 중국전통方位論 ‘山北爲陰, 水北爲陽’에 의해 심주를 ‘沈陽’이라 개칭했던 것이며 따라서 그때부터 심양이란 도칭이 史料에 등장하고 702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1643년 청태종 황태극이 심양을 ‘盛京’이라 개칭했고, 이듬해 북경에 천도한 후 심양을 ‘陪都’라 불렀으며, 1657년 청나라는 ‘奉天承運’의 뜻으로 심양에 ‘奉天府’를 설치하고 그때부터 심양을 봉천이라고도 불렀다. 1929년 장학량이 동북을 지배하면서 ‘봉천시’를 옛 이름인 ‘심양시’로 고쳐 놓았는데, 1931년 일제가 심양을 공략하고 다시 ‘심양시’를 ‘봉천시’로 바꿔놓았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심양이란 도칭이 702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비해 봉천이란 이름은 341년밖에 되지 않는다. 다음 지명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모두 그 유래가 있는 법이고 유래는 대다수가 전설에 의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당연히 심양이란 지명도 유구한 유래를 갖고 있고 이에 관련된 전설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심수(沈水, 강 이름)북안의 石嘴頭山 기슭에 沈哥라는 총각이 있었다. 그 해 심수가 갑자기 범람하여 사처에 홍수가 졌고, 본래 심수의 용왕인 三頭蛟의 작간이었다. 沈哥가 三頭蛟를 찾아 백성을 위해 악귀를 없애려고 결심했다. 바로 그때 東梅용왕의 셋째 딸 羊妹의 부모가 그녀를 외사촌오빠인 三頭蛟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부모 모르게 심수용궁에 친히 외사촌오빠의 성품을 알아보려고 달려왔는데, 三頭蛟는 한참 ‘童男宴’을 크게 베풀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화가 나 沈哥를 도와 三頭蛟를 없애려고 결심했다. 그녀는 龍衣를 沈哥에게 입히고 “이 옷을 입으면 하늘에 날아오를 수 있고 불바다에 가서 태양오빠를 옮겨올 수 있으며 오로지 태양오빠가 三頭蛟를 태워버릴 수 있사옵니다.”고 아뢰었다. 沈哥가 불바다에 뛰어들어 몸이 타 연기가 나고 있었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태양을 지고 달렸다. 심수에 돌아왔을 때 三頭蛟는 羊妹를 필사적으로 물에 밀어 넣고 있었고, 그는 황급히 태양을 물에 향해 던졌다. 三頭蛟가 태양에 그을려 재가 되었으나 그도 더는 지탱할 수가 없어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羊妹가 다급해 “沈哥!”라 부르면서 강물에 뛰어들었다. 허나 그녀는 자신의 龍衣를 이미 沈哥에게 준 것을 까맣게 잊었다. 마을 사람들이 백방으로 심수에서 沈哥와 羊妹의 시체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심수북안에 비석을 세우고 “沈羊”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 후에 이 비석을 중심으로 촌락이 수건되고 城池를 마련했으며 이곳을 ‘沈羊’이라 불렀는데, 마침 沈水陽面에 위치한 까닭에 후세사람들이 沈哥, 羊妹, 三頭蛟의 이야기를 모르고 ‘沈羊’을 ‘沈陽’이라 잘못 불러왔다고 한다. ‘沈羊’은 전설이고 ‘沈陽’은 심수양면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 전설이든 심수양면이든 모도 ‘沈’은 심수란 강에서 유래된 것이지 결코 박명호 씨의 지적처럼 ‘침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심양이 ‘해가 진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느니,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한족들이 만주족에게 당한 패배의식에서 심양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느니, 옛날‘하늘을 받든다’던 봉천이 그 정반대로 ‘해가 침몰하는’ 뜻인 심양으로 바꿨다느니, 이 코미디라도 수준이하의 코미디 같은 글을 소위 소설가란 양반이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 개인 생각으로는 저자가 중국역사에 대해 무지한 탓이고, 유래가 있는 지명을 글자 그대로 ‘望文生意’하여 주관억측으로 자의적으로 코미디 식으로 풀이한 결과이고, 저자의 의중에 만주를 찬양하고 현재 중국 한족에 대한 편견이 마음속 구석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코미디 같은 글들이 발표되면 한국 내 독자들에게 피해 될 뿐만 아니라 중한관계에도 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알기를 바란다.
49    중역한(中譯韓)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점 댓글:  조회:7800  추천:46  2008-10-30
중역한(中譯韓)에서 드러나는 몇 가지 문제점 자민족어를 타민족어로, 타민족어를 자민족어로 옮기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 때문에 번역은 십분 정확해야 한다. 일본에서는 대학 교수의 평가에서 번역물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번역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원생들이나 하는 노릇, 혹은 교수가 번역을 맡아도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시켜먹고 자기 이름을 역자로 박아 넣기가 일쑤이다. 때문에 한국인의 번역수준은 매우 차하다. 아래에 세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첫째 천자문식의 번역한국도교학회 회장이신 최창록 교수는 도교계열서인 <<황제·내경>>과 <<황제·소녀경>>을 번역해냈다. 그런데 그의 번역은 ‘번역’이 아니라 한문을 한 글자씩 하늘 천, 따지 식으로 옮겨놓아 원의(原意)가 거의 전달되지 못해 한마디로 엉망이다. 이를테면 최창록 교수는 옛날 천자문 식으로 한문을 알고 있을 뿐 현대한어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리하여 가령 ‘立刻’이 현대한어에서 ‘즉시’라는 뜻을 글자 그대로 ‘세워서 조각하다’로 옮겨 놓았다. 또 ‘摸不淸’이 현대한어에서 ‘올바로 만지지 못하다.’라는 뜻을 글자 그대로 ‘깨끗하지 못한 것을 만지다’로 번역했다. 최창록 교수의 번역물은 전부 이런 식이어서 90%이상이 오역이다. 출판사는 오역이란 것을 모르고 교수분의 번역물이라고 그대로 믿고 출판한다. 이런 오역 투성인 출판물을 독자들이 보게 되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둘째 중국역사문화에 대한 상식 부족<<단군은 실존했다>>는 저자 강무학 씨는 ‘魯司寇’가 공자를, ‘周柱史’가 노자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상식을 몰라 엉뚱하게 “寇가 본래 徒인 것을 선생(최치원)이 잘못 썼지 않느냐니, 주나라 역사를 꾸미는 것이 어쩌고저쩌고, 주나라 문화를 숭상해서 ‘주주사’란 언사를 썼다느니”, 하여튼 번역이 아예 개판이다. 그가 원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족주의학자인 최치원을 오히려 사대주의자로 몰기에 이르렀다. 이런 분들이 ‘단군의 실존’을 운운하니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셋째 언어 환경의 문제언어란 그 언어 환경의 체험이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전공으로 대학을 나오고 석, 박사를 졸업해도 그 언어 환경의 체험을 해보지 못하면 타민족의 언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를테면 “車到山前必有路”란 속담이 있는데, 나의 딸애가 소학교 때 이미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허나 <<장자>>라는 소설의 역자인 이선옥(李先玉) 씨는 서울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교 석, 박사를 나왔으나 이 속담을 “수레가 산에 오르려면 길이 있어야 한다.”라고 옮겼다. 원의가 한심하게 왜곡된 한심한 번역이다. 이 속담의 원의는 “수레가 산 밑에 이르면 길이 나지는 법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우리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에 해당된다. 이외에도 한국인의 번역물을 읽어보면 “이것 아닌데”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거나 아예 머리를 가로 젓게 될 때가 많다. 일본인은 자신이 모르는 고전구절을 인용하지 않고 파고들어 알고 난 다음 인용한다. 이것이 학자가 갖춰야할 자세이다. 그렇지 않고 한국의 일부학자들은 자신이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무작정 남의 것이 맞는지 틀린 것인지도 모르고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그리고 출판사들에서는 책을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관련된 전문가들을 청해 교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엉뚱한 번역을 그대로 내보내 애꿎은 독자들을 피해보게 만들고 있다.
48    방방곡곡, 오호사해, 츠츠우라우라 댓글:  조회:6956  추천:95  2008-07-22
<방방곡곡, 오호사해, 츠츠우라우라> <김정룡의 역사문화이야기>   김정룡 kzl0917@naver.com   방방곡곡, 오호사해(五湖四海), 츠츠우라우라(津津浦浦) 민족문명이 형성된 가장 원초적인 토대(바탕)는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그것이 바로 마을문화라고 생각한다. 즉 인류가 산에서 대지에로 내려와 마을을 이루고 군거생활(群居生活)을 시작한 이제문화(里制文化)가 민족문명의 형성토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역사연변(歷史沿變) 과정에서 한 개 집단이 본래 소속되어 있던 군체를 이탈하여 새로운 곳에 마을을 이루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면서 세력이 커지면 또 새로운 민족을 형성해온 사례도 허다하다. 그렇다면 민족과 민족 간의 문명 차이가 생겨난 근원이 무엇일까? 필자는 한 군체가 마을을 정착시킨 지리적 환경이라 판단한다. 쉽게 말해서 지리적 환경이 민족과 민족 간의 문명 차이를 생성케 했다는 의미다. 한중일 삼국은 각기 동서남북 여러 곳에서 모여들거나, 전국 곳곳을 말할 때 한국인은 ‘방방곡곡’, 중국인은 ‘오호사해’, 일본인은 ‘츠츠우라우라’라고 표현한다. 이 ‘방방곡곡’, ‘오호사해’, ‘츠츠우라우라’가 곧 한중일 삼국 세 민족의 초기 마을이 처한 지리적 환경특징에서 비롯된 개념들이다. ‘방방곡곡’은 ‘방곡(坊曲)’의 확대적 표현이며 ‘방곡’을 한자로 ‘坊谷’이라고도 한다. ‘방곡’의 지리적 특징을 알려면 먼저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부터 살펴보아야 한다.한반도는 삼분의 이가 산이지만 산세가 험하지 않아 비산비야의 모습이며, 산 속 수풀 진 곳에 샘물이 있고 샘물이 내를 이루고 내가의 양 옆에 마치 미끈하게 쭉 뻗은 여인의 다리처럼 생긴 작은 산이 있고 산 아래 내가의 양 옆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것이 곧 ‘방곡’이다. 우리민족이 이 ‘방곡’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기 때문에 장풍득수(藏風得水)처럼 성격이 온화하며 오손도손하고 화평하면서도 매우 낙천적이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이러한 ‘방곡’이 8만 여개가 있었다고 한다.중국인은 초창기에 주로 황하중하류유역에서 마을을 이루고 문명을 형성해왔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흔히 중국문명은 황하의 다스림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또 마치 이것이 정설인 것처럼 떠들고 난리다. 필자는 이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국문명은 ‘소택지(沼澤地)’를 다스려 옥토로 만드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나의 견해(見解)이다. 중국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원은 본래부터 비옥한 땅이었던 것이 아니라 4천 년 전에는 물이 가득한 ‘소택지’였다고 한다. 중국인은 초창기에 이 ‘소택지’에 마을을 이루고 치수를 통해 옥토로 만들면서 삶을 영위해왔다. 우(禹)임금이 치수에 필생의 정력을 소모했다는 전설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중국인이 전국 곳곳을 ‘오호사해’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초창기 마을이 처한 지리적 특징, 즉 물이 가득한 ‘소택지’에서 얻어진 호칭이다. 중국인의 이러한 지리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민족성격에 관해서 할 말이 많으나 여기서 잠시 접어두고 제4부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하겠다. 일본열도는 본래부터 땅이 메마르고 척박하며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았다. 그래서 일본인은 초창기에 매우 한정된 ‘진(津)’과 ‘포(浦)’의 변두리에서 개울물을 막아 알뜰살뜰 땅을 가꾸면서 겨우겨우 삶을 영위해왔다. 일본인은 그러한 각박한 삶을 통해 알뜰하고 진지하고 정확하고 투입적이고 근검하고 절약적이고 진취적이고 또 독한 성격이 형성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은 ‘진’과 ‘포’의 고인 물처럼 조용하고 고독하고 남의 신세를 거부하는 등 성격이 형성되었다. 일본인이 친구끼리도 밥을 먹고 나서 비용을 똑 같이 분담하는 ‘와리끼리’ 문화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본인은 초창기 삶의 터전이 ‘진’과 ‘포’의 변두리였기 때문에 전국 곳곳을 ‘진’과 ‘포’를 뜻하는 의미로서 ‘츠츠우라우라’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방방곡곡’, ‘오호사해’, ‘츠츠우라우라’는 한중일 삼국 세 민족 문명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고도 매우 귀중한 요소이다.  
47    "엄마, 난 한국국적이 싫어요." 댓글:  조회:7201  추천:74  2008-07-13
function openPop(){ window.open('http://ec.512.co.kr/web/link.jsp?mcode=23208&nid=8252','elis','width=710,height=685,top=0,left=0,scrollbars=no'); }   "엄마, 난 한국국적이 싫어요"   김정룡 kzl0917@naver.com   1992년 중한수교 이후 2007년 말까지 조선족출신 동포1세·2세와 한국인과의 국제 결혼자 및 그들의 미성년 자녀들을 합쳐 한국국적을 취득한 수가 7만여 명, 귀화신청을 제출해놓고 허가를 기다리는 조선족이 3만 5천여 명, 한국 내 체류기간이 2년(결혼자)과 3년(동포2세)이 차지 않아 귀화신청을 기다리고 있는 잠재적인 귀화신청자 3만 여명이다. 그들은 한국국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필자가 알아보았다. 절대다수 한국국적취득자 조선족출신들은 다음과 같은 이중생각을 갖고 있다. 즉 한국에서 영원히 뿌리내리고 살려고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체류가 편하고, 한국인으로부터 무시를 적게 당하고, 부모형제자매 및 친인척들을 초청하기 위해, 한국에서 사업하는데 편리하고, 일부 젊은 여성들은 미국이나 일본에 쉽게 왕래하기 위해 한국국적을 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다수 조선족 출신들은 한국이 비록 중국보다 여러모로 발전하여 살기 좋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나, 그래도 나고 자란 정든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잊지 않고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살려는 낙엽귀근 의식이 뿌리 깊으면서도 임시 삶의 방편을 위해 한국국적을 원한다는 것이다. 한국국적을 원하는 조선족출신들이 이와 같은 이중생각을 갖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농경문화가 주류였던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은 한국이 비록 할아버지의 고국이나 고향은 중국이라는 향토의식이 뿌리 깊어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둘째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은 말로는 조선족을 자기네와 동족이라 하면서도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차별하고 무시하고 시기하는 등 이방인 취급하며 여러모로 불편하게 만든 것도 이중생각에 크게 한목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정부는 미국이나 일본 등 잘 사는 나라에 시집 간 ‘딸’만 자식 취급하고, 중국과 러시아 등 못사는 나라에 시집 간 ‘딸’은 자식으로 대해주지 않고 있다. 쉽게 말해서 선진국에 이민 간 교포는 내국인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해주고 있는데 반해, 후진국에 살고 있는 동포는 완전히 외국인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족은 한국에 대해 정이 가지 않아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조선족 기성세대들은 상기 이중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한국국적을 갖기를 원한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 개방시대에 태어난 조선족신세대들은 한국국적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1980년대 말 이후 태어난 조선족신세대들은 기성세대들과 같은 정의 문화라든가, 향토의식이 매우 취약하며 그들은 대다수가 계산적이고 실리적이며 앞날을 따지는 미래형이다. 흑룡강성 해림시 윤모 여인(40시)은 1994년 04월 단기상용비자로 한국에 입국했다가 불법으로 체류하던 중 2003년 02월 한국인과 결혼했고 현재 한국국적 소지자이다. 03개월 전 그녀는 중국에 있는 딸애(17세)를 한국에 데려와 한국국적을 신청할 타산이었다. 그런데 딸애는 한사코 한국국적이 싫다고 한다. 엄마는 딸애의 이런 당돌한 태도에 놀랐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딸애의 말에 의하면 “엄마가 중국을 떠난 지가 14년이 되고, 가끔 중국에 와도 고향에만 들러보고 하기 때문에 중국, 특히 남방이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지를 모르고, 또 한국이 잠시 중국보다 앞서있지만, 필경 작은 나라이자 반도인데 비해 중국은 거대한 대륙이며 필경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을 것이고, 또한 우리 세대는 앞으로 고향이요, 민족이요, 국적이요, 이런 것들을 떠나 어디가 실리적이면 어디를 원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에요. 그래서 한국국적이 싫어요.”하고 엄마를 설득했다고 한다. 필자는 현재 조선족신세대들은 거의 대다수가 그녀의 딸애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는 조선족 코리안드림의 열풍도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뚜렷하게 식을 것이라는 결과를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고국, 조국, 모국, 고향, 민족 등 정체성이라는 ‘골치 아픈 허상’에 연연하지 않고 실리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 짐작된다.  
46    巫女와 祈雨祭 댓글:  조회:6609  추천:63  2008-06-12
巫女와 祈雨祭      무당(무속)이란 무(巫)자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주자가어(朱子家語)>>에 의하면 “무는 춤으로 신을 섬기는 바, 무란 공(工) 양 옆에 인(人)자를 붙인 것인데, 그 춤추는 모양에서 취한 것이다. 무는 신을 받들고 춤추는 따위가 모두 통창화기(通暢和氣)하여 신명에 이른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한국 유동식 교수가 “무(巫)는 위 가로가 하늘을, 아래 가로가 땅을 뜻하며 양 옆의 인(人)은 사람이 춤추는 모습이며 내리 줄은 가무강신을 통해 하늘의 신을 맞아 지상에 교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필자는 유동식 교수의 해석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무(巫)란 개념을 간단하게 이해하면 곧 귀신을 섬기는 일이다. 중국학자 강천(江灥)의 말을 들어보자.    고대의 관(官)은 단지 巫와 史일 뿐이다. 후에 학술의 분기가 천만갈래에 이르지만 그 발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결국 巫와 史로 다 귀결된다. 사람의 일을 기록하는 관이 史이며 이는 <<설문>>에 史를 해설하여 ‘記事者也’라고 한 것으로 방증된다. 그리고 귀신을 섬기는 관을 巫라고 한다. 이는 <<서경>>의 이훈(伊訓)을 보라. 옛사람은 제사를 중히 여기고 귀신을 받들었기 때문에 史와 巫의 두 직책이 동시에 같은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후세에 내려올수록 합리적 지식이 증가하고 귀신의 일이 묘막(渺漠)하여 근거가 없고 또 사람의 일만큼 귀중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따라 史가 성하고 巫가 쇠했으며 일체의 관직을 모두 史가 독점하게 되었다. 史로서 巫의 자리를 빼앗게 되었으니 祝史 · 卜史 등의 명칭은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巫는 부녀로서 충당하였다. ······周末에 이르면 巫의 도는 거의 종식되었던 것이다.    중국역사에서 무(巫)의 도가 가장 성했던 시기는 은 나라였고 주나라 때부터 문(文)의 도가 완전히 자리매김 됨에 따라 무(巫)가 완전히 쇠락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한반도처럼 무당, 특히 여무가 근세말기까지는 고사하고 2천 년 전부터 일찍이 쇠락하고 말았다.  세계역사를 살펴봐도 무당, 특히 여무가 근세말기까지 발달하고 활발하게 또 왕성하게 활동한 사례는 한민족이 으뜸이다.  한반도에서 남격수(男覡數)보다 여무수가 많았던 이유에 대해 임동권 씨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무를 하나의 직업으로 보면 남녀의 구분이 필요 없는 것이나 무직은 신과의 교섭을 갖는 것이요, 또 감수성이 예민해서 신빙이 쉬운 여성이 적합하였다. 따라서 고대의 무는 여성이 많았을 것이다.” 그는 또 “기우에 여무가 주역을 맡은 것은 신과 교섭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니 사제자의 기능에 속하는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지적에 일정한 이치는 있겠으나 해석이 요해를 짚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당의 역할은 주로 가무강신이며, 즉 하늘에 계시는 신(천신은 남성성을 지닌 신)을 여무가 가무를 통해 지상의 인간과 교감시키기 때문에 천지조화, 음양조화, 남녀조화의 원칙에 의해 여무가 많았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가뭄은 음기가 약하고 양기가 성한 때문이라 인식했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동남지역 어떤 소수민족들은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로 소녀들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했다. 소녀들이 씨름으로 땀을 많이 내고 왕성한 음기를 발산 하면 하늘의 양기와 만나 비가 생긴다고 믿었다.   한반도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말기까지 조정에서 조직하여 치르는 기우제에 수백 명의 여무가 동원된 것이 곧바로 천지조화, 음양조화, 남녀조화의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김별아 씨는 그의 <<미실>>에서 고대한민족의 기우제 때 있었던 여무들의 굿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마르고 곡식이 타들어갈 때, 궁중에서는 엄숙한 천제의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민간의 처방을 병행하여 기우제를 치렀다. 무당들은 속옷을 벗고 치마만 걸쳐 입은 채 굿판에 섰다. 물기 하나 없는 바람이 함부로 그녀들의 통통한 허벅지와 가로퍼진 엉덩이를 매만졌다. 무녀들은 분노한 신령들과 교접하며 영신했다. 치마를 들추어 바람을 희롱하며 가랑이를 번쩍번쩍 들어 한바탕 음란한 춤을 추었다. 가뭄이야말로 양이 음을 이겨 눌러 음력이 부족해 빚어진 탓이었다. 그래서 무녀들이 지닌 음력의 발산을 통해 신령을 위로하고 천기를 다스리려 한 것이다.  
45    연변은 아직도 '문화혁명 중?' 댓글:  조회:8007  추천:71  2008-06-04
연변은 아직도 “문화혁명 중?” 1970~80년대 연변에 “연변은 중앙 직속이요, 마레고향이다.”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이 유행어는 건국 후 1957년 반우파운동, 1958년 대약진운동, 1960년대 초 공산공식(共産共食)운동, 1966년~1976년 문화대혁명, 1970년대 산아제한운동시기 다른 소수민족 대다수가 이 일련의 운동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남의 일로 대했던데 반해 조선족은 매 차례 운동 때마다 가장 혁명의 선두에 섰고, 그 결과는 자기네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행태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이를 민간에서는 ‘조선족은 째빨갛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럼 조선족은 왜 째빨간가? 필자는 이 현상의 역사적 유래를 살펴보았다. 동북아시아의 문화역사중심은 황하중하류유역인 이른바 중원이었고, 조선반도는 중원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수천 년 동안 줄곧 중원문화를 수입해왔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조선반도는 중원문화에 대한 절대적 동경과 흠모와 존경과 숭배가 생겨났으며 따라서 이념적으로 오히려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이념화시킨 사례도 많다. 그 일례로 조선반도는 조선조 500년을 통해 삼강오륜을 비롯한 유교와 주자학(신유학)을 본산지인 중국보다 더 경직되게 이념화했다. 학계에서는 동북아시아를 유교문화권이라 칭하는데 필자는 중국, 일본, 조선의 유교를 아래와 같이 명명한다. 중국은 한조이래 유교가 주축이었으나 유불도가 엎치락뒤치락했고 삼교통합을 추구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유교가 사람들의 근육에까지만 침투되어 ‘근육유교’라 부르고 싶다. 일본은 ‘晝朱夜明’, 즉 낮에는 주자학을 배우고 밤에는 양명학을 공부하는 이중적이었고 유교를 절대화하지 않았으며 유교가 기껏해야 피부에만 스쳐지나갔기 때문에 ‘피부유교’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조선은 조선조 500년 동안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듯 조정으로부터 민간생활에 이르기까지 전부 유교로 규범화시켰고 유교가 사람들의 뼈속까지 침투되었으므로 ‘뼈속유교’라 칭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근대화 이후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후 조선반도에는 두 가지 ‘중원문화’가 앞에 놓여 있었고, 이남에서는 미국을 중원문화로 받들고 숭배해왔으며, 이북에서는 마레주의를 숭배하고 실천해왔다. 필자는 이 지구상에서 남의 문화에 대해 가장 이념화가 심한 것이 조선반도라 본다. 이를테면 이 지구상에서 밤에 동서남북 어디에 눈길을 돌려도 십자가가 흔하게 보일 정도로 기독교열기가 가장 뜨거운 것이 조선의 남쪽땅이요, 아직까지 문을 걷어 닫고 자본주의문화와 ‘룰’을 거부하는 국가는 조선의 북쪽땅이다. 이런 결과는 결국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을 만큼 서로 쪼개져 있고 통일의 길은 요원해 보인다. 참으로 비극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으로 풀이해보면 조선족은 1860년대부터 속칭 만주땅에 이주해 처음에는 땅을 개간하고 생계에만 몰두해오다가 토지소유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중국공산당의 약속을 믿었고 그때부터 예로부터 중원에 매달려온 역사의 관성이 <<문학과 예술>>의 조일남 사장이 지적했듯이 ‘공산당의 영도 하에’를 바짝 쫓는 새로운 이념이 자리 잡게 되었고, 누가 ‘공산당의 영도 하에’ 더 충실하느냐는 경쟁이 생겨났고 따라서 서로 죽고 줄일 정도로 사상과 이념이 ‘째빨겨졌다’. 물론 조선족이 ‘째빨간’ 것이 나름대로 이와 폐가 있다. 중국공민의 일원으로 빨리 자리 잡게 된 것은 ‘이’요, 서로 물고 뜯고 하는 것은 ‘폐’다. 조선족은 문화혁명을 거치고 나서 서로 물고 뜯고 하는 바람에 흩어진 모래알과도 같이 전혀 단합이 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조선족의 ‘째빨간’ 사상이 조선족사회에 피해가 컸다는 것을 마땅히 반성하고 단합을 도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조선족사회 엘리트에 속하는 지식인들이 아직도 문화혁명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조선족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사상과 이념이 개방되지 못해 아직도 한 때 떠들썩하게 받았던 이념과 사상의 교육 틀에 맞춰 남이 자기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인신공격까지 서슴치 않는 소위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조선족사회가 아직도 문화혁명 중이라는 근거로서 아래와 같은 실례를 들어보자. 첫째 흑백구의 논리 우리민족이 세상에서 가장 흑백논리가 강하게 된 것은 조선조 500년에 주자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몰아붙인 데서 생겨났다고 필자는 본다. 누가 든 비유였던지 기억에 남지 않지만, 아무튼 <<추한 중국인>>의 저자 백양은 흑백구의 논리로서 중국인의 흑백논리를 지적했다. 즉 커다란 흑백구가 있는데 흑 측에서 공을 본 사람은 축구공은 검은 것이라 주장하고, 백 측에서 공을 본 사람은 축구공은 하얀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흑 백 양측에서 서로 자기주장을 하다 보니 둘 다 틀렸으면서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 진리라고 여기고 남을 이단이라 취급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상대편의 입장에서, 한국의 한자 어휘인 ‘易地思之’해야만 남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문화혁명 때 받았던 사상과 이념 교육 틀에 맞춰 타인을 대한다면 남의 문장에 대한 독해력에도 문제가 있거니와 폐쇄된 언저리문화수준을 뛰어넘을 수가 없고 기껏해야 인신공격밖에 더 있겠는가! 둘째 푼수를 알고 살자.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자신의 푼수를 알고 살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이 한마디로 더 유명해졌다. 우리말로 풀이하자면 인간은 앉을 자리 설자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진정 자신의 푼수를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마다 나름대로 제 잘난 멋에 살기 때문이다. 허나 집단을 놓고 말하면 푼수를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조선족은 한 때 제 노릇도 하기 힘든 중국이 마치 구세주인양 “전 세계 삼분의 이 인류를 해방하자.”는 등 거창한 교육을 받은 탓에 사유가 따라서 거창해졌고 자신의 푼수를 모를 정도로 거창하게 문제를 들먹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영전 선생을 모른다. 그저 그에 대해 말썽이 많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시시비비에 휘말릴 생각이 티끌만치도 없고 또 그를 모르고 있어 왈가왈부할 자격이 전혀 없다. 다만 일부 그를 비평하는 문인들이 “남영전은 7,000만 겨레 앞에서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사이트에서 보고 한마디 하려고 한다. 우리 조선족은 중국공민으로서 중국법을 지키며 착실하게 살아가면서 조선족공동체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정도이지, 일개 조선족이 가령 어떠한 일을 저질렀다 해도 어떻게 거창하게 7,000만 겨레를 들먹일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좀 자신들의 푼수나 알고 살자. 셋째 김문학의 현상에 대하여 내가 김문학에 대해 들은 것은 2006년 02월 <<연변여성>>잡지사 이선희 사장을 만나고 나서 처음이었다. 그때 나도 조선족사회폐단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7편의 문장을 그 잡지에 시리즈로 발표하게 되니 김문학의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 그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미국인이 <<추한 미국인>>을, 일본인이 <<추한 일본인>>을, 중국인이 <<추한 중국인>>을 썼다 해서 국가와 민족의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만 작가 백양이 그의 <<추한 중국인>>에서 “중국유교문화를 ‘장독구더기’로 비유하고 중국인의 추한 면모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하지만 백양은 대륙에 와서 대환영을 받았고 중국인은 그의 작품을 통해 반성의 계기로 삼았다. 김문학의 <<이야기 삼국지>>인지 뭔지 나는 보지 못해 할 말이 없지만 최근에 또 ‘조선족대개조론’인지 뭔지 하면서 그를 들먹이고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누가 어떤 글을 썼던지 있으면 반성하고 고치고 없으면 참고하려는 태도와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임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 본다. 그리고 그러한 글에 대한 흑백 ‘평가’에 열을 올리느라 시간을 허비할 거면 차라리 <<삼국유사>>나 한 페이지라도 읽는 것이 더 생산적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김문학에 대해 얼마나 민감했으면 일부 조선족 지식인들이 나의 글을 읽고 김문학을 들먹이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대해 비평의 발언을 하면 민족의 역적이란 말인가? 이는 순전히 문화혁명 때 흑백논리라 볼 수밖에 없다. 넷째 지와 식의 문제 조선족사회 일부지식인들이 나보다 결코 책을 적게 읽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지식인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그들보다 책을 적게 읽었다고 인정한다. 지식이란 독서를 통해 얻어지고 또 사회생활을 통해 습득한다. 고로 지식은 ‘지’와 ‘식’으로 나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지’는 풍부할지 모르겠으나 ‘식’도 풍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지’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것인데 반해 ‘식’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 우리는 주변에 공부를 못한 사람이 판단력과 결단력 및 언변이 좋고 논리가 정연하고 타인의 존중을 받는 사례를 많이 본다. 이것이 곧 ‘식’의 문제이다. 예로부터 ‘有知之士’란 말은 쓰지 않는데 반해 ‘有識之士’라 하고, “저 사람이 유식하다.”고 말하지 “저 사람이 유지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보다 ‘식’이 더 중요함은 더 의논의 여지가 없다. 내가 조선족지식인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했던 발언도 그들의 ‘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려는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다. 일부조선족문인들의 치명적인 폐단은 한때 받았던 이념과 사상의 교육 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 비록 책을 많이 읽었다 해도 현대사회에 대한 ‘식’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認’만 있고 ‘知’가 따라가지 못하거나, ‘學’은 있어도 ‘問’이 결핍하기 때문에 타인의 글을 읽을 때 왜 그렇게 썼을까에 대한 독해력이 부족하고 아울러 엉뚱하게 풀이하고 매도한다. 그들은 타인을 나뭇잎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고 평가하지만 자신들이야말로 그런 폐단을 안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인 요소를 떠나 학문적으로 ‘식’이 매우 결핍하여 남의 글에 대한 깊이와 넓이에 대한 독해력이 문제가 있어 자신이 모르면서 오히려 타인을 모른다고 함부로 꼬집으니 참으로 비극이다. 이를테면 내가 “우리선조들이 역사기재를 남기지 않아 민족역사를 연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는 발언에 대해 어떤 지식인은 조선왕조실록과 팔만대장경을 거론하고 대조영 드라마제작에 조선족지식인들이 발해사자료제공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나를 남의 역사만 알고 우리민족역사를 모른다고 꼬집는 것은 천박한 발언이다. 나의 발언의 취지는 중국에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상서>>, <<춘추>> 같은 사서가 등장하고 기원전 한무제 때 사마천이 완벽한 사서를 지어냈고, 일본은 702년과 712년에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펴냈던데 비해 우리선조들은 기원 11세기에 이르러도 사서다운 사서가 없어 김부식이 송나라에 가서 3년 동안 배우고 연구하여 중국 사서를 모방하여 겨우 써낸 것이 <<삼국사기>>이며 1145년에 출판되었다. 그 후에도 현재까지 <<삼국사기>>를 뛰어넘는 사서가 등장하지 못했다. 1280년에 출판된 김일연의 <<삼국유사>>도 첫머리가 “魏書云”으로 시작했듯이 중국 사서를 떠나서는 우리민족역사연구가 이뤄질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포괄적인 역사맥락도 모르고 남의 글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올바르지 못한 태도라 나는 생각한다. ‘지’와 ‘식’, ‘인’과 ‘지’, ‘학’과 ‘문’의 문제는 물론 사상해방부터 앞서야 해결될 문제이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한족 지식인들은 한때 문혁교육의 틀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반해 일부조선족지식들은 아직도 그 틀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 전에 지적했던 봉건이란 용어에 대해 한족지식들은 되도록 봉건이란 용어를 쓰지 않는데 비해 일부조선족지식인들은 아직도 봉건이란 용어를 반성하자는 나의 발언에 대해 마치 하늘땅이 뒤번져지는 듯 호들갑을 떨고 있다. 서양인이 제작한 <<금단의 도시, 자금성으로 가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봉건이란 말이 단 한번이라도 출현하지 않고 세계 어디를 보아도 과거 중국역사를 말함에 있어 봉건이란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다. 고국 한국도 마찬가지로 역사를 논함에 있어 봉건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봉건이란 용어가 중국역사에서 처음으로 <<상서>>에 등장하는데 명사로서의 의미보다 동사에 가깝다. 분봉제를 일컬을듯 봉하고 건설한다(封土建國)는 동사적의미로 나타난다. 서구에서 말하는 봉건은 중세기 농노제이며 그 성격은 장원영주제를 뜻한다. 우리 중국 진나라 때부터 통일중앙집권제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문제는 앞서 지적했던바와 같이 칼·맑스의 역사오단계설의 도입에 따라 중국에서 봉건에 대해 논의가 시작되었고, 거기다 두들겨 맞추고 교육시킨 결과 조선족마저 아직까지도 봉건이란 용어에 껌뻑 죽을 정도로 깊이 침투되고 뿌리박혔다. 여기서 1930년대 곽말약이 처음으로 칼·맑스의 역사오단계설에 근거하여 <<중국고대사회연구>>를 통해 중국역사시대획분의 시도를 했고, 呂振羽 측과 중국역사시대획분에 대한 논쟁과 그 과정을 생략하고 말하자면 결국 곽말약이 득세함에 따라 그의 학설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의 논쟁을 하지 않기로 결론 냈다. 만약 봉건이란 용어가 청말까지 중국역사와 딱 맞고 똑 떨어진다면 굳이 논쟁이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더 이상 논쟁을 금하고 막 밀어붙이기 식으로 결론지었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현시대에서 봉건이란 용어의 남용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한다. 나는 일부조선족지식인들에 대해 충고할 자격이 없지만 ‘지’만 추구하지 말고 ‘식’을 넓히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아울러 이념과 사상을 해방하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폐쇄된 언저리 문화의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44    그네는 왜 여자만 뛸까? 댓글:  조회:6776  추천:58  2008-06-02
그네는 왜 여자만 뛸까?      그네는 고대 아세아지역에서 널리 전파된 오락놀이였으나 우리민족처럼 단오 날에 남자들의 씨름놀이와 함께 활기찬 문화행사로 자리매김 되어왔던 사례는 없다.  그네는 본래 여성들만의 오락놀이가 아니라 남자들도 뛰었다. 한반도 그네뛰기 풍속에 대해 <<송사(宋史)>>에는 “단오유추천(端午有鞦韆)”이라 하였고, 한반도 문헌에 최초로 보이기는 <<고려사>> <최충헌전(崔忠獻傳)>에 단오추천에 문무4품 이상이 모여 사흘 동안 하였다 하였고, <<최이전(崔怡傳)>>에는 천 수백 명이 모여 기악백희(伎樂百戱)를 하였는데 그네도 뛴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양반층에서는 그네뛰기가 천한 놀이로 간주하고 금지했으나 민간에서는 단오 날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그네를 즐겼으며, 그네는 여자들만의 놀이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네뛰기가 여성들의 전용놀이로 자리매김 된 데는 아래와 같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 비상의 욕망  인류는 동물보다 원초적인 본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동물을 닮으려고 애써왔다. 그 중에 인간이 새처럼 날고 싶어 하는 환상과 욕망이 강열했다. 새는 부권제시대가 확고해짐에 따라 남성신의 성격을 띄게 되었으나 본래는 여성신이었다. 즉 조신은 본래 여성신이었다.  조류의 특징은 날음이다. 인간이 새처럼 날고 싶어 하는 환상과 욕망을 실현하는 데는 같은 성격을 지닌 여성이 적격자다.  둘째 치맛바람 원리  조류의 날음은 바람과 연관되어 있다. 고대인들은 조류가 바람을 일으키고 또 조류가 날을 수 있는 것은 바람을 마스터한 때문이라 믿었다. 여성은 치마를 입는다. 치마는 바람을 일으킨다. 고대인들은 여성이 창공을 날을 수 있는 것은 치맛바람의 덕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민간에서는 그네뛰기를 구경하는 남자들이 여자들이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하늘높이 날을 때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전설이 있다.  현대인들은 여성의 치맛바람을 많은 남성을 정복하는 일종 ‘부정행위’로 간주하지만, 본래 여성의 치맛바람은 새처럼 비상하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다가 음양사상이 심화됨에 따라 여성의 치맛바람은 천신을 ‘유혹’하는 일종 무기로 간주되어왔다. 무당이 치마를 펄럭이며 굿을 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셋째 영신의식(迎神儀式)  단오 날에 여자들이 그네를 뛰는 것은 양신을 맞이하는 하나의 종교적 의식이다.  단오 날부터 양이 왕성해지는 바, 일조량이 많아져 곡식이 무럭무럭 자란다. 그런데 인간이 그 어떤 종교적 의례로서 양신을 맞이하지 않으면, 곧 양신은 노여워서 심술을 부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일년 농사를 망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양신을 맞이하는 여러 가지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그네뛰기가 포함된다.  양신은 천신이자 남성성을 지니고 있다. 남성성을 지닌 양신을 맞이하려면 여성이 나서야 한다. 그런데 여성이 선 자리에서 치마를 펄럭이거나 가랑이를 번쩍번쩍 쳐드는 춤을 추는 등 굿으로만은 양신을 모시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여자가 직접 하늘에 올라가 양신을 모시고 지상에 내려오는 의식을 치러야 한다. 그 의식이 곧 여자들이 그네를 뛰는 것이다. 하늘공중에 방울을 달아매놓고 여자가 발로 차게끔 하는 것은 천신과 교접했다는 신호이다.  그리고 우리민족이 그네뛰기가 줄곧 흥행해왔던 것은 한복의 매력이 크게 한몫을 했을 것이다. 한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아울러 고운 한복을 입고 하늘공중을 나는 여인은 흡사 선녀와 같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그 어느 민족에 비해 신선사상이 강했다. 이런 맥락에서 여자들의 그네뛰기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을 것이다.  단오 날에 여성들이 그네뛰기를 하는 외에 또 널뛰기도 한다. 그네뛰기는 밧줄을 이용하여 수십 미터 높이를 날을 수 있으나 널뛰기는 나무의 탄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십 여 미터를 초과하지 못한다. 널뛰기의 높이는 비록 그네뛰기 높이에 못 미치나 여성들이 공중에서 다양한 동작을 펼칠 수 있다. 이를테면 그네뛰기는 하늘공중에 매달아놓은 방울을 차는 것이 묘기이지만, 널뛰기는 가랑이를 가위처럼 벌렸다 모았다 한다든가, 두 다리를 앞뒤로 벌렸다 모았다 한다든가, 손에 훌라호프를 쥐고 두 다리를 넣었다 뺐다하는 등 그 동작이 매우 다채롭다.  널뛰기도 그네뛰기처럼 첫째는 비상의 실현이요, 둘째는 치맛바람의 원리이요, 셋째는 양신을 영접하기 위함이다.  
43    "왜 재입국정책이 없어요?" 댓글:  조회:6400  추천:78  2008-05-25
왜, 재입국정책이 없어요? “따르릉, 따르릉!” “재입국정책이 나왔다면서요.” “아닙니다.” “신문에도 나고 TV뉴스에도 보도했다던데요.” “그런 게 아니라 ······” 요즘 재한조선족관련신문사와 단체들은 이러한 내용의 문의전화가 빛발치고 상담원들은 그에 정확한 답변을 해주느라 기타 업무가 마비될 지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이다. 사건의 발단 계기는 이렇다. 한국법무부는 중국사천지역의 강진피해를 간접적으로 도우려고 재한중국인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오는 6월 15일까지 합법체류자가 출국할 겨우 재입국비자를 발급하는 수속비(3만원)를 면제하고, 불법체류자가 자진귀국 할 경우 벌금을 면제하고 입국규제를 없애고 초청이나 한국어능력시험을 거쳐 재입국할 수 있다는 ‘임시조치’를 내놓았다. 법무부의 상기 임시조치를 조선족들이 잘못이해하고 재입국정책이 나왔다고 헛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재입국정책을 바라던 불법체류자들은 사실여부를 확인하려고 관련단체에 부지런히 전화를 걸어오고 있다. 지난 3월 14일 모 교회단체의 주체로 장충동체육장에서 법무부에 중국동포에 대한 완화정책을 펼칠 것을 바라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 때도 역시 요즘처럼 불법체류자들이 그 행사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관련단체에 “재입국정책이 나왔다면서요.”라는 문의전화를 많이 했다. 상기 두 사례는 조선족들의 이해력부족으로 빚어진 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불법체류자들이 재입국정책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증거라 필자는 본다. 법무부는 불법체류자들이 그토록 바라고 있는 재입국정책을 왜 시행하지 않을까?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한 관계자는 공개석상에서 “만약 조선족에게만 재입국정책을 시행하면 다른 외국인들이 불만이 있을 것이고 그들과 형평성을 맞추려면 앞으로 일정기간 재입국정책을 시행하기 어렵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을 결과적으로 보면 이명박 정부는 조선족을 다른 외국인과 같이 취급하고 특별한 우대정책을 펴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실 노무현정부로부터 이명박 정부로 과도할 당시 수많은 문필가들이 기왕에 이회창 씨가 보스로 있던 한나라당이 조선족에 대해 ‘비친화’적이었던 것을 감안하여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시 조선족에 대해 ‘비친화’적인 정책을 시행할까봐 우려하여 <<이명박 정부에게 바란다.>>는 내용으로 된 글을 많이 썼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없는 외침이 되고 말았고 우려했던바와 같이 이명박 정부는 확실히 조선족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만약 노무현정부가 계속 집정한다면 적어도 2005년, 2006년 두 차례 동포자진귀국지원정책을 시행한 것과 같이 금년에 역시 제3차 프로그램을 꼭 시행할 것이라는 것이 동포들의 생각이고, 이명박 정부는 불법체류동포들에게 합법적으로 길을 열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강경수단인 단속을 통해 강제퇴거 수단으로 불법체류자를 줄이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차이나타운으로 불리우는 가리봉동 시장 일대를 보더라도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단속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매우 심해 그 일대 살고 있는 동포들은 물론이고 한국 상인들마저 장사에 지장이 있을까 한숨을 짓고 있다. 만약 합법적인 길을 열어주는 동시에 단속을 가강한다면 누구나 찬성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고 단속에만 의존하는 방침은 이명박 정부가 조선족에 대해 ‘비친화’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재입국정책과 단속방침만 갖고 이명박 정부가 조선족에 대해 ‘비친화’적이라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으나 어느 나라 정부든지 혹은 어떤 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이념과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조선족은 이명박 정부에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언제 가면 조선족이 고국에서 진정 ‘동포취급’을 받고 살게 되겠는지? 그 길이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42    생식숭배와 박(匏) 신앙 댓글:  조회:6498  추천:73  2008-05-18
생식숭배와 박(瓢)신앙      임동권 씨는 그의 저서 <<한국민속학논고>>포포편의 서두에서 “가을에 농촌을 여행하면 지붕위에 희고 둥근 박이 복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서 한국적인 정취를 한층 돋우거니와······”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러한 풍경은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마을에서도 볼 수 있다. 즉 한족(漢族)마을에서는 가끔씩 보이는 현상이지만 조선족마을에서는 가가호호 빠짐없이 보이는 풍경이다. 따라서 이러한 풍경이 조선족마을과 한족마을을 구분하는 요소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박에 대한 숭배의식이 도대체 조선민족에게서 먼저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한족에게서 먼저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선 단언하기 어렵다(일설에 의하면 박 신앙은 동남아에서 먼저 생겨났고 후에 중국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 왜냐하면 중국천지창조신화에 박씨(朴氏) 부부가 천지를 개벽했다는 전설이 있고, 복희와 여와가 박에서 나왔다는 신화도 있고, 또 맹강녀(孟姜女)가 박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 이러한 박에 대한 굵직한 신화전설이 있기는 하지만 박에 대한 민속이 발달하지 않았다.  박에 대한 민속, 풍속이 가장 풍부하고 또 뿌리 깊은 것은 아마 세상에서 한민족이 으뜸일 것이다. 한민족은 박의 실용성을 초월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 실례를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농촌의 도로 세거리목이나 사거리 변에 판류가 산포되고 식도가 꽂혀 있으며 그 옆에 바가지를 엎어놓은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은 가정에서 발병이 있을 경우에 간단한 고사, 동토 잡이, 푸닥거리 또는 사망이 있을 적에 하는 짓이니 병역을 예방하고 악귀를 축출하려는 양귀법의 일종이다.  둘째 치질, 황달, 소아의 태독에는 바가지 파편을 불에 태워서 그 분말을 환부에 바르면 완치된다고 한다.  셋째 역병이 유행할 때에는 무녀나 가족이 바가지를 마룻바닥에 엎어놓고 소리 나게 문지르며 또는 바가지를 장간(長竿) 끝에 매어 세워두면 무병하다고 하며 <<동국세시기경도잡지>>의 상원조에 의하면 남녀 유아들은 겨울부터 박 삼편을 청, 홍, 황색으로 물들여 배용했다가 상원 전야 중에 남몰래 노변에 버리면 소액이 된다고 하였다.  넷째 민간에서 바가지의 파편이 아궁이에 들어가는 것을 극히 꺼려하고 또 식탁 위에 바가지를 엎어놓으면 가내 불화가 생긴다고 한다.  다섯째 장사(葬事)가 있을 때 출장할 관을 실내에서 외부로 운반해 나올 때 문턱 밑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관을 들고 맨 앞에 나오는 사람이 토족으로 밟아 깨어지도록 한다.  여섯째 혼사 때 의식에 앞서 납폐를 드릴 때 채단을 든 자의 앞에 바가지를 놓고 토족으로 깨어지도록 하며 또 신랑의 가교가 신부 집 문전에 도착하면 신랑 집 가족의 한 사람이 박이나 호박을 통째로 가져다 땅에 던져 깨트린다.  일곱째 전승민담에 입에 붙은 표주박이야기가 있다. 요약해서 적으면 옛날에 어른의 명을 받고 급수에 간 소년이 물을 어른에게 올리기 전에 제가 먼저 물을 마신 바, 표주박이 입에 딱 붙어버리고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덟째 고대소설 흥부전에 의하면 바가지 속에서 신기한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흥부네 바가지에는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왔지만 놀부네 박 속에서는 무당, 사류(蛇類), 오물이 속출하였다.  아홉째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난생으로 되어있으나 민담에 의하면 신라의 박혁거세는 박 속에서 탄생했다고 하며 그래서 성을 박의 음을 따서 박 씨라 했다 한다.  열째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동분서주할 때 함께 모의에 가담하려는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한다는 결의를 맺을 시에 표주박으로 술을 권하고 받아 마시는 수작(酬酌)을 했다고 한다.  열한째 한민족은 타향살이 길에 나설 때 반드시 몸에 쪽박을 차고 다녔다.  열두째 조선족은 신혼 첫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일가친척이 모인 앞에서 신랑이 부엌에서 온돌에 앉아 있는 신부를 향해 바가지를 던진다. 만약 바가지가 하늘을 향하면 남아를, 땅을 향하면 여아를 생산한다고 한다.  열셋째 조선족은 잔칫집에서 바가지를 물독에 엎어놓고 반주하면서 오락을 한다.  위 열세 가지 실례로부터 우리는 한민족이 세상에서 바가지에 대한 민속이 가장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왜 인간은 박을 숭배하게 되었을까?  <<생식숭배문화사상>>의 저자 조국화(趙國華) 선생은 중국역사에서 박에 대한 신화전설을 종합하고 분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박 혹은 과류의 인간탄생신화가 실제로는 여성의 자궁이 인간을 탄생시킨다는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또 “여자가 생산 시에 양막이 파열되어 양수가 흐르고 태판이 벗겨지고 또 양수가 혈액과 혼합되어 흘러나온다. 자궁의 오물 특히 분만 시의 양수는 일단 분만 시에 신생아가 흡수하면 곧 질식하여 죽는다. 옛사람들은 양수와 혈액이 태아의 생존에 일종 위협이 된다고 착각했다. 이러한 원시적인 연상사유가 여성이 분만 시에 흐르는 양수와 혈액을 과장하여 홍수로 상상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아의 무사강생은 곧 그들을 박 혹은 과류로 상징되는 자궁이 보호한 결과라 생각했다.”고 논증했다.  한민족의 박에 대한 숭배의식도 생식숭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41    부처님이 오신 날 성교를 금지한다? 댓글:  조회:6671  추천:64  2008-05-08
부처님이 오신 날 성교를 금지한다?      음력 4월 8일은 석가탄생일이다. 민간에서는 사월초파일을 부처님이 오신 날이라고 한다. 물론 이 날에 모든 절간에는 부처님을 뵈러 간 불도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일부 기특하신 불도들은 그날은 물론 전날부터 불경(佛經)에도 없는 한 가지 ‘계율’을 철석같이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곧 사월초파일 부처님을 뵈러 가기 위해 전날부터 성교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교를 하면 불결하고 그래서 부처님이 노여움을 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불도들이 부처님이 성교를 불결행위로 여기신다고 하면서 아들을 점지해 줄 것을 부처님에게 비는 기자(祈子)신앙행위는 웃기는 일이 아닌가? 또 평소에 보살상을 모신 방에서 성교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기 이러한 ‘금기계율’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아무튼 불경에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 여기서 고대인들은 성교행위를 어떻게 성스럽게 보았고 보살의 본래 모습은 어떤 이미지였나에 대해 살펴보자.  당대(唐代) <<속현괴록(續玄怪彔)>>, 송대(宋代) <<태평광기(太平廣記)>> 등 여러 문헌에 <연주부인(延州婦人)>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옛적에 연주에 한 부녀가 있었다. 그녀는 살결이 희고 자태가 매우 고왔으며 스물네댓 되는 나이에 홀로 도시를 떠돌며 살았다. 어린 소년들이 그녀와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그녀와 잠자리를 요구하면 그녀는 스스럼없이 받아주면서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수년 후에 갑자기 사망했다. 당시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에 대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술잔치를 벌리고 상구(喪具)를 마련하여 장례를 치뤘다. 그녀가 집(가족)이 없었으므로 길 왼편에 묻었다. 구정 즈음에 홀연히 한 오랑캐 스님이 서역(西域)에서 와 묘지를 보더니 방석을 깔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예를 올리고 향을 피우면서 수일 동안 찬탄을 올리며 떠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의아해 스님에게 물었다. “이 여자는 음탕해서 모든 남자를 지아비로 삼았으며, 이 여자가 의지가지 할 데가 없는지라 여기에 묻었는데 왜 스님께서는 경이롭게 대하시는 겁니까?” 스님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 여자는 대단한 성인이올시다. 자비를 베풀어 세속지욕을 마다하지 않고 잠재웠으며, 이 여자의 쇄골이 보살처럼 순연(順緣)을 다 하였기에 성인이라 부를만하지요. 믿지 못하겠으면 열어서 검증해 보시지요.” 사람들이 그 즉시로 묘를 파헤쳐보니 과연 전신의 뼈가 쇠사슬 모양으로 얽혀 있었으므로 스님의 말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녀를 경이롭게 여기어 제단(齎)을 설치하고 탑을 세웠다.    당나라 시기는 유교문명이 뿌리내렸고 따라서 정조가 매우 강구되었다. 당연히 연주부인처럼 모든 남자를 지아비로 삼은 여자는 방탕하고 음탕한 여인으로 취급되기 마련이었다. 허나 오랑캐 스님은 오히려 연주부인을 성인이라 치하하고 보살에 비견했다. 현대인의 인식으로 말할 때 이는 매우 어처구니없는 일로 여길 수 있으나, 이것이 곧 불교의 본래 모습이었으며, 고대문명의 본질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편 관음보살은 본래 인도에서는 남성상이었으나 중국과 한반도에서는 여성상으로 인식되어왔는데, 이는 음양조화를 추구하는 중국문화 본질에서 유래되었었다. 즉 보살은 여와나 서왕모와 같은 인물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여와나 서왕모는 성교를 많이 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여중 여이며 여신이자 성녀였다. 비너스도 본래 모습은 여와나 서왕모와 같은 이미지였다. <<중국신화연구>> 저자 오천명의 지적에 따르면 “보살은 본래 많은 ‘아주(阿注:성상대)’가 있는 존재였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녀의 본질은 본래 성교를 많이 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여인상징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금욕적인 여인의 이미지로 변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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