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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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국양제(一國兩制) 유래
2013년 09월 16일 14시 53분  조회:5542  추천:2  작성자: 김정룡
일국양제(一國兩制) 유래
 
중국이 1997년 홍콩을 영국 수중에서 되찾으면서 일국양제의 정치체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등소평의 주도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다. 당시 세상만사 지식, 특히 역사지식에 눈이 어두웠던 필자는 일국양제의 정치체제가 등소평의 ‘창작품’으로 간주하고 인류역사에 없던 새로운 획기적인 발상인 줄로 알고 있었다. 10여년이 지나 역사문화에 흥미를 갖고 진지하게 파고든 결과 일국양제의 정치체제는 등소평의 새로운 획기적인 발상이 아니라 중국역사(한나라 초기)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울러 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의 명언 “모든 현대사는 역사이다”가 만고의 진리라는 것을 깨달게 되었다.

천년만년 이어가리라 믿었던 진제국이 불과 16년 만에 멸망하고 유방의 한조가 시작되었다. 진제국이 비록 중국제국역사에서 가장 단명한 왕조였으나 어찌되었던 중국 최초의 제국역사의 서막을 연데 대해선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역사에는 아이러니가 굉장히 많았다. 일례로 전국시대 후기에 들어 전국7웅이 남아 겸병을 벌일 때 사실 진나라는 서북쪽에 위치한 편벽한 ‘촌놈’의 나라였고 문화적으로도 초나라,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 등에 비해 후진 국가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세련된 나라들이 최후의 패주가 된 것이 아니라 가장 ‘촌놈’의 나라로 여겨졌던 진나라가 통일(정확히 말하자면 統一이 아니라 一統이었음)의 역사 과제를 완수하는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사건을 그저 아이러니로만 취급할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촌놈’의 나라라 평가받았을지언정 통일을 이뤄냈다면 필경 그럴만한 소이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 소이연이란 대체 무었일까?

독자들은 모두 상앙변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상앙변법의 주요 내용으로서 봉건의 핵심이 되는 ‘분봉제’와 ‘정전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황무지개간을 장례하였다. ‘분봉제’와 ‘정전제’의 폐지는 제후국인 방국의 폐지를 의미하고 새로운 황무지개간을 통해 군량도 해결하고 경제적으로 재정의 건실함을 갖게 되었다. 대부와 사 집단의 귀족세습을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관리임명제를 실행하였다. 이 또한 봉건으로 된 방국으로부터 제국으로 가는 길을 닦아놓은 획기적인 개혁이었다.

상앙의 변법을 통해 진나라는 제국의 틀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진나라가 통일을 이룬 소이연이다. 하지만 진제국의 수명은 매우 단명이었고 그 뒤를 이은 한조는 천하를 얻고 나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 고민의 초점은 정치체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이다. 진나라 초기에도 일부 인사들이 봉건제도인 방국을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일부는 군현제를 중심으로 제국을 건립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시황제는 봉건제도인 방국은 낡은 것이고 아울러 천자는 허수아비여서 강력한 권력을 지향하는 시황제의 맘에 들지 않아 군현제를 선택하였고 이 정치제도가 2천년이나 지속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군현제를 실시한 진제국의 수명이 매우 짧았기 때문에 유방의 한조 초기에 한신을 비롯한 충신들이 군현제가 아닌 봉건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하였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군현제가 봉건제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만약 유방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면 새로운 내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방은 양쪽의 의견을 모두 수렴하여 경기지역(한국의 京畿라는 표현이 중국역사에 있었음)을 포함한 수도권에서는 군현제를 실시하고 기타지역은 봉건의 방국제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일국양제이다.

한조 초기 유방이 궁여지책으로 일국양제를 실시하긴 하였으나 봉건 방국들의 반란이 여기저기서 그치지 않았고 ‘문경지치’로 소문난 태평성세 시절에도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강력한 군주인 한 무제가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체적으로 군현제를 지방에까지 확대 실시하여 제국의 정치체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군현제의 기본은 귀족세습제가 아닌 관료임명제이고 관료들은 한나라 시기에는 ‘천거(薦擧)’, 위진남부조 시기엔 ‘찰거(察擧)’, 수`당부터는 ‘과거(科擧)’에 의해 등용되었는데 이들을 사대부라 부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士)는 공부한 귀족집단, 대부는 권력을 가진 관료집단이며 공부한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곧 ‘사대부’라 부른다. 이 사대부 집단이 제국의 관료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2천년 제국역사를 살펴보면 지방할거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례는 많았으나 사대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권을 위협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조가 518년 동안 지속된 역사는 사대부 집단의 역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조선왕조의 장수비결에 있어서 그저 막연하게 반도인의 민족기질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마땅히 사대부역사를 중점으로 풀어야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조선왕조의 장수비결, 이와 관련해선 별도의 주제로 발표할 계획이다.

2천 년 전 중국역사에 일국양제의 정치체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비록 역사에 존재해 있었던 사실도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저 역사로만 남을 것이나 후세의 현명한 지도자가 나타나 그것을 잘 활용한다면 현시대에 도움이 크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역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울이란 말이 십분 맞다. 등소평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고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만약 홍콩을 수복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대륙의 정치체제에 맞춘다면 큰 혼란이 조성되었을 것이나 등소평의 현명한 일국양제의 도입에 의해 무리가 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볼 때 한조 초기의 일국양제와 등소평의 일국양제가 다른 점이라면 전자는 실패했고 후자는 성공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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