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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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와 장성택, 2인자의 비운
2014년 06월 14일 13시 11분  조회:5132  추천:4  작성자: 김정룡
김종서는 조선왕조 초기 세종부터 단종까지 삼대 왕을 거쳐 요직에서 활약했던 인물이고 장성택은 이북 현대사에서 역시 삼대 ‘임금’을 거치는 과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김종서와 장성택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2인자 역을 맡았던 이력이 같으면서 삼대 ‘임금’을 거친 역사도 비슷하며 최후 ‘왕실세력’에 의해 제거된 운명도 비슷하다. 다만 김종서는 세종대왕의 손자 단종의 왕위를 지키려다가 수양대군한테 철퇴를 맞고 저승에 갖고 장성택은 현 ‘임금’한테 형장의 이슬이 된 점 조금 다를 뿐이다.

김종서와 장성택은 여러 ‘임금’을 거치면서 정치적 입지가 그 누구보다 확고하여 2인자가 되었는데 왜 제거 당했을까?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역모를 일으켜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인물이었다. 조선왕조 왕실법에 의하면 왕족은 조정의 요직에 출마할 수 없다. 수양대군은 장차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려면 일단 먼저 조정에 진출하여 정치성과를 올려야 했다. 당시 수양대군의 의도를 강력하게 가로막은 인물이 바로 김종서였기에 수양대군이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제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왜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하였을까? 11세에 왕이 된 단종이 나이 탓에 김종서를 비롯한 사대부들에게 휘둘리울 수밖에 없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왕실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수양대군이 나서 왕실의 권위를 되찾고 강력한 군주가 되어 이씨조선의 위엄을 다지려는 목적이 강렬하였다.

단종뿐만 아니라 518년 조선왕조역사에서 어린 왕을 올려놓고 아낙네들이 수렴청정하고 사대부들이 천하를 쥐락펴락 하는 사례가 많았다. 중국 청나라말기   자희태후가 수렴청정 하였고 사대부들이 나라를 이끌어 간 사례와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조선왕조에서 수렴청정 하는 아낙네들이 자희태후처럼 강한 인물이 못 되면 천하는 사대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사대부란 구경 어떤 존재인가?

중국 주나라 시기 대부(大夫)는 제후 밑에서 나라 살림을 맡은 자이며 세습귀족이었다. 사(士)는 공부한 선비이다. 본래 대부와 사는 분명히 계급이 달랐지만 제국시대 진입한 이래 공부를 통해 출세하여 권력을 쥐면 사대부(士大夫)가 된다. 중국에서는 제국시기에 진입한 이래 사대부들이 세습귀족이 아니고 임명제를 통한 관리였으며 수나라 이후로는 과거제를 통해 출세한 관료들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들도 중국 사대부역사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무리가 없다.

김종서와 장성택은 사대부들 중 으뜸의 요직에 있었던 사대부라고 보면 하자가 없을듯하다. 두 인물이 다르다면 김종서는 비왕족출신이라면 장성택은 김일성 주석의 사위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이며 김정은의 고모부 되니 ‘왕족’ 출신관료라 말할 수 있다. 왕족출신이든 비왕족출신이든 두 사람 모두 ‘사대부’이며 또 두 사람은 기존의 ‘왕’에 충성하는 사대부정치 본연을 지킨 인물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중국이든 조선이든 지방토호세력들이 반기를 들고 역모를 일으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도한 사례는 있어도 사대부들이 역성혁명을 일으킨 사례는 중국도 조선에도 없었다. 이것이 조선왕조 518년 장수비결 중 하나이다. 사대부들은 왜 역성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정확히 말해서 왜 일으키지 못했을까?

중국 한나라 무제 때 동중서가 군주의 권리는 하늘이 내린다는 이른바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주장하고 따라서 군주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은 신의 영역을 건드리는 으뜸의 죄로서 신성불가침의 성역을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이 유교의 왕도법칙이 되었고 사대부들은 유생출신으로서 모두 이 왕도법칙을 철칙처럼 지켜야 했다.

고려 말기 무너져가고 있는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와 썩어빠진 고려를 때려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려는 정도전 모두 유생출신 사대부들이다. 다만 그들이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 가는 길이 달랐던 것이다. 정도전은 유배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고달픈 고난생활을 친히 목격하고 몸으로 부대끼며 체험하였기에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 즉 백성은 배를 태울 수도 있고 배를 번질 수도 있어 군주의 도보다 백성의 삶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맹자의 이상국가를 표방하여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려고 유교에서 가장 꺼리는 역성혁명마저 불사하였던 것이다. 정몽주는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목숨처럼 받들고 왕씨 일가의 군주통치를 지켜내려고 온몸을 던져 싸웠던 것이다. 결과는 정몽주가 실패하고 정도전이 성공하였지만 그 이면을 따져보면 이성계라는 막강한 무관이 결국 승패를 가르는 잣대가 되었던 것이다. 즉 모택동이 즐겨 말하던 “총대에서 정권이 나온다.”가 진리로 작용하여 470여년의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의 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는 조선조 518년 동안 정도전의 백성 위주의 왕도정치 이상과 이념이 먹힌 것이 아니라 정몽주의 성리학을 사대부들이 받들어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을 절대 진리로 간주하고 크고 작은 당파싸움과 역모사건이 빈번하였으나 종당에는 518년 동안 이씨 성이 바꾸지 않은 왕조정치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사대부들이 왕조정치를 지키는 첨병이 되어 왕조의 수명이 길어졌지만 김종서와 같이 중종 때 2인자 역을 맡았던 조광조 역시 제거당하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이퇴계와 같이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았던 선비들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2인자 역을 맡았던 사대부들 및 그 추종자들은 그 당시 왕한테 제거당하지 않았다면 후세 왕한테 변을 당하거나 한명회처럼 연산군한테 죽어서까지 부관참사(剖棺斬死)를 당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대권도전에 최대 걸림돌이 되어 제거 당했고 장성택은 현 ‘임금’이 조카라 어릴 적부터 자라는 모습을 겪어오면서 내심의 존경이 부족해 절대권력 군림에 걸림돌이 되어 역시 비운으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장성택의 처형사건을 두고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말들이 많은데 이북은 유교적인 사회주의국가(지도자의 세습제)로서 ‘짐(朕)’의 한마디가 곧 법인 왕조시대의 예치가 잔존해 있기에 민주사회 법치 잣대로 논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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