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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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세계적인 석학이 없는 이유
2009년 04월 29일 20시 19분  조회:6441  추천:49  작성자: 김정룡

내가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사람들로부터 “세상에서 유태인이 가장 총명하고 그 다음으로 한국인이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참말로 그럴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한민족과 유태인의 공통점이라면 두 민족이 주변 국가와 민족들로부터 이리 치우고 저리 치우는 동네북과 같은 불운의 역사로 흘러왔다는 것일 뿐, 한민족은 유태인처럼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 사건도 없었고, 국제적으로 명함을 올릴만한 인물조차 없다.

우선 유태인은 세계를 뒤흔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예수라는 인물을 배출했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와 칼`맑스, 막스`베버, 니체 등 세계적인 사상가 및 미국정치, 금융, 언론을 장악한 위대한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이에 반해 한민족은 말로는 반만년의 문화역사를 갖고 있고 유태인에 비견해서 자화자찬하지만 실상은 과학과 문학분야의 노벨상수상자가 단 한 명이라도 없을 뿐더러 국제적으로 명함을 내밀만한 석학조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름 있는 유태인을 제쳐놓고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는 노벨과학상과 문학상수상자가 수두룩한데 유독 우리민족만 제로인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가 있는 민족과 종교가 없는 민족>

인류문화를 논함에 있어서 종교를 떠나서는 말이 안 될 정도로 인류역사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따라서 자체종교가 있는 민족은 정체성과 주체성이 뚜렷한데 반해 자체종교가 없는 민족은 정체성과 주체성이 희미하다.

세계 3대종교로 꼽히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가운데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모두 유태교에서 파생되어 생겨났을만큼 유태교는 뿌리가 굳건하며 유태인은 유태교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유태인답게 만들어왔고 살아올 수가 있었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민족으로 거듭나고 있다. 유태인의 지혜를 탈무드지혜라고도 하는데 탈무드는 유태종교의 핵심인 율법을 풀어 쓴 유태인의 삶의 지침서이다. 그래서 유태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유태인의 총명과 지혜는 탈무드에서 온 것이라고 진단한다.

멀리 말고 이웃나라인 중국은 4천년의 문자역사와 사대발명과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할만한 문화가 뚜렷하며 특히 유교와 도교는 중국인을 중국인답게 만든 인간타입을 형성시킨 양대 문화이다. 아울러 중국인은 후한 말에 불교 를 도입하여 도교식 불교로 만들었는데 이를 격의불교라 한다. 중국은 불교의 도입에 따라 언어를 발달시켰고, 변문을 통해 문학과 예술이 크게 발전했고 유교와 도교와 어울려 중국인의 삶을 풍부케 했다.

일본은 자체종교인 신도가 있고 일본인의 인간타입은 신도적이라는 지적이 이미 8세기 초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통해 밝혀졌다.

<문명이 인간타입을 형성시켰다>

세계문명을 크게는 중국문명, 인도문명, 기독교적인 서방문명 등 세 가지로 나누고(이는 양숙흘의 나눔법이다), 작게는 유교문명, 불교문명, 기독교문명, 이슬람문명, 유태문명, 아프리카문명, 남미문영, 일본문명 등으로 나눈다.

과거에는 일본을 유교문명권인 중국문명에 포함시켰다가 미국 인류문화학자 루드`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이란 책을 출간해낸 이후부터 서방에서 일본을 중국문명과 분리해서 단독문명으로 취급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 문명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한 문명이 물어야 할 것은 고층빌딩의 건립이나 도로건설이나 대학설립이 아니라 그 문명이 형성시킨 인간타입이다.” 이는 고홍명이 그의 <<중국인의 정신>>에서 밝힌 대목이다. 물론 고홍명은 서양문화의 병폐를 꼬집고 중국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한 말이지만 한 문명이 그 민중군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킨다는 말은 진리라 나는 생각한다.


한 문명이 그 민중군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시켰다는 견지에서 볼 때 한민족도 필경 중국인과 일본인과 구분되는 자체인간타입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아울러 한민족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킨 자체 종교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문명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그것이 바로 한민족의 풍류도이고 신라시대 화랑도였으며 통속적으로 말해서 바람문화였다. 단재`신채호는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화랑을 모르고 조선민족을 말하는 것은 마치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운운하는 것처럼 우둔한 짓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화랑도야말로 우리민족의 인간타입을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는 해석이다.

사실 고려 중기까지만해도 우리민족은 자체 인간타입을 형성시킨 자체문화가 뚜렷했다. 그러다가 신채호의 지적처럼 “국수파인 묘청집단을 숭송파인 김부식집단이 쓸어버리는 바람에 우리 것을 잃기 시작했고,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신유학 외의 모든 것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바람에 조선반도는 경직될 대로 경직되었고 우리 것을 철저히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선조 초기 세종대왕이 박연에게 민간에 흝어져 있는 민속, 풍속을 수집해 들이라고 명하였으나 그 후 유교일변도로 번지면서 민속, 풍속을 유교에 위배되는 이단이라 취급하고 전부 없애버려 현재까지도 우리민족자체인간타입을 형성시킨 문화뿌리를 캐낼 수 없을 정도로 소실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경직된 조선조는 희망이 없었다>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유학자들이 학문을 독점했고, 심지어 가령 누가 도교서를 번역작업시도를 하려고 해도 이단으로 몰아부치고 불교를 철저히 배격했고 조정으로부터 민중의 삶에 이르기까지 전부 유교패턴으로 도배될 정도로 유교단일화로 되었다. 거기다 조정은 왜군의 침입을 눈앞에 두고도 당파싸움에 휘말렸고, 명과 청의 교체시기에 만주족을 배척하고 명을 받들고 소중화로 자칭할 정도로 공자왈 맹자왈에 빠져 있었다.

더욱이 고려 말까지 개성을 비롯해 상업이 발달해 주변국은 물론이고 멀리 페르시아 상인들까지 드나들 정도로 대외교역이 활발했으나 조선조는 유교에 빠져 사농공상의 서열을 철저히 지키면서 상업을 경시하는 바람이 불어 대외교역은 물론이고 국내 상업이 얼어붙어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고단하게 되었다. 여기에 자연재해까지 겹쳐 1860년대에 이르러 만주땅에 이주하는 바람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정은 무능하다못해 동학혁명을 진압하지 못해 청군의 요청을 바랐고, 이것이 기회라 엿본 일본이 끼어들어 중일갑오전쟁이 발발했고, 급기야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사유람단>

16세기 포루투갈과 에스빠냐가 대외식민지 개척에 나설 때 일본은 위기를 느끼고 1580년대 초 소년견구단을 유럽해 파견했다. 그들이 8년 간의 학업을 마치고 세계지도를 작성해 풍신수길에게 바쳤는데 풍신수길은 그 세계지도를 보고 조선과 중국침략의 야심을 키웠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은 많은 유학생을 서구에 파견하였고 서구문명을 수입하는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시켰고 1868년에 이르러 명치유신을 통해 서구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과거 일본이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던 시기는 옛말이 되었고 꺼꾸로 중국이 일본을 배우러 떼를 지어 갈 정도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었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을 겪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1860년대에 이르러 구미에 소년유학생과 성인유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엄복은 과학뿐만 아니라 다윈의 진화론을 중국에 전파했고 서구사상을 중국에 전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유학생들은 구미 데모크라스와 사이언스를 중국에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인문분야에서는 고홍명은 9개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정도였고 최초로 <<논어>>를 서양에 번역전파했으며 서구문명을 비평하고 중국문명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중국인의 정신>>이란 책을 써 서구를 놀라게 했으며 “한 문명이 그 민중군체의 인간타입을 형성시킨다.”는 이론을 내놓아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고홍명의 뒤를 이어 임어당은 <<중국인>>, <<생활의 발견>>등 저서를 통해 서구문명을 비평하고 중국문명을 서구인들에게 정확히 인식하게끔 하는데 정력을 몰두했다. 고홍명과 임어당은 구미에서 생활하면서도 종래로 양복을 입지 않았고 줄곧 중국 전통복장인 다부산자를 입고 살아왔다. 임어당은 제2차 세계대전기간 노벨상이 중단을 맞는 바람에 노벨상수상기회를 놓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공인하는 석학이다.

임어당과 동시대에 양숙흘은 <<동서양철학과 문명비교>>를 통해 세계문명을 새롭게 포괄적으로 진단해냈다. 채원배, 호적등은 소장파학자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고 강유위, 양계초 등도 서구에서 인정하는 대학자들이었다. 일본유학을 거친 노신도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문인이다.

자아, 일본은 중국보다 한발 앞서 개화했고, 중국은 비록 일본보다 뒤졌지만 그래도 중국적인 것을 지키면서 서양 것을 도입하는 작업을 통해 세계적인 석학을 많이 배출해냈다. 허나 조선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미국과 일본에 유학생을 보냈으나 그들은 거기서 뭘 어떻게 배워야할지를 몰라 놀다가 귀국했다고 해서 그들을 신사유람단이라는 별명을 붙혀주었다.

<조개떡 하나 갖고 서울에 못간다>

어떻게 일이 있었을까? 우리말 속담에 조개떡 하나 갖고 서울에 못 간다는 속담이 있다. 무슨 말이냐!

과거 중국학자들은 학자라면 유불도에 모두 정통했다. 주자는 본래 도학에 심취해 있다가 불학에 흥미를 느꼈고 급기야 구국처방으로 내놓은 것이 신유학이었듯이 중국학자들은 모두 주희처럼 세 가지 학문에 통달한 사람들이다. 이는 한 가지 학문만 고집하고 다른 학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새로운 학문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과 머리가 열려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중국 학자들은 구미에서 새로운 학문을 접촉하고 접목하기가 쉬웠고 아울러 문명비평가로도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도 에도시대에 낮에는 주자학을 배우고 밤에는 양명학을 학습하는 이른바 “주주야명”을 견지하므로써 다른 학문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머리를 열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 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가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 반해 조선은 조선조 500여 년을 통해 우리 것을 전부 잃어버리고 주자학 하나에만 매달리다 보니 마음과 머리가 경직될 대로 경직되어 개화기 구미나 일본에 막상 가보니 마치 도랑물 고기가 망망대해를 만나 어떻게 헤염치고 어떻게 적응하고 바닷물 고기들의 장점을 어떻게 배워야할지를 몰라 그냥 죽어버리거나 도랑물이 그리워 되돌아는 격이 되고 마는 꼴과 같았다.

<문화의 단절>

역사란 흐름이다. 마치 물이 발원지에서 발원하여 강을 이루고 바다에 흘러가듯이 하지만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우회곡절을 겪는다.

이 지구상의 모든 부족과 민족은 초창기에는 모두 자체인간타입을 형성시킨 문화내지 문명이 있었다. 하지만 물이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르듯이 문화내지 문명은 강하고 우수한 것이 약하고 낙후된 곳에 흘러들어 본문화내지 본문명을 파괴하며 소실되게 만든다. 이것이 인류문명의 역사흐름이며 본문화내지 본문명이 파괴되고 소실되는 것을 문화 혹은 문명의 단절이라 한다.

서구는 본래 찬란한 고대그리스와 로마문명이 있었는데 기독교 유입에 따라 천년 동안 신이 통치하는 암흑시대를 맞아 문명이 단절시기를 겪다가 오늘의 서구가 있기까지는 많은 진통을 겪었다. 브루노와 갈릴레오가 지구가 돈다고 말해 종교재판소의 재판에 의해 통닭이 되었거나 될 뻔했던 사건이 말해주듯이 기독교는 과학을 철저히 배격했다. 16세기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인간의 존엄을 주장했고, 과학자들을 살리기 위해 “신은 이 지구를 만들 때 마치 시계에 탑을 감아놓고 저절로 돌아가게끔 해놓고는 손을 뗐다.”는 주장을 하여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고 뉴턴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다윈의 진화론도 신을 모독한 행위라고 종교계에서 큰 반발이 있었다. 어찌되었든 서구는 종교와 과학, 종교와 정치의 분리시대를 맞아 근 200년 동안 크게 활발하게 움직여왔던 것이다.

중국은 서구와 같은 암흑시대가 없었고 유불도 3교통합을 추구해오듯이 줄곧 열린 사회로 흘러왔다. 비록 중국이 문혁을 통해 전통문화와 단절되는 시기가 있었으나 이는 근근이 10여 년의 일이다. 일본도 신도를 지키는 동시에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경직된 사회는 아니었고, 문화의 단절시대가 없었다. 이에 비해 유독 조선만 조선조를 통해 문화의 단절시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개화기를 맞이한 조선학자들은 세계적인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계적인 석학도 배출할 수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넓이와 깊이에 대하여>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고, 문화도 유구하여 인간타입이 넓이와 깊이가 있다. 일본인은 초창기 각박한 자연생활환경 때문에 넓이는 없지만 깊이는 있다. 이에 비해 한반도는 산수가 좋고 먹을 것이 딸리지 않아 인간타입은 낙천적이지만 넓이와 깊이가 없다. 거기다 조선조 경직된 사회를 500여 년이나 겪고나서 넓이와 깊이를 더욱 상실했다.

노벨상이라든가 세계적인 석학을 배출하자면 그 민족의 역사적인 넓이와 깊이가 있어야 된다. 현재 한반도와 해외 700만 겨레를 포함해 노벨상수상자가 없고(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수상은 여기서 제외로 함) 세계적인 석학이 없는 주요 이유가 바로 우리민족이 넓이와 깊이가 없기 때문이라 나는 진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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