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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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 해프닝
2010년 01월 04일 15시 57분  조회:4964  추천:23  작성자: 김정룡



그 때 그 시절 해프닝

2007년 2월 말에 있었던 일이다. 대만 모 신문사 기자가 강원도 스키관광을 왔다가 갑자기 맹장이 터져 복막염 때문에 서울 00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국어 한 마디도 모르는 대만기자는 영어를 잘하지만 의사나 간호사들이 회화가 되지 않아 내가 아침저녁으로 회진시간을 맞춰 중한, 한중 통역을 해주었다. 보름간의 치료를 거쳐 귀국하게 된 그 분이 나에게 사례금도 푼푼하게 주었고 귀국 전날 저녁 근사하게 한 턱 쏘았다.

그 분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대륙이 궁금했고 나도 대만의 이모저모에 대해 알고 싶어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남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나랏일을 얘기하다가 서로 지나온 인생 얘기로 화제가 돌았다.

나는 그 분한테 시골소학교 3학년 때 문화대혁명을 맞아 학업이 중단을 맞다시피 했고 초중부터 요구촌 시골학교에 민족연합반을 만들어 한어로 수업(초중이지만 과목이란 어문과 수학밖에 없었음.)받다가 동불사고중졸업을 반년 앞두고 다시 조선반으로 옮겨져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는데다 만날 이불짐을 둘러메고 농사일을 지원했던 굴곡 많은 학창시절을 얘기해 주었다. 그 분은 나보고 10년 동란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대학을 나왔는가? 고 물었다. 나는 급해 말고 차분하게 나의 과거사를 들어보라고 권했더니 흥미 있다고 얘기를 이어가라고 달라붙는다.

나는 1975년 7월 12일 동불사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시기 학생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명색이 고중졸업이지만 편지 한 장 변변히 쓸 줄 모를 정도로 수준이 영 개판이었다. 중학교시절 남들이 다 드는 공청단조직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낙후분자였다. 실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폐인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명색이 고중졸업이라고 정치 대장이 하는 말이 나의 졸업을 은근히 기다렸단다. 생산대 회계로 써먹을 계획이란다. 나는 회계사업이 골머리가 아파날 것 같아 거절했다. 화가 난 정치 대장이 나보고 5년 동안 양치기를 하란다. 내가 왜 아까운 청춘을 양과 같이 5년을 보내야 하는가? 고 대들었더니 김 서기 막내아들이 정치 각오가 덜돼 먹었다고 비판한다. 아무튼 나는 한 달 양치기 하고 그만 두었다.

정치 대장이 당의 호소에 거부하는 나를 괘씸해 기양저수지전투대에 보냈다. 보름 만에 나는 또 당의 호소를 거슬러 집에 돌아왔다.

그 후 농촌에서 멀쩡한 밭을 사다리 식 제전을 만들고 벼 가을걷이 지나자 조전을 만드는 일선에서 전전하다가 1976년 2월 운이 좋게 촌위생소에 취직했다. 본래 타고난 체질이 약해 농사일이 버거웠던 나는 남들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그 해 10월 19살에 용정현 제4기 맨발의사학습반에 입학하게 되어 이불짐을 메고 용정현병원에 가서 1년 간 의사공부를 하는 행운을 맞이했다.

맨발의사직업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민감한 반응이 있는 환자에게 어떤 주사는 금방 알레르기 때문에 급사하는 의료사고가 생길 위험이 커 늘 속이 조마조마했다. 한밤중에도 거리가 먼 이웃마을에 왕진을 다녀야 했다. 병보고 처방 떼고 약을 짓고 계산하고 돈 받고 주사 놓고 약 구입하면서 일인 다역을 소화해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밤중에 한족마을에 왕진가면 수고했다고 요리를 볶고 술상을 갖추는데 위생이 불결해 입에서 거리가 멀지도 않은 목구멍에 도무지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먹지 않으면 성의를 무시한다고 곱지 않는 눈총을 받아야 한다. 께름직한 기분으로 귀가해 몸이 고달픈데 잠은 자꾸 도망간다. 말하기가 민망하지만 나는 19살 때부터 아기 낳는 장소에 많이 다녔다. 당시 도시에 시집간 여성들도 대다수가 본가인 시골에 와서 몸을 풀어 더군다나 내가 다니는 차수가 많아졌다. 나는 산파가 아니지만 정맥주사조차 놓지 못하는 산파들 때문에 내가 나타나야 했다. 산모가 힘이 떨어지면 정맥에 포도당을 밀어야 하고, 쇼크하면 구급치료를 해야 했다. 시골에 위생시설이 엉망이라 새파란 총각이 해산장소에 나타난다고 산모음부를 가리느라 먼지가 풀풀 나는 탄자를 가리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기왕에 맨발의사 얘기가 나온 김에 두 가지만 더 말해보겠다. 우리 마을에서 7리 떨어진 상촌이란 마을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되게 순진하다. 내가 21살 때 있었던 일이다. 한 부녀가 17살 먹은 자기 딸애가 아래가 끄는 병을 앓고 있으니 치료해 달라고 청을 들었다. 가렵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적충병(滴蟲病)을 시골 아낙네들은 아래가 끈다고 표현한다. 내가 중의처방책을 뒤적여 여섯 첩을 지어주었는데 병이 치유되었다고 닭 한 마리 들고 인사 왔다. 이 일이 한 입 두 입 입소문을 탔다.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졌다. 21살 되는 총각이 일시에 부녀병을 잘 치료하는 ‘명의’로 부상했다. 나는 겁이 났다. 이러다가 장가도 못 가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나는 재간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천진하고 우둔했다. 만약 그 재간을 계속 써먹었더라면 지금쯤은 이렇게 애타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생계를 유지하느라 애쓸 필요 없이 큰 재산을 모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맨발의사 하느라 상상도 못할 일들이 많아 지금까지 그때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2살 되는 해 무더운 한여름에 타지에 시집 간 한 여인이 시골본가에 와서 몸을 풀었는데 산후출혈이 심했다. 친정엄마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생명이 위급하단다. 내가 그 집에 도착하니 미쳐 출혈을 수습하지 못해 온돌에 온통 피투성이었다. 지독한 피비린 냄새가 진동했다.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산모가 정신이 말짱하기에 총각을 꺼려할 것 같아 눈에 흰 천을 가리고 붕대로 아래를 틀어막고 25% 포도당을 정맥에 밀고 지혈제를 근육에 놓는 등 구급치료를 했다. 다행이 생명에 지장 없었다. 새파란 총각이 산후출혈을 처리하고 나니 그날 저녁 나는 밥을 먹지 못했고 싱숭생숭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후 그 산모는 나와 마주치면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나도 민망하기 마찬가지였다.

1977년 말경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었다. 도전해 보았지만 중학시절 공부를 너무 허술하게 했기에 인식분해나 방정식이 떠오르지 않았고, 오른손 왼손 법칙을 배운 기억은 있는데 가물가물했고, 역사는 진시황을 배우다 말았고, 지리는 아예 한 폐이지도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시험을 연거푸 해마다 보았으나 기초가 너무 빈약해 번번이 낙방이었다. 1978년 12월부터 나는 중학시절 한 마디도 배우지 못했던 외국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진전이 빨랐다. 그래서 일본어 전공에 도전했다. 해마다 일본어성적은 문제없었으나 총점이 몇 점씩 모자랐다. 그 주요 이유는 중학교를 한족반에 다녔기에 한어로 시험 보니 어문성적이 120점에서 50점을 넘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3년 처음 조선어로 시험을 봤는데 입시제도 회복 7년 만에 성공했다. 그 과정이 복잡했다. 1979년 봄 전주 맨발의사시험에 합격했으나 1981년 맨발의사직업을 때려치우고 입시에 뛰어들었는데 또 낙방했다. 소학교 교사를 하란다. 한 학기 하고 또 그만두고 입시에 매달렸다.

졸업분배는 연변1중이었다. 운이 좋게 첫 해부터 담임교사를 맡았다. 3년 동안 모든 정력을 아낌없이 제자들에게 쏟아 부었다. 경험이 전무 한 상황에서 신입생을 맡아 큰 차질이 없이 무난히 졸업시키니 학교지도부에 신임을 얻어 재차 담임을 맡게 되었다.

한 번 해본 경험이 있어 두 번째부터는 담임사업을 멋들어지게 해재꼈다. 학년 일이 등이 나왔고 체육제일 위생제일 우수반급 등 하여튼 한 학기에 상장을 무려 11개나 탔다.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과가 컸다. 그렇게 ‘잘 나가던’ 내가 당시 거세게 불어치는 하해 바람의 유혹에 못 이겨 1990년 4월 초경 사표를 제출했다. 학교지도부의 거듭 만류권고를 뿌리치고 1990년 5월 20일 교단을 떠나고 말았다.

지난 20년간 별로 해낸 일도 없이 바쁘게 보내느라 제자들을 잊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지난 9월 중순 중국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제자 이설화(부반장)입니다. 10월 4일부터 5일까지 연변1중 졸업20주년 동창만회를 열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참석할 수 있습니까?”

“두 말이면 잔소리지 10월 3일 내가 비행기로 날아가겠다.”

“아이고 큰 시름 덜었습니다. 근데 꼭 약속을 지켜주세요.”

“암, 그렇게 하구 말구”

나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제자와 한 약속을 지켰다.

20년 만에 제자들을 만나 감개무량했다. 일본 도시바에 아시아담당으로 근무하는 제자, 광동 일본기업에서 연봉 인민폐 30만원을 받는 제자, 교수가 된 제자, 정부 국장 부국장으로 승진한 제자. 불혹의 문턱에 가까운 제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한창 중견역할로 빛을 발하고 있어 가슴이 뿌듯했다. 3박4일 동안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다.

나는 연변1중 교사생활이 3년 10개월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입생을 맡아 졸업시킨 행운이 있다. 이는 나에게 있어서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재산이다.

나는 본래 7년 대학입시를 본 의지와 의력을 가장 큰 재산으로 간주하고 살아왔다. 즉 무슨 일이나 내가 마음먹으면 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이었고 좌절에 부딪힐 때마다 헤쳐 나아가는 동력이 되어왔다.

제자들의 동창만회에 다녀온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7년 대학 입시는 내가 인생을 걸어가는 힘이 될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해 놓은 재산이 아니다. 연변1중제자들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남겨놓은 가장 큰 재산이리라. 앞으로 가령 지금 내가 한창 몰두해 쓰고 있는 역사소설이 세상의 빛을 본다 해도 제자를 남긴 재산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변문학(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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