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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의 약속ㅣ그 시절의 반주임
2020년 07월 13일 10시 46분  조회:374  추천:0  작성자: netizin-1
달팽이의 약속ㅣ그 시절의 반주임
 
글 김현철 ·
 
졸업시즌이다. 또 한기의 친구들이 졸업장을 안고 새로운 길을 향해 떠난다. 그러나 시기가 시기인지라 화려한 졸업식이 없고, 졸업사진이 없고, 크고 작은 리별의 풍경도 펼쳐지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친구들은 출입규제로 인해 숙소에서 챙겨갈 자기의 짐들도 직접 정리하지 못한채 누군가가 대신 정리해 우편으로 부쳐주게 됐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비상 리별이다. 
 
졸업학년 학생들의 담임을 맡은 최선생님의 마음은 더욱 그렇다. 매일과 같이 교내출입신청을 하여 들어가서는 친구들의 서류를 포함한 자잘한 뒤처리들을 해주며 씁쓸한 배웅을 해준다. 혹은 잠깐 얼굴을 보며, 혹은 전화로, 혹은 위챗으로 정든 학생들을 이렇게 떠나보내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취직은 어떻게 하려는지, 류학은 계획대로 될려는지, 고향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쉽게 가셔지지 않는 하나하나의 걱정들은 무거운 축복이 되여 문자를 타고, 음성을 타고 개개인의 마음속에 전해진다.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난 4년을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는 일은 그 누구한테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수없이 반복했을 그 한마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며칠전 우연히 사무실에 들렸다가 홀로 씁쓸히 서류들을 들고 계시는 최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작년 이맘때 이런 저런 유감을 남긴 채 맡았던 반급의 친구들을 떠나보내던 기억도 새록새록 살아났다. 만약 되돌릴 수 있다면 그때 그 일은 그렇게가 아닌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들도 주저리주저리 갈마들었지만, 만약은 없다. 이미 발생한 유감은 지금 앞에 있는 일들을 통해 미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저런 현실과 기억들을 마주하며 오늘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나의 반주임’ 선생님들을 한번 모셔보려 한다. 대학공부를 마치기까지 반주임을 만나기도 참 많이 만났다. 추억의 종착역에 도착할 무렵, 나는 과연 뭔가 특별한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을가?
 
소학교 1학년, 엄하기로 소문난 김선생님을 만났다. “물 뿌린 듯이 조용하다”라는 것이 어떤 조용함을 가리키는지, 나는 반주임의 수업을 통해 알게 되였다. 자습시간이 되여 선생님이 간혹 사무실에 다녀오시느라 자리를 비워도 교실은 글쓰는 소리, 교과서 펼치는 소리, 약간씩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군대규률이였다. 교실문은 앞문과 뒤문 두개였는데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면 소란스럽던 친구들이 일제히 뒤문 유리를 주시한다. 그러다가 선생님의 머리카락이 슥 스쳐지나는 것이 보이면 일제히 바로 앉은 자세를 취하며 숨을 죽인다. 선생님이 앞문을 뚝 떼고 들어오는 순간, 교실은 그야말로 비장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러면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강의를 시작하시였다. 
 
반주임은 숙제를 많이 내주시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특히 련휴가 있을 시에는 숙제가 얼마나 많은지 차라리 쉬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매번 휴가전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친구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숙제포치를 기다렸다. 법관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의 마음이라 할가… “련습집 세벌, 과문 두벌, 수학문제집 몇페지부터 몇페지까지, 1 하나 2 둘 이렇게 100까지 갔다가 다시 거꾸로 오기를 두번…” 몰래몰래 입을 딱 벌리며 숙제를 표시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련휴를 앞둔 즐거움과 설레임은 꼬물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음이 나오는 풍경이다. 간혹 놀음에 탐해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련휴가 끝나고 첫 수업에 들어오는 모습은 세상 무너지는 표정이였다. 그럴만도 했다. 반주임은 결코 그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숙제를 안해오거나 하면 꾸중은 물론이고 선생님은 에누리없이 매를 선사했다. 한번은 친구와 교실에서 ‘붙잡을래기’를 하다가 교탁에 부딪치는 바람에 먹물이 쏟아지면서 선생님께서 며칠간 정성들여 꾸려놓은 벽보란에 붙일 자료들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날 나와 친구는 호되게 맞았다. 또 한번은 장난을 치다보니 아래 학년 교실에 들어가고 말았는데 그 일이 선생님한테 발각되여 또 엄청 맞았다. 맞을 당시에는 무섭기도 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귀한 자식 매 한대 더 치라는 말이 있 듯이, 귀한 학생 매 한대 더 쳐도 되는 세월에 선사받았던 선생님의 ‘매’는 지금 생각해봐도 귀한 매가 맞았다. 
 
1998년, 조선족학교들이 하나, 둘 합병되던 시절, 내가 다니던 소학교도 어느날 예고없이 진중심소학교에 합병되였고 나는 새로운 반주임을 만났다. 예쁜 얼굴에 맵시나는 차림새를 한 한선생님은 전교에서 유일하게 전동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는데 매번 운동장에 그림처럼 나타날 때면 많은 사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누가 봐도 우아하고 멋져보였다. 오후 자습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간식으로 아이스크림 혹은 과자를 사주시군 했는데, 아이스크림이 20전 정도 더 비쌌다. 매번 선생님은 “동무네 똰쟐삥치린 먹겠슴까, 발바닥과자 먹겠슴까?”라고 물었고, 친구들은 대부분 아이스크림을 원하면서도 가격차이를 아는지라 쉽게 대답하진 않았다. 마침 반급에 넉살좋은 개구쟁이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항상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똰쟐!”하고 대답하군 했고, 그러면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상점에 다녀오시군 했다. 한학기 밖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겨주신 미녀선생님이셨다. 
 
6학년이 되니 또 다른 마을의 친구들이 편입되면서 반급 조정이 이루어지고 나는 처음으로 남자반주임 김선생님을 만났다. 준수한 얼굴에 축구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주시는 선생님이셨다. 특히 남학생들한테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셨는데, 수업이 끝나고나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를 하곤 했다. 당시 싱글이였던 선생님은 “시간이 많았다”. 방학 기간에도 친척집을 빌려 우리한테 수학을 가르쳐주셨고 기회만 되면 우리를 데리고 자연을 만나러 나갔다. 겨울이면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난로에 학생들이 들고 온 도시락을 덥혀주시였고 축구공이 귀한 세월에 질좋은 공을 구해오셔서 남학생들의 귀인이 되기도 했다. 훈훈하면서도 자상하셨던 선생님, 그후에도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3호학생이 됐니? 하시며 다른 동학들의 안부도 함께 물으셨다. 한번은 선생님이 수학응용문제를 설명해주셨는데 ‘사탕꿀’을 읽는 발음이 얼마나 구수한지 저도 몰래 침을 꿀떡 삼켰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또 새로운 반주임을 만났다. 년세가 있으시고 원칙성이 강한 원로 선생님이셨는데, 교실에서는 박력있게 강의에 열중하셨고 수업이 끝나면 자식들을 대하듯이 구석구석 까근하게 관심해주셨다. 집이 학교와 가까웠지만 선생님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몸이 꽤 웅장하셨던 선생님이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에 척 들어서는 걸 보면 우리는 저도 몰래 어깨에 힘이 들어가군 했다. 목소리에 독특한 울림이 있었던 선생님은 교단과 교실 밖에서 서로 다른 풍격을 선보이며 학생들의 존경을 사시였다. 하지만 2학년이 되여 중학교들마저 합병되면서 반주임이 또 바뀌게 되였다. 선생님은 그게 못마땅하셨는지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를 만나도 웃어주지 않았다. 전에 없던 굳은 표정으로 완전 다른 사람이였다. 우리는 못내 서운했고 혹시 우리가 뭘 잘못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그 비밀 혹은 그 리유를 우리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고 이후에도 알 수 없게 되였다.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새로 바뀐 반주임은 젊은 남자선생님으로 카리스마가 넘쳤다. 학생들과 롱담도 별로 하지 않으셨고 교류도 많지 않으셨다. 요즘으로 말하면 차도남에 가까운 분이셨는데 학생들이 부적절한 언행을 보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까주군 했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반급을 이끌어나가셨다. 말하자면, 굳이 포치하지 않아도 학생들이 알아서 움직이게 하는 마력 같은 걸 갖고 계셨다. 누구든지 인정 사정 봐주지 않고 공평성을 기하셔서 얼핏 보면 차가운 분 같지만 그 속에 따뜻함도 묻어있었다. 아쉽게도 또 1년만 함께 하고는 재차 반급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반은 절반으로 깨져 다른 두개 반급에 합병되였다. 선생님과의 더 깊은 교류도 불가능해졌고 이후에도 기회는 없게 되였다. 또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관건적인 중3, 녀자선생님이신 김선생님이 맡으신 반에 나는 편입되였고 ‘굴러들어온 이방인’의 신세로 마지막 학년 스타트를 떼게 되는가 싶었는데, 마음이 넓으신 선생님은 편입된 우리들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푸셨다. 그래서 반장도 셋이나 되였다. 원래 반급에서 직무가 무엇이면 그대로 유지시켜준다는 것이였다. 쪼개짐으로 인한 잠깐의 ‘상처’는 그렇게 빠르게 아물어갔다. 
 
아이를 둘씩이나 키우면서도 선생님은 고중입시를 위한 밤자습에 나오셔서 우리를 지켜주셨다. 공부를 하다가 문득 머리를 들어 교탁을 바라보면 선생님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학생들을 내려다보고 계셨고 간혹 눈이 마주치면 웃으시군 했다. 따뜻한 보온병물에 두유를 들고 오셔서는 배고플 텐데 타먹으라 하셨고 집에 딱한 사정이 있을 때면 아예 두 애들을 데리고 교실에 오시군 했다. 가끔 가다 친구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선생님은 꾸중은 안하시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면 애들은 자세를 바로 하며 책을 보는 시늉이라도 내군 했고, 고중입시 막바지가 되여서는 하나같이 열공모드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늘 솔직하셨다. 다 집어치우고 한국에 나가 돈도 벌고 싶지만 너희들 때문에 안간다, 하는 얘기도 무람없이 하셨다. 그러다보니 애들 역시 선생님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 밖에 없었다. 사생관계를 떠나서 동지 같은 가족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덕분에 친구들은 무난하게 고중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고1, 머리카락 한올 흐트러짐이 없는, 옷에 구김살 한줄 없는 녀자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다. 처음 만난 날부터 다른 반에 옮기는 그날까지 단 한번이라도 선생님의 빈틈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철저한 분이셨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중 가장 빈도가 높으셨던 것은 여차여차 하면 문제 없죠예? 하는 것이였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일이여도 선생님의 차분한 설명을 듣고 마지막에 문제없죠예? 하는 마무리멘트를 들으면 거짓말처럼 자신감이 생기고 진짜로 별 문제 없어보이군 했다. 차분하면서도 자신감을 심어준 반주임, 태선생님은 그런 매력을 가진 분이셨다. 문과반, 리과반을 선택해야 될 시점에 이르러 마음 속으로는 언녕 문과를 택하고 있었지만 반주임을 떠나기가 싫어서 옹근 이틀을 숙소에서 끙끙 속을 앓았던 기억이 어제 같다. 
 
문과반으로 옮겨가면서 또 새 반주임을 만났다. 듬직하고 위엄있고 멋진 남자선생님이셨는데 멀리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분이였다. 강의에서도 그렇고 회의나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고 불필요한 얘기는 철저히 하지 않으셨다. 정치과목을 강의하시는 분답게 항상 “전반 우리 학교의 진학률을 볼 때…”, “전반 중국의 대학교 분포 상황을 볼 때…” 등 폭넓고 개괄적인 용어들을 즐겨 사용하셨고 자주는 안하시지만 가끔 선보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동반한 유머는 번마다 그렇게 적절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알람시계의 고장으로 지각을 하게 되였는데, 허겁지겁 학교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셨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해서 걱정했다 하고 한마디 하시며 시름을 놓는 반주임께 인사드리고 교실로 들어오는 마음이 더없이 따뜻했다.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60이라면 그걸 90이상으로 발휘하게끔 하는 힘을 지닌 분, 업간체조시간이면 우리반 대렬 젤 앞에서부터 유유히 뒤쪽으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존재만으로도 안전감을 부여하는 분, 그분이 우리에게 자주 해주신 말씀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큰 일은 작게, 작은 일은 없던 걸로”라고 하는 철학이였다. 그 말씀은 오늘을 살면서도 수시로 검증되고 있다. 
 
대학에 오면 반주임이 없는 줄로 알았는데, 입술이 매력적인 한 남자선생님이 입학한 첫날부터 졸업할 때가지 우리 옆을 지켜주셨다. 옹근 4년이라는 시간, 얘기가 적으셨고 항상 묵묵히 챙겨주셨다. 별 일 없이도 우리가 수업하는 교실에 스윽 들어와서는 한바퀴 돌고 나가시군 했고 남학생들의 호주머니 사정이 궁할 때면 묘하게 기숙사를 방문해 술 한잔 사주셨다. 모든 학생들을 공평하게 대해주셨고 학생들한테 시켜도 되는 잔일도 가급적 본인이 직접 하셨다. 학생들은 누가 베풀어줬는지도 모르고 어떤 혜택을 받고나서는 나중에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반주임이 챙겨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전혀 변함없는 반주임, 묵묵히 흐르는 두만강처럼 오늘도 그 자리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폐교와 더불어 합병되고, 다시 조종되고, 그러기를 반복하며 나는 큰 걱정없이 학업을 견지할 수 있었고 그런 덕으로 많은 반주임을 만났다. 짧게는 반년, 길게는 5년반, 그러나 함께 한 시간과 상관없이 ‘나의 반주임’들은 내 마음속에 정중히 모셔져있다. 격변의 시절, 어려움도 적지 않았던 지난 시간들은 그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뜻깊은 추억, 소중한 기억으로 정히 기록되게 되였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본인들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학생들에게 최선의 배려를 부여해주신 그 은혜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 고맙게 느껴진다. 선생님들에도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겠거늘, 선생님들에게도 이런저런 생활고가 있었겠거늘, 본인이 맡은 반급의 친구들을 끝까지 품어주고 가르쳐주고, 한번 또 한번 보내주고, 그 마음을 이제 조금씩, 그러나 더 깊게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썩 오래전에 그분들이 이미 가르쳐줬는지도 모른다. ‘반주임’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 책임에 대해서, 역할에 대해서, 한계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받아서 간직하고 있는 그 기억과 가르침들을 되새기며 오늘도 열심히 자기의 색상을 만들어가려 한다. 그렇게 쉼없이 찾아가는 동안, 그분들에게 괜찮은 학생으로, 현재 맡고 있는 친구들에게 무람없는 선배 같은 반주임으로 기억되고 싶다. 
 
올해는 많은 것들이 ‘구름’ 우에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머지 않아 세상이 평온을 회복할 그날, 지금의 이 흔적들이 비를 통해, 혹은 눈을 통해 우리의 피부에, 마음속에 잔잔히 적셔지기를 기대해본다. 영웅, 평범한 사람, 안타깝게 떠난 사람들, 그리고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된 어떤 사람들이 문득문득 마음을 울리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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