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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의 영웅호걸이 될 뜻을 품어야 한다
2010년 05월 12일 13시 08분  조회:2678  추천:0  작성자: 말(話)

사람마다 한 세대의 영웅호걸이 될 장한 뜻을 품어야 한다.

                                         

 

                                                                         -주은래-

 

 

좌로부터 주덕(朱德), 주은래(周恩来), 모택동(毛泽东), 류소기(刘少奇)。

 

저우언라이(周恩来)는 중국공산당의 주요인물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1949~76)와 외교부장(1949~58)을 역임했다. 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후에 중국정부의 외교문제를 전담했다. 중국공산당 초기인 1921년부터 지도자적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중국의 위대한 정책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정책 시행에 뛰어났고 세부사항을 파악하는 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언제나 당 지도부에서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내부 갈등으로부터 비롯된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우아함과 섬세함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친화력있고 실용적이며 설득력있는 사람으로 정평이 났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저장 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 살고 있던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이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1913년 톈진[天津]에 있는 명문 중학교인 난카이중학교[南開中學校]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뒤에 계속 공부하기 위해 1917년 일본으로 갔다. 1919년 5·4운동으로 불리는 학생시위가 베이징에서 크게 일어나자 톈진으로 돌아왔다. 1920년 체포될 때까지 학생시위와 유인물 발간에 적극 가담했다. 1920년 가을에 석방되어 근로장학생제도의 일환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공산주의자로 평생을 보내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프랑스에서였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립되자 유럽 지부의 조직책이 되었다. 1924년 여름 중국으로 돌아와 국민혁명에 참가했다. 이 혁명은 쑨원[孫文]이 이끄는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의 협조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둥[廣東]에서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 무렵(1925) 덩 잉차오[鄧穎超]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는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로서 나중에 중국공산당의 주요일원이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蔣介石]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정치부 주임에 임명되었고, 1926년 겨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27년 3월 장제스의 북벌군이 상하이 외곽에 도착했을 때 그는 국민당 군대를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 폭동을 일으켜 상하이를 장악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상하이 입성 후 곧 공산주의자 동료들을 숙청하자 우한[武漢]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중국공산당은 우한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국민당 좌파인사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같은 해 4월 우한에서 열린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산당 중앙위원 및 정치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당 좌파인사들이 공산당과 결별하게 되자 그는 난창[南昌] 사건(1927. 8)으로 알려진 공산당 봉기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민당이 난창을 재탈환하자 광둥 동부지역으로 퇴각했고 곧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도피했다.

 

1928년 제6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공산당 내의 자신의 지위를 확인받았다. 이어 모스크바에서 중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공산당 조직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1920년대 후반 중국공산당 본부는 상하이에서 지하활동을 벌이면서 도시 근로자의 봉기에 주력했으나, 주요대도시를 장악하려는 공산당의 시도는 큰 피해만 냈을 뿐 실패를 거듭했다. 1931년 저우언라이는 상하이를 떠나 장시[江西]로 갔는데, 1928년 이래로 주더[朱德]와 마오쩌둥[毛澤東]이 이곳에서 공산당 지방근거지를 착실히 다지고 있었다. 1932년 공산당 본부는 상하이 경찰의 가중되는 압박을 이기지 못해 장시 지역으로 옮겨갔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주더가 지휘하는 홍군(紅軍)의 정치위원이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장시 소비에트에서 마오쩌둥으로부터 정책통제권을 빼앗은 공산당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결국 마오쩌둥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관계는 평생 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장제스의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인해 공산당은 마침내 1934년 10월 장시 소비에트와 중국 중남부의 기타 소비에트 지역을 버리고 중국 북부의 새로운 근거지를 향해 장정(長征)에 나섰다. 마오쩌둥은 장정중에 당기구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저우언라이의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직도 넘겨받았다. 저우언라이는 그 이후로 충실하게 당내 마오쩌둥의 지도력을 보좌했다.


 
1935년 10월 산시 성[陝西省] 옌안[延安]에 이르러 장정은 끝났다. 이곳에서 공산당의 근거지를 확보하자 저우언라이는 당의 주요협상자가 되었고, 국민당과 전략적으로 연합을 맺는 어려운 일에 착수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항일감정에 호응하고 파시즘에 대항하라는 모스크바의 이른바 신(新)인민전선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1935년 후반 중국공산당은 '항일'이라는 기치 아래 국민당을 비롯한 모든 애국인사들과 연합하겠다고 제의했다. 1936년 겨울 장제스가 국공내전을 중지하고자 하는 부장(部將)들에 의해 산시 성 시안[西安]에서 체포되자 저우언라이는 곧 그곳으로 갔다(→ 시안 사건). 그는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에게 장제스를 살해하지 말라고 설득한 뒤, 장제스가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공산당과 연합전선을 편다는 조건 아래 그의 석방을 성사시켰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그는 연합전선 구축을 성사시켰고, 그 이후로 1943년까지 국민정부에 파견된 공산당측의 대표로 활약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지 2주 만에 마오쩌둥을 수행하여 충칭[重慶]으로 가서 장제스와의 평화회담에 참가했다. 6주 후에 마오쩌둥이 옌안으로 돌아간 뒤 그는 충칭에 남아서 협상을 계속했다. 1946년 미국이 후원하고 조지 C. 마셜 장군이 주재한 국민당과의 평화협상에도 대표로 참가했으나 이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때 그는 국민당에 환멸을 느낀 진보적 정치가와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의 이미지를 좋게 심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 점은 1947년 전면적인 내전이 재개되었을 때 장제스가 결국 몰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총리가 된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대규모 민간 관료체제를 관리하는 주요행정가가 되었다. 외교부장을 겸임하면서 외교문제에서도 중책을 수행했고 이 직책을 사임하고 난 뒤에도 계속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50년 2월 14일 모스크바에서 30년 기한의 중·소상호우호동맹조약에 서명했고,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한국과 인도차이나 관련 회담에서 중국 사절단 대표로 참가했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회의에서 아시아 비동맹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제의했다. 1956~64년에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했고, 아프리카의 상황이 '혁명 직전'이라고 공언했다. 1964년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나 중국과 소련 사이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해소할 수는 없었다. 1971년 7월 미국 특사 헨리 A.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를 처음 만난 후 외교관·협상가로서 그의 명성은 미국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마오쩌둥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사이의 역사적 회담은 대부분 저우언라이가 조직·성사시킨 것이었다. 1972년 방광암에 걸린 뒤에도 정치를 계속했다.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제1차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공업·농업·국방·과학 기술의 현대화를 실현시키자고 주장했다. 그가 죽은 지 3개월 뒤인 1976년 4월 많은 공산당원·학생·노동자·간부·군인 등이 그를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4인방(四人幇)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4월 5일 이 집회는 4인방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는데, 이를 '톈안먼 사건'이라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끝까지 유지했다. 1956년 당내 4명의 부주석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있었던 문화대혁명 이후에 린뱌오[林彪]가 당내의 유일한 부주석이 되었지만, 그는 정치국 상임위원회 제3인자가 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마오쩌둥 사상을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제동을 거는 주된 역할을 했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유일하게 안정의 구심점이 되었다. 1970년대 초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쇠퇴하는 동안 덩샤오핑[鄧小平]과 기타 전직 온건지도자들을 권좌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주요저작은 〈저우언라이선집 周恩來選集〉에 수록되어 있다.

 

周恩来和邓颖超的传世情书及经典瞬间

50년대초 주은래(周恩来)와 부인 등영초의 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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