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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說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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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6 ]

16    말탄 사람은 걷는 사람 힘든줄 모른다 댓글:  조회:1578  추천:0  2012-02-14
령리한 새는 깃을 아끼고 현명한 사람은 말을 아낀다. -웰남속담- 래일 아쉬워할 일 오늘 하지 말라. -인도속담 말은 타봐야 알고 사람은 사귀여보아야 안다. -일본속담  
15    인간은 아무런 리유 없이 살아갈수는 없다 댓글:  조회:1530  추천:0  2012-01-06
인간은 아무런 리유 없이 살아갈수는 없다. -까뮈- 자기도 지킬수 없는 자기만의 비밀을 남더러 지키라고 하는 생각은 잘못이다. -괴테- 인간이 "산다"는것은 그저 존재하는것이 아니고 "잘 존재한다"는것을 뜻한다. -올테가 이 가셋트-
14    요즈음은 부모에게 물질로써 봉양함을 효도라 한다 댓글:  조회:1581  추천:0  2012-01-04
요즈음은 부모에게 물질로써 봉양함을 효도라 한다. 그러나 개나 말도 집에 두고 먹이지 앉는가. 공경하는 마음이 여기 따르지 않으면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논어 위정편 한 아버지는 열 아들을 기를 수 있으나 열 아들은 한 아버지를 봉양키 어렵다. -풀러 "성지"   자녀에게 회초리를 쓰지 않으면 자녀가 아비에게 회초리를 든다. -폴러 "성지"  
13    재능은 없어도 인격은 갖추어야 한다 댓글:  조회:1529  추천:0  2011-12-23
  사리를 아는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적응시키고 사리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에게 세상을 적응시키려고 한다. ---버너드 쇼---     재능은 없어도 인격은 갖추어야 한다. ---E.스펜서---     만약 인간의 가치가 일로써 결정이 된다면 소는 어떤 인간보다도 가치가 있을것이다. 소는 일을 잘 하고 또 절대로 불평을 부리지 않는다.   --- 고리끼---   
12    잘 씌여진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댓글:  조회:1742  추천:0  2011-12-20
삶은 짧지만 죽음은 결국 인생을 영원하고 신성하게 만든다. -A.A.프록터"죽음까지의 일생"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씌여진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죽음을 찾지 말라. 죽음이 당신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완성으로 만드는 길을 찾으라. -함마슐트  
11    청년은 완전한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댓글:  조회:1544  추천:0  2010-08-09
  자! 전세계의 젊은이들이여!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말라. 세계와 그안에 있는 모든것이 그대의것이다. -처칠-     청춘이란 "나는 이것이 하고싶다", " 나는 저것이 하고싶다", "나는 이렇게 되고싶다"라고 말하는것으로 특징지어지는것이다. -키에르케고르-     무엇보다도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며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스스로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사람은 누구 하나 무능력하지는 않을것이다. -펄벅-     청년은 완전한것을 사랑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가 노력해야 할 여지가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기때문이다.   -발레리-
  남의 선을 보거든 나의 선을 찾고 남의 악을 보거든 나의 악을 찾아라.   -명심보강-   선한것을 따르기는 산을 톺아오르듯이 어려우나 악한것을 따르기는 산이 무너지는듯 순식간이다.   -국어주어-   선한 일을 하면 소문나기 마련이고 악한 일을 하면 드러나기 마련이다. -한유-   재산을 잃을 땐 손실이 없다. 건강을 잃을 땐 약간의 손실이 있다. 명성을 잃을 땐 모든것을 잃는다.해빛이 대단히 작은 구멍을 통해서도 보여질수 있듯이 사소한 일이 사람의 인격을 설명해줄것이다.   -스마일즈-      
9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댓글:  조회:1755  추천:0  2010-07-26
  ★행복한 가정은 미리 누리는 천국이다.     ★  영원히 살 것 처럼 꿈을 꾸고, 오늘 죽을 것 처럼 살아라.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8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댓글:  조회:1597  추천:0  2010-07-07
@font-face{font-family:티티;src:url(http://free4.ttboard.com/TTche.eot)};body,table,tr,td,select,input,div,form,textarea,font{font-family:티티;font-size=9pt;} 꽃양배추에 사는 벌레는 꽃양뱌추를 자기 세상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책의 앞면과 뒷면같은 것이다. 길을 열 번 물어보는 것이 한 번 길을 헤매는 것보다 낫다. 휴일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람이 휴일에 주어진 것은 아니다. 단번에 바다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0에서 1까지의 거리가 1에서 100까지의 거리보다 길다. 매일을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유태 민족이 안식일을 지켜온 것이라기보다는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켜온 것이다. 우물에 침을 뱉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그 물을 마시게 된다. 기적을 바라는 것은 좋지만 그 기적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행운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의지해서는 안된다. 운 없는 사람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등을 쳐도 코가 부러진다. 선행에 대한 가장 큰 댓가는 무엇인가? 선보다 악이 빨리 번진다. 정원을 보면 그 집의 정원사를 알 수 있다. 아무리 길고 훌륭한 쇠사슬이라도 고리 하나가 망가지면 못쓴다. 술이 들어가면 비밀은 밖으로 나온다. 식사는 자기의 기호에 맞추고 옷차림은 사회의 풍조를 따르라 자물쇠는 정직한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따분한 사람이 방을 나가면 누군가 방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성공의 절반은 인내심이다. 성공의 문을 열려면 밀거나 당기거나 해야 한다.     -유태인의 격언 "삶의 지혜"중      
7    죽음은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 댓글:  조회:1684  추천:0  2010-06-25
  □ 죽음은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플로베르) 죽음보다 더 나쁜 상태는 발생하지 않는다.더구나 인간은 죽음을 면할 수 없다.  □ 생명이 있는 곳에 죽음이 있다(프로이트) 생명이 있으면 희망도 있다. 죽고난 뒤엔 아무것도 바랄 수 없다.  □ 죽음에의 준비(헤쎄) 가령 호위를 세워서 엄중히 몸을 지켰다고 해도 일생의 마지막에는 예외없는 죽음이 찾아와서 우리들을 끌고간다.그러기 때문에 늘 행실을 올바르게 하고 빛나는 희망을 방패삼아 앞으로 걸으며 보다 더 굳센 마음을 기르고 하느님이 내려주신 어떠한 비운에도 견디는 용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죽음은 생존에 대한 약속의 해소이다(프로이트) 죽음은 우리들이 생명에 대하여 지고 있는 약속을 해소시켜 줄지는 모르지만 우리들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약속에서 해방하는 일은 없다. 
6    지혜로운 사람은 귀가 길고 혀가 짧다 댓글:  조회:1721  추천:1  2010-06-22
  지혜로운 사람은 귀가 길고 혀가 짧다   -영국속담-   현실에 꿈과 유모아를 더한것이 지혜다.   -임어당-   별이 하늘을 장식하고 지식이 지혜를 장식한다. -몽골속담-   새는 날개로 날고 짐승은 다리로 걸으며 사람은 지혜로 살고 물고기는 꼬리로 헤염친다.   -중국속담-       지식이 많다고 지혜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간혹 우리중의 어떤 사람은  많이 배운 지식으로 인해 오히려  오만하게 되어 지혜를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혜의 첫걸음은 자기가  미흡하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고 합니다.  지혜롭다는 건  우선 고개를 숙일 줄 안다는 것이지요.        유태인의 속담 중에  '태양은 당신이 없어도  뜨고 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광활한 우주와 오묘한 자연 속에서  우리 인간의 존재는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껏 오만을 떠는 것은  지식만 있었지 지혜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우리 인간은 결국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나 지혜의 문만 열게 되면  인생의 많은 난관들을 비교적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에게 무엇을 가장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지혜'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지혜를 얻게 된 그는 바라던  모든 것을 갖게 되었으며,  다른 나라의 왕들이 그에게 찾아와  값진 보물을 바치고 지혜를 배웠습니다        인생의 불빛이 되어 주는 지혜,  그 지혜로움으로 당신의 인생이  환히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5    남자의 세계 댓글:  조회:2326  추천:0  2010-06-08
  □ 분별있는 남자(라 로슈푸코)   분별있는 남자는 여자를 가볍게 취급하고 함께 어울려 농담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일밖엔 하지 않는다.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여자와 의론도 하지 않고 맡기지도 않는다.   □ 여자에의 환상(모옴) 어떤남자라도 한 여자를 자기것으로 하려고 생각했을 때는 그 사람이 자기사랑을 위해 가장 적합한 여자라고 여긴다.그리고 자기자신이 이렇게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고 깨닫게 되는 것은 딴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경우다.   □ 남성의 부도덕한 행위의 원인(알렝) 만약 모든 여성이 같은얼굴,같은성질,같은마음을 하고 있었다면 남성은 절대로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뿐만 아니라 연애도 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한 여인과 함께 되어 죽을 때까지 그것만으로써 그칠것이다.     □ 여자의 효용(고리키) 가령 남자가 아무리 자기자신을 잊고 일에 열중하더라도 그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든지 한 여자가 숨어있다.즉 남자를 일하게 하는데 있어서 여자는 효과적인 현상금이다.  
4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댓글:  조회:1697  추천:0  2010-06-02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고요하면            말도 맑고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거칠게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말로써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법정스님
3    나는 싫다,"그렇지만"이라는 말이. 댓글:  조회:1582  추천:0  2010-05-28
2    한 세대의 영웅호걸이 될 뜻을 품어야 한다 댓글:  조회:2677  추천:0  2010-05-12
사람마다 한 세대의 영웅호걸이 될 장한 뜻을 품어야 한다.                                                                                                                      -주은래-     좌로부터 주덕(朱德), 주은래(周恩来), 모택동(毛泽东), 류소기(刘少奇)。   저우언라이(周恩来)는 중국공산당의 주요인물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1949~76)와 외교부장(1949~58)을 역임했다. 혁명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후에 중국정부의 외교문제를 전담했다. 중국공산당 초기인 1921년부터 지도자적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중국의 위대한 정책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정책 시행에 뛰어났고 세부사항을 파악하는 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언제나 당 지도부에서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내부 갈등으로부터 비롯된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우아함과 섬세함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친화력있고 실용적이며 설득력있는 사람으로 정평이 났다.   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저장 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 살고 있던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이곳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1913년 톈진[天津]에 있는 명문 중학교인 난카이중학교[南開中學校]에 입학했으며, 졸업한 뒤에 계속 공부하기 위해 1917년 일본으로 갔다. 1919년 5·4운동으로 불리는 학생시위가 베이징에서 크게 일어나자 톈진으로 돌아왔다. 1920년 체포될 때까지 학생시위와 유인물 발간에 적극 가담했다. 1920년 가을에 석방되어 근로장학생제도의 일환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공산주의자로 평생을 보내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프랑스에서였다.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립되자 유럽 지부의 조직책이 되었다. 1924년 여름 중국으로 돌아와 국민혁명에 참가했다. 이 혁명은 쑨원[孫文]이 이끄는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의 협조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둥[廣東]에서 일으킨 혁명이었다. 이 무렵(1925) 덩 잉차오[鄧穎超]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는 당시 학생운동 지도자로서 나중에 중국공산당의 주요일원이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蔣介石]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정치부 주임에 임명되었고, 1926년 겨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27년 3월 장제스의 북벌군이 상하이 외곽에 도착했을 때 그는 국민당 군대를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 폭동을 일으켜 상하이를 장악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상하이 입성 후 곧 공산주의자 동료들을 숙청하자 우한[武漢]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중국공산당은 우한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국민당 좌파인사들과 긴밀히 협조했다. 같은 해 4월 우한에서 열린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산당 중앙위원 및 정치국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당 좌파인사들이 공산당과 결별하게 되자 그는 난창[南昌] 사건(1927. 8)으로 알려진 공산당 봉기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민당이 난창을 재탈환하자 광둥 동부지역으로 퇴각했고 곧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도피했다.   1928년 제6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공산당 내의 자신의 지위를 확인받았다. 이어 모스크바에서 중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공산당 조직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1920년대 후반 중국공산당 본부는 상하이에서 지하활동을 벌이면서 도시 근로자의 봉기에 주력했으나, 주요대도시를 장악하려는 공산당의 시도는 큰 피해만 냈을 뿐 실패를 거듭했다. 1931년 저우언라이는 상하이를 떠나 장시[江西]로 갔는데, 1928년 이래로 주더[朱德]와 마오쩌둥[毛澤東]이 이곳에서 공산당 지방근거지를 착실히 다지고 있었다. 1932년 공산당 본부는 상하이 경찰의 가중되는 압박을 이기지 못해 장시 지역으로 옮겨갔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주더가 지휘하는 홍군(紅軍)의 정치위원이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장시 소비에트에서 마오쩌둥으로부터 정책통제권을 빼앗은 공산당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결국 마오쩌둥과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관계는 평생 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되었다. 장제스의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인해 공산당은 마침내 1934년 10월 장시 소비에트와 중국 중남부의 기타 소비에트 지역을 버리고 중국 북부의 새로운 근거지를 향해 장정(長征)에 나섰다. 마오쩌둥은 장정중에 당기구의 통제권을 장악했고 저우언라이의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직도 넘겨받았다. 저우언라이는 그 이후로 충실하게 당내 마오쩌둥의 지도력을 보좌했다.   1935년 10월 산시 성[陝西省] 옌안[延安]에 이르러 장정은 끝났다. 이곳에서 공산당의 근거지를 확보하자 저우언라이는 당의 주요협상자가 되었고, 국민당과 전략적으로 연합을 맺는 어려운 일에 착수했다. 일본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항일감정에 호응하고 파시즘에 대항하라는 모스크바의 이른바 신(新)인민전선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1935년 후반 중국공산당은 '항일'이라는 기치 아래 국민당을 비롯한 모든 애국인사들과 연합하겠다고 제의했다. 1936년 겨울 장제스가 국공내전을 중지하고자 하는 부장(部將)들에 의해 산시 성 시안[西安]에서 체포되자 저우언라이는 곧 그곳으로 갔다(→ 시안 사건). 그는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에게 장제스를 살해하지 말라고 설득한 뒤, 장제스가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공산당과 연합전선을 편다는 조건 아래 그의 석방을 성사시켰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그는 연합전선 구축을 성사시켰고, 그 이후로 1943년까지 국민정부에 파견된 공산당측의 대표로 활약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지 2주 만에 마오쩌둥을 수행하여 충칭[重慶]으로 가서 장제스와의 평화회담에 참가했다. 6주 후에 마오쩌둥이 옌안으로 돌아간 뒤 그는 충칭에 남아서 협상을 계속했다. 1946년 미국이 후원하고 조지 C. 마셜 장군이 주재한 국민당과의 평화협상에도 대표로 참가했으나 이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때 그는 국민당에 환멸을 느낀 진보적 정치가와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의 이미지를 좋게 심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 점은 1947년 전면적인 내전이 재개되었을 때 장제스가 결국 몰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총리가 된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대규모 민간 관료체제를 관리하는 주요행정가가 되었다. 외교부장을 겸임하면서 외교문제에서도 중책을 수행했고 이 직책을 사임하고 난 뒤에도 계속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50년 2월 14일 모스크바에서 30년 기한의 중·소상호우호동맹조약에 서명했고,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한국과 인도차이나 관련 회담에서 중국 사절단 대표로 참가했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회의에서 아시아 비동맹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제의했다. 1956~64년에 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했고, 아프리카의 상황이 '혁명 직전'이라고 공언했다. 1964년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나 중국과 소련 사이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해소할 수는 없었다. 1971년 7월 미국 특사 헨리 A. 키신저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를 처음 만난 후 외교관·협상가로서 그의 명성은 미국 언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마오쩌둥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사이의 역사적 회담은 대부분 저우언라이가 조직·성사시킨 것이었다. 1972년 방광암에 걸린 뒤에도 정치를 계속했다.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제1차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공업·농업·국방·과학 기술의 현대화를 실현시키자고 주장했다. 그가 죽은 지 3개월 뒤인 1976년 4월 많은 공산당원·학생·노동자·간부·군인 등이 그를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4인방(四人幇)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4월 5일 이 집회는 4인방에 의해 무력 진압되었는데, 이를 '톈안먼 사건'이라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끝까지 유지했다. 1956년 당내 4명의 부주석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있었던 문화대혁명 이후에 린뱌오[林彪]가 당내의 유일한 부주석이 되었지만, 그는 정치국 상임위원회 제3인자가 되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마오쩌둥 사상을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에게 제동을 거는 주된 역할을 했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유일하게 안정의 구심점이 되었다. 1970년대 초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쇠퇴하는 동안 덩샤오핑[鄧小平]과 기타 전직 온건지도자들을 권좌에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주요저작은 〈저우언라이선집 周恩來選集〉에 수록되어 있다.   50년대초 주은래(周恩来)와 부인 등영초의 합영 
1    가치있는 삶은 살아라 댓글:  조회:1596  추천:0  201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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