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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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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한국에서 살아남기

한국에서 살아남기 ( 1 )
2014년 12월 20일 22시 34분  조회:1844  추천:1  작성자: 김선녀

이 글은 연변여성에  올해초부터 연재했던 글이여서 시간이나 숫자등이 지금현실과는 차이가 있음을 사전에 알려드립니다.



머리글


시간의 흐름은 류수와 같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에 와 닿는 속담이다. 2002년도부터 중국과 한국을 다니기 시작했으니 한국생활을 시작한지가 벌써 10년이 넘는다. 요즘은 변화발전속도가 너무 빨라서 5년이면 강산이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한국물을 마시게 되여서부터 어느덧 강산이 두번도 넘게 변했다는것이다. 과연 그동안 나한테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을때는 비즈니스비자로 입국했다. 여러차례 중한 두나라를 비즈니스비자로 다니다가 한국에서 나만의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2004년도에 나는 한화 5천만원이라는 거액을 투자를 하고 여행사를 운영하게 되였고 한국에서의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올해는 여행사를 운영한지가 꼭 10년째이다. 사람들은 5년이상만 사업체를 유지하면 사업할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고 말하고 8년만 유지하면 이미 성공했다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한다. 나도 그들중 한사람으로 되였다고 생각하니 가슴 뿌듯해진다. 지금은 개인적으로는 소망여행사 대표로 있으면서 한중동포신문 자문위원. 재 한국다문화타임즈 논설위원, 경기도 외국어강사협회 중국어/일본어 강사/  중국문화 강사, 한중동포신문자문위원, 안산시 자원봉사협의회 재능기부강사,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북포럼 저자와의 만남 MC등 여러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70여만 중국동포들이 무시와 차별없이 조금은 더 좋은 생활을 하면서 한국생활에 빠른 정착할수 있도록 도움주고 싶어서이고 중국동포라는 브랜드가치는 우리 스스로가 높혀야 하기때문이다. 이렇게 해야만이 아직까지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중국동포의 정체성을 찾을수 있고 이제부터라도 중국에서 코리안드림을 실현하고저 하는 조선족들이 한국에 오면 적게 아프고 상처받는 일이 줄어들수 있을것이다.


사람들은 나보고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두 글자는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에 그것은 욕심이라는 마음으로 감히 상상한적도 없다. 단지 하루하루 큰 사건사고가 없이 웃으며 살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는것이 나의 삶의 원칙이고 또한 그것으로 만족스럽게 살아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족으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고 체류자격으로부터 사사건건 부딪칠때마다 최선을 다하면서 힘들게 살아왔다는것만은 사실이다. 그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몇번에 나누어서 소개하려고 하니 한국에 오려고 하는 고향에 계시는 조선족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였으면 좋겠다.


코리안 드림

2002년도 중국에서 한국행을 선택한 것은 나도 많은 조선족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려는 욕심 하나뿐이였다. 한국에 오기전에 나는 남편 따라서 개방도시 심수에서 살았다. 20대 청춘들의 꿈의 도시 심수였다. 그때 나는 벌써 30대에 들어섰고 어린 아이를 키워해야 했던탓에 마땅한 일자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했던것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것과 무역통역을 하는 일이였다. 당시 연변에서는 과외비가 한시간에 5원밖에 안되지였지만 심수는 시간당 30원이나 되였다. 중국어무역 통역도 하루에 3백원 기준이였다. 아이키우는 엄마한테는 꽤 괜찮은 수입인거 같았다. 그러나 심수의 생활소비에 비하면 이렇게 버는 돈은 만져볼사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듣기만 해서는 좋아 보이는듯한 일자리 같지만 당시 영어를 모르는 나한테 중국어를 가르치는것이나 통역을 한다는것은 그렇게 생각처럼 쉬운 일도 아니였다. 한국아이들이” 陆桥를 “육교 라고 말할 때 나는 “육군학교”를 줄여서 말하는줄로 알았다. 사실은 우리가 늘 말하는 “구름다리”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기분을 언짢게 하는 “일없습다.”는 말도 서슴치 않았고 선적(船籍)이라는 단어가 뭔뚯인지 몰라서 통역한다는 내가 손짓,발짓 하면서 의사소통을 하기도 했다. 선적은 배에 물품을 싣는다는 뜻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썩 후의 일이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사랑하며 배웠던 조선글과 한국어는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했다. 내가 사용하는것은 중국어식 조선어라면 한국인들은 한문식 또는 영어식 한국어였다. 天气를 천기라고 하는가 하면 火车를 화차라고 부르는 한국인이였다. 이런 일에 부딪칠수록 영어를 모르는 내가 안타까왔고 한국에 대한 꿈은 커져만 갔다. 커다란 풍선처럼 점점 부풀기 시작했다.뇌졸중으로 오랜기간동안 병환에 계시는 어머니한테 돈을 많이 벌어서 병치료를 원없이 해드릴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코리안드림의 꿈은 커져만 갔다. 다행히 나는 운이 따라주었다. 통역하던 회사의 초청으로 한국행의 꿈은 이루어졌다. 회사초청으로 2주간의 비자로 왔다. 한국은 그야말로 깨끗한 도시였고 환상속의 도시였다.공항으로부터 곳곳에 한국어로 적혀있는 간판만 보아도 편안해보였고 끝이 보이지 않게 밀리는 차량만 보아도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은 중국어과외도 시간당 150원씩이나 했다. 심천보다 5배정도는 더 비쌌다, 순간 나는 마치도 부자라도 된듯이 기뻤고 앞길이 밝아만 지는 것 같았다. 3개월만 벌어도 중국에서 반년수입과 맞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둥둥 뜨고 마치도 첫사랑을 만난듯이 가슴설레는것을 억제할수 없었다. 나는 중국어과외부터 찾았다.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상상은 상상일뿐이였다. 연변사투리를 팍팍 사용하는 나한테--그것도 친,인척 한사람없는 나한테 아이들의 중국어수업을 맡기려는 부모는 없었다.내 이름 석자를 알고 있는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나는 인터넷과 일자리 찾는 광고지인 “벼룩시장”, “가로수”등 소식지들을 샅샅이 훝었다. 전화는 또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전화통화를 하면 상대방은 내가 거침없이 내뱉는 연변사투리에다가 한국온지 며칠 안된다는 말만 들으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후부터는 한국에 온지 오래되였다고 조금씩 거짓말도 하면서 일자리 찾는 방법도 달리했다. 그러나 방법은 달리해도 여전히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는 학부모는 없었다. 시간은 흘러만 갔다. 중국에서 갖고 왔던 생활비도 줄어만 들었다. 당시 나는 알고 지내던 유일한 고향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와 함께 고시원생활을 했었다. 고시원(考试院)이라는것은 원래 의미는 번호사, 검사등 좋은 직업을 가질려고 밤낮없이 공부하는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상대로 마련된것이다. 하지만 월세가 저렴해서 많은 외국인들이 좋아한다. 나는 고향언니와 월세를 절반씩 지출하면서 얼마 남지않은 돈으로 진짜 겨우 생계를 유지하다싶이 살았다. 찬물에 밥을 말아서 김치쪼각에 한끼를 떼울때면 중국에 가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물론 식당이나 회사에 들어가서 취직하면 돈을 벌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한국행을 선택했던 목적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중국어 강사였고 짧은 기간동안에 고가의 로동력으로 많은 돈을 버는것이였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었는데 나한테는 안 통했다. 마음은 점점 급해만 갔다. 우물에 가서 슝눙 달라고 싶었다. 어차피 한국에서 나를 누구한테 알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나는 한국어라도 능숙히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고시원주인언니 아들한테 중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료였다. 하지만 그 학생한테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얻었던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한국학생들은 연예인으로 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가장 많다는것도 알게 되였고 한국에서는 스카이(S.K.Y) 서울대, 연세대,고려대학교를 제일 선호한다는것도 알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학부모들은 서울에 위치하고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기만 하면 소원성취 한걸로 생각하기에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서 아끼는 것이 없다는것도 잘 알게 되였다. 무료로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것도 알게 되였다. 고시원주인언니는 아들한테 무료교육을 한다고 고맙다고 고시원비를 받지 않기도 하고 또 맛있는 과일을 주기도 했었다. 더 기뻤던 것은 나한테 충무로에 있는 사장님한테 중국어를 가르칠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것이다.

뜻이 있는데는 길이 있다는 말이 나한테도 통하는것 같았다. 주인언니가 소개해준대로 충무로에 일주일에 두번씩 강의하기로 하고 한달에 1500원정도 받을수 있는 중국어과외를 할수 있게 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안산에서 서울에 있는 충무로까지는 지하철로 2시간씩 이동을 해야 했다. 8시부터 진행하는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5시부터 일어나야 했다. 그래도 기쁘기만 했고 신나기만 했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듯이 살거 같았고 앞이 밝아보였다. 누군가가 나를 믿고 나한테서 중국어를 배우겠다고 하는것만으로도 그냥 좋기만 했다. 나는 10분, 20분씩 더 강의를 해주었다. 회사에 오는 중국어팩스도 무료로 번역해주었다. 돈은 몇푼벌지 못했지만 나는 내가 할수 있있는 것 최선을 다해서 했다. 세상은 언제나 노력하는자의 편인것 같다. 중국어 교육을 받던 사장님은 나의 끈질긴 노력에 감동되여 지인분한테 내가 중국어를 잘 가르친다고 입소문내주어 수업 하나를 더 맡을수 있게 되였다. 식당이나 회사나 현장에서 일하는 다른 동포들은 한달에 인민페로 만원씩 번다는데 나는 3천원을 받으면서 즐거워 했다. 어차피 내가 욕심낸다고 해결된 부분은 없다고 생각했고 꼭 해낼수 있을거라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뻗쳤다. 그 힘은 당시 남들은 7,8만원씩 지불해야만 한국행을 선택받을수 있었지만 나는 회사에서 무료로 초청해주었기에 비행기표밖에 지출하지 않았다는것이 마음의 위안으로 되였던것이다. 그렇게 3개월 체류비자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였다. 중국어를 배우시던 사장님께서 중국 유리관련 시장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그런데 비자체류기간이 만료 된다고 하자 사장님께서 선뜻이 초청을 해주시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으로 향한 나의 두번째 걸음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뒤로 연이어 초청비자를 발급받을수 있었다. 만약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고 나도 당시에 일당이나 하면서 돈을 벌겠다고 악착같았다면 오늘의 내가 과연 있을수 있었을가를 가끔씩 돌이켜 보기도 한다. 초청비자는 체류기간이 길어야 3개월이다. 관광비자나 초청비자로 한국에 다녀본 사람들이 요즘은 많아서 알겠지만 3개월에 한번씩 중국에 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였다. 숙식비나 해결할 정도로 번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려면 항상 번 돈이 부족되였다. 2002년도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한국땅을 밟으면 불법체류를 하는 것이 기본이였고 불법체류를 하려고 7,8만원씩 돈을 냈던 시기였다.나도 불법체류하고 싶어졌다. 돈을 좀 모아보고 싶었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게다가 회사초청비자로 4차이상 한국방문했더니 초청장없이도 3개월 체류가능한 비자를 발급해주었다.불법체류를 해도 초청해준 회사측에 불이익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귀국하는것과 불법체류하는 것 사이에서 나는 갈등의 갈림길에 서 있게 되였다. 당시 아이가 4살밖에 안되였다. 만약 불법을 선택하면 아이를 쉽게 볼수 없다는 마음과 마음이 불안해서 일도 제대로 할수 없을것 같은 나의 소심한 성격때문에 결국 힘들더라도 3개월에 한번씩 다녀야 하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 단기비자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이 제한 되여 있었다. 그러했기에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뛰였던거 같다. 서울,부산, 제주 3박4일 중국대표단 통역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제주도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날씨변화가 있는곳이라 그날도 기상청 날씨예고와는 무시하고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는 항공편을 더 이상 뜰수 없게 세차게 세차게 사정없이 내렸다. 우리의 일정과 상관없이 제주-부산 항공편도 전부 결항이였다. 아침8시 항공편은 오후 2시지나서 정상운행할수 있었다.그러다보니 경주와 부산일정은 전부 늦추어져서 호텔에 들어왔을때는 이튿날 새벽 1시도 지난뒤였다. 지친몸을 이끌로 바로 침대에 몸을 던졌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주체측에서는 폭우에 고생했다고 정해진 통역비외에 800원을 더 주었다. 하지만 나는 날자를 초과한것도 아니라고 원래 결정한대로만 받으면 된다고 거절했었다.물론 고생했다고 주는거니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해서 받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디에서 그런 진실되고 순수한 마음이 생겼는지 믿겨지지 않을정도이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생각과 행동은 나한테는 또다른 통역을 맡을수 있는 기회가 되였고 많은사람들에게 성실함을 보여줌으로써 믿음을 얻게 되였던것이다, 그렇게 2년남짓이 한국을 다녔지만 3개월에 한번씩 중국을 다녀야 하는 단기비자였기 때문에 버는 돈은 없었다. 일자리도 고정된 것이 아닌 통역이나 중국어과외뿐이였기에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던것이다. 남은것이 있었다면 한국문화에 조금 더 익숙해졌고 한국어가 많이 능숙해진것뿐이였다.중국어과외만 하면 대박을 터뜨릴 것 같던 아름다운 꿈은 서서히 깨지는듯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렇게 수년을 다닐수는 없을것 같았다. 어린 아이를 두고 돈도 벌지 못하면서 다닌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였다, 나의 마음은 아픔과 함께 점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한국생활도 많이 적응되였다는 것을 깊이 느꼈을때에는 이미 한국에 지인분들도 좀 만나게 되였고 중국어를 가르쳐달라는 엄마들도 꽤 있었던 탓에 더 이상 중국에 가고 싶지 않았다. 불법은 못하겠고 합법으로 장기체류할수 있는 방법을 찾던중에 투자비자가 있었다. 인민페 40만정도였다. 나한테는 꿈속의 숫자였고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 돈이 있으면 중국에서 좋은 아파트 사놓고 즐겁게 살수도 있는데 고생스럽게 한국에 올 이유가 없었다. 한국꿈이 깨여지나싶어서 고민하고 있을 때 평소에 내가 통역을 많이 해주었던 사장님께서 나의 고초를 알고 도와주시기로 했다. 폭우속에서 제주도 통역을 열심히 해드렸던 그 사장님이셨다. 주는 돈도 거절할수 있는 나의 마음의 여유에서 나의 미래를 인정해주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는 신용하나로 투자비자를 발급받는데 성공하였다.

그때는 2004년도 3월이였다.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기까지 나는 한국과 중국을 오고가기를 수십번했고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D-8 체류코드로 된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은 내 마음은 날듯이 기뻤고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도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불법체류를 하지 않기를 천만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를 내다보았던 선견지명에 난 나자신에게 스스로 큰 박수를 보냈다. 그동안 비록 돈은 벌지 못했지만 돈으로 살수 없는 소중한 지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였고 진심은 어디에서도 통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였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운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달에 3천원을 벌려고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물어보시라. 약속시간을 지키겠다고 조금이라도 늦을거 같으면 수업료에 맞먹는 택시비를 지출하면서 신용을 지켜온 사람이 몇 명이 있냐고 물어보시라. 한달에 3천원밖에 안되는 돈을 받으면서 통역을 무료로 해줄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있냐고 물어보시라. 돈 몇푼 더 준다면 여기 저기 사업장을 옮겨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현실이였다. 돈 벌러 갔다가 빚지는 인생이였지만 나는 한국문화를 익숙히 할수 있다는것에 감사한 마음이였고 나를 믿고 일을 맡겨준다는 것이 늘 고맙게 생각되였다. 더욱이 통역 몇번 했다고 초청까지 해주시는 그 따뜻한 마음은 오늘까지도 잊지못하고 있다. 투자비자를 도와주신 사장님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 그대로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눈앞의 돈보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큰 행운과 행복과 즐거움을 준다고 말한다. 진실은 언제든지 통하는 법이니까요. 나도 3년동안 불법체류를 했다면 어느정도 돈을 벌었을수는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 길을 선택했다면 지금도 식당이나, 호텔이나, 제조업등 한국인들이 말하는 3D업종에서 일하고 있을것이다. 비록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기까지 힘들고 경제적으로 남는것 없었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대표 김선녀라는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을수 있었을것이다.


3D업종에서 일하는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이제는 우리 동포들도 자신의 브랜드가치를 높혀서 한국인들이 하지 않는 업종에서 늘 수모를 당하면서 돈 벌러온 조선족이라는 이미지 대신 한국사회에서 꼭 필요한 한국인들과 일자리경쟁에서 이길수 있는 그런 조선족으로 거듭나야 할때라는 생각이다. 누구나 다 더 멋진 삶을 추구하려고 한다 . 하지만 그렇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걸림돌이앞을 가로막는다는 핑계로 또다시 주저안기도 한다. 다음호에는 걸림돌과 디딤돌 사이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걸림돌을 디딤돌로 상황변환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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