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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련재 3)
2020년 02월 01일 07시 48분  조회:3919  추천:0  작성자: 오기활
               3. ‘국민최고학부’를 졸업하니까…
들어가는 말로 일본의 교육제도를 곁들어본다.
일본은 자기들의 식민지로 동북에 ‘만주제국’을 세우고 여러가지 정책으로 ‘만주국민’을 부려먹었다.
그 때 소학교 6년 졸업생은 ‘우급문화국민’, 중학교 3년 졸업생은 ‘고등문화국민’이라 칭했는데 고중 이상부터는 공부길을 어렵게 만들어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중학교를 졸업한 후 전업적인 직업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이런 목적과 수단으로 중학교의 명칭을 ‘국민고등학교’라고 명명하였고 국민들이 중학교를 졸업하면 ‘최고학부’를 졸업한 것으로 하여 자부감을 느끼며 더 이상의 학업을 포기하고 전업적인 직업에 일심하도록 하는 것이 일본교육제도에 대한 나의 인식이다.
아래는 송우혜(宋友惠)가 펴낸 ≪윤동주평전≫(열음사 출판, 1988년)에서 일본교육제도에 대해 서술한 것이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래 ‘고등학교’란 학제를 만들었다. 인생 전반에 대한 교양의 바탕이 없는 학문추구는 편파적이 될 수밖에 없으니 고등학교에서 교양과목을 이수하여 인격적인 바탕을 만들게 하고 그 우에다 대학의 전문지식을 쌓게 한다는 구상이였다. (≪윤동주평전≫ 152페지)

1897년에 세워진 숭실학교(평양)가 1908년에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정식으로 ‘대학’으로 인가를 받고 대학부와 중학부를 갖춘 관서제일의 신교육기관으로 명성이 높았는데도 일제당국은 자기들의 교육제도로 조선인들에게 대학으로 ‘경성제대’ 하나만 두는 정책을 실시하여 ‘숭실대학’을 ‘숭실전문학교’로 격하시켰다. (≪윤동주평전≫ 294페지)

나는 일제 때인 73년전에 국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때 국민고등학교에서는 기본상 보통교육이 아닌 직업기능교육을 실시했다. 내가 처음 다닌 연길국민고등학교도 농학과 축목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중학교였는데 1943년에 왕청현을 축목현으로 건설한다며 연길국민고등학교의 축목전공생들을 모두 왕청에 집결시킴으로써 다시 다니게 된 학교가 왕청국민고등학교였다. 이 학교 역시 축목수의과를 전문으로 배우는 중학교였다.
그 때 내가 왕청국민고등학교로 가야 한다니 금방 결혼한 안해도 따라 가겠다며 울며불며했다. 하지만 중학생으로서 장가를 간 것만 해도 남들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는데 뻔뻔스럽게 안해까지 데리고 가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말도 안되였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비밀 아닌 비밀을 세상에 밝히는 것이지만 내가 방학 때마다 집에 돌아가면 우리 부부는 남몰래 부부다툼을 하군 하였다.
1944년말에 내가 왕청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학교에서는 나를 도문시친화목재주식회사(亲和木材株式会社)의 역축보건지도원으로 배치하였다.
그 때 나의 직접 상급은 키가 작달막하고 아담진 도노이(殿井)라고 부르는 일본인이였는데 그는 나를 직접 그의 회사인 화룡현 팔가자출장소(出张所)에 데리고 가서 그 출장소에 부임시키는 것이였다.
주식은 직원 단체숙사에서 했는데 로동자들의 대우는 노예와 다름이 없는 최하층 대우였다.
때마다 풀기 없고 썩은 냄새가 나는 조밥에 장졸임무우반찬을 먹었으며 랭수로 겨우 갈증을 풀었다. 나는 난생처음 이런 푸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스산한 곳마저도 나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글쎄 나더러 목재발구를 끌러 가란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물으니 벌목장인 고동하작업터로 가란다. 자체로 이부자리를 준비해야 한다기에 이부자리를 마련하려고 횡도에 있는 집으로 가니 안해는 다른 이부자리는 너무 헐어 내놓기 부끄럽다며 결혼 첫날 이불을 가지고 가란다.
그 때는 팔가자에서 고동하로 가는 교통편이 려객용 소철이였는데 정각운행이 아니였기 때문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석탄검댕이투성인 목재운반용 소철에 앉아 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도 비싼 비단이불을 마구 덮는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나는 산골사람들의 뉴스인물로 되고 말았다.
고동하의 숙박과 식당 환경이 팔가자보다는 좀 났다고는 하지만 역시 거기에서 거기였다.
겨울이 오니 또 벌목시기라며 나를 고동하 상류인 로령(老岭)으로 가란다. 나는 고동하로부터 도보로 가면서 백설에 덮인 침활혼성림(针阔混成林)의 절경을 만긱하였다. 그 때는 21세 청춘이라 미에 대한 감수력이 뛰여났던 것 같다. 활엽수잎은 거의 모두 떨어지고 침엽수잎들만이 백설 속에서 독야청청하며 저 푸른 하늘을 향해 자랑을 떨치니 그 절경에 누구인들 매혹되지 않으랴!
채벌지역의 건물들은 모두 통나무로 지었고 붉게 달아오른 난로 안에서는 탁탁 소리를 내면서 토막나무들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하루세끼는 기껏해야 이밥에 마늘장졸임이였다. 피곤한 몸을 지탱하려고 잠자리에 들면 검정색 두루치기 이불이 람루하기로 말이 아니였다.
목재검사원은 왕등거(王登举)라고 부르는 한족이였는데 늘 나와 일어로 대화하면서 나를 허물없이 대해주었다.
이곳의 책임자는 와끼야마라는 일본인이였는데 그는 일본 북해도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다가 여기에 와서 벌목기술까지 맡고 있었다.
와끼야마는 산으로 다닐 때 늘 옆구리에 큰 칼을 차고 다녔는데 아무튼 나무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없었다. 나는 그한테서 나무이름을 많이 배웠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 때의 배움이 정말 다행스러웠다.
당시 벌목한 나무운반은 화룡현에서 온 20여명의 소발구군들이 전담하였다.
그런데 그 해에 전염성이 아주 강한 구제역(口蹄疫)이 돌아서 한동안 원목을 운반하지 못했다. 구제역이란 소나 돼지 따위의 동물들이 잘 걸리는,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 병으로서 입의 점막이나 발톱 사이의 피부에 물집이 생기며 체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식욕이 떨어지는 증상을 말한다. 비록 죽는 확률은 높지 않았지만 소들이 이 병에 걸리면 발톱이 빠져 부릴 수 없으므로 벌목운수에 있어서 그 손실이 막대하였다.
팔가자출장소의 역축보건원인 나는 방역과 치료를 담당했기에 약품을 구매하러 조양천으로 자주 다녀야 했다. 한번은 내가 조양천의 숙부가 발진질부사(发疹窒扶斯)에 걸려 치료중인 것을 모르고 숙부네 집에 갔다가 그 병에 감염되기도 했는데 잠복기여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동안 전염병이 감염된 몸으로 송강출장을 자주 다녀야 했다. 그 때에는 송강을 안도라고 불렀다.
그 때에는 뻐스에 승객이 넘쳐나면 큰 화물트럭으로 대리운송을 하였다. 내가 출장임무를 끝마치고 팔가자출장소로 돌아갈 때 마침 잠복기였던 발진질부사가 발작하여 하루에 2~3번씩 전신경련을 일으켰다. 하루는 아픈 몸으로 겨우 뻐스정거장에 이르니 뻐스에 자리가 없어 트럭을 타지 않으면 안되였다. 송강에서부터 명월구까지는 8시간 걸린다. 비좁은 트럭에 앉아 오다가 세번이나 전신경련을 일으키고 나니 입이 말라 말도 번질 수 없었다. 그래도 죽지 않고 겨우 명월구기차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조양천에 이른 후 다시 화룡으로 가는 기차를 갈아타서야 팔가자출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겨우 사무실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벽에 기대여선 후 혀가 꼬부라진 말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발진질부사에 걸린 사람이오. 그러니 나한테 접근하지 마오. 빨리 나를 격리시켜야 하오!”
마침 출장소에 몇몇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행이였다. 출장소에서는 아다찌라는 일본성을 가진 청년을 나에게 배치하여 그 날 저녁 기차편으로 나를 조양천에 있는 숙부네 집까지 데려다주게 하였다. 그 날(1945년 4월 1일)인즉 바로 조양천 숙부가 운명한 날이여서 아버지, 백부, 둘째아버지를 포함한 많은 친척들이 와있었다. 이런 북새판에 중환자인 나까지 갔으니 온 집안이 수라장이 되였다. 친척들은 나를 옆집에 보내였다.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헛소리만 치면서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1945년 4월 12일 10시경에 대양촌 류신툰에서 한 마차부가 우리를 태우려고 마차를 몰고 왔다. 마차부는 ‘아리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족 중년남자였는데 성은 장씨였다.
나는 백부, 둘째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게 되였는데 조양천 북쪽 태동 부근에 이르니 물도랑에서 쏴쏴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였다. 나는 고생스럽게 앓기보다는 오히려 죽는 것이 더 편하다는 생각으로 이불을 헤치고 물에 뛰여들려고 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불을 꽁꽁 여며주며 꼼짝달싹도 못하게 하니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될 수 없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나처럼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적잖게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나는 이불 속에 파묻혀 이런저런 환각에 빠지군 했다. 내 몸이 때론 물이 되고 때론 돌이 되고 때론 흙이 되면서 말이다.
나는 반주검이 된 몸으로 어떻게 집으로 갔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희미한 호롱불이 방구석에서 명멸하듯 사위가 어두워진 방안은 숨 쉬기조차도 너무 힘들었다. 온몸을 동강내여 온 방안에 뿌려놓는듯, 정신이 오락 가락하여 땅바닥에 잦아드는듯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환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때론 전혀 아픈 느낌도 받지 못할 때가 있었다.
‘죽을 때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나는 삼수(氵)변에 혀(舌)를 붙인 살 ‘활(活)’의 뜻을 그 때에야 실감했고 사람이든 동물이든 혀가 젖어있어야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였다.
집에 돌아와 몇몇 의원들의 정성어린 치료로 나는 건강한 몸을 되찾게 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송강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8. 15’해방을 맞이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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