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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전"(련재 10)
2020년 04월 01일 06시 22분  조회:3900  추천:2  작성자: 오기활
10. 비 내리는 야밤에 도적으로 몰려
룡정현 삼합에서 지신으로 이어지는 오랑캐령은 나에게 숱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오랑캐령은 백여년전 할아버지가 아홉 식솔을 거느리고 조선 명천에서 연변으로 이주해올 때 피눈물을 흘리며 넘던 산마루로서 그 때 우리는 첫 인연을 맺게 되였다.
오랑캐령에는 금강산을 방불케 하는 산봉우리가 많고 락락장송—적송(赤松)이 우거지고 철따라 피는 철꽃들이 많아 대자연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
룡정에서 가까운 이 명산은 나에게 식물학을 배우게끔 꿈을 키워준 ‘도사’이고 ‘은인’이며 나를 식물학자로 배육한 종자이며 옥토이다.
1976년 6월 3일, 채전의 도마도가 불그스레 익기 시작한 여름철에 나는 삼합행 뻐스를 타고 가다가 중도인 오랑캐령도로관리소 부근에서 내렸다. 그 때는 사진기도 없어 빈손에 두 눈만 챙기고 산야를 두루 누비며 식물고찰을 하던 시기였다.
때는 오전 아홉시 반이였다.
산골짜기에 들어서니 천남성이요, 등칡이요, 노랑송이풀이요 하는 보기 드문 식물들이 눈에 띄였는데 거기에 정신이 팔린 나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얼결에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한시가 지났다. 이제 30분후이면 룡정으로 돌아가는 막뻐스가 여기를 지나가는 판이다. 그런데도 나는 식물채집에 열중하다보니 룡정으로 가는 뻐스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암, 될 대로 되라지. 오늘 밤으로 룡정에 도착하면 되니까 마음 놓고 식물을 관찰하고 표본을 채집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뻐스를 놓친 나는 오후 2시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나무숲을 헤치며 식물채집을 계속하였다.
날이 어슬어슬 어두워져서야 나는 천불지산으로 가는 남북방향의 자동차길을 걸어 성남촌을 지나 지신진으로 향하였다.
뒤잔등에 비닐봉지로 정히 싸서 넣은 묵직한 식물표본배낭을 메고 걸어가는데 반디불들이 사방에서 켜졌다 꺼졌다 하며 숨박곡질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황홀한 반디불세계를 나는 처음 걸어보았다. 언제 또 이렇게 황홀한 반디불세계를 걸어볼 수 있겠는가! 순간 힘듦도 지침도 배고픔도 어느새 싹 가셔지는 것만 같았다.
지신을 지나니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동서로 이어지는 승지촌의 외골목이 지친 나에게는 끝없이 멀고 멀어보였다.
‘승지촌에 들려 룡정현당교에서 학습중인 상욱(둘째아들)이를 찾아갈가…지금 쯤은 한창 꿈속에 빠져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인차 마음을 고쳐먹었다. 야밤중에 옷이 다 젖고 또 지친 몸을 끌며 아들을 찾아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더라도 속 편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았다. 순간 무겁던 발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고 무겁던 등짐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재바위골 어구도 지나고 신화촌도 룡정 서쪽 어구에 자리한 양계장도 지났다. 룡정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다리쉼을 하려고 길옆 채소밭머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후 채소밭을 지키던 한족청년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오더니 다짜고짜로 한밤중에 여기서 무슨 짓을 하느냐며 등뒤에 멘 짐을 수색하겠다는 것이였다. 나는 나의 짐에는 귀중한 것이 들어있으니 아무에게나 보여줄수 없다면서 생고집을 부렸다.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은 내가 도마도 밭머리에 앉아있으니 등에 진 것이 도마도라고 여겼던 것이다.
시원히 보여주었으면 쉽게 끝날 것을 내가 막무가내로 그들을 뿌리치고 길을 떠남으로써 일이 커졌다. 다행히 그들이 거의 합성리까지 따라오다가 지쳤는지 포기하고 돌아갔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번했다.
내가 새벽 2시경에야 집에 도착하니 집식구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의 처사가 너무 경솔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식물채집을 하면서 집식구들에게 많은 심려를 끼쳤다. 나는 이 글로 집식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함과 동시에 집식구들이 나의 사업과 흥취에 대해 리해하고 지지해준 데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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