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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리시진' 김수철 전"( 련재 18)
2020년 08월 01일 05시 16분  조회:2640  추천:2  작성자: 오기활

18. 나, 일본학자 그리고 일본행

나와 일본과의 인연은 동북림업대학 류삼규 박사가 맺어주었고 또 그를 통해 돈독히 하였다.
동북림업대학에서는 자주 국제학술보고회를 조직하였는데 류박사는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오기만 하면 꼭 나를 초청하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본학자들과 류창한 일어로 식물학지식들에 관해 교류를 하군 하였다. 그리고 일본교수들은 저들의 박사연구생들을 나에게 맡겨 실습지도를 받게 하였다.
일어에 능숙한 나는 어느새 그들과 우스개도 주고받는 허물없는 사이로 되였고 그들과 려행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뿐이랴! 나는 청소년시기에 읽었던 일본문학작품들을 떠올리면서 그들과 일본문학작품에 대해 교류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내가 청년 때에 일본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접했던 사이죠 야소(西条八十), 야마다 비묘우(山田美妙), 오자끼 시로우(尾崎士郎), 미끼 로흐우(三木露风) 등 일본작가들에 대해 언급하자 젊은 일본학자들은 그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검색해보고는 “아! 그런 작가들이 있었습니다!” 하며 나의 일본문학지식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후 나는 류박사 덕분에 일본행도 할 수 있었다.
박사연구생―아베(阿部)
동북림업대학에 드나드는 일본 동경대학 학술단 단원들중에는 이이야마(饭山)라는 가장 년로하고 저명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동경대학 교수로 있을 때 자기의 박사연구생 아베를 흑룡강성 안달에 있는 류삼규 박사의 실험지로 데리고 와서 나한테 맡기며 실습지도를 부탁하였다.
나는 아베를 온종일 풀밭에 데리고 다니면서 교학지도를 하였다.
하루는 식물실습을 끝낸 후 나와 아베 단둘이서 길가에 걸터앉아 한담을 하고 있는데 실습지의 식당을 관리하는 한 아가씨가 우리에게 포도를 건네주며 먹으라는 것이였다.
나는 포도를 껍질을 뱉지 않고 대강 씹어서 삼켜버렸지만 아베는 포도즙만 빨아먹고는 껍질과 씨는 뱉아버리는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롱담조로 아베에게 말을 걸었다.
“아베야, 포도는 야만인처럼 먹어야 몸에 좋단다. 껍질에는 즙보다 더 진한 안토시아닌과 활성물질이 있어 버리면 랑비란다. 그리고 씨는 미끌미끌하여 통째로 삼키기 쉽단 말이야. 씨에는 영양분이 그닥 많지는 않지만 넘기면 위벽과 장벽 청소도 해주고 변배출도 촉진하는 역할을 하지.”
총명한 아베는 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참 옳은 말씀입니다. 좋은 일은 서둘러서 실행하라고 했으니 저도 선생님처럼 먹어보겠습니다.” 하며 내가 알려준 대로 먹기 시작했다. 꾸밈이 없고 순박한 그의 마음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 후 내가 요청으로 동경대학에 갔을 때 마침 아베가 다까노 데쯔오(高野哲夫) 교수의 학생으로 박사공부를 하였기에 우리는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아베가 그 때 포도를 먹던 이야기를 꺼내 우리는 한바탕 폭소를 터뜨렸다.
오매불망하던 일본행
1) 나의 일본행 조건
류삼규 박사와 일본학자들의 노력으로 나는 2007년에 일본 동경대학에서 조직한 ‘장백산야생자원식물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였다. 그리고 <장백산의 야생자원식물>이란 론문을 발표하기로 하였다.
론문의 필자로는 나외에 류삼규, 오명근, 다까노 데쯔오 등 교수들이였다. 론문의 키워드와 요점은 영어로, 그 외의 것은 일어로 서술하였는데 론문 전부를 나절로 컴퓨터로 타자해야 하였다. 일문타자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걱정이 앞섰으나 마음을 먹고 해보니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론문은 A4용지로 6페지에 달했다. 보고할 때 환등편도 30장을 준비하였다. 이 작업은 오명근 박사가 협조하기로 하였다.
일본 동경대학에서 요청한 목적은 바로 내가 직접 론문을 발표하는 것이였으므로 나의 론문작성이 내가 일본행을 할 수 있은 가장 관건적인 요건으로 되였다.
나의 출국수속은 처음부터 오명근 박사가 책임지고 했고 나는 그와 함께 2007년 5월에 연길에서 떠나 대련에서 하루밤을 체류하고 이튿날에 일본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2) 창공에서 본 일본
흐린 날씨였지만 비행기가 구름 우로 오르니 기내는 개인 날처럼 해볕이 쬐였다. 비행기가 황해를 날아 산동반도에 이르더니 거기서 다시 가없는 푸른 바다를 동행하며 서울을 지나 부산을 경유했는데 현해탄을 건널 때 나는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였다.
그런 와중에 얼마쯤이나 지났을가. 나는 그만 화뜰 놀라 정신을 차리고 하늘 아래를 부감했다. 마침 후지산(富士山)이 흰머리를 구름 밖에 내놓고 위용을 떨치고 있지 않겠는가!
아! 후지산!
내가 어려서부터 들었던 후지산에 관한 이야기들이 눈사태처럼 밀려와 나의 머리를 황홀케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매혹적인 후지산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비행기에서 본 일본의 산야는 푸르른 록지였다. 곳곳에는 깨끗하고 네모난 논밭과 네델란드에서나 볼 수 있는 넓고 울긋불긋한 꽃밭들이 경관을 이루었다. 해안선을 따라 날던 비행기가 내륙으로 향하더니 낮게 뜨며 잠간 사이에 나리다공항에 착륙했다.
모든 입국수속을 끝마치고 출구로 나오니 류삼규, 다까노 데쯔오, 장흔흔(张欣欣) 등이 마중을 나와 반기며 짐을 차에 실어주었다.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중형 승용차를 몰고 동경대학을 향해 달렸다.
3) 국제교육기지에서
일본엔 황사가 없는지 길가의 초목들이 한결 더 푸르러보였다. 게다가 무상기가 긴 때문인지 나무가지는 우리 동북보다 더 길게 자라서 나무의 모양들이 달라보였다. 천백년에 이르는 고목들이 도처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리니 그 곳은 동경대학 농장과 실험교학청이 즐비하게 들어선 원림지였다.
우리의 숙소는 다까노 데쯔오 박사의 연구소 부근에 있는 이층회관에 정해졌다. 회관의 길쭉한 강당은 미닫이로 칸막이를 하여 평시의 리용에 편리를 주었다. 바닥은 일본 특유의 다다미로 깔았는데 다다미는 길게 자란 골풀로 짠 돗자리와 벼짚을 한데 꿰매여 다진 것이였다. 이부자리는 포근한 비단이불과 비단요였다.
그 넓은 방을 나와 오명근 박사 단둘이 차지하였다.
회관을 관리하는 50대 남성인 다까노 데쯔오(高野哲夫) 교수가 자주 와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군 하였다. 그는 생각 밖으로 내가 일본말을 잘하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더 자주 드나들면서 얘기를 주고받았고 지어는 롱담까지 하면서 허물없이 지냈다.
동경대학 아시아환경자원연구중심이 바로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까노 데쯔오 교수는 우리들에게 자기의 연구실을 구경시켰다. 류삼규 교수의 비서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북림업대학의 장흔흔도 다까노 데쯔오 교수의 도움으로 일본 문부성(文部省) 국비류학생으로 여기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었다.
장흔흔의 부모님들은 흑룡강성 대경에서 살고 있었는데 장흔흔은 무남독녀로서 부모님들이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다.
여기는 장흔흔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박사연구생들로 운집된 학부였다. 장흔흔외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녀박사연구생도 있었는데 내가 “만나게 되여 반갑소.”라고 했더니 그녀도 “저도 교수님을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받는 것이였다. 내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묻자 그녀는 “저의 이름은 엘리자예요.”라고 수집어하면서 대답하는 것이였다. 따라서 여기가 바로 높은 국제적인 차원의 교육기지임을 감수할 수 있었다.
이럴 때 쯤에 물찬 제비마냥 호리호리한 몸매의 한 처녀애가 달려들어오는 것이였다. 찬찬히 보니 아베였는데 다까노선생의 제자로 여기에 와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였다. 이이야마 교수가 쯔꾸바(筑波)세계농업연구소의 소장으로 전근하니 아베도 여기에 오게 되였고 한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우리는 또 안달에서 포도를 먹던 얘기를 나누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4) 국제학술보고회
2007년 6월 3일은 내가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그것은 내가 아시아의 최고학부인 동경대학에서 조직한 ‘장백산야생자원식물세미나’에서 론문발표를 하기 때문이였다.
청중들 모두가 대학 교수, 저명한 학자, 박사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우수한 박사연구생들로서 ‘학술보고를 일삼으면서 학술생애를 이어가는 사람들’이였다. 때문에 학술보고 수준의 여하를 가늠하는 론문평론에서 신경이 바늘끝마냥 예민하고 또 야박할 정도로 보고서의 내용을 족집게질 하는 청중들인 것 만큼 일언반구라도 틀린다면 그보다 더 체면이 깎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나만이 갖고 있는 절대적인 우세를 하나씩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1) 나에게는 한국자원식물학회에서 주최한 국제학술보고회에서 여러 차례 보고를 한 국제무대의 경험과 단련이 있다.
(2) 나는 식물의 일어명칭을 많이 알고 있고 능숙한 라틴어와 영어로 식물학명을 말할 수 있다.
(3) 나는 장백산식물현지답사를 많이 했었기에 돌연적인 질문을 받더라도 잘 응부할 자신이 있다.
(4) 일어가 능숙하기에 나의 의사를 막힘없이 표달할 수 있다.
(5) 류삼규 박사와 오명근 박사가 나를 많이 고무격려해주고 기술적으로도 많이 협조해줄 것이다. 오박사가 식물환등방영을 담당하기에 뒤심이 든든하다.
(6) 보고의 조직자이며 사회자인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것이다.

이러고 보니 나는 모든 조건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것 만큼 겁나하고 잘하지 못할 리유가 거의 없었다.



나는 우선 영문과 일문으로 된 서면학술보고 100부를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발부하였다.
학술보고가 시작되였다. 얼핏 둘러보니 청중들이 50~60명은 잘되는 것 같았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금쪽같이 귀중한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감격스럽고 죄송스러웠다.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연단에 올라 나를 소개하고 나서 청중들에게 부탁까지 하였다.
“중국의 저명한 식물학자이신 김수철 교수가 동북아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식물의 수직분포와 우리 나라의 후지산과 많이 류사한 중조변경에 자리한 장백산식물에 대한 보고를 하십니다.
저는 중국 할빈에서 김교수님을 자주 만나보았고 또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박수를 아끼지 맙시다.”
나의 보고는 오명근 박사의 능란한 컴퓨터조종환등기술로 원만히 마무리를 하였다.
보고가 끝나자 한 청년이 일어나서 나에게 질문했다.
“장백산이라면 산꼭대기에 일년 내내 흰눈이 덮여있겠지요?”
“눈은 7~8월이면 거의 녹고 9~10월이 되면 또 내립니다. 장백산은 산봉이 흰 부석이기 때문에 눈이 없어도 그냥 하얗게 보입니다.”
이어 나는 말했다.
“땅은 사시장철 내내 얼어있는 동토대(冻土带)구요.”
이 때 또 한 청년이 일어나서 질문했다.
“우리 나라의 후지산엔 키가 2m에 달하는 왕엉겅퀴가 있는데 그런 식물이 장백산에도 있는지요?”
“그건 정말 굉장히 큰 엉겅퀴입니다. 내가 래일 후지산으로 가는데 그걸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걸 천추만대 후세에 남겨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장백산에도 엉겅퀴가 있지만 그렇게 큰 종류는 없고 다만 그에 비교할 만한 것으로 도깨비엉겅퀴가 있는데 귀엽고 아름다워 등산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답니다.”
내가 대답하자 바람으로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페회를 선포했다. 그리고는 연단에서 내려오는 나를 마중하며 두 손을 힘껏 잡아주더니 흥분에 넘쳐 찬사까지 보내주었다.
“학술보고가 아주 성공적이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이날 보고에 대해 나보다도 더 걱정한 분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류삼규 박사와 오명근 박사였다. 보고가 끝나자 그들은 나의 손을 굳게 잡으면서 격동에 못이겨 이렇게 말했다.
“보고가 정말 성공적이였습니다!”
5) 축하파티
한국자원식물학회에서는 매번 국제학술보고회가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꼭 축하파티를 열었다. 이런 파티는 대회의 성공을 축하하려는 것이 목적이였지만 보고회 참가자들의 호상간의 친목을 도모하려는 목적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번 국제학술보고회는 아시아에서 최고학부로 손꼽히는 동경대학에서 열렸으므로 그 축하파티도 당연히 동경대학에서 치르게 되였다.
시장에서 여러가지 해산물과 육류, 과채, 조미료를 구입해왔다. 점잖아보이는 다까노 데쯔오 박사가 친히 팔을 걷고 나서자 수하의 젊은 교수, 박사, 연구생들도 그저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엔 식당 아줌마까지 모두 동원되여 파티준비에 나섰다.
저녁때가 되여서야 축하파티가 시작되였다. 술에 얼근히 취한 지식인들이 평소의 침묵을 깨고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다까노 데쯔오 박사와 다정하게 마주앉아 마음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는 술기운을 빌어서 아시아차원의 생태환경과 자원식물연구, 그리고 인재양성에 대한 다까노 데쯔오 박사의 공로를 극찬하였다.
따라서 나는 중한수교를 수립함에 있어서 위훈을 떨친 한국의 애국화교인 한성호 박사가 북경대학에서 웅변을 토할 때 “중국사람들은 웃음과 박수에 너무 린색하다.”고 하며 남을 칭찬하기를 싫어하는 중국사람들의 린색함을 지적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지라 중국사람들도 린색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주 박수를 보내며 웃음꽃을 피웠다.
좋은 점은 서로간 찬양하고 앞으로 서로 버팀목이 되며 속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러한 파티는 무성한 줄기와 잎으로 되여 보다 아름답고 큰 꽃을 피울 것이며 보다 크고 쓸모 있는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동경대학에서의 학술보고는 나의 학술연구에서 종지부가 아닌 시발점으로 되였다. 자만자족하면 종착점이 되고 허심탐구하면 시발점이 되니깐.
6) 아, 후지산!
오매불망 바라던 것이 그 어떤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지게 되는 메커니즘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동경대학에서 학술보고를 끝낸 이튿날, 연변농학원 졸업생인 장거현(张巨贤)이 찦차를 몰고 우리 거처에 왔다. 후지산으로 놀러 가자는 것이였다. 나의 평생소원이 류삼규 박사의 배려로 이뤄진 것이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각이였다.
나, 오명근, 류삼규는 장거현이 운전하는 찦차에 앉아 후지산을 향해 출발했다.
꿈이냐 생시냐를 가리려고 눈을 지긋이 감았더니 일전에 꾼 남가일몽(南柯一梦)이 떠오른다.
…어느 한번 나는 장백현성에 가게 되였는데 도착하자 바람으로 그 곳의 절경인 고탑공원을 거닐게 되였다. 그 때 놀랍게도 고탑 아래에서 ‘문화대혁명’ 때 우리 농학원에서 대자보를 제일 많이 쓴 ‘혁명용사’ 친구를 만나게 되였다.
내가 천리타향에서 친구를 만나자 너무 반가워 인사를 했더니 그 친구는 반가워할 대신 이렇게 나를 훈계하는 것이였다.
“당신은 왜 그냥 그 모양 그 꼴인가? ‘문화대혁명’ 때도 ‘백전(白专)’도로를 걷더니 지금도 일본사람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다니 원… 내가 그렇게 충고를 했는데도 말이야… 응?”
친구는 나를 훈계하고 나서 나의 변명을 들을 념도 하지 않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가일몽이였다. 기회를 엿보아 정치적인 야욕을 채우려 했던 그 때 그 친구의 훈계가 일본행인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젠 후지산으로 왔으니 후지산에 대해 얘기해보자.
중국의 장백산은 올라가는 곳이 북파(北坡), 서파(西坡), 남파(南坡) 세곳뿐이다. 동파(东坡)에는 장백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다.
그런데 후지산은 사방이 자기들의 땅이기에 등산길이 13갈래나 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등산객들이 장백산처럼 붐비지도 않고 등산료금도 받지 않으며 곳곳에 안내패말이 세워져 등산객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나는 안내패말이 하도 많아 너무 신기해 찰칵찰칵 사진기렌즈에 담았다.
내가 첫눈에 반한 것은 후지산 기슭과 허리에 울창하게 서있는 침활혼성림이였다. 장백산은 침엽수보다 활엽수가 많다.
6월초의 후지산은 하얀 눈으로 덮였고 눈 아래는 돌바다(石海)를 이뤘다. 그리고 6월이였지만 웬일인지 개화한 꽃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6월초의 장백산에서는 여러가지 꽃들이 만발해있음을 볼 수 있다.
학술보고에서 그 질문자가 말했던 유명한 ‘왕엉겅퀴’의 웅장한 모습도 나의 시각을 파고들었다. 아직은 꽃봉오리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후지산은 자연보호구였으므로 나는 일초일목(一草一木)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표본으로 채집하고 싶고 기념으로 남기고 싶은 초목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바쁜 일정이라 일일이 사진으로 남길 수도 없었다.
기슭에 있는 매점으로 들어가니 천연식물들로 만든 기념품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속히 동경으로 가야 했으므로 관계일군들과 몇마디 인사말을 건넸을 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식물로 만든 그 미묘한 공예품들은 더 구경할 수 없었다.
귀로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신기한 식물들, 알고 싶은 식물들이 우리의 차가 멈춰서기를 기다리는 듯하였다. 하지만 무심한 차는 앞으로 앞으로 달릴 뿐 좀처럼 멈춰설 줄을 몰랐다.
이번 후지산려행은 너무 급한 걸음이라 아쉬움만 남겨주었다. 만약 일주일이란 시간을 더 줬더라면 아주 만족스러운 려행으로 되였을 텐데.
우리의 장백산처럼 후지산 역시 일본의 명산이며 동북아의 명산이다.
나는 누가 또 나에게 후지산으로 가는 기회를 만들어준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한달음에 뛰여가 아쉬움만 남겨놓은 후지산을 만긱할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후지산이 없으면 살 재미가 없다고 한다. 상품도 후지산상표가 있으면 잘 팔린다고 한다. 우리 백의동포들이 장백산을 선조들의 령산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사람들도 후지산을 령산으로 여기고 있다.
나는 이런 감정으로 후지산행을 바라고 또 바랐건만 이번 후지산행은 나에게 아쉬움만 남겨주었다.


김수철
(2016년 10월 25일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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