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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 어머님
2021년 11월 12일 09시 05분  조회:2447  추천:0  작성자: 오기활

나의 세 어머님

오기활


나에게는 생모, 계모, 장모가 있었지만 이들은 나의 입에서 “어머님”이라는 부름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생모 전정숙
생모는 내가 말을 번지기도 전에 사망하고 계모는 ‘후어머니’라는 신분 때문에 ‘후어머니’이라 불렀고 장모님을 처음 만났을 때 년세가 70대이다 보니 생전 엄마를 불러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머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보이는 대로 ‘로인님’이라 불렀다.

 

엄마 전정숙(1919ㅡ1948년)은 나를 낳고 15개월 만인 32세에 사망하셨기에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30대가 돼서야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나는 외가집이 전씨라는 것만 알았지 엄마의 이름은 몰랐다. 엄마의 이름을 몰라서 난처해보기는 1973년 연변농학원에서 입당할 때였다. 입당 서류에 엄마의 이름을 올려야 하는데 엄마의 이름을 몰라서 난처해하다가 ‘조직에서 간대루야 몇십년전에 사망한 사람을 조사하겠는가’하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나름 대로 전정숙이라고 써넣었다.

그 후 도문시 홍광향 축목수의소 소장으로 있을 때의 1975년의 어느 날 사업차로 홍광향 오공 7대에 갔다. 그 때 몇년전부터 알고 지내던 리창순씨를 만나 그의 집에서 마련한 점심 술상에서 서로 얘기를 나누던중 우연하게도 창순씨의 어머니가 우리 엄마의 사촌 녀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엄마의 이름을 물었더니 엄마의 애명이 ‘꽃분이’이라는 것만 알았지 본명은 몰랐다.

1976년에 훈춘에 갔다가 엄마의 큰 언니를 찾게 되고 큰 이모네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내면서 외가집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그래도 네 에미는 천명이였다…”

큰 이모는 이렇게 말문을 열며 이왕지사를 말했다.

“어느 하루 내가 동네 마실을 갔다오는 데 집 동쪽에 자리한 퇴비장 부근에서 아기의 울음 소리가 나기에 가까이에 가보니 글쎄 그 애기가 바로 몇달전에 낳은 내동생이더라. 나는 너무 놀라 애기를 꼭 안고 정신없이 집에 들어서니 울어서 눈이 둥둥 부은 아버지가 하는 말씀이 ‘여러 식솔에 집이 하도 구차해서 가정형편이 좋은 마음 착한 사람이 가져다 잘 키우라고 아이를 포대기에 꽁꽁 싸서 따뜻한 재무지 우에 놓았다’라고 하더라.” 큰 이모는 생활난으로 둘째 녀동생도 어릴 때 한족집의 시녀로 보냈다고 했다.

70대가 다 된 이모는 기억력도 좋았다. 나는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눈물겨운 가정사를 듣다가 무심중에 엄마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더니 글쎄 전정숙이라고 답하지 않겠는가.

“전정숙이라구요?”

내가 너무 놀란 표정으로 반문하니 이모는 제법 ‘全貞淑’이라고 썼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내가 엄마의 이름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꺼내자 큰 이모는 “네가 용케도 엄마 이름을 맞게 썼구나!”며 “그래도 무엇이 통하는 게 있는 가 보다”며 희한해하셨다.

2014년 11월 18일, 한창 눈을 치고 있는 데 셋째 누님 오금자(당시 71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라비요? 올해에도 엄마가 하늘에서 눈 이불을 보냈구만!” , “눈 이불이라니?”, “엄마가 세상을 뜬 후 65년간 해마다 제사 날인 음력 10월 15일이면 눈이 내렸소.”

뜻밖의 전화를 받고 방금까지도 부담으로만 생각했던 아름차던 눈 마당이 하늘에서 엄마가 펴주는 흰 이불이라고 생각하니 일손이 잡히지 않아 곧장 셋째 누님네 집으로 향했다.

“누님, 나는 엄마 제사 날에 해마다 눈이 내린다는 말을 처음 듣소. 그 눈이 엄마가 우리를 그리며 흘리는 눈물이 아닐가요? ”

우리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서로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누님은 엄마 기억이 있소?”

 

2000년 9월 중순에 찍은 필자의 형제 (앞줄 왼쪽으로부터 필자의 동생 오기용, 큰 누님 오계옥, 필자, 뒤줄 왼쪽으로부터 둘째 누님 오순옥, 셋째 누님 오금자)

 

글쎄…다섯살 때 큰길에서 빈 마대를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는데 엄마가 욕할가봐 울던 일이 생각나고, 엄마가 사망할 때 어른들이 엄마의 입을 벌리고 ‘구술’을 넣으면서 ‘자식들이 배불리 먹게 해달라’며 부탁하던 일이 생각나구…”

6살에 엄마를 잃은 셋째 누님의 엄마 이야기가 기껏해야 이뿐이였다.

나는 80세가 다된 큰 누님 오계옥은 치매로 아무 것도 모르기에 왕청에 있는 둘째 누님 오순옥에게 전화를 하니 둘째 누님도 엄마 제사날이면 해마다 눈이 내린다며 엄마 얘기를 했다.

“엄마는 결혼 후 10년이나 큰집과 같이 살다가 분가한 후 아버지께서 병으로 일을 못하게 되자 혼자서 농사일로 바삐 돌아치다가 우리 네 형제를 남기고 세상 떴소.”

“엄마가 돌아가실 때 큰 언니는 13살, 나는 (둘째 오순옥) 열살, 금자가 여섯 살, 오라비는 두살이였소”

둘째 누님에 따르면 그 때 우리 집이 매우 가난하여 여름에 엄마가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못 봤다고 한다. 엄마가 사망한 1948년에 동네분들의 도움으로 우리 집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탈곡을 끝냈는데 엄마는 그 날에 촉한을 만나 병에 걸려 1주일을 앓다가 사망했다.

림종전에 엄마는 혀가 굳어져 겨우 한마디씩 이런 말을 남겼단다. “물남(곡수)에서 시아버님이 이 둘째 며느리를 빨리 오라고 부른다. 큰 형님이 저 철부지들을 거둘라니 얼마나 고생 하겠슴둥… 기활이를 한번 더 보고 가겠으꾸마!”

둘째 누님은 엄마가 돌아가시자 금자의 ‘울음병’과 나의 병이 거짓처럼 떨어졌다고 했다.

지난 세기 70년대에 동네 전길선아주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 엄마는 체격이 크고 마음이 한량이 없다 했다. 아버지가 술 끝에 말다툼을 하려면 일에 지친 엄마는 “싸울 맥이 없으니 내가 입안의 밥을 다 삼킨 후에 싸우깁소”라고 하며 고비를 넘겼다 한다.

엄마가 해마다 자식들에게 눈 이불을 내려보낸다는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가 ‘누구를 닮았다’는 선색을 알고 엄마와 비슷하게 생긴 외가 친척의 원본 사진에 비춰 모 화백으로부터 엄마의 초상을 그려서 고이 모셨다.

 

계모 김수동

계모 김수동(1927ㅡ2001년)의 이야기는 누님들에게서 들었다.

 

엄마가 사망한 이듬해에 아버지는 김수동과 재혼하였다. 계모는 10대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1녀 2남중 맏이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천보산 동광에서 설계원으로 있었다.

청춘과부로 보내온 계모의 친정 엄마는 “귀한 딸을 나이 든 가난한 남자한테 시집을 보내면 좋다”는 어느 점쟁이의 말을 듣고 나어린 딸을 목단강시 정미소에서 삯일을 하는 리씨 성의 남자한테 시집을 보냈다. 그런데 결혼해서 얼마 안돼 리씨가 1946년 5월에 한국 경기도 안성시에서 10여리 떨어진 고향에 간다기에 계모도 남편을 따라 한국에 갔다. 친정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겨우 한달만에 중국에로 돌아왔다. 아들 돌전에 남편이 와서 아들 이름을 리덕선이라고 짓고 돌생일을 쇠준 후 다시 한국에로 돌아가면서 생리별했다. 1994년, 1996년 아들 리덕선이 부친 리관현을 찾았지만 종무소식이였다.

계모는 친정 엄마, 아들 리덕선과 함께 천보산에서 보내다가 22살에 세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10년 년상 농민인 우리 아버지와 재혼했다. 1950년 6월 11일에 나와 배다른 동생인 오기용을 낳았다. 그 때 대학생들이 청혼해도 재혼을 안하겠다던 계모는 우리 아버지의 멋진 인물에 남자다운 매력에 반했는지 아니면 소개자를 믿고 재혼했는지 아무튼 손시계까지 차고 자식많은 농민한테 시집을 왔다고 동네서 후론이 있었다 한다.

계모는 23세에 여섯 자식의 어머니로 되였는데 계모와 큰딸 간의 년령 차가 9년 밖에 안되였다.

나는 처음부터 계모를 “후엄마”라고 부른 데서 아버지가 안해 보기가 난처했던지 나더러 “후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엄마”라고 부르라고 몇번이나 당부했다.

아버지는 당당한 설계원으로 있던 ‘후어머니’가 20대 초반에 여섯 자식 어머니로 되여 고생하는 것이 측은했던지 재혼하여 2년도 안돼 ‘세 딸을 시집보낸 후 재결합한다’는 조건으로 ‘합의 리혼’을 하였다.

리혼하던 날 아버지는 결혼하듯 안해더러 치마저고리를 입고 술상까지 차리고 동네는 물론 구정부 간부까지 초대했다.

그 후 계모는 리씨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재결합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8년 후에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 생을 포기하고 목에 바를 매고 자결하려다가 동네 분들에게 발견되여 구원되였다.

결국 계모는 고급 공정사로 정년퇴직했고 큰아들이 50대에 차사고로 식물인이 되자 연길의 모 경로원에서 몇년을 보내다가 향년 74세로 2001년에 사망하였다.

 

장모 김옥녀
장모 김옥녀(1906ㅡ1989년)는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벌써 70대 로인이였다. 안해에 따르면 장모님은 12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8명은 요절되고 남은 2남 2녀중 맏이 큰언니는 해방전에 조선으로 갔고 큰아들은 결혼하자 참군하여 사평해방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그러니 장모님은 아홉 자식을 가슴속에 묻었으니 평생 눈물과 동무하며 살았다.

 

한번도 “엄마”라는 두 글자를 불러보지 못해 장모님을 만나서 “어머님”이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70대 로인이라 첫 눈에 보이는 그대로 ‘로인님’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큰사위는 본 적이 없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막내 사위마저 “어머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니 장모님이 서운해 할 것은 물론 처가 편에서 “저 사람이 부실하지 않는가?”며 후론을 했다고 한다.

나는 장모님의 사위 사랑에서 처음 엄마의 사랑을 피부로 느꼈다.

1975년 10월 1일 우리가 결혼할 때 처가집은 대흥구립업국 청산림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청산림장은 대황구에서 6, 7리 떨어진 영벽 마을에서 산길로 60리 길을 더 가야 하는 깊은 산골이였다. 그 때까지도 뻐스가 통하지 않아 60리 길을 도보로 다녔다.

1976년 늦가을의 어느 저녁 무렵, 장모님은 동네에서 개추렴을 했다며 사위를 대접하려고 노란색 비닐통에 개고기국을 들고 오셨다. 청산림장에서 대황구까지 66리, 대황구에서 기차 타고 130리나 떨어져있는 도문까지 개고기국을 들고 온 장모님을 본 나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서 감사하다는 말 대신 “대흥구에서 도문까지 오는 왕복 차비만도 이 개고기국물보다 더 비싸꾸마...”, “이런 사위 사랑을 두번 다시 하지 맙소”하며 큰소리로 랭대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장모님이 얼마나 서운해 하셨을가?!

또 어느 한번 장모님은 고령에 산을 넘나들며 위병에 좋다는 삽주뿌리를 캐서 알뜰히 말리워 가루까지 내서 들고 오셨다.

초겨월의 어느 날 장모님은 사위에게 털실 옷을 떠 입히겠다고 농촌에서 양털을 사서는 씻고 말리우고 실을 뽑아서 가져오셨다. 장모님은 7년을 사이 두고 출생한 나의 아들딸들도 등에 엎고 키우셨다.

장모님 생전에 제일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다녀 온 날은 1989년 6월 1일이였다. 그 때 우리는 자체로 집을 지으려고 집터를 팠다. 장모님은 새로 판 집터를 보고 기뻐하셨다. 장모님은 “이번 걸음이 마지막 걸음일 것 같다”며 큰 병에 인삼담근 술까지 사가지고 오셨다.

장모님 말 그대로 장모님은 새로 지은 우리 집을 보지 못하고 1989년 8월 26일에 향년 83세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비록 32년이란 짧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8년 만에 하늘 나라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재회하였다. 엄마가 두고 떠난 네 자식은 모두 무탈하게 잘 자라 지난해 큰딸인 나의 큰 누님은 86세에 돌아 가셨고 셋째 딸은 코로나19로 인한 격리로 한국의 모 경로당에서 자식들을 보지 못한 채 뇌출혈로 78세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하고 급급히 떠나가셨지만 당시 두살 밖에 안된 아들의 효도로 본명을 찾고 후세에 전할 수 있게 그림으로나마 초상을 남기게 되였으니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다.

계모는 비록 74세까지 살았지만 재혼 날을 합쳐봐도 부부생활을 2년도 넘기지 못하고 청춘과부로 보냈다. 그가 낳은 두 아들중 리씨는 50대에 차사고로 식물인이 되여 몇년을 시달리다가 60대 초반에 사망하고 오씨는 50대에 중병으로 사망했으니 계모의 삶은 더없이 비참하고 외로운 삶이였다.

장모님은 비록 전반생은 아홉 자식을 가슴에 묻고 말없는 눈물로 보냈지만 후반생은 막내 사위 덕에 외롭고 고독한 산골 마을을 떠나 딸 가까이에 있는 변강 도회지에서 생활하셨다.

장모님의 손끝에서 자란 외손자는 세계 명문대의 교수로 있고 외손녀도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잘 보내고 있다.

한번도 “어머님”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나는 이 글에서나마 세 어머님을 불러보련다.

“어머님!”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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